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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18~250808] 에르리체 - 공무원야 公無怨夜

초현_c 2025. 8. 15.

 

플레이타임 : 약 3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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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 요한
 
이화는 수양버들이 상흔처럼 그림자진 궐 안을 걷습니다.
 
비단과 금실로 장식된 천장과 금빛의 용이 승천하는 사치의 향연.
 
무엇 하나 허투루 장식된 곳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대궐이었으나, 이화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화에게는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옷감과 장인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세공한 귀금속들이 걸려 자신을 뽐내길 마다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연의 부름으로 황제의 집무처인 태창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듣기> 판정
 
배이화: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폐하…… 주시옵소서……."
 
이미 질리도록 들어 이제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통곡 같은 애원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화를 유폐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달라는 간언일 것입니다.
 
배이화:(흐리게 귀에 드는 소리에 발목이 잡힌다. 반듯하게 놓인 길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걷는 걸음이 서서히 멎는다. 크게 신경써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말소리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것이 향하는 끝이 자신임을 안다. 저들이 입에 오르는 성군을 폭군으로 만든 자. 휘황찬란하고 부드러운 치마 폭에 황제를 감아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간악한 이가 바로 자신이니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것일까, 너무 큰 욕심을 부린 대가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걸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차라리 저들의 말처럼....... 지난 밤을 새운 고민을 되새기다 고개를 저어 털어낸다. 다시 느리게 걸음을 옮긴다. ...황상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이니까.)
 
막막하고 착잡한 심정을 안고서도 걸음을 옮깁니다.
 
태창전의 앞에 도달한 이화는 아전 중 하나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태창전으로 들어가려 해도 비켜서주지 않고 당신을 빤히 바라보네요.
 
노신:폐하. 소신의 목을 치셔도 좋사옵니다. 그러나, 화빈만은 제발…….
 
이 연:아직도 네놈이 내 앞에서 간교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뚫린 입이라 하여 두려울 것이 없더냐?
 
안쪽에서는 황제의 노성이 들려옵니다.
 
배이화:(연의 목소리에 한발 앞으로 나선다.) ...폐하께서 나를 찾으셨네. 내가 왔다 일러주시게.
 
아전:……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십니다.
 
아전에게 <심리학> 판정이 가능합니다.
 
배이화:
심리학
기준치: 70/35/14
굴림: 1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불타오르는 눈, 꽉 다물린 입술에서 그가 당신에게 품은 선명한 적대감이 읽힙니다.
 
아전:황제 폐하의 총기를 얼마나 더 흐려야 만족하실 겁니까? 화빈께서 오신 이후로 궁궐에 볕 들 날이 없습니다!
 
배이화:(어느 정도 익숙해질 법도 한데, 눈 앞에서 마주하는 적대감은 언제나 날을 갈고 세워 파고드는지. 입술을 꾹 물었다가 고개를 더 꼿꼿이 든다.) ...이유가 나라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나이겠지. ...어서 비켜 서시게. 자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지 않는가.
 
아전:궁 바깥에선 하루하루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악문다.) 피눈물을 흘려가며 울부짖는단 말입니다. 전부 화빈께서 입궁하신 뒤 일어난 일입니다. 어찌 화빈께서 해결하시리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배이화:(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알고 있음에도 무엇 하나 하지 못했고. ...몸에 휘감긴 옷감이며 장식들에 무겁게 짓눌리는 기분이 든다.) ...해결하지 못한다면, 유폐되기 전에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궁을 나설테니 걱정 마시게. 폐하께선 내가 하는 말은 들어주시지 않는가.
 
아전:(무어라 더 쏟아붓고 싶은 눈치였으나, 황제를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더 큰 난리가 날 것임을 이미 안다. 결국 마지못해 옆으로 비켜섰다.) …… 부디 올바른 간언을 바쳐주시기를 빌겠습니다.
 
배이화:...... (가벼운 고갯짓으로 아전의 옆을 지나 잠시 숨을 고른 후, 태창전으로 들어선다.)
...폐하, 신첩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이화는 태창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섭니다.
 
충직한 노신과 차가운 광기에 물든 당신의 황제가 보입니다.
 
노신:(이화가 들어왔음을 알고 더욱 목소리를 높여 간언한다.) 폐하! 부디 이 노신의 오랜 충정을 생각해 주십시오.
 
이 연:(옥좌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언뜻 권태롭게도 보였다. 그러나 팔걸이에 올려둔 손은 힘껏 주먹을 쥔 채고, 이마에는 핏발이 돋아났다. 본래에도 그리 밝지 않던 금색 홍채는 빛이 완전히 꺼져선 이성을 잃은 짐승의 것처럼 섬뜩하게 신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광기는 흡사 소리없이 타오르는 불길 같았다. 작은 불씨인 줄 알고 안심한 찰나에 무섭게 세를 불려 단번에 모든 걸 태우려 드는, 조용하고 차가운 화마였다.)
(시야에 저의 하나뿐인 후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화빈. 나의 화빈이 왔구나.
가까이 오거라. 그리고 듣거라. 이 노망난 늙은이가 네가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짐을 희롱하고 있다 간언하였다. (소름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전각 안에 울려퍼진다.) 감히, 나의 화빈에게 말이지.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다가오던 황제가 탁상을 거칠게 걷어차는 건 순간이다. 보통 공문을 올려놓고는 하던 묵직한 나무 탁상이 고요한 태창전에 엄청난 소란을 일으키며 굴러간다. 노신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탁상이 기둥에 부딪히며 다리 하나가 날아가 버렸다.) 주제를 모르고!
기강을 흐트려? 짐을 희롱해? 간교한 세 치 혓바닥으로 짐을 희롱하는 건 다름 아닌 그대다!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기둥 옆에 세워진 장식용 검을 단번에 뽑아듭니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검은 장식용인데도 불구하고 당장 살을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이 연:내 친히 화빈에게 칼을 쥐여주고 싶으나, 나의 빈은 마음이 약하고 섬세한 아녀자이니 내가 대신하여 모욕을 갚으리라. (칼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노신은 깊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배이화:(연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온건한 금색 눈동자가 늘 평안을 가져다 주었는데. 제게도, 이 태평하고 번성하던 이 나라에도. 그러나 자신의 궁에 들어온 후로, 이제는 사랑하는 눈동자는 꼭 저 멀리서 번져오는 들불 같다. 저 멀리 잔잔하게 흔들리는 불길은 한 손에 덮일 듯 고요하나, 눈 앞에 성큼 다가온 순간 모든 것들 태워버릴 만큼 거대하고, 폭발적이다. ... ...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이 곳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그때, 타국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시덥잖은 생각은 전각을 뒤엎는 거친 소리와 함께 뒤집혀 쓸려 나간다.)
......폐하. (소리도 없는 걸음이 자신의 황제에게, 제 평생을 건넨 이의 앞까지 닿아 멈춘다. 번뜩이는 칼날 앞에서도 오로지 충심만으로 미동도 없이 간언을 바치는 노신을 겹겹이 두른 비단 치마 뒤에 가리고 선다. 올려보는 얼굴에는 언제나 연에게만 보였던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다.) 제게는 늘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셔요. 이런 광경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주실거지요?
신첩의 일로 마음을 너무 어지럽히지 마셔요.
 
이 연:(이화가 노신의 앞을 막아서자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꿰뚫어버릴 듯 이글거리던 기세가 한층 누그러든다. 칼날이 혹여라도 치맛자락조차 스치지 않게끔 주의하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이화의 미소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한결 흐려진 눈빛으로 무언가 골몰하는 듯했다.) 이런. 내가 화빈에게 못 볼 꼴을 보여주었군…….
이 자가 감히 화빈을 맞이할 시간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괘씸한지고! (가라앉았던 목소리에 다시금 힘이 실린다.)
도리를 위해서라도 이 자를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
 
배이화:(바닥으로 향하는 검에서, 연의 얼굴로 다시금 시선이 올라간다. 빛을 머금지 못하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내려앉는 심장께에 손을 얹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미소는 여전하나, 물러섬 없이 한걸음 더 다가선다.) 더욱 서두르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신첩, 폐하와 마주하는 시각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이 싫사옵니다. 저 자는 내버려두시고 저를 봐주시어요.
폐하, 그래주시겠지요. (더욱 환히 웃어 보였다가 고개만 반쯤 틀어 돌아본다.)
...대감은 폐하의 심기를 더 어지럽히지 말고 그만 돌아가세요.
 
이 연:내 저자가 간언이랍시고 뱉어둔 모욕을 생각하면 사지를 찢고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걸어두어도 모자라나, 화빈이 그리 부탁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가볍게 혀를 차며 칼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챙강―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날카롭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노신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방금 네 목숨을 살린 이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거라. 인의를 알고 은혜를 아는 사대부라면 평생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야.
썩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노신:(비틀거리며 일어나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한다. 천천히 돌아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화를 눈에 담지 않았다.)
 
배이화:(노신이 무사히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다시 연을 바라본다. 주변에 누구도 없이, 둘이 마주한 순간 만큼은 조금 숨통이 트인다.) 저들이 말하는 것은 제게 아무런 모욕도 되지 않습니다. 제게는 폐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시리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들여보며, 여상한 미소를 그린다.) 어찌 신첩을 부르셨습니까?
 
이 연:인사 하나 없는 저 무례한 작태란! 제가 방금 누구 때문에 살았는지 알기는 하는 것인가. (노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찬다. 탁상이 날아가며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져 태창전의 바닥이 온통 엉망이 되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시야에 이화만이 유일해지자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 같던 분위기가 그나마 온건해진다. 그와 별개로 사고의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은 듯, 질문에 답을 떠올리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내 너를, …… 그래. 연회복을 준비하고자 너를 불렀다. 곧 연회가 열리지 않느냐. 그때 너를 위한 특별한 옷을 한 벌 지어줄 셈이다. (그는 본디 물자를 너무 쓰지 않아 위엄이 떨어질까 걱정될 정도라는 상소를 받곤 하는 황제였으나, 반 년 전부터는 국고를 거덜낼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사치스러워졌다. 이전 연회가 열린 지 채 달포도 되지 않았으나 또다시 새로운 연회를 준비하는 것도 그러하다.)
 
배이화:(그의 화마가 금방 가라앉도록 어르듯 부드러운 낯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다소 풀린 분위기에도 연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눈동자에 빛이 흐려지고 희미하게 비어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다시 흐르기까지 되묻지도 보채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그가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탓도 있었다.) ...또 연회를 여십니까? 폐하께서 이미 내려주신 것만으로도 신첩은 연회에서 가장 반짝일 텐데 어찌 또 새 옷을 지어주려 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차라리 새 옷을 지을 값으로 백성들과 나눌 음식을 지으시는 건 어떠하겠습니까.
 
이 연:화빈을 맞이한 지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르지 않았더냐. 그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다. (이제는 시간 감각도 흐릿했다. 조도를 통해 낮과 밤을 구별하는 정도다. 종종 나가곤 했던 사냥도 더는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따라올 자가 없다던 무예 실력만큼은 여전해서, 옳은 말을 간언하는 충신들을 어수(御手)로 직접 몇 명이나 베어냈던가.) 빈은 이미 궁에서 가장 빛나는 여인임을 모르지 않으나, 그럼에도 더 귀하고 좋은 것을 챙겨주고픈 내 마음이니 받아주거라. 정 마음이 불편하다면 연회가 열리고 남은 음식을 백성들에게 나누라 이르겠노라. 그러면 되겠느냐?
 
배이화:제가 무어라고 그렇게 까지 하십니까. (초조함이 심장을 집어삼키고 등허리를 타고 나가 손끝과 발끝까지 번져 닿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정말 내가 아는 연이 맞나, 확인해야 한다는 듯이. 느릿하게 손을 뻗어 감히 용안에 가져간다. 무엄하다 손이 달아나도 시원찮을 일인데도, 연의 뺨 끝이 손을 스쳐 지나갈 때 까지 천천히, 곧게. 실낱같은 온기에 겨우 다시 미소를 띄운다.) ...예, 폐하. 감읍할 따름입니다. 다만, 다음에는 아주 오래 시각이 지난 뒤에 귀한 것을 내려주셔요. 미처 다 입어보지 못한 옷도 있습니다.
 
이 연:그 누구보다도 중한 나의 화빈이 아니냐. 세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산해진미를 갖다 바쳐도 부족하다. (닿아오는 손길을 밀어내기는커녕 편하도록 허리를 숙여 높이를 맞춰주었다. 이화가 제게 칼을 꽂는대도 순순히 받아들이겠지. 아마도 이것이 그의 사랑방식인 모양이다. 혹은 그마저도 광기에 변질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입고 있는 그 옷도 참으로 어여쁘구나. 내가 지어준 것이냐? (분명 제가 비단의 종류와 모양까지 정하여 마련해준 옷이거늘, 마치 처음 보는 듯 묻는다.)
 
배이화:(엄지로 뺨 언저리를 쓸어내고, 눈 아래를 스쳐 지나는 손이 이보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울 수 없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자신을 순순히 내어 놓는 연의 모습에 심장이 술렁인다. ...그의 사랑을 바랐을 뿐인데. 온전한 사랑만 바랐을 뿐인데. 내가, 내 사랑이 당신을 망쳤습니다, 폐하. ...어쩌면 좋을까요.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말은 웃음과 삼킨다.) ...예, 폐하. 폐하께서 직접 색과 문양까지 대어보며 골라다 주시지 않았습니까.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하시면서요.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이 연:과거의 나는 안목이 제법 훌륭했구나. (제 기억력을 되돌아보거나 스스로를 탓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각자의 삶에서 서로가 겹쳤던 시간은 1년 남짓, 이후로 두 사람 모두 많은 고초를 겪었다. 7년 만에 재회했을 때 연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채였으며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았는지 이전보다도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혼인을 올리고 반 년 만에 돌부처 같던 낯에는 많은 감정이 스치기 시작했고 ―비록 부정적인 류가 대다수지만― 투박할지언정 이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대단한 것인가? 약주의 힘이 그토록 강한 것인가? 누군가는 가질 의문이나 그는 해답을 모른다.)
상궁은 무엇 하는가. 어서 줄자를 내와라. 화빈, 팔을 뻗어보시오. (자를 받아들어 직접 이화의 치수를 재기 시작한다.)
 
배이화:...예, 그럼요. 그러니 잊지 마셔요. 폐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신지요. (험난한 그 끝에 돌고 돌아 제게 겨우 남은 것이 가장 커다란 것이라 놓을 수도 품을 수도 없어 그 끄트머리만이라도 간절히 붙잡게 된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것에 제 전부를 건네주어서 쉽게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겨우 반년 만에 되찾은 웃음에, 말 못할 슬픔이 어리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한 나라의 황제가 겨우 빈을 위해 이리저리 재는 모습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그럼에도 눈을 가리고, 잠시 꿈을 이어 꾼다. 어린 시절, 그를 기다리며 가장 좋은 비단 옷을 꺼내 입고, 창가에 매달리듯 서던 소녀가 되어서. 그의 말에 따라 양팔을 뻗고, 간지럽다는 듯 흐리게 웃는다.)
어찌 이런 것까지 손수 하셔요, 누가 볼까 겁납니다.
 
이 연:화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무엇이든 좋다. (가까이 붙어있는데다 이화가 웃어주었기 때문인지 어느덧 제법 부드러운 어조였다.)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여흥이니 부디 용인해다오. (마저 치수를 재고서야 줄자를 상궁에게 되돌려준다.) 여전히 너무 말랐구나. 식사량을 조금 더 늘리는 건 어떠하냐.
 
배이화:신첩도 그렇습니다. ...폐하만 계시면 되어요. 제겐 폐하밖에 없습니다. (맞지도 않는 지위에 맞지도 않는 옷과 과분한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무게에 눌려 겨우 숨을 쉬면서도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미 충분합니다. 본 적도 없는 산해진미가 늘 때마다 차려지는걸요. 폐하의 옥체를 더 신경 쓰시어요. ......늘 걱정입니다.
 
이 연:화빈이 다름 아닌 나를 걱정하는 것인가. (피식 웃었다.) 한때는 적이 많았었지. …… 모두 옛날 일이다. 전부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많은 피를 묻혔었다. (과거를 헤매이는 듯 잠시 몽롱해졌다가 금세 현실로 되돌아온다. 칼날에 피를 묻히는 건 지금도 다를 바 없으나, 그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을까?) 나는 내 한 몸을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나보다 본인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거라. 물론, 그대 역시 내가 지켜줄 테지만.
 
배이화:(그가 겪었을, 또한 기어이 이겨냈을 고초를 전해 듣는 것 만으로 그것에 약간의 상상을 더하는 것 만으로도 한 켠이 아리다. 필연적으로 그의 손에 묻혔어야 했을 피를 생각한다. 약주 따위에 취해 빠진 이를 덮어주려 더한 피를 묻히지는 마셔야 할텐데.) 폐하께서는 무척 강인하신 분이시지요. 그러니 뭐든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신첩도 걱정 마시어요. 그런 폐하의 빈이 아닙니까.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제 모든 것을 잃고 도망 길에 오른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귀히 자란 온실 속의 화초는 길에 내던져졌다. 거친 땅에 다시 뿌리를 뻗고 꺾인 줄기를 펴야 했으니 그 날보다 억척스럽게 자랄 수밖에.)
게다가 가장 귀하신 분이 앞에 버티고 지켜주신다지 않습니까.
 
이 연:그대도 지난한 삶을 살아 왔겠지.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있었겠지. 그 모든 나날을 견디고 내 앞에 있음을 아는데도, 왜 나는 자꾸만 그대가 연약하게만 보이는지. (침묵하더니, 이화의 양 손을 소중히 감싸쥐며 시선을 맞춘다.) 화빈, 대화하는 내내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하군. 그대에게 위협을 가한 이가 있느냐? 혹은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느냐?
 
배이화:(그래도 버티고 살겠다고 도망친 이유에 그가 있어서 였을까. 겹쳐진 두 손과 손을 내려보다가 그저 웃었다.) 신첩에게 위협을 가할 이가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느리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 해를 끼치려는 자가 바로 지근거리에 있다면 어찌 하시겠어요? ...만약 그게 저라면, 신첩이라면 어찌 하시겠어요? (느리게 고개를 든다. 시선을 맞춘다. 여전히 제게만 다정한 눈의 저편에 흐릿해진 빛을 기어이 찾아내려 마주한다.)
 
이 연:왜 없겠느냐. 방금 그 천벌을 내려도 시원찮을 노신만 보더라도 이 궁에 너를 호시탐탐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가득하잖느냐.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눈살을 작게 찌푸렸다.) 짐이 알아차리는 게 늦었군. 걱정 마라, 화빈. 그들이 네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할 테니.
(홀로 대단한 결심을 한 듯 중얼이다가 이화의 질문은 한 박자 늦게 이해한 듯했다. 눈을 몇 차례 깜박이다 우스운 말을 들었단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농을 하는구나. 내 생애 온전히 믿어본 이는 단 둘뿐인데, 한 명은 나를 거두어주신 이 소용이고 한 명은 화빈 그대다. 그대가 나에게 봄의 온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대를 의심할 일도 없지만, 만일 그렇다 한들, 네 손에라면 기꺼이 스러져 주마.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테니.
 
