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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30~250604] 에르리체 - 무산지우

초현_c 2025. 6. 4. 01:40

 

플레이타임 : 9시간

 

 
 
 
 
툭, 투둑.
 
빗물을 맞은 나뭇잎이 떨리는 소리가 불안하게 들려오더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곧 도착인데 이런 때 하필 비가 내리다니.
 
귀향길이 심란한 것이 꼭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비례하는 머뭇거림을 읽어낸 듯한 모양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이기를 빌며 잠시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읍시다.
 
이 연:이런…… (투두둑, 연달아 땅에 쏟아지는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평소라면 비가 오건 말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귀향하는 길이었다. 피가 이어진 친척보다 더 저를 위해주던, 진짜 가족 같던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가는 길. 어느덧 그곳을 떠나 상경한 지도 5년이나 지났다. 그간은 제 능력과 힘을 기르고 삶을 가꾸는 데 집중하는 시간이었기에 일부러 고향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마침내 귀향길에 오른 지금은 익숙했던 장소와 사람들의 모습이 새록새록 눈앞에 그려진다. 저를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던 배 씨 부부, 자유롭게 누비던 숲과 산, …… 그리고 이화. 내색하진 않았지만 저를 떠나보내는 게 마냥 기쁠 수는 없었겠지.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비가 발목을 잡는다.)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짐이 다 젖으면 곤란하기도 하니까.)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가지와 잎이 넓게 퍼져 있어 얼른 밑으로 들어가면 적어도 옷이 홀딱 젖기 전에 무사히 비를 피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연:(서둘러 그 아래로 걸음한다. 갑자기 웬 비람.)
 
걸음을 재촉해 나무 아래로 들어갈 때 무언가 발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 연: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1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어이쿠! 깜짝이야.”
 
낡은 우의를 담요 삼아 덮은 채로 구겨져 주저앉아 있던 웬 사람입니다.
 
곡예단원:그쪽도 비 피하러 오신 모양이구먼. 어디서 오셨소?
 
이 연:(이쪽도 놀랐다. 예상치 못한 조우에 눈매가 살짝 사나워졌다가 바짓단이나 몇 번 털었다.) 한양. (짧게 답하곤 하늘을 다시금 올려다본다.) 비가 오래 갈 것 같나?
 
곡예단원:그 멀리서 예까지 고생이 많소. 지나가는 소나기면 좋겠는데 제법 쏟아지는구만. 빗줄기가 벌써 굵어지는 걸 보아하니.
나는 원래 떠돌이 곡예단 사람인데, 산에서 길을 잃었는지 다른 단원들이랑도 떨어져 버렸지 뭐요. 여기서 기다리면 올까 싶었는데 웬걸, 꼼짝없이 갇혀버렸군.
 
곡예단원이라 자신의 신분을 밝힌 상대는 우의를 바닥에 넓게 펼쳐놓고는 앉으려면 앉으쇼, 하고 먼저 덜렁 주저앉습니다.
 
비가 그칠 기미는 좀처럼 없고 그의 말마따나 아까에 비해 빗줄기가 훨씬 굵어진 느낌이 드는 게, 일 없다고 피할 처지도 못 되겠군요.
 
이 연:(빗줄기를 보니 바로 이동하기엔 글렀군. 짧은 한숨을 내쉬고 짐을 바닥에 내려둔 뒤 우의 위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여기에 존재감도 없이 구겨져 있었군. 본래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나?
 
곡예단원:(사람 좋게 웃으며 끄덕인다.) 내가 먼저 물으려 했는데 선수를 빼았겼군. 떠돌이 곡예단에게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발 닿는 곳이 곧 갈 곳이지.
그래, 댁은 어디까지 가시오.
 
이 연:(이걸 말해도 되려나. 허허실실 웃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빠르게 그의 차림새를 훑는다. 칼이라거나 활 같은 무기 혹은 날붙이는 없나?)
 
연의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곡예단원은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곡예단원:(기우뚱.) 자네도 돌아갈 곳이 없는가? 떠돌이같지는 않아뵈는데.
 
연이 사냥꾼다운 매서운 눈으로 둘러보니... 다행히도 곡예단원에게 어디 무기를 숨길 틈은 없어 보입니다.
 
이 연:(곡예단원이라는 게 사실인가? 일단 마을에 공연히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으니 그쯤에서 답해주었다.) 연리 마을. 그곳이 내 고향이라서.
 
곡예단원:고향으로 간다고? 큰 결심 했구려. 이 근방도 많이 바뀌어서 길 헤매지 않게 조심하시고. 오가는 사람이 줄어서 그런지 사나운 산짐승도 왔다갔다 한다니까.
연리 마을... 연리 마을이라....... 이 근처에 그런 마을 이름은 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가 보구먼.
그래도 돌아갈 곳이라도 있는 댁이 부럽긴 하구려. 고향에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이 연:사냥꾼이니 짐승에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돼. …… 그나저나 마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5년 새에 마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저 개인에게는 나름대로 긴 시간이었지만 마을의 수명으로 따지자면 짧은 찰나일 텐데.)
(단순히 그쪽까지는 발걸음한 적 없어서 모를 가능성이 높겠지만, 괜히 걱정 한 줄기가 피어오른다. 다시금 이화의 희고 섬세한 얼굴을 떠올린다. 어떤 기분이냐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앞날을 개척해나가면서도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안식처라고 할까. 다만 그는 말수가 적고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당신도 그런 사람을 만들면 되지 않겠어.
 
곡예단원:아하, 사냥꾼이었구만. 듬직해뵈니 걱정은 덜었구려.
참.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모르겠소. 모든 마을을 꿰고 있는 건 아니니 너무 심려치는 말게나. (고개를 돌려 연을 빤히 바라본다.)
떠돌이가 그런 사람을 만들면 되겠는가. 나는 자유로이 유랑할 몸이라네-
 
서로의 목적지, 고향 이야기, 과거 이야기를 얼마간 나누는 동안에도 세찬 비는 그 기세가 꺾일 줄을 모릅니다.
 
곡예단원은 구멍이라도 뚫린 듯 퍼붓는 비를 바라보다 허,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쉽니다.
 
곡예단원:거, 징하게도 내리는구먼. 위에 있는 이가 정히도 슬피 우는갑소.
(목을 큼큼, 다듬는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소.
어느 날 귀하신 분이 나들이를 나와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선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고 해.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선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앞으로도 여기에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사라졌소. 꿈에서 깨어보니 선녀의 말대로 저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그 마음에 감복한 그 이도 선녀를 그리워하며 제사를 지내주었다나.
 
이 연:곡예단원 아니랄까 봐, 그런 이야기를 다 아는군. (턱에 손을 괸 채로 듣는다. 지금껏 사랑이나 사랑 이야기는 다 저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누군가와 쉽게 가까워지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나마 가까이 어울렸던 이는 제 발로 떠나와 상경했으므로. 그러나 이제 이 길을 쭉 걸어돌아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지하거나 깨닫지는 못했지만 보고 싶은 이는 있다. 마침 그 사람도 선녀라 부르기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구름만으로 그 존재를 그리워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군.
 
곡예단원:허나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것은 그리움 뿐이라- (곡조를 넣어 흥얼거리다 퍽 가볍게 웃어 보인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야기 값을 받아야하나, 이것도 인연이고 하니 내 넘어가리다.
아무래도 날 찾으러는 아무도 안 올 모양이니 내가 먼저 찾으러 가야겠는데, 댁도 해가 지기 전에는 일어나시구려. 사냥꾼 나리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이가 목이 빠질지도 모르잖소. 비 피하는 동안 담소에 어울려준 답례로 내 몇 가지 좋은 걸 알려주리다.
 
곡예단원은 몸을 숙이고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곡예단원:첫째는,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갈래 길이 나올 텐데, 거기서 매듭이 지어진 나뭇가지를 찾으시오. 그 가지가 가리키는 길이 내려가는 길인데, 다른 쪽은 워낙 험해서 길 잃기에 십상이오. 물론 가서 좋을 일도 없고…….
둘째는, 여기서 누굴 만나던 이것 좀 먹어보라고 권해도 절대 입에 대지 마시오. 암만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더라도 차라리 나무껍질 벗겨다 씹는 게 이로울 거요.
마지막으로 셋째는…… 앞의 두 가지를 깜빡 잊고 다른 길로 가서 음식까지 얻어먹었다면 자, 이것 받으시오. 뱃속에서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이 을 씹어 삼키시구려.
 
