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역시 조금 더, 조금 더 머물다 가길 권하는 판국이니 멋대로 채비해 돌아가 잘 수도 없습니다.
다들 수도의 매너 하우스가 그립지도 않은가 봅니다.
이 부근에는 별장이 아주 많지만 휴가철이 아니기 때문에
관리인 몇 명,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 하나가 전부입니다.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으니 기나긴 요양도 따분해 질 수 밖에요.
이미 서재에 있는 읽을 만한 책들은 전부 읽었고, 후원을 산책하는 것도 지겹습니다.
뭐라도... 이 답답한 생활을 바꾸어줄 어떤 작은 변화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요.
-똑똑
메이드:마리아 아가씨. 약을 가져왔습니다.
은 쟁반을 든 메이드가 약차와 다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습니다.
주치의의 처방이라고 하는데 찻잔 속 찻물의 색은 매일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어제는 몹시 붉었다가, 오늘은 아슬아슬 보랏빛을 띄고 있군요.
이곳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뿐이지만.
마리아 L. 라크엠:(오늘은 보랏빛에 가깝네. 무슨 약을 넣고 있기에 이리 매일같이 색이 달라지는 걸까.) 고마워요. (찻잔을 양손으로 조심히 들어 마신다. 아무리 조용한 걸 좋아한다지만 매일같이 조그만 별장의 똑같은 풍경만 보며 지내는 건 지루했다. 차라리 향수의 제조라도 허락받았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당신이 지루한 기색을 보이자 본가에서 따라온 메이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습니다.
메이드:아가씨, 심심하세요? 마침 오늘은 비가 그쳤으니 멀리 가지 않으신다면 산책을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폭풍우가 몰아쳐 바깥에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그쳤다니, 그것 하나는 정말 다행이네요.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병증 완화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얼른 건강해진다면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겠죠.
마리아 L. 라크엠:드디어 비가 그쳤나 보군요. (그렇잖아도 심심한 일상이건만 폭풍으로 인해 산책까지 하지 못하게 되어 얼마나 답답했던지. 메이드의 말에 안색이 한결 밝아져 고개 끄덕인다.) 그럼 금방 나갔다 올게요. (얇은 숄 하나만 걸치고선 곧장 현관을 나선다.)
메이드:꺄악! 잠깐. 잠깐만요!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그 차림으로는 안되세요!
메이드는 당신을 냅다 붙잡고는
외투와 장갑, 양산, 모자를 준비해 줍니다.
오늘은 해가 전혀 비치지 않는 날이지만 모자를 쓰고 양산을 드는 것은 귀족 자제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메이드:(모자 끈을 단단히 여며주며) 절대로 멀리 가시면 안됩니다. 아시겠지요?
마리아 L. 라크엠:(얼떨결에 붙잡혀 이것저것 챙김받는다) 알겠어요. 어차피 요 앞까지만 나갔다 올 생각이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럼 이젠 진짜로 나가도 되겠지? 양산 들고 현관을 연다)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아 가며 밖으로 나옵니다..
멀리 가지 마라고는 했지만 산책으로라도 숨통을 틔워줘야 하는 법입니다.
별장 부지 밖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괜찮겠지요.
[꽃밭] , [후원] , 그리고 [숲]으로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별장의 땅을 넘어가지는 않으면 상관없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합리화하며 꽃밭부터 먼저 가본다.)
커다란 나무들이 빙 둘러싼 넓은 부지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검은 흙과 작게 고개를 내민 파란 들꽃이 가득한 별장 소유의 꽃밭입니다.
연이어 지나간 폭풍의 영향으로 조금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푸릇하게 피어 있는 것은 여전합니다.
아직 정원사가 정리하지 못 했는지 산책로가 이리저리 튄 진흙으로 조금 지저분합니다.
마리아 L. 라크엠:(진흙을 최대한 피해 조심조심 발을 내딛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꽃향기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관찰 판정 가능한가요?)
GM:가능합니다.
마리아 L. 라크엠: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73
판정결과:
실패
잘못하다간 드레스 자락이 진흙으로 엉망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어요.
마리아 L. 라크엠:(그랬다간 메이드에게 한소리 듣겠지... 드레스 끝자락을 잡아든 채로 조심조심 산책로를 건넌다. 파란 들꽃을 몇 송이 꺾어보기도 했다. 꽃의 종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일까)
당신이 좋아하는 델피늄입니다.
마리아 L. 라크엠:(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꽃송이들을 코끝 가까이 대어 몇 번이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후원으로 향한다)
귀족 가문의 별장 치곤 조금 소박한 후원입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그네와 벤치, 장미울, 대리석 분수 따위가 아름다운 곳인데 폭풍 탓에 흠뻑 젖어 제대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아쉬운대로 닦여있는 산책로나 조금 거닐어야 할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비만 오지 않았더라면 벤치에 앉아서 분수 구경이라도 하는 건데. 빨리 해가 뜨고 빗물이 마르길 바랄 수밖에. 산책로를 한동안 거닐다가 숲으로 향한다.)
꽃밭 뒤 쪽에 난 작은 오솔길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입니다.
이 뒤로 무엇이 기다리는지, 숲의 경계는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단지 이 중 몇 마일 정도는 별장에서 소유한 영토라는 것 외에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평소에 이 길로 종종 산책을 하던 터라 외투를 바싹 여미고 조심히 걷는다면 옷에 흙이 튀지는 않겠지요.
비바람이 한 차례 훑어간 것 치곤 비교적 온건한 모습입니다.
올려다보면 듬성듬성 푸른 차양 사이로 회백색의 하늘이 보입니다.
쌀쌀한 바람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쩐지, 여기까지 나왔더니 기분이 좋네요. 며칠간 전혀 외출하지 못 했던 탓일까요?
오늘따라 조금 더 걷고 싶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숲은 후원만큼 길이 잘 닦여있진 않을 테니, 보다 더 조심해서 걸음 내딛는다. 숨 들이쉴 때마다 폐부 속으로 숲향기가 깊이 밀려들어왔다. 너무 오래 바깥에 나가있는 건 좋지 않을 테지만, 며칠만의 산책이기도 하고, 요양한지도 꽤 되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산책을 더 지속하기로 마음먹는다.)
마리아 L. 라크엠:(이러다간 길을 잃겠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온 방향을 확인한다. 기껏 회복한 건강이 다시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이쯤에서 돌아갈까, 싶던 차.) ...? (눈에 띄는 무언가로 시선을 두었다가, 형체를 알아보고는 숨을 짧게 들이켠다.) ... 누구신가요?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물으며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가본다.)
반쯤 찢어진 하얀 코트 차림의 남자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 거죠? 살아있기는 한가요?
나무둥치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어두운 피부의 남성은 군데 군데 상처를 입은 듯한 모습입니다.
길게 늘어진 장발은 흐트러져 얼굴을 가리고, 떨군 고개는 의식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남자의 곁에는 긴 장검과 손바닥만 한 총 한 정이 놓여있습니다.
??:...으윽...
순간 쓰러진 인영에게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옵니다.
마리아 L. 라크엠:(며칠이나 폭풍이 몰아쳤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쩌다 이런 숲 속에... 장검과 총을 보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인가? 쭈뼛거리며 먼발치에서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흘러나오는 신음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한다. 잠시 고민하다 가까이 다가가 그를 살짝 흔들어보았다.) 저, 괜찮으신가요? 정신 차려보세요. 이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요.
어제부터 계속 이곳에 있었다면 체온이 떨어져 아주 위험한 상태입니다. ...수상하긴 하지만.
흰 바탕에 금사를 수놓은 코트, 견장, 금색 단추와 흑요석 커프스에 긴 장검...
차려입은 모양으로 보아 귀족, 혹은 어딘가의 기사입니다.
이 근처에도 성청과 영주관이 있으니 그 곳 소속일까요?
우선 이 남자를... 어떻게든 해야겠어요.
집사에게 혼이 나겠지만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다친 데다 쫄딱 젖은 사람을 홀로 두고 간다면 분명 평생 꿈에 나와 당신을 괴롭힐 거예요.
그런 일은 귀족의 도리가 아닙니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부르고 싶지만 그 사이에 남자가 죽는다면...
일단 의식이 있는지 확인을, 아니 체온을 높이는 게 먼저일까요?
마리아 L. 라크엠:(평생 꿈에 나올 정도인지까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폭풍에 휩쓸려 상처까지 입은 이를 이대로 두고 갔다간 죽고 말 것이 자명해 보였다. 어서 사람을 불러와야 할 것 같지만, 그러기 전에 우선 잔뜩 젖은 코트를 낑낑대며 벗기고 제 외투를 덮어준다.)
코트를 벗기고 있으면, 원래는 망토가 부착되어 있었던지 견장에 달린 망가진 핀이 눈에 띄는군요.
당신이 조심조심 쓰러진 남자의 코트에 손을 올리자... 순간 억센 손아귀가 팔목을 잡아챕니다.
깜짝 놀랄틈도 없이 눈을 부릅뜬 사내는 돌연 상체를 굽히며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내더니 이내 힘 없이 손을 놓아버립니다.
찰나에 스쳤던 두 눈에 비친 것은 지독한 두려움과 눈을 동그랗게 뜬 당신의 얼굴입니다.
??:아...윽...
사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낮은 신음을 흘립니다.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의식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가...어디...
마리아 L. 라크엠:꺅! (갑작스럽게 팔목이 붙잡히자 깜짝 놀라 작게 소리를 질렀다가 얼른 헛기침을 한다.) 정신이 드셨나요? 이곳은 라크엠 가문이 소유한 별장 근처의 숲이에요.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 ... (지금은 자세한 걸 물어볼 때가 아니지. 얼른 고개 내젓곤) 우선, 제가 사람을 불러올 테니 여기 잠시만 계세요.
마리아 L. 라크엠:구해드렸다기엔, 고작 외투를 덮어드린 것뿐이지만요. (머쓱한 듯 미소하며 외투를 좀 더 단단히 둘러준다. 고민하다 장갑도 벗어주었다. 한 박자 늦게야 당신의 손 크기엔 한참 안 맞을 것 같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전 마리아 루비 라크엠이라고 해요.
??:...그렇군요. 라크엠 가문에 당신 같은 자제분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내민 장갑을 잠시 보다가 잡고만 있는다. 장갑이 손에 넉넉히 쥐여진다.)
칼리든:제 이름은 칼리든. 레노버의 기사입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 휴가를 내고 돌아가던 중 폭풍에 휘말려... 눈을 떠 보니 이곳이군요. 저,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신세를 져도 괜찮겠습니까? 급한 일은 아닌 데다 심약하신 어머니께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서...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이곳에 머물러도 될까요?
마리아 L. 라크엠:역시 기사셨군요. 어렴풋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좀 창피스러워진 느낌에 괜히 제 볼을 문지른다) 물론이죠. 머무르실 공간은 넉넉할 거예요. 저만 요양차 별장에 지내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그럼, 일어나실 수 있겠나요? 아니면 사람을 불러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레노버라면 이곳에서 산 하나 더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지방입니다.
그곳 영주관 소속의 기사님이셨군요.
그래요. 당장 손님 하나 들인다고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문은 매우 부유하고, 또 손님 접대라면 본가에 있을 때 부모님의 어깨 너머로 익혔으니까요.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몹시 안쓰럽습니다.
당분간 이곳에서 천천히 회복하도록 돕는 편이 좋겠어요.
칼리든:아, 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걱정한 것과 달리 칼리든은 주변에 있던 굵은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고 어정쩡하게 일어섭니다.
다친 곳은 팔이니까요,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저런 나뭇가지보단 마리아가 부축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다리를 다치신 게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생각보다 기력도 쇠하지 않은 것 같고. 기사는 기사일까, 싶었다.) 나뭇가지는 튀어나온 부분에 살갗이 베일 수도 있으니, 대신 제가 부축해드려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근처에 산책을 나갔던 작은 주인이 양산과 모자는 어디론가 내버리고 대신 다 죽어가는 낯선 남자를 데려왔으니까요.
