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너는 어엿한 어른이 되었겠지. 그 시간 동안 힘든 일이 없었기를 바라. 옆에서 힘이 되어주지 못해 아쉽기도 해.
안녕, 우리가 다니던 학교와 살던 마을이 전부 철거 예정이래. 모든 게 부서지기 전에 날 찾으러 와.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많이 보고 싶었어.
아라가.
닳도록 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게 이름인데, 그 이름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니까요.
5년 전, 졸업식 바로 전날 아라는 죽었습니다.
이별은 한순간이고 인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류예성:(편지를 받은 그 순간부터, 그리고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향하는 지금까지, 나는 꼭 맨몸으로 우주를 유영하는 비행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5년 전, 졸업식 바로 전날, 선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과 꼭 닮아있는 듯하다. 내가 이제 막 졸업하여 더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학생일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부고 또한 그랬다. 죽었다는 게 사실같지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울지도 않았던 것 같다. 선배가 봤으면 좀 서운해했으려나, 나름 아끼던 후배가 슬퍼하지도 않는 걸 봤더라면. 그렇지만 그 덕에 편지를 받았을 때 발신인이 내가 아는 그 아라 선배라는 걸,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봐 줘요. 물론... 나의 가장 큰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이성은 이런 수상한 편지 따위 믿지 말라고 했지만, 가끔은... 그래, 아주 가끔씩은...)
이럴 때만큼은 당신의 냉철한 이성을 내려둬도 괜찮을 거예요.
그리 자기합리화를 하며 당신은 편지가 이끄는 대로 기차에 올랐습니다.
류예성: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88 |
판정결과: |
실패 |
주소 하나 없이 갑자기 예성의 집 앞에 떨어진 편지.
기차는 잡념 하나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립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 편지를 따르고 있는 건가요?
그곳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편지의 주인까지도.
속은 셈 치고 가는 동네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일 겁니다. 재개발 후에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되어 있겠죠.
류예성:(내 기억 속 그곳은 5년 전 그대로다. 학교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으며, 친구들과 함께 등하교하던 길은 보도블록이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으며 강인함을 자랑하는 풀떼기들이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는 곳이다. 아라 선배도, 나도 아직 학생인 채 남아있다. 어른이 된 나는 그곳을 떠나왔지만, 열아홉 살의 나는 선배와 함께, 아직 그곳에 있다.
그래서 오늘, 그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함께 떠나오지 못한 나와 선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완벽하게 철거된 다음에는 떠나보내 줄 수도 없으니까. 죽음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5년이나 지났으면 나도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겠죠. ... 그렇지만 여전히 힘들다.)
떠드는 사람 없는 한적한 기차. 산길과 바닷길을 달려 창문의 풍경이 휙휙 달라집니다.
너른 햇살에 천천히 눈이 감겨요. 수마에 사로잡힙니다.
어차피 예성이 도착할 곳은 종점, 졸음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끔뻑, 그리운 목소리에 눈이 천천히 떠집니다.
비몽사몽 정신을 간신히 일깨우면 교실을 채운 학생들이 보입니다.
모두 교복 위로 사복을 덧대어 입고 있습니다.
류예성:
정신
기준치: |
75/37/15 |
굴림: |
96 |
판정결과: |
실패 |
상황파악을 하는 것도 잠시, 종종 꾸던 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마지막 겨울. 졸업식과 봄의 시작을 기다리던 12월의 그 날.
동네로 가던 길 마음이 뒤숭숭했을까요, 이런 꿈을 꾸다니.
눈앞의 아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자를 돌려 당신을 마주 봅니다.
배아라:자다 깬 것 같은데... 악몽이라도 꿨어? 표정이 안 좋아. (걱정스럽게 당신을 바라보는 눈길은 평소처럼 상냥함이 배어 있다.)
류예성:(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꿈같은 당신에게, 꿈같은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한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막 눈을 뜬 참이라 정신이 없나봐요.
배아라:그래? 아니면 다행이야. 답지 않게 자고 있어서 좀 놀랐네... 간밤에 늦게 잤어~? (안심했는지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다.)
류예성:아뇨, 그런 건 아닌데... 좀 피곤해서요. 저도 사람인데, 피곤할 때가 있잖아요? (종종 선배의 꿈을 꾸긴 했는데, 꿈이든 현실이든... 예전에는 무슨 대화를 했었지?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아 어깨와 목을 빙빙 돌려 스트레칭만 해 댄다.)
배아라:그건 그래. 피로회복제라도 줄까...? 수능 준비하면서 왕창 사둔 게 몇 개 남았거든.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사이 ‘졸업’, ‘겨울 방학’, ‘대학’, ‘폐교’라는 말이 간간이 들립니다.
그중 가장 들뜨게 토론 중인 주제는 폐교입니다.
기억해 보면 이맘때 즈음부터 학생 수도, 동네 주민 수도 빠르게 줄었던 것 같아요.
류예성:(반 친구들이 우스개소리로 대학을 폐교 전형으로도 갈 수 있느냐는 소리를 해 대던 게 기억난다. 나는... 그래도 우리까지는 졸업이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쪽이었다. 옛날 기억을 떠올려 보니 재밌네.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어요? 대체 얼마나 산 거야... 하나 주세요. 선배는 이러다 졸업식 날 꽃대신 피로회복제 나눠주게 생겼네요.
배아라:수능이 얼마 안 남았을 땐 너무 긴장이 돼서... 조금이라도 더 봐야겠다는 생각에 잠도 거의 안 자고 열심히 했었지. 그때 하나 둘 사모으던 게 어쩌다 이렇게 많아졌네. (웃으면서 사물함으로 걸어가 회복제를 하나 꺼내준다.) 그... 그래도 졸업식 땐 제대로 된 꽃 사야지.
말 나온 김에, 마저 정할까? 졸업식 때 서로 무슨 꽃을 주고받을지.
무슨 말인지 되새기면 문득, 우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 하나가 떠오릅니다.
‘졸업식 전날, 서로를 위한 꽃다발을 주고받자.’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의 졸업을 축하해주자는 의미였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예성이 건넬 수 있던 꽃은 희고 흰 국화꽃 한 송이가 전부였습니다.
류예성:...... 전 뭐든 좋아요. 음, 그래도 졸업식이니까 축하나 기원을 담은 꽃이면 좋겠는데... (휴대폰을 꺼내 '꽃말 모음', '축하용 꽃' 등을 검색한다.) ... 아, 프리지아의 꽃말은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래요. 매쉬 메리골드라는 꽃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고, 음... 포인세티아는... '뜨거운 마음으로 축하한다' 라는데, 마침 겨울이니 이것도 좋겠네요. 선배는 어떤 게 좋으세요?
배아라:그러면 나는... 하얀 카멜리아? (같이 검색한다. 화면 두드리는 소리 토도독...) 예성이 네 머리가 하얀색에 가깝잖아. 졸업식이니까 너를 닮은 상징을 지닌 꽃을 주고 싶어서. 꽃말도 좋아. 존경, 감탄, 순수...
내가 받고 싶은 것도... 들어보니까 다 하나같이 뜻이 좋아서 고민되는걸. (곰곰) 매쉬 메리골드의 꽃말이 가장 마음에 들기는 해. 색도 금빛이라 예쁘기도 하구. 또 검색해봤는데 이달의 행운 색이 금색이랬거든.
류예성:그래요? 그럼 그걸로 살게요. 행운의 색은 금색이고, 제 머리색은 은색이라 반대되는 게 꼭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느낌을 줘서 좋지 않아요?
배아라: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 (눈이 반짝인다) 너무 멋지다...! 금색과 은색의 대비도 너무 예쁠 것 같아. 졸업식 때 꽃다발 주고받고서 꼭 같이 사진 찍어줘. 응?
류예성:당연하죠. 같이 졸업장 들고 하나, 꽃만 들고 하나, 둘 다 들고 하나, 적어도 세 장은 찍어야죠. 저랑 제일 먼저 사진 찍어야 해요?
배아라:응! 물론이지...! (웃는 모습이 마냥 천진하고 밝다. 고된 학교 생활을 끝마치고 성인으로서 나아가게 될 설레임과 순수함이 섞인다.)
천진하게 웃는 아라는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당연하죠, 우리의 기억은 그때에 멈춰있으니까.
“야, 졸업식 때 우리 집에 올 사람? 졸업하면 보기 힘들 거잖아.”
한 무리가 예성과 아라에게 다가오며 친근히 묻습니다.
이 역시 익숙한 얼굴이에요. 아라가 죽었던 날, 저 환하게 웃는 얼굴에선 상상도 못 할 표정을 지었던 친구입니다.
우린 친구의 집이 아닌 울음소리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졸업식을 마무리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배아라:나도 괜찮다면 갈게. 예성아, 너는? 너도 올 거야?
류예성:(예전에는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난다. 그렇지만 아마도,) 네, 갈게요. 이젠 기회도 거의 없을 거잖아요. (라고... 대답했겠지. 그러고보니, 실제로는 같이 놀지 못했었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배아라:...아, 예성아. 나중에 학교 마치면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 시끄러운 교실 속, 문득 아라가 예성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입을 떼려던 찰나, 부드럽지만 아무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려 퍼집니다.
시야가 흔들리고, 또 흐릿해집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해요.
마지막으로 본 아라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습니다.
류예성:(눈을 깜빡거리며 기차 안의 풍경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아... 꿈을 꾸고 있었지. 마저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의, 점점 더 익숙해보이는 것들을 바라본다. 곧 내려야겠군.)
몇 없는 승객들도 짐을 챙겨 하나둘씩 자리를 뜹니다. 예성도 내려 볼까요.
류예성:(얼마 안 되는 짐을 빠르게 챙겨 역에 발을 디딘다. 닫자마자 몰려오는 향수에 괜히 잠시 멈춰서 바람을 느껴본다.)
마지막으로 이 동네를 떠날 때도, 이삿짐까지 모조리 옮긴 후에도 지나왔던 역입니다.
류예성: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3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배아라:예성아, 여기 역 이름이 왜 햇귀인 줄 알아? 왜냐면...
드문드문 아라와 나눴던 대화가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재생됩니다.
괜히 고개를 올려 역을 보면, 다 녹슨 판에 적힌 ‘햇귀역’이 보입니다.
류예성:
언어(모국어)
기준치: |
80/40/16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햇귀... 그 뜻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도 같은데.
언어(모국어)
기준치: |
80/40/16 |
굴림: |
6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햇귀란, 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바라고, 무얼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어느 누군가의 지독한 장난일지도 모르겠다고, 한 줌의 이성이 그리 말하지는 않나요.
흰 입김이 퍼집니다. 쌀쌀한 날씨에 편지를 잡은 손이 시려 와요.
류예성:(지금까지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믿어왔지 않나. 그러니 이 편지가 장난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리움이 이성을 이긴 지금, 평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겨울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 내용을 외워버리다시피 한 편지를 잠시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품에 넣는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재촉한다.)
철거 전 마지막으로 동네를 둘러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떤 모습으로 사라질지 마지막으로 지켜볼까요.
더듬더듬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발걸음을 옮깁니다.