그 말과 함께 건네준 헝겊 주머니에는 무슨 종인지 모를 파릇한 풀이 들어 있습니다.
 
이 연:(갑자기 이건 웬 묘한 정보란 말인가? 풀을 받아들긴 했으나 석연찮은 낯이다.) 당신은 이걸 어떻게, 왜 알고 있는 거지? 이건 또 무슨 풀이고?
 
곡예단원:이곳 저곳 떠돌다 보면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듣는 법이지.
 
석연찮은 대답 뒤로 우의를 다시 어깨에 둘러 얹은 남자는 연에게 “조심히 가시오” 라는 인사를 건네고 나무 그늘 밖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남자의 형체는 그림자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SAN 0/1.
 
이 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 어찌 된 일이지? (축지법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눈앞에서 단숨에 사라졌다. 일반적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평범한 존재가 아닌 건가? 그 수상한 곡예단원의 말대로라면 누군가 여기에서 몸에 이롭지 않은 무언가를 먹기를 권해 온다는 소리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산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일인지 파악이 어렵다.)
(솔직히 사람인지도 모르겠는 그 곡예단원의 말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만 혹시 모르니 풀을 챙겨넣는다.)
 
쏴아아—
 
빗소리가 여전히 귓전을 울리고 이곳에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이 꼭 꿈이나 환상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는 오로지 연의 손에 들린 헝겊 주머니뿐.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는 게 곧 해가 저물 요량인 듯합니다.
 
이대로라면 나무 아래에서 밤을 지새우게 생겼으니 어떻게든 가볼 수밖에요.
 
비에 젖은 풀숲을 걸어 산길을 지난 끝에 연은 남자가 말했던 갈림길을 발견합니다.
 
이 연:(빗속에서 눈을 가늘게 뜬다. 정말로 매듭지어진 나뭇가지가 있나?)
 
두 갈래로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모양이 뚜렷하지 않아 방향으로 가늠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주변이 어둡고 비가 한참 내린 터라 좀 더 자세히 보려면 【관찰】이나 【추적】 등의 판정이 필요합니다.
 
이 연: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한참 주변을 둘러본 끝에 광목천으로 지은 매듭이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면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연:(역시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님, 비 때문에 나무가 쓰러진 건가. 나무를 넘어갈 수는 없을까?)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 살펴본다. 어떻게 부술 수 있는 부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길을 틀어 막은 나무가 깔끔하게 쓰러져있습니다.
 
비에 젖어 더욱 무거워진데다 둥치가 워낙 큰 탓에 넘어가기 힘들어보입니다.
 
가까이 다가서니 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샤냥꾼인 연에게는 익숙할 작은 빛.
 
쓰러진 나무 건너편에서 산짐승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연:……!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짐승의 눈빛을 발견하곤 바로 경계 자세를 잡는다. 나무가 길을 막은 덕에 산짐승과 맞닥뜨릴 위험을 피한 것 같다. 일단 곡예단원의 말이 사실이건 진실이건간에 이 길로는 갈 수 없으니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왔다. 다른 쪽 길도 험할 뿐이지 내려갈 수는 있다고 하니 이쪽으로 가볼 수밖에.)
 
결국, 연이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길은 가는 동안 걸림돌이 될 만한 쓰러진 나무도, 커다란 바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머리 위로 가지가 몹시도 우거져 달빛도 들지 않고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라
 
발밑을 조심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두둑.
 
연이 밟은 얕은 흙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훅 아래로 꺼집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끊겨버린 절벽 아래를 마구잡이로 굴러떨어지고 맙니다.
 
몸이 땅에 부딪히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 극심한 고통과 함께……
 
정신이 흐려집니다.
 
.
 
...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옵니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가까워지는 만큼 연의 정신도 점점 돌아옵니다.
 
슬며시 눈을 뜨면 이곳은 여전히 숲 속인 듯 하늘에는 둥근달, 주변으로 키 큰 나무들이 보입니다.
 
여기까지는 기절하기 전과 똑같은데,
 
좀 더 둘러보니 연의 곁으로 붉은 옷을 입고 등불을 든 사람이 여럿 서 있습니다.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지만, 주변을 보니 절벽에서 구른 게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SAN 1/1d3.
 
이 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2
(울리는 방울 소리에 의식이 든다.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죽지 않은 건가? 아프지도 않은 건 말이 안 되는데. 눈살을 찡그리며 제 몸상태와 상황을 파악하다가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킨다. 뭐지?)
(이 사람들은 다 누구지? 그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는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이 연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 말을 걸어옵니다.
 
: 어서 일어나세요. 시간이 다 됐습니다.
 
상대는 붉은 천으로 지은 옷을 입었고 얼굴마저도 천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이 연:시간이 다 됐다니 무슨 소리야? (눈을 찡그린다.) 당신은 누구지? 그 차림새는 또 뭐고.
 
: 중요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기다리던 시간이 되었지요, 곧 옵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찡그린 연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붉은 옷.
 
그제야 연은 자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만 그들과 달리 비단으로 지은 듯 소매에 은은하게 광택이 돌고 세세한 자수가 새겨져 있는 게 꼭……
 
그렇습니다. 혼례복 같습니다.
 
이 연:(그제야 제 몸에 걸친 옷을 알아본다. 이건 꼭…… 더더욱 당황스럽기만 하다. 결혼할 예정은커녕 약속을 나눈 이조차 없는데 웬 혼례복 같은 걸 입고 있단 말인가?)
 
연의 의문에 대신 답하듯 주변이 점차 소란스러워집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외칩니다.
 
등불을 든 사람 : 신부가 옵니다. 신부가 와요.
 
어느새 방울을 단 붉은 꽃가마가 흔들, 흔들 이 앞까지 도착합니다.
 
비가 내려 웅덩이가 진 바닥에 붉은 주단이 깔리고 그 위에 꽃가마를 탄 이의 작은 발이 닿습니다.
 
연과 마찬가지로 하늘하늘한 혼례복을 입은 신부의 얼굴에는 베일이 드리워져 있지만,
 
신부가 가마에서 내리자 밤바람이 불어와 베일을 흩트려 놓습니다.
 
다시 베일을 쓰기 위해 고운 손으로 살짝 들어 보였던 순간에 드러난 얼굴,
 
배꽃을 닮은 듯 새하얀 그 얼굴은 분명히…….
 
다시 얼굴을 가린 채 신부는 바닥에 깔린 주단을 사뿐사뿐 밟아 연에게로 다가옵니다.
 
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곁에 선 사람들이 연의 팔을 잡습니다.
 
붉은 천을 쓴 사람 : 이리로 오세요. 신부가 도착했으니 이제 천지신명께 맹세를 올려야지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신부와 함께 어디론가 향합니다.
 
얼마간 산길을 걸어가니 산속에 있기에는 너무나 고풍스러운 풍채의 고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혼례 날이 대개 그렇듯 집 주변으로 밝은 등을 몇 개나 켜두었고 문에는 복을 비는 부적이 문짝에 각각 붙어 있는데,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자 이제야 빗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안쪽에도 곳곳을 붉은 장식물로 꾸미고 천장에는 마찬가지로 붉은 천을 매달아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가장 안쪽, 그들이 연과 신부를 데리고 간 곳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습니다.
 
탁자 위에는 어째서인지 천을 덮어둔 커다란 조각상과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가 올려져 있습니다.
 
천을 덮어 두었음에도 얼핏 보이는 모습에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집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 : 유세차 신축정묘삭 일십오일임오에 길일을 맞이하여 맑은 인연이 다시 자리를 찾아 백년가약을 맹세하니 이를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신랑과 신부는 천지신명께 절하시오.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탁자 위 조각상에 몸을 숙여 인사를 올립니다.
 
배??:......
 
이 연:(분명 산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대체 이 길은 무엇이고 고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천을 고쳐쓸 때 스치듯 보였던 얼굴은 분명…… 귀향길에 오르며 몇 번이고 떠올렸던 사람. 이화다. 내가 이화와 결혼을 한다고?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꿈이 이렇게 선명할 수도 있던가. 당장이라도 혼례복 따위 벗어던지고 이 자리를 모두 뒤엎을 셈으로 몸에 힘을 주고 있었으나 맥이 탁 풀렸다.)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투성이지만, 이화가 이 기이한 과정에 임하고 있다면 망가뜨릴 수가 없어진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화와의 혼인이라면 싫지는 않다. 단지, 누가 설명을 좀 해주었으면 할 뿐.)
('나랑 얘기 좀 해' 눈빛으로 그를 마구마구 바라보면서, 우선은 이화가 하는 대로 어색하게 조각상을 향해 몸을 숙였다. 이건 또 뭐길래 천으로 덮어둔 거야?)
 
