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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7~210228] 메리엘&비올라 - 철거 예정 청춘 1길

초현_c 2021. 2. 28. 23:39

플레이타임 : 약 8시간

 

 

 
철거 예정 청춘 1길
 
w. Team. Ganada
 
KPC 배아라 / PC 윤바다
 
‘다음 역은 -입니다. 내리실 문은-’
 
덜컹, 덜컹.
 
기차가 건네는 리듬은 불친절합니다.
 
그 엇박자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즈음, 창가 너머로 이제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해가 뜬 낮, 밖은 모든 게 잠들어가는 겨울입니다.
 
바다가 앉아 있는 곳은 고등학교 때 살았던 동네로 가는 기차 안입니다.
 
기차에 남은 사람은 몇 없어 적막하기만 합니다.
 
하긴, 이제 그 동네 전체가 철거 예정이라 했던가요.
 
본래도 큰 동네가 아니었지만, 학생 수가 줄고 하나둘씩 떠나며 자연스레 유령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방문하는 것도 5년만일까요.
 
죽은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든 장소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을 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손에 들린 편지가 유독 무겁습니다. 몇십 번이고 읽었을 그 편지가요.
 
어쩐지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이 모든 게 신기루 같아 괜히 눈길이 가요. 편지를 한 번 더 읽어볼까요?
 
윤바다:그럴 리 없는 걸 알면서도... 신경쓰이네. (편지를 다시 읽어본다)
 
편지: 바다에게.
너는 많이 자라고 어른이 되었겠지. 그 시간 동안 힘든 일이 없었으면 좋을 텐데. 그 시간의 한 조각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바다야, 우리가 다니던 학교와 살던 마을이 전부 철거 예정이래. 모든 게 부서지기 전에 날 찾으러 와줘.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많이 보고 싶었어.
아라가.
 
아라가, 아라가…
 
익숙하고도 그리운 이름입니다.
 
닳도록 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게 이름인데, 그 이름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니까요.
 
5년 전, 졸업식 바로 전날 아라는 죽었습니다.
 
이별은 한순간이고 인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누구에게서 온 건가요?
 
윤바다:(사실 누구라도 상관 없을지 모른다. 봉투의 그 이름을 봤을 때부터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아라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아라 본인일까. 오랜 시간이 지나 다행히 기차에서 눈물 흘리진 않았지만 먹먹한 마음에 편지를 어루만진다.)
 
먹먹한 마음으로 종이의 단면을 어루만집니다.
 
<관찰력> 판정
 
윤바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구겨질 때까지 읽은 편지의 필체는 아라의 것이 확실합니다.
 
주소 하나 없이 갑자기 바다의 집 앞에 떨어진 편지.
 
어느 누가 칠 수 있는 장난도 아닙니다.
 
당신의 습윤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차는 잠념 하나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립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 편지를 따르고 있는 건가요?
 
그곳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편지의 주인까지도.
 
윤바다:적어도 가면... 달라지지 않을까. (아라가 떠난 이후로 몇 년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심리치료를 병행해도 그 시절을 벗어나는 건 너무도 어려워 눈물이 그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애의 편지라니. 구겨진 편지를 살살 펴 반듯하게 만들어본다, 혹시 몰라 준비한 꽃향기가 거슬린다.) 나를 기다려주면 좋겠다.
 
그 아이가 떠나고 힘들어하였던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낙엽덩이가 되고 눈뭉치가 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보냈는지는 미궁일 따름이지만, ...그래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혹시나, 하면서 준비한 국화꽃 다발을 건네줄 일이 있을까요.
 
동네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일 겁니다. 재개발 후에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되어 있겠죠.
 
떠드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기차. 산길과 바닷길을 달려 창문의 풍경이 휙휙 달라집니다.
 
너른 햇살에 천천히 눈이 감겨요. 수마에 사로잡힙니다.
 
어차피 바다가 도착할 곳은 종점, 졸음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창가에 기댄 머리가 아래로 점점 떨어집니다.
 
덜컹, 기차의 리듬과 의식이 희미해집니다.
 
 
 
배아라:바다야?
 
끔뻑, 그리운 목소리에 눈이 천천히 떠집니다.
 
비몽사몽 정신을 간신히 일깨우면 교실을 채운 학생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눈앞의 아라까지도요.
 
모두 교복 위로 사복을 덧대어 입고 있습니다.
 
<정신력> 판정
 
윤바다:......아라야...? (목소리를 인식하자마자 방금까지 무거웠던 눈꺼풀을 금세 들어올렸다.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 정경, 그리고 너. 망연히 당신을 바라보다 눈이 말라 눈시울 붉히며) 정말 아라야?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또 그 꿈인 것 같군요.
 
우리가 함께 보냈던 마지막 겨울. 졸업식과 봄의 시작을 기다리던 12월의 그 날.
 
동네로 가던 길 마음이 뒤숭숭했을까요, 이런 꿈을 꾸다니.
 
눈앞의 아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자를 돌리고 당신을 마주봅니다.
 
배아라: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조심스럽게 당신의 눈가를 손끝으로 쓸어준다.) 표정이 안 좋아, 바다야.
 
윤바다:응... 우리가 졸업하는데, 네가 없었어...... 네가 보고 싶었는데 네가 없어서, 그래서...... (언제나 이 날로 돌아가고 싶어 그랬던가, 유난히 졸업 전의 꿈을 그리곤 한다. 너와 같이 자라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남은 건 홀로 어른이 된 나뿐이라 어리던 너를 부르나보다. 여전한 상냥함에 기대 어리광 부리며) 그것보다 더한 악몽은 없을 거야. 네가 없을 리 없는데.
 
배아라:(뺨을 조심조심 감싸준다.) 내가 졸업식에 없었어? 왜 그러지, 지각을 했나? 아님 갑자기 사정이 생기기라도 했나? 진짜 나쁜 악몽이었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응. (당신의 목소리에 제가 다 슬픈지, 안절부절못하며 조근조근 당신을 달래준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간간이 ‘졸업’, ‘겨울 방학’, ‘대학’, ‘폐교’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그중 가장 들뜨게 토론 중인 주제는 폐교입니다.
 
기억해 보면 이맘때 즈음부터 학생 수도, 동네 주민 수도 빠르게 줄었던 것 같아요.
 
배아라:우리 졸업식 때 무슨 꽃을 서로한테 줄까 정하고 있었는데, 마저 정할 수 있겠어? 아님 조금 더 진정한 뒤에 정할까?
 
무슨 말인지 되새기면 문득, 우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 하나가 떠오릅니다.
 
‘졸업식 전날, 서로를 위한 꽃다발을 주고받자.’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의 졸업을 축하해주자는 의미였을 겁니다.
 
결국 그 꽃은 건네주지 못하였죠.
 
마지막으로 바다가 줄 수 있던 꽃은 희고 흰 국화꽃 한 송이가 전부였습니다.
 
윤바다:흰 꽃은 싫어. 국화는 더더~욱 싫어. (일그러지려던 입가를 잠시 우물거리다 활짝 웃는다) 아라랑 잘 어울리는 꽃이 뭐가 있을까... 워낙 잘 어울려야지! 머리가 수국색이니 귀여운 프리지아? 아무래도 졸업식에 장미는 좀 흔하겠지? (당신 앞에서 말하던 그 때처럼 밝은 목소리로 조잘거린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이 꿈을 다시 꾸겠나.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저, 그 때처럼만.)
 
배아라:음? 요즘은 분홍색이랑 노란색 국화처럼 예쁜 색들도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 (잠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맞장구를 친다.) 장미는 좀 흔할 것 같기는 해. 그럼... 나는 수국을 선물하고, 너는 프리지아를 주는 게 어때? 서로의 머리색을 닮은 꽃을 주는 거야! (얼마 남지 않은 졸업, 새로이 성년을 맞이한 이의 목소리는 가볍게 들떠 있다. 닥쳐올 미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윤바다:으응, 그래도 국화는 싫어. 그냥 그런 기분이 드네. (가게에도 들여오지 않던 꽃을 오늘 들고 온 건 오로지 너를 기린다는 의미였으니 졸업식에는 필요 없다. 너를 닮은 수국, 태운 향내와 국화향이 아닌 프리지아면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좋아, 프리지아 이마안큼 큰 다발로 가져올게. 그날 아라가 제일 특별할 걸? (팔을 크게 벌려 과장한다)
 
배아라:(과장하는 몸동작을 곧이곧대로 믿는지 따라서 눈매가 커진다.) 우와아. 그렇게 크게? 그 정도면 내 얼굴보다 꽃다발이 더 큰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럼 나도 바다가 졸업식에서 엄청 돋보일 수 있도록 멋지게 준비해 올게. 수국은 졸업식 선물론 정말 드문 편이니까, 아주 멋질 거야. (울상짓던 당신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며 걱정하던 것은 어느새 잊고서 말갛게 웃었다.)
 
아라는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당연하죠, 우리의 기억은 그때에 멈춰있으니까.
 
“야, 졸업식 때 우리 집에 올 사람? 졸업하면 보기 힘들 거잖아.”
 
한 무리가 바다와 아라에게 다가오며 친근히 묻습니다.
 
이 역시 익숙한 얼굴이에요. 아라가 죽었던 날, 저 환하게 웃는 얼굴에선 상상도 못 할 표정을 지었던 친구입니다.
 
우린 친구의 집이 아닌 울음소리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졸업식을 마무리했습니다.
 
우울은 어째서 나눌수록 더 커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라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배아라:바다도 같이 갈 거지?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나요?
 
물론, 이곳은 그저 꿈이라지만…
 
윤바다:나도 갈래! 아라도 가는 거지? 다같이 모여서 가면 좋겠다. 이제 어른이니까 함께 있을 때 술이라도 사갈까? (끔찍한 기억을 지워내려 부러 장난스레 웃는다. 아무리 꿈이라도 미래를 그리던 그날의 대화를 망칠 수 없었다.)
 
배아라:그럴까, 나 술 아직 많이 안 마셔봐서 모르는데... 주정 부리면 바다가 받아줘야 해? (걱정이 슬금슬금 밀려오는지 약간 고민하는 듯하다가도, 청춘의 활기가 무엇인가. 이내 어렵잖게 고개 끄덕인다.)
 
그 시끄러운 교실 속, 문득 아라가 바다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배아라:맞다, 바다야. 나중에 졸업식 마치고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
 
…우리가 이런 대화도 나누었던가요?
 