역을 지나 인도를 따라 걸으면 굴착기나 큰 트럭, 그 외 철거 작업을 위해 모인 사람과 장비들이 보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예성을 힐끗 보더니, 잠시 손을 들고 소리칩니다.
인부:두고 오신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철거 중인 곳엔 어쩌다.
류예성:예전에 여기 살던 사람입니다. 곧 철거된다기에... 마지막으로 둘러보려고요. 혹시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건가요?
인부:오전이야 준비 중이라 상관없지만. 오후부터는 마을 전체를 걸쳐 철거 작업을 시작합니다. 밤에는 작업도 쉬고, 마을 전체를 닫아두니 해가 지기 전에 나와주세요. 위험하니까 철거 중인 곳 주변에도 오지 마시고요.
류예성:(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생각보다 일정이 촉박해지겠는데...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을로 들어간다.)
해가 지면 모든 작업이 멈춘다고 합니다. 어둠은 늘 위험하니까요.
겨울의 이른 밤이 되기 전에 금방 둘러보고 가야 할 듯하네요.
너무 오래 추억에 잠겨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조금 더 걸어가면 기찻길과 신호등이 놓인 길이 보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이 기찻길을 건너가는 것이 하나의 놀이였고,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죠.
그때보다 더 커버린 발을 옮기려 할 때면, 길 너머 전봇대 아래…
예성이 잘 알고 있는 복장의 누군가가 보입니다.
류예성: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6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익숙한 교복, 그리고 익숙한 연보랏빛 단발머리.
언뜻 돌아본 그 옆선마저도 완전히 닮아있어요.
류예성:... 선배? (혹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내리기 직전에 깨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다시 잠든 것이었던 걸까...?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발을 떼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한 채 주춤거리다 용기내어 목소리를 높여본다.) 저기요!! 선배, 맞아요?
예성이 목소리를 높여 아라를 부르는 그 순간, 기차가 들어온다는 경보음이 울립니다.
안전대가 내려가면 기찻길은 걸어갈 수 없게 막힙니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가고, 눈앞의 거리에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기차에서부터 무언가 꿈을 꾸듯 감각이 떨어집니다.
류예성:(... 눈을 감고 떠다니는 기분이다. 내가 방금 소리를 낸 건 맞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도, 눈 앞의 형상도, 방금 그 기차와 함께 흩날려 사라졌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걷는다. 아까 당신이 걸어가던 거리를 향해서.)
다시 기찻길을 건너자 자주 걷던 길이 보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검은 선들이 늘어진 하늘, 낡은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음식점, 문방구와 학교로 가는 골목길…
아니, 모두 하나같이 낡고 어딘가 부서져 있습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거리에는 단 한 명, 예성만이 숨을 쉬고 있어요.
푸른 하늘 아래 건물들은 흰 입김과 겨울이 스며 더욱 해묵어 보입니다.
류예성:
듣기
기준치: |
65/32/13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조용한 거리에서,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류예성:(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홱 돌린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보이지 않는데... 다 무너져내린 것들 사이로 당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쓴다. 눈동자의 방황과 몸의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 꿈이야, 아니면 내가 미친 거야?
이 목소리는 어쩐지 앳된, 어쩐지 여리고 가는, 그리고 옅은 웃음이 부서지듯 숨어있는...
류예성:
SAN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5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목소리는 학교로 가는 골목길에서 울려 퍼집니다.
여린 울림을 거듭해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히 당신이 아는 아라입니다.
… 분명 꿈에선 깨어났을 텐데도, 아직 꿈결에 있는 듯합니다.
류예성:(꿈이어도, 현실이어도... 깨어나야 한다는 뜻일까, 이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골목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별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멍하니 그곳으로 향한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구름을 걷는 듯 몽롱하게 발걸음을 옮기면 담쟁이 넝쿨이 가득한 담벼락이 보입니다.
이 길은 학교 뒷문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죠.
수업이 끝나고 어디론가 급히 움직이던 아이들이 떠오릅니다.
목소리는 학교 쪽에서 들리나 싶더니, 어느 순간 끊겨 사라지고 없습니다.
역시, 그건 어느 환청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류예성:
언어(모국어)
기준치: |
80/40/16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담쟁이 넝쿨이 뒤덮인 담벼락. 수많은 필체의 낙서들이 보입니다.
분명 이 어딘가에 아라와 예성도 글을 새겼던 것 같은데…
기억을 따라 더듬거려 보면 울퉁불퉁한 벽에 손이 조금 쓰라려옵니다.
그리고, 유언처럼 남긴 이의 필체와 글이 보입니다.
‘졸업 후, 예성, 아라, oo, oo은 여행을 갈 것. 어길 시 벌금 100만 원.’
그때 우리가 그린 미래에는 두 사람 모두가 있었겠죠.
손끝에 닿는 문장 역시 곧 철거되어 사라지겠죠.
류예성:... 이런 약속도 했었나, (담벼락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휴대폰을 꺼내 찰칵, 그 흔적을 찍는다. 이러면 없어져도 기억할 수 있으니까...)
… 사진으로 남겨두었으니, 이만 잡념을 지우고 학교로 갑시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고, 둘러 보아야 할 곳은 많으니까요.
계속 앞으로, 앞으로 움직입시다. 과거에 멈추지 말고요.
류예성:(학교에 도착하면, 아까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까? 일말의 기대를 품고 나아간다.)
그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예성이 3년을 보냈던 학교가 보입니다.
예성이 졸업한 후 바로 폐교가 되었다고 했었죠.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운동장의 잔디는 무성히 자라 풀밭이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는 학교는 숨이 꺼진 듯 고요합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실내로 들어가면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류예성:(고요한 학교에 제 발걸음 소리만 뚜벅뚜벅 울리는 걸 듣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다보면 어느새 3층에 도착한다. 졸업식 날, 교실의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려고 하는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었던 걸까.)
오래된 복도는 삐걱삐걱, 낡은 소리를 냅니다.
교무실, 미술실, 음악실… 천천히 지나가는 교실 속은 엉망입니다.
류예성: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5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런데 이상하게도… 3층으로 향하는 그 계단, 먼지가 쌓인 그 계단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있습니다.
최근에 방문한 걸까요? 발자국 위로 쌓인 먼지가 없습니다.
발자국은 예성이 쓰던 교실을 향해 이어져 있습니다.
류예성:설마...... (혹시나 하는 기대감 절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감각 절반이 다투는 사이 발걸음은 먼저 그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다. 아, 교실 문 앞이다. 이 문을 열면......)
어색할 정도로 조용한 그 복도를 지나자 예성이 쓰던 교실 문이 보입니다.
이 문을 열면 당신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당신을 반겨줄까요?
류예성:(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떨리는 손으로 뻑뻑한 문을 덜컹, 소리가 나게 연다.)
드르륵, 떨리는 손으로 낡은 문을 열면 마지막 기억 그대로의 교실이 늦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낡고 엉망인 이 학교 속, 먼지마저 흩날리지 않는 이 교실은 유독 멀쩡하고 정갈해요.
다만 질서 있게 정돈된 책상과 창문에 달린 조금 바랜 커튼에서는 누군가 치운 듯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낙서가 지워지지 않은 [칠판], 줄을 지은 [책상], 교실 뒤편의 [사물함]이 보입니다.
류예성:(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하는 마음을 대체 뭘 기대한 거냐며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이 내리 누른다. 하지만... 죽은 선배가 여기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한 것 만큼이나 지나치게 멀쩡한 교실의 상태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 앞문을 열린 채 내버려두고 칠판을 향해 걸어간다.)
나중에 커서도 연락하자, 성공해서 만나자, 분식점으로 5년 후에 집합…
그 사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글이 보입니다.
졸업식 전날, 마지막으로 교실을 쓰며 다 함께 적었던 그 낙서.
그러니까, 저 낙서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졸업 날의 인사입니다.
왜 지키지 못한 말들은 늘 무겁고 다정한가요.
류예성:(갈 곳 잃은 말들이 사라지지도 못하고 칠판에 새겨져 있는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분명 나도 이쪽... 어딘가에 한 마디 남겼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하얀 분필로 간결하게 써 놓은 흔적을 찾는다. '다들 졸업 축하해. 잘 지내고, 웃으며 다시 만나자.' 열아홉의 류예성이 남긴 '다시 만나자'는 말은 스물 넷의 류예성이 지킨 셈이 되었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이곳을 다시 찾아온 사람이 나 말고도 있을까.
칠판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칠판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다가가서, 5년 전의 내가 남겼던 인사를 왼 손으로 슥슥 지운다. 다른 친구들이 남긴 인사는 내 것이 아니라 지우지 못해도, 너는 내가 남긴 말이니까. 나는 잘 지냈어. 그러니 너도 잘 가.
짧은 인사를 마치고 손에 묻은 분을 탈탈 털어낸 다음 학생이 있을 때는 결코 똑바로 줄이 세워지지 않는,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질서있는 책상들 사이를 걷는다.)
널브러진 다른 교실의 책상들과 다르게 이 교실의 책상만은 줄을 지어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예성의 자리로 가면 익숙하고도 사뭇 달라 보이는, 쇠에 녹이 잔뜩 생긴 책상과 의자가 보입니다.
류예성: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6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창가 자리면 바람 들어와서 춥지는 않겠어? 담요 필요하면 말해. 내 거 빌려줄게.'
그렇게 말하는 아라도 예성의 바로 앞자리였지만요.
아라는 추위를 잘 타지 않아서, 그의 담요는 그보다는 친구들에게 더 많이 가 있었습니다.
류예성:(안 추운데 담요를 왜 들고 와요? 언젠가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춥다며 선배 담요를 빌려가놓고 고맙다며 음료수 하나 건네주지는 못할 망정, 잔뜩 꼬질꼬질해진 걸 며칠 뒤에나 던지듯 반납하는 몰상식한 녀석에게 물건을 이 따위로 다루는 걸 보면 지구는 네가 다 멸망시키겠다며 빈정거린 날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양심없는 녀석조차도 장례식장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게 할 수 있었겠지. 선배가 그래서 좋았다. 남에게 늘 최선을 다해주는 사람이라서.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어릴 적 추억을 이야기하며 찻잔을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제 선배는 언제까지나 교복을 입은 그대로겠지만요. ... 창가의 내 자리를 지나치면, 몇 걸음 못 가 사물함이다.)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당신의 기억 속 아라는 언제고 다정하고 상냥했습니다.
시험이나, 어쩌다 혼이 났던 일이나, 아님 싸웠던 일이라던지...
...아라의 자리를 보면 검게 시든 꽃이 잔뜩 올려져 있습니다.
벌레 몇 마리가 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원래는 희었을 그 꽃의 이름은 떠올리지 않기로 합시다.
류예성:(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창문을 열고 손을 휘저어 벌레를 내쫓는다. 새 꽃을 사 올 걸 그랬나, 흰 국화든, 아까 꿈에서 말했던 그... 매쉬 메리골드든지.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너무 아쉬워진다. 하루만 더 일찍 왔더라면...)