하지만 곧 손님맞이에 익숙한, 수도의 저택에서 따라온 사용인답게 재빨리 두툼한 담요를 칼리든에게 둘러주고 벽난로가 켜진 방으로 데려갑니다.
메이드:이리 오세요. 세상에. 몸이 얼음장이네.
한발 늦게 달려온 별장의 집사는 조금 미묘한 낯입니다.
그는 칼리든과 마리아를 번갈아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며 메이드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릅니다.
분명 완쾌되지 않은 마리아가 숲까지 들어간 것이 못 마땅한 탓이겠죠.
GM:원한다면 심리학 판정이 가능합니다.
마리아 L. 라크엠:레노버의 기사님이라고 하세요.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폭풍을 만났다고 하시더군요. (왠지 변명하듯이 설명한다)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4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집사는 어쩐지 조금...혼란스럽고 불안해보입니다.
집사:제가 분명 멀리 가시면 안된다고...
아닙니다. 일단 아가씨는 목욕부터 하시죠.
손님께는 2층의 손님 방을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퍼시, 아가씨의 점심 식사는 되도록 따뜻한 것으로 부탁한다고 주방에 일러주세요.
집사의 뒤에 서 있던 어린 시종이 주방으로 달려가자 마리아와 칼리든은 각각 그들의 방으로 안내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집사가 당신을 따라왔을 텐데 오늘은 칼리든에게 방을 안내해주고 있군요.
그는 일류 사용인이니 주인의 손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마리아 L. 라크엠:(무슨 일이라도 있나? 칼리든에게 방을 안내해주기까지 기다렸다가 집사에게 슬쩍 물어본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세요. 저분에 대해 알고 계시는 점이라도 있나요?
집사:... ...아닙니다. 그저... 아가씨가 숲까지 가서 저런 사람을 데려오셨다니, 혹여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그보다는 어서 씻으시지요. 이제 바람도 찹니다. 외투도 그에게 건네주셨으니 몸을 데우셔야합니다.
마리아 L. 라크엠:그게... 그때는 기절해 계셨거든요. 원래는 돌아와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외투를 덮어드렸더니 금세 정신을 차리시더라구요. (집사의 걱정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싶어, 반성하는 투로 말하다가 고개 끄덕인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집사:메이드에게 일러 미리 준비해두었으니, 목욕 후 점심 식사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면 갈아입을 실내복과 물을 데운 욕조, 환복용 파티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뜨거운 욕조 안에 들어가 있으려니
당신이 아니었다면 온종일 춥고 서늘한 숲속에서 누워있었을 칼리든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정말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마리아 L. 라크엠:(위험한 마음을 가진 이였다면 큰일날 뻔한 건 내 쪽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따뜻한 물에 깊숙이 몸 담그며 휴식 취한다. 그 기사님도 지금쯤 목욕을 하고 있을까? 꼭 소설의 변곡점마냥, 지루하던 일상에 나타난 존재에게 생각이 쏠렸다.)
마리아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메이드가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내려놓습니다.
뜨거운 토마토 스튜와 치즈를 뿌려 구운 감자, 꿀을 탄 우유... 환자식이로군요.
그래도 식사는 평범하게 일반식을 먹었는데 찬 바람을 조금 쐬었다고 정말 환자 취급입니다.
메이드:손님은 잠드셔서 나중에 따로 식사준비를 해 드릴 예정입니다. 입고 오신 옷들은 세탁 중이고요. 이곳엔 성인 남성분의 의복은 사용인 정복 뿐이라 부득이하게 주인어른의 예전 의복들을 내어드렸어요.
식사를 챙겨온 어린 메이드가 당신에게 귀띔해줍니다.
마리아 L. 라크엠:잠드셨군요. 하긴, 많이 피곤하셨겠죠. 찬 비를 맞으며 그리 맨바닥에 쓰러져 계셨으니... ... 그나저나 저는 일반식을 먹어도 되는데요. (너무 연약한 사람 취급받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먹긴 먹는다)
메이드:다들 아가씨를 걱정해서 그렇죠~ 주방장님이 아가씨 식사만 따로 만들었는걸요?
조잘조잘, 어린 메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끝낼 즈음...
집사가 찾아옵니다.
집사: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아가씨?
마리아 L. 라크엠:(날 위해 따로 정성 들여 만드셨다고 하니 더 무어라 할 수도 없고. 메이드에게 감자를 잘라주어 나눠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사에게 고개 끄덕인다) 그럼요. 매번 감사해요. 기사님껜 아버님의 옷을 내어드렸다면서요?
집사: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상처 말입니다만...
왼쪽 뺨과 목덜미 부근에 얕은 찰과상, 그리고 오른팔에 바위에 찍힌 자상이 남아있습니다만 걱정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기사 분들은 회복력이 좋으시니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아가씨의 주치의가 직접 상처를 살피고 약을 처방했습니다.
집사는 '궁금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린다, 라며. 더 물어보고 싶은 점이 있는지 묻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감사해요. 그렇잖아도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쾌차하리란 말에 마음이 한결 놓인다. 숲에서 막 마주쳤을 땐 죽은 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으니.) 참, 상처가 나을 때까진 쭉 별장에 머무르게 해 드리고 싶은데. ... 괜찮지요? (약간 눈치)
집사:... ...(잠깐 침묵하다가) 상처가 나을 때까지 머무르시게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식기를 챙기며 말을 잇는다.) 아가씨는아직 미혼이시고 혼약을 주고받은 자제 분도 없으시죠. 다른 미혼의 귀족과 너무 가까이 하시면 좋지 못한 소문이 도니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주치의 말로는 길어도 이 주면 상처가 나을 거라고 하니, 이 주 정도만 불편해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쉬십시오. 아가씨.
말을 마친 집사는 방을 나섭니다.
아무래도 칼리든은 집사에게 단단히 밉보인 것 같습니다.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저리 부랴부랴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니...
물론 이 곳에는 환자인 마리아 홀로 있으니 손님맞이에 소홀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칼리든이 머무는 동안은 마리아에게도 말벗이 생기는 셈이니 조금 덜 무료할 텐데요.
마리아 L. 라크엠:(내가 데려온 게 마음에 안 드셨나...? 저럴 분이 아니신데.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부상 입은 이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덕목이고, 게다가 같은 귀족이기까지 하니 라크엠의 평판이나 차후 가문간의 관계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지만 어쨌건 허락을 받았으니 된 거겠지.)
집사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이상한 소문이 난다면 칼리든에게도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고요.
하지만... 그가 돌아간다면 당신은 다시 홀로 남을 거예요.
조금 울적한 기분입니다. 칼리든도 자고 있다고 하니 잠시 눈을 붙였다 다시 그를 찾아가 봐야겠어요.
잠자리는 편한지, 몸은 조금 괜찮은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으니까요.
마리아 L. 라크엠:(그래... 제 생각과는 별개로, 오히려 귀족이기에 관계를 더욱 신경써야 하는 것도 있을 테다. 이전부터 집사의 말은 들어서 나쁠 게 없었으니, 조심스레 대해야지- 하고 다짐하며 일찌감치 침대에 눕는다)
퍼시:진짜 별거 아니라 그래요! 그, 그. 이거에요. 집사장님이 주셨던 손수건을 두고와서. 좋아하는거라. (꺼내어 들어 보여준다.)
마리아 L. 라크엠:손수건? 아아... 집사장이 네게 수건도 주셨구나. 좋은 분이니까. 널 예쁘게 봐주시는 거겠지. (보고서는 곧 납득한다.) 그래. 얼른 들어가 자렴. 여기엔 따로 호위기사도 없으니 늦은 밤에 숲에서 나온 동물이라도 마주치면 안 되잖아. (따지자면 기사가 머무르고 있긴 하지만. 그분은 맡은 임무가 따로 있을 테니.)
퍼시:(고개 끄덕끄덕) 네. 이만 들어가 잘게요. 아가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퍼시는 꾸벅 목례하고는 방으로 사라집니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건강을 생각한다면 도로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이런 어중간한 시각에 깨어서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마리아 L. 라크엠:(괜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고 잔소리 듣고 싶진 않으니,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기로 한다)
마리아 L. 라크엠:저는 거의 다 나아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환자식을 주신답니다. 이렇게 약차도 꼬박꼬박 내어주시고요. (조금은 푸념이 담긴 투로 말하다가) 요양에는 산책처럼 꾸준하게 움직여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상태가 괜찮으시다면 함께 산책을 하지 않으시겠나요? 햇살이 아주 좋아 보여요.
칼리든:그만큼 영애를 걱정하시는 걸 거예요. (가볍게 웃는다.) 사랑 받으시는 것 같아 부러운걸요. (아주 잠깐, 씁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가) 권유해주신다면야, 기꺼이요. 저 역시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은 지루한터라.
마리아 L. 라크엠:... (내가 눈치없는 말을 한 걸까? 왠지 미안해지는 마음에 입술만 달싹인다.) 저도 이곳에 머무른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네요. 이미 서재에 있는 책도 몇 번씩 다 읽어버렸답니다. (남은 약차를 전부 마시고는) 그럼 외출 준비를 하고 올게요. 현관에서 뵈어요.
칼리든:그건 확실히 지루하셨겠는걸요. 친우 한 분 없이 혼자... (가벼이 웃는다) 네. 현관에서 뵈어요.
당신은 외출 준비를 합니다. 수수한 복장에 어제처럼 양산과 모자를 쓰고, 몰래 비상금이 든 손가방도 챙깁니다.
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출다운 외출을 하려니 조금 설레는군요.
현관에 가면, 가벼운 외투 하나만 덧입은 칼리든이 서 있습니다.
칼리든:아. 오셨나요? 양산은 이리 주세요. 대신 들어드릴게요.
마리아 L. 라크엠:앗, 이 정도는... (거절하려다가 이내 순순히 건네준다. 과연 기사여서인지, 매너가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쯤은 집사도 넘어가주겠지?) 감사해요.
두 사람은 저택의 정문을 지나, 숲과 반대쪽 길로 십여분을 걸어 대기 중인 마차를 타고 바로 이어지는 마을, 비슐트에 도착합니다.
이 일대는 귀족들의 별장이 여럿 모여있고 기숙 아카데미도 하나 설립 되어있기 때문에 이 부근에 조합 소속의 마차가 항상 대기 중이거든요.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진 빽빽한 숲길과 듬성듬성 자리한 민가가 눈에 띕니다.
오 분여를 달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장터]와 이야기꾼의 [무대]입니다.
마리아로서는 모두 오늘 처음 보는 것들이죠. 칼리든 역시 이곳저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봅니다.
칼리든:(먼저 마차에서 내린 후, 당신이 내리는 것을 돕는다.)
마리아 L. 라크엠:별장에 오래 머물렀는데도 여기까지 와 보는 건 처음이에요. (당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다.) 칼리든도 이 지역은 처음이시겠지요? ... 어디부터 가보면 좋으려나요. 장터를 먼저 돌아보시겠어요?
칼리든:예, 저도 이 지역은 처음입니다. 작은 마을인데도 꽤나 활기가 있군요. (장터라는 말에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까요. 자고로 한 마을에서 가장 활발한 건 장터니까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닷새에 한 번 열린다는 장이 서는 날입니다.
특이한 빛깔의 염색 천과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장식품들, 신선한 식자재, 과일 따위가 그득하게 쌓여있어요.
흙으로 빚고 유약을 발라 구운 목걸이를 파는 상인도 있고요,
아라베스크 무늬의 양탄자, 묘하게 비뚤어진 꽃병... 저택에서는 도통 구경할 수 없었던 신기한 것들입니다.
칼리든:(당신을 신경쓰며 같이 장터의 거리를 걷는다.) 관심 가는 것이 있으신가요?
마리아 L. 라크엠:예쁜 물건들이 많군요. 수도의 장과는 또 다르네요. (반짝이는 장신구보다는 그 곁의 유리병이나, 싱싱하게 향을 뽐내는 생화 쪽 좌판에 절로 눈길이 간다.) 라크엠에 대해 들어보셨다면 알겠지만, 저 역시도 향수에 관심이 많아서요. 좋은 향의 꽃이 있다면, 추출하여 향수로 만들고 싶은데... 적절한 모양새의 향수병도 찾고 싶네요.
