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 E. 테라코르:나가서 할 만한 것도 없을 텐데. (기관사 모자를 들어 만지작거리다가 탁자 위에 올려둔다. 이 엄청난 추위가 들이닥치면서 지구는 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들은 우주선을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지만, 그와 단테는 부도, 힘도 없었기에 당연스럽게 남겨지는 신세였다. 멸망이나 다름없는 세상에서 기차의 선로는 얼어붙었을 테고 연료는 말라붙은 지 오래일 테다. 기관사라는 직업 역시도 사장됐다고 봐야 하겠지. 그런데도 단테가 이 모자를 버리지 못하는 건, 아마 자신이 나비도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할 테다.)
아이린 E. 테라코르:창밖으로 보니 눈이 많이 쌓였더구나. 그나저나 방은 네가 어지럽히고 간 거니? 난 나름대로 깔끔하게 해두고 잤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보니 꽤 난잡스러워서 말이야.
(그런데 우린 우리가 최후의 인류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단테 이그리드:아, 그건 아까 혹시 몰라서 눈을 치울 것을 찾고 있는데 영 못 찾겠더라고요... 더 지체되면 정말 큰일이 날 것같아서 급하게 나가느라 정리는 못 했네요. 덕분에 손으로 눈을 조금 치우고 왔거든요.(눈이 잔뜩 묻은 장갑을 벗어 탁자 구석에 잘 놓아두며) 그동안 방을 치우고 계셨나요? 제가 괜히 일거리를 만들고 간 것같네요...
아이린 E. 테라코르:괜찮아. 어차피 일어나서 별로 할 만한 일도 없었고. 학교에 가거나 놀러 나갈 수도 없으니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의 반복이잖니. 그나저나 전망대에서 뭔가 보진 못했니? 동물이라거나, 혹은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라거나.
단테 이그리드:그건 그렇죠...(너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방, 그리고 대피소 너머를 쭉 둘러보았다. 하얀 눈으로 가득한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남았으니 많이 지루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전망대는 여전했어요. 여전히 하얗고, 하얀 눈으로 가득하죠. 아이린이 갔어도 재미없었다고 다시 금방 돌아올 정도였거든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랬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네……. (떠난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에서는 자신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부모님밖에 없었고, 학교에서도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이 혼자 노는 데 익숙했으니까. 이제야 조금씩 얼굴을 알아가던 이들도 있었지만, 관계를 새로이 명명하기도 전에 전부 떠나갔거나 죽었을 터다. 하지만 이런 자신과 별개로 당신은 할머니나 부모님이 보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나비는 없겠지? 이 추운 겨울엔.
단테 이그리드:혹시 눈에도 끄떡이 없을 정도로 진화된 나비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도 역시 없더라고요... 무척 아쉬워요. 얼음같은 투명한 날개를 가진 나비가 있었다면 아이린이 오랜만에 기뻐했을텐데 말이죠.(너도 나도 가족도 다른 친구들도 없이 이리 남았으니. 뭐라도 더 즐거울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을까 매일 밖을 나오고 둘러봤지만 늘 허탕이었다. 늘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오늘도 허탕이니, 아쉬움에 아쉬움만 더해졌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몇 모금 마시다가 다시 냉장고 안에 넣어두며) 다른 것들도 여전하긴 한데... ... ...아, 조금 있다가동면 기기를 확인하러 갈 생각이에요. 그 때 아이린도 같이 가실래요?
아이린 E. 테라코르:얼음처럼 투명한 나비…… 그러게 말야. (머릿속으로 모습을 상상해보다가, 아예 차디찬 유리벽에 손가락을 대어 그림을 그려본다.) 얼음 날개를 가진 나비가 손에 앉으면 시원할 것 같아. 꽃가루 대신 얼음 결정을 실어나를 것 같지.
동면 기기? 그래,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무어라도 할 만한 게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단테 이그리드: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어서 갔다오죠. 방을 치우느라 재미도 없으셨을 거잖아요. 아이린은 동면기기 쪽에 가본 적은 없으실테니... 아마 평소보다는 조금 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지 않을까요?(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벗어두었던 장갑을 다시 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동면 기기엔 누가 잠들어 있니? 아니면 작동시켜 보려고? (겉옷과 장갑을 착용하고 귀마개를 꼈다. 고양이 모양 귀가 귀엽다고 단테에게 몇 번 자랑을 했었다.)
단테 이그리드:네, 그건 가면서 이야기할까요?(고양이 모양 귀마개를 쓰면 용케 그걸 버리지 않은 것이 대견하다는 듯, 아주 밝게 웃더니 안내하듯 대피소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아이린 E. 테라코르:뭐니. 엄청 좋아하네. (귀마개가 뭐라고, 밝은 웃음을 짓는 것에 저도 모르게 마주 피식 웃어버린다. 그리고는 당신을 따라 대피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안에 동면 기기가 있었던 건가?)
단테 이그리드:...그래서, 그렇게 되면 깨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하겠다고 한 거예요.(그렇게 말하고는 밝게 웃으며) 떠난 우주선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예요. 사람은 고향을 잊지 못하는 법이잖아요? 저는 그걸 보고 싶어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런 게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그런데 깨줄 사람이 필요하다니…… 거기에 네가 지원한 거니? 대체 언제?
우주선이 돌아오려면 이 지구의 환경이 조금은 나아져야 할 텐데 말이야. 계속 이렇게 얼어붙은 채라면 우주선에 탔던 사람들까지 다 죽고 말걸.
단테 이그리드:그건...(잠깐 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이린이 또 다른 분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동면하시겠다는 분들과 상의했던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신 거 보니까, 정말 안 들으셨던 모양이네요?(너라면 그렇겠지. 이제 그냥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도 끝이 있다면 새로운 시작도 있는 법이에요.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설령 여전히 지구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면 남아있는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다시 한 번 와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어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단테는, 정말 그렇게 믿는 것같습니다.
당신과 단테를 남겨두고 지구를 떠난 사람들이 남겨진 우리를,
혹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남아있는 인류를 데리러 올 거라는 사실을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혼자가 아닌 둘입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그랬나. (워낙 딴청을 자주 피우는 성격이긴 했다. 주변에 관심없고 오직 제 하고 싶은대로만 하는 마이웨이였으니. 그렇겠거니 하며 별 생각 없이 고개 끄덕였다.)
…… (별로, 데리러 올 것 같진 않은데. 그런 상념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희망에 차 있는 이를 굳이 꺾고 싶진 않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됐으면 좋겠네. 그리고 어디로 가든지간에 나비가 있었으면 좋겠어. (관심있는 건 여전히 그것뿐인 듯)
단테 이그리드:(잠깐 있는 공백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너라면 또 부정적인 생각을 할 것이라고, 그런 막연한 생각을 잠시 하다가 그래도 바람이 담긴 말에 웃으며) 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아이린의 관심사는 나비 뿐이네요? 조금 더 다른 분들에게 관심을 주시면 좋을텐데... ... ...이렇게 말해도 관심 없을 거죠?
아이린 E. 테라코르:다른 분이라고 해 봤자 내 눈앞엔 너밖에 없잖니? 동면한 사람들을 상대로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일어났을 때 자기 얼굴에 낙서가 되어있으면 어떨 것 같아? (장난 칠 생각이나 하고 있다)
단테 이그리드:아, 그럼 혼나요! 그 분들께 혼나지 않아도 제가 잔소리할 생각이니까요!! 정말이지... 다음에 동면 기기를 확인하러 올 때는 절대 아이린은 데리고 오면 안 될 것같네요...(또 데리고 왔다가는 진짜로 어딘가에 낙서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이다.)
단테 이그리드:정말 낙서하지 않을 거죠? 저 옆에서 계속 지켜볼 거예요?(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너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곧 열리는 문 쪽으로 고개를 다시 바로 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르 열리면 동면실의 문이 개방됩니다.
고작 한 사람이 누울 정도로 좁은 동면 캡슐 6대가 누워있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알겠다니까. 나 지금은 낙서할 만한 펜도 안 들고 왔는걸. (무해하단 듯 양손 들어보였다)
동면실에 들어오니 온도는 더 내려갑니다.
단테 이그리드:여기서는 조금 더 추워질 거예요. 만약 못 견딜 것같으면 방으로 돌아가셔도 괜찮으니까요.(무해하게 양손을 드는 모습에 덩달아 양손을 들어 짝, 소리가 나게 맞부딪히고는) 전 기계들을 살펴볼테니까 이상한 건 건들이시면 안 돼요, 알겠죠?(그렇게 말하고는 동면 기기들이 작동에 이상이 없는지,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러 간다.)
아이린 E. 테라코르:(이름을 붙이지 못한 건가? 아니면 이름 자체가 작은 생명체인 건가……. 어째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점만 커진다.)
하지만 당신이 그나마 읽을 수 있을 것같은 종이가 책 사이에서 툭, 떨어집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다른 건 용어들이 너무 어렵고 이해도 안 되고. 도무지 뜻을 모르겠는 글자의 나열을 노려보다가,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어 읽었다)
떨어진 종이는 동면 기기에 대한 사용법이 적힌 안내서입니다.
안내서 앞에 표시되어 있는 동면 기기는 당신이 동면실에서 본 것과 같아 보입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만약 쓰고 싶은 상황이 오더라도 빈 캡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캡슐 여섯 개는 다 차 있는지 훑어본다)
동면 기기 최적 작동 유효 기간은 약 400년이라 적혀 있습니다.
단테가 더이상 동면 기기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잠든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400년? 엄청난데. 단테가 400년이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때까지 우주선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누가 깨워주지?)
(단테가 우주선의 귀환을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일까. 우리가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면 -혹은 그 전에 추위로 인해 죽을 수도 있고- 관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종이를 다시 제자리에 잘 끼워두고는 프로젝트 화면으로 시선 돌린다)
화면에는 둥근 지구의 현재 모습이 보입니다.
푸른 지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어 붙은 지구는 유일한 파란색을 잃고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지구 내 생명활동 감지를 나타내는 불빛은 모두 꺼져 있습니다.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단테가 다가와 둥근 리모컨으로 화면을 돌려줍니다.
둥근 리모컨을 반대로 돌리자 대피소 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초록빛이 사라지고 지구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참담할 만큼 차가운 온도와 얼어붙은 땅과 바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단테 이그리드:저번에도 이렇게 돌려봤는데... ...화면은 여전하네요.
