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pg 로그 백업

[240202~240322] 루이스&비올라 - 12시의 도밍게즈 ch 1. 시계 바늘의 방향

 

플레이타임 : 약 26시간 반

 

 
.
 
.
 
루이스는 DOT의 14회의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살면서 무수히 많이 들어 보았을 이름의 주인. 도밍게즈의 구원자,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시간이 선택한……
 
타이머, 오늘부터 당신의 파트너가 될 비올라를.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 미묘하게 기분이 들뜹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루이스의 삶에는 이상한 일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71
판정결과: 보통 성공
 
봄처럼 소리소문없이 드러난 시간의 각인을 발견했을 때부터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12살의 생일과 달리,
 
시간, 운명…… 혹은 이름 모를 무언가가 당신을 붙잡는 것처럼 각인을 따라 희미한 열감이 두드러졌습니다.
 
루이스가 왼손목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유일한 구원자, 타이머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고 아무리 문질러 보아도 사라지지 않았더랬죠.
 
영문은 알 수 없더라도, 타이머의 힘을 얻었다면 마땅히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도리.
 
당신은 DOT 측에 먼저 연락을 취하였고 곧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루이스가 DOT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자를 보는 양 황망하고, 황당함을 가득 담아 깜빡이던 눈꺼풀과 다물지 못하던 입술 사이로 새던 신음성…….
 
하인리히 장교: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구원자가 깨어났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과 흐릿한 남색 제복을 입은 사무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하인리히 장교가 감탄을 흘렸습니다.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DOT의 장교, 실질적인 책임자로 종종 TV에도 얼굴을 비추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장교를 비롯한 그 누구도 루이스의 자격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손목에 새겨진 숫자란 도밍게즈에서 그토록 절대적이거든요.
 
루이스는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구원자라는 명분하에 DOT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도밍게즈는 세계 멸망의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DOT가 당신을 간절히 바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일컬어 케레스, 타이머의 짝이라 불렀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흐르고, DOT에서의 생활은 평이했습니다.
 
루이스의 존재는 비올라에게도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정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타이머를 혼란케 하지 않으려는 조치라더군요.
 
루이스는 연구원들이 머무는 동관에서,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연구원의 신체검사 따위에 응하는 것을 제외하면 쭉 홀로였습니다.
 
루이스는 비올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를 만나는 날을 기다려 왔을까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 카지안, 제3시의 능력을 가진 타이머이자 가장 존재감이 없는 타이머. 세계를 구원할 유일한 빛이라 불리는 타이머들 사이에서도 유독 유별나보이는 타이머. 물론 좋은 의미에서다. 사람은 인기를 얻게 되면 누구나 어느 정도 우쭐해지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하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내 손목에 새겨진 이 각인이 숫자 3을 나타내고 있다는 걸 알게된 후 기뻤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일지 기대가 되었다. 새롭게 나타난 또다른 능력자를 싫어하진 않을지, 잘 지낼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지만...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잘 안다. 내게 닥쳐온 새로운 봄바람을 피할 수 없다면, 발을 내딛어 보아야지.)
 
긴 밤 동안 당신은 자연히 운명의 짝, 당신의 파트너, 당신과 같은 시간의 타이머인 비올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게, 아주 가까이, 바로 너머에 머물고 있었는걸요.
 
도밍게즈에서 타이머란 연예인, 혹은 그 이상으로 빛나고 숭배되는 존재. 그 인기란 가히 놀라울 정도죠.
 
그러나 열넷의 타이머 중 케레스는 유독 눈에 띄지 않는 이였습니다.
 
타이머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아볼 때 가장 마지막에 나오거나, 혹은 심심찮게 빼먹고는 하는 이름.
 
그러나 루이스는 그가 '인기'로서의 존재감은 없으나 '구원자'로서의 숙명에는 성실하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사고나 재해의 현장이 수습되고 나면 피해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었으니까요.
 
그야말로 그림자에서 은은히 빛나는 존재라 할 수 있겠네요.
 
하인리히 장교:곧 도착한다는군.
 
기나긴 회상을 깨고, 하인리히 장교가 타이머들의 도착을 예고합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타닥타닥, 바닥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복도를 가르고,
 
“왔어요?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안내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상냥하게 건네는 안내가 문턱 너머로 들립니다.
 
세계가 예비한…… 운명을 마주하기 직전입니다.
 
똑똑.
 
형식적인 노크와 함께 14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섰습니다.
 
도밍게즈의 구원자, 시간이 선택한 타이머.
 
어떻게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있겠어요?
 
그러나 루이스가 그를 알아본 것은 눈에 익은 얼굴이라는, 그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깜빡, 깜빡. 루이스가 눈을 깜빡이자 비올라 또한 같은 속도로 눈을 깜빡입니다.
 
그래요. 분명히 낯익은 얼굴입니다.
 
도밍게즈의 국민으로 태어난 이래 타이머의 소식은 일거수일투족이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니.
 
아무리 뒤쪽으로 한 발 물러선 이라 하여도 어쨌건 타이머가 아닌가요.
 
그러니, 하나도 특별한 것 없는 대면이건만.
 
어째서일까요?
 
이토록 그 ‘존재’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러라고 명령한 것도 아닌데,
 
밑바닥부터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과 기분, 생각과 언어, 감정과 본능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가까이 가고 싶다는, 어울리지 않는 욕구가 고개를 쳐듭니다.
 
아, 그래요.
 
루이스는 운명이 안배한 일련의 사건을 따라 새로운 구원자가 되었고,
 
DOT에 도착해, 기어코 눈앞의…… 비올라를 만나고 만 것입니다.
 
얼굴을 보자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어째서 ‘운명’이니 ‘파트너’라느니 거창한 칭호를 붙여댄 건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묘한 이끌림 사이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소리가 가볍게 새어 나옵니다.
 
웃음소리는 방아쇠를 당기고, 지나간 기억을 꿰뚫습니다.
 
무척 익숙한 웃음입니다.
 
그야, 루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하인리히 장교는 비슷하게 웃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루이스와 비올라는 들이닥치는 서로의 존재감에 휘둘리고 있었을 겁니다.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혹은 이끌리거나, 밀어내거나, 도망가고 싶어지는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가길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타이머에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비올라의 각인이 눈에 띕니다.
 
루이스의 각인과 같은 왼쪽 손목에 새겨진, 똑같은 두 자리의 숫자.
 
그가 루이스의 운명이자 단 하나뿐인 파트너라는 증명.
 
고작 숫자에 불과하건만……
 
하인리히 장교:인사하게. 자네의 이 될 사람일세.
 
어쩜 이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지.
 
하인리히 장교는 익숙하게 타이머들에게 카운터들을, 카운터들에게 타이머들을 소개합니다.
 
미리 설명을 들었던 루이스와 달리, 비올라는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란 기미를 숨기지 못합니다.
 
설명이 지나치게 단출하군요.
 
비올라 카지안:네, 네에……? (장교와 루이스를 번갈아보며 혼란스러워한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나, 쉽게 꺼내지 못하고 제 옷자락만 잡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개미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짜, 짝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잘……
 
군인이란 되묻지 않는 법이지만, 비올라는 기어코 되묻고 말았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다시 말해줘야겠나.
자네의 짝이 될 사람이니, 인사들 나누라고 했다네.
 
뻐꾸기처럼 반복되는 대사가, 친절하게도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금 짚어줄 뿐이었지만.
 
하인리히 장교는 타이머의 당황한 얼굴을 한껏 즐기고 난 후에야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스는 각인이 드러난 후, DOT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설명입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네.
물론,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예언의 탑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야. 이미 세간에서는 반쯤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건…… 아주 좋지 못한 조짐일세.
멸망이 실재한다고 해도 문제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더 문제거든.
멸망이 예정된 세계의 법과 도덕, 규칙 따위를 누가 지키겠냔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세계는 무너질 테고, 점차 아수라장이 될 테지. 처리하기 곤란한 쓰레기가 넘쳐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전부터 세계 멸망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자신의 수염을 가다듬은 하인리히 장교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 들곤,
 
하인리히 장교:결론부터 말하지.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눈앞의 이가 그 증거일세.
 
루이스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깁니다.
 
루이스 레너드:(갑자기 몸이 홱 낚아채져서 약간 놀라며... 눈 깜빡깜빡.) 어... 네. 장교님께서 설명하신대로입니다. (일단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루이스 레너드라고 합니다. 앞으로 카지안 씨와 함께 멸망 저지를 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고요.
 
비올라 카지안:아, 저…… (손이 내밀어지자 눈에 띄게 당황해서 우물쭈물거린다.)
 
하인리히 장교:자자. 반가운 건 알겠지만 지금은 전달 사항이 있으니, 인사는 잠시 기다리도록 하게. (루이스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하인리히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인리히 장교:지난 예언의 타이머는 매우 훌륭한 이였어.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거운 데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을 함께 점지받곤 했거든. 많은 이들이 세계 멸망의 예언이 예언의 탑으로부터 시작한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DOT는, 타이머는 이미 그 미래를 알고 있었네. 그 예언이 퍼질 것도, 세계가 혼란스러워질 것도,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날 것마저도!
반년 전쯤부터, 예언을 따라 새로운 능력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네. 바로 이들이지. 정확히 열네 명, 자네들과 같은 각인이 새겨져 있어.
우리는 이들을…… ‘카운터’라고 부르기로 했네.
 
이미 예비된 만남이었다니. 이것은 루이스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 멸망의 초읽기를 앞둔 작금의 상황에,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역할에 도취한 것인지, 예언의 탑을 한 방 먹일 즐거움에 심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인리히 장교는 하나씩, 카운터의 시간과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제0시의 ■■, 제1시의 ■■■■, 제2시의 ■■과 제3시의 루이스, 제4시의 ■■과 제5시의 ■■■,
 
제6시의 ■■■■, 제7시의 ■■, 제8시의 ■■■■■, 제9시의 ■■■, 제10시의 ■■■과 제11시의 ■■, 제12시의 ■■■와 제13시의 ■■■…….
 
모두 열넷이었지만, 비올라는 오직 당신의 이름에만 어깨를 작게 움찔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연구 결과, 카운터가 타이머와 똑같은 능력, 자질이 있으며 시간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입증됐어. 그뿐만 아니라 타이머의 능력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을 거란 가설이 등장했지.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야.
오늘부터 서관에서 함께 지내게 될 거야. 수업부터 시작해서 모든 타이머의 활동과 역할을 부여받아, 자네들과 동행할 걸세.
그러니 인사들 나누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하인리히 장교는 웃는 얼굴로 통보합니다.
 
모든 것은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고.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어떤 재해가 밀려와도 타이머와 카운터가 함께라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노라고.
 
즉, 이것은…… 대의이자 명령.
 
개인의 의견은 묵살하기 딱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이라네. 서관으로 데려가서, 건물 소개도 좀 해주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해지도록 해. 다음 달쯤, 건국 축제에서 정식으로 카운터의 존재를 발표할 예정이니 외부에 유출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일방적으로 명령한 장교가 절도있게, 그러나 한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섭니다.
 
회의실에는 침묵과 함께 타이머와 카운터, 두 개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고요.
 
…….
 
14명의 타이머 중 누구도, 시간이 데려온 운명의 상대에게 표정 관리를 하는 법은 훈련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이머와 카운터가 각기 짝을 지어 흩어지고, 루이스의 앞에는 여전히 비올라가 서 있습니다.
 
비올라는 루이스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다가……
 
비올라 카지안:아, 아까 인사에 대답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저는 비올라 카지안이라고 해요. (그러다 앗차, 하고는 잔뜩 기 죽은 낯으로 묻는다.) 이, 이미 이름은 들으셨던가요……?
 
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어쩐지, 예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네...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들었습니다. 음...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다.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하고는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 고민하면서.)
 
비올라 카지안:루이스…… (이름을 입안에서 조용히 곱씹어본다) 타이머처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또 나타날 줄은 전혀 몰랐어서…… 장교님은 저희에게 정말 아무것도 말씀해주지 않으셨거든요……. 장교님하곤 이미 면식이 있으신 것 같던데 그간은 어디에서 지내셨나요?
 
루이스 레너드:아, 지금까지는 동관에서 지냈습니다. 여기에 도착한지는 조금 됐고요. 제가 알기로는... 혼란을 막으려고 공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카지안 씨가 이렇게 놀라는 걸 보면 그 판단이 옳았을지도요. (농담이라며 살짝 웃는다.) 저도 사실 놀랐습니다. 열두 살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갑자기 이런 게 나타나서. (손목을 보여준다.)
 
비올라 카지안:동관에서 지내셨군요. 하긴, 그쪽은 연구소라 갈 일이 거의 없기는 해요. (어색하게 따라 웃다가, 손목에 새겨진 숫자에 시선이 고정된다. 정말로 저와 똑같은 위치, 똑같은 숫자이지 않은가. 아직은 무척이나 얼떨떨하고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장교가 직접 전달한 사항이니 거짓일 가능성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겠지.)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러면, 저, 저처럼 식물에 관한 능력을 다루시는 거죠?
 
루이스 레너드:네. 하지만 아직 잘 다루지는 못해요. 제가 쓸 수 있는 능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고요. 여기 온지 고작 이 주 정도밖에 안 됐거든요. 지금은 덩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요.
 
비올라 카지안:덩굴을……? (저와는 다른 능력일 것 같은데. 과연 어떤 식으로 쓰려나, 잘 감이 오지 않아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이 주면 정말 얼마 안 되었네요. 아직 DOT의 구조도 잘 모르시겠어요.
(하인리히의 말을 떠올린다. 솔직히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오래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무언가를 소개해주는 건 그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저는 DOT 소속이다. 군인은 명을 따를 수밖에.)
그, 그럼 제가…… 소개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면서 초라하게 묻는다)
 
루이스 레너드:물론이죠.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편하게 루이스라고 불러주세요. 저보다 한 살 많으신 걸로 아는데... 맞으시죠? DOT 선배기도 하시고요.
 
비올라 카지안:(고개 퍼뜩 든다.) 여, 열일곱 살이에요. 그,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될지…… 선배인 건 맞긴 하지만요.
 
루이스 레너드:괜찮아요. 마침 형이 있어서 익숙하기도 하고, 딱딱하게 대하시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할 것 같아요. 저희 오늘 하루만 보고 말 사이는 아니잖아요.
 
비올라 카지안:아아, 그, 그렇죠…… 죄송해요, 아직 실감이 안 나서. (하루만 보고 말 사이는 아니다. 함께할 구원자. 앞으로도 계속, 계속 함께 지내게 될…… 지금으로서는 잘 와닿지 않았지만 세상은 언제나 한 걸음 느린 저를 기다려주는 법 없이 앞서나갔다. 그러니 제가 맞춰서 적응할 수밖에.)
그럼…… 자, 잘 부탁해, 루이스? (어색함에 속으로 진저리침)
 
루이스 레너드:네, 잘 부탁드려요. (아까 못 건넸던 악수를 다시 청한다.) 음... 그리고 저는 카지안 씨를 비올라 선배라고 불러도 될까요? 전자는 아무래도... 너무 격식차리는 것 같죠. 심리적 거리감도 들고.
 
비올라 카지안:그냥 호칭 없이 비올라, 라고만 해도 돼.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어서…… 약간 어색할 것도 같고…… (후다닥 악수에 응한다.)
 
루이스 레너드:그러는 게 편하시다면... 네, 그럴게요. 그럼 비올라, 이제 건물 내부 구경하러 가 볼까요? 서관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요.
 
비올라 카지안:(끄덕) 이, 이쪽으로……
 
비올라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딱히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는 여전히 기묘한 이끌림에 시달립니다. 파트너가 된 이상 앞으로도 쭉 함께하게 되겠죠.
 
비올라를 따라 14회의실을 빠져나오면, DOT 본관의 복도입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DOT의 본관은 언제나 그렇듯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비올라에게는 낯익은 풍경이었고, 루이스, 당신에게는……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쩐지 무척 그리운 풍경이었죠. 낯익기 짝이 없어서, 꼭 제자리를 찾아온 듯했습니다.
 
처음 발을 들였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공기마저 친숙했어요.
 
루이스는 어떤 감각을 느낍니다. 기시감일 수도, 괴리감일 수도 있습니다.
 
비올라 카지안:여긴 본관이야. 성인이 되어서 임관을 받으면 여기로 숙소를 옮긴다고 해. 우리가 지금 지내는 서관보다 조금 더 넓거든. 평소에는 호출을 받을 때 회의실에 모이는 정도야.
네가 머무르던 동관은 연구소가 있는 곳. 타이머는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어. 그래서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들어가본 곳이라…… 설명해줄 수가 없네.
본관이랑 서관은 구조가 거의 비슷해. (본관을 나서서 타박타박 서관으로 향한다.) 2층에서는 수업을 듣고, 3층에서는 보통 능력 훈련을 하고, 4층이 숙소야. 옥상은 출입 금지기는 한데…… 다들 몰래몰래 들어가는 것 같더라. 나도 가끔씩 바람을 쐬고 싶으면 가기도 해.
 
루이스 레너드:(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건물 내부를 눈에 담는다.) 그렇군요, 음... 전 다른 곳보다 도서관에 제일 흥미가 가는데. 지금 들어가봐도 되나요? (눈을 반짝인다.)
 
비올라 카지안:응, 물론이지. 언제든 자유롭게 와도 돼.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책을 좋아하나 봐?
 
루이스 레너드:(씩 웃으며) 네.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유산이 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도밍게즈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 전해졌단 걸 생각하면 괜히 경외감도 들고요. 비올라는 도서관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비올라 카지안:우, 우와. 멋지다…… 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봐서. (루이스는 똑똑한 사람이구나. 하긴 첫인상부터 모범생처럼 보였었지.) 나는 자주 오는 편은 아니긴 한데…… 식물도감을 빌리러 가끔 오곤 해. 내 능력은 식물에 대해 더 잘 알수록 성장시킬 수 있는 거여서.
 
루이스 레너드:멋지네요. 말 그대로 '아는 것이 힘인' 능력이잖아요. (서가에서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발견했는지 꺼내서 파라락 훑어보며 감탄사를 작게 내뱉는다.) 저도 식물 능력을 다루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식물 관련 서적에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은데, 추천해주실만한 게 있나요?
 
비올라 카지안:음…… 루이스는 덩굴 관련 능력이라고 했었지? 아직 더 알아가야겠지만, 그래도 덩굴식물 관련 쪽이면……. (식물 관련 서가로 걸어간다. 잠깐 고민하다가 두어 권의 책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좋을 거야.
 
루이스 레너드:(책을 받아들고 목차를 살핀다. 흠... 대충 이런 내용이군. 책을 덮고 제목을 기억한다.) 고맙습니다. 지금은 일단 구경다닐 거니까... 나중에 꼭 빌려 볼게요.
 
비올라 카지안: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구매해달라고 요청하면 돼. 웬만한 건 다 사주셔. 능력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좋다고…… 장교님이 그러셨거든. 난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잠깐 낯빛이 어두워졌다가) 늦은 시간이라 카페는 문을 닫았겠네…… 숙소로 바로 올라가볼까?
 
루이스 레너드:(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말을 얹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지, ... 섣부른 위로보다는 그냥 흘려듣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래요.
 
두 사람은 숙소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갑니다.
 
비올라 카지안:그런데, 4층엔 방이 열네 개 뿐이거든. 따로 숙소에 대해선 말씀을 안해 주신 것 같은데……?
 
비올라의 의문 섞인 목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각 방문 앞에 놓여진 짐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카운터의 것 같네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순간 나 방을 뺏기는 건가 싶어짐)
 
루이스 레너드:음...? (내 짐이 왜 여기에...?)
숙소... 에 대해 저도 들은 건 따로 없는데. 뭘까요, 이건...?
 
비올라 카지안:아, 저기 직원분이 보여. (익숙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다가간다.) 저, 저것들 카운터의 짐이죠? 왜 저게 타이머의 방 앞에…… 카운터의 숙소는 어떻게 되나요?
 
직원이 경쾌하게 대답합니다. "못 들으셨어요? 타이머와 카운터는 같은 방을 쓴다던데요!"
 
비올라 카지안:(입 떡) ………………………… 네??
 
루이스 레너드:... 네? (내... 내 개인 공간은...?)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여태 타이머가 14명뿐이었던 걸요!"
 
비올라 카지안:그, 그, 그래도 어떻게 오늘 처음 본 분이랑 가, 같은 방을…… 게다가 저, 저흰 이성인데…… (너무 당황해서 평소보다 더 더듬는 중)
 
루이스 레너드:(정신 차리고 침착하게...) 맞습니다. 차라리 이전처럼 동관에서 지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지낼 곳이 현재로선 마땅찮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카운터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을텐데요. DOT의 미흡함 탓에 졸지에 방을 공유하게 생긴 타이머들은 무슨 죄인지요.
 
"그건 미안해요. 하지만 장교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셨는걸요. 번복은 불가능해요."
 
"여러분이 회의실에 있는 사이 방에 이층침대를 들여두었으니 모쪼록 상의해서 잘 지내봐요!"
 
대비를 하라니까 이런 거나 하고 있었군요.
 
직원은 더 불만을 듣기 전에 도망치듯 사라집니다.
 
비올라 카지안:저, 저기이…… (차마 목소리 높여 붙잡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루이스 레너드:(하아...... 이마짚) ... 역시, 군대는 제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능력이 생긴 이상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죄송합니다, 신세 좀 질게요. 침대는... 위층이랑 아래층 어느 쪽을 선호하세요? 맞추겠습니다.
 
비올라 카지안:아, 아냐.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걸. 군대가 체질에 맞지 않는 건 나도 그렇고……. (너와 나 비슷한 점이 있네. 닮은 면이 있다는 건 어쩐지 친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아래층을 써도 괜찮을까? 부주의한 면이 있어서, 위층에서 자다간 분명 아침에 이층인 걸 잊고 나오려다 떨어질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비올라도 저랑 비슷하네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사용되지 않는 집단은...... 언제나 견디기 힘들죠. (짐을 양손에 들며) 그럼 제가 위를 쓸게요. 아, 방 안에 화장실은 혹시... 하나인가요...? (제발...)
 
비올라 카지안:합리적인…… 그런 사고 때문만은 아니지만. (제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도 잠깐 잊고 희미하게 미소하는가 싶다가, 루이스의 질문 한 마디에 다시 급격히 현실로 돌아온다.) …… 하나야.
이, 일단 방 좀 정리하고 있을게. 정리를 안 하는 편은 아니지만 혹시나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째 모든 게 꿈 같다…… 후다닥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가서 널린 옷이라던가 책 같은 걸 정리해둔다. 5분 정도 후에 문을 빼꼼 연다) 이제 들어와도 돼.
 
루이스 레너드:실례하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선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랑 같은 방을 써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짐을 적당히 내려놓은 다음, 진지한 얼굴로 거실 소파로 당신을 데려간다.) 짐 정리하기 전에, 공동 생활 규칙을 세우죠. 귀찮으시다면 제가 간단하게 만들어놓을테니 컨펌만 해 주셔도 돼요.
 
방은 나름대로 깔끔한 편입니다. 책상이나 테이블 위에 작은 화분이 놓여 있네요.
 
은은한 제비꽃 향기가 납니다.
 
비올라 카지안:고, 공동 생활 규칙? (얼레벌레 데려가져서 비장한 얼굴이 된다) 좋아……! 함께 지내려면 맞춰가야 할 것도 많을 테니까.
 
루이스 레너드: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건 화장실 문제에요. (심각한 표정으로) 혹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신가요?
 
비올라 카지안:(고개 절레절레) 아침잠이 조금 많은 편이야. 그래서 지각하지 않으려고 샤워는 전날 밤에 하고 자는데…… 루이스는?
 
루이스 레너드:저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조금 안도한듯) 다행히 겹칠 일은 없겠네요. 그럼 샤워를 할 경우엔 제가 아침에, 비올라가 밤에 하는 걸로 해요.
그럼 기본적인 집안일의 경우... 청소는 제가 도맡아서 할 수 있어요. 빨래는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게 나을 것 같고... 요리는, 음. 평소 타이머들은 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나요?
 
비올라 카지안:(순순히 고개 주억인다.) 빨래는 세탁실이 있으니까…… 거기에 맡기면 될 거야. 식사는 지하 1층의 식당에서 세끼 다 먹을 수 있고. 식당이 싫으면 카페테리아 같은 데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방에서 먹어도 상관은 없어. 대체로 맛있게 나오는 편이라서 밥을 거르는 타이머는 많이 못 본 것 같지만……
청소를 너한테 다 맡기는 건 미안한걸. 나도 보이는 건 제때제때 해놓을게. 아침에는 좀 소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막 더럽히고 지내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루이스 레너드:괜찮아요. 제가 들어와 사는 입장이기도 하고, 원체 깔끔한 성격이라서... 제가 직접 청소하지 않으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많아요. 정 마음에 걸린다 하시면, 제가 부탁드릴 때만 도와주시겠어요?
 
비올라 카지안:아아, 그렇구나…… (더럽히지 않고 지내도록 노력해야겠네.) 응, 알겠어. 그 외에 또 특별한 건 없을까? 아참, 옷장이나 서랍 공간이 부족하면 하나 더 들여달라고 할 수도 있어.
 
루이스 레너드:일단 지내보고, 불편하면 요청하는 걸로 하죠. 다른 규칙은... 음, 뭐가 있을까. 추가하고 싶은 거 있으세요?
 
비올라 카지안:으으음……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 오늘은 그럼 이 정도로 할까? 이제 곧 잘 시간이기도 하고.
 
루이스 레너드: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네. 그럼 규칙은 차차 수정해나가는 걸로 해요. 쉴 시간에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있었죠? (아까까지의 일을 회상한다. 파트너 간 소개를 그런 식으로 할 줄은 몰랐지...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푹 쉬세요. 저는 정리 조금만 하고 잘게요.
 
비올라 카지안:뭔가 엄청 많은 일이 스쳐지나간 기분…… (그야말로 폭풍 같은 저녁이었다. 그저 평이하게 지나갈 하루였을 뿐인데. 갑자기 파도처럼 온갖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를 만난 것도 모자라, 짝이라는 관계로 명명되어 같은 방까지 쓰게 되다니……) 응, 나도 샤워하고 잘 테니까. (잠옷이랑 수건이랑 바디로션 스윽 챙겨서 욕실로 들어간다. 샤워부스 안에서 물을 맞으며 가만히 아까의 일을 되돌아본다. 루이스는 착한 사람처럼 보이니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 내 예상과 소망이 빗나가지 않아야 할 텐데……)
(20여분 정도 후에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의 물을 털며 나온다. 잠옷은…… 자잘한 토끼 무늬가 그려진 옷. 한 방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뒤늦게 자각이 되어서 부끄러웠다.) 잠깐만 머리 말릴게. 짧아서 오래 안 걸리니까.
 
루이스 레너드:(부피가 큰 짐만 대충 정리를 끝냈다. 고개를 끄덕이고 세면도구를 챙긴다.) 네, 그럼 저는 그동안 세수 좀 하고 나올게요. 편하게 하세요.
(10분 쯤 뒤... 간단하게 세안과 착복을 마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내일에 대한 기대 반, 앞으로 지낼 생활에 대한 걱정 반을 안고서.)
 
비올라 카지안:(그 사이 머리를 다 말리고 뻗치지 않게 빗어주고 있다. 거울 앞에 앉아 있다가 루이스를 보고 어색하게 일어난다.) 일찍 일어난다고 했지? 그럼 잠도 일찍 자는 편……?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늦게까지 할 일이 있으신가요? 시끄럽지만 않으면 불빛은 견딜 수 있어요.
 
비올라 카지안:좀 늦은 시간에 자기는 하는데, 보통은 그 시간까지 훈련실에 있곤 해. 책을 읽을 일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니까. (※ 도서관은 24시간 개방이다) 만일 늦더라도 방에서 시끄럽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나도 오늘은 일찍 누워야겠다. 이미 샤워도 다 했고. (이층침대를 올려보다가 아래층 침대에 걸터앉는다. 지금껏 쓰던 1인용 침대가 아닌 새로운 침대.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람. 꼭 DOT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어색하면서도 신기한 기분이다.) 음…… 잘 자?
 
루이스 레너드:(씩 웃으며 위로 올라간다.) 네, 비올라도 잘 자요. 좋은 꿈 꾸시고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인연, 새로운 생활...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미래를 그려본다. 내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함께할 구원자, 짝으로서 만난 첫날 밤이 이렇게 지나갑니다.
 
DOT에서의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루이스는 일찌감치 일어났을까요?
 
루이스 레너드:(조금 피곤하긴 해도 몸은 기특하게도 익숙한 시간에 일어났다. 아직 덜 뜬 눈으로 짐을 챙겨 화장실로 향한다.)
 
루이스가 샤워를 하고 있자면 바깥에서 알람소리가 들려옵니다.
 
퍽 시끄러운 소리인데…… 5분에 한 번씩, 루이스가 샤워를 끝내고 올 때까지도 멈추지 않네요.
 
나와보면 아니나 다를까 비올라가 뒤척거리면서 계속 잠에 빠져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잠귀가 어두운 편인가? 깨지 않는 당신과 멈출 줄 모르는 알람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제 손으로 알람을 끄고 비올라를 향해 말한다.) 아침이에요, 일어나세요.
 
비올라 카지안:으으…… 5분만 더요…… (비몽사몽)
 
루이스 레너드:(시계를 본다. 음... 아직은 시간이 있어 보이는데. 5분 뒤에 다시 깨워볼까.)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드라이기를 잠시 멈추고 다시 비올라를 깨운다.) 5분 지났어요. 일어나세요.
 
비올라 카지안:아흐으으오분마아안…… (웅얼거리다가 왠지 어색한 목소리에 문득 뒤척이기를 멈춘다. 뭔가 이상한데? 하고 슬쩍 눈을 뜨자 보이는 루이스의 모습. 그제야 잠이 번쩍 달아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맞다. 이제 혼자 쓰는 방이 아니지! 헉, 자다가 침 흘렸으면 어떡하지……?)
이, 일어났구나 루이스…… (머리 손으로 빗어내리면서 어색하게 이불 옆으로 밀어낸다)
 
루이스 레너드:아, 일어나셨네요. (이러고도 안 일어나면... 얼굴에 약하게 드라이기 바람을 쏘여줄까도 싶었는데, 다행히 일어났군. 확인한 뒤 다시 거울 앞으로 간다.) 알람 울린지 얼마 안 지났으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될 거예요.
 
비올라 카지안:정말? (한 박자 늦게 시계를 보더니 눈 커진다. 자신이 평소에 기상하는 때에 비교하면 이른 시간이었기에) 그러네. 아직 여유가 있구나. 루이스는 정말 일찍 잘 일어나네. 어떻게 그래……? 대단하다. (하품하면서 세수하고 온다)
 
루이스 레너드:원래 잠이 별로 없는 편이라 그래요. 비올라는... 어제 피곤한 하루를 보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평소에도 잘 못 일어나는 편?
 
비올라 카지안:어제는 훈련을 그렇게 많이 한 게 아니라 신체적으로 피곤했던 건 아닌데…… (정신적으론 좀 피곤했으려나?) 그냥 아침에 잘 못 일어나기도 해. 부끄럽지만…… 지각도 꽤 하고.
 
루이스 레너드:(드라이기와 바닥을 정리하고는) 그럴 수도 있죠, 사람마다 생활 습관은 다 다르니까요. 그래도 앞으로는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각한 사람을 내버려두고 갈 만큼 매정하진 않거든요. (미소짓는다.)
 
비올라 카지안:지, 진짜? 귀찮을 텐데……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켓에 팔 꿴다)
 
루이스 레너드:뭘요, 대단한 일도 아닌걸요. (짓궃은 말투로) 아, 물론 열 번 이상 깨워도 못 일어나면 그땐 먼저 가려고요~...
 
비올라 카지안:…… 여, 열 번이나 깨울 일 없게 노력해볼게……. (실제로 알람이 열 번 반복되도록 못 일어난 적도 있었으므로)
 
타이머와 카운터는 아직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정식 임관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임무보단 수업과 훈련이 주 일과를 이룹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관 2층의 교실로 들어오면 14개뿐이던 책상과 의자는 28개가 되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이머와 카운터는 서로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고요.
 
루이스가 일찍 일어나 비올라를 챙겨준 덕에, 교실에 일찍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남은 자리를 골라 앉을 수 있겠네요.
 
교사:어서 와요, 비올라. 오늘은 늦지 않았네요? (미소) 그 옆의 친구는 3시 카운터죠? 반가워요.
 
비올라 카지안:………………………… 안녕하세요. (얼굴 새빨개짐)
 
루이스 레너드: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하며) 제3시 카운터 루이스 레너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비올라 카지안:(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는다. 쥐구멍이 있으면 거기에서 수업 듣고 싶은 기분)
 
루이스 레너드:(오... 웬만하면 가운데 자리에 앉는 편인데, 뭐... 구석에 앉는다고 공부를 못 하는 건 아니니까. 따라가서 옆자리에 앉는다.)
(속닥거리며) ... 이 방면으로 유명하셨나봐요?
 
