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19시간
환한 빛이 망막을 투과하자 익숙한 대피소 내부가 보입니다.
곧 차가운 기온이 앨릭스의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코레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자리에 있었던 코레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털실과 바늘, 줄지어 세워진 인형과 책 등등.
앨릭스와 코레트가 만들어낸 조악하지만 가득 찬 공간이 보입니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겨울잠을 자기에는 봄이 찾아오지 않을 시대죠.
앨릭스가 누워있는 대피소 한쪽 벽은 지진과 해일, 충격을 버티기 위한 고강도 특수 강화 유리로 제작되었습니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보이는 밖은 전부 새하얀 눈에 파묻혀 있습니다.
지구 전체가 얼음 같은 추위에 잡아먹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탁자에서 떨어져 있는 책들. 커피 자국이 남아 있는 컵. 일정한 속도에 맞춰 깜박이는 전등….
그 전에 추위에 적응이라도 할 겸 방을 정리해두는 게 낫겠습니다.
앨릭스와 코레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이 대피소를 집으로 삼아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유리창 밖] [탁자] [냉장고] [현관] 조사가 가능합니다.
앨릭스 J. 셔먼:(비척비척 일어나 멍하니
유리창 밖 너머를 바라본다.)
만약 저 창에 손을 댄다면 한기가 올라오겠죠.
밖이 얼마나 추울지, 직접 닿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지구를 덮은 이 눈이 바다이고, 산이고. 곧 하늘인 것처럼 눈은 지평선도 되고 수평선도 되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 바다인지 또 어디까지가 땅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나무는 메마르고 가난한 채로 무거운 눈을 버티고 있습니다.
멸종의 시대가 다가오기 전 상상해봤던 인류의 멸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구에 살고 있던 모든 생명체들은 추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관찰력
기준치: |
70/35/14 |
굴림: |
5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작은 점부터 시작해 손가락으로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지만 확실합니다. 코레트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 곧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앨릭스 J. 셔먼:(추운데 또 어딜 나갔다 온 거야...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건가?)
(오기 전에 빨리 치워놔야겠어. 탁자 위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탁자 위에는 오래된 [신문]들과 물컵. 책 몇 권이 어지럽게 놓여 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책을 반듯하게 눕혀서 정리해두고,
신문을 들어 읽어본다.)
인쇄된 글자 대부분이 지워졌고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고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단어들 몇 개가 전부입니다.
단어들은 어떠한 집합도 가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감정
기준치: |
25/12/5 |
굴림: |
44 |
판정결과: |
실패 |
낡은 신문이 금세라도 찢어질 듯 바스락거립니다. 잘 정리해둡시다.
앨릭스 J. 셔먼:(이제와서 필요가 있나, 싶지만... 잘 정리해서 탁자 한 쪽에 놔둔다.)
(냉장고를 둘러본다. 식량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더라.)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의 제목은 제각각입니다.
인류가 멸망을 선언하기 전 쏟아져 나온 수십 권의 생존과 우주, 그리고 새로운 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책들.
코레트는 지구에 남은 이후 이 책들을 참 많이도 읽었습니다.
남겨진 책들이라곤 이런 것들뿐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탁자와 함께 마련된 의자에는 코레트의 겉옷이 걸려 있습니다.
원래는 벽의 옷걸이에 깔끔하게 걸어두는 편인데, 미처 신경쓰지 못한 건지 다소 아무렇게나 널려 있네요. 정리해줄까요?
앨릭스 J. 셔먼:(...다른 옷 입고 나갔나? 의자에 걸쳐진 겉옷을 들어 옷걸이에 걸어둔다.)
(냉장고도 마저 살펴본다.)
겉옷을 정리해주다 보니, 옷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이 하나 잡힙니다. 이게 뭐지?
앨릭스 J. 셔먼:(뭐지? 궁금하니까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작은 물건을 꺼낸다.)
초소형으로 제작된 이 기계는 지구 주변을 이루고 있는 우주 상공 주파수를 미세하게 감지하고 그들이 보낸 신호를 지구의 언어로 변형해 송출시킬 수 있습니다.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냉장고는 실상 쓸모없는 제품입니다.
코레트와 앨릭스가 먹고 마시는 음식들은 온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코레트는 방 안에 냉장고를 가져다 두었습니다. 무슨 고집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물 두 병과 단단하게 밀폐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습니다.
멸망한 지구에서 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조금 웃기네요.
앨릭스는 술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틈새질문)
앨릭스 J. 셔먼:(옛날의 집에 한가득 쌓여 있었던 위스키들과 와인들을 떠올린다. 나름 즐기는 편이었는데. 술... 마시면 혼나려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젓고 냉장고의 문을 닫는다. 하나라도 더 아껴야지.)
(이제 다 왔으려나? 입고있던 옷을 더 꼼꼼히 여미고 느릿한 걸음으로 현관에 나가본다.)
앨릭스가 막 현관으로 향할 즈음 코레트가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코레트:아, 일어나셨어요? (옅게 미소하며 문을 닫았다.)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는 코레트의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상냥한 표정이라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습관 등등.
협소한 현관에 코레트와 앨릭스의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응. 나 자고있는 동안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거야? 추웠을 텐데, 그냥 여기 있지 그랬어. (눈을 털어내는 걸 도와준다.)
코레트:전망대에 다녀왔어요. 절반 넘게 눈에 파묻혀 있지만 그래도 무너지거나 한 곳은 없더군요. 다행이죠. (
아, 감사해요. 눈 털어주는 손길에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넨다.)
대피소 전망대는 대피소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입니다.
생존 인류를 태운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도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우주로 날아 간 날이.
전망대는 우주선에 타지 못하고 잔류한 인구가 우주로 향하는 우주선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주선에 탄 채 새로운 지구,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선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코레트와 앨릭스를 제외하고 지구에 남게 된 인류들은 모두 멸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코레트와 앨릭스는 얼어붙은 행성에 남은 지구 최후의 인류입니다.
앨릭스 J. 셔먼:(...그런지 벌써 3년이나 됐지. 작게 웃으며 머리에 묻은 눈도 털어준다.) 그거 다행이네. 그나저나 밖은 어때? 여전히 많이 춥지?
코레트:네…… 기온이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봄에 피어나는 꽃들을 본 지도 아주 오래전 일 같아요. (씁쓸하게 바깥을 응시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3년이었지만, 그 시간 내내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으니.)
앨릭스 J. 셔먼:그러게. 예전엔 꽃이 참 흔했는데... 겨울철 꽃도 다 죽은 것 같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세히 봐둘 걸 그랬나 봐. (네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끈다.) 이불 덮고 있어.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이젠 병원도, 의사도 없는데.
코레트:대피소 책장에 식물도감이 한 권 있더군요. 그 책에서라도 꽃을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얼떨결에 침대로 데려가진다.) 그 정도는 아닌데…… 저 건강한 편이잖아요. (눕지는 않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불 한쪽을 들어보인다.) 그럼 같이 덮고 있으실래요?
앨릭스 J. 셔먼:나도 알고 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잖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내 말 맞지? 덧붙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붙어 있으면 좀 더 따뜻해지겠지. (네 옆자리에 앉고는 함께 이불을 덮는다. 두꺼운 옷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여길 떠난 사람들 말이야. 잘 도착했을까? 벌써 3년이나 지났잖아.
코레트:맞는 말이네요. (수긍하며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앨릭스가 빈틈없이 이불을 덮을 수 있도록 잘 살펴주곤 대피소 내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두 사람의 유일한 안식처.) 그러길 바래야죠. 그곳은 지구보다 훨씬 환경이 나은 곳이라고 했으니, 도착만 무사히 했다면 지금쯤 새 터전을 꾸렸겠네요. (한창 우주선에 탈 이들을 모집할 적 그는 동생들을 태우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온 사방을 뛰어다녔었다. 후보에서 자연스럽게 본인을 제외하고서. 평범한 시민에 불과한 제 처지로서는 동생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만도 한계였으니, 그가 우주선에 타지 못한 건 반쯤은 자의고 반쯤은 강제였다.) 그때 당신도 타지 못했다는 걸 알고서 얼마나 놀랐었는지.
앨릭스 J. 셔먼:그러게. 어디든 이렇게 폭삭 망해버린 지구보다야, 훨씬 낫겠지. (너와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히고 이불 속에서 네 손등을 감쌌다. 어쩐지 이 넓은 지구에 둘 뿐이라는 사실이 더 깊이 다가와서. 너도 마찬가지겠지, 아마.) ...네 동생들, 잘 갔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거기서는 꽃들도 피어날 테니까, 봄 맞이 꽃놀이를 갔을지도 모르지. (소리내어 웃는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고요한 대피소 안에서 조용히 울린다.) 음, 뭐. 자리가 없어서 못 탔어. 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고... 겸사겸사 하나 남은 내 친구도 챙길 겸, 남았지. 그때 우리 딱 마주친 거 기억 나?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운명적 사랑인 것처럼 마주쳤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은 잊지 않는다.)
코레트:그곳에도 이곳처럼 사계절이 있으려나요? 말씀대로라면 좋겠네요. 분명 즐겁게 어울리고 있을 테죠……. (그 꽃을 보며 가끔씩은 저를 떠올려주기를 바랐다. 비록 만날 수는 없더라도 서로의 마음 안에 남아있다면 완전한 이별이 아닐 테니. 대피소 안에 퍼지는 웃음에 답하듯 작게 웃었다. 세상은 춥게 얼어붙었지만 감싸쥔 손은, 이 이불 속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따뜻하다. 그래서 버텨낼 수 있었다.) 네, 그날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네요. 아는 얼굴을 만났지만 마냥 반가워할 수도, 기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그나마 그 난리 속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 게 유일하게 다행이었어요. 의지할 상대가 있잖아요. 혼자였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앨릭스 J. 셔먼:그럴 거야. 봄이 오면 꽃을 구경하고, 여름이 오면 시원한 걸 먹으면서 수영도 하고, 가을이 오면 단풍도 구경하고.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너와 시선을 마주한다. 네 녹색 눈동자를 보면, 싱그러운 계절이 다시금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그래서 이따금씩 혼자 있을 때면 네 눈동자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넌 모르겠지만.) 맞아. 내가 만약 혼자였다면... 술에 절어있었겠지. 우리 집 술 창고에 침입해서 말이야. 솔직히,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없었다면... 난 계속 혼자였을 테니까. 죽을 때까지. ...이건 좀 이기적인 생각인가? (힘 없는 웃음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코레트:(그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보냈던 사계절을 회상한다. 그때는 당연하게 느껴졌던 계절과 온도. 아무런 걱정도 없이 보냈던 즐거운 시간.) 이기적인 건 아니지만 조금 슬프네요. 험난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저희는 살아있고 숨을 쉬니까,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봐야 하지 않겠나요. (그가 끝까지 혼자였을 거란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혹독해진 세상에서 친구가 아니었다면 서로를 신경써주기 어려웠겠지.) 걱정 마세요, 제가 곁에 있으니 당신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일은 없도록 막을게요. 냉장고에 아직 당신이 가져오신 술이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저 몰래 드시면 안 돼요~?
앨릭스 J. 셔먼:(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아직은 따뜻하니까. (잡고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준다.) 힘 빠지는 소리말고, 네 말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봐야겠지. 네가 있어서 참 든든해, 코레트. 귀찮아도 나랑 계속 있어줄 거지? (청소 열심히 할게. 덧붙이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띈 채, 눈동자를 한 바퀴 굴렸다.) 글~쎄... 완벽히 숙성된 와인을 저대로 썩히는 건 죄 짓는 것과 같다는 말, 못 들었어? (완벽히 개소리다..) 아니면 같이 마실래? 한 잔만. 지금보다 더 따뜻해질텐데, 응?
코레트:그럼요. 전혀 귀찮지 않은걸요? 앨릭스가 있어서 얼마나 의지가 되는데요. 사실 저였어도 혼자서는 버티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바깥의 추위에 얼어붙었던 손에 온기가 돈다. 사방천지가 새하얀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이들도 줄어가고, 물자도 점차 부족해지는 와중에 저 혼자만이 남아있었다면 외로움과 막막함에 질식할 것 같았겠지.) 네에? 지금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다가 잠시 고민한다.) 음, 딱 한 잔이라면……
동면 기기를 확인하고 와서 마실까요.
앨릭스 J. 셔먼:그거 좋은 소식인걸.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줄게. 그러려고 이때까지 함께 있었던 거지만. (네 표정을 보고 즐거운 기색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놀랄 것 까지 있어? 누가 들으면 내가 너한테 못할 말이라도 한 줄 알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걸치고 있던 외투를 조금 더 꼼꼼히 여미고는, 네게 손을 뻗어 목도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킨다.) 자... 준비됐으면 갈까?
코레트:기쁘네요. (웃는 앨릭스를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본다.) 술 이야기를 했다고 바로 술을 마시잔 제안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 그렇죠~. (목도리를 매어주는 당신의 손길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다. 장남으로서 동생 넷을 돌보다 보니 누군가를 살피는 데만 익숙했지, 직접 받아본 적은 드물었기에.) 네.
우주선에는 타지 못했지만 최후까지 지구에 남았던 사람들이 세운 이 대피소는 약 2천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남은 인구 중 소수는 동면을 선택했습니다.
지구가 다시 생명의 땅이 되면. 눈과 얼음이 녹고 추위가 물러나면.
… 혹은 지구를 떠났던 생존 인구가 다시 이 행성에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전부 데려갈 그 날을 위해 잠든 사람들.
대피소 지하에 누워있지만 마치 관 속에 들어간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라는 사실까지 코레트는 담담히 설명해 줍니다.