아이린 E. 테라코르:(아. 이 화면을 통해 인류의 생명활동을 알 수 있었던 거구나. 이걸 감지할 만한 기술은 또 어디서 나온 걸까? 대피소에 들어온 후로부터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므로 생명활동의 부재에는 그다지 충격받지는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의문과 호기심이 차지한다.)
다른 대피소에서도 이 캡슐처럼 잠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단테 이그리드:그럴까요? 음... 그렇다면 지하에 있어서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좋겠네요. 거기도 여기처럼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좋겠고요.(화면을 미련이 넘치는 눈으로 멀뚱히 바라보다가) 그래도, 동면 기기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다들 살아있을테니까 괜찮겠죠? 아이린은 다 둘러봤나요?
아이린 E. 테라코르:감지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지. 기술이 완벽한 건 아닐 테니까. 볼 만큼은 봤어. (철제 문 가리켠다.) 저기로 가 보자.
단테 이그리드:저기로요?(네가 가리킨 철제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음... 뭐, 그래볼까요.(그렇게 말하고는 너와 함께 철제 문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동면실 한쪽 벽에 마련 된 이 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물쇠도 없고 비밀번호 입력란도 없습니다.
이 문은 관리자 인식증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한 문인 것 같습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대피소의 관리자는... 단테죠.
아이린 E. 테라코르:들어가본 적 있니? 이 문 뒤에는 뭐가 있을까?
단테 이그리드:(들어가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는 여기에 들어갈 수 없어요. 여긴출입금지 구역이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왜? 너한테 관리자 인식증 있는 거 아니었어?
단테 이그리드:그렇긴 하죠. 여긴 대피소에서 사용되었던 내부 통제실인데 출입할 수 있는 인간들이 모두 죽었거든요. 산소도 희박하고 온도도 여기보다 훨씬 더 낮아서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AI들이 인간의 출입을 모두 통제해놨어요.
그렇게 말한 단테는 직접 보여주려는 듯 자신의 인식증을 가까이 댑니다.
붉은 불빛이 몇 번 깜박이더니 동면실에 출입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음성이 들립니다.
언젠가 봤던 해변의 모래처럼 부드럽게 부서지는 눈이었지만 덕분에 머리부터 어깨까지 전부 눈으로 덮였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네 머리색이 나와 같아졌구나? (키득거리면서 다가가 눈을 털어준다)
단테 이그리드:.....................추워요...(작게 에취, 하더니 머리를 흔들어 쌓인 눈을 마저 털어낸다. 그러고는 웃는 너를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아이린, 재밌으세요?
아이린 E. 테라코르:응. (숨길 생각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곤 맑게 웃음짓는다.) 내가 맞을 눈까지 대신 맞아줬네. 귀마개 쓸래? 춥겠다.
단테 이그리드: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라도 쓸 걸 그랬어요. 그럼 그나마 나았을텐데...(하지만 귀마개를 쓰겠냐는 너의 물음에는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늘 아침까지는 운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같은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역시 전 운이 많이 나쁘네요...
아이린 E. 테라코르:어쩔 수 없지.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신경쓰지 마렴. (여전히 웃음기 가시지 않은 낯으로 제 귀마개를 벗어 당신에게 씌워준다.) 주황 여우 같네~. 다음에 나올 땐 꼭 처음부터 모자 쓴 채로 나와야겠구나.
단테 이그리드:(귀마개를 썼더니 고양이가 아니라 여우로 종족이 바뀌었다...) 네, 정말 그래야겠어요. 그럼 일단 다시 전망대가 있는 쪽으로 가볼까요? 멀지는 않지만 눈이 많이 쌓여 있으니 걷기 힘들테니까요... 그 사이에 또 눈보라라도 치면 저희가 곤란하잖아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귀마개도 쓰고 눈도 웬만큼 턴 것 같으니……. 날씨가 나빠지기 전에 얼른 가자꾸나. (걸음을 최대한 빨리 해보았다. 워낙 걸을 때마다 눈에 다리가 푹푹 빠지는지라 쉽지는 않았지만.)
단테 이그리드:(너를 따라 이번에는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도 조심히 살펴보면서 전망대가 있는 쪽으로 가보았다.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여전히 걷기는 힘들지만 더 힘들어 보이는 너를 힐끗 보더니) 아이린, 걷는 것이 힘드시면 제가 업어드릴까요? 눈이 많이 쌓여서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같으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발을 뺄 때마다 자리에서 위태위태하게 휘청거린다.) 힘들지 않겠니? 괜히 넘어졌다간 네 머리랑 어깨뿐만 아니라 온 몸에 다 눈범벅이 되고 말 텐데.
단테 이그리드:눈이야 다시 털어내면 괜찮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아이린보다는 키가 크니까 더 걷기 수월할 거예요. 아, 발 아래도 조심하시고요.(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 놀라서 얼른 손을 잡아준다.)
아이린 E. 테라코르:그럼 부탁 좀 해도 되겠니.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 잠깐 동안만. (손 잡고서 아슬아슬하게 무게중심을 유지한다.) 점점 더 눈이 많이 쌓이는 것 같아…….
단테 이그리드:전망대에 도착할 때까지만 잠시 업어드릴게요...(아슬아슬한 것을 보면 정말 안될 것같다는 생각에 어서 업히라는 듯 몸을 낮춰 등을 보였다.) 위에서 너무 몸을 흔들지만 않으신다면 저희가 넘어질 일도 없을 걸요?
아이린 E. 테라코르:나비가 꽃에 앉은 것처럼 가만히 있을게. (끙끙거리며 다가가 당신의 등 위에 어찌저찌 업힌다.)
단테 이그리드:(이 나비는 나름 무게감이 있네요, 하고 농담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업힌 상태로 머리가 쥐어 뜯기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니까... 네가 제대로 업히면 일어나고는 전망대가 있는 쪽으로 조심조심해서 걸어가본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목은 좁은 오르막길입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무겁진 않니? 힘들면 중간에 내려놔도 돼. 네가 넘어지면 나까지 같이 넘어지니까. (그게 쟁점인 듯)
이 길도 진작 얼음에 덮였어야 할 곳이지만 단테가 꾸준히 길목을 관리한 덕분에 그나마 아직도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단테 이그리드: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이죠...? 무겁지는 않으니까 넘어지지 않게만 조심할게요...
잎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나무는 얼어 붙은 채로 빼곡하게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를 지나갈 때마다 꼭 산에서 조난 당한 기분입니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 사계절 모두 눈에 파묻혀 있는 도시가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종종 그렇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꿈처럼 느껴집니다.
종말은 너무 빠르게 왔고 갑작스러웠습니다.
당신과 단테가 우주선을 타지 못한 건 운이 없어서였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대피소에 도착했고, 최후까지 지구에서 살아 남아 있습니다.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걸으면 전망대에 가까이 왔습니다.
대피소 창문으로 봤을 때 보다 훨씬 더 거대한 크기입니다.
이정도 크기도 높게만 느껴지는데 전망대의 절반은 눈 속에 파묻힌 상태니 과거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높이였는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낡고 허물어진 전망대 안에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단테 이그리드:(전망대에 가까이 오자 눈이 그나마 없는 쪽으로 너를 내려주고는 전망대의 꼭대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아이린. 우주선이 우주로 날아갔을 때, 그 때를 기억하시나요?
대기권 밖으로 사라지는 우주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기억 속에 흐릿하게 자리한 그 모습 그대로일겁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3년이나 지났지만, 선명히 기억해.
그때만 해도 여기에 사람이 무척 많았었지. (전망대의 계단을 향해 다가가며 벽을 손끝으로 쓸어본다.)
그 사람들 다 어디로 갔을까……. (대부분은 죽었겠지만.)
단테 이그리드:...그러게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죠.(전망대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옥상의 문 앞까지 다다라 손잡이에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열지 않고 그 상태로 가만히 있기만 하다가)
우주 상공으로 출발하기 전, 우주선을 탄 사람들이 저희들한테 그렇게 말했잖아요.
단테가 전망대 옥상 문을 열자 눈이 부십니다.
예전만큼 환하지 않은 빛이지만 여전히 전망대 위를 비추고 있는 태양 때문입니다.
시야가 익숙해지자 두번째로 눈에 들어 온 건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눈.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를 가린 채 언덕처럼 쌓인 눈길.
무너진 건물과 서서히 파묻혀 가는 문명입니다.
단테 이그리드:반드시 저희를 데리러 오겠다,... ...그렇게 말했었죠.
전망대 끝에 올라도 우주선이 발사 되었던 발사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전망대 꼭대기에 훤히 내다 보였던 그곳은 지구에 최후로 남은 우주선 발사지이자, 도착지였습니다.
정말 인류가 남은 우리를 위해 지구로 되돌아온다면 바로 그곳일겁니다.
대피소가 이곳에 있고 얼어붙은 채 잠든 인류가 바로 여기 있으며
당신과 단테가 최후로 여기에 남아 있으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 말을 믿니? (눈 아래에 묻혀 있을 수많은 문명을 상기한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속해 있었고, 우리가 누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부 영원토록 녹지 않을 것처럼 두텁고 깊은 눈 속에 묻혀 잠들었다.)
이제는 발사되었던 곳이 보이지도 않는데. (그 목소리에 절망이나 참담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무감했을 뿐이다.)
단테 이그리드: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 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설령 그 때가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 ...저는, 그렇게 믿고 싶어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다시 한 번 많은 인류가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미래를 바라고 있으니까요.(전망대 꼭대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의자 두 개에 쌓인 눈을 치우고는 앉으며) 아직 괜찮은 것같으니까 여기서 이야기라도 조금 더 하고 갈까요? 그냥 간단하게, 인류가 찾았을 행성이라든가... 다시 만난다면 어떤 인사를 할까, 같은 그런 것들로요.
아이린 E. 테라코르:너도 그럼 지금 고향이 그립니? 대피소로 오기 전 원래 살았던 곳 말이야. 나는……. (남은 의자 위에 느리게 앉는다. 날도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태양빛도 있으니 바람도 쐴 겸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많이 나는 건 아니야. 대신 가끔씩 떠오르곤 해. 내가 자주 올라가 놀곤 했던 나무, 풀꽃을 찾으며 뒹굴었던 언덕, 나비가 자주 찾던 꽃덤불 같은 것들 말이야. 그런 건 조금만 자연이 보존된 지역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라서, 특색이 없어서 그리 그립지 않은 걸까나.