비올라 카지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선생님이 날 놀리시는 거야……. (얼굴이 거의 토마토가 됐다)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앞으로 지각 안 하면 되는 거니까. (웃으며 가방을 정리한다. 새로운 교실은... 꽤나 마음에 드는듯.)
 
다른 페어들도 모두 들어와 앉으면 수업이 시작됩니다.
 
창틀 너머로 아침 햇살이 쏟아집니다.
 
꽃샘추위도 누그러진 초봄은 앉아서 수업을 듣기엔 아까울 정도로 완벽한 날씨입니다.
 
교사는 칠판 위로 분필을 움직입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부드럽게 흔들리는 커튼, 책상 위의 그림자…….
 
평소와 똑같지만, 단 하나, 옆에 앉은 사람만이 어제와 다르군요.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러고 보니, 입학하고서도 딱히 교과서나 시간표를 안내받은 적이 없는데……
 
교실에도 교과서는커녕 공책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수업이 이렇담?
 
루이스 레너드:(작은 목소리로) 보통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비올라 카지안:아. 그러고 보니 너는 이게 어색하겠구나. (모기만한 목소리로 속닥인다) 이 과목은 DOT 자체 과목인 '시간'이야.
보통 입학하고 초반에 듣는 수업인데 능력의 정의나 다루는 방법,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능력을 사용해도 되는 상황과 안 되는 상황 같은 걸 배워.
카운터들의 첫 수업이라서 일부러 기본적인 과목을 가르치는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그렇군요, 하긴... 저 포함 다른 카운터들은 동관에 있을 때 특별히 배운 게 없거든요. 교재가 따로 없는 걸 보면 정말 기본적인 과목이니 바로 외우고 기억하라는 의미인가요?
 
비올라 카지안:응. (끄덕) 꼭 외워야만 하는 복잡한 내용은 아니기도 하고.
직접 들어보면 이해가 될 거야. (소근거리곤 다시 교사를 본다)
 
분필이 다각다각 글씨를 새깁니다. 교사가 적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타이머와 카운터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질은 무엇인가?
2. 타이머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멸망할 것인가?
3. 도밍게즈의 건국 신화를 읽고, 시간과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사:자, 새로운 친구들이 왔으니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 볼까요.
 
운을 뗀 교사는 첫 번째 문장을 읽습니다.
 
교사:타이머와 카운터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질은 무엇인가? 별 것 아닌 문제 같지만, 도밍게즈에서 타이머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따라서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죠.
카운터 또한 건국 축제를 기점으로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될 테니, 중요한 문제랍니다. (대답을 기다리듯 교실의 학생들을 둘러본다)
 
루이스 레너드:(교실을 한번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교사:네, 루이스 학생. 말해볼까요?
 
루이스 레너드:타이머와 카운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인애라고 생각합니다. 타이머는 도밍게즈를 구원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도밍게즈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없이는 성립할 수 없죠. 그냥 생명체가 없는 행성 하나가 될뿐입니다. 카운터 또한 마찬가지로, 우리 능력의 존재 가치는 타인을 구할 때 발휘됩니다. 인애 없이는 힘든 일이죠.
 
교사:좋은 대답이네요. 루이스 학생은 타이머에게 기대되는 책임을 잘 알고 있군요. 훌륭해요.
 
이외에도 강한 능력이나 자비로운 마음씨, 결단력, 협동심 같은 대답들이 나옵니다.
 
비올라는 얌전히 듣고만 있네요.
 
교사:자아, 여러 가지 대답들이 나왔네요. 모두 일리있는 대답들이었습니다만, 저는 적어도 ‘타이머가 아닌 나와 타이머인 나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대답인가요? 혹은 의외의 대답인가요?
 
루이스 레너드:(나름... 일리가 있다. 타이머, 그러니까... 카운터로서의 나와 그렇지 않은 나를 분리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도 아낄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일텐데, 맞는 말이지. 좀 잔인한 소리긴 하지만 공리적인 관점에서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능력자가 사는 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지만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약간 의아하긴 하다. 희생 정신을 가르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교사: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구원자라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이에요. 언제나 구원자, 타이머, 카운터라는 이름에 휘둘렸다간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힘들어진다면 ‘구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사회적인 껍질을 뒤집어쓰고, 개인으로서의 일은 잠시 차치해두는 거죠.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단 쉬울 겁니다.
 
가볍게 조언한 그는 이윽고 2번째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교사:자, 그럼 생각해보죠.
타이머가, 그리고 나아가서 카운터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멸망할까요?
 
루이스 레너드:(손을 들고) 실제로 멸망이 예언되지 않았던가요? 그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일반인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자들이 사라진다면 정체 불명의 멸망이 들이닥쳤을 때 대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빠르게 멸망할 가능성이 있는 거죠.
 
비올라 카지안:멸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옆에서 흐려지는 말끝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교사:사실 이건, 도밍게즈가 생겨난 이래 타이머와 카운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므로 명확히 그렇다, 아니다를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로 여겨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시간이 있기에 타이머가 태어난다고 믿지만, 실상은 반대예요. 타이머가 있기에 시간이 존재하는 거죠.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교사는 덤덤히 설명하다가 이것은 모두 가설이라고 말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섭리를 인간이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하지만,
 
교사:타이머가 둘이라면 시간은 더 안정적으로 존재하며 흘러갈 거예요. 끝은 멀어질 겁니다. 영원히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초읽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테죠.
 
마지막 문장만큼은 단호했습니다.
 
교사: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여러분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요.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멀리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정체불명의 소리입니다.
 
비올라 카지안:(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방금 무슨 소리가……?
 
루이스 레너드:저만 들은 게 아니었네요. (소리가 난 것으로 추측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무슨 소리인지 비올라도 모르나요?
 
비올라 카지안:응. 뭔가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대체 무슨 소리지? 선생님은 못 들으신 것 같은데…….
 
소리의 정체를 채 찾으려고 하기도 전, 유인물이 배부됩니다.
 
회색의 종이에는 익숙한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도밍게즈 신화입니다. 도밍게즈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3. 도밍게즈의 건국 신화를 읽고, 시간과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사:마지막 문장은 숙제로 낼게요. 유인물의 뒷장에 적어 제출해주세요.
자아, 오늘은 첫 수업이니 조금 일찍 마치도록 할까요? (경쾌히 말한다)
친해지라는 의미로 주는 휴식이니까, 되도록 타이머와 카운터는 함께 다니세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건국 축제까지는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하고요.
 
당부와 함께 교사가 먼저 교실을 떠납니다.
 
교실에는 타이머와 카운터, 그리고 유인물이……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라,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었네요?
 
루이스 레너드:(왜 두 장이지? 나머지 한 장을 떼어내본다.)
 
또 다른 유인물은 ‘연구 보고서’입니다.
 
심지어 제일 마지막 줄에, 필수 제출하라고 쓰여있습니다.
 
꼼짝없이 함께 붙어 있을 수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비올라 카지안:으음…… 왜 글씨가 지워져 있지? (제 유인물을 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루이스 레너드:그러게요, 뭔가 잘못 인쇄됐나? (의아해하며) 가서 여쭤보고 올까요?
 
여쭤보고 와야 할지 의문을 표하던 그때, 타이밍 좋게 문자가 도착합니다.
 
「 2052-03-08, 09:18
 
제3시 페어 3번 훈련실 사용 가능
 
연구 보고 협조 요망 」
 
루이스 레너드:(문자를 확인하며) 훈련실에 가면 장교님이 계실까요? 아니면... 저희끼리 자체 연습을 하고 보고하면 되려나요.
 
비올라 카지안:장교님이 계시진 않을 거야. 연구 보고 협조라는 말을 보니, 아마 동관의 연구원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싶어.
필수 제출이라고 하니…… 가야겠지?
 
루이스 레너드:가야겠죠. (어깨를 으쓱하며) 훈련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했는데, 이렇게 빨리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네요. 바로 갈까요?
 
비올라 카지안:(끄덕) 으응…… 가자.
 
시간은 두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신속히 흐릅니다. 어쩌면, 함께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루했을 수업이 눈 깜짝할 새 끝났다면, 역시 착각일까요?
 
호출을 따라 훈련실로 걸음을 옮기면,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페어별로 진행할 모양입니다.
 
문 앞에서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두 사람을 반깁니다.
 
애쉬:왔어?
 
비올라 카지안:안녕하세요, 애쉬. (익숙한 사람인 듯 별로 낯가리지 않고 인사한다)
 
루이스 레너드:(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3시 카운터 루이스 레너드입니다.
 
애쉬:반가워, 루이스. 네가 비올라의 짝이 됐구나. (상냥하게 미소한다)
 
애쉬는 일지에 ‘제3시 페어, 타이머 비올라, 카운터 루이스’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연구 방식에 관해 설명합니다.
 
애쉬:보고서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별로 어려운 건 아냐. 첫 만남의 소감은 되도록 진솔하게 적어주고, 지금부턴 타이머와 카운터 간의 상관관계나 영향력을 검사해볼 거거든.
몇 가지 단계에 맞춰 진행 가이드를 띄워놨으니까 보고 따라가면 되고, 힘들거나 불편하다 싶으면 너무 무리하지 마. 어쨌건 오늘은 처음이니까.
 
루이스 레너드:네, 알겠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애쉬와 비올라 모두에게 미소지으며 인사한다.)
 
비올라 카지안:열심히 할게요…… (연구원들에게도 이미 수차례 협조해 왔었지만 역시 이런 분위기는 영 불편하다. 예의 조그만 음성으로 답한다.)
 
곧 애쉬가 비올라에게 작은 패드를 부착합니다.
 
루이스에게도 다른 연구원이 같은 위치에 패드를 붙입니다.
 
뺨, 귀 뒤쪽, 목덜미와 손목 안쪽……. 피부색과 엇비슷한 그것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애쉬:봐봐, 잘 됐어? 꼼꼼히 확인해야 하니까.
 
비올라 카지안:이 뒤쪽이 약간 불편한 것 같아요. 조금만 조정해주시면……
 
저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다정한 거죠? 유난히 거리가 가까운 것 같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거리 아니야?
 
어쩐지 묘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루이스 레너드:(뭐어... 예전부터 알고 지냈을 사이니까. 별 생각 없다. 동경을 약하게나마 품고 있던 사람이라 아주 약간 묘한 기분이 들긴 해도?)
 
비올라 카지안:(다른 연구원의 도움을 받고 있는 루이스를 흘끔흘끔 본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상 친밀감을 쌓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그런데 당신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묘한 감각이 드는지. 설마, 질투심인 걸까? 감정의 정체를 찾고서는 얼굴이 빨개지는 듯해 스윽 고개를 돌린다. 친절하게 대해줘서 그새 마음을 놓기라도 했는지.)
 
두 사람이 모두 패드를 부착하자, 애쉬가 말합니다.
 
애쉬: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영향을 주지만,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좋은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 유력해. 실제로…… 다른 페어들의 결과도 좋았고.
자리를 비켜줄 테니까, 테스트해봐. 수치는 전부 기록될 거야. 뭘 하고, 얼마큼 편차가 있었는지 보고서로 작성하면 끝. 어렵지 않지?
 
애쉬는 상당히 경쾌하게 설명합니다. 설명만 듣자면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 보입니다.
 
세상만사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주의점이지만요.
 
애쉬:자, 진행 가이드는 안쪽에 있으니 들어가봐.
 
애쉬와 연구원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루이스와 비올라의 등을 떠밉니다.
 
루이스 레너드:(얌전히 떠밀려 들어감...)
 
연구 보고를 돕는 일이라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루이스가 여태까지 비올라와 만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카운터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위해서 몇 번이고 거쳤던 과정이잖아요.
 
심장박동과 능력의 효율을 확인하는 패드를 부착하고, 능력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한 후의 신체 변화를 검사하기도 했었죠.
 
건강 검진이랑 비슷해서 조금도 여상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문득 소독약 냄새를 맡습니다. 짭조름하고, 화한…… 약물 특유의 그 냄새.
 
바람도 불지 않는데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리고, 거세게 뛰지도 않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습니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모를 애매한 감각입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각인이 새겨진 손목까지 패드를 부착하고서 훈련실의 안으로 들어섭니다.
 
내부는 깨끗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장도 바닥도 반지르르하니 윤이 납니다.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충분히 채워주지만, 평소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된 건지, 스크린만 바닷속 풍경을 비춥니다.
 
거품이 일다가 흩어지고, 다시 일다가 부서지고……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히면 스크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진행 가이드는 한 줄이 전부입니다.
 
손깍지, 포옹, 이마 맞대기, 비쥬, 입맞춤.
 
다시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네, 그러니까……
 
<교육> 판정
 
루이스 레너드:
교육
기준치: 75/37/15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Baiser. 흔히 ‘비쥬’라고 알려진 프랑스의 인사법으로 양 뺨을 번갈아 맞대며 마치 입을 맞추듯 ‘쪽’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연구 보고라는 게…… 지금 생각하는, ‘그거’ 맞나요?
 
비올라 카지안:(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졌다.) 이, 이게 무슨……?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비올라도 마찬가지겠죠.
 
루이스 레너드:오...... (애매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진행 가이드를 두어 번 읽어본다.) 뭐... 저희,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반응 생각하면 타당한 가설이긴 한데요, (가이드에서 시선을 떼고 당신을 본다.) 아무래도 좀 힘들겠죠?
 
비올라 카지안:그, 그, 그게……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피하며 빨개진 뺨을 손으로 감싼다.) 난 정말이지 연구 보고가 이런 식일 줄은 하나도 상상 못해서……
 
<심리학> 판정
 
루이스 레너드:
심리학
기준치: 55/27/11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비올라는 이 예기치 못한 사태에 무척 당황한 것 같긴 하지만, 놀랍게도 싫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루이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사실인진 모르겠지만요!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힘들거나 불편하다 싶으면 너무 무리하지 마. 어쨌건 오늘은 처음이니까.”
 
불현듯 애쉬의 당부가 생각납니다.
 
그래요, 이대로 돌아나간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도 그럴 게, 만난 지 이제 고작 하루인걸?
 
비올라 카지안:(한참 동안 차마 뭐라 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저, 저기…… ……루이스는 스킨십엔 익숙한 편이야?
 
루이스 레너드:음... 익숙한 편은 아녜요. 연구에 필요한 거라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거, (가이드의 첫 번째 단계를 가리키며) 정도만 가능할 것 같네요. 비올라는요? 많이 부담스러우시면 그냥 '같은 공간에 있었을 경우 능력 사용' 정도만 실험해보고 나가죠. 첫날이니 무리할 필요도 없을 거고요.
 
비올라 카지안:으, 응. 나도…… 스킨십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서 하는 성격도 아니라서.
…… 그러면 일단은 1단계까지만 해볼까? 못한다고 해서 애쉬가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하진 않을 거야. 다정한 분이니까.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대성공이 떴으니 다음 한 번의 실패 판정을 성공으로 넘겨드리겠습니다 (ㅋ)
 
루이스 레너드:(아싸 ㅋ)
 
문득 시선이 스크린의 반대편 모서리에 닿습니다.
 
온통 하얘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검은 점이 반질반질 빛나며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 동관의 실험실, 연구소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죠.
 
아무리 봐도…… CCTV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실험실 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지만... 뭐,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연구 결과를 위해서라면 연구 윤리는 종종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니. 불편할만한 장면을 찍힌 건 아니니 한 번은 넘어가준다.)
(비올라에게 알린다면...? 흘끔 당신을 본다. 나보다 선배니 이미 알고 있을까? 알든 모르든, 딱히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올라를 알게된 지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아서. 모르는 편이 속 편하겠지.)
그래요, 그럼 일단은 1단계만 해 보죠. (손을 내민다.)
 
연구원들은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CCTV는 계속 눈을 빛내고 모든 것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카메라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비올라 카지안:(손잡는 것 정도는 별로 특별한 스킨십도 아니다. CCTV가 있단 건 알고 있지만, 어차피 우린 그 이상의 스킨십을 하진 않을 거니까. 그래도 괜시리 더 떨려오는 듯해서,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조심스럽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깍지를 껴오는 손길이 덜덜 떨려와서, 스스로도 참 바보같다고 생각하며.)
 
루이스, <이성> 및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능력 Roll
기준치: 45/22/9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이능력 성공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어쩐지 심장이 간질간질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비올라 카지안:
이능력 Roll
기준치: 60/30/12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루이스 레너드:오... 이거, 되게 신기하네요. (발 근처에서 자라난 작은 덩굴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며 눈을 반짝인다.)
 
비올라 카지안:(씨앗을 땅에 내려두자, 단번에 비올라의 허리까지 오는 작은 초목이 자라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스킨십이 정말 효과가 있나 봐. (루이스의 덩굴과 제 나무를 번갈아보다 희미하게 웃는다.)
 
루이스 레너드:그런가봐요. 사실 저도 이걸 만들어낸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동관에서 실험할 때는 이미 존재하는 덩굴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본인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움직이는 식물이 재미있고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은 몰랐어요.
비올라는 그럼 속도가 향상된거고, 저는 몰랐던 능력의 범위를 하나 더 알게 된 거네요? 꽤나 흥미롭네요.
 
비올라 카지안:정말? (눈 동그랗게 뜬다) 그랬구나. 자기 능력을 알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지. 그래야 어떻게 활용할지도 알고, 연습해나갈 수 있으니까. 잘됐다.
(무릎 굽혀서 루이스의 발치에 난 덩굴을 조심스럽게 톡 건드려본다) 앞으로는 덩굴을 더 크게 키우는 연습도 하면 좋겠다.
 
루이스 레너드:노력해봐야죠. 아, 저 궁금한 게 하나 생겼어요. 비올라의 능력은 식물 생장과 관련있다고 들었는데... 이녀석의 생장에도 비올라가 간섭할 수 있을까요? (발 밑의 덩굴 툭툭)
 
비올라 카지안:그렇잖아도 그건 내가 연습 중인 부분이야. 지금까진 내가 만들어내거나 씨앗에서부터 직접 피워낸 식물의 생장만 조절할 수 있었거든. 효용 범위를 더 높이면 좋으니까……
(덩굴에 손 뻗더니 눈을 감고 집중해본다. 그러나 발치에서 흔들리는 덩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잠잠하다.) …… 연습은 하고 있는데, 역시 쉽지는 않네.
 
루이스 레너드:한 번에 되면 좋은 거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지금이 첫 시도잖아요. 아직 시간은 많아요.
 
비올라 카지안:워낙 훈련해야 할 게 많기도 해. (굽힌 무릎을 펴고 일어선다) 식물을 생장시킬 수 있는 최대 크기라던지, 동시에 생장시킬 수 있는 갯수, 유기물이 없는 환경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빨리 바라는 대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조급해해서는 될 것도 안 되겠지.
(제가 만들어낸 나무의 표면을 가만 쓸어내린다) 앞으로 같이 훈련실에서 연습할까……?
 
루이스 레너드:(선뜻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저희는 파트너잖아요, 같이 훈련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비올라 카지안:네가 덩굴을 만들어낼 수 있고 내가 능력을 더욱 개발해낸다면…… 내가 식물을 직접 만들어내기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네 덩굴을 대신 키워내면 되니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거야.
반대로 네가 내 식물을 대신 조종할 수도 있을지도? 이것도 훈련할 점으로 추가해두면 좋겠다.
 
루이스 레너드:맞아요, 아직은 어디까지 가능한지 몰라서 확실히 계획을 세워놓을 수는 없지만... 개인훈련을 하며 성장한 내용을 공유하고, 그걸 바탕으로 훈련 계획을 세워도 좋겠어요. (능력을 연계해 활용할 생각을 하니 즐거운 표정이 지어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역시 공부체질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비올라 카지안:응……!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획을 세우거나 내용을 정리해둔다면 좀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지.)
그러면…… 지금의 '연구'는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마무리할까?
 
루이스 레너드:그럴까요? 그럼 보고서만 작성해서 드리죠. 어... 훈련실에서 적나요?
 
비올라 카지안:아, 보고서는 천천히 적어서 드려도 될 거야. (고개 도리도리 젓고) 일단은 나가서 마무리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두 사람은 짧은 실험을 마치고 훈련실을 나섭니다.
 
애쉬:고생했어.
 
애쉬가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애쉬:보고서는 일주일 내로 적어서 내면 돼. 편하게 가서 쉬어.
 
어떻게 변했는지 굳이 묻지는 않습니다.
 
아마 연결된 모니터로 다 보고 있었을 테니,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었던 거겠죠.
 
축하해요, 루이스. 이로써 구원자가 되는 한 걸음을 훌륭히 내디뎠군요!
 
루이스 레너드:(뭔가... 이것보다 더 힘든 훈련이나 이론 공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 치고는 제법 가볍게 넘어갔다. 어렵지도 않았고. 첫날이라 그런걸까?)
 
비올라 카지안:그러면…… 같이 적을까? 나는 카페라도 갈까 하는데.
 
루이스 레너드:좋아요. 어젠 시간이 너무 늦어서 구경도 못 했으니까요.
비올라는 카페에서 주로 뭘 마시나요? 제가 보기엔... 음, 차 종류를 즐길 것 같은데.
 
비올라 카지안:으음…… 난 녹차라떼 아니면 허브차가 좋아. 여기 캐모마일 티가 특히 향이 좋거든. 루이스는?
 
루이스 레너드:전 커피요. 라떼 류도 즐기고... 따뜻한 커피면 가리는 게 별로 없는 편이에요.
오늘은 그래도 추천받은 걸 마셔볼까 해요, 캐모마일 티로.
 
비올라 카지안:괘, 괜찮겠어? 입맛에 안 맞으면…… (아무 평가도 안 들었는데 벌써부터 괜히 주눅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 타 지하 1층을 누른다.)
 
루이스 레너드:안 맞으면 다음에 안 마시면 되죠. 새로운 경험을 했다 치고요. 도전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비올라 카지안:루이스는 대단하네…… 물론 도전의 중요성은 나도 알고 있지만, 난 지금껏 안 하던 걸 하려고 하면 너무 두렵던걸. 혹여나 실수하거나 실패할까 봐. 그럴 때면…… 내가 엄청 모자라게 느껴지거든.
 
두 사람은 지하 1층의 카페테리아에 도착합니다.
 
식당 옆에 붙어있는 카페테리아는 크고 널찍합니다.
 
루이스 레너드:여기 시설이 좋네요. (두리번...) 지하인데도 쾌적하고요.
 
비올라 카지안:그치?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기도 좋아.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다들 자주 오지.
(다가가서 주문한다) 캐모마일 한 잔이랑 녹차라떼 한 잔 주세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의 주문이 끝나고 자리에 가서 앉는다. 챙겨온 보고서와 필기구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첫 번째 항목을 읽는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상. (고개를 들어 비올라를 보며) 어떠셨어요?
전, 음... 일단, 운명이란 걸 믿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타이머들과 카운터들이 대면할 그때, 아... 이런 게 운명이라는 건가? 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어요. 그러니까... 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 고민한다.) 아, 그래요. 마치 동시에 공명하는 느낌이었어요.
 
비올라 카지안:공명…… (납득하듯 고개 주억인다. 이내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타이머 특성상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너를 만났을 때처럼 강렬하게 이끌리는 인상을 받은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거든.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고, 모든 감각이 네게로 쏠리는 것 같은 기분…… 루이스 말대로 운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뭔지 몸으로 이해한 것 같은 충격이었어.
 
루이스 레너드:(이해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덧붙여서 저는 타이머 케레스를 언론에서나 이 연구소에 와서나 본 적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긴 했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찾아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갖게끔 하는... 되게 신기한 감각이었어요.
 
비올라 카지안:대체 어떤 원리로 우리가 이끌리게 되는 걸까……? 구원자라는 숙명 때문인가? (중간에 진동벨이 울리자 일어서서 녹차라떼와 캐모마일을 받아온다. 캐모마일이 든 잔을 루이스 앞에 놓아주고 걱정 반 불안 반으로 지켜본다.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루이스 레너드:아, 감사해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꽤 괜찮네요. 추천해주신 보람이 있는데요?
 
비올라 카지안:괜찮아? (녹차라떼를 홀짝이면서 루이스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안심하며 어깨의 힘을 푼다) 다행이다……. 웬만해선 다 맛있게 만들어주시지만, 개개인의 취향은 다 다른 법이니까.
(그리고 라떼를 마시며 아까 자신이 말한 내용을 적어내려갔다. 볼펜을 꾹꾹 눌러 쓴 아기자기한 글씨체.) 그럼 이제 2번을 쓸 차례네.
 
루이스 레너드:2번... 아! (번진 글자를 보고) 그러고 보니, 여기 뭐라고 적힌 건지 여쭤보는 걸 잊었네요. 정황상 스킨십... 이겠죠? (팔짱을 끼고 글자를 노려본다. 그렇게 하면 글자가 갑자기 선명해지기라도 할 듯이.)
 
노려봐도 글씨가 선명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충분히 유추 가능한 내용이네요.
 
비올라 카지안:내가 생각하기에도 스킨십이 맞는 것 같아. 정말 절묘하게 지워져 있었네. 만약 알았다면 반발하는 페어도 있을 거라고 예상해서 그러셨던 걸까……? 어제 방을 함께 쓰는 것도, 우리는 평화롭게 해결했지만 싸우는 페어도 있어 보였어.
 
루이스 레너드:그럴만도 하죠... (지금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 이건 보고서랑 관련 없는 질문이긴 한데, DOT는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편인가요?
 
비올라 카지안:음…… ('이런 식'이라는 표현은 꽤 추상적이지만 비올라는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항상 이렇지만은 않지만, 도밍게즈 전체를 위한 일이라면 가끔씩……?
사실 카운터는 존재만으로도 멸망을 막을, 도밍게즈를 위한 커다란 힘이니까 더 중요히하는 것 같기도 해.
 
루이스 레너드:(찻잔을 매만지며)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해요, 전체를 위한 개인과 그들의 자유 문제는 항상 논쟁 거리니까. 그럼 비올라는 DOT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비올라 카지안:어,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는지라 조금 당황했다. DOT는 자신의 안에서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기관이고 힘이었기에, 어떠한 사적인 생각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밍게즈를 위해 힘쓰고 있는 멋진 기관……? 타이머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고. 능력이 발현한 타이머들이 어떤 보호도 없이 세간에 나타났던 과거에는 꽤나 혼란스러웠다고 해. 그 힘을 통제할 만한 권한도 법규도 없었으니까. DOT가 창설되면서 적절한 보호도 받고, 이 힘을 더 의미있게 쓸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DOT에게 빠르게 전달이 되면 우리도 최대한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출동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타이머를 너무 연예인처럼 홍보하는 점은 좀 불편하긴 하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게 싫어.
 
루이스 레너드:(살짝 웃으며) 왜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답변이 꼭 공식 석상에서 하는 발표처럼 됐잖아요.
뭐... 저도 비슷하긴 해요. DOT 덕분에 우리의 구원자들, 타이머들은 체계를 가질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도밍게즈 전체를 위해 항상 힘써 노력하는 곳이니까요. 다만... 아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처럼, 카운터로서의 루이스 레너드는 아무 불만 없이 순응한다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루이스 레너드에게는 다소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는 뜻이에요.
이를테면, 그래요. 아까 그 스킨십 단계 말이죠. (다소 진지하게) 저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벌써 이런 정보를 알려드리는 게 부적절한가도 싶긴 하지만, 일단은 파트너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 저는, 강도가 높은 스킨십은 실제 연인 사이인 경우에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희가 군인 신분이 된 이상, 하라면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요? 만일 그렇게 명령을 받는다면... 저 하나의 행복보다는 도밍게즈 전체의 행복이 더 크고 우선인 걸 아니까 따르긴 따를 거예요, 아마. 그렇지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타이머가 아닌 저는 꽤나 행복하지 못하겠죠.
비올라가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데 연예인처럼 홍보하는 건도... 음, (말을 너무 많이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멈추고, 짧게 마무리한다.) 여러모로 비합리적이긴 해요.
 
비올라 카지안:아, 그, 그런 건 아닌데…… 막상 말하려니 생각보다 길어졌네. (곧 루이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역시 말하는 것보단 듣는 게 훨씬 편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었지. 타이머인 나와 타이머가 아닌 나를 분리하는 것…….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어. 이미 5년을 이렇게 살아와서인지, 아직은 그 두 개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더라. 그래도 DOT의 건물 안에서만큼은 케레스가 아닌 비올라 카지안이 될 수 있는 것 같아. (넓은 도밍게즈에 비하면 무척이나 좁은 공간이지만.)
나는 그냥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일정 이상의 스킨십은 부끄러워. 만약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우리를 배려해주셨다면 그런 연구를 시키지는 않으셨겠지……. 그렇지만 타이머와 카운터로서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연예인처럼 홍보하는 것도…… 타이머를 더 널리 알려서,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타이머의 존재 자체가 억제력이 될 수 있게끔 말이야. (이렇게 납득하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우니까.)
그래도 루이스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슬플 것 같아. DOT가 항상 우리에게 강요만 하는 건 아니야. 일단…… 여러 행사에 나가거나 광고를 찍는 만큼, 수입 하나는 대단하거든. (인기만 연예인에 버금가는 것이 아니다!) 돈을 더 벌려고 일부러 더 많은 행사에 참여하는 타이머도 있어. 이외에도 성인 임관을 받으면 DOT에서 나가 따로 관사를 얻어 살 수도 있다고 하고. 지금은 학생 신분이니 제약이 여럿 있지만, 성인이 되면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으려나.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좋은 일이네요, 그건. 하지만 제게 중요한 건 금전이 아니라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는 거라서요. ... 너무 이상적인가요? 저희 형은 제게 항상 그랬거든요. 너무 꼿꼿하게만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끔은 마음을 가볍게 먹어도 된다고...
 
비올라 카지안:아냐. 멋진걸? 정말로 '구원자'에 어울리는 사람 같아, 루이스는. (그런데도 구원자로서 네게 강요되는 일이 너를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니, 이건 꽤나 아이러니한 면이다.) 형이 있었구나. 너를 많이 생각하셔서 그런 조언을 해주셨을 거야. 신념을 지키려다 네가 꺾여 버리기라도 한다면 슬프실 테니까.
DOT에 들어오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었어? (글을 쓰던 펜을 잠시 내려두고 묻는다.)
 
루이스 레너드:형이랑 같이 9구역에서 지냈어요. 부모님은 다른 곳에 사시고, 학교 때문에 둘만 같이 살다가... (손목을 들어 보이며) 여기로 오게 됐죠.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구체적인 장래희망은 없고, 그냥 성실히 살아가는 보통 학생요.
 
비올라 카지안:9구역 출신이구나. 나는 10구역에서 자랐는데. 형제자매가 다섯이나 되는 대가족이었지. (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어도. 깊은 사정까지는 아직 터놓을 때가 아니라 생각해 뒷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아직 장래희망을 생각하기에는 어리니까. 그래도 루이스는 무얼 해도 잘했을 것 같은걸. 똑부러지고 똑똑하잖아.
분명 카운터로서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루이스 레너드:(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해요.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죠. 이젠 확실하게 길이 정해졌으니까요.
(주먹을 내밀며) 함께 노력하는 거예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비올라 카지안:응……! 세계를 위해서. (내밀어진 손을 다소 얼떨떨하게 보다가 주먹을 쥐고 소심하게 톡 맞부딪혔다.)
그럼 2번은 아까 우리가 손깍지를 꼈을 때의 능력 향상도를 그대로 쓰면 되겠지……? (빠르게 자라났던 나무를 상기하며 사각사각 적어내려갔다.)
 
루이스 레너드:네, 속도 면이랑 발견 면에서 차이점요. (종이 흘끔) 다 적으셨어요?
 
비올라 카지안:(머잖아 고개 끄덕인다) 으응. 내일 수업 시간에 제출하면 될 것 같아. 루이스는?
 
루이스 레너드:(완벽한 보고서 보여주며) 한참 전에 다 적었죠.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비올라 카지안:그러게. 부지런하게 한 덕분이지. 수업도 일찍 끝났고, 저녁 시간까지 쭉 자유일 것 같아. 하고 싶은 거 있어?
 
루이스 레너드:음... (거의 다 마신 찻잔을 바라보며) 본관에 가 보고 싶어요. 거긴 가본 적이 없거든요. 옥상에 스카이라운지가... 있댔나?
 
비올라 카지안:회의실 말고는 못 돌아보긴 했지? 서관 옥상이랑은 다르게 본관 스카이라운지는 꽤 잘 꾸며져 있어. (종이랑 펜 챙겨서 일어난다)
 
루이스 레너드:그럼 거기 구경 갔다가 저녁 먹으러 가요. (새로운 곳을 본다는 생각에 신남)
 
비올라는 신난 루이스를 데리고 본관으로 향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도착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멋들어진 스카이라운지입니다.
 
직원들이 쉴 수 있게끔 하얀색과 남색이 배치된 벤치가 놓여있고, 유리창문 너머로 수도의 정경이 내려다보입니다.
 
쉴 수 있는 테이블과, 한쪽에는 간이 커피머신도 보이네요.
 
