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16시간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 동측 전선. 그림자가 사라진 남회귀선의 정오.
사막의 전투는 보통의 전투와 달리 낮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활동은 해가 떨어진 이후 시작됩니다. 이곳에서의 오후는 다른 지역의 새벽과 같죠.
그러니 착륙장에 조용히 도착한 헬기 한 대는 말하자면 야음을 틈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4개월간의 별도 특수 작전을 마치고 본진으로 복귀한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의 헬기입니다.
에르드가 해방군이 사용하는 특수 스마트워치에 대고 조용히 보고합니다.
에르드:통신보안, 'THE UNIT' 1중대장 에르드. 부소대장 베아트리체 힐 본진 복귀 완료. 인도에 따라 움직이겠다.
실제로 편제된 이름을 밝힐 수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는,
해방군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두고 모든 병사들은 이 부대를 그저 ‘바로 그 부대’ 라고 부릅니다.
어느 옛날 뉴욕이 그랬듯이, 통용된다면 굳이 다른 별명을 붙일 필요가 없죠.
헬기에서 내리자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릴리안 웨즐리:충성, 고생 많으셨습니다. 짐 이쪽으로 주십쇼.
……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릴리안 웨즐리는 그런 일들의 표상 같은 존재죠.
키가 10cm 넘게 커선 뺨 한쪽에 큰 흉터를 달고 고글을 쓴 군인에겐 더는 수줍어하던 소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나미브 북측 전선에서 작전 하나를 수행하고, 적군 특수부대 두 개를 섬멸한 후 막 비밀리에 돌아온 참입니다.
에르드는 헬기에 채워 두었던 에너지 파동 감지 스텔스 장치를 풀어내고, 릴리안은 개조 워치에 두 사람의 도착 소식을 한번 더 알립니다.
해방군은 정부 지급 스마트워치를 사용하지 않게 된 지가 오래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괜찮아. 다치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들쳐 멘다. ...4개월이 제법 길었나보다. 이렇게 릴리안의 얼굴이 반가운 걸 보면. ...마냥 반가워할 틈도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이 쪽에는 별일 없었어?
릴리안 웨즐리:다친 데 없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소령님은요? 워낙 대위님 감싸느라 혈안이신 분이니.
에르드:뭘 물어. 아무 일 없었다. (지나치게 간결한 답이다.)
릴리안 웨즐리:예. (그런 대답에도 이젠 완전히 적응했는지 반박도 없이 다시 베아트리체에게 고개 돌린다.) 별일이요? 그 개좆같은 새끼들이 우리 애들을 완전히 전깃불에 튀긴 쥐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언제 그랬지? (흐리게 미간이 찌그러진다.)
릴리안 웨즐리:두 분 없으실 때 당한 거죠. 에라이, 개같은 거. (몇 번 더 욕설을 중얼거리곤, 짐 두 개를 훌렁 들쳐매고 사령부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령부 막사는 깨끗합니다. …… 주변 너무 둘러보진 마시고요.
베아트리체 힐:......그래. 고생이 많았어.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운 릴리안의 욕설에도 묵묵히 끄덕인다. ...왜 인간의 몸은 하나밖에 없어서 양 쪽의 일을 해낼 수 없는 걸까.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매번 통탄스럽다. 이마를 짚었다가 뒤따라 걸음을 옮긴다.) ...갈까, 에르.
에르드:그러지. (릴리안 어깨에서 짐 하나를 뺏어 들면서 걸음을 옮겼다. 4년의 세월 동안 그는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얼굴에 잘 보이는 흉터 하나가 추가되긴 했지만 여전히 무뚝뚝했고 몸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었다. 그의 모든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베아트리체에게만 한정되었다.)
온실재배에 성공한 다카르의 곡창지대는 불행 중 다행으로 해방군 병사들에게 그럭저럭 먹고 죽지는 않을 만한 군량을 제공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죠.
이 와중에도 장교들은 와인 한 잔씩을 지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의 몫으로 세운 막사 텐트로 안내하면서 릴리안은 주변 보급관에게 부탁해 샴페인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릴리안 웨즐리:(텐트로 들어가 베아트리체의 맞은편에 앉는다. 와인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급관이 완전히 나가고서야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금일 아군 사망자는 총집계 422명입니다. 비각성자 일반병 소대 두 개가 모래폭풍에 휩쓸렸는데, 그때 상대측 X각성자를 맛닥뜨려 에너지 파동을 그대로 맞았답니다.
베아트리체 힐:......오늘만 해도 그 정도라는 말이지. (한숨을 겨우 입 안으로 삼킨다. 껄끄러운 모래를 삼키는 듯한 기분. 지난 세 달간, 해방군이 패전만을 거듭했다는 소식은 외떨어진 북쪽에서도 잠을 설치게 했다. 그리고 또 오늘, 반복. 보고로 듣는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들의 무게가, 잃은 것들이 너무나 무겁다.)
릴리안 웨즐리:저쪽은 모래폭풍 때문에 감청이 끊겨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우리처럼 믹서기에 갈리진 않았습니다. (또다시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사령부 쪽에선 오늘 격전이 있었으니 아마 이삼일 정도는 전투가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에르드:…… 400명이면 손실이 크군. (와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묵묵히 중얼거렸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떠오르는 기포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보고 고마워, 릴리안 중위.
(에르드에게로 시선을 든다. 그저 말 뿐인 불가능한 바람.) ...우리가 남아있었더라면 손실이 줄었을까.
에르드: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어. 그 임무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특수부대가 들이쳤겠지. (저와 베아트리체였기에 해낼 수 있는 임무라고 판단했다. 그만큼 쉽지 않은 전투였다. 서로의 몸을 지극히 신경쓰는 덕에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은 여러 곳에 가벼운 타박상이나 찰과상을 입었다. 아마 그의 등에는 새로운 흉터가 남을 것이다.)
그보다 응급처치는 더 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미 헬기에서 오는 길에 할 수 있는 건 했다만…… 그래도.
베아트리체 힐:(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결국 가장 최선의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미련을 털어내듯 손을 쥐어보다가 그대로 에르드의 눈가를 쓸어낸다. 릴리안이 말했 듯 늘 자신을 감싸느라 혈안인 탓에, 베아트리체는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 뿐인데도. 또 그가 아닌 자신을 먼저 걱정하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
......응급처치가 필요한 건 너야, 에르. 이번에도 나를 감싸는 덕에 등이 찢어졌잖아. 또 크게 흉이 생기면 어쩌려고. ...이러다 온 몸에 흉만 지겠어. (염려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릴리안 웨즐리:소령님. 안 다치셨다더니? (눈 가늘게 뜬다.)
에르드:그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니까. (눈가에 닿는 손길에 표정이 얼마간 풀렸으나, 일축하는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다.) 응급처치도 필요 없어. 흉터가 생긴다고 행동이나 전투에 지장이 가는 것도 아닌데.
아니면 보기 흉한가? 흉터가 많으면……. (말끝이 흐려진다. 조그맣고 희고 여린 사람에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없을 것 같은 덩치가 몸을 낮추는 모습은 일견 우습게도 보였다.)
베아트리체 힐:흉하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답지 않게 제법 단호한 투로 말을 끊어낸다. 두 손으로 에르드의 뺨을 붙잡고, 오롯이 제게만 향하도록 끌어당긴다.) 네게 흉밖에 남지 않아도 내게는 가장 아름다워. 그러니 그런 말 하지마.
...네가 다치는 게 싫어서 그래. 너도 내가 다쳤다면 똑같이 했을 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은 거라면 내가 도와줄테니까. 응? (분명 릴리안이 옆에 있을텐데도... 이제는 퍽이나 이런 행동이 자연스럽다.)
에르드:그러니까 그런 칭찬은 나한텐 안 어울린대도. (말은 그러해도 진심으로 싫은 기색은 아니다. 애초에 베아트리체가 하는 모든 일에 '싫다'는 감정을 가져본 적 없다. 베아트리체는 이 고된 나날 속에서도 언제나 다정하고 따스했으며 과하게 이타적이고 희생적이었으니까. 그를 볼 때면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힘이 솟구치는 듯했고, 어떤 사소한 것에도 상처받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물론 나도 네가 다치는 게 싫어.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거랑 내가 다치는 건 무게가 다르니까. (베아트리체도 어엿하게 4년차 혁명군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여전히 베아트리체가 민간인처럼 느껴지곤 했다.)
(양손에 이끌려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다가 눈만 돌려 맞은편의 릴리안을 흘끗 본다.) …… 정 그러면 식사 끝나고 나서.
릴리안 웨즐리: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우리 소령님도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니까. (이제 이 두 사람의 유대감에는 적응이 될 대로 됐으므로 아무런 생각 없이 군용 식량이나 퍼먹는다)
베아트리체 힐:...아. 그래. (괜히 릴리안 쪽으로 돌아보며 조용히 웃는다.)
에르는 아직도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봐. (아주 짓궂은 농담. 그제야 조용히 웃으며 손을 도로 가져간다.) 네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은 심정이야.
그럼 식사부터 할까, 배고프겠다.
에르드:(척수반사처럼 돌아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예나 지금이나 농담이라곤 통하지 않는 남자다)
…… 많이 먹어. 기운 나게. (조금 눈치를 살피다가 숟가락을 뜨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도. 많이 먹어야 금방 나을테니.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든다. 저렇게 커다란 사람이 제게 절절 매는 모습이 어쩐지 너무 귀여워서.)
베아트리체는 눈을 굴려 멀리 서쪽을 보는 행위만으로도 적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은 사이, 시선만 옆으로 굴린다.)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암습할 계획도 없고, 각성자 부대는 소대 단위로 4개 정도네요.
베아트리체의 설계는 이제 극한까지 기적에 잇닿아 있어서, 촘촘히 깐 그물망 같은 에너지 흐름 추적으로 적의 동태마저 살피곤 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베아트리체대로, 에르드는 에르드대로 강해진 결과가 이것입니다.
릴리안 웨즐리:적군 살피고 계십니까, 대위님? (눈치가 제법 빨라졌다)
베아트리체 힐:(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조용해. 암습할 계획도 없고... 각성자 부대는... 4개 정도.
릴리안 웨즐리:다행입니다. 그래도 쉴 시간은 벌 수 있겠네요. 하긴 저쪽도 특수부대 두 개 날라갔으니 타격이 있겠죠.
전 다 먹었으니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소령님 눈길 따가워서 엉덩이 못 붙이고 있겠네요. (흉터 진 눈을 찡긋거린다) 휴식하시고 조금 있다 저녁에 사령부로 브리핑 들으러 오십쇼.
에르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눈으로 '내가 언제' 라고 말하고 있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그때까지 푹 쉬어. 릴리안 중위. (릴리안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에르드에게로 돌아간다.)
...눈길이? (갸우뚱...한 얼굴로 빤히 바라본다...)
에르드:음. 중위가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네. (시선 허공으로 피한다)
베아트리체 힐:으음, 그래...? (들었던 숟가락을 다시 내려둔다.) 어떻게 봤길래 그럴까.
에르드:(잔에 따르지도 않고 열려만 있던 와인에 다시 코르크 마개를 꽂는다. 딴말이나 한다.) 조용해지니 좋네. (딱히 릴리안이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므로 그냥 베아트리체 외의 타인을 불편해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힐:...정말. (와인병을 보다가는 슬 턱을 괴었다. 입가에 호선만 그린다.) 여전히 다른 사람은 불편해?
에르드:응. (간단하게 답하곤 와인병을 살짝 흔들었다) 이건 안 마셔도 되지? 좀 있다 요한 보러 가야 하는데 주정부릴 순 없잖아. (술은 두 사람 다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베아트리체 힐:다들 좋은 사람인데. 릴리안도. (아쉽다는 문장이지만, 어투는 보다 가볍다. 자신만이 그의 예외라는 점에서.) 응. 그건 다음에 여유로울 때. ...게다가 상처가 덧날 테니까. (잊지 않고 덧붙인다.)
에르드:그래. 여유로우면 너랑 어울려서 한 잔쯤은…… 그것도 다 못 마시고 널 챙기느라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그제야 로봇마냥 딱딱하던 낯에 희미한 웃음이 어린다.)
다 먹었으면 상처 보여줘? 진짜 이 정도는 상관없다니까.
베아트리체 힐:......마시다 보면 늘지도 몰라. (그제야 자신도 어깨를 느슨하게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응, 보여줘. 아무래도 걱정되서.
에르드:글쎄? 베로니카 주간에서 8년이나 지났지만 네 주량은 여전한 것 같은데. (부드러운 농조로 답하며 몸을 돌리고 상의를 걷어올렸다. 이미 가득한 흉터들 위로, 채찍 같은 능력에 얻어맞은 듯 등을 가로지르는 긴 상흔이 남아 있다. 겨우 피는 아물어 있으나 필시 흉이 질 듯한 상처다.)
베아트리체 힐:... ......그때는, 긴장해서 그랬던거야. (조그맣게 줄어드는 목소리가 에르드의 등 뒤에서 멎는다. 익숙하게 자리 잡은 흉터들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다가, 그 중 가장 길게, 새로이 자리 잡은 상처 주변으로 가 닿는다. 느릿하게 선을 따라 손길이 내려간다. 목소리는 어느새 침울하게 가라앉는다.)
...역시 이것도 흉지겠네. (자신이 다 막아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 몸으로 이것들을 옮겨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느리게 고개를 숙여 어깻죽지에 입을 맞췄다.)
소독은 더 안해도 괜찮겠어? 아프지는 않고?
에르드:긴장했어? 왜? (그럴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나, 멍청하게 생각하며 상처를 보인다.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베아트리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책하며 슬퍼하고 있겠지.) 네 탓이 아니야.
(등을 얻어맞을 때 덮쳤던 통증보다도 어깨에 와닿는 짧은 입맞춤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몸을 살짝 움찔했다가 대답한다.) 혹시 모르니 소독은 한 번 더 하는 게 좋긴 하겠군. 붕대 두르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겠어. 전혀 아프지 않으니 걱정 말고.
베아트리체 힐:...그야. 처음이었으니까. (난생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과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였으니까. 장황한 설명은 일부러 삼켰다.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에... 조금 부끄러워진 탓에.)
넌 항상 내 탓이 아니라고만 하니까. (한숨 같은 웃음을 지으며 뒤돌아있는 턱만 제 쪽으로 가볍게 쥐어 돌린다. 선명한 흉이 남은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대었다가 머리칼을 쓸어준다.)
응, 브리핑 가기 전에는 꼭 하고 가자. 도와줄까?
에르드:……? (베로니카 주간을 즐기는 게 처음이었다는 뜻인가? 자세한 설명이 없으니 제멋대로 이해해버린다. 그것도 잘 이해한 게 아니라 오해지만. 이런 쪽으로는 전혀 지식도 감각도 없다.)
(손길에 순순히 응해 입맞춤을 받는 동안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아무래도 등 쪽이라, 붕대 감는 것만 좀 도와줄 수 있어? 위치 조정이 어려울 것 같아서.
베아트리체 힐:(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에는 걱정와 염려로 가득하던 얼굴도 결국 적당히 풀어진다.)
응, 막사 안에도 간단한 용품 정도는 있을 거야.
(익숙하게도 응급 키트를 찾아내면, 이미 소독약이나 붕대를 손에 들고 있다.)
에르드:소독약은 나 줘. (상의를 아예 주섬주섬 벗어낸다.)
베아트리체 힐:손이 닿을까? 내가 해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얌전히 손에 소독 키트를 쥐어준다.)
에르드:뭐…… (그냥 무식하게 상처 부근에 소독약병을 쥐어짠다)
됐지? 이제 붕대 묶어 줘. (태연)
베아트리체 힐:(넓은 등 뒤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다...) ...에르...!
...못 살아. (거즈로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소독약을 닦아낸다. 에르드가 워낙 두껍고도 넓은 탓에 거의 안다시피 팔을 뻗어 붕대를 꼼꼼히 두른다.)
...다음부터는 소독도 내가 할게. 알겠지? (이음매까지 꼼꼼하게 마무리하고 얼굴을 당겨와 시선을 마주한다.)
에르드:왜? 소독만 잘 되면 된 거 아냐? (문제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다. 붕대가 둘러지는 동안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있다가 별안간 가까이서 마주하고는 눈을 끔벅거렸다.)
네가 굳이 그러고 싶다면야. 근데 귀찮을 텐데.
베아트리체 힐:(이마나 콩 맞댄다.) 네가 아무리 아픔에 무디다고 해도, 보는 내가 다 아파서 그래. 에르, 넌 너를 좀 더 소중히 대할 필요가 있어. 내게 하는 만큼.
...그리고 하나도 안 귀찮아. 맡겨주면 오히려 고맙지.
에르드:내 몸은 자원이야. 필요할 때 잘 쓰이기만 하면 돼. 그 주체가 나거나 너면 되고. 그럼 문제 없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난 어릴 때부터 다치는 데 익숙하다니까.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알겠어. 다음엔 그렇게 할게. 너는 추가적으로 소독 안 해도 괜찮겠어?
베아트리체 힐:...넌 쓰고 말 자원이 아니니까. (토닥이는 어깨가 둥그렇게 아래로 처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일러줘야 좋을까. 결국 그의 몫까지 자신이 전전긍긍하며 아끼는 수밖에 없나, 생각에 잠긴다.)
...응. 괜찮아. 간단한 처치는 했으니까. 너처럼 깊은 상처도 없고. 내버려두면 나을 거야. (스스로는 아끼지 않으면서 자신만 돌보려는 모습은 너무나 닮아있어서 베아트리체 역시 끄덕이고 만다.)
에르드:너야말로 흉터 생기면 난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지켜왔는데. (베아트리체의 속 깊은 걱정은 전혀 모른다는 듯 베아트리체의 뺨을 살짝 감싸듯이 쓸어준다.)
베아트리체 힐:......응.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 네 흉터 하나하나가 내 가슴에 새겨진다는 걸. (따스한 온기에 뺨을 가만 기대어본다.)
에르드:잊어버려, 그런 건. (불가능할 소리를 한다. 우리는 이제 자신보다 서로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으므로.)
생존이 헛된 농담이 된 시대에, 바깥 막사 병사들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을 텐데도 시선을 마주하면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습니다.
막사를 나오니 오후의 햇살이 무심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령부에 들러 브리핑을 듣기로 한 저녁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진지를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은 사령부 근처, 그중에서도 가장 심층부의 장교 막사이므로 진지를 제대로 둘러보고 일반병들을 살피려면 바깥쪽으로 더 나가야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시간이 남았으니까. (옷의 안 쪽으로 가려진 갖은, 또 자잘한 상처들은 이제 아무런 걸림돌도, 옷 안에 박힌 가시조차 되지 못한다. 무던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서 바깥쪽으로 나아간다.)