단테 이그리드:(너의 말은 추임새 없이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너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꼭 추억의 장소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테니까. 너에 비하면 스스로는 여전히 그럴 수 없었다.) 저는... ... ...네, 많이 그리워요.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곳이 지금도 꿈에 자주 나오고 있거든요. 집 주변에 있던 담벼락이나 주변 이웃들의 웃음소리, 바람이 불면 시원한 소리를 내는 나무들과 저녁노을이 지면 그 빛에 반사되어 황금빛처럼 보이는 강물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눈에 덮여 있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또 슬퍼요. ... ...저도 아이린처럼 무언가를 심하게 그리워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까요? 일단 계속해서 버티고 있지만 저는 제 자신이 무슨 선택을 내려야 할지 아직도 갈팡질팡할 때가 간혹 있거든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리울 만도 하지. 어쩌면 내가 이상한 거야. (우주선이 떠나고 사람들이 많았을 때에는, 이 사태를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일같이 울거나 화를 내거나 정신을 놓아버린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게다가 그때 저희는 고작 열한 살이었다. 어린 나이로 감당하기에는 힘든 재앙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과거를 크게 그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은 자신은 감정 어딘가가 결여되었기 때문일지도.)
당장 네가 버리지 못한 그 기관사 모자만 해도 그렇겠지. 너의 꿈이었잖아.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당신의 목소리에 따라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3년간 지겨울 만큼 하얗고 하얀 눈밭만을 봐 와서인지 이제는 과거의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리는 것도 퍽 힘겨웠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난 존중할 거야. 버티기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어지더라도.
그래도 네 안에는 희망이 있잖아. 불씨는 아직 타오르고 있어.
단테 이그리드:하필이면 남은 사람들이 이러니, 이건 이것대로 먼저 우주선을 타고 가신 분들이 걱정하는 건 아닐까 싶네요.(농담처럼 가볍게 하는 말은 이내 끄트머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너의 말처럼 아직 희망을 악착같이 붙잡는 것은 좋게 봐서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었으며, 나쁘게 보자면 아직까지 미련이 너무나도 넘쳐서 놓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맞는 걸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 간혹 엄습해오니. 그래도 옆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아직 놓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다면... 역시 아직 놓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을래요. 어쩌면 우주선을 타고 새로 정착하게 된 곳은 또 다시 기차가 돌아다닐지도 모르잖아요. 또는 꼭 기관사가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과 희망을 가지면, 적어도 계속해서 살아갈 힘이 생기겠죠. 아이린도 저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저희가 반드시 우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사람들은 분명히 다시 돌아올테니까요. ...그러니까 아이린도 같이 희망을 가져 주실 거죠...?
아이린 E. 테라코르:(그 사람들이 우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지가 더 궁금한데, 난.하지만 입 밖으론 꺼내지 않았다. 냉철할 만큼 비관적인 견해를 굳이 꺼내봤자 분위기만 나빠지겠지.) 우릴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을까. (대신 하려던 말을 그리 바꿨다.) 그러면 더 버텨야겠네. 만약 그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우리가 안 보이면 슬퍼할 거 아냐. (위로하는 어조였다.)
그리고 네 말대로, 언젠가는 다시 기관사 시험이 열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기관사보다도 더 끌리는 꿈이 생길지도 몰라. 나도 지금은 나비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지만 이제 나비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진로를 찾는다면 다른 걸 생각해야겠지. 흠, 환경학자라던가?
나는 지금 살아가는 환경이 아주 힘들지만은 않아. 이미 적응했거든. 벌써 3년이나 되었고……. 희망이란 단어는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 우리가 우주로 가게 될지, 그들이 지구로 돌아올지 궁금해졌으니까. 그때까지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버텨볼게.
단테 이그리드:분명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어쩌면 저희를 잊은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우주선을 탄 사람들 중에서 저희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다면, 그 분들은 꼭 저희를 기억해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더 건강히 지내야죠!(물론 아까 걷다가 눈을 한무더기로 맞은 자신이 할 말은 아닌 것같지만.) 아이린이 환경학자가 되신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같네요... 왠지 사람들을 위한 환경보다는 나비들을 위한 환경을 더 우선시하실 것같은데, 그건 제 노파심이라고 해주실 거죠?(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너의 옆구리를 손으로 몇 번 콕콕 찌르다가 손을 거두었다. 더 찔렀다가 화내면 그건 싫으니까...) 제가 기관사보다 더 끌리는 꿈이 생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궁금하네요. 음... 아이린은 환경학자 얘기를 하셨으니 저는 기상학자라도 지망해볼까요. 다시 이런 기상변화로 인류가 멸종되는 일이 없이 계속 공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마 후대 사람들에게도 더 좋은 일이 되겠죠. 음... ... ...하긴 3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으니까요. 아이린이 그렇게 말하셨으니까 꼭 그 말 지키셔야 해요? 만약 여기에서 더 살아가기 힘들고, 정말 목숨이 위험할 것같다 싶으면 혼자서라도 꼭 우주로 나가기로요. 아이린이라면 우주에 혼자 나가서도 무척 잘 지내실 것같으니까 분명 괜찮을 거예요.
아이린 E. 테라코르:내 부모님은 아마도 못 타셨겠지만. 데린은 탔으면 좋겠구나. 데린은 날 잊지 않아줄 거야. (부모에 대해서는 어렴풋하더라도 데린에 관해서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건강하게 지내려면 운도 좀 따라줘야겠네. 모자를 꼭 챙겨 쓰는 세심함도 필요하겠고 말야.
음, 글쎄. 동식물이나 곤충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어야 인간들도 잘 살 수 있을 테니. 인간을 위한 환경학자야 이미 많을 텐데- (아, 많진 않겠다. 정정했다) 아무튼 나비 쪽에 치우친 연구를 하고 싶단 건 부정 못 하겠네. (옆구리를 찌른 대가로 당신의 팔뚝을 마구 간지럽혀 버린다) 환경학자와 기상학자라. 우리 둘 다 머리가 좋으니까 꽤 잘 맞는 직업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나 혼자서 우주로 나가라니. 우주선이 귀환했을 경우를 말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나갈 수 있는 수단이 없는걸. 혼자서 떠나라면 못 할 거야 없긴 하겠지만……. 옆에서 매일같이 종알종알 잔소릴 해대는 네가 없으면 조금 심심할 것 같기도 하구나.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 네 희망의 불씨도 오래 타들기를 바랄게.
단테 이그리드:저는 아이린의 부모님도 데린도 전부 타고 나가셨으면 하네요. 데린도 분명 아이린을 잊지 않았겠지만... 부모님이고, 가족이잖아요? 그러니까 절대 아이린을 잊지 않았을 거예요. 딸이 여전히 이런 지구에 남아있다는데 아무렇지 않아 할 부모님은 이 세상에 없을 걸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장담보다는 자신의 부모님은 정말 다수를 위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확실하지 않지만 자신의 바람만을 듬뿍 담아 말하는 것 뿐이었다.) 아, 운은... ... ... ...운이 없는 편인데, 그 부분은 노력은 해봐야죠... 운이 노력한다고 좀 괜찮아지는 것이라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그렇게 말하면서 한숨만 몇 번이고 쉬었다.) 인간을 위한 환경학자 분들이 많을까요... 환경을 위해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는 그런 성향만 아니라면야... 아, 그리고 간지럽히지 마세요! 저 간지럼 꽤 탄다고요!(네가 팔뚝을 간지럽히면 말하는 사이사이에도 웃음이 몇 번이고 비져나오다가 결국 두 팔을 아예 등 뒤로 숨기고는 너를 슬쩍 노려보았다.) 만약 우주선이 돌아왔는데 한 사람만 겨우 나갈 수 있다든가 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을테니까요. 그러니까 만약 그런 비슷한 때가 찾아온다면 그 때는 제가 아닌 아이린이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우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제가 외로워서 죽을지도 모를테니까요. ...그래도 여긴 동면하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완전히 혼자도 아니고요. 저도 제 희망을 계속 지켜볼테니까, 아이린도 하신 말씀들은 전부 지키셔야 해요, 알았죠?
아이린 E. 테라코르:그분들은 잘 모르겠어. 네 할머니나 부모님이 무사히 타셨으면 좋겠네. 나를 걱정하거나 그리워하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거든.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뭉뚱그리고 오히려 당신의 가족을 더 신경쓴다. 애정을 받지 못한 만큼 부모와 애착 관계를 거의 형성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운에 너무 붙잡히지는 마렴. 결국 내 운명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니까. 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침울해하는 데 시간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 시도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내 마음을 정돈하는 데에도 빠를 거야.
네가 먼저 내 옆구리 찔러놓고선, 뻔뻔하기도 하구나? (흘겨본다) 이미 인간이라곤 없어졌는데 뭘. 만일 되돌아온다 한대도 아주 소수일 것 같으니까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까지 굳이 펼치진 않을 거야.
아까 내가 한 말이랑도 조금 결이 같은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진 말자. 둘 중에 한 명만 나가야 한다거나 살 수 있다거나 하는 거 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는 아니거든. 오히려 우주선을 타고 나가면 먼저 떠났던 사람들을 만날지도 모르니 그게 더 외로움이 덜한 방법일 것 같은데. …… 네 알아서 하렴. (한 번 더 확인하는 물음엔 고개만 끄덕였다.)