루이스 레너드:(탁 트인 공간을 보니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비록... 창가로 다가갈 용기는 없지만 벤치 근처의 초목 덕에 기분이 좋아진다.) 훈련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오기 좋은 장소네요.
 
비올라 카지안:(마찬가지로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창가엔 못 다가가고 있지만, 깔끔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스카이라운지를 보면 마음이 절로 편안해진다) 본관에는 서관만큼 자주 오진 않지만, 제대로 쉬기 좋은 장소지? 본관에도 카페테리아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음료수를 사서 가도 좋겠다.
 
루이스 레너드:(당신의 행동을 유심히 보다가...) ... 혹시, 비올라도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편인가요?
 
비올라 카지안:('도'?) …… 루이스도??
 
루이스 레너드:(고개 끄덕......) 우리 능력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 관련한 거라 정말... 다행이에요......
 
비올라 카지안:…… 그런데 가끔은, 높게 자라나게 한 식물을 타고 올라가서 구조 활동을 해야 할 때도 있어. (먼 산 봄) 루이스는 나랑 같은 능력이 아니니 높은 곳까진 안 와도 될지 모르지만……
 
루이스 레너드:(놀란 표정으로) ... 아뇨, 저도 아직은 모르죠... 높은 곳과 관련한 배리에이션을 새로 발견하게 된다면...... (상상하기 싫음...) 그리고, 파트너끼리는 가까이 있어야 능력이 더 증폭되잖아요...
 
비올라 카지안:…… 괜찮겠어? 어쩌면 우리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훈련을 같이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루이스 레너드:그러게요...... (아찔...) 저는 보통 계획을 세워놓는 편이지만, ... 고소공포증 극복에 관해서는 미리 생각해놓고 싶지가... 않네요.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비올라 카지안:응, 그러자……. (벌써부터 아찔)
 
연구 보고를 마치고, 점심 식사부터 저녁 식사까지는 쭉 자유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바야흐로 두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DOT의 흰 건물 위로도 어김없이 밤이 내려앉습니다.
 
12개라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수의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선선한 봄바람이 운동장의 잔디를 부드럽게 훑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비올라와 보낸 시간은 특별했나요?
 
루이스 레너드:(새롭고 신기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운명이 정해준 파트너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체감해보았고, 묵묵히 일만 하며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타이머 '케레스' 대신 차를 좋아하고 조금 많이 소심한데다가 부끄러움도 많지만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따스한 열일곱 살 '비올라 카지안'을 알게 되었다. 참, 공통점도 발견했지. 고소공포증 같은 건 능력처럼 점지받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것마저 똑같으니 재밌을 정도였다.
그래, 즐거웠고... 특별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상을 즐길 수 있단 말이지.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회상하는 시간을 갖다 보면, 종소리가 들립니다.
 
‘저녁 식사’를 알리는 특별한 종소리입니다.
 
두 사람은 서관의 지하로 향합니다.
 
식사를 꼬박꼬박 챙기는 것도 구원자의 책무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걸요.
 
<행운> 판정
 
루이스 레너드:
기준치: 70/35/14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띵.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크게 벌리고 비올라와 루이스를 기다립니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오늘 저녁은…… 뭘까요?
 
루이스 레너드:저녁 메뉴는 따로 공지되어 있나요? 그러니까, 식단표 말이에요.
 
비올라 카지안:따로 배부되는 식단표는 없어. 그래도 곧 알게 될걸……? 내려가면 금방이니까. (숨 들이마심) 맛있는 냄새 난다.
 
루이스 레너드:그러게요. 몰랐는데, 저 배고픈 상태였나봐요... (음식 냄새 킁킁) 비올라는 싫어하는 음식 있어요?
 
비올라 카지안:나 생선류는 잘 못 먹어. 느끼한 것보단 담백한 게 훨씬 좋고…… 루이스는?
 
루이스 레너드:전 딱히 가리는 거 없어요. 주는대로 먹는 편이에요.
 
비올라 카지안:다행이네, 타이머로 여러 행사나 축제 같은 데 초대되다 보면…… 때로 원치않은 음식을 먹어야 할 때도 있으니까. 1구역처럼 바닷가가 있는 구역 축제 때는 정말 힘들었었지.
 
식당은 28명, 아니, 어제까진 14명을 위한 곳이라기엔 지나치게 호화롭습니다.
 
남색 천장, 깨끗한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액자들, 푹신푹신한 흰색 양탄자(식당에 배치하기엔 정말 호화스럽지 않나요?)와 56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길고 커다란 테이블.
 
음식은 이미 차려져 있고, 개인의 앞접시가 있어 원하는 만큼 덜어 먹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미 도착한 몇 명은 식사 중이군요.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토마토 두부 카프리제, 잘 녹은 치즈를 얹은 스테이크 정식, 흰 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와 색색의 과일 스프링롤.
 
참치를 깍둑깍둑 썰어 채소와 상큼한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 콩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나는 두유 스무디……
 
디저트로는 바싹 구운 무화과 쿠키가 나왔습니다.
 
루이스 레너드:(맛있겠다......)(스테이크에 시선을 집중하며)
 
비올라 카지안:(카프리제에 시선 끌림) 배고프지? 얼른 덜어와서 먹자. (앞접시를 두 개 챙겨 하나를 루이스에게 건네고, 연어 스테이크를 뺀 음식들을 덜어온다. 특히 카프리제와 샐러드를 많이 담았다)
 
루이스 레너드:(차려진 음식을 모두 적당히 덜어온다. 접시 하나로는 모자라서 하나를 더 챙겼다. 평소에는 한 접시를 모두 먹은 뒤 다음 접시를 가져왔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배가 많이 고파서, 한번에 두 접시도 괜찮을 것 같다. 능력을 써서 그런가?) 비올라도 많이 먹어요.
 
식사를 하면서 [액자]와 [테이블]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샐러드를 먹으며 벽에 걸린 액자를 흘끗 본다.)
 
각각 [알록달록한 하늘], [푸른 장미 아치], [검은 호수]를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푸른 장미? 특이한 색이네. 아치 사진에 먼저 주목한다.)
 
은색 아치문을 따라 피어난 푸른 장미가 유난히 화려합니다.
 
공원에 설치된 조형물인데,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그 아래를 거닐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더군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수도의 연인에게는 꽤 명소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저런 곳도 있었군... 전설은 믿지 않는 편이지만 연인들에게는 흥미로울만한 주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검은 호수 사진을 본다.)
 
새까맣게 물든 호수에는 흰 종이꽃이 떠다닙니다.
 
수도의 유명한 관광지, 코마니 호수입니다.
 
건국 축제, 단 이틀간 호수의 수면이 검게 물드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죠.
 
축제 때면 타이머의 이른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이 손수 접은 종이꽃을 띄워 보내곤 합니다.
 
사진 속 호수를 바라보던 루이스는 문득 불안함과 불쾌감을 느낍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이유를 생각할수록, 원인을 찾을수록 두통이 밀려옵니다.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처럼 불안해집니다.
 
루이스, San C (0/1)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루이스 레너드:(꺼림직한 기분이 들게 하는 사진이다... 이유 모를 불안함이 몰려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다독인다. 죽음을 떠올리고 기분이 좋은 인간은 없다, 너는 지금 맛있는 밥을 먹으며 휴식 중이니 괜히 불쾌한 감정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라며.
마지막으로 하늘 사진을 본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대조적입니다.
 
창틀 따위에 단단히 매인 긴 줄에는 우산과 깃발, 손수건과 종이학 같은 것이 걸려 있습니다.
 
꽃이 핀 것처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 풍경은 도밍게즈 건국 축제의 장면이에요.
 
루이스 레너드:(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보았던 아름다운 축제를 회상하며 사진을 본다. 대책없이 즐거워지는 시간이었지. 아까 느꼈던 불쾌함은 금방 사라지고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린다.
시선을 벽에서 내려 식사에 집중한다.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테이블마다 배치된 네임 카드와 은식기.
 
비올라와 루이스의 이름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습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가까운 곳에 배치한 의도가 훤히 보입니다.
 
냅킨은 토끼 모양으로 접혀 있고, 음식 사이사이 푸른 장미가 꽂힌 화병이 있어서, 꼭 비싼 레스토랑에 데이트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네요!
 
참고로 푸른 장미는 도밍게즈의 국화입니다. 불가능을 넘어선 기적의 상징이죠.
 
맛있게 식사합시다. 밥을 먹는 동안은 개도, 애도 건드리지 않는 법이므로 식사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디저트를 먹을 무렵에……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진짜 ■■가 그렇게 말했어?”
 
“■■■■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던데. 재수 없게 뭐람?”
 
근처에 앉은 N시의 타이머와 카운터가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싶다면 <지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DOT에서의 식사가 너무 맛있는 나머지 그쪽으론 잘 신경이 가지 않네요!
 
궁금하다면 비올라에게 물어봐도 되겠죠.
 
혹은 <대인관계> 판정 성공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저기, 저희 근처에 앉은 분들요, 혹시 누군지 아세요? 중요해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누군지 도통 기억이 안 나서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옆쪽을 살짝 돌아보더니) 저쪽은 7시 페어야. 나도 카운터들 얼굴은 아직 다 못 외웠지만 타이머는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방금 예언의 타이머 이름이 들린 것 같았는데……
 
루이스 레너드:예언의 타이머요...?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혹시, 멸망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비올라 카지안:최근에 예언의 타이머와 카운터가 중요하게 다룰 주제라면, 아마도 멸망일 것 같기는 한데…… 한 번 물어볼까……?
 
루이스 레너드:(흠...) 네, 그래요. 가서 물어보죠.
(7시 페어에게 다가가서 정중한 목소리로 꾸벅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식사 맛있게 잘 하고 계신가요? 저는 3시 카운터 루이스 레너드라고 합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3시 타이머 케레스고요. 아까 하시는 이야기를 어쩌다보니 살짝 듣게 되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이야기인지 저희도 들을 수 있을까요?
(조곤조곤하게 둘을 설득한다.)
 
제 7시 타이머:아, 루이스. 이름은 들었는데, 비올라의 짝이 루이스 씨였군요? (정중한 태도 덕에 첫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듯 친절하게 미소한다) 잘 대해줘요, 만나봤으면 이미 알겠지만서도, 착하지만 무척 소심한 친구니까요.
그리고 저희가 하던 이야기 말인데, 예언의 카운터와 타이머가 같은 날 같은 시에 서로 다른 예언을 했다지 뭔가요. 연구원들이나 사무원, 심지어 하인리히 장교님까지도 쉬쉬하고 계셔서 본인들한테 가서 직접 들었어요.
 
루이스 레너드:그럼요,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으며 이야기를 듣다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다.) 같은 계열의 능력을 가진 둘이... 한날 한시에 다른 예언을요? 그럴 수가 있나요? 자세히 해석해보면 본질적으로는 같은 예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제 7시 카운터:아니에요, 다른 게 분명해요. (대화를 듣다 끼어든다.) 일례로, 예언의 카운터가 들었다는 예언은 이래요.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세계가 무너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건물이 붕괴하고, 별이 떨어지는······ 요란하고 끔찍한 소리입니다.'
“멸망이 신속히 임하리니, 아무도 멸망의 때인 줄 알지 못하리라······”
 
제 7시 타이머:(심각한 낯으로) 그리고 이게 예언의 타이머가 들었다는 예언의 내용이죠.
'평소와 같은 하루입니다. 새로운 이들이 오고 가지만 달라질 것은 무엇도 없습니다. 어떤 소리를 듣습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꽃샘추위가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봄이 오는 소리입니다. 녹은 눈이 아스팔트 도로를 적시고 스며듭니다. 겨울이 지난 후의 봄.'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언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차가 있다. 둘 중 한 명이 틀렸다. 서로 다른 경우의 수를 예언했다. 두 가지 모두 결국 같은 이야기다…….
 
세계는 멸망할까요? 멸망하지 않을까요?
 
루이스 레너드:...... 엇갈린 예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해볼 수 있겠네요. 저는... '멸망'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 (7시 카운터와 타이머, 그리고 비올라를 바라보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7시 타이머:저는 한 명이 틀렸기를 바라는 쪽이에요. 비록 예언이 쉬이 빗나가지는 않는 법이라 한들, 아직 저희는 어리고 능력의 숙련도가 완벽하지 않잖아요. 그렇기에 가닥을 잘못 잡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야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의 예언이 나왔겠어요?
 
비올라 카지안:(급격히 불안해진 낯으로 무화과 쿠키가 싸인 비닐봉지만을 만지작거린다.) ……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느 쪽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인걸.
 
루이스 레너드:(한숨을 옅게 내쉬며) 그렇죠, 말씀하신 것처럼 예언 자체가 빗나갔을 가능성도 있고, 맞다 하더라도 당장 정답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식사 도중에 불편하게 만들어드려 괜히 죄송하네요. 하지만 우린... 적어도 노력해보고자 여기에 모였잖아요. 어떤 예언이 진실이든, 타이머들이 늘 그래왔듯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요.
 
제 7시 카운터:아니에요, 저희야말로 계속 예언과 관련된 대화를 하고 있었는걸요. 말씀대로 어떤 예언이 진실이건간에 타이머와 카운터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불안해진 비올라가 짐짓 신경쓰이는듯 흘끗 보더니) 아,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일 수업에서 만나요.
 
제 7시 카운터:네, 내일 뵈어요. (친근하게 손 흔든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에게 소곤소곤) 쿠키는 방에 올라가서 먹어요. 일단 가죠.
 
비올라 카지안:아, 응. 그러자. (접시를 가져다두고 일어서서 식당을 나선다. 단정하게 칠해진 서관의 천장을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멸망이 닥쳐온다면 무너지고 말 단정하고 아름다운 건물.)
 
시작이 좋았던 저녁 식사는 찜찜하게 끝이 납니다.
 
루이스는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DOT는 분명히 그리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루이스가 이곳에 존재함에도 불길한 예언은 끝나지 않는 걸까요?
 
루이스 레너드:(하인리히 장교는 분명... 카운터가 새로운 구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멸망에 관한 예언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 지금으로써는 어떠한 추측도 단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머리 아프게 고민해봤자 별 도움이 안 된다. 아까도 말했듯, 그저 현재를 살며 노력해가야겠지. 파트너와 함께.)
 
비올라 카지안:(어느 것도 명확히 알 수 있는 게 아닌 지금, 예언에 과도하게 신경써보았자 저만 힘든 일임을 안다. 머리로는 알지만, 생각이란 간단하게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손톱 옆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떼어낼라치면 아프고, 쭉 뜯어내버려도 얼얼한 상흔 자국이 남고 말지. 그 예언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되어 나타나기 전까지는 쉽게 떨쳐낼 수 없을 것 같다.)
 
각자의 상념을 품은 채로 하루가 저뭅니다.
 
예언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겠죠.
 
시간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사건은 고장난 폭탄처럼 순식간에 터집니다.
 
그래, 사건이라고 불러 마땅한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어요.
 
음, 언제냐면, 비올라와 루이스가 막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을 때였습니다.
 
저녁 식사 후 평온한 시간을 맘껏 누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때쯤이요.
 
그러니까······
 
카운터의 능력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DOT의 지시로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된 탓에, 비올라와 루이스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정리하던 비올라가 문득 루이스를 물끄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엽니다.
 
비올라 카지안:조금…… 흐릿해진 것 같지 않아?
 
초록빛 시선이 당신의 왼쪽 손목에 가 닿습니다.
 
비올라의 말마따나 다소 옅어진 것 같습니다.
 
한 번 새겨지면 죽을 때까지 평생 지울 수 없는, 각인이자 낙인인 바로 그것이요.
 
아, 물론 착각일 수도 있어요. 잘못 본 걸지도 몰라요. 눈을 깜빡이면 어제와 다를 바 없었거든요.
 
하지만……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이능력 Roll
기준치: 45/22/9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능력의 효율이, 출력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은 선명했습니다.
 
당신이 여러 차례 훈련실에서 연습했던 때 끌어낼 수 있던 능력의 절반도 안 되는 출력입니다.
 
사람은 호흡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누구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 마련입니다.
 
능력자가 능력을 다루는 꼴이 딱 그렇습니다.
 
시간의 선택을 받으면, 능력은 존재의 증명이 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죽음에 이를 때까지 타이머와 함께합니다.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삶에서 유일하게.
 
그래서 타이머는, 어떻게 여기냐와 별개로 단 한 번도, 능력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싫건, 좋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사라진다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카운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각인이 새겨진 순간부터 능력은 온전히 루이스의 것이었고, 루이스의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당신은 당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챕니다.
 
얌전하던 능력이 무언가 이상하게 새고 있습니다.
 
루이스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자꾸만 어디론가 뛰쳐나갑니다.
 
그 종착지는……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11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너의 타이머를 봐.
 
저 애가 네 모든 걸 뺏어갈 거야.
 
시간이 속삭입니다.
 
능력은 순식간에 루이스의 몸을 빠져나갑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타이머 또한 그 과정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었냐고요? 글쎄…… 루이스의 표정에 드러나서? 카운터의 행동이 이상해서?
 
아니면, 능력자 대 능력자로서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아뇨, 그저, 스스로가 증거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다루기 쉬운, 당장이라도 넘칠 것처럼 넘실거리는 비올라의 능력은……
 
이례적일 정도로, 완전하게 차 있었습니다.
 
카운터와 함께 있으면 능력의 효율이 오를 거라고 했지. 누군가는 그 설명을 두고, 타이머를 위한 배터리, 소모품이라고 불렀고.
 
그 표현이 꼭 맞아요. 그래, 이건 단순히 효율이 오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저 안에 있던 것이 내게로 넘어온 것처럼·…….
 
뒤섞인 능력은 물과 기름처럼 모호한 경계를 긋고 있습니다.
 
루이스,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이능력 Roll
기준치: 0/0/0
굴림: 34
판정결과: 실패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고작 하루아침에.
 
이부자리를 사이에 두고 비올라와 루이스는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사라진 것이 저기 있었고, 잃어버린 것이 여기 있었습니다.
 
불을 끄는 것처럼, 그리고 불을 켜는 것처럼.
 
해가 지는 것처럼, 그리고 달이 뜨는 것처럼.
 
네가 ■■ ■ 것처럼, 그리고 내가 ■■■ 것처럼.
 
오롯이 타이머와 카운터만 숨쉬는 작은 방.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떤 얼굴로 보고 있었던가요?
 
비올라 카지안:(분명하게 제 것이 아닌, 이질적인 타인의 능력이 손쓸 틈도 없이 저에게로 흘러들어온다. 아주 길게 느껴지는 찰나, 모든 것을 느끼면서 낯빛이 새하얘진 채 제자리에 석고상처럼 굳었다.) 무, 무슨…… 루이스……?
 
루이스 레너드:(힘이 쭉 빠지는 이질적인 느낌이다. 원리를 알 수 없이 사라져버린 능력에 당황해 손목과 비올라를 그저 번갈아 보기만 한다.) ... 이거, 왜...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더 할 말을 찾지도 못하고 그저 답지않게 당황한 채다.)
 
불현듯 스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가 무너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건물이 붕괴하고, 별이 떨어지는······ 요란하고 끔찍한 소리와,
 
“멸망이 신속히 임하리니, 아무도 멸망의 때인 줄 알지 못하리라······”
 
평온하기 짝이 없던 눈앞의 세계와,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꽃샘추위가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봄이 오는 소리.
 
녹은 눈이 아스팔트 도로를 적시고 스며듭니다. 겨울이 지난 후의 봄.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다정하던 그 문장.
 
카운터를 소개할 때, 하인리히 장교는 분명히 세계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세계 멸망과 엮인 사건인 걸까요?
 
어느 쪽의 예언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길하고 불길한 예언이 공평하게 저울 위에 놓여 있습니다.
 
어두운 밤, 사위가 고요하고, 창 너머의 달만 밝습니다.
 
비올라 카지안:분명 지금…… 네, 네 능력이 나한테 넘어온 것 같은 감각이 들었어. (뒤섞이지 않고 찰랑이는 능력. 두 개의 힘이 제 안에 머문다. 대체 이게 무슨 듣도보도 못한 일인가. 경악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제 손목을 매만진다) 어떻게 된 거지……? 어, 얼마나 넘어온 거야?
 
루이스 레너드:(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창백한 낯을 애써 다스리려 노력하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힘에 집중해본다.) ... 아마, 전부 다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비올라를 바라본다.) 능력이 타인에게 넘어간다는 이야기는 도밍게즈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어요. 비올라의 능력 탓이라고 치기에는, ... 그럴 수가 없겠죠.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연구소로 가야겠어요. 빨리 이 일을 보고하고, 다른 페어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는지 체크해야 해요.
 
<지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시간의 각인이 아직 선명하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듭니다.
 
일시적인, 일시적인, 일시적인 현상일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돌이키지?
 
DOT가 루이스와 비올라에게 이상한 짓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루이스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세계를 구원할 유력한 방법인걸요.
 
비올라 카지안:내, 내, 내가 뺏어온 게 아니야. 정말이야! (루이스가 자신을 의심하지도 않았건만 지레 겁먹고 사색이 된다.) 아, 아무리 내가 부족해도 남의 능력을 탐내본 적은 없어. 게다가 함께 멸망을 막아낼 수 있는 존재라고 했는데, …… (대체 왜 이런 일이?)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젓는다.) 걱정마세요... 비올라가 제 능력을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절대로. (애초에, 법 없어도 죄 짓고는 죄책감에 못 살 사람이 매일 옆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뺏겠는가. 생각도 못 한 일에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숨기려 주먹을 꼭 쥔다.)
 
이 상황을 묻어두려 해봤자 언젠가는 드러나고 말 겁니다.
 
애초에 건국 축제부터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걸요.
 
하인리히 장교는 카운터의 존재만이 세계 멸망을 막고, 사회의 평안을 불러올 일인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건국 축제에서는 무조건 등장시키려 들 테니, 그날이 온다면 얄팍한 거짓말은 결국 드러나고 말겠죠.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소등한 서관과 달리 창 너머의 본관은 아직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는 본관에 머무를 테죠. 우선 장교를 찾아가는 게 어떨까요?
 
하필 이럴 때 본관이 눈에 띄다니. 이마저도 퍽 교묘한 배치입니다.
 
보고한다고 한들, DOT는 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뾰족한 수 따윈 없을지도 모릅니다.
 
루이스 레너드:(불 켜진 본관을 바라보며) ... 일단은 본관으로 가 보죠. 일시적인 현상이라 해도 보고할 필요는 있어요. 다른 페어들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더욱 시급한 일이기도 하고요.
 
비올라 카지안:괘, 괜찮을까……? 능력이 없어졌다고 너, 너를 여기서 내보내려고 하면 어쩌지? (지레 걱정하는 습관이 또다시 튀어나온다.)
 
루이스 레너드:... 어쩔 수 없죠,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곳에서 나간다고 해도 저 개인에게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물론... (손목의 각인을 내려다보며) 조금 안타깝긴 하겠지만요. 오히려 절 내보내지 않는 쪽이 더 걱정되긴 하지만... 문제 해결이 우선이에요.
 
비올라 카지안:그, 그건 그렇지만……. (루이스와 어울린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당신이 있는 삶이 익숙해진 걸까. 처음에는 그토록 어색해했으면서. 친절하고 차분하면서도 정의로운 제 파트너에게 금세 정이 들어버렸다. 네가 떠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절로 슬퍼지고 마는걸. 하지만 능력을 빼앗긴 쪽은 카운터이니 제가 강하게 붙잡기도 어렵다. 장교님이 카운터를 내보내려 한다면 최대한 간절하게 시간을 갖자고 부탁해보는 수밖에. 지금으로서는 비올라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이었다.)
(결국 망설이다 고개 끄덕인다) 응. 가자.
 
문제의 시급한 파악과 해결을 위해서라도 보고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린 아직 어렸고, 지고 있는 책임과 무게는 너무 무거우니까요.
 
때론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에요. 바로 지금과 같은 일들. 어른의 도움이, 조언이, 결정이 필요한 순간.
 
창 너머로 아직 환한 본관을 보았죠.
 
운명이 배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본관 1층에 들어서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안내데스크로 향한다. 직원에게 빠르게 인사를 건넨다.) 3시 카운터 루이스 레너드입니다. 하인리히 장교님을 좀 뵈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가능한가요? 매우 급한 일입니다.
 
서관을 나서,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지납니다.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해선, 흰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세계 멸망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많은 별들은 떨어질 기미라곤 보이지 않고.
 
본관 안내 데스크에는 퇴근하지 않은 직원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면서도, 의외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습니다.
 
하긴, 이 시간에 본관에 방문하는 경우가 워낙 드무니 그럴 만도 하죠.
 
직원: 장교님을요? 아…….
 
잠시 곤란한 기색을 보인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힐끔 바라봤습니다.
 
지하 2층. 층수를 나타내는 파란 글씨가 점등합니다.
 
그리고는 곧 지하 1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갈하게 웃은 직원이 설명합니다.
 
직원: 마침 올라오시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전히 상냥하지만,
 
<심리학> 판정
 
루이스 레너드:
심리학
기준치: 55/27/11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조금 귀찮아 보이네요. 얼른 퇴근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방해한 걸까요?
 
비올라 카지안:(주눅들어서 눈치봄)
 
루이스 레너드:(퇴근이 중요하냐, 지금...... 이 시간에 급하게 찾아올 정도면 심각한 일이란 걸 대충 눈치는 채야지! 짜증을 옅게 깐 얼굴로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비올라와 루이스가 직원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에도 웃음은 여전하고, 엘리베이터는 올라옵니다.
 
지하 2층, 지하 1층, 그리고…… 1층.
 
띵.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익숙한 남자가 내렸습니다.
 
칼같이 다린 군복을 입은 하인리히 장교였습니다.
 
식사하거나,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음식 냄새도, 술 냄새도 묻지 않았거든요.
 
두 사람과 마주친 하인리히 장교는 의외란 듯 눈을 크게 뜨면서도, 기꺼이 반깁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며칠 전에도 본 것 같은데. 하룻밤 새 많이들 컸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은 완전히 점멸합니다.
 
하인리히 장교:무슨 일이지?
 
그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봅니다.
 
지난밤 사이좋게 지냈나, 지내지 않았나 감시하는 것 같은 눈초리입니다.
 
비올라 카지안:(장교 앞에서는 그렇잖아도 초라한 자신이 더욱 모자라지는 기분이다. 양손을 모으고, 시선을 떨구며 슬쩍 루이스의 뒤쪽으로 한 걸음 옮겨선다.) 그게…….
 
루이스 레너드:(앞으로 반 걸음 정도 나서며)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장교님. 3시 페어 루이스와 비올라입니다. 긴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직원을 슬쩍 보며) 혹시 보안을 유지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요.
 
하인리히 장교:DOT의 직원조차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니, 이것참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지는군그래.
자, 이쪽으로 오게. 회의실을 쓰지. (1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달칵 하고 불을 켠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에게 속삭인다.) 가요, 너무 겁먹지 말고요. 괜찮을 거예요.
 
비올라 카지안:응…….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기가 팍 죽은 채로 어디 끌려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회의실로 향했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를 먼저 들여보내고 문을 닫는다. 자리에 앉아서 침을 한번 꿀꺽 삼킨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능력이 모두 사라졌고, 타이머 케레스에게 그 힘이 모두 옮겨갔습니다.
 
비올라 카지안:제, 제가 능력을 앗아가려고 생각하거나 시도한 건 아니에요. 문득 루이스의 손목을 봤는데 각인이 조금 옅어진 것 같아서, 그걸 말하는 순간 갑자기…….
 
두 사람에게 일련의 상황을 듣고서도 하인리히 장교의 눈초리는 그다지 심각해지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엄숙하고, 얼핏 보면 거만한 얼굴로 웃은 그는 루이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립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그 말 때문에 이렇게 분위기가 심각했던 건가? 어린 사람들이 걱정도 많긴.
걱정하지 말게. 이미 들어둔 바가 있어. 환경이 낯설어서 그럴 거라고, 마음을 편안히 갖는 게 중요하다더군. 또래라 함께 있으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나 보지?
 
웃던 그가 툭 묻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그럴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만, 혹시나 타이머 군이 텃세라도 부리던가?
 
루이스 레너드:(웃으며 받아친다.) 그럴리 없다는 걸 저보다 훨씬 더 아시잖습니까, 그 반대라면 몰라도요. 물론 제가 실제로 텃세를 부렸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교님께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이 일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 중요하단 말은, ... 다소 이상합니다. 능력이 사라진 일은 모든 일과가 끝난 뒤, 휴식을 취하던 때에 벌어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상태였는데,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인리히 장교:DOT도 정확히는 모른다네. 보통은 12세에 각인이 나타나는 타이머와 달리 카운터는 17세에 뒤늦게 각인이 생겼으니, 그 불안정성 탓에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지.
걱정하지 말게, 레너드 군. 자네들의 존재가 세계의 평화를 좌지우지해. 그래서 우리는 작은 문제도 괄시하지 않고 방비한다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 말을 명심하게. 그러면…….
 
녹이 슨 청동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납니다.
 
그는 제 턱을 한 차례 쓸고, 당부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걸세. 도밍게즈는 언제나 평화로울 거야.
 
<심리학> 판정
 
루이스 레너드:
심리학
기준치: 55/27/11
굴림: 62
판정결과: 실패
 
하인리히 장교의 시선은 집요하게 루이스를 향합니다. 도밍게즈의 평화를 노려보는 것처럼!
 
루이스를 바라보는 눈빛, 대하는 태도, 은근한 목소리에서 집착이 묻어납니다.
 
당신을 절대적인 구원자로 맹신하는 신도처럼, 절대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되돌아올 거야.
그러니, 더 가까이 있도록 해. (시선이 비올라를 향한다.) 붙어있는 시간을 늘리도록. 더 가까이 있을수록, 가까워질수록, 완벽하게 적응할 테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시간마저도 자네들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꼭 그렇게 굴면 돼. 어렵지 않은 일이잖나? 어차피 자네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어.
 
세계에는 충성을,
 
명령에는 복종을.
 
군인에게나 딱 어울리는 요구사항을 목에 걸어주는 꼴이었습니다.
 
<지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72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나저나, 본관에 지하 2층이 있었던가?
 
루이스 레너드:(군사 시설에, 실제로 표기되지 않은 층이 있는 것쯤은 별로 놀라울 것이 아니다. 다만... 계속해서 물리적으로 가까워질 것을 명령하는 것이 다소 불편하단 말이지. 능력이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명령을 듣지 않을만한 근거도 없고. 심리적 거리만이라면 못 할 것도 없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 만일 이대로 능력이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하인리히 장교:그럴 일은 없어. (한 마디로 단정짓는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네.
자, 이야기할 사항은 그게 전부인가?
 
루이스 레너드:(확신하시는 근거라도 있습니까, 질문이 턱밑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삼켜진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없습니다. ... 비올라는요? (옆을 살핀다.)
 
비올라 카지안:저도…… 없습니다. (고개 미약하게 젓는다)
 
하인리히 장교:그럼 이만 가보겠네. 두 사람도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도록. (먼저 회의실 문 열고 자리를 비운다.)
 
루이스 레너드:(나가는 하인리히를 향해 인사를 하고는 맥이 빠진 듯 자리에 다시 앉는다.) 휴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예견했대도 너무 태연한 태도인데. (능력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을 당시의 당혹감이 다시 몰려오며 약하게 소름이 돋는다. ... 두려웠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나, 이게?)
 
비올라 카지안:(하인리히가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다. 턱턱 막혔던 숨을 길게 내쉰다.) 돌아올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태연하신 걸지도…….
 
DOT를 믿어도 될까요?
 
루이스 레너드:전... 그 지점이 가장 궁금해요. 대체 우리로부터 어떤 데이터를 얻었기에, 그 데이터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새로운 구원이라고 추앙하던 카운터의 능력이 갑자기 사라졌다는데도 곧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머리가 복잡하다는 듯) 명확한 근거를 말해줬더라면 이 불안감이... 덜 했을까요? 우리도 아직 우릴 잘 모르는데, 붙어있는 게 그냥 답이라니.
(DOT를 믿든, 믿지 않든,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뭘 더 할 수 있느냐고. 손목의 각인에게 괜히 따져본다. 줬다가 빼앗았다가, 뭐 하자는 건지.)
 
비올라 카지안:(이유로 추정되는 걸 아주 말해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서로의 존재만이 답이라는 명제를 던져주니 어떻게 덥석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저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12살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 변함없이 선명하기만 한 각인. 능력의 증명이자 구원자의 증거. 이게 뭐라고 너도 나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려워야 하는지…….)
일단은 서관으로 돌아갈까……? 가는 길에 카페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건 어때?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인다.) ... 네, 좀 진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비올라 카지안:(회의실을 문을 닫고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서관으로 향한다. 발 아래 밟히는 인조 잔디의 촉감이 유달리 선명하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카페로 향한다.) 뭐 마실래?
 
루이스 레너드:저는... 얼그레이 티로 할게요. (메뉴판을 보다가, 고민하기 싫은지 차 종류 중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을 고른다.) 비올라는요?
 