류예성:(수능이 끝난 다음부터 물건을 하나 둘 차근차근 정리해서, 다들 졸업식 전에 짐을 한가득 챙겨갈 때 나는 평소처럼 가볍게 하교했던 기억이 난다. 내 사물함 정리할 때 선배한테도 사물함은 빨리 정리해놓으라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그 덕분인지 선배도 깔끔하게 다 비우고 돌아갔던...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열어보면 까먹고 놓고 간 물건들만 있거나, 아니면 아까처럼 다 썩어서 재로 돌아가기 직전인 꽃들만 있겠지. 열쇠도 없이 남아버린 자물쇠들을 보니 저 안에는 뭐가 있을지 괜시리 궁금해진다.)
류예성:(낡았으니... 힘을 주면 열리려나?)
근력
기준치: |
60/30/12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역시 안된다... 철은 강하다... 인간은 나약하다...)
덜컹, 닫힌 문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두어 번 더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 그제야 문이 열립니다.
텅 비어있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편지 한 통이 놓여있습니다.
편지지는 예성이 어제 받은 편지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아라에게서 온 그 편지 말이에요.
류예성:(예상치 못한 물건의 환영에 잠시 상황을 파악하다가, 황급히 편지를 집어든다. 뭐지? ... 타임캡슐 같은 느낌으로... 남겨 둔 물건인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살살 뜯는다.)
접힌 편지지를 펼치면 짧은 글이 보입니다. 익숙한 필체예요.
안녕. 막상 편지를 쓰려 하니 무어라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되네. ... ... 5년 동안 잘 지냈어? 찾아와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지만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만큼 약속도 많이 했었는데 전부 지키지 못하게 되어 미안해.
바깥으로 나와줄래?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아라가.
…어째서 편지의 받는 이는 예성이고, 보내는 이는 아라인가요?
게다가 이 내용은, 마치 죽은 아라가 남기고 간 것만 같습니다.
류예성:... 선배, 진짜, 여기에 있는 거에요?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현실에 있는 건 맞는 걸까? 기차를 타고 떠나온 것부터, 잠들었던 것도, 학교에 온 것도, 모든 것이... 다 꿈이라면, ...... 아니, 꿈이어서는 안 된다. 졸업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고, 꽃도 못 전해 줬다. 담벼락에 새겼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을, 정녕 받아들여야 한다면 최소한 인사라도 제대로 전해야 한다. 제발, 꿈이 아니라고 누가 말해줘.)
바람 때문이 아니라 누가 인위적으로 흔드는 것만 같아요.
창문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이리로 오라는 듯이. 꿈이 아니라는 듯이.
아까 들었던 그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류예성:(나를 부르듯이 덜컹이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편지를 든 채로 천천히 창가로 다가간다. 선배는, 유령이 된 걸까? 그런 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나는 미치지 않았고 꿈같긴 해도 여전히 현실에 살고 있으니, ... 오늘부터는 생각이 좀 달라지려나.)
창 너머 운동장, 익숙한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라가 웃으며 예성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네요. SANc (0/1)
류예성:
SAN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것도 환영인가요? 아라는 아까처럼 눈앞에서 또 사라질 것 같습니다.
너는 대체 누구고. 이곳에는 왜, 어떻게 있고…
류예성:(운동장에서 교실에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선배. 문장 자체로는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지금 상황을 두고 본다면 있을 수가 없는 이상한 일. 이상한 걸 알면서도 자꾸 상황에 놀아나게 되는 이유는 미련, 미안함, 그리움, ...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품은 채 교실 밖을 나간다. 천천히 운동장을 향해 내려간다. 체육 수업을 듣기 싫어 천천히 돌아가던 그 길을 따라서.)
교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 계단을 건너… 운동장 밖으로 서둘러 나오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헛것을 본 걸까요. 아까 아라가 있던 교문 쪽으로 가도,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예성은 아라를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그리워했나 봅니다. 아님, 이 장소에 그리움이 증폭된 걸 수도 있고요.
해는 벌써 높이 떠 있습니다. 둘러볼 곳이 많아요,
류예성:선배는... 여행 가이드라도 된 거에요? (아까 당신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곳을 향해 작게 속삭이듯 말한다.) 약대 지망이었으면서 안 어울리게 웬 가이드람. 만약 그런 거라면 진로 잘못 잡은 것 같은데요. 여행객을 이렇게 내버려두는 가이드가 어디 있어?
(제자리에 잠시 멈춰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아까 선배가 서 있었던 그 자리에 똑같이 서서 빈 학교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사진을 찍고, 교문을 나선다. 이번에는 어디로 데려가려나.)
배아라:미안... 내가 가이드는 좀 미숙해서. 그래도 같이 가자.
뒤돌면, 평소처럼 단정하게 교복을 챙겨입은 아라가 보입니다.
배아라:5년 후의 너는, 이렇게 성장했구나... (금세 울 것처럼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의 아라가, 당신의 앞에 서 있습니다. SANc (0/1)
류예성:
SAN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1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류예성:(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교복 차림의 당신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달라졌는데 혼자서만 예전과 같은, 그 이질적인 그리움이 자꾸만 날 무너뜨리려는 것만 같다. 목구멍까지 말이 반복해서 차오르는데 막상 진짜로 얼굴을 보게 되니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입에 머금고만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첫 마디를 꺼낸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하지만 그렇다면 어깨에 느껴지는 손길의 무게와 온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배아라:(5년 전,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학생 시절과 똑같은 자신. 그 시절 저와 같은 반에서 같은 교복을 입었던 예성은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골격도 더 성숙해졌고, 걸친 사복도 좀 더 어른 티가 나고... 책을 넘기듯이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새긴다. 그러면 울컥 목이 메여온다. 괜히 목도리를 끌어올려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응. 예성이 너는 멋진 어른이 됐네. 그간 뭘 하면서 지냈어? 어딘가에 취직하기도 했을까?
류예성:그동안요, 음... 일단은 대학을 갔죠? 대학생이 된 후에도 고등학생일 때랑 큰 차이는 없더라고요, 저한테는.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후에 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게 술이랑 담배인데, 전 둘 다 그렇게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요. 아, 솔직히 술은 정말... 마시라면 마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그 기분이 그닥 별로더라고요. 그래서 웬만하면 안 마시게 됐어요. 그래서 뭐... 그냥 똑같이 공부하고, 학교 다니고, 시험 기간에는 도서관에서 밤샘도 해 보고. 아, 동아리도 들었어요. 하나는 취업용 스터디 동아리고, 다른 하나는 유기견 봉사활동 하는 동아리에요. 음, 그리고... 이왕 대학 다니는 거, 교환학생도 해 보고 싶어서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는 영어 공부를 좀 했어요. 군대는 2학년 끝난 다음에 바로 다녀와서, 사실 지금은 대학생보단 군인 신분이 조금 더 익숙하달까요. (멋쩍게 웃는다.) 다음 학기에 복학하고, 그 다음 학기에 영국으로 교환 다녀오려고요. 2년 다니고, 2년 쉬었으니, 이제 나머지 2년은 열심히 달려야죠. 지금은 그 전의 마지막 휴식 기간이에요. 선배가 보시기에 멋진 어른 같다니, 그거 정말 영광인걸요? (살며시 웃으며) 열심히 산 보람이 있네요.
배아라:(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오랜 시간 얼굴을 보지 못했던 만큼 우리 사이에 쌓인 시간도 가득이었기에,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새롭게 성인으로서의 류예성이라는 이를 짜나간다.) 예성이 너는 어릴 적부터 바른 생활 하는 걸로는 유명했었으니까, 술이나 담배도 안 좋아할 것 같았어. 교환학생도 준비했다니... 멋지다. 대학교 생활, 알차게 다니고 있네. 우리가 학생 땐 꼭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하자면서 목표를 잡고 열심히 공부했었지... 예성이 너라면 분명 영국에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그간의 회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날 따라와줄래? 시간이 얼마 없어. 너와 마지막으로 가고픈 곳이 많아.
아라는 웃습니다. 그 웃음이 따스합니다. 그의 손 또한 온기를 지니고 있으리란 확신을 갖게 됩니다.
류예성:(암묵적으로, 선배나 나나 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입에 직접적으로 올리지 않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스무 살의 의 배아라는 죽어서 스물 다섯이 되지 못했고, 열아홉의 류예성은 죽지 않고 살아 스물 네 살이 되었다. 내가 혼란스럽듯이, 선배 또한 그렇지 않을까. 이 만남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둘 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냥... 지금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 여행을 하자.) ... 좋아요. 다음은 어디에요?
배아라:이쪽으로 가자. (죽음이라는, 가장 큰 명제를 암묵적으로 뒤로한 채 그는 걸음을 옮긴다.)
이건 또 어떤 꿈일까요.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리운 이를 만난 행복한 꿈인지, 아님 깨어나면 공허함만 남는 악몽인지….
잠시 복잡한 생각을 버려둡시다. 해가 지면 이곳을 나가야 하니까요.
아라를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면 [문방구]와 자주 가던 [분식점]이 보입니다.
배아라:(걸음의 속도가 느릿해진다. 당신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디로 가고 싶어?
류예성:음, 저는 분식점요. 선배, 야자 끝나고 들러서 군것질 했던 거 기억 나세요? 별 것도 아닌 게 그때는 왜 그렇게 행복했는지...
배아라:맞아, 늦게 가면 문 닫았거나 다 팔렸을까 봐 뛰어가기도 했었지... (목도리 매만지며 미소한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해서 힘들어서 그랬었는지, 진짜 맛있었는데.
간판의 글씨가 벗겨진 페인트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바랜 메뉴판은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어요.
어쩐지 그리운 메뉴들과 가격입니다. 기억해보면 사탕도 팔았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류예성:(눈을 찌푸리며 더듬더듬 흐린 글씨를 읽어나간다.) 조금 아쉽네요, 장사하시는 분이 떠나기 전에 들렀더라면 마지막으로 먹어볼 수 있었을텐데. 하기야 폐교 이후에 동네 전체가 문을 닫다시피 하는 분위기였으니... 그리 오래 가진 못했으려나요.
배아라:그랬지. 다른 가게들은 문을 일찌감치 닫아도, 음식점들은 그나마 오래 남아있었는데... 여기도 결국은 이렇게 폐점하고 말았네. (그때의 시간들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첩에 꽂아둔 사진처럼 소중하게 남아있다. 당연한 이치일까, 당신은 나아갔어도 저는 이곳에 있으니.)
문구점에도 가볼래?
류예성:네, 좋아요. (문구점의 옛 모습을 떠올려본다. 어땠더라?) 거긴... 항상 물건들로 너무 꽉 차 있어서 발 디딜 곳 하나 없었는데. 거기도 분식점처럼 별의 별 걸 다 팔았었잖아요. 거기서 봤던 제일 이상한 물건은 웬 이상한 석상 같은 거였어요. 어디 절에 장식돼있을 것처럼 생긴 기묘한 상이었는데... 선배는 그런 경험 없으세요?
배아라:석상? (고개 갸웃하다가 금세 떠올린 듯 아- 소리를 낸다) 맞아. 그런 게 있었지. 아주머니께서 동네 계모임에서 얻어오셨다고 했었어. 경험이라면 어떤 경험? 그런 거 본 경험? 난 조금만 위협적인 외형이면 무서워해서, 봤어도 가까이 다가가질 않았을 거야.