배이화:(잡은 손에 느긋하게 힘을 준다.)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되려 원성만 높아질 거에요. 폐하께서 신첩의 일로 마음을 쓰시는 것이 싫습니다. 약조하셨지 않습니까, 제가 어여쁜 것만 보여주시겠다고요.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모두가,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궁에 들어온 후로 당신께서 어찌 되셨는지요. 겨우 입꼬리를 올린다. 그의 말처럼 정말 농을 던졌다는 것처럼.) 어찌 그런 농을 하느냐, 무엄하다 꾸짖으셔야지요. 폐하, 제겐 폐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스러지지 마셔요. 언제고 제 곁에 있어주세요, 원하는 건 그것 뿐입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스스로를 잊으시면 안돼요, 언제고 제 곁에 있어주셔야지요.......)
 
이 연:참으로 그리하고 싶다. 네겐 언제든 곱고 어여쁜 것만 보여주고 싶거늘 어찌하여 방해하는 이들이 이리도 많은지. 그대도 짐의 일로 마음을 쓰지 않느냐. 나의 빈을 걱정하고 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화가 말려도 별로 진지하게 듣는 기색이 아니다.)
화빈, 나에게도 그대뿐이다. (희미하게 미소한다.) 우리에겐 서로뿐이구나. 걱정 말거라. 언제고 그대의 곁에 있을 테니. 그대가 부르기만 한다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갈 테니. 빈은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그저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시오.
 
"폐하. 승지들이 보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사를 행하시지요."
 
근처의 내관이 떨면서 조심스레 말을 전합니다.
 
이 연:이런. (아쉬워하면서도 별다른 소란 없이 고개 끄덕인다.) 알겠다. 곧 들라 하라.
화빈, 저녁 수라 시간 때 다시 봅시다.
 
배이화:....예, 폐하.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겹쳐든 손 위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나선다.)
 
다난한 오후였습니다.
 
어느새 방백처럼 깔리기 시작한 노을이 이화의 신발 앞코를 적십니다.
 
오늘은 다름 아닌 염족의 전달자를 만나 흑양黑羊의 젖을 전달받는 날입니다.
 
전달자와의 만남은 궁궐의 뒤편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지요.
 
느리게 발걸음을 옮겨 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버드나무의 그림자 안에 갓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이가 보입니다.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팔을 타고 그려진 흑양黑羊의 문신이 보입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전달자의 표식이죠.
 
배이화:(한숨처럼 늘어지는 걸음이 전달자가 선 나무 아래로 들어선다.)
 
전달자:마마, 오셨습니까. (의례적인 예를 갖춘다.)
무탈하신지요?
 
배이화:......예. 무탈합니다. (전달자의 팔에 그리진 문신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느리게 입을 연다.)
...이번에도 가지고 오셨습니까?
 
전달자:이틀치를 구해 왔습니다. (젖이 든 병을 건넨다.) 최근 황제 폐하의 동향이나 가신들의 행보는 어떠한지요.
 
배이화:(대답 없이 천천히 병을 받아 든다.) ......그곳까지는 여전히 소식이 먼가봅니다. ...가신들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저를 유폐하고 나라를 바로 잡으시라 간언을 올리고 계시지요. 폐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시고요. (낮게 울리는 그의 노성이 귓가에 선하다.) 요즘 들어서는 시간조차도 헛갈려하시는 듯 해요. 염족을 위한 일이라지만 의문이 듭니다. (손에 든 병을 물끄러미 내려본다.) ...폐하께서 변하신 것이 이것 때문입니까?
 
전달자:궁에도 염족의 일원들이 없지는 않으나,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분은 마마시니 정확하고 소상한 상황을 알기 위해 여쭈었습니다.
저희가 해가 되는 걸 드리겠습니까? 황제 폐하에게 기대어 권세를 누리고자 하는 게 바로 저희인데요. 괘념치 마십시오, 마마. (달래듯 말하고는) 그보다 최근 반역을 꾀하려는 무리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곧바로 황제 폐하께 고하시고 마마께옵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언제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배이화:(여전한 불안감에 병목을 매만지다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두고 어찌 혼자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겠느냐만.) ......예. 그리 할테니 심려치 마세요. 부디 조심히 돌아가세요.
 
전달자:(그러나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모양이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근 만주 쪽에 쓰이지 않는 너른 들판이 있습니다. 내쫓긴 소수 민족에게 그 들판을 하사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드려 주십시오. 황제 폐하는 마마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배이화:(이어지는 목소리를 잠자코 듣다가, 고개만 잠깐 끄덕인다.) ...만주 쪽 너른 들판이요. 말씀은 올려보겠습니다.
 
전달자:(고개 끄덕인다.) 젖이 떨어질 때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리곤 먼저 풀숲 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전달자와 헤어질 무렵, 당신은 저 수풀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그건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본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배이화:(흔들리는 수풀과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사람을 눈으로 쫓아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구였을까, 언제부터, 어디까지 본거지? 주변을 돌아보다 입술만 꾹 물었다.)
 
시선으로 좇아가보려 해도 풀이 무성한데다 재빠르게 사라진 탓에 불가능합니다.
 
하는 수 없죠. 다른 이들의 눈에 더 띄기 전에 어서 돌아갑시다.
 
배이화:(병을 품에 숨기듯이 끌어안은 채 서둘러 처소로 돌아간다.)
 
처소로 돌아간 이후로는 별 일이 없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저녁입니다.
 
황제는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데, 이화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씻은 듯이 잠이 온다며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죠.
 
그리고 이화가 황제의 잔에 흑양黑羊의 젖을 타는 것도 그때입니다.
 
당신은 황제의 수라상을 들이기 전, 점검 목적으로 상궁들을 물리고 수라상을 독대합니다.
 
오색의 음식들과 흰 쌀밥들 사이에 보이는 약주가 눈에 들어옵니다.
 
배이화:(이제와 새삼스럽게 망설이게 되는 것은 그를 잃을까 봐서 일까, 그 마음을 잃을까 봐서 일까. 오색의 음식들보다 눈에 먼저 드는 것은 저녁 수라에 늘 함께 하는 약주다. 건네받은 매끈한 병을 쓰다듬어보다가 결국 약주에 병에 든 젖을 섞는다.)
 
흑양의 젖을 약주에 타고 자리에서 물러서면, 상궁들이 수라상을 처소로 들입니다.
 
그 이후에 이화가 들어설 차례입니다.
 
배이화:(수라상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 처소로 들어선다.) 폐하.
 
안으로 들어서면, 연이 이화를 맞이합니다.
 
이 연:이화. 어서 오거라. (당신을 반긴다.)
 
배이화:(그제야 낯에 미소가 스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시장하지는 않으세요?
 
이 연:얼마 기다리지 않았으니 걱정 말고 이리 앉거라. (제 바로 옆자리를 몇 번 가볍게 두드렸다.)
 
배이화:예, 폐하. (황제의 바로 옆에 앉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느냐 하지만 바로 여기에 예외가 있다. 연의 낯을 보고 곁에 앉으면 근심도 불안도 잠시 날아간다.)
좋아하시는 찬이 가득입니다. 얼른 드셔요.
 
이 연:(식사할 생각은 않고 한참 동안 이화의 얼굴만 들여다본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거친 낯에 절로 옅은 미소가 어렸지만, 동시에 어딘지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그대가 먼저 든다면 나도 따라 들지. 그대는 언제나 먹는 양이 적으니 내가 이리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배이화:...그리도 좋으세요? 이러다 얼굴이 뚫어지겠습니다. (연의 피곤해보이는 낯이 꼭 명치에 얹혀서 괜히 농담과 함께 미소 지으며 손에 수저를 쥐어 든다.) 폐하께서 든든히 드시는 모습이 신첩에게 제일 가는 찬입니다. 그러니 더 많이 드셔요. (반질한 고기 조각을 집어 연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고 한 술 뜬다.)
 
이 연:뚫어지기 직전까지만 보고 있으마. (수저가 쥐여지고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다가 그제야 고기와 함께 첫 술을 떴다. 그리곤 이화가 좋아하는 반찬뿐 아니라 식탁에 놓인 거의 모든 반찬을 그릇 하나에 조금씩 덜어준다.) 태창전에서 물러간 이후로 별 일은 없었느냐.
 
배이화:(알록달록하게 정갈하게 놓인 그릇을 보다 고개를 젓는다.) ......예, 별일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유독 피곤해보이세요. ...근래 정무가 많이 바쁘시지요?
 
이 연:어서 먹거라. (다 먹기를 바라는 듯 그릇과 이화를 빤히 번갈아본다. 둘만의 사석이어서 그런지 이전의 불길 같던 광기는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소탈한 분위기와 표정에는 곤룡포보단 차라리 농부나 사냥꾼의 복식이 더 잘 어울릴 듯했다.) 괜찮다. 이쯤 아무렇지도 않아. (힘든 일이나 고민거리를 일절 털어놓지 않는 면은 여전했지만.)
 
배이화:...예, 제가 먼저 비우지 않으면 꼭 덜 드시겠습니다. (무겁고 힘든 것은 온통 제 어깨와 등에만 지고 내려 놓지를 않는 이를 어쩌면 좋을까. 커다란 바위같이 우뚝 버티고 서서는. 결국 졌다는 듯 웃음과 함께 반찬이며 밥그릇을 천천히 비운다. 중간 중간 연의 그릇 위에도 이런 저런 찬들을 얹어두면서.)
 
이 연:그대도 이제는 나를 조금 잘 알게 되었군. (피식 웃고 그제야 평소처럼 수라를 들었다. 차차 그릇이 비어가고, 남은 건 이화가 따라둔 약주뿐이다. 수저를 내려두고 술잔을 잡는다. 곧장 입가로 가져다대기 전 다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화. 중전이 아닌 후궁으로 이 궁에 들어온 것이 아쉽진 않느냐. (조금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들이 혼례를 올린 지도 벌써 반 년이 넘었다.)
 
배이화:(새삼스러운 이야기에 휘어진 눈동자가 순식간에 일렁인다. 술잔에 담긴 약주처럼.) ......한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지금도 맞지 않게 과분한 옷을 입고 있는 걸요. ...이보다 높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생각하시는 마음만 변치 않으신다면, 그걸로 족해요. (그의 옆에, 연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리에 다른 이가 번듯하게 선다면, 마음이야 갈래갈래 찢어지겠지만. 더한 욕심은 또 얼만큼의 과업으로 돌아올지 두려운 마음이 더 크다.)
 
이 연:과분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그대는 국모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이다. 대신들의 반대만 없었더라면 그대가 진작 중전이 되었을 터인데. 소수민족 출신인 것이 어떠하단 말이냐. 그 작자들이 떠받드는 황제 역시 길가의 평민이었던 것을! (목소리에는 그다지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조했다.)
그대는 좀 더 욕심내도 된다. 이화 그대라면…… 마음이 동하는 건 무엇이든 원할 자격이 있어. 그 중 하나가 그대를 향한 내 애정이라면 얼마든 주겠다.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을 테니.
 
배이화:하지만 폐하께서는 스스로 지금의 자리를 손에 쥐신 것이 아닙니까. (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천천히 도닥인다.) 폐하께서 그리 생각해주시는 것 만으로 무척이나 기쁩니다. 이리 내어주시는 마음을 품으면 꼭 천지가 제 품에 들어온 것만 같아요. ...대신들의 말은 간지럽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마음. 그 하나 뿐이나, 둘러싼 주변마저 녹록지는 않아서 느즈막히 어렵게도 입을 뗀다.) ......폐하, 한 가지만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만주 쪽에 쓰이지 않는 들판이 있다 들었습니다. 내쫓긴 소수 민족에게 그 들판을 하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빈 땅을 놀리는 것이 아쉬워서요. ...오갈 곳 없었던 제 처지가 생각도 나고요.
 
이 연:그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그는 재회한 이후 제 이야기를 거의 터놓지 않았었기에, 7년의 세월 일부를 간접적으로나마 언급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봄꽃 같다. 부드럽고 상냥했다.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만큼. 어떤 고난이라도 감내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 이화의 청을 들어주는 건 그로선 당연한 일이다.) 만주의 들판이라. 알겠다. 그리하지.
 
배이화:...잘하셨어요. 잘하셨습니다. (스치듯 짧게 나마 연이 지나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라, 절로 눈이 커졌다. 한 줄을 꺼내어 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단단해지기까지 얼마나 부딪치고 깨졌을까. 그의 고난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지난 세월이 사무친다. 거친 손을, 낯에 담긴 것을 손끝으로 그리고 어루어 만져본다. 제 눈 앞에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 이.)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하옵니다. ...저도 폐하께는 내어드리고만 싶은데 자꾸 받기만 해서 큰일입니다.
 
이 연:(한 문장을 끝으로 더는 과거를 꺼내두지 않았다. 대신 옅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대의 부탁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존재만으로도 나의 안정이자 기쁨인데, 무얼 더 주려 하는가. 괘념치 말거라.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랐듯, 나 역시 그대가 내 곁에 있어주기만을 바랄 뿐이니.
(그리고 천천히 술잔을 들어올린다. 입가를 타고 약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러들어갔다.)
 
배이화:예, 폐하. 신첩, 언제고 곁에 있겠습니다. (나 역시 변치 않고 당신의 곁에 있겠노라, 환한 낯으로 답을 더한다. 이내 비워진 잔에는 씁쓸한 뒷맛을 남몰래 삼켰다.)
약주 없이는 여전히 잠에 들기 힘드세요?
 
이 연:(잔을 내려놓는 팔에 일순 힘이 풀려, 술잔이 상 위를 데굴데굴 굴러간다. 눈은 구름이 낀 듯 몽롱하고 입술은 멍하니 벌어졌다. 이화의 물음에도 한동안 조용하다가 고개를 몇 번 가볍게 털었다. 풀어졌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소탈하던 분위기에 권위가, 긴장이 어린다. 총기가 사라진 금빛 눈이 이화를 향해 뻣뻣하게 굴러갔다.) 제대로 듣지 못하였다. 화빈, 무어라 하였지?
 
배이화:(술잔이 상 위를 구르는 소리가 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 제 심장이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 같다. 순식간에 흐릿해진 눈동자에, 풀어진 표정에, 굳은 몸짓에 절로 손을 뻗는다. 연의 뺨을 부여잡아 눈을 맞추면, 그 흐린 눈에 비친 절절한 여인의 얼굴과 마주친다.) ...폐하. 폐하, 괜찮으세요?
......약주 없이. ...약주 없이는 여전히 잠에 들기 힘드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이 연:이리 가까이서 보니 좋구나. 나는 미추에는 일절 관심이 없으나 그럼에도 그대가 얼마나 어여쁜 여인인지는 확신할 수 있다. (금색 눈에 비치는 상은 금세라도 울 것만 같은 이인데, 그는 놀라거나 위로해주기는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딴소리를 한다. 홀로 다른 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며칠 안 자도 상관없다. 화빈을 바라보고, 존재를 확인하고, 시간을 함께 보낼 수만 있다면 잠 따위 아니 자도 무방해. (한 팔을 뻗어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쉽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일반적인 광인과 달리 광기에 물들면 더욱 조용하고 묵묵하게 가라앉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이 더한 섬뜩함을 자아내고는 했다.) 화빈. 내 생각해보았다. 연회 말고 또 무엇으로 그대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사냥 대회를 다시 여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꽤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었지. 풀어놓은 동물들이 제법 수를 불렸을 것이다. 내 손수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겠다. 그리 잡은 짐승들의 피로 연못을 만드는 것이다. 붉은, 꽃처럼 붉은 못을 말이다…… 그리고 그대를 중전으로 올리는 데 반대한 대신들의 목도 거기에 잘라넣어야겠다. 참으로 보기 좋을 것 같지 않느냐?
 
배이화:.......폐하. (겨우 떨어지는 입술이 잘게 떨린다. ...연의 눈에 비치는 것이 정말 눈 앞의 자신이 맞는 걸까. 저 어드메의 꿈 속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달콤한 말 한마디가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멀다. 한번 안기면, 영영 떨어지고 싶지 않던, 그토록 바라마지 않은 따스하고 너른 품인데, 등골이 서늘하다. 연의 품에 가득 안겼음에도 한겨울 칼바람이 심장께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날아가는 것만 같다. 연을 이렇게 만든 것이 꼭 저밖에 없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힌다. 유일하게 제 숨통을 틔워준 이의 목을 제가 죄고 있는 거다. 저주처럼.)
(구겨지는 낯을 꾹꾹 눌러 펴 웃음을 띄운다. 당신이 어떻게 변한다 해도, 여전히 이 자리에 남아있겠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다만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아도 좋은데...) ......폐하께서 다시 사냥을 나가신다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꼭 다시 예전처럼 기운이 나시면 좋을 텐데요. (꿈 속에, 환상에 빠져든 것 같은 달고도 멍한 눈이 아니라, 무던해도 따스한 그 눈으로 나를 봐주면 좋을 텐데.) ...하나 저 하나때문에 죄없는 목숨들이 다치고 스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눈 앞에서 쓰러진 이들을 생각하면 밤잠을 다 설치게 될 거에요. 그건 싫습니다. ...폐하만 제 곁에 계셔주시면 돼요. 그것이 제일 기쁩니다. (겨우 입꼬리를 들어 여상한 미소를 그린다. 겹겹이 두른 비단 옷 아래, 가느다란 팔을 뻗어 너른 등을 쓸어 내린다.) ... ...그러니 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폐하...
 
이 연:지금의 나는 기운이 없어 보이느냐? 그렇지 않다. 정무를 보는 데에 무게를 더 두고 있을 뿐. (그 '정무'라는 것이 태반은 차가운 분노로 대신들을 살라먹는 행위지만 말이다.)
(당신이 저를 말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일까? 나의 사랑하는 후궁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데. 무엇이든 원하면 가져다 안겨주겠다는데. 그래서 그는 제멋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하긴, 목을 자를 적엔 피가 많이 튀지. 내 고운 화빈의 옷에 그런 더러운 게 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은 참으로 죄가 많은 이들이나 그대를 보아 내 이번에도 넘겨주도록 하겠다. (문득 탄식한다.) 너그럽게 굴면 정도를 모르고 넘어서기 마련. 그들이 화빈의 아량에 감사하기는커녕 나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려 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오늘 낮의 그 노망난 작자마냥 말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그때만큼은 내가 기어이 칼을 뽑아 합당한 벌을 내려줄 터이니.
나의 빈은 너무나 소탈하여 탈이다. (연보라색 머리칼을 손끝으로 쓸어보고, 손가락에 감아본다. 머리카락 하나마저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병목을 타고 흐르는 술처럼 사랑이 넘친다.)
 