연의 눈빛이 붉은 베일 너머로 닿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부는 여전히 말이 없고, 천을 덮어둔 커다란 조각상에는 여전히 위압감만 느껴집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 : 다음으로 신랑과 신부는 마주 보고 절하시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신부가 먼저 연을 향해 몸을 틀어 숙입니다.
 
꽃가마에서 내릴 때 보였던 그 얼굴이 정말로 이화가 맞다면,
 
이화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에 동조하고 있는 걸까요.
 
게다가 이화와 혼례라뇨. 이런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복잡한 연의 속사정을 이해해줄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는 듯,
 
연이 신부와 마주 절을 할 때까지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끝내 두손 두발 모두 든 신랑이 신부와 마주 절을 하고 나서야 주변에서 나직한 박수 소리가 울립니다.
 
이런 걸 혼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어쨌든 짧은 혼례를 마친 연와 신부는 이윽고 장소를 바꾸어 신방으로 보내집니다.
 
두 사람을 신방으로 안내한 시종은 “좋은 밤 보내십시오” 라며 문을 닫아줍니다.
 
신방의 문이 닫히고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배??:... ...
 
붉은 혼례복 소매 끝에 뻗어나온 새하얀 손이 혼란스러운 연의 손에 자신의 베일 끝을 쥐여줍니다.
 
구태여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베일은 스르륵 걷힙니다.
 
베일을 벗고 자세히 마주한 얼굴은 역시, 틀림없는 이화입니다.
 
배이화:오랜만이야, 연아…….
 
이 연:…… 진짜 너구나. (신방까지 보내지다니, 정말 얼떨떨하기 그지없다. 와중에도 천 너머로 드러난 얼굴이 반갑다. 당연히 마을 입구에서 재회할 줄 알았지, 신랑과 신부로 마주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자리가 조금 어색하다.)
어떻게 된 거야? 난 분명 연리 마을로 돌아가는 중에 길이 험해서 굴러떨어졌는데, 정신 차려보니 이런 옷을 입고 너랑 결혼을 한다잖아. 이거, 누가 억지로 시킨 건 아니지? 원치 않는데 당한 건 아니지? (가장 먼저 묻는 건 역시 상황에 대한 설명과 당신을 향한 걱정이다.)
 
배이화:늘 네가 얼마나 컸을까, 궁금했는데.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처음 나온 것은 지난 세월을 잇는 농담이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대도 연을 알아보지 못 할 리가 없으니까. 매일을 같이 그리며 달에 기대 떠올리던 얼굴이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준다. 섬세한 움직임은 꼭 보고 싶었던 환상이 흩어질까 조심스럽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닳을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모셔둔 꽃갈피를 다루는 듯도 했다.)
(비구름처럼 복잡하게 흘러가는 감정을 잠시 덮어두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만 걸어둔 채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다친 곳은 없고?
 
이 연:그런 너는…… 5년 전이랑 거의 달라진 게 없네. 아닌가. 더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머리칼도 많이 길었고. 주변이 조용해지니 이제야 눈앞의 이를 찬찬히 살펴볼 여유가 생긴다. 어릴 적에도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탓에 망가진 옷차림을 이화가 자주 정리해주곤 했었지. 이번에도 별반 다를 바 없는데 괜히 몸이 작게 움찔거릴 것 같고 다른 곳을 보고 싶어진다. 이 역시 우리가 마주한 자리의 특수성 때문이겠지. 영 익숙치 않은 분위기와는 별개로 손길이 무척 조심스럽고 섬세함을 알아차렸다. 떠나기 전에도 난 험하게 굴러다녔는데 새삼.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 저보다는 한참 작고 마른 당신이지 않은가.)
음. 일단 아픈 데는 전혀 없기는 한데…… 그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다친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아?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닌가 했는데 그렇다기엔 너무 선명하네, 모든 게. (손을 뻗어 이화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려본다. 촉감이 제대로 느껴지는지)
 
배이화:달라진 게 거의 없다니 다행이다. ...혹여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거든. (...이렇게 붉은 혼례복을 입고 마주 바라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연이 어느 곳에서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길을 찾아서...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떠났으니, 더 넓은 세상을 밟고 뛰며 이 좁은 곳에는 돌아오지 않길 바랐는데.)
(손길에 눈을 내리 감는다. 5년의 세월만큼 길게 자라난 머리칼은 연의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감기며, 선명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 ...차라리 지금이 꿈이라면 좋을까? 가끔 이런 꿈을 꿨어. 너와 이렇게 마주 앉은 꿈을. ......혼례복도 이런 신방도 아니었지만. (나직하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떠올린다. 비구름이 걷힌 눈동자에는 오랜 그리움, 반가움, 뒤늦게야 깨달은 마음... 그 같은 것들이 차올라 떠난 이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다만-) ...먼 길 오느라 힘들었겠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
 
이 연:그럴 리가 없잖아. 오래 떠나 있기는 했지만, (그리고 일부러 생각을 피하려 노력하기는 했지만) 너와 네 가족을 잊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에 얽힌다. 사실은 제가 쓰러진 지 꽤 시간이 지났고, 상처가 아문 후에야 정신이 든 건가? 그게 아니라면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이 이상 지금이 꿈이라고 의심하기도 어렵다.)
내가 많이 그리웠어? (이화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이미 어렵지 않게 그 감정들을 읽어냈으면서도 굳이 묻는다. 당신의 생각을 혼자 어림짐작하여 설레발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직접 듣고 싶기도 해서.) 내가 옛날부터 칼을 잘 다뤘잖아. 활을 쏘는 법도 익히고 힘을 많이 길러서 사냥꾼이 됐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힘이 필요한 곳에 가서 용병으로 일하기도 하고, 상단이나 양반을 호위하기도 하고. 세상 구경 많이 했지.
넌 어땠어? (이화는 마음씨도 착하고 외모도 고우니 5년 사이 혹시 결혼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는데. 저와 혼례를 올렸으니 이제는 필요없어진 상념이다.)
 
배이화:...정말? (눈동자에 이채가 스친다. 일말이 기대같은 것. 너도 나를 그리워 했을까 하는. 연이 떠난 후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무던히도 의식해서. 그러니 속으로는 이름자가 닳도록 외었어도, 한번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오늘에서야 다시 그리운 이름을 꺼내어 본 것이다. 그립다 말하면, 그 마음에 이름이 지어지니까. 꼭꼭 묻어두고 산 감정이다. 그것이 네 발목을 붙들어 둘까봐서. 제 마음이 짐이 될까봐서. 하지만 연아, 네가 내 앞에 있잖아. 네가 물었으니까, 갈 곳 잃은 마음의 주인이 찾고 있으니 답을 고할 수 밖에.) ...그리웠어. 무던히도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그게 안됐어.
...네가 없는 나는 늘 같았어. 책을 읽고 쓰기도 하고, 가끔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너는 종종 잠들었었지만.
(가라앉으려는 목소리를 가볍게 띄우려 애썼다. 입가에 걸린 미소도. 그때에 너와 함께 떠났다면 좋았을까. 뒤늦은 후회와 헛된 상상은 여기에서 그친다. 보지 못한 세상은 상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라.) 사냥꾼이 되었구나. ...잘 어울려. 늘 네가 다치지 않고 건강하길 빌었는데, 내가 잘 빌었나보다.
 
이 연:(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짧았으나 그 안에 숨겨진 시간과 감정이 얼마나 깊고 길었는지는 듣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었다. 조금은 놀라웠다. 이화가 저를 그렇게 생각해준 것이. 그렇게나 많이 그리워하고 마음에 담아 둔 것이. 우리는 가깝게 지냈지만 어떠한 약속이나 깊은 감정을 나누지는 않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화에게 가진 감정 역시 별반 다르진 않다. 산을 오르고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힘들 때, 짐승에게 허를 찔려 부상을 입고 땅바닥을 구를 때, 밝게 어울려노는 아이들을 볼 때면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슴이 작게 요동치곤 했다. 얼굴이나 이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과거의 시간을 안식처마냥 되짚고는 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계곡물 암초처럼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그 안으로 빠져든 우리를 받쳐드는 듯하다.)
여전히 마을에서 지냈나 보구나. 잘 어울리네, 아이들 가르치는 거. 애들이 말을 잘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말썽꾸러기들이 많으니 말이야. 덧붙였다.) 바깥에 나가보진 않았어? 연리 마을은 좋은 곳이지만, 넓은 세상에 나가보니 새로운 게 참으로 많더군. 음식이나 옷은 물론이고 문화도 말이야. (이화는 똑똑하고 배우는 걸 좋아하니 그 모든 광경을 좋아했을 텐데. 함께 가자고 할 걸 그랬을까. 결국은 진짜 가족도 아니니, 함부로 바깥에 나가자고 말할 수가 없어 홀로 떠났으나 한 줄기 미련이 맺힌다. 같은 고민이 촛불처럼 타오른다.)
 