류예성:(눈을 휘둥그레 뜨며) ... 그걸 진짜 사 간 사람이 있었어요? 창고에 들어갔거나 처분된 줄 알았더니... 그런 걸... (잠시 할 말을 잃으며) 하긴...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니까요, 네, 뭐...
꼭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긴 것들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가령... 진짜 우스꽝스럽게 생긴 사자 가면이라든가요. 선배는 보통 필요한 것만 사서 나오는 타입이라 못 보셨나봐요.
배아라:아, 아니. 아마 사진 않았고, 거기 아주머니께서 나한테 어떻게 갖고 왔는지 말씀해주셨던 거야. (기억 더듬는다) 그거... 정말 사려는 사람이 있긴 했을까... 조각상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분이 있었다면 그분이 샀을지도.
으응, 아무래도 나는 거기 오래 있진 않았지. 거기서 사는 건 정해져 있기도 했고. 이제 거기도 문을 닫았을 텐데, 그 많은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에 도착합니다.
온갖 물건이 가득해서 거의 잡화점이라고 보는 게 더 맞았었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 빈 진열대와 계산대가 보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뽑기 기계가 보입니다. 동전을 넣고 돌리면 플라스틱의 캡슐이 나오는 형식이었죠.
모두가 떠난 마을에 버려져 가게를 지키고 있습니다.
배아라:(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혹시 동전 있어? 오백원짜리.
류예성:잠시만요, 지갑에 보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동전을 훑는다. 다행히 예비용으로 들고 다니는 오백원 동전 세 개가 짤랑인다. 그 중 두 개를 꺼내 건넨다.) 여기요.
배아라:다행이다, 있었네. 보통 어른 되면 현금은 잘 안 들고 다니잖아. 다 카드 쓰니까... 너도 체크카드나 신용카드 만들었어?
류예성:졸업하고 난 직후에 만들었었어요. 그래도 현금이 필요한 곳은 꼭 있더라고요. 그래서 예비용으로 얼마 정도는 꼭 넣어다녀요.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뭐가 나올까요? 앞에 붙어있던 종이도 다 바래서 뭔지를 알 수가 없는 바람에... 진짜 랜덤 뽑기가 돼 버렸네요.
배아라:그러게. 이왕 뽑는 거, 예쁘고 귀여운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기계가 낡았어도 안에 있는 캡슐들까지 낡진 않았을 테니까.
동전을 넣은 아라는 달그락, 손잡이를 돌려 캡슐 하나를 뽑습니다.
이어 나머지 동전을 넣더니 예성을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배아라:(캡슐을 손 안에 쥐고 두어 번 돌리며) 이번엔 예성이 네가 돌려볼래?
류예성:(남은 동전을 받아서 기계에 넣고 손잡이를 돌린다. 나온 캡슐을 집어들고 귀 근처에서 살살 흔들어본다.) 영 모르겠네요... 하나 둘 셋 하고 같이 열어볼까요?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아까 아라가 잡았던 탓인지 미약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오랜 시간 돌아가지 않았던 녹슨 손잡이는 조금 뻑뻑합니다.
힘을 주어 돌리면 달그락, 아라의 것과 같은 작은 플라스틱 캡슐이 나옵니다.
배아라:좋아. 그럼... 하나, 둘, 셋...! (캡슐을 슥슥 돌려연다)
류예성:(셋 신호를 듣고 옆에서 같이 돌림... 슥슥)
두 개 다 유치한 구슬 팔찌네요. 고등학생 때도 이런 건 하지 않았지만…
아라는 마음에 드는지 한쪽 팔목에 벌써 끼우는 중입니다.
배아라:구슬팔찌라니. 뭔가... 이런 기계에서 나올 만한 캡슐 중에 제일 좋은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보니 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팔찌 끼우며 웃는다)
류예성:(알록달록... 형형색색... 반짝거리는 팔찌를 손 위에 놓고 바라보다가, 당신이 즐겁게 팔찌를 끼는 것을 보고 비장하게 같이 낀다. 우정을 위해서라면... 선배가 저렇게 좋아하잖아!!) 그러게요, 사실 이상한 캐릭터 모형이 나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이고 좋네요.
배아라:(저를 따라 착용하는 것을 보고는 수줍게 웃는다.) 잘 어울려, 예성아. (진심?)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차보겠어? 나중에 버리게 되더라도 지금만큼은 같이 차고 다니자.
류예성:버리긴요, 안 차고 상자 안에 오래도록 넣어 놓을 수는 있어도 버리진 않아요. (팔찌 찬 손목을 짤랑짤랑 흔들어보이며) 생각해보니 고등학생일 때 이런 걸 했어야 했는데. 그때 못했던 우정팔찌 지금 하는 셈 치면 되죠, 뭐.
배아라:그때 이걸 봤다면 유치하다고 했을 것 같아. 내 행운 아이템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몰라도. (무언가 떠오른 듯 잠깐 침묵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 ... 5년 만에 만나서 우정팔찌를 하게 되었으니까, 예성이 너도 이걸 오늘의 행운 아이템으로 삼아줬으면 좋겠어.
류예성:(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약속한다.) 그럴게요. 시험 볼 때면 꼭 이 팔찌를 차고 갈게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회사 면접을 보러 가거나, 친구의 결혼식을 가는 때가 생겨도 그럴게요. 오늘의 행운을 잔뜩 담아 놓은 팔찌니까, 나에게도 중요한 일을 앞둔 타인에게도 이 팔찌가 도움이 될 거에요.
배아라:그... 그렇게까지 해주진 않아도 되는데. (감동받았는지 다시금 눈시울이 붉어져 온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아 얼른 고개를 돌리고 두어 번 눈가를 문질렀다.) ... ... 나와의 추억을 소중히 여겨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너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내심 반문하기도 했지만, 먼저 말해주는 당신에게 고마움만 가득하다.)
아라의 얼굴은 이 동네와 다르게 5년이라는 시간이 스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때 그 모습으로, 지금 예성의 눈앞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류예성:저야말로... 고마워요.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 잠시 주저하며 팔찌만 만지작거린다.) 선배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본받을 점이 참 많은 선배였고, 다정한 같은 반 친구였고, 함께 수험 생활을 헤쳐나간 동료기도 했고요. 선배에게 알게 모르게 받은 것도 참 많아요. 어떻게... 그런 우정이 어떻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눈물을 애써 감추려는 당신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가가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웃으며 울음을 달래고, 품 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건네준다.) 얼마전에 집 정리를 좀 했는데, 옛날 교복 사이에 이게 같이 있더라고요. 아마 손 씻은 다음에 추워하니까 빨리 닦으라고 빌려줬던 거겠죠? 돌려주려다가 깜빡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오늘 여기 오면서 선배를 만나든 그러지 못하든,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어서일단 들고와 봤는데... 그러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선배,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겠지만요, 어떤 경위로 만나 어떻게 친해진 사람이라도 선배만큼은 아닐 거에요. 다정한 사람도, 존경할만한 사람도, 전우애를 형성한 사람도, 앞으로 만날 인간 군상에 속해 있겠지만 그 모든 걸 동시에 해내는 건 선배 하나뿐이거든요. 나에게... 선배의 행운을 선물해줘서 고마워요.
배아라: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본 적은 딱히 없었어. 항상 나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었거든. (머쓱하거나 쑥스러울 때면 곧잘 그랬듯 손바닥으로 반대쪽 손등을 문지른다.) 자신감도 없고 용기도 없고... 하도 숫기가 없으니까 한 살 더 많은 사람 맞냐는 타박도 꽤 자주 들었던 것 같아. 오히려 네가 고등학생 때부터 날 잘 챙겨줘서, 너한테 고마웠었지. 그때는 고마웠던 마음을 즉각적으로 다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서... ... 두고두고 미안했어.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속에 쌓아두지 말고 바로 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뒤늦게야 알겠더라. (긴 여행, 출장, 혹은 죽음까지. 이별을 겪으면 자연히 후회가 따라오는 법이다.) 아, 이 수건도 아직 갖고 있었구나... 고마워. 그때 떠오르네. 3층 화장실은 뜨거운 물이 잘 안 나와서 손이 시려우니까 겨울엔 수건을 꼭 갖고 다녀야 했었지. (먹먹하게 수건을 응시하다가 받아들었다.)
예성이 네가 좋은 말만 해주니까, 괜히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네...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 하면서 눈가에 손부채질을 한다.) 난 아직도 울보인가 봐. ... 나야말로 고마워. 고마웠어. (고마울 거야, 라곤 말할 수가 없다.)
류예성: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95 |
판정결과: |
실패 |
파스스, 어디선가 빛가루가 퍼지듯 파편이 흩날려요.
손부채질을 하던 아라가 급히 손을 뒤쪽으로 숨깁니다.
류예성:아, 진짜... (양손으로 미간을 꾸욱 힘주어 눌러 눈물을 꾹꾹 속으로 삼킨다. 시야가 가린 덕에 상대방의 행동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얼굴 보고 고맙다는 말 들으니까 자꾸...... 하아. (감정을 다시 갈무리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웃어 줘야지, 오늘만큼은 끝까지 행복한 얼굴을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선배의 마음속에 후회가 남아있다는 건, 그만큼 선배가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오늘 차고 넘칠 정도로 그 마음을 다 받았어요. (팔찌를 흔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있다는 느낌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선배 몫의 후회는 방금 그걸로 다 털었으니... 저도, 남기고 가는 게 있으면 안 되겠죠. 졸업식 날 꽃 못 줘서 미안해요. 사 두긴 했었는데, 차마... 그걸 줄 수가 없었어요. 여행가기로 했던 약속 잊어버렸던 것도 미안하고,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았던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그날, 선배를 위해 울지 않아서... 미안해요. 용서... 해 줄거죠?
배아라:(겨우 몇백원밖에 하지 않는 조악한 팔찌일 뿐인데도, 5년간의 마음을 받았다 말해주는 당신. 당신은 얼마나 관대하고 또 상냥한가.) 응, 미안해하지 않을게. (결국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방향이었다.) 그러니 너도 사과하지 마, 예성아. 꽃다발도 여행의 약속도... 전부 고의로 그랬던 게 아니잖아. 혹여 네가 고의로 그랬다고 한들, 너였다면 이유가 있었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어. 장례식도 그래. 울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닐 테니까. 전부 용서할게. (너그러울 만치 나붓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의 우정을 이 구슬마냥 실에 꿰어 가져가.
철컹,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배아라:(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본다.) ... 철거가 시작됐나 보네. 이전에 종종 갔던 놀이터라도 한 번 둘러볼까? 다 무너지기 전에.
류예성:... 사과 받아줘서 고마워요. 그러니... 이제 저도, 선배도, 후회는 남기지 않은 거에요. (마음 속에 두고 있던 짐을 이제야 치운 기분이다. 후련... 하지만, 짐이 있던 자리에 차디찬 겨울바람이 새어 들어와 시리기도 하다. 행운과 용서가 담겨 그새 무거워진 장난감 팔찌를 만지작거려본다.)