입을 떼려던 찰나, 부드럽지만 아무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려 퍼집니다.
 
'다음 역은- 종점으로-'
 
시야가 흔들리고, 또 흐릿해집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해요.
 
마지막으로 본 아라는 맑게 눈 휘어 웃고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요.
 
번쩍,
 
눈을 뜨면 다시 기차 안입니다.
 
눈가가 시려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기차는 어느새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습니다.
 
몇 없는 승객들도 짐을 챙겨 하나둘씩 자리를 뜹니다. 바다도 내려 볼까요.
 
윤바다:(시린 눈을 추운 날 차게 언 손으로 문지르고 이내 기차에서 내린다. 선물하려던 프리지아 대신 국화에 흔들거리는 것에 비위가 상해 한껏 찬 공기를 마시며) 아라야... 나 왔어.
 
차디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깥으로 나가니 익숙한 역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동네를 떠날 때도, 이삿짐까지 모조리 옮긴 후에도 지나왔던 역입니다.
 
아라를 향해, 돌아왔군요.
 
<아이디어> 판정
 
윤바다:
지능
기준치: 60/30/12
굴림: 4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배아라:바다야, 여기 역 이름이 왜 '햇귀'인지 알아? 왜냐면...
 
드문드문 아라와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재생됩니다.
 
괜히 고개를 올려 역을 보면, 다 녹슨 판에 적힌 ‘햇귀역’이 보입니다.
 
<모국어> 판정
 
윤바다:글쎄, 뭐더라~?
교육
기준치: 55/27/11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햇귀는 '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었지요.
 
국화 향을 맡고 있자니 어쩐지 비위가 상하는 듯합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쉴수록 입김은 하얗게 얼어가고, 편지를 잡은 손이 시려 옵니다.
 
철거 전 마지막으로 동네를 둘러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떤 모습으로 사라질지 마지막으로 지켜볼까요.
 
윤바다:(사라지기 전 우리가 자란 곳을 둘러본다. 이 역 안에도 네 목소리가 들리는데 다른 곳은 네가 보이지 않을까. 몸은 차게 식었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발걸음이 가볍다. 이제 너를 되짚는 시간이다. 아마도, 이 동네에 안녕을 고할 때다.)
 
길을 되짚어 안녕을 고할 시간임을 직감한 탓인지,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더듬더듬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걸어가 봅시다.
 
역을 지나 인도를 따라 걸으면 굴착기나 큰 트럭, 그 외 철거 작업을 위해 모인 사람과 장비들이 보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다를 힐끗 보더니, 잠시 손을 들고 소리칩니다.
 
인부: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두고 가신 물건이라도 있어요?
 
윤바다:아, 아뇨, 여기가 고향이라 잠시 들러봤어요! (철거 준비 중이라더니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둘러보다 깜짝 놀라 마주 소리치며)
 
인부:아, 그러셨습니까. (머쓱하게 모자 매만지다가) 오전에야 준비를 하니까 상관없지만. 오후부터는 마을 전체를 걸쳐 철거 작업을 시작합니다. 밤에는 작업도 쉬고, 마을 전체를 닫아두니 해가 지기 전에 나와주세요. 위험하니까 철거 중인 곳 주변에도 오지 마시고요.
 
윤바다: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가볍던 발걸음을 재게 놀려 자리를 벗어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우선 학교부터 가볼까...
 
본격적인 철거 시작일은 오늘이었나 봅니다.
 
겨울의 이른 밤이 되기 전에 금방 둘러보고 가야 할 듯하네요.
 
조금 더 걸어가면 기찻길과 신호등이 놓인 길이 보입니다.
 
마지막 기억보다 풀은 더 우거져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이 기찻길을 건너가는 것이 하나의 놀이였고,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죠.
 
그때보다 더 커버린 발을 옮기려 할 때면, 길 너머 전봇대 아래…
 
바다가 잘 알고 있는 복장의 누군가가 보입니다.
 
아득히 멀고, 또 가까운 곳에서.
 
<관찰력> 판정
 
윤바다:지금 생각해보면 용기가 아니라 만용 아니었을까. (어린 추억에 비실 웃으며 기찻길을 보다가 낯익은 복장에 고개를 기울인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분명 낯이 익은데, 눈을 가늘게 떠서 봐도 잘 기억이 안나는 걸)
 
익숙한 교복,
 
그리고 익숙한 연보랏빛 단발머리. 한 줄기 땋아내린 옆머리까지, 기억이 멈춘 그 뒷모습 그대로.
 
저건… 아라의 뒷모습과 같습니다.
 
…아라?
 
상대는 우중충한 거리를 유유히 걸어갑니다.
 
윤바다:...아라야? (내가 저 뒷모습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저건 아라야. 기억의 잔재든 유령이든 상관없어. 편지와 꽃다발을 꼭 쥐고 뛰어가듯 쫓는다) 아라야!
 
바다가 편지와 꽃다발을 쥐고 그를 쫓아가려는 순간,
 
기차가 들어온다는 경보음이 울립니다.
 
덜컹, 덜컹…
 
안전대가 내려가면 기찻길은 걸어갈 수 없게 막힙니다.
 
순식간에 불어오는 바람과 나부끼는 머리카락.
 
요란한 소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가고, 눈앞의 거리에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봇대 아래의 아라는 그저 환상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기차에서부터 무언가 꿈을 꾸듯 감각이 떨어집니다.
 
윤바다:......네가 날 부르고 있는데. 너를 또 놓쳤어... (그날과 같다. 넌 다시 안보는 새에 내 곁에서 사라졌다. 어쩐지 부유하는 기분으로 한발씩 내딛어 길을 건넜다.)
 
다시 기찻길을 건너자 자주 걷던 길이 보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검은 선들이 늘어진 하늘, 낡은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음식점, 문방구와 학교로 가는 골목길…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 모두 하나같이 낡고 어딘가 부서져 있습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거리에는 단 한 명, 바다만이 숨을 쉬고 있어요.
 
푸른 하늘 아래 건물들은 흰 입김과 겨울이 스며 더욱 해묵어 보입니다.
 
<듣기> 판정
 
윤바다:5년 밖에 안 지났는데, 여기도 많이 낡았네......
듣기
기준치: 54/27/10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배아라:이쪽이야, 바다야.
 
조용한 거리에서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분명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이 목소리는 어쩐지 앳된, 어쩐지 여리고 가는, 그리고 웃음을 가득 머금은...
 
편지의 주인인 아라의 것입니다. SANc (0/1)
 
윤바다:네 목소리가 선명해, 아라야...... (이 공허한 거리에 홀로 있음을 알고도 그 그리운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는다)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목소리는 학교로 향하는 골목길에서 울려 퍼집니다.
 
이쪽이야, 이쪽…
 
여린 울림을 거듭해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히 당신이 아는 아라입니다.
 
…잘못 듣고 있는 걸까요?
 
발걸음을 움직여 그 목소리를 따라갈까요? 어차피 학교로 향하던 길이었으니 말입니다.
 
윤바다:(아마 익숙한 곳에 와 너와의 기억에 잠식되나보다. 내가 갈게. 오늘은 내가 네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이 곁에 있던 것처럼 익숙한 등교길을 걸어 학교로 향한다)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기면 담쟁이 넝쿨이 가득한 담벼락이 보입니다.
 
이 길은 학교 뒷문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죠.
 
수업이 끝나고 어디론가 급히 움직이던 아이들이 떠올라요.
 
목소리는 학교 쪽에서 들리나 싶더니, 어느 순간 끊겨 사라지고 없습니다.
 
역시, 그건 어느 환청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모국어> 판정
 
윤바다:오랜만인데, 조금만 더 들려주지. (환청이 사라지자 잔상을 찾듯 조금 두리번거린다)
교육
기준치: 55/27/11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담쟁이 넝쿨이 뒤덮인 담벼락. 수많은 필체의 낙서들이 보입니다.
 
분명 이 어딘가에 아라와 바다도 글을 새겼던 것 같은데…
 
기억을 따라 더듬거려 보면 울퉁불퉁한 벽에 손이 조금 쓰라려집니다.
 
그리고, 유언처럼 남긴 이의 필체와 글이 보입니다.
 
‘졸업하고 나면 같이 여행가기! -바다&아라-’
 
5년 전, 그러니까 잊고 있던 추억입니다.
 
우리가 그린 미래에는 둘이 함께였나요?
 
발걸음이 괜히 무거워집니다. 손끝에 닿는 문장 역시 곧 철거되어 사라지겠죠.
 
…잡념을 지우고 학교로 갑시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고, 둘러 보아야 할 곳은 많으니까요.
 
계속 앞으로, 앞으로 움직입시다. 과거에 멈추지 말고요.
 
윤바다:(가볍던 발걸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무거워져 마냥 그 글씨를 쓸어내렸다. 소중하고 소중한 내 친구, 네가 그리워. 시린 눈을 감았다 뜨고 걸음을 옮긴다.)
(잠깐 뒤로 물러나 벽을 힘껏 쳐본다. 어차피 철거될 건데 문제가 될까? 하지만 네 글씨를 차마 두고 갈 수 없었다)
근력
기준치: 70/35/14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와르르, 지반이 약해진 탓인지 담벼락이 쉽사리 무너져내립니다.
 
두 사람의 추억이 쓰여진 벽돌이 말끔하게 떨어져 나와 바다의 발치를 맴돕니다.
 
윤바다:......아라야 내가 잘못한게 아니라고 해 줘. (혹시 몰라 쳐봤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담벼락에 안절부절하다 우리의 추억을 주웠다) ...이걸 너라고 생각하고 돌아갈게...... (발길을 돌리며)
 
괜찮을 거예요. 어차피 철거될 마을이니까요!
 
추억의 한 조각을 얻고,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바다가 3년을 보냈던 학교가 보입니다.
 
바다가 졸업한 후 바로 폐교가 되었다고 했었죠.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운동장의 잔디는 무성히 자라 풀밭이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는 학교는 숨이 꺼진 듯 고요합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볼까요?
 
윤바다:...인공잔디가 아님을 이렇게 알려주네. (회녹색으로 물들어 바스락거리는 잔디를 밟아보다 천천히 학교로 들어간다.) 안녀엉... (입김과 함께 아스라이 흐려지는 목소리로 작게 인사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실내로 들어가면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마지막 학년을 보냈던 곳은 3층이었지요.
 