단테 이그리드:외할머니라면 아마 타셨겠지만, 부모님은... ...(너의 말을 곱씹어보니 정말 탔을지 의문이 들어 턱을 괴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워낙 자기 자신보다 세상을, 사람들을 훨씬 더 좋아하시는 분들이니까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지키기 위해서 우주선에 탔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정작 부모님들은 안 탔을지도 모르겠네요... 우주선을 타는 사람들의 수도 꽤 많아서 부모님이 탔는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요.(그래도 만약 가능하다면, 부모님이 살아서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제 운은 아이린이 보기에도 엄청 나빠 보이지 않나요? 아까도 눈을 그대로 맞기도 했고요...진짜 운이 너무 없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심한 감기를 앓기까지 했겠지만요. 그렇다고 아이린의 말처럼 계속 침울해 하지는 않을 거예요. 침울하게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 ... ...그거, 정말 뻔뻔한 아이린이 말하기에는 조금 아이러니한 거 알고 있죠? 제가 뻔뻔하면 아이린은 뻔뻔함의 대왕이에요.(아무렇지 않게 유치한 말이나 한다.)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긴 하셨으니 그런 주장을 펼칠 학자는 이제 없겠죠... ... ...정말 없겠죠?(그래도 네가 고개를 끄덕이면 만족한듯 웃었다.) 그렇다면 됐어요. 그래도 그건 최악의 수니까 당장 일어나지는 않겠죠. 어디까지나 만약이란 가정 하에 있는 이야기니까요.(그렇게 말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슬슬 대피소로 돌아가볼까요? 이대로 어두워지면 정말 답이 없을테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연락이 닿지 않으니 여러모로 아쉽구나. (무선 전파기기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올린다.) 발신만 되고 수신은 안 되는 거니, 이건? 어쩌면 우릴 아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네 감기는 오늘 돌아가서 한 번 보자꾸나. 약이 없으니 만약 걸린다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할 텐데……. 아니기를 바라야지.
유치해. 뻔뻔함 대결이라도 한 번 해보자는 거니?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좀 더 단단히 둘러입는다. 의자도 잘 정리해두고) 없을 거라고 믿어. 그간 인간이 개발을 한다면서 지구의 환경을 망쳐놓은 게 있으니, 솔직히 인간 조금 정도는 사라져도 됐다고 봐. 너무 한꺼번에 싹 사라져버려서 문제지만. 지켜야 할 환경도 다 눈밭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지만……. (이렇게 보니 저희가 처한 상황이 새삼 얼마나 답이 없는지 보여 실없이 미소나 지었다.) 돌아가자. 해가 지면 안 걸릴 감기도 걸리고 말 거야.
단테 이그리드:일단 저는 만져봐도 수신은 잘 안 되는 것같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발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주선이 있는 곳까지 잘 도달했을지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저희가 하는 말이 저기까지 잘 닿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아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약을 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그런데 마침 자신이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게 생겼으니... 약간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에이, 괜찮을 거예요. 들어가서 물 마시고 최대한 따뜻하게 이불 돌돌 말고 자다 보면 감기에는 안 걸리겠죠, 그쵸? 그리고 만약 뻔뻔함 대결을 정말 하게 된다면 100% 이상으로 1000%는 분명 제가 지고 말 걸요? 그러니까 안 할래요... 솔직히 이 때까지 지구가 과학의 발전으로 많이 파괴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조금은 없어져도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한 번에 사라져서... 그래서 문제지만요... 그럼 얼른 돌아갈까요. 혹시 이번에 돌아갈 때도 업는 거 필요하신가요? 필요하시다면 등은 언제든지 빌려드릴 자신이 있으니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러게. 잘 닿고 있긴 할진 모르겠구나. 막상 나는 무얼 말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별로 없어서 지금까진 대부분 다 네가 메시지를 보냈지만 말이지.
몰라. 난 그런 유치찬란한 대결은 애초에 안 할래. (그렇지만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기에 이 단조롭고 어두운 삶에서 한 줄기 웃음이나마 지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번엔 안 업어줘도 괜찮아. 아까 왔던 길대로 자국이 나 있을 테니 거기에 다시 다리를 쏙 넣으면서 가면 되지 않겠니? 우선 돌아가 보자꾸나.
당신이 도착한 대피소 지하는 서늘하고 어둡기만 했던 복도가 네온등이 켜진 것처럼 환합니다.
그닥 좋은 의미로 밝아진 건 아닌 것같지만요.
동면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고작 3년 만에 우주선이 돌아올 리 없다. 게다가 동면한 이들은 관리자가 기기를 조작해야 깨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자신의 의지로 일어날 수 있을 리가……. 불길하도록 밝은 대피소의 복도를 내달려 문 앞에 도달한다. 이렇게 빨리 뛰어본 적이 없다시피 했기에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한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호흡을 고르면서 인식증을 문에 가져다대었다.)
동면기기 사용 설명서가 놓여 있던 자료 보관함에 상자 하나가 깊숙히 놓여져 있는게 보입니다.
상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어딘가 오래 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당신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상자입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짧은 시간 사이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정과 경우의 수가 스쳤다. 설마비활성 의식 유지를 택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 만일 깨어난다면, 만일 이 사태를 본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망하거나 비난할까…….)
(아냐. 나에게 이런 선택권이 주어져서는 안 돼. 나는 관리자가 아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과 각오로 캡슐에 들어갔는지도 알 수 없어. 언뜻 합리적으로 들렸으나 결국은 이 상황에서 회피하고 싶은 변명에 불과한 상념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깊숙히 든 상자를 서둘러 꺼내어 열어본다.)
아이린 E. 테라코르:(이런 와중에도 단테가 돌아올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나는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는데. 제가 결정하고 싶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고 살아왔다. 지금껏 그래왔는데……. 이 시끄럽게 울리는 경고음은 도저히 멈출 기미가 없이 머리를 징징 울려대며 자신에게 책임을 지라 말하는 것만 같다.)
(어떻게 해서든 이 소리를 멈춰버리고 싶었다. 머리가 맑아진다면 이 상황의 해답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고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 없을 제 인식증을 상기하려 하다가, 충동적으로 철문 앞으로 향한다. 어떤 방법이라도 나에게 내어줘.)
(다시 한 번 단테의 인식증을 철문에 대고 접근을 시도한다)
단테의 인식증을 가져다 대면 이전처럼 철문은 여전히 인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그럼 인식증을 바꾼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이들의 것으로.)
당신이 다른 인식증으로 바꾸는 그 순간까지 경고등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이것도 실패한다면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단테를 기다리거나, 찾으러 전망대에 가거나 할 뿐이겠죠.
아이린 E. 테라코르:단테! (마치 색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팔레트마냥 혼란으로 어지러이 치닫던 뇌리와 마침내 철문 너머의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불안이 단번에 숨을 죽인다. 제 뒤쪽에서 느껴오는 한기에 의해서.)
대체 어디에…… 아니,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겠구나. 동면 캡슐에 이상이 생겼어. 제니의 의식이 깨어나려 하고 있다구! 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거니? 너라면 방법을 알고 있지? 나는 다룰 줄 모르니까, 어떻게든 하려고 철문을 열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단테 이그리드:... ...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가 숨을 깊게 내쉬고는 너의 손에서 자신의 인식증을 포함한 다른 인식증들까지 자연스레 빼내어 가져갔다.) 그 부분이라면 제가 잘 아니까 이 문을 열 필요는 없어요. 여기 문은 기계가 고장이 난 모양이네요. 가끔 오류가 생길 때가 있거든요. 어쨌든, 오래 전에 폐쇄된 곳이니까 들어가면 안 돼요. 알았죠?(그렇게 말하고는 동면 캡슐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걸어간다.)
단테가 동면 캡슐의 INF 버튼을 누르자 제니의 고유 정보와 의식 단계가 캡슐 위로 생성됩니다.
단테 이그리드:(캡슐의 상태를 확인하고 프로젝트 화면을 몇 번이고 오고 갔다. 계속 울리는 경고등에 귀가 먹먹한지 한 손으로 귀를 잠시 막다가도, 이내 프로젝트 화면에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동면실의 경고등과 깜빡거리던 센서들도 멈추었다.) ... ...음, 이거면 이제 괜찮을 거예요. 아이린도 일어나자마자 경고음을 계속 들으시고 움직였을텐데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 ... ...(너의 상태를 묻는가 싶더니 잠시 허공을 보고 바닥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아이린,
...동면 캡슐, 멈출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제 팔을 꼬아 팔짱을 낀 채로 착잡하게 단테를 지켜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많은 가설들이 뇌내를 침전물마냥 부유한다. 와중에도 꺼지지 않는 경고음에 이제는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하니?
단테 이그리드:갑자기는 아니였어요.(많이 지쳐 보이는 표정이 언뜻 지나가다가) 지구는... ... ...지구는,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초기 계획 중에 저 분들이 잠에서 깰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차피 비활성을 하려고 했어요. 동면에서 깨어나도 오래 살지 못할테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 그래. 그렇지만……. 지금 네가 고친 것 아니니? 의식이 갑자기 왜 깨어나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다시 잠들 수 있도록 한 것 아니야?
단테. 어제 나눴던 대화를 그새 잊기라도 한 거니? (하긴 그때부터 당신은 어딘가 이상했다. 한 명만 탈 수 있다면 제가 우주선에 타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질 않나. 많이 그립고 지치다고 하기도 했었지. 이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진 걸까.) 아니면 도저히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든 거니.
단테 이그리드:지금 고친 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에요. 나중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가능성은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부분들은 이미 예전에... ...(그리고 너의 물음에는 힘이 빠진 웃음을 흘렸다. 힘든 거냐고 묻는다면,) 사실대로 말하자면 괜찮은 건 아니죠. 너무 많은 시간들이 지나왔는데도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만 있잖아요. 그래도 이렇게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죄송해요.
아이린 E. 테라코르:예전에……? 하려던 말은 끝까지 하렴. 나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었으니 참고 있는 거야. (숨을 가다듬는다.) 3년이란 시간은 길었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지치기엔 충분했을 거야. (고작 열넷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오히려 지금껏 버티고 살아남은 게 더 신기한 일이었을 테다.)
……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는 막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아직 죽고 싶은 이유를 찾지는 못했어.
단테 이그리드:그냥, 별 이야기는 아니에요. 예전에 제가 직급을 맡기로 하면서 저 분들이 이런 상황이 온다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뿐이니까요. 그리 썩 좋은 이야기들은 아니었어요.(손에 들린 인식증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인식증과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인식증. 무엇을 그리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모를 표정을 하다가 자신의 인식증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인식증은 다시 상자에 넣어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아이린은 죽으면 안 돼요. 그건 제가 막을 생각이니까요. 음... 일단 저희 나갈까요? 아직 아침도 드시지 못하셨을텐데 저희 뭐라도 좀 먹어요.
아이린 E. 테라코르:어머. 나는 죽으면 안 되고 너는 포기해도 괜찮고? 날 우주선에 태우는 건 되지만 네가 타는 건 안 된다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구나.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친다. 상자에 인식증을 넣는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먼저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는 내내 단테는 말이 없었습니다.
평소였으면 가짓수가 적은 음식으로라도 무엇을 먹고싶냐며 한창 떠들었을텐데 말이죠.