칼리든:아. 네. 들어봤습니다. 향수로 유명한 가문이었죠. 저희 저택에서도 종종 라크엠의 향수를 사용했거든요. 저도 좋아한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라크엠의 영애 답게 만드실 줄 아는군요. 그러면 꽃과 향수병을 찾아볼까요?
마리아 L. 라크엠:정말요? 칼리든의 저택에서도 라크엠의 향수를... (아직 실력이 미숙하여 제가 만든 향수를 시중에 내놓아본 적 없었지만, 꼭 제가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기뻤다.) 언젠가 제가 만든 향수도 선물로 보내드릴까 봐요. 칼리든의 취향에 맞아야 할 텐데요... 네, 좋아요. (끄덕이며 좌판을 둘러본다)
한 켠에 제철 꽃들을 잔뜩 모아두고 파는 꽃집이있습니다.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뽑내네요.
칼리든:저 쪽으로 가보시겠어요? 마음에 드시는 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마리아 L. 라크엠:좋아요. (그쪽으로 향하여 꽃들을 살펴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풍겨오는 향기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칼리든은 평소에 꽃을 좋아하시는 편인가요?
칼리든:저는... (약간의 간극. 그 후에 다시 평소처럼 말을 잇는다.) 네, 좋아해요. 향도 좋고, 아름답잖아요. 영원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요.
마리아 L. 라크엠:그렇죠. ... 사실, 영원한 건 어디에도 존재치 않겠지만요. 그래도 영원을 바라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네요. 들꽃보다는 꽃을 오래오래 피울 수 있는 나무가 칼리든의 취향에 좀 더 맞을지 모르겠네요. (그리 말하며 메리골드를 한 다발 집어들어 향을 맡는다.)
칼리든:맞아요. 제 마음을 잘 아시는군요. (나직히 웃어보인다.) 하루 동안 아름답게 피고 사라질 들꽃보다는... 오래오래 남아, 은은한 향을 선사해줄 나무가 좋아요. (당신이 메리골드의 향을 맡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마리아 L. 라크엠:나중에 묘목을 선물로 보내드려야 할까 봐요. 꽃을 피우는 나무론... 역시 벚나무도 아름다울 것 같지요. 벚꽃에서 추출해내 만든 향수도 꽤나 향이 부드럽고 좋답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벚꽃이 필 철은 아니니, 오늘은 이 메리골드로 정할래요. (계산해주세요, 하며 주인에게 꽃 한 묶음을 건넨다. 비상금을 챙겨오길 잘했다)
칼리든:...그래주신다면 소중히 간직할게요. (옅게 웃어보인다.) 벚꽃으로도 향수를 만들 수 있군요. 몰랐어요. 향수의 세계란 신기하네요. (당신의 말을 경청하며 간간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의 향수는 메리골드로 하시나요? 향이 궁금해지는걸요.
주인은 돈을 받고, 당신에게 꽃다발을 건넵니다.
주인:어휴~~ 두 분께서 놀러나오셨나봐요? 사이 좋아보이셔서 좋네요! 이건 서비스에요. (붉은 장미 두 송이를 더 챙겨준다.)
마리아 L. 라크엠:그럼요. 향이 좋은 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요. 의외로 생각도 못한 재료에서 향을 추출해내기도 한답니다. 향수는 여러 향을 섞어내어 조향한 결과물이니까요. (꽃다발을 받아들다가, 장미만큼이나 귀끝이 붉어진다.) 네... 네? 감사해요. (당황해서 말끝 더듬으며 얼레벌레 장미꽃 받는다.)
오늘 향수엔 메리골드와 더불어 장미 향도 더해볼까 봐요... (그러면서 한 송이를 당신에게 건넨다. 손끝이 조금 떨리는 듯해, 애써 힘을 주어야 했다.)
칼리든:아... (칼리든 역시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는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어쩐지 부끄러워 보이는 기색으로 장미 한 송이를 받아든다.)...네. 무척. 좋은 향이 될 것 같네요.
마리아 L. 라크엠:참, 칼리든은 레노버의 기사라고 하셨었죠? 혹 황태자나 황자님을 뵌 적도 있으신가요?
칼리든:...아. (그 말에는 잠깐 답을 망설이는 듯 텀이 있습니다.) 예. 뵌 적 있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방금 좀 망설이지 않았나...?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걸까. 그의 눈을 바라본다)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글쎄요. 어쩐지 그 주제에 대해 꺼내기 꺼려한다는 기색이 느껴진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꺼려한다면 괜히 물어 좋을 건 없겠지.) 그렇군요. 레노버의 영주님께서는 좋은 주군이신가요? (자연스럽게 화제 넘긴다)
칼리든:...(당신이 화제를 넘겨준 것을 눈치챘는지 살짝 웃는다) 네. 좋은 분이십니다.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신경 써주세요.
문득 길 옆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작은 무대 앞으로, 땅을 파고 긴 나무 의자를 놓은 작은 원형 극장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듣자 하니 이곳은 거의 매일같이 음유시인과 이야기꾼, 유랑 배우들이 극을 올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마을 주민들의 문화공간이라고 합니다.
관심이 있다면 한 번 구경해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향수병을 두어 개 사들고는, 극장을 바라본다. 시끄러운 건 좋아하지 않아 도시의 극장에는 잘 가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곳은 그리 큰 마을은 아니니 적당히 괜찮지 않을까.) 극장이 보이네요. 이런 작은 마을에도 음유시인들이 들리나 봐요. 괜찮다면 같이 가보시겠어요?
칼리든:음유시인들의 이야기와 노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몇 안되는 활력소니까요. (당신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가벼이 끄덕인다.) 연극은 좋아하시나요?
근처로 가까이 가면, 제대로 된 좌석조차 없어 붙어 앉아야합니다.
칼리든이 안 쪽으로 들어가 앉더니, 가장 바깥 쪽에 당신의 자리를 넉넉하게 만들어주네요.
어디선가 챙겨온 손수건까지 꺼내 깔아줍니다.
마리아 L. 라크엠:(과연 기사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매너에, 입가 살짝 가렸다가도 조심히 그 위로 앉는다.) 고마워요. 연극은 자주 보러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보러 가고는 해요. 다양한 군상의 등장인물들을 볼 수 있는 게 즐거워서요. 칼리든은 어떤가요?
칼리든:저도 좋아합니다. 일이 바쁘고 시간이 없어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요. 아무래도 주군을 호위하고, 검술 훈련을 하고, 무구를 정리하고.. 그러다보면 여가시간이 거의 나지 않거든요.
오늘은 나무 인형을 든 남녀가 그림자 인형극을 공연하기 위해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아무래도 그렇겠군요... 기사는 항상 주군의 곁을 지켜야 하니까요. (어젯밤을 상기한다. 폭풍에 흠뻑 젖고 부상을 입어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떡 벌어진 어깨나 무기에선 숨길 수 없는 태가 묻어나왔었지.) 일이 고되지는 않으신가요?
칼리든:...괜찮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왔으니까요. (잔잔히 미소짓는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모호한 대답.) 기사로 살아온 세월도 벌써 제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고요.
정식 공연이 아닌 탓에 사람들은 연극을 보면서도 이런 저런 수다를 떱니다. 우리들처럼요.
앞에서는 그림자 인형극이 한창 진행중입니다.
왕자:애원컨데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이 섬에 사시는 분입니까? 신기한 그대여! 당신은 하계의 여인이십니까?
공주:신기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저 보통의 여인이랍니다.
난파당한 왕자를 발견한 공주가 서로 속살거리듯 대화를 나눕니다.
이 극은 저택의 서재에도 한 권 있는 유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연되는 연극인가 봅니다.
마리아 L. 라크엠:... 얼마나 어릴 적부터 칼을 잡아오셨나요? (어릴 때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기사라는 직업과 무척 잘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의 의지와는 또 다른 모양이다. 시선은 무대를 향해 있다가도, 이따금씩 옆쪽의 당신을 바라보았다)
칼리든:...걷고,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상기한다. 아직 자신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부터 쥐여 졌던 칼. 엄한 교사와 혹독한 훈련 속에, 운 좋게도 재능이 있어 좋은 성과를 올리며 훌륭한 기사로 키워졌지만... 그 시간 속에 즐거웠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던지.) 적어도 기억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검과 함께 했네요.
그 외에도 늙은 왕, 요정, 신하들이 여럿 등장하고, 비로소 두 젊은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여 함께 돌아가는 대목으로 막이 내립니다.
공연이 끝나자 장막 속에 숨어있던 두 배우가 나무 인형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와 절도있게 인사를 합니다.
관객 틈에 섞여 박수를 치고 일어나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네요.
생각보다 재미있는 극이었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그렇게나 일찍요...? 그런... (자신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는지도 다 파악할 수 없을 때부터였지 않나. 어쩌면 당신도 저처럼 향수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거나, 약초를 키우는 데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기사의 훈련이 쉬운 일도 아닐 테니, 그간 당신이 겪어 왔을 지난한 과거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 눈썹이 처진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칼리든:...귀족가문의 승계 자격이 없는 자제들이란 본래 그런 법이니까요. (가문을 위해 길러지는, 후계자가 아닌 자식들. 그 중에서도 왜 하필 기사로 선택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 하지만... 막연히 생각한다. 손에 쥔 것이 검이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고...)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인걸요. 지금은 제 일에 만족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에 미소를 건다.)
그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슬슬 시간이 꽤 지나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혹시 미처 들르지 못한 곳이 있으십니까?
마리아 L. 라크엠:그래도 지금은 만족하신다니 다행이지만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연히 웃음이 나오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인데, 매일이 웃을 일도 없이 지나간다면 너무 단조로울 것 같으니까요. (자신의 삶이라 하여 단조롭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당신과는 달리 후계자로 자라나며 온갖 사교 파티에도 자주 다녀보고, 조향의 재료를 손수 얻기 위해 부모님과 다양한 곳을 돌아다녀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아, 아니에요. 오늘은 이만큼도 많이 돌아본 것 같아요. 이곳에 온 지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되었지만, 이곳 비슐트에 와본 건 처음이라서요. 다음에 또 나올 수 있다면 좋겠네요. (라고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했다가 혼자 당황했다. 칼리든은 몸이 나으면 다시 돌아가야 할 텐데.)
칼리든:네. 지금은... 만족합니다.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시선은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있다. 무언가를 상기하거나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을 생각하듯이...)
처음 와보셨다고요? (그 말에는 조금 놀란 기색입니다.) 그러면, 내내 저택 안에서만 지내셨나요? 보아하니 사용인도 별로 없어, 심심하셨을 것 같은데...
마리아 L. 라크엠:(푸른 시선이 주변보다도 제게 더 오래도록 향해 있는 것만 같다면, 저의 착각일까? 그래. 아무래도 두 달 가까이 지루한 별장 안에서만 지내며 매일 보던 사용인만 봐 와서 그런 것이리라. 새로운 만남에, 이렇게까지 가슴이 동요하는 건...) 네. 그간은 요양을 하느라 멀리까진 나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더라구요. 집사장이 어찌도 붙잡는지... 오늘 아침에도 환자식을 받았잖아요. 이제 거의 다 나았는데 말이죠.
칼리든:...몸이 많이 약하신가보군요. (당신을 잠시 바라보다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머무는 동안 만이라도, 말동무가 되어드려도...
...아니, 아닙니다. 아무래도 시선이 신경쓰이시겠죠. 방금 말은 못 들은걸로 해주세요.
칼리든은 이제 진짜 돌아가야겠다며, 마을 입구에서 마차를 잡습니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도 별 말이 없네요.
마리아 L. 라크엠:네, 네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당신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라탄다. 한동안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부유했다.)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 연다.) 칼리든. 아까 해주신 말... 저는 좋아요. 어차피 이곳은 근외의 별장이기도 하고... (집사장의 조언을 떠올리자면, 이래서는 안 될 텐데. 그렇지만 성별이 다르단 이유만으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니 조금은 억울했다.)