배이화:...아주 어린 시절의 네가 생각나서 좋았어. ... ...바깥에는, 아직 못 가봤어. (웃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함께한 세월도 길었으니, 마주한 황금빛 눈동자에 담긴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구태여 물어보는 것은 만약 마음이 같다면,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리라. 가슴에 묻고 살리라는 마음이다. 언제가 되어도 빛나는 추억으로. 네가 다시 너른 세상으로 간다고 해도- ) ...연아. 너도 나를 그리워했어?
(느리게 손을 들어 연의 뺨에 가져간다. 새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깃털처럼 가벼이 내린다.)
 
이화의 맨 살결이 굉장히 차갑습니다.
 
이 연:…… 응. (본래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못하는 연이지만, 이화가 솔직하게 말해줬으니 이쪽도 답하는 것이 도리다.) 너와 마을을 너무 많이 떠올리면 목적의식이 흐려지고 돌아가고 싶어질까 봐 일부러 자제하긴 했지만, 힘들 땐 너와 보냈던 추억을 버팀목 삼고는 했지.
(뺨에 와닿는 손길에 옅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잠시, 온도가 낮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얼른 감싸쥔다. 제 손 안에 이화의 손이 완전히 잡힐 정도로 크기가 차이난다.) 왜 이렇게 손이 차?
 
배이화:(연의 대답에 하나로 이름 지을 수 없는, 미련스러운 것들이 물러나고, 단 하나만 남았다. 온전한 기쁨.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이 얼굴꽃이 환하게 피었다. 꽃이 지듯, 순식간에 고개를 떨어트렸지만.) ... ...아, 가마를 타고 오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려서 추웠나봐.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을까. 창백한 제 손을 다 가리는 커다란 연의 손을 내려보다, 느릿하게 웃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 몸을 좀 데우면 괜찮을거야.
 
이화가 빈 손을 들어 뒷편을 가르키면,
 
정다운 두 마리 원앙 자수를 놓은 비단 금침이 깔린 침상 뒤로 술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혼롓날에 걸맞은 신방의 차림새입니다.
 
술상 가득 상다리가 부러질 듯 갖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달콤한 술 향기가 풀풀 납니다.
 
들어온 문 반대편에는 벽의 반을 넘게 차지하는 커다란 미닫이문이 있습니다.
 
배이화:(술상을 가만 바라보다가 연에게 다시 고개를 돌린다.) ......혼례 의식은 술을 나눠 마셔야만 완성돼. 술을 마시지 않으면 가약이라 할 수 없으니까. ...어울려줄래?
 
이 연:날을 잘못 골랐군. 내가 오는 길에도 비가 많이 내렸어. 소나기인 줄 알고 잠시 피했다 가려고 했는데 끝도 없이 와서 결국은 다시 마을로 향했었지…… 지금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와 있지만. (이화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금침이 깔린 침상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금침에 수 놓인 원앙이 부부의 증표라는 것쯤은 안다. 어쩐지 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이화가 가리켠 술상은 한 박자 늦게서야 발견했다.)
(금방 몸을 일으키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곡예단원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음식을 권해도 절대 입에 대지 말라고 했었지. 보통은 처음 보는 이의 말을 믿지 않지만 이 상식에서 벗어난 상황 때문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이화가 쓰는 단어도 왠지 기이하게 느껴졌다. 혼례 의식. 의식이라…….)
(그래도 일단은 이화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이화가 술상으로 갈 수 있게끔 도왔다.) 아직 설명해줄 생각은 없어?
 
배이화:... ...마을이 많이 달라져서 알아보기 힘들지? 네가 없는 동안 마을에 일이 조금 있었어. (연의 질문에 내놓은 답이다. 술상에 나란히 건너 앉아 제 앞에 놓인 잔에 맑은 술을, 연의 잔에는 한참을 망설이다 엇비슷하게 채워 건넨다.)
 
이 연:무슨 일이 있었는데? (술잔을 받아들었으나 마시지는 않고, 찰랑이는 맑은 수면을 들여다만 봤다.)
 
배이화:(대답하기 전, 잔에 가볍게 입을 대었다가 내려놓은 뒤, 연의 손에 들린 잔을 가져가 금방 비워낸다.) ...연아, 넌 다시 이곳을 떠날거지?
 
이 연:…… 글쎄. 잘 모르겠어. 오래 떠나 있었으니 한동안은 머무를 작정이었는데.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나 네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같이 갈 수도 있고……. (잠시 침묵하다가 이화의 눈을 바라본다) 내 대답에 따라서 부부의 연을 맺을지 말지가 결정되는 거야?
 
배이화:(침묵 끝에 망설임 없이 시선을 마주한다. 올곧게.) ......아니. 연아, 이 곳에 있으면 안돼. 너는-
 
문득 이화의 입이 다물립니다.
 
신방 어디선가 툭, 툭, 무언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연:(무슨 소리지? 반사적으로 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 돌린다.)
 
커다란 미닫이 문에서 들리는 소리 같습니다.
 
창호지가 발라져 있어 밖의 나무 그림자가 밝은 달빛과 환히 켜 둔 등불에 비쳐 어른거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몇 개인가 구멍이 뚫려 그 너머에서 안쪽을 쳐다보는 섬뜩한 눈동자 몇 쌍과 마주합니다.
 
SAN 1/1d3.
 
이 연: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때 연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손이 있습니다.
 
이화가 연을 끌어안고 침상 안으로 뛰어들어 이불 아래로 숨습니다.
 
두 사람의 몸이 겹치어 가리워지고-
 
배이화:......쉿, 조용히 해야 해...
 
작게 속삭이는 이화의 심장도 두근, 두근 소리를 내며 크게 뛰고 있습니다.
 
눈을 질끈 감은 이화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솔직하게, 초조하고 괴로운 기색을 내비칩니다.
 
배이화:(서늘한 제 몸과 달리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박동하는 심장이 너머에 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다. 연을 따라 마을을 나가 넓은 세상을 마음껏 누비고 싶었던 때가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품에 그대로 고개를 묻은 채, 느릿하게 입을 연다.)
.....연아, 아까 네가 물었지. 바깥에 나가보지는 않았냐고. ...난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 네가 떠나고 마을은…… 이상한 신을 모시다 귀신이 된 사람들만 남았거든. 이제는 나도 그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아. 도망치려고도 해봤지만-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이 연:(창호지 너머의 눈빛을 보고 서늘하게 식었던 심장이 금침 안에서 다시금 뜨거운 피를 만들어내며 뛰어오른다. 품에 안긴 이의 등을 어색하지만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그러나 귓가에 들려오는 느릿한 목소리에 다시금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귀신이 되었다고? 나갈 수가 없다고?)
…… 네 부모님은? 네 오라버니는 어떻게 됐어? 나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너를 안고 있는데, 감촉이 선명한데 귀신이라니.
 
배이화:(......연아,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 달에 너무 큰 바람을 속삭였기 때문이야. 네게 품은 그리움이 바람에 실려 네게 갔기 때문이야. 떠났으면 떠난 대로, 그렇게 살았어도 되었는데... 내가 너를 너무 그리워한 탓에 네가 여기까지 끌린 걸지도 몰라.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나를 잊었다면 좋았을걸. 지금의 상황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탓하는 것 뿐이다. 숨을 고른 후에야 겨우 눈을 들어 야트막한 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한다.)
(그저 고개만 저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연아. 이 곳에서 나가는 길을 알려줄테니 이만 떠나.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고향은 잊어. 나도, 우리 가족들도.
 
이 연:떠나라고? (뒤돌아 가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본래도 마을을 떠난 뒤로는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방랑하며 살았으니까. 그러나 제 고향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들은 지금은, 이화가 어찌 되었는지를 안 지금은 순순히 등을 돌릴 수 없다. 잊을 수 없다.) 그런 말 마. 간다 해도 함께야. 널 두고는 안 가.
나가는 길이란 게 있다면 같이 가면 되잖아.
 