돌아가면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단테는 대체 전망대에서 무엇을 보는 걸까요?
왜 그렇게 매일,
추운 것을 싫어하면서도 추위를 감내하고 전망대로 가는 걸까요.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여태까지 어떤 신호도 오지 않았던 그 전망대에서.
...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으로 돌아온 단테는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준비합니다.
동면 캡슐의 처분을 생각하느라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단테도 머릿속이 복잡하긴 하겠지만 지금은 딱히 상대를 배려해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이린은 언제나 자신의 호기심과 흥미가 가장 우선이었으므로.) 인식증 말이지. 내 것만 없더구나. 그리고 네 인식증으론 열리지 않았던 철문이 그 사람들 걸로는 열렸고 말야.
내부 통제실에 정확히 뭐가 있는 건지, 넌 알지?
단테 이그리드:아이린의 인식증 카드는... 글쎄요, 전에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인식증 카드를 받은 것이 3년 전이었으니, 이제 누가 잃어버렸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네요. 그래도 대피소 생활에 어려움이 있지는 않으니까 다음에 같이 찾아봐요.(스푼을 들어 음식을 조금 떠서 입에 물다가 너의 물음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거긴 내부 통제실이에요. 지금은 사용을 안 하지만요. 통제실을 사용해야할 만큼 대피소 내부에서 할 일이 많지는 않잖아요. 애초에 깨어 있는 사람은 저나 아이린 뿐이니까 사용하는 범위도 한정적이고요. ...(몇 번 더 음식을 입에 물다가 결국 스푼을 탁자 위에 내렸다.) 죄송해요. 가능한 아이린이 거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하거든요. 말했다시피 거긴 AI가 출입과 퇴장을 관리하지만 관리가 되지 않은지 한참이고 온도는 바깥과 동일하게 무척 춥거든요. 기계 하드웨어들도 전부 얼긴 했지만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들어가시면 안 돼요.
(그러고는 너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대신, 오늘은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이린 E. 테라코르:어려움이 있어 그러는 게 아냐. 단지 어느 틈에 잊어버렸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까 그래. (게다가 남들의 인식증으로는 그 철문이 열렸던 것도 컸다. 만일 지금 제 인식증을 손에 넣는다면 어떻게든 몰래 틈을 보아서 철문을 열려고 시도하겠지.당신의 설명은 그의 호기심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바깥이 아무리 춥다곤 해도 너는 매일같이 다녀오잖아. 오늘도 전망대에 다녀온 거지? 이젠 발사지도 보이지 않는데.
(음식을 입에 떠넣으며 말 잇는다) 좋은 소식은 뭐니?
단테 이그리드:아이린은 워낙 관심이 없는 것들은 기억을 잘 안 하셨잖아요. 아마 그 철문이 없었으면 인식증 카드도 관심이 없어서 금방 기억에서 지우셨을 걸요?(그래도 나름 화제를 바꿔보았는데 들어준 것같아서 기쁜 표정으로 가지고 있던 무선 전파기를 꺼냈다. 버튼을 꾹 누르니 지지직, 거리며 부서지는 전파음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린이 잠든 사이에 제 전파기를 좀 만져보고 있었거든요. 바깥의 신호도 잡을 수 있게 되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지구 근처 우주 상공에 누군가 와 있는 것같더라고요. 오늘 아침 전망대에 갔을 때 신호가 잡혔어요. 너무 짧은 통신이라서 대화는 못 했지만 제 착각이 아니라면 저희도 곧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거예요! ... ...아까는 정말 너무 지쳐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한 거지만, 동면 캡슐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할까요. 만약 저희를 데리러 온 것이라면 동면한 분들도 다같이 떠날 수 있을테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수신이 되었단 말이니? 게다가 지구 근처의 상공에……? 네가 매일같이 전망대에 간 보람이 있기는 하구나. (하지만 그런 거라면 왜 직전의 동면실에서 네가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연스럽게 의심을 하게 된다.) 희망의 불씨가 아직 네 안에 남아있다면 조금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까의 너는 너무 지쳐 보였어. 답잖게 포기를 입에 담을 만큼 말이지.
그러면 내일도 전망대에 올라가봐야겠구나. 바깥이 많이 춥지 않니? 계속 너만 나갔다간 너도 감기에 걸리거나 앓을지 모르니 내일은 내가 나가볼게.
단테 이그리드:내일이요? 음... ...그럼 같이 가볼까요? 아, 괜찮으시다면 아이린의 전파기도 조금 만져보면 저처럼 신호를 곧잘 받을 수 있게 하지 않을까요? 제 전파기만 썼다가는 나중에 고장나면 큰일이잖아요. 방금 일들은 정말 지쳐서, 그래서 한 말들이니까 그냥 잊어주세요... 정말 답지 않게 굴었던 건 맞으니까요.(좀 창피한듯 화끈거리는 얼굴을 하다가 일어나서 자신이 먹을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아이린도 다 드셨나요? 오늘은 제가 치울테니까 좀 쉬세요. 다리 상태도 걱정이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알겠어. (안 잊어버릴 거지만.) 누구나 지치는 시절은 오는 거지. 그리고 경고등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으니까. 나도 짜증이 절로 나더구나. 그나저나 어제 너한테 업혀 가기까지 했는데 왜 동상이 걸렸는지 모르겠어. 내 몸상태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제 그릇을 닦고 정리한다. 그리고 제 전파기를 꺼내왔다.)
단테 이그리드:오랜만에 아이린이 밖을 나가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돌아올 때는 해도 저물어서 더 추워지기도 했으니까요. 저야 이제 익숙은 해졌지만 아이린의 몸은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죠...(물론 자신 또한 익숙해졌다고 해도 추위를 싫어하는건 마찬가지다. 그러고는 네가 꺼내온 전파기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상태를 살펴보더니) 음... 이 정도면 금방 기능을 할 수 있을 것같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그렇게 말하며 공구들을 몇 개 가져와 전파기의 부품들을 하나하나 해체해서 만져보았다.)
아이린 E. 테라코르:하긴 난 바깥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으니까. (지구가 얼어붙기 시작한 초기에는 혹시나도 남아있는 나비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주 밖을 헤매고 심지어 눈밭에 드러눕는 등 기행을 저지른 적도 다수였다. 하지만 나비는 고사하고 거의 모든 생물이 얼어죽은 지금에 와서는 나가더라도 바라는 것을 찾지 못함을 안다.) …… 제니는 왜 갑자기 의식이 깨어나려고 했던 걸까. 관리자의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단 게 그 때문이었을까?
단테 이그리드:(드라이버로 나사를 조금씩 돌리다가 너의 물음에 눈만 굴려서 너를 바라보며) 그건 아마 캡슐의 오류가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심각한 건 아니라서 금방 해결이 되었지만요. ...그 분 말고도 다른 분들도 그런 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동면실은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겠어요. 혹시나 누구 하나가 정말 깨어나면 지금의 상황에 절망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클테니까요. 깨어나더라도... 그 시기는 저희를 데리러 온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만이어야 해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제가 조금 더 주의를 해볼게요. 아니면 경고등의 소리라도 조금 줄일 수 있도록 살펴볼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하긴 온도가 점점 더 내려가고 있으니, 기계가 이상을 일으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침묵하다가 느리게 동의를 표시했다.) 그래. 일찍 깨어나봤자 해결책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 없겠지. (그래도 역시 제 손으로 비활성 의식 유지를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경고등 소리를 줄일 수 있는 거니? 너무 작게 줄여도 위기를 알아채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작게 조정해도 괜찮을 것 같아.
단테 이그리드:그렇잖아도 점점 추워지니 더 문제네요. 이러다가 캡슐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캡슐들에 오류가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정말 골치가 아플 거예요...(머리 속으로 잠깐 상상만 해보았는지 금방 피곤해 죽을 것같다는 표정이 그려졌다. 그래도 그 때가 당장 오지는 않겠지...) 아, 그래도 너무 많이 줄이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 많이 줄였다가 정말 큰 일이 벌어지면 안 되잖아요~ 적당히 잘 들릴 정도로만 조정해야죠.(어느 정도 전파기를 만지다 보면 이제 다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커버를 닫고는 너의 손에 쥐어주었다.) 네, 이제 잘 될 거예요~ 그럼 오늘 일들은 다 한 것같으니 잠시 전망대에 또 다녀올게요. 이번에 또 전파가 잡혀서 운이 좋으면 대화를 해볼 수 있을테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그런 오류가 생기기 전에 우주선이 와 주는 게 가장 금상첨화일 텐데 말이야. (처음엔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단테가 받은 수신이 잘못 전달된 게 아니라 진짜라면, 어쩌면…….) 그래. 네가 알아서 잘 판단하렴. 나도 오늘 자던 중에 그 경고 소리를 듣고 깨어났었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단테. 어제 대피소로 가던 중에 네가 손으로 내 눈가를 덮어줬더니 순식간에 의식이 끊기더구나. 나한테 뭐라도 한 거니? (좀 의심스럽게 본다)
단테 이그리드:분명 그 전에 우주선이 도착해주겠죠~ 만약 도착하지 않는다면, ... ...그 때는 그 때 가서 생각을 해볼까요.(어떻게 들으면 속이 편할 것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외투를 다시 걸치고 장갑을 다시 쓰며 경고등 소리느 얼마나 줄일까, 같은 속 편한 생각을 하다가) 아, 그거요? 그 때는 아이린이 걷기 힘들 것같아서 다시 들려고 했는데... ... ...다시 보니까 그 때 아이린이 의식이 없으셨어요. 눈을 헤치고 걷느라 피곤하셨던 거 아닐까요? 오랜만에 밖이었잖아요.(어색하게 딴청을 피우며 말을 하다가 자신의 전파기까지 제대로 챙기고는 얼른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아마 저녁 쯤에 돌아올 거예요!(그렇게 말하며 얼른 대피소 밖으로 나가 전망대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이린 E. 테라코르:지금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좋을 것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속 편하게 넘겨버린다.) 단테,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넌 거짓말을 정말 못 하는구나. 네가 내 식사에 약을 타거나 하는 건 못 봤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눈가에 손 닿는 정도로 바로 잠들어버린 적은 없었어. 게다가 나는 원래 아주 다채로운 꿈을 꾸거든. 이번엔 어쩐지 꿈조차 꾸지 않고 잠들었던 것 같은데. (팔짱 낀 채로 신발 신는 모습을 바라본다) 할 말이 없으니 도망치는구나.