비올라 카지안:나는…… 이번엔 페퍼민트 티로 할래. (고민하다 허브티를 고른다. 계산하고 자리에 돌아와 잠시 조용히 앉아있자면, 손님이 없는 탓에 금세 주문한 차가 나왔다. 얼그레이 티를 당신에게 건네주었다)
정말로 물리적으로 가깝게 붙어있는 게 도움이 될까……?
 
루이스 레너드:처음 훈련했을 때 능력이 향상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그렇지만... 도대체 어떤 원리로? (눈썹을 찡그리며) 저는... 카운터의 존재에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토록 불안정한 존재는 왜 갑자기 생겨났으며, 왜 타이머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지.
 
비올라 카지안:나도 거기에 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애초에 타이머라는 존재부터가 평범한 사람은 쓸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사람들이잖아. 시간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들…… (그렇지만 과연 축복이 맞는 걸까. 구원자로 세계를 위해 살다가 다음 세대의 타이머가 태어나면 죽어버리는 운명.)
 
루이스 레너드:결국... 우리가 아는 건 타이머가 도밍게즈를 구원할 것이라는 구절 하나뿐이네요. 그마저도 예언에 따르면 아닐 수도 있고요. 하아... (여전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듯 표정이 좋지 않다.) ... 그래도, 타이머의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참 다행이에요. 저야 뭐... 아직 능력 출력조차 미숙한 단계기도 했고, 공인되지도 않았잖아요.
 
비올라 카지안:전혀 다행이지 않은걸…… (서글픈 낯으로 찻잔을 양손으로 감싼다.) 근시일 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꼭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비올라도 알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울 수는 없다는 걸. 그건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으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루이스 레너드:... 정 안될 것 같으면 '매일 5분씩 손잡고 있기' 같은 거라도 해 봐야 하려나요. 그것도 일단은 신체 접촉이니까요. (그러고도 안 되면, 이라고 생각하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지 말라던 하인리히 장교의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자신있어 한다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비올라 카지안:가까운 거리를 강조하셨으니, 조금은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 방으로 돌아가면 자기 전에 한 번 시도해볼까?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을 내려놓는다.) 그래요,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해 봐요. ... 돌아갈까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가자. (마지막 남은 차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루이스 레너드:(유독 말없이 걷는다. 보통은 비올라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먼저 말을 붙이곤 했는데, 오늘은 생각이 많은지 조용하다.)
 
비올라 카지안:(중간중간 루이스의 눈치를 살핀다. 차마 먼저 말을 붙이지는 못한 채로, 어느덧 두 사람의 숙소까지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조심스레 말 붙인다) 그럼 나, 먼저 씻고 올게……?
 
루이스 레너드:네, 다녀오세요. 전 책 좀 읽고 있을게요. (조용히 책을 챙겨 소파로 향한다.)
 
비올라 카지안:(샤워기의 물을 맞는 시간은 원래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어차는 때이긴 했지만, 오늘은 더욱더 상념들이 넘쳐난다. 많이 놀라고 힘들겠지. 장교님의 말은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돌아온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빨리 내 안에 들어찬 이질적인 능력이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평소보다 5분쯤 더 시간이 걸려서야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의 여남은 물을 털면서 나온다.) 나 머리 말릴게, 루이스. (드라이기 소리가 시끄러울 테니 미리 언질한다)
 
루이스 레너드:네. (짤막한 대답을 하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여러 생각이 맴돌아서 제대로 읽고 있는지는 본인도 잘 모르겠지만, 본인의 잘못도 아닌 일로 비올라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이 싫다. 차라리 신경을 쓰지 않게라도 해 줘야지.)
 
비올라 카지안:(거울 앞에 앉아서 드라이기를 켠다.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시선이 책을 읽는 루이스에게로 향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지금……)
(머리가 짧은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말리고 드라이기를 껐다. 그러자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 저, 루이스. 손 잡는 거 지금 해볼까……?
 
루이스 레너드:아,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선선히 손을 내밀고 시계를 본다.) 지금부터 5분, 카운트 셀게요.
 
비올라 카지안:응. 그럼……. (조심스럽게 루이스의 손을 맞잡는다.)
 
루이스 레너드:음... 5분 동안 뭐라도 좀 얘기할까요. 우리 둘 다 기분 전환 좀 하게, DOT랑은 관련 없는 주제로요.
 
비올라와 손을 맞잡자, 비올라에게 넘어간 능력이 아주 약하게나마 당신과 공명합니다.
 
지금이라면 비올라에게 넘어간 능력을 아주 약간은 빌려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원래 쓰던 방식은 아니지만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근데, 어때……? 뭔가 좀 달라지는 게 있어?
 
루이스 레너드:...... 네, 뭔가가... 아주 미약하지만 느껴지는 게 있어요. (약간 놀라며) 잘은 설명 못 하겠는데... 지금 이 상태로라면 능력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올라 카지안:어어? 정말? (눈 커진다) 능력이 네게 돌아간 건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일단 한 번 써볼래?
 
루이스 레너드: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리송하다는 듯한 말투로) 네, 일단 한 번 해 볼게요... 비올라, 덩굴 식물을 하나만 키워줄래요?
 
비올라 카지안:으, 응. 잠시만……! (씨앗을 하나 꺼내어 바닥에 내려두고, 덩굴류가 허리춤까지 자라나게끔 한다.)
 
루이스 레너드:(눈을 감고, 능력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한다. 덩굴을 떠올리며 오른쪽으로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덩굴이 아주 조금 오른쪽을 향해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덩굴에 간섭할 수 있었던 미약한 힘마저 사라지고 맙니다.
 
능력을 빌려올 수는 있지만 그 시간도 지나치게 짧은 것 같네요.
 
비올라 카지안:이제 더는 안 되는 거야……? (덩굴의 상태를 예의주시하며)
 
루이스 레너드:네, 아깐 됐는데... 지금은 연결이 끊긴 것처럼 다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미약하게나마 제 말을 들어준 식물을 살짝 건드려본다.)
 
비올라 카지안:나도, 넘어온 네 힘이 다시 돌아가는 건 느껴지지 않았어. 그래도 조금이나마 쓸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려나……?
일단은 한동안 매일 5분씩 잡고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게 낫겠지? 내일 다시 해보면 조금 차도가 있을지도 모르고.
 
루이스 레너드:이런 식으로나마 쓸 수 있다는 것에 일단 안도해야겠네요. 적어도... 완전히 흡수된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매일 해 보기로 해요. 확실히... 효과가 있네요. (조금이라도 길이 보이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
 
비올라 카지안:응……! (아까보다 루이스의 표정이 나아진 듯하여 안도한다. 장교님의 조언이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니 다행이야.)
 
하루, 이틀.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능력은 딱히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닌가? 어제보다 나아졌나? 싶으면 다시 한 움큼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루이스는 매일 꾸준히 5분씩 비올라와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을 가졌죠.
 
기분이나 마음, 당신의 능력 상태까지도 붙어있지 않을 때보다는 스킨십을 할 때 보다 더 안정적이었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감각이었을지언정!
 
시간이 흐릅니다. 꺾인 손가락의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는 바닥을 천천히 기어 다녔습니다.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가를 문득 깨달으면, 뱀의 비늘이 스치는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전부 기분 탓이겠죠.
 
일상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일어나고, 아침을 먹고,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시시껄렁한 시간을 죽이고, 농담을 따먹고, TV를 보거나, 훈련하는 평범한 하루의 반복입니다.
 
능력이 사라진 적 따위, 없었던 것처럼.
 
기다리는 것은 초조했지만,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축제를 이틀 앞둔 날,
 
똑똑.
 
손님은 그때 찾아왔습니다.
 
교실에 앉아서 교사를 기다리던 타이머와 카운터의 시선이 모두 앞문으로 쏠렸습니다.
 
수업을 위해 드나드는 이들은 노크하지 않았으므로, 상당히 낯선 소리가 아닐 수 없었어요.
 
문가에는……
 
리슬러 부관:안녕하십니까. 리슬러입니다.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하인리히 장교의 부관이 서 있었습니다.
 
타이머에게는 낯익고, 카운터에게는 낯선 남자였습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남자는 정장 차림새로 누런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뱀처럼 얇은 눈꼬리가 새로운 얼굴들을 훑곤,
 
리슬러 부관:아시겠지만, 건국 축제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리슬러 부관:도밍게즈 건국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타이머가 등장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능력을 선보여 시간이 건재함을 알리고, 세계가 평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맨십이죠.
실제로 이 시기면 타이머의 얼굴을 보겠다고 수도로 향하는 관광객의 수가 대폭 늘어나곤 합니다. 보여주기식이지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이벤트죠.
더군다나 이번에는 카운터…… (그 이름이 낯선 것마냥 느리게 발음한다) 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자리니 더욱 중요하게 다뤄질 겁니다. 예년보다 화려하게, 완벽하게, 차질 없이 준비되어야겠죠.
 
리슬러 부관은 서류 봉투를 뒤적이며 물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장교님께서도 기대가 크십니다. 능력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카운터……의 존재. 즉, 새로운 능력자의 등장입니다. 친밀하게, 다정하게, 모쪼록 완벽한 파트너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고 하시더군요. 서로간에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결국, 본론은 그거군요.
 
리슬러 부관:능력을 ‘함께’ 선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고 말입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함께’에 악센트를 강조했습니다.
 
비올라 카지안:(더럭 불안해진 낯으로 루이스를 돌아본다. 작게 소근거린다.) 축제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그때까지 능력이 돌아올까……?
 
루이스 레너드:(목소리를 낮추고) 뭐... 안 돼도 되게 해야죠. 정 안 된다면 비올라가 내 능력을 쓰는 척이라도... (... 과연 대중 앞에서 속일 수 있을 위인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인다.) 그냥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보여줘도 충분할 거예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라도 대죠, 뭐.
 
비올라 카지안:드, 들키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루이스가 능력을 쓰는 방식을 연습해야 하나……. (건국 축제의 중요성이 워낙 크기 때문인지 걱정이 가득한 낯으로도 고려하고 있다. 축제 무대에 올라가는 걸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으므로)
 
리슬러 부관:(두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아, 그리고 축제 때 일정이 정해졌습니다. 첫날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아침을 먹고 외출할 수 있을 거예요. 대신, 반드시 사복을 착용하고 타이머와 카운터는 동행한다는 조건입니다.
 
카운터의 존재가 발각되어선 안 된다며 DOT 지부 밖으론 한 걸음도 못 내밀게 했으면서. 상당히 파격적인 ‘허가’입니다.
 
축제이니만큼 어린 것들을 묶어두기가 안타까웠던 걸까요.
 
리슬러 부관:만약 누군가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이야기를 걸어도 되도록 답변하지 마십시오. 공식적인 발언은 언제나 DOT와 사전 협의 후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카운터에 대해서는 더더욱이요.
 
당부를 마친 리슬러 부관은 서류 봉투의 입구를 엽니다.
 
우르르, 안에서 쏟아지는 것은 팸플릿입니다.
 
리슬러 부관:저녁에는 전원 전시회에 참여할 겁니다.
 
전시회?
 
건국 축제와 전시회라니, 상당히 동떨어진, 그러니까, 개연성 없는 조합입니다.
 
웬 전시회냐고 묻는 우리에게, 리슬러 부관은 팸플릿을 나눠줍니다.
 
표지에는 타이머 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구원자에 미친 이 작은 행성은, 굿즈와 장난감,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기타 여러 창작물을 넘어서…… 이젠 전시회마저 열 모양입니다.
 
‘시간의 흐름과 세계의 섭리를 담았습니다.’
 
그럴싸한 홍보 문구는 지나치게 유치했습니다.
 
리슬러 부관:도밍게즈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타이머 전시회인 만큼 첫 번째로 관람하고, 이후 DOT로 복귀할 겁니다. 둘째 날은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세팅하고, 리허설에 참여하게 될 거예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첫째 날 실컷 쉬거나, 하고 싶은 걸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설명을 마친 리슬러 부관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리슬러 부관:무언가, 문제라던가, 할 이야기가 있나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에게 속닥거린다.) ... 능력을 못 쓸 때 어떻게 대비하냐고 물어볼까요? 사전 협의를 저렇게나 강조하시는데.
 
비올라 카지안:(고심하다가) 으응. 물어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고개 끄덕)(손을 들어올리고 말한다.) 질문이 있습니다, 부관님. 만일 축제 마지막 날 능력을 사용하지 못 하게 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리슬러 부관:그 말은 무슨 의미죠? (무심하게 묻는다)
 
루이스 레너드:음, 말 그대로입니다. 대중 앞에서 갑작스럽게 능력이 나오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타이머가 대신 능력을 사용해서 아닌 척 도와야 하나요.
 
리슬러 부관: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혀 대수롭지 않단 듯 대답하고) 추가적인 질문이 남았나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에게 어깨를 으쓱인다. 다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으로.) 없습니다.
 
리슬러 부관: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 남기고 미련없이 교실을 떠났습니다.
 
비올라 카지안:다들 확신하시네…… 걱정하는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멍하니 눈 깜박거린다)
 
루이스 레너드:걱정마세요, 여기 바보 하나 더 있으니까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지, 능력을 가진 건 우리인데 말이죠. 게다가 아무리 자신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방책은 세워둬야 할 텐데.
 
비올라 카지안:장교님과 부관님 말대로면 축제 전까지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달칵, 문이 닫히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커다랗게 울립니다.
 
수학 시간이에요. 수학 교사는 늘 종이 치면 움직이니까, 한 10분의 여유가 남았군요.
 
비올라 카지안:그래도 축제 때는 DOT 바깥에 나갈 수 있겠다, 루이스. 안에서만 지내느라 답답했을 것 같은데.
 
루이스 레너드:오랜만에 바깥 구경 하겠네요. 그렇지만... (약간 웃으며) 이정도 같이 지냈으니 아시겠지만 전 아웃도어보다는 인도어 파거든요.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답답하진 않았어요.
 
비올라 카지안:하긴…… 나랑 비슷한 유형이지. (외출 금지가 아니더라도 바깥에 잘 안 나가는 사람) 그래도 축제 땐 즐거울 거야. 전시회엔 뭐가 있을지도 좀 궁금하다. 타이머 전이라는 거 보면 우리와 관련된 내용일 것 같은데. 잘 짐작이 안 가는걸.
 
루이스 레너드:맞아요, 축제는 흔하지 않은 이벤트니까요. 전시회 내용은, 흠... (지금까지 타이머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여러 제작물을 떠올려보며) 타이머 개인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연표로 정리해서 만들어놓았다거나...?
 
비올라 카지안:헉, 설마 내 얘기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간 타이머가 얼마나 많았는데. 유명한 타이머들 몇몇만 그런 식으로 소개해줬음 좋겠다. (생각만 해도 싫은 듯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가고,
 
교사:늦어서 미안해요. 모두 자리에 앉았나요?
 
수학 교사가 뒤늦게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는 교탁에 프린트의 모서리를 툭툭 쳐서 정리하곤 수업을 시작합니다.
 
교사:오늘은 3단원을 할 차례였던가요?
 
루이스는 수학 수업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루이스 레너드:(좋아하는 편이죠. 방법만 올바르다면 명확하게 답이 나오는 정직한 학문이니까.)
 
좋습니다... 좋아하는 과목이니만큼 더욱 열심히 듣겠군요.
 
교사가 열성적으로 프린트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비올라는 점점 눈이 무거워지더니,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네요.
 
교사가 이쪽을 볼지도 모르니, 깨워줄까요?
 
루이스 레너드:(선생님께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선은 돌리지 않고 손만 움직여서 살짝 톡톡 침)
 
루이스가 비올라를 톡톡 두드리는 그때,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이능력 Roll
기준치: 0/0/0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따끔!
 
스파크가 튀더니 손목에 새겨진 시간의 각인이 화끈화끈 달아오릅니다.
 
그리고, 루이스를 떠나갔던 무언가가 다시금 루이스에게 돌아옵니다.
 
텅 비었던 어딘가가 가득 차는 것을 느낍니다.
 
비올라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놀란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봅니다.
 
착각이 아니에요.
 
방금, 정말로,
 
능력이 돌아왔습니다.
 
불을 끄는 것처럼, 그리고 불을 켜는 것처럼.
 
해가 지는 것처럼, 그리고 달이 뜨는 것처럼.
 
네가 ■■ ■ 것처럼, 그리고 내가 ■■■ 것처럼!
 
루이스, 초능력 기능치를 2만큼 회복합니다.
 
비올라 카지안:루이스? (깜짝 놀라서 저와 당신을 번갈아 본다) 어쩐지 지금 능력이……
 
루이스 레너드:(따끔했던 손목을 얼떨떨하게 어루만지다가, 당신을 바라본다.) ... 네, 돌아왔어요. 아주 미미하지만...
 
비올라 카지안:어떻게 된 거지? 네가 날 깨워주려고 하던 순간 돌아간 것 같은데.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속삭인다. 아까부터도 그랬지만, 이제 수업의 내용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졌다.)
 
루이스 레너드:... 이상한 일이네요. 접촉이 조건이라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던 건데... (역시 수업은 안중에서 사라졌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죠? 한 쪽의 의식 여부? 아니, 그런 거라면 능력이 사라졌을 때도 한 명은 의식이 없는 상태였어야...
 
비올라 카지안:의, 의식이 없을 정도로 졸진 않았지만. (얼굴 화끈거림) 정말 스킨십을 하는 게 맞는 선택이었던 걸까…… 왜 그간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손 잡아볼래?
 
루이스 레너드:(이 괴현상은 조건이 대체 뭔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약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민다.)
 
비올라 카지안:(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아본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지자, 다시금 각인이 화끈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능력이 루이스에게로 조금 흘러들어옵니다.
 
루이스, 초능력 기능치를 6만큼 회복합니다.
 
비올라 카지안:돌아갔지……? (이번에는 저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 안에서 불길하게 경계를 쌓고 있던 타인의 힘이 넘어가는 감각을.)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인다.) ... 방금 다른 가설을 세워 봤는데요, 접촉의 정도나 시간이 누적이 된 걸까요? 임계점을 넘어서 이젠 조금씩 돌아오는 거고요.
 
비올라 카지안:(일리있는 듯해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면 지금까지 꾸준한 시간을 갖길 잘했나 봐. 일단 수업이 끝나면 좀 더 제대로 얘기해볼까……? (교사의 목소리나 내용이 전혀 귀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괜히 집중하지 않는다고 혼나기라도 할까 봐 제안한다)
 
루이스 레너드:(일단은 고개 끄덕...)(그런다고 해서 수업에 집중이 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미 수업을 향한 집중력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되네요.
 
돌아온 것이 맞는지, 정말 사실인지 알고 싶고 확신하고 싶습니다.
 
비로소 완전하게 충족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존재의 가치를 증명받은 것처럼.
 
교사:그럼 오늘의 수업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점심 맛있게 드세요.
 
교사가 프린트물을 챙기고 교실의 문을 나섭니다.
 
루이스 레너드:(드물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비올라에게 나가자고 눈짓한다.)
 
비올라 카지안:(이날처럼 수업 중 시계를 많이 봤던 적은 없던 것 같다. 프린트를 후다닥 챙겨서 서둘러 일어나 루이스와 함께 교실을 나선다.)
 
루이스 레너드:(교실을 나와서는 목소리를 조금 높인다.) 어디로 가죠? 훈련실? 아니면 방?
 
비올라 카지안:훈련실로 가볼까? 능력을 직접 사용해보면서 얼마나 돌아왔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루이스 레너드:좋아요. 바로 가요. (고개 끄덕)
 
두 사람은 빈 훈련실 중 하나에 들어섭니다.
 
비올라 카지안:일단 다시 손을 잡아볼까……? 스킨십을 하면 되돌아오는 게 맞는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손을 내밀며) 지금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오늘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요.
 
비올라 카지안:네 말대로 임계점을 넘은 걸지도 모르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금 손을 맞잡는다.) 부관님은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하셨던 걸까……
 
루이스, 초능력 기능치를 3만큼 회복합니다.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당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그러게요... (황당한데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고... 복잡한 심경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럼, 양손을 다 잡아볼까요? 두 배로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비올라 카지안:뭐든, 일단 네 능력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정말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대쪽 손도 내민다. 능력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야.)
 
루이스 레너드:(손을 맞잡는다.)
 
1d30 굴려주세요!
 
루이스 레너드:
rolling 1d30
 
(
26
 
)
 
 
=
26
 
아 그렇지 이거지
 
루이스, 초능력 기능치를 26만큼 회복합니다.
 
루이스 레너드:(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아니, 회복하니 좋은데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이렇게 되니 결과적으로는 장교님과 부관님 말씀대로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 돼서... 약간 자존심 상하네요.
 
비올라 카지안:우리가 예언의 타이머나 카운터도 아니고, 미래를 알 수도 없는 노릇인걸. 갑자기 하루아침에 능력이 사라졌으니 걱정되고 놀라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이제는 확연하게 넘어가고 있다. 저의 것이 아닌 능력을 갖고 있던 며칠간 계속 마음이 불편했었다. 강한 능력을 갖고싶다 바라기는 했었지만 그게 제 파트너의 힘을 앗고 싶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고, 실제로 제 힘과는 상충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웬만큼 다 돌아간 것 같다, 그치? 조금만 더 잡고 있으면……
 
루이스 레너드:네, 이전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그럼... 평소처럼, 5분 정도만 잡고 있을까요?
 
비올라 카지안:(끄덕) 그러자. 완전히 되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이후로 손을 잡고 있는 시간 동안, 통로를 타고 넘어가듯 비올라 안의 힘이 루이스에게 타넘어갑니다.
 
평소처럼 손을 맞잡는 시간이 모두 흘렀을 때, 루이스의 힘은 다시 '완전하게' 차 있었습니다.
 
루이스, 초능력 기능치 8만큼 회복.
 
루이스 레너드:(5분이 흐르고, 능력이 온전히 돌아왔다는 감각이 느껴진다. 사라진 것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기뻐 미소지으며 비올라를 바라본다.) ... 이제 됐어요. 더는 문제 없어요.
 
비올라 카지안: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감격 어린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한 번 힘을 써볼래……? 혹시나 부족한 부분이 없진 않은지, 힘을 쓰는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만약 뭔가 달라진 점이 있으면 그것도 일단 보고해야할테니까요. (능력을 못 쓴지 얼마나 지났다고, 어떻게 힘을 운용하는지도 약간 잊어버린 것 같다. 기억을 되살려서, 이렇게... 하면.)
(덩굴을 생성하려고 시도한다.)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이능력 Roll
기준치: 45/22/9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능력이 없어졌던 시간 동안, 그간 능력을 썼던 방식을 잠시 잊어버렸나 봅니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는 게 다소 어렵네요.
 
다행히도, 당신이 힘을 끌어내어 쓰는 근본적인 방식 자체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닌 듯합니다.
 
루이스 레너드:... 조금 헷갈리는데, 좀 도와줄래요? 비올라가 덩굴을 만들면 제가 움직여 볼게요.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이게 좀 더 쉬울 것 같아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물론이지. (얼른 씨앗을 꺼내어 바닥에서부터 덩굴식물을 자라나게끔 한다.)
 
루이스 레너드:(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해서... 능력을 사용한다.)
이능력 Roll
기준치: 45/22/9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번에는 의도대로 능숙하게 덩굴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여 연습하고 훈련하다 보면 감각을 완전히 되찾을 것 같네요!
 
루이스 레너드:(뜻대로 움직이는 덩굴을 보고 이전의 감각을 다시 떠올린다. 그래, 이런 식으로 집중해서 움직이면 됐었지...) 다행이에요,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문제라서. 하아... (긴장이 풀렸는지 몸에 힘을 빼고 덩굴 옆에 쭈그려 앉는다.)
 
비올라 카지안:(조마조마하게 지켜보다가 덩굴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는 걸 보고 제 양손을 맞잡으며 안심한다) 곧 적응할 수 있을 거야.
능력이 돌아왔으니, 건국 축제 무대를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도 이야기해 봐야겠는걸.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나는 매해 무대에 섰었는데, 이전에는 미리 씨앗을 무대에 깔아두고, 빠른 시간 내로 차례차례 씨앗을 띄워서 꽃밭처럼 만든 적이 있었어. 무대 아래에 나무를 만들어내기도 했었고.
 
루이스 레너드:제가 가능한 범위는... (손가락을 꼽으며) 덩굴 식물을 움직이게 하고, 또 만들어내는 거죠. 식물을 생성해내는 능력은 우리 둘이 겹치는데다, 비올라가 저보다 훨씬 능숙할테니까... 만드는 건 비올라 담당, 그걸 움직이는 건 제 담당. 어때요?
물론 그냥 움직이기만 한다면 임팩트가 덜 할테니... 공연처럼 해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덩굴을 움직여 뭔갈 옮긴다거나.
 
비올라 카지안: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러면…… 일단은 무대를 채울 수 있게 여러 들꽃들을 피우고 마지막으로 덩굴을 만들게. 그럼 네가 덩굴을 움직여서…… 꽃들을 훑어서 관객석에 뿌려주는 건 어떠려나?
 
루이스 레너드: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축복한다는 의미로... 아, 그럼 축복과 관련한 꽃말을 가진 꽃을 뿌려주는 건 어때요? 꼭 축복이 아니더라도 행복이나 평안, 기쁨. 긍정적인 단어가 들어가는 거라면 뭐든 좋을 것 같은데.
 
비올라 카지안:너무 좋은걸. 나 혼자였더라면 이런 무대는 보여주지 못했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그 광경이 아름다울 듯하여,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가슴이 설레어온다.) 좋은 꽃말을 가진 꽃의 씨앗들을 미리 준비해둬야겠다. 큰 훈련실에서 몇 번 실전처럼 연습해보는 건 어때?
 
루이스 레너드:좋아요. 호흡이 잘 맞지 않으면... 꽃을 패대기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비장한 표정으로...) 오늘부터 매일 연습하는 걸로 해요. ... 아, 그 전에... 점심부터 먹는 게 어때요?... (고개를 슬쩍 들며...) 식사하면서... 마저 이야기하죠!
 
비올라 카지안: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네.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던 문제 여럿이 해결되어서일까. 공복이 그제야 확연히 느껴진다. 한결 밝아진 낯으로 고개 끄덕였다.) 응, 식당으로 가자.
 
하나의 중요한 대사건을 해결하고, 이제는 축제의 무대를 꾸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앞일을 상의할 시간입니다.
 
구체적인 과정을 상의하고, 훈련실을 빌려 능력을 연습하고, 피드백을 나누며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축제의 전야.
 
매해 봄의 가운데, 4월 19일이면 도밍게즈의 건국 축제가 열립니다.
 
이튿날 동안 사람들은 꽃을 달고, 등을 띄우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냅니다.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지독하게 깨끗한 하늘 위로, 매달릴 곳을 잃은 우산이 홀로 떠다닙니다. 창 너머가 왁자지껄합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건물 사이 엮인 긴 줄마다 색색의 것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깃발, 손수건, 우산…… 다 나름의 소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장막을 비유하는 깃발.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손수건. 날씨가 맑기를 기원하며 활짝 펴둔 우산.
 
건국 축제가 끝날 때까지 화창하기를 비는 거예요.
 
정말로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도 날은 화창합니다.
 
비올라 카지안:드디어 축제날이네……! (전날부터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여 있어서인지, 오늘은 아침잠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눈을 뜬다.) 잘 잤어, 루이스?
 
루이스 레너드:네, 축제를 즐기려면 충분히 쉬어 둬야죠. 푹 잤어요. 오늘은 제가 깨우지 않아도 일어난 걸 보면 많이 기대했나봐요. (살짝 웃으며) 아참. 깃발이랑 손수건, 우산은 미리 다 챙겼어요? 어제는 그냥 잠들어버린 것 같았는데.
 
비올라 카지안:(옅은 초록색 바탕에 하얀 잔꽃무늬가 박힌 원피스와 노란색 장식으로 맞춘 팔찌와 귀걸이로 나름 멋을 냈다. 악세사리들은 그가 매일 아침 시청하는 TV 프로그램 '오늘의 운세'에서 추천한 색상이다) 축제니까 기대될 수밖에 없어서…… (약간 머쓱해하며 미소한다) 아, 아직. 우산은 옥상에 펴놓고 오면 될 것 같고, 깃발이랑 손수건은 지금 챙길게……! (후다닥 움직여 깃발과 손수건을 챙긴다)
 
루이스 레너드:(검정에 가까운 남색 슬랙스, 그리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흰색 반오픈 셔츠를 입었다. 장신구는 잘 착용하지 않는 주의지만 축제기도 하고 기념하는 상징물도 있겠다, 손수건 하나를 팔찌처럼 손목에 감았다. 물론 각인이 새겨진 쪽에. 첫 날은 들키면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천천히 하세요. 아직 시간 넉넉해서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시계를 가리키며)
 
비올라 카지안:으응. 그래도, 아침 먹고 얼른 나가고 싶어서. 저녁엔 돌아와야 하니까 많이 돌아다녀두고 싶거든. (서랍 앞에서 무릎 꿇고 고심하다가 산뜻한 하늘색의 손수건을 고른다. 깃발도 챙겨서 핸드백에 넣어둔다) 됐다…… 이만 식당으로 갈까?
 
루이스 레너드:네, 전 준비 다 됐어요. 아침먹고 기운차게 출발해보자고요.
 
식당으로 내려가면, 축제 때문일까요? 가벼운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치아바타와 세 종류의 치즈, 구운 햄, 부드러운 스크램블드에그.
 
우유와 시리얼은 상비되어 있으니 배가 고프다면 그릇에 따라 먹으면 됩니다.
 
오늘의 아침 주스는 사과와 케일, 당근을 갈아 넣은 건강 주스입니다.
 
루이스 레너드:(모든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담는다. 시리얼 한 그릇, 치즈와 햄을 얹은 치아바타, 스크램블드에그를 한 손에, 다른 한 손에는 주스를 들고 자리로 돌아간다.)
 
비올라 카지안:(간단하게 먹을 생각인지 시리얼 그릇에 우유를 적당히 담고 스크램블드에그만 챙겨온다. 냠냠 먹으면서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았다.) 다른 타이머들은 대부분 모자나 선글라스를 썼네. 하긴, 워낙 유명하니까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하지. 이런 면에서는 편한 것 같아. 난 워낙 존재감이 없으니까……
 
루이스 레너드:흠...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텐데. 아, 물론... 알아서 잘 하시는 걸 알지만, 세상에는 타이머 오타쿠... 라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꼭 그렇지 않더라도 저처럼 타이머의 우상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케레스가 더 익숙해요.
 
비올라 카지안:아, 그러엄. 나도 안경 정도는 준비했어. (핸드백 안에서 꼬작꼬작 안경 케이스 꺼낸다) 근데…… 타이머 오타쿠……? 그게 뭐지…… (이런 쪽의 문화는 전혀. 아무것도. 1도 모르는 사람)
그나저나 루이스는 그럼 이전에도 나를 알고 있었어? 아, 알고 있었냐는 말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루이스 레너드:(오타쿠... 라는 것의 개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 음... 그러니까, 타이머를 병적으로 좋아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니까요.
어... 네, 그렇죠? 일단 기본적으로 모든 타이머의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중 케레스의 소식을 중점으로 찾아보곤 했어요.
 
비올라 카지안:그, 그런 사람들도 있구나. (잘 상상이 가지 않음) 선물이나 편지를 산더미처럼 받는 타이머들도 많으니까. 가끔 인기가 과해서 힘들어하는 타이머도 봤는데…… 네가 말한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겠네. 나 같은 유명하지 않은 타이머한테도 그런 사람이 붙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기는 할게.
내, 내, 내 소식을 중점으로? (평소에는 민간인과 사적인 대화를 할 일이 없으니, 자신에 대해 알아본다던가 하는 말이 유달리 생소하고 신기하게 들린다. 타이머들을 꼽을 때 케레스의 이름이 심심찮게 빠진다는 점은 비올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난 능력이 화려하지도, 외모가 특출나거나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닌데……. 대중을 휘어잡을 힘이 부족하잖아. 늘 그러셨거든, 장교님이. 좀 부끄럽지만, 기쁘기도 하네.
 
루이스 레너드:아무래도, 저는 본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 중 하나라서요. 구원자 이미지로서의 타이머는 중요하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제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통계 분석을 보면... 케레스의 구조 성공률이 가장 높더라고요. 그건 비올라가 화려함보다는 본질을 추구했다는 의미겠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비올라가 구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비올라가 그 누구보다도 멋진 타이머이지 않겠어요?
 
비올라 카지안:(파도처럼 몰려오는 감동에 스크램블드에그를 입에 넣으려다 말고 천장 올려다본다. 자신이 묵묵히 해왔던 일을 누군가는 알아주고 있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지금껏 자신이 받아온 부정적인 평가와 힘든 시간들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루이스. 그렇게 말해줘서……. 나는 사람들을 이끌거나 '멋진' 언행을 보여주는 건 못하지만, 내가 가진 힘으로 구해낼 수는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되뇌면서 버텨왔거든. 내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
 
루이스 레너드:(웃으며 빵을 집어든다.) 전 그냥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실제로 일을 행한 건 비올라, 당신 본인이니까요. 그으러니까, ... 저희 곧 놀러나갈 건데, 울면 안 돼요. 아침 마저 드세요!
 