놀이터라, 좋아요. 이제는 제가 너무 커버려서 그 작은 곳이 성에 찰까 모르겠네요. (너스레를 떤다.)
배아라:애초에 네가 정말로 사과할 만한 건 없었지만 말이야. 그래. 이제 후회는 겨울바람에 다 날려버리는 걸로... (말끝이 아스라하다.)
그렇겠네. 너무 좁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학생 때도 넌 키가 큰 편이었는데, 성인 되니까 더 커졌네.
류예성:저도 거기서 더 클 줄 몰랐어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190을 넘어 버리더라고요. (장난으로) 저 정면만 보고 있으면 선배 아예 안 보이는 거 알아요?
배아라:190을 넘었다구? 허억... (놀라서 눈 커짐) 그럼 나랑 거의 30cm 차이나는 거 아냐? 난 이미 고등학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이 키였는데.
기억을 따라 걸어가는 사이 그림자는 점점 길어져 갑니다.
작은 꼬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늦은 시간 그네를 타며 떠들던 학생들도 많았던 놀이터에 어느덧 도착합니다.
돌이켜 보면, 예성과 아라도 종종 늦은 시간까지 이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었죠.
미끄럼틀과 시소는 부서져 있습니다. 그네의 쇠줄은 녹슬어 본래의 색을 잃었습니다.
류예성:(그네를 타 보고 싶었는데, 안 되겠군. 앉았다간 바로 부서질 것 같아... 아쉬움을 감추고 벤치로 향한다. 앉을 곳을 손으로 살살 쓸어낸다.) 선배, 여기요.
배아라:으응, 그래. 같이 앉자. (모래 먼지 같은 것들을 같이 쓸어내곤 앉는다.) 예전에 여기서 종종 시간 보내곤 했었지. 컵떡볶이 사와서 여기에서 먹기도 했잖아.
류예성:맞아요, 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꼭 그 시절 즐거웠던 기억만 들고가게 된다던데, 그거 진짜인 것 같아요.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것보다 중간중간 틈 타서 놀았던 것만 기쁘게 남아 있다니깐요. 아, 그건 기억나세요? 모래 쌓아놓고 막대기 먼저 무너뜨리면 지는 게임 했던 거요. 먹을 거 놓고 했었던 거!
배아라:원래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잖아. 미화라는 단어도 있지. (당신이 이야기하는 추억을 금세 상기하고는 고개 끄덕인다.) 맞아, 맞아. 내가 대부분 졌던 것 같기는 한데... 너 모래 들어가는 게 싫다고 소심하게 하다가 졌던 거 떠오른다. (작게 키득거린다)
류예성:(같이 웃는다.) 아, 그거 진짜 중요한 문제에요. 놀이터 모래가 얼마나 더러운데요! 근처에 수돗가가 있었으면 몰라도! ... 그런 걸 따지면 애초부터 놀이터에 안 들어가면 되는 문제긴 했지만요...? 생각해보니 좀 웃기네. 이게 다, 여기가 놀 거리 별로 없는 시골이라 그래요.
배아라:모래 만지고 나서 손 씻으면 되지 않나...? 라고 그때 내가 말했던 것 같아. (발치에 깔린 모래를 운동화 끝으로 쿡쿡 누른다.) 워낙 놀 게 없기는 했지. 그리고 우린 고등학생이라 놀 만한 게 있어도 거기에 낼 시간도 없었고. 그런 와중에도 즐거운 시간을 많이 쌓았어, 돌이켜보면.
류예성:이런 대화 하니까 옛날 생각 나네요. 기왕 말 나온 김에... 이번에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 보실래요? 오늘은 손이 더러워질 거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해 볼테니까요. 내기도 걸어요! 음, 뭘 사 먹을 순 없으니까... 가볍게 딱밤 같은 걸로.
배아라:딱, 딱밤? ... 아, 아플 것 같은데... (물론 너라면 힘을 거의 주지 않겠지만서도,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겁쟁이다) 그래도 해볼까, 오랜만이니까? (일어나서 주섬주섬 모래를 모은다.)
류예성:(같이 모래를 쓸어 모으며 짓궂은 미소를 짓는다.) 선배, 혹시... "예성이는 딱밤을 세게 때리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선을 다할 거란 사실을 꼭 알아 두시길 바라요.
배아라:..............................
....... 나 꼭 이길게...... (막대기로 쓸 만한 나뭇가지 주섬주섬 찾으러 감...)
류예성:(모래 토닥토닥... 옛날에는 반응이 웃겨서 종종 일부로 놀리곤 했는데. 역시 재밌다.) 먼저 하실래요?
배아라:응, 그럼 나 먼저 해볼게...?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모래를 한 줌 쓸어낸다)
류예성:
운
기준치: |
70/35/14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아라: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아라가 모래를 퍼내자, 조심스러운 손길임에도 불구하고 막대기가 휘청!하네요.
류예성: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배아라: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53 |
판정결과: |
실패 |
배아라:...... (침 꿀꺽 삼키고 거의 모래 한 올 한 올 감각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손 움직인다)
류예성:(역시나 말 없이 막대기에만 눈을 고정하고...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배아라: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4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류예성: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59 |
판정결과: |
실패 |
예성이의 손길에 막대기는 거의 떨어질 뻔!! 하다가
배아라:헉...! (자기 턴도 아닌데 노심초사함)
류예성:(허억...) ... 아무래도 다음 판이 마지막이... 될 것 같죠?
배아라:... 이제 모래도 거의 없어... 예성이 너 실력이 많이 늘었네.(?) 5년만인데...
류예성: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니까요(;)
마... 마지막 해보자...! (스륵스륵)
류예성: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3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아라: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2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류예성:(와....) 선배도 장난 아닌데요? 이 지경까지 왔는데 막대기가 살아있어...
아라의 손길에 모래는 쓰러질 듯 말 듯 하더니 버텨냅니다!
하지만... 예성이가 손을 대자, 아슬아슬하던 나뭇가지가 결국 툭 떨어지고 맙니다.
류예성:(아쉽......) 아, 조금만 더 버텼으면 되는 건데...
배아라:돼... 됐다! 이겼어...! (입가 가리며 감격한다)
그, 그럼... 딱밤은 내가 때리게 되겠네? (약간 눈치보면서 웃을 듯 말 듯)
류예성:(크윽...) ...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죠. 저는... 각오 됐어요. (모래 묻은 손을 탈탈 털어내고, 머리카락을 슥슥 정리해 이마를 가격하기(?) 쉽게 만든다.)
배아라:... 그러면... (머리카락 슥 정리하는거 보면서 손에 바람 호- 부는 시늉까지 한다. 그리곤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모았다가...)
이얏...! (힘빠지는 기합소리와 함께 손을 딱 튕긴다. 물론? 하~나도 안 아프다. 이마에 그냥 톡 닿는 수준!)
류예성:(뭔가가... 툭 닿았다가 떨어진다.) ... 음! 좋은 승부였어요. 재미있었어요. (딱밤 후기는... 그냥 넘기려는 듯.)
배아라:예성이 넌 전력으로 때리겠다고 했지만... 나는 힘 안 줬어. (순진한건지 바보인건지) 아무튼 진짜 아슬아슬한 승부였네.
류예성:아직도 이런 놀이에 불태울 정신이 남아 있는지... 오늘 새삼 다시 알았어요. (모래 더미의 흔적을 발로 평평하게 정리하며 웃는다.)
배아라:원래 친구랑 있다 보면 어릴 때로 돌아가곤 하잖아. (막대기를 모래에 콕 꽂고는 다시 벤치에 앉는다.)
사르륵,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립니다.
하늘을 보면 햇빛과는 다른 빛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있어요.
배아라:네가 오지 않을까 봐 조금 걱정했어. 나는 워낙 걱정이 많기도 하고...
류예성:하긴, ... 저도 사실 제가 여기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 편지를 받고 의심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저보다는 선배 쪽이니까. 그럼에도 찾아온 이유는... 진짜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랬어요. 진짜면 마지막으로 못 했던 말을 전할 수 있어 좋고, 아니었다면... 뭐, 저도 편지를 써서 놔 두고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배아라:너의 편지, 받을 수 있다면 좋았을 거야. 무슨 내용이었을지 궁금하네. 너는 상냥하니까 분명 좋은 글귀들이 쓰여있었을 것 같아.
곁에 앉은 아라에게선 여전히 온기가 느껴져 어쩐지 안심이 되어요.
눈앞의 상대는 겨울과 어울리지 않지요, 언제나 그랬습니다.
부드럽게 바람에 나부끼는 연보랏빛 머리칼을 기억하나요. 그와 함께 흩날리던 은빛 머리칼은요.
새로 움트는 잎새처럼 비치던 녹색 눈동자가 서로 웃음으로 맞닿는 순간은 또 어떻구요.
배아라:예성아. 나는 늘 이곳에 있었어.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수마가 몰려오는 이유는 다정한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인가요, 아님 어깨를 토닥이는 다정한 누군가의 손길 때문인가요.
다시 깨어나면 사라질 것만 같은데, 애써 눈을 뜨려 해도 자꾸만 몸의 힘이 빠집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으면서도, 들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기만 합니다.
배아라:사과도 후회도 모두 여기에 놓고 가자. 그저 네가 슬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 잘 자, 예성아. 좋은 꿈 꾸기를...
툭, 그 말을 끝으로 예성의 머리가 앞으로 기울어집니다.
예성은 아까 전의 낮잠보다 조금 더 긴 잠에 빠지게 됩니다. 아주 상냥한 향기와 함께요.
류예성:
듣기
기준치: |
65/32/13 |
굴림: |
89 |
판정결과: |
실패 |
배아라:... ... 이 다음에는 뭘 쓰면 좋으려나...
정신을 차리면 예성은 아까 그 놀이터가 아닌 어느 골목길에 서 있습니다. SANc (0/1)
류예성:
SAN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5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또 천천히 숨을 내쉬고….
골목의 담벼락은 뒤덮는 담쟁이 넝쿨 하나 없이 깔끔합니다.
손에는 돌을 들고 벽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어요.
손을 쥐었다 펴보니 감각이 없네요. 아, 또 과거에 머무른 그 꿈일까요.
배아라:음... 벌금 같은 거? 100만원... 너무 많은가...
아라의 얼굴은 벤치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어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미소가 어린 표정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것만 같군요.
류예성:(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감각을 느낀다. 담벼락에 돌로 새긴 글... 혹시, 여행을 약속했을 때의 꿈일까. 물끄러미 당신을 본다. 꿈에 어울려 주라는 소리인가?) 벌금이 백 만원 정도는 돼야 약속을 지킬 마음이 들죠. 왜, 그... 수능 영어 지문에 나왔던 내용이랑 비슷하게. 뭐랬더라... 벌금이 적으면 약속을 어기는 대가로 값을 치른다고 생각해서 쉽게 어기게 된다?
오늘 예성이 겪은 일은 사실 모든 게 꿈일까요?
죽은 이에게서 온 편지와 다시 만난 아라,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가는 오늘 하루…
골목에서 보았던 낙서입니다. 함께 새겼었던 그 낙서, 지금은 그때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졸업 후, 예성, 아라, oo, oo은 여행을 갈 것. 어길 시 벌금 100만 원.’