배이화:...그야 신경 쓰실 것들이 무척이나 많으시니까요. (그 '정무'에는 매일같이 간언을 올리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얹혀져 있을테니. 저만 없었어도 그 짐을 덜었을 텐데.)
...예,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의 옷에도 그런 것들은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더럽혀지는 것이 싫습니다.
(긴 머리칼을 타고 흐르는 감각에 눈을 감고 고개를 품에 기댄다. 드넓은 궁에서 가장 믿으면 안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나, 가진 것이, 바라는 것이 그것 하나라. 느리게 닿는 애정에 모르는 척, 또 눈을 감고 만다. 입 안에 숨겨둔 사탕처럼 달게만 굴게 된다. 그러니 지금 심장이 급박하게 뛰는 것은 당신을 향한 마음 때문이라고. 주인인 불안은 바닥으로, 심연으로 밀어낸다. 겨우 든 고개를 목 언저리에 파묻는다. 숨결처럼 닿은 입술이 떨어지면 결국 나지막한 웃음이 흐리게 흐른다.) ...신첩만큼 욕심이 많은 이도 없을 거예요. 천하의 제일이신 폐하의 마음을 잔뜩 탐내는 이를 어찌 소탈하다 하실 수 있으세요.
 
이 연:황제의 자리란 본디 그런 것이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벌레 떼처럼 떠들어대는 간언이니 상소 따위만 아니라면 말이야. (어쩜 하나같이 제 유일한 후궁과 관련된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는지. 듣기 싫고 보기도 싫다.)
그대를 위해 나는 얼마든 더럽혀져도 되거늘, 화빈은 무척이나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니 나를 과히 신경써주는 게지. (반대쪽 팔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고 뺨이나 귀를 매만진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은 억세지만 얼굴을 더듬는 손길만큼은 아주 조심스럽고 보드라웠다. 그는 무거운 칼도 깃털처럼 가볍게 흔들 만큼 힘이 장사였으나 이화에게는 결코 거칠게 구는 법이 없었다.)
(나지막하게 웃는 이의 이마에 메마른 입술이 내려앉는다.) 그건 욕심이라 부를 수 없다. 황제라 한들 결국은 한 명의 사내. 반려를 아끼고 은애하는 건 무릇 당연한 일이 아닌가. 드는 걱정이라곤 하나뿐이다. 화빈이 바라는 만큼 내어주고 있는지. 부족하고 모자라 그대를 갈급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배이화:(가장 높은 곳에 선 이가 어찌 그 짐을 나누어 놓겠으며, 쉬이 같이 짊어질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못내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제가 싫어 그럽니다. (마음을 꼭 투정처럼 늘어놓고, 눈꺼풀을 느리게 감는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만 선명하다. 당신이 이토록 소중하다고 말하는 투박하고 거친 손이 깃털보다 부드럽고 상냥해서, 그 너머에서 전해지는 것이 꼭 마음을 간질이다 다 녹여버린다.)
...폐하, 폐하께서는 늘 제가 바라는 것의 두어 곱절은 더 내어 주십니다. 그러고도 늘 모자랄까 마음을 졸이시지요. 꼭 제 마음처럼요. (조용한 웃음 끝에 눈을 떠올린다. 떨어진 메마른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가 그 위로 제 입술을 겹쳐본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게 해주시니까요. 늘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 연: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이 짝지어준 인연이구나. 그대가 날 위하는 마음과 내가 그대를 위하는 마음이 꼭 같으니 말이다. (아니 그렇느냐? 가만 묻는다. 입술이 맞닿을 적 눈을 감지 않았다. 막을 한 겹 씌운 듯한 흐린 눈으로도 당신을 꼼꼼히 훑고 새겼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라곤 오직 눈앞의 한 사람뿐이다.)
 
배이화:예, ...돌고 돌아 하늘이 맺어주신 인연이지요. (뺨이며 입술을 쓸고, 어루어 만진다.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로, 금세 흩어질 연기를 붙잡아 두듯. 총기 어린 금빛 눈이 아니어도, 저 눈에 자신이 비치면 되었다. 문득 이런 마음이 치밀고 올라온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무서워 일부러 더 환히 웃었다.) 그러니 하늘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영영 잃을 일이 없겠습니다.
 
이 연:무너질 일 없을 것이다. 몸이 부서지는 일이 있더라도 떠받칠 테니. (손길을 느끼며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세상은 그의 발밑에 있고, 사랑하는 이와 혼인하였으며, 그가 저의 곁에 언제까지나 머문다고 말하니 도무지 불행할 이유가 없다.)
오늘은 양자전으로 가 함께 침소에 들지 않겠느냐.
 
배이화:...예. (언제고 이 웃음만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세상 가장 행복할 텐데. 웃음은 자연스레 번져 물든다.)
양자전은...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곳인데 같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이 연:내 비를 들이겠다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혹 불편한 것이라면 내가 의영전으로 가도 된다.
 
배이화:...그럼 의영전으로 드시지요.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황제는 평소의 침소인 양자전 대신 의영전으로 향합니다.
 
궁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내일이면 궁 전체에 퍼지겠지요.
 
황제가 처소를 옮길 만큼 화빈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잠들기 전, <지능> 판정
 
배이화: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은 알고 있던 흑양의 젖의 효과를 다시 떠올립니다.
 
잔을 마실 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 효과 덕에 연은 이화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젖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로 폭군이 된 것은 어째서일까요?
 
애초부터 연에게 광기의 조짐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배이화:(어둠 속에서 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이 서서히 느려진다. 흑양의 젖의 효과는 분명 잔을 마실 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는데... 왜 당신이 이렇게 변하게 된 걸까. 당신에게 해가 될 것은 아니라 하였는데. ...내가 미처 전해 듣지 못한 다른 효과가 있는 건 아닐까. 침묵 속에 폭풍이 쓸고 지나간다. 설마, 애초부터 연에게- 아니. 아니다. 그럴리가. 그것만큼은 절대, 절대 아니라며 고개 저어 헛된 생각을 털어낸다. ...내 탓인거야. ......내 욕심이 부른 화일거야.)
 
...
 
...
 
뙤약볕이 살을 꼬집는 불길한 낮입니다.
 
어쩐지 살갗에 달라 붙어오는 의복마저 오늘은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침에 당신이 몸을 일으키자 무너져버린 촛대도, 찢어져 버린 서적의 끄트머리도 묘합니다.
 
무언가 일이 날 것처럼.
 
어제 전달자와 대화한 뒤 목격했던 인영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 무렵일까요, 고성과 함께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황제의 집무처인 태창전입니다.
 
배이화:(아침부터 살갗에 들러붙는 어떠한 징조들이 기어이 형체를 갖추었나, 고요함을 찢는 선뜩한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원지로 향한다. 걸음이 꼭 조급한 마음을 대신하듯 점점 빨라진다. )
 
“폐하, 소신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좋사옵나이다.”
 
“이 몸이 산 채로 불태워 돼지우리에 던져져도 좋사옵나이다.”
 
“그러하오나 화빈, 배 화빈만은 부디 곁에서 물리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 연:그 입 닥치라 하였다! 네 혀를 조금이라도 더 놀렸다간 평생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멀리서까지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노기가 가득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입니다.
 
평소의 간언들과는 다릅니다.
 
아침의 불길한 징조들은 모두 이 순간을 암시하는 건 아니었을까 싶기까지도 합니다.
 
어서 태창전에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배이화:(심장께를 부여잡고 서둘러 태창전으로 걸음한다.)
 
어제 태창전에서 간언을 하는 노신을 기다리던 젊은 아전의 모습이 보입니다.
 
황제에게 간언을 하며 바닥에 이마를 찧었는지, 아전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꼴이 끔찍하다는 듯 한껏 인상을 구긴 채입니다.
 
그러나 태창전으로 들어선 이화를 보고는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집니다.
 
이 연:화빈이 아닌가.
 
배이화:(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올려본다.) 예, 폐하. 어찌 하여 이리 노하셨습니까.
 
이 연:마침 잘 왔다. (씩씩대는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제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이 괘씸한 자가 무어라 하는지 들었느냐? 화빈, 그대가 내 잔에 독을 탔다는구나. 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대가! (치켜올라간 눈이, 말아쥔 주먹이, 딱딱히 굳은 어깨가 죄 분노와 증오로 타오르는 듯했다.)
그대가 직접 이 자에게 진실을 고하라. 한 마디면 된다. 아니, 소명할 필요도 없다. 감히 하늘의 반려를 음해하는 자에게 상세히 말해줄 필요 없느니라. 나에게, 이 짐에게 명령하라, 이 자를 죽이라고 말이다. 그대가 한 마디만 한다면 내 이 자를 오체분시하여 머리는 저잣거리에 걸어두고 몸은 개돼지의 먹이로 줄 터이니!
 
배이화:... ...제가 어찌 감히 폐하께 해가 되는 것을 올리겠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그럴 리가요. 언제나 폐하의 옥체가 상하실까 그 걱정 뿐인데요. (...그때 수풀 너머로 본 이가 저 노신에게 전한 것일까? 수상한 모습을 목격했노라고. 하지만 늘 마주하던 전달자도 분명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했는데... 잠들기 전 머리를 헤집어 놓던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고, 술렁이는 가슴을 꾹 누른다. 허나 이 모든 것이 변명이라면 어쩌지. 그때에는 이 죄를 어찌 갚을까... ...)
...허나 나라에 오래도록 충성한 대신을 이리 잃으시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옥에 가두시는 것은 어떠하세요?
 
이 연:보라! 화빈이 이토록 짐을 위하고 걱정하는 것을. 그런데 나라의 녹을 먹는 아전이라는 자가 감히 짐의 후를 음해해? (칼집에서 단번에 칼을 빼어들었다. 끓어오른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듯하지 않다.) 옥에 가둔다 한들 제 죄를 깨닫기야 하겠느냐? 이리 괘씸한 자는 팔다리 하나라도 잘라야만 한다. 그것이 합당한 벌이며, 차후에도 본보기가 될 테지!
 
배이화:(성큼 가까이 다가선다.) ...폐하, 마음을 가라앉히시옵소서. 피는 피를 가져올 뿐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더한 명분을 쥐어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팔 하나로 입을 다물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리 간언을 올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폐하, 폐하께서 신첩을 생각하시는 마음을 잘 압니다. 그러니 이리 노하신 게지요. ......허나 폐하께서는 성군이시지 않습니까. 신첩보다 나라를,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번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폐하.
 
이 연:화빈. 비켜서라. 그대의 옷에 피가 튀게 하고 싶지 않다. (싸늘하게 뱉었으나, 당장이라도 목을 벨 듯한 기세와 달리 칼을 쥔 팔을 들어올리진 않는다.) 성군이니 암군이니 관심없다. 짐의 반려를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는 이 있다면 세상의 끝까지라도 쫓아가 도륙할 것이다.
(문득 침묵. 낮은 목소리가 툭 흘러나온다.) 헌데, 빈은 매번 짐을 말리는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화가 나지도 않느냐? (칼날을 아전의 턱 아래에 넣어 얼굴을 반강제로 들어올린다.) 이 자의 눈빛을 보라. 그대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다.
 
배이화:(칼 위로 얹혀진 아전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당신을 위해 간언을 올리는 자를 위해 화를 낼 수 있을까.) ...예,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자를 내버려둔다면,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또 반복될지 모른다. 연의 곁에 있는 동안 계속.) ...다만 목숨을 내걸고서 간언을 내어놓는 자의 말이니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제가 어찌하여 폐하의 잔에 독을 탔다는 것인지. 어떤 증좌가 있으시기에 그리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연유가 궁금해 그럽니다.
...제가 정말 폐하께 해가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집니다.
 
아전:(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위축되거나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다. 연만큼이나 화가 난 듯하고, 그 배로 절박해 보였다.) 폐하! 소신 똑똑히 보았나이다. 화빈께서 궁궐의 으슥한 곳에서 수상한 자와 밀회를 갖고 무언가가 든 병을 전달받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
화빈께서 궁에 들어오신 이후로 황제 폐하의 총기가 흐려지셨지 않습니까. 부디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들어주십시오! 화빈께서 전해받은 병을 조사해 주기라도 하십시오. 필시 그 안에―
 
이 연:닥쳐라! (칼끝을 아전의 목 끝에 찔러넣는다. 어떻게든 힘 조절을 한 건지 목이 단번에 뚫리거나 잘려나가는 일은 없었으나 피부에 박힌 날카로운 검날 아래로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정녕 그 혀를 잘라야 삿된 말을 멈추겠느냐?
화빈, 나의 그대. (그러나 불같이 화를 내던 순간은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화에게 고개를 돌리자마자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진다. 이화가 진심으로 마음 상했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대가 내게 해가 될 리 없지 않느냐. 더 이상 이 자의 지리멸렬한 궤변을 들어줄 필요 없다.
 
배이화:(...그때 수풀 너머로 사라진 인영이 저 사람이었구나. 짧은 상념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끊어진다. 번뜩이는 날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것을 보이면 숨을 쉬는 것마저 잠시 잊어버린다. 연의 목소리가 꼭 저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폐하. 대감이 본 것이 모두 사실이라면요. 어찌 저를 의심조차도 하지 않으세요.
 
이 연:그럴 리 없지 않느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화를 달래려는 듯이.)
나는 사랑하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뿐이었다. 어떤 근거도 변명도 필요없었다.)
 
배이화:(연의 웃는 낯을 보고도 따라 미소 지을 수 없었다. 어설프게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눈까지 가려버린 걸까.)... ......폐하. 이만하면 대감께도 폐하의 뜻이 전해졌을 것이옵니다. ...그만 칼을 거두어주세요, 폐하. ...신첩이 마지막으로 간청하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것 밖에는,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연:일어나시오, 화빈. (황급히 칼을 내던지고 이화를 손수 일으켜준다.) 그대가 무릎 꿇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 고작 저자 하나를 살리자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하는 수 없군. (혀를 차곤 아전에게 뱉듯이 말했다.) 너는 운이 억세게 좋은 모양이로구나. 네가 음해하는 화빈이 무릎까지 꿇으며 너를 구했다. 이후 한 번이라도 그 더러운 입에 화빈과 관한 음해를 올린다면 목이 남아날 일 없을 줄 알거라.
 
아전은 아연한 낯으로 이화와 황제를 번갈아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어나 물러갑니다.
 
필시 죽음을 각오하고 이 자리에 왔겠죠.
 
그러나 제 목숨이 바로 당신에 의해 구해질 줄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이 연:괜찮느냐. 무릎이 아프진 않고? (아전이 나가든 말든 시야에는 오로지 이화뿐이다.)
 
배이화:.....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얹힌 듯 답답한 심장께를 두드리며 느리게 숨을 내쉰다. 지금에도 여전히 제 걱정 뿐인 연을 위해 미소를 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금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읍한 마음 뿐입니다.
 
이 연:그대의 상냥한 성정은 익히 잘 아는 바이나, 그대를 음해하는 자에게까지 고운 마음을 베풀어줄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내가 다 막아 줄 터인데.
(부드럽게 이화를 끌어안았다.) 당연한 바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 곧 나의 소망이고 그대가 내치고자 하는 건 나의 원수나 다름없으니.
내게는 세상의 만물 중 그대만이 유일한 가치를 갖는다.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번들거린다.)
 
배이화:...이런 일로 폐하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될까봐 싫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괜찮다 하시지만요. ...그저 그것이 제 사랑이라 그리 여겨주세요. (그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유일한 품. 그를 향한 마음만큼은 한결같으나, 지금을 둘러싼 모든 것이 심지어는 연마저,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등 뒤로 내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제게는 폐하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만 무사하시면 되어요.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봐도 이제는 간언들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드넓은 궁궐, 황제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후궁.
 
그것이 당신의 위치이나 점점 더 발 디딜 자리가 좁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온갖 간언과 상소들이 당신의 숨을 조여오는 듯합니다.
 
황제의 품에 안겨 있으면, 그의 보호를 믿고 있으면 모두 괜찮아질까요?
 
... 연은 다시 업무를 봐야 하니 이화도 이만 태창전을 나옵시다.
 
배이화:(품에서 떨어져 나오면 이만 표정을 갈무리한다. 여전한 미소만 남긴다.) 제가 또 욕심을 내어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후 태창전을 나선다.)
 
:궁궐의 한 곳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배이화:(남몰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서야 고개를 반짝 든다. 그대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다 솔종루로 걸음을 옮긴다.)
 
물소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솔종루입니다.
 
궁궐에서 연회가 벌어질 때면 솔종루에는 밤에도 빛이 꺼지지 않습니다.
 
누각은 연못가에 놓여져 있으며, 누각 근처의 화단에는 돌담의 아래로 색색의 화려한 모란들이 피어있습니다.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만큼 꽃들이 피어있다면 으레 꽃향기가 나야 정상이거늘…….
 
호숫가의 물내음만 날 뿐 꽃향기는 가까이 가도 맡아볼 수 없습니다.
 
배이화:(자연히 소담하게 피어난 꽃을 들여보다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상하네. 이렇게 하려하게 피었는데도 향이 하나도 없다니. 꼭 가짜처럼. (괜히 꽃잎을 매만져본다.)
 
꽃잎은 싱그럽고 부드러워 의심할 수 없는 진짜입니다.
 
영문 모를 일입니다.
 
꽃잎을 매만지며 화단에 머무르자니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소리의 근원을 쫓으면, 돌담 너머로 이어집니다.
 
궁궐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같습니다. 누가 노래를 하는 걸까요?
 
花開得豔麗 화개득염려
 
宮殿裡的牡丹 궁전이적모란
 
但無濟於事 단무제어사
 
蝴蝶不感興趣 호접불감흥취
 
<교육> 판정
 
배이화: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강행!
 
배이화:(돌담에 기대어 다시 집중해본다.)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화려하게 피었다
…… 속의 모란
그러나 무슨…… 인가
…… 떠난 곳이
 
대강 이런 가사인 것 같습니다. 뭘 의미하는 걸까요?
 
배이화:(......무슨 뜻일까?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뜻을 되새겨보지만 미묘하게 앞뒤가 맞지 않고 가물가물하다.)
(노랫말만 다시 흥얼거리고 말았다...)
 
태창전에서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고, 솔종루의 평화로운 정경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해집니다.
 
그날도 이화는 황제의 저녁수라에 함께하기 위해 양자전으로 향합니다.
 
양자전의 앞에서 이화는 연을 마주칩니다.
 
이 연:화빈. 오후는 편안히 보내고 있었느냐.
 
배이화:폐하를 뵙습니다. ...예, 더할 나위 없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든다.)
 
이 연:(그 웃음에 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금일의 저녁 수라는 그대가 지내는 의영전에서 함께 들고자 길을 나서던 참이었다. 괜찮겠느냐.
 
아뿔싸, 그렇게 되면 저녁수라가 상에 오르기 전에 흑양의 젖을 타려던 이화의 계획에 오차가 생깁니다.
 
수라를 드는 와중 연이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라거나 어떻게든 시선을 돌리게 한 뒤에 젖을 타는 수밖에 없겠네요.
 