코레트:만일 그들이 되돌아온다면 깨워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앨릭스 J. 셔먼:(잠든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묻는다.) 왜 그랬어? 그 역할은 굳이 네가 아니였어도 됐을 텐데.
코레트:음…… 저는 동면은 하지 않을 거고, 참을성도 좋으니까요? 우주선이 올 때까지 버틸 자신도 있구요.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어요.
비록 처음엔 전부를 데리고 가진 못했지만, 우주선은 저희를 위해 되돌아올 거예요. 고향을 잊기란 어려운 법이잖아요. 그 모습을 꼭 직접 보고 싶어요.
앨릭스 J. 셔먼: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어쩌게? 희망적인 미래도 좋지만, 그 반대인 미래가 오게 된다면... 어떡하려고.
코레트:……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이 대피소엔 저희 외의 다른 사람도 없으니 더 부탁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모든 일이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죠. (조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앨릭스 J. 셔먼:...그렇지, 아무래도.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면 지구 멸망이 오지도 않았을 거니까. (잠시 시선을 네 쪽으로 옮겼다가 한숨을 쉰다.) ...미안, 자꾸 어두운 얘기만 해서. 좋은 얘기만 해도 모자란 시간인데.
코레트:아녜요. 현실적인 지적이셨는걸요. 저도 고려해본 점이기도 하구요. (사과할 필요 없다면서 문 앞에 섰다.)
코레트가 가지고 있던 관리자 인식증을 문에 갖다 대자 생경한 기계음이 들립니다.
코레트를 제외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너무 오랜만입니다.
앨릭스는 코레트를 따라 동면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고작 한 사람이 누울 정도로 좁은 동면 캡슐 6대가 누워있습니다.
코레트:좀 춥죠? 버티기 힘들다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방으로 돌아가면 되니깐요. (목도리를 풀어줘야 하나 고민함)
앨릭스 J. 셔먼:(나오려던 재채기를 가까스로 참는다.) 괜찮아, 이 정도는. 3년 동안 추운 데서 살았더니 버틸만 해. 너는 괜찮아?
코레트:네, 저도 괜찮아요. (좀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그럼 얼른 살펴볼게요.
곧 그는 동면 기기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작동에 이상은 없는지. 기기 안에서 잠든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앨릭스 J. 셔먼: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5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곳은 낯설지 않습니다. 동면실 안은 대피소 내부와 비슷하게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합판 재질로 만든 벽과 옅은 베이지색 블럭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다 알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집니다.
:[동면 캡슐] [자료 보관함] [프로젝트 화면] [철제 문] 조사가 가능합니다.
앨릭스 J. 셔먼:(
동면 캡슐 먼저 살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망가진 곳은 없는지...)
성인 1명이 누우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채워질 것 같은 크기를 가진 캡슐은 매우 협소해보입니다.
조금만 몸을 뒤척이면 캡슐 뚜껑에 이마를 부딪힐 것 같은 높이지만,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캡슐 뚜껑 너머로 동면하는 인간의 얼굴이 보입니다.
슬쩍 바라 본 동면 인간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은 지구에 버려진 인간입니다.
죽음을 택하기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영원의 잠을 선택한 인간.
앨릭스가 들여다본 동면 캡슐 속 인간의 이름은 '제니(Jennie)' 입니다. 제니….
코레트:(다른 캡슐들을 살피다 앨릭스 곁으로 온다. 제니라는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앨릭스는 동면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나요?
앨릭스 J. 셔먼:(잠시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다가,) 글쎄... 잘 모르겠네. 그래도... 너처럼 깨어있는 걸 선택하지 않았을까. 멸망한 지구가 다시 멀쩡해질지, 떠났던 우주선이 돌아올지 확실하지도 않은 마당에 잠에 드는 건... 죽음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솔직히 난... 살아남고 싶거든.
코레트:같은 생각이에요. 물론 동면을 택한 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기약 없는 잠은 죽음과 크게 다를 바 없으니까. (희미하게 미소하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놓는다.) 저희가 동면을 택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앨릭스 J. 셔먼:(마주 미소지어보인다.) 나도 마찬가지야. 혼자였다면 같이 술 마실 사람도 없고, 얼마나 외롭겠어? (장난스레 답하며
자료 보관함을 열어본다.)
보관함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자료들은 이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역사입니다.
과학과 우주에 관련된 연구자료부터 출간된 책까지.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펼치자 ‘생명의 자손’ 이라는 투박한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이 별의 죽음으로부터 탄생된 존재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억 년 동안 반복된 별들의 죽음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시행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소수의 학자들은 인간이 태초의 우주 그 자체에서부터 존재한 미약한 생명체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 >
동면 기기에 대한 사용법이 적힌 안내서도 있습니다.
안내서 앞에 표시되어 있는 동면 기기는 앨릭스가 동면실에서 본 것과 같아 보입니다.
기기 장치를 다루는 방법과 긴급 상황시 대처 방법등이 적혀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온도에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는 인간은 이렇습니다.
동면 기기는 지구에 남은 인류를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더 이상 추위와 병.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동면 기기의 사용을 원했고,
그들은 이 멸망한 행성을 떠나거나, 다시 살아갈 그 날을 위해 죽음 대신 잠을 선택했죠.
동면 기기의 최적 작동 유효 기간은 약 400년.
코레트가 더 이상 동면 기기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잠든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앨릭스 J. 셔먼:(...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걸까.)
(계속해서 떠오르는 암울한 생각을 애써 털어낸다. 자료 보관함을 닫고 다음으로 프로젝트 화면을 본다.)
얼어붙은 지구는 유일한 파란색을 잃고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지구 내 생명활동 감지를 나타내는 불빛은 모두 꺼져 있습니다. 기기가 고장났나 봅니다.
둥근 리모컨을 반대로 돌리자 대피소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지구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참담할 만큼 차가운 온도와 얼어붙은 땅과 바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앨릭스 J. 셔먼:...예상한대로네. 이런 날씨가 됐는데, 대피소가 또 있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어. (기대도 안 했다. 슬쩍 화면에서 고개를 돌리고
철제 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동면실 한쪽 벽에 마련된 철제 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문은 관리자 인식증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문인 것 같습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대피소의 관리자는… 코레트죠.
앨릭스 J. 셔먼:코레트, 이 문 안 쪽 말이야. 귀중품...이 들어있을 리는 없고. 여긴 뭐가 있어?
코레트:(기기 관리를 마저 끝내고 곁으로 다가온다.) 아,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에요.
이전에 대피소에서 사용했던 내부 통제실인데, 산소도 희박하고 온도도 낮아서 위험하다 판단했는지 AI가 인간의 출입을 모두 통제해버렸거든요. 저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코레트가 자신의 인식증을 가까이 댑니다.
붉은 불빛이 몇 번 깜박이더니 동면실에 출입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음성이 들립니다.
코레트의 말대로 이곳은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 아닌 듯 합니다.
코레트:추우셨죠? 기기도 다 확인했으니 이제 나갈까요.
앨릭스 J. 셔먼:(...뭐, 별 거 없겠지. 몸을 돌려 너와 함께 출구로 향한다.) 응, 그러자. 이제 슬슬 향긋한 와인이 생각나던 참이였어.
어둠 속에서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면 기기.
당신도 생각했듯, 동면하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문이 닫히기 전 보게 된, 빛 한 점 들지 않는 동면실이
코레트:(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고 들어온다.) 휴, 그래도 여긴 한결 따뜻하네요.
딱 한 잔만이에요. 아셨죠~?
앨릭스 J. 셔먼:(길게 한숨을 내쉬고 내내 쓰고 있던 장갑을 벗어 탁자 위에 둔다.) 그럼, 당연하지. 나 못 믿어? (냉장고 문을 열고 와인과 유리잔 두 개를 꺼낸다. 그 중 하나를 네게 내밀었다.) 자, 받아. 모처럼인데 기분은 내야하지 않겠어.
코레트:잔이 비면 자연스럽게 다시 채우려는 분들을 여럿 겪어봐서요. (어쩌면 앨릭스와도 그런 술자리를 가져봤을지도 모르고. 미소하며 잔을 받아든다.) 안주로 마땅한 게 없으려나요?
앨릭스 J. 셔먼:...옛날엔 그랬지. 나도 지금은 연달아 마시는 건 힘들어. (뜨끔한 표정을 숨기려 뒤를 돌아 냉장고를 뒤진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우리 갓 성인 됐을 때, 생각 나? 멋도 모르고 마셔대다가 둘 다 취해버렸잖아.
코레트:그래요? (정말인지 확인하려는 듯 빤히 바라봤지만 앨릭스가 적절히 뒤돈 덕분에 닿지 않는다.) …… 아, 맞아요. 그것도 벌써 아주 오래전 일이네요. 흉한 꼴만은 보이지 않아야 된다고 자기세뇌를 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요. 후후, 그땐 저희도 꽤 어렸었죠. 어렸기에 다음날 걱정 없이 맘놓고 마실 수 있었구요.
앨릭스 J. 셔먼:(냉장고를 뒤지다가 아직 포장지가 뜯기지 않은 비스킷 하나를 찾는다. 작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괜찮다고 봐야겠지. 떠오르는 먼 추억에 자연스레 웃음이 튀어나온다.) 맞아. 그때 우리 해장하는 법도 잘 몰라서 다음 날에 완전 고생했잖아. (네 잔에 적당히 와인을 따르고, 들고 있는 잔에도 비슷한 양으로 따른다.) 한 번만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무 걱정없이 마시고... 지금은 이런 저런 걱정 많이 해야 하잖아. 안 그래?
코레트:(받아든 잔을 살짝 돌린다. 와인이 찰랑이며 공기 중으로 향기가 퍼진다.) 그때는 적어도 생존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죠. 부족한 것도 없었고, 모든 게 풍족한 시기였으니까요. 어떻게 숙취를 해소해야 하는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물론 그 시기에도 나름의 걱정이야 있었겠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배부른 걱정이었구나 싶어진다. 당신의 잔에 제 잔을 가볍게 부딪힌다.) 잘 때, 꿈을 꾸진 않으세요? 과거의 꿈을.
앨릭스 J. 셔먼:(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천천히 홀짝인다.) 그땐 참...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어렸지. 쓸데없는 걱정이랑 고민도 많이 하고... (비스킷 봉지를 뜯고는 네게 건넨다.) 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난 주로 아주 어렸을 때의 우리를 꿈꾸곤 해. 이를테면, 중학생 때 말이야. 그게 아니면... 지독한 악몽을 꾸기도 하고. (다시 한 번 와인잔에 입에 대고 마신다.) 코레트, 넌? 악몽 꾼 적은 없어? 과거의 기억이 나오는 꿈이라던지. 근 3년 동안 말이야.
코레트:어릴 땐 아주 심각하게 느껴졌던 걱정거리가 지금 되돌아보면 웃음이 나올 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던 적도 있고요. (이제 다신 그 순수했던 시기와, 따뜻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우주선의 귀환을 기다리고는 있으나 그건 정말로 기약 없는 일이다.) 중학생 때요? 저희가 처음 만난 시기네요. 저흰 그때부터 크게 다투는 일 없이 잘 지내왔었죠. (잔을 든 것도 잊은 것처럼 즐겁게 과거를 회상하다, 뒤늦게 입만 적시는 수준으로 조금씩 마신다.) 저도 종종 꾸곤 하죠. 처음으로 바느질을 하던 때라던가, 제가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친구분들이라던가…… 그렇지만 요즘은 미래와 관련된 꿈을 더 많이 꾸는 것 같네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행성을 상상하며 잠든 적이 많다 보니.
앨릭스 J. 셔먼:맞아. 그래서 옛날 생각하면 웃길 때가 참 많지. 나만 그런 거 아니였구나. (떠오르는 옛날 기억을 계속해서 추억한다. 어떻게 해도 다신 그 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옛날을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랬지.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네가 날 많이 견뎌줘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 알게 모르게 널 화나게 할 만한 행동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예를 들면 약속 시간에 늦잠을 잤다던가, 그런 거.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잔에 있는 와인을 전부 마시고 네 눈치를 보며 대꾸한다.) 네가 상상하는 미래가 어떤지 궁금한데. 이야기해줄 수 있어? (그러면서 은근슬쩍 잔에 와인을 따른다..)
코레트:(현실이 힘들기에,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화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그랬나요? 사소한 일들은 전부 잊어버렸는걸요.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서로 맞춰가고 이해하는 게 당연하죠. 저도 앨릭스가 보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면들이 있었을걸요. (눈치보는 줄은 전혀 모르고 대답하며 잔을 기울인다. 비어버린 앨릭스의 잔과 달리 아직도 막 따른 잔 같다.) 이야기야 당연히 해드릴 수 있지만…… 분명 한 잔만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시선은 앨릭스의 손에 고정되어 있다. 빤히…… 빤히……)
앨릭스 J. 셔먼:(정말 잊어버린 거 맞으려나? 눈을 끔뻑거리며 널 쳐다본다.) 내가 기억하기엔... 딱히 그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조금 답답했던 부분은 있었지만. 너는 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챙기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됐거든. 혹시 양아치들한테 잘못 걸릴까봐... ... (머쓱한 표정으로 와인이 흘러나오기 직전에 멈춘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는데, 역시 눈 앞이라서 힘든가? (어색하게 웃으며 와인 병을 조금 더 기울인다.) ...진짜 조금만 더 마실게. 진짜 조금만. 응? (조르기 시작한다..)