배이화:......도망치려고도 해봤어. 그런데 안돼.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연아. (차라리 미울 말이라도 골라해서 밀어내야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연아,너라도 살아. 너는 살아야 해. 부탁이야.
 
이 연:왜 안 되는 건데? 뭔가에 묶여 있는 거야? 내가 부술게. 어려운 일이어도 해낼 테니까 일단 설명해줘. (가슴팍에 묻은 당신의 머리를 감싸며 눈을 내리감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기대되던 귀향길이 참담하게 얼룩지고 말았다.)
 
배이화:......다 말할 수 없어, 연아. (말할 수 없는 것이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역시 그의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에 담긴 것이 저를 향한 미움이라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네가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바랐는데, 그것 뿐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이곳을 떠날 거라고 약속해줘. ...그냥 한 번만 믿어주면 안될까.
 
이 연:(핏줄이 돋아나도록 주먹을 꾹 쥔다. 명색이 사냥꾼인데, 소중한 사람 하나 지킬 수 없다니. 마음 같아선 창호지 너머로 지켜보는 이들을 모두 활로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떠나면 너는 어떻게 되는데? …… 나와 혼례를 함으로써 얻는 게 있으니 나를 데려왔을 텐데. 내가 홀로 이곳을 벗어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배이화:(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뺨을 느리게 쓸어낸다. 닿은 살갗은 여전히 차갑지만, 행동만은 여전히 다정해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낯에 내건 환하게 휘어진 웃음 또한.) ......연아, 걱정마. 나는 괜찮을거야.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내 걱정을 왜 해. 봐, 손이 얼음장처럼 차지? 꼭 귀신처럼. (언젠가 네가 돌아오면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한낱 꿈이다.)
 
이 연:…… 꼭 잡고 있으면 따뜻해지지 않을까. 난 몸에 열이 많은 편이니까, 잡고 있으면…… (남과 닿는 걸 좋아하지 않던 제가 천천히 타인과의 접촉에 익숙해질 수 있게끔 도와준 이가 바로 이화 당신이 아니었던가. 닿아오는 살갗의 온도는 도저히 산 자의 것이 아니나, 그렇다 해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다. 함께한 추억이 사라질 리도 없다.)
(딱 한 사람만의 체온이 금침을 덥힌다. 환한 웃음은 봄빛처럼 따뜻하기만 한데. 그 웃음을 보고 있을수록 숨이 괴로이 막혀오는 것 같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 번이라도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던 적 있었어?
 
배이화:(...꼭 잡고 있으면. 따스한 온기를 제가 다 빼앗아가는 것만 같아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찌 같아지자 할 수 있을까. 그건 안될 말이다. 가슴에는 여전히 연과 함께한 기억들이 사계절 피어나는 꽃처럼 매일을 다르게 피는데, 저만 메마른 겨울 가지처럼 시리다.)
(자그만 웃음이 힘없이 흐른다.) ......네가 떠난 후로 종종. ...아니, 꽤 자주. 꿈에 그쳤지만.
 
이 연:그럼, 내가 어떻게든 네가 나갈 수 있게 방법을 찾아볼게. (당신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마을은 고사하고 이 고택의 구조나 상황마저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말리라. 집념과 결의로는 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너를 이곳에 혼자 두고 싶지 않으니까.)
 
배이화:(너른 품에 안겨 숨을 고른다. 심장이 비슷한 박자로 맞아들어간다. 제자리를 찾아가듯 틈없이 끌어안는 온기는 영영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이 없던 지난 시간은 포기하고 체념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은 차게 식어 재만 날리는 심장에 다시금 풀무질한다. 그래, 어쩌면. 어쩌면-) ......정말 여전하구나, 연이 넌. ...내가 어찌 너를 말리겠어. 혼자서는 정말 나가지 않겠다는거지?
...따라갈게. 그러니 여기서 나가자. 더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릴 찾으러 올거야. ...그 전에 얼른.
 
이 연:(그제야 희미하게 미소한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부딪히고, 시도한다. 지금껏 그리 살아왔다. 게다가 특히나 이화에 관한 일이다. 술을 나눠 마시지 않았어도 이미 우리의 혼례는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반려를 포기하는 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응. 고마워.
미닫이문 쪽에 사람들이 있지 않아? 나가는 게 들키지 않을까?
 
배이화:(마주한 낯에는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기척이 사라졌어. 지금은 괜찮을거야. (금침 사이로 창호문을 내다 보고는 이불을 걷는다.)
 
이화는 바깥에 감시하는 눈이 사라진 것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침대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신방 한쪽에 세워진 병풍 뒤에서 연의 짐을 찾아 돌려줍니다.
 
배이화:옷 먼저 갈아입어. …혼례복은 나한테 줄래?
 
이 연:응. (병풍 뒤로 돌아가 어색하기만 한 혼례복을 벗고 본래 입고 있던 옷으로 환복한다. 이것도 의식의 일환인가? 붉은 옷을 의심스럽게 보다가 이화에게 건네주었다.)
 
배이화:(연의 표정에서 의아한 기색을 읽었는지 소리 없이 웃다가 받아든다.) 도망칠 때 이런 화려한 옷은 불편하기만 할 테니까. 게다가 눈에 띄잖아, 이런 붉은 색은.
 
혼례복을 받은 이화는 옷을 대신 베개에 씌우고 침대에 눕혀 그럴듯하게 모양을 잡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형편없는 위장이지만 멀리서 보면 속아 넘어갈 법도 합니다.
 
모양 잡는 걸 조금 도와줘 볼까요?
 
이 연:옷 자체가 이 혼례식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서. (이화가 저와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가 저의 간절함을 들어준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 곁에 다가가 제 짐에서 필요없는 천이나 물건을 몇 개 꺼내어 최대한 인형(人形)을 잡아본다.)
 
배이화:이곳의 것은 최대한 가져가지 않는 게 좋을테니까. (제 어설픈 분장이 제법 그럴듯하게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며 가만 웃는다.) ...이 정도면 되겠다. 충분해, 고마워.
참, 짐은 다 무사해? 받은대로 고이 숨겨두긴 했는데, 혹시 몰라서.
 
이 연:(모양을 잡아둔 뒤에 그제야 짐을 다시 살펴본다.) 애초에 갖고 온 게 별로 많지 않긴 했어. 그러고 보니 칼이랑 활 같은 무기들을 챙겨왔는데. (모두 있나?)
 
돌려받은 짐에는 소지품이 그대로 들어 있고, 곡예단원에게 받은 헝겊 주머니도 무사합니다.
 
칼과 활은...... 병풍 구석에서 이화가 마저 꺼내옵니다.
 
배이화:이것까지 있으면 다 있는거지?
 
이 연:응. (화살들까지 갯수에 맞게 잘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는 다시 짐을 어깨에 맸다.) 무기를 뺏기지 않아서 다행이야. 빠져나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방을 둘러보며 이화에게 맞잡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배이화:(내밀어진 손에서 올라와 다시금 낯을 마주하면 미소가 어린다. 손을 마주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를 나가면 복도 끝에 정원과 통하는 뒷문이 있어. 잘 따라와야 해.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화는 조용히 연의 손을 이끌어 신방 밖으로 나갑니다.
 
다들 신방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탓인지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복도에는 벽과 바닥, 천장 곳곳에 [부적]이 붙어 있고 탁자를 놓아둔 벽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띕니다.
 
이 연:(한 손으로는 이화의 손을 맞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언제든 칼을 뽑아들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히 걸음을 옮긴다. 저 부적들은 뭐지?)
 
따로 떼어서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덕지덕지 발라둔 곳은 쳐다보기만 해도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이 연: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배이화:......천지신명의 힘을 더 강하게 해주는 부적이야. 우리가 신방에 들어간 다음에 붙여뒀나 봐. ...들어갈 때는 분명 없었으니까.
...만지지 마. (잡은 손을 끌어당겨 다시 복도를 걸어간다.)
 
이 연:천지신명이란 게 너희가 믿는 이상한 신과 관련된 거야? (본래는 저리 불길한 존재를 칭하는 게 아닐 터인데.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 않도록 애쓰며 걷는다. 저 그림도 평범한 건 아니겠군.)
 
배이화:...응, 맞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어. ...이제는 다들 귀신이 되었지만. (미소가 흐려지며 걸음이 느려진다.)
 