(함께 걸어간다)
막사에는 몇몇 병사들이 누워 자거나, 앞에 불을 피워 놓고 물을 끓이고 있습니다.
하사관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다가도 두 사람이 지나가면 입을 딱 다물고 경례를 보냅니다.
‘지지 않는 꽃’을 보고 경탄의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한 병사가 단체 막사 앞에 앉아 발에 칭칭 감은 붕대를 풀고 있습니다.
병사들의 생활을 파악하려면 대화를 해 보아도 좋겠네요.
베아트리체 힐:(에르드와 나란히 걷다가 시야에 들어온 병사 쪽으로 다가선다.) ...무슨 일이지?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병사:(발에 감은 붕대를 풀다 말고 베아트리체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선이 차차 올라가며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던 무감동한 눈은 그의 얼굴에 닿자 튕기듯이 놀라 일어난다.)
충성! 2보병연대 3대대 독립중대 1소대 분대장 마키 허셔입니다. 아. (그러다 중심을 잃어 휘청거린다.)
푸르고 검게 썩어 들어간 동상 같은 흔적이 발등의 절반을 뒤덮고,
엄지와 검지는 아예 잘려 나갔는지 자리가 텅 비어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서둘러 손을 뻗어 휘청거림을 잡아낸다. 이어 그 자리에 그대로 앉기 편하도록 몸을 숙여 돕는다. 주변을 슬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춘다.) ...그대로 앉아 있어도 됩니다. 치료는 제대로 받고 있는 겁니까?
병사:죄송합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의무실에는 이미 다녀온 겁니다. 처치를 받았습니다. 지금 의무실 병상이 포화 상태라…… 여기 보이십니까? (손목에 초록색 띠를 차고 있다.) 트리아지 그린입니다. 저같이 가벼운 증상은 발이 다 썩어 잘려나갈 처지가 아니라면야, 잠시 다녀오는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소식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만…… 참호전이 있었습니다.
전선이 고착화되니 참호를 파고 밤새도록 전선을 지키는 방식의, 1차 대전 무렵에나 유행했던 전투가 지속되었던 모양입니다.
구덩이에 물이 고여 찰박거리는 전투화를 신다 보면 참호족이라는 병에 걸리는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의무병들이 매번 잔소리를 하고 예방책을 내놓았지만, 모든 병사들을 관리하기는 어려운 법이죠.
베아트리체 힐:...가벼운 증상이요. (한숨은 삼켜내고 표정을 유지한다. 흐트러져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자연스레 눈썹이 아래로 향한다. 참호전이라니. 이런 시대에... 아니, 이런 시대이니만큼. ...하루라도 빨리 상황을 끝내야 할 텐데.)
의무실에는 이보다 더한 증상자들이 많다는 거겠네요.
병사: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발가락 한두 개쯤은 우스울 정도죠.
그렇지만…… (병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포기하려고 했다가, 충동적으로 불쑥 내뱉었다.) 문제는 의료물자가 아닙니다.
치유 능력을 가진 각성자 분들이 아예 싹 낫게 해 주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의료 로봇이나 약이나 다, 요즘은 기술력이 좋지 않습니까? 낫는 건 금방 낫습니다. 낫지 못해도 어쩌겠습니까? 전쟁에 나왔다가 팔다리 한짝 잃는 것도 다 자기 운입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놈들은 치료 자체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실력 좋은 의사와 치유 각성자가 붙어서 사흘만에 낫게 해주면, 사흘만에 도로 전선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기죽는 성격도 아니고, 발가락 정도야 의지를 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징집되어 온 어린 놈들은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합니다. 자유롭게 참전한 병사만 있지가 않습니다. 내전이 되다 보니 이쪽 편 도시들에서도 사람을 닥닥 긁어 징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놈들이 혁명이고 자유고 뭘 알겠습니까.
전쟁 자체가…… 전쟁 자체가 끝나야 합니다.
병사가 이토록 위험한 말을 베아트리체에게 하는 이유가 뭘까요?
마치 거대한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기적이 된 천사를 보듯이.
대명사로 지칭될 수 있는 고유명사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싶다는 얼굴로.
베아트리체 힐:......이해해요. (전해 듣는 보고, 숫자로만 적혀진 수치, 부상자와 사상자는 눈에 담으면 이렇게 참혹하다. 전쟁은 아무런 죄없는 이들까지 긁어모아 이토록 진창으로 끌고 간다. 병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다.)
...끝내겠습니다. 반드시.
(그의 손을 위로하듯 두드린다.)
에르드:어느 전쟁이든 끝은 와. (덤덤하게 한 문장만 뱉었다. 그다지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으나 그는 본디 위로에 소질이 있는 이는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확실한 가능성이 보이는 것만 말할 뿐.)
릴리안 웨즐리:대위님! 시간 남으시면 이쪽 창고 좀 봐 주십쇼! 수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까리한데 근시일에 무너질 것 같은지 능력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 병사는 여전히 간절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단히 뛰어난 몇 사람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요?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이미 어마어마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 힐:(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간절한 얼굴을 돌아본다. 화답하듯 희미하게 웃음을 그린다. 저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인지라, 무수히 쏟아지는 믿음이 가끔은 어깨에 무겁게 내린다. 그럼에도,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그들의 바람과 염원이 다시금 일어날 힘을 주니까.)
...믿어주세요. 저희는 지지 않습니다.
(말을 끝으로 에르드를 올려보고는 릴리안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릴리안이 무례하게도 상관을 닦달해 창고 수리를 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저편으로 기울었습니다.
약속된 시간, 두 사람은 사령부 막사로 향했습니다.
수뇌부가 머무르고 있는 것치고는 검소한 막사 안에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회의 탁자가 있습니다.
상석에는 해방군 총사령관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참모 요한 에를리히가 보입니다.
총사령관:왔나. 앉게. (의자를 눈짓한다) 고생 많았어. 다친 곳은 없고?
에르드:예. (칼같은 각으로 경례하며 무뚝뚝하게 응답하곤 의자에 앉는다.)
베아트리체 힐:예, 괜찮습니다. (각 잡힌 경례 후에 자리에 앉는다.)
복귀하면서 두 사람은 ‘극비 작전‘ 이 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보안을 우려해 상세한 내용은 전달받지 못했었죠.
요한 에를리히:(공중에 지도를 띄워 홀로그램 패널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쳤다.) 지금 우리는 왈비스만 동측 전선에 있다.
…모두 알만한 이야기지만 정리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총사령관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공화국은 X각성자를 무한히 생성해 재공급했다. 치유계 각성자들까지 미친듯이 투입해 빠른 전선 복귀 시스템을 완성했지. 반면 우리는 여기서 더는 병력을 긁어모을 수 없어. 다카르도 이 이상의 군비 지출은 난색을 표하고 있으니까. 이대로는 안 돼. 이 인원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우리는 스와콥문트로 향한다.
총사령관:(말을 받았다.) 재작년에 결국 스와콥문트로 대통령궁이 이전된 것 기억나나?
전쟁 중이라는 사유로 결국 종신직 대통령이 된 로멩 바투타의 대통령궁이 스와콥문트로 이전되었죠.
공적인 사유는 신변 보호였지만, 실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총사령관: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대강 추측할 거라 생각되는군. 어쨌든 전선을 여기까지 끌어당기는 데에 성공했으니 지금이 적기라네.
대통령을 인질로 붙잡아 협상을 요구할 작정이야.
설령 생포에 실패하더라도 그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찾아볼 정보도 있을 테지. 자네들이 이야기해준 게 많지 않은가. 에를리히 군이 찾아낸 것도 있고.
요한 에를리히:예를 들자면, 4년 전… 에르드와 힐이 방위사령부 지하에 침입했을 때 발견했던
‘SKYWAY’ 라는 단어. 우리는 정부가 하늘길 시스템을 수상한 곳에 쓰고 있다고 이미 잠재적 확인을 거쳤지. 그 하늘길 시스템의 서버 신호 전파가 스와콥문트 방향에서 감지되고 있다.
총사령관:그런데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거야. 정찰이 필요해. 우리는 근처에서 끌어모을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끌어모아 대기하고, 두 사람이 먼저 침입해 길을 열어 주길 바란다.
요한 에를리히:적군은 우리가 열세에 몰렸다 여기고 있다. …그게 사실이고. 그래서 내일, 그들의 핵심 군단 두 개를 투입해 우리 잔존 병력을 쓸어버리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간의 패전은 작전상 후퇴였다. 흩어져 있던 적 병력을 일부러 이쪽으로 모아 오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어.
그러니… 두 사람이 내일 전투에서 할 수 있는 한 적측 핵심 군단을 섬멸해야 해. 그렇게 해서 적군 병력을 크게 약화시킨 다음 스와콥문트로 침입한다면, 적측은 한동안 정신이 없어 쫓아오기 힘들겠지.
베아트리체 힐:(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로 인해 끝을 조금이라도 빨리 앞당길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끝으로 에르드를 바라본다.)
에르드:확인했습니다. 지금껏 해왔던 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의문이나 반박은 하지 않는다. 요한 에를리히는 뛰어난 참모였고 에르드에게는 그만한 전술을 짜낼 지략이 없었다. 그의 판단을 믿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거면 된다.)
이 이상 전달사항이 없다면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요한 에를리히:그래. 하려던 건 이게 끝이다. 별달리 보고할 사항 없지? 비밀 임무 건은 아까 복귀 때 들었고.
베아트리체 힐:네, 없습니다. (고개만 끄덕인다.)
베아트리체 힐: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만 갈까, 에르드에게 입 모양으로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 후, 걸음을 옮긴다.)
에르드:(가볍게 예의를 갖추곤 사령부 막사를 나선다. 어느덧 검푸른색으로 변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대통령을 인질로 붙잡는다라……
명운을 건 전투군. 승패가 여기서 결정나겠어.
베아트리체 힐:...분명 그렇게 되겠지. (허공에 손을 뻗었다가 천천히 거둔다.) 끝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손에 잡힐 것 같아.
(나란하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에르, 대통령은 정말 실존하는 인물일까.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이. 조작은 아닐까 생각했던 영상들. 불안한 기색이 일순 스쳐간다.)
에르드:어떤 힘겨운 전쟁이라도 끝은 반드시 오는 법이니까. (낮은 음성으로 마키 허셔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나도 회의감이 들지 않는 건 아냐. 영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이전했다던 대통령궁 역시 죄다 허상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결말을 보기 위해선 스와콥문트에 갈 수밖에 없어.
베아트리체 힐:맞아. ('어떤 힘겨운 전쟁이라도 끝은 반드시 오는 법이니까.' 반드시 정해진, 이미 눈으로 본 미래라는 듯이 되뇌이는 목소리는 명료하다.)
(시선을 들어, 턱끝부터 뺨, 눈을 마주한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해야겠지. 마지막을 위해서.
무엇이 기다리더라도 네가 함께하니까. 우리는 어디에서도 지지 않을 거야. (바람에 힘을 실어 에르드의 손을 맞잡는다.)
에르드:(그러고 보면 너무 오래도록 전쟁에만 미친 채 살아왔다. 적군을 죽이고, 아군을 보호하고, 적군을 또다시 죽이고, 베아트리체를 위험에서 떨어뜨리려 애쓰고…… 전쟁 다음의 삶을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발 딛고 선 아프리카가 끝없이 신음하고 있어서.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환경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제는 그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그는 시선을 마주하듯 베아트리체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빈말로라도 편하다고는 할 수 없을 4년이었다. 그는 고독에 익숙했고, 기관단총에 맞아도 몸만은 우뚝 서 있을 것처럼 우직한 사람이었지만, 베아트리체가 함께 있었기에 이 지난한 세월을 버텨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응. 지지 않아.
우리 막사로 돌아가자. (꾹 맞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베아트리체 힐:(수많은 피를 보았고,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으며, 이내 푹 적셔졌다. 지난 4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전쟁은 죄없는 이들의 피로 쓰여진 누군가의 이익이다. 끝을 마주하고도 없었던 일처럼 행복할 수 없다. 평화가 도래해도 상처는 남는다.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야겠지. 그럼에도 세상에, 상황이, 주변이 떠밀어서 한 선택이라 해도 내가 한 선택이다. 그 길에 너와 함께이니, 단 한순간도 후회한 적 없다. 그 무게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에르드 덕분이니까. 그러니, 지금 얼굴에 얼마든지 웃음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응. 돌아가자.
작전 개시까지 두 시간. 옷을 갖춰 입어야겠습니다.
더는 군인 제복도 입을 수 없고, 해방군의 대다수는 부족한 물자 탓에 어디 지나가는 도적떼 같은 꼴이었으나 그래도 장교는 그래선 안 됐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제대로 갖춰 입을 수는 없어도, 가능한 갖춰 입어야지. 옷 매무새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색 하나 없는 복장은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번듯하게 각을 잡아 소매며 목깃을 정리한다.)
에르드:(일반적인 전투를 하는 이들이 아니므로 걸쳐 입는 복장도 일반적인 군인과 같은 무거운 군장이 아니다.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몸을 가장 뛰어나게 활용할 수 있게끔 간단하게 챙겨입기 시작한다.) 긴장되진 않아? (이미 전투에야 익숙해진 지 오래이므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물음이다.)
베아트리체 힐:응, 그럼. 네가 있잖아. (나지막하게 숨을 몰아쉬고는 가볍게 웃는다. 손을 뻗어 어깨를 털어내는 손이 가볍다.)
에르드:언제나 네 몸이 가장 중요한 거 알지? (검은 목티 위에 방탄 자켓을 걸쳐입으며 환복을 마쳤다. 일견 무심하게 들리는 물음이나 페어를 향한 깊은 애정과 걱정이 숨어 있다.)
베아트리체 힐:그럼. 그만큼 네 몸이 중요하는 것도 알지. (마지막으로 걸친 자켓의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린다. 무던한 얼굴을 두 손에 담아본다. 언제나 조심스러우며, 걱정스럽고 염려스러운.) 이번에는 다치지 말자. 가능한.
에르드:넌 너보다 내 걱정뿐이니까. (그건 에르드도 마찬가지지만. 베아트리체의 작고 하얀 한 손을 감싸쥐며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오늘은 좀 더 노력하지.
그때, 막사마다 설치된 안내 스피커에서 경보 소리가 울리며 새빨간 조명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정찰조에서 본진에게 알림. 적군이 접근하고 있음.」
에르드:(그나마의 평온마저 싹 사라지고 전투를 앞선 야생동물과 같은 안광이 번뜩인다.) 일찍 시작하려는 심산인가 보군. 어서 무기를 챙겨,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 힐:(끄덕임과 동시에 손에 익은 장총을 메어 든다. 서늘한 금속을 쥐어든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탄창이 필요 없는 총, 탄창이 필요한 총을 가리지 않고 챙겨듭니다.
에르드:(막사 문을 열어젖힌다.) 에를리히에게 전해! 우린 당장 출격 가능하다고.
사막에서의 전투인 만큼 양자간의 전투는 언제나 적어도 해가 진 뒤에 개시되도록 암묵적 합의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작전도 20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데, 적이 기습을 해왔습니다.
어차피 20시 예정이었던 출격이 몇 시간 앞당겨진 것뿐입니다.
아군은 진작부터 진형 배치를 시작하고 있었고,
새삼스럽게 혼란이 와 규격이 흐트러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휴식을 방해받은 데다 뜨거운 날씨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열받은 병사들의 사기만 되려 올랐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모래바람을 헤치며 서걱서걱한 땅을 밟고 이륙장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두 사람과 한영, 그리고 그 설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한영:왔어?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에게 짧게 인사한다)
어서 타. (눈짓한다) 바로 띄울 수 있도록 준비해뒀으니.
급하게 닦아 놓은 이륙장이라 소음도 바람도 심합니다.
한영의 이능력이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니, 활주로 같은 게 굳이 필요치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민간인은 탑승조차 불가능하여 본 적도 없는 헬기를, 한영이 어찌어찌 조종법을 익히고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달이 걸렸죠.
기실 지난 몇 달은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의 작전 수행 완료와 동시에 한영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늘 고마워. 잘 부탁해. (모래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하나로 단단히 묶으며 올라탄다.)
에르드:(한영 페어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베아트리체의 뒤를 따라 헬기에 올랐다.)
한영과 설계자는 조종석에, 두 사람이 뒷좌석에 타 헤드셋을 걸쳤습니다.
스텔스 차폐막 드론이 붕붕거리며 작은 에너지 장벽으로 헬기 전체를 감싸 소리와 형상을 죽입니다.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지위를 무시하는 지휘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 필승 권장 수칙‘ 같은 것을 명문화할 수 있다면 ‘재앙의 날‘ 이후 그런 문서는 모조리 수정되었을 테죠.
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존재했던 허브 공항은 대다수 무너졌고,
시민들에게 정밀한 방위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국가는 새로운 공항 건설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공군은 지극히 극소수 편제로 구성되어 사상검증을 철저히 받은 사람들만이 조종간을 쥘 영예를 허락받았습니다.
국가 방침이 그러한 데다, 애초에 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내에선 고공에서의 타격이 불가능합니다.
툭하면 모래폭풍이 불고 낙진 같은 비가 쏟아지는데 시계 확보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습이 가능할 리가 없죠.
양자 모두 공습에 투입할 인력이나 군용기도 없었지만,
있다고 쳐도 장벽 바깥에선 앞이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도시를 습격하자니 자국민을 참살하는 꼴이 되는데 어떤 정신 나간 지휘부가 그것을 승인하겠나요?
그러나 공중전이란 개념 자체가 상실된 이 우스운 시대 속에, 요한 에를리히는 작전 개시를 선언하며 말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전황을 뒤집을 수 없다면 지형을 뒤집으면 된다. 폭탄을 떨어트릴 수 없어도 공중전은 가능해. 에르드 소령, 베아트리체 대위. …스러진 병사들의 목숨값을 대납해 주도록.]
헬기는 묵묵한 재앙을 품고 적진 위로 날아갑니다.
지상에서는 보병들이 부딪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래 먼지가 피어올라 시계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보병들의 전황이 격렬하고, 독립 중대 두어 개가 모래능선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적진에선 하늘의 변화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영의 설계자가 뒤를 돌아봅니다. 조심스러운 질의가 이어집니다.
고공에서 헬기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오로지 한영의 구현에 의지해 허공을 걷습니다.