코레트:답답하단 말도 꽤 자주 듣긴 했네요. (익숙하단 듯 별다른 표정변화 없다.) 험하게 구는 분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분들도 다 사정이 있으셔서 그랬겠거니, 이해하려고 노력했었어요. 그러다 보면 제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못된 짓을 아예 안 당한 건 아님에도 그쪽으로는 일언반구 언급 없다. 학창 시절의 코레트는 종종 호구라고 불리곤 했었는데, 아마 이런 면들 때문이겠지.) 저의 단점에 집중하시기보단 절 걱정해주신 거니 감사한걸요?
안-돼요. 이미 약속하신 거잖아요? (딱 자르는 말끝과 달리 표정은 마냥 단호하지 못하다. 조금만 더 조르면 금방 넘어가줄 듯…….)
앨릭스 J. 셔먼:그, 널 탓하려던 말은 아니였어. 내 마음 알지? (슬쩍 눈치를 살피곤 장난스럽게 답한다.) 나 참... 넌 가끔씩 보면 다른 사람들을 너무 좋게만 봐주는 면이 있다니까. 나 같은 놈도 그렇게 봐줘서 고맙긴 하지만, 넌 좀 이기적으로 굴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 기분 나쁘게 하는 놈이 있으면 시원하게 욕도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이렇게 술 한 잔 하면서 울기도 하고. ...너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 이해해주라. 마지막 남은 친구잖아. (빈 와인잔에 습관적으로 입을 대었다가 머쓱하게 떨어진다..)
... .... 코레트... 정말 조금만 더 마시면 안 돼? 응? 나 요새 악몽꿔서 잠도 잘 못 자고... 너랑 더 마시면 오늘은 기분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최대한 불쌍한 척 연기한다.....)
코레트:(머쓱하게 미소한다.) 저보다 다른 분들을 먼저 위하는 게 습관처럼 배어버려서요. 마냥 쉽지 않네요. 그리고…… (문득 하얀 낯에 씁쓸함과 애상함이 빠르게 스쳤다 사그라든다.) 이미 충분히 이기적으로 군 것 같기도 하고요. (묘한 말을 하고선 언제 그랬냐는 듯 한결 밝은 목소릴 낸다.) 알아요.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그렇지만 여기에는 저희 둘뿐이니 못된 짓을 할…… 소위 양아치 분들도 없는걸요? 만약 앨릭스가 절 슬프게 한다면 그때에도 앞에서 울어도 되나요?
……. (잠도 잘 못 잔다는 말과 연기에 제대로 넘어가 눈빛이 매우 흔들린다. 차마 다시금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허락한다.) 그럼 딱 한 잔만 더 마시는 거예요. 아셨죠? 이번엔 진짜로요!
앨릭스 J. 셔먼:(충분히 이기적으로 굴었다니, 무슨 소리지? 잠시간 아무 말 없이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평소처럼 웃는다.)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하는 거 아냐? (어깨동무를 하고 네 뺨을 쿡, 찌른다.) 안아주고 토닥여줄 테니까, 마음껏 울어도 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너한테 못된 쓰레기짓을 한다면, 한대 때리는 것까지도 허용해줄게. (선심썼다는 듯이 으스대는 말투.)
(언제 그랬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와인잔에 와인을 아주 가득 따른다.) 좋아, 이번에는 진짜 약속할게. 손가락이라도 걸까? (키득거리며 답하고는 네 와인잔에 제 잔을 가볍게 부딪힌다.)
코레트:네에? 때리다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눈 휘둥그레진 채로 뺨 찔린다) 반대로 앨릭스도 저에게 서운한 점이 있으시다면 터놓고 말씀해주세요. (나도 때려도 된다고 해야 하나? 속으로 갈등하는 중) …… 근데 너무 많이 따르신 거 아니에요? 남은 와인도 이젠 이 병이 마지막인데 나중에 또 마시고 싶어지면 어쩌시려구요. (그래도 제 잔을 기울여 건배에 어울려준다)
앨릭스 J. 셔먼:내가 널 너무 속 터지게 한다면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야. 네게 폭력을 강요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너무 참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 둘만 남았는데, 눈치 볼 것 없잖아? (빤히 쳐다보다가 네가 하는 고민을 얼추 눈치채고는 푸하하, 웃는다.) 네가 허락해도 안 때릴 테니까 걱정 마. 널 때리는 일은 세상을 등지는 것보다 더한 짓인걸. (어깨를 으쓱이며 새로 따른 와인을 한 입 마신다.) 지금을 즐기는 거지, 뭐. 운이 좋으면 와인의 신께서 내게 좋은 술을 내려주시지 않겠어? (알코올이 들어가니 평소보다 헛소리도 많이 나오는 듯하다..)
코레트:아무리 저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폭력을 쓰지는 않아요. 그래서도 안 되구요. (지금까지 중 가장 단호한 태도로 말한다) 당신이 절 때리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하네요. (친구가 아니었더라도 그러지는 않았을 테니) …… 앨릭스도 참. (고개 절레절레 내젓지만, 종말을 맞이한 생활을 3년 가까이 해오며 오지 않을 미래를 신경쓰기보단 지금의 하루하루를 즐겨두는 게 낫다는 걸 배웠기에 별달리 첨언하진 않는다.)
(여전히 그의 잔은 거의 줄지 않은 채다. 와인을 사이에 두고 한참 시간을 보내다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제가 꾼다는 악몽 말인데요.
앨릭스 J. 셔먼:우리 코레트는 참 올곧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지만. 내가 말했었나? 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어, 옛날부터. (단호한 낯에도 뻔뻔할 정도로 싱긋거리며 웃는 낯이다. 즐겁게 웃으며 다시금 와인을 들이킨다.) (어느새 한 방울밖에 남지않은 와인잔을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무슨 악몽인데 그래? 무서운 괴물이라도 나오는 모양이지?
코레트:(언제 그랬냐는 듯 단호한 낯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는 언제나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려 했고 눈물보다는 웃음을 찾으려 드는 사람이었으니까.) 제겐 영광이네요. (그러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놓고도 망설이는 기색이다.) 괴물은 아니에요. …… 우주선이 끝끝내 오지 않아 이곳에 저희만이 남겨지는 꿈. 당신이 제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꿈을 종종 꾸곤 해요. 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의식 중에 더 깊게 남아버린 걸지도요.
앨릭스 J. 셔먼:(마주 웃는다.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도 네 웃는 얼굴이 너무 밝아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긴, 네가 불안해할 만 하지. 여긴 온통 새하얗게 얼어붙은 눈밭이고,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너랑 나밖에 없으니까. 떠난 우주선은 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털썩, 술이 들어가 붉어진 얼굴로 침대에 눕고는 늘어진다.) 내가 네게 실망하고 화낼거라 생각한 거야? 그건 조-금 실망인걸. (가볍게 주먹을 쥐고 네 팔을 툭, 친다.)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우주선이 안 오는 게 네 탓도 아닌데.
코레트: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잠들 때는 마음처럼 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자꾸 악몽을 꾸나 봐요. (얼마간 남아 있는 잔을 바라보다가 한 번에 마셔 버린다. 차라리 취기가 올라오면 꿈 없이 잘 수 있을까 싶어서. 침대에 걸터앉아 앨릭스의 위로 이불을 잘 덮어준다.) 당신이 그럴 거라 여기진 않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깐요…… 하하. 죄송해요. (열없이 웃는다.)
주무세요, 앨릭스. 오늘은 좋은 꿈을 꾸시기를.
앨릭스 J. 셔먼:이해해. 나도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번에 다 마셔 버리는 네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뜬다. 그렇게 마시면, 속에 안 좋을 텐데...) ...우리 중학생 때부터 이때까지 잘 지내왔는데, 설마 아직도 날 못 믿는 건 아니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널 쳐다본다. 책망한다기보다는 장난기가 담긴 가벼운 말투다. 네가 덮어주는 이불을 꼼꼼히 더 꼼꼼히 덮고, 네가 누울 자리도 만든다.)
너도 잘자. 오늘 나랑 어울려줘서 고마워. 좋은 꿈 꿔, 코레트.
코레트:전 언제나 당신을 믿어요, 앨릭스. 진심이랍니다. (술을 들이킨 반동으로 몸 안에서부터 열기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머지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져 오겠지. 앨릭스가 마련해준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당신도요…… 마지막으로 속삭이고는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가, 눈을 감는다.)
얼어붙은 지구에서 보내는 또 한 번의 하루가 막을 내립니다.
술 덕분이었을까요, 즐겁게 이야기하며 보낸 시간 덕분이었을까요. 앨릭스는 어떤 꿈도 없이 편안하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눈을 뜨면 코레트는 벌써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아 있습니다.
코레트:(책을 읽다가 침대로 시선 돌린다.) 앨릭스. 일어나셨어요?
앨릭스 J. 셔먼:응... (손가락으로 눈을 비비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 멍한 눈빛으로 눈을 끔뻑이다가 이불을 몸에 두른 채로 네게 다가간다.) 언제 일어났어? 심심했을텐데 나 깨우지...
코레트:얼마 안 됐어요. (그 말처럼 머리가 다소 부시시하다.) 속은 괜찮으세요? 일단 뭘 좀 먹을까요. (냉장고의 문을 열고 안쪽을 뒤적거린다. 든 것도 별로 없지만.)
앨릭스 J. 셔먼:그래 보이네. (그런 네 모습에 작게 웃음 짓는다. 비척비척 일어나 네게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얼마 안 마셨으니까 괜찮아. 너는? 오늘은 무슨 꿈 꿨어?
코레트:학생 때의 꿈을 꿨어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의…… 꿈속에서 이야길 많이 나눴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그새 다 잊었네요. (보존 식량과 물을 꺼내어 탁자에 올려둔다.) 술을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좀 갈증이 나긴 하더라구요.
앨릭스 J. 셔먼:그래도 악몽이 아니라니 다행이네. 그 꿈 속에서 얘기한 사람은 난가? 아니면 다른 친구? (네 앞 자리에 앉고는 컵에 물을 따르고 네 쪽으로 밀어준다.) 그렇게 한 번에 다 마시니까 그렇지. 자, 마셔.
코레트:앨릭스도 있었고, 다른 분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분들은 잘 떠오르질 않네요. 3년이나 됐다고 이제 기억에서도 얼굴이 희미해진 걸까요. (조금 서글픈 낯으로 컵을 건네받아 마신다.) 앨릭스는 어땠나요? 와인이 효과가 있었나요?
앨릭스 J. 셔먼:(육포를 뜯으려던 손이 멈춘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 하잖아. 모두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어, 코레트. ...참 슬프고 견디기 힘든 사실이지. (마찬가지로 서글픈 빛을 담은 표정이지만,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다.) 난 아무 꿈도 안 꿨어. 덕분에 푹 잤지. 오랜만에 친구랑 같이 술을 마셔서 즐거웠나 봐. 어쩐지 머릿 속이 개운한걸.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코레트:역시 그러려나요. (조금은 쓸쓸한 목소리였지만 마찬가지로 오래지 않아 다시 평소의 온온한 낯빛으로 되돌아온다.) 후후,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럼 조금 있다 같이 전망대에 가보지 않으시겠어요? 일어나서 잠깐 나갔다 왔는데 오늘은 바람이 강하지 않아서 대피소 바깥을 짧게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더라구요.
앨릭스 J. 셔먼:밖은 또 언제 나갔다 온 거야?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 아니지?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안 그래도 조금 답답했는데 날씨까지 좋다니, 타이밍이 참 좋네. (육포를 입에 넣고 씹어 삼킨다.) 너도 좀 먹어, 코레트. 어쨌든 추울텐데, 든든하게 먹어둬야지.
코레트:바깥 온기가 어떤지 체크만 하고 온 정도예요. (끄덕이곤 육포나 건조시킨 과일을 몇 점 먹는다.) 바깥이 춥긴 하지만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니까요. 가끔 산책도 가 줘야죠.
코레트와 앨릭스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함께 대피소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전히 대피소 밖은 강한 추위가 느껴지지만 시야를 가리는 눈 때문에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지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부가 얼어붙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코레트의 말대로 이만하면 잠깐 산책할 만은 하네요.
대피소 밖으로 한 발 내딛자, 눈이 바로 무릎 위까지 올라옵니다.
발은 푹푹 빠지고 중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갈 때마다 다리와 허리에 잔뜩 힘을 준 채 걸어야 합니다.
앨릭스 J. 셔먼:
민첩
기준치: |
50/25/10 |
굴림: |
12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앨릭스 위쪽으로 드리운 가지에 눈이 쌓여 위태롭게 흔들립니다만, 재빠르게 지나옵니다.
하마터면 가지에 쌓여 있던 눈을 죄다 맞을 뻔했습니다.
코레트:눈이 여간 많이 쌓인 게 아니죠? 걷기만 해도 운동이 되는 기분이에요.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다 보니……)
앨릭스 J. 셔먼:그러니까 말이야. 대피소 주변을 좀 치워놔야 되나, 싶기도 하고... (생각만 해도 귀찮네.. 끙끙거리며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딛는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코레트. 아니면 손 잡고 갈까?
코레트:좋아요. 서로 잡아주면서 가면 한결 나을 것 같네요. (기꺼이 장갑 낀 손을 내민다.) 돌아가면 빗자루가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앨릭스 J. 셔먼:(내밀어진 손을 단단히 잡고 천천히 걸어나간다.) 옛날에는 눈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별로인 것 같아. 역시 눈은 낭만적인 추억으로만 남겨두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네. 안 그래?
코레트:(기우뚱거리면 서로를 단단히 받쳐주면서 한 걸음씩 내디뎠다.) 눈이 적당히 왔다면 지금도 좋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 정도 적설량이면 4단 눈사람을 백 개는 만들어도 남겠어요.