배아라:좋아. 그럼, 100만원이라고 할게. 네 말대로 금액이 크면 클수록 꼭 지켜야 한다고 되새길 수 있겠지...! (당신이 현실의 골목길에서 봤던 글씨 그대로 뒤쪽에 덧붙여 쓴다.)
그나저나... 아까 좀 멍해 보였는데. 어디 아파? (글씨를 새기고는 걱정스럽게 팔을 내린다.) 아까 그 친구 집에서 만나기로 했었지만... 졸업식 때 시간 많으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 바로 갈까?
미래를 모르는 이의 말은 막연하고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류예성:(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선배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저 진짜 괜찮아요! 졸업식 날에는, 음... 다들 사진찍고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 날도 아닌 오늘 마음 편하게 놀아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배아라:그래도 행사가 다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을까? (그 되물음은 걱정이란 때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이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그렇겠지. 그 누가 졸업식 날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예상했을까.) 아니면... 오늘은 친구들 집에는 가지 말고 우리 둘이서 노는 건 어때?
류예성:둘이서요? (현실에서, 실제 5년 전에는... 어땠었더라. 사실 그 무렵의 기억은 꿈속처럼 몽롱하고 흐리다. 졸업을 했고, 장례식장엘 갔고, 그리고... 마을을 떠나왔고... 큼직했던 기억만 강렬히 남아있고 그 외의 것들은 죄다 뭉개진 것처럼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근데 이건 꿈... 인걸. 꿈에서마저 현실을 따라야 할까? 하는 의문이 불쑥 고개를 든다. 지금만큼은 생각을 접어 두고 후회했던 과거를 덮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 네, ... 좋아요. 둘이서 놀아요.
두 번째로 보이는 것은 멀쩡한 [문방구]와 [분식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그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간판의 색은 바래지 않았고, 떨어져 나간 콘크리트 벽도 없습니다.
배아라:오늘은 특별히 내가 다 살게. 어디부터 갈까?
아라가 웃으며 예성을 바라봅니다. 온기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류예성:진짜요? 그럼 사양 않겠습니다.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분식점부터 갈까요? 저 배가 약간 고프거든요.
배아라:좋아. 이때는 돌도 씹어먹을 나이라면서. (막상 배가 고프다는 말이 들리자 지갑이 얼마나 남아날지 약간 두려워지긴 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어떻게 무를 수 있겠는가. 그것도 한 살 누나인데. 불안함을 안고서도(?) 꿋꿋하게 분식집 향해 걸어간다)
하교 후 집에 가기 전,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인심 좋은 분식점입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새로 뽑은 듯 코팅이 번쩍이는 메뉴판에 익숙한 메뉴들이 보여요.
바래어 보지 못했던 메뉴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배아라:뭐 먹을래, 예성아? 다 시켜도 돼. (메뉴판 훑는다) 일단 나는 컵볶이랑 슬러시 먹을래. 컵볶이가 매콤해서 꼭 마실 게 같이 있어야 좋겠더라구.
류예성:그럼 저도 그걸로요. (컵볶이와 슬러시를 먹은 다음에 다른 것을 더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를 한참 고민해보다가) 그리고 붕어빵도 하나? 4개니까 반씩 나눠 먹어요.
배아라:그래. 그럼... (계산대로 다가가 주문한다.) 저희 컵볶이랑 슬러시 두 개, 붕어빵 네 개 부탁드릴게요.
하지만 예성과 아라의 차례가 되면… 미안하다는 듯 아주머니는 머리를 긁적입니다.
아주머니: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지? 앞에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왔나, 메뉴가 다 떨어져서 오늘은 일찍 마무리하려던 차였거든.
미안하다. 다음에 꼭 다시 오렴. 서비스 줄 테니까. (그러면서 아라의 손에 사탕 두 개를 쥐여준다.)
배아라:(이럴수가... 청천벽력 맞은 얼굴로 돌아옴) 예성아... 분식이 다 떨어졌대. (아까 받은 사탕만 나눠준다)
류예성:(안타까움이 담긴 얼굴로...) 아쉽네요...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걸. (사탕을 받아들고 분식을 못 먹어서 그렇다기에는 과할 정도의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 꿈에서라도 좀 추억의 그 맛 먹게 해 주면 안 돼? ... 그래, 안 된다는데 떼를 쓸 수도 없고... ) 하는 수 없죠. 그럼 다음에 사 주시는 걸로 해요.
배아라:아무래도 그래야겠다. 하필 오늘 애들이 엄청 많이 왔다나봐. 여기 분식집이 맛있기는 하지... 예성이 배고프다고 했는데. 내 사탕까지 먹을래? 난 괜찮으니까.
류예성:어, 괜찮아요! (고개를 저으며) 그건 선배 몫이잖아요. (그리고 사탕 하나 더 먹는다고 배가 크게 부르진 않을 거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배아라:그래도... 내가 오자고 해서 온 건데, 못 먹으니까 미안해서. (못내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탕을 까서 입안에 넣는다.) 그러면 문방구라도 갈까. 거기서 뭐 살 건 없어? 난 노트나 볼펜을 좀 살까 했는데...
류예성:음... 글쎄요, 뭘 사 두려고 계획했던 건 딱히 없어요. 근데 선배가 살 물건 있는 김에 같이 가죠, 뭐.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주머니에 넣는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로 향합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아주머니도 친절하셔서 인기가 좋았죠.
신중하게 볼펜을 고르는 학생이나 불량식품을 잔뜩 집는 꼬마 친구들이 보입니다.
진열대는 색색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이제는 살 수 없는 그리운 것들입니다.
배아라:(노트 코너로 걸어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멈춰선다. 아래쪽의 무언가를 빤히 바라보더니) 예성아. 우리 이거 한 번 해볼래?
류예성:(당신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 같이 멈춰서서 멍하니 응시한다. 저기에서는 또, 유치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선배의 행운 팔찌가 나오려나. 고개를 끄덕인다.) 네, 좋아요. ... 동전은, 제가 드릴까요?
배아라:아냐, 나 마침 딱 두개 남은 게 있었거든. (지갑을 꺼내들며 앞으로 다가간다.)
아라는 그 앞에 쪼그리더니,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냅니다.
땡그르- 그 동전은 손에서 미끄러져 기계 아래로 들어가고 말지만요.
... 날렸네... 예성이 네 것까지 같이 뽑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그냥 다음에 뽑자.
류예성:(참으로 오래간만인 광경에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아쉽네요. 선배, 혹시 오늘 행운의 아이템 안 들고 오셨어요? 영 운이 별로인데요.
배아라:오늘은 금방 집에 가는 날이라 안 들고 왔는데... 이렇게 바로 결과로 나타나게 되네. (힝구) 역시 행운 아이템은 어떤 날이든 꼭 갖고 다녀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배아라:그냥 노트나 사야겠다. 성인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맞이한다는 차원에서... 예쁜 걸로 골라야지. 오늘의 행운 색상이 노란색이었으니까... (노란 꽃무늬가 그려진 표지의 노트를 집어 결제한다.)
류예성:그래요, 그 녀석이 집에 갈 때까지의 행운이라도 지켜줬으면 좋겠네요. (즐비하게 늘어진 각종 문구류를 구경한다. 많기도 많다... 그러다 귀여운 당근 모양의 볼펜 하나를 발견한다.) 선배, 펜도 산다고 하셨죠? 이건 어때요? 노랑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배아라:어떤 거? (뒤돌아 당신이 가리키는 펜을 보고는 반색한다.) 귀여워...! 좋아. 이것도 사야겠다. 같이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아. 고마워, 예성아. (당근 펜도 쏙 꺼내 같이 결제한다.)
몇 아이들이 익숙한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이 보이네요.
배아라:노트랑 볼펜을 사긴 했지만... 나만 좋은 일 했네. 떡볶이도 못 먹고 뽑기도 못 뽑고... 아쉬워.
류예성:뭘요, 그게 어디 선배 잘못인가요? 아주 조금... 타이밍이랑 운이 나빴던 거죠. (차마 다음을 약속하는 말을 가볍게라도 내뱉을 수가 없어서, 통상적으로 올 법한 '다음에 사 주세요.'라는 문장은 속으로 가라앉힌다.) ... 이제 집에 가실 거에요?
하늘은 이제 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합니다.
색의 온도와 반비례하게 기온은 떨어집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
꿈이라 그럴까요, 춥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배아라:역시 행운 아이템을 챙겨 왔어야 했나 봐. 머리핀이었거든.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찾을 시간이 부족했어. 이 짧은 시간 사이에도 운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다시 한 번 아쉬워한다)
놀이터라도 잠깐 들렸다 갈래? 이제 졸업하게 되면 다들 바빠서 자주 갈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꿈속의 아라는 예성의 속도 모르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쉽게 거절할 수는 없겠죠. 눈을 뜨면 전부 사라질 것들이잖아요.
류예성:(현실, 에 가까웠던 곳에서는... 놀이터에서 기억이 끊겼었지. 정신 차려보니 꿈이었고. 여기서도 역시 놀이터에 가면 꿈에서 깨어나고, 마을을 떠나야 하려나. 놀이터 대신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면 현실과는 다른 꿈을 꿀 수 있을까. ... 생각처럼 될 것 같진 않다. 내 꿈인데, 적어도 그런 것 같은데, 왜 맘대로 안 되는 건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왜 이런 꿈을 꾸게 하는 건지. 갈 곳 잃은 원망이 표정으로 슬그머니 빠지려는 것을 애써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거기서 이야기하다가... 돌아가요.
둘은 노을을 등지고, 어느새 키보다 길어진 그림자와 함께 놀이터를 향해 걸어갑니다.
놀이터에는 작은 꼬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모여 떠들기 바쁜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미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는 전부 차 있어요.
남은 건 페인트칠을 막 끝내 신문지가 덮인 벤치뿐입니다.
배아라:생각보다 아이들이 많구나... (두리번거리며 앉을 만한 곳을 찾다가 벤치로 다가간다. 손수건을 꺼내서 손에 감싸고 벤치를 꾹 눌러본다.) 응, 아무것도 안 묻어나네. 다 마른 것 같아. 여기 앉을까?
류예성:네, 있을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네요. (당신이 이미 확인했지만 진짜로 안전한지 손으로 가볍게 쿡 눌러 재차 확인한다.) 하긴, 빈 놀이터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죠?