칼리든:(그러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한 가문의 후계자가 되실 분께서, 저 같은 사람과 소문이 나도 곤란하실겁니다. 일개 기사일 뿐인걸요. 작위도 높지 않고...
마리아 L. 라크엠:그래도... 칼리든이 제게 나쁜 마음이나 속셈이 있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사이 좋은 친우로 지낼 수도 있는걸요. 제가 귀족이고 후계자라고는 하지만 작위에 따라 사귈 사람마저 나누고 싶지는 않아요.
칼리든:...영애께서는 정말로 마음씨가 고우시군요. (그 말에 나직히 미소짓습니다.) 마음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영애. 진심으로 기뻐요. 저 역시 그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 사회는 가십을 좋아한다는 것을. 영애께서 저로 인해 안 좋은 소문을 듣게 되시면 제 마음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 ... 네, 맞는 말이에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저는 사교계에선 햇병아리나 다름없는 수준. 그들이 얼마나 향락과 사치에만 찌든 삶을 보내는지도, 향락에도 질려 매일 물어뜯을 만한 가십거리만을 찾아 헤매는지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괜시리 분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가까워지고 싶은 이와도 신분이라는 벽에 가로막혀야만 한다니.)
그러면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별장 안에서는 괜찮겠지요? 적어도 그곳 안에서만은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어떨까요? ... 이 또한 무례한 부탁이라면 너그러이 넘겨주세요.
칼리든:...(더 가까워지면 안되는데. 더 이상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칼리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피어오른다.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뱉어진 한 마디.) ...예. 별장 안에서라면... (어쩌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이 말을. 하지만 잠깐의 꿈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영애께, 이 정도의 보답은 하고 싶어요.
마리아 L. 라크엠:(그제야 분하단 듯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양손에서 힘을 풀고는 생긋 미소짓는다.) 감사해요, 칼리든.
간단한 저녁 식사 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메이드 한 명이 당신을 따라 방으로 돌아와 환복을 돕습니다.
메이드:마리아 아가씨. 솔직하게 말씀하셔요. 혹시 비슐트까지 내려가셨어요?
마리아 L. 라크엠:... ... ...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변명할 거리를 찾아보려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택도 없는 것 같지.) 어떻게 아셨나요?
메이드:제가 아가씨랑 지낸지가 얼마인데 그것도 못 알아볼까봐요? 그 기사님이 가자고 꼬셨죠?
마리아 L. 라크엠:꼬, 꼬시다뇨! 전혀요. 제가 먼저 산책이나 나가자고 한 거예요. 설마 집사장이 기사님을 부르신 것도 그 때문은 아니겠죠?
메이드:아마 맞을걸요~지금쯤 엄청 혼나고 계시지 않을까요~ (이건 반 쯤 장난입니다)
마리아 L. 라크엠:뭐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서 아니라고 해명이라도 드려야겠네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튼 오늘 꽃도 사고, 향수병도 사고, 얼마나 즐거웠는데요.
메이드:어휴, 농담이에요. 농담! 설마 진짜 그러시겠어요? (까르르 웃고는)
즐거우셨다는 건 다행이지만... 아가씨는 몸이 약하시니까 오래 돌아다니시면 안돼요. 금방 발이 붓고 호흡이 어려워 질 거예요. 오늘은 괜찮으셨어요? 아프시진 않으셨구요?
마리아 L. 라크엠:그럼요. 오늘은 멀쩡해요. 애초에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는걸요. 시장을 돌아보고, 연극 구경을 한 게 다예요. (그러고 보면 그 연극, 유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댔지. 그 책이 어떤 건지 떠올려볼 수 있을까요)
어릴 적에 자주 읽었던 유명한 고전 소설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 판본까지 나와 있습니다.
메이드:연극이요? 재미있었나요? 어떤 내용이었어요?
마리아 L. 라크엠:유명한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그림자 인형극이었어요. 난파당한 왕자가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돌아가는 내용이었답니다. 진작 마을에 갔더라면 더 재밌는 극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시는지 다들 허락을 해주질 않으셔서요.
참... 혹시 아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으셨죠? 미혼인 아가씨께서 다른 미혼의 남성분과 나들이를 했다는 게 수도에 있는 주인어른 귀에 들어가면 혼이 나실 거예요. 마님도 아주 엄하시고...
마리아 L. 라크엠:으음... 네, 일단은 없었어요. 제가 사교계에 많이 얼굴을 비춘 편은 아니었기도 하고요. ... 하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성별이 다르고, 작위가 차이가 난단 이유만으로 함께 가벼운 나들이도 가지 못한다는 건 너무 슬픈걸요.
메이드:어쩔 수 없죠. 귀족 사회가 다 그런거 아니겠어요. 저야 메이드여서 잘은 모르지만... 뭣보다 라크엠 주인 내외께서 아가씨를 아끼시니까, 조금의 소문에도 엮이시게 만들기 싫어서 그러시는걸거에요. 이해하세요.
그런데... 그 기사님이 마음에 드세요?
마리아 L. 라크엠:저도 부모님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 후계자로서의 위치도, 책임감의 무게도 알고 있지만요. 이렇게 제 위치를 상기하게 될 때마다 조금은 기분이 처지네요. (사실 그전까진 마리아는 후계자로서의 제 위치를 잘 받아들여 순종하던 축에 속했다. 후계 교육도 열심히 받았고 사교계에 나가거나 조향에 관련된 것도 성실히 임해 왔었으니. 그가 무리없이 후계를 이어받음은 자명해 보였다. 폭풍에 휘말렸던 기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작위의 차이에 대한 의문조차 제대로 가져본 적 없었으니 말이다.)
(메이드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작게 움찔했다.) ... 그냥 이야기가 잘 통해서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메이드:흐으음~ 정말로요? 단순히 친구 사이의 우정이에요? (또 놀리고 있다)
마리아 L. 라크엠:... ... 놀리는 건 그만두세요. (조금 빨개진 얼굴을 후다닥 손으로 감싸 가린다.) 아무튼 집사장님께도 잘 말해주세요. 기사님은 정말 다정하고 좋으신 분이세요.
메이드:알았어요~ (장난스레 웃고는 마지막으로 옷 매무새를 정리해준다.) 제가 기사님 안 혼내도록 잘 말해볼게요.
그럼 주무세요, 아가씨!
메이드가 방을 나가면 오늘도 당신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게됩니다.
하지만 온종일 새로운 경험을 잔뜩 했기 때문에 가슴이 설레어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아요.
잠깐 발코니에서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요?
마리아 L. 라크엠:(마을에서 보았던 시장의 풍경과, 무대 위의 배우들, 사람들의 대화와 웃음으로 비롯되는 소음들이 전시회의 그림들마냥 늘어선다. 때마다 한 사람의 모습이 그에 함께 끼어있다. 장미꽃을 받아드는 기사, 제 자리에 손수건을 깔아주는 기사, 직업과 작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 별장에 온 이후로 내내 반복되기만 하던 일상에 갑자기 새로운 추억이 잔뜩 덧칠되니, 곱씹기만 하다 금세 새벽이 올 것만 같다. 가볍게 숄을 걸친 채로 -아마 메이드가 알면 경을 치겠지만- 발코니로 향한다.)
평소에는 항상 잠가두기만 했던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가면 칠흑 같은 어둠 위로 반짝거리는 별빛이 쏟아집니다.
마치 커다란 우주 속에, 나와, 저 별들 그리고... 저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한 층 아래의 손님방 발코니에 칼리든이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손을 흔들면 보일까요?
마리아 L. 라크엠:(머릿속을 그득 채우는 기사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비우려고 발코니에 나갔지만,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바로 아래층 발코니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하고야 만다. 그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라고 메이드에게도 자신에게도 되뇌이고 있지만, 그를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이 마음이 과연 단순한 우정일까... 박동하는 심장을 자꾸만 의식하게 되는 이 마음이.)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바깥을 보고 있을까?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을 한 번 보고, 칼리든을 번갈아보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손을 살짝 흔들어본다. 그림자가 당신을 간지럽힐까.)
...영애? (몸을 돌려 위를 바라봅니다. 당신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지고 말아서...) 안 주무셨나요.
마리아 L. 라크엠:(알아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 그대로 몰라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 저 스스로도 제 정확한 마음이 어떤지 짐작이 어렵다. 결국 당신이 돌아보자, 저도 모르게 가득이 미소지어버렸으면서.)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런 칼리든은?
칼리든: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미소를 숨기지 못한다. 밤의 어둠이 제 표정을 가려주기만을 바랄 뿐. 그럼에도 쏟아져내리는 별빛 속 당신의 미소만큼은 왜 이리 눈부셔서 눈을 멀게 만드는지) 저 역시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별을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꽤 많이 돌아다니셨는데, 피곤하시지는 않고요.
마리아 L. 라크엠:(당신의 입술이 그리는 호선은 꼭 당신의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고 다정해서, 보고 있으면서도 더 보고 싶어진다. 제 목소리가 괜히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지, 제 옷차림이 너무 이상하진 않을지 살피게 된다. 그제야 자신이 잠옷 차림인 걸 깨닫고 혹여나 우습진 않을까 하여 숄을 더 넓게 둘러본다.) 네, 오랜만에 바깥 외출을 다녀온 것 때문인지... 자꾸 그때의 풍경이 떠올라서 오던 잠도 달아나네요. 오늘밤은 하늘마저도 맑네요. 별구경을 좋아하시나요?
칼리든:네. 좋아합니다. 평상시에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별을 헤아리곤 했어요. 언제나 제 자리에서 변함 없이 빛나는 별들을 보고 있자면, 제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문제들은 가볍게 느껴졌거든요. 저 별빛처럼, 묵묵하게 빛나고 있으면... 지금의 문제들도, 다 지나갈 것처럼 생각되어서.
...영애께서는요?
마리아 L. 라크엠:건강으로 인해 염려를 받은 날이 많아, 밤하늘을 보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 역시 좋아해요. 조향이나 독서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덧 늦은 밤이 되어있고는 하는데,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면 너르게 퍼진 별빛이 사근하고 보드랍게 보여서, 모든 걸 잠시 잊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더군요. 평온을 찾아줄 수 있는 존재란 건 참 소중한 것 같아요.
참... 오늘, 돌아오자마자 집사장님이 칼리든을 불렀다고 들었어요. 뭔가 안 좋은 소릴 듣지는 않으셨나요?
칼리든:(당신의 좋아한다, 라는 말이 별 것 아닌데 왜 이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공통점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네, 그렇네요. 평온을 찾아줄 수 있는 존재라는건... (당신을 바라보며) 소중하죠.
...아. 집사장님이... (그 말에 당신을 바라보다, 조금 웃는다.) 걱정하셨나요?
마리아 L. 라크엠:(그런 표정으로, 푸른 시선을 제게 향하며 그리 말하면... 괜한 오해를 해버릴 것만 같아진다. 귀끝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이 정도쯤은 당신에게 드러나지 않을 테니. 이어지는 웃음에 이번엔 볼까지 빨개졌지만.) 네에... 괜한 이야길 하진 않았을까 싶어서요.
칼리든:그리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습니다. 아가씨는 몸이 약하시니 너무 멋대로 굴지 말라...정도였어요. 아가씨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진정으로 아가씨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라고요.
마리아 L. 라크엠:... 제가 걱정한 게 딱 그런 이야기였는데 말이에요. (작게 한숨 내쉰다.) 이미 칼리든은 잘해주고 계신걸요. 사실 아까 마차에서도 제가 떼를 쓴 거나 다름없고요. 오히려 저 때문에 괜히 곤란해지신 건 아닌지 저어가 되네요.
칼리든:곤란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작게 미소 짓습니다.) 오히려... 집사장님께서 얼마나 영애를 소중히 여기시는지 느껴져서, 기뻤는걸요. 영애께서는 사랑받고 자라셨구나, 싶어서요.