헬기 안에서 설계와 구현을 펼치기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신처럼 활보하면서… 적을 섬멸해야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모래 먼지가 이는 아래와 푸른 하늘을 잠시 눈에 담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다.) 네, 부탁합니다.
에르드:(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 몸을 풀었다.) 준비됐어. 가지.
펄럭거리는 고공의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옷소매 사이로 펄럭여 피부를 긁습니다.
에르드는 망설임도, 겁도 없이, 마치 달로부터 지구까지 투신하듯 허공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한영과 설계자의 이능력이 두 사람을 감쌉니다.
연한 노란색과 연두색이 교차하며 발밑을 받쳐 주는 것이,
이제는 사라져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봄의 풀밭을 밟는 기분입니다.
허공에서 적을 죽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권능 같은 이능을 지녔다고 해도, 고작 두 사람이 수천, 수만 명을 해치울 수가 있겠나요.
릴리안의 고함 소리로 추정되는 것이 얼핏 들려옵니다.
해방군의 핵심 전력인 두 사람과, 중력을 다룬다는 중요한 이능력을 가진 한영 페어가 동시에 떠나올 수 있는 까닭은 다 릴리안 웨즐리 덕분입니다.
설계자도 없는 그가 어떻게 아군 진지를 홀로 방어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여백이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전쟁은 사람의 역사를 하나하나 지우고, 또 새롭게 쌓아 올리는 과정입니다.
영웅은 탄생하는 것 자체로 발아래에 수많은 시체를 밟아 건너는 일을 행하므로 영웅인 거겠죠.
사막을 뒤덮고 엉키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 떼처럼도 보입니다.
연보랏빛 눈에는 그 수많은 이들 하나하나가 움직일 미래가 선명히 보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몇 발자국을 뗄지, 어떤 방향으로 방아쇠를 당길지, 어디를 노릴지.
4년 전의 자선 파티 때 에르드가 그리 말했었죠.
당신에게 함께 승리할 미래만을 보여주고 싶다고.
혼자라면 어려웠을지 모르나 두 사람은 이제 서로와 떨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마침내 각인까지 마치며 한몸으로 붙어자라는 연리지와도 같아져서.
당신의 페어와 이 지난한 전쟁에 하나의 방점을 찍기 위해.
베아트리체 힐:(휘청이는 허공에서도 단단히 발 밑을 지탱하는 것이 있다. 단단히 붙들어주는 손이 있다. '우리'는 이 전쟁을 끝낼거야. 승리를 거머쥐고, 상처 뿐인 땅에 생명을, 잃어버린 봄을 틔울거야. 하늘의 푸른 빛이 일렁이는 옅은 눈에, 모든 것들이 새겨진다. 저들의 미래를 잘라내고, 우리의 미래를 새로이 엮어나갈 것이다. 흐름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온다. 끝을 위해.)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9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에르드:(평소와는 다른 시계와 고도.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런 것쯤엔 하등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고 최적의 자세를 잡는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안광이 거의 없는 황금색 눈에서 적을 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말살해내고야 말겠다는 살의와 적대감이 불타오른다. 제 곁에 숨쉬는 이의 존재를 되새길 때마다 정신은 돌로 쌓은 성벽처럼 견고해진다.)
(그는 사실 혁명이나 정치극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제 한 몸 건사하며 살아갈 수만 있으면 어떤 환경이든 버텨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더 좋은 세상과 더 나은 삶을 바라게 되는 이유가 생겼다. 저에게 미래를 꿈꾸게 만들고, 나아가고 싶게끔 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를 위해서라면 마르고 갈라진 땅을 채찍질해서라도 비옥해지기게 만들 것이다. 일일이 씨앗을 뿌려서라도 풍요를 가져올 것이다.)
(먹잇감을 물어챌 순간을 노리는 짐승처럼 베아트리체의 설계가 뻗어나가기를 기다린다. 철컥, 에너지 운용 권총의 장전음이 울렸다.)
석화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2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하늘 위에서부터 촘촘하게 뻗어나가는 에너지의 흐름은 마치 나무가 드리운 뿌리 같습니다.
실 같은 뿌리 하나하나가 적군에게 가닿고, 그 설계를 타고 에르드의 석화가 번개처럼 굴러가 적의 움직임을 멎게 합니다.
다수에게 동시에 적용하기는 힘든 만큼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였지만, 전투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큰 허점이 되죠.
적과 아군이 뒤섞인 난장판에서 정확히 절반의 움직임만이 멎는 동시에 에르드가 에너지 운용 권총을 난사합니다.
연보라색 뿌리 위로 비처럼 쏟아지는 황금빛 총알은 마치 피어나는 꽃송이처럼도 보입니다.
설계를 타고 흘러간 구현이 적을 꿰뚫고 지나갈 때 비로소 만개합니다.
극비 작전을 알고 있었던 장교 몇 사람이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휘하 병사들도 제 중대장의 행동에 따라 고개를 듭니다.
아모리베늄을 연상케 하는 두 빛깔의 색이 온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꽃을 잡아뜯거나 꺾을 수 없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피어나는 아모리베늄의 꽃송이 위에, 물줄기를 끼얹듯 에너지가 담긴 긴 총신에서 아래로, 땅으로 연보랏빛 줄기가 하나 둘 쏟아진다. 고통 없는 마지막을, 땅을 적실 물줄기를. 미약한 힘이나마 더해 보태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계속 가자.
에르드:문제 없음. (베아트리체가 읽어내는 미래가 저의 눈에도 보였다. 감정뿐 아니라 시야까지도 합치되어간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듯 이 전장터 역시도 그렇다. 주어진 몫, 그 이상을 해내기 위해 끝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희귀하다는 꽃이 지금만큼은 이 사막 전체에 피어나는 듯했다.)
눈앞에서 정확히 적군들만이 쓰러져 죽어갑니다.
눈이 돌아간 아군 병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시체를 밟고 진격합니다.
그날 아프리카 해방군은 몇 달간의 패배를 완전히 뒤엎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적군 4만명 중 1/3이 사망하거나 전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정리하며 요한 에를리히는 무덤덤한 낯빛을 했습니다.
보고를 마친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막사로 향합니다.
릴리안 웨즐리:단결. 고생하셨습니다. (칼같이 경례한다.)
베아트리체 힐: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어. 고생 많았어, 릴리안 중위. (가벼운 경례 끝에 품에 꼭 안았다가 놓아준다.)
릴리안 웨즐리:대위님도요. (조심스럽게 마주 끌어안는다.)
(에르드에게 시선 옮겨간다.) 잠시 대위님이랑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에르드:…… 마음대로. (어깨 가볍게 으쓱하고는 먼저 막사로 들어간다)
베아트리체 힐:(가는 등에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시 릴리안을 바라본다.) 할 이야기라니?
릴리안 웨즐리:(막사 문 바로 옆의 의자를 가리켠다.) 일단 앉으시죠. 와인도 한 병 가져왔는데 드시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래, 앉아서 얘기하자. (미소를 떠올리다가... 잠깐 고민한다. 얼마만이지. 한 모금 정도는 괜찮으려나... ...) 그럼 한 잔만 부탁할까.
릴리안 웨즐리:예. (기다렸단 듯 잔을 두 개 꺼내서 1/3쯤 따라준다. 건배하자는 듯 잔을 들어보이기까지 했다.) 예전엔 대위님이랑 이렇게 술 한 잔 하는 건 꿈도 못 꿨는데 말입니다. 해방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맨날 선배님이라고 호칭 실수하고 그랬죠.
베아트리체 힐:(가볍게 잔을 마주 부딪히고는 입가로 기울인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때는 정말 귀여웠지. 나는 언젠가 릴리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릴리안 웨즐리:정말입니까? (쑥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소심하던 학생 적 모습이 겹쳐보인다. 잔을 맞부딪힌 후에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엔 선배님이랑 함께 싸운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았었죠.
오늘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는 물론 많았지만, 적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모래가 시체를 덮어 신원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된 사람이 많았을 겁니다.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릴리안은 침묵하다가 와인 몇 모금으로 용기를 얻은 듯 다시 입을 엽니다.
릴리안 웨즐리:그때 기억나십니까? 저 살아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몇 년 전 임무에 나선 릴리안이 한 달 가까이 고립되어 있다가 기적처럼 생환했던 시절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털은 뭉텅이로 쥐어뜯겨나갔고, 피골이 상접해 있었죠.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었는데, 이슬을 받아먹으며 버텼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려 요한 에를리히가 한참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때 말이지. (핼쑥하게 파인 뺨이 겹쳐 떠오른 탓에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더 미리 보았더라면, 그렇게 될 일은 없었을텐데.
릴리안 웨즐리:대위님 탓하려고 이 얘길 꺼낸 게 아닙니다. (뺨에 닿는 손길을 느끼며 실없이 웃는다)
그때 제가 소대장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래 200명 애들을 다 잃어버리고 혼자 고립되어서 무너진 건물 안에 갇혔습니다. 적 각성자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바람에 그렇게 됐었죠. 제가 갇혀 있던 기간이 20일이 넘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을 것 같으십니까?
베아트리체 힐:(수많은 죽음을 목도 했어도, 쉽게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심정은 여전히 앙금처럼 남는다. 그때 보고서를 받아든 요한이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던가.) ...이슬로 겨우 버텼다는 얘기는 들었어.
릴리안 웨즐리:……. (씁쓸하게 웃는다) 위층에서 죽은 놈이 있었는데, 그 피가 제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도리가 있습니까? 받아 마셔야죠.
근데 그게 X-각성자였던 겁니다. 그 피를 마셨으니 제가 설계자 없이도 이렇게 강해진 겁니다. 의무장교님은 아십니다.
선배님. (그는 이제 더는 실수하지 않는데도 일부러 당신을 그리 호명했다.) 산다는 건 선택의 연속입니다. 저희는 정말이지 더는 이 전쟁을 이끌어나갈 수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옳았다고 할 수 없어도 옳은 겁니다. 몇 명인가는 모르겠지만, 적 부대 몇 개를 섬멸해서 더 큰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베아트리체 힐:......릴리. (이 감정을 무어라 더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있는 사전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참담함이 이곳에 있다. 전쟁은 잔인하다. 그러므로, 더 잔인해지는 자만이 끝을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를 위로하듯, 자신을 위로하듯 손을 겹쳐 느리게 다독인다.)
...그래, 그 말이 맞아. 더 큰 죽음을 막아야하지, 우리는. (발밑에 무수히 쌓인, 태산보다 높게 차오르는 죽음들이 발목을 잡는다. 우리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그런 것이다.) ... ...더 이상 끌어서도 안돼. 끝을 내야 해... ...반드시.
릴리안 웨즐리:(다독이는 손길을 마주 잡는다.) 이미 선배님의 어깨에 많은 짐이 올라가 있단 걸 압니다. 오늘의 전투는 두 분 덕분에 이긴 거나 다름없습니다. 혹여라도 죽은 목숨에 죄책감을 느끼시지는 않을까, 주제넘게 걱정이 돼서 찾아뵀지 말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손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잔을 반쯤 기울인다.) 그때에도, 지금도 네게는 늘 위안만 받는 것 같네. (푸른 하늘과 엉망으로 뒤엉킨 모래 바닥. 뒤섞이는 소음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들... ... 눈꺼풀 안 쪽에 새겨진 것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우리에게는 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이웃이며 연인이고, 친구였을 이들이니까. ......하지만 그런 상처까지도 다 안고 가야해, 나는. 지키고자 한 것들을 지켜야지. 옳다고 생각한 것을 계속 옳다고 믿어야 하니까.
릴리안 웨즐리:저도 대위님께 만만찮게 위로받았는걸요 뭐. 열 배는 더 많이 해주셨을 겁니다. (희미하게 미소한다) 대위님은 마음 여리시지만 동시에 강한 분입니다.
이걸로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 가까워졌겠죠. 그 끝까지 꼭 살아남는 겁니다.
베아트리체 힐:(잔을 내려놓고 다짐하듯 손을 꼭 마주잡는다.) 응, 그래야지. 꼭 살아남자. 마지막의 마지막에 승리했다고 외치는거야.
릴리안 웨즐리:(고개를 끄덕였다. 흉터가 지고 바랜 홍채에서는 결연함이 엿보인다.)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릴리안은 몇 마디를 나누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갑니다.
베아트리체 힐:(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낮게 숨을 내쉬며 표정을 갈무리한 후, 막사로 돌아간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많이 기다렸어? (한 모금 기울인 덕분에 얼굴에 호선을 그리는 것이 쉽다. 그만큼 반대로 쏟아지기도 쉽지만. 자신의 조각을 찾아가듯, 빈 구석에 연인을 가득 채워 넣는다. 빈틈없이 끌어안는다.) ......오늘 고생했어.
에르드:(간이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뜬다.) 아니. 할 것도 없는데 뭐. (아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얇은 막사 너머고 굳이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 끌어안고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너도. 공중에서 공격하는 건 처음이라 적응이 어려웠을 텐데 잘 해줬어.
베아트리체 힐:...다 네 어깨 너머로 많이 보고 배운 탓이지. (품에 가리워지면 어떤 표정도 필요 없으니, 그대로 파묻는다.) 우리는 해야할 일을 했어, 늘. ...그렇지?
에르드:응. (본디 각성자사관학교에 입학한 생도들은 크리쳐와 싸우기 위해 훈련받고 길러진다. 지능 없고 악의만 가득한 크리쳐와 싸우는 대신 같은 사람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다. 에르드는 천성이 무디고 거친 편인지라 죽여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 하여 그다지 심정적 동요가 있진 않았지만 베아트리체에게는 또 다르겠지.) 옳지 않더라도 옳다고 해야 돼. 거대한 악을 물리치기 위해선 또 다른 악이 되는 경우도 있을 수밖에.
베아트리체 힐:그래, 그거면 됐어. (흔들리고 무너질 즈음이면 언제든 붙들어주는 것들이 있다. 넘어져 까진 무릎을 털어주고, 손 내밀어 일으켜 줄 이가 있다. 그러니 다시 나아가야지. 뒤돌아 볼 시간조차 아까운 시기에.) ...얼마든지 악이 되어도 좋아. 나를 손가락질해도 좋으니 얼른 끝내고 싶어.
에르드:너와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마찬가지로 얼마나 더한 악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세간의 인식 따위 관심도 없다.) 곧 그런 세상이 올 거야. 우리 손으로 가져올 테니.
베아트리체 힐:응, 분명히. (눈을 내리 감는다. 소음, 비명, 총탄, 파열음과 낙진처럼 쏟아지는 그 어떤 것... .... 낮게 감싸 안는 목소리만 남겨둔다.)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건 스스로와 에르드의 존재뿐입니다.
다음날, 전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무렵 요한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스와콥문트 돌입 전 해방군 전용 워치 펌웨어를 업데이트하고 가라는군요.
베아트리체 힐:응. 갈까.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요한이 우측 옆자리, 에르드가 좌측 옆자리. 그리고 에르드 옆이 베아트리체입니다.
총사령관:그것도 해야지. 자네들 시계는 잠깐 풀어서 두게. 에를리히 대령, 부탁 좀 함세.
베아트리체 힐:...네. (경례 후에 의자에 앉는다.)
에르드:(왜 사령관까지 있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시계를 풀어 내밀었다.)
요한이 두 사람의 시계를 가져가 스크린 패널을 띄우고 이것저것 조작하는 사이,
총사령관이 손수 커피를 내려 앞에 내려 줍니다.
총사령관:뻔한 격언이긴 하지만… 장교의 전쟁은 병사의 전쟁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지.
전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나, 어쩌면 올해 안으론 전쟁이 끝날 거야. 그렇지 않은가?
끝나면 자네들은 뭘 할 작정인가?
베아트리체 힐:(무감한 낯에 불안의 기색을 떠올리지 않는다.)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에르드:마찬가지입니다. (함묵하더니) 승리로 끝난다면 군인이고 뭐고 때려치고 베아트리체랑 조용히 살고 싶긴 합니다.
네 의사는 안 물어보긴 했지만. (그렇지만 지금도 함께 지내고 있으니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져서. 한 박자 늦게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베아트리체 힐:(당연하다는 듯이 고개가 끄덕인다.) 그것만큼은 나도 똑같이 생각해. (만약 끝이 너무나도 가까워, 미래를 그릴만큼 여유로웠다면 부서지고 무너진 것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서리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총사령관:그런가. 쉬고 싶다는 마음도 이해하네만, 전후처리도 생각해야지.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는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엔 상징이 필요해. 신음하는 병사들을 어루만져 주려는 마음은 없는가?
요한 에를리히:실례. (하나도 안 실례한 표정으로 커피 대강 닦는다.) 이런 얘길 하시려고 애들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사령관님, 영웅의 삶을 왜 영웅 아닌 자가 강론합니까? 그만하고, 다 끝나면 두 사람은 자유롭게 하도록 풀어주십시오. 상징이건 영웅이건 총사령관님이 직접 하시면 그만입니다.
그 과정에서 로맹 바투타처럼 되신다면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거고, 잘 하시면 여기 두 사람보다 더 대단한 위인이 되실 테고.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 마음대로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깨 으쓱)
베아트리체 힐:(묵묵히 요한을 바라보다 겨우 시선을 돌려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지금은 끝을 맺는 데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때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겠지요.
에르드:(총사령관의 말에 벌레 씹은 표정이 됐다가 요한의 지적에야 겨우 찌푸렸던 미간에서 힘을 뺐다.) 상징 같은 거 관심 없습니다. 손톱만큼이라도 그딴 걸 원한다고 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억지로 강권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야. (몸을 일으킨다.) 그럼 먼저 나가지.
총사령관은 어느 정도 수긍한 채 지휘부 막사를 나갑니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홀로그램 패널을 연신 두드립니다.
혁명군은 더는 공화국 지급 시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카르에 독립적인 생산 라인을 구축해 두었죠.
두 사람이 4년 전 발견했던 ‘SYSTEM SKYWAY’ 가 하늘길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국민을 감시하고, 총본산 서버에 데이터를 쌓아 두는 시스템이 OS로 적용된 시계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을 주축으로 개발해 낸 새로운 OS를 적용한 시계가 모든 해방군에게 보급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마친 요한이 시계를 도로 내밉니다.
요한 에를리히:기억하나? 4년 전에, 너희가 방위사령부 지하에서 어쩌다 위기에 처했었는지.
베아트리체 힐:(시계를 손목에 차다 말고 끄덕인다. 그러니까 그 때에...) 기억나요. 프로젝트의 아버지에 대한 질문 덕에.
...관련된 정보가 있나요?