오래된 복도는 당신의 흐린 인사에 응답하듯 삐걱삐걱, 낡은 소리를 냅니다.
 
교무실, 미술실, 음악실… 천천히 지나가는 교실 속은 엉망입니다.
 
<관찰력> 판정
 
윤바다:여긴 뭐, 변한 게 없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런데 이상하게도… 3층으로 향하는 그 계단, 먼지가 쌓인 그 계단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있습니다.
 
최근에 방문한 걸까요? 발자국 위로 쌓인 먼지가 없습니다.
 
발자국은 바다가 쓰던 교실을 향해 이어져 있습니다.
 
윤바다:동네 애들이 담력체험이라도 한 걸까? (발자국 옆에 제 것을 새기며 교실로 향한다.)
 
어색할 정도로 조용한 그 복도를 지나자 바다가 쓰던 교실 문이 보입니다.
 
드르륵, 낡은 문을 열면 마지막 기억 그대로의 교실이 늦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낡고 엉망인 이 학교 속, 먼지마저 흩날리지 않는 이 교실은 유독 멀쩡하고 정갈해요.
 
질서 있게 정돈된 책상과 창문에 달린 조금 바랜 커튼...
 
마치 누군가 와서 치우고 가기라도 한 듯이요.
 
낙서가 지워지지 않은 [칠판], 줄을 지은 [책상], 교실 뒤편의 [사물함]이 보입니다.
 
윤바다:여기가, 이렇게 그대로일 수가... 있나...?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지는 교실을 둘러보다 칠판으로 시선을 옮긴다)
 
칠판의 낙서 역시 5년 전 그대로입니다.
 
나중에 커서도 연락하자, 성공해서 만나자, 분식집으로 5년 후에 집합…
 
그 사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글이 보입니다.
 
‘다시 만나자.’
 
졸업식 전날, 마지막으로 교실을 쓰며 다 함께 적었던 그 낙서.
 
당연히 아라의 것도 섞여 있겠죠.
 
그러니까, 저 낙서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졸업 날의 인사입니다.
 
다시, 다시….
 
왜 지키지 못한 말들은 늘 무겁고 다정한가요.
 
윤바다:(분필로 적힌 말에 손댈 수 없어 들고 있던 벽돌 모서리를 살살 쓰담는다.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고 해서, 네 기억을 걷고 있어.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에 뒤돌아 책상 쪽으로 걸어간다. 여기쯤 앉았었지. )
 
널브러진 다른 교실의 책상들과 다르게 이 교실의 책상만은 줄을 지어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바다의 자리로 가면 익숙하고도 사뭇 달라 보이는, 쇠에 녹이 잔뜩 생긴 책상과 의자가 보이네요.
 
<아이디어> 판정
 
윤바다:하하, 이런 건 확실히 낡았구나. (아무리 그날과 같아 보여도 다른 점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지능
기준치: 60/30/12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부럽다, 창가 자리. 밖이 잘 보이겠네.’
 
누군가 건넸던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예상가는 한 사람이 있지만요.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마냥 좋은 기억만 있던가요? 시험이나, 어쩌다 혼이 났던 일이나, 아님….
 
...아라의 자리를 보면 검게 시든 꽃이 잔뜩 올려져 있습니다.
 
벌레 몇 마리가 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원래는 희었을 그 꽃의 이름은 떠올리지 않기로 합시다.
 
윤바다:(눈을 약간 찌푸리고 잔뜩 시든 꽃 뭉텅이와 제 꽃다발을 교체했다. 너는 언제나 희고 고운 걸 쥐어야 했다. 시든 꽃을 들고 잠시 밖을 봤다가 이내 사물함 쪽으로 다가간다. 짐은 하나도 없을 테지만, 뭐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자물쇠가 그대로 걸린 사물함도 몇 보입니다.
 
바다가 쓰던 사물함을 열면 텅 비어있어요.
 
그렇죠, 모두 버리고 떠났으니까.
 
괜히 아라의 사물함을 열어보려 하면…
 
<근력> 판정
 
윤바다:
근력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머리는 힘이 없는 사람이나 쓰는 것이다. 힘껏 열어젖히며)
 
덜컹, 닫혀 있던 문은 힘을 주자 쉽게 열립니다.
 
무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라도 하듯이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네요.
 
편지지는 바다가 어제 받은 편지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아라에게서 온 그 편지 말이에요.
 
윤바다:(무심코 열어본 사물함에 얼굴이 허물어진다. 너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시든 꽃을 내려두고 조심히 편지를 열며)
 
접힌 편지지를 펼치면 짧은 글이 보입니다. 익숙한 필체예요.
 
편지: 바다에게.
안녕, 막상 편지를 쓰려니까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네. 5년 동안 잘 지냈지? 와줘서 고마워. 많이 늦었지만, 졸업 진심으로 축하해. 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었는데, 약속을 전부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바깥으로 나와 줄래?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아라가.
 
…어째서 편지의 받는 이는 바다이고, 보내는 이는 아라인가요?
 
게다가 이 내용은, 마치 죽은 아라가 남기고 간 것만 같습니다.
 
윤바다:.....아라, 야? (이럴 순 없다. 이럴 수 없는데, 이럴 수 없는데...... 5년 간 너를 그렸다. 이 글씨체를 못 알아볼 리 없다. 바들거리던 손이 편지를 구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바깥으로 향한다)
 
세 곳을 모두 둘러보면 덜컹, 창문이 흔들립니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 누가 인위적으로 흔드는 것만 같아요.
 
덜컹, 덜컹…
 
창문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이리로 오라는 듯이.
 
아까 들었던 그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바깥으로 내려가면서 복도의 창문을 바라보면, 창 너머 운동장에서 익숙한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보입니다.
 
아라가, 아라가 웃으며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SANc (0/1)
 
윤바다:(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버티고 미끄러지듯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아라야, 아라야...!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이것도 환영인가요? 아라는 아까처럼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너는 누구고. 이곳에는 왜 있고…
 
교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 계단을 건너 황급히 뛰쳐내려갑니다.
 
의문과 혼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반가움을 떠안고 운동장으로 서둘러 나오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헛것을 본 걸까요. 아까 아라가 있던 교문 쪽으로 가도,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윤바다:제발, 기다려줘...... (서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아까도 그렇고, 분명 내게 손짓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또 혼자다. 겨울의 시린 향만이 남았을 뿐.)
 
무얼 기대한 건가요.
 
이상하도록 맑은 날입니다.
 
바다는 아라를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그리워했나 봅니다. 아님, 이 장소에 그리움이 증폭된 걸 수도 있고요.
 
당신을 부르던 목소리는, 손짓은, 웃음은 전부 헛것이었을 뿐일까요.
 
해는 벌써 높이 떠 있습니다.
 
둘러볼 곳이 많아요, 겨울의 차디찬 향만을 떠안고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배아라:같이 가자, 바다야.
혼자 어디 가? (희미하게 웃으며,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꿈에서나 들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목소리.
 
꿈에서나 느낄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온도.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아라가 당신을 부릅니다.
 
배아라:... 5년 후의 바다는 이런 모습이구나? (울 것처럼 눈가가 발개진 채로도 희미하게 눈 휘어 웃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의 아라가, 당신의 앞에 서 있습니다. SANc (0/1)
 
윤바다:(정말, 너인가? 그토록 바라왔지만 막상 마주하니 되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울고 웃으며 네게 매달릴 것 같았는데, 입에 아교가 붙은 듯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이것도 꿈인 걸까요?
 
하지만 그럼,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도와 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당신을 향해 보내는 이 먹먹하고 따스한 웃음은 또 어떻게 말을 덧붙일 것이고요.
 
배아라:머리카락이 많이 짧아졌네. 얼굴도 엄청 성숙해졌고. 정말 어른이 됐구나, 바다. (조금만 삐끗하면 초록빛 앳된 눈망울에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를 것 같은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당신의 모습을 훑는다.)
... 보고 싶었어. 정말로. 잘, 지냈지?
 
윤바다:너는, 너는, 그대로야, 너무 그대로라서, 못 알아볼 수도 없네. (삐걱이는 머리를 굴려 언어를 뱉는다. 눈 감으면 다시 사라질까 눈이 말라감에도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돌아왔어. ...아라 너는, 잘 지냈어? 혼자 춥지 않았어?
 
배아라:그렇지? 나는... 그대로야.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너를 보고 싶었어... 와 줘서 기뻐. (5년 만의 재회였다. 이따금은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을 때 더더욱 말을 정제하기가 힘들어지고는 한다. 그래서, 쌓이고 쌓인 말뭉치는 많건만 그를 차근차근 풀어낼 시간도 여력도 없어서, 그저 당신의 짧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미소를 지을 따름이다.)
 
윤바다:(예전과 다르게 쓰다듬다 중간에 뚝 끊김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네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널 끝없이 추억해서 그런 걸까. 여상히 쓰다듬을 받은 후 무른 미소를 지었다. 한쪽 눈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지만, 아무렴 어때. 흐린 눈이 맑아져 온전히 눈에 담김에 무른 미소가 견고해진다.) 언제나 널 찾아가고 싶었어. 겨우, 겨우 만나서 기뻐...! (신기루일까 물거품일까 이 순간을 두려워하는 한 편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신을 껴안는다.)
 
겨울바람이 선선하게 부는데도, 당신의 품 안에 들어찬 아라의 몸은 따스합니다.
 
배아라:나도, 너무 너무 기뻐... 정말로. (당신의 뺨 타고 눈물방울이 툭 흐를 즈음에, 제 눈에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물줄기가 한 방울 흘러내린다. 당신의 품에 와락 안긴 채 고개를 부비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어른이 되어 미소와 울음을 전부 지닐 수 있게 된 당신과는 달리 저는 아직도 눈물도 겁도 많던 5년 전 모습의 그대로여서.)
(이렇게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운데에 걸린 태양은 언제나 기다려주는 법 없이 기울어 가는 법이라서. 눈가를 문질러 닦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너랑 가고픈 곳이 많아. 같이 갈까? (손을 내민다.)
 