마리아 L. 라크엠:그런가요, 부끄럽네요. 요새엔 사랑받는 수준을 넘어 과보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답니다. (곤란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긴 하겠지만, 아마 겉치레식인 말이겠지. 집사장을 입단속이라도 시켜둬야 하나...) 오늘 사온 메리골드로 향수를 만들게 된다면, 칼리든에게 보내드리고 싶은데... 혹, 괜찮으실까요.
칼리든:그게 다 애정에서 비롯된걸텐데요. 그리고, 가족이 보호하면 하는 만큼... 나중에 사회에서도 보호 받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 속상해만은 마세요. (가벼이 미소짓고는)
...제게요? (다소 놀란 목소리가 이어진다.) ...제가 그래도 될까요?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은데...
마리아 L. 라크엠:저를 아껴주시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감사하게 여기고 있지만요. 그래도 이제 얼마 가지 않으면 성년이 될 텐데, 조금쯤은 풀어주셔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못할 건 무어 있냐는 듯 고개 끄덕인다.) 그럼요. 사실 지금 제 실력으론 시중에 내놓을 만큼 완벽한 향수를 만들지는 못해서, 제 부족한 향수를 받아주신다면 제가 더 감사한걸요. 소포를 보낼 수 있게 주소지를 알려주셔야겠지만요.
칼리든:성년이 되신 후에는 정식으로 데뷔탕트도 치르시고, 라크엠의 이름 아래 활동하게 되실테니 지금보다는 훨씬 자유로워지실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살짝 웃는다.)
(주소지라는 말에는 잠시 침묵하다가) ... ...아.. 만드는데, 오래 걸리나요?
마리아 L. 라크엠:아, 아무래도 향을 추출하고 다른 재료들과 섞으며 조합을 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요. ... ... 기간이 길어지면, 어려울까요?
칼리든:...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받을 수...있다면 좋겠네요.
...저,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더 늦게 자면 내일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요. 영애께서도 이만 주무세요.
마리아 L. 라크엠:아, 네. 제가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었나 봐요. 주무세요, 칼리든. (이 또한 당신에겐 좋지 못한 주제였을까. 가정환경이 썩 좋지 않은 것일지, 홀로 조심스레 추측해보고는 밤인사를 건넨다.) 좋은 꿈 꾸시기를.
칼리든:...좋은 꿈 꾸세요. 영애.
칼리든은 발코니에서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당신도 발코니에서 나와, 문을 닫으려고 하면...
'똑똑'
야트막한 노크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이제 저택의 모든 일과가 전부 종료되었을 시간인데...
집사나 메이드일까요?
마리아 L. 라크엠:(이 시간까지 잠들지 않은 게 들켰나? 얼른 목소리를 졸린 척 다듬고는) ... 누구신가요?
퍼시:저, 퍼시입니다. 아가씨.
마리아 L. 라크엠:퍼시...? 어제도 늦게까지 안 자더니, 오늘도 어딜 다녀온 거니? (다가가 문을 열어준다.)
퍼시:(문을 열어주면 꾸벅 인사합니다.) 쉬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이면 되는데,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리아 L. 라크엠:상관없기는 한데... 꼭 이 시간이어야만 하는 거니? 낮에 말하지 않고. (바빠서 그러려나? 의아하게 그를 바라본다)
퍼시:조금, 급한 안건이라...(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집에 계시는 손님에 관한거거든요.
황태자의 기사단이 아랫 마을, 비슐트까지 당도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마리아 L. 라크엠:... 기사님에 대해서?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이를 상기한다. 칼리든도 아직은 잠들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칼리든 씨는 레노버의 기사님이라고 하였는걸.
퍼시:바로 그게 문제에요.
...제가 알기로, 레노버의 기사는 푸른 제복을 입어요.
...그러니까... (말 끝을 흐립니다) 추측일 뿐이지만요.
황태자 직속 기사단이 여기까지 왔다면 목적은 2황자 하나만은 아닐거에요.
...조심하세요. 너무 믿지 마시고요.
마리아 L. 라크엠:... ... 푸른 제복? (기억을 더듬는다. 전날 숲속에 쓰러져있던 칼리든은 분명 흰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설마, 황태자님의 기사단은 흰색 제복을 입니? (그럴 리는 없을 거라 믿지만. 굳이 출신지를 속이는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퍼시: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요.
...전 이만 물러가볼게요. 제 말 명심하세요! 그를 너무 믿지 마세요.
퍼시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급히 발을 옮겨 사라져버립니다.
...이게 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마리아 L. 라크엠: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이어지려던 물음이 입안에서만 맴돈다. 그를 믿지 말아야 한다니. 만약 그가 황태자의 기사단이라고 해도, 휴가를 내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뿐인데. 꼭 그를 찾으러 오기라도 했단 것처럼 들리질 않나.)
(방금까지만 해도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달콤한 꿈결에서 깨어나란 것마냥 차디찬 손길이 저를 잡아당기는 듯하다. 가슴이 술렁인다.)
(문가를 잡고 한참이나 아무도 없는 복도를 바라보다가, 착잡한 심경으로 다시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본다.)
작은 [분수대]와, 티 파티를 열 수 있는 테이블, 원형의 [미로], 드넓은 [꽃밭]과 장식 체스말들이 놓여있는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저택의 뒤쪽 발코니를 통해 계단을 밟고 내려갈 수 있지요.
칼리든은 당신에게 기꺼이 한쪽 팔을 내밀고 에스코트를 청합니다.
칼리든:어디부터 가시겠어요?
마리아 L. 라크엠:(이렇게 기사도를 갖춘 다정한 사람인데, ... 석연찮은 점이 대체 무어 있을까. 있다 한들 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자면 안개처럼 흐려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쑥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팔을 살짝 잡았다.) 분수대부터 가볼까요. 이제 비가 그쳤으니 물이 나오고 있으면 좋겠어요.
칼리든:그러면, 분수대부터 갈까요.
두 사람은 함께 분수대로 걸음을 옮깁니다.
비너스 신상이 선 아름다운 분수대입니다. 이곳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죠.
칼리든:저택에서 쉬는 동안, 후원을 종종 거닐었는데... 정말 관리가 잘 된, 아름다운 곳이더라구요.
집사장님이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지 알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집사장님이 워낙 꼼꼼하고 섬세한 분이셔서요. 제가 이곳에 온 후로도 매번 신경써 주셨고... ... 정작 저는 집안에서 요양에 집중하느라 이렇게 잘 꾸며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요. (후원의 고즈넉한 정경에 감탄하며 느리게 돌아본다.)
이 분수대에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들었어요. 칼리든은 빌고 싶은 소원이 있으신가요?
칼리든:집 앞 후원도 못 돌아볼 정도셨다니, 몸이 정말 많이 안좋으셨군요. (안타깝다는 표정이 언뜻 스쳤다가, 이내 실례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지운다.)
소원이라... ...(잠시 침묵해요) 예, 있습니다. 라크엠 영애께서는 있으신가요.
마리아 L. 라크엠:그래도 지금은 마을도 돌아볼 수 있고, 산책도 할 정도로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미소지어보인다.)
(마리아 역시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두곤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저도 있어요. 그러면 하나씩 던져 볼까요? (지갑에서 동전을 두 개 꺼내어 하나를 당신에게 건넨다.)
칼리든:예, 어제 함께 다닐때는 확실히 크게 아프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었네요.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기만 했으면 좋겠네요. (옅게 웃어보인다)
마리아 L. 라크엠:신이 그렇게 매정한 분은 아니실 거예요. (그리곤 잠깐 분수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빈다. 신님, 소원을 바꿀게요.제 소원 대신 칼리든의 소원이 이뤄지게 해주세요.죄송해요. 그렇지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당신의 옷깃을 살짝 잡아끈다.) 저쪽 꽃밭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멀리서부터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아요.
칼리든:그럴까요? (칼리든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쪽으로, 영애.
꽃밭은 후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숲길로 가는 입구 즈음에 있습니다.
저택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예요. 보는 눈이 없으니 조금 더 편하군요.
칼리든이 언제 챙겨왔는지 피크닉 매트를 폅니다.
칼리든:집사장님께서 챙겨주셨어요. (짠, 하고 간식이 든 피크닉 바구니를 내려놔요.)
두 사람은 꽃밭 위에 피크닉 매트를 펴고 앉습니다. 이렇게 보니 꼭 데이트 같네요.
이따금 저택의 사용인들이 연애를 하면 제 연인과 함께 마을로 놀러 가거나 공원에 가곤 했는데...
마리아 L. 라크엠:(산책이라기보단 데이트 같지 않나? 종종 사용인들이 연애하는 모습을 보면 꼭 이런 식이던데. 그리 상기하니 괜스레 얼굴에 열이 오를 것 같아 손부채질을 한다. 그래도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편했다.)
아, 잠시만요. (피크닉 매트에 앉으려다 말고 유독 아름답게 피어오른 흰색 코스모스 한 송이를 톡 꺾는다. 그리곤 칼리든의 귓가에 슬쩍 꽂아보았다.) ... ... 예쁘네요! (흡족하게 미소를 짓는다)
칼리든:(잠시만요, 라는 말에 얌전히 당신을 기다리다가...제 귓가에 꽂힌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린다.) 이런건 저보다는 영애께 더 어울리실텐데요. (그러고는 저 역시 그 옆의 연노랑 코스모스를 하나 꺾어 당신의 귓가에 꽂아준다.) 역시 더 잘어울리시네요.
마리아 L. 라크엠:정말요? 거울을 가져왔더라면 좋았을걸... (자신이 꽃을 꽂아줄 땐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막상 당신의 손이 귓가에 다가오자 가슴이 쿵쿵 뛰는 듯해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린다. 손끝으로 꽃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화원의 달콤한 향기 속에서 유달리 코스모스의 향이 짙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도 칼리든에게도 정말 잘 어울리는걸요.
집사장은 또 어느새 이런 걸 챙겨주셨는지... (쑥스러움을 떨쳐내려 괜스레 바구니를 열어 간식이나 꺼내놓는다)
칼리든:칼을 쓰는 기사에게 꽃이 어울릴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요... (가볍게 웃는다.) 영애께서 좋게봐주시니, 그 점은 기쁘네요. (당신이 예쁘게 봐준다면, 이런 꽃 정도는 몇 송이고 꺾어서 나를 장식할 수 있을텐데.)
잠시만요, 영애. 제가 하겠습니다. (당신이 꺼내려하자 자신이 뺏어 내려놓는다.)
바구니를 열면, 간단한 샌드위치와 스콘, 차가 든 주전자와 과일 등이 들어있네요. 전부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마리아 L. 라크엠:기사라고 해서 꼭 차갑고 냉정한 분은 아니라는 걸, 저도 칼리든 덕분에 알게 되었답니다. 꽃송이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걸요.
다 제가 좋아하는 종류들이네요. ... 칼리든도 이 과일 좋아하시나요?
칼리든:...그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은 영애 밖에 없으실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나직히 웃습니다. 그래, 정말로 당신 밖에 없다. 당신은 아직 내 면모를 모르니까. 이렇게 나를 향해 다정히 웃어주는 것도, 아마 지금 뿐이겠지...) 영광이에요.
아, 네. 좋아한답니다. 먹는 것에 크게 호불호를 가지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요.
마리아 L. 라크엠:다행이에요. 혹시나 싫어하는 종류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찻잔은 두 개가 있겠지? 평소라면 접시를 꺼내둔다던지 차를 따라주는 건 대개 사용인이 해주기에, 직접 하려니 동작이 다소 서투르다.) 그럼 홍차도 좋아하시나요?
칼리든:차는... (살짝 안색이 안 좋아지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온다.) 네, 좋아해요. 영애께서도 차를 자주 즐기시나봐요. (당신의 서툰 동작을 보곤 제가 조심스레 가져와 익숙하게 찻잔을 두고 차를 따른다.)