복도 한쪽에 향로가 놓인 탁자와 그 위로 걸린 커다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은 이 산의 전경을 그린 산수화로 어른거리는 향로의 연기가 마치 산 속의 안개처럼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그저 평범해보이는 그림인데-
 
이 연: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1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모서리가 벽에서 살짝 떠 있습니다.
 
이 연:이화야. 저 그림도 만지면 안 돼?
 
배이화:...뭐가 이상해?
 
이 연:그림이 벽에 딱 붙어 있지 않아. 뒤에 뭔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배이화: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궁금하다면. (끄덕.)
 
이 연:조심할게. (최대한 그림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림을 벽에서 들어보았다.)
 
들춰보면 그림이 벽에서 떼어지면서 뒤에 가려져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겉의 산수화와는 다른, 기괴한 형상의 괴물이 우뚝 서 있고 그 발아래 피 흘리는 사람들이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린 사람의 한이 느껴지는 괴기한 아름다움에 눈앞이 아찔해집니다…….
 
SAN 1/1d3.
 
이 연:
SAN Roll
기준치: 52/26/10
굴림: 75
판정결과: 실패
1
(뭐지? 분명 역겹기만 하고, 제 기준으론 결코 아름답다 말할 수 없는 그림인데 기묘한 감각이 몸을 휩쓴다. 저도 모르게 눈가를 매만지며 뒤로 물러서다 중심을 살짝 잃고 비틀거린다.)
 
배이화:연아..! 괜찮아? (그림을 덮어두고 바로 안색을 살핀다.)
 
이 연:미안. 탈출에 도움될 만한 거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괜히 봤나 봐. (고개를 몇 번 내저으며 잔상을 털어낸다.) 저거…… 무슨 그림인지 알겠어?
 
배이화:아니야, 내가 확인해볼 걸 그랬어. ...더 조심해야겠다. 산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찬찬히 뺨을 쓸어주고는 그림을 잠시 번갈아본다.) 저기에 그려진 신이 사람들이 모시는 천지신명이야. ...그림 밑에 숨겨둔 줄은 몰랐어.
 
이 연: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되겠어. 그 신을 상징하는 게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니. (그림은 떠올리지 않고 눈앞의 이화에만 집중하려 애쓴다. 차차 정신이 또렷하게 되돌아온다.) 어서 나가자.
 
다시금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조심 복도를 지나는 중, 어디선가 쿵쿵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껏 발을 굴리며 걷는대도 저런 소리가 날 턱이 없는데.
 
이화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당황한 듯 연의 팔을 잡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열어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배이화:빨리 숨어, 빨리..-
 
얼마나 다급하게 떠밀었는지 두 사람이 겹치고 넘어져 등을 부딪쳐도
 
작은 신음이라도 흘릴세라 이화는 연의 입을 틀어막아 버립니다.
 
순식간에 시야는 어둠에 삼켜지고 터질 듯이 뛰는 심장 소리만 귀에 먹먹하게 울려옵니다.
 
문밖을 지나는 이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쪽에 누가 있으리란 것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붉은 천을 쓴 사람: 이화 그 녀석은 아직 신방인가? 안 봐도 뻔하군. 물러 터진 게 아직도 시간을 끌어.
 
붉은 옷을 입은 사람 : 새벽까진 좀 남았으니 급할 건 없잖나. 그리고 뭐, 못 죽인대도 어떤가. 그것들을 다 제물로 쓰면 그만이지.
 
한 마디 한 마디 들려올 때마다 연의 옷깃을 쥔 이화의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갑니다.
 
이죽거리는 웃음을 끝으로 다시 바깥이 조용해질 때까지 이화는 여전히 연을 세게 쥐고 있기만 합니다.
 
배이화:….........이제 간 것 같아. 미안해, 연아. 마음이 급해서. 다친 데는…? 아프진 않아? (고개를 내리면 겹쳐진 채로 닿을 듯 가까운 얼굴에 화들짝 놀란다.)
...미, 미안해. 무겁지. (옷깃을 쥔 채로 반쯤 일어난다.)
 
이 연:(바로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에 신경이 한껏 곤두섰다가,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틈없이 붙은 거리감을 알아차린다. 급한 움직임 탓에 빠르게 뛰던 심장 소리가 이제야 귀에 얽힌다.) …… 아까 금침 안에서도 이렇게 붙어 있었는데 새삼스레 뭘.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귀에 후끈 열이 오른다. 어두워서 다행이지.) 5년간 얼마나 험하게 굴러 다녔는데, 이쯤 아무렇지도 않아. 무겁지도 않고.
이화, 넌 괜찮아? (급하게 일어날 필요 없다는 듯 한 팔로 이화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다시 제 위로 끌고 온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의 체향이 아찔하다.)
 
배이화:.....그건, 그랬지. (...어두워서 다행이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던만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아무리 흉내라고는 해도 혼례복을 입은 신랑 신부의 차림으로 금침 안 숨었었다니. 낯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발자국도 목소리도 저 편으로 사라지고 나니 남은 건 제 심장이 벅차게 뛰는 소리 뿐이다.) 네가 튼튼하다는 건 좋지만, 험하게 굴렀다는 건 ...별로야. 네가 다치는 건 싫거든.
(긴장이 풀린 탓에 그대로 이끌려 천천히 고개를 묻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긴 숨에 그의 체향을 함께 들이쉰다.) ...이렇게 단단한데, 내가 다칠 틈이 어디 있어.
 
이 연:괜찮아. 업이 업이니만큼 많은 부상을 입기는 했었지만, 날 다치게 하는 건 있어도 아프게 하는 건 몇 없었고 난 고통에 굴하지 않으니까. (낮은 목소리가 울림을 남긴다.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뒤섞이니, 누구의 것이 더 크고 빨리 뛰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비록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고 있는 신세지만, 명색이나마 혼례라는 이름으로 묶이니 이화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가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몇 년 만에 만나는 당신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나 있어서……)
그러니 마지막까지 다칠 일 없게끔, 저들에게 붙잡혀 마을에 남는 일 없게끔 하고 싶어. (절대 홀로 두고 가지 않으리라. 저의 뜨거운 체온을 당신에게 넘겨주며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배이화:(그대로 눈을 내리 감으면 온통 어둠에 두 심장이 아니라, 하나의 심장만 남는다. 같은 박자와 속도로 뛰는 것이 둘이니 어떻게 하나가 아닐 수 있을까. 늘 제 몫은 해내던 아이는 어느새 다른 이의 몫까지 책임질 만큼 장성하여- 자신을 다 감싸고도 남는 온기에 기대어 잠시 모든 것을 잊는다. 죄책감도 후회도.... 지금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온기가 아니라, 그것만이 참으로 아쉽다.)
연이 넌 항상 내가 못 보는, 못 하는 것들을 늘 내어주는구나. 그때에도 지금도. (이렇게 붙어있으면, 나도 너를 닮아 미지근한 온기라도 내어줄 수 있게 될까. 겨우 미련이 남는 손을 옷깃에서 떨어트린다. 두 사람을 찾는 이가 없었다면 오늘 밤이 다 가기 전까지, 영영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그래, 너라면. 네가 말하는 거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거야. 넌 늘 해내고 마니까.
(희미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날렵한 턱선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킨다.)
 
이 연:마을을 떠나 이룬 건 나 홀로의 힘이지만, 그 전의 일들은 네가 날 도와주고 함께했기 때문에 해낼 수 있던 거야. (글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정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된 것도 전부.) 이후에 어려운 일이 닥쳐온다면 그때도 함께 헤쳐나가고 싶어. 곧 떠나게 될 곳이라도 여기 돌아왔으니까. 널 다시 만났으니까.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다, 턱에 와닿는 입맞춤에 놀라서 눈이 커진다. 꼭 꽃잎이 닿았다 떨어진 것 같다. 잠시 얼떨떨하게 제 턱을 매만지다가 이화를 따라 일어났다. 문을 아주 살짝 열고 사람이 없는지 다시 확인했다.)
 
바깥은 조용합니다.
 
구색일지언정 혼롓날에 걸맞게 곳곳에 등불을 놓아 환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있는 이 방만 유독 불빛이랄 만한 게 없어 몹시 어두운데,
 
별다른 가구도 없어 보이건만 안쪽에 커다란 무언가가 세워져 있는 게 흐릿한 형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이화 역시 같은 것을 보았는지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배이화:(퍼뜩 정신을 차린다.) ...여긴. …… 여긴 오래 있으면 안 돼.
 