윤바다:(결국 당신의 어깨를 흠뻑 적시고 나서야 고개를 든다. 널 두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가끔 싸우더라도 언제나 네가 있어줄 줄 알았어. 어리고 안일한 바람이 시련에 뭉개져 몸만 자란 어른을 만들었다. 내 친구도, 추억도, 기억과 그리움마저도 여기 다 있는데 어찌 여길 떠날 생각을 했는지. 안온한 품에 위로 받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손을 잡았다) 오늘 하루 뿐이야? 좀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계속 너랑 걷고 싶어. 나도, 너랑 가고 싶은 곳이 많아. (되도 않는 고집인 걸 알지만 미처 성장하지 못한 마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라야, 그 때처럼. 응?)
 
배아라:얼굴이 다 젖었네. 춥지 않아? (걱정스레 물으며 제 옷소매로 당신의 눈가를 세심하게 톡톡 닦아준다. 손을 맞잡고 천천히 운동장을 걸어나간다. 몸만 훌쩍 자라버린 어른과 어른을 앞두고 있었던 갓 스무살의 아이가. 당신의 고집 같은 간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절한 목소리에 확답을 내어주지 않고 그저 말간 목소리 내어놓기만 한다.) ...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할까? 지금은 그냥 지금을 즐기자.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러 가는 거야.
 
아라는 분명 5년 전에 죽었는데, 손을 잡은 이는 당신과 발 맞추어 천천히 보폭을 딛습니다.
 
아까 그 골목길을 지나고, 다시 거리로…
 
이건 또 어떤 꿈일까요.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리운 이를 만난 행복한 꿈인지, 아님 깨어나면 공허함만 남는 악몽인지….
 
머릿속은 어지럽고 맞잡은 손의 온기는 다정합니다.
 
아라의 말대로 잠시 복잡한 생각을 버려둡시다. 해가 지면 이곳을 나가야 하니까요.
 
아라를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면 [문방구]와 자주 가던 [분식점]이 보입니다.
 
배아라:어디부터 가고 싶어, 바다야?
 
윤바다:...문방구에 가볼까? 왜, 우리 준비물 두고 온 날이면 아침부터 뛰어가고 그랬잖아. (여전히 붉은 눈가를 접으며 그 때를 회상하는지 작게 키득인다.)
 
배아라:맞아, 그랬지... 그러다가 지각하면 운동장 열심히 돌았었는데. 아침부터 운동한다고 배고파서 간식 사먹었던 기억 난다. (천천히 문구점으로 걸음한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입니다.
 
가격이 저렴하기도 했고, 아주머니가 친절하시기도 했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 빈 진열대와 계산대가 보입니다.
 
배아라:아. (무언가의 앞으로 총총 걸어간다.) 이거 기억나, 바다야?
 
유일하게 남은 뽑기 기계가 보입니다. 동전을 넣고 돌리면 플라스틱의 캡슐이 나오는 형식이었죠.
 
모두가 떠난 마을에 버려져 가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아라는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러니까… 한 번에 오백 원이던가요?
 
<재력> 혹은 <행운> 판정
 
윤바다:나 이거 꽤 좋아했는데. 한번 해볼까?
행운
기준치: 60/30/12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좋아한다고 했지 좋은 걸 뽑아봤다고 하지 않았다. 철컥거리며 동전 넣고 돌려보며)
 
주머니나 지갑 속을 뒤져 보아도 동전은 없습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라는 한참을 둘러보곤 여기 있었네. 작은 소리를 내며 뽑기 기계 아래 동전 두 개를 찾아내 건네줍니다.
 
오랜 시간 돌아가지 않았던 녹슨 손잡이는 조금 뻑뻑합니다.
 
힘을 주어 돌리면 달그락, 작은 플라스틱 캡슐이 나옵니다.
 
배아라:나도 한 번 돌려볼게. (손잡이를 잡고 힘껏 돌리자, 당신의 것과 같은 모양의 캡슐이 데구르르 굴러나온다.)
 
열어보면 두 개 다 유치한 구슬 팔찌예요. 고등학생 때도 이런 건 하지 않았지만…
 
아라는 마음에 드는지 한쪽 팔목에 벌써 끼우고 있습니다.
 
하긴, 아라는 예전부터 온갖 미신을 믿으며 악세사리들을 수집하고는 했었지요. 여전합니다.
 
윤바다:(여전한 모습에 다시 킥킥거리며 저도 하나 받아들어 손목에 끼운다.) 어때, 우정팔찌? 마음에 들어? (서로 같은 구슬 팔찌를 흔들어보이며) 학교 다닐 때는 실팔찌 만들어보겠다고 그렇게 엮어댔는데 결국 실은 아니지만 팔찌 하나 했네! (밝게 조잘대며 분식집 쪽으로 손을 끌어당긴다) 이번엔 저쪽 가볼까? 이제 장사 안하겠지...?
 
배아라:응, 맘에 든다. (당신도 손목에 끼울지 슬쩍 눈치를 보다가, 구슬 팔찌가 손목에서 흔들리자 못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끄덕인다.) 예쁘네, 우리 옷 색이 어두운 계열이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분명 불운에서 지켜줄 거야. (당신을 따라 이끌려간다.) 아마 안 하실 것 같은데. 마을이 다 철거를 하니...
 
분식집은 간판의 글씨가 벗겨진 페인트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떡볶이부터 피카츄 등등 온갖 걸 다 팔았었지요.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바랜 메뉴판은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어요.
 
컵볶이 500원
 
슬러시 500원
 
붕어빵 4개에 1000원…
 
어쩐지 그리운 메뉴들과 가격입니다. 기억해보면 사탕도 팔았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아라의 얼굴은 이 동네와 다르게 5년이라는 시간이 스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때 그 모습으로, 지금 바다의 눈앞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라를 향해 <관찰력> 판정
 
윤바다:(너는 5년 전에 남아있구나... 나만 변한 것 같아.)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문득 아라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빛이 반짝입니다.
 
파스스, 빛가루가 퍼지듯 반짝이는 파편이 흩날려요.
 
시선을 느낀 걸까요, 아라는 은근슬쩍 손을 뒤쪽으로 감춥니다.
 
윤바다:아라야. 너 손끝에서 별가루가 떨어져. (눈을 끔뻑이며 당신에게 말했다. 잘못 봤나? 고개를 기울이며) 어디 안좋은 건 아니지?
 
배아라:별가루라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멀쩡한걸.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철컹, 저 바깥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먼 곳에서부터 철거가 시작된 것 같네요.
 
배아라:(소리나는 방향을 잠깐 돌아본다.) 놀이터라도 갈까? 거기도 예전에 자주 갔었잖아. 특히 야자 끝나고 가끔씩 그네 타고 놀았었는데.
 
윤바다:(종종 안좋은 일을 숨기던 당신을 기억해서 그런지 미심쩍지만 이내 들려오는 철거 소리에 파드득 놀라 잊고 만다.) 물론 기억나지. 애들 아무도 없을 때니까 그네 하나씩 차지하고 한참을 놀았는데. 거기 가볼까? (미소지으며 따른다)
 
기억을 따라 걸어가는 사이 그림자는 점점 길어져 갑니다.
 
작은 꼬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늦은 시간 그네를 타며 떠들던 학생들도 많았던 놀이터입니다.
 
아라의 말대로, 두 사람 역시 종종 늦은 시간까지 이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었죠.
 
미끄럼틀과 시소는 부서져 있습니다. 그네의 쇠줄은 녹슬어 본래의 색을 잃었습니다.
 
지금 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그나마 벤치가 멀쩡해 보입니다.
 
윤바다:(방치되어 낡고 부서진 놀이터에 기억을 덧씌운다. 저기는 군것질거리를 먹으며 앉아 있던 곳, 중앙에서 균형을 잡겠다며 뛰어오른 시소, 거꾸로 올라가 금세 내려오던 미끄럼틀... 지금은 모두 퇴색되었지만 그 추억마저 스러지진 않아 조금은 아련하고 조금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저기 잠깐 앉을까?
 
배아라:그네는 못 타게 되었네. 하긴,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과 같은 추억을 상기하는지 놀이터를 한 번 크게 휘이 둘러보다가 벤치에 조심스럽게 걸터앉는다. 당신이 앉을 자리도 제대로 비워두고.)
 
옆자리에 따라 앉으면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침묵으로 수놓은 시간은 다만 짧디짧고, 사르륵-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립니다.
 
하늘을 보면 햇빛과는 다른 빛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있어요.
 
슬며시 당신의 손 위로 아라의 손이 올라옵니다.
 
배아라:그래서, 정말 어떻게 지내고 있었어? 5년 동안 말야. 다른 친구들한테도 편지를 보냈는데 아무래도 다들 어려웠던 모양인지... 이렇게 와 준 건 너뿐이였거든.
 
윤바다:...다른 애들에게도 보냈어? 만일 받았다면 기뻤겠네...... 난, 널 여기서 못 만나도 조금은 기뻤을 것 같거든. 네 글을 다시 읽어 기뻤어. 물론 실제로 만난게 더없이 기쁘지만...... (손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다시 꼭 잡았다) 나는 졸업하고, 잠깐 쉬다가... 아빠 가게를 물려받았어. 알지? 우리 꽃집하잖아. 졸업식 꽃다발도 내가 준비하, 려고. 했는데.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우물거리다가) 이제 근처 졸업하는 애들 꽃다발 내가 다 만들게 생겼어. 한 해에 이벤트가 어찌나 많은지, 문전성시야.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 그야,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걸.)
 
배아라:나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곳에 너와 함께했던 순간이 남아 있으니까? (당신의 심정을 대충 이해한다는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고 싶어해준 것 같아서 기뻐. 나도 쭉 너희를... 그리워했거든.
꽃집을 물려받았구나. 바다랑 잘 어울리네. 은근히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일 것 같은데, 그래서 특히. 그리고 바다는 워낙 햇살 같은 느낌이라 무슨 꽃이든 잘 돌봐줄 것 같고. (흐려진 말끝 뒤에 숨은 말을 짐작한 건지 아닌 건지 굳이 콕 집어 말하진 않는다.) 가게가 잘 된다니 다행이야. 앞으로도 돈 많이 벌어서 엄청 부자가 되어야지, 바다. 머리는 기분전환으로 자른 거야? 귀걸이도 너무 예쁘네.
 