마리아 L. 라크엠:(방금 안색이... 내가 또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나? 속으로 조마조마한 심정이 된다.) 네, 저는 즐기는 편이지만... 억지로 마실 필욘 없으니까요. 조금만 따르셔도 괜찮아요. (차가 다 따라졌는데도 막상 마시진 못하고 잔의 표면을 매만지기만 한다. 분위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저어, 칼리든. 그럼 혹시 화관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시나요?
칼리든:억지로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설마 또, 나도 모르게 티를 내버렸나? 최악이다. 칼리든. 괜히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기나 하고. 영애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실텐데...) 정말로 좋아하는걸요. (그러고는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다. 평소와 같이 웃으며)
화관은...아니요. 저희 저택에서는, 후원의 꽃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기에...
마리아 L. 라크엠:네에. 다행이에요. (한 모금 마시자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낯빛이다.)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사실 저도 사용인들에게 배운 거라 아주 뛰어나지는 못하지만요. 같이 꽃을 찾아주시겠어요? 줄기가 길고 소담스레 잘 피어난 꽃들이면 좋겠어요.
칼리든:아, 네. 좋아요. 찾아볼게요. (가볍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몇 송이 정도면 될까요?
마리아 L. 라크엠:으음... 일고여덟 송이면 돼요. 아 참, 줄기가 굵은 꽃도 찾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꽃봉오리만 맺혀 있어도 괜찮으니까요. (그리곤 일어서서 꽃밭을 돌아다니며 예쁘게 핀 꽃을 찾아다닌다. 델피니움과 코스모스, 콜키쿰...)
칼리든:(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대방향으로 가서 꽃을 꺾는다. 붉은 국화, 노란 코스모스, 금목서, 만데빌라, 백일홍...)
(잔뜩 꺾은 후 한아름 품에 안고 당신에게 돌아온다. 화관을 서너개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양) 이 정도면...될까요?
마리아 L. 라크엠:어머. 네. 넉넉히 만들 수 있겠어요. (웃으며 피크닉 매트 위에 앉는다. 당신이 가져온 국화나 만데빌라의 줄기와 굵은 줄기를 번갈아가며 얽고, 꽃송이가 바깥으로 나오도록 위치를 조절했다. 어느 정도 길게 이어지자 줄기들의 양끝을 모아 동그란 모양이 되도록 질끈 묶었다. 마치 아이들이나 만들 법한 서투른 실력이지만 그래도 얼추 모양새가 났다.) 어떤가요? (제 머리에 화관을 씌워보곤 당신을 바라본다.)
칼리든:(옆에서 당신이 하는 것을 보면서 따라한다. 줄기를 번갈아가며 얽고, 꽃송이가 바깥으로 나오도록 하고, 양 끝을 모아 묶고... 처음해서 그런지 간신히 화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만큼 어색한 모양새였지만.) ...잘 어울리세요. 무척.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처 말로 꺼내지 못한 애정과 다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니 잘 어울린다는 말에는 한점 거짓도 가식도 없으리라.)
마리아 L. 라크엠:칼리든도 제법 잘 만드셨는걸요. 여기, 이쪽 줄기만 좀 더 세게 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칼리든이 만든 화관에 조금 더 손대어 모양새를 좋게 만든다. 귓가에 꽂아주었던 코스모스를 살짝 빼내어 화관 사이에 꽂고는, 당신의 머리 위에도 슥 올려둔다.) 칼리든도 무척 잘 어울리시는걸요! 이렇게만 보면 기사님보다는 평범한 시골 청년 같아요. (봄꽃 같은 웃음이 절로 피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고, 그 안에 드러나는 감정을 읽자마자 딱 굳어선 슬슬 볼이 빨개지기 시작한다.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같은 마음이진 않을까 설레이게 되어 버려. 이런 기대감은 가져보았자 헛된 것일 텐데...)
칼리든:시골 청년이요? 아하하, 정말 그랬으면... ...아니다. 지금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시골 청년이었으면 영애를 만나기는 커녕 감히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을테니까요. (장난스레 웃으며 화관을 쓴 채로 가볍게 몸을 숙여 눈을 마주한다.)
그는 잠시 말 없이 당신을 응시합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아름다운 푸른 꽃이 드넓게 펼쳐진 이 곳.
바람이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돕니다.
문득 칼리든이 입을 엽니다.
칼리든:...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만약에, 가족들과 함께 유람선에 탔어요. 그런데 배가 전복되어서, 그만 전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보이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 지나가던 구조선이 손을 내민다면, 타실건가요?
마리아 L. 라크엠:(시선이 높이가 같아지자 심장이 몇 배나 힘을 얻고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크게 뛰어선 당신에게 들려 버릴지도 모르는데... 바람결이 스칠 적마다 두 사람의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이 가볍게 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온 사방에서 흐르는 향기는 꿀에 파묻혀 있는 것마냥 달금하다.)
(그러던 와중 이어지는 질문은 다소 뜬금없는 것이라, 의중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상황이겠죠. 전부 포기하고 싶어질지 몰라요. 그래도 저는 구조선에 탈 것 같아요. 그래야 살아있을지 모르는 다른 가족들을 찾으러 갈 수 있으니까요. 혹은 시신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테고요.
칼리든:...그런가요. (그 말에는 조금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짓습니다. 왜 안심하는걸까요? 그저 가정일 뿐일텐데. 마치 뭔가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영애께서는 강한 사람이시군요. 정말로. (눈을 감고 작게 읊조립니다.) 그런 점이 존경스러워요.
마리아 L. 라크엠:... (유람선이 전복된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당신에게는 구조선이 도착했을까? 그 손을 잡고 있을까... ... 의문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왠지 직접 묻기에는 조심스러워져 눈 감은 그의 모습을 시야에 담기만 한다.) 사실 저는 그리 강하진 않지만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없던 힘도 끌어모을 수 있어요.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들을.
차도 다 마셨고, 간식도 웬만치 먹었으니 이번엔 저쪽에 가 보지 않으실래요? (미로 쪽을 가리켠다.)
칼리든:어떻게 모두가 강할 수 있겠어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른걸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해질 수 있는 것. 저는 그게,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 네. 좋아요. 그러면 잠깐 일어나주시겠어요?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뒷정리를 하고, 미로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투두둑.
... 찰나와 같았던 행복한 순간은 뺨 위로 떨어진 빗줄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칼리든은 재빨리 양산이나마 마리아에게 쥐여줍니다.
칼리든:이런, 빗줄기가 거세네요. 소나기 같은데...
저기 작은 정자가 있으니, 일단 저기에서 비를 피하시겠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지나갈거에요.
마리아 L. 라크엠:앗... ... 갑자기 비가 오네요. 아까까진 날씨가 좋았는데. (반강제로 피크닉이 종료되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양산을 높이 들어 당신에게도 씌워주려 하며 정자로 향한다) 그럼 어서 저쪽으로 가요.
마리아 L. 라크엠:네, 덕분에요. (양 다리를 감싸곤 어깨에 둘러진 외투의 표면을 조심스레 쓸어본다.) 칼리든이야말로 제게 외투를 벗어주기까지 하셨는데 괜찮으신가요?
칼리든:저야, 한 밤 중에 비를 맞으며 행군한 적도 있는걸요. 기사에게 있어 체력은 필수 소양이랍니다. (살짝 웃습니다.)
저보다야, 몸이 약한 영애께 무리되지는 않을지가 염려되네요.
마리아 L. 라크엠:네에? 한밤중에 빗속에서 행군을요?! (저로선 상상도 못해볼 일이라 눈이 두 배는 커졌다) 그 정도까지 노력한다면 체력이 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만요. 감기에 걸리진 않으셨나요? (기사는 정말 고된 일이구나. 새삼 그런 감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올 때도 양산을 쓰고 왔고, 지금도 외투를 덮어주셨으니 이 정도쯤 괜찮을 거예요. 대신 돌아가고 나면 집사장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기는 하네요......
칼리든:운이 좋았는지, 타고나길 튼튼하게 태어나서요. 크게 앓은 적은 없답니다. 물론 그만큼 훈련도 열심히 하고, 식사도 잘 챙기지만요. (뒤이은 말에 작게 웃었다) 그래도 그만큼 사랑받고 계시는거잖아요.
...여기 있다보면,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영애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어서... 가끔은,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곤 하거든요. (농담하듯 웃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크게 앓으신 적 없다니 다행이에요. (안도의 한숨 푹 내쉰다.) 그만한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드시겠군요.
(정자까지 오면서도 손에 조심히 쥐고 있던 화관을 무릎 위로 올려, 꽃송이를 만지작거린다.) 칼리든이 보기에도 느껴지시는 거겠죠. 정말 저를 많이 위해주고 계세요. 운이 좋은 거라 생각해요. 만약 제가 라크엠 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만치 사랑받기도, 좋은 대우를 받기도 불가능했겠죠. 여러모로 주변분들께 감사하고 있어요. (그리곤 시선만 빼꼼 들어 당신을 바라봤다.) 칼리든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도 분명 계실 거예요.
칼리든:(그러면 그 말에 답하지는 않고 그저 나직히 웃습니다. 조금 씁쓸한 기색이 스쳤던 것도 같아요) 자신이 받은 행복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영애께서는 정말 바르고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말씀도 감사해요.
(약간의 간극, 그러다 입을 뗀다) ...저, 내일은 시내로 외출을 좀 할까 해요. 알아볼 게 있어서. 금방 돌아올게요.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예요.
마리아 L. 라크엠:주어진 위치를 당연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 노력했어요. 그리 말해주시니 제 노력이 겉으로도 보이는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당신은 계속 표정이 어두워진다.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체력과 힘 뒤에 어떤 배경과 아픔이 숨어있는 걸까.)
시내라면 비슐트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퍼시가 황태자의 기사단이 비슐트까지 당도했다고 했었는데...... 설마 아직까지도 그곳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겠지? 괜히 불안한 마음이 한 조각 피어올라 억지로 연기를 휘휘 내저어 없애보았다.) 모쪼록 조심히 다녀오세요.
칼리든:라크엠 영지의 주민들이 부러운걸요. 영애 같은 분께서 영주시라면, 분명 다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을거에요.
네. 비슐트에 잠시... 금방 돌아올테니, 너무 걱정마세요
그는 다정하게 당신을 도닥이며 정자 밖으로 시선을 고정합니다.
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요.
이렇게 되니 꼭 어제 함께 마을로 가던 그 마차 안 같아요.
자박한 빗소리, 낯선 감각들과 눈앞의 칼리든.
...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에게는 이 비가 오히려..
...
비는 오래가지 않아 그쳤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리아가 귀족의 소양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동안,
칼리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낯빛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생각에 잠겨서, 답지 않게 당신의 말을 흘려보내기 일쑤였지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간 마리아에게 뜨거운 탕파와 데운 우유 한 잔을 들고 퍼시가 찾아옵니다.
퍼시:주방에서, 마리아님이 비를 맞으셨으니 오늘은 탕파를 안고 주무시라고 이것들을 보냈어요.
칼리든님이 어디론가 가시기에 마리아님과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마리아 L. 라크엠:어딘가에 갔다고... 혹시 바깥으로 나가셨니? (탕파와 우유잔을 받아들다 당황해서 되묻는다.) 비슐트엔 내일 간다 하셨는데.
퍼시:글쎄요? 저택 밖으로 나가시진 않았던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어느 쪽으로 가시는진 보지 못했니? (유달리 표정이 어두웠던 그의 모습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실례가 될까 일부러 삼켰지만, 역시 비슐트에 어째서 가는지 물어보는 게 좋았을까.)
퍼시:방향을 봐서는, 집사장님을 만나러 가신 것 같아요.
마리아 L. 라크엠:고마워, 퍼시. 우선 돌아가보렴. (그를 먼저 돌려보내고는, 탕파와 우유를 협탁에 올려둔 뒤 집사장이 머무르는 곳으로 살금살금 내려가본다.)
마리아 L. 라크엠:(후원을 거닐 때만 해도 별다른 기색은 느끼지 못했었는데. 괜시리 더 불안해진 마음에 조심조심 내딛는 걸음에 한결 속도가 붙는다. 칼리든이 머무르는 방 쪽으로 올라가본다.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고 오는 거야. 그 정도면 아무리 영애와 기사의 입장이라 해도 괜찮을지 모르니까...)