제대로 설명해줄 때까지 계속 끈질기게 물어볼 거야. (현관이 닫힐 때까지 조금은 음산하게까지 보이는 낯으로 통보(?)했다)
당신의 그 말을 들었는지 어째 현관을 빠져나가기 직전의 단테의 표정은 묘하게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테의 말이 맞았습니다.
정말 지구를 떠났던 인류가 우리를 데리러 오기 위해 지구에 돌아온 거라면.
혹은 그들이 아니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봐 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오늘 들은 것 중 가장 좋은 소식이네요.
이 추위와 고립 속에서 벌어날 수 있다는 것만큼 좋은 소식이 또 어디 있을까요.
우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멸망된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언제 지구에 도착할까요?
아마 그 전까지 우리는 계속, 계속.
아이린 E. 테라코르:(3년이나 부재하였다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인지 아직은 잘 믿기지 않는다. 과연 정말로 '우리'가 우주선에 탈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전파 탐지실에 가서 전파 기기를 작동 시키는 것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테의 관리자 인식증을 챙겨야겠죠.
아이린 E. 테라코르:(감지 활동 대상이 없을 리가. 이 메시지만을 기다려 왔는데. 단테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앓고 있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는, 옷을 두껍게 걸쳐입고 제 전파 기기를 손에 꼭 쥔다. 만약 그들이 정말 우주선을 몰고 온 거라면 단테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
아이린 E. 테라코르:(닿았구나!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보내고자 하는 전파를 기록한다. 어렵지 않았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이고 해 본 일이었으니까.'생명체 존재. 최소 8명. 좌표는 xx.x.xxx, xxx 대피소.')
아이린 E. 테라코르:무슨 소리니?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들에게 닿지도 않을 터인데 절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데.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인간이 아니라니?)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1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바보 같은 소리.)
(다시 전파를 송신한다.) [우리는 인류예요. 살아 숨쉬고 있어요. 전망대에 여러 번 올라 전파를 보냈습니다. 우주선이 왔다면 저희를 데려가 주세요.]
그들:우리들의 기계가 고장난게 아니라면 너에게선 인간의 생체 활동이 전혀 감지 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우리쪽 기기 오류는 아닌 것 같네. 우리는 네가 전파를 쏘아 올린 그곳 바로 위에 있어. 네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래 된 대피소 같은데 너는 그곳을 관리하는관리자인가?
아이린 E. 테라코르:…… (이제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관리자의 친구입니다. 저는 열네 살. 이름은 아이린 에바 테라코르예요. 관리자의 이름은 단테 이그리드. 저와 동갑입니다.]
그들:흠, 대피소 전체를 스캔해봤는데 지하에 동면 캡슐이 6개 있다고 나타나는 군. 하지만 그 외에는 없어. 너를 포함해서 그 단테 이그리드라는 존재도 생체 활동이 감지 되지 않아. 내 생각에는 너와 그 존재는 인간이 아니야. 너무 긴 시간동안 작동되어서 그런지 정보 저장에 오류가 생긴 것 같아. 하긴.400년이면 그럴 만도 하지.
아이린 E. 테라코르:무슨…….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저희 대피소의 프로젝트 화면에는 생명 활동 감지 불빛 두 개가 표시되고 있어요. 오류라니…….]
그들:그 생명 활동 감지 불빛이란 거, 누가 말해줬어? 정확히 네가 그것들이생명 활동 감지라는 의미로 반짝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해?
...아, 확인했어. 너희가 확인했다는 생명 활동 감지 불빛이란 거.
아이린 E. 테라코르:(손이 떨려서 전파를 수신하는 속도가 느렸다.) 분명, 단테가…….
[생명 활동 감지 불빛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거죠?]
그들:그건GPS야. 정확히 너희가 어디에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자 하는 불빛일 뿐이지. 안드로이드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
아이린 E. 테라코르:(이제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방금까지 살아있었어. 식사를 하고 책을 읽음으로써 여가활동을 했으며 수면을 취했다. 그런데 내가 안드로이드라니? 기계일 뿐이라고?)
[식사도 수면도 모두 평범한 인간과 동일하게 행했어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그들:너희 시대의 안드로이드 정도라면 그 정도의 기능은 있었겠지. 생체적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능들은 구현되어 있을 거야. 하지만 내구성은 역시 오래되어서 좀 문제가 있을 것같은데. 오랫동안 차가운 곳에 있어서 기능이 말을 듣지 않는다든가.
아이린 E. 테라코르:(동상이라거나, 단테의 손이 닿자마자 잠들었던 게…… 내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날 구성하는기능의 문제였다고?)
……. (이젠 도저히 더 소통을 할 의지를 찾을 수 없었다. 충격에 빠져 손을 떨다가 전파 기기를 던지듯 내려놓고 뛰쳐나간다. 단테가 감기에 걸린 건? 그것도 내구성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내가 지금껏 쌓아온 삶이 부정당하다니.)
단테. 단테! (그대로 대피소로 돌아와 단테의 몸을 흔들어 깨운다. 다급하면서도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외친다.)
당신이 방으로 돌아오면,
단테가 누워있던 자리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만 있군요.
아이린 E. 테라코르:어디로……. (시선이 흔들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체, 너마저 어디로 간 거니.
너는 전부 알고 있었던 거니?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라는 걸?
희망 따위 가져봤자 아무 의미 없는 존재라는 걸……?
(한참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가련히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아무리 홀로 추위 속에 떨고 있어도 단테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경고음이 울리는 일도 없다. 비로소 이 지구에 오롯이 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속해 있다고 믿어 왔기에 의미 있었던 삶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단테의 어둡고 지쳐 보였던 표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3년이 아니라 400년이었다면, 그 누구라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차라리 내가 단순히 명령만을 이행하는완벽한기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째서 나에게 생각과 감각과 감정이라는 기능을 주었나.)
(나의 기억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던 걸까……. 멸종한 세계의 심각성에 비해 나름대로 잘 버텨오고 있다고 믿었는데,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 조각조각 갈라져 비산해 버리자 설원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외롭고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눈물 흘려본 적 없었건만 왈칵 울음을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이린 E. 테라코르:(얼마나 시간이 흐르는지조차 모른 채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다시 전파 탐지실로 돌아간다. 맨 처음 그곳에 갈 때는 설레임과 기대감에 차 빨랐던 걸음걸이가, 지금은 황망함과 비탄에 차 느리고 무겁기만 했다.)
[그럼 여러분은 누구인가요?]
그들:우리는 지구를 버렸던 인류의 후손이야. 정확히는 새로운 행성 ‘알파 566’을 고향으로 가진 인류지. 알파 566도 이제 살기 어려운 땅이 되어 버려서 이전 고향을 탐사하러 온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곳은 … 선조들이 말했던대로 여전히 최악이군. 너희는 지구를 빠져나가길 원하나?
아이린 E. 테라코르:[알파 566도 지구와 같은 대재앙이 닥쳐왔나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빠져나가길 원한다 한들, 영원히 자라지 않는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대피소에서 동면하는 이들은 우주선만을 기다려 왔을 테니, 이들 여섯 명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른 관리자는 갑작스럽게 사라졌기에, 그를 찾아 대답을 들은 후 다시 답을 하겠습니다.]
그들:그래, 인간이 또 한 번 같은 실수를 저지른 거나 다름 없어. 여기는 그나마 나아졌나 탐사차 왔는데 더 나빠지기만 했으니...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 우주선의 탑승 인원은 제한되어 있어. 우주선의 탑승 인원은 최대 4인이고, 지금은 나와 셴. 그리고 크리스가 있지. ‘알파 566’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지구를 방문하지는 않을거야. 여긴 말 그대로 버려진 행성이니까.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버려졌다고요.
그런데도 단테는 무엇을 기다린 건가요.
이미 버려진 이 행성 속에서,
우리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떠나버린 인류에게.
그들:아, 그런데 말이야.
며칠 전에 신호를 처음으로 수신한 존재가 있었지. 그 존재가 네가 말하는 단테인가봐. 그도 우리에게 그도 우리에게 우리들을 데려 가려고 찾아온게 아니냐고 물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야기해줬어. 너희가 로봇이든, 정말 400년동안 살아남은 인류든 알파 566으로 데려 가려고 온 건 아니라고 말이지. 자리는 한 자리밖에 없고, 이후에는 다시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을거라고.
그랬더니...좋아하던데?데려가야 할 존재가 있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이 행성의 기후가 너무 혹독해서 244시간 동안 통신이 먹통이었어.
내부 통제실*에 한번 가봐. 그곳에서 또다른 기기 작동 신호가 잡혀.
그들의 통신은 잠깐 거기서 끊겼습니다.
아이린 E. 테라코르:(그래서 네가 전망대에서 내게 그리 말했구나. 한 자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바보 같으니. (이를 악물고는 잠시 몸을 옹송그리고 떨었다.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숨을 가다듬고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부 통제실로 향한다. 그 철문, 이번에는 여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내부 통제실을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선 전파기로 전파를 보낸 인류의 후손이 내부 통제실을 막고 있던 AI 활동을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제니:그건 로봇들에게 맡기면 돼.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르게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어. 물론 대피소 전체의 관리를 로봇에게 맡기는 건 굉장한 도박이긴 하지. 그래도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죽는 것 보다는 나아. 인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안 돌아올지도 모르고.
단테 이그리드:그건... ... ...머지 않아 돌아올 거예요. 아이린과 제가 함께 있을테니까요. 분명 괜찮을 거예요.
제니: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아이린도 너도 사람이야.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아이린 E. 테라코르:(그저 관리자로 남기 위해서, 나와 자신을 로봇으로 개조했다는 것인가. 어쩌면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어쩌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음성 녹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겉으로 보이는 지금의 나이보다 확연히 성숙했다.) 어린 네가 멸망하는 세계에 던져졌음을 안타까워 할 이유가 없었네. (중얼거린다.)
멋대로 나를 안드로이드 따위로 개조할 정도로 살고자 하는 열의가 넘쳤던 것 같은걸. (이를 악물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을 전부 잃은 나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는. 이 상황에 대해 따지기 위해서라도, 그의 머릿속을 알기 위해서라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파 기기를 손에 쥔 채 전망대로 향한다.)