대피소에서 전망대까지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건 눈이 쌓이기 전의 일입니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가기도 힘든 지금. 걸음을 내딛으면 내디딜수록 점점 숨이 차오릅니다.
코레트:돌아오는 길엔 업어드릴까요? (아마도 농담)
앨릭스 J. 셔먼:(약간 솔깃....하지만 빤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생각하기도 난 양심없는 놈이지만, 너한테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사양할게.
오히려 내가 널 업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농조)
코레트:전 앨릭스에 비해 (?) 운동을 열심히 하니까 괜찮을걸요? 다녀와 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진 멀쩡해요. (당당)
앨릭스 J. 셔먼: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보다 큰데. 힘들지 않겠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따금씩 바람소리가 지나가는 새하얀 눈밭 위로 웃음소리가 옅게 퍼져나간다. ) 후회 안 할 자신있나 봐, 코레트.
코레트:후회할지 하지 않을지는 직접 해 봐야 알 것 같네요. (미소하면서 열심히 눈밭을 헤쳐나간다.) 그러니 힘들면 꼭 말씀해주세요.
이 길도 진작 얼음에 덮였어야 할 곳이지만 코레트가 꾸준히 길목을 관리한 덕분에 그나마 아직도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잎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나무는 얼어붙은 채로 빼곡하게 서 있습니다.
그 가운데를 지나갈 때마다 꼭 산에서 조난이라도 당한 기분입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 사계절 모두 눈에 파묻혀 있는 도시가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종종 그렇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꿈처럼 느껴집니다.
코레트와 앨릭스가 우주선을 타지 못한 건 운이 없어서였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대피소에 도착했고, 최후까지 지구에서 살아남아 있습니다.
대피소 창문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크기입니다.
이 정도 크기도 높게만 느껴지는데, 전망대의 절반은 눈 속에 파묻힌 상태니 과거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높이였는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낡고 허물어진 전망대 안에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코레트:우주선이 우주로 날아가던 날을 기억하시나요, 앨릭스?
앨릭스 J. 셔먼: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7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우주선이 지구를 떠나는 장면을 본 게 어디 우리뿐이던가요?
3년 전 전망대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떠나는 우주선을 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사라지는 우주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기억 속에 흐릿하게 자리한 그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앨릭스 J. 셔먼:응, 기억나. 사람이 정말 미친듯이 많았었잖아. (우주선이 하늘로 쏘아올려졌을 때 들리던 굉음과 사람들의 고함 소리, 또는 울음 소리가 머릿 속을 스친다.) 우리가 만난 날이기도 하니까. 그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너는 어때, 코레트. 기억 나?
코레트:정말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던 우리. 마치 운명이 이끈 듯한 조우.)
상공으로 출발하기 전 우주선을 탄 사람들이 저희에게 말했었죠.
예전만큼 환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전망대 위를 비추고 있는 태양 때문입니다.
시야가 익숙해지자 두번째로 눈에 들어 온 건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눈.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를 가린 채 언덕처럼 쌓인 눈길.
무너진 건물과 서서히 파묻혀 가는 문명입니다.
전망대 끝에 올라도 우주선이 발사되었던 발사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전망대 꼭대기에 훤히 내다 보였던 그곳은 지구에 최후로 남은 우주선 발사지이자, 도착지였습니다.
정말 인류가 남은 우리를 위해 지구로 되돌아온다면 바로 그곳일 겁니다.
대피소가 이곳에 있고 얼어붙은 채 잠든 인류가 바로 여기 있으며 코레트와 앨릭스가… 최후의 인류로서 여기에 남아 있으니까요.
코레트:(문 안쪽에 놓여 있어 눈이 쌓이지 않은 의자 두 개를 가리켠다.) 저기 앉아서 햇빛을 좀 쬘까요?
앨릭스 J. 셔먼:좋은 생각이야. (숨을 마저 가다듬으면서 먼저 의자에 앉고는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오기까지는 참 힘들었는데, 막상 오니까... 광합성도 하고, 좋네.
코레트:(의자에 앉아 몸을 살짝 기댄다.) 대피소에도 햇빛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받으니 더 상쾌한 기분이네요.
그때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새로운 행성에 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고 했었어요. 그래도 지금쯤은 새로운 행성에 정착했겠죠……? 어제 얘기를 나눴던 대로 사계절이 있는 곳이면 좋겠네요.
앨릭스 J. 셔먼:이 정도면, 그 정도 고생쯤이야 할 만 한걸. (눈을 감고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볕의 따스함을 느껴본다.) 그러게. 이왕 우리를 두고 떠나버린 거... 차라리 좋은 곳에 잘 도착한 거였으면 좋겠어. 그럼 마음 편하게 원망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실패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절망스럽겠지.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쓴 맛이 감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이어서 말한다.) ...코레트, 너는 네가 우주선에 타지 못한 거, 후회한 적은 없어?
코레트:(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하늘은 새파란 색을 띄고 있어 눈이 시리다.) ……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지구에 남은 지인들과의 연락이 하나 둘 끊어져 가고 세상은 좋아질 기미 없이 나빠져가기만 할 때, 동생들이 보고 싶을 때, 그 아이들의 얼굴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희미해져 갈 때 어쩔 수 없이 회한하게 되더군요. 나도 함께 탔더라면…… 하고요.
앨릭스도 있나요?
앨릭스 J. 셔먼:(고개를 돌려 널 바라보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밭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도 너랑 같아. 남겨지는 게 무서웠어. 진작에 연을 끊은 가족들이라지만, 날 두고 떠난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거기 있었던 거야. 붙잡고 싶어서. 그렇게 못 한다면...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어두운 낯빛으로 작게 웃는다.) 그래서 그냥 잊었어. 잊어버리려고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중이야. 미련한 멍청이가 따로 없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두웠던 태도가 금세 장난스러워진다.)
코레트:(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 채로 시선만 돌렸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서로의 눈길은 맞닿지 못하고 엇나간다. 그러나 서로에게 공감하는 마음만큼은 일치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굳건한 척 해보아도 너무도 가혹한 환경에 내던져져 있으니. 이제는 닿지 못할 우주선을 그리고 그리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멍청이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나요. 아무리 멀어졌다고 한들 가족은 가족인데. 자꾸 떠오르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제야 술을 찾던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 술기운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지면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을 테니.)
앨릭스 J. 셔먼:(마주하지 못한 시선은 여전히 네게 머물러 있다. 만약, 그날... 널 마주하지 못했다면 나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을까? 어쩌면,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런가. 사실, 아직도 생각하곤 해. 만약에, 내가 조금 더 행동처신을 잘했더라면... 내쳐지지 않았을까. 뭐... 이런 미련한 생각. (그래도 혼자가 아닌,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으니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는, 네 손등을 제 손으로 감싼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 네가 있잖아, 내 옆에.
코레트: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코레트는 그를 옹호했다. 적어도 지금은 시시비비를 따질 사람들도 이유도 없으니까. 곁에 있는 저만큼은 무조건적으로 당신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 손등에 닿는 손길에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신뢰와 친애를 담아.) …… 다행이네요. 당신이 원하는 한, 저는 언제나 곁에 있을 거예요. (손을 감싼 장갑은 두꺼웠지만, 그는 전해져오는 온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앨릭스 J. 셔먼:... 그런 멘트 엄청 식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듣고 싶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마주 보며 웃는다. 온 세상은 추워도 맞닿아 있는 손은 여전히 따뜻하다.) 고마워, 코레트. 네겐 고마워해야 할 일 투성이네. 내가 죽기 전까지 다 갚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어떻게 갚으면 좋으려나...
코레트:식상해진 데는 이유가 있는 거겠죠. 으레 듣고 싶은 말들이기 때문에. (고개 살짝 젓는다) 따지자면 저야말로 앨릭스에게 고마운 일들이 가득인걸요. 혼자 있었더라면 버티지 못했을 순간들이 너무 많아요. 제게 빚을 졌다는 생각은 마시고, 그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조금이나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셨으면 해요.
앨릭스 J. 셔먼:그렇지. 식상하다곤 해도... 사실 나한테는 그 반대의 의미거든. 그런 진심이 담긴 말은 정말 오랜만라서. (가만히 네 말을 듣다가 시선을 내린다. 감히 내가 널 행운이라고 여겨도 되는걸까.)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나중보단... 지금을 즐기는 게 맞는 거겠지.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뒷 말은 굳이 꺼내지 않고 삼켰다.)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인데, 돌아가면 또 같이 한 잔 할래?
코레트:(코레트는 언제나 해야 할 말을 신중히 골랐고, 입 밖으로 꺼낼 때는 진심을 담았다. 그렇기에 앨릭스가 겪어왔을 거짓말들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만큼 그가 많은 고뇌를 겪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제안에는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던 눈이 동그래진다.) 저희 분명 어제도 마시지 않았나요? 이제는 정말로 남은 술이 얼마 되지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앨릭스 J. 셔먼:(네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솔직히 조금 아깝긴 하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할래. 그리고, 아꼈다가 썩어서 내버리는 것보단 낫지. (장난스레 네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물론 억지로 어울려줄 필요없어. 여기서 술 좋아하는 사람은 나 뿐이잖아.
코레트:그럼 그렇게 할까요. (앨릭스의 건강이 걱정되기는 해도, 그는 결국 친구의 의사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지라 강경하게 말린다는 경우의 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은 잠시 망설이다가도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전 오늘은 함께 앉아있기만 할게요. 연속으로 마셨다간 숙취가 심해질 것 같아서.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추워진 탓인지 해도 평소보다 더 짧아진 느낌입니다.
돌아가는 길이 더 어려워지지 않도록 지금 전망대를 내려가는 게 낫겠습니다.
앨릭스 J. 셔먼:마시진 않아도 같이 어울려준다니, 난 참 상냥한 친구를 뒀네. (손을 뻗어 네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갈까?
코레트:(머리에 닿는 손길에 느리게 눈 감으며 미소짓는다. 곧 따라 일어났다.) 겨울이 오면서 해가 금방 지는 듯해요. 날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어서 가요.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건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코레트를 따라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이 어쩐지 쌀쌀합니다.
밤이 찾아오면서 온도도 더 낮아졌기 때문이겠죠.
그 사실을 코레트 역시 알고 있는지 내려가는 걸음이 분주합니다.
앨릭스 J. 셔먼: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5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추위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탓인지 미약하게 열이 나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긴. 다른 날에 비해 좋은 날씨였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인간이 버틸 만한 온도는 아닙니다.
몽롱하고 까마득한 기분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코레트:앨릭스. 괜찮으세요? (걱정이 되는 듯 그를 돌아본다.)
앨릭스 J. 셔먼:(눈치 못 챘겠지... 하던 찰나에 돌아봐서 표정관리를 못 하고 놀란다.) 아, 응. 당연히 괜찮지. 그런데, 왜? 안 괜찮아보이나?
코레트:날이 많이 차가워져서요. 제가 괜히 나오자고 한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힘들면 기대세요. (계단을 다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앨릭스 J. 셔먼:그런 말 마. 멀쩡한데, 뭐. 어디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와, 네 손을 부드럽게 마주잡는다.) 힘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양은 안할게.
돌아가는 길에는 이상하게 발이 시리지 않았습니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 공기와는 다르게 따뜻한 온도가 앨릭스를 맞이합니다.
내부 온도는 고작 영상 9도에 그치지만 충분한 온도입니다.
코레트:(김이 올라오는 데운 물을 담아 가져온다.) 앨릭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을 드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발이 좋지 않으시죠? (오는 길에 당신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듯하다)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예감한 그대로 동상인가 봐요.
아주 걷지 못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달리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 등은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앨릭스 J. 셔먼: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네 앞에서는 다 들통나버리네... (외투를 벗고 침대에 앉아 다리를 주무른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소 불편한 감각이다.) 코레트, 너는 괜찮아? 같이 나와 있었잖아.
코레트:전 괜찮아요. 아무래도 추위를 별로 안 타는 편이라. 따뜻한 물에 발을 좀 담그고 계시는 게 어떠세요? (대야를 앨릭스의 발 앞에 놓아준다)
앨릭스 J. 셔먼:그러는 게 낫겠다. 고마워, 코레트. (바지를 걷고 양말을 벗은 뒤, 발을 담근다.) 엎친 데 덮친 격이네... 난 몰랐는데, 오늘 컨디션이 별로였나 봐.
코레트:괜히 나가자고 했나 봐요. (눈썹이 처진다.) 많이 안 좋으세요? 이제 구급약품도 남은 게 별로 없는데…….
앨릭스 J. 셔먼:(야단났네. 이런 말은 꺼내는 게 아니였는데. 잠시 당황하다 네 손을 잡고 말을 꺼낸다.) 아냐. 아까 내가 했던 말은 잊은 거야? 너와 함께 나와서 좋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광합성도 했고. (고개를 젓는다.) 이런 거에 괜히 약 쓸 필요는 없어. 이러고 조금만 있으면 나을 거니까 걱정 하지마. 나 믿지?
코레트: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궜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대신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믿음만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라 마지막 말에는 굳이 긍정하지 않는다.)
앨릭스 J. 셔먼:(네 단호한 태도에 협상해볼 생각도 하지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네말대로 오늘은 일찍 잘게. (발을 담그고 있던 대야를 옆으로 치우고 옆에 놓아져 있던 수건으로 발을 닦는다.) 내친 김에 지금 잘 생각인데, 넌 언제 잘 거야?
코레트:(그제야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앨릭스가 발을 닦는 동안 침대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전 조금 더 있다가 잘게요. 중간에 당신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는지 살펴야 할 것 같아서요.