윤바다:그래, 함께한 순간이 남아있으니까.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여긴 다시 와보려고 했어. 이제 울지 않게 되면 말이야. 여기 도착하자마자 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한참 두리번거렸지 뭐야. (작게 키득인다) 온 동네에 네가 가득해서 오히려 슬플 틈이 없었어. 그리고, 정말 너를 만났고.
아직 기억하고 있어? 오늘도 나 사고쳤어. (약간 부끄러워 꺄르르 웃고 하나 뺴 온 벽돌을 슬쩍 보여준다) 아니, 혹시 하고 살짝 쳤는데 그대로 무너지지 뭐야. 그래서 그 김에 가져왔지! (다시 집어 넣고 빙그레 웃으며) 머리는, 그냥. 무거워서 잘랐어. 졸업하고 내내 기르니까 불편하더라고. (슬픈 일은 모두 잊었는지 내내 방싯거리다가) 널 만날 줄 알았으면 꽃 말고 좀 더 좋은 선물을 가져올걸. 이 귀걸이가 마음에 들면 줄까?
 
배아라:그건 정말로 내가 부른 걸지도 몰라. (애매모호하게 대답해버린다.) 그래? 외려 슬플 틈이 없었다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곳인데 너무 슬프기만 하면 우울해지잖아. 이것저것 감상하고, 떠안거나 버리고 갈 게 많을 텐데... 고등학생까지 여기서 쭉 살았는데, 갑자기 철거된다고 하니 무척 아쉽지만.
사고를? (깜짝 놀라서 눈이 화등잔만해진다. 당신이 꺼낸 벽돌을 보고선 우와,탄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당신의 손부터 살핀다.) 다치진 않았어? 벽돌이 부서질 정도로 치다니 역시 바다는 힘이 세구나. 꽃집 일을 하면서 단련된 근력, 이런 건가... 거기 써진 말도 참 오랜만이네. 너랑 여행 가면 참 좋았을 텐데. 난 개인적으로 숲을 가고 싶었는데, 네 이름이 바다니까 바다도 한 번 가보고 싶었고... 그냥, 둘 다 가면 재밌었을 거야. 이 얘기도 그때 했었던가... (아스라한 말끝.) 아, 괜찮아. 바다 귀에 달려 있으니까 더 잘 어울리는걸. 게다가 소중한 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 난 네가 달고 있는 걸 구경할래.
 
윤바다:네 목소리가 닿았다니 다행이네. 불렀는데 상대가 못 들으면 속상하잖아. (다행이라는 듯 미소지었다) 어디든 네가 떠올랐어. 많이 슬플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철거할 거라 알려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다신 못볼 뻔 했잖아? 버릴 게 어딨어. 오히려 옛 추억 품 한가득 담고, 너와의 기억도, 새로 담고. 얼마나 좋았는데. 정말, 오늘이 끝이라니 아쉽다......
으응, 안 다쳤어 안 다쳤어. 나 튼튼한 거 알잖아. (봐달라는 듯 장난스레 윙크한다) 어릴 때부터 꽃집에서 살았으니 뭐, 이정도 근력은 당연한 거 아닌가? 좀 더 의지해도 좋아. (짐짓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며)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방학 때 많이 가볼 걸 그랬다. 어디든 즐거웠겠지. 네 눈인지 숲인지 모를 정도로 푸른 숲이랑, 우리의 이름을 가진 바다에도 가고, 정말... 즐거웠을 거야. (그저 미소짓는다. 미소 말고는 보여줄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귀걸이보다 네가 더 소중한데. 안되는 거야? 정 싫으면 팔찌처럼 나누지 않을래? (귀걸이 한쪽을 빼내 겹쳐진 손을 잡아 쥐여주었다. 숨기려 했지만, 무언가 남기려 하는 절박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아라:사실 부끄러워서 말은 잘 안 했지만, 항상 네게 의지하고 있었어. 바다는 힘도 세고, 성격도 멋지고... 강하잖아. 나보다 훨씬. 물론, 아까는 많이 울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정말로 매달리듯 당신의 팔을 양손으로 감싸고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키가 조금 더 커졌을까, 당신은.) 그러게. 대학이며 입시가 뭐라고 학생 때는 그렇게 바쁘게 공부만 했는지... 그때의 시간에서도 너와 행복했던 나날들이 있으니 아주 헛된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귀걸이 한 쪽이 기어코 손에 쥐여지자 망설이면서도 더 거절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제 왼쪽 귓불에 끼워넣는다.) 고마워. 귀걸이보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것도... 선뜻 나누어주는 것도.
 
아라의 목소리는 조곤조곤 나지막하게 이어집니다.
 
배아라:네가 오지 않을까 봐 많이 걱정했어.
 
겹쳐 잡은 손에는 여전히 온기가 느껴져 어쩐지 안심이 되어요.
 
겨울인데도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봄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눈앞의 상대는 겨울과 어울리지 않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부드럽게 바람에 나부끼는 연보랏빛 머리칼에 당신의 햇살 같은 갈색 머리칼이 섞여들던 시절을 기억하나요.
 
꽃송이처럼 붉은 당신의 눈망울에 새로 움트는 잎새처럼 비치던 녹색 눈동자는 또 어떻구요.
 
배아라:바다야, 나는 늘 이곳에 있었어.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꿈뻑, 천천히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벤치.
 
수마가 몰려오는 이유는 다정한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인가요, 아님 손을 토닥이는 다정한 누군가의 손길 때문인가요.
 
다시 깨어나면 사라질 것만 같은데, 애써 눈을 뜨려 해도 자꾸만 몸의 힘이 빠집니다. 동시에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요.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으면서도, 들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기만 합니다.
 
배아라: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어버려 미안해.
강한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그 슬픔의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 ... 잘 자, 바다야. 좋은 꿈을 꿀 거야.
 
툭, 그 말을 끝으로 바다의 머리가 아라의 어깨로 떨어집니다.
 
의식도 다시 꿈속으로 떨어져요.
 
바다는 아까 전의 낮잠보다 조금 더 긴 잠에 빠지게 됩니다. 아주 상냥한 손길과 함께요.
 
 
 
<듣기> 판정
 
윤바다:
듣기
기준치: 54/27/10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배아라:...이 다음엔 뭘 쓰면 좋을까. 여행지 같은 거?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정신을 차리면 바다는 아까 그 놀이터가 아닌 어느 골목길에 서 있습니다. SANc (0/1)
 
윤바다: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73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윤바다:여긴, 어디. (약간 몽롱한 머리를 슬슬 깨우며 당신의 말을 귀담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또 천천히 숨을 내쉬고….
 
골목의 담벼락은 뒤덮는 담쟁이 넝쿨 하나 없이 깔끔합니다.
 
교복을 입은 아라가 바다를 바라봅니다.
 
손에는 돌을 들고 벽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어요.
 
바다 역시 교복을 입고 있고요.
 
손을 쥐었다 피면 감각이 없습니다. 아, 또 과거에 머무른 그 꿈일까요.
 
배아라:숲에 먼저 가는 게 좋을까, 아님 바다랑 같이 바다에 가는 게 좋을까? (작게 키득거린다.)
 
아라의 얼굴은 벤치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어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담벼락에 돌로 무언가를 새기고 있어요.
 
싱그러운 미소가 어린 표정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것만 같군요.
 
아니, 오늘 바다가 겪은 일은 사실 모든 게 꿈일까요?
 
죽은 이에게서 온 편지와 다시 만난 아라,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가는 오늘 하루…
 
'졸업하고 나면 같이 여행가기! -바다&아라-'
 
골목에서 보았던 낙서입니다. 함께 새겼었던 그 낙서, 지금은 그때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배아라:바다야? 어디 아파? (당신의 대답이 늦어지자 쓰던 것을 마치곤 걱정스럽게 다가온다.)
 
윤바다:아니, 아니. 안 아파. 걱정 고마워...... (당신이 앞에 있음에도 갓 써둔 낙서를 빤히 보다가) ...숲. 숲에 가자.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엔 초목을 보고, 가을엔 단풍을 보고, 겨울엔 쌓인 눈을 보러 가자. 너, 숲을 좋아하잖아.
 
배아라:응? 그래, 좋아. 숲은 사계절이 유난히 뚜렷해서 더 예쁠 것 같지? (당신이 숲을 먼저 가자고 하니 금세 들떴는지 낯이 상기된다.) 졸업만 하면 숲을 돌아보고, 또 바다도 같이 가자!
 
미래를 모르는 이의 말은 막연하고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배아라:그나저나, 오늘은 바로 집으로 갈까? 졸업식 때 시간 많을 테니까. 그때 그 친구 집에서 만나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윤바다:...응, 기억하지. (꿈에서 다시 주지시켰던 졸업식 전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너에겐 얼마 전의 일이겠구나.) 오늘, 내가 데려다줘도 돼?
 
배아라:그럴까? 나야 고맙지! (웃으며 팔짱을 낀다.) 추운데 꼭 붙어서 가자.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웃음 섞인 이야기를 나누며, 오늘 수없이 걷던 그 길을 다시 건넙시다.
 
돌아가는 길, 보이는 것은 멀쩡한 [문방구]와 [분식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그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간판의 색은 바래지 않았고, 떨어져 나간 콘크리트 벽도 없습니다.
 
배아라:아, 맞아. 돌아가는 길에 문방구랑 분식점 좀 들릴까? 시간 많이 남았잖아. 그치? 어디부터 갈래? 내가 사줄게, 오늘은.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윤바다:음음, 분식집? 먹고 문방구에서 구경하다 들어가자. 자, 가시지요, 물주님! 쇤네 자알 모실 준비 되었습니다! (과장된 어조로 말하며 단단히 엮인 팔을 끌고 분식집으로 향했다)
 
하교 후 집에 가기 전,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인심 좋은 분식점입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새로 뽑은 듯 코팅이 번쩍이는 메뉴판에 익숙한 메뉴들이 보여요.
 
컵볶이 500원
 
튀김 500원
 
슬러시 500원
 
피카츄 500원
 
붕어빵 4개에 1000원…
 
현재에서는 바래어 보지 못했던 메뉴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배아라:(물주라니, 하면서 작게 웃음 터뜨리다가 메뉴판을 하나씩 읊으며 고민한다.) 바다는 뭐 먹고 싶어? 난 컵볶이 먹을까.
 
윤바다:그럼 난 피카츄 먹을래~ (안으로 들어오자 훅 끼치는 훈기에 손을 호호 불고는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바다와 아라의 차례가 되면… 미안하다는 듯 아주머니가 머리를 긁적이네요.
 