요한 에를리히:그래. 거기 있는 로봇들이 모두 '아버지' 라는 어떤 존재에 관해 이야기했었지.
당시엔 너희나 나나 아놀드 박사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결론이다.
(홀로그램 패널 하나를 크게 띄워 보여 준다.) 당시 모든 로봇들의 관리 전파를 한 송신기에서 받아 오고 있었는데, 그 송신기는 마치 각성자처럼 짝을 이루는 두 개가 한 쌍이야. 너희가 떠난 뒤 뒷처리하러 들어갔던 우리 내부자가 송신기를 빼돌렸고, 내가 분해해 봤거든. 모든 회로가 절반으로 잘려 있더군. 그리고 남은 하나의 짝 좌표값이… 스와콥문트로 되어 있었어.
로봇들에게는 하늘길 시스템 OS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아래를 파고들어 보면 최초로 ‘설계된’ 시스템의 신호는 스와콥문트로부터 받아 보고 있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그들을 ‘만든’ 누군가가 스와콥문트에서 로봇들을 관리하고 있고, 그게 곧 ‘아버지‘ 라고 추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스와콥문트에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그 ‘아버지’ 인지 하는 존재를 단번에 찾을 수 있을까요?
도시 하나 넓이를 두 사람이 탐색하는 일은 어려울 겁니다.
베아트리체 힐:(패널을 유심히 들여본다. 절반으로 잘린 회로, 남은 자리는 ... ...스와콥문트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 넓은 곳에서 저희 둘 만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요? ...범위를 줄일 수 있거나 신호가 발신 되는 정확한 좌표를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요한 에를리히:그래. 그래서 오늘은 그 작전 이야기를 좀 할 거다.
너희는 스와콥문트를 정복하러 가는 게 아니라, 스와콥문트의 진실을 파헤치러 가는 거니까 일단은 그 도시의 생체 정보를 추적해 봐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스와콥문트로 갔다’ 고 하는 그 많은 ‘공로자’ 들이 정말 거기 살고 있는지, 사람을 추적해 보자는 거야. 그건 내가 업데이트해 둔 스마트워치 어플리케이션으로 해결할 수 있어.
그다음으로 대통령궁이나, 핵심적인 시설이 설치된 장소를 찾아야 해. 내부 상황을 알지 못하니 작전을 촘촘히 짤 수가 없어. 일단 너희 두 사람의 목표는 이것 두 개고, 통신하면서 그때그때 대응하자.
허를 찔러 빠르게 몰아쳐야 하니까, 사령부에선 적어도 일주일 내 작전 개시를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나흘 뒤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겠나?
베아트리체 힐:...네, 이해했습니다.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자연스럽게 에르드 쪽으로 돌아간다.)
에르드:(공로자.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해방군으로 향했던 최초의 목적을 상기한다. 이제는 아주 오래도록 만나지 못해 얼굴마저 희미해져가는 어떤 사람. 이미 생사의 여부는 확인했으나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곳으로 향한다면 리사에 관한 진실도 파악할 수 있겠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제없어. 스와콥문트로 가는 건 바라는 바였으니까.
요한 에를리히:알았다. 전달사항은 이걸로 끝이야. 이만 가서 쉬어라.
베아트리체 힐: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쉬세요.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복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속으로 곱씹으면서.)
에르드:(고개 까닥 끄덕인다. 여러 의미의 끝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대화를 마친 후, 요한은 오래도록 두 사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공화국군을 절멸시킨 것만 같았던 전투로부터 며칠 뒤,
아군 병력은 새벽을 틈타 스와콥문트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부대 행보관들이 꺼멓게 죽어가는 얼굴이 되어 진군을 준비했습니다.
하늘길 시스템의 지도는 사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고의로 조작된 부분이 많습니다.
일일이 정찰 드론을 먼저 보낸 다음 경로를 파악한 후에야 이동이 가능했기에 진군 속도는 예상보다 한참 늦어졌습니다.
공간이동 구현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 가본 적도 없는 장소로는 이동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걸려 있었기에 더욱 선택할 수단이 없었죠.
이동하는 아군 진로로부터 한참 앞선 곳, 매서운 함신 사이.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군용 오프로드 차량에 탑승해 있습니다.
기묘하게도 모래 폭풍은 스와콥문트에 접근할수록 잦아들었습니다.
한치 앞도 짐작할 수 없는 사막에서 올바른 방위를 잡고 있다고 일러 주듯 기상 상황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차량의 자동 주행 기능은 지도 정밀성 문제로 믿을 수 없으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수동 운전을 해봅시다.
:기본 이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며, 아래 순서를 3회 진행합니다.
1. 정찰 드론을 날려 보내 주변을 관찰한다.
2. 설계자의 항법 판정에 성공하면 드론이 스마트워치로 전송하는 영상을 분석하고 스와콥문트까지 향하는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설계자가 실패한다면 구현자가 관찰력 판정 등을 진행해도 좋다.
3. 선정한 방향을 향해 운전한다. 운전자 역할을 담당한 캐릭터는 자동차 운전 판정을 거친다.
에르드:역할을 배분하는 게 좋겠군. 어느 쪽을 맡겠어?
베아트리체 힐:...그럼, 내가 드론을 확인할게. 내 운전대는 늘 네가 쥐고 있으니까.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듯, 가벼운 투로 정찰 드론을 날려보낸다.)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8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날려보낸 드론이 곧 베아트리체의 스마트워치로 날아간 경로의 영상을 전송해옵니다.
북쪽으로 200미터, 서쪽으로 30미터까지 우선 이동할 수 있겠군요.
베아트리체 힐:(스마트 워치를 확인한다.) ...북쪽으로 200미터, 서쪽으로 30미터까지는 보여. 문제 없을 것 같아. 부탁할게.
에르드:좋아. 어째 가까워질수록 폭풍도 잠잠해지는 것 같군. (다시 엑셀러레이터를 꾹 밟고 나아간다.)
자동차 운전
기준치: |
55/27/11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꽤나 험한 지대로 접어들었나 봅니다. 차가 미친 듯이 흔들리네요.
에르드:
(To GM)rolling 3
=
3
슬슬 멀미가 올라오던 그때, 모래 먼지 너머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보입니다.
처음 든 인상은 마치 육지에 사는 오징어 같다는 것입니다.
흐느적거리는 촉수와 짙은 회색의 괴육질 몸은 마치 기다란 자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
55/27/11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베아트리체 힐:
SAN Roll
기준치: |
60/30/12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에르드:아무래도 지나쳐갈 수는 없겠군. 정확히 이쪽으로 오는데. (운전대를 놓고 총을 집어든다.) 준비하자,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 힐:응, 문제 없어. (장총을 앞으로 메며, 다시금 흐름을 읽는다.)
순서는 베아트리체-에르드-크토니안... 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차 문을 닫고 내리면 불어오는 모래 바람에 시야가 흐리기도 잠시, 선명한 몸체가 눈에 들어온다. 고작 저것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쉽게 읽히는 미래다. 조준과 격발. 동시에 빛이 탄환이 되어 날아간다.)
라이플
기준치: |
25/12/5 |
굴림: |
1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피해: |
3 |
크토니안:
회피
기준치: |
17/8/3 |
굴림: |
1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베아트리체의 공격을 알아채고 몸을 꿈틀거렸으나 피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에르드:(전광석화처럼 베아트리체와 거리를 벌리고 다른 각도에서 크리쳐를 노린다. 찰나의 시간 베아트리체에게 유탄이 튀지 않게끔 계산을 마치고,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황금빛 탄환이 소리도 없이 공기를 갈랐다.)
권총
기준치: |
99/49/19 |
굴림: |
6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8 |
크토니안:
회피
기준치: |
17/8/3 |
굴림: |
27 |
판정결과: |
실패 |
구현자의 힘인지, 황금빛 탄환은 몇 배나 강력한 위력으로 크리쳐의 옆구리를 꿰뚫습니다.
크리쳐가 하늘을 향해 아가리를 치켜들자 점액이 허공으로 튀어오릅니다.
(더 강한 위력으로 저를 공격한 에르드에게 스스슷 기어가 몸을 휘감은 촉수를 휘두르려 한다.)
촉수 휘두르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7 |
에르드:(한참 빗나가는 촉수를 보지도 않고 펄쩍 뛰어오르며 입을 향해 총알을 난사했다.)
권총
기준치: |
99/49/19 |
굴림: |
9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2 |
총알이 크리쳐의 벌어진 입 안으로 파고들어갔으나, 각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는지 생각보다는 타격이 적어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넓게 퍼진 시야를 집중 시켜 미래를 읽는다. 저것의 움직임, 힘, 방향, 주변의 영향으로 비틀어질 궤도까지.)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8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크리쳐가 왼쪽을 향해 몸을 구부리려는 미래가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왼쪽. 어깨에 긴 총신을 기대어 다시 한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조준, 격발.)
라이플
기준치: |
25/12/5 |
굴림: |
48, 76, 48 |
+2: |
실패 |
+1: |
실패 |
0: |
실패 |
-1: |
실패 |
-2: |
실패 |
피해: |
1 |
순간 날아온 모래먼지가 당신의 눈을 찌릅니다.
시야가 흐려지며 총구의 방향도 미세하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크토니안:
잡고 빨아먹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75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2 |
그 틈을 타 다가온 크리쳐가 당신에게 촉수를 뻗어 붙잡으려 하였으나,
에르드:베아트리체! 옆으로 피해! (재빠르게 크리쳐의 움직임을 굳힌다.)
석화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7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금방이라도 다시 재정비해 달려들 것 같던 크리쳐가 순간 돌처럼 허공에 굳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아릿한 시야에, 들리는 것은 에르드의 목소리 뿐. 오로지 그에 맡겨 크리쳐의 움직임이 멈춘 순간, 몸을 낮춰 옆으로 피한다.)
에르드:(베아트리체가 유탄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
기준치: |
99/49/19 |
굴림: |
32, 23, 36 |
+2: |
어려운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0: |
어려운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2: |
어려운 성공 |
피해: |
1 |
에르드의 탄환은 이번에도 크리쳐에게 적중했으나, 급하게 쏜 탓인지 강한 데미지를 입힐 수는 없었습니다.
크토니안:
촉수 휘두르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3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3 |
석화에서 풀려난 크리쳐가 몸을 거세게 휘둘러 반격을 시도하나 거리가 멀어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었습니다.
뭉개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62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7 |
크리쳐가 발악하듯 몸을 마구 흔들며 에르드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박힌 탄환들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져 닿을 수 없습니다.
에르드:(가까워진 틈을 타 권총 대신 단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표피를 다 베어낼 기세로.)
단검
기준치: |
99/49/19 |
굴림: |
2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피해: |
5 |
우드득! 질긴 가죽이 찢기는 소리가 나며 크토니안의 몸 일부가 찢겨져 나갑니다.
크게 몸부림치기도 잠시, 크리쳐는 이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까끌한 모래를 눈물에 흘려보내고 시야를 살린다. ...머지 않았다. 다시금 거리를 가늠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베아트리체 힐:(찢겨나간 틈. 가장 깊숙이 박힐 궤도를 미리 열어본다.)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5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라이플
기준치: |
25/12/5 |
굴림: |
66, 8, 84 |
+2: |
어려운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0: |
실패 |
-1: |
실패 |
-2: |
실패 |
피해: |
4 |
이번에야말로 보입니다. 약점을 맞고 완전히 쓰러지는 크리쳐의 모습이.
표피가 갈라지며 드러난 약한 부분에 베아트리체의 탄환이 정확히 직격합니다.
크리쳐가 미친 듯 몸을 털어대다가 이내 움직임이 완전히 멎습니다.
에르드:(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베아트리체에게 달려간다.) 괜찮아? 다친 데는?
베아트리체 힐:(생리적으로 턱 끝에 맺힌 눈물을 닦아낸다.) 괜찮아, 네 덕분에 멀쩡해.
(손등으로 남은 땀방울을 훑어준다.) 안 다쳐서 다행이다.
에르드:이건 모래 때문에? (젖어든 눈가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업어주지 않아도 되겠어? (과보호)
베아트리체 힐:응, 모래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아. (에르드의 등을 꾹꾹 밀며 차로 돌아간다.)
크리쳐의 시체를 뒤로하고 다시 차로 복귀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다시 확인해볼게. (드론이 잘 날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3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드론이 제대로 방향을 잡고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북서쪽으로 400미터까지 거리를 확보해낼 수 있었습니다.
에르드:
자동차 운전
기준치: |
55/27/11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두 사람의 몸이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베아트리체 힐:(덜컹거림에 몸을 맡기고 에르드의 옆얼굴이나 빤히 본다.)
괜찮아? 길이 험해서 운전하는 데 힘들겠다.
에르드:(이쪽은 별 생각 없어 보임) 모래 때문에 바퀴가 자꾸 헛돌기는 하는군. 나는 괜찮은데 넌 어째 자꾸 위아래로 튀어오르는 것 같다. (자기보다 작은 만큼 움직이는 높이도 다르다……) 버틸 만해?
베아트리체 힐:(에르드의 시야가 넓긴 한가보다... 그걸 어떻게 봤을까. 괜히 벨트만 한번 고쳐맨다.) 응, 괜찮아. 등을 좀 더 딱 붙이고 있을게. 편하게 운전해.
에르드:그래. (털털털털 나아가는 자동차……)
흔들리는 차를 타고 나아가던 그때,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한 번 시야를 휩쓸고 지나간 모래 먼지가 걷히고 나면 결코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습니다.
거친 피부, 지나치게 큰 눈과 귀. 코알라의 얼굴을 비튼 듯한 얼굴.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
55/27/11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베아트리체 힐:
SAN Roll
기준치: |
60/30/12 |
굴림: |
8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에르드:이번에도 맞서야 할 것 같군. 어디서 자꾸 이런 게 나오는 거야. (투덜대며 차 문을 열었다.)
순서는 베아트리체-모래 부족-에르드... 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차에서 튀어나오듯 앞에 선다. ......이번에는 코알라. 총신을 다시 어깨에 기대며 한쪽 눈을 감아내린다. 바람이 스쳐간 후의 궤도, 저것의 힘과 움직임, 예기치 못한 방향들을 읽는다.)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5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조준, 방아쇠에 손을 걸어 당긴다.)
라이플
기준치: |
25/12/5 |
굴림: |
90, 69, 93 |
+2: |
실패 |
+1: |
실패 |
0: |
실패 |
-1: |
실패 |
-2: |
실패 |
피해: |
4 |
강력한 에너지를 담아 쏘았지만, 예기치 못하게 빗나가고 맙니다.
능력으로 본 미래가 반드시 들어맞는 건 아니니까요. 100번 중에 한 번 있는 실수였다고 생각합시다.
모래 부족:
발톱 공격
기준치: |
30/15/6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9 |
크리쳐가 위협적으로 달려들어 긴 발톱을 휘둘렀지만 거리를 잘못 계산한 건지 베아트리체와는 먼 허공만 가릅니다.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적에게 다시금 달려들어 팔을 휘둘렀다.)
발톱 공격
기준치: |
30/15/6 |
굴림: |
2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6 |
베아트리체 힐:(바람에 밀려 파악하는 것보다 움직임이 늦다. ...다만 지금이라도 움직임을 읽는 것에는 늦지 않다.)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회피
기준치: |
60/30/12 |
굴림: |
46, 46, 96 |
+2: |
보통 성공 |
+1: |
보통 성공 |
0: |
보통 성공 |
-1: |
보통 성공 |
-2: |
실패 |
발톱이 닥쳐오기 직전 크리쳐가 공격할 방향을 읽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발톱이 얼굴 바로 옆을 살벌한 소리를 내며 긁고 지나갑니다.
에르드:제길! (욕설을 내뱉으며 크리쳐에게 석화를 걸었다.)
석화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9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탄환이 베아트리체에게 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냅다 손에 든 단검을 던진다. 일반적으로는 그 누구도 총보다 검의 정확성이 높다고 판단하지 않겠으나 에르드는 10년 가까이 검을 손에 쥐고 살아온 이였다.)
단검
기준치: |
99/49/19 |
굴림: |
5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5 |
모래 부족:
회피
기준치: |
30/15/6 |
굴림: |
75 |
판정결과: |
실패 |
키에에엑ㅡ!
에르드가 던진 단검이 크리쳐의 한쪽 팔에 정확히 가 꽂힙니다.
크리쳐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납니다.
베아트리체 힐:(팔에 꽂힌 단검을 눈에 담는다. 섬뜩하게 스쳐가는 칼바람에도 다시금 시야를 바로 한다. ...제대로 보고 읽어,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을 노려. 베아트리체.)
설계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5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라이플
기준치: |
25/12/5 |
굴림: |
72, 36, 9 |
+2: |
어려운 성공 |
+1: |
실패 |
0: |
실패 |
-1: |
실패 |
-2: |
실패 |
피해: |
3 |
빠르게 시간을 감아대면, 스쳐가는 광경 속에 크리쳐의 움직임이 파노라마처럼 보입니다.
크리쳐가 결코 피할 수 없을 지점을 향해 탄환이 격발됩니다.
연보라색 빛이 번쩍하더니 크리쳐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쳐오릅니다.
모래 부족:
비무장
기준치: |
30/15/6 |
굴림: |
2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3 |
크리쳐가 당신에게 반격하려 들지만, 다리를 공격당한 탓에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져 충분히 피할 수 있습니다.
물어뜯기
기준치: |
30/15/6 |
굴림: |
33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4 |
크리쳐가 대상을 바꾼 듯 에르드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벌리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번 역시 다리의 부상 탓인지 이빨은 허공만을 악물고 갑니다.
에르드:(달려드는 크리쳐를 피하면서 권총으로 뒷머리를 겨냥한다.)
권총
기준치: |
99/49/19 |
굴림: |
8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7 |
위치에서 우위를 점한 에르드가 정확히 크리쳐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크리쳐는 방어할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숨이 끊어집니다.
에르드:(쓰러진 크리쳐의 팔에서 단검을 빼낸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으며 당신에게 다가갔다.) 베아트리체. 아깐 진짜 위험했어. 미래예지가 제대로 발동되지 않은 거야?
베아트리체 힐:(괜찮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빨라서 살았어. 갑자기 너무 많은 미래를 열어봤나 봐. 최근에 일이 많았으니까. 시야가 중간에 흐려져서. ...지금은 괜찮아.
에르드:네가 여기서 다쳤으면 내 명줄도 한 10년쯤 줄어들었을 거야. (작게 한숨 내쉬며 손 내민다.) 가자.
베아트리체 힐:(그럴 일은 없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응, 다시 출발하자.