앨릭스 J. 셔먼:(침대의 안쪽에 들어가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자리에 눕는다.) 그렇게까지 아픈 건 아니니까 졸리면 그냥 자, 코레트. 너까지 피곤해질 수도 있잖아.
코레트:너무 늦게까지 깨어 있진 않을게요. (그 위로 이불을 잘 덮어준다.)
잠에서 깨고 나면 지금 보는 풍경보다 좀 더 쌓인 눈을 보게 될 겁니다.
앨릭스 J. 셔먼:(눈을 감고 느릿하게 답한다.) ...응... 잘자, 코레트. 내일 봐...
코레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앨릭스의 의식이 꺼집니다.
앨릭스 J. 셔먼:
듣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10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앨릭스 J. 셔먼:(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주변을 살핀다.) ... 무슨 소리야, 이게... 코레트, 너도 들었어?
눈을 뜨자 불길한 붉은 빛이 문 밖에서 깜박이고 있습니다.
대피소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긴게 분명합니다.
문을 닫아 놓았지만 복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전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앨릭스 J. 셔먼:
SAN Roll
기준치: |
60/30/12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코레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피소 밖을 나갈 때 입는 외투와 신발이 없어진 걸 보면 또 전망대로 간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건 코레트는 동면실에 문제가 생겼음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앨릭스 J. 셔먼:(빨리, 알려야 해. 관리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건 코레트니까. 지금의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 ...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것을 몸에 걸치고 서둘러 전망대로 향한다.)
마냥 기다리자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고, 코레트를 찾아 나서려고 해도 어젯밤 걸렸던 동상이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았습니다.
밤새 눈이 더 내렸으니 눈길을 헤치고 코레트에게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 또한 당신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바깥에 나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동면실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동면실을 관리하는 사람은 코레트니 관리 책임을 코레트가 감당해야 할 수도 있죠.
앨릭스 J. 셔먼:(...이대로라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대피실을 바라본다. ...다른 방법이 없으려나.)
코레트의 옷 주머니에 관리자 인식증이 있지 않을까요?
테이블과 함께 둔 의자에는 어제 입었던 코레트의 옷이 걸려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망설일 틈도 없었다. 재빨리 코레트의 옷의 주머니를 뒤져 관리자 인식증을 찾아본다.)
옷 주머니를 뒤지자 코레트의 관리자 인식증이 나옵니다.
앨릭스 J. 셔먼:(...할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가보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관리자 인식증을 손에 쥔 채로
동면실로 향한다.)
현관문을 열자 방에서 느꼈던 경고등보다 훨씬 더 밝고 강한 빛이 깜박입니다.
대피소 전체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요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동면이 이렇게 빨리 풀릴 리가 없을 텐데.
새 터전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서늘하고 어둡기만 했던 복도가 네온등이 켜진 것처럼 환합니다.
어제 코레트와 다녀 온 이후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출입할 사람도 없죠.
앨릭스 J. 셔먼:(황급히 손에 쥔 관리자 인식증을 찍어본다.)
관리자 인식증을 코레트가 했던 것처럼 문에 갖다 대자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동면실 내부는 경고등이 켜진 것 외에 달라진 게 없습니다.
동면 캡슐들 중 하나의 캡슐이 붉게 깜빡거립니다. 제니의 캡슐입니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는 사람은 제니였던 모양입니다.
다시 동면기기 사용 설명서를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앨릭스 J. 셔먼:(동면실 내의
자료 보관함을 뒤져본다. 분명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를 빠르게 훑은 뒤 제니의 캡슐로 향해, 기기의 우측 하단을 살핀다.)
우측 하단을 살피자, 제니의 의식이 6단계에 머물러 있음이 보입니다.
이 상태라면 머지않아 곧 동면에서 풀려날 것 같습니다.
지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도요.
제니의 동면 캡슐은 ON 버튼에 붉은 빛이 들어와 있고 경고등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제니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걸 코레트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까요?
앨릭스 J. 셔먼:
관찰력
기준치: |
70/35/14 |
굴림: |
85 |
판정결과: |
실패 |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가 놓여 있던 자료 보관함 중 한 구석에 놓인 책이 툭 튀어나온게 보입니다.
앨릭스 J. 셔먼:(툭 튀어나온 책을 꺼내 펼쳐본다.)
책을 꺼내려고 하자 단단한 무언가에 걸립니다.
이게 뭐지? 보관함 깊숙이 놓여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집어 넣으면 오래된 상자 모서리에 손등이 긁힙니다. (HP-1)
앨릭스 J. 셔먼:(책은 대충 뒤로 던져버리고,
상자를 꺼내본다. 도움될만한 것이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상자 안에는… 여러 명의 인식증 카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카드 중에는 제니의 이름도 있습니다.
제니. 동면 캡슐에 들어가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죠.
그렇다는 건 이 인식증 카드는 동면 캡슐에서 동면하고 있는 저 사람들의 것이군요.
인식증에는 이름과 국적만 다를 뿐 동일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코레트의 직급은 대피소 관리인이지만 그들의 직급은 대피소 생존 인류.
동면 캡슐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코레트처럼 관리자가 아닙니다. 앨릭스와 같은 대피소 생존 인류입니다.
앨릭스 J. 셔먼: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5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대피소에 들어온 직후 누군가가 앨릭스에게 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잊어버렸을 만큼 오래 전에 잃어버렸나?
기억해 내려고 할수록 생각나는 건 캄캄한 어둠뿐입니다.
그래요. 인식증이 없어도 대피소 내부를 돌아다니는 데 불편함은 없으니까요.
이런 일이 또 생기고, 코레트가 그때도 곁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인식증으로도 동면실의 철문이 열릴 일은 없겠네요.
이 정도로 지속되는 경고라면 동면실 내에 있는 AI 기계들이 손을 쓸만 한데도 그렇습니다.
앨릭스 J. 셔먼:... ... (동면실의
철문에 다가가, 시험삼아 출입증을 대어본다.)
앨릭스는 동면 캡슐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인식증을 들고 동면실에 존재하는 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삐. 삐.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등이 신경에 거슬리지만 앨릭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후 코레트를 계속 기다리거나, 코레트를 찾으러 전망대에 가거나 할 뿐이겠죠.
앨릭스가 인식증 중 하나를 꺼내 문에 가까이 갖다 대자 예상과는 다른 AI 음성음이 들립니다.
앨릭스 J. 셔먼:... (머뭇거리다가 철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본다.)
동면실에 위치한 대피소 내부 통제실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코레트가 개방 준비를 하고 있던 AI를 작동 정지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쌓인 눈을 털어내지도 않고 달려왔는지 코레트의 모습은 엉망진창입니다.
불안함과 조급함이 느껴지는 경고등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립니다.
다시 물들었다가 꺼졌다가 반복되는 빛이 코레트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비춥니다.
그의 녹색 눈에 비치는 앨릭스도 마찬가지일 테죠.
앨릭스 J. 셔먼:(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다가 서둘러 네게 다가간다.) 코레트, 마침 잘 왔어. 아까부터 경고음이 울렸는데...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을까? 확인해보니까 제니라는 사람, 깨어나는 중이던데.
코레트:(한동안 고요한 낯으로 문과 앨릭스를 번갈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운 표정. 잠시간의 정적 끝에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당신의 걱정이다.)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당연스러운 반응일지 모르나, 지금의 급박한 상황에서는 다소 이질적으로 들린다.)
앨릭스 J. 셔먼:... (눈살을 찌푸린다. 등장한 타이밍도 그렇고, 여러모로 수상한 것이 느껴진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지금 내 다리가 문제가 아니야. (네 손목을 잡아끌어 불빛이 번뜩이는 캡슐 앞으로 데려간다.) 한 번만 봐줘. 난 설명서를 읽어도 도통 감이 안 잡히더라.
코레트:(기계로 향하는 와중 앨릭스의 손에서 인식증 카드들을 자연스럽게 가져간다. 버튼에 붉은 빛이 들어온 캡슐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고장이 났나 보네요. 가끔 이렇게 오류가 생길 때가 있어요.
코레트는 인식증을 가져오고 나서 동면 캡슐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동면 캡슐을 오래 관리했던 그라면 무슨 문제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가 INF 버튼을 누르자 제니의 고유 정보와 의식 단계가 캡슐 위로 생성됩니다.
코레트가 캡슐과 프로젝트 화면을 오가기를 몇 번. 동면실의 경고등이 꺼졌습니다.
복도에서 깜빡거리고 있던 센서도 사그라든 걸 보니 대피소 내부 전체를 밝히던 경고 센서가 제어된 것 같습니다.
코레트:(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괜찮아요, 앨릭스. 많이 놀라셨겠어요.
앨릭스 J. 셔먼:(다시 잠잠해진 캡슐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행이네. 잘못 되는 줄 알고 놀랐어... 그나저나, 저기 말이야. (턱짓으로 철문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 인식증으로 열리던데, 알고 있었어?
코레트:(철문을 바라보는 대신 손을 뻗어 캡슐의 표면을 느리게 쓸었다. 어쩐지 무척 지쳐 보였다. 전망대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일까.) ……네. 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곳이에요. 내부 통제실을 이용할 만큼 대피소에서 해야 할 일이 많지는 않거든요. 관리되지 않아서 온도가 바깥과 같을 만큼 아주 춥기도 하고요. (처음에 출입 금지 구역이라 말해주었던 것과 아주 틀리지는 않은 말이다.)
앨릭스 J. 셔먼:(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들어갈 필요는 없겠네. 동상이 지금보다 더 심해지는 건 싫으니까. (철문을 힐끔, 바라보고는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 코레트. 혹시 내 인식증 못 봤어? 네 인식증이랑 이 사람들 인식증은 다 있는데... 내 것만 안 보여서. 설마 눈 밭에 떨어뜨렸나?
코레트:당신의 인식증이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경황없던 날들이 많았으니 그때 잃어버린 게 아니려나요. 인식증이 없어도 대피소 생활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흐린 미소를 짓는다.)
우선 나갈까요. 잠깐 전망대에 다녀왔었는데, 그새에 동면실에 문제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미안해요.
앨릭스 J. 셔먼:하긴, 그렇지. 별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럼 굳이 안 찾아도 괜찮으려나. (빤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토닥거린다.) 사과할 필요없어. 이렇게 해결됐으니 다행이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먼저 동면실을 나선다.) 그나저나, 전망대에는 왜 간 거야? 깼는데 네가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코레트:꼭 인식증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제 걸 대신 쓰면 되니까요. 이번에도 잘 대처해주셨어요. 철문만 빼면요. (토닥이는 손길에 애써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많이 놀라셨죠……. 전망대에 관한 건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죽은 듯 펼쳐진 캡슐들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가 한 박자 늦게 그곳을 벗어났다.)
코레트는 대체 전망대에서 무엇을 보는 걸까요?
왜 그렇게 매일, 추운 온도를 감내하고 전망대로 가는 걸까.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여태까지 어떤 신호도 오지 않았던… 그 전망대에.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레트:(방으로 돌아와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아무런 말도 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여느 때와 같이 온온한 낯으로 뒤돈다.) 다리는 좀 어떠세요? 동면실로 급히 가느라 무리하신 건 아닌가요.
앨릭스 J. 셔먼:(놓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알아볼 수 있다면, 차차 알아보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는다.) 별 문제 없어. (한 쪽 발을 흔들거린다.) 걱정하지 마. 사실 아까 좀 뛰었는데, 괜찮던데? 별 거 아니였나 봐.
코레트:(한결 안도한 듯하나 한동안 시선이 당신의 다리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참.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셨죠? 뭐라도 드실래요? (과자나 말린 과일 등을 가져온다)
앨릭스 J. 셔먼:내가 또 네 말은 잘 듣잖아. (침대 위에 다리를 꼬며 앉고는 네가 가져온 먹을 것들을 조금씩 먹는다.) 아까같은 일이 또 생기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기기 오류라니, 왠지 모르게 섬뜩해. 이제... 별 문제 없는 거 맞지?
코레트:추위 때문에 기기에도 이상이 생겼는지 종종 오류가 나더라구요. 동면실은 여기보다도 추우니까요. 아까처럼 대피소 전체가 경고등을 울리는 일은 많지 않지만…… 이제는 괜찮을 거예요. (미묘하게 눈을 피하며 답한다.)
앨릭스 J. 셔먼:...그럼 다행이지만.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집요하게 시선을 쫓는다.) 그럼... 이제 전망대로 갔던 이유를 말해줘, 코레트. 두고 온 거라도 있었던 거야?
코레트:아, 그렇잖아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내내 눈을 맞대지 못하다가 아예 시선을 차단하듯 몸을 돌려 제 겉옷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조금은 들떠 보였다.)
코레트가 꺼낸 것은 우주 전파를 감지할 수 있는 무선 전파기입니다.
그가 전파기 버튼을 누르자 지지직. 지지직. 부서지는 전파음 소리가 들립니다.
코레트: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구 근처의 우주 상공에 누군가 와 있는 것 같아요. 전망대에 갔을 때 신호가 잡혔거든요. 너무 짧은 통신이라 미처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제 추측이 맞다면 저희는 곧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지구를 떠났던 인류가 우리를 데리러 오기 위해 지구에 돌아온 거라면.
혹은 그들이 아니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봐 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좋은 소식이네요. 이 추위와 고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니까요.
우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멸망한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앨릭스 J. 셔먼:정말? 그거 좋은 소식인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것보단 낫네. (시선을 맞추며 웃는다.) 다행이다, 그렇지? 곧 동생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코레트:(그제야 푸른 눈과 맞닿는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요. 정말 만나고 싶어요. 사실 모두 무사히 새로운 행성에 안착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재회를 바라게 되네요.