비올라 카지안:으응. 울면 안 되지……. (눈 꾹 감았다가 손부채질하면서 울컥했던 감정 가라앉히려 한다. 시리얼도 스크램블드에그도 다시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 아침부터 반듯한 차림새의 리슬러 부관이 식당에 들어옵니다.
 
리슬러 부관:모두들, 오늘 나가볼 예정이십니까?
 
타이머와 카운터들이 외출할지, 외출하지 않을지 확인하러 온 모양입니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 한 번 보고...) 네, 3시 페어 외출할 예정입니다.
 
비올라 카지안:(이미 옷부터가 완전 외출복임)
 
모처럼의 외출입니다. 게다가, 건국 축제는 매년 한 번밖에 돌아오지 않아요.
 
리슬러 부관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당부합니다.
 
리슬러 부관:잊지 마세요. 군들은 타이머와 카운터고, 세계의 구원자지만, 동시에 개인입니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이에요. 개인적인 행동을 할 때마저 ‘구원자처럼’ 굴 필요는 없습니다.
 
타이머가 어딘가를 나갈 때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따라오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담을 갖지 말라는 건지, 오히려 부담을 갖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저의가 헷갈릴 정도로 집요한 충고였지만, 그는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타이머가 본인이 개인임을 이해하고, 행동해야 사회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을요.
 
세계의 구원자라며 추켜 올리는 하인리히 장교의 언행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행보였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그래, 그래. 내 훌륭한 부관께서 그렇다 하시는군.
 
하인리히 장교는 말리는 대신 싱거운 농담이나 덧붙일 뿐이었지만요.
 
부관이 다시금 묻습니다.
 
리슬러 부관:누군가 바깥에서, 군들에게 무언갈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거죠?
 
어깨를 반듯하게 편 리슬러 부관이 두 사람을 내려다 봅니다. 상당히 고지식한 얼굴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음...... 정중히 거절하고 자리를 빨리 피해야죠.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뭐가 되었든...)
 
비올라 카지안:침묵하고 무시로 일관할 것, 어떤 이야깃거리도 흘리지 말 것,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 입니다. (이미 지겹도록 들어온 말인지 줄줄이 대답한다.)
 
정말 우리를 위한 조언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문제가 될 상황에서 ‘그것은 타이머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발을 빼기 위한 수작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리슬러 부관이라면 후자를 의도했을 것 같단 의심이 들지만……
 
그래도 상관없죠. 나가서까지 체통을 지키라고 요구받는 것보단 낫잖아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별다른 동경도, 애정도, 호의와 영광, 감사마저도 깃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좋아했고, 싫어했고, 편히 여겼고,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했는지, 그가 작은 종이를 내밉니다. ‘외출증’입니다.
 
비올라 카지안: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받으면서 개미만하게 감사인사한다.)
다 먹었으면 출발할까, 루이스? (장교님과 부관 앞에선 눈치를 보게 되지만, 그래도 바깥에 나가고픈 설레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다……!)
 
루이스 레너드:(눈치보는 비올라와 달리 이쪽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어차피 지킬 규율이니 뭐라고 압박을 하든 관계 없다는 태도.) 네, 전 다 먹었어요. 출발해요!
 
비올라 카지안:(외출증을 잘 챙기고 걸음을 내딛는다. 금세 기분이 환기되고 내딛는 발이 절로 가벼워졌다.)
 
경비실에 외출증을 제출하고, DOT의 정문을 나서, 긴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수도 외곽이기 때문에 축제가 열리는 중심지까지 가려면 약 20분을 걸어야 합니다.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화한 향기가 밀려듭니다. 때 이른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밴 탓입니다.
 
아파트 베란다며 학교의 창문마다 수놓은 새파란 장미가 시선을 훔칩니다.
 
누군가 장미 다발을 한 아름 안고 지나가면, 미처 챙기지 못한 눈물처럼 꽃잎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마주친 몇몇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심의 풍경은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건물 사이로 엮은 긴 줄마다 색색의 깃발, 손수건, 혹은 우산 따위가 걸려 화려하게 하늘을 수 놓습니다.
 
도밍게즈의 국화인 새파란 장미가 창틀과 문지방마다 걸려 있고, 꽤 많은 사람이 품에 안고 있기도 합니다.
 
늘 이맘때쯤이면 날씨가 좋아요. 하늘은 깨끗하고, 바람은 살랑이고, 때 이른 장미 향기가 향긋합니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에게 흰 리본을 묶은 새파란 장미라던가, 풍선을 선물 받을 거예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광장]과 [골목], [공원]으로 흩어집니다.
 
루이스 레너드:(즐거움이 가득한 거리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행복은 전염이 되어서, 누군가 웃고 있으면 나도 함께 웃게 된다. 기분이 좋지 못할 때조차 그런데, 기분이 좋은 지금은 더욱이나!) 어디부터 가 볼까요? 광장에 볼 거리가 가장 많을 것 같긴 한데. 먼저 들러보고 싶은 곳 있으신가요?
 
비올라 카지안:(보통은 언제나 DOT 소속임을 나타내는 군복을 입고 있으니, 타이머 사이에서의 존재감 여부와 상관없이 어딜 가도 시선이 쏠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경을 쓴데다 산뜻하고 평범한 사복을 입어서인지 그 누구도 제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건국 축제처럼 사람이 많은 때에 이런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건 정말이지 드문 경우다. 약간 감격하기까지 하면서 축제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바삐 담았다.) 나야 DOT에 지내면서 매년 축제 구경을 왔으니, 수도의 모습은 익숙해. 루이스는 4구역에 자주 와봤어?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도 상관없어.
 
루이스 레너드:자주 오진 못 했어요. 어쩐지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럼... 오늘은 제가 앞장설게요. (씩 웃는다.) 광장에 먼저 가 봐요. 기념품같은 걸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비올라 카지안:(고개 한 번 끄덕거리곤 루이스와 함께 광장으로 향한다.) 축제날은 모두들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이니까 특히 더 좋은 것 같아. 난 행사에 많이 가지 않으니까, 주로 보는 게 재해나 사고에서 다쳐서 힘들어하는 표정이거든.
 
흰 돌이 깔린 광장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시계탑 분수가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사고가 터진 게 아니라면 DOT에서 나갈 일이 거의 없을테고, 대외 행사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니... (고통이 가득한 현장만 눈에 담았을 비올라가 어쩐지 안쓰러워진다.) ... 그럼 이 기회에 잔뜩 즐겨둬야겠네요. (시계탑을 가리키며) 아, 저길 보세요. 멋있는 시계탑이네요.
 
비올라 카지안:DOT 바깥에 나가는 게 금지되어있는 건 아니지만, 나간다고 해도 카페 같은 데서 몇 시간 죽치고 있기만 하니까. 그래도 축제 날에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날이지. (시계탑 역시 익숙한 전경이지만 축제라는 전제 때문인지 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시계탑은 분침과 초침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침만 존재합니다.
 
타이머의 존재를 기념하는 시계입니다. 정각이 될 때마다 긴 종소리가 울립니다.
 
루이스 레너드:오... (정각까지 얼마나 남았나 계산해보려고 손목을 보니... 오늘은 안타깝게도 시계 대신 손수건을 차고 왔다.) 종소리 울리는 걸 듣고 싶은데, 혹시 얼마 남았는지 아세요? (손목을 들어 올리며) 시계를 두고 왔네요.
 
비올라 카지안:잠깐만. (핸드폰 꺼내본다) 10분쯤 남았어. 분수대에 앉아서 기다릴까?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날이 좋아서 햇빛 쬐며 기다리면 금방일 거예요.
 
커다랗고 깨끗한 분수대에서는 끊임없이 맑은 물이 쏟아져내립니다.
 
분수에 새파란 장미의 목을 꺾어 던지며 어떤 소원을 비는 것은 도밍게즈의 흔한 의식입니다.
 
분수대로 다가가는 두 사람에게, 장미꽃을 품안에 가득 든 어떤 사람이 다가와 꽃을 내미네요.
 
도밍게즈의 국화인 파란 장미입니다.
 
"즐거운 축제입니다! 한 송이씩 받아가요!"
 
광장에는 장미를 파는 사람과 가족 나들이, 데이트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루이스 레너드:감사합니다. 즐거운 축제 보내세요. (웃으며 꽃을 받아든다. 한 송이를 비올라에게 건네준다.) 장미로 소원을 비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아주 어렸을 때나 했었고, 조금 큰 뒤로는 잘 안 하게 됐거든요.
 
비올라 카지안:감사합니다. (마주 인사하고 루이스에게 꽃을 받았다.) 나는 축제 때 매년 해왔어. 이루어진 적은 없긴 해도…… 그래도 소원을 비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푸른색 꽃잎을 손끝으로 조심히 쓸어보았다. 이내 무지개를 반사하는 맑은 분수에 장미의 목을 꺾어 던지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루이스 레너드:(무슨 소원을 빌지... 장미를 한 손에 들고 뱅글 돌려본다. 소원을 비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눈을 뜬 비올라에게 질문한다.) 어떤 소원을 빌었어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전... 도무지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힌트라도 좀 얻어볼까 하는데.
 
비올라 카지안:(부끄러운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한다.) 올해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적어지기를…… 이라고. 꼬, 꼭 나처럼 거창한 걸 할 필요는 없으니까.
 
루이스 레너드:아하하... (무슨 말을 하길래 머뭇거리나, 생각하다 소원을 듣고 웃어버린다. ... 소원도 꼭 타이머 케레스다운 걸 빌었다는 생각을 한다.) 좋네요, 그런 소원. 제가 크면서 소원을 빌지 않게 된 이유는요...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면, 내가 노력해서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나와 관련된 소원이 아니라면... 그래요. 확실히 소원이 필요한 영역이겠네요. 참고가 됐어요. 고마워요.
(웃으며 장미를 꺾어 던지고 두 눈을 감는다. 타이머와 카운터가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처럼, 우리의 노력이 성장하여 결실을 맺기를. )
 
비올라 카지안:나는 항상 소원으로는 내 힘으로 절대 못 이루겠다 싶은 걸 빌었거든. 루이스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새로운 시각인걸. (떨어진 장미가 물 위에서 둥둥 떠다닌다. 푸른 물과 푸른 꽃잎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한참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는 무슨 소원 빌었는지…… 물어봐도 돼?
 
루이스 레너드:비슷한 거요. 우리가 앞으로 잘 해낼 수 있길 빌었어요. 세계를 위해서... (수면 위의 푸른 장미를 바라보며 소원을 되새긴다. '장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둘씩에게나 빌었으니 해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올라 카지안:해낼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열넷 아닌 스물여덟이니까. (그리고 루이스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성격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는 분명 멸망의 위기를 막아낼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인품은 비올라에게 믿음과 함께 묘한 확신을 갖게끔 한다.)
 
장미꽃을 던지고, 분수대에 잠깐 앉아 있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흐릅니다.
 
시계탑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립니다.
 
묵직하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율이 길게 울려퍼졌습니다.
 
타이머를 기념하듯 종소리는 열네 번 울렸다가 멈춥니다.
 
언젠가는 스물 여덟 번으로 바뀌게 될까요?
 
루이스 레너드:(눈을 살짝 감고 창공에 울려퍼지는 열네 번의 종소리를 고요히 감상한다. 종소리가 끝나자 눈을 뜨고 광장의 풍경을 감상한다.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분수에 소원을 비는 연인들, 축제 분위기에 젖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 그래, 비록 종소리에는 아직 포함되지 않았을지라도...
무언의 결심을 마음속으로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살짝 턴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 볼까요? 저 골목 사이로 들어가면 신기한 게 있을 것 같아요.
 
비올라 카지안:(익숙하게 들어온 종소리가 오늘따라 가슴에 보다 큰 울림을 남긴다. 세차게 흐르는 분수의 작은 물줄기에 손가락을 대어본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시원한 촉감을 느끼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아마 맛있는 냄새의 근원지가 아니려나?
 
수도의 골목 곳곳에는 노점상이 열렸습니다. 온갖 축제 음식이란 음식은 다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종류의 소스를 바른 꼬치구이라거나, 과일을 정교한 모양으로 깎아 설탕물을 입힌 사탕,
 
바람에 흔들리는 색색의 솜사탕, 캐러멜을 입혀 튀겨낸 과자들.
 
수도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전부 가게를 접고 노점을 냅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념품이나 액세서리, 수공예품을 팔기도 합니다.
 
가장 인기인 것은 이번 세대의 타이머를 본떠 만든 봉제 인형이에요.
 
물론, 비올라의 인형도 놓여 있습니다!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특성 탓인지 머리색이 미묘하게 더 푸른빛을 띄기는 하지만, 트레이드마크인 장신구들이나 한쪽으로 땋은 머리가 잘 구현되어 있네요.
 
골목은 내내 시끌벅적하고, 맛있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루이스 레너드:우와...... 어, (군침이 돌게 하는 음식 향에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다가, 비올라 봉제 인형을 발견했다. 신기한듯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린다.) ... 사가실래요? 되게 잘 만들었는데.
 
비올라 카지안:(내 예상이 맞았네, 란 표정으로 곳곳에 가득한 간식거리들을 구경한다. 워낙 기름기가 줄줄 흐르고 색이 휘황찬란하다 보니 보기만 해도 배불러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눈에 띄는 타이머들의 봉제인형…… 반사적으로 제 것도 있는지 찾아보다가 눈이 동그래진다.) 내 인형도 있구나……. 솔직히 없을 줄 알았어. (신기해하며 인형을 조심스레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땋은 머리까지 구현해두다니……. 그, 근데 내가 내 인형을 사기는 좀. 다른 타이머들 것만 사서 선물해줘야겠다. (정작 자기 건 쏙 빼고 남은 모든 시간대의 타이머들 인형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루이스 레너드:그렇게만 사 가면 케레스 인형이 외로울텐데요. (웃으면서 비올라 인형을 집어든다.) 그럼... 이건 제가 살게요. 문제 해결이죠?
 
비올라 카지안:(루이스의 손에 들린 제 인형을 머쓱하게 바라본다.) 사실 있어도 아무도 안 살 것 같아서…… 나중에 네 인형도 나오면 같이 사서 둬야겠다. 그럼 정말로 외롭지 않겠지? 루이스 인형은 어떤 식으로 나오려나. 머리를 묶은 모습일지 푼 모습일지 궁금해. 개인적으론 어떤 게 더 좋아?
 
루이스 레너드:흠... 푼 쪽이요. 활동적인 일을 할 때만 머리를 묶어서, 지금 이 상태가 기본이거든요. 그리고 상품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긴 머리가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법 자세하게 구현된 인형들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비올라 카지안:그렇구나. 이 인형도 나중엔 두 배로 숫자가 늘겠네. (이내 다른 손님들이 우루루 와서 인형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불편해졌는지 쭈뼛쭈뼛 뒤로 물러선다.) 이제 인형도 샀으니까…… 뭐라도 먹으러 갈까? 되게 많아 보이는데. 저 중에 좋아하는 거 있어? 난 저 과일 사탕이 궁금한걸.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음, 저는... 솜사탕요. 축제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간식이잖아요. (즐비한 노점상을 바라보다가) 아, 모든 간식을 종류별로 조금씩 사서 공원에서 먹는 건 어때요? 꼭 소풍온 것처럼요.
 
비올라 카지안:좋은 생각이다……! 그러자. (아침을 먹은 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원래 식사 배와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 솜사탕도, 과일 사탕도, 꼬치도, 계란빵이나 과자들도 조금씩 전부 산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루이스 레너드:둘이 먹기엔 충분해 보여요. (고개 끄덕) 짐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음식은 먹어서 없앨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비올라 카지안:축제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양손에 짐이 가득하게 되더라구. (벌써 인형 가방이나 음식들로 양손이 꽉 찼다. 그래도 즐겁기만 했다. 함께 공원으로 향한다)
 
광장에서 조금 걸으면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나옵니다.
 
꽃과 나무를 잘 가다듬어 조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공원의 한편에 설치된 파란 장미로 장식한 아치 모양의 터널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어요.
 
조건은 반드시, 손을 잡고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원 곳곳에 앉기 좋은 벤치가 있고, 잔디밭에는 돗자리를 깔고 춘정을 즐기는 이들도 여럿 보입니다.
 
공원 구석에는 낡은 [교회]가 남아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공원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적당한 벤치를 발견한다. 묻은 것 없이 깨끗하고, 위치도 괜찮고... '비올라, 여기 앉아요.'라고 말하려던 순간... 여기서 이름을 말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에 말을 멈춘다.) ... 여기 앉죠!
 
비올라 카지안:(앞의 짧은 침묵에 약간 긴가민가하면서도 벤치에 앉는다.) 맛있겠다, 그치?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공원도 더 예쁘게 보이네. 저기 봐. 꽃들도 가득해. (식물 타이머 아니랄까봐 온갖 식물들에 절로 눈이 간다)
 
루이스 레너드:그러네요, 봄답고 좋아요. 저는 평소에 식물에 큰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젠 조금씩 눈에 들어오곤 하더라고요. (솜사탕을 하나 손에 든다. 꽃이랑 색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한 입 베어문다. 냠냠...)
 
비올라 카지안:(아까부터 관심이 갔던 과일 꼬치 냠 먹는다. 날은 좋고, 풍경도 아름답고, 맛있는 간식까지 먹고 있으니 더없이 평안하고 즐겁다. 비올라는 평소, 소심한 성격에 타이머의 책임감과 과중함까지 더해 항상 불안하면서도 어두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의무를 모두 잊은 지금은 제 나잇대 소녀처럼 밝고 들떠 보였다.) 나는 원래도 식물엔 관심이 많았어. 아마 타이머가 되지 않았더라면 부모님을 따라서 약학 계열로 들어가지 않았으려나 싶네.
 
루이스 레너드:약사가 된 비올라라... (어둡고 신비로운 기운이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약재를 저울에 달아보고 있는 비올라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것도 멋졌을 것 같은데요? 사람을 구하고 돕는다는 점에서는 지금 일과 비슷하기도 하고요.
저는, 음... 명확하게 무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막연히 형을 따라가거나, 혹은... 법학을 전공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할 일이 생겼다는 점에서 본다면 지금 이 생활도 나쁘진 않지만요.
 
비올라 카지안:그래? 미처 그쪽으론 생각을 못 해봤네. 하긴, 약학은 결국 아픈 대상을 위하는 분야니까. 어떤 길로 가더라도…… 사람들을 위해 일했겠구나. (옅게 미소를 띈다. 그는 스스로에게 사람들을 구할 자격이 있는지 몇번이고 몇백 번이고 되물으며 채찍질해 왔지만, 타이머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법학이라니 대단하다. 약학도 어렵기야 하겠지만 법학은 외울 게 엄청 많잖아. 역시 머리가 좋구나. 네 능력도 다양하게 접근해서 금방 여러 가지로 응용해낼 것 같은데? 나도 많이 도와줘. 타인의 시각에서 보면 도움이 되는 점도 많잖아.
 
루이스 레너드:(씩 웃으며)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돕는 건... 당연한 거죠. (손가락으로 3을 만들며 하나씩 꼽는다.) 첫째로, 우리는 같은 능력이니 비슷한 걸 공유할 가능성이 있죠. 둘째,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았을 때... 하나의 성장이 다른 하나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요. 유일한 결점이라 하면... 스킨십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파트너잖아요. 언제나 기쁘게 도울 거예요.
 
비올라 카지안:(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하는 루이스를 바라보자면 울컥할 때처럼 감격스러움이 일렁인다.) 내가 어쩌다 루이스 같은 파트너를 만나게 된 걸까? 나한테는 너무 과분하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저야말로 영광인걸요. 아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운데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저는... 식물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그간 여가 시간에 틈틈이 식물도감 보고 공부했던 걸 떠올리며...) 진짜로 도움이 많이 돼요. 그러니까, 음... 친절한 말하는 도감! 같아요. (... 칭찬인가?! 비올라가 또 울먹일까봐 다급하게 칭찬을 해 보았는데, ... 뭔가... 이상하다.)
 
비올라 카지안:정말? 나, 도움이 되고 있어……? (울먹이기 직전까지 갔다가 루이스의 다급한 칭찬에 조금씩 추스른다. 이내 입가 가리면서 픽 웃어버린다.) 친절한 말하는 도감이라니, 그건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네. 나도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범위 내라면 언제든 알려줄 수 있으니까. (루이스를 만난 이후로 덩굴식물과 관련한 책도 여러 권 빌려 읽고 있다.)
 
루이스 레너드:(휴우... 한숨 돌렸다) 앞으로도 많이 의지할테니까요. 그러니 새삼, 다시 잘 부탁드립니다. (꼬치구이를 하나 건네준다.)
 
비올라 카지안:응, 자꾸 이런 분위기로 만들어서 미안. (바보처럼 웃으면서 꼬치구이 받고 계란빵 하나 건네준다. 역시 아직도, 누군가 자신에게 기댄다던가 의지한다던가 하는 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케레스인 자신을 알아봐주는 루이스 덕분에, 내가 지금껏 타이머로서 보내온 나날의 보람을 얻게 돼.)
 
루이스 레너드:(피식 웃으며 계란빵을 받는다.) 뭐어, ...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 것 같으니까요. 이미 적응했어요.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게 싫지도 않고요? (빵 냠냠 먹으며)
 
비올라 카지안:(앞으로도 많을 것 같단 말에 괜히 가슴이 콕콕 찔린다. 제 낮은 자존감이 하루이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비올라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개선하도록 노, 노력은 해볼게. (먼산 보면서 솜사탕도 하나 먹는다. 어느덧 가득했던 먹거리가 점차 비워져간다)
 
루이스 레너드:(마지막으로 남은 과자 하나를 입에 털어넣는다. 아침도 먹고 간식까지 먹었더니 배가 과하게 부른데... 산책이라도 좀 할까, 공원 정경을 둘러보다 구석의 교회를 발견한다.)
교회가... 있네요? (신기하다는 듯)
 
비올라 카지안:저긴 이제는 안 쓰는 곳이라고 들었어. 그래도 종종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더라.
 
루이스 레너드:그렇군요...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직접 보니 신기하네요. 비올라는 가본 적 있나요?
 
비올라 카지안: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나 안정을 찾고 싶을 때 종종 가고는 해. 신의 존재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댈 대상이 있으면 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니까.
루이스만 괜찮으면 잠깐 들릴까? 축제라는 특별한 날이니 짧게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루이스 레너드:네,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저도 옆에서 비올라를 따라해볼게요. 색다른 체험이라 재미있겠네요.
 
두 사람은 교회 안으로 들어섭니다.
 
비올라의 말대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떨어지는 색색의 빛은 꽤 장관입니다.
 
먼지 냄새가 묻어나지만, 기도를 올리는 데 장소는 중요치 않죠.
 
비올라 카지안:(구석진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소원을 빌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루이스 레너드:(교회의 여기저기를 구경한다. 먼지때문에 흐려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의자, 누군가의 염원으로 가득했을 공간의 고요함을 온몸으로 느껴보다가 비올라의 자리 근처에 앉는다. 초월적인 존재를 신실하게 믿기보다는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는 편이었지만, 공간이 공간이니만큼 오늘 하루 정도 신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두 손을 다리 위에 내려 가지런히 포개고, 눈을 감는다.)
 
루이스,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리로 오세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선 ■■■■ 해요…….”
 
어쩐지 애절한 목소리가 루이스에게 속삭입니다.
 
루이스 레너드:(감은 눈을 뜨고 두리번거린다. ... 뭐지?)
(옆의 비올라를 본다. 나만 이런 이상한 소리를 들은건가?)
 
비올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의 성격이라면 무언갈 들었을 때 이렇게 조용할 리 없는데……
 
루이스 레너드:(들었으면 분명 토끼눈을 하고 놀라서 '루이스, 방금 들었어?'하고 먼저 물어봤을텐데, 조용한 걸 보면... 나만 들은 것 같다. 환청... 이라기엔, 너무 분명했는데...... 분위기에 취한 건가?)
(기분이 찜찜하긴 한데...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비올라 카지안:(잠시간의 시간이 더 지나 눈을 뜬다. 루이스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인다) 루이스도 기도 다 마쳤으면 이만 나갈까?
 
루이스 레너드:어... 네. (고개를 끄덕인다. ...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얘기를 해야하긴 하겠는데... 무서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어떻게 돌려말하면 괜찮을지를 고민한다. 일단은 나가서 운이라도 떼 보자.)
 
비올라 카지안:(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걸 보니 전혀 듣지 못한 듯. 아무것도 모르고 짐을 챙겨서 교회를 나선다. 때로 공기 중에 먼지가 날리는 조용한 공간을 뒤로하고 나서니 다시금 밝고 활기찬 공원이다.)
 
루이스 레너드:(태양이 환하게 내리비추고, 사람도 많아서 활기찬 분위기니...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뗀다.) 저, 비올라?
 
비올라 카지안:응? 왜, 루이스?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하며 느긋하게 걷다가 고개 돌린다)
 
루이스 레너드:절대로, 절대로 놀라진 마시고요. 아까... 교회에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어요. 저더러 이리로 오라고 하던데... 혹시, 들으... 셨나요?
 
비올라 카지안:이상한…… 목소리? (이미 겁먹어서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리로 오라고 했다고……? 아니. 난 그런 거 전혀 못 들었는데…… 뭐, 뭐지?
 
루이스 레너드:그러니까, 놀라진 마시고요! 위해를 끼칠 것 같진 않았어요. 그것보단 오히려 좀 슬퍼보이는 목소리였고... 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니까...
 
비올라 카지안:그 교회에 여러 번 갔지만 난 한 번도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거든. ……뭔가의 계시 같은 건가?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런 가능성밖에)
 
루이스 레너드:계시라... 그럼 더 이상한데요. 저는 예언 능력자가 아니잖아요. ...... 미래를 알려주는 식물... 같은 게 있나요, 혹시? 찻잎 점 같은 거요...?
 
비올라 카지안:그것도 그렇네. 11시 타이머한테 혹시 그 교회에 가본 적 있는지 물어봐야겠어. (고개 느리게 젓는다.) …… 미래를 알려주는 식물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본 적이 없네. 만약 있었다면 매일같이 갖고 다녔을 텐데. 찻잎 점을 볼 줄 알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신이라.
 
루이스 레너드:그렇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다가 그만둔다. 축제날인데 고민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다...!) 여하튼,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듯이 들은 소리니까요. 지금 당장 그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걱정하는 걸로 해요. 오늘은 축제에만 집중하죠.
 
비올라 카지안:으응. (대체 무슨 의미인 건지, 왜 루이스에게만 들린 건지도 알 수가 없어서 찜찜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단서가 없으니 기억에만 넣어둘 수밖에. 그리고 루이스의 말대로, 즐거운 축제를 방해받고 싶진 않았다.)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코마니 호수]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저 호수 근처에 유독 사람이 많이 있네요. 유명한가봐요.
 
비올라 카지안:공원에서 제일 많이 찾는 명소지. (잠깐 미묘한 표정으로 호숫가를 바라보았다가) 우리도 가볼까?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구경 가 봐요. (표정 차이를 눈치챘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기분 탓인가?)
 
축제가 아니라도 유명한 관광지로 꼽히는 코마니 호수입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호수라서 물에서 짠맛이 나고, 물살이 둥글게 돌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호수의 바닥은 반짝입니다. 자갈과 모래 사이에 묻은 소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바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데, 보기보다 수심이 깊어 성인도 발을 딛지 못합니다.
 
그런 탓에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는 경우가 왕왕 생기곤 했습니다.
 
호숫가에는 옅은 색의 잔디가 자랐습니다. 봄이 찾아오는 시기, 희고 노란 들꽃이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드는군요.
 
호수는 온통 검고,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종이꽃이 몇 송이 떠다닙니다.
 
호수에 들어갈 수 없도록 세워둔 울타리에는 매달리지 마세요. 삭막한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이 무렵 호수에 들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타이머의 추모’입니다.
 
감히 도밍게즈의 모든 국민, 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꽃을 띄웁니다.
 
루이스 레너드:아, 여기가... (도밍게즈의 국민이 어떻게 이 호수의 목적을 모를까. 이 주변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뒤늦게 눈치챘을 따름이다. 칠흑처럼 검은 호수를 바라보다가 제 옆의 타이머에 생각이 미친다. 언젠가는 '케레스'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게 되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카운터'가 된 이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가설도 호수 밑바닥에서 같이 고개를 든다. 타이머와 카운터가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면, 나 역시...)
 
이것은 비올라, 그리고 어쩌면 루이스 또한 겪게 될,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입니다.
 
죽은 후에 기리는 일이 무에 중요할까요?
 
일평생 세계를 위해 살고, 사람을 구원하고, 죽은 후에도 결국 구원자로 추모받는 삶.
 
누군가는 명예롭고, 영광되며, 훌륭하다 칭송할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미묘한 감상을 남깁니다.
 
비올라 카지안:루이스는 이전에 여기 와본 적 있어?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천천히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축제 기간 때 사람들은 추모를 위해 이곳에 온다. 나도 언젠간 꽃으로서 기려지게 되겠지, 상기하면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언제 죽음을 맞이할 지 알 수 없는 운명. 타이머가 아니라 하여 죽음이 예고장을 들고 찾아가는 건 아니라지만, 적어도 일반인들에게는 자연사의 개념은 존재한다. 하지만 타이머들에게는 다음 타이머의 탄생이 곧 죽음이니, 당장 내일 죽는다 하여도 이상치 않은 것이다.) 4구역에는 많이 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종이꽃을 띄워본 적은 없으려나.
 
루이스 레너드:영상으로는 가끔 보았지만 코마니 호수에 직접 방문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주로 9구역에만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종이꽃을 띄워보내는 의식은 저희 구역에서도 비슷하게 했어요. 검은 호수는 아니라도, 공원의 연못이나 주변의 강, 병원의 분수대... 물이 있고 하늘이 보이는 곳이면 각자 마음을 담아 꽃을 띄우곤 했어요.
 
비올라 카지안:그렇구나…… 나도 타이머가 되기 전에는 띄워본 적 있어. 이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부모님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했었지.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니 입맛이 씁쓸해진다. 타이머가 되고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이 점지하듯 어느 순간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로운 정체성. 너라는 운명적인 만남에 앞서 타이머라는 운명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만약…… 타이머나 카운터가 되는 걸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선택할 수 있었다면... ... 모르겠어요. 애초에... 제가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마...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 타인의 구원이 된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부담은 뿌듯하다는 감정이나 책임지겠다는 신념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굳이 그런 능력이 없더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은 얼마든 할 수 있어요. 다소... 효율이 낮은 직업이죠. 선택할 수 있었다면 고르지 않았을 거예요.
다만... 이것이 운명이기에,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이해하는 거예요. 내가 새로이 부여받은 이 위치가 무엇인지를 인지하되, 운명에 무조건 순응하지는 않도록요. 어쩔 수 없다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싸워가야죠. 그래서 계속 노력하는 거예요.
 
비올라 카지안:(조금 의외였다. 책임감과 이타심 있는 루이스라면 타이머를 당연히 택하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기에. 하지만 이유를 들으니 금세 납득할 수 있었다. 너는 정말 단단한 사람이구나.) 나였다면, 나 같은 사람이 세상을 구하는 타이머를 해도 되는 걸까? 싶은 마음에 택하지 않으려다가도…… 주변에서 기대나 눈치를 줬다면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떠밀리듯 받아들였을 것 같네. 난 남에게 많이 휘둘리는 성격이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이건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니 튕겨나가지 않으려면 노력하고 노력할 수밖에. 루이스와는 조금 다른 결일지라도, 비올라는 힘을 내야만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였다.)
나는 타이머가 된 이후로는 더이상 꽃을 띄워본 적 없어. 여길 보면 언제 맞이할지 모를 내 끝을 상상하게 되거든. 적어도 아프지만은 않으면 좋겠다.
 
둘레를 따라 쭉 걷다 보면, [종이를 파는 노인]이 보입니다.
 
[함께 종이꽃을 접는 연인]과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루이스 레너드: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아프지 않으면 좋겠네요. (즐기려 나온 곳에서, 어쩐지 상념에 빠져버렸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걷다가 노인을 발견한다. 뭘 파는 거지?)
 
얇고 흰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둔 노인은 비올라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루이스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을 하네요.
 
노인:어이. 자네들도 이리 와 꽃을 접고 가지 그러나?
 
루이스 레너드:꽃이요? (그렇지만 비올라는... 옆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정중히 거절한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미 하고 왔거든요. 말씀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노인:쯧. (혀를 차며 성질을 낸다.) 요즘 놈들은 타이머한테 감사할 줄을 모른다니까.
 