아주머니:아이고, 어쩌지? 오늘따라 애들이 많이 와서 재료가 그만 다 떨어져 버렸는데.
(두 사람 손에 작은 사탕을 쥐여준다.) 이거라도 받아가, 학생들. 다음에 오면 서비스 잔뜩 줄 테니깐!
 
윤바다:허어어엉... 정말요?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다. 그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우는 소릴 내다 당신의 어깨에 쓰러져 머리를 부비고는) 힝, 다음에 올게요! 사탕 감사합니다! (사탕을 쥐자 그 나잇대 청소년처럼 기분이 휙 바뀌어 활짝 웃으며 인사한다)
 
배아라:떡볶이 먹고 싶었는데... (서운한 티가 나지만 아주머니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리곤 저도 당신의 머리에 축 처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내일 다시 오자. 문구점엔 뭐라도 있겠지?
 
윤바다:어쩔 수 없지, 문구점은 품절이 드무니까 뭐라도 있을 거야. 그럼 바로 가볼까? (서운해보이는 당신을 와락 껴안고 안녕히 계세요! 크게 외치며 밖으로 향한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아주머니도 친절하시고.
 
신중하게 볼펜을 고르는 학생이나 불량식품을 잔뜩 집는 꼬마 친구들이 보입니다.
 
진열대는 색색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이제는 살 수 없는 그리운 것들입니다.
 
배아라:(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바다야, 우리 이거 한 번 해볼래?
 
아라가 가리키는 것은 익숙한 뽑기 기계.
 
윤바다:앗, 동전이 있으려나? (이전처럼 없을까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바다의 주머니에는 동전이 들어있지 않네요. 하필 지갑을 놓고 온 모양이에요.
 
배아라:아, 나 마침 딱 두 개 있어. (기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동전 두 개를 넣는다.)
 
하지만 동전을 넣으려던 순간,
 
땡그르르- 동전이 손에서 미끄러져 그만 기계 아래로 들어가 버리네요.
 
배아라:... 운이 없어... 역시 오늘 오하아사에 맞는 팔찌를 하고 왔어야 했나? (곤란한 표정으로 바다의 눈치를 본다.)
 
<아이디어> 판정
 
윤바다:아유, 괜찮아, 괜찮아~ 오늘 몇 순위였길래 그래?
지능
기준치: 60/30/12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뽑기 기계 아래로 들어간 동전이 어째 익숙하게만 느껴집니다.
 
팔목을 보면 지금은 텅 비어 있어요. 팔찌가 없습니다.
 
배아라:오늘... 10위인가 그랬어. (시무룩하게 자리 털고 일어남)
 
왁자지껄한 문방구에는 뽑기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뒤에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아쉽지만 이만 포기하고 가봐야 할 듯하네요.
 
윤바다:...다음에 뽑자. 오늘은 다음으로 미루는게 많네~ 정말, 어쩔 수 없구만! (시무룩한 당신에 부러 호쾌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자, 가자. 데려다줄게.
 
배아라:뭔가 오늘은 안 풀리는 날인가 봐. 모처럼 바다한테 쏘려고 했는데... 그래, 가자. (터덜터덜 걸어나옴)
 
문방구를 나가는 길, 몇 아이들이 익숙한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두 장소에서 모두 퇴짜를 맞다시피 했네요.
 
하늘은 이제 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합니다.
 
색의 온도와 반비례하게 기온은 떨어집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
 
꿈이라 그럴까요, 춥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배아라:놀이터라도 들렸다 갈까? 이제 졸업하면 올 일도 점점 없어질 테니까. 그래도 여긴 성공하고 실패할 일이 없겠지...
 
꿈속의 아라는 바다의 속도 모르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쉽게 거절할 수 있나요. 눈을 뜨면 전부 사라질 것들이잖아요.
 
윤바다:그래, 그러자. 아라 하고 싶은 거 다~ 해.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팔짱을 꼈다. 이렇게 따뜻한데 일장춘몽이라니, 조금 서럽네.)
 
둘은 노을을 등지고, 어느새 키보다 길어진 그림자와 함께 놀이터를 향해 걸어갑니다.
 
놀이터에는 작은 꼬마들만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모여 떠들기 바쁜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미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는 전부 차 있어요. 남은 건 페인트칠을 막 끝내 신문지가 덮인 벤치뿐입니다.
 
배아라:아, 놀이기구들이 있다는 걸 잊었네. (꽉 찬 그네를 좀 황망하게 바라보다가 벤치를 손바닥으로 살짝 눌러 페인트가 묻어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다 마른 것 같아. 앉을래?
 
윤바다:완전 새 거네. (잠들기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이 이토록 낯설 수가 있나. 어쩐지 서먹한 마음에 조심히 앉았다) 그래도 자리가 있어 다행이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면 잠시 짧은 침묵이 흐릅니다.
 
침묵으로 수놓은 하늘은 구름의 무늬뿐입니다.
 
붉은 노을은 어둠을 이끌고 산 너머로 사라져 갑니다.
 
배아라: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노을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해가 다 지면 진짜 추워질 테니까 오래 있음 안 되겠다.
맞다, 저번에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말했었지? 생각해봤는데 지금은 좀 이른 것 같아서... 졸업식 전날에 데려다주려고. 괜찮을까?
 
바다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날 둘은 해가 지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죠.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눈이 녹고 꽃망울이 열리는 졸업식의 해.
 
아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은 낯설기만 했어요.
 
그 앞에서 몇 번이고 무너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윤바다:...지금은 일러? ......왜? 아니, 네가 데려가준다면 어디든 좋지만, ...알았어. 졸업식 전날이야. 꼭 그날, 나랑 가야해. (입김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마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어 정면만 꼿꼿이 바라본다.) 너랑, 눈이 녹고, 봄이 오는 걸 보고 싶어.
 
배아라:으으음... 그런 게 있어. (비밀이야, 속삭이는 소녀의 낯은 순진무구하기만 하다. 닥쳐올 일에 무지렁이처럼 깜깜한 채로.) 응, 꼭 같이 가자. 나 약속한 건 잘 지키잖아?
새 봄도, 여름도, 사계를 같이 봐야지. 아무래도 대학은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지만... 어른이 되어도 우린 여전히 친구일 거잖아?
 
윤바다:(감춰라, 괜찮다, 나는, 네 앞에서 괜찮다. 입밖에 내기도 전에 떨리려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헛기침하고 여상하게 말했다) 널 어떻게 안 믿어. 모두 같이 봐야지. 일정만 맞는다면 쉬운 일이잖아?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친구할 거니까.
 
배아라:응. 계속계속 친구해줘. 내가 만약 실수하거나 너를 화나게 하는 일이 있어도... 더 잘해볼게. 항상, 너를 좋아하니까... (얼굴이 조금 불그스레해져선 팔짱을 좀 더 세게 낀다.) 졸업하고 나면 뭘 할 거야, 바다는? 난 대학도 대학이지만 들이나 밭에 가서 약초 캐는 걸 해 보고 싶어. 할머니께서 알려주신대, 재밌을 것 같아. 식용인지 독초인지 구분도 해 보고...
 
윤바다:뭐어? (정면을 보고 입꼬리나 파들거리다가 어이가 승천하는 말에 고개를 홱 돌리고) 그거 너무 내가 할 말 아냐? 화나게 해도 내가 하고 실수를 해도 내가 할텐데 아라는 보살님이야? (와다다 내뱉다가 또 애처럼 굴었다는 자각에 얼굴을 붉힌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야. 마아아안일 네가 실수하거나, 날 화나게 해도 우린 쭉! 친구일 거라고. (세게 엮인 팔짱에 쏟아내던 말을 줄이고 묵묵히 듣다가 고생길 열린 당신을 측은하게 본다) ......아라야, 밭은, ...그래. 네가 즐겁다면 됐어. 그치만 시작하기 전에 근육통 약 먹고... 알았지? (결국 입에서 나오는 건 당신 걱정이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친구인걸.) 나는 아마 아빠 일 돕지 않을까? 엄마가 하는 일은 별로 재능 없고, 플로리스트나 준비해볼까 해.
 
배아라:으, 응??? (와르르르 쏟아지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반문한다. 혼란스러워하는 듯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느림보지만 아무튼 당신의 말뜻은 대충이나마 알아들은 것 같다.) 하지만 나도 바다를 화나게 할 수도 있잖아? 실수도... 나 사실 실수 엄청 자주 하는 편인데에. (말끝 늘리며 슬쩍 눈치봄) 나도 바다가 나쁜 짓 하거나 실수해도 계속계속 친구할 거지만. (측은한 시선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 갸웃거림) 근육통 약이 필요할 정도야? 밭에서 일해본 적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약초 캐는 정도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플로리스트 멋지다. 바다한테 잘 어울려. 대학도 그쪽 학과로 가는 거야? 바다한테 꽃 선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겠네. 우리도 교환하기로 했지만.
 
윤바다:네가 뭘 하든 난 네 편이라는 말이야. 조금 싸우면 어때? 네가 실수하면 어떻고? 하하, 내가 널 용서 못할 일은 없을 거야. 봐, 지금 그림자까지 한몸처럼 보이는걸.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가 꼭 거대한 한 명처럼 보인다. 그걸 보고 키득이다 자연스레 웃는 낯으로 당신을 보며) ...우리가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것도 감정 문제로.
으음~ 역시 안해봤으려나, 밭일. 어릴 때 고구마 캐본 적도 없어? 허리도 팔도 지인짜 아프거든. 쉬울지도 모르지만 약은 챙겨 가. 대비해서 나쁠 일 없잖아? (한쪽 어깨를 으쓱인다) 학과도 아마 조경디자인이나 원예 쪽으로 가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도움되는 곳에 가야지. (이렇게 다시 나온 꽃다발 교환식에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우리도 교환해야지. 가장 크고 예쁜 꽃다발 준비할테니까, 졸업식 늦지 말고 와야 해.
 