방으로 올라가면,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습니다.
어쩌면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바깥에 나간건 아닐까요?
마리아 L. 라크엠:(설마 또 후원 쪽으로? 비는 그쳤을까? 문가에 도달해, 바깥에 나서기 전 손을 내밀어 빗물이 떨어지는지 확인해본다)
다행히 비는 그쳤습니다.
해가 져서 어둡고, 바람이 쌀쌀하니 당신이 산책을 갈만한 날씨는 아니지만...
칼리든이라면 체력이 좋으니, 밤산책을 나섰을지도 모르겠어요.
마리아 L. 라크엠:(문가에 한 발을 내딛고서도 바로 넘어서지 못하고 망설인다. 오랜 시간 나갔다가 찬바람에 감기라도 걸리면 된통 혼이 날 텐데. 하지만 겉옷을 준비한다 수선을 떨자니 그사이에 칼리든이 아주 어디로 가버릴 것만 같은 이유모를 불안이 입을 벌려왔다.)
(사실 별일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시선이었다. 단순히 잠시 밤산책을 나섰을 뿐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오래지 않아 다시 들어와 잠을 청하겠지. 하지만 며칠간 퍼시에게 들었던 이야기나, 쓸쓸하고 어두워 보였던 분위기나, 그를 향해 혼란스레 소용돌이치는 제 마음이 판단력을 갉아먹고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저 칼리든에게 온 신경이 쏠린 것 같았다.)
(결국 결정을 마치고 문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칼리든? (혹여나 하인들이 듣고 깨어날까 봐 차마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하면서 발코니의 계단을 걸어 후원으로 향했다.)
당신의 약한 몸도,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꾸중도 당신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망설임을 떨치고, 문 밖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발코니를 넘어, 후원으로 향하면...
칼리든:...영애?
은색으로 반짝이는 달빛 아래, 칼리든이 서 있습니다.
칼리든:...왜 이 시간에 이 곳에... (조금 놀란 표정입니다)
(그리고는 복장을 보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잠시만, 영애. 설마 잠옷만 입고 나오신건가요? 그런. 잠깐. 잠깐만요.
(그러더니 허둥지둥 제 망토와 겉 옷을 벗어 당신의 어깨에 걸쳐주곤 몸을 가립니다. 그러면서도 혹여나 닿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이네요.)
...왜 이런 모습으로, 계시는건가요. (시선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웅얼거립니다.)
마리아 L. 라크엠:칼리든...! (달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서야 혼란과 불안, 걱정이 한데 섞여 만들어진 응어리가 흩어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에게 종종걸음쳐 다가간 후에야 제 얇은 잠옷 차림을 내려다본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망토며 겉옷이 걸쳐졌지만) 이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걱정이 되어서요...... 후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내내 표정이 좋지 않으셨잖아요. 게다가 집사장님을 뵌 후에 갑자기 나갔다 들으셔서, 혹시 안 좋은 소릴 들으신 건 아닐까 하고...... (그의 옷소매를 조심스레 붙잡는다.)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제가 못미더우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요.
칼리든:이렇게까진 하지 않아도 된다뇨. 안그래도 몸이 약하신 분이, 밤에 이리 얇은 차림으로 다니시면 큰일납니다. 독감에 걸릴지도 몰라요.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면 꼭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지만)
...그것 때문에 절 찾으신건가요? 죄송합니다. 걱정시켜드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멋쩍게 웃습니다.) 별 일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집사장님과 상담하고 싶은게 있었거든요. 현명한 분이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애를 가장 아끼시는 분이시니까.
궁금해하시는게 당연해요. 제가 너무 말씀드리지 못한게 많았죠. 그래도 지금은... 아직은 안돼요. 곧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올거에요. 그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마리아 L. 라크엠:다행히 오래 헤매지 않고 칼리든을 만났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모르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제 건강도 많이 좋아졌으니까요. 이 정도쯤은 버텨줄 거예요.
상담......? (고개 갸웃) 그렇군요. 저는 또 집사장님이 별 일 아닌 걸로 칼리든을 불러 무어라 잔소리를 하지는 않으실까 싶었거든요.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굴러떨어지는 달빛에 의지해 실날처럼 의문을 풀어내고 싶었건만, 그런 제 마음을 읽히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네. 기다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정말 약속해주실 거죠? 꼭 말해주셔야 해요. 말없이 어딘가로 가버리시면 안 돼요.
칼리든:만약에 제가 후원에 없었으면, 어쩌시려고... (당신의 그런 부분이 좋았다. 불확실함, 망설임, 그런 발목을 잡는 것들을 전부 떨쳐버리고 바라는 것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천진한 시골 소녀마냥 그렇게, 자신을 얽매는 것들에도 아랑곳 않고...)
...예, 약속하겠습니다. 바라신다면 검에 걸고 맹세라도 할 수 있습니다. 기사에게 있어 검을 걸고 하는 맹세는 절대적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영애.
마리아 L. 라크엠:그랬다면 다시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잠옷 차림으로 마차까지 타고 내려가기엔 어려웠을 테니까요. 마부를 깨워야 하니 소란도 일어났을 거구요. (즉 잠옷 차림이 아니었고 소란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마을까지라도 내려갈 수 있단 뜻과도 같다. 마리아는 그다지 저돌적이거나 과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차분하고 신중하여 앞에 놓인 돌 하나도 안전하단 걸 확인하고서야 밟고 갈 이였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그런 것 따위 다 상관없게만 느껴져. 시야에 오로지 당신만이 담겨서, 주변의 풍경이나 장애물 따위 안개로 흐릿해져 버리는 듯해. 오늘로 당신을 보게 된 지 나흘째밖에 되지 않았건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당신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영애나 기사라는 신분 차이 같은 건 의식에 들어오기도 어려울 정도로 의식에서 멀리 떨어뜨린 지 오래였다.)
(심장이 빠른 박자로 뛰어온다. 실크 비단마냥 힘없이 맞잡은 소매로부터 올라가 손길을 맞잡고, 당신의 품에 끌어안기고 싶다는 낯부끄러운 소망이 가슴을 따라 뺨으로, 손끝으로, 이리저리로 번져갔다. 그러나 차마 소리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눈 먼 이라 하여도 그 정도는 인지를 하고 있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그만하면 칼리든의 의지를 충분히 알겠어요. 칼리든이 말하고픈 때가 올 때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려볼게요.
칼리든:(고작 며칠. 첫 만남부터 함께한 나흘의 시간. 그런데도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리고 뺨은 붉게 물들며 눈은 당신만을 쫓는 것인지. 아무리 당신의 별장 안이라고는 하나, 혼기가 찬 남녀 둘이 한 밤 중에 후원에서 꾸미는 밀회라니, 들키기라도 했다간 양 쪽 모두에게 큰 일이 날게 뻔했다. 지금이라도 어서 당신을 데리고 저택 쪽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헤어져야만 하는데... 왜일까,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고 싶어.)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이 시간은 분명 꿈결 같은 것. 잠에서 깨면 사라질, 가을 밤의 신기루. 어차피 사라질 환상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젖어있고 싶어.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영애께서는, 왜 그렇게 저를 믿어주시는건가요? 저는, 신분도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일개 기사일 뿐인데.
마리아 L. 라크엠:레노버의 기사님이라고 하셨잖아요. 칼리든이 당장은 말 못한다 하더라도 사정이 있을 거라 여기고파요. 왜 그렇게까지 믿느냐고 하면...... (당신에게 홀린 듯 마음을 앗겨서 그렇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눈을 가리고 마음을 편협하게 만든다는 이치를 아직도 다 깨닫지 못한 미숙한 이였는데.) 칼리든이 지금껏 제게 보여주신 다정하고 상냥한 면모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의심하고 불신해야만 한다. 저의 부모님과 오빠가 수도 없이 전한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요. 도저히 의심하고픈 심산이 들지 않는 이가 눈앞에 있다면.) 제게 나쁜 심성을 가지고 계시다면 진작 드러낼 기회는 많기도 했고요. 제...... 제게 못된 짓을 하실 건가요?
칼리든:(그러면 부드럽게 고개를 젓습니다.) 그럴리가 없는걸요. (다정하고 신실한 음성입니다. 이상하기도 하죠. 속내를 감추고, 감정을 가장하고, 내가 아닌 내가 되기 위해 여태껏 연습해왔고, 그렇기에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었을텐데. 그래야 하는데. 왜 당신 앞에서는 이렇게 속절 없이 가면이 벗겨져서 전부 드러나버리고 마는지. 어쩌면, 드러나길 바라고 있는걸까요.) 영애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다 헤아릴수 없고, 갚을 방법조차 요원한데, 어찌 감히 그런 명예와 도리에 맞지 않는 짓을 하겠어요.
...후후. 어리석은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네요, 제가. 영애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셨는데.
마리아 L. 라크엠:맞아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죠. (그제야 생긋 미소짓는다.) 칼리든과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봐 온 분이라면 그럴 짓을 하실 리 없다고요. (겉옷에서 느껴져오는 이 체온과 체향이 모두 당신의 것이라 여기니 심장이 더욱 빨리 뜀박질을 하는 것만 같다.) 분명 그때 칼리든을 구해드렸던 건 저이지만, 당신과 만나게 된 건 저에게도 큰 행운이에요. 그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칼리든:(행운이라, 그 말에 나직한 미소를 짓습니다. 제가 정말로 당신의 행운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내보이겠다고. 반드시 당신의 행운이 되어보이겠다고) ...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해보일게요.
마리아 L. 라크엠:...... 바깥이 소란스럽더라. 하지만 집사장님도 누구도 내게 제대로 알려주는 이는 없고......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니? 게다가 어째서 수도의 기사들이 이곳 비슐트까지 내려와 있는 거고? 나는 이미 오래 전 건강이 나았는데도 계속 이 별장에만 머무르고 있어.
퍼시:...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실줄은 몰랐는데요.
아시는대로에요. 황태자가 황위를 찬탈했고 사라진 2황자는 수배 중. 2황자가 황실에서 자취를 감춘 지는 한참 되었으며 황태자의 기사단이 전국에 파견되어 그를 수색 중이죠.
하지만, 위험한게 2황자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마리아 L. 라크엠:내게 털어놓는 이는 없고 전부 감추기에 급급하니, 나도 참을성을 더 유지하기가 어렵구나. (당신이 보기에도 제 다급함이 읽혀나왔던 걸까. 반성하며 제 이마에 한 손 얹는다.) 황태자 전하가 반란이라도 일으킨 거니? 어차피 이어받을 왕위를 찬탈이라니......
2황자 전하는 라크엠의 친척분이지. 그래서...... 그래서 나도 위험하단 뜻이니?
퍼시:네. 잘 아시네요. 아가씨는 명문 라크엠 가문의 후계자이고, 2황자와도 정치적으로 밀접한 위치시죠.
황태자로서는 취하거나, 아예 내치려고 할 거에요. 그리고 아마 그건, 아가씨께서 이 곳에 계신 이유와도 관련 있을테고요.
마리아 L. 라크엠:(후자에 가깝다는 것일까? 하지만 저는 친척이라 한들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는 기분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일에 내가 그렇게 말려들어 있었다고...... 내가 이곳에 머무르게 된 병증은 결국 전부 핑계일 뿐이었던 거구나.
하지만 칼리든은? 그는 이 상황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퍼시:정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마리아 L. 라크엠:...... 무슨 뜻이니. (설마, 설마...)
칼리든이 황태자 전하의 기사단이기라도 하단 거야?
퍼시:글쎄요. (분명히 고의적으로 말을 돌립니다.) 그건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지금까지 말해드린 것들은, 숨길 이유가 없어서 말해드린 것 뿐이니까요. 다른 사용인들은 아마 거의 모를거에요. 혹은 걱정이 많아 숨기거나.
마리아 L. 라크엠:(손끝이 떨려오는 듯해, 반대쪽 손으로 맞잡아 감춰보려 했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교외의 별장에만 머물러있는 사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그래. 알겠어...... 말해줘서 고맙구나. 이만 가봐도 좋아.