배이화:(짧은 고민 끝에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예, 물론입니다.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별달리 눈에 띄는 건 없습니다.
 
이 연:(고개 까닥인다.) 다행이구나. 그럼 어서 가지.
 
이화와 연은 함께 의영전으로 향합니다.
 
굳세고 영묘하다는 뜻을 가진 궁전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는 중전과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의영전의 뒤로 이어진 정원으로 향하면 솔종루가 나오며,
 
의영전의 창을 내다보면 이화의 소원대로 정원의 길목 따라 심어진 죽단화가 기품있는 향을 풍기며 흔들립니다.
 
이화와 연이 의영전 안으로 들어서 자리를 잡자, 수라상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몸종이 따라 들어오는데, 천에 무언가를 싸서 들고 있습니다.
 
배이화:...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연:(기대감 어린 눈으로 몸종과 이화를 번갈아보다 몸종에게 손짓한다.) 걷어보거라.
 
비단 싸개를 걷어내니, 고운 비단과 보석으로 황제만큼이나 화려하고 우아하게 장식된 홍매색 연회복이 드러납니다.
 
옷자락이 치렁치렁하니 길게 늘어지며 자태를 뽐냅니다.
 
이 연:지난번 그대의 치수를 쟀었지. 며칠 뒤의 연회에서 그대가 입을 옷이다. 어떠하냐? 마음에 드느냐?
 
배이화:(선명한 색감에서 그제야 눈을 떼 연을 바라본다.) ...예.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색이 무척 고와요. 늘 이리 마음을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연:마음에 들어하니 짐도 기쁘군. (이화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가 마를 새가 없다. 옷을 들어 이화의 몸에 살짝 대어 본다.) 몸에 맞는 것 같으냐. 너무 크거나 짧으면 수선해오라 이를 터이니.
 
배이화:(잘 보이도록 돌아선다.) 폐하께서 직접 재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맞지 않을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대어 보기만 해도 잘 맞아보이는걸요. ...잘 어울립니까? 이리 화려한 옷은 역시 제게는 과하지 않나 싶어요. (소매를 끌어다 대어보며 올려본다.)
 
이 연:과하기는. 과연 화빈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답게 아주 어여쁘고 잘 어울린다. 화빈이 그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지는구나.
옷과 어울리는 장식도 구해 오라 명해야겠다. (흐뭇하게 바라본다.)
 
배이화:...부끄럽습니다. (비단을 결따라 쓸어보다 퍼뜩 고개를 든다.) 아니에요, 이 연회복만으로도 충분한걸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 연:그러하냐. (어차피 연회 준비를 할 때 시종들이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가득 챙겨 와 꾸며줄 텐데도 괜히 아쉬운 기색이다.)
(시종에게 손짓해 연회복을 다시 내가게끔 한다.) 먼지 한 톨 묻지 않도록 중히 보관하거라.
 
시종이 연의 지시에 따라 연회복을 잘 개어 천에 감쌉니다.
 
연이 시종에게 고개를 돌린 이 틈에, 서둘러 젖을 타도록 합시다.
 
<은밀행동> 판정
 
배이화:
은밀행동
기준치: 60/30/12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시선이 엇나간 틈을 타, 연의 잔에 젖을 섞는다. 고요히 찰랑이는 수면에서부터 오늘 낮의 간언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도 같다.)
 
다행히 연과 시종은 옷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이화를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젖이 탁한 술 사이로 아무런 이질감 없이 섞여들어갑니다.
 
이 연:(시종을 보내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어서 들거라. (먼저 젓가락을 쥐고 먹음직스러운 찬을 이화의 그릇 위로 올려준다.)
 
배이화:...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어서 드시지요. (연의 목소리에 시선을 올려 웃었다가 찬 그릇들을 연에게로 가까이 밀어둔다. 그대로 한 술 뜨는가 싶더니 숟가락 위에 윤기 나는 찬을 얹어 내민다.) 자, 오늘은 꼭 먼저 드셔요.
 
이 연:짐은 그대만 잘 먹으면 된다는데도. (이렇게까지 챙김을 받아본 적은 황자 시절에도 많지 않았으므로 영 어색하지만, 하는 수 없이 내밀어진 숟가락을 받아먹는다.)
태창전에서 나간 후로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느냐? (아전의 목숨을 두고 한 대치는 없었던 일인 것처럼 태연히 물었다.)
 
배이화:그저 제게 몇 없는 낙이려니, 여겨주세요. (그릇 위로 하나 더 얹어두고 나서 입을 뗀다.) 솔종루를 걸었습니다. 담 아래 꽃이 참 화려하게 피었어요. 폐하와 함께 거닐었으면 좋았겠구나, 싶을 만큼이요. 향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은 조금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이렇게 둘만 남으면, 바깥에서의 일은 온통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폐하께서는 그 후로 별일 없으셨지요?
 
이 연:그렇다면 짐은 그대를 배불리 먹이는 걸 낙으로 삼고 살아야겠군. (웃으면서 이번에야말로 이화가 먹을 수 있도록 그릇 여러 개를 가까이에 놓아준다.) 어떤 꽃이 피었던가? 그대가 좋아하는 꽃을 심어두라 명했던 것도 같은데.
별일 없었다. 정무는 거진 마무리하고 왔으니. 그대가 부탁했던 땅도 소수민족에게 하사하였고 말이야.
 
배이화:폐하께서 기뻐하시도록 더욱 성심을 다해야겠습니다. (농담처럼 가벼이 웃는다.) 솔종루에 핀 건 모란이었습니다. ...예, 그런 말씀도 하셨지요. 그래서 정원에는 죽단화가 잔뜩 심겨있고요. 노란 꽃송이가 꼭 폐하의 눈동자를 닮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에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잊지 않으셨군요, 폐하.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베푸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연:모란의 향이 나지 않던가? 본래 짙고 풍요로운 향을 지닌 꽃일 터인데. 정원사가 일을 허투루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잡아다 경을 치는 게 어떻겠느냐? (제 눈을 닮아 좋아한다는 말에 표정이 눈 녹듯 부드러워진다.) 나는 그대에게 모자란 부군일 터인데도…… 나의 눈동자 색을 닮아 좋아해주는 것인가.
고개 숙이지 말거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 화빈의 부탁이라면 얼마나 어렵고 고되어도 들어줄 것이다.
 
배이화:그래서 이상하다 생각은 하였으나... ...(끄덕이다 말고 우뚝 멈춘다.) ...아. 아닙니다, 폐하. 모란이 흠뻑 핀 덕에 적적한 마음도 달래고 좋았는걸요. 특이한 노래를 듣기도 했고요. (다시 허튼 생각으로 흘러가지 않게 뺨을 쓸며 마주 환하게 웃는다.) 예, 은은한 향은 또 얼마나 오래 남는지 꼭 마음에 듭니다. 모자라기는 커녕 분에 넘치지요.
폐하께는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할지.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위인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큰 마음을 받을까요. (다시 한 술 크게 떠 내민다.) 그러니 이런 것이라도 마음껏 하게 해주시어요.
 
이 연:화빈의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지만. (이화의 환한 웃음에 정신이 팔려 처벌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금세 자취를 감춘다.) 그렇다면 내가 명하는 대신 그대가 조경에 신경을 쓰라 일러두는 게 좋겠구나. 오로지 그대 눈에 어여뻐 보이기 위해 단장시킨 정원이니.
그대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았는가. 은혜를 갚겠다거나 분에 넘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마음 편하게 누리거라. 내가 바라는 건 그대의 행복뿐이니. (그러면서 숟가락을 쥔 손의 방향을 그대로 이화의 입가로 돌린다.) 식사를 잘 챙겨 건강해야 행복 또한 누릴 수 있는 것이겠고.
 
배이화:정원사를 만나게 되면 꼭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끄덕이다가, 그대로 다시 돌아 눈 앞으로 온 숟가락을 보면 결국 또 웃고 만다.) 예, 그것 또한 명심하겠나이다. (한술 가득 들어찬 입대신 눈을 접어 웃음을 대신했다.)
 
이 연:(이화가 가득 뜬 술을 먹자 그제야 만족하는 기색이다. 그는 제 그릇을 비우는 대신 술잔을 들어 입안에 흘려넣었다.) 내 오늘은 어디에서 밤을 보내면 좋겠느냐? 화빈, 그대의 마음을 말해 다오.
 
배이화:(잔이 비는 것을 가만 눈에 담는다. 반역의 이야기도 있었거니와 오늘 낮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양자전으로 드시지요. 필요하시면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이 연:짐은 언제나 그대가 필요하다만. (희미하게 웃곤 이화를 한 번 꼭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정원을 만들어달라 하면 그리 하지. 저 먼 서역의 꽃을 구해와달라 하면 직접 말에 올라서라도 구근을 얻어오겠다. 화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주지 못했으니 이렇게나마 마음을 달래주고 싶구나.
 
배이화:폐하께서 하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를 얼마나 기쁘게 하시는지 모르시지요? (금세 떨어진 온기가 아쉽다는 듯 품에 고개를 반쯤 기댄다.) 그 일은 더 마음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으니까요. 폐하께서 꽃을 찾으시느라 멀리 가시면 저는 혼자 남아 무얼해요?
(꿈 속의 장면을 읊듯이, 잔잔하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진다.) ...차라리 아주 나중에, 저 먼 서역으로 같이 가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온 들판이 꽃으로 뒤덮여 꼭 커다란 정원처럼 보이는 그런 곳이 있겠지요? 그런 곳을 오래도록 거닐며 폐하를 닮은 꽃과 신첩을 닮은 꽃을 번갈아 찾아보아도 좋겠습니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바라보고, 낮게 웃었다.) ...농입니다. 아시지요? 당장 말이라도 대령하라, 명하실까봐서요. 정원에 가득한 죽단화 길만으로도 충분해요, 제게는.
 
이 연:짐이 미리 꾸며 둔 정원을 노니는 게지. 화관을 만들기도 하고, 사슴이나 토끼 같은 무해한 동물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말을 타 거닐어도 좋을 터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정원이라면 돌아보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리지 않겠느냐?
(이화의 어깨를 감싼 채로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그려본다. 면류관과 곤룡포를 벗어던진 평범한 필부의 모습인 자신을. 그 곁에서 소박하고 쇄탈하게 웃고 있을 이화를.) 나는 그대가 화려하고 웅장한 궐에서 부족한 것 없이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허나 듣자 하니 그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왕위 따위 내려놓고 그대와 먼 곳으로 떠나 단둘이서 평온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 말이다……
물론 그러자면 왕위를 물려줄 이가 있어야겠지만. 그대가 아이를 낳느라 고생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 어디 허우대 멀쩡한 놈 하나 튀어나오면 좋겠구나.
 
배이화:...하시는 말씀만 들어도 좋습니다. 허나 혼자 그 큰 정원을 거닐다 길이라도 잃으면 어쩝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내어주신대도, 역시 혼자서는 싫습니다.
(호선으로 내리 감긴 눈꺼풀 너머로, 너른 들판과 먼 자유를 그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 하여 훌쩍 떠날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폐하께서는 제게 의무는 저버리고 권리만 찾으라고 하십니다. 황실의 후계를 생산하는 것도 신첩의 일인걸요.
 
이 연:(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그대를 혼자 둘 수는 없겠구나. 그대와 나는 원앙 한 쌍과도 같아 서로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신하들은 으레 그리들 말하지. 하지만 나는 싫다.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는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나를 황궁으로 데려와 길러주신 이 소용께서 어찌 돌아가셨는지 아느냐. 선대 황제의 손을 낳다 졸하셨다. …… 그대를 잃을지도 모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런 위험은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아.
 
배이화:(느리게 팔을 뻗어 두 손 가득 뺨을 감싼다.) ......예, 알겠습니다. 폐하께 두 번은 그런 슬픔을 안겨드리지 않겠습니다.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으니, 저는 언제고 폐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언제고 건강하게요. ...그러니 걱정 마셔요. 폐하께서 싫으시다는데 어느 누가 말을 올리겠습니까.
 
이 연:후궁으로서의 책무에 가장 부담을 갖고 있는 건 그대일 듯해 걱정이구나. 짐은 그대에게 추호도 후계를 낳아 달라 바랄 일 없으니 부디 괜한 무게를 가슴에 안고 있지 말거라. (그 손을 감싸쥐며 눈을 내리감았다.)
 
배이화: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겠지요. ...허나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니까요.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끌어도 당신 앞에서는 깃털처럼 날아가버린다. 그 짐을 어디서부터 가지고 왔는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린다. 고요하고 굳건한 낯을 찬찬히 들여보다, 사랑스러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면 여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덜어내겠습니다.
 
저녁 수라를 든 두 사람은 양자전에서 밤을 보내기로 합니다.
 
잠들기 전, 낮에 보았던 아전이 떠오릅니다.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간언을 멈추지 않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망국의 후궁. 폭군의 애첩.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돌이키려 해본들 염족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것입니다. 대신들의 싸늘한 시선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잠에 듭니다.
 
...
 
아침이 되어 황제는 집무를 위해 태창전으로 향하고, 이화는 산책을 할 겸 의영전 뒤쪽 궁중의 정원을 거닙니다.
 
새들은 지저귀고, 계절감 있는 꽃들이 하나같이 당신에게 어여쁨을 받기 위해 울타리 너머로 목을 빼고 있습니다.
 
황홀경 같은 꽃내음이 당신의 몸을 잠식해나갈 때에…….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저 멀리 보이는 꽃에게만 나비와 벌이 꼬이지 않은 것이 눈에 띕니다.
 
이상하죠, 사람을 홀릴 정도로 탐스럽게 피어난 꽃인데 말입니다.
 
배이화:(저마다 색과 향을 뽐내며 피어난 꽃들을 손 끝으로 스치며 지나다,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춘다. 왜 저 꽃만 어떤 나비도 벌도 날아들지 않을까. 저리 아름답게 피었는데... 꼭 아무 향도 나지 않다는 것처럼. 그 꽃이 피어난 곳까지 다가간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니, 이 꽃은 모란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향이 나지 않습니다.
 
솔종루에 핀 꽃들도 향이 없더니, 의영전의 꽃에서도 향이 나지 않네요.
 
나비와 벌이 꼬이지 않은 것은 그래서 같습니다.
 
배이화:(바짝 다가가 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절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솔종루에 핀 모란만 향이 없는 줄 알았더니, 이 곳도 그렇구나. ...정말 이상하네. 왜 모란만 향이 없을까...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으면, 연의 몸종이 급하게 달려와 이화를 찾습니다.
 
"화빈 마마. 황제 폐하께서 마마를 찾으십니다……! 한시가 급하다고……"
 
황제께서 또 말입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당신을 찾아대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흑양의 젖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새삼 실감이 납니다.
 
배이화:...폐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앞장서주시게.
 
"폐하께선 태창전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시종의 뒤를 따라 도착한 태창전, 정화서의 수석 화원이 앉아있는 것이 보입니다.
 
황제의 어진을 그리려던 중인 것 같은데, 왜 이화를 부른 걸까요?
 
배이화:...폐하,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이 연:화빈. (희미하게 미소를 짓곤 손짓한다.) 곁으로 오거라.
 
연은 이화를 자신의 곁에 세우고는 화원에게 명합니다.
 
이 연:듣거라.
목 아래로는 나를 그리고, 목 위로는 화빈을 그리도록 해라.
 
그 해괴망측한 명령에 화원이 단말마처럼 되묻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진 대신 한낱 후궁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용포를 입은.
 
그것은 예절과 법도에 어긋날 뿐더러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배이화:(낯에서 핏기가 싹 가신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아니. 이건 있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연:어허. (우물쭈물하는 화원에게 미간을 좁힌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화빈. 긴장할 것 없다. 이 황제가 된 것처럼 편하게 있어도 되느니라. (달래듯 말했다.)
 
배이화:(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 되어 저와 별 다를 바 없는 화원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숙인다.) 한낱 후궁에 불과한 제가 어찌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황제 폐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명을 거두어주세요.
 
이 연:황제인 내가 그대를 지극히 사랑하니, 그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도 별반 다를 바 없지. (뜻을 굽힐 기미가 없어 보인다.) 나는 사연국의 황제였다고 기록 속에 남아 있겠지만 그대는 나의 후였다는 기록 한 줄만으로 정리되고 말겠지. 나는 그대를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기고 싶느니라.
 
배이화:(이 자리에. 아니, 이 나라에 연을, 황제를 말릴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이 지금만은 아쉬운 일이 된다.) ...폐하의 뜻은 마음으로 백 번이고 이해하나, 어찌 제가 감히... (뜻한 바는 반드시 이루곤 했던 연의 눈동자를 올려보면, 결국 그의 뜻대로 되리라. 저편으로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굳은 체 선다.)
...초상화가 완성된다면 그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으실 것이지요?
 
이 연:(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의아하게 이화를 바라본다.) 황궁에 걸어둘 어진이다. 길이길이 남아, 모두에게 이번 대의 황제가 그대라 알려지겠지. 그대가 이 사연국의 황제나 다름없어지는 것이다. 그림으로나마 화빈에게 세상을 줄 수 있다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자, 어서 그리거라. (화원에게 명령했다.)
 
이화의 만류에도 연은 굴하지 않고, 결국 화원이 붓을 듭니다.
 
시간이 지나 마침내 어진이 완성됩니다.
 
목 아래로는 황제의 용포를 두르고, 목 위로는 이화의 얼굴을 한 어진이요.
 
화원은 떨리는 손으로 어진을 연에게 건넵니다.
 
연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짓습니다.
 
이 연:보거라. 어떠하느냐? 참으로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니냐?
 
배이화:실력은 출중하나........ (보고도 믿기지 않는 어진을 한참 넋놓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마음에 드세요, 폐하?
 
이 연:그래. 아주 흡족하구나. (흐뭇하게 그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화빈. 그대가 이 사연국의 황제다.
 
화원이 고개를 떨군 채 통탄스럽다는 얼굴을 하는 것은 당신에게만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제 다른 이들은 당대의 폭군을 당신의 얼굴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별 차이는 없겠죠.
 
그는 당신의 것이자 당신은 그의 것.
 
겨우 이목구비의 차이로 그 사실이 바뀌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궁궐 내 한 곳의 조사가 가능합니다.
 
배이화:(저 화원의 얼굴과 이화의 낯에 그려진 것도 별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나, 이미 이루어진 일을 다시 돌릴 수는 없으니. 예를 표하고 정무를 보는 곳에서 물러나 태창전을 돌아본다.)
 
크게 창성하라는 뜻을 지닌 태창전입니다.
 
궁궐의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태창전은 제왕의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어느 전각보다 크고 웅장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이화와 연의 혼례식도 이곳에서 치뤄졌었죠.
 
후궁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뤄졌던 혼례였습니다.
 
전각을 돌아다니다 한켠에 마련된 침실로 향하면,
 
한켠에 놓인 [새장]이 보입니다.
 