배아라:정말? 바다는 항상 참 마음이 넓구나. 역시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던데... 나도, 별로 힘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너의 편이야. 알아줬음 좋겠어. (당신의 시선을 따라 합쳐진 그림자를 응시한다.) 어엇? 그러게. 마침 그림자가 딱 저렇게 생겼네.
고구마... 모르겠어, 어릴 때 몇 번 가본 적 있었나... 근데 그때는 어려서 그런지 많이 하지도 않았고, 체력이 넘쳐나서 별로 안 힘들었던 것 같아. 차에서 곤히 잠들었던 기억은 희미하게 나지만. 하지만 지금 우리는 3년간 야자를 하면서 많이 퇴화(?)된 몸이니까... 네 말대로 준비를 좀 단단히 해야겠네. 미리 조언해줘서 고마워. 바다는 사실, 어딜 가도 잘 하겠지만... 역시 네 재능을 가장 꽃피울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지? (혼자 납득하고 고개 끄덕끄덕)
절대 안 늦을게! 그 전날부터 알람 맞춰두고 잘 테니까. 미래 플로리스트가 골라오는 꽃다발, 기대된다. (해말갛게 웃다가, 문득 핸드폰 시계를 보곤 아차한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네. 이제 집에 갈까?
 
윤바다:사람이 이름 따라간다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아라, 우린 같은 뜻의 이름을 가졌으니까. (와, 이거 운명 아냐? 작은 일에도 쉽게 웃어버리는게 정말 5년 전 그 때 같아서 몹시도 즐거웠다.) 큰 힘이 돼. 지금도, 먼 미래도 말이야.
기억이 미화됐나? 어쨌건 힘든 기억이 아니었다니 다행이네. 좀 피곤해도 즐거운 경험이 되겠지. 아라가 흥미 가진 일이잖아? 흥미를 가진 이상 뭐라도 얻어낼게 분명해. 감정이든, 결과든. (그날 오하아사 운세도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장난스레 말하며 당신의 행운을 빌어준다. 네가 좋은 일을 해. 오늘을 살면 또 내일이 오니까,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비록, 얼마 안 남았지만. 미래를 말하며 과거에 잡힌 생각에 다시 앞을 본다)
기대하라고, 그 기대보다 훨씬 멋질 테니까. (저녁시간이 지났다는 말에 움찔 놀라곤) 벌써 그렇게 됐단 말야? 얼른 가야겠네, 오빠가 다 먹어버리겠어. 어서 가자. (꼭 잡은 팔짱을 끌고 종종거린다)
 
이제 놀이터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몇 없습니다.
 
해는 완전히 지고, 거리를 밝히는 건 가로등뿐입니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들이 폴폴 나오고 있어요.
 
<관찰력> 판정
 
윤바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깜빡, 가로등의 빛은 불안하게 꺼졌다 켜지길 반복합니다.
 
파스스, 가로등에서 퍼져나오는 빗줄기가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뒤돌아선 아라의 모습이 안개가 낀 듯 경계가 모호해져요.
 
안녕, 안녕… 분명 그런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시야가 흔들리고, 또 흐릿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본 아라는 맑게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요.
 
바다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립니다. 여전히 다정하고, 오늘 하루는 계속 곁에 맴돌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집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요, 어디론가 떨어졌던 정신이 차차 돌아옵니다.
 
BGM
 
 
 
배아라:바다야. 잘 잤어?
 
다시 깜빡, 눈을 뜨면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아라는 당신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습니다.
 
윤바다:...어어, 잘 잤어.....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은데.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하고) 미안, 이렇게 잠들 줄은 몰랐는데... 많이 기다렸어?
 
비몽사몽한 정신과 돌아오지 않는 현실감.
 
꿈에서 깬 걸까요? 여긴 정말 현실이고, 방금은 꿈이고…
 
그 얇은 경계선에서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은 붉어요, 노을이 지고 붉은빛이 상처마냥 하늘을 물들입니다.
 
손을 괜히 쥐었다 피면 있는 그대로 압각이 느껴집니다.
 
바다의 옷도 교복이 아닌 처음 입고 온 그대로예요. 꿈이 아닙니다.
 
배아라:그리운 꿈? 이곳에 관한 꿈이었을까? (많이 기다렸냐는 물음에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별로. 푹 자는 것 같길래 일부러 안 깨웠어. 여기까지 오는 데 피곤했을 텐데...
그래도 이젠 움직일까? 조금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 같아.
 
아라는 바다에게 손을 내밉니다.
 
자연히 시선을 내리면... 어느새 아라의 손 절반이 흰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손이 닿자, 오늘 몇 번이고 본 빛처럼 부서져 흩어지는 그 손. SANc (0/1d2)
 
윤바다:(별가루따위가 아니라 산산이 부서지는 당신에 손을 움츠리다가)
SAN Roll
기준치: 56/28/11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입꼬리를 올리고 마주 잡는다)
 
맞닿은 손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지만, 그 흰 부분은 조금씩 커져가고 있습니다.
 
아라를 잡어먹을 것처럼, 이 빛처럼 아라도 부서질 듯이.
 
빛은 벌레가 잎을 먹듯 아라를 좀먹고 있어요.
 
배아라: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붉은 노을에 비친 살구빛 피부, 눈가가 언뜻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던가.) 가자, 바다야.
 
윤바다:(그 때와 같은 온기가 이렇게 선명한데 왜 마지막이야, 아라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빛무리가 널 잡아먹는 것 같아, 노을이 널 앗아갈까 두려워. 떨리는 손끝을 들킬까 손을 꼭 잡고 숨을 나눠 내쉰다.) 그래, 가자. 가자 아라야. 그 때부터 쭉, 보여주고 싶던 게 있다며. (마지막임을 안다. 정말 마지막이라면 끝까지 웃는 얼굴로 남고 싶어 꿈꾸던 그 때처럼 웃는다.)
 
어째서 사람은 예정된 이별을 느낄 수 있는 건가요.
 
마지막, 그 익숙해질 수 없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어지럽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이번에는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겠죠.
 
적어도 웃는 얼굴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그런 여유라도 주어진 지금이, 차라리 얼마나 다행인지...
 
눈가가 시린 이유는 찬 겨울바람 때문일 겁니다.
 
아라는 손을 잡고선 익숙하게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느새 그림자는 우리들의 키보다 조금 더 커져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철컹, 그리고 와르르.
 
또 먼 곳에서 어느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골목을 지나, 위로 향하는 돌계단을 지나, 오솔길과 처음 보는 건물을 지나…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아라의 뒤를 따라가면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옆에는 저수지가 있으며, 언덕 아래로는 마을 풍경이 전부 보이는 높은 이곳.
 
마치 전망대 같습니다.
 
길게 늘어진 검은 전깃줄이 오선지의 악보마냥 이어지고, 또 모든 건물은 울긋불긋한 노을을 머금는 중입니다.
 
노을 탓에 마을 전체가 불이 난 듯, 매화꽃잎을 덧바른 듯 붉게 물들고 화사해집니다.
 
비록 이제는 거의 철거가 되어 발랄한 생기 대신 황폐함이 더 크게 느껴지지만, 정말로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윤바다:예쁘다...... (부서지는 노을빛을 한껏 받은 오래된 마을을 못박힌듯 보고 있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스쳐도 손 안의 따스함이 이 광경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몇 년이나 직접 발 딛고 살아간 나의, 우리의 마을. 이 시간과 풍경을 눈과 머리에 온전히 새기려 쉼없이 훑었다. 저수지, 언덕, 무너져가는 마을 위의 전깃줄.) ...아라야. (다시금 숨을 내쉰다. 노을에 부서지는 널 볼 용기가 생길 때까지.) 고마워.
 
문득 본 아라의 몸은 발목까지, 그리고 손은 또 완전히 빛이 되어 반짝… 흩어지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있어요.
 
배아라:... ... 예쁘지? (사라져가는 제 몸을 의식적으로 내려다보지 않고 신경쓰지 않으려 애써보아도 노을에 비쳐 산란하는 빛무리가 이렇게도 선명하여서. 끝이 왔다는 걸 당신도, 저도 알고 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말없이 당신을 따라 몇 번이고 홀로 보았던 풍경을 다시금 길게 훑는다. 이제는 함께가 되어, 조금 더 색다른 감상을 품에 안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공간 같더라구. 힘들거나 쓸쓸할 땐 이곳에 와서 많이 위안받았었지. 그리고 네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
오늘 널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뻐. ...졸업을 축하해, 바다야.
 
노을을 등지고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역광이 진 그 얼굴은 왜 마냥 슬프게 느껴지나요?
 
윤바다:(눈앞이 흐려져 빛이 산란한다. 이지러지는 시야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 나도, 나도 기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널 만나서 기쁘지 않은 적 한 번도 없었어. (이 노을이, 이 바람이 널 앗아가는 거라면 품에 안아 모두 막아줄텐데 그것도 아니라서, 나는, 그냥.) 아라야, 졸업, 축하해...... (사라져가는 널 안고 시기 놓친 축하를 전한다. 이제 네가 그 시간에서 졸업하길 마음 깊이 바라지만 터져 나온 눈물이 멎질 않아 네 어깨를 적실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졸업식에, 내가 만든 꽃다발 주면서, 그렇게. 그런데 네가 오지 않아서, 그래서...... 미안해, 아라야, 미안해...... 오늘이 끝인 것처럼 말하지 마......
 
배아라:바다야... (불그스레해진 눈가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한 번 흘려보낸 눈물은 마치 둑을 막고 있던 돌이 홍수에 쓸려나가는 것처럼 쉴 새도 없이 뚝뚝 흘러내려, 땅을 적시기도 전에 빛무리 속으로 삼켜져 버린다. 너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너를 또다시 아프게 할 걸 알면서...)
나는 죽은 후에도 이곳에 계속 살았어. 너를, 친구들을,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붙들었던 것 같아... 비록 영혼의 상태여서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는 없었지만 계속 너를 기다렸어.
홀로 가늠하지도 못할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이 장소와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는데, 이제 이곳이 철거가 된다고 하니... 동네가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나도 사라져 버릴 거야. (이제 팔까지 옮겨간 빛무리를 살짝 움직여 보였다.) 지금처럼. 아마 오늘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이겠지.
소식을 전할 길 없으니 너를 만날 일은 사라질 때까지 없겠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라. 누군진 알 수 없었지만, 아름다운 마지막을 자신에게 보여달라면서... 내게 5년 전의 몸과 하루의 시간을 줬어.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네게 편지를 쓴 거야. 계속 너를 기다려서, 겨우 이렇게 만날 수 있었네. 네게 마지막으로라도 인사를 건네고 싶었어. (눈물에 좀먹혀 목소리가 마구 흔들린다. 얼굴은 붉어져 꼴사납게 일그러질 것이다. 저 역시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끝의 순간에는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었다고.)
내가 사라져도... 너무 많이 울지 말고, 잘 살아야 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바다야. 넌 그럴 수 있지?
 