당신을 닮은 소년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낯입니다.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전합니다.
퍼시:저는 오늘부로 일을 그만둬요.
...2황자가 비슐트의 영주와 결탁하고, 세력을 모아 조만간 수도를 칠 거라는 정보가 있었어요.
아가씨께서도 그 때까지 무사하시면 좋겠네요.
퍼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당신의 메이드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방문을 두드립니다.
메이드:아가씨, 칼리든 님이 귀가하셨답니다.
퍼시:그럼 저는 이만 진짜 가볼게요.
방 밖으로 나서던 퍼시는 명백한 경고를 담은 눈길로 당신을 한번 돌아보고 아래로 내려옵니다.
칼리든....칼리든.
알고 지낸 지는 나흘 뿐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마리아의 세상을 이만큼이나 넓혀놓은 야속한 사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더 이상 이 저택은 안전하지 못하다는데...
마리아 L. 라크엠:일을......? (더 자세히 묻기도 전에 메이드가 들어와,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내려가는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무사해야 해. (중얼인다. 주어가 없는 말이었으므로 그건 퍼시를 향한 말이기도 했고 저와 칼리든, 그리고 이 별장의 사용인들을 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도망쳐야 할까? 도망치면 들키지 않을 수는 있을까? 칼리든이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수도에 있는 부모님과 오빠는 또 어떻게 된 걸까. 지금이라도 편지를 쓰면 닿기는 할까? 애초에 보낼 수는 있을까?)
(수많은 걱정과 상념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마치 터지기 직전의 솥과도 가까웠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우선은 그를 맞이하러 내려가야 했다. 고작 나흘이라는 시간으로 저의 시선과 마음을 앗아간 이에게로.)
당신에게 외출 여부를 물어보고 오늘은 날이 차니 집안에만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이고요.
저녁을 먹을 때에도, 함께 티타임을 가질 때에도 특별한 기색은 없어요.
당신이 외출의 목적을 물어도 별것 아니었다고 둘러대는데
그 모습이 꼭 저택의 사용인들과 같아 괜히 골이 납니다.
당신은 칼리든에게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거짓말도 안 합니다.
그런데 칼리든은 아직도...
그의 마음도 당신의 것과 비슷할 텐데, 분명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마리아 L. 라크엠:(기회가 오면 말해줄 수 있다고 했었지. 하루도 안 되어 기회가 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니 이해는 할 수 있다. 머리론 이해하는 게 합당하다 말한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은 또다른 문제였다. 저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불안한데, 퍼시가 아니었더라면 제 2황자가 숨었다거나 황태자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 중 무엇도 알 수 없었다는 걸 자각하니 조금은 화도 났다. 어째서 나에게는 모두가 숨기려 들기만 하는 건지.)
칼리든. 당신이 숨기고 있는 건...... 저를 위한 것인가요? 아니, 차라리 저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괜한 설레발을 치고 있는 거였음 좋겠어요. 의심하고 싶지 않은걸요. 그런데 상황이 너무 소란스러운 것 같아서, 심란한 마음이 지워지질 않아요...... (꼭 아이가 떼를 쓰기라도 하는 꼴이 아닌지. 제 꼴에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칼리든:(당신의 반응에 난처한 기색을 보입니다. 그러나 단지 숨기고 있는 것을 들킨 탓에 보이는 난처함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 더, 당신의 표정에서 보이는 괴로움과 속상함, 옅은 분노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 때, 기회가 되면 말씀드린다고 했죠.
오늘 밤 10시에, 서재에서 볼 수 있을까요?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이야기요.
...그래요. 과연 무슨 말을 할지, 들으러 가볼까요.
마리아 L. 라크엠:...... 그때는 들을 수 있을까요. (이 상황에 대한 답을. 타파할 방법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아이처럼 굴었죠...... (작은 한숨을 내쉰다.) 열 시에 찾아뵙도록 할게요.
마리아 L. 라크엠:(드디어 저에게만 숨겨져 왔던 비밀과 진실들이 드러나는 순간일까. 서재에 선 칼리든의 모습이 왜인지 초조해 보여서, 저까지도 손끝이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이어진 질문에는 그 마음도 잠시 잊고 당황해 제 뺨을 감싼다.)
......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는 것일까요?
칼리든:...네. 괜찮으시다면 부디.
마리아 L. 라크엠:(대답이 돌아왔는데도 손끝을 매만지며 망설이다, 조심히 붉은 입술을 연다.) ...... 사실 저는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처음으로 찾아온 연정이란, 수많은 서책에서 묘사하고 표현했듯 심장이 종잡을 새도 없이 뛰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감각과 감정이 쏠리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 그대는 기사이고 저는 귀족가의 영애이니만큼 신분의 차이가 난다는 건 알아요. 고작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리 빠져버린 제가 우스우실지도 모르겠죠. (제 마음을 고백하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칼리든의 손을 맞잡고 싶고, 품에 안기고 싶고, 다정한 말을 나누고픈 소망이 앞서게 되어요.
칼리든:(그러면 옅게 웃습니다. 기쁨인지, 혹은 예상한 답을 들은 것에 대한 안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명확하지 않은 웃음이 얼굴을 타고 퍼져나갑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영애. (짤막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말하기 힘이 드는지. 떨리는 음성을 겨우 붙잡고, 제가 가진 모든 연심을 담아 당신에게 고한다.) 저도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칼리든은 검을 내려놓고, 당신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칼리든:...저는 달리에 후작가의 2순위 후계 계승자이자, 황태자가 이끄는 제 1기사단의 기사단장. 칼리든 달리에입니다.
...당신을 체포하기 위해, 이 곳 비슐트까지 내려왔지만. 어리석게도 주군의 명을 어기고 당신을 사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작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선택을 내린 제가 어리석게 느껴지시겠죠. 하지만 진심입니다.
...이제껏 당신을 속이고 기만한 제 죄를, 부디 용서하지 마시길.
그는 괴로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진실을 고한 뒤, 다시 고개를 숙입니다.
마리아 L. 라크엠:(평소라면 떠나는 순간까지 가슴 속에 묵혀두었을 마음을 솔직히 꺼내어 내놓은 이유는, 당신이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 허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이 아니라면 털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묘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이의 벽이 명확하였으니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이루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그리 여기고, 마치 선고를 받듯이 제 두 손을 꾹 맞잡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니. 긴장이 탁 풀리는 것 같은 안도와 기쁨의 물결이 동시에 몰려오는 순간, 이어지는 목소리가 다시금 경종을 울린다.)
네......? (달리에. 달리에 후작가의 계승자이자, 1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니.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되묻고 말았다.)
(퍼시가 저에게 은밀하게 흘려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칼리든이 기사단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으리라고. 하지만 현실은 마치 파도라 예상했던 물결이 해일인 것처럼 저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 전, (목소리가 떨려와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떨리고, 옷자락을 잡은 손마저 여리게 경련하건만, 그러나 붉은 시선만큼은 오롯이 당신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칼리든. (심호흡 끝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아끼는 꽃송이를 다루듯이, 조그마한 새를 쓰다듬듯이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따지자면,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저 역시도 어리석은걸요......
지금도 당신과 마음이 맞닿았다는 사실에 우선 기뻐하게 되는 저를 부디 용서치 마세요.
마리아 L. 라크엠:그렇지만, 제 기쁜 감정과는 별개로 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도 사실이군요. 저를 체포하러 오셨으나 그러지 못했다고 하셨죠. 수로를 기억하라 언질을 주셨던 건 이 때문이셨을까요.
칼리든:(그러면, 다시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저 역시 기뻤다. 마음이 닿은것이. 이 짧은 시간임에도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축복인가.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
(그러나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음은, 자신과 그의 입장 차이 때문이리라. 당신은 2황자의 친인척. 자신은 1황자의 가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양 극단에 선 이들. 만약 지금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칼을 뻗었을지도 모른다.)
(잘못을 돌이킬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당신을 만난, 혹은 알게 된 순간에 당신을 붙잡았어야했다. 아니면 당신을 사랑하게 된 순간에 도망쳤어야했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아니, 지금의 이 선택을 하기 위해 그 모든 선택을 내던졌는지도 모른다.)
...황태자는 황제를 죽이고, 이제 2황자마저 죽여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라크엠에서 그 낌새를 느끼고 2황자님을 피신시켰고, 지금은 신변을 보호 받고 계시지만... 말씀드렸다시피, 기사단이 라크엠의 후계자인 영애와 2황자를 붙잡기 위해 이 곳 비슐트까지 와버렸습니다.
수로를 기억하라 언질을 드린 것은,예. 그 때문입니다. 시내에 나갔을 때, 1기사단이 지척까지 도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빠르면 내일 아침, 저택 역시도 검문에 응해야겠지요. 그 전에 자취를 감추어야합니다.
칼리든:...저는 이미 충성의 맹세를 저버릴 각오를 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칼리든은 검을 들어 당신의 손에 쥐여줍니다.
칼리든:저의 새로운 주인이시여. 부디 청컨데, 몸을 피하세요. 제 목숨을 바쳐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마리아 L. 라크엠:2황자님은 무사하신 거군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황태자님께서 황제를 시해하신 줄도, 2황자님을 노리고 계신 줄도 전혀 몰랐어요. 가까운 친인척일 뿐 저는 일말의 연관이 없는데 단순히 후계란 이유만으로…… (차라리 당신의 손에 죽을 수 있다면 다행이었으리라 여기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역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피어난 사랑이 이제야 막 맞닿아 가지를 얽는 순간이었다.)
도피의 길에 올라야 하는 것이겠지요. 각오는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정말 괜찮으시겠나요, 칼리든? (손에 들린 검의 무게가 묵직했다. 당신은 언제나 이것을 지니고 또 휘둘러 왔겠지. 주군을 위하여. 그가 이제 저를 위해 그 충성을 바치겠다 말한다.) 황태자와 달리에 가의 눈밖에 나실 것은 자명한 일인데……
당신이 걱정돼요.
칼리든:...정계란 그런 법이죠. (쓰게 웃는다. 자신이 1황자의 기사단으로 간 것도 결국 집 안의 싸움에 휘말려서 그리 된 것이었으니. 아마 그가 자신을 거둬주지 않았더라면 죽었겠지.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은인을 저버린다 욕할지도 모른다. 허나 이토록 사랑스럽고 가여운 당신을 결코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었을 뿐이다. 죽게 내버려두는 것 역시.)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황자께서 무사하신만큼, 세력 싸움 역시 쉽게 결론지어지지는 않을테니까요. 더군다나... 그런 것을 염려할 터였다면, 영애께 이리 고백하지도 않았을 것을요.
제 지위, 신분 목숨, 그 모든 걸 버린다 해도...
당신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마리아.
마리아 L. 라크엠:(저도 모르게 입가에 달빛같은 미소가 찾아든다. 아, 풍랑같은 미래가 코앞에 놓여있건만 어떻게 이리도 충만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이토록 과분한 감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이렇게 마음을 되돌려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당신의 이 칼을, 이제는우리를 위해 써 주세요. (칼날을 곧게 들어 당신의 어깻죽지 위로 올려놓는다. 단둘만의 서임식, 그러나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결속으로 맺어질 순간이었다.)
메리골드 향수를 만들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기뻐요. 가장 곱고 향기로운 꽃들만을 모아 만들어낸 향수를 선물드릴게요.
그리고 어떤 고난이 오더라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나아가요. (칼날을 태피스트리에 꽂고, 당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칼리든.
칼리든:(어깨에 올려놓는 칼날을 느낀다. 기사의 맹세. 단 한 사람만을 위하겠다는 서약. 그 한 없이 무거운 무게가 기꺼웠다.) 예. 오직 당신을 위해.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는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해도, 결코 저버리지 않으리.)
(안겨오는 당신을 마주 끌어안는다. 품 안에 들어오는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따스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이 작은 사랑을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없는 사랑과 경애와 기쁨을 담아.)사랑해요,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