배이화:(미묘하게 밝아진 표정으로 새장을 들여다본다.)
 
새 한 마리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장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금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7년 전 숲 속에서 연에게 도움받은 당신이 감사의 표시로 보낸 귀한 새가 아닌가요.
 
7년이나 지났으니 아마도 그 새들이 새끼를 친 모양이지요.
 
한 마리만 낳은 건지 다른 새끼들은 모두 죽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홀로 새장 안에 갇힌 모습이 일견 쓸쓸히도 보입니다.
 
연은 새를 애지중지 돌봐온 모양입니다. 황위에 오르기 전의 시절부터 지금까지.
 
배이화:...안녕. 혼자 외롭지는 않니?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장에 놀라기도 잠시, 졸고 있는 새를 들여다본다. 알아들을 리도 없을 텐데, 괜히 인삿말을 건네면서. 연과 처음 만난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라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폐하께선 이 날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실까. ...잊지는 않으셨을까. (괜히 새장을 손 끝으로 톡, 건드려본다.)
 
이화가 말을 걸자 새는 눈을 뜨더니, 맑고 청초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새장에 머리를 부빕니다.
 
당신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요.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황제께서 보시고 난 뒤 분노하여 구석에 팽개쳐둔 것을 내관이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구석에 처박힌 [상소문] 하나가 눈에 띕니다.
 
배이화:(검지만 새장 속에 살짝 집어넣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나서 구석에 있던 상소문을 집어든다. ...심기가 불편하셨던걸까. 왜 이것만 여기에 남았담.)
 
상소문을 읽고 나자, 작은 칠기상 위에 올려져있는 [서적]이 눈에 띕니다.
 
상소문과 함께 올린 책일까요?
 
배이화:(...자신을 구해주고 보살펴 준 이들인데. 상소문을 읽어내려가는 표정에 점점 심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상소문을 접어두고, 놓인 서적을 펼쳐본다.)
 
<교육> 판정 (어려운 성공 이상)
 
배이화: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한번만 다시해볼까
 
배이화:(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집중해본다...)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집중해 살펴보니 사연국이 아닌, 전쟁에서 패하기 전 염족이 속해있었던 타국의 역사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적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당신이 여지껏 도왔던 이들이 이런 이들이었나요?
 
서적을 모두 읽은 이화, <이성> 판정 (0/1)
 
배이화:
정신
기준치: 65/32/13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배이화:(...어찌하여. 혼자가 된 자신이 겨우 기대어 살 수 있는 가족같은 이들이었는데. 가슴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태 제가 해온 일들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연을 망가트리는 일이었다면... 의심이라는 조그만 불씨가 점점 몸집을 키워 다 삼켜질 정도로 흔들린다.)
 
역사서의 내용이 불러일으킨 의심에 사로잡히기도 잠시,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이 뇌리를 스칩니다.
 
하필이면 오늘은 염족의 전달자와 밀회가 있는 날입니다.
 
하필이면, 역사서를 읽은 참에…… 썩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배이화:(마음이 어지러운 탓에 입안이 쓰다. 글자가 다 닳을만큼 서적을 내려보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나가지 않는다면 괜한 의심을 사 일이 틀어지거나 더 커질지도 모르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밀회 장소로 향한다.)
 
느린 걸음으로 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달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달자:다시 뵙습니다, 마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별고 없이 평안하셨는지요.
 
배이화:......예, 한결 같습니다.
 
전달자:다행입니다. (흑양의 젖을 건넨다.) 마마 덕에 만주의 들판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염족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저희 일족 모두 마마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입지를 위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 붉은 학이 용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매 국가의 존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배이화:...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만주의 들판을 얻었음에도 여전히 이 젖이 필요할까요? (망설이듯 아주 느릿하게 받아든다.)
...입지를 위협하는 이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전달자: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건 마마께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내리깐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설명을 완곡하게 돌려 거절한다.) 이는 화빈 마마의 안위를 위하는 일이기도 하니, 반드시 잊지 마십시오.
 
배이화:...허나- (이 젖으로 얻어낸 마음이고 총애라고 하면, 거짓이며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입 안에서 맴돌던 것은 말이 되지 못하고 삼켜진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그래요, 꼭 전하겠습니다.
 
전달자:예.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마.
 
전달자가 먼저 물러납니다.
 
당신도 이만 의영전으로 돌아갑시다.
 
배이화:(한숨과 함께 돌아서서 의영전으로 향한다.)
 
의영전으로 돌아가는 길, 연의 몸종이 오늘의 저녁 수라는 희문정에서 들자는 어명이 있으셨다며 전하고 갑니다.
 
요새 황제는 양자전에 머무르는 것을 피하는 듯합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요?
 
그나저나 오늘도 술잔에 먼저 젖을 타는 것은 힘들 것 같으니, 다시 연의 눈을 피해 자리에서 잔에 젖을 타야겠네요.
 
배이화:(...차도가 보이는 줄 알았더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신 걸까. ...악몽이라도 꾸시는 걸까. 품에 숨긴 병을 저 대신 다독여 보다가 희문정으로 걸음을 옮긴다.)
 
희문정에 도달해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연이 시종들을 대동하고 걸어옵니다.
 
이 연:이화. (옅게 미소한다.) 내가 그대를 오래 기다리게 했는가.
 
배이화:(마주 미소 짓는다.) 오셨습니까, 폐하. 아닙니다, 기다리는 시간 마저 즐거운걸요. 어서 앉으시어요.
 
이 연:(천천히 다가와 상석에 앉는다. 움직임이 조금 무겁게도 보인다.) 그래도 영 미안하구나. 다음부터는 먼저 식사를 들고 있으라고 일러야겠군.
 
배이화:혹 어디 불편하세요? (목소리를 낮춰 묻다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안 계신데 어찌 혼자 들겠습니까. 게다가 혼자서는 영 맛이 없습니다.
 
이 연:(입을 다물곤 고개를 천천히 내젓는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잖아도 내명부의 유일한 이로 신경쓸 일이 많을 텐데 괜한 걱정을 더해줄 필요는 없지. 연은 본디 솔직히 드러내는 것보다는 숨기는 데 더 익숙했다.)
(수저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이화의 흰 낯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대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 (평소의 위엄 어린 말투와 달리 격식을 내려놓은 문장이었다.)
 
배이화:...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이시는 곳이 있으면 꼭 말씀해주셔요. 숨기기만 하시면 더 마음이 쓰입니다. (연을 언제나 시선으로 좇는지라 조그만 차이도 금세 알아채지만, 늘 기다리는 것이 먼저라 다급히 보채지는 않았다. 걱정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내걸었으나, 다음 말에는 차츰 흐려진다. 평소와 다른 말투 때문도 있었고, 오히려 자신이 해야할 말이 연의 입에서 나온 탓이다.) 폐하의 승은을 입은 제가 고생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도리어 폐하께서 신첩의 일로 마음 쓸 일이 많으시지요.
 
이 연:나는 황제가 아니냐. 나를 살펴주는 이는 수도 없이 많다. 이화 그대는 나보다는 자기 자신을 신경쓰고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기울이도록.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선 작은 한숨을 내쉰다.) 지금껏 이화 그대가 고초를 겪은 게 벌써 몇 차례인지. 전부 내 부덕이니라. 그런데도 그대는 나를 탓하기는커녕 되려 걱정하고 있으니…… (이런 성격만은, 여전하구나.)
 
배이화:(자신보다 소중한 이를 먼저 신경 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라도 짐을 덜어드려야지.) ...예,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은 노력해보겠습니다. (손등을 덮어 토닥이며 여전한 얼굴로 웃는다.) 폐하께서 이리 성심껏 보살펴주시는데요. 제가 어찌 탓을 할 수 있습니까?
...참, 오래 전 선물 드렸던 새를 기억하세요? 울음소리가 아주 맑은 새였지요.
 
이 연:(손에 와닿는 온기가 마치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볍게 느껴져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왕궁은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기꺼운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화가 있는 곳만은, 마치 그 주변으로 꽃과 풀이 자라나고 햇빛이 비치는 듯 따뜻하고 포근하다. 눈을 가리고 그 안에만 머물고 싶다 떼쓰고 싶을 만큼.) 심성 고운 그대이니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으나, 부탁하마.
새 한 쌍을 받았었지. (천천히 고개 끄덕여 수긍한다. 그러나 그뿐, 별다른 첨언은 없다. 설마하니 이화가 태창전의 침전을 방문했음은 상상도 못한 모양으로.)
 
배이화:기억하시는군요. (어린아이를 품듯 다정하고 조용한 토닥임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이어진다.) ...얼핏 그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 긴 세월이 지났으니, 그 새들은 남아있지 않겠지만 꼭 오래 전 그 날이 생각났습니다. (행복한 추억에 잠긴 듯 환한 낯으로 올려본다.) 분명 황금 새장에 두고 소중히 여겨 주셨겠지요? 지금 제게 주시는 마음만큼이요.
 
이 연:…… 새장을, 보았느냐? ('황금 새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이 살짝 커진다.)
 
배이화:(답 대신 고개를 숙인다.) ...염려되는 마음에 감히 침전에 들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이 연:아…… 아니. 무례하다 꾸중하려던 건 아니었다. (고개를 급히 내젓는다. 그리곤 시선을 피한다. 어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발견할 거라곤 미처 생각도 못 해서. 네가 준 새들은 오래 전 죽었지만, 다행히 새끼 하나는 살아남았지. 내관과 나인들더러 잘 돌보라 명하고는 있다만.
 
배이화:(눈만 들어 힐끔 올려보다 비껴나가는 연의 시선을 보고선 결국 환하게 웃어버린다.) 예, 하나라도 살아남아 다행입니다. 언제고 잊지 않아주신 것도요. (한 쌍의 새도, 옛 추억도, 자신도.) 폐하께서 이리 사소한 것까지 마음을 써주시니. 고초를 겪을 틈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연:……. (잊지 않았다는 말에 부정하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설명이나 매끄러운 화술을 선보이지도 못한다. 변방의 왕자였던 지금이나 황제가 된 지금이나 말솜씨가 좋지 못한 건 여전하다. 다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하관을 가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대가 보기에 흡족했다면 그걸로 됐다. 그럼에도 그대가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단 생각은 변치 않는구나.
일단은 식사를 들도록 하지. 기껏 준비된 음식이 다 식겠구나.
 
배이화:예. 폐하께서도 얼른 드셔요. 시장하시겠습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작게 소리내 웃었다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끄덕이고는 수저를 들었다.)
 
이화, 술에 젖을 탄다면 <은밀행동> 판정
 
배이화:
은밀행동
기준치: 60/30/12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연의 시선이 식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젖이 든 병을 쥐는 게 제법 티가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는 그저 술병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귀한 반찬을 이화의 그릇에 올려주기 바쁩니다.
 
이 연:수라간의 나인이 말하길, 오늘은 저 멀리 서역에서나 구할 수 있는 귀한 나물 반찬을 올렸다더구나. 그대는 고기보단 채소 반찬을 좀 더 선호하는 편이지 않은가?
 
배이화:(...티가 났으려나. 온종일 본 것들이 많아서 인지, 생각이 많아진 것이 꼭 행동에서 드러난다. 병을 탁자에 멀리 두며 웃음으로 무마한다. 복잡한 마음도 가릴 겸.) 예, 이렇게 마음 써주시니 기쁩니다. 꼭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해요. (처음 보는 나물을 집어 연의 그릇에도 먼저 올려놓고 나서야 한입 넣는다. 오물오물 삼키고 나서 방긋 웃었다.) ...폐하께서 주신 것이라 더 맛있습니다. 어서 드셔 보세요.
 
이 연:맛이 괜찮느냐. (먼저 먹어도 괜찮을 텐데 꼭 제 그릇에도 놓아 챙겨주려는 모습이 참 이화답다. 못 이기겠단 듯 고개를 살풋 내저으면서도 나물을 따라 입안에 넣는다. 무엇이든 잘 먹는 그답게 입안에 퍼지는 신선한 향기가 나쁘지 않다.) 음, 맛이 괜찮구나. 몸에도 좋은 나물이라고 하니 좀 더 많이 구해 오라고 해야겠다. (이 역시 저보다는 이화를 신경써서겠지.)
나의 침전에서 새장을 보고, 또 무얼 했느냐? (일과를 묻는 목소리는 자연스럽다.)
 
배이화:폐하께서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연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는 만족스럽게 끄덕인다.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모습을 보면 절로 마음이 흐뭇해지고 이미 배가 부르는 듯 하다.) 어지러운 것들을 조금 정리해두었지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뗀다.) ...그리고 의영전으로 돌아가는 길을 조금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들은 이야기가 있사온데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어. (잠시 말을 끊으며 올려본다.)
 
이 연:무엇이 그대를 어지럽게 했지? (평소에는 금세 폭발할 불길처럼 불안하고 탁한 목소리였으나, 지금은 그보다 훨씬 부드럽다. 살의와 분노 대신 이화를 향한 걱정만이 기저에 깔려 있다.) 의영전에서 불온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느냐? 기탄없이 말해 보거라.
 
배이화:(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다. 차라리 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해결되지 않을까. 그러나 말 대신 다정한 손길과 표정으로 뺨을 어루어 만진다.) 이리 걱정부터 하시니 섣불리 말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 어찌하면 폐하께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을까, 그 생각이어요. ...어찌 보면 신첩은 혼자가 아니라 염족의 운을 짊어진 셈이니, 그것에 폐하께도 짐처럼 느껴질까 봐서요. (염족의 원으로 이곳에서 당신을 해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손 끝으로 눈 밑을 어루어 만지다 손을 거둔다.)
...... 숨어 들은 지라 그 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붉은 학이 용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매 국가의 존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연:이화. 그대는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힘이 되고 있어. 그것만은 진실이다…… 한 점 거짓 없는 진심이다.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며 뺨에 닿는 이화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감싸쥔다.) 또한, 짐이 된다 여긴 적도 없다. 그대의 걱정과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은데, 외려 짐만 얹어주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이화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를 테지. 떨어져 있는 동안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두 사람은 거의 털어놓지 않았으니까. 혼례를 올리자마자 광기에 물들며 왕궁을 피로 적신 반 년이었다.)
…… 붉은 학이라. (낯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한 끝에 입을 연다.) 걱정 말거라. 내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배이화:...폐하와 저는 어째 이런 마음까지 닮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단단한 온기에는 절로 호선이 그려졌다. 둘 사이에 쌓인 마음만큼이나, 풀어내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큰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 모순적이나, 할 수 있는 것은 후에 무자비한 상처로만 돌아오지 않기를 겨우 바라는 것 뿐. 그러다 어두워진 낯을 보면 덜컥 겁이 난다.)
......폐하께 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옵니다. 부디 옥체를 보중하세요.
 
이 연:어쩌면 그러할지도 모르지. (선선히 인정한다.) 닮았기에 부부가 되었거나, 부부가 되었기에 닮았거나…… 무엇이 먼저인지 구별하기 어렵구나. (서로를 지극히 아끼고 위하기에 되려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평소의 태도만 보더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의심할 바가 없을 터이나 발밑의 골이 점점 더 넓고 깊어져가는 듯한 감각은 어째서일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허나 혹시 모르니 미리 일러두는 게 좋겠군.
내가 떠나라고 명한다면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배이화:(그의 앞에서만 보이는 환한 낯 저편에 한 조각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은 연과 같은 감각에 빠져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 폐하께서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순순히 끄덕이던 고개가 천천히 멎는다) ...저 혼자 말입니까? 어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연:혼자 갈지, 함께 갈지는…… 그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다. 눈을 내리감았다. 짧은 침묵. 그 사이로 새 한 마리가 서글픈 소리로 길게 우짖는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틈을 타서 다시 젖을 타 봅시다.
 
<은밀행동> 판정. 보너스 주사위 한 개 드립니다.
 
배이화:(병목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새의 울음 소리가 꼭 제 울음을 대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밀행동
기준치: 60/30/12
굴림: 88, 24, 5
+2: 극단적 성공
+1: 어려운 성공
0: 실패
-1: 실패
-2: 실패
 
연이 눈을 뜨기 전 재빠르게 술잔에 젖을 타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이화가 병을 갈무리하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천천히 눈을 뜹니다.
 
이 연:너무 걱정 말거라. 나는 언제나 이화 널 위한 선택을 하니까. (어쩐지 친근하게 들리는 어조로 속삭인다.)
오늘은 달이 밝아 정취가 좋군. 함께 술을 들겠느냐? (제 잔을 살짝 들어올린다.)
 
배이화:(걱정이 마음 먹는다고 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고 맞았던 것은 연의 말이었으니까. 길게 말을 덧붙이는 대신 마주 잔을 들며 웃음으로 답한다.) ...예, 달이 참 밝습니다.
 
이 연:(찰랑이는 액체를 잠깐 바라보다 단번에 입가로 흘려넣는다.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나는 건 익숙한 모습이다. 황제는 다시 술 한 잔만큼의 '사랑에 빠진다'. 금빛 눈동자가 몽롱하게 깜박이고, 술잔을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 달이,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배이화:(...사랑에 빠진 이의 눈빛이 이리 혼탁하게 가라앉을 수 있을까. 젖을 탄 뿌연 술잔처럼. 연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리던 가슴에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듯하여 더 밝게 웃어 보인다.) ...달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하셨습니다. 저 밝은 닭이 꼭 폐하의 눈동자를 닮았다 말하려던 참이었고요. (손을 뻗어 연의 낯을 쓸어내린다.) 기억이 나세요?
 
이 연:아, 그래. 오늘은 달이 참으로 밝군……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야.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듯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는다. 지존다운 위엄은 없으나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당당한 풍채와 위협적인 체구는 가려지지 않는다.) 나의 눈동자를? 아니, 아니지. 나보다는 화빈의 미소를 닮지 않았는가? (낯을 쓸어내리는 손을 가볍게 낚아채고는, 손목 안쪽의 살결에 입술을 묻는다.) 그대가 짐을 향해 웃어줄 때면 보름달이 쏟아지는 듯하니 말이다.
 
배이화:(간질한 기분이 손끝까지 번져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가 낮은 웃음이 된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날 것 같은데, 또 저를 향한 사랑은 지독하게도 좋아서 이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저를 달에 빗대는 이는 폐하가 유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어디에 계시든 늘 눈으로 좇고 싶은 마음이니 그만큼은 하늘의 달을 닮았겠어요.
(성큼 가까워진 만큼 몸을 기대어 거의 반쯤 올라앉은 상태가 된다. 누구든 지금의 이화를 본다면 무엄하다 할 테지만, 이미 망국의 후궁이자 폭군의 애첩이라 불리는데 무서울 것은 또 무엇일까.) ...허나 폐하께서는 품이 너르시니 보름달마저도 온전히 안아주시겠지요?
 
이 연:나를 달에 비유하는 이 또한 화빈이 유일할 테고. (정자에 깔리는 달빛만큼 흐붓하게 미소한다. 한 팔로는 이화를 끌어안듯 받치고, 반대쪽 팔로는 머리칼이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리고 감싼다.)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 얼마든지.
위층에 욕조를 준비해두라 일렀다. 식사도 마쳤으니 함께 달빛 아래에서 목욕이나 하지 않겠느냐.
 