돌아가던 중 베아트리체는 오래 전 품었던 기억을 문득 떠올립니다.
각성자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겪었던 모의 전투에서의 일.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고 지친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차량 내부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합니다.
사령부 쪽으로 현황 보고를 보내는 일도 빠뜨릴 수 없겠죠.
베아트리체 힐:(등받이에 기대어 패널을 확인하는 동안 크리쳐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역시 이상하지, 그런 모습은. 꼭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처럼.) ...보고도 해둬야겠지?
에르드:응. 부탁해도 되겠어? 난 말솜씨가 없어서. (그가 보고를 올린다면 '크리쳐를 조우함. 전투함. 끝.' 정도로 말할 것이다)
베아트리체 힐:응, 그럴게. (패널을 두드리며 보고할 내용을 입력한다.) '출발 후, 북으로 200m, 서로 30m 이동 중 오징어를 닮은 크리쳐와 조우, 전투 발생. 후에 북서쪽으로 400m 전진 중 코알라를 닮은 크리처와의 전투 끝에 점검 차 정지 중입니다.'
(제대로 전송 되었는지 패널을 확인하고 끄덕인다.)
...나 때문에 더 고생이 많았어, 에르.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 에를리히 측에서 확인했다는 요지의 답이 되돌아옵니다.
에르드:그런 말 마. 둘 다 무사하니 된 거지. (옆에서 베아트리체가 보고 내용을 입력하는 걸 구경하다가 물을 꺼내 내밀었다.)
베아트리체 힐:(내밀어진 물병의 뚜껑을 열어 다시 건넨다.) 너 먼저.
에르드:난 마셨어. (가득 찬 새 물병인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한다.)
베아트리체 힐:내가 방금 열었는데? (결국 슬 웃으며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넘겨준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크리쳐들의 생김새가 너무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방사능 탓에 변이된 동식물이라기에는... 역시 너무 이상해. 꼭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처럼.
에르드:(베아트리체가 마실 때까지 입술을 완강하게 다물고 있다가 그제야 받아마신다.)
나도 하나같이 괴상하게 생겼단 생각은 했어. 애초에 지도조차 제 입맛대로 조절하는 놈들이니 크리쳐에 관해서도 정확한 교육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동식물이 변이한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베아트리체 힐:(그 모습을 보고선 입가를 한번 쓸어준다.)
...어디까지가 거짓인걸까. 이제는 가늠이 안될 지경이야. (잠시 눈을 굴린다.) 어디에서부터 온 걸까... 저것 또한 만들어낸 걸까? 잘못된 경로로.
에르드:…… 그 비밀도 스와콥문트에 가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정말 크리쳐까지 만들어낸 거라면 인류의 행동 반경을 제한시킨 것도 의도라는 건가? 그게 정부한테 이득인 건지 잘 모르겠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저는 두뇌파가 아니다.)
베아트리체 힐:네 말처럼 모든 진실이 그 곳에 묻혀있을지도 모르겠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시작점으로 가야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에르드:그래. 거길 가기 위해서라도, (시계를 흘끗 확인했다.) 10분 정도 쉬었으니 마저 이동하자.
베아트리체 힐:응. (어느 정도 가까워진 것 같으니 마지막으로 다시 정찰 드론을 날린다.)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7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번에도 차질 없이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드론이 표시한 경로를 따라 에르드가 차를 운전해나갑니다.
에르드:
자동차 운전
기준치: |
55/27/11 |
굴림: |
2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사막 위를 운전해나가는 데에도 마침내 적응했는지, 이제야 운전이 매끄러워졌습니다.
갑작스레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에서 건조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우선 스마트워치가 알리는 방향으로 다가가 볼까요.
베아트리체 힐:...에르, 구조 신호가 있는 곳까지 가보자. (구조 신호와 정면을 번갈아 응시한다.)
에르드:우리가 아는 그 아놀드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겠어.
근처로 접근했을 때, 베아트리체가 먼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차에서 내려 [백골]과 [아치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신호가 가르킨 곳에서 차량이 멈춰서면 문을 열고 내린다. 메시지에서 말한 그대로야. 아놀드 밴에이슨, 아놀드 박사의 시신과 그 옆으로... 아치문. 정말 우리가 아는 아놀드 박사일까? 백골 시신에게 다가간다.)
낡은 방풍복이 반쯤 찢겨나갔고, 손에는 배낭과 낡은 신호 기기를 쥔 채 쓰러진 형상을 한 백골입니다.
아무래도 이 신호 기기가 문제의 ‘구조 요청 신호’ 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태양열 발전으로 수명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쥔 모양으로 깎여 나간 손가락뼈는 여전히 [배낭]과 신호 기기를 간절한 듯이 쥐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당신은 어떤 결심을 했길래, 이곳에 있는 건가요. 당신의 간절함을 내가 이뤄줄 수 있을까요. 손에 쥐인 배낭을 조심스럽게 확인해본다.)
몇 번이나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여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책이 한 권 들어있습니다.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언어인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중간쯤 날카로운 필체로 이런 문장이 휘갈겨져 있습니다.
그밖에는 말라비틀어진 건식 먹거리, 수분이 다 날아간 군용 수통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 사막을 홀몸으로 헤맸다기엔 준비가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애초에 여기까지 혼자 걸어오지는 않았을 테죠.
무슨 곡절로 스와콥문트를 목전에 둔 이곳에서 죽어간 걸까요?
시신 옆에는 구조 요청 신호의 메시지대로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아치문이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수습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여의치 않은 상황에 안쓰러운 눈길을 아치문으로 돌린다. 뭐라고 쓰여있는걸까. 자세히 들여다본다.)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로, 오래된 고대 유적처럼 흙 벽돌을 쪄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입니다.
벽돌마다 스마트워치조차 번역해내지 못하는 기이한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까 보았던 낡은 책에 쓰인 것과 같은 구조의 문자네요.
돌처럼 단단한 바람이나 만질 수 있는 구름처럼 환상적인 색채를 가진 채 반짝여 휘도는 물질이 맴돌고 있어 그 너머가 보이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홀린 듯이 아치 너머로 손을 뻗어 색채를 잡아본다.)
에르드:(식겁한다) 이게 뭔 줄 알고 막 손을 뻗어.
베아트리체 힐:(튕겨져 나온 손을 매만져본다.) ...아. 나도 모르게.
...아치문을 작동시켜 달라고 했는데. 저 책에 쓰인 것과 연관이 있는걸까? '각성자의 피 몇 방울, 약간의 마력과 정신력.'
에르드:…… 어쩌면. 대체 이 아치문이 뭐길래 작동시켜달라는 거지? (아치문을 한껏 노려본다. 그런다고 뭐가 나오진 않는다.)
베아트리체 힐:...우리의 목적을 이뤄줄 만한 것일지도 몰라. 메시지에서 들은 것처럼. 그는 꼭 스와콥문트로 각성자가 올 거라고 예상한 것 같아.
에르드:우리가 아는 아놀드 박사와 동일인물이라면, 프로젝트 아난시에서 경질됐다고 했었지. 그러면 최소한의 윤리는 갖췄단 건가…… (아치문이 함정이거나 위험한 물건은 아닐지 고민하는 듯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말했다) 그럼 내 피를 쓸게.
베아트리체 힐:(잠시 백골을 내려보다가 고개를 올려 시선을 마주한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말릴거야?
에르드:응. 적어도 내가 먼저 해보고 위험요소가 없단 걸 확인한 후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굳건)
베아트리체 힐:(굳건한 태도에는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이 죽 내려간다. 끝없는 걱정과 염려 탓에.) ...나도 늘 너와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는데.
에르드:봐줘. (씩 웃으면서 단검을 꺼낸다. 그는 이제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웃음에 약하다는 것 정도는 학습하는 데 성공했다.)
베아트리체 힐:.........정말. 이럴 때만 아주 못됐어. (그의 웃음에는 결국 손을 든다.) 대신 아주 조금만이야.
에르드:나도 필요 이상으로 상처 낼 생각은 없으니까.
(아치문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에 칼을 살짝 묻는다. 피 몇 방울이 아치문 너머로 흘러들어간다.) 나는 만지고 싶다. 느껴보고 싶다.
색채가 조금 더 빠르게 휘몰아치는 듯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제서야 흰 손바닥을 내민다.)
...우리는 하나니까. 혼자만으로는 안되는 모양이야.
알겠어. (심통난 게 뻔한 낯으로 베아트리체의 새끼손가락에 아주 조심스럽게 얕은 상처를 냈다.)
베아트리체 힐:(정말 과보호.) ...이 정도로 충분할까? (손 끝에서 떨어지는 방울들을 아치문으로 떨어트린다.)
나는 만지고 싶다. 느껴보고 싶다.
두 사람 모두 이성과 마력을 2점씩 지불합니다.
묘한 문장을 읊자 잠시 후, 부드럽게 휘돌던 기체가 점차 형상을 갖추더니 스크린처럼 매끄럽게 펼쳐집니다.
이윽고 영화가 재생되듯 내부에서 여러 장면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For the first time in its life, the universe will be permanent and unchanging. Entropy finally stops increasing because the cosmos cannot get any more disordered. Nothing happens, and it keeps not happening, forever.”
“생애 처음으로 우주는 영원하고 불변하게 됩니다. 우주는 더 이상 무질서해질 수 없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마침내 증가하길 멈추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일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영원히.”
리사 커티스:그 가정이 의미가 있나요, 닥터?
우리는 ‘축퇴의 시대‘ 는커녕 제4천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조차 예측할 수 없어요.
아놀드 밴에이슨:중요한 것은, 리사 커티스 씨. ‘최초의 설계자‘ 는 그것을 ‘설계하려‘ 했다는 겁니다.
리사 커티스:…… 당신의 가정을 처음부터 되짚을게요. '재앙의 날' 당시 살아남은 아프리카의 일곱 도시가 모두 해안가와 인접하고 있는 게 수상하단 거였던가요.
아놀드 밴에이슨:예. 운석 충돌 탓에 오염된 건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해안선을 따라 도시 일곱 개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카사블랑카, 다카르, 몬로비아, 아비장, 두알라, 카빈다, 스와콥문트.
아놀드 밴에이슨:전부 아프리카 대륙의 서측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리고 카사블랑카부터 스와콥문트까지는 정확하게 1만 km 거리가 있지요.
리사 커티스:저도 그게 이상하단 생각은 해요. 하지만…… 역시 이해가 어렵네요. '최초의 설계자'는요?
뭐가 어떻게 됐든간에 ‘각성자‘ 들이 나타난 것은 ‘재앙의 날‘ 이후예요. 재앙의 날 이전부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설계자‘ 가 될 것을 예측하고 앞으로의 일을 대비할 수는 없잖아요.
아놀드 밴에이슨:그렇다면 이야기는 좀 더 과거로 되돌아가야겠군요…….
아놀드 박사, 방위사령부 지하 연구소에 틀어박힌 채다. 푸르고 괴괴하게 빛나는 홀로그램 패널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아놀드 밴에이슨:…이건 말도 안 돼. 하늘길 시스템은 100% 정확성으로 다음 선거 결과를 예측했어. 이게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한 영역이 맞나?
선거 결과 예측이란 것은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일이야. 게다가 후보의 사생활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어제야. 그 여파가 ‘계산‘ 되려면 언론 기사를 취합하고 사람들의 선택을 분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아놀드 밴에이슨은 아프리카 대륙이 겪은 바 없던 규모의 허리케인이 해상 저편에서부터 나타나 몰려오는 것을, 그것이 굳건한 카사블랑카 장벽에 부딪혀 사라지는 장면을 목도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광장, 집, 거리, 가게, 학교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환호를 내지른다.
아놀드 벤에이슨의 절망감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하늘길 시스템이 재난을 예측했고, 방벽은 방비를 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S#4.
아놀드 밴에이슨:더 깊이… 더 깊이. 인간의 기저를 분석하는 것처럼……. 이 데이터 안을 살펴보는 거야.
아버지, 분명 아버지라고 불렀어…….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없겠으나, 회상은 사람의 편의에 따라 서술될 수 있다.
씬 넘버는 다시 1로 돌아온다. 아놀드 밴에이슨은 주의 깊게 리사 커티스를 들여다본다.
아놀드 밴에이슨:하늘길 시스템은 AI를 아득히 능가하는 분석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늘길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 중 누구도 그런 것을 만들어내려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보십시오. 재작년 선거에서 그 후보의 사생활 사건이 터짐에 따라 승기는 다시 여당이 잡았습니다. 의석 중 대다수를 여당이 가져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민들 중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누구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오히려 국가를 향한 만족감만을 드러냈습니다.
그 허리케인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아무리 지구 기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지만,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 대서양을 건너는 대신 역방향으로 몰아닥치는 경우를 저는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카사블랑카 장벽은 굳건히 시민을 지켜내고, 시민들은 다시 자신을 지켜 준 나라에 환호하고…….
리사 커티스:마치… 모든 게 안배되어 있는 듯이.
아놀드 밴에이슨:예. 예측이 아니라, 미리부터 일어나기로 약속해 두었던 사건에 대응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늘길 시스템은… 표현할 말을 찾기가 힘들군요.
리사 커티스:어떤 예언가가 미리 적어둔 지침서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하는군요.
아놀드 밴에이슨:그리고 그 모든 사건은 시민들의 결속력,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굳건히 하는 데에 쓰이고요.
리사 커티스:아놀드 씨가 주장하는
‘최초의 설계자’, 로봇들의
‘아버지’,
하늘길 시스템의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예언가’ 라는 주장인가요?
아놀드 밴에이슨:반론의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리사 커티스:그렇다면…… 정말 그런 거라면. 인류의 미래를 미리부터 결정짓고 이끄는 손이 있다면, 누군가 자신이 신이기를 자처하며 세상을 모형 정원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돕겠어요. 내가 돌봐온, 돌보게 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갑작스레 몸이 훅 끌어올려지는 감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아치 안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헬기에 탔다가 마구 흔들려진 것처럼 멀미가 납니다.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
53/26/10 |
굴림: |
72 |
판정결과: |
실패 |
1
베아트리체 힐: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2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에르드 이성 1 감소, 베아트리체 감소 없음.
에르드:리사……?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눈이 흔들린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베아트리체 힐:(기이한 감각에 느리게 눈을 떠올리면 무언가 뺨을 타고 간질이는 것이 느껴진다. ...왜 눈물이 났을까. 손등으로 훔쳐내며 에르드를 올려본다. 리사, 그에게서 익숙하게 들었던 이름. 손을 끌어당겨 잡으며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한다.) ...괜찮아?
에르드:잘…… 모르겠어. 여기서 나올 줄 전혀 생각지도 못해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베아트리체가 눈물을 훔쳐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기이한 아치문만 바라보았다.)
아놀드가 리사와 만난 적이 있다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까 들은 말을 정리하자면, '아버지'는 '최초의 설계자'라고 하는 어떤 인물과 동일인이고, 그 최초의 설계자는 아놀드 박사가 아니라 그가 추적하고 있는 인물이란 뜻인가.
넌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됐어?
베아트리체 힐:(손을 뻗어 뺨을 쓸어내다가 다시금 아치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 최초의 설계자가 마치 모든 사건들을 미리 내다본 것처럼 예언했다는 거겠지. ...정말 기이한 일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에르드:멍청해서 그런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리사가 이걸 파헤치려고 한 것도 납득은 돼. 그러다가 자기까지 위험으로 몰아넣은 것 같지만…… (어쩌면 스와콥문트에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 어디서도 생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혹시 그래도…… 스와콥문트가 아주 조금이라도 일반인에게 홍보되는 낙원 같은 곳이라면…… 오랜만에 그리운 이의 얼굴을 보니 헛된 희망이 고개를 든다.)
그때,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가 동시에 강하게 진동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저 너머가 아니라, 지금 눈 앞에 그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사람의 결정을 되살린다. 손목을 울리는 진동에 눈물의 이유를 곱씹는 동안 잠겨든 생각에서 벗어난다.)
...릴리? (워치를 바로 확인한다.)
릴리안 웨즐리:대위님! 이,
(바람 소리)발 미친
(바람 소리)같은 새끼들이, 아니 그러니까, 크리쳐가 지금 이동하던 아군 행로를 습격했습니다!
그런데 정찰병 말이. 저희뿐만 아니라 적군 진지에도 크리처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뒤에서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한의 목소리가 전화를 바꿉니다.
요한 에를리히:들리나? 아군은 웨즐리 중위 포함해서 각성자들이 충분히 상대 가능한 규모다.
적군은 대공습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미친듯이 크리처의 습격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 스와콥문트까지 얼마나 남았나? 정신 팔린 사이에 얼른 진입하면 너희는 방해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전방 8km 이내에 희고 거대한 장벽이 보입니다. 5분이면 도착할 것 같네요.
베아트리체 힐:네, 듣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장벽까지의 시간 흐름을 읽는다. ...5분.) ...5분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정말 괜찮으신거죠?
요한 에를리히:그래. 이쪽은 신경쓰지 말고 어서 진입해.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된다.
이제 통신 어려워. 행운을 빈다!
베아트리체 힐:...네, 믿겠습니다. (끊어진 통화에 대고 답을 남긴다.)
...에르, 진입하자. 가능한 빨리. 괜찮겠어? (다시 한번 염려스럽게 낯을 살피며 손을 잡는다.)
에르드:괜찮아. (언제 혼란에 젖어 있었냐는 듯, 베아트리체가 통신을 나누는 사이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다. 숨을 크게 고르고 책을 반대쪽 손에 쥐었다.)
차로 가자. 천운의 기회나 다름없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베아트리체 힐:...응. (차량으로 향하는 동안, 걱정스러운 시선은 넓은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한번 고개가 돌아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백골과 아치를 눈에 담다가... 차에 올라탄다.)
에르드:(심호흡을 하고선 망설임없이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직전의 광경에 의식적으로 매몰되지 않으려는 듯 눈앞에 보이는 장벽에 가까이 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차량은 빠르게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은 아무도 스와콥문트에 가보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각성자가 아니라면 장벽 바깥은 감히 나갈 수 없고,
허가받은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열차는 카빈다를 종착역으로 하고 있죠.
철로는 스와콥문트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그곳으로 향하는 열차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각성자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철저하게 그 행적이 관리됩니다.
하늘길 시스템은 모두를 철창 안에 처넣고 거친 숨을 내쉬며 우리가 정도만을 걷기를 강제했습니다.
의문이 많은 도시임에도 이 전쟁통이 되어서야 와볼 수 있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에르드가 정찰 드론을 두 대 양쪽으로 보내 성벽에 문이 있는지 찾아보게 시킵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면 정찰 드론이 돌아옵니다.