당신은 전파기를 손에 쥐고 전망대로 향합니다.
모든 사실을 알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면 눈이 내립니다.
하긴, 눈이 내리는 건 이 지구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대피소 밖에는 강한 눈보라가 치고 있습니다.
그 눈보라를 보고 있으면 이제 모든게 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구에 기대되는 미래 따위는 없고 최후에 남은 인류도 없습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지구가 버려졌다는 것과 우리 역시 버려진 존재라는 겁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눈 때문에 새겨진 발자국은 금방 새로운 눈 아래로 덮여 사라지지만 당신은 알 수 있습니다.
단테가 신발도 신지 않고 전망대로 걸어갔다는 것 쯤은
짧은 순간이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거센 눈보라에 두 팔과 다리, 뺨이 얼어 붙을 것같이 차갑지만 이 통증 역시 인간이 느끼는 실제 감각이 아니겠죠.
모든게 얼어 붙을 것 같은 이 감정도,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요.
아이린 E. 테라코르:이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들을 사람도 없건만 중얼거리며 빠른 속도로 발을 내딛는다. 눈에 무릎까지 푹푹 묻히건, 차디찬 칼바람이 저의 귀를 시리도록 베고 지나가던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직 전망대로 향해 나아가는 데에만 집중했다. 어차피 곧 쓸모를 잃어버릴 기능. 나의 진짜 감각이 아니라 기계를 기반으로 한 생체 감지일 뿐이다. 역겨울 정도였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는 감각이.)
(최대한 빠르게 걸어 전망대로 향하고 계단을 오른다. 그의 낯은 지구에 흩날리는 눈싸라기만큼이나 차갑게 얼어붙은 채였다.)
전망대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갑니다.
겨울만 계속되는 추운 행성, 지구.
계단을 오르는 당신은 어떤 감정이 드나요.
아니, 이렇게 말해야겠죠.
감정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지금 기동되고 있나요.
계단 끝에 도착하자 꼭대기로 나오는 문은 열려 있습니다.
열린 문 사이로 눈이 쌓여갑니다.
밖을 향해 한 발자국 걸어나가면,
눈이 겹겹하게 파묻혀가는 풍경 속, 단테가 서있습니다.
당신의 눈에는 보입니다.
맨발로 나와 부르튼 발과 멍이 든 것처럼 푸르고 우울한 색으로 변해버린 다리가요.
심한 동상에 걸려 피부가 자신의 색깔을 잃어 버린거지만 그건 이제 당신에게도 단테에게도 상관 없는 일입니다.
단테 이그리드:...잘못했어요.(전망대에 멍하니 있다가 네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말은 사과였다. 분명 네가 이렇게 뛰어나올 정도면 이미 모든 것을 봤으리라 그렇게 짐작하면서. 잠시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허공을 맴돌다가 너에게 다가가 인식증 카드 하나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미 400년 전에 잃어버렸다는 너의 인식증 카드였다.) 사실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었죠. 아이린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래서 이 인식증은 대피소 내에서 이미 인간으로서의 통제 권리를 잃어버렸으니까요. ... ... ...그래서, 아이린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래서 숨기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한참을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그래도 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아이린이 이 지구에서 생존했었던 인간이라는 건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우주선을 타고 나가도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었구나, 하고 생각할테니까요...
아이린 E. 테라코르:(당장이라도 비처럼 쏟아내고 싶은 많은 말들이, '잘못했어요' 라는 첫 마디에 잠시나마 삼켜진다. 이미 짐작한 거겠지.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영원처럼 긴 시간이 주어졌다면 더더욱 그런 법이니까.) 알고는 있구나.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난 지금 네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야.
(후련한 듯한 웃음을 보자 더욱이 화가 치밀고, 익숙지 않은 부아가 치솟는다.) 어째서 웃는 거니? 내가 고맙다고 인식증을 받아들 줄 알았어? 잘 되었다고 우주선을 타고 나갈 줄 알았어? 그래봤자 이미 내가 안드로이드라는 건 저들에게 다 드러났어. 부품을 교체해주지 못하면 죽어버리고 마는 몸뚱아리.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봤자 무슨 소용인 거야! (아이린의 어조는 언제나 신비스러울 만큼 가녀리고 차분하였다. 이렇게나 악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400년의 세월 속에서 기억이 잊혀진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래서일까. 목소리가 제멋대로 이지러지고 갈라져서 우스울 만큼 볼품없이 들렸다.)
왜 그랬어?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이런 상황을 초래해버린 거지. 대체 왜 그랬어!
단테 이그리드:차라리 지금 뺨이라도 내어 드리면 아이린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까요?(허탈한 웃음소리가 한숨처럼, 추위에 얼어버린 하얀 숨이 입 밖으로 나오다가 바람 속에서 바스라졌다. 아, 웃으면 네가 더 싫어하려나.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면서도 웃음은 여전히 멈추지 못했다. 프로그래밍이 잘못됐나? 하긴 추운 곳에 이러고 나왔으니 망가질 만도 했지. 머리 속에서 웅웅거리며 울리는 너의 외침에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많이 지쳤지만 그래도 후련한, 그래서 후회가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린이 우주로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면 저들은 분명 아이린만큼은 데리고 나갈 거예요. 저와 이미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으니까요. 저는... ... ...저는, 무서웠어요. 아이린이 저에게 실망했어도, 화가 난다고 해도. 온 세상의 미움을 전부 받는다고 하더라도 혼자 남는 것은 너무 싫었어요.
아이린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겠죠? 저희가 인간이었을 때, 말싸움을 하고 사이가 틀어지고. 그래서 대피소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는 것을요. 겨우 만났는데... 상황은 여의치 않았어요. 그래서 개조를 한다고 했을 때 어른이 아닌 아직 저희가 친구였을 때를 바라면서 지금을 만들어 버렸어요. 죄송해요... 처음에는 분명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만들었는데, 이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 제가 느끼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네요. 프로그램이 잘못 된 것일까요? 저는 그저 아이린과 계속 친구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이제 손 끝에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상 이상으로 내구도에 문제가 생겼는지 손가락을 굽히는 것 자체도 이제 힘들어졌다.)
하지만 아이린의 성격을 저는 잘 알잖아요? 무언가에 꽂히면 그것에 집중하고, 또 파고들고. 그래서 아이린도 400년의 시간동안 몇 번이고 기억을 다시 떠오르는 거 있었죠. 그 때마다 아이린은 지금과 같았어요. 이렇게 화를 냈었죠. 그 때마다 저는 다시 한 번 아이린의 기억을 리셋시켰고, 저희가 지구에서 기다렸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전 제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없어졌어요. 이대로 지구가 끝나버릴 때까지 고립될 것만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몇 번이고 후회했어요. 차라리 제가 아이린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저희가 동면했더라면. ...처음부터 이 곳에 와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 ... ...아이린은,저를 원망하시나요?
아이린 E. 테라코르:
운
기준치:
50/25/10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네가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했건간에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내 의지야. 너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 거니? 나를 안드로이드로 만들 때 나의 의지가 들어가 있었을 리 없잖아. 그게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언제 나에게 이런 반쪽짜리 영원을 달라고 했니? (이제야 안드로이드가 되기 전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잃었던 제 조각을 뒤늦게서야 붙잡는다. 영원을 바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이 떠나가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누렸던 주변인들의 우정과 애정을 붙잡고 싶었다. 지구가 지긋지긋한 눈발로 뒤덮이기 전까지 자신이 누렸던 초록빛 낙원에서. 영원이 이런 형태일 줄 알았더라면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텐데.)
데린이 우주선에 있으리라는 것도, 언젠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전부 네가 개조한 내게 맞춰주기 위한 기만이고 거짓말이었을 뿐이구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희게 질린 당신의 피부를 향해 내려치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포기했다. 그런다고 대체 무엇이 바뀌나.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한들 데린은 이미 오래 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다. 자신이 아꼈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은 채로 홀로 우주선에 타 보았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구! (마구 소리를 내지른 탓에 금방 목이 쉬었다. 아니, 아니. 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추위에 부품이 망가지고 있기 때문일 터다.)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나야말로 영원을 원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너무 무모했잖니. 차라리 관리자 역을 포기하고 같이 캡슐에 들어갔어도 됐을 텐데. (너는 바보처럼 착하고 이타적이었지. 그 성향이 참 신기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저의 숨결을 기계에 묶는 결말로 돌아올 줄이야.)
(이런 잔혹하고 차가운 결말을 받아든 와중에도 저는, 우리가 아예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같은 가정은 하지 않는다. 아이린에게 가장 가치를 갖는 건 현재도 미래도 아닌 과거였으니까. 돌아볼 때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반짝이고, 그렇지 않은 순간이더라도 포장해서 끝끝내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거짓을 덧씌울 수 있는 과거.) 그래.너를 원망해.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버린, 나를 홀로 우주선에나 태워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네가 끔찍하게도 원망스러워!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모든 감각과 감정을 지워버리기라도 하지. 리셋 따위 할 일 없게 처음부터 나를 그저 단순한 기능만 가진 로봇으로 만들지 그랬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너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이것도 모두 거짓일 뿐인데. 전부 거짓인데…….
단테 이그리드:저는 아이린의 모든 걸 프로그래밍 했죠. 원래의 성격도, 좋아하고 싫어했던 것들도 전부. ... ...하지만 의지라는 건 프로그래밍을 한다고 해서 기동되는 것이 아니에요. 기계에도 의지라는 것이 깃들 수 있어요. 신념이 깃들 수 있어요.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 또한 아이린의 자율의지 아닌가요? ... ... ...제가, 그런 것까지 프로그래밍을 했을리가 없잖아요.(이제는 추위가 성대를 흉내낸 기계부품에도 영향을 주는 것인지 말하는 목소리는 점점 쉬어가고 어떤 단어는 노이즈가 끼기도 했다. 만약 아직 인간이라고 착각했던 때라면 이 목소리조차 울음으로 목이 매인 것처럼 들렸겠지. 결국 내 욕심으로 만들어낸 영원 또한 너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구나.)