비올라 카지안:(노인이 권유했을 때부터 쩔쩔매다가, 성을 내자 더욱 안절부절못한다) 아, 그…… 하, 한 장 정도라면 나는 괜찮은데. (루이스 눈치 봄)
 
루이스 레너드:(흠......? 눈치를... 보게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귓속말로 비올라에게 속닥거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들어줄 가치 없어요. 설사 우리가 정말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띄우고 왔다는데 화를 내는 건 굉장히 논리적이지 못한 분노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기분을 맞춰줄 필요 없다고 보는데... 여기서 저 노인의 말을 들어주는 편이 심신 안정에 좋을 것 같다면 전 상관없어요. 비올라 마음대로 하세요.
 
비올라 카지안:(알고는 있었지만 루이스는 정말 이성적이구나! 라는 깨달음이 낯을 스친다.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지? 난 노인이 말을 걸자마자 당황했는데.) 그래도……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또 타이머에게도 호의적이신 것 같은걸. 호수에 안 띄우고 갖고만 있어도 괜찮으니까. 한 장만 해볼까? (호구의 정석)
 
루이스 레너드:당신만 괜찮다면야. (어깨를 으쓱한다.) 그렇게 해요, 그럼.
 
비올라 카지안:고마워. 저희 한 장씩 접을게요. (희미하게 미소하면서 노인에게 종이 두 장을 받아 한 장을 내민다.)
 
종이꽃을 만든다면 <손놀림> 판정
 
루이스 레너드:
손놀림
기준치: 50/25/10
굴림: 60
판정결과: 실패
 
비올라 카지안:
손놀림
기준치: 50/25/10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꾸깃... 꾸깃...
 
두 사람은 꼬작꼬작 접어보았지만 어째 제대로 된 꽃은 아닙니다.
 
특히 비올라의 종이는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네요.
 
노인:떼이잉. 이게 뭔가? 반듯하게 잘 좀 접어보라고. (훈수 둠)
 
비올라 카지안:(주눅)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쉽지 않네…….
 
루이스 레너드:(어쨌든 난 최선을 다했다는 표정)
 
노인:쯧쯧, 자, 내가 접는 걸 보라고. (종이 한 장 새로 빼어들어 능숙하게 접어간다.)
 
비올라와 루이스를 앞에 두고 종이를 접으며, 노인은 주절주절 이야기보따리를 풉니다.
 
노인:자네들은 타이머를 본 적이 있나?
 
비올라 카지안:(본인입니다만)
 
노인:내가 젊었을 적에 말이야, 그래, 딱 자네들만 했을 때. 그때 우리 마을에 큰 홍수가 났어. 그리고 나도 물을 잔뜩 먹고 판자에 매달려 정처 없이 쓸려 다니고 있었지. 딱 죽을 뻔했다니까. 제1시의 타이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날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그 뒤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축제마다 추모의 꽃을 띄우러 온다네.
 
노인에게 <심리학> 판정
 
루이스 레너드:
심리학
기준치: 60/30/12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는 무척 감사하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자랑의 기색이 깔려 있네요.
 
타이머를 향한 감사는 분명히 진심이지만, 그보다 그는 타이머에게 구원받은 순간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유별나게 여기고 있습니다.
 
노인:자, 받게.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꽃을 루이스에게 건네준다.) 흠흠, 우리는 항상 타이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루이스 레너드:음... 네. 알겠습니다. 유념하도록 하죠. (꽃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비올라 카지안: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꽃도 접었으니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남은 축제도 즐겁게 보내시기를……. (꾸벅 인사하고 루이스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겨 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몇 걸음 떨어져서 속삭인다) 그래도 저런 이야길 들으면 보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루이스 레너드:잔소리는 좀 많은 분이셨지만... 거기서 힘을 얻은 것 같으니 다행이에요. 생각도 못한 수확이네요. (아까 일을 떠올리니 웃겨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게된다.) 저는 평소 저런... 스타일을 만나면 가차없이 갈 길 가곤 하거든요.
 
비올라 카지안:난 절대 그냥 못 가. 그래서 이따금씩 물건팔이를 하는 분이나 사이비 종교 권유라도 하는 분을 만나면……. (상상도 하기 싫단 듯 고개 젓는다) 빠져나오기가 너무 힘들지.
 
루이스 레너드:(이상한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비올라를 상상해본다... 분명히 거절도 못 하고 쩔쩔매다가 해달라는 것을 모두 들어주고 오겠지...?) ... 앞으로는요, 그런 일 있으면 저한테 전화라도 하세요. 어떻게든 빼내볼게요. (어쩐지 비장한 목소리로)
 
비올라 카지안:저, 정말? 그치만 그럼 루이스가 귀찮을 텐데. (물론 루이스라면 저와 달리 아주 금세, 전혀 어렵지도 않게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머뭇거리면서도 속에서는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루이스 레너드:이상한 사람들 본거지까지 끌려가거나, 팔지도 못할 물건들 사오는 걸 보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뭐어... 그게 비올라의 가장 큰 장점이긴 하지만요. 그걸 이용해먹으려는 놈들이 나쁜 거죠.
 
비올라 카지안:(본거지까지 끌려갈 뻔함 < 맞음, 팔지도 못할 물건들 사옴 < 맞음 이라서 좀 매우 찔린다. 그런 와중에도 장점이라고 말해주다니, 얼마나 마음씨 다정한 사람인지.) 고마워. 웬만해선 안 당해야겠지만, 혹시나 또 그런 사람들한테 걸리면 바로 연락할게.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걷는다. 걷다 보면... 종이꽃을 접는 연인이 보인다. 하긴... 아까 그 노인도 그렇고, 장소가 장소다 보니 다들 종이꽃을 접고 있구나.)
 
데이트 중인 연인 같습니다. 종이꽃을 접고, 검은 호수에 띄워 보내는 동안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네요.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연인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예쁘지?”
 
“우리 자기는 손재주도 좋아. 그래도 자기가 더 예뻐.”
 
“아이,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요. 타이머의 죽음을 추모한다니 뭐니, 다 그럴싸한 명분인 거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도 꽃을 띄우며 진심으로 슬퍼하거나 울지 않습니다.
 
루이스 레너드:(뭐어... 그러려니 한다. 아무리 타이머라는 존재가 도밍게즈의 구심점이라지만, 실제로 그 능력으로 구원받은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순 흥밋거리일 수밖에 없겠지. 축제 날인데 침울한 기분이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 여기까지 나들이 와서 겉으로나마 챙겨준다는 것에 기본 점수를 줘야 하지 않나. 물론, 일반인 기준이다. 내 기준은 아니고.)
 
비올라 카지안:(이래서 호수 근처에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장본인이 아니고서야 얼마나 타이머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하겠는가. 세간에 보이는 화려하고 멋진 구원자로서의 모습이 그들이 아는 전부겠지. 그럼에도 역시, 아무도 우리를 진정으로 추모하지는 않는다는 게 조금은 씁쓸해서.)
 
루이스 레너드:음... (비올라의 표정을 살핀다. 그래, 역시 좋을 수가 없지... 헛기침을 흠흠, 두어 번 하고 말을 건다.) 저기까지만 걸을까요? 호수는 충분히 둘러본 것 같으니까, 저기까지 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비올라 카지안:아, 응. (기분이 너무 표정에 드러났나? 정신을 차리고 작게 고개 끄덕인다.) 새까매진 물색도 이제 볼 만큼 본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봐요. (그렇게 말하고 계속 걷다가, 이번에는 난간에 매달린 아이를 발견한다. 아니, 저거... 위험할텐데.)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눈이 마주쳤나? 의심했을 때, 아이가 먼저 말을 겁니다.
 
아이:전 아빠를 만나러 왔어요. 수도에서 일하시거든요.
 
루이스 레너드:어, 어? (말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는 통에 약간 당황했다.) 응... 그렇구나. 알겠어. 그런데 거기서는 내려오지 않을래? 위험할 수 있거든.
 
아이:네에. 그럴까요? (폴짝 뛰어내려온다.)
 
아이는 앳된 얼굴로 당신과 비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퍽 친밀하게 굽니다.
 
아이:(눈을 내리뜨곤 비올라를 향해 말한다.) 언니, 타이머죠?
옆의 그 사람이 누군지 나 알고 있어요.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에리카! 위험하다고 했잖아. 어서 이리 와!”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챙겨서 끌고 갑니다.
 
비올라 카지안:(깜짝 놀라서 숨을 들이킨다. 타이머임을 들킨 게 문제가 아니라, 방금 저 아이…… 멀어지는 아이와 루이스를 뻣뻣하게 번갈아보며 어쩔줄 몰라한다.) 자, 잘못 말했을 거야.
 
루이스 레너드:... 아뇨, 그럴 리 없어요. 저 아이는 본인이 뭘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우리가 들은 건 그대로예요. (표정이 심각해진다.) 타이머를 알아보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아직 공개되지도 않은... 것을, (뒷말도 신경쓰이긴 매한가지지만, 어떻게 나를 알아본 것인지... 그게 더 의문이다. 수도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라...) ... 혹시, 저 아이의 아버지가 DOT에서 근무하는 분일까요.
 
비올라 카지안:그런 걸까……? 저 정도의 의미심장한 말이라면 네 예상이 맞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일 DOT의 소속이라면 아이가 왜 그런 표현을 쓴 거지? (카운터는 세상의 멸망을 막을 축복이고 또 하나의 강력한 힘인데.)
 
루이스 레너드:글쎄요, 만에 하나 DOT 내에서 카운터의 존재를 부정하는 계파가 있었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죠. 그렇지만 이건 근거도 없는 확대 해석일 뿐이고... (기분이 영 찝찝하다.) 비올라는 저 아이가 누군지 짐작이라도 가나요? 저보다는 오래 계셨으니까...
 
비올라 카지안:(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 잘 모르겠어. 워낙 잠깐 본데다, 나도 그 많은 DOT 직원분들의 얼굴을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니라서. 사실 타이머들 외에는 DOT에서도 친한 사람이 몇 없거든.
 
어느덧 하늘이 슬금슬금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댕, 댕, 댕…… 광장의 시계탑이 울어댑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입니다.
 
즐거웠나요? 행복했나요? 혹은, 설렜나요?
 
직전의 일 때문에 조금은 불쾌하기도 할까요?
 
어떤 시간을 보냈건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저 멀리 DOT의 꼭짓점이 보입니다. 우리가 떠나온,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자, 이만 돌아갑시다.
 
루이스 레너드:이상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 전 대체로 즐거웠는데. 비올라도 그랬나요? (잔뜩 먹었던 축제 음식의 맛을 떠올리며) 다음에 또 나올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꼭 축제가 아니더라도 말이죠.
 
비올라 카지안:그럼. 너무 즐거웠어. (마지막에 만난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오롯이 행복하기만 했을 텐데. 까끌한 뒷맛처럼 아쉬움의 잔여물이 남는다.) 내일 카운터의 존재가 공표되고 나면 이전보단 자유롭게 바깥에 나다닐 수 있을 거야. 또 이렇게 같이 구경하러 다니면 좋겠다. 그치?
 
루이스 레너드:당연하죠. 다음에는 오늘 못 가본 곳도 가보자고요. 물론 DOT가 과연 어린 군인 둘을 자유롭게 내보내줄지... 의문이지만요. 노는 것도, 그 이외의 것도. 새삼스럽지만 다시 잘 부탁드려요, 파이팅? (주먹을 내밀어 보인다.)
 
비올라 카지안:자유롭지 못하다면 약간의 일탈을 할 수도 있으려나……? (물론, 나는 그럴 용기가 없고 너는 규칙을 어기려 들지 않겠지만. 함께하는 가까운 친구가 생기다 보니 저의 성격도 조금씩 활발해져가는 것 같다.이 동작도 여러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 같아. 웃으면서 주먹을 맞부딪혔다.) 파이팅.
 
시곗바늘이 아래로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모두 로비에 모였습니다.
 
눈대중으로 인원을 헤아린 리슬러 부관은 서류철에 무어라고 적었습니다.
 
아마 전원 출석했다거나, 문제없음, 이런 걸 쓴 거겠죠.
 
리슬러 부관:타이머 展은 내일, 축제 마지막 날에 정식 개장합니다.
오늘 군들에게 먼저 시간을 내준 것은, 정식 개장 후 방문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죠. 꽤 많은 사람이 몰려오리라고 예상 중인데……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러분에게’ 위험하잖습니까.
 
무해한 국민이라도, 타이머에게 집요한 팬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곳을 놓칠 턱이 없죠.
 
카운터의 존재가 소개된 후에는 훨씬 더 유난스럽게 들끓을 거라고, 무미건조한 우려가 덧붙었습니다.
 
리슬러 부관:공식 일정이라곤 했지만, 견학에 지나지 않으니 가볍게 다녀오면 됩니다.
 
개인으로서!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묻는 시선이 뺨에 달라붙습니다.
 
설명을 끝낸 리슬러 부관이 자리를 비킵니다.
 
서관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너머에선 하인리히 장교가 몇몇 연구원이나 일반 군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이 앞서 걷자, 곧 어른들이 먼저 DOT를 벗어났습니다.
 
전시관은 DOT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립되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기도 우스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검은 철창을 넘어, 아침에 걸었던 야트막한 내리막길을 다시 걷자면,
 
“타이머다.”
 
“하인리히 장교도 있어.”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이 도화선이 되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아침보다 선명한 시선이 따라옵니다.
 
호감, 호의, 온갖 곱고 귀한 것들을 모아 가루를 낸 것처럼 부드러운 시선들이…….
 
“그런데, 쟤네는 누구야?”
 
채 떨어지기도 전에, 누군가 묻습니다.
 
“그러게. 저런 교복도 있었나?”
 
“본 적 없는데. 다음 기수의 타이머 아냐?”
 
“그럴 리가 있어? 타이머는 한 세대에 하나뿐이잖아.”
 
“그럼…… 타이머의 부관이라던가?”
 
질문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꼬리를 잘라, 계속해서 새로운 꼬리가 돋아납니다.
 
타이머의 근처에서 걷는 카운터의 존재가 퍽 이질적이었던 모양이에요.
 
하긴,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하죠. 시선은 어느새 호기심이 점철되고,
 
“어, 어, 언니!”
 
소란 사이로 톡 튀어나온 것은 어린 목소리였습니다.
 
어딘가 낯익은 여자아이 둘이 앞을 막고 두 사람을, 아니, 정확히는 비올라를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쌍둥이처럼 차려입은 아이들은 처음 보는 상대였지만 낯이 익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한 쪽만 땋아내린 머리칼이라던가, 테마를 맞춰 주렁주렁 단 장신구들이 척 봐도 비올라를 흉내 낸 꼴이었으니까.
 
다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올라처럼 꾸며 달라며 부모를 신나게 닦달했겠지, 싶을 정도로 쏙 빼닮았습니다.
 
비올라 카지안:(깜짝 놀라서 얼굴이 불그스레해진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저와 흡사하게 꾸몄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같은 타이머와 닮게 꾸미다니…… 팬이 별로 없는 비올라로서는 신기하고 놀라우면서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무려 타이머의 시선이 향하자 두 뺨을 발갛게 붉힌 아이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장미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꽃송이가 활짝 만개한 푸른 장미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비올라도 나름 인기 많다고 했잖아요. 전 틀린 말 안 한다니까요? (살짝 놀리듯 웃는다.)
 
비올라의 근처에 선 루이스에게도 성큼, 장미 향기가 다가옵니다.
 
비올라와 루이스에게 각각, 장미를 건넨 어린 눈동자들은 오직 두 사람이 그것을 받아주기를 바라며 간절함으로 반짝거립니다.
 
자, 어떻게 할까요?
 
비올라 카지안:그, 그렇지만…… (내밀어진 장미를 바라보는 눈망울이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아른한 빛이 깃들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미 타이머가 된 지 몇 년이나 지났고 민간인들도 수도없이 접했지만, 여전히 이런 사소한 마음 하나하나에 감동을 받게 된다.)
(부관의 당부 같은 것도 지금만큼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장미를 받아들었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울컥할 것 같은 심정을 참으면서 미소지었다.) 정말 고마워. 참 예쁜 장미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가 장미를 받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신에게도 향하는 장미 한 송이를 보고 조금 당황한다. 본인을 가리키며, '나한테 주는 거야?'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이가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도 의아함을 떨치지 못한다. 아직 내가 누군지도 모를텐데. 그래도... 마음은 고맙게 받아야겠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미를 받아들고 감사의 의미로 가볍게 목례한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비올라와 루이스가 기꺼이 장미를 받아들자, 누군가 총성을 울린 것처럼 하나둘 선물과 이야기를 안겨주기 시작합니다.
 
아직 따뜻한 애플파이, 빨간 풍선, 손수 엮은 사탕 목걸이와 흰 리본을 묶은 파란 장미 수십 송이. 구름보다 커다란 솜사탕이라거나 갓 짠 우유와 치즈까지!
 
누군가 루이스의 목에 사탕 목걸이를 걸어주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또 다른 누군가가 비올라의 어깨를 두드립니다.
 
“어깨 좀 펴고 다니라고. 위축될 필요 하나도 없으니까!”
 
꺄악, 꺄아악. 환호성도 끊이지 않습니다.
 
인산인해. 그야말로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낱말과 단어로 구성된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올해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더 평온한 내년이 찾아오기를!”
 
누군가 예언의 타이머를 끈질기게 쫓아오며 소리칩니다.
 
“세계 멸망이란 게, 진짜인가? 무언가 신의 계시를 받지 못했냐고?”
 
“자네들만 믿고 있어. 우리는 언제나 그래.”
 
언니, 오빠, 형, 누나! 저기요! 타이머! 온갖 호칭이 물거품처럼 귓가에 스칩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질문과 호의가 꽃가루처럼 허공을 떠다녔습니다.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것은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는 것처럼 향기로웠어요.
 
향기로웠지만, 숨을 쉬기 어렵단 점에서도.
 
“그런데, 옆에는 누군가?”
 
순간, 바람이 불었습니다.
 
희고 고운 바람과 함께 쏴아아, 파도 소리 같은 것이 일렁이고 줄에 매달린 것들이 일제히 몸을 흔듭니다.
 
꽃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것처럼 시선의 일부가 카운터를 향합니다.
 
“처음 보는데, 역시 부관을 들이기로 한 건가?”
 
곤란한 질문이 당도합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을까요? 아니면 주의받은 대로 입을 딱 다물었을까요? 혹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나요?
 
잠깐의 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듭니다.
 
리슬러 부관:잠시만요.
 
리슬러였습니다.
 
리슬러 부관:지금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라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기계적으로 모든 질문에 대응한 그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눈짓했습니다.
 
1. 침묵하고 무시로 일관할 것, 2. 어떤 이야깃거리도 흘리지 말 것, 3.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
 
지금 필요한 것은 3번이겠군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를 톡톡 건드리며) 부관님이 주의를 끄시는 동안 빨리 이동하죠. 저희가 너무 큰 소란을 만들어 버린 것 같네요...
 
비올라 카지안:아, 그, 그렇네. (온갖 선물들과 언사의 향연에 정신이 혼미해져 얼레벌레 대답한다.) 얼른 가자……!
 
루이스 레너드:(후다닥 이동합니다...)(나중에 혼나겟다)
 
흰 돌이 깔린 바닥을 밟습니다.
 
건물 사이사이로 난 골목과 도로는 아주 깨끗했습니다. 캐러멜 냄새가 설탕 냄새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시끌벅적한 인파를 물리치며 걷는 사이 점점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도 하인리히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거리가 꽤 벌어졌던 걸까요.
 
리슬러 부관:받아주지도 말고, 대답하지도 말라고 했잖습니까.
 
한 발 뒤에서 쫓아온 리슬러 부관이 한숨을 섞어 책망합니다.
 
하지만 그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아는지 크게 탓하진 않네요.
 
루이스 레너드:(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는 말은... 변명이지, 솔직히. 못 들을 말도 아니다.) 죄송합니다. 대응이 미흡했습니다.
 
비올라 카지안:(솜사탕과 애플파이, 장미꽃으로 양손이며 품까지 한가득이다. 상기된 낯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다음엔 신경쓸게요. (그래도, 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난 받아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골목을 완전히 내려간 후에는 광장을 가로지르는 대신 옆의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리슬러 부관이 덧붙입니다.
 
리슬러 부관:세계가 군들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이상입니다. 그러니 가끔은 깨트릴 필요가 있어요. 현실을 보여주는 거죠.
그건 나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닙니다. 그저…… 필요한 일일 뿐.
 
의외로 도로에는 사람들이 없어 한적합니다.
 
술에 취한 이들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떠들긴 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어요. 드물게 지나가는 차량의 창문이 열리고,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손을 흔들곤 했습니다.
 
타이머를 알아본 거겠죠.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곳곳에서 타이머를 부르고, 외치고, 눈짓하고, 손짓하며, 끌어당깁니다.
 
단순히 개인을 향해 쏟아지는 호의와 호감이라기엔 지나치게 두터운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본 일련의 광경은……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6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쩐지 무척 그리운 풍경이었죠. 낯익기 짝이 없어서, 꼭 제자리를 찾아온 듯했습니다.
 
제게 쏟아지는 호의와 호감, 관심처럼…… 목소리마저 친숙했어요.
 
기이한 기시감입니다.
 
리슬러 부관:(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앞서 걷는다.) 딱 맞추어 도착했군요.
 
도밍게즈의 달은 휘영청 밝기만 합니다.
 
하늘에 뜬 달이 너무 밝아서, 전시관이 아니라 달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검은 하늘에는 소원 대신 별이 떠서, 흰 별이 촘촘하게 달려 있었고요.
 
그 밤, 걷는 길은 왜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던가요.
 
감상과 달리, 실제로는 도로를 따라 오 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도요.
 
전시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나치게 익숙한 생김새였습니다.
 
DOT의 본관을 본떠 지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거든요.
 
마중을 나온 전시관의 담당자가 “일부러 그렇게 지었습니다.” 간결한 설명과 함께 하인리히 장교의 옆에 섰습니다.
 
본관의, 아니, 전시관의 문을 넘기 위해 얕은 계단을 오르려던 하인리히 장교가 문득 멈춰섭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주인공들이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를 해야겠군.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아까 나섰던 문과 꼭 닮은 문이 보입니다.
 
좌우로 나뉜 문은 청동으로 빚고 남색으로 덧칠했는데, 무척 크고 두꺼웠습니다.
 
상당한 무게를 자랑했지만, 누구도 문을 여느라 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언제나 열린 문이었으니까.
 
DOT의 모든 건물은 현관을 닫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통입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공간은 단절되지 않는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전시관은 생각보다 더 정교하게 베껴다 둔 것 같군요.
 
루이스 레너드:(생각보다 더 익숙한 정경에 신기하다는 듯 눈빛을 빛낸다. 처음 DOT를 방문했을 때가 떠오르는 것만 같다.) 비올라가 먼저 들어가요. 난 그 뒤를 바로 따라갈게요.
 
비올라 카지안:(머뭇거리며 한 걸음 앞서나갔다가 당신을 돌아본다.) 같이 가자. 똑같은 '주인공'들인걸.
 
루이스 레너드:어... 네. 그래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같이 가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비올라의 옆에 선다.)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익숙한 로비가 펼쳐집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DOT의 본관처럼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합니다.
 
타닥타닥, 바닥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립니다.
 
다른 점이라면…… 안내 데스크에 아무도 없단 걸까요. 그야, 전시관의 근무시간은 DOT보다 훨씬 짧고, 일찍 끝날 테고.
 
뒤에서 어른들이 느긋하게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잘 만들었군.”
 
“장교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저희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둘씩 나란히, 복도를 거닙니다.
 
이렇게 걷자니 첫 만남이 떠오릅니다.
 
영문도 모른 채 걸었던 복도, 괜스레 뛰던 심장, 수런거리던 목소리, 그리고……. 문 너머의 상대.
 
그러나 이곳은 DOT가 아니고, 두 사람은 이미 만났습니다.
 
:벽 좌우에는 섬세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해와 달이 뜬 하늘과 끝을 알 수 없는 넓은 바다, 희고 고운 모래사막, 얼어붙은 땅과 바람이 머무는 들판. 곳곳마다 열네 개의 기둥이 서 있습니다. 신의 손가락이건, 최초의 시곗바늘이건, 혹은 그 둘 다일 기둥들이. 기둥 아래에 진 그림자가 유난히 캄캄합니다. 섬세하게 신경을 쓴 티가 났습니다.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은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해가 떴는가, 달이 떴는가의 차이입니다. 왼쪽 복도는 아침을 맞은 세계였고 오른쪽 복도는 저녁을 맞은 세계였거든요.
 
하인리히 장교:이 그림은 세계를 상징하기에 앞서 하루를 상징한다네. 아침과 저녁, 하루는 둘로 나뉘어 있지 않은가.
 
뒤따라오던 하인리히 장교가 아는 체를 합니다.
 
열네 개의 구역을 따라 그린, (정확히 말하자면 구역의 최초, 첫 모습을 그렸을) 벽화가 끝나자 전시관의 입구가 펼쳐졌습니다.
 
문은 세 개입니다.
 
전시관Ⅰ. 구원의 시간
 
전시관Ⅱ. 쌓여온 역사
 
전시관Ⅲ. 지나간 생애
 
문에는 각각 패널이 붙어 있습니다. 원하는 곳부터 둘러보면 됩니다.
 
루이스 레너드:(세 전시관의 이름을 읽는다. 시간, 역사, 생애... 보통은 순서대로 도는 게 맞겠지.) 1관부터 둘러볼까요? 아니면 먼저 보고 싶은 전시관이라도 있으신가요?
 
비올라 카지안:이런 건 순서대로 보는 게 좋더라, 난. (잘 꾸며둔 전시관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린다.) 1관부터 보러 가자.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1관으로 들어간다.)
 
전시관Ⅰ. 구원의 시간
 
:천장과 벽을 모두 남색으로 칠한 곳에는 흰 석고로 빚은 조각상들이 서 있습니다. 조각상의 수는 스물두 개입니다. 두 명의 사람이 한 쌍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한 것으로 유려한 곡선이 진짜 사람 같습니다.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조각상은 전시관 곳곳에 배치된 구조로 시곗바늘의 방향을 따라 걸으면 차례대로 살필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중앙에는 [높은 탑]이 서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어디까지 뻗어있는걸까, 이 탑은...?)(탑을 기준으로 한 바퀴를 빙 걸으며 조각상을 바라본다. 정말 잘 지었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하나의 거대한 석고를 깎아 만든 탑으로 그저 새하얗습니다.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입니다.
 
<교육, 지능, 예술, 역사> 중 택 1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다른 판정으로 다시해봅시다!!
 
루이스 레너드:
교육
기준치: 75/37/15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다.. 다른거없나요
 
<행운> 가봅쉬다
 
루이스 레너드:(좀 더 생각을 해 보면...)
기준치: 70/35/14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많이 돌아다녔던 탓인지 머리가 안 돌아가나 싶었지만……
 
루이스는 번개처럼! 이 탑의 정체가 오벨리스크라는 것을 알아챕니다.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드리우면, 꼭 시침 같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조각상들은 각자의 시간에 맞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제1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유리구슬이 쏟아진 바다에 선 조각상.
제2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불붙지 않은 성화에 화살을 겨눈 조각상.
제3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세계수라 부를 법한 커다란 고목 아래 선 조각상과,
제4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번개를 쥐고 휘두르는 조각상.
제5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얼음처럼 투명한 유리 속에 갇힌 조각상이라든가,
제6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발아래 온갖 동물을 거느린 조각상.
 
:제7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유일하게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리는 조각상도 있었고,
제8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조각상도 있었으며,
제9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발아래 해골을 쌓은 조각상.
제10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각각 허공과 구덩이 안에 서 있는 조각상과,
제11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조각상,
제12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차마 잊지 못한 무언가를 돌아보는 조각상……
 
정확히 열두 개. 시작과 끝이 없는 불완전한 조각상들이 서 있습니다.
 
석고로 빚었다지만 온전히 하얀 것을 제외하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것의 얼굴은,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비올라도, 루이스도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계가 바라고 열망하는, 가장 완벽한 구원자의 모습이 그곳에 서 있을 뿐입니다.
 
비올라 카지안:(모든 조각상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속한 시간이니만큼 제3시의 조각상 앞에 더 오래 발길이 머무르게 된다. 웅장하게 뻗어나간 세계수를 올려다본다. 그 누구도 닮지 않은 구원자의 낯에 제 얼굴을 꿰어보았다. 나도 이 조각상처럼 완벽해 보일 수 있을까? 그 발끝만큼이라도 닿을 수 있을지.)
 
루이스 레너드:(오로지 대중을 위해 조형된, 너무 완벽해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의 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완벽'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자신에게는 어쩌면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항상 최고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그 누구에게서도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해오던 제 모습과 닮아있지 않은가. 완벽을 위해 두꺼운 석고 마스크를 쓰는 일은 남이 보기엔 미련한 짓일지 몰라도 루이스 본인에게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 마스크를 벗기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것'이 될테니. 세상이 완전무결한 구원자를 원한다면... 그래. 가볍게 해내주겠다.)
 
마지막 조각상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음 관으로 떠나기 위해 걸음을 떼는데, 무언가 앞을 막아섭니다.
 
<행운> 판정
 
루이스 레너드:
기준치: 70/35/14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루이스는 무언가에 부딪히기 직전 간신히 알아채고 멈춰섭니다.
 
문 좌우에 태양과 달을 끌어안은 조각상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찌나 반질반질하게 닦아두었는지 지독하게 투명해서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제0시와 제13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분명합니다.
 
0과 13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수. 그럴싸한 연출이네요.
 
비올라 카지안:루이스, 괜찮아?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지. (걱정스럽게 묻는다)
 
루이스 레너드:(너무 투명한 조각상과 충돌할 뻔 하고... 깜짝 놀란다.) 네, 다행히 멀쩡한데... 주의깊게 살펴보지 못하면 위험하겠네요. 나중에 전시관 관리 담당 측에 울타리라도 세워 달라고 건의드려야겠어요. 그거랑 별개로... 멋있긴 해요. (부딪힐뻔한 자리 바라보며)
 
비올라 카지안:그러게. 열두 개밖에 없어서 남은 두 시간은 어디로 갔나 했거든. 설마 안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전시해뒀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덧붙이면서 조각상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루이스 레너드:그래도 전 역시 3시 조각상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비올라도 그렇지 않아요? (미소지으며)
 
비올라 카지안:응, 나도. (옅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주 공들여 만드셨더라. 나도 언젠가 그만한 나무를 자라나게 만들 수 있음 좋겠어.
 
루이스 레너드:함께 훈련하고 성장하다 보면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거예요. 같이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단 거, 알잖아요?
 
비올라 카지안:(예전이었다면 아주 막연하고 멀게만 느껴졌을 텐데. 지금은 언젠가 분명 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제 안에서 싹튼다.) 응. ……네 덕분이야. 그런 미래가 올 거라고 가정할 수 있는 거.
 
루이스 레너드:이하동문이에요. 저도 비올라가 있었기에, 더 발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 우리, 이 조각상의 의도를 아주 착실하게 따른 것 같지 않나요? 아까는 지시를 안 듣는 바람에 소란을 만들었는데. 하하!
 
비올라 카지안:그러게. (웃는 루이스를 바라보다가, 작게 따라웃고 만다. 한 시간대에 두 개가 존재하는 조각상은 네 존재가 당연스러움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제 다음 전시관으로 갈까?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긴다.)
 
전시관Ⅱ. 쌓여온 역사
 
전시관Ⅱ의 내부는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암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요!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전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흘러 내렸습니다.
 
때마침 스크린에는 어떤 영상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리슬러 부관:시청각실입니다. 타이머와 관련된 뉴스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따위를 볼 수 있죠.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생략할 겁니다. 원한다면 수업 시간 중 여유가 있을 때 틀어달라고 요청해두죠.
 
얼핏 스쳐본 영상에는 낯익은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비올라와 루이스입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뉴스, 애니메이션 따위라고 했는데, 저건 진짜 우리잖아?
 
때마침 영상 속 루이스가 입을 엽니다.
 
루이스 레너드:[루이스 레너드라고 합니다. 앞으로 카지안 씨와 함께 멸망 저지를 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고요.]
 
맙소사! 비올라와 루이스가 처음 만났을 때예요. 언제 촬영한 거야?!
 
루이스 레너드:(... ... 사생활 보호라곤 전혀 안 되는 집단이군.)
 
비올라 카지안:(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졌다. 아니, 새하얘졌나? 타이머들의 모습이 조각조각 나뉘어 민간에게 공개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 이 순간을 그것도 전시관에 송출하다니. 이때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이 얼버무렸었는데……. 그렇지만 소심한 성격답게 아무런 반박이나 불평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린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의 반응을 슥 보고... 걸어가며 속닥거린다.) 정 신경쓰이면... 저 부분만은 내려달라고 해 볼래요? 원래는 저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잖아요. 이상한 타이밍에 찍혀서 그렇지.
 
비올라 카지안:(곁에 있는 하인리히와 리슬러의 눈치를 스윽 살피면서 개미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말씀드려도 안 들어주실 것 같아…….
 