붕붕 돌던 정찰 드론이 영상을 출력해주었습니다.
동쪽으로 200미터 정도 돌아간 위치에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쪽문이 살짝 열려 있네요.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도시라면 뭐 어디 감시탑이나 CCTV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베아트리체 힐:(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희고 높은 벽에 유일하게 열린 문. 기이하나 낯설지는 않은 장면이다. 어쩌면 꿈에서 미리 보았던 것처럼...) ...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네. 이것마저도 설계의 일부분일까?
에르드:(열 만한 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치 드론을 기다렸다는 듯 홀로 열려있는 문. 평소라면 뻔한 함정이라 의심하였겠으나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스와콥문트로 향해야 한다.) 저쪽이 미리 쳐둔 덫이라고 해도 들어갈 수밖에. (거미줄처럼 옭아매 온다면 끊으며 나아가면 그만이다.)
베아트리체 힐:응, 가자. (손을 내민다. 당신이 있어 어떤 순간에도 망설이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떤 위험에도 몸을 내던질 수 있으니까.)
에르드:그래. (굳건하게 손을 맞잡고, 쪽문을 향해 나아간다. 무엇이 기다린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서로를 믿고 있으니까.)
쪽문을 통과하자 짧은 바람이 휙 불고는 문이 도로 닫혔습니다.
첫인상은 색을 지운 도시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새하얀 건물과 포장된 도로가 그들을 반깁니다.
이 세계 어딘가에 나무들과 무지갯빛 꽃들로 뒤덮인 260제곱킬로미터의 자연 흙 위에 대통령의 궁전이 세워져 있다는 생각이 언뜻 떠오릅니다.
그 궁전은 철강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가상의 낙원 속에서, 하늘은 여전히 잿빛입니다.
카사블랑카에서조차 볼 수 있는 들꽃이나 나무 따위가 전혀 없습니다.
도시보다는 작은 마을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높은 빌딩은 없습니다.
언덕길을 따라 멀리 마을 중앙에 아름다운 반구형 유리돔이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꼭 죽은 도시 같아. (무엇도 살아있지 않고- 오로지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도시를 걷는다. 강렬한 흰 빛에 눈이 시릴 지경이 되어 반쯤 감겨드는 눈을 곧게 떠올리면, 저 멀리 언덕길의 끝에 유리돔이 들어온다.)
...우리가 찾는 것이 저 곳에 있을까? (저 안에는 생명이 남아있을까.)
에르드:(낙원이라던 정부의 말을 전부 믿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다른 도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찬란함과 풍요로움이 있을 줄 알았는데. 눈이 시릴 정도의 하얀색만이 도시를 가득 채우는 풍경은 가히 이질적이다.) 역시 낙원이란 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군. (조금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다 시선을 들어 유리돔을 응시했다.) 무엇이든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베아트리체 힐:...그러게. (현실은 눈앞에 드밀어진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낙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엔가 존재했으면 바랐기 때문이겠지. 제 곁에 선 색과 온기를 가진 낯을 바라본다. 다짐하듯 미소를 그리고,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앞으로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보자, 찾을 수 있을 거야.
에르드:(도시의 정경에 굳은 낯이 베아트리체의 미소에 천천히 풀려간다. 이곳이 얼마나 큰 비밀이나 힘을 숨기고 있던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변치 않는다. 곁에 있는 이를 되새기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응.
그러는 동안 에르드의 스마트워치는 반복해서 ‘반경 5km 이내에 생체 반응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고 주장합니다.
누군가는 이 도시가 진짜 낙원이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텐데.
야자수가 즐비하고, 종려나무 새순이 부드럽게 돋아나고,
우리는 살면서 본 적도 없는 그 백사장이란 것과 열대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는…….
얼마간 걷자, 두 사람의 시계는 점점 다른 알림을 띄우기 시작합니다.
빨간 점이 3D 스캔을 완료해 띄운 맵 위에서 반짝이고 있습니다. 유리돔 근처로 추정됩니다.
베아트리체 힐:(홀로그램 창을 바라본다. 북서쪽으로... 설계자의 에너지 파동이라니.) 위치가 고정된 것 같아. 누군가 남아있는걸까? 이런 곳에...?
에르드:지금까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경비를 서는 정부 쪽 사람일 수도 있으니 경계하고 가자.
좀 더 나아가자 길 한중간에 무엇인가 보입니다.
그것만이 이 징그러울 정도로 정신 나간 흰빛 도시에서 유일하게 낡아 가는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퇴락한 도시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꾸며둔 것만 같은 여기에서.
베아트리체 힐:...왜 여기에 추락한거지? (가까이 다가가 잔해들을 헤집어 들여다본다.)
헬기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계기판이나 사용된 부품 양식으로 보아 오래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기껏해야 1~2년 사이에 추락한 것으로 보이네요.
사람이 앉았던 흔적이 뚜렷하고, 기능은 전부 망가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영 같은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헬기로 여기까지 정상적으로 들어와 내려앉기 어려웠겠죠.
뒷좌석에서 찢겨 나간 책 페이지를 발견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조종사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흔적을 살피다 보면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들 주워 든다. ...책? 찢겨 나간 페이지들을 읽어본다.)
아까, 아놀드 박사의 시신 옆에서 발견한 책과 같은 언어로 쓰여 있습니다.
헬기가 추락했고, 다친 상태에서 맨몸으로 사막을 횡단하려다 쓰러져 사망하기라도 한 걸까요?
에르드:추락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시신은 어디로 간 거지? (헬기 표면을 쓸어내리며 외관을 살핀다.)
좀 더 살펴보면 꼬리 날개에서 총탄 자국을 발견합니다.
더불어, 각성자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설계에 실린 공격은 그것이 그리는 경로를 따라 불탄 궤적 같은 것을 남기기 마련이죠.
베아트리체 힐:그게 이상하지. (총탄 자국처럼 남은 것을 쓸어본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설계의 흔적이야. ...이곳에 정말 설계자가 남아있다는 말일까. (머릿속에 질문이 떠오른다. 그가 '예언자'일 수도 있는 건가.)
에르드:누군가 헬기를 추락시킨 게 확실하군. 그렇다면 최소 여기에 설계자가 있다는 건 분명한데…… (눈살을 찡그린다.)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로맹 바투타의 신변 확보. 이곳으로 대통령궁을 이전했다고 했었지. 하지만 유리돔 안에 대통령이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예전에 네가 의문을 제기했던 대로, 로맹 바투타가 실존인물이긴 한 건지 모르겠어.
베아트리체 힐:맞아. 말이 안되지. 이해가 안되는 것들 투성이야. 만약 모든 것이 가짜였다면... 이곳은 왜 세워진거지?
길 멀리,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형상 하나가 ‘피어납니다’.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이 떠오른 형체는 머리카락을 조용히 나부끼며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에르드:(시야에 나타난 상을 기민하게 잡아채고, 여차하면 총을 쏠 각오로 가터에 손을 올리며 경계태세를 취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손에서는 힘이 빠지고 금색 홍채는 속절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
…… 리사? (믿을 수가 없다는 듯 거의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로 이름을 발음했다.)
리사 커티스:그래, 에르드. (자애로운 미소를 띈다.) 나란다.
형상 뒤가 조금 비쳐 보입니다. 이건 홀로그램입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이 바닥의 조명 장치에서 떠오른 형상이란 사실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피어오른 형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르드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흐르기 전까지. 그의 흔들리는 눈과 비쳐 보이는 형상을 바라본다. 아, 진실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이 곳에는 온통 거짓밖에 없는걸까. 마음이 무너진다. ...어떻게 말을 해야할까. 누군가가 비춘 '리사'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할까. 불안한 마음에 에르드의 팔을 붙잡는다.)
...에르, 정말 저분이 리사셔?
에르드:아무리 봐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기이한 아치문에서 본 영상 속의 모습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4년 가까이 리사를 찾아 헤맸다. 사망했다는 소식만을 입수하고 나서도 차마 포기하지 못하고 기억 한켠에 품은 지도 또다시 4년. 너무도 긴 세월과 긴 그리움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저도 모르게 리사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다.)
어떻게 된 거야? 이곳에서…… 스와콥문트에서 지냈던 거야? 난 당신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목소리가 조금은 잠겨든다. 상상도 못한 등장에 놀란 탓인지 홀로그램이란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베아트리체 힐:(바로 곁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따라붙는다.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얼마나 리사를 찾아 헤매였는지 아니까. 잠깐이라도 행복했으면 해서. 다만, 정해진 결말이 눈앞이다. 옆 얼굴과 간절히 찾았던 얼굴을 번갈아본다.) 고개를 숙여 바닥의 장치를 내려본다.)
에르, 리사는...
리사 커티스:(베아트리체에게 시선을 옮긴다.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을 발견하고는 이내 부드럽게 웃어준다.) 에르드, 네가 알고 있는 게 맞아. 나의 몸은 죽었단다. 그러니 여기 서 있는 나는 신기루 혹은 메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인공지능과 동화된 뇌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구나. 죽어가는 동안 아놀드 박사에게 배운 마지막 지식을 이용해서 나의 정신 일부를 이 도시를 관리하는 시스템 안에 침투시켰단다. (조금은 통 속의 뇌라고도 볼 수 있겠지? 하며 미소한다.)
에르드:메아리라고? (그제야 그의 눈에도 들어온다. 반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몸체를. 일렁이는 발치를. 아주 조금이나마 불티처럼 타오르던 희망이 삽시간에 꺼진다. 다시금 굳은 낯으로 멈춰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리사를 천천히 훑어본다. 이내 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숙인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란 잔인한 법이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너무 짧은 찰나의 순간.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지는 희망을 보면 꼭 제 가슴이 애달파온다. 넓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리사를 마주 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덮쳐올 낯에 겨우 입꼬리만 끌어올려 짧게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정말 간절히 찾았어요.
...에르드의 앞에 나타나셨다는 건 전해주실 것이 있어서겠죠. (헬기의 잔해에서 다시금 리사에게 시선이 돌아온다.) 다들 어떻게 이리 되신 건가요? 어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건가요?
리사 커티스:그랬구나. 낯을 가리는 에르드와 함께 있다는 건, 네가 에르드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었다는 거겠지. 고맙단다. (베아트리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통과하고 만다.)
저쪽의 헬기를 보았니? 나와 아놀드 박사는 우리가 쫓던 '최초의 설계자'를 만나기 위해 공화국 군대에게 쫓기면서도 목숨을 걸고 헬기를 타 이곳으로 왔지. 그런데 모래 폭풍에 휩쓸려 버렸지 뭐니. 모래 때문에 시야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와중에 어떤 각성자의 설계가 꼬리 날개까지 잘라 버렸어. (그 이후 헬기가 추락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을 터다.)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을 때 나는 아놀드 박사에게 배운 대로 나의 '일부'를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단다. 그는 어째서인지 장벽 바깥으로 다시 나갔고 말이야. 그 뒤로는 생체 신호가 꺼져서 어떻게 된지 알 수 없었는데, 내가 이 도시의 시스템에 흡착된 후에 CCTV 기록을 살펴보니 사막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었더구나.
이 도시의 사람들은 사라진 게 아니란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거야.
베아트리체 힐:...아니에요, 리사. 제가 감사드려야 할 일이에요. 에르드를 돌봐주셔서,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그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스쳐나가는 손을 따라 시선이 흘러간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짧게 침묵이 이어진다.)
...저 헬기를 타고 오셨군요. (나지막히 숨을 내쉰다.)
에르드:(조금은 마음을 가다듬은 듯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린다. 이미 죽었음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이렇게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이 시간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시스템에 정신을 침투시켰다고 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난 모르겠지만…… 그럼, 그 시스템에서 뭔가를 발견했어?
리사 커티스:(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 도시엔,
하늘길 시스템 서버의 총본산이 있단다. 저 유리 정원의 지하에. (고개를 돌려 먼 유리 돔을 가리켰다.)
나는 시스템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 보았지. 정말 엄청난 정보량이라 분석할 엄두가 나지 않더구나. 하늘길 시스템은 시민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나누었다 모아서… 가깝고 먼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쓰고 있어.
베아트리체 힐:(등을 마저 토닥여주며 다시 묻는다.) ...두 가지 목표라는 건 뭔가요?
리사 커티스:그건 너희가 직접 알아보았으면 좋겠구나. (의미모를 미소를 짓는다.)
시스템 내에서 로맹 바투타가 이곳으로 왔다는 정보를 수집한 기록을 발견했어. 그래서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그 대신 흥미로운 존재 하나를 만났단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지. 아마 너희를 오래도록 기다렸을 거야.
리사 커티스는 좀 더 가까워진 유리 돔을 가리켭니다.
리사 커티스:이상한 점을 알아낸 게 하나 더 있단다. 저 유리 돔 주변을 살펴 보겠니?
아직 거리가 멀어 돔 내부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흰 도시에… 돔 주변에, 파르란 풀잎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혹, 사막을 거쳐 이곳으로 오는 동안 아놀드 박사의 시체나 그가 남긴 물건을 발견하진 않았니?
베아트리체 힐:...아, 있어요. 그 분의 시체도 남기신 것도요. (바스라질 것 같은 책을 꺼낸다.)
...계속해서 구조 신호를 보내고 계셨어요.
...저희의 목적과 당신들의 목적이 나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리사 커티스:그렇다면 그가 남긴 아치문도 보았겠구나.
어떤 사건들이 마치 예비된 것처럼 일어나고, 하늘길 시스템은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처한다고 말했었지. 나는 그걸 두고 ‘마치 예언가가 적어둔 지침서라도 따르는 듯하다’ 라고 표현했고.
그걸 ‘예언’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앞날을 내다본 것일까, 앞날을 계획한 것일까? 정답은 '계획했다'. 어째서인지 나는 모르지만, 아놀드 박사는 그걸 알아내려고 한 모양이야. 너희가 본 이상한 아치를 통해 '예언자'의 정체를 파악하려 계속 시도했어. 그러나 그런 기이한 유물 장치를 사용하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란다. 아놀드 박사는 자신 안의 어떤 ‘대가’ 를 전부 소모한 끝에 죽고 말았지.
그리고 아치문을 보았다면 아놀드 박사의 이 말도 기억하겠지. 해안선을 따라 일곱 개 도시만이 살아난 건 이상하다고.
나라가 시민들의 정보를 끌어당겨 그것을 독재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이 소속된 군대에선 전부 다 알고 있는 일이지. 그리고 공화국 시민들은 그런 소문만으론 전부 다 설득되지 않았어. 하지만… 지구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누군가 그 환경을 억제하고 있다면, 그건 어떻겠니?
자세한 건 이제부터 너희들이 파헤쳐 봐야겠지. 저기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단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유리 돔을 응시했다.)
베아트리체 힐:(말이 맺어지기까지 차분히 귀를 기울인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이는 무엇을 바랐을까. '대가'는 무엇이며,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 뿐만 아니라 환경까지 통제하고 있다니. 쉬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우리가 실마리를 풀어 해결할 수 있다면... 저 곳에서 무엇이 기다린다해도 기꺼울 일일테니까.)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리사.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미소로 마주한다. 품에 안으면 스쳐 지나가 통과되어 사라질 이를 품에 안았다.)
...당신이 길을 만들어주셨으니, 저희가 해낼게요.
에르드:(허벅지 옆에 붙은 주먹을 꾹 쥔다. 헤어짐을 직감해서이다. 스와콥문트에 대통령이 없다고 한다면 하늘길 시스템을 정지시키거나 최소 망쳐놓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다음 일일 테지. 그렇다면 시스템에 녹아든 리사도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사실상 리사는 이미 죽었고 눈앞의 모습은 과거의 의식 일부일 뿐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감정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놀드의 시체는 사막에 있었어. …… 그럼 당신의 시체는 어디에 있지?
리사 커티스:황금색으로 빛나는 나의 소중한 꽃. (자신의 자식과 다름없는 이를 바라보는 눈에서 애틋함이 묻어나온다. 도저히 기계의 시스템 일부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나를 추억하고 싶다면 바다에 가렴. 우리는 모두 스와콥문트를 동경하도록 배우고 자라났지. 너희가 잘 해낸다면 그곳에서 나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란다.
이번에도 리사 커티스는, 마치 만질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처럼 팔을 벌립니다.
에르드:(이미 베아트리체의 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건 의미없는 움직임일 뿐이다. 그럼에도 에르드는 다가갔다. 마주 팔을 벌리고, 형체 없는 이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형체가 훌쩍 자라버린 아이를 감싸 안습니다.
느낄 수 없어도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없어도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없어도 안을 수 있었습니다.
경보 부저처럼 애도와 언어가 무너져 떨어집니다.
지구가 이토록 훼손되었어도 바다는 빛깔이 푸르고, 그것은 산란의 법칙이 본래 그러한 까닭입니다.
긴 파장이 슬픔의 가장 멀고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파고듭니다.
그리움이란 어째서 이토록 화상 같은 감각일까요?
그러나 리사 커티스는 바람에 흩어지는 아모리베늄처럼 흔들리다, 금색 궤적을 남기며 위로 솟아 사라졌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울지 않는 이를 대신해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타고 흐른다. 가슴을 무겁게 울리고 간질이던 그리움이 꽃잎처럼, 빛의 조각으로 흩어지는 것을 오래 올려보았다. 끝나지 않을 감사를 담아서.)
...에르, 바다로 가자.
우리는 반드시 그 곳에 닿을 거야. (그렇지? 어느새 지어올린 미소로 손을 뻗는다. 흩어져 사라진 이를 대신하여, 품에 가득 안았다가 놓는다.)
에르드:(저 하늘 너머로 멀어져가는 빛을 오래도록 올려다본다. 여전히 그의 눈가는 메말랐고, 표정은 덤덤하다. 그러나 따스한 온도는 그의 가슴 안에 틈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리움의 온도였다. 베아트리체가 가르쳐준 사랑의 파형이기도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곳이 궁금하군.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마주 안아준다. 당신이 있기에 나 외로움을 깨닫게 될 일 없으리라.)
베아트리체 힐:끝없이 아름다울 거야. (우리가 사랑을 속삭이듯,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가 귓가를 간질이는 그런 곳. 다시 한번 손을 맞잡고, 푸른 잎이 둘러진 유리돔으로 고개를 돌린다.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두 사람은 유리 돔을 목적지로 삼아 계속 걷습니다.
주변에는 시냇물까지 흐르는 것 같은 모형 정원을 향해.