이 연:(그러고 보니 지나치게 어둡다. 뭐가 있는지 묻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서둘러 이화를 붙잡고 문 밖으로 나선다.) 천지신명인지 뭔지에 관련된 게 또 있는 거야?
 
배이화:.........그게-
 
문 밖을 나서는 그때, 문득 무언가 발치에 치입니다.
 
왜 이런 곳에 떨어져 있는 걸까요?
 
이 연:(직접 손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나마 밝은 문 밖을 향해 발로 차 밀어내본다. 뭐지?)
 
연의 발에 치인 네모난 것이 빙그르, 복도로 굴러갑니다.
 
나무로 조각한 네모난 패입니다.
 
복도는 어두운 방보다 환해, 적힌 이름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 연:(누구의 이름이지? 확인해본다.)
 
'裏 鍊' 이 연.
 
너무나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름패를 보자 이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립니다.
 
이 연:……. (아까 지나가던 이들이 분명 제물이랬지. 나도 그 일환이라는 증거인가. 그닥 놀랍진 않다. 명패를 천천히 주워든다.)
 
배이화:(파리하게 질린 손으로 명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힘없이 떨어트린다.) ......미안해, 연아. 역시 나는 너와 행복하면 안돼.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이 연: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눈살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그들이 너더러 이걸 만들라고 했어? 아님 부숴야 한대?
 
배이화:(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젓지도 않고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방금 그들이 한 이야기 못 들었어? 너를 제물로 쓰려고 했어. ...연아, 내가 널 죽이려고 했던거야. 나와 내 오라버니 대신 너를 제물로 바치려고. 그런 내가 어찌 너와 함께 도망가. 이 큰 잘못을 어떻게 숨기고 살아.
여기 귀신들이 천지신명에게 바칠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어. 오늘 밤에 네가 이 길을 지나갈 테니, 나더러 널 죽이라고…… 그러지 않으면 나와 내 오라버니를 대신 바칠 거라면서. ...연아, 내가 제물로 바쳐지는 건 무섭지 않아. 두렵지도 않고. 그런데 차마, 내게 겨우 하나 남은 가족을 저버릴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막상 네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라. ...처음부터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
 
이 연:(이화가 이야기하는 내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여린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화를 내지도 놀라거나 상처받지도 않은 채 평소와 같은 낮은 목소리로 단 하나만 물었다.) 이화, 그럼 넌 아직 완전한 귀신이 되지 않은 거야?
 
배이화:(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 도망가주면, 떠나서 살아만 준다면 그러면 되었는데.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것이라 절로 고개가 들린다. 참담하게 무너진 낯에 눈에 어린 것이 뺨을 타고 굴러 떨어진다.) .........연아.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밉지도 않아?
 
이 연:내가 묻고 싶은 건 단 하나야. 네가 이전처럼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지. (굳건하나 차갑지는 않은 낯으로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이화의 젖어든 눈가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닦아낸다.)
 
배이화:(...너는, 너는 어째서 그래. 숨마저 울음에 잡아 먹힐 것 같아 한마디를 꺼내는 데에도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눈을 내리감은 채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가.) ......잘, 잘 모르겠어. 이 곳에서는 믿음을 거부하는 이들은 모조리 제물로 바쳐. 나도 그런 그런 흐름에서 도망치지 못했고...... 내 영혼도 바쳐진 다른 이들처럼 묶이게 되었으니까.
......난 벗어나는 방법을 몰라.
 
이 연:널 원망하지 않아, 이화야. 오히려 잘했어.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날 길을 찾아야지. (항상 상냥하고 착해서 남을 위하던 이화였다. 이번에도 자신보다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저를 끌어들였을 그 심정을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도 잘 알아. 나라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했을 거야. (게다가 그는 사냥꾼이었다. 목숨이 턱끝까지 몰리는 위급한 상황을 몇 번이고 겪어봤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험한 일을 하며 발버둥친 적도 숱하게 많았다. 그러니 어찌 화를 내고, 어찌 원망하겠는가?)
그럼 그 방법을 찾자. 다 뒤져보면 어딘가에는 단서가 있겠지.
 
배이화:......넌 어떻게 그래. 차라리 나를 원망한다고 하지, 평생을 네게 용서를 빌면서 살 수 있게. (느리게 시선을 마주한다. 너는 이런 때에도 나를 먼저 생각하는구나. ...그토록 그리워한 얼굴을 5년 만에 마주했을 때,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산을 넘어오는 이가 너만은 아니기를, 몇 번을 빌었는데.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서는.)
......연아, 이곳에 오래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들킬거야. 그럼 너도 도망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 연:용서 같은 거 빌 필요 없어.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 말 네 입에서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아. 괴상한 신한테 믿음을 바친 인간들이 문제지. (이화에게는 그저 고요하고 침착하기만 했던 목소리에서 귀신들을 향한 경멸이 묻어나온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여기 갇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너도 날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을 거잖아. 틀려?
 
배이화:(고저없이 나직하게 울리는 연의 목소리를 듣다가 느리게 끄덕인다. 꼭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하리라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으니까.) ...그럴거야. 분명히.
 
이 연:가능성이 있는 한 나도 포기하지 않아. 그뿐이야. (다시 한 번 당신의 눈가를 닦아준다.) 그러니, 너도 너를 버리지 마.
 
배이화:...내가, (내가 그래도 되는걸까? 다른 것들을 저버리고, 너 하나만을 보고, 이번만큼은 내 마음에 따라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도 되는걸까? 이리도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걸까. 너의 손길은, 말은, 눈빛은 언제나 길을 만들고 이끌어간다. 그 앞은 언제나 눈이 부셔서-... 손길에 기대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떠올린다.)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줘, 연아.
 
이 연:(희미하게 미소하며 당신의 뺨을 감싼다.) 얼마든지.
(그는 항상 이화가 이기적으로 굴기를 바랐다. 남을 위하고, 남을 생각하여 자신을 깎아내는 대신 저 스스로를 돌아봐주었으면 하고. 어릴 적 항상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그 빚을 갚을 차례다.)
 
배이화:.........응. (고마워, 입모양으로 나직하게 뱉어본다. 다시 한번 온기에 기대어 희미한 희망을 그리면서. 너의 체온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을 나누어주며 다시 살아가고 싶다고 그렇게 소망해본다. 너와 함께라면 다시금 행복을 그릴 수 있을거라.)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다시금 손을 맞잡습니다.
 
복도 끝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문 앞까지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함께 하겠다, 약속한 마음만 발자국을 따라 울립니다.
 
이화가 문을 열자 바깥으로 언제부터 다시 비가 내렸는지 축축하게 젖은 정원이 보입니다.
 
그제야 이화는 목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속삭입니다.
 
배이화:......밖에 비가 내려서 몰래 담을 넘으면 아무도 모를 거야. …만약 내가 이대로 신방으로 돌아가서 너와 함께 있는 척을 하면, 그러면. 산에서 무사히 내려갈 시간까지도 벌 수 있을텐데. (하지만 넌 그러지 않겠지? 눈빛으로 묻는다. 어느새 밤안개처럼 뽀얗게 피어오른 웃음으로 돌아보면서.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니까. 저는 몇 번이고 손을 놓았지만, 몇 번이고 망설이지 않고 다시 제 손을 잡아준 '연'이니까.)
 
이화가 가리킨 담은 야트막한 높이라 충분히 넘고도 남겠습니다.
 
게다가 신방에서 이목을 끌어준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는 있겠죠.
 
위험을 무릅쓰지만 않는다면.
 
이 연:이미 이불 안에 사람이 있는 척 열심히 꾸미고 왔잖아. 우리의 그 노력을 헛되게 할 순 없지. (언뜻 장난기가 읽힌다. 마주 입가에 어리는 미소는 별빛처럼 옅으나 담긴 뜻은 확실하다. 당신이 결코 의심하거나 불안해할 일 없도록. 우리의 연은 이미 맺어졌으니 끊기지 않도록 끝까지 붙잡을 것이다.)
(정원으로 발을 딛기 전 멈춰선다.) 이화, 잠시만. (어깨에 맨 짐을 내리고, 그 안에서 헝겊 주머니를 꺼낸다. 곡예단원이 건네준 풀이 든 주머니다. 무언가를 먹게 되었을 때 쓰라고 했었지. 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이화는 제 술을 대신 받아마셨었다.) 나가기 전에 이걸 삼켜.
 