DOT 곳곳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타이머와 카운터의 첫 만남을 담은 영상도 회의실의 CCTV가 담은 것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음, ... ... 집단의 위신을 근거로 내세운다면 못 들어줄 청도 아니긴 해요. 믿져야 본전이니... 말씀이라도 드려봐요. 그러니 지금은 너무 신경쓰지 말고 가죠.
 
비올라 카지안:그래. 일단 지금은 다들 즐거워 보이시니…… 다음 전시관으로 가자. (한 번 더 스크린을 흘끗 돌아봤다가 못 볼 걸 본 것처럼 후다닥 다음 전시관으로 향한다.)
 
전시관Ⅲ. 지나간 생애
 
턱 없는 문을 넘어서자 전시관Ⅲ의 내부가 훤히 보입니다.
 
복도가 없고, 벽도 없는 전시관Ⅲ은 한눈에 모든 곳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장이 무척 높아서 고개를 다 들어도 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이라면…… 전면의 [액자]들일까요.
 
루이스 레너드:여긴... 정말 높네요.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가, 확인해보려다 목이 아파 그만뒀다. 대신 시야에 닿는 액자를 구경해본다.)
 
비올라 카지안:그러게. 한 전시관만 이렇게 만들려면 꽤 어려웠겠는데……. (따라서 고개를 쭉 뻗어 보다가 뒷목을 두드린다.)
 
흰 액자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어찌나 개수가 많은지 한 벽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세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였어요. 수백, 수천 개는 되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액자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걸려 있습니다.
 
역대 타이머.
 
여태까지 우리가 나고 자라며, 혹은 책과 영상을 통해 보았던 이들의 사진이 액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기억나지 않는 얼굴도,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얼굴도 있습니다.
 
장교를 비롯한 어른들은 짧게 묵념합니다.
 
하인리히 장교:이곳에는 타이머의 사진이 걸릴 예정일세. 죽은 이들을 잊지 않도록.
 
천장이 유난히 높더라니. 1대, 2대쯤 되는 이들의 얼굴은 까마득해서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사진 속에 갇힌 얼굴들은 하나같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서로 간에 닮아서가 아니라 모두 타이머라서. 사진이란 피사체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담는 법이니까.
 
……조각상과 마찬가지예요.
 
아래쪽의 빈 액자들에 시선이 닿습니다. 아마 저 중에는 우리의 액자가 될 것도 있겠지.
 
언제가 될까? 평균 연령이 반백 살이라지만, 어디까지나 통계입니다.
 
사진 속에는 상당히 앳된…… 또래의 얼굴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이라는 건 결국……
 
당장 내일, 새로운 부품으로 갈아 치워질지도 모르는 운명인 거였죠.
 
루이스 레너드:(원래 인생이라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라지만, 우리가 가게 된 길은 그보다 더 많은 변수를 품은 삶이다. 그래, 알고는 있는데... 괜히 이런 생각을 하면 좋을 게 없단 말이지. 어차피 알지 못할 미래라면 걱정보다는 대비하는 게 맞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내일은 더 나은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쌓이면 결국 나의 완벽이 될테니 두렵지 않다. ... 그래도, 기왕이면 일찍 가진 않았으면 해.)
 
비올라 카지안:(코마니 호수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젠가 다가올 운명이라는 건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이 액자에 전대 타이머로 갇히겠지. 누군가 나를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호수에 들리겠지. 지금은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다가오지 않기만을 막연히 바라게 되는 건, 아직 내가 어른스럽지 못한 탓일까. 어른들을 따라 눈을 감고 묵념한다. 액자에 담긴 저의 모습을 잠시간 상상해보며.)
 
고개를 돌리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이미 자리를 비켰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일부로 배려해준 건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 다시 액자로 시선을 돌린다. 아직은... 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치관의 문제도 있지만, 이건 내가 아직 '카운터'로서 한 활동이 마땅히 없기 때문일지도. 그냥 얌전히 묵념만 한다.)
 
비올라 카지안:(묵념을 마치고 잠시 루이스를 기다린다. 분위기 탓에 다소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만 나갈까?
 
루이스 레너드:(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전시관을 모두 살피고 돌아 나오면,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문]이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저건 뭐죠? (문을 가리키며) 스태프 공간... 같은 걸까요?
 
안내 데스크 옆에 딸린 문은 특이하게도 아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철제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장미가 덮여 있습니다.
 
장미 향기가 전시관의 바닥으로 가라앉습니다. 죽음을 추모하는 것처럼.
 
어른들은 이미 보여주기식의 묵념을 마치고 다음 전시관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기에,
 
남아있는 것은 미래를 목격한 아이들뿐입니다.
 
비올라 카지안:스태프 공간이라기엔 장미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고개 갸우뚱한다.) 아까는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예쁘긴 하다. 기간 한정 전시관 같은 걸까나?
 
루이스 레너드:음, 전시관을 갓 열었으니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일 수도요...? (갸우뚱...) 저기에 흥미 있으세요?
 
비올라 카지안:이왕 왔으니 한 번은 보고 싶어. 내일 개방되고 나면, 이제 우리가 여길 사적으로 찾아올 수 있는 일은 없다시피 할 것 같아서. 저렇게 장미로 화려하게 꾸며둘 정도면 뭔가 읨가 있을 것 같고…….
 
루이스 레너드:그래요, 그럼 한 번 가 보죠. 대신 빨리 다녀오기에요?
 
비올라 카지안:응, 뭐가 있는지 가볍게 확인만 하고 와도 되니까.
 
장미는 활짝 만개한 탓에 내일이면 시들기 시작할 것 같았습니다.
 
밤 내내 화려하게 피어있다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꽃잎을 떨구겠죠.
 
지금 우리가 가장 아름다울 때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아치문 아래에 섰을 때였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자네들, 거기서 뭐 하는 건가?
 
하인리히 장교가 우리를 부른 것은.
 
목소리는 분명히, 등 뒤에서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하인리히 장교와 리슬러 부관, 그 외 일행들은 입구 근처에 서 있었습니다. 마치……
 
그곳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이쪽은 보지 않는 건가?
 
아치문을 돌아보자,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하인리히 장교:거긴 아무것도 없어. 뭣들 하나. 돌아가야지.
 
흰 벽이 시야를 가립니다. 새파란 장미도, 은색 아치도 없는 평범한 흰 벽.
 
이상한 일입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수가 없는데…….
 
환각인가? 싶지만 제8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도 모두 이 광경을 목격한 거예요.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걸까요?
 
바깥에선 어른들이 “빨리 나오라”며 우리를 재촉합니다. 루이스, SanC (0/1)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1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감소 없음.
 
루이스 레너드:... ... 우리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다들 반응을 보니 장미 아치문을 본 듯한데, 건설에 관여한 어른들은 정작 못 본다는 건... 누군가의 능력일까요? 하지만 식물은 우리 관할인데...
 
비올라 카지안: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눈을 크게 뜬 채로 아치문이 있었던 하얀 벽을 바라본다.) 난 저런 장미들은 만들어낸 적 없어. 게다가 분명히 문이 있었는데……. 환각이라도 본 것처럼. (그렇지만 8시 페어도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들이 굳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루이스 레너드:... 전 이상한 건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혹시 제가 장교님들께 지금 당장 이 문에 대해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비올라 카지안:(긴장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응. 혹시 이게 안전 같은 것과 관련이라도 되어 있으면 큰일이니까.
 
루이스 레너드:죄송합니다만, 하인리히 장교님. 저희의 눈에는 여기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아치문이 보입니다. 저희뿐 아니라... 모든 타이머와 카운터들에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허락해주신다면, 잠시만 여기를 조사해보고 싶습니다.
 
루이스가 아치문에 대해 설명하자 어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딱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파란 장미라면 도밍게즈의 국화이니 길한 일이 있으려는 걸지도 모르지.
조사야 상관없다만 지금은 이미 사라진 게 아닌가? 잠깐 살펴보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겠네.
 
하인리히 장교는 오히려 반기는 모양새였습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니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심리학> 판정
 
루이스 레너드:
심리학
기준치: 60/30/12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네, 그럼 잠시 살펴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의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을 바라보며) 혹시 같이 벽을 조사해보실 분 계십니까.
(비올라를 돌아보며) 지금 씨앗 가진 거 있어요? 벽에 장미를 피게 하면 아까처럼 문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데요. 저기서는 자라기 힘드려나요.
 
비올라 카지안:(불안한 낯으로 서 있다가 일단 루이스 곁에 한 발짝 다가선다.) 아, 씨앗은 교복 주머니에 항상 넣어다니는 게 몇 개 있어. 그렇지만 여기에서 식물을 피워올리다간 바닥이나 벽이 깨질 수 있어. 그건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눈치 살핀다)
 
비올라 말고도 서너 명이 조사를 도우러 옵니다. 환각 능력자인 8시 페어도 있네요.
 
루이스 레너드: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일단 벽만이라도 살펴보도록 하죠. 물리적인 반응과, 능력을 사용했을 때의 반응을 모두 비교해보고 싶은데요. (8시 페어를 바라보며) 저와 케레스가 벽을 손으로 치고 난 뒤 아무 반응이 없다면, 거기에 능력을 사용해서 아까 모습을 재현해주시겠어요? 그런 다음 벽의 반응을 보죠.
 
8시 페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합니다.
 
루이스 레너드:(벽을 손으로 쿵쿵 두드려본다.)
 
비올라 카지안:(옆에서 손 들어서 다소 소심하게 콩콩콩 두들겼다)
 
벽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납니다. 벽 뒤에 빈 공간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몇 번 두드려보아도 어떤 기미가 없자, 곧 8시 페어가 아까 보았던 문과 흡사한 환각을 만들어냅니다.
 
루이스 레너드:(환각이 생긴 후 몇 초간 기다렸다가, 다시 그 상태로 쿵쿵 두드려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조금 허탈하기까지 하다.)
 
환각이지만 향기마저 날 것처럼 생생한 새파란 장미. 그것들로 뒤덮인 문.
 
문의 환각과 함께 다시금 벽을 두드려보아도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장교가 뒤쪽에서 루이스를 부릅니다.
 
하인리히 장교:그쯤하지. 너무 파헤치려 들면 길할지도 모르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으니.
 
루이스 레너드:...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행동을 멈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들었던 이상한 소리도 그렇고... 결코 착각한 게 아니야. 뭔가 있어.)
 
비올라 카지안:(뭘 어째야 할지 모르는 채로 루이스와 장교 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괜찮아, 루이스……? 아무래도 이만 가야 할 것 같은데.
 
루이스 레너드:네... 일단 가야죠. (벽에서 물러난다.) ... 뭐였을까요, 그건?
 
비올라 카지안:그러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우리 모두 봤는데 어른들만 보지 못한데다, 찰나에 나타나 찰나에 사라져 버리다니. 우린 마법같은 이능력을 이미 다루는 사람들이지만…… 그거야말로 꼭 진짜 마법 같았어.
 
루이스 레너드:8시 페어도, 우리도... 그걸 만들어 낼 수 있을만한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지만 모두 아니란 것도 지적할만한 점이죠. 매일 확인하기 위해 전시관에 들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비올라 카지안:난 애초에 장미 씨앗은 보여주기 용이 아니면 잘 갖고 다니지 않아. 지지대가 있어야만 하는데다 가시가 나 있어서 구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거든. 그러니 우리도, 8시가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누가 그런 아치문을 우리 앞에 나타나게 한 걸까? (조용한 의문만이 쌓여간다.)
 
루이스 레너드:... 지금은 이렇게 고민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어 답답하네요. 저는 일단 축제 기간이 끝난 뒤에 도서관에서 문헌 조사라도 해 보려고요. 전설이나, 과거의 타이머 이야기 같은 거요.
 
비올라 카지안:같이 찾아보자. 도움이 되는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쩌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언과 관련된 현상일지도 몰라. (그런 거라면 일이 커진다. 괜히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듯했다.)
 
루이스 레너드:그러게요. 놀자고 나온 날인데, 괜히 머리 쓰게 됐네요. 그렇지만 그렇게 중대한 문제라면 확실히 살펴보아야 하는 게 맞고,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다른 장소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 너무 신경쓰진 마시고... 나중에. 나중에 해결하기로 해요.
 
비올라 카지안:그래도 오늘 축제는 정말 즐거웠어. 분명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거야. (여러 의미로 잊지 못할 날이 될 것 같았다.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중에.
 
관람은 끝났고, 조각에 불과한 타이머와 카운터에게 이별을 고할 때입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잊을 수 없는 장미 향기가 발목을 붙잡습니다.
 
타이머의 상징은 그저 시간일 텐데, 이곳의 시간은 멈춘 듯했고 오히려 때 이른 장미만 만개했습니다.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름도 뭣도 아닌 계절에 핀 장미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기적의 상징이었어요.
 
전시회를 벗어나, 도로를 걸어, 달에서 멀어지는 동안 때마침 광장의 시계탑이 정각을 알리며 울어댔습니다.
 
밤이 깊어 하늘은 어두컴컴합니다.
 
우연일까?
 
혹은 이 또한 어떤 운명인가?
 
그런 생각에 빠진 두 사람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따위 알지 못했습니다.
 
내일의 ‘그 일’이 훗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도 알 수 없었어요.
 
만약 알았더라면……
 
오늘의 우리는, 결단코 그 문을 열어젖혔을 테니까.
 
축제가 한창입니다. 거리는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하늘은 구름과 흰 새, 손수건과 종이 가루 따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타이머의 교복, 제복과 비슷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유난히 많습니다.
 
희고 고운 색으로 점철된 세계란 어찌나 완벽한지.
 
땅거미가 건물을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하늘은 딱 좋은 색으로 물듭니다.
 
오렌지 마멀레이드처럼 윤기가 도는 주황색이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구름은 어렴풋하게 사라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래,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꼭 그랬어요.
 
수도의 광장에는 커다란 무대가 설치됐습니다. 매해 이맘때쯤이면 설치하고 철거하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르내리는 흰 차양이 비스듬하게 하늘을 가립니다.
 
가장 어두운 밤이 찾아오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가라앉는 시간을 기다리며.
 
“언제 시작한대?”
 
“곧 시작할걸. 이제 10시잖아.”
 
“나 너무 기대돼.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객석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습니다. 어느 곳이랄 것 없이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무대 뒤편에 서 있는 타이머와 카운터의 귀에도 그들의 소리가 확연히 들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존재가…… 이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네, 오늘은 바야흐로 축제의 마지막 밤.
 
타이머의 존재를 드러내고, 카운터의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입니다.
 
‘사이좋은 파트너’의 모습을 연출하라고 내내 요구받은, 그 순간이에요.
 
인이어를 귀에 걸고,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이런저런 상황을 살핀 스태프 하나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스태프: 준비됐나요?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들 물릴 수도 없었지만.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옆의 반응을 살핀다.) 긴장돼요?
 
비올라 카지안:네, 네에……. (약 두시간 전쯤부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지금은 떨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다.) 벌써 5년째인데도 축제 무대는 하, 항상 떨리는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이런 사람을 도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나도... 참... 매번 색다르게 재미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수 있죠. 음, 이거 하나 알려드릴까요. 저도 실은 제법 긴장 중이에요. 다만...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중일뿐이죠.
 
비올라 카지안:정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전혀 긴장 안한 것처럼 보이는데. 대단하다, 루이스. 으음, 스스로를 속이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눈 감고 자기세뇌 같은 거라도 시도하면 되려나. (양손을 모은 채로 눈을 감고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않다…… 중얼중얼거린다.)
 
스태프: (그런 두 사람 지켜보다가) 신호하면 제0시부터 순서대로 나오면 돼요. 두 사람이 함께 나와야 하고, 되도록 친한 티가 나게. 친밀하게. 무슨 뜻인지 알겠죠? 손이라도 잡으면 더 좋고요.
 
루이스 레너드:네, 알겠습니다. (중얼거리는 비올라를 보면서 작게 킥킥, 웃다가 스태프에게 대답한다.) 비올라, 나가기 전에 손을 잡고 나가요.
 
비올라 카지안:소, 손까지?! (백짓장처럼 하얘졌던 얼굴에 조금씩 붉은기가 돌기 시작한다.) 괜찮겠어? 난, 나야 손 잡으면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긴 하지만……
 
루이스 레너드:그러라고 말씀하시니, 따라야죠, 뭐. (어깨 으쓱) 그리고 능력 쓸 때도 필요하잖아요. 전 괜찮아요. 오히려 비올라가 좀... (걱정이죠? 라는 말은 굳이 붙이지 않는다. 근데... 맥락상 알아듣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중.)
 
비올라 카지안:그럼 다행이긴 한데…… (뒷말은 안 듣고도 유추할 수 있었다. 한숨 푹 쉰다) 나도 내가 걱정되긴 해. 실수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미 몇 번이나 연습해보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지.
 
루이스 레너드:괜찮아요. 사람은 의외로 단순해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걸 티내지 않으면 이상함을 느끼지 않아요. 의연하게 대처한다면 다른 페어들이나 DOT 말고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리고... 마침 저는 그런 문제를 대비해 n가지 해결책을 미리 계획해둔 참이죠. (어쩐지 안경을 척! 하고 올릴 것 같은 표정)
 
비올라 카지안:루이스, 진짜 든든하다……. (걱정과 긴장이 가득하던 초록빛 눈에 선망이 반짝반짝거린다. 이전의 축제에서는 다른 타이머들과 함께 있었지만, 각 시간별로 소개되는 무대에서는 오롯이 혼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광활한 무대가 얼마나 버겁게 느껴졌던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파트너가 생긴 것도, 파트너가 루이스처럼 든든한 사람인 것도 무척이나 운 좋은 일이다.) 덕분에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스태프는 카메라는 정중앙의 2번을 보라던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사회자의 지시를 잘 따르기만 하라는 시시콜콜한 조언들을 늘어놓습니다.
 
우리에게 한참 무언가를 떠들던 그는 곧 “네, 네. 준비 다 됐습니다.” 누군가의 호출이 떨어졌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습니다.
 
무대 뒤편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이 화려한 쇼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거든요.
 
이곳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 어느 곳보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위한 자리인데, 우스울 뿐입니다.
 
시곗바늘도 평소처럼 움직입니다. 하나, 둘, 셋…….
 
공연 시작인 10시까지는 채 3분이 남지 않았습니다.
 
무대로 올라가는 문을 통해 환한 조명이 떨어집니다.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옆에 선 사람의 존재감만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들뜸과 긴장감이 뒤섞이는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었을 때,
 
스태프: 자, 이제 시작합니다. 제0시 페어부터 올라오세요.
 
스태프가 손짓했습니다.
 
제0시부터 순서대로 타이머와 카운터의 소개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익숙하게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팔려나간다면, 이 순간 또한 온갖 곳에서 부티나게 팔리리라고.
 
“제3시 페어 올라가세요!”
 
어느덧 비올라와 루이스의 순서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고) 올라가죠! 비올라, 그냥 웃어요. 어제 꽃 줬던 그 애들 생각하면서요.
 
비올라 카지안:(올 것이 왔구나. 떨지 않으려던 것도 잊고 사시나무처럼 와들거리기 시작한다. 파트너의 손은 거의 구원의 동앗줄이나 다름없기에, 저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자. 루이스의 조언대로 나 스스로를 속이고, 어제의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응, 가, 가자.
 
지시를 따라 무대 위로 걸음을 옮기자, 숨 막힐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발아래에 선 사람들의 수는 도저히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골목에서 겪었던 인산인해는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보일 수준이었습니다.
 
케레스! 케레스! 케레스!
 
환호성이 터지고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비올라의 코드네임을 연호합니다.
 
그중에는 종종 루이스를 향한 시선이 섞여 있기도 했습니다.
 
타이머를 위한 자리에 등장한 새로운 사람이라니! 이상히 여길 만도 하죠.
 
타이머가 부관을 들였다더라. 그런 입소문이 돈 탓인지 그다지 부정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의문이 가득했습니다.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6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몰아치는 압도감에 다리가 조금 떨려오지만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괜찮아요.
 
빼곡한 사람들의 수에 비올라는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맞잡은 손에 한 차례 힘을 줍니다.
 
조명 탓인지 홧홧했습니다.
 
손을 맞잡고, 한 걸음, 두 걸음, 무대의 중앙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완벽한 중앙에 섰을 때,
 
비올라 카지안:(무대 위와 무대 바로 근처의 바닥에는 두 사람이 정해둔 꽃의 씨앗들이 미리 뿌려져 있었다. 너무 떨리는 탓에 호흡마저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애써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맞잡지 않은 쪽의 손을 내밀고, 공기를 가볍게 움켜쥐듯이 손을 틀면 씨앗들이 일제히 움트기 시작한다. 초록빛 새싹이 피어나고, 긴 줄기를 내밀고, 순식간에 봉오리가 맺히더니 영롱한 꽃송이가 터지듯 피어난다. 축복을 상징하는 파란 장미와 붉은 포인세티아. 강렬하게 대비되는 꽃들 사이로 맑은 마음과 순수한 사랑을 의미하는 하얀 안개꽃이 점점이 피어나 조화를 더한다. 뒤이어 길다란 초록빛 덩굴이 내리쬐는 조명을 받아 더욱 화려하게 반짝이는 생화 사이를 비집고 자라난다.)
(이제 네 차례야, 그리 말하듯 루이스를 바라본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홍채는 제3시의 능력을 가졌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생그러운 잎사귀의 색을 닮았다.)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의 신호를 받고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이 자리에 서기까지 제법 우여곡절이 있었지. 난데없이 세계의 구원자가 되질 않나, 그리고 갑자기 능력이 사라지질 않나. 그래도 제법... 재미있었다. 평범함을 벗어나지 않는 길만 걸어가다가 이런 예측불허의 삶으로 떨어진 일은 말이다. 나는 어떤 순간에서도 완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제는 그게 결실을 볼 차례지.
비올라가 피워낸 덩굴 바통을 받는다. 처음에는 가볍게 까딱까딱, 내 수족처럼 잘 움직이는지 체크. 문제 없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까딱거리던 덩굴을 크게 휘둘러 꽃을 한데 그러모은다. 그리고... 마지막. 폭죽을 터트리듯이... 관객석으로 힘차게 던진다!)
(장미와 포인세티아, 안개꽃이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의 머리 위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다. 계획한대로, 훈련했던대로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이 쾌감은, 결코 혼자서 이뤄낸 게 아니지. 옆의 파트너를 바라보며 환히 웃는다.)
 
절정에 이른 계절의 색채를 담은 꽃들이 삽시간에 가득이 피어나고, 루이스의 덩굴이 그 꽃들을 단번에 훑어 공중에 흩날립니다.
 
축복과 사랑의 꽃말을 담은 생화가 폭죽마냥 쏟아집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무대를 훑고 지나가면, 달큰하고 생그러운 꽃향기가 가득 풍겨왔습니다.
 
시간의 현신. 세계의 구원. 타이머와 카운터.
 
그 이름을 증명하는 능력의 존재에,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비올라와 루이스가 모든 것을 끝낸 후에도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습니다.
 
긴 침묵을 깬 것은, 무대 한 편에 비켜 서 있던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자:이 얼마나 아름다운 힘인가요! 순간 제가 무대가 아닌 정원에 서 있는 줄로만 알았답니다.
도밍게즈에게 사랑받는 타이머가 마침내 이 자리에 섰군요. 오, 그리고 사랑하게 될 타이머도요. 케레스, 우리에게 직접 소개해주겠어요?
 
매해, 이 쇼맨십의 사회를 맡은 여자입니다.
 
비올라 카지안:(몇 번이고 연습해보기는 했지만, 이토록 큰 규모로 꽃을 피우고 흩뿌린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저 또한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가득 매료되었다. 앞다투어 손을 뻗어 꽃을 붙잡고, 향을 맡으며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 눈에 한가득 담다가 사회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방금의 무대로 흥분한 탓인지, 생각한 것보다는 긴장이 많이 풀렸다. 자연스럽게 미소까지 지으며 답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3시, 식물의 타이머 케레스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와 같은 3시의 능력을 지닌 파트너예요. (루이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마침내 여러분에게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자연스럽게 비올라와 인사를 나눈 사회자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루이스 레너드:안녕하세요. 아마 어제... 저를 보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길거리에서나, 광장에서나. 축제가 있는 어딘가에서요.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이실테죠. 저는 디케, 식물을 다루는 제3시의 카운터입니다. 앞으로는 여기 있는 타이머 케레스와 파트너가 되어 활동할 예정이지요. 도밍게즈의 모두 앞에서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왼손을 가슴에 얹은 채, 가볍게 목례하여 정중하게 인사한다.)
 
사회자:디케! 반가워요. 이 자리에서 소개될, 타이머의 새로운 파트너를 오매불망 기다렸어요.
 
사회자는 그들이 타이머의 곁에서 세상을 함께 구원할 카운터라는, DOT의 진부한 대본을 아주 그럴싸하게 연기합니다.
 
새로운 구원자. 타이머의 파트너.
 
시간이 선택한…… 또 다른 증명.
 
루이스의 능력을 두 눈으로 보고, 카운터의 존재를 실감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객석이 술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자라는 말에 눈을 홉뜨고, 숨을 들이켜기도 했어요.
 
세계 멸망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으며…… 빼내기엔 너무 두려운.
 
그런 세계 멸망의 징조를, 정확하게 깨부수는 존재의 등장인걸요.
 
비올라의 코드네임을 연호하던 외침 사이에 루이스의 코드네임이 자연스럽게 섞여들었습니다.
 
태초부터 두 사람이 짝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누구도 그 존재에 의문을 표하거나 반감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카운터의 존재를 실감하는 것도 잠시, 사회자는 익숙하게 다음의 순서를 진행합니다.
 
사회자:모두들 이 새로운 구원자의 등장이 짜릿하시겠지요? 그런 만큼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겠어요.
DOT의 말로는 타이머와 카운터는 서로 선택받은 운명이라던데,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부터 물어봐야겠죠?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졌나요?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그렇습니다. 음, 일례로... 카운터의 운명을 부여받기 이전, 저는 개인적으로 타이머 케레스에게 관심을 두고 활동을 찾아보곤 했어요. 그렇지만 처음 인사하는 날 직감할 수 있었죠. 만일 내가 케레스의 얼굴을 알지 못했더라도, 분명히 열두 명의 타이머 중 나의 파트너를 찾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요.
 
비올라 카지안:(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운명이라는 단어는 낭만적이지만, 그만큼 쉽게 찾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디케를 처음 본 순간 '아, 이게 운명이구나' 라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모든 감각이 그에게로 이끌리는 기분이었죠.
 
사회자:그토록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니, 과연 신과 세계에게 선택받았다는 타이머와 카운터네요! 놀라워요.
디케, 타이머가 됐을 때 상당히 놀랐겠어요. 어떻게 능력을 자각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모두 궁금해하죠. 짧게라도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루이스 레너드:아무래도... 전 이미 열두 살이 한참 지나고도 남았으니까요. 여러분도 아마 동의하시리라고 믿어요. (웃으며 손목을 들어 보인다.) 운명이 아니었다면 평생 하지 않았을 문신이죠.
음... 저는 그때 평소처럼 학교에 있었어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어요.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선 걸 빼면요. 그러다 오후 나절쯤 되었을까... 갑자기 손목에서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대수롭잖게 넘기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냥 셔츠 팔목을 걷었는데, 이런 게 생긴 거예요. 그래서... (쨘! 하고 두 팔을 양쪽으로 펼치며) 이후로는 별 거 없어요. DOT에 연락을 했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괜히 죄송하네요.
 
사회자: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나타난 시간의 증표였군요. 그날 이후로는 일상이 완전히 뒤바뀌었겠지요? DOT에서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혹시나 짓궂게 구는 타이머는 없고요? 텃세라고들 한다죠. 하인리히 장교님이 없는 틈에 살짝 말해 봐요. (장난스레 말한다)
 
루이스 레너드:글쎄요, 사회자님이 보시기에는 어떤가요? 제가 변화나 텃세에 쉽게 굴복할 얼굴로 보이시나요? (자신감있는 표정을 하고 웃으며 당돌하게 맞받아친다.)
 
사회자:전혀요! 과연 세상을 지켜나갈 구원자네요. 호락호락하지 않은걸요? (하하, 웃고는)
디케의 파트너에 대한 생각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군요. 케레스는 다른 타이머들 중에서도 대중에 드러나는 모습이 워낙 적은 편이잖아요? 케레스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저는 자신있게 짐작할 수 있답니다. 어떤가요, 파트너로서의 케레스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이스 레너드:아, 이건...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네요. 10점 만점에 9점을 주겠습니다.
조금 학술적인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지루하시지 않게 간단하게만 말하겠습니다. 최근 5년치 통계를 살펴보면 투입율 대비 구조 성공률이 가장 높은 타이머는 다름 아닌 제 파트너 케레스입니다. 아, 물론 다른 타이머를 비하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가장 잘 아실 겁니다. 통계를 인용한 이유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케레스는 도밍게즈를 구원한다는 본질에 가장 집중하는 타이머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1점을 뺀 이유는... 세상의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9점입니다.
 
비올라 카지안:(루이스가 자신을 나쁘게 말하지 않으리란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작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 정도는…….
 
루이스 레너드:(눈을 살짝 깜빡거리며 신호를 준다. 비올라,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 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비올라 카지안:(신호를 알아듣고 얼른 미소지어 보인다.) 사실 통계율까지는 미처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파트너가 저를 좋게 봐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저는 미숙한 면이 많은 타이머예요. 그런데도 디케가 저를 많이 응원해주어서 의지가 돼요. 앞으로도 디케의 상냥함과 의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만하면 잘 대답했지? 표정으로 말한다)
 
루이스 레너드:(충분해요, 멋졌어요. 그런 의미를 담아 미소지어보인다.) 저야말로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미숙하지만, 케레스와 함께 발맞춰 걸으며 성장해나가고자 합니다. (잠깐 손을 놓고, 아까 관객들에게 인사했듯 비올라에게도 가볍게 목례한다.) 새삼스럽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파트너.
 
비올라 카지안:(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무대를 준비하는 내내 걱정과 긴장감으로 인해 무거운 돌덩이로 짓눌리는 것만 같았는데, 지금 이 순간 그 돌덩이가 깔끔히 부서지는 듯했다. 훨씬 편안하게 마주 미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잘 부탁해.
 
사회자:아주 훌륭하네요! (짝짝 박수를 치며 관객들에게도 박수를 유도한다.) 비록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제3시 페어의 서로를 향한 유대감과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자라는 본질에 가장 충실하는 타이머와, 꼼꼼하고 현명한 자질을 갖춘 카운터가 만났으니 그야말로 빼어난 조합이네요. 앞으로도 디케와 케레스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무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남은 순서를 기다릴 뿐입니다. 무대 뒤편에 내려오자 스태프가 의자와 마실 것을 갖다 줍니다.
 
스태프: 수고하셨어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비올라 카지안:휴우……. (내려오는 동안 긴장이 풀린 다리가 후들거려서 하마터면 중심을 잃을 뻔했다. 물을 받아들어 몇 모금 마신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네. 정말 고생했어, 루이스. 엄청 멋있었어.
 
루이스 레너드:감사합니다. 비올라도... 정말 잘 하던데요. (물을 벌컥벌컥, 크게 두어 모금 마신다.) 시작을 잘 끊어준 덕분에 저도 잘 해낼 수 있었어요. ... 하이파이브? (손을 슬쩍 내밀며)
 
비올라 카지안:네가 긴장을 풀어준 덕분이지. 우리 무대 공연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예상 이상으로 잘해낸 것 같지? 원래 난 내가 나온 인터뷰 영상은 안 봤는데, 이건 나중에 방송으로 다시 보고 싶어. 꽃이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거든. (어색하게 손을 맞부딪히곤 이내 작게 웃어버린다) 이번만큼은 내 스스로가 창피하지 않았어.
 
루이스 레너드:저는 조금, 아주 조금 도왔을 뿐이에요. 기운을 북돋운 것 이외 나머지는 다 비올라 스스로 해낸 것들이고요. 그 많은 식물을 피워낸 건 온전히 비올라의 힘에서 비롯된 거잖아요.
 
비올라 카지안:그래도. 인터뷰에서도…… 그렇게까지 말해줄 줄은 전혀 몰랐거든.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몰라. (파트너가 되기 전에도 너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구나 싶어서. 나처럼 스타성도 없고 숫기도 없는 타이머여도 꾸준히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이,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는 힘을 준다.) 덕분에 발전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여러모로 말이야.
 
다음 순서도 무탈하게 흘러갑니다.
 
누군가 내려오면 누군가 올라가고, 능력이 무대 위를 환하게 장식하고,
 
사람들의 환호성과 연신 쏟아지는 익숙한 이름들을 듣다가,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와 QNA가 이어지는 식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차례입니다. 제13시, 어둠의 타이머와 카운터의 순서예요.
 
두 사람은 오래 기다린 것이 지루했는지, 금세 계단을 오릅니다.
 
그들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대의 조명이 먹히고, 어둠이 가득해집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제0시 페어가 띄운 빛이 희미하게 별처럼 반짝입니다.
 