다가갈수록 유리 돔은 웅장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거대한 신전에서 무너진 주춧돌처럼 낡게 흰 기둥, 어떤 역사를 지닌 것이 분명한 폐허, 유리 정원을 둥글게 휘감아 도는 시냇물…….
아모리베늄도 두어 송이 보입니다. 자생종인지 몹시 크기가 작습니다.
카사블랑카의 인조 정원이 아니면 본 적도 없는 자연입니다.
인간의 손이 하나도 닿지 않은, 보석을 갈아 흩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그대로 숨쉬는, 책 속에서나 이야기하던 오랜 전설들.
그런 것이 있었다고 어디선가 흘려 들었을 뿐입니다.
오르트 구름같은 별가루의 잔해가 검푸른 하늘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분수대와 인공 물길의 소독약 향이 아니라, 흙과 분변과 미생물이 섞인 냄새.
그곳의, 이미 다 자라난 채 옮겨 심긴 온실수들이 아닙니다.
왜 이 주변만 ‘재앙의 날’ 이전과도 같은 별천지일까요?
무수한 별들이 발치를 걷는 인간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이 이런 광경을 빼앗겼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할 일인지, 가져 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와아- ('아름답다.' 단어의 정의가 눈 앞에 있다. 귀를 기울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어떤 것. 발끝에서부터 격동이 인다. 걸음이 가까워질 때마다 박동이 거세어진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만들어 가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본연의 색과 형태로 흔들리고 흐르고 반짝이며... ...만면에는 자연에 가까운 웃음이 반짝이며 떠오른다.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으며, 무엇에도 꺾이지 않을 것이. 바닥으로 손을 뻗어, 푸름과 맑음으로 손을 간질인다. 고개를 들어 쏟아지는 별과 눈을 맞춘다.)
...아름다워. 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걸까?
아주 오래 꿈꿨던 풍경이야. 에르, 정말로. (환한 웃음으로 올려본다. 이 곳에는 자연을 비추는 나의 태양이 함께하니까.)
에르드:(그는 그다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낭만이나 서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는 광경 앞에서는 가슴 어딘가가 깊은 감동으로 울려 온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밤하늘에 쏟아지는 모래알 같은 별들. 생그러운 향기를 품기는 꽃과 풀잎들. 이것이 우리가 한때 가졌으나 잃었던
자연인가. 놀라움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자연스레 피어난 아모리베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건 푸르른 자연 속에서 저를 돌아보며 웃는 베아트리체겠지. 때묻지 않은 아이 같은 웃음이 순수하고 맑다. 이 광경을 위해서 우리는 그토록 숨가쁘게, 많은 목숨을 밟고 넘어 달려온 걸까.) 그럼 네 꿈이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내야겠군.
별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저 온실 안으로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너머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어색한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베아트리체 힐:(꽃잎을 간질이듯, 에르드의 머리칼 끝을 살랑인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이 아름답고, 그 사이에 자신이 있다. 우리도 이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거야.)
들어가보자. 저 아래까지.
에르드:(머리칼에 와닿는 손길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희를 맞이한 광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까운 이를 잃은 고통을 희석한다.) 그러자.
로코코 양식의 장식이 달린 흰 철제 아치를 통과하자 빼곡하게 피어난 푸른 장미가 그들을 맞이합니다.
식물은 두서 없이 자랐고, 종종 곤충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물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게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이곳은 천혜의 자연입니다.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만들어 올린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호화로운 저녁 식사가 나타납니다.
식탁 상석에는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습니다.
100살도 넘은 것 같은 노인이었으나 아직 눈빛이 형형하고 정정합니다.
베아트리체 힐:(기묘한 상황에도 별다른 의문이 들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다만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연다. 세상은 비극이나-) ...희극을 원합니다.
노인:(베아트리체의 대답을 듣고 웃는다.) 하하. 나이 들어 혼자 산 지가 오래다 보니 내가 젊은이들을 데리고 장난을 좀 쳤군.
희극이든 비극이든 결과는 같지만, 어쨌든 자네들에겐 비극이고 내겐 희극인 이야기가 한 가지쯤은 있지.
(상석을 끌어내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턱짓을 한다.) 들게. 어린 송아지 등심은 아주 연하지.
베아트리체 힐:(눈을 깜빡이다가는 의자를 끌어낸다. 에르드의 자리 먼저, 그 옆으로 앉는다.)
(...이런 곳에 이런 음식이라니. 식기는 손에 들지 않았지만 접시를 내려보다가, 다시 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에르드:(장미 아치나 돌길을 봤을 때부터 사람의 손길이 아주 닿지 않은 곳은 아님을 알았지만, 이렇게 마주하게 되다니. 게다가 우릴 적대하지도 않는다고? 찜찜한 마음에 경계를 풀지 않고 맞은편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음식에는 손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앉자 노인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프를 듭니다.
베아트리체 힐:(그의 낯에서 손끝으로 시선이 내려간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노인:오,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그래.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넣고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나를 자네들이 찾는 '예언자'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군.
내 이름은 테케네 드그레.
테케네 드그레:예언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수 없다네.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 용의는 조금 있지.
인류 최초의 설계자를 찾아왔는가? 그렇다면 번지수가 맞았어.
베아트리체 힐:(...정말 본인이 살아있을 줄이야.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 곳을 만들고 모든 것을 계획한 이가 당신이 맞나요?
테케네 드그레:그래. 계획했다는 그 '모든 것'이 뭔지 자네가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1만 2천 년을 3천 년으로 줄이는 일을 하고 있다네.
베아트리체 힐:(기울어지려는 고개를 바로한다.) ...저희에겐 비극이고, 당신에게는 희극인 이야기가 이건가요?
테케네 드그레:아니지, 아니야. 그건 다른 주제라네. (마치 당신이 맞추기를 기다리는 듯 속시원하게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베아트리체 힐:......그럼 1만 2천 년을 3천 년으로 줄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하죠?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 떠오른다.)
테케네 드그레:그 대답을 들려주기 전에 질문 하나를 더 해볼까. 자네들은 ‘완전한 인간’‘ 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베아트리체 힐:...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에르드:그런 게 있기는 한가. 모두가 어딘가는 부족해. (무뚝뚝하게 답한다.)
테케네 드그레:(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는, 한 템포 쉬었다가 입을 연다.) 재앙의 날 이전 이야기를 해 볼까. 자원은 낭비됐고, 지구는 뜨거웠다 차가웠다를 반복하고, 사람들은 죽고, 해수면은 상승했지. 전쟁은 계속됐고 앞날을 생각하는 목소리들은 묵살되었어. 그때 나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어떠하다고 판단할 만한 능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랬어.
앞으로… 1만 2천 년이라네.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다투기를 멈추고,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지 않으면서, 자연을 아끼고 훼손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배우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나는 그것을 계산해 냈어. 이걸 두고 아놀드 박사가 ‘예언’ 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
자, 생각해 보게. 그 수없이 긴 세월을 버티는 동안 인류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1만 2천년이 지나고 나서 ‘완전성’ 을 획득할 사람이 과연 남아있기는 하겠는가? 이런 지구에서? 그러니 시간을 줄여야 해. 이런 결론을 내렸을 때, 자네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완전해지는 기간을 줄이겠는가?
베아트리체 힐:(꼭 완전해져야만 하는걸까? 의문도 잠시 고민에 빠져 고개가 기울어진다.) ...그럴만한 상황을 만들어야하지 않을까요? 수를 줄이는 방법이라면, 시간도 줄어들겠죠. 변수가 생길 범위를 줄이고,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그들을 통제하고... (말을 멈추고 다시 올려본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0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스와콥문트로 향하기 전 요한 에를리히와 나누었던 대화.
로봇들에는 하늘길 시스템의 OS가 설치되어 있었고, 다루는 송신기의 짝 중 하나는 좌표값이 스와콥문트로 되어 있었죠.
또, 온실에 들어오기 직전 리사 커티스가 했던 말을 떠올려 봅시다.
이 도시에는 하늘길 시스템 서버의 총본산이 있다고 했죠.
테케네 드그레:그래. 변수가 생길 범위를 줄이고 통제하는 방법으로 나는 하늘길 시스템을 택했다네. 그건 나의 설계 능력을 본따 만든 것이지. 베아트리체, 자네는 설계자지? 이 능력으로 전투만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리란 걸 잘 알 거야.
유사 이래 인류는 외부의 적이 있을 때 가장 확실하게 일치단결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어. 환경 같은 것보단 좀 더 가까운 적이 좋지. 전쟁의 상대 국가라든지, 스포츠에서의 경쟁 상대라든지.
나는 인류의 ‘적’ 을 안배해 두었다네. 앞으로 3천 년간.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 미리 정해 둔 시기가 오면 사람들이 적당히 어렵게 헤쳐나갈 수 있는 위기가 공화국에 닥칠 게야. 모두 손을 잡고 그것을 이겨내고, 감사함을 배우게 되지.
허리케인? 선거 결과? 재난, 살인, 사건, 반란, …해방군? 전쟁? 내가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미리 알지 못했을 것 같나?
요컨대 해안선을 따라 아프리카의 일곱 개 나라만 살아남은 것도,
자연이 모두 죽어버리고 사막과 거친 모래폭풍만 부는 황량한 터전이 되어버린 것도 모두 테케네 드그레의 의도라는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완전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이 계획이 필요했다는 말씀이세요? 그 무수한 죽음이 꼭 필요한 것이 었다고요. 하지만,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기에 인간일텐데.
테케네 드그레:그 자유 의지가 수없는 전쟁을 낳았다네. 자신들의 이익 다툼에 눈이 멀어 넘치는 쌀을 바다에 버리지. 어딘가에선 그 쌀이 없어 굶어죽어가는 이들이 널려 있는데 말이야.
지금의 인간은 너무도 사악하고 또 나약해. 이끌어주어야만 하네. 그 과정에서 다소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본디 큰 계획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있지 않은가.
지구 환경을 개선할 방법이 분명히 있지. 나는 알아.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을 되찾아 봤자 인간은 재앙의 날 이전과 같은 일을 반복할 게야. 적은 자원에 익숙해지게끔 먼저 교육하고 길들여야 해. 그러니 나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회복을 늦추고 있지.
리사 커티스에 대해 말해 볼까? (에르드를 바라본다.) 현명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 그자 하나를 빼앗음으로써 자네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해방군에 합류했고, 출중한 능력을 보여 전쟁을 제때 일으키도록 도왔지. 내가 원한 시기와 딱 맞았어. 감사를 전하지 않을 수가 없군.
내 아내가 기뻐했을 게야. 그녀는 줄곧 푸른 지구를 다시 보길 원했으니까.
그리고 노인은 한가롭게 커피를 마십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처럼 낯섭니다.
나의 상실과 슬픔이……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미리부터 설정되어 있었다고?
에르드:(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경계로 일관하던 낯에 섬뜩하리만치 선명한 적대감과 분노가 어린다. 당장이라도 노인의 멱살을 틀어쥐려는 듯 몸을 숙였다.) 모두 알고 저지른 짓이라고? 리사에 관련된 것마저도?
이 개자식이……
그때, 두 사람의 이어폰에서 동시에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요한입니다.
요한 에를리히:[베아트리체, 에르드! 지금 공화국 여섯 도시 각지에서 크리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민간인이 죽게 생겼어! 우리 쪽 각성자의 숫자를 나누어 각 도시에 파견하려고 한다. 그쪽 상황은 어때!]
테케네 드그레:급한 연락이라도 온 모양이지? (노인은 태연하고 또 태평하다.)
일단 요한에게 상황을 간략히 전달해서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이럴수가. 급하게 연락을 받는다. 지금 당장에 뛰쳐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나 통탄스럽다.) 괜찮은가요? 저희는 최초의 설계자를 만났어요.
...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한 사람을요.
요한 에를리히:[최초의 설계자? 그가 '아버지' 라고 불리던 사람인가?]
[…… 일단은 그쪽에 집중해. 모든 일을 끝낼 열쇠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니 두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부터 해결하도록. 크리쳐와 맞설 전력은 해방군 측에서 어떻게든 충당 가능할 것 같다.]
베아트리체 힐:네. 그 사람이 맞아요. 이름은, 테케네 드그레.
(나지막한 한숨 끝에 끄덕인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무사하세요.
테케네 드그레:저런. 당장이라도 도와줄 수 없는 걸 안타까워하는 모양이군.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자네 마음 안의 모든 불안을 없애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네.
(에르드의 위협적인 동작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베아트리체를 응시한다.) 자네, 에르드를 잃을까 무섭지? 자네를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저 자신에겐 관심이 없어 망설임없이 위험 속에 스스로를 장기말로써 내던지니 말일세.
영원히 자네의 곁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있을 수 있도록 묶어 줄까? 삼천 년의 미래를 안배한 내가 그것조차 해주지 못하겠는가. 내가 죽고 난 뒤 자네들이 내 역할을 대신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제공해줄 수 있다네. 사랑, 그것을 나만큼 이해하는 자도 세상에 없을 거야. 내 아내가 떠나간 후 이 마음이 얼마나 나약해졌는지 모른다네.
상대가 거짓 없이 설득하려 든다는 게 보이니까요.
테케네는 ‘아내’ 라고 발음할 때, 베아트리체가 ‘에르드’ 라는 이름에 담는 것과 정확히 같은 색깔의 감정을 실었습니다.
테케네 드그레:인류의 만 이천 년 후 미래 같은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그래도 내가 ‘설계’ 해둔 것은 전부 아내 때문이야. 아내가 그것을 원했어. 푸른 지구, 더 나은 세상,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계, 사람들의 행복, 그런 가치를 원했어. 그러니 내가 여기 있다네. 죽지 않고 살아서… 그녀를 기리면서. 자네는 어떤가? 나처럼 살고 싶은가? 먼저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겠지?
(손끝이 살짝, 베아트리체의 손등에 닿았다.) 이 아름다운 곳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다른 곳에선 누릴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여기 있어. 멋지지? 별들이 반짝이고, 연인과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그런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베아트리체, 이곳이 자네들의 에덴이야. 단 둘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로지 둘만이 여기 남아 낙원을 꾸려 살아가는 거야. 아담과 하와처럼.
베아트리체 힐:......그걸. (곧게 응시하던 시선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담은 눈을 마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르드가 제 곁에 없는 미래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전장에서 스러져갈까봐,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까봐.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까봐. 나란히 잠에 든 밤이면 고요한 얼굴을 몇 번이고 확인하곤 했다.)
(닿은 손등을 감싸쥔다.) ... ...그러고 싶어요.
...그러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건 모든 것이 계획으로 이루어진 희극이 아니었어요. 저 바깥에서 몰려오는 비극에서도 살자고 마음 먹은 것은, 잃은 것들을 되찾기 위함이지, 저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었어요. 저 밖의 모두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그걸 재단하고 계획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는걸요.
당신도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했으니 잘 아시겠죠. 당신과 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이,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후회하는 이들이 별만큼 무수히 있다는 걸. ...그들의 에덴을 제 손으로 어떻게 부수죠?
테케네 드그레:행복해질 자격? 그것도 우선은 사람답게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거지. 전쟁이, 기후위기가, 천재지변이, 멸망이 닥쳐왔을 때도 그 세상을 에덴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작금의 인간들은 너무 모자라. 다투고 재단하고 계산하지. 그런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필시 질투와 증오와 다툼에 눈이 멀어 어그러지고 말 걸세.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운찬 몸짓입니다.
테케네 드그레: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다소의 강제성은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진 모두 계산 안이기도 하고…….
테케네가 일어서면서 몸이 조금 움직이자, 시야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광경이 드러납니다.
뒤에 왜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나 싶을 만큼─어쩌면 어떤 오묘한 힘으로 보이지 않게 숨겨 두었을지도 모릅니다─아름답고 거대한 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수대 가장 상단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돌덩이가 얹혀 있습니다.
그것은 황금색 사슬로 감싸여 고정된 채 덜그럭거리는 중이었고, 뚜렷하게 금이 간 모양새입니다.
애초에 조각난 것을 얼기설기 간신히 이어 놓은 듯했습니다.
테케네 드그레:시간이 없을 텐데, 두 사람. 오늘 이 시간은 많은 크리처가 동시에 여러 도시를 습격하도록 정해진 날이로군.
어떻게든 내 의사를 받아들이고 나가서 사람들을 구하든, 아니면 자네들 뜻대로 나를 제압하든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아, 그렇지. 저 돌을 보고 있군. 저 돌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해. 자네들이 내 뜻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중요하지.
<관찰력> 혹은 <정신력> 판정이 가능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 장소에 자라난 들풀이나 자연의 형태가 정확히 돌을 정가운데 두고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돌 주변과 분수 바닥에는 아몬드 꽃잎이 넘쳐흐르고,
어쩌면 저 돌이 바로 황폐화된 지구 환경을 돌리는 열쇠가 아닐까요?
베아트리체 힐:(돌덩이를 응시한다. 가로지른 금이며, 감싸인 사슬까지.) ...저게 열쇠인가요?
..저 돌덩이가 완전히 부서지면 어떻게 되죠?
테케네 드그레:하하…… 부술 수는 없을 걸세. 금이 가게 만드는 것만도 아주 큰 힘이 들어갔거든. 그래도 가정해 대답하자면, 이 유리 온실 안에 있는 자연마저도 모두 사그라들겠지. 이 지구는 영영 이전의 풍요로운 자연을 되찾지 못하게 될 거야.
베아트리체 힐:...그럼에도 당신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요?
테케네 드그레:그렇다 한들 내가 순순히 돌을 내어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돌아가게. 자네의 동료들에게로. 미래를 바꾸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을 이어받지 않겠다면 자네가 여기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지.
베아트리체 힐:(에르드를 돌아본다.) ...에르, 어떻게 생각해? 너는... (그에게 복수를 꿈꿀 수도 있는 일이니까.)
에르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달려들 것 같던 기세는 겨우 죽였으나 여전히 씨근거리며 노인을 노려본다.) 세계가 사막화된 이유를 알아냈고, 어쩌면 해결할 방법도 찾았지. 어떤 식으로든 저 자식의 계획을 어그러뜨려야만 해.
노인의 제안이 네겐 매력적이었을 텐데…… 너야말로, 거절해도 괜찮은 거야?
베아트리체 힐:그래.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떠올린다.) ...너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 늘 내 곁에 있었으면 해. 안전하고 행복한 미래만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우리는 알아, 낙원은 없다는 것을.
에르드:(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베아트리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다. 눈을 내리감는다.) 네 말대로야. 낙원도 영원도 불가능한 개념이지.