기만... ...기만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데린의 후손 또한 분명 있을테고, 그들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아이린이 아주 조금이나마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제 착각이었네요. 모든 것을 잃은 채 우주선에 탄다고 해도, 아이린이 살아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것 아닌가요? 아직 살아있으니까, 기계로나마 숨을 쉬고 있으니까 괴로워할 일도 있겠지만 행복을 느낄 일도 분명 있을테니까요. 물론 아이린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요...(결국 어떤 말을 내뱉더라도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건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너의 생각을 돌리고, 그래서 너를 우주로 보내기 위한 그런 형편없고 얕은 변명. 그럼에도 이번에 하는 말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거짓없이 모든 것을 말하기로 했다.)
아이린, 그 캡슐 또한 이제 가망이 없어요. 동면 캡슐의 사용 기한은 400년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제 400년이에요. 그 긴 세월도 눈 깜빡할 사이에 도달했다고요. 만약 저희가 동면을 했다면, 그래서 다시 눈을 뜨고 아직도 이렇게 황량하고 추운 지구의 모습을 보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었겠어요. 잠드신 분들과 마지막에 했던 대화도 똑같았어요. 나중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을 때도 지구가 똑같다면 차라리 비활성화를 원한다고요. ...이곳은 그런 곳이에요.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그런 버려진 행성이라고요. 그 때 느꼈을 절망은 지금 아이린이 느끼는 것보다 덜했을까요. 더했다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해요, 겨우 제 생각 뿐이었네요.(차라리 너를 완전한 기계로 만들었다면? 그런 가정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관리자로 남으면서 원했던 것은 친구였던 아이린이지, 말을 듣기만 하고 온순한 그런 기계가 아니었다. 눈은 점점 몰아치고 이제 세차게 부는 바람에 너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너 또한 그렇게 보였겠지. 날은 어두워지기만 하고 눈은 점점 높게 쌓여갔다. 지금 너의 눈에 나는 대체 어떻게 보일까. 감정이 북받치고 울렁거려서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나마 눈발에 가려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성대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칠 부품도 이제 없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쥐어 짜냈다. 노이즈로 망가진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아이린 E. 테라코르:기계 따위에 의지나 신념이 깃들 수 있을 리가. (부정한다. 자신이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연기가 새어나오는 것도. 우리가 함께 식사를 했거나 바닥에 누워 잠들었던 순간도. 인간으로 착각했던 그 시절, 때로 즐거운 일이 있으면 웃음을 짓고 농담을 하였던 그 순간들은 전부 거짓일 뿐이라고.)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부정한들 기억이 사라지진 않는다. 안드로이드임을 몰랐던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은 전부 진실이었다. 그리고 점점 강해지는 눈보라 아래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가슴에서 느껴지는 이 통증과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북받침마저도…… 전부, 아이린 에바 테라코르라는 한 명의 의지로 빚어낸 감정인 거겠지. 내가 아는 단테 이그리드라면 일부러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리 없으니까. 그 사실이 자신이 안드로이드라는 현실보다도 더 서럽다.)
의미없어.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후손이 있다고 한들 나와 데린이 함께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게 아니잖니? 나는 너희들 말고 또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의 자리는 깊지만 너무 좁아서, 많은 사람을 포함시킬 수 없다고. (비참함이 바람처럼 시리게 제 뼛속을 파고든다.) 너도 알고 있잖아. 전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는 걸.
그래. 만약 우리가 캡슐에 들어갔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았겠지. 지구에는 가망이 없어. 우주선도 돌아오지 않아. 과거보다도 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뿐이었겠지. (제니의 의식이 왜 깨어나려 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기계의 제한이 다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을. 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당황하고 놀랐던 걸까. 허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사람으로 살고 싶어. 사람으로 남고 싶어.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내딛으며 당신에게로 향한다.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천천히 닦아내었다. 추위로 인해 손끝이 얼었는지 감각이 희미하고 움직임이 둔하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겠지. 그러나 위기감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당신의 서러움이 마치 제 것인 마냥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시선을 잠시 내리감았다. 어둠이 닥친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암흑이…….)
그러니, 내가 사람이었더라면 맞았을 결말을 택할래.
외롭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아이린 E. 테라코르:이 지구에 너를 외롭게 두고 떠나는최후의 인류는 되지 않을 거야.
단테 이그리드:(너의 말을 듣는 사이사이에도 마른 기침이 몇 번이고 나왔다. 목구멍에서 비린 맛이 나는 걸 보면 성대 부품의 기름관이 터지기라도 했나. 눈보라 속에서 듬성듬성 들려오는 너의 말을 듣다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소리없이 눈물이 떨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25년 하고도, 400년을 함께 지냈으니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너는 내가 남긴 유산을 절대 기꺼워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원했던 영원은 네가 사랑했던 그 시간까지 얼려버린 듯한 그런 영원이었으니까. 너의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사람으로 남고 싶다니. 나는 네가 사람으로 남길 원했다. 하지만 그건 이런 춥고 절망만 남은 곳이 아닌 조금 더 먼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그나마 안전한 곳이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린, 아이린... 그럼 안 돼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사람이라면 무릇 가지고 싶은 생존욕구란 것이 있잖아요.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우주로 나가셔야죠. 이런 곳에 남아 있어서는 그저 차가운 고철덩어리 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떠나주세요, 떠나주세요, 아이린. 저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감정도 없고 프로그램도 더이상 작동하지 않은 망가진 안드로이드는 외로움을 느낄 새 조차 없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우주로 나가주세요. 제가 인간이었을 때도, 지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떼를 쓴 적은 없었잖아요. 제발 이번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될까요? 저는... 아이린이 미래를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요. 아이린이 살았으면 좋겠어요...(말끝이 흐려지고 기침이 나오면 하얀 눈밭 위로 검은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조차도 눈보라에 흔적없이 지워졌다. 너까지 이 곳에 있으면 나처럼 될 것이다. 그것만은 원하지 않았다.) 아이린, 제발... 제발. 제발, 나가주세요. 지구를 떠나주세요...
(시야가 일렁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제 인식증 카드를 꺼내 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도 제가 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걸 가지고 떠나주세요. 카드가 있으면 제 이름을 아는 사람이 생겨요. 카드에 있는 사진으로, 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생겨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저는 정말 혼자가 아니게 되잖아요... 저는 기억 속에라도 남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나가주세요, 제가 그걸 원해요.
아이린 E. 테라코르:이미 400년이나 되는 시간을 안드로이드로 살아왔어. 그때의 기억이 너에게도, 이제는 나에게도 있지. 그러면 된 거 아니니? (미소를 지었다.) 너와 나는 비록 진짜 사람은 아니어도 의지하면서 이 멸망한 지구에서의 삶을 버텨 왔어. 엷은 희망이나마 잃지 않자고 이야기하면서. 언제나 웃을 수는 없었겠지. 내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화를 내고 네가 끝내는 리셋을 했던 것처럼 아팠던 때도 있었겠지. 그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였더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갈등이잖니. 비록 몸은 기계였더라도 나는 네가 말했던 것처럼 충분히 사람처럼 살아왔어. 그거면 돼. 우리는 이미 미래를 봤어. 그 미래가 달콤하거나 즐거운 대신 냉정하고 건조했을 뿐.
난 이미 오래 살았어. 그러니, 별로 더 살고 싶지 않구나.
(기침을 할 때마다 나오는 것은 기름이겠지만, 저에게는 피로 보였다. 그만큼 너의 상태가 끝에 다다랐다는 거겠지.) 바보. 나에겐 생존욕구가 있다면서, 너에게는 없는 거니? 너도 이렇게 울고 있으면서. 기계에게 간절한 바람 같은 감정 따윈 없어. 내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면 너도 그런 거야. (손에 쥐여진 카드를 가만 바라본다. 당신의 사진 부분을 손끝으로 느리게 쓸었다.)
단테. 앉자꾸나. (비틀대는 당신의 몸을 부축하여 그나마 눈발이 들지 않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듯이 앉고는, 제 양 무릎을 모은다.) 나의 소중한 사람에 너도 포함된다는 걸 아직까지도 모르는 거니. 부정하고 싶은 걸지 몰라도. (농조처럼 덧붙였다가)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지구의 흔적이자 유일한 친구인 너를 어떻게 두고 갈 수 있겠니.
너를 최후의 존재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우리 함께 여기서 최후를 맞자.
단테 이그리드:그런 시간이었어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400년이라는 긴 거짓된 시간이었어도... ... ...(너의 말을 들으면 너의 의지를 돌리겠다는 마음마저 꺾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선택을 하겠다면. 너무 슬퍼서 심장이 찢겨나갈 것같지만... 아니, 찢겨나갈 심장이 없으니 이렇게 말해야지. 심장을 구성하는 부품의 판막들이 찢겨질 것만 같았다.(이제 관절부품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비틀대는 몸을 네가 부축하여 안쪽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어 앉으며 눈보라가 치는 밖을 멍하니 바라보면 이제 웃음이 비져나왔다. 내 욕심으로 이런 상황을 초래하니, 결국 마지막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구나. 그래, 나는 늘 그랬지. 운이 없었고, 상황도 늘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그럴까요... 그럼, 그냥 이렇게 저희가 지구 최후의 인류가 되도록 할까요. 아이린이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 ... ...아이린,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전 좋은 친구였나요?
(마지막 물음은 그 끝을 다 맺지 못하고 그 상태로 길고 긴 침묵만을 유지했다.)
아이린 E. 테라코르:결국은 400년 동안 네가 내 곁에 꾸준히 친구로서 있어 주었던 거잖니. 그거면 됐어. 모든 걸 여기에 두고 우주선을 타 평생 부품을 갈아가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눈발 아래 잠들었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있는 이곳에서 잠을 청할래. (점점 눈이 무거워져 온다. 쿵, 쿵, 심장을 대체하는 부품이 뛰는 소리가 점점 느려져 간다. 온 몸을 휩쓸던 시린 추위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죽음을 언제나 두려워했어. 하지만 온전한최후를 목전에 둔 앞에서 느낀다. 죽음이란 그다지 아프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당신 쪽으로 돌린다. 차고 새파랗게 얼어붙은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두었다. 감겨버린 눈, 끊긴 목소리,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온기.)
(다만 너의 청각을 담당하는 부품만은 아직 기능이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힘을 담아 속삭인다.)
응.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을 만큼.
이대로 우주로 간다고 한 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당신이 인간이었을 시절 살았던 지구는 이곳에 있고 단테 역시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성은 멸망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로 남았던 여전히 춥습니다.
겨울을 살아내고 있다는 뜻이겠죠.
더 이상 전망대 위에서도 보이지 않는 발사지를 매일 바라보며 단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