배아라:초등학생들은 우리보다 빨리 겨울방학을 맞았을 테니까. 한창 놀 때지. 해가 지고 난 후였으면 자리가 좀 비어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북적거리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노트를 두 손으로 잡는다. 후- 바람을 불면, 흰 입김이 연기처럼 새어나왔다.) 졸업하고 나면 곧 대학교에 가게 되잖아. 대부분 대도시로 갈 테니 이제 이런 조용한 마을 풍경도 보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
류예성:도시로 나가면... 우리 마을처럼 조용한 시골은 점점 어색해지겠죠. 작은 마을이긴 했어도 나름 살만한 좋은 곳이었는데. (그러다 문득, 당신이... 무엇을 꿈꾸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래희망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 그렇지만 되고자 했던 직업 대신에, 구체적으로나 막연하게나 그렸던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 남아 있는 미래가 없는 선배에게, 그 사실을 모르고 천진하게 웃고 있는 선배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기만인가도 싶지만, 아무도 모른 채 사라지느니, 나라도... 꼭 들어주고 싶다. 듣는 건 힘들지도 않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 선배는, 음... 꿈이 뭐에요? 그러니까, 전공이나 직업 같은 거 말고, CC를 하고 싶다거나, 머리를 다른 색으로 염색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
배아라:그러게. 저 아이들도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면 또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입시를 치르고, 몇은 여기를 떠나게 되겠지? 언젠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우리 마을. 그렇잖아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고등학교도 학년당 반이 두 개밖에 없었잖아. (음악실이나 미술실 같은 교실이 제대로 굴러간 게 신기하다며 사족을 붙이다가, 문득 들려오는 질문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한다.) 꿈...? (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서 학생으로 살면서 진로나 직업 외의 꿈을 갖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학생 때는 주변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학교를 외치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직업을 외치니까. 부산스럽게 떠오르는 몇 가지는 있지만 단번에 구체화시키기는 박힌 돌을 빼내는 것마냥 어려웠다.) 나는... ... 걱정이나 불안이 조금 줄어들었으면 좋겠어. 항상 과도하게 걱정하다 보니 신경이 과민해져서 배도 자주 아프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되는데 자꾸만 나쁜 가능성만 떠올리게 되거든. 정말 나쁘게 흘러갔을 때는 나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고 말이야. 이렇게 자기한테 각박한 게 좋지 않다고 하더라구. 그러니까... 성인이 된 나는 좀 더 긍정적이고 멋진 사람이 됐으면 좋겠네.
류예성:걱정 불안 없는 삶이라... 그런 미래의 선배는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안정되어 있겠네요. 좋다. 아, 물론 저는 지금의 선배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이라도 멋지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꼭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와 같은 확신이 깃든 응원은 할 수가 없으니, 계속해서 말을 고르고 고르다 적막만이 길어진다.) 다른 건... 또 뭐가 있는데요? 음, 저도 하나만 말해보자면... 저는 렌즈를 사용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고려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떨지 궁금해졌거든요. (... 물론 실제로는 한두 번 사용해봤다가 너무 안 어울려서 포기했다. 그래도, 이때 즈음에 그런 생각을 하긴 했으니까....)
배아라:지금도 멋지고 존경할 만한... 그런 사람이라고?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당황하며 손사래친다.) 여유롭고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네. 그게 내 미래의 바라는 바기도 해. 지금이라고 해서 여유롭지 않다거나 불안정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품에 기대어서 살 수는 없잖아. (렌즈라는 말에 작게 웃음짓는다) 아, 렌즈. 나도 한 번 착용해보고 싶다. 나도 한 번 컬러렌즈 껴보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못 껴봤거든. 음, 또 다른 꿈은... 번지점프 해보는 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 기념으로 많이 해보기도 하던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겁이 너무 많아서 근처론 가보지도 못했거든.
류예성:매번 말하는 거지만, 선배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진짜로. 스스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기 마련이에요.
번지점프... 는 말만 들어도 소름돋는데요, (몸서리를 치며) 저만큼이나 겁 많으신 분이 어떻게 그런 걸 결심했대요? ... 아, 놀리는 게 아니라 대단하다는 뜻이에요. 진짜로. (엄지를 척 들어보이며)
... 그런 용기가 있으니까,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날아갈 마음을 먹는 만큼의 용기가 있으니까, 존경하는 거에요. 전 그만큼 대담하진 못하거든요. (발끝을 내려다보며)
배아라:그런 말 많이 들었어. 자신감을 가지란 말... (쑥스럽게 머리 긁적인다.) 타인의 눈에 보이는 자신은 내가 보는 나보다 조금 다를까? 좀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을 텐데.
겨, 결심한 것까진 아니야. 꿈이 뭐냐고 하니까 막연하게 이전에 한번쯤 해보고 싶다- 했던 걸 말한 거지. (당황해서 얼굴이 좀 빨개진다.) 그런데, 예성이 네가 대담하지 못하다고? 나는 항상 네가 정확한 목표를 세우고 그걸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무척 멋있다고 여겼는데. 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용기가 없는 건 아니잖아.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더 좋을 수도 있고.
류예성: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저는요, 제가 해낼 수 있을 만큼만 해요.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일이면 시작조차 않으려 들거나, 결과물을 내보이려 들지 않아요. 그러니 제 목표는 한정되기 마련이고, 자연스럽게 멀리서 보면 항상 뭐든 척척 잘 해내지만 가까이서 보면 큰 발전 없이 제자리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죠. 한 걸음의 약진을 못 해내는 거에요.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지. 기분이 저조할 때는 우물 안 완벽이라고까지 여겨지는 내 모습을.) 저도 어쩌면 선배랑 비슷한 모습을 꿈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나아갈 용기. ... 그게 필요해요, 저는... ... 할 수 있을까요?
배아라:약간 완벽주의적인 면이 있구나. 해낼 수 있을 만큼만 하는 거... 그것도 하나의 두려움일 수도 있을까? 성공하지 못할까 봐, 실패할까 봐 시도하지 못하는 거 말야. 그래도 어떻게 보면...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분야를 알아볼 수 있는 거니까 시야가 넓고 판단력이 좋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해. 이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당신의 어깨를 약한 손길로 토닥인다.) 당연하지! 나도 용기를 가지겠다고 마음가짐을 먹었잖아. 나도 하는데 예성이 네가 못 할 이유가 어디있어?
류예성:(느긋하게 웃는다.) 그런 면도 선배의 큰 장점 중 하나죠. 상대를 북돋아 주는 말을 적절한 시기에 가장 다정한 언어로 해 주는 것. 쉬운 일 아니에요. ... 선배가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고요...... (당신의 죽음을, 진짜로 인정하고, 마지막 인사를, 그리고 전진을, ...) 네, 선배가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거겠죠. 믿을게요. 제 안에 있을 용기를. 그리고... 최선을 다해볼게요.
배아라:그런가... 이런 것도 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니,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네. 내가 놓치는 점들을 짚어주는 것도 너의 장점 중 하나이고 말이야. (부드럽게 미소한다.) 응, 우리 둘 다 내면의 용기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힘내보자. 아직 삶은 길잖아.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캄캄한 앞날이 두렵기도 하지만... 천천히 걸어나가다 보면 어느덧 목표에 닿아있을 수 있을 거야. (한 번 더 이어지는, 잔인한 말. 너에게도 자신에게도 칼날 같은 말. 때로 미래는 영화보다도 더 잔학하고 현실보다도 비현실적이다.)
붉은 노을은 어둠을 이끌고 산 너머로 사라져 갑니다.
배아라:시간이 많이 늦었네.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직은 좀 이른 것 같고... 졸업식 전날에 데려가 줄게.
이날 둘은 해가 지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죠.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눈이 녹고 꽃망울이 열리는 졸업식의 해.
아라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은 낯설기만 했어요.
그 앞에서 몇 번이고 무너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류예성:(흐려졌던 기억들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래, 더는 또렷해지지 않아도 될 그 기억도. 선배의 영정 앞에서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못 했었다. 제일 단정한 옷인 교복을 입고,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 몇몇과 함께 조심스럽게 들어가 선배의 웃는 얼굴을 그냥 보다가 나왔다. 그 다음 날에는 혼자서 다시 찾아갔었는데, 둘째 날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었다. 선배 부모님이 힘없이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시고는 손을 잡고 우셨다. 같이 울어드리고 싶었는데, 실감이 하나도 나질 않아서 그냥 고개 숙인 채 입술만 꼭 깨무는 게 다였다. 한참을 말 없이 그러고 있다가, 극심한 피로가 몰려와서 이제 가 봐야겠다며 자리를 떴었다. ... 그분들은 잘 지내고 계실까.)
이제 놀이터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몇 없습니다.
해는 완전히 지고, 거리를 밝히는 건 가로등뿐입니다.
류예성: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88 |
판정결과: |
실패 |
깜빡, 그 가로등의 빛은 불안하게 꺼졌다 켜지길 반복합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뜨면 빛이 점점 더 흐려집니다.
어디선가 또 빛의 파편이 한차례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뒤돌아선 아라의 모습이 안개가 낀 듯 경계가 모호해져요.
안녕, 안녕… 분명 그런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시야가 흔들리고, 또 흐릿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본 아라는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요.
여전히 다정하고, 오늘 하루는 계속 곁에 맴돌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집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요, 어디론가 떨어졌던 정신이 차차 돌아옵니다.
다시 깜빡, 눈을 뜨면 벤치 앞에서 당신 쪽으로 무릎을 굽히고 있는 아라가 보입니다
꿈에서 깬 걸까요? 여긴 정말 현실이고, 방금은 꿈이고…
하늘은 붉어요, 노을이 지고 붉은빛이 상처마냥 하늘을 물들입니다.
손을 괜히 쥐었다 피면 있는 그대로 압각이 느껴집니다.
예성의 옷도 교복이 아닌 처음 입고 온 그대로예요. 꿈이 아닙니다.
류예성:...... 저 잠들었었나요? (부스스 일어나며 미간을 찡그린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감각도 잠시, 붉은 노을이 하늘을 물들인 모습을 보자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이제, ... 가야할 시간이... 된 건가요.
배아라:푹 자길래 안 깨웠어. (당신의 물음에, 문득 서글픔이 스치웠다. 그러나 고개를 두어 번 저어내면 반딧불이처럼 희미해질 따름이다.) ... 지금은 아직 아니야.
일단, 움직일까? 조금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것 같네.
내밀어지는 손, 그 손 절반이... 흰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손이 닿자, 오늘 몇 번이고 본 빛처럼 부서져 흩어지는 그 손. SANc (0/1d2)
류예성:
SAN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6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류예성:(점점 사라져가는 손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인다.)
따스하지만 그 흰 부분은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아라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 빛처럼 아라도 부서질 듯이.
빛은 벌레가 잎을 먹듯 아라를 좀먹고 있어요.
류예성:
심리학
기준치: |
55/27/11 |
굴림: |
76 |
판정결과: |
실패 |
그 심정이 과연 어떠할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배아라: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짧은 연보랏빛 머리칼이 겨울바람에 간간이 흩날린다. 머리칼 새로 보이는 녹색 눈이 언뜻 젖어 있었던 듯도 하다.)
어째서 사람은 예정된 이별을 느낄 수 있는 건가요.
마지막, 그 익숙해질 수 없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어지럽게 합니다.
이번에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질 수 있겠죠.
눈가가 시린 이유는 찬 겨울바람 때문일 겁니다.
아라는 손을 잡으며 익숙하게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느새 그림자는 우리들의 키보다 조금 더 커져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또 먼 곳에서 어느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골목을 지나, 위로 향하는 돌계단을 지나, 오솔길과 처음 보는 건물을 지나…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아라의 뒤를 따라가면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옆에는 저수지가 있으며, 언덕 아래로는 마을 풍경이 전부 보이는 높은 이곳.