내가 그동안 너를 많이 걱정시켰지만, 이 지난한 전쟁이 끝나면 이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싸워야 할 필요도 몸을 던져 위험에서 너를 지켜야 할 일도 없어질 테니까. (낮은 목소리가 흐른다.)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가져오자. 우리 손으로.
베아트리체 힐:...응. 믿어, 믿고 있어. (낙원도 영원도 없지만, 눈 감는 날까지 함께할 사랑은 있다. 그것은 언제나 살아갈 희망이 된다. 맞닿은 온기에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여기에서 물러서서도 도망쳐서도 안된다. 저자를 공격하는 것마저도. 최초의 설계자는 그 순간까지도 계획해뒀을 테니까.)
최초의 설계자도 계획하지 못한 순간이 분명 있을 거야, 그런 결정이 있을 테고. 저 사람 역시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니까. ...그걸 찾아야 해.
그렇습니다. 최초의 설계자라 하여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짜 둔 계획에도 분명히 허점은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 전부를 어그러뜨릴 수 있겠죠.
베아트리체 힐:(시선을 바로 한다.) ......테케네. 당신은 제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셨죠. 그리 말씀하셨다는 건, 제가 둘 중 무얼 선택하든 당신의 계획 안에 있다는 말일 거예요. 제가 거부한다고 했을 때에도 무척이나 침착하셨으니까요.
당신의 계획 밖의 세상에는 그 외에도 무수한 선택지가 있으니... 둘 중에서 고를 필요가 없겠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때로는 훌륭한 선택이 된다면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요. 사랑을 떠나보낸 심정을요. 당신은 당신의 자유 의지를 따르세요. 저희는, 저희의 자유 의지로 당신을 지켜볼 테니까.
테케네 드그레:…… 뭐라고? 아니, 잠, …… 이건. (당황한 노인이 얼굴빛을 감쓰려 애를 쓰면서, 떨리는 손으로 식탁을 짚는다.) 98.89%였어. 이건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정말 그게 전부인가? 더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내게 감복하든, 나를 죽이려 들든…….
(그게 테케네 드그레의 ‘계산‘ 안에 들어 있던 두 가지 가능성이었다. 그것이 깨진 것을 안 순간 노인의 안색이 파리해져, 순식간에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시간의 더께가 어깨에 쌓이는 듯 보였다. 위대한 영도자도, 예언가도 아닌 노인이 속삭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완벽한 허점을 간파당한 테케네 드그레는 숨을 삼킵니다.
빠르게 무엇인가를 새로 계산하려는 것처럼 홀로그램 패널을 끌어옵니다.
찬란한, 무수히 찬란한 별들과 서글프도록 빛나는 열대의 달이 조명처럼 돔 내부를 비춥니다.
거대한 스크린이 장막처럼 펼쳐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주르르 쓰러져 앉는 것이 느껴집니다. 에르드는 아닙니다.
여성:안녕, 테케네. 이 프로토콜이 실행되었다는 건, 당신의 ‘계획’ 중 하나가 심각하게 틀어졌다는 뜻이 되겠지.
멋쩍게 손을 흔든 그녀는 오래된 영상 속에서 말을 이었습니다.
여성:이 프로토콜을 숨겨 놓느라 엄청 고생했어. 당신이 개발 중인 하늘길 시스템 안에서 이 흔적을 발견해선 안 되니까. 오로지 당신의 맥박, 당신의 말, 당신의 감정에만 반응하도록 꽁꽁 감춰 두었지. 당신은 어쩌면 평생 이 영상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본다는 가정 하에 말하고 있으니까, 내 소감을 이야기할게.
…굉장히 기뻐! 당신 계획이 망가졌다는 거잖아.
야윈 얼굴을 하고도 어린 소녀처럼 빛나는 눈은 유리 구슬만 같습니다.
여성:테케네, 나는 줄곧 말하고 싶었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계획대로 되는 일일까? 모집단이 어느 정도의 숫자를 유지하면 통계를 통해 계산해낼 수 있다는 당신의 장담은 올바른 일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개념일까?
나는 당신을 알아. 아마 내가 당신보다 먼저 떠나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대신 내가 바랐던 싸움 없고 평화로운 세상을 나 대신 ‘구현’ 해 놓으려는 작정인 거지. 당신은 나의 구현자니까……. 그런다면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나의 의지는 세상에 남을 테니까.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없으면 행복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신의 예상이지. 당신은 당신 자신까지도 계산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테케네, 나는 당신이 그저 자유 의지로써 살아갔으면 좋겠어. 인류의 먼 미래 같은 것은 놓아두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그걸 그저 지켜보면 좋겠어. 그러다 보면 아침이 밝고, 새소리가 지저귀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면서 맑은 물이 다시 흘러올 거야. 나는 살아서 다시 볼 수 없었던 지구의 새 아침을 당신은 맞이할 수 있을 거야.
살아가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든 에덴이 될 수 있어.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까 말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어디든 있는 법이잖아?
병색이 완연한 뺨에 홍조가 돌자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여성:내 마지막 부탁이야. 별돌은 제자리에 돌려놓아 줘.
그리고… 이 영상을 다른 사람이 같이 보고 있다면.
마치 화면 바깥을 보듯 여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정확하게
당신
을 바라봅니다.
여성:왼쪽 복도로 내려가면 지하 서버실과 연결돼요. 메인 컴퓨터에 내가 설정해 둔 코드를 입력하면 하늘길 시스템은 즉시 가동을 멈추고 공영방송사로 이 시스템이 시민들을 어떻게 감시해 왔는지 폭로하도록 되어 있죠.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하세요.
코드는, 이미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 후에 시선은 다시 테케네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세워 둔 계산과 계획, 예상과 예측, 예언과 실현을 벗어나 똑바르지 않은 길로 가기를 바라.
베아트리체 힐:(자신을 향한 말이 아닌데도, 왜 이렇게나 가슴 한구석이 아릴까. 짧은 영상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환하게 빛났을,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발견한다.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 하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다.)
(같은 처지였다면, 분명 자신도 저렇게 되었으리라... 다시금 실감한다. 그러니 테케네를 완전히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모든 걸 버리고 그린 듯한 에덴을 선택하지도 못했으니까.)
(이 순간, 오롯이 제 자유 의지로 선택한 이를 바라본다.)
에르드:(영상은 아주 오래 전에 찍힌 것이나, 그 안에 담긴 감정만은 지금에 와서도 빛바래지 않고 선명하다. 여성의 말을 들으며 한 팔을 뻗어 베아트리체의 어깨를 감싼다. 하늘길 시스템을 만들어 인류를 억압하고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한 테케네는 분명 악인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의 동기인 사랑만은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아, 사랑이란 얼마나 크고 간절한 힘인가. 누군가를 엄청난 계획에 매달리게 하고, 누군가에겐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대단한 감정을 가져다 주고, 누군가는 바라던 염원을 포기할 용기를 준다.)
(베아트리체를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고개를 기댄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감정도 저들과 다르지 않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노인의 절망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테케네 드그레:코드를 입력하면…… 어쩌면 별돌을 묶고 있는 저 사슬도 풀릴지 모르겠군.
베아트리체 힐:(가볍게 내리는 무게와 온기에 나지막한 웃음이 터진다.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으로, 자그만 행동으로, 맞닿은 살갗으로, 같이 내쉬는 숨으로 우리는 열렬히 사랑한다 말하고 있다. 간절히 바라는 염원은 앞으로 펼쳐질 우리의 자유와 그를 이뤄낸 의지로 이뤄나가자.) ...열쇠를 제자리로 돌려놓자.
(연리지가 엮이듯 단단히 손을 붙잡는다. 왼쪽 복도의 지하 서버실, 그 곳에 우리가 바라던 끝이 있어. 우리가 가져와야 할 끝이 있어. 이끄는 걸음이 가볍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 국적인들을 ‘국민’ 이 아니라 ‘시민’ 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이 이성적인 의사 결정 능력을 가진 현대인들에 의해 지극히 공화적인 절차를 밟아 주체적으로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 시각 카사블랑카에서는 노노이 라가힛의 형이 총을 쥔 채 장벽 너머의 크리쳐에게 격발하고 있었습니다.
스와콥문트 성벽 바로 앞까지 도달한 해방군 속에선 릴리안 웨즐리가 해방군의 깃발을 쥔 채 성가퀴 아래를 달리며 핏물 섞인 고함을 내질렀습니다.
다카르 시장은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려 손수 환자를 업고 병원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카사블랑카 시민들은 이 전선의 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야기는 각자의 자리에서, 호된 자유 의지 속에서, 활자 너머에서 실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계속됩니다.
두 사람은 흰 벽돌로 짠 길을 밟아 내려가 지하로 향합니다.
마치 몇 해 전 방위사령부처럼 거대한 서버실 안에,
점점이 빛나는 항성처럼 메인 컴퓨터는 액정을 꺼트리지 않고 ‘최후의 질문’ 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지난한 시대의 마지막을 고할 순간이 왔다.)
(...영원한 행복도, 낙원도 없다. 저 밖에서는 피가 흐르고, 비명이 들리고, 무지에서 오는 작달만한 평화 또한 존재한다. 언젠가 이 날을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확신한다. 나는 너의 곁에서, 내가 선택한 자리에서, 내가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그저 살아서 행복했노라고.)
잠시간 기다리자 퍼센테이지가 올라가더니 100%에 달합니다.
당장 이 지하에서 변화를 알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가자, 에르. (나를 가장 웃음 짓게 하는 존재, 맞잡은 손을 끌어 위로 향한다.)
에르드:그래. (살아 숨쉬며 말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행복을, 평온을.)
소란스러운 별들이 무수히 찬란한 지상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테케네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인지 보이지 않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분수대 위에 별돌이라는 것이 고요히 놓여 있습니다.
황금빛 쇠사슬이 철컹거리며 벗겨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수대 아래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다가 이제 석판 뚜껑이 열려 드러난 것 같은 일곱 개의 빈틈이 보입니다.
별돌 조각을 집어 빈틈에 맞물리도록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반짝이는 별들을 눈에 담는다. 곧 온 세상에 뿌려질 빛을.)
같이 끼워 넣을까? 뭐든 함께 하고 싶어. (별돌 조각을 집어 하나를 내민다.)
에르드:물론이지. (내밀어진 조각을 잡아 망설임없이 빈틈에 끼워넣었다. 하나, 둘……)
베아트리체 힐:(...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 제 손 위에 끌고 온 에르드의 손을 겹쳐 끼워넣는다.)
일곱 개를 전부 끼워 넣은 그 순간에, 눈이 멀 것처럼 환한 빛이 폭발하여 하늘로 솟아 올랐습니다.
아모리베늄이 수억 송이 핀 것처럼, 연보라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빛이 몰아닥쳤다 빠져 나가는 썰물 같이 도시를 뒤덮습니다.
스와콥문트 성벽에서 잠시 멈췄다가 이내 도로 흘러 내려가 사막까지 닿습니다.
빛의 물결이 닿는 곳마다 마른 모래에 습기가 젖어들고, 먼지와 구름이 가라앉아 날씨가 갭니다.
두 사람을 안내하듯 바다 방향으로 아모리베늄이 무수히 피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베아트리체 힐:(귓가에 속살대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를 위한 길이 눈 앞에 피어나고 그려진다. 바라보는 낯에도 꽃처럼 피어난다. 분명 저 끝에는...) ...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에르드:(놀라운 광경이다. 새하얀 도시에 조화로운 연보라색과 금색이 몰아닥친다. 물결처럼 밀려들어오는 빛을 커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베아트리체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럼 가자, 우리를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가 사랑하게 될 곳으로.)
베아트리체 힐:(다시는 놓지 않을 손이, 사랑하는 연인들이 무수히 피어난 사랑을 헤치고 나아간다. 무채색을 지나 선명한 색으로. 성벽을 너머 저 바깥으로.)
스와콥문트 성벽 안은 도시라기보다는 마을 규모 크기라, 서쪽 벽까지는 금방입니다.
오염되고 낡아 언제라도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친 먼지가 아니라,
부드러운 백사장과 연푸른 바다가 맞닿아 은청색 파도와 물방울을 꽃처럼 틔우고 있습니다.
감미로운 볕이 피부를 적시고, 발목을 데우는 바닷물이 고요하고 우묵한 소음을 내면서 우리를 간지럽힙니다.
베아트리체 힐:(흰 모래알과 맞닿은 끝없는 푸름, 그 위로 떠오르는 빛이 조각조각 뭉치고 부서진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저것이 파도라면. 아, 언젠가 꼭 이런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지금 맞이한 미래를.) 나 해보고 싶은 게 있어, 에르.
(단단한 군화를 벗어 내면 새하얀 발등이 드러난다. 맨발로 바닥을 디딘 적이 있었던가? 간질함이 발 끝에서부터 심장까지 타고 올라 만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오른다.) 나란히 파도를 밟고 싶어.
해줄거지?
에르드:(사진과 글귀로만 접해 온 풍경이었다. 끝이 없을 만큼 드넓어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게 모두 보인다지. 가끔 사진을 보면서 상상해보고는 했었다. 그러나 파도 소리가 들리는 백사장에 선 지금, 기록으로 남은 무엇도 실제를 이길 수는 없다. 광활한 바다가 연보랏빛 새벽 하늘을 가르고 떠오르는 태양에 주황빛으로 물든다.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른다. 하염없이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물론. (망설임없이 따라 군화를 벗었다. 딱딱하게 박힌 굳은살 아래로 까슬하고 차가운 모래가 밟힌다. 신기한 촉감이었다. 베아트리체를 따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오른다. 직전까지 군인으로서 총을 들고 싸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베아트리체 힐:...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 너와 나로 존재 한다. 나와 나? 너와 너 일지도. '지지않는 꽃'은 바다 너머까지 피어난다. 우리는 잘게 부서지는 파도를 밟는다. 간질이고 빠져나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을. 우리가 바라던 봄이 멀었을까? 우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벌써 봄을 닮아있는데. 책에서만 접하던 사계절을 머지 않아 눈에 담게 될지도 모른다. 긴 머리칼을 스치는 짭짤한 바람도 꽃내음 배인 봄바람이 된다. 너는 나고, 나는 너라. 간질한 파도를 밟는 두 인영은 금세 하나가 된다.)
이런 미래를 그렸어, 언제나.
(선명한 색채보다 맑은 웃음소리가 흐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
(이 길을 따라 달려도 보고, 걸어도 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털고 일어나자.)
에르드:(군화를 먼발치에 던져놓고 손을 맞잡은 채 백사장을 걷는다. 파도를 걷는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밀고 들어온 바닷물이 발등을 사르라니 적시고 뒤로 물러선다. 젖어드는 피부, 코끝에 감기는 짠 내음, 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모습. 어디 하나 놀랍고 감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되돌려받은 자연. 우리가 앞으로 누리게 될 세상. 지난 4년이 승리와 생존을 위해 '버티는' 나날이었다면 앞으로는 오롯이 우리의 힘과 의지로 미래를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끝을 가져왔어, 베아트리체.
그리고 이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
언젠가 또다시 어렵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온다 하더라도 지금껏 했던 것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자. 한 번 행복을 거머쥐었으니 두 번, 세 번도 해낼 수 있을 거야. (망설임없이 자신할 수 있다. 우리가 걸어온 세월이 곧 우리의 믿음과 신뢰로 화했으므로.)
베아트리체 힐:응, 바라던 끝이야. 새로운 시작이고. ...우리는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거야.
새로운 시작의 축하를 하자. (가벼운 몸짓으로 돌아 당신의 눈 앞에 멈춘다. 가느다란 팔을 뻗어 단단한 목덜미에 감아, 부드럽게 끌어내린다. 눈을 감고, 입을 겹친다. 땅의 마지막에서, 바다의 시작에서 하나로 겹친 인영은 완벽한 자연의 조각이 된다.)
에르드:(입술 새로 웃음소리가 샌다. 한 팔로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머리를 받치며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떠오르는 햇살이 그들을 비춘다. 사막과 바다, 피어난 꽃잎과 숲의 풍경 속에 두 사람이 있다.)
거칠고 매서웠던 폭풍이 지나간 후만 같습니다.
윤슬이 반짝이는 수면은 박명이 내릴 때 금가루를 뿌려 녹인 보석처럼 변합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자니 해의 궤적을 따라 점점 느긋한 에메랄드 빛으로 바뀝니다.
실크 같은 해변은 막 타오르다 꺼진 잉걸불처럼 무심하게 반짝이더니,
이윽고 태양을 온전히 수평선 위까지 잡아당겨 꺼냈습니다.
마치 우리를 발견되지 않은 땅으로 부르는 이정표같이…….
극지보다 싸늘한 절망 위를 날다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어리둥절해지게 됩니다.
이어폰이 시끄럽게 울립니다. 스마트워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카르에 갑작스럽게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이야기,
크리처들이 햇살 맞은 먼지처럼 타올라 사라진 이야기,
혼란스럽게 소식을 모으고 있는 요한과 해방군,
카사블랑카에 돌연 보도되기 시작한 독재 정부에 관한 소식…….
그러나 두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는 해변에, 푸르고 흰 것만이 가득한 세상에 오로지 둘로써 서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소란은 지금 우리와 멀다. 지금, 숨을 나누는 입술 사이로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
사랑해.
...사랑해.
언제까지나.
에르드:(스마트워치를 아예 꺼 버렸다. 지금만은 그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 그 무엇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나 역시도. 베아트리체, 너만을…… 언제까지나.
살기 위해 두드린 세상의 성벽이 결국 한금 부서지고, 그 사이로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합니다.
비단이나 성기게 짠 그물 사이로 반짝여 들어오는 별빛처럼 태양이 산란합니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 삶은 예언서에 적힌 한 줄짜리 운명 따위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발버둥쳐 살아남아서, 가슴 안에 품은 것들을 말하고, 닫히지 않는 입술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발로 달려 나가길 원했습니다.
지금 비로소 살아남았으므로 우리는 어떤 별종이 사람의 의지를 감히 계산하려 했고,
수많은 비극의 철로를 깔아 인간의 역사를 주무르려 했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억눌렀던 어떤 것에 대해 고함칠 수 있습니다.
감히 남이 간섭하거나 계산하거나, 주사위 놀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테케네 드그레의 주장과 달리 모든 선택은 스스로 한 것입니다.
예언자 따위는 예측할 수도, 계산할 수도, 설계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형 정원에 들어간 이끼 따위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의지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람다운 일이죠.
사람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순간이 왔습니다.
열대의 달은, 지구로 뛰어들고 싶은 듯이 은청빛 물결을 내려 보내며 반짝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