새 행성에는 사계절이 존재할지, 직접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죠?
앨릭스 J. 셔먼:잘 지내고 있을 거야.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서. 애들이 날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인사하면 모르는 아저씨라고 경계하려나. (가볍게 웃고는 침대 위로 드러눕는다.) 봄이 길었으면 좋겠어. 겨울은 이제 지긋지긋해. 아니면... 열대지역처럼 아예 더워도 괜찮을 것 같아. 꽁꽁 얼어버린 바다가 아닌 시원한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좋을 것 같지 않아?
코레트:아저씨라뇨, 아직 그리 불릴 나이는 아닌데요? (작은 웃음소리 낸다.) 그러게요. 봄의 온난한 날씨가 지속되는 행성이었으면 좋겠네요. 수영 좋아하세요, 앨릭스? 그러고 보니 바다를 본 적도, 수영을 해본 적도 아득히 오래 되었네요…… (당신이 말한 광경을 상상해본다. 아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지구의 풍경을 겹쳐 보며.)
앨릭스 J. 셔먼: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애들 입장에서 보면 아저씨가 아닐까, 싶어서. (웃는 널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싫어하는 건 아냐. 튜브를 타고 얕은 곳에서 떠다니는 건 좋아해. 깊은 곳은 조금 무서워서. (조금씩 바래지고 있는 지구의 옛 풍경을 떠올려본다. 정말로, 떠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고보니 우리, 학교에서 수영 수업 때문에 같이 수영도 하고 놀았잖아. 기억나?
코레트:이렇게 잘생기고 젊은 아저씨가 어디 있나요~. 그럼 저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저씨게요? (사람은 모두 나이 든다고는 하지만, 막상 제가 그런 호칭으로 불린다 상상하자 좀 심란해졌다) 저도 너무 깊은 곳까지는 일부러 가지 않으려 해요. 혹시라도 사고가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하니까요. (당신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 주억거린다.) 맞아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간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막상 물 속에 들어가니 금세 적응해서 즐거웠지만요.
앨릭스 J. 셔먼:(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나 예전에 그 말 많이 들었었는데... 막상 네 입으로 들으니까 뭔가 이상하네. (고개를 젓는다.) 그럴리가. 네가 작정하고 고등학생이라고 속이면 다들 넘어갈걸? (키득거리며 웃다가 상체를 일으킨다.) 그때 진짜 재밌었어. 내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서 물에 빠졌었는데, 네가 그 물 다 뒤집어썼었잖아. 그것 때문에 같이 물싸움도 하고 그랬었는데.
코레트:(커다란 웃음소리도 퍽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가정에 마음의 성에도 녹아내린 걸까. 무엇이든 듣기 좋았다.) 설마요. 고등학생과 비교하기엔 이제 나이가 꽤 들었는걸요. (입가를 가리면서 작게 웃음 터뜨린다.) 맞아요,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죠. 그때는 젖은 것보다 당신이 다치지는 않았나 걱정이 더 컸답니다.
또다른 행성으로 가서도 그렇게 즐겁게 어울려 놀 수 있으려나요? (분명 웃고 있는데도 쓸쓸해 보였다.)
앨릭스 J. 셔먼:내 말 못 믿는 거야? 그럼 나중에 우주선이 왔을 때 한 번 해봐. (장난스레 째려보고는 다시 웃는다.) 너 답다. 아마 거기서 그런 생각한 사람은 너 밖에 없었을걸. 내가 기억하기론 다들 웃느라 바빴거든.
... (웃음기가 조금 잦아든 모습으로 널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머물렀던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와 뺨으로 향했다. 코레트,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내게 숨기고 있는 게 대체 뭐야? ...네게 묻고싶은 것은 많았으나, 그 물음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당연하지. 어렸을 때보다 더 재밌게 놀 수 있을거야. 네 가족들과 같이 놀다가 배고프면 간식이라도 사먹고... 그러다 지치면 집에 돌아가서 자고. 그런 일상들이 이어질 테니까 이제 걱정은 그만 넣어둬, 코레트.
코레트:우주선에서 제 외모 이야기를 하라구요? 그보단 좀 더 실속 있는 대화 주제가 있지 않을까요? (모르는 척) 저도 물싸움 할 때는 즐거웠답니다. (학생 시절만이 줄 수 있는 안정감과 천진함이 있다. 발 디딘 행성이 그 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했듯, 저 또한 이제는 그때의 마음가짐이나 정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겠지.)
(옮겨가는 손길에 웃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미온적이고 고요한 낯이 드러난다. 녹색 홍채가 눈 앞의 이를 비췄다가 속눈썹에 반쯤 숨겨진다. 말로 하지 않더라도 짐작 가능한 사실들이 있다. 오랜 시간을 단둘이 보내면서 소리가 없더라도 의사를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감정을, 하고픈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침묵으로 넘기고 마는 건 우리가 어른이 되었다는 하나의 증거일까?) 언제나 당신을 신경쓰게 되네요. 제 천성인가 봐요. …… 그래도 믿어요. 당신이 말한 일상이 우리에게 올 거라고.
앨릭스 J. 셔먼:왜, 설마 부끄러워? 난 우리 코레트가 얼마나 예쁜지 얘기하고 싶은데. (모르는 척하는 걸 그냥 안 넘기고 놀린다..) 날이 가면갈수록 어렸을 때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게 슬퍼. 그래서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해, 가끔은.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내가 모르는 네 모습은, 어떤 형태를 띄고 있을까. 언젠가 내게 들려줬던 네 악몽의 모습을 띄고 있으려나.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정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 물음은 그저 흩어지기만 했을 뿐이다.) ...솔직히, 그 천성 말이야. 우주선이 돌아오고 더 이상 내가 네 유일이 아니게 되어도... 조금은 유지해줬으면 해. 몇 년동안이나 이렇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바뀌면 서운하잖아, 안 그래? (손가락으로 네 뺨을 몇 번 쓰다듬고는 이내 손을 내렸다.)
나도 믿어. 네 일상에 내가 있고, 내 일상에 네가 있을 거란걸. ...뭐... 이것도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한다는 가정 하에 하는 말이지만.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코레트:지, 진짜 그러지 마세요…… (거울도 잘 안 보는 사람. 슬슬 진심으로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시간을 되돌리는 걸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많았던 건 같은 이유겠죠. 다들 한 번쯤 바랐었기 때문에.
지구를 떠나 가족들에게 돌아간대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차분하나 확고한 답이다.) 저는 여전히 저일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도 여전히 제 소중한 친구일 테고요. 그런 걱정만큼은 않으셔도 돼요, 앨릭스. (당신이 저에게 멀어지려 하는 것. 제가 당신에게서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은 같은 불안과 우려다.) 당신이 서운해할 일은 하지 않고 싶으니까요.
날이 밝아야 다시 전망대로 가서 소식을 확인할 수 있겠죠. 기대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오늘은 그만 쉬는 게 좋겠네요.
앨릭스 J. 셔먼:(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짓궂다. 누가 봐도 놀려먹으려는 심보가 가득해보이는 얼굴..) 옛날부터 알았던 거지만, 넌 진짜 놀리는 맛이 있어.
(잠시간 얼굴에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 나타난다.) ...응, 고마워. 네가 그 말을 해줬으면 했어. 나도... 네가 슬퍼하는 건 싫으니까, 그러지 않도록 노력할게.
(눈치본다. 여기서 같이 술 마시자고 하면... 안 되겠지? 미련없이 금방 고민을 접어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오늘은 이만 쉬자. 최대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편이 좋으니까.
소란으로 시작한 하루였지만, 희망과 기대를 품고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코레트가 들었다던 우주 전파는 그 이후 더이상 소식이 없었고,
지구의 기온이 이전과 다르게 더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눈이 몰아쳤습니다.
이미 멸망된 지구지만 그 사실을 더 확고히 하는 것처럼, 다시는 생명을 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지구의 얼음은 자꾸만 두꺼워집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우주전파음을 잡겠다고 전망대로 간 덕분에 코레트가 감기 몸살로 앓아누운 날이.
몇 번 기침을 하던 코레트는 오늘 아침까지도 전망대에 가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습니다.
저런 몸을 하고 이 추위에 대피소 밖을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죠.
앨릭스 J. 셔먼:몇 번이나 말했잖아, 코레트. 그런 몸으론 아무데도 못 나간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안 돼. 여기서 푹 쉬어.
코레트:(뭔가 말을 하려다가 터져나오는 기침 탓에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네…… (꼴사납게 잠긴 목소리였다.)
결국 코레트는 침대에서 무선 전파기를 몇 번 만지작대다가 잠들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듣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80 |
판정결과: |
실패 |
방 안에서 들린 것 같은데 어디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는 감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그 소리는 아주 짧게 흘렀다가 단호하게 꺼졌습니다.
앨릭스 J. 셔먼:
듣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96 |
판정결과: |
실패 |
앨릭스 J. 셔먼: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방안을 뒤적거린다. 뭔가 안 보이던 거라도 있나?)
뭔가 코레트 쪽에서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앨릭스 J. 셔먼:(...설마. 코레트가 잠든 침대로 가
무선 전파기를 조심스레 집어들어 살핀다.)
무선 전파기에서 전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높게 오른 열에 시달리던 코레트는 전파음을 듣지 못하고 아이처럼 잠들어 있네요.
바로 그때. 무선 전파기 너머에서 모스 부호로 해독된 문자가 재생되어 들렸습니다.
코레트의 말대로 지구를 떠난 인류가 새로운 행성을 찾은 건가?
전파기에서는 계속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잡음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없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앨릭스 J. 셔먼:... .... (생명을 감지할 수 없다니, 고장이 난 것도 아닐테고. 이상하네.)
앨릭스 J. 셔먼: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이쪽에서도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시 <지능> 판정!
앨릭스 J. 셔먼: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3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들이 이 지구에 남아있는 생명체를 확인하기 위해 전파를 흘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주를 향해 전파를 쏘아 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들이 이곳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요.
저들이 이 지구를 다시 떠나기 전에 전파를 쏘아올릴 수 있는 곳은 이 대피소 안… 전파 탐지실입니다.
지금 앨릭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전파 탐지실로 가서 대피소에 부착되어 있는 전파 기기를 작동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레트의 관리자 인식증을 챙겨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앨릭스의 인식증은 없으니까 말이죠.
코레트가 그토록 기다렸던 인류가 돌아왔습니다.
앨릭스 J. 셔먼:(...조금만 기다려, 코레트. 내가 해결할 테니까.)
(코레트의 인식증을 찾아본다. 늘 그랬듯이 외투 주머니에 넣어놨을까?)
앨릭스 J. 셔먼:(코레트의 인식증을 주머니에 넣는다. 손에 집히는 외투를 아무거나 입은 뒤, 방의 문을 열고
전파 탐지실로 향한다.)
전파 탐지실은 지하에 있습니다. 문을 열어볼까요?
앨릭스 J. 셔먼:(...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문을 열어본다.)
코레트의 관리자 인식증으로 전파 탐지실 문을 열었습니다.
전파 탐지실은 2인이 앉을 자리만 있을 정도로 좁고 기계들이 벽을 가득 잠식하고 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교육
기준치: |
60/30/12 |
굴림: |
3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도 않았고요.
앨릭스는 몇 번 전파 탐지기기를 만진 끝에 곧 기계의 전원 버튼을 찾아냅니다.
전파 기기 전원을 누르자 곧 불이 들어오더니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오래 사용되지 않은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이미 끊어져 버린 전선들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전파 기기에 부착되어 있는 모든 전원 화면이 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조롭게 작동되어 가는 것 같으니까요.
곧 화면에 지구 주위 우주 상공 상태창이 나타납니다.
얼어붙은 지구 주변으로 작은 물체가 잡힙니다. 무언가 있습니다.
전파는 그곳에서 모스부호가 되어 번역되고 있습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우주선이 떠나기 전 이 지구에 아직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앨릭스 J. 셔먼:(...우리들이, 코레트가 가장 바라던 일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응. 작동시킬게.
앨릭스 J. 셔먼: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81 |
판정결과: |
실패 |
전류를 느끼자마자 몸 전신이 아찔하고 따가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손과 발 끝이 저릿저릿하고 눈 앞 시야가 막연하게 어두워집니다.
너무 대피소 안에만 있었던 탓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앨릭스 J. 셔먼:...윽... (눈을 꾹 감고 비틀거린다. 순간 감전이라도 당한 건가? ...아냐. 지금 중요한 건 내 몸 상태 따위가 아니니까... 황급히 고개를 들어 화면을 확인해본다. 지구에 온 그들에게... 전파가 보내졌을까?)
5분. 10분. 20분.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기기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지만 적어도 지구 근처에 존재하는 우주선이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나, 느낄 때 드디어 화면에 그들의 규칙적인 전파 음성이 나타납니다.
앨릭스가 쏘아 올린 전파가 그들에게 닿았나 봅니다.
그들이 답하였으니 우리도 답을 보내야 합니다.
우선은 이 지구에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그것부터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앨릭스 J. 셔먼:(서둘러 기계를 통해 답장을 보낸다. '현재 지구 내 유일하게 작동되고 있는 대피소에 사람들이 살아있습니다.')
앨릭스가 화면에 대답을 생성하자 기기는 그 대답을 일정한 주파수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립니다.
생명체가 감지되지 않았다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 코레트와 앨릭스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이렇게도 명백한걸요.