길게 늘어진 검은 전깃줄이 오선지의 악보마냥 이어지고, 또 모든 건물은 울긋불긋한 노을을 머금는 중입니다.
노을 탓에 마을 전체가 불이 난 듯 붉게 물들고 화사해집니다.
문득 본 아라의 몸은 발목까지, 그리고 손은 또 완전히 빛이 되어 반짝… 흩어지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있어요.
배아라:... ... 어때? 예쁘지 않아? 입시 문제로 많이 힘들었을 적 마을을 무작정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야. 여기서 마을 정경을 내려다보면서 많이 위로받았었거든. 그래서 언젠가는 너한테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멋진 모습으로... ... 하루 이틀 미뤄지다 보니 결국은 너무 늦어지게 됐네.
오늘, 만나서 기뻤어.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 예성아.
노을을 등지고 미소짓는 그 얼굴은, 역광이 진 그 얼굴은 왜 마냥 슬프게 느껴지나요?
류예성:(이 곳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처음 마주하는 경관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꼭... 꿈같은 풍경이네요. ... 늦게라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그리고... 선배도 졸업 정말 축하해요. 비록 꽃도, 졸업장도 없지만, ...... 어른이 된 걸 축하해요.
배아라:오늘이 지나면 전부 철거되어 사라져버릴 풍경이지만... 그 전에 네가 찾아와줘서 다행이야. 날 보러 와 줘서 고마워. (손목에 채인 구슬 팔찌를 느릿한 손길로 매만진다.)
나는 죽은 후에도 이 동네에 계속 있었어. 모두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었는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더라. 그래서 영혼의 상태로 내가 아는 이들을, 너를 계속 기다렸던 거야. (나긋한 목소리가 천천히 단어들을 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여기에 있으면서, 장소와 내가 완전히 동화되었지만... 사람들이 떠나고 이곳은 철거 예정인 마을이 되어버렸지. 동네가 전부 부서지게 되면, 나도 사라질 거야. 오늘이 마지막이리라고 직감했어.
모두를 보고 싶었지만 다시 만날 수는 없겠구나, 포기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게 마지막 기회를 줬어. 5년 전의 몸과 하루의 시간을 준 거야. 그래서 편지도 보낼 수 있었고, 이렇게 만날 수도 있었네. 그간 못다했던 인사를 건네고 싶었어.
류예성:여기에, 계속... (당신이 홀로 견뎌왔을 그 외로운 시간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그 기다림이 오늘로 온점을 찍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상냥한 당신은 그저 만나러 와 줘서 고맙다고만 하겠지.) ... 미안해요. 그리고 저도,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 정말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 제가 남긴 말들이... 선배에게 위로가 되었나요?
배아라:왜 사과를 해. 우리 미안하다는 말, 서로에게 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러면서도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문방구에서처럼 눈물이 앞을 가리려 든다.) 너와 오늘 이렇게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던 것만도 나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야. ... 빈 영혼처럼 무상하게 떠돌던 내가 다시 웃음을 되새길 수 있었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
류예성:하하...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랬었죠, 참... 그럼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고칠게요. 나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서 정말... 고마워요. (팔찌를 찬 팔을 들어올린다. 팔찌가 잘그락 하는 소리를 낸다.) 행운을 가져다 준 건 물론, 최고로 감사한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을 기적이라고 해 줘서 고마워요. 정말... 다행이야......
행복하고, 밥은 잘 챙겨 먹고. 좋은 사람과 좋은 일만…
5년 동안 쌓이고 쌓여, 묵어버린 그 말들을요.
헤어짐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아라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부서지는 아라의 몸은 노을보다 더 밝게 빛납니다. 빛무리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요.
마지막으로 노을이 지기 전, 작별 인사를 해요.
배아라:앞으로도 너의 앞길에 쭉 행운만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하늘은 점점 더 밤의 휘장을 치며 어두워져가는데, 반대로 우리의 주변은 흘러나오는 빛으로 밝아져간다. 그러나 그 빛마저도 곧 먼지마냥 아스라하게 부스러져 버리겠지.) ... ... 여기에서 더 어른이 된 너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너는 분명 멋진 어른이 되겠지.
중간중간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해가 짐에 따라 그 소리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합니다. 이젠 정말 헤어질 때가 온 걸까요.
아라는 오랜 시간 예성을 응시하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입을 뗍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
날, 잊어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아라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요?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불그스레해진 눈.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애원하듯, 목소리가 잘게 떨립니다.
이별이 비록 슬프고 잔인하다지만, 영영 잊는 건 이별과는 또 다른 의미죠.
마지막 부탁이 이렇게 잔인할 필요까지 있나요?
류예성:...... 제가,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타당한 근거 없이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 잘 아시면서.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가 뭐에요?
배아라:... ... 내가 너에게 편지를 보내고, 우리가 만나고, 손이 닿았던,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 예성이 너도 알지...? (목소리가 떨려서,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금세라도 흐를 것 같아서 이미 붉어진 눈가를 몇 번이고 거세게 문지른다. 하필이면 이런 너무한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 욕심 때문에 원래는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을 꿈을 빌려 마주하게 되었으니, ...너에게도 부작용이 생길 거야.
앞으로 너의 꿈에 평생, 내가 나올 거야. 그리고 너를 괴롭히는 악몽이 되겠지. 매일 밤 내가 죽었던 날이나 헤어지는 순간을 감내해야만 해. ... 나는 네가 그런 무거운 감정을 감당하길 바라진 않아. 그리 부정적으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아.
기억을 잊게 하는 주문을 알고 있어. 너에게 걸어줄 수 있는 시간은 아직 남아 있으니... 부탁이야.
미안해,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해... 그렇지만, 제발... 날 잊어줘, 예성아.
다정히 뻗어나온 손은 이제 형체가 거의 없습니다.
아라의 눈에서 떨어지는 건 그 수많은 파편 중 하나겠죠. 미처 삼키지 못한 눈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5년의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부탁이 망각이라면 우린 너무 슬픈 이별을 맞이하는 게 아닌가요?
아라의 이름 한 획부터,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눈앞의 상대는 금세라도 한 줌의 빛이 되어 바스러질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별을 앞둔 사람의 표정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 기울어진 해는 누군가가 없는 내일을 향해 떨어져요.
류예성:다시 만나길 원한 건, 선배 혼자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그랬잖아요. 내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왜... 왜 제가, 선배의 욕심에 희생당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건데요? (갈 곳 잃은 원망과 억울함이 속을 계속 때려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만다.)
... 악몽은 이겨낼 수 있어요. 꾸는 순간에는 비참하고 괴로울지라도, 깨고 나면 나는 그때 선배와 진짜 작별을 했고 이제는 다 괜찮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러니 진짜로, 견딜 수 있어. 아픔도 나의 일부잖아요. 나는 그걸 딛고 다음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배가 그렇게 말해 줬으니 나는 분명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지만... (주먹을 꽉 쥔다. 너무 분하다. 이럴거면 처음부터 만나게 해 주지 말지 그랬어.) ...... 배아라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 선배 본인이겠죠. 선배가, 제 악몽이 되길 원치 않으신다면... (울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떨며 고개를 끄덕인다.)
배아라:...... 미안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나도 몰랐어.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눈물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른다. 작은 흐느낌이 입술 새로 샌다.)
너는 괜찮다고 하지만... ...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봐. 평생이야. 매일매일 나의 죽음을 접하고, 장례식에 가는 꿈을 되풀이해야 하는 거야. ... ... 너는 이성적이고 침착하니까 그게 꿈이라는 걸 알겠지. 하지만... 그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반복된다면, 언젠가 지겨워질까 봐. 나는, 나는 그게 무서워. 이럴 바에는 아예 만나지 말 걸 그랬다고, 잊지 않겠다는 약속 같은 거 하지 말 걸 그랬다고, 우리의 시간을 네가 후회하거나 지겨워하게 될까 봐.
너의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었어. 학창 시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떠나가버린 친구. 그렇게 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루의 만남을 대가로 존재를 바쳐야 한다니... (저에게 만남을 대가로 꼬드겨냈던 그 존재가 얼마나 사악한지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속임당한 이들이 흔히 그렇듯, 아무리 가슴을 치고 괴로워해보았자 이미 이루어진 현실은 돌이킬 수 없다.) 끝까지 미숙하고 부족한 나라서 미안해.
완전한 헤어짐을 가질지, 슬픈 기억을 매일 떠올리며 추억할지.
우리의 끝은 왜 슬픔으로 얼룩지고, 철거되지 못해 이 자리에 남을까요….
류예성:(흐느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젓는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기로 했었죠? 어떤 존재와 어떻게 약속했는지는 몰라도... 선배의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라면, 그 누구든 거절하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요. 적어도 제가 받은 행운은 모든 걸 담고 있을 거에요.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더는 어떠한 기회도 없어. 그러니까 그만 웃을 시간이야. 이제는 빛에 가까워진 당신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의연한 표정을 짓는다. 고인 눈물을 닦아내고,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에 노을을 칠해 웃어보인다.) ... 전 준비됐어요.
배아라:... ... 이해해줘서 고마워. (마지막까지 성숙히 저의 심정을 살펴주는 당신에게, 저는 끝까지 감사를 느끼며 떠나겠지. 아, 잊혀지는 것이 더없이 슬플 정도로 아쉬운 인연이다.) ... ... 내가 잊혀지더라도 네가 그 팔찌를 간직해 준다면 좋겠어. 나는 사라지더라도 팔찌는 쭉 너의 행운을 위할 테니까... (나를 잊은 당신이라면 아마 그런 팔찌는 유치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아라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이게 마지막입니다.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주고 떠나는 거예요.
추억하면 더욱 슬퍼지는 기억이라니, 그건 누굴 위한 것인가요.
희미한 빛만이 남은 아라는 예성을 그러안습니다.
그 빛은, 그 온도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해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아요.
배아라:잘 지내. ... ... 부디 행복하길. 우리의 추억과 시간은 잊혀지더라도, 이 온기가 너에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 (울음을 감추지 못해 젖어든 목소리로 당신의 행복을 빈다.)
류예성:충분히, 차고 넘칠 정도로 그래요. ... 고마웠어요, 열심히 잘 살고 잘 지낼게요, ... 안녕. (마지막 온기를 품에 안는다. 나의,영원한, 다시 없을 벗이여, ... 안녕.)
예성이 품에 안고 있던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지탱하던 무게가 사라지자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입니다.
시린 겨울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이 보입니다. 손이 닿자 으스러지는 그 연약한 빛이요.
꽃다발입니다. 흰 카멜리아와 매쉬 메리골드가 섞인...
꽃들은 겨울과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싱그럽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은 예성이 살던 동네입니다.
오늘 기차를 타고, 동네를 둘러봤습니다. 철거 예정이라 빨리 나가야 하는데.
영문 모를 꽃다발을 가만히 쳐다보면, 낡고 바랜 갈색 카드 한 장이 꽂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류예성:(영문을 모른 채 꽃다발을 집어든다. 카드?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손끝을 간질이는 꽃들 사이 그 카드를 꺼내어 읽읍시다.
어쩐지 눈시울이 흐려지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