배이화:(정자를 비추는 달은 연의 미소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화의 눈에는 오로지 품에 다 안기도 벅찬 연, 제 세상만이 비친다. 사랑은 시야를 아주 좁게 만들었다. 고개를 폭 박으며 끄덕인다.) 네, 그리하여요.
 
연은 그대로 이화를 안아올려 희문정의 3층으로 올라갑니다.
 
보랏빛 꽃잎이 점점이 떠 있는 거대한 나무 욕조가 놓여있습니다.
 
이 연:(이화를 조심히 욕조 앞에 내려준다. 조용히 뒤따라온 나인들이 겉옷을 한 겹씩 벗겨주기 시작한다. 그들의 손길을 받으면서 이화의 겉옷 한 겹을 천천히 팔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그 이후로는 손길을 멈춘다. 이화의 의중에 따르겠다는 듯이.)
 
배이화:(발이 땅에 닿으면 겨우 벅차게 뛰는 심장이 가라앉나 싶더니, 이어지는 손길에는 더욱 거세게 뛴다. 어째 이런 때마다 매번 처음 닿는 사람처럼 굴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미묘하게 달아오른 낯이 느껴져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멈춘 손을 다시 제게로 끌어다 놓았다.)
 
이 연:(한참은 자그마한 손이 제 손을 끌어당기자 절로 미소가 어린다. 이어서 당의의 옷고름과 치마 고름을 풀어나간다. 대신들 앞에서 칼을 들고 설쳐대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다. 그의 사랑이란 헌신과 수호로 이루어진다. 겉옷을 하나 남기고 모든 내관과 나인을 물렸다. 단둘이 되어서야 전부 벗겨내고 속저고리와 속치마만 입은 이화를 다시 한 번 가볍게 들어올려 함께 욕조 안으로 들어간다.) 춥지는 않느냐? 최대한 빨리 들어왔다만. (물에서는 따끈한 김이 오르고, 단단한 팔로 당신의 어깨를 빈틈없이 감싸고서도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배이화:(우뚝 솟은 바위산이 제 앞에서는 부드러운 시냇물이 되어 흐르는 모습은 아마 언제고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다. 속절없이 뛰는 심장만큼, 살아있는 동안 내내. 얇은 천 한 겹 너머로 닿는 체온이 김이 오르는 목욕물보다 더 따스하게 느껴진다.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가 느슨하게 내려간다.) 내내 품에 안아주셨는데 추울 틈이 어디 있겠어요. ...그저 좋습니다.
(그제야 눈만 살짝 들어 옆선을 따라가다, 괜히 물에 뜬 꽃잎으로 시선을 돌린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시지요? 혹여 고뿔이라도 드시면 큰일이니까요.
(두 손으로 목욕물을 함뿍 떠 연의 어깨 위로 부었다.)
 
이 연:그래도 야외이니, 혹여나 추위를 느낀다면 바로 말해다오. (가깝게 밀착한 채 이화의 체향을 함뿍 들이마시고 온수에 따스해진 체온을 즐긴다.) 짐이 고뿔에 걸릴 것 같으냐? 짐은 어릴 적부터 건강 하나는 타고났지. 아무리 험하게 굴렀어도, 며칠 먹지 못하거나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어도 병을 앓은 적은 없다. (그래도 이화의 걱정이 싫지만은 않다. 물길이 적시는 속적삼 너머로 근육질의 몸이 언뜻 비친다. 따라하듯 물을 떠올려 이화의 어깨나 등을 적신다.)
 
배이화:...예. (당신과 꼭 붙어있어 열이 올라 어지러워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면, 조금은 웃으려나. 희미하게 비치는 살갗이 눈에 들면 괜스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말을 돌리려 더욱 걱정을 늘어놓는다. 어깨에 얹어둔 손을 그림을 덧그리듯 이리저리 움직여보기도 하면서.) 잘 압니다. 워낙에 건강하신 덕에 옥체가 상하실 일에도 거리낌이 없으신 것이 걱정이지만요. (그러는 동안 제 속저고리도 젖어 흰 살갗에 달라붙는다. 등 뒤로 부는 바람에 금세 식어 결국 더욱 붙어 앉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입을 뗀다. 줄어든 목소리가 투정처럼 흐른다.) ...저를 소중히 하시는 만큼, 폐하의 안위를 생각해주세요.
 
이 연:그도 이제는 옛말. 황제란 자리는 짊어져야 할 게 너무나도 많고, 짐의 몸이 곧 국가의 안위와도 같으니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황제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있으니 부디 걱정은 내려놓아 다오. (후끈해지는 몸이 물 때문인지, 틈없이 맞닿아 있는 당신과의 거리감을 인지했기 때문인지 분간이 어렵다. 바람이 이화의 등을 스치고 갈 때면 꼭 물을 떠서 다시 덥혀주기를 잊지 않았다.) 허나 짐보다 그대를 더욱 중히 여기는 건 고칠 수가 없구나. (나직한 목소리와 단단한 팔, 혼탁하되 당신만을 시야에 담는 두 눈.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가득하고 충만하게 사랑을 표현한다. 여린 어깨와 팔을 쓸어주던 손이 문득 이화의 아랫입술을 문지른다. 부드러우나 농밀하기도 한 동작이다.)
 
배이화:...폐하께서 폐하셔서 다행입니다. (이 곳을 비추는 것은 달빛이고 피어오르는 김도 한 겹 있으니,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마주하여도 적당히 묻어갈 수 있다. 더운 물을 주거니 받거니,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겹쳐진 몸도 마찬가지로 은근하게 달아오른다. 말로 다하지 않아도 결국 그가 내비치는 모든 것이 다 사랑이니, 단물에 빠져 헤어 나올 수도 없게 된다. 그를 안은 채 함께 저 깊은 아래까지 빠져드는 것 밖에는. 복잡할 것 없이 서로만을 담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대신 연의 손을 붙잡아 입술 위로 더욱 지그시 눌렀다.)
 
이 연:(이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자면 국정이니 상소니 하는 것들은 모두 아무렴 상관없어진다. 그저 눈 앞의 이와 함께하기만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킬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된다. 아, 사랑이란 시원한 샘물이자 달콤한 독과도 같으니. 제 몸을 해칠 걸 알면서도 들이마시기를 멈출 수가 없다.)
(고요하게 흔들리는 수면 위로 미명의 빛이 이지러진다. 별이 가득한 맑은 밤하늘 아래 한 쌍의 연인만이 있다. 밀어내기는커녕 부추기는 듯한 손짓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을 터다. 고개를 기울여 느릿하게 입술을 겹쳐 온다.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밤이다.)
 
배이화:(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어깨에 겨우 걸쳐진 손은 곧은 목에 단단히 걸린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당신의 숨을 넘겨 받고 제 숨을 내어주며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마치 한 몸처럼 겹친다. ...이 밤이 아주 느리게 흐르기를. 온기가 오래도록 식지 않기를.)
 
그날 호숫가엔 안개조차 끼지 않고 맑습니다.
 
새벽 깊이 올빼미 우는 소리가 만연할 때까지 마음을 속삭이고 사랑을 나눴습니다.
 
따듯하니 김이 올라오는 욕조에서 편백 나무의 향이 아스라이 올라옵니다.
 
...
 
...
 
...
 
아침부터 대궐 안은 소란스럽습니다.
 
여기저기서 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제의 노기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지마다 까마귀가 앉아 웁니다.
 
이화조차 곡하는 소리에 도저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 의영전을 박차고 나와 소리의 근원을 찾자,
 
태창전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이 보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연이 태창전의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어지간히 심기를 거스른 것인지 성노해 고함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입니다.
 
<듣기> 판정
 
배이화: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루가 다르게 소리가 커지는구나.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거슬려 커다란 소리마저도 빗겨나가는 듯하다.)
 
이 연:네놈들이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전형적인 대사입니다. 뒤는 신하들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고하는 소리가 궁궐 전체를 울립니다.
 
어림잡아 오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신하들이 각자 머리를 조아리며 그리 외치고 있습니다.
 
일부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흐느끼기까지 합니다.
 
"화빈은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해악 같은 존재이옵니다!"
 
"폐하, 부디 소신들의 충정을 생각하시어 과거의 어진 성군으로 돌아와 주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배이화:(...진정 내가 물러나기 전까지 소란은 끊이지 않고 저들의 목소리는 높아만 지겠구나. 언제고 반복되는 일에 연에게는 미안한 마음 뿐이다.)
(깊게 숨을 내쉬고는 곧은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 가장 앞에서 돌아선다.) 다들 떼로 몰려와 폐하의 심기를 이토록 어지럽히십니까.
(그리곤 천천히 돌아 연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다.) .........폐하, 차라리 저를 내치시옵소서.
 
이화가 앞으로 나아가자, 당신을 발견한 신하들이 손가락질하며 저주를 쏟아냅니다.
 
"부끄러운 줄 알라!"
 
"나라를 염족에게 팔아먹고도 자리를 보전하길 바라는가!"
 
이 연:닥쳐라.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용암처럼 끓던 분노가 결국 폭발한다.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태창전 앞뜰 전체에 진동한다.)
(마구 솟구쳐대는 감정을 어떻게든 갈음하려는 듯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 화빈. (마침내 소름끼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차적인 막을 내렸을 뿐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아주 약한 바람만 불더라도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도록 커지겠지.)
이자들의 말을 들었나 보군…….
어찌하여 화빈까지 이 개돼지 같은 작자들의 말에 동조하는가? 나의 총기를 흐린 자는 그대가 아니다. 누명을 씌우려는 저 간악한 혓바닥들에 당해주지 마라.
 
배이화:......폐하. (그 동안 몇 번이고 떠올렸으나 되삼켰던 말을 기어이 꺼낸 것을 순식간에 후회하고 만다. 끝까지 제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텨야만 하는데, 그저 상처만 준 것은 아닐까. 그러나,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라.) ...신첩이 이 곳에 있는 한 지금과 같은 일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옵니다.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시어, 옥체마저 상할까 두렵습니다.
대신들의 말이, 누명이, 진실과 거짓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아주시옵소서. (...저들에게는 지금의 자신이 말마저도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달콤한 말로 황제를 치마 폭에 감싸려는 듯, 얼마나 간악해보일까.)
 
이 연:그만. (한 손 들어올린다.) 그만하시오.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건 화빈의 잘못이 아니오. 그대가 정녕 짐을 걱정한다면 그리 말해선 안 돼. 그런 말을 해서는……
(삽시간에 칼날을 빼든다.) 모든 게 신하라 불러주기에도 아까운 이놈들 때문이다. (그리곤 이화가 미처 막아서지 못한, 줄 끄트머리에서 읍소하던 노신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린다. 결코 이화의 앞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거늘, 불길 같은 분노가 끝내 그 자제력마저 살라먹었다. 새빨간 피가 튄다.)
(피가 뚝뚝 흐르는 무겁고 거대한 칼을 어깨에 걸친다. 용포로 곧장 피가 스며들어간다. 사연국에서 가장 존귀하다 칭송받는 자 이연은 이 순간 한 마리 들짐승마냥 거친 숨을 내뱉으며 좌중을 훑는다.) 화빈을 모욕하는 건 곧 나를, 이 짐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그 사실을 모르느냐?
이 자리에 작정하고 몰려든 건 죽을 각오를 했단 뜻이겠지. 그대들의 원대로 해주마. (다시금 칼을 앞으로 뻗는다. 오십여 명의 신하를 정말로 싸그리 죽일 기세다.)
 
배이화:...폐하...!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섬뜩한 소리와 광경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간다. 소리가 사라진다. 그러나 넋을 놓고 있을 틈이 없다. 하나를 베어내고도 그칠 생각이 없는 그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체통이니, 생각할 틈도 없이 연에게 달려가 그의 소매를 붙잡는다. 바닥에 고인 피에 치마 끝자락이 붉게 물드는 것도 모르고, 흰 손가락이 더욱 창백하게 굳을 만큼 힘주어 제 쪽으로 당긴다.)
폐하..! 폐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들을 모조리 베어 낸다 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자들이 이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되려 저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저를 위해서라도, 저를 봐서라도 부디 이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폐하, 제발...
이들을 모두 벌하시면 신첩, 죄책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 (용포에 이미 스며들어 지워지지도 않는 핏방울을 제 소매로 닦아내며 간절히 붙잡는다.)
 
이 연:(칼을 높이 들어올리려다 멈칫한다. 무거운 칼날을 수족처럼 다루는 그의 힘이라면 이화의 미약한 손길 따위 단번에 쳐낼 수 있었겠으나, 그가 어디 사랑하는 이에게 거칠게 굴 사람이던가. 미간은 여즉 분노로 인해 험하게 구겨져 있었으나 칼을 든 팔에선 힘을 빼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칼을 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마시오, 화빈. 그대에게 위험해. (이 지경에 와서도 오로지 당신 걱정뿐이다. 방금 자신이 목숨을 앗아간 이에겐 쌀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다. 사람의 목숨이 그에겐 파리 한 마리 목숨과 다를 바가 없다. 언제부터 이리 되었을까? 무술과 사냥에 뛰어난 재능이 생명을 경시한다는 뜻과 결코 동일하지는 않는데도…….)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 보거라. (가신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린다. 황금빛 눈이 형형하게 번뜩인다.) 그대들이 모함하는 화빈이 이토록 간절히 목숨만은 살려달라 빌고 있지 않는가? 정녕 화빈이 해악과 같다면 나를 부추겨 목을 죄 쳐달라 부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네놈들은 어째서! (호통친다.) 어째서 화빈을 물어뜯지 못해 이리 안달이 났느냔 말이다.
다시 한 번 이따위로 나와 화빈을 모욕하였다간 네놈들뿐 아니라 네놈들의 일가친척까지 씨를 말릴 것이다. (칼을 바닥으로 내던진다. 챙강- 소름끼치는 소음이 인다.) 썩 꺼져라!
 
금군들이 들어와 대신들을 태창전 뜰에서 끌고 나갑니다.
 
불길하도록 까마귀가 울어 짖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노신에게서 흐른 피웅덩이를 밟은 채 연이 이화를 끌어안습니다.
 
이 연:(손이나 얼굴에 튄 피가 이화의 옷깃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를 품안에 가득 안는다. 어쩌면 가두는 것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황금 새장 속의 새처럼.)
화빈, 그대가 내 세상이다.
일백, 일천 신하의 목숨을 거둘지언정 그대를 내놓지는 않으리라.
 
그 모습은 어쩐지 폭군이라기보단, 당신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가련한 어린 짐승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화는 연의 세상입니다. 이화는 연의 나라입니다.
 
그를 실감하고 있습니까?
 
배이화:(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다. ...아니,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이런 걸까. 순식간에 고요해진 뜰에 그저 조용히 팔을 뻗었다. 어쩐지 가여운 등을 마주 끌어안고, 쓸어내리고, 도닥인다. 칼 하나로 세상을 갈라버릴 듯, 사람 하나의 생명을 눈 깜짤할 새 끊어 놓았는데도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다. 제 발목을 붙잡아 새장에 가둬 놓는다고 해도, 목을 죄인다고 해도,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연의 눈에 담긴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고 분명 앞으로도......
그러니 연이 그렇듯, 이화 역시 물들고 번지는 피는 안중에도 없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을까. 어찌 해야 할까. 복잡한 마음에도 쓰담는 손길만은 한결같이 다정하다.) ......예, 폐하. 방금 제가 한 말은 잊어주셔요. 제 세상도 오직 폐하십니다.
 
이 연:…… 후후. (웃는다. 목석처럼 표정이라곤 없던 황제가.)
후후후, 아하하하. (무언가에 걸린 듯 묵직하고 탁한 웃음소리가 단둘만의 세상에 울려퍼졌다. 사랑이라는 광기에 목매였으니 숨 끊어질 때까지 벗어날 수 없으리라. 제 발로 벗어나는 일 역시 없으리라. 이렇게나 기꺼운 것을. 품에 안으니 이토록 흡족한 것을 왜 놓겠는가. 숨통이 천천히 조여오는 줄도 모른 채 기뻐하는 꼴이란.)
 
다른 금군들이 와서 대궐 안을 치우고, 연은 다시 태창전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와중에도 정사는 보아야 한다나요.
 
이후 저녁에는 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연회라니.
 
하지만 취소해 달라 부탁해본들 당신을 위한 연회를 파할 일은 없겠지요.
 
연회복으로 갈아입기 전에 궐 안을 돌며 심란한 기분을 정리하는 건 어떨까요.
 
두 곳의 조사가 가능합니다.
 
배이화:(일단락이 되고 나서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린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려야지. 움직여야지. ...걷기라도 해야지. 그래야지. 중얼중얼, 혼자 되새기다 고개를 털어내며 고민하던 걸음을 백서전으로 옮겨간다.)
 
백 개의 글이라는 뜻을 가진 백서전입니다.
 
황제가 실질적으로 정사를 보는 건물로, 이곳에서 황제는 신하들과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크고 작은 나랏일을 처리합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양각으로 새겨진 책상 위에는 여러 [문서]들이 놓여있습니다.
 
배이화:(망설이듯 책상 모서리를 손 끝으로 매만지다 위에 놓인 문서들을 펼쳐본다.)
 
꽤나 바르고 정갈하게 쓰인 글씨들이 눈에 띕니다.
 
대부분이 신하들이 올린 상소 같네요.
 
<자료조사> 판정
 
배이화:
자료조사
기준치: 80/40/16
굴림: 74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중 연이 적은 듯한 종이들을 발견합니다.
 
일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일기는 아닌 것으로, 상소를 확인하는 중간중간 적어내려간 것 같습니다.
 
이건 뭔가요? 마치 당신과의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일기임과 동시에, 묘한 내용입니다.
 
<이성> 판정 (0/1)
 
배이화:
SAN Roll
기준치: 64/32/12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배이화:(주인을 꼭 빼닮은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시선으로 덧그려가며 읽다 보면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연이 꺼내어 놓지 않은 속내를 이렇게 들여다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 연 본인도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은 다 본인이 불러온 재앙이라 생각했는데. ...연, 당신은 대체 어떤 마음을 속에 담고도 그리 굳건히 서있었던 건가요.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서글픈 눈빛으로 종이를 내려놓는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박동합니다.
 
배이화:(심란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려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다. 주체하지도 못하고 뛰는 심장과 달리 숨은 가슴께에서 턱 막혀와서 서둘러 백서전 밖으로 나섰다. ..어디를, 어디로 가야하지. 먹먹한 숨을 몰아쉬다 양자전으로 향한다. 조금이나마 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니까.)
 
자줏빛 바다라는 뜻을 지닌 양자전입니다.
 