방황하고 있는 앨릭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다시 답을 송신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SAN Roll
기준치: |
59/29/11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앨릭스 J. 셔먼:... ...그럴리가, 없잖아. (인간이 아니라니, 그럴리가 없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다시 답을 전송한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빨리 구출하러 와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들:[우리들의 기계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너에게선 인간의 생체 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우리 쪽 기기 오류는 아닌 것 같네. 우리는 네가 전파를 쏘아 올린 그곳 바로 위에 있어. 네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래된 대피소 같은데 너는 그곳을 관리하는 관리자인가?]
앨릭스 J. 셔먼:'관리자는 아닙니다만, 그의 동료입니다. 잠시 몸의 상태가 좋지않아 제가 임시로 관리자의 직함을 대신 가지고 있구요. 이 곳에서 몇 년간 멀쩡히 살아 숨쉬던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
[대피소 전체를 스캔해봤는데 지하에 동면 캡슐 6개가 있다고 표시되는군. 하지만 그 외에는 없어. 너를 포함해서 그 동료라는 존재도 생체 활동이 감지되지 않아.]
[내가 보기엔 너와 그는 인간이 아니야. 너무 오랫동안 작동되다 보니 정보 저장에 오류가 생긴 것 같군. 하긴, 400년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앨릭스 J. 셔먼:'...400년이라니. 그게 무슨... 지구에서 우주선이 떠난지 400년이 지났다는 뜻입니까?'
그들:[몰랐나 보군. 우린 지구를 버렸던 인류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새로운 행성 '
알파 566'을 고향으로 가진 인류지. 알파 566도 이제는 살기 어려운 땅이 돼버려서 이전 고향을 탐사하러 왔던 거야. 그런데 이곳은…… 선조들의 말대로 여전히 최악이군.]
앨릭스 J. 셔먼:...하하. (헛웃음이 나온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코레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코레트. 네가 내게 숨기던 게 이거였어?)
'...하지만 제가 당신들의 말을 어떻게 믿죠? 이 곳에서 3년간 살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믿을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들:[글쎄…… 그 또한 오류인 거겠지. 400년이나 작동되다 보면 아무리 당시 최신 기계였다고 해도 어디 하나 고장이 안 나는 게 이상하니까.]
[믿고 믿지 않고는 네 자유야. 우린 거짓말은 안 했어. 굳이 그럴 이유도 없잖아?]
앨릭스 J. 셔먼:'좋습니다. 당신들의 말대로 우리가 400년 전의 최신 기계였다고 칩시다. 우리가 만들어지고 이 곳에 남은 이유는... 동면에 든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들:[그건 우리로선 알 수 없지. 생명 탐지기에 나타나는 결과만을 알려줬을 뿐이야.]
[여긴 말 그대로 우리가 버리고 떠난 곳이니까. 이 행성은 버려졌어.]
지구를 버리고 우주선을 탄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찾았고 그곳을 ‘알파 566’ 이라고 명명했으며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미 버린 행성 속에서. 우리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떠나버린 인류에게.
그들:[며칠 전에 신호를 처음으로 수신한 존재가 있었지. 아마 네가 말하는 관리자인 것 같은데. 그 역시 자기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온 게 아니냐고 묻더군. 그래서 답해줬지. 너희가 로봇이든, 정말 400년 동안 살아남은 인류든 알파 566으로 데려가려고 온 건 아니라고. 우주선에 남은 자리는 한 자리뿐이고, 이후로 다시는 여길 방문할 일이 없을 거라고.]
[그랬더니…… 좋아하던데. 데려가야 할 존재가 있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이 행성의 기후가 너무 혹독해서 244시간 동안 통신이 먹통이었어.]
[내부 통제실에 한 번 가봐. 그곳에서 또다른 기기 작동 신호가 잡혀.]
코레트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요? 또 어디까지가 거짓일까요?
앨릭스 J. 셔먼:... (한 자리 뿐이라면, 둘 중 한 명은 이 곳에 남겨질 수 밖에 없겠구나. 왜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어? 내가 널 버려두고 우주선에 타고 떠나버릴 알량한 인간으로 보였나? ...아, 이젠 인간도 아닌가.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일단,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서둘러 몸을 움직여
내부 통제실로 향한다.)
내부 통제실에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선 전파기로 전파를 보낸 인류의 후손이 내부 통제실을 막고 있던 AI 활동을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동면 중인 제니를 지나쳐 앨릭스는 내부 통제실 문 앞에 섭니다.
AI가 앨릭스를 인지하더니 곧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얼어붙은 먼지들이 오랜만에 불어오는 외부 불빛을 환영합니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온도가 앨릭스를 감쌉니다. (HP-1)
마치 대피소 밖으로 나온 것처럼 온몸에 한기가 듭니다.
금방이라도 또, 동상에 걸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앨릭스 J. 셔먼: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75 |
판정결과: |
실패 |
전류를 느끼자마자 몸 전신이 아찔하고 따가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이건… 동상을 입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 손과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눈 앞 시야가 막연하게 어두워집니다.
내부 통제실은 여태까지 봤던 대피소의 그 어떤 곳보다 크기가 거대합니다.
대부분의 기계들이 추위에 얼어붙었고 뚝뚝 끊어진 전선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습니다.
앨릭스가 내부 통제실에 들어서자 불길한 경고등이 통제실 내에 가득 켜집니다.
:[통제실 화면] [음성 녹음기] [통제실 연구 보관함] 조사가 가능합니다.
앨릭스 J. 셔먼:하하... 닥쳐, 제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거다.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뗀다. 저 빌어먹을 음성 AI가 뭐라고 지껄이든.)
(통제실 화면을 먼저 살핀다.)
통제실에 있는 수많은 화면 중 단 하나의 프로그램 화면만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동면 캡슐에 잠들어있는 사람들과 코레트, 그리고 앨릭스의 고유 정보가 화면에 인식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 발생되는 생체 신호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명체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400년 동안 지구에서 동면하지 않은 채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선택하지 않은 겁니다. SANc (1/1d3+1)
앨릭스 J. 셔먼:
SAN Roll
기준치: |
58/29/11 |
굴림: |
61 |
판정결과: |
실패 |
1
앨릭스 J. 셔먼:... (개조라는 말은, 사람이였던 날 누군가 인공 로봇으로 개조했다는 뜻이겠지. 누구였을까. 누가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기어코 로봇으로 다시 살려낸 걸까. 그 사람은... 살아있을까? ...생각이 또 다시 복잡해진다.)
(다음으로 음성 녹음기도 살핀다.)
화면은 빠르게 변해서 지난 400년간 대피소 내부에서 녹음된 음성 화면을 띄웁니다.
동면에서 깨어날 인류를 위해 저장된 음성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코레트입니다. 그리고 낯선 사람이 한 명.
녹음된 시기는 앨릭스가 기억하고 있는 지구 멸망의 날.
코레트:네. 마침 동면실의 관리자가 필요하던 참이었잖아요.
제니:그건 로봇들에게 맡기면 돼.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르게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잖아. 물론 대피소 전체의 관리를 로봇에게 맡기는 건 굉장한 도박이긴 하지. 그래도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죽는 것 보다는 나아.
인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안 돌아올지도 모르고.
코레트:오래지 않아 돌아올 거라고 믿고 싶어요. 앨릭스와 제가 함께할 테니…… 괜찮을 거예요.
제니: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앨릭스도 너도 사람이야. 얼어붙어가는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작정이야.
제니:너.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코레트:만약 동면에서 깨어나도 소용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코레트:당신과 다른 분들이 동면 유효기간까지 동면을 지속했는데도 지구에는 가망이 없고, 인류가 저희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면요.
제니:최악의 상황에 대한 답을 필요로 하는 거니?
코레트:정말 최악인 경우는 그들이 지구에 왔는데도 저희를 데려갈 의사가 없다는 거겠죠.
전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관리할 테지만…… 정말 모두를 데려갈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네요.
제니: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냥, 동면 기기를 비활성해줘.
제니:나뿐만 아니라 동면을 택한 모두가 그걸 원해. 우린 또다시 절망하고 싶지 않아.
제니:대피소를 잘 부탁해. 아니,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하나.
제니:동면에서 눈을 뜨면…… 너와 앨릭스가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선택을 한 건지 바로 알게 될 테니까. 코레트, 제발 무모한 짓 하지마.
그는 살고 싶어했어요. 저 또한, 마지막 남은 희망 한 줄기를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내부 통제실 화면 신호가 불안정합니다. 흘러나오던 음성이 잠깐 멈췄습니다.
코레트가 무슨 선택을 한 건지 이제는 압니다.
지금은 앨릭스의 기억으로부터 400년 후입니다.
앨릭스의 기억이 40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앨릭스가 아직 자신을 인간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동면을 선택하는 대신, 지구로 돌아올 우주선을 하루하루 기다리기 위해.
인류가 돌아올 확률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쯤은요.
인류가 돌아와도 대피소에 있는 모두를 데려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정들을 말이죠.
이제 곧 대피소는 완전히 눈에 파묻힐 테고 전망대의 꼭대기는 상공에서 보이지 않게 되겠죠.
절망하고 싶지 않으니 비활성 의식 유지를 해달라고 하던 사람들.
앨릭스 J. 셔먼:...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통제실 연구 보관함을 살펴본다.)
기온이 낮은 내부 통제실의 장점은 연구 자료들의 훼손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작성한 건지 모를 자료들은 대부분 인간과 로봇의 개조 특성에 대해 기재되어 있습니다.
앨릭스 J. 셔먼:
과학 Roll
기준치: |
5/2/1 |
굴림: |
79 |
판정결과: |
실패 |
빽빽하게 저장되어 있는 보관함에서 <인간과 기계의 신체 결합 개조>에 대한 자료를 발견합니다.
자료에는 인간의 피부조직과 장기, 어떻게 정보 인식을 처리하고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이 적혀있습니다.
적합한 개조를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키와 몸무게, 성별 정보가 필요했는지 수식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 정보에 정확히 부합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이제 앨릭스도 알고 있겠죠.
낡고 고장나는 부품과 오류를 꾸준히 관리 및 교체해주면 로봇은 더 오랜 기간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코레트와 앨릭스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대피소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이 모두 떨어지면 코레트와 앨릭스도 작동이 멈추겠죠.
앨릭스가 보관함을 살피고 나자, 멈춰 있었던 음성 녹음 화면이 다시 작동됩니다.
음성 녹음 화면에 입력되는 날짜와 연도는 가장 최근입니다.
동면 캡슐에 이상이 생겨 앨릭스가 다녀갔던 그 날부터 바로 며칠 전.
코레트: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네요. (차분하면서도 쓸쓸하고 애달픈 목소리가 흐른다. 그는 분명 로봇일 텐데도, 왜 녹음기 너머 목소리에서는 이토록 많은 감정이 묻어나는지……)
이제야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어요.
당신의 말대로 참 무모한 짓이었네요. 깨어 있었다면 제게 관리자를 맡긴 걸 후회하셨으려나요. 하지만…… 이미 저답지 않은 짓을 저지른 이상 마지막까지 제 뜻대로 하려 해요.
미안해요. 전 소중한 친구를 포기할 수 없어요.
그들:[지금 전망대 위에 네가 말했던 관리자가 있는 것 같아.]
앨릭스 J. 셔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 통제실을 박차고 나와 최대한 빨리
전망대로 향한다.)
하긴. 눈이 내리는 건 이 지구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눈보라를 보고 있으면 이제 모든 게 끝인 것 같아요.
지구에 기대되는 미래 따위는 없고 최후에 남은 인류도 없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지구가 버려졌다는 것과 우리 역시 버려진 존재라는 겁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눈 때문에 새겨진 발자국은 금방 새로운 눈 아래로 덮여 사라지지만 앨릭스는 알 수 있습니다.
코레트가 신발도 신지 않고 전망대로 걸어갔다는 것쯤은… 짧은 순간이라도 알 수 있어요.
뺨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지만 이 통증 역시 인간이 느끼는 실제 감각이 아니겠죠.
모든 게 얼어붙을 것 같은 이 감정도, 지금 앨릭스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도요.
계단 끝에 도착하자 꼭대기로 나오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열린 문 사이로 눈이 쌓여갑니다.
앨릭스 J. 셔먼:(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네 이름을 불러본다.) ...코레트. 여기 있어?
그의 뒤로 눈 속에 겹겹이 파묻혀 가는 풍경이 보입니다.
코레트:…… 앨릭스. (음울한 녹색 눈으로 당신을 응시한다. 여지껏 이토록 어두운 표정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영원 같은 침묵 속에 그가 처음 꺼낸 말은 사과였다.) 미안해요.
코레트의 부르튼 발과 멍이 든 것처럼 푸르고 우울한 색으로 변해버린 다리가 보입니다.
심한 동상에 걸려 피부가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린 거지만… 그건 앨릭스에게도, 코레트에게도 상관 없는 일입니다.
앨릭스 J. 셔먼:...네게 물을 게 많아, 코레트... 우선, 이거 먼저 물어볼게. (멍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허공에 새하얀 숨결이 흩어진다.) ...왜 말 안했어?
코레트:(시선을 떨군다.) 아무리 우리 모두 생존을 원해 왔다고 해도, 이건 전적으로 제 이기심으로 벌인 일. 당신의 대답을 듣는 게 무서웠던 것 같아요. 저도 참…… 한심한 겁쟁이죠.
처음 몇 년은 괜찮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구는 점점 더 얼어붙어가고, 떠난 이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당신이 제게 실망할까 봐.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까 봐……
앨릭스 J. 셔먼:...그래서, 넌 우리 둘 다 로봇으로 만든 거야? (입가에 걸려있는 웃음이 서서히 사라진다.) 살고 싶었던 건 맞아. 하지만, 난...