행복하고, 밥은 잘 챙겨 먹고. 좋은 사람과 좋은 일만…
 
아라는 가만가만 두서없이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5년 동안 쌓이고 쌓여, 묵어버린 그 말들을요.
 
헤어짐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아라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헤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연하지만…
 
무릎까지, 이젠 머리카락의 끝부분도.
 
부서지는 아라의 몸은 노을보다 더 밝게 빛납니다. 빛무리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요.
 
마지막으로 노을이 지기 전, 작별 인사를 해요.
 
윤바다:(틈없이 껴안은 채 오열하다 네 목소리에 꾹꾹소리를 눌러담는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거리를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외로웠을 텐데. 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있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어, 아라야.)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당신을 여기에 두고 가면 수없이 많은 추억, 그리고 기억 모두 이렇게 사라지겠지. 마치 철거되는 이 마을처럼... 이 마을도 아마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것을 쌓아 다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다신 발걸음 할 수 없겠지.노을처럼 부서지는 당신의 팔을 찬찬히 쓸러보고는)
아라야, 늦게 와서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 그리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네가 없는 곳에 돌아오기 무서웠어. 모든 게 그대로인데 너만 없을까 두려워서, 그래서 늦었어.
(눈물을 벅벅 닦고 붉어진 눈가를 한 채 짓궂은 듯, 어쩌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정말, 넌 여전하네.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해서 정말... (이제 혀끝에 내뱉을 말이 마지막이겠지. 네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해야한다. 5년 전에 건네지 못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 난, 널 기억하며 살아갈 거야. 덜 울고, 행복하고, 밥도 잘 먹으면서, 그렇게... 그러니까 너도 이번처럼 외롭게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서 새 친구도 사귀고 그래. 난 잘 지낼 테니까, 아라 넌 하아안참 뒤에 내가 올 때 마중 와줘. 그 때는 꼭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갈테니까.
 
배아라:늦게 오지 않았어. 전할 방법이 없었는걸. 너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바다야. 난 누구도 보지 못하고 떠나리라고 예상했었으니까. 지금 내 눈 앞에 네가 있는 게 내겐 얼마나 벅차고 기쁜 일인지... (당신의 짧은 머리칼에 제 눈물이 섞여 맺힌다. 바닥에 흘러 자국을 남겼을까, 아주 잠깐 마른 땅을 적셨다가 이내 흡수되어 사라져버리고.) 무서움을 견디고 와 줘서 너무 고마워. 내 친구, 내 소중한 친구...
(당신의 입술이 빚어내는 마지막 인사에 결코 당신 감정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엇보다도 기쁘게 고개를 끄덕인다.) ... ... 힘들면 울어도 괜찮아. 그래도 네가 힘든 날보다는 보다 행복하고 웃음짓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 지나친 바람이 아니겠지, 이건?
하지만... ... (문득, 목소리가 흐려졌다. 환하게 웃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들어 간신히 입가에 걸쳐진다.)
 
중간중간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해가 짐에 따라 그 소리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합니다. 이젠 정말 헤어질 때가 온 걸까요.
 
우리의 겨울은 유독 시리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라는 아주 오랜 시간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초록빛 두 눈에 가득 그려 다신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길 것처럼.
 
영원처럼 느리게 흐르던 시간 끝에 그가 입을 뗍니다.
 
배아라: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 바다야.
... 날 잊어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아라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요?
 
일그러진 미간과 함께 애원하듯, 목소리가 잘게 떨립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영영 잊는 건 이별과는 또 다른 의미죠.
 
목이 메이는 듯한 기분에 숨이 절로 턱 막혀오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탁이 이렇게 잔인할 필요까지 있나요?
 
윤바다:......내가? ...너를? (이토록 잔인한 말이 또 있을까. 기껏 살아가겠다 다짐하기 무섭게 떨어진 마지막 부탁에 마음이 모래성처럼 부서진다.) 시간이 지나면 살아지겠지. 빛나던 우리의 추억도 조금씩 빛바래겠지. 그런데, 어떻게 아예 잊어달라고 해? ...왜? 왜야?
 
배아라:(직전, 당신이 저를 기억하며 살아가겠다 말했기에 더더욱 입에 올리기 어려웠던 부탁. 그러나, 그럼에도... 삼킬 수는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를 친애하고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나 혼자만의 진실로 떠안은 채 사라져서는 안 되는 거니까. 비록 네가 나를 애증하게 되더라도...)
바다야. 죽은 사람이 하루나마 다른 인간과 똑같이 살아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마 무언가 마법 같은 힘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은데... 지금 나를 잊지 않으면 이 부작용이 네게도 영향을 미치고 말 거야. 나의 미련과 욕심이 결국 만나선 안 될 사람인 너를 꿈을 매개로 해서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 네가 지금 나를 잊어주겠다 말하지 않으면... 너의 꿈속에 매일같이 내가 나올 거야. 평생을. 추억과 슬픔은 품에 묻어두고 이따금 꺼내봐야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게 매일매일 나타난다면 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겠지.
매일 밤마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받는 꿈을, 혹은 이렇게 헤어지는 꿈을 꾸게 될 거야... 네가... 그런 짐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윤바다:(비현실을 현실로 끌어다 놓은 죄로 이런 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아니. 너에게 이 시간을 선물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자. 무너져가던 마음을 천천히 쌓아올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의 대가가 나만의 기억이면 적어도 너만은 이 기억을 가지고 노을 너머로 갈 수 있겠지. 허물어진 표정을 다시 가다듬는다. 네게, 마지막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나는 아직 서 있을 수 있다.)
그건 나만의 기억이지? 네가 괴로울 일은, 없는 거지? (파도치는 마음이 가라앉자 잔잔히 미소지을 수 있었다.) 욕심 부려줘서 고마워. 난 늘 네게 받기만 하네. 사실, 이제 네가 매일 밤 찾아오지 않은지 꽤 됐어. 이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신발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다시 스러져가는 당신을 똑바로 마주봤다.) 오늘을 잊어도 내가 널 잊을 일은 없으니까, 오늘의 널, 보내줄게.
(걱정하지 마. 이 노을이 지기 전에 활짝 웃으며 당신을 배웅한다. 걱정 없이, 울지도 말고. 나중에 보자, 아라야.)
 
배아라:(끊임없이 눈물이 샘솟아 진주 발치에 고이듯이 뚝뚝 떨어져간다. 이것이 슬픔의 눈물인지, 저를 이해해주는 당신이 애틋해서인지, 그나마도 제가 기억을 안고 갈 수 있어 기뻐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응, 오로지 너의 기억에서 나는 사라지는 거야. (어찌 아쉽지 않을까. 아름다웠던 추억과 기억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릴 저 혼자만의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어차피 죽고 말았으니까. 너는 살아가야 하니까. 내가 네 발목을 잡을 수는 없으니까. 너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 나는, 괜찮을 수밖에 없는 거야.)
고마워, 바다야. 나는 너를 떠나 바다를 보러 갈게. 샛푸른 바다에 녹아들어 오래도록 헤엄쳐 갈게...
내 사랑하는 친구.
.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고 몸을 끌어안는 손은 이제 형체가 없습니다.
 
그저 따스한 빛만이 바다를 감싸고 있어요.
 
아라의 눈에서 떨어지는 건 그 수많은 파편 중 하나겠죠. 미처 삼키지 못한 눈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5년의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부탁이 망각이라면 우린 너무 슬픈 이별을 맞이하는 게 아닌가요?
 
마지막 안녕 역시 잊히고 말 것입니다. 아라의 이름 한 획부터,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눈앞의 상대는 한 줌의 빛이 되어 바스러질 것 같고, 천천히 기울어진 해는 누군가가 없는 내일을 향해 떨어집니다.
 
우리의 끝은 왜 슬픔으로 얼룩지고, 철거되지 못해 이 자리에 남을까요….
 
BGM
 
아라는 바스러지는 팔로 눈가를 벅벅 닦더니,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이게 마지막입니다.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주고 떠나는 거예요.
 
추억하면 더욱 슬퍼지는 기억이라니, 그건 누굴 위한 것인가요.
 
노을이 산 뒤로 완전히 넘어갑니다.
 
희미한 빛만이 남은 아라는 바다를 그러안습니다. 그 빛은, 그 온도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해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아요.
 
잘 지내, 친애해, 그리고...
 
여린 목소리가 점점 작아집니다.
 
바다가 품에 안고 있던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지탱하던 무게가 사라지자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입니다.
 
눈물이 고여 흐릿한 앞을 보면 완전한 어둠 속 넓게, 하늘로, 또 하늘로.
 
시린 겨울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이 보입니다. 손이 닿자 으스러지는 그 연약한 빛이요.
 
아라가 있던 빈자리에 무엇인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뽑았던 팔찌, 그리고 저건…
 
생그러이 향기를 뽐내는 푸른 수국 꽃다발입니다.
 
졸업식 때, 우리가 서로에게 주마 약속했었던 그 꽃.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보드랍고 여리던 목소리가, 아스라했던 온도가...
 
…그게 누군가요 바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은 바다가 살던 동네입니다.
 
기억이 흐릿하군요.
 
오늘 기차를 타고, 동네를 둘러봤습니다. 해가 지면 철거가 끝난다고 했으니 이제 슬슬 빠져나가야겠죠.
 
당신은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요?
 
영문 모를 꽃다발을 가만히 쳐다보면, 낡고 바랜 갈색 카드 한 장이 꽂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끝을 간질이는 꽃들 사이 그 카드를 꺼내어 읽읍시다.
 
어쩐지 눈시울이 흐려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카드에 적힌 글귀는...
 
End 1. 너의 졸업식을 축하해.
 
아라 로스트, 바다 생환
 
바다 이성치 1d5 회복
 
바다는 아라에 대한 것을 모두 잊게 됩니다.
 
...
 
...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 낮보다 밤의 이곳은 더욱 한산합니다.
 
침묵으로 수놓인 기차 속 작은 숨소리마저 크게 들립니다.
 
덜컹, 잠시 멈춘 기차 밖으로 흰 눈이 내리는 것이 보입니다. 올해의 첫눈이에요.
 
누군가의 눈물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꽃의 꽃말은 무엇일까요.
 
졸업, 졸업…
 
말에도 중력이 있다면 이건 조금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덜컹, 기차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합니다.
 
부재가 익숙한 공간으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번 겨울은, 유독 바람이 시리다는 기분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