양자전은 4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혹시 모르는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평소 황제가 지내는 건물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놓인, 입구가 숨겨지듯 한 건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배이화:(가라앉지 않고 술렁이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당연하게도 연이 늘 머무는 건물로 걸음이 닿는다. 망설임이라고는 없어 이화의 눈에는 꼭 그 곳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바깥에는 난들이 우후죽순으로 심어져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꽃향기가 코 끝에 스칩니다.
 
양자전 안으로 들어서니 폭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내부가 보입니다.
 
금침이 놓인 침전과 [책장] 등이 그나마 눈에 띄는 가구입니다.
 
배이화:(코 끝에 희미하게 남는 난 향이 꼭 연의 품에 있을 때면 저를 꼭 감싸던 그 향과 비슷해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제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과시하고 탐하려 들지 않는 사람인데. 눈가를 꾹꾹 누르고 나서야 책장을 살펴본다.)
 
황제가 자주 읽는 서적들과 문서들을 보관해두는 개인 책장입니다.
 
책장에는 고서부터 논어 같은 기본적인 책들까지 다양하게 놓여져 있습니다.
 
<자료조사> 판정
 
배이화:
자료조사
기준치: 80/40/16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책들 사이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쪽지>
오소 니하 遠代平生애 여힐ᄉᆞᆯ 모ᄅᆞᄋ샙ᆞ
滿殿春
 
무슨 의미일까요? 기억을 더듬는다면 <교육> 판정
 
배이화:(눈에 익은 책들 사이에서 발견한 쪽지를 들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교육
기준치: 65/32/13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착잡하고 혼란스런 마음 탓일지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글자 몇 개의 나열 따위는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어느덧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이만 의영전으로 돌아갈까요.
 
배이화:(...이만 돌아가야겠지. 괜히 흐릿한 눈가를 한번 더 꾹 눌렀다가 돌아나간다. 의영전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다.)
 
...
 
...
 
연회가 벌어집니다.
 
수십의 기생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비단옷을 입고 나비처럼 춤을 추고, 붉은 꽃 같은 천을 두른 채 두 팔을 하늘거립니다.
 
가신 하나 없이 오로지 사치와 쾌락으로만 채워진 연회장은 연과 당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어둔 밤에 물결을 타듯 울려퍼집니다.
 
당신은 오늘도 이 연회를 틈타 연의 잔에 젖을 타야 합니다.
 
배이화:(하늘까지 닿을 듯이 커다란 북소리 때문인지, 더한 불안감 때문인지, 연이 옆에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평소보다 거세게 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꽃들의 군무를 한참 구경하다 음악에 묻히지 않게 몸을 기울여 귓가에 속삭이듯 입을 연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하늘 아래 이보다 화려한 연회는 없겠지요.
(한 뼘 물러난 다음, 희미하게 미소하며 묻는다.) 마음에 드세요? 즐거우십니까?
 
이 연:(목소리를 잘 들으려는 듯 이화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다. 기생들의 춤사위가 꽃 같다지만, 저에게는 이화의 여리고 맑은 목소리가 더 꽃잎처럼 사근하게 느껴진다. 마주 옅게 웃음을 띈다.) 네 마음에 든다고 하니 나 역시 즐겁구나. 연회복이 과연 잘 어울린다, 이화야. 직접 치수를 재고 무늬를 고른 보람이 있다.
 
배이화:...이리 화려한 연회를 여시고는 어찌 저만 보세요. (오히려 그것이 기껍다는 투로 말 뜻에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춤사위를 흉내내듯 넓은 소매를 가볍게 들었다 놓는다.) 폐하께서 일일이 고심해 하사해 주신 것이니 당연하겠지요? 저를 가장 잘 아시는 것은 폐하시니까요. 눈요기도 중요하지만, 요깃거리를 챙기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 하나 드셔보세요. (앞 에 놓인 달콤한 강정 하나를 들어보인다.)
 
이 연:연회를 즐기는 그대가 보고 싶어 주최한 것이니까. (덤덤한 답이 망설임없이 흘러나온다. 소매를 들었다 놓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다. 흥겨운 음악이 한층 흥을 돋군다.) 춤은 얼마나 출 줄 아느냐? 나는 몇 번 배우지 못해 그리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다만…… 그대가 원한다면야 몇 번이고 어울려주지. (강정이 입가에 다가오자 눈이 조금 커졌으나 순순히 받아먹는다.) 음, 달구나. 그대는 이것을 먹겠느냐? (옥춘당을 반으로 잘라 건넨다.)
 
배이화:(입 안으로 사라지는 다과를 보다가 눈을 데구르르 옆으로 굴린다.) ...못하는 말씀이 없으세요. 어렸을 적 책이나 눈으로 배운 것이 다인지라 폐하께 한참이나 못 미칠 것입니다. ...허나, 폐하께서 어울려주신다면 새로이 몸으로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내밀어진 옥춘당을 두 손으로 받아 한입 베어 문다.) ...맛있습니다. 아주 달아요. 차나 술을 곁들이면 더 좋겠습니다.
 
이 연:연회에 술이야 빠질 수 없지. (제 잔에 술을 따른다.) 그대를 위한 차를 준비해오라 이르겠다. 차와 다과를 조금 더 즐기다가 한 곡조 춤추어보자꾸나. 나 역시 배운 것이라곤 검무에 불과하니 실력은 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걱정 말고 편히 즐기거라. (그리곤 시종을 향해 손짓한다.) 벽라춘 잎을 들여왔다 하였지, 그것을 내오거라.
 
연이 시종에게 지시하는 사이 젖을 타 볼까요.
 
<은밀행동> 판정이 필요합니다.
 
배이화:(당연히 응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연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미소가 흐려지다 기색을 감춘다. 그와 자신만을 위한 이 연회는 분명 즐겁기 더할 나위 없을 것인데, 연의 고개가 돌아간 사이 당연하게도 숨겨온 병을 더듬어 찾고 있는 자신에게 한숨이 난다.)
은밀행동
기준치: 60/30/12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평소보다 화려하고 넓은 연회복 소매 덕인지 어렵지 않게 병을 찾아 술잔에 따른다. 두 가지 액체가 익숙하게 하나로 섞여 든다.)
 
연회복 소매에 병을 감추어 자연스럽게 젖을 타는 데 성공합니다.
 
아무도 당신이 무얼 했는지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곧 시종이 뜨끈하게 끓인 벽라춘을 진상합니다.
 
고소하면서도 깊은 향이 참으로 좋네요.
 
이 연:(유밀과를 담은 접시를 이화의 앞으로 가져온다.) 함께 들어보거라.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배이화:(한숨을 환한 웃음으로 덮는다.) 수색이 정말 곱습니다. 꼭 봄같아요. 향은 또 어떻고요. (유밀과를 작게 잘라 입에 넣은 후에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감상하는 듯 눈이 잠시 감겼다가 반짝 뜨인다.) ......조합이 좋습니다. 폐하께서도 들어보셔요.
 
이 연:난 됐다. 이 정도 차야 평소 수라에서도 쉽게 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오늘은 연회의 주인공인 이화 네가 마음껏 즐길 수만 있으면 되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양한다.)
 
배이화:.......같이 즐기시면 좋을 텐데요. 저는 술을 잘하지 못하니. (잔과 연을 몇 번 번갈아보다 소매를 죽 끌어당긴다. 비슷하게 제 몸도 반쯤 일으키더니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쏙 돌아간다.) ........나쁘지 않지요?
 
이 연:음? (이화가 당기는 대로 몸을 기울였다가 별안간 입맞춤을 받는다. 순간 십 대 아이라도 된 것처럼 귀에 열이 오른다. 멍하니 제 입술을 매만지다가 피식 웃어버린다.) …… 그래. 참 좋은 향이구나.
차를 대접받았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다. (이화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일어서서 손을 내민다) 곡조에 맞추어 어울려보자꾸나. (왕이 연회장 가장 높은 곳에서 춤이라니, 체통이라곤 내다버린 짓이지만, 무엇이 문제인가? 제 세상에는 저와 이화 단둘뿐인데.)
 
배이화:(빈 잔을 내려 놓고는 손을 잡고 일어선다. 드넓은 숲 속에서 혼자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을 때, 눈 앞에 내밀어졌던 손과 붙잡았던 손은 크기며 모양새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때와 같은 웃음으로 마주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마신 것은 차 한잔 뿐인데 술 항아리를 들이부은 사람처럼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든다. 음악 소리도 멀고, 제 눈에 담기는 것은 하늘 아래 오로지 연 뿐이라. 맞잡은 손에 온 몸을 맡긴다.) ...폐하의 발이라도 밟으면 어쩝니까? 분위기에 취했거니 용서해주실건가요?
 
이 연:그대는 깃털처럼 가벼운지라 발을 밟아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을 것 같구나. (잔잔히 어린 미소는 당신을 향한 깊은 마음을 투명하게 비춘다. 분노나 혼란 같은, 광기에서 빚어진 부정적인 감정은 이 순간 전혀 고개 쳐들지 못한다. 근심 하나 없는 즐거움과 평온이 온전하게 깃든다. 과연 그는 황제의 그릇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나라 전체를 이끌고 다스리는 것보다야 사랑하는 이 한 명과 지극하게 어울리는 것이 더 행복하였으므로……)
(이화와 한 손을 맞잡은 채로 곡조에 맞춰 발을 디딘다. 춤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스울 정도인, 박자에 몸을 맡겨 어깨를 들썩이거나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아무렴 춤사위의 뛰어나고 부족함 따위가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아닐 테다.)
 
배이화: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깃털이겠습니다. (속내를 감추려 그린 웃음은 연과 함께 할수록 진실해진다. 흉내를 내는 것 만으로 즐거워져 자신도 모르는, 오로지 연만 아는 웃음을 짓게 된다. 연의 몸짓을 보고, 오래 전 보았던 그림같은 춤을 머릿속으로 되뇌어본다. 몸을 쓰는 데 영 재주가 없는데다 난생 처음 춰보는 춤은 엉망에 가깝다. 미묘하게 박자를 벗어나는 가벼운 움직임 정도였으니까. 다만 연의 안목으로 지어낸 섬세하고 고아한 연회복 덕에 약간의 살랑임에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었다. ...어쩌면 완벽하지 않아서 웃음이 나는 걸지도. 음악 대신 웃음이 흐른다. 서로에게만 향하는 시선을 얽고 있자면, 연회도 결국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즐겁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이 연:이화 그대가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화의 몸에 꼭 맞는 화려한 연회복이 살랑일 때마다 만개한 봄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낮부터 밤까지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은 광경이다. 곡조에 어설픈 춤사위를 추다가 이화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번쩍 들어올려 한 바퀴를 뱅그르르 돈다. 연의 검은 곤룡포 자락과 이화의 홍매색 치맛자락이 긴 원을 그리며 보기 좋게 펼쳐진다. 장난스런 눈웃음이 어린다. 아마도 아까의 기습적인 입맞춤의 복수인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깃털은 아마 따로 있는 듯하구나. 이리 가뿐하니 말이다.
 
배이화:..! (기분만 둥실 뜨는가 했더니 정말 발 밑이 떠오르자 연의 어깨를 꼭 붙잡는다. 늘 올려보던 굳건한 얼굴을 이리 내려보니 더 어여쁘고 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길게 휘날리는 옷자락이 화려한 꽃과 같다. 연과 이화, 두 사람처럼 상반되나 반대로 하나인 세상에 둘도 없는 꽃. 결국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어깨를 붙잡은 손은 목 언저리에 감긴다.) 이럴 때면 꼭 제가 폐하만큼 힘이 세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리 번쩍 들어드리기도 하고-... 어떤 위험에서도 당신을 구해드릴 수 있게요.
 
이 연:(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어여쁘던지. 동화에 나오는 선녀가 실재한다면 이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꽃잎을 꾹 눌러 압화하듯 당신의 모습이 제 눈에 박힌다. 아마도 이 순간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하겠지.) 나는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한데도? 물론 이화 그대가 나만큼 강해진다면야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기는 하겠지. (안아올린 그를 보물을 보는 듯 소중히 바라보다가, 조심히 땅에 내려준다.)
 
배이화:물론 폐하께선 제가 아는 누구보다 가장 강하시지요. 언제고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 안에서 가장 빛나는 제 모습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진다. 지상으로 돌아온다.) ...사모하는 이에게는 응당 그런 마음이 드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 연:(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다가 멈칫한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단어가 귓전에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화, 지금……
 
연이 놀란 듯 그 자리에 굳어선 채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습니다.
 
기생 중 하나가 연회장을 뛰쳐나와, 연과 이화가 있는 곳으로 올라선 것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화는 기생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를 발견합니다.
 
기생은 순간 박차고 올라서 연을 향해 돌진합니다.
 
배이화:(다음 말을 기다리며 올라가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다. 시야 끝에 섬뜩하게 반짝이는 빛이 들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홍매색 옷자락이 길게 휘날리며 곧장 연의 앞을 가리고 나선다.)
 
이화, <민첩> 판정
 
배이화: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칼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집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파악하기도 전 발이 먼저 달려나갑니다.
 
이화는 연의 앞을 막아섭니다.
 
갑작스럽게 당신이 나타나자 당황한 기생이 칼을 휘두르던 손길에서 힘을 뺍니다.
 
단도가 아슬아슬하게 이화의 목덜미를 스쳐지나갑니다.
 
만일 당신이 막지 않았더라면 연의 심장이 노려졌을 위치입니다.
 
이 연:이화! (당신을 급하게 제 품안으로 끌어당긴다.)
 
호위무사들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다가 급하게 기생을 포박합니다.
 
기생은 처절하게 절규합니다.
 
“네놈이 나의 가족을 죽였다.”
 
“백성의 피눈물을 뒤집어쓰고도 뻔뻔스레 황제를 자처하는가!”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 네 사지가 찢어질 것이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한 이화를 노려보며 흐느낍니다. 피눈물이 흐릅니다.
 
이 연:지금 뭐하는 짓이지? (당신의 어깨를 두 팔로 거세게 감싸쥔 채 목소리를 높인다. 직전까지 그를 감싸안고 공중에서 길게 돌았던 일은 죄 꿈결이라도 되는 듯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를 가로막다니, 그대가 다칠 수도 있었어!
 
배이화:(서늘하게 느껴지는 목덜미를 더듬어보다 말고 웃어 보인다. 매서운 분위기로 뒤바뀐 이런 순간조차. 연의 목소리가 여전히 힘이 있음에 안심해서일지도 모른다. ...나서지 않았다면 당신은 정말 목숨이 위험했는데도.) ...언제고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지 않았습니까. 어떤 위험에서도 당신을 구해드리고 싶다고도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 연:…… 다시는 이러지 마라. 다시는. (당신이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세 손을 놓는다. 그러나 금빛 눈은 여즉 형형히 불타오른다.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부로 나선 데 대한 분노가 뒤섞인 불길이었다.) 그대가 구해줄 필요 없었어. 저런 칼날 따위에 질 내가 아니란 말이다.
 
<심리학> 판정
 
배이화:
심리학
기준치: 70/35/14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이화가 아니었다면 그가 다칠 뻔헀는데도, 그는 암살 시도가 일었던 직전의 상황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입니다.
 
이제 와 천천히 되짚어보면, 당신이 그를 구하기 위해 앞으로 막아서는 순간 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었죠.
 
그의 뛰어난 무예 실력과 반사신경이라면 진작에 기생을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도요.
 
이화가 막으려 하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기분 탓일까요?
 
배이화:(타오르는 눈동자를 묵묵히 응시한다. ...어째서?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무예에 전혀 재능이 없는 자신도 먼저 몸이 움직였는데. 당신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꼭 어떻게 되려 했다는 것처럼.) ...왜 그리 말씀하세요. ...정말, 정말 위험했단 말입니다. (...어쩌면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연: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를 잃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으르렁거리며 뱉듯이 말했다. 감정을 추스리려는 듯 몸을 홱 돌린다. 제 이마를 손끝으로 누르며 숨을 고르다가, 잔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술을 따라 놓고 내내 손도 대지 않았던 잔이다.)
 
연은 잔을 잡아들고 잠시 망설이는가 싶다가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 잔을 마셔야만 한다는 느낌을 받은 것처럼요.
 
이 연:소란스럽군. 자객이 나타났으니 연회는 끝이다. 금군은 무엇 하는가? 어서 화빈을 모셔라!
 
연회는 갑작스럽게 종료되고, 황제는 이화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새도 없이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급하게 양자전으로 돌아갑니다.
 
이화 또한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의영전으로 돌아갑니다.
 
연회를 회상합니다.
 
순간 당신과 연이 있던 곳으로 뛰어오른 기생, 그가 휘두른 단도, 조금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던 연…….
 
장면들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치며 이화는 불편하게 잠에 빠집니다.
 
...
 
...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맡에는 작은 [쪽지]가 한 장 놓여있었습니다.
 
배이화:(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가 두고 간걸까. 여전히 들러붙은 졸음을 떨쳐내며 쪽지를 펼쳐 읽는다.)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6
판정결과: 실패
 
한번만 재판정해봅시다
 
배이화:(푸르르 고개를 털고 좀 더 눈 가까이 가져가본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검은 염소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배이화:(졸음이 싹 달아난 얼굴이 금세 창백해진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밀서까지 보냈단 말인가. 쪽지를 품에 넣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접선 장소로 향한다. 나가는 중에도 걸음 소리를 줄여 살금살금 빠져나간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소리 죽인 걸음으로 궁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염족의 전달자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전달자:마마. (이번에는 의례적인 인사치레조차 없이 급하게 다가와 이화에게 젖이 든 병을 쥐여준다.) 황제 폐하께 제가 말씀드린 사실을 전하신 것이 맞습니까?
 
배이화:(무어라 먼저 입을 떼기도 전에 손에는 여전히 병이 들려있다. 인사도 잊은 말이 앞선다.) ...분명히 전했습니다. 걱정 말라 하셨어요. 그런데 왜...
(한참 입을 다물었다가 중얼거린다.) ......어제 있었던 일이 그것이라면... 아시는 게 있으시다면 부디 제게도 말씀해주세요.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전달자:간밤 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눈가를 미미하게 찌푸린다.) 제가 전하려는 건 그것이 아닙니다. 가신들이 반역을 도모한 날이 당장 내일입니다. 그 전에 폐하께 젖을 먹여 반역이 일어날 수 없도록 가신들을 처단해야만 합니다.
 
배이화:어제 있던 연회에서... ... ... (더이상 말이 되지 못하고 멈춘다. 생각도 굳어버린다.) ...... ...가신들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 젖에 대체 어떤 효능이 있기에 폐하께서 이걸 드시면 반역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지.
 
전달자:전번의 만남 때 황제 폐하께 전해드리라던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그것이 바로 반역의 낌새가 보인다는 의미였습니다. 폐하께서 분명 알아들으시고 조치를 취할 줄 알았는데. 제정신이셨던 건가? (초조하게 중얼거린다.)
당연히, 마마를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지요. 가신들은 마마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해하려고 하니, 폐하께서 이를 아신다면 분명 마마를 보호하기 위해 반역을 막아내실 겁니다. 반드시 똑바로 전하셔야 합니다. 마마의 안위가 달려있습니다.
 