인간으로 살아남고 싶었어. 왜 날 로봇으로 만든 거야.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
(하하... 헛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곧이어 멀리 있는 널 차갑게 노려보며 말한다. ...코레트. 난 네가 살길 바라. 그러니까...) ...실망이야, 코레트. 이런 로봇의 몸으로 내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길 바란 거면, 미안하게 됐어.
코레트:할 수 있는 말이 사과뿐이네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같은 말이 입안에서 힘없이 되풀이된다.) 당연히 동의를 받아야 하는 일인데도 전부 제멋대로 저질러버렸죠. 일반적인 수명으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더라도,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여길 함께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인류가 새로 일군 행성의 사계절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또다시 장난을 치며 수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 수도 없이 꾸었던 악몽이 지금 현실에서 되풀이된다. 지구는 완전히 버려졌고 우주선의 빈 자리는 하나뿐. 그리고 당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실망했다 말한다. 기계로 살아가는 나날이 수백 년이 되고, 당신의 기억을 리셋시키는 날이 반복되어갈수록 저는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미래를 맞이하는 날은 없을 거라고.)
제가 잘못했어요. 멋대로 이런 일을 저질러서 미안해요. 그러니 살아주세요. 마침내 온 기회잖아요. 여길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단 한번뿐인 기회란 말이에요.
앨릭스 J. 셔먼:... (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다. 우리가 꿈꿨던 우리의 미래. 서로가 서로의 미래에 존재하는 그런 꿈은 이젠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 불과할 뿐이다. 우리 둘 중에 하나만이 살아야 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너야.) ...나도 그런 미래를 바랐어. 너와 내가 새로운 행성으로 가서 함께 사계절을 맞이하고, 따뜻한 바다에서 수영을 하면서 지금의 평화와는 완전히 다른 뜻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모든 걸 알기 전까지는.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실망하지도 않았어. 다만... 내가 이런 말을 입에 담은 건, 네가 날 버리고 떠나주길 바라서. 그것 뿐이야. 바보같이 다정하고 상냥한 네가, 정말로 이기적인 선택을 하길 바라게 되어서. ...가만히 제 눈동자 속에 너를 담다가 고개를 돌린다.) ...아니. 싫어. 그런 기회, 너나 가지고 빨리 이곳에서 떠나버려. 널... 보는 것도 힘드니까. ...알아들었어?
코레트:(당신에게는 3년 남짓한 기억이지만, 저에게는 400년의 시간이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을 봐 왔는데, 모질게 뱉어내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바닥을 밟고 선 하얀 맨발은 점점 감각이 사라져간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지만 당신에게는 아니다. 당신의 몸에 추위가 더한 악영향을 끼치기 전에, 그 전에-) 앨릭스. 이걸 받아주시겠어요?
코레트는 앨릭스에게 낯설지만 익숙하게 생긴 인식증 카드를 건넵니다.
당신의 얼굴이 새겨진 카드. 잃어버렸던 앨릭스의 인식증입니다.
코레트:당신의 인식증은 대피소 내에서 이미 인간으로서의 통제 권리를 잃어버려서…… 이상하게 여기실까 봐 제가 갖고 있었어요. 지금은 안드로이드의 몸일지라도 이게 있다면 당신이 이 지구의 인간이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멸망한 지구에서 우리는 수 세기를 살아냈습니다.
살았다고 하는 표현은 이상하네요. 살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앨릭스의 앞에 있는 코레트도, 코레트 앞에 있는 앨릭스도 그렇게 되기 위해 만들어지고 개조된 인공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이미 인간으로서의 정의는 잃었습니다.
코레트는 인간이었던 앨릭스를 로봇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우리들을… 지구 최후의 인류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요?
코레트가 그토록 오래 스스로에게, 또 앨릭스에게 물었던 질문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요?
눈이 몰아칩니다.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코레트와 앨릭스가 서 있는 이곳은 너무 춥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은 순식간에 더 높게 쌓여갑니다.
이 추위에 나와있는 우리들은 이번에도 역시 동상에 걸리거나 감기를 앓게 될까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전혀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지구를 떠나요. ……제발.
더 거세진 눈발에 가려 코레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코레트의 그 눈물에는 인간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을까.
인간이 아닌 앨릭스가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앨릭스 J. 셔먼:... .... (눈발에 눈 앞이 가려도, 얼어버릴 것 같은 감각이 온 몸을 찔러오지만... 네게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코레트. 너도... 우주로 가고 싶어했잖아. ...그 기회를,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살고 싶지 않아?
코레트:(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턱에 닿을 즈음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투명한 진주가 발치에 쌓여간다.) 당신에게 이런 짓을 저지른 제가 살기를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 아닐까요.
(일 년, 십여 년,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날 때마다 죄책감이 세를 불렸다. 억지로 수명을 잡아늘려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현실이 날카로운 고드름이 되어 심장을 찔러왔다. 기실 꿈이란 자신의 무의식에서 영향을 받는 법. 그는 일반적인 기준에 비해 무척이나 정신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400년에 가까운 시간 앞에서는 마모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많은 희망을 꿈꾸었었죠. 상상만으로도 제겐 충분해요.
앨릭스 J. 셔먼:(팔을 뻗어 널 품에 안는다. 조금이나마 따뜻한 온기가 네게 옮겨가길 바라면서.) ... ...아까 했던 말... 전부 거짓말이였어. 너와 함께 하면서 네게 실망했던 적은 없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널 안고있는 팔에 힘을 준다.)
살아줘, 코레트. 네가 없는 우주는 내게 아무 의미 없어.
...넌 나 없이도 충분히 그 희망을 이룰 자격이 있어. 우리 둘 중 한 명이 살아가야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닌 네 쪽이야.
코레트:(차갑기만 한 세상 속에서 당신의 품은 따뜻하다. 이런데도 우리를 로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슬퍼하고 기뻐하며 소망하고 추억하는데.) 살아남을 자격이라는 표현도 이질적이지만…… 누군가 한 명을 따져야 한다면 그 기회를 가져야 하는 사람은 당신인걸요, 앨릭스.
제가 당신을 마음대로 안드로이드로 만들었어요.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게 했어요. 이 외롭고 추운 지구에 400년이나 남아있게 만들었죠. 당신은 이 모든 일의 피해자예요. 어떻게…… (목소리가 울음에 떨린다.) 어떻게 당신을 두고 제가 떠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는 못해요.
앨릭스 J. 셔먼:... (조심스레 네 머리를 쓰다듬는다.) 틀렸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네가 없는 우주에서는 1분도 숨 쉴 수 없어. 아니... 그러기 싫어. 내가... 널 버리고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네가 바라는대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잠들고 나서도, 잠에서 깨고 나서도... 난 늘 이 얼어붙은 행성에서의 나날 속에서 살아갈 테니까. 널 죽였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 테니까...
(널 안고 있던 팔을 밑으로 내리고, 네 손을 잡는다. 추위 때문일까,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넌 알고 있잖아, 코레트. 내가... 그런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거야?
코레트:그건 제게도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휘둘렸을 뿐인 당신을 두고 저만이 살아남는다니. (상상만으로도 죄책감과 중압감에 짓눌리는 것 같다.)
당신이 괴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하지만…… (400년을 기다려 겨우 얻은 천금같은 기회다.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가는 지구의 온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얼어죽고 말겠지. 제가 맞이하기에는 마땅한 끝이라 여겼다. 그래서 우주선에 한 자리가 남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가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끝끝내 여기에 남는다고 고집을 부릴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서로를 향한 깊은 우정이 결국은 당신의 발을 붙잡는구나.)
당신이 가지 않는다면 저 또한 갈 수 없어요. …… 그래도 괜찮나요? (푸른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이제는 너무 오래 전으로 변해버린 인간이었던 시절을 더듬어 찾듯이.)
앨릭스 J. 셔먼: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줘. ...내가 인간이 아니고 로봇이라는 사실은... 그래, 인정할게. 화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오히려 난 기뻤어. 그리고 내가 말 안 해줬나? 너랑 함께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데. (네게 버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웠던가. 버림 받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시간 이제는 지구에서 찾을 수 없는 녹음을 닮은 듯한 네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어딘가에 입력해두듯이, 아주 자세히.)
...응. 괜찮아.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빨리 가, 코레트. 우주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잖아. 정말로 놓치고 싶은 건 아니지? (네 손을 한 번 꽉 쥐고는, 놓아준다.)
코레트:정말로 저를…… 보내시려는 건가요. (겨우 말랐던 눈가가 다시금 젖어든다.) 앨릭스, 외로운 걸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점점 더 추워지는 곳에서 혼자 죽게 될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함께 남고 싶어요. 그것마저도 안 되는 건가요……? (애원에 가까운 어조였다. 저의 눈을 한참 바라보는 모습에서 당신의 선택을 직감해 버렸기에 더더욱 간절했다.)
(멀어지는 손을 반사적으로 잡으려 팔을 뻗었으나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것이 제가 저지른 죄의 형벌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내린 결정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당신을 남겨두고 이 행성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악문 입술에는 어느덧 피가 맺힌다.)
앨릭스 J. 셔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주먹을 세게 말아쥔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미약하게 들었지만...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 소중한 친구인 너한테 같이 죽어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내 외로움 때문에 떠나지 말고 여기서 함께 있어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응? 코레트...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이를 악물고 네게서 몸을 돌린다. 흔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남겨지는 건 익숙해. 네 말마따나 너에겐 400년이지만 내겐 3년이었잖아. 3년 전에도 지금이랑 다를 바가 없었어. 지구가 눈에 파묻혀 멸망하는 것만 빼고는, 다... (문득, 너와 함께가 아니였던 과거의 날들을 떠올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렸다.)
...빨리 가버려. 더 이상 네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코레트:당신 때문이 아니예요. 이곳에 남는 건 제가 바라는 일이기도 해요. 저에게 어울리는, 제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끝은 이 지구라고 여겼기 때문에. (괴로움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앨릭스가 몸을 돌린다. 맞닿지 않는 시선은 단절의 시작을 알린다. 금세라도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은 괴로움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곳을 담당하는 부품이 얼어붙어가고 있는 거겠지. 다시금 눈물이 흐른다. 코레트는 어깨를 옹송그리고 흐느꼈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세차게 내리는 눈에 묻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눈 속에 박혀버린 듯한 발을 어떻게든 내딛으면 친구에게로 갈 수 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앨릭스의 등을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온 힘을 다해 참는다. 그리고, 그 대신, 반대편으로 발을 돌렸다. 파랗게 얼어버린 지 오래인 발을 내디딘다. 한 걸음이 천금처럼 무겁고, 또 한 걸음이 늪에 빨려가는 듯 막막하다. 그 즈음에는 얼마나 울고 있었는지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앨릭스 J. 셔먼:...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를 있는 힘껏 모른 척했다. 다시 뒤돌아 널 안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외면한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인기척이 사라진 직후... 그제서야 다시 네가 있었던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네가 있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발이 무척 추워보였는데, 신발이라도 줄 걸 그랬나. 아니, 입고 있는 외투도 전부 줄 걸 그랬나... 뒤늦은 생각이 하나 둘 씩 떠오르지만, 이제 괜찮을 것이다. 너는 이런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곳이 아닌, 따뜻한 계절이 있는 곳에서 살아갈 테니까.)
... ...하하... (어쩐지 웃음이 흘러 나왔다. 뺨에서 물방울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녹아버린 눈인지, 내 눈에서 흐른 눈물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눈발이 아까보다 훨씬 더 거세어지고 있었으니까.)
...나 같은 건 잊어버려. 누구보다 잘 지내야 해, 코레트. ...잘 가.
앨릭스는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안드로이드 로봇으로서의 삶을 바란 적도 꿈꾼 적도 없었으니까요.
자신의 의지 없이 400년이나 이어지는 길고 긴 시간은 더더욱이요.
그런데도 당신은 코레트를 우주선의 빈자리에 태우기로 합니다.
얼어붙어가는 지구에 남는다면 끝이 어떨지는 자명한데도, 당신은 이곳에 남기를 택했습니다.
낮에서 저녁으로 바뀌는 시간대가 아니면 이 전망대에 그림자를 만드는 존재는 없습니다.
곧 착륙이라도 할 것처럼 거센 바람도 함께 몰아칩니다.
날이 추워요. 지긋지긋한 겨울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지구 상공을 진입해 곧 우주선이 도착할 테죠.
400년 전, 지구를 버린 인류를 태운 우주선이.
아마도 울고 있겠죠. 그러면서도 끝끝내 당신을 더 붙잡지 못하고.
우주선의 굉음이 멀어져가자 혼자가 되었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납니다.
앨릭스 J. 셔먼:... (몸을 돌려 언젠가 우리가 함께 앉아 햇빛을 쬐었던 의자에 앉는다. 비어있는 옆자리에 쌓은 눈을 턴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부 덮여버린 새하얀 지구가 아닌... 과거의 너와 내가 함께 손을 잡고 웃고 있기를 바라면서.)
한때 고즈넉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옆자리는 조용합니다.
몰아치는 눈바람은 아주 날카롭고 시립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점차 잦아들어갑니다.
400년간 버틴 당신의 부품이 결국은 기능을 잃어가는 모양입니다.
코레트는 당신을 지구에 홀로 두고 떠났다는 죄책감에 잠겨 살아가겠죠.
그럼에도 친구를 살려 보냈다는 것이 당신의 마지막 남은 위안일 것입니다.
아무리 가혹한 끝이더라도. 아무리 외로운 최후더라도.
그러니 꿈을 꿉니다. 폭설도 이별도 없는 곳에서 재회하기를.
지구에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인류의 숨이 이렇게 꺼져 갑니다.
마지막으로 그 행성을 떠난 인류만이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