배이화:응. (희미한 웃음은 마주한 이를 닮아, 어느새 비구름 사이로 언뜻 얼굴을 내비친 달을 닮아 선명하고 환하게 이지러진다. 연, 그 앞에서만 떠오르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읽던 책을 내려놓고 뒷 산으로 산책을 가던 때의 가벼운 걸음으로 곁에 선다. 상황도, 나이도, 장소도 무엇 하나 같은 것은 없지만 너와 나. 그것만은 여전하다.)
...풀이네. (고개를 기울이기도 잠시. 난생 처음 보는 풀인데도 망설임 없이 받아 입에 넣고 씹는다. 이를 건넨 것이 연이라서, 언제고 자신을 먼저 위하며, 먼저 염려하는 연이니까. 그라면, 정말 제게 독을 내밀더라도 선뜻 받아 마실 수 있으니까.)
(다 삼키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서 난 풀이야?
 
이 연:(먹고 나서야 물어보다니. 헛웃음이 난다.) 너도 참 너다…… (그렇지만 그만큼 이화가 저를 믿고 있다는 의미기도 할 터다.) 여기 오기 전에 어떤 곡예단원을 만났는데, 여기에서 뭔가를 먹었다면 이 풀을 씹어 삼키라고 하더라. 원래는 처음 본 사람 말은 안 믿는데 그 사람은 어쩐지 사람 같지 않고 기묘한 존재 같아서……. 조금이라도 네게 도움이 되는 걸지도 모르니까.
뭔가 다른 느낌이 나? 속이 안 좋다던가, 체온이 돌아온다던가…….
 
배이화:...이 근처에서 곡예단원을? 길이 험해지고 산짐승이 많이 다녀서 다니는 사람이 드물텐데. (기울어진 고개가 돌아온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 산에서는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풀이긴 했어. 달고 푸릇한 맛이 나. 다른 건... 잘 모르겠어.
 
이 연: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눈 깜박하는 사이에 사라졌거든. 내려가는 길을 알려줬었는데, 비록 비 때문에 넘어진 나무에 가로막혀 있긴 했어도 맞는 길이었어.
너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나지막하게 말하곤 먼저 정원 아래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린다. 안기라는 듯이.) 이제 가자.
 
배이화:...은인같은 분이네. 어쩌면 신선일지도 몰라. (입가를 닦아내고는 장난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분명 그럴거야. 오늘은 꿈만 같은 날이니까. 뭐든 이뤄질지도 몰라. (그럼 좋겠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두 팔을 마주 벌려 꼭 안긴다.)
응, 가자.
 
이 연:(이화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끔 가뿐하게 안아들고 걸음을 옮긴다. 날래게 담을 뛰어넘는다. 이제는 언제까지나 함께일 것이다.) 앞으로도 네가 바라는 일은 모두 이뤄질 수 있도록 내가 힘낼게.
 
배이화:(연의 가뿐한 걸음 만큼이나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맞잡는다.) 응, 너만 있으면 돼. 연아.
 
이화를 안은 채 담을 넘고 뛰어내립니다.
 
비가 내리는 산속,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은 혼롓날 밤이었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일어났으니, 이루어지지 않을 일마저 이루어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손을 맞잡고 미래를 약속하는 걸음을 때려던 때.
 
도망자를 알아차린 귀신들이 두사람을 쫓아오기 시작합니다.
 
붉은 천을 쓴 귀신? : 도망자다! 제물들이 달아난다!
 
붉은 옷을 입은 귀신? : 쫓아라! 어느 쪽이든 잡히기만 하면 심장에 칼을 꽂고 제단에 바치리라!
 
붙잡은 손 하나에 의지해 도망치는 길은 몹시도 험난합니다.
 
바닥에 깔린 젖은 나뭇잎에 자꾸만 발이 미끄러지고,
 
그때마다 차가운 손을 꽉 쥔 손에도 힘이 풀리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내내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두고 온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에는 신물이 나서,
 
이제 더는 혼자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간절히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맺어진 연이 끊기지 않도록 끝까지 붙잡으리라 다짐하지 않았나요.
 
그러니 필사적으로 뛸 수밖에요.
 
고택에서 멀어질수록 이화의 숨소리는 점점 커지고 맞잡은 손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연의 이름을 부르는 이화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처음 맞닥뜨렸던 갈림길이 다시 눈앞에 보입니다.
 
이 연:(싸늘하기만 하던 몸에 체온이 돌아오고 있다. 그 사실에 환희하면서 서둘러 매듭지어진 나뭇가지를 찾는다.)
 
연의 시야 끝에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매듭이 들어옵니다.
 
배이화:이쪽이야..! ...계속 뛰어야 해, 연아.
 
이화는 내려가는 쪽, 매듭이 흔들리는 길로 연의 등을 떠밉니다.
 
뒤에서 따라오는 이화만을 의지하며 뛰어 내려온 길의 끝.
 
엉망진창의 몰골로 산에서 내려와 닿은 곳은 당신의 옛 고향.
 
마을 어귀를 지키는 익숙한 비석에 적힌 마을의 이름은, 연리입니다.
 
아, 둥근 비석의 머리 맡으로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집집마다 모두 비어 황량한 폐허가 되어버린 고향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섭니다.
 
배이화:......고향, 이네. 돌아왔어. ...우리가.
 
이 연:완전히 폐허가 돼 버렸네. 이런 모습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허탈하게 마을을 둘러보았다. 저 나무 앞에서 자주 햇빛을 피했었지. 저 집 근처에서는 방물장수가 와서 자주 구경을 나갔었는데. 과거의 정경이 똑같이 남아있을 거라 여기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모두 황량해졌을 줄은 몰랐다.)
……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이화, 네 손이 따뜻해.
 
배이화:(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지난 세월에 스러져가는 마을을 돌아본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길, 그 어머니들이 광주리를 이고 가던 물가, 소담히 꽃 피어나던 담장도. 주인없이 비어있다. ...언젠가 이곳도 되돌릴 수 있을까. 단 하나, 이 곳에 변하지 않은 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손을 뻗어 찬 밤바람을 헤친 뺨을 쓸어 내린다. 너의 온기를 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이리 반가운지.)
...네 덕분이야, 연아. 다 네 덕이야. (흐릿한 희망이 형상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
 
이 연:(그 모든 추억에 이화가 함께 있었다. 연은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인 이는 아니었으나, 다시 한 번 이화와 보낼 시간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폐허를 일구고 가꿀 수 있었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가 천천히 이화를 끌어안았다.) 네 몸을 추스르고 채비를 한 뒤에 네 오라비도 구해 오자.
 
배이화:(빈틈없이 가득 끌어안으며 서늘한 새벽 공기에 젖은 그의 체향을 들이마신다. 그 끝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오는 것 같다. 이제 막 피어난 꽃송이가. ...살았으니, 또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 ...응, 그 애만 혼자 둘 수 없으니까. 돌아가서 구해오자.
...고마워, 고마워. 연아. 언제고 날 잡아줘서.
 
이 연:네가 나를 의지해줬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거야. (저 또한 당신에게 기대어왔고 말이다. 쑥스러움 탓에 차마 입밖으로는 내지 못하겠지만.)
(꽃송이가 발부리에 짓밟히고 이파리가 바람에 뜯겨 날아가도 뿌리가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다시 빛을 받고 물을 마셔 고개를 든다. 새 잎을 피우고 새 봉오리를 틔운다. 우리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늘한 새벽에 맞닿은 온기만이 따스합니다.
 
그리워했던 고향은 기억과는 사뭇 달라져 있습니다.
 
하나, 흰 새벽빛 아래에서 본 이화의 얼굴은 언젠가 떠올렸던 그대로 입니다.
 
일부러 생각을 피해보아도 결국 떠오르고 마는,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새하얀 배꽃을 닮은 얼굴.
 
보고 있어도,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
 
“거기 두 사람 다 산에서 내려온 거요?”
 
“신혼부부인가? 그런데 꼴이 꼭 산에서 귀신이라도 만난 것 같네. 쫓기다 내려온 것 같잖아! 무사한 걸 보니 운이 좋았군.”
 
“가만, 이쪽은 옛날에 산 아랫마을에 살던 그 이들 아닌가?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죄 사라졌다던데, 이 이만 무사했던가 봐.”
 
“얼른 들어가 보시구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 텅 비어서 기분이 싱숭생숭하겠지마는.”
 
“그래도 돌아온 게 어디야. 안 그런가?”
 
 
연리지처럼 얽인 인연이, 하나 된 연인이 되어 여기까지 닿았습니다.
 
엔딩 C. 歸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