배이화:(어째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었을 텐데. 폐하께서는 분명 바로 아셨을 텐데...) ...제정신이라니. 꼭 평소엔 아니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요, 우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고개는 끄덕이고 있으나, 제 안위를 걱정하는 말은 스치듯 흘린다. 연이 위험할까 그 걱정에 온 신경이 다 쏠린 탓에.)
 
전달자:염족의 안위가 마마께 달려 있음을 부디 잊지 마십시오. (경고하듯 말하고는 사라진다.)
 
궁궐 두 곳의 조사가 가능합니다.
 
배이화:(사라지는 모습에서 금방 눈을 돌린다. 의영전에도 무언가 있을지 모른다. 쿵쾅거리는 심장만큼 돌아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굳세고 영묘하다는 뜻을 지닌, 당신이 머무르는 의영전입니다.
 
꽃향기에 코가 마비될 정도로 근처에는 많은 꽃이 심어져 있으며,
 
나라에서 제일 가는 단청쟁이들의 솜씨가 자수처럼 수놓아진 지붕,
 
기둥 하나마저 허투루 지나치는 법 없이 음각으로 세공되어 있는 것이 사연국의 미학을 향한 집착을 알 수 있습니다.
 
내부를 돌아본다면 <관찰> 판정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익숙한 물건들 사이에서 당신은 검은 보자기에 싸인 낯선 물건들을 발견합니다.
 
처음 궐에 들어왔을 때 염족의 전달자가 한가할 때에나 읽어보라며 건네주었던 서적들입니다.
 
후궁으로서의 삶에, 광기에 시달리는 연에게 적응하기에도 바빠 미처 눈길 둘 틈도 없이 잊어버렸지만요.
 
제목도 적혀있지 않은 서적들에서는 어쩐지 불길함이 느껴집니다.
 
배이화:(궐에 들어온 후로 여유가 없어 있고 있던 서적을 이제야 펼쳐본다. 등골이 쭈뼛서는 불길함도 뒤로 하고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지는 않을까. 찬찬히 읽어본다.)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모독적인 내용입니다.
 
당신의 민족이 섬기는 신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뇨?
 
서적을 읽은 이화, <이성> 판정 (1/1d3)
 
배이화:
정신
기준치: 65/32/13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SAN Roll
기준치: 63/31/12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1 감소.
 
배이화:(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순간 눈앞이 어질하고 머리가 깨어지는 기분이 들어 이마를 짚고 섰다. 염족이 모시는 신이 이렇게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니. 살아있는 ...것을 제물을... ...미간을 꾹 눌러 조금 진정하고 나서야 손 힘이 풀린 탓에 바닥으로 떨어진 서적을 다시 제자리에 얹어둔다. ... ...아직 다 돌아보지 못했으니, 언제고 이러고 서있을 수는 없어. 가장 아름다운 밤을 보았던 희문정으로 가는 걸음이 어찌나 무거운지. 한걸음 한걸음 노력해서 떼어야만 했다.)
 
희문정은 연못의 가운데에 위치한 정자입니다.
 
3층짜리 목조건물로, 단순한 정자라기엔 꽤 호화스럽게 지어져 있습니다.
 
전번 이곳에서 연과 목욕을 함께 했었지요.
 
정자의 곁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정자 옆으로 길게 뻗어있는 소나무에 앉은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간혹 술잔을 기울이고는 했던 운치있는 장소입니다.
 
정자 근처에선 신하들이 지나다니며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듣기> 판정
 
배이화:(지나가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번에 염족이 만주 벌판을 차지했다는 소문 들었나?"
 
"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그 근본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어느새에 폐하를 주무르기 시작해서는……."
 
"예끼! 이 사람아. 그래서 만주 쪽에도 비상이 걸렸네. 이상한 절 같은 걸 세우곤 주문을 왼다는 거야 글쎄."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주문이라니? 이상한 신이라도 모신다 이 말이야?"
 
"그뿐이면 말을 안해, 무슨 제물을 바친다느니 하면서……."
 
"대체 폐하께선 그치들을 왜 감싸주시는 건지 통 모르겠단 말이야."
 
염족에 관한 대화입니다. 그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사라집니다.
 
배이화:(염족에 관한 이야기가 들릴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흑양과 제물에 대한 이야기... 역사서며 서적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리며 희문정에 오른다.)
(그들이 닿는 땅은 황폐해지고 멀쩡하던 이들은 미쳐버리고, 사람을 제물로 삼는다고도 하나... 염족이 섬기는 흑양은 풍요의 신이라 축복을 내린다고도 하니. 복잡한 머리를 털어내며 희문정에서 아래를 내려본다. 연과 보낸 기억을 떠올리면서.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당신이 옆에 없어서인가. 그렇게 반짝여 보이지도 않은가보다.)
 
그날 밤에는 그토록 아름답던 풍경이건만 지금은 왜 그만한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지.
 
그건 아마도 사모하는 이가 곁에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한 저녁입니다.
 
오늘 황제께서 저녁 수라를 물리셨다고 합니다.
 
또한, 이화를 양자전으로 부르고 있다고 하는군요.
 
공기가 폐부를 압박하듯 숨을 조입니다. 이 불안감의 근원이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겠죠.
 
배이화:(...수라도 물리시고 괜찮으신 걸까. 언제부턴가 불안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꼭 원래의 제 것이었던 것만 같다. 품에 든 젖이 든 병을 다시금 확인해본다. 무거운 바위라도 얹힌 듯 답답한 가슴을 두어번 두드리다 양자전으로 향한다.)
 
불온히 뛰는 심장을 안고 양자전으로 향합니다.
 
무거운 공기는 황궁 전체를 에워싼 듯합니다.
 
연은 죽은 이처럼 양자전 안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이화가 도착하자 조용히 눈을 뜹니다.
 
연의 앞에는 저녁 수라 대신 자개상과 익숙한 약주 한 병이 놓여있습니다.
 
이 연:…… 왔구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음성. 언뜻 평온하게 들리기도 하나 적확하게는 마치 맥이 탁 풀린 듯 느껴졌다.)
 
배이화:...부르셨습니까, 폐하. (인사를 올린 후에야 연의 낯을 마주한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왜 이리 애처로운지 가슴 안쪽이 저려온다.) ...왜 저녁 수라도 물리시고 주안상을 보고 계세요. 속을 다 버리십니다.
 
이 연:수라 따위 별로 중요하지 않아졌으니까. (맞은편을 향해 손짓한다. 간단한 동작임에도 무겁고 힘겨워 보인다. 무쇠 같던 그가 힘겨워 보일 수도 있다니.) 앉거라.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배이화:(맞은편에 앉으면 얼굴이 더욱 흐려진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모습에 남는 건 걱정뿐이었으나 의외의 말에 눈만 커졌다.) .........해야 할 일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연:(묵묵히 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고 앞으로 살짝 밀었다.)
 
배이화:(덜덜 떨리는 손을 꾹 눌러 쥔다. 낯은 병에 든 젖보다 새하얗게 질려선,) ...........폐하.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이 연:화를 내거나 벌할 마음은 없으니 그리 떨지 말거라. (반면 지극히 덤덤했다.) 입지가 좁은 황자는 궁 안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암살 시도를 몇 번이나 당했었다. (개중에는 당연히 음독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을 터다.) 살아남기 위해 감각을 첨예히 단련시켰다. 잔에 무언가 섞였다는 걸 모를 리가. (즉 처음부터였다는 의미다.)
 
배이화:(....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으면서, 어째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찢는 듯하다. 힘이 되어주기는 커녕 다시 상처만 주고 있지는 않은가.) ...어찌. 그런데도 어찌 한 번을 피하지도 않으시고,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어요, 폐하. ...대체 어째서요. 이것이 무엇인 줄 아시고요. (이제 와서 무엇을 더 숨길 수 있을까. 젖이 든 병을 꺼내 상 위에 얹어둔다. 떨림이 멎지 않아 찰그랑,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난다.)
 
이 연:(그는 병을 바라보지 않는다. 탁하고 쇠해진 금빛 눈은 과거를 헤매이고 있다.)
…… 눈에 밟히는 낭자가 있었다. 까딱하면 짐승들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숲 속에서 홀로 떨어져선 내게 말을 걸어왔었지.
가문 내의 싸움에 휩쓸린 뒤로는 생사를 알 수가 없어졌고 나 역시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혈전의 연속인 탓에 소식을 쫓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매일같이 피가 튀기는 와중에도 그가 주었던 새 한 쌍만은 어떻게든 지켜나가며 살았다. 왕좌에 오를 때까지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건조한 목소리로 지난 날을 읊는다.) 시찰을 나갔던 소수민족의 틈바구니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친교를 오래 쌓지는 않았으나 그 낭자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알지. 선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저를 거두어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어하리라고…… 후가 되겠느냐는 제안에 응한 것도 나의 잔에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타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그래서 거절할 수 없었다. 허나 너무 먼 길을 와 버렸구나.
 
배이화:(처음 연을 만난 그날, 바람결에 실려온 맑은 새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맴돌다 이명이 되어 사라진다.)
......그날 이후로, 단 한순간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라는 사람을 감추고 다른 이로 살았어야 했어도 말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함부로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잊지 못하는 당신이 있어서였어요.
저를 거두어 가족처럼 맞아준 이들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품은 마음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내밀어진 손을,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이를 어찌 놓을 수 있겠어요. 그저 조금이라도, 거짓을 빌려서라도 마음 한 구석이나마 얻을 수 있다면, 이렇게 해서라도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뿐이었는데. (...왜 이리 되어 버렸을까.)
(병목을 세게 쥐고 입술을 꾹 물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폐하. 가신들이 반역을 도모한 날이 당장 내일이라 합니다. ...위험하세요, 막으셔야 합니다.
 
이 연:그대도 나를 잊지 못했는가? …… 그대도 나에게 깊은 마음을 품었는가? (지난밤 연회는 자객이 난동을 부리며 엉망으로 마무리되었으나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선명하게 귓전에 얽히는 말이 있었다. 원하는 바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곁에 둔 이의 마음만큼은 감히 탐낼 수 없었다. 그가 인간관계에 서투른 자이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사랑하는 이에게 함부로 감정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억지로 연정을 갈취해보았자 무의미하니까. 허나 당신도 나를―) 나를 정녕 연모하는가?
나를 전부 잊었으리라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감히 같은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곤 바랄 수조차 없었다. 나만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믿었으니까. (아, 진심은 어찌 마지막 순간에서야 드러나는지. 서럽고 서글프다.)
…… 알고 있다. 허나 막을 수 없다. 내가 저지른 짓은 응당 나라를 망친 것과 다름없으니 그들이 들고일어나는 건 당연한 바겠지. 죄 없는 자들의 피를 너무나 많이 묻혔다. 더는 그들을 향해 칼을 들 수 없구나.
 
배이화:......예, 잊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그 끝에는 연, 당신의 생각으로 끝을 맺었으니까요. (더이상 부를 수 없었던 하늘 같이 높은 이름을 입에 담아본다. ...왜 진작 말하지 못했을까, 자신을 다 내버려도 좋을만큼 당신을 연모하고 있노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 눈 앞을 가린 것이다. 같은 마음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신기루라 생각했으니 벌어진 비극이다.) ...연모하고 또 연모합니다. ...이 마음 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살고 있으니까요.
(눈 앞이 흐려진다.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연정을 고백하는 다정한 순간이 이토록 벼랑 끝에 몰린 채라니. 느리게 손을 뻗어 느리게 눈가를 어루어 만진다.) ...........폐하. 당신께서 없으시면 저도 살 이유가 없습니다.
 
이 연: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대가 불러주는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은 줄을 끝을 앞두고서야 알게 되다니…… (후회해봐야 이제는 늦은 일이다. 다만 절절히 전해져오는 이화의 진심을 온 힘 다해 감각한다. 피부로 느끼고 숨결로 들이마신다. 사랑하면 닮는다던가, 우리는 너무나 닮아 버려서 자신의 마음이 상대에게 감히 닿지 못하리라는 생각마저도 닮아버린 것이다.)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가만히 얼굴을 내어주다가, 그 여린 손을 퍼뜩 붙든다.) 그대는 나의 말을 들어야만 해. 지난번 희문정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겠지. ("내가 떠나라고 명한다면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게 바로 지금이니라.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내민다.) 그대의 황제이자 연인이었다. 나의 마음을 바쳤으니 목숨 역시 그대의 것이다. 반란군에게 유린당하기 전 차라리 나를 죽여다오. 그리고 이곳을 떠나라. 떠나, 살아가거라.
 
자, 어떻게 할까요, 이화.
 
그가 반란군의 손에 유린당하게 두는 것도, 그를 죽이는 것도 당신의 선택입니다.
 
배이화:.........예, 그러셨습니다. (잡힌 손을 조심히 빼내어 뺨을 쓰담는다. 내가 당신이었어도 분명 이와 같은 선택을 내렸으리라. 당신의 손에 단도를 쥐어주고... 모든 것을 내맡겼을 것이다. 나와 당신은 이토록 닮아있으니...)
(천천히 단도를 받아든다. 그러나 날은 번뜩이지 않았고, 품 안으로 사라졌다.)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가지 않아요. ...저의 황제이자 연인이시여. 제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게 두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도 목숨도 제게 주셨으니, 쉽게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가요. 같이 떠나요. 이떻게든 살아가요. ...연, 그대와 함께 해야만이 제가 살 수 있습니다. 허떤 험한 돌밭도 가시밭길도 그대와 함께라면 걸어 갈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제발 제게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저 손을 잡아주세요, 연. 살아요. 살아야 해요. (이제는 반대로 손을 내민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 위험한 궐 안에 홀로 남을 연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그날 잡은 손이 제 세상을 바꾸었듯, 다시 한번 그리 될 수 있을 거라.)
 
이 연:(당신이 쉽사리 칼을 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냥 여리기만 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이를 다치게 만드는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오히려 칼날의 방향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건 아닐지를 더 우려해야 했다. 그렇기에 품안으로 사라지는 단도를 시선 끝으로 좇고 있었으나 들려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이다.)
함께…… 말인가.
(기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감은 느끼고 있었으나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사그라드는 생명은 수도 없이 본 데다가, 객관적으로 연은 선한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살아남기 위해 얻어낸 황제의 자리였다. 권력이니 향락이니, 그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가치들이다. 굳게 침체되었던 심장에 쉬이 봄바람 부는 듯한 감각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이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괴리가 크고, 그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었으므로 이화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수도를 멀리 벗어나기 전까지는 내 얼굴을 알아보는 자들이 많을 테지. 군사를 풀어 나를 쫓을 테니 만약 들킨다면 그대 또한 함께 죽고 말 것이다. 너무도 위험한 여정이 될 거야.
그럼에도?
 
배이화:...예, 함께. (...기묘한 술수로 황제의 눈을 가리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자신에게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벌을 받아야할 자가 있다면 응당 자신이리라. 그러나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해하라며 건네준 칼은 반드시 당신을 지키는 데에 쓰리라, 그리 다짐하며 품을 도닥여본다.)
그럼에도. (낯에 드리운 먹구름이 조금씩 물러난다. 허황될지 모르는 제 계획을 조금이나마 생각해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꺼워서 끄덕이는 고개가 가뿐하다.)
...압니다.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요. 무사히 도망친다고 한들 마음 편히 살 수는 없겠지요. 모든 것을 버리셔야하는 일입니다. 연, 연인과 한날 한시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어요. 죽음은 무섭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아요. ...그대만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래주실 거지요? 제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연:그대가 나에게 이토록 깊은 마음을 품었다니, 몇 번이고 놀랐지만 또다시 놀라게 되는구나. (나라를 망치고 왕으로서의 삶이 풍전등화와 같은 이 상황에 와서도 순수하게 번지는 놀라움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다. 역시 저는 왕의 재목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는 또다시 언젠가 이화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한다. 어딘가 먼 곳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단둘이서 살아가는 삶. 날이 밝으면 면류관은 떨어져 짓밟힐 테고 곤룡포는 갈기갈기 찢어지겠지. 저 역시 죽음이라곤 두려워해본 적 없고, 제게 마땅히 내려질 벌이라 여겼으나, 이화와 함께 왕과 후궁 아닌 평범한 필부와 아낙으로 지내고픈 바람이 점점 더 세를 불려간다.)
가약을 올린지 고작 반 년인데도 나를 너무나 잘 아는구나. (그건 우리가 처음 서로의 눈을 마주한 지 어느덧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겠지. 결국 그는 이화의 손을 고쳐잡는다. 강하게, 다신 놓지 않을 것처럼.)
그러자. 그리하자, 이화야. 나 또한 너와 살고 싶다. 살아가고 싶다. 앞으로도 쭉 함께. (왕이라 불렸던 증표들을 허물처럼 벗어두고 마침내 마음 맞닿은 연인과 함께 떠나가리라.)
 
배이화:...몇 번이고 말하겠습니다. 제 마음이 당신과 꼭 닮아있다는 것을요.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깊고 깊어 무엇에도 비할 바가 없다는 것을. 당신이 가장 높은 곳의 황제이든, 이름 모를 평범한 필부이든, 남들이 다 꺼리는 백정이든 중요하지 않다. 연, 이라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니. 그들을 이름 대신 호칭으로 불리게 했던 겹겹이 둘러싼 화려한 옷도 장식도, 짓밟혀 사라질테지만 마음은 이보다 풍족할 수 없다. 가장 원하고 바라마지 않던 것을 기어이 서로의 품에 안아 들지 안았는가. 서로가 서로의 세상을.)
언제고 당신만을 좆고 있었으니까. (환한 낯으로 마주한 손에 힘을 준다. 연리지가 단단히 얽히듯. 같은 마음이라고, 절대 놓지 않을 것이라고.)
...예, 그거면 충분합니다. 언제고 살아가겠습니다. 곁에서.
 
당신이 떠올린 것은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채 연도, 당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지금껏 연의 폭정에 피해를 받은 모든 이들이 당신들을 보며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친다며 손가락질하겠지만,
 
애초에 그 폭정은 연의 성격이 비틀려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빚어진 결과물이었는걸요.
 
죗값을 받아야 한다면 영영 산속에 숨어지내야만 한다고 해도, 살겠습니다. 그의 손을 잡겠습니다.
 
도저히 그 없이 홀로 떠나는 일이란 상상할 수가 없어서…….
 
둘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궁궐의 뒤편으로 빠져나갑니다. 담을 넘고 수풀을 헤칩니다.
 
누구도 이 밤을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연과 이화는 더 이상 제왕과 후궁이 아닙니다.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야겠죠.
 
그 길은 분명 험난할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까, 서로만 곁에 있다면.
 
두 사람은 도망칩니다. 먼 곳으로 향합니다. 단둘만의 세상을 향해.
 
긴 시간 끝, 이제야 처음으로 둘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종장 三. 그 밤을 기억치 마오
 
연 생환, 이화 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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