밤보다 안온하고, 검정보다 진한 어둠이 완벽히 무대에 내려앉았을 때,
 
파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대 뒤편의 조명이 꺼집니다.
 
정전이라도 온 것처럼, 혹은 능력에 잡아 먹힌 것처럼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비올라 카지안:꺄악! (저도 모르게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13시 페어가 주변을 어둡게 만드리란 것 정도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무대 뒤의 조명까지 영향을 주겠단 말은 못 들었는데.)
 
루이스 레너드:비올라, 괜찮아요? (불이 팍 꺼진 순간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만, 옆에서 더 격한 반응이 나와... 어쩐지 진정하게 됐다.) ...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 왜 여기까지 영향이...
 
비올라와 루이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가까이 있던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도 놀랐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리고……
 
<듣기> 판정
 
루이스 레너드:
듣기
기준치: 65/32/13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위가 온통 조용합니다.
 
비올라 카지안:으, 응. 소리가 커서 순간 깜짝 놀라긴 했는데…….
(여전히 어깨를 움츠린 채로 조심스레 주변을 돌아보다가) ……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 소리로 엄청 소란스러웠는데. 스태프 분들은 또 어디에…….
 
사위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사회자는 더 말을 하지 않았고, 무대 뒤편에서 바삐 소리치던 사람들도 모조리 조용해졌습니다.
 
똑딱똑딱, 끊임없이 흘러가던 시계 소리도 멈춰버렸어요.
 
제13시 페어가 어둠을 거두자, 인공적인 태양도 조명도 없는 온전한 밤이 찾아왔습니다.
 
희미하게 보라색이 섞인 하늘에는 불온한 별들이 총총 떠 있습니다.
 
붉은색 별이에요. 달도 어쩐지 붉은 듯했어요.
 
그리고 달빛 아래 드러난 광경은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산 사람도, 죽은 것들도, 움직이지 않고,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들마저……
 
모두 멈춰버린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구름도 흘러가지 않았고, 달도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멈춰 서 있습니다.
 
12시를 알려야 하는 광장의 시계탑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세계의 종말이라기에도, 축제의 마무리라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이었습니다.
 
이 순간이 소설이라면, 아마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을 겁니다.
 
4월 20일, 도밍게즈의 건국을 축하하는 마지막 날.
 
타이머와 카운터만을 남겨두고, 세계가 멸망했다.
 
……라고!
 
루이스 레너드:... ... (믿기지 않는 상황에 갖고 있는 전자기기를 모두 작동시켜보고, 주변을 필사적으로 둘러보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만 빼고 모든 것이 정지했다. ... 이런 위기 상황을 대비한 해결책은 세워놓지 않았다.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당장 행동해야 하는데, 전혀 믿기지가 않아서 비효율적인 질문부터 한다.) ... 비올라, 이거... 비상상황 맞죠.
 
비올라 카지안:(주변의 스태프가 조각처럼 얼어붙은 것을 보았을 때부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무대 위로 뛰쳐올라가자 보인 건 더욱 가공할 만한 광경이었다. 사회자도, 수많은 관객들도, 심지어 구름과 달마저 멈추어버린 광경이라니. 이게 예언이 말한 멸망이었다고?)
(재해가 일어났을 때의 프로토콜대로 다급하게 DOT의 본부에 연락을 돌렸고, 그 다음은 각 구역의 DOT 지사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 어느 것도 가닿지 않는다. 몇 번이나 떠오르는 통신 불가 지역이라는 문구에 그제야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이렇게 멸망해버렸다는 것을. 그런데, 대체 왜 우리만은 움직일 수 있는 거지?) …… 응. 지금껏 겪어보지도 못한 심각한 상황. (대답하면서도 현실같지 않아 멍하기만 했다.) 말도 안 돼. 지금 이 순간에 이런 형태로……
 
루이스 레너드:(긴급 프로토콜을 따라 행동하는 비올라를 다소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린다. 안 돼,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행동은 빠르게, 마음은 고요하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큰 목소리로 외친다.) 모두, 잠시만 주목해주십시오! 3시 카운터 디케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일단 팀을 셋으로 나눠서, 한 팀은 문헌 조사를, 다른 한 팀은 현장 조사를, 그리고 마지막 팀은 어제 전시관에서 보았던 푸른 장미 아치문을 조사하러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적성에 맞게 팀을 나눠 당장 행동에 옮기고자 하는데요.
 
당황해서 웅성웅성거리던 타이머와 카운터들은 루이스의 침착한 지시에 조금씩 진정하며 그의 앞에 모여듭니다.
 
"그럼 우리 페어는 문헌 조사를 하러 갈게."
 
"우리도."
 
비록 전혀 생각지 못한 형태의 멸망이지만, 여러 재해를 경험해본 탓인지 자연스럽게 지시에 따르고 대처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몇몇 페어씩 나뉘어 팀을 이루었네요. 루이스는 어느 팀에 속하나요?
 
루이스 레너드:(각 조사에 자원한 페어를 휴대전화에 기록하며) ... 좋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페어들은... (인원을 세어 보며) 제가 임의로 배정하겠습니다. 식물과 환각, 예언, 기억의 페어는 아치문을 조사하러 가도록 하죠. 치유와 바람의 페어는... 현장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어둠의 페어는 문헌 조사 팀으로 배정하고요. 만일 본인들이 다른 조사에 더 적합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그 팀으로 옮기셔도 좋습니다. 이의 없으시면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연락은... 제 0시와 13시, 3시의 능력을 이용하겠습니다. 문헌 조사 측에서 무언가 발견하거나 위기 상황이 생긴다면 어둠을 하늘로 쏘아올려 주십시오. 마찬가지로 현장 조사에서는 빛을, 전시관 조사에서는 식물의 기둥을 하늘로 올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숨쉴 틈도 없이 본인이 계획한 내용을 읊고, 동시에 휴대전화에 기록한다.) 이 내용은 전송을... 할 수가 없으니, 카메라로 노트를 찍어가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준비되셨으면 즉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올라 카지안:(루이스가 빠르게 내용을 정리하고 팀을 나누는 동안, 귀로는 들으면서도 눈은 멍하니 멈추어버린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범람하는 재해라면 모든 능력을 쏟아부어서라도 어떻게든 대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시간에 기여하는 능력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구하지 못한 이들, 막아내지 못한 풍경을 보았을 때의 감정들이 다시금 천천히 치밀어오른다. 무력감과 절망이란 감정들이.)
 
루이스 레너드:(각 팀이 출발하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본인이 속한 팀을 바라본다.) 출발하죠. 제가 아직 근처 지리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타이머 분께서 선두에 서 주셨으면 합니다. (한 페어가 자원하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출발한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시간 절약에 초점을 둔 말과 행동이다.)
(빠른 걸음으로 전시관으로 향하며, 제 옆에서 두려운 눈빛을 하고 걷는 비올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비올라, 지금은 비올라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어요. 나는 기다릴 수 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해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내가 감히 조언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선배로서, 숱한 구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 ... (너무 매몰차게 말한 게 아닌가 싶어, 잠시 정적 후에 덧붙인다.) 이 상황은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알았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현재에 집중해요. 이게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이에요. 나를 모방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당신은... 당신만의 방법이 있겠죠. 빨리 떠올릴 수 있길 바라요.
 
비올라 카지안:응…… 무슨 뜻인지 알아. (결국 루이스가 모든 조를 정리하고 지시를 내리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를 따라 비척비척 걸어가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고, 길가에서 멈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선이 한참이나 그에게 머물렀다.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 흔들리기보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 행동하는 게 옳다는 걸 아는데도 이 상황을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환호성을 보내고, 바쁘게 움직이고, 꽃을 붙잡으며 향기를 맡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멈추어버렸다. 자신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정말 이게 멸망이라면 너무나도 최악의 형태잖아. 솔직히 문헌을 조사하거나 사람들을 살펴본대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요원했다. 그야 이런 일은 아무리 잔뼈굵은 DOT라도 지금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었을 테니까.)
(우리가 이미 사라져버린 아치문을 찾을 수 있을까……?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붙잡아봐야 하는 걸 아는데도, 반짝이던 세계가 순식간에 모래로 무너져버린 것 같은 공허와 막막함이 저를 덮쳐왔다.)
 
문헌 조사와 현장 조사, 아치문 조사로 나뉜 팀은 각각의 위치로 이동합니다.
 
세계는 타이머와 카운터를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미처 구원을 시도할 틈도 없이 세계는 멸망을 맞이해 버렸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해는 고개를 내밀지 않을 것입니다.
 
달과 별은 그 자리에 풀칠한 것처럼 불온한 색으로 빛날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멈춰 서 있어요.
 
웃고 떠들던 그대로, 손을 잡고 걷던 그대로, 돌아서던 그대로, 박수갈채를 보내던 그대로.
 
무구하고 기쁨에 찬 얼굴이 생생합니다. 자신의 시간이 멈췄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폼페이의 그 날처럼!
 
다른 점이라면 화산재 대신 부서진 빛만 떠다닌단 걸까요.
 
문득, 전시관에서 보았던 조각상들이 떠올랐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퍽 닮았거든요.
 
사람이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마저 멈추어 버린 걸까요?
 
혹은 생생하게 움직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라고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을 확신하는 건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은 왜 멈췄을까? 답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맞이했고, 답을 내놓고, 정답인지 오답인지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자, 이상했던 징조를 돌이켜 볼까요.
세계 멸망의 예언과 전 세대 예언의 타이머가 내놓았던 해결 방법. 갑자기 나타난 카운터와 홀연히 사라진 새파란 장미의 아치문…….
불가능과 기적이 순서대로 교차하는 배치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떠들던, 일어날 리 없다고 부정한 세계 멸망.
 
:시시각각 다가오던 세계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해낸, 한 줄의 예언.
타이머는 오직 하나뿐이라던, 세계의 섭리를 깬 카운터의 등장과,
기적을 상징하는 새파란 장미의 아치문.
데칼코마니처럼 좌우의 아귀가 딱 들어맞습니다.
이것이 만약, 정말로 예정된 멸망이라면……
타이머와 카운터로서,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건 아닐까요.
 
:그래서 예언의 타이머는, 카운터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멸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걸지도 몰라요.
물론 모두 추측입니다.
 
시계는 울지 않습니다. 세계는 고요합니다.
 
새파란 장미는 무르익었지만, 꽃잎을 떨구지 않아요.
 
<이성> 판정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루이스는 직감적으로 아치문을 떠올렸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던 아치문이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언가의 징조였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전시관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졌었죠.
 
어쩌면 전혀 다른,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지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3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전시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나치게 익숙한 생김새였습니다. DOT의 본관을 본떠 지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거든요.
 
마중을 나온 전시관의 담당자가 “일부러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시관은 본관을 본떠지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오히려, 전시관이 아니라……
 
루이스 레너드:(앞서가는 동료들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멈춘다.
걸으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전시관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할지 이동하면서 생기는 공백 동안에 계획을 세워 놓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그런데... 상황을 복기하다 보니 짚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만일 그 문이 사라졌다면, 그리고 다른 어느 곳에 다시 나타났다면, 그것은 어디에 위치해있을 것인가?'
타이머를 닮은 카운터, 멸망을 둘러싼 정반대의 예언, 그리고 DOT 건물과 동일하게 생긴 전시관. 그렇다면... 이미 어제 조사를 시도해본 곳 대신 새로운 곳으로, 즉, DOT로 향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잠시만요! (앞서가는 동료들에게 소리쳐 그들을 멈추게 한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시관이 아니라, DOT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제 그곳을 조사했었고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죠. 그렇다면 같은 환경의 다른 건물에서 시도해보는 쪽이 더 가능성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해 드릴테니, 바로 이동하죠!
 
비올라 카지안:뭔가 생각이 있는 거지? (루이스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행선지를 정할 사람은 아니다. 너를 본 지 아주 오래 되지는 않았어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 아까도 바로 다음 행동을 생각해낸 루이스였으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응, DOT로 가자.
 
아치문 조사를 맡은 다른 페어들도 루이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루이스와 비올라는 DOT로 행선지를 변경합니다.
 
DOT 본관은 언제나처럼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지금도 그렇습니다.
 
청동으로 빚은, 남색으로 덧칠한 문을 지나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본관의 로비입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언제나 그렇듯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한.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도,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도 모두 멈춰선 상태입니다.
 
그때, 전시관의 구조가 어땠더라.
 
전시관을 모두 돌고 난 후, 안내 데스크의 옆에 세워졌었지.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돈 시선이 비로소 장미 아치가 있던 곳에 다다릅니다.
 
그곳에 있던 것은,
 
엘리베이터입니다.
 
띵.
 
멈춘 시간을 깨트리고, 요란한 소리가 울립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였습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선 채, 내려갈 채비를 마치고 있습니다.
 
열린 문이 어쩐지 우리를 기다리는 괴물의 입속인 양 께름칙합니다.
 
우연인가?
 
혹은 운명인가?
 
새파란 장미는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의 문설주는 둥글긴커녕 각지고 네모나지만…… 위치는 분명히 같았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시간이 멈췄다면 엘리베이터 또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어째서 이것만은 움직이는 건가요?
 
그러나 장미 아치와 달리, 엘리베이터는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들어오라는 것처럼, 문을 닫지 않고 내내 그렇게 서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루이스 레너드:비올라, 이거... 그때의 엘리베이터 맞죠. (엘리베이터 문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우리가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러 갔을 때 하인리히 장교가 내렸던...
 
비올라 카지안:응, 맞아. (모든 것이 멈추었는데, 이 엘리베이터는 꼭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우리를 향해 입을 벌린다. 더없이 불길하고 또 불안했다. 하지만, 정확히 아치문이 있던 자리에 나타났다면……) 뭔가 의미가 있는 거겠지……?
 
루이스 레너드:... 그렇겠죠. 우리는 모르는 무언가를, 간부급 군인들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그들에게 물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걸 타는 수밖에 없겠어요.
 
비올라 카지안:(침을 한 번 삼켰다. 두렵고 걱정되었지만, 루이스의 말대로 아치문을 찾아 오니 다음 길이 열리지 않았나. 세상을 잃는 것과 제 두려움을 저울에 놓는다면 무게가 쏠리는 쪽은 자명한 것이다.) 그래, 타자.
 
그러나 타이머와 카운터가 모두 탄 후에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몇 층으로 갈지, 버튼을 눌러주어야 움직일 모양입니다.
 
지하 1층부터 4층, 그리고 옥상까지. 총 6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몇 층으로 가야 하지?
 
루이스 레너드:(몇 층을 눌러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비올라의 머리카락을 보고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래, 지금과 비슷한 위치에 비슷한 분위기였지. 며칠 전을 회고하며 천천히 말을 꺼낸다.) 분명 제 기억에 따르면... 하인리히 장교는 지하 2층에서 올라왔어요. 그날은 정말 당황스러웠기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어요. 존재하지 않는 층이라 기억에 좀 더 인상적이기도 했고요. 군의 기밀 시설이니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도 지금 막 떠오르네요.
그러니까, 엘리베이터 어딘가에 비밀 장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층을 모두 눌러본다거나 보이지 않는 버튼을 찾는다거나. 숨겨진 층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 못 찾는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능력을 사용해 엘리베이터를 뚫고 가야겠지만...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길 바랍니다. (타이머와 카운터 모두에게 외친다.) 다들 흔적을 조사해주세요!
(엘리베이터 버튼이 달린 벽을 아래서부터 위로, 천천히 손으로 전부 훑는다. 움푹 들어가거나 유독 튀어나온 부분이 없는지 체크해본다.)
 
하인리히 장교를 찾아갔었을 때를 기억합니다.
 
그가 분명 지하 2층에서 올라왔었지요.
 
비올라 카지안: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대단하다 루이스. (전혀 짐작도 못했단 표정으로 층수를 표시하는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장교님이 어디서 올라오시는지는 신경쓸 틈도 없었거든. 지하 2층이 정말 아치문이나 멸망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장교님은 이 사태마저도 예상하셨을까? 네 능력이 나에게 넘어왔던 때도 아무렇지 않게 별일 아니라고 말씀하셨었지.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분은? 장교님 말고도 DOT에 속한 이들은 전부 예상하고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아무것도 미리 설명해주지를 않는 걸까. 상념에 빠진 채로 버튼을 찾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
 
<초능력> 판정
 
루이스 레너드:
이능력 Roll
기준치: 45/22/9
굴림: 3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떤 위화감이 움틉니다. 능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잠잠하던 그것들이 요동칩니다.
 
정확히, 엘리베이터의 버튼 중 가장 아래, 긴급 호출 버튼을 가리킵니다.
 
꼭 그것을 누르라는 것처럼!
 
제 8시 카운터:(능력을 사용해 면밀히 버튼을 들여다보더니) …… 이거, 단순한 비상용 버튼이 아니야.
 
제8시의 카운터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모두 깨닫습니다.
 
버튼에, 환각이 걸려 있노라고.
 
마치 비상 호출 버튼인 것처럼. 원래 지하 2층으로 향하는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상당히 정교한 방식의 환각입니다. 만져본다고 해도 손끝에 걸리는 홈 따윈 없습니다.
 
루이스 레너드:...!!! (요동치던 몸안의 기운과, 제8시 페어의 선언이 모두 증명해주었다. 확실하다. 정답을 단번에 잡아냈다는 기쁨에 눈빛이 더 날카로워진다. 마치 단숨에 모든 걸 끝내버릴 기세다.) 혹시, 이 환각을 해제하실 수 있으신가요? 혹은, 굳이 해제하지 않더라도 원래의 기능대로 작동할테니 그냥 누르면 될까요?
 
제 8시 카운터:어차피 눈속임용일 뿐이야. 그대로 눌러도 될 것 같아.
 
루이스 레너드:알겠습니다. 그럼... (지체없이 긴급 호출 버튼을 누른다.)
 
그 버튼을 누르면, 파란 LED 램프가 점등합니다.
 
엘리베이터의 안내판에는 정확히 B2, 지하 2층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공간입니다.
 
<행운> 판정
 
루이스 레너드:
기준치: 70/35/14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천천히,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도르래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평소보단 훨씬 깊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지하 2층이라니.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구태여 존재 자체를 숨긴 것은 무엇을 위함이란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불이 꺼진 탓일까. 옆에 선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위가 어두웠습니다.
 
제13시 페어가 내린 어둠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독약 냄새가 싸하게 코끝을 스칩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내키지 않는 냄새입니다. 병원이라기엔 지독하게만 느껴집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일까요?
 
비올라 카지안:어, 어두워. (눈앞에 새까맣게 펼쳐진 어둠과 기이하게 강한 소독약 냄새에, 차마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나서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린다.) 본관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는데…….
 
루이스 레너드:(소독약 냄새... 꼭 동관에 머무르며 여러 검사를 받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눈을 찌푸리고 뭐라도 보려고 노력하지만, 제 이능력은 신체를 강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 될리가 없다.) 그러게요... 이런 공간에 대해서는 설명들은 적이 없어요. 비올라도 모르는 걸 보면 철저히 우리에게 숨길 의도로 만든 공간이겠어요.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고 하면... 현재 환각의 능력을 쓰는 이들조차 버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점 정도일까요. 우리의 이전, 한참 이전부터 계획되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여하튼... 여기서 지체할 수만은 없을테니, 일단은 이거라도 의지해서 나아가봐야겠는데요. (휴대전화의 불빛을 흔든다.) 만일을 대비해 한 팀만 여기에 남는 걸로 할까요?
 
그때, 다른 페어가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한 발을 내딛자 자동으로 불이 켜집니다. 센서가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더 갈라지지는 않아도 되겠군요.
 
금세 주변이 환해집니다.
 
불이 켜지고, 지하 2층의 모든 곳이 밝은 빛 아래 들어섰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오...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가,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리며 이내 고개를 다시 원위치시킨다.) 다행이네요. 그럼 모두 출발합시다.
 
비올라 카지안:응,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빛 아래 드러난 곳에는……
 
14개의 [원형 유리관]과 [컴퓨터 PC], [멈춘 연구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원통]이 놓여 있습니다.
 
안쪽에는 [철제문]이 딸려 있습니다.
 
여러 대의 CCTV가 모서리에 매달려 있었지만, 모두 멈췄는지 움직이거나, 액정을 빛내진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수상쩍기 짝이 없습니다. DOT 본관 지하에, 이런 것들이 왜 필요로 한단 말인가요?
 
루이스 레너드:(두리번거리다가 컴퓨터로 향한다. CCTV 영상이나, 연구 자료같이 참고할만한 것들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엘리베이터와 센서 등이 작동하기에 기대했는데, PC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어떻게 작동시킬 방법이 없나?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화면 보호기 버튼과 본체 전원 버튼을 달칵달칵 눌러본다.)
 
컴퓨터는 아예 멈추어버린 상태로, 마우스 커서도 움직이지 않네요. 소용이 없어 보입니다.
 
루이스 레너드:(기왕이면 컴퓨터도 엘리베이터랑 같이 움직여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아쉬운 표정을 한다. 컴퓨터 옆을 쉽사리 떠나기가 힘들어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탐색하다가, 그 근처에 있는 희생자... 연구원에게로 다가간다.)
 
어쩐지 얼굴이 낯익더라니. 연구 보고를 설명하고 지시한 애쉬입니다.
 
그 또한 [가운]을 입고 [커다란 책]을 든 채 조각상처럼 꼿꼿하게 멈춰버렸습니다.
 
루이스 레너드:(가운의 주머니를 뒤져본다.)
 
사원증 하나와 담배 한 갑, 라이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흡연자셨군... 사원증만 챙겨가려다, 만일을 대비하여 세 가지 모두를 챙긴다.)
(다음은... 저 유리관인가. 무엇이 담겨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다가간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선 원형 유리관에는 모두 정체불명의 액체가 꽉 차 있습니다.
 
투명한 파란색으로 물든 그것은 꼭 장미의 색을 훔친 것처럼 흐릿합니다.
 
각 유리관에는 숫자와 간단한 낱말이 적힌 네임택이 붙어 있습니다.
 
〈제0시, 빛〉, 〈제1시, 물〉, 〈제2시, 불〉, 〈제3시, 식물〉, 〈제4시, 전기〉, 〈제5시, 얼음〉……
 
구태여 더 읽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전부 시간이 부여한 숫자와 능력을 적어둔 것이었으니까.
 
마침 수도 14개였으니 딱 떨어집니다.
 
비올라 카지안:이게 대체 무슨……?
 
하지만, 타이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입니다.
 
카운터인 루이스도, 연구를 도왔지만 이런 곳의 존재는 알지 못했어요.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다시해볼까?..
 
루이스 레너드:(미간 찌풀...)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개안~
 
네임택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숫자를 읽어본다.)
 
〈2051. 10. 08〉, 〈2052. 02. 27〉, 〈2052. 03. 06〉, 〈2051. 12. 17〉……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날짜들은, 대략 반년 전부터 일주일 사이의 어느 날들이었습니다.
 
이날이, 무슨 날이었더라.
 
…….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카운터들이 곧 익숙한 날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네, 그들이 DOT에 처음 발견되었던, 혹은 스스로 발을 들였던…… 그 날짜였습니다.
 
불길하게도 유리관은, 딱 한 명의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루이스 레너드:(굳이... 위험해보이는 요소에 몸을 던질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이 유리관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다, 아까 연구원이 들고 있던 책을 살펴보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는다. 컴퓨터 이용이 불가하다면, 책에라도 기대해볼만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애쉬에게 다가간다.)
 
미묘한 색의 가죽 표지가 눈에 띕니다. 요즘 책도 이런 가죽 표지를 쓰던가요?
 
<근력> 판정에 성공하면 애쉬에게서 책을 뺏어들 수 있습니다.
 
루이스 레너드:... ... (힘을... 내 보자...! 내 전공은 아니지만)
근력
기준치: 60/30/12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힘냈다
 
뺏어든 가죽에서는 어쩐지 서늘하고, 끈적거리며, 희미하게 사향 냄새가 납니다.
 
불길한 감촉에 루이스, SanC (0/1).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아무리 봐도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읽을 법한 책은 아닙니다.
 
책 표지에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무언가를 사용하기 위한 설명서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문장도 비올라와 루이스가 가진 의문에 해답이 되진 못합니다.
 
이런 건 왜 읽고 있던 걸까요?
 
루이스 레너드:(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 아는 언어인데 해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그저 기이하게만 느껴진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이번이 단연코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 비올라, 이것 좀 봐요.
 
비올라 카지안:(기이한 책의 표지에 머뭇거리다가 그가 보여준 책을 읽어내려갔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언어만 공용어지…… 이렇게 복잡한 것들을 다루는 곳이었단 말이야, 여기?
 
루이스 레너드:도대체... 여긴 뭘 하던 곳이었을까요. 점점 알 수 없게 되어서, ... ... (미간을 찌푸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고, 기분만 나빠지는 책은 일단 덮어놓는다. 대신 커다란 원통으로 향한다. 이것도 아까 그 유리관과 비슷한 용도로 추정된다면, 얼른 확인하고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올라 카지안:(DOT에서 벌써 5년을 지냈지만 이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진 공간은 처음이다. 원래도 낯을 가리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이곳에서는 거의 공포감마저 느껴지는 기이함이 있었다.)
 
빛나는 원통은 단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높이 30cm 정도에 지름은 그보다 약간 작고, 볼록한 앞부분에 신기한 소켓 세 개가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생김새인데, 유리창도 없어서 내용물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무척 무겁고, 움직이면 내용물이 출렁거립니다.
 
라벨에 낯선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아르고.
 
원통 뒤에는 렌즈와 진공관, 금속 원반을 연결한 작은 상자라던가, 그 외에는 통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매달린 기다린 기계가 서 있습니다.
 
도저히 도밍게즈의 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수상쩍은 물건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직전 책에서 이 원통과 비슷한 그림을 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자료조사> 판정
 
루이스 레너드:
자료조사
기준치: 70/35/14
굴림: 3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루이스는 어렵지 않게 그 부분을 찾아냅니다.
 
커다란 원통의 용도가 뇌를 보관하는 것이며, 안에 든 것이 라벨에 적힌 이름의 뇌라는 걸 알게 된 루이스, SanC(0/1D2)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3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음
 
보관통을 사용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이스 레너드:어째서... 이런 게, (경악과 두려움에 찬 얼굴을 하고 책과 보관통을 그저 번갈아 바라보기만 한다. 이... '아르고'라는 사람은, 사람이었던 것은... 언제부터 왜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차가운 머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뭐든 해보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공포와 분노로 가득한 몸은 그것을 거부한다.
'아르고'는 필시 과거의 타이머 중 하나겠지.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면 꽤 오래전의 인물일 것이고.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죽어서까지 이렇게 알뜰하게 구원의 도가 되어야 하는가? 구원자들의 안식과 명예는 전체를 위해 이렇게까지 철저히 무시되어야만 하는가?
차마 소켓을 연결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뇌 보관통'에 대한 설명이 펼쳐진 페이지를 읽고 또 읽을 따름이다. 아,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효율과 더 큰 선을 위해서는 괜찮은 것 아니냐며 스스로를 설득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어디까지 더 내어줘야 하는 걸까.)
 
비올라 카지안:(세상에. 경악하다 못해 두 입을 틀어막았다. 기계를 보아도 그 목적이나 용도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는데. 사람의 뇌를 보관하는 장치였다니. 쓰여있는 글자가 어떠한 명칭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었다니. 공기 중에 미약하게 서려 있던 공포심이 이제는 선명한 무게를 갖고 폐부를 짓눌러 왔다.)
(아예 보관통 쪽으로는 손도 대지 못하겠단 듯 뒤로 몇 걸음 비척비척 물러났다. 속이 좋지 않았다. 대체 아르고라는 이는 누구였는지, 무엇 때문에 그의 뇌가 여기 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나름대로 제 2의 집이나 가족처럼 친숙하게 여겨왔던 DOT와 연구원들에게 아주 낯선 감각만이 느껴졌다.)
 
루이스 레너드:(눈을 감고 잠시 크게 숨을 들이내쉰다. 시간이 멈춘 지금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 ... 비올라. '아르고'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질문의 형식이지만, 단정적인 어조가 묻어난다.)
 
비올라 카지안:(사실, 책을 확인하고 나서부터 그는 이 공간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제 양손을 꾹 맞잡은 채로, 눈을 내리깐 채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자, 잘 모르겠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루이스 레너드:(꼭 쥔 당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도망치고 싶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 봤자 잠깐 기분이 나아질 뿐, 멸망 자체는 변하지 않을테고 우리는 아르고에 대한 책임을 어디에도 물을 수 없게 되겠죠. (또다시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다. 눈물이 쥐도새도 모르게 지나간 흔적이 보이는 목소리로, 그러나 천천히 또박또박, 의견을 이어 말한다.) 저는, 그러니까... 일단은 이 책에 나온대로 해 보려고 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다시 단서를 찾아야겠지만요.
그리고 세계를 다시 되돌리고 나면, 그때 따질 거예요. 우리는 물론 구원자 신분이지만, 그러기 이전에...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저는 기억하고 있어요. 그의 명예와 우리의 명예를 돌려내라고. DOT에 강력히 요구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 발 물러서려고요.
 
비올라 카지안:우리가 이걸 보았다는 사실을 알려도 괜찮은 걸까? 난 모르겠어, 루이스. (더럭 겁을 먹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도망쳐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그러니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도 머리로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이제는 멈춘 시간을 되돌린 이후도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더이상은 가족같던 사람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루이스 레너드:알려야죠. 우리는 이런 대우를 받겠다는 것에 동의한 적 없어요. (이미 결심을 한 듯 보관통으로 천천히 걸어가 소켓을 잡는다.) ... 실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해봤자, 우리만 손해에요.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겠어요. (조금씩 떨리는 손으로 장치를 작동시킨다. 무언가라도 대답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책에 나온 대로 보관통을 작동하자,
 
렌즈를 통해 벽면에 어떤 장면이 투영되고, 단조로운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흑백 영화처럼 모두 회색인 데다 상당히 화질이 좋지 못해서, 더더욱 도밍게즈의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TV도, 녹화한 영상도 아니므로 장면은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운 좋게 흘러나오는 것들을 훔쳐보고 주워들을 뿐입니다.
 
:어떤 예언
깜빡,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시야가 재조명되더니, 낯익은 얼굴이 떠오릅니다. 예언의 타이머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말합니다.
“세계가 멸망할 거예요. 시간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 다 닳아가기 때문이니, 이제 타이머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주변에는 하인리히 장교와 리슬러 부관을 비롯해 몇몇 연구원이 보입니다. 모두 DOT의 직원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새로운······”
뒷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루이스는 이미 다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샘플
“정말 괜찮겠어요? 내키지 않아요.”
기억의 주체인 연구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키지 않는다거나, 두려워한다기엔 지나치게 삭막한 나레이션입니다.
시야의 맞은편에 선 것은 마찬가지로, 전 세대의 타이머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팔을 내밀었고,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잘랐고, 누군가는 또 다른 신체 일부분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위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죠.”
“이 방법뿐이니까.”
 
:목소리 너머로 장면이 바뀝니다.
시체 안치실입니다. 냉동 보관되어있는 것들은 전부…… 익숙한 시체들입니다. 전전 세대, 혹은 전전전 세대……. 죽어서도 시체조차 묻히지 못한 그것들은 서랍에 얌전히 들어 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가 문가에서 지시합니다.
“유전자 샘플 확보해. 조심히 다뤄.”
 
 
:어떤 기적
“타이머의 능력은 유전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누군가 밋밋하게 소리를 지르자, 하인리히 장교가 단언합니다.
“그걸 해내기 위해 자네를 고용한 거야.”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겁니다.”
“자네가 가부를 판단할 일이 아닐세.”
 
:“이건, 불가능해요.”
영상 속 하인리히 장교의 입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라도 만들어 내.”
 
 
:어떤 괴물
다음의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습니다. 흐물거리고,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닙니다. 흰 대리석 바닥은 그것이 흘린 진액으로 끈적끈적해졌습니다. 화질이 나쁘고, 음질이 더러운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누군가 한숨을 쉬고, 가운의 소매를 걷어 올립니다.
“실패라니까. 도저히 무리야. 다른 방법이 필요해.”
마찬가지로 지친 누군가 “다른 방법?” 이라고 물었고,
“그래, 전혀 다른……“
 
:지직, 지지직.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름
“성공, 성공이야!”
여전히 억양과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뛸 듯이 기뻐합니다. 두 눈은 똑똑히, 원형 유리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옅은 회색으로 보이는 그 물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들어있습니다.
네, 루이스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목격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말합니다.
“이들을 카운터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어떤 대화
“표정이 좋지 않네요, 아르고.”
또다시 예언의 타이머입니다. 뇌의 주인을 부르며 곁에 앉은 그는 커피잔을 들고 있습니다. 아르고는 한참 고민하다가, “정말 괜찮겠어요? 내키지 않아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나는, 분명히 세계 멸망을 봤어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뿐이에요.”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지만, 연구원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입니다.
“예언을 하나 하죠.”
 
:“아르고, 당신은 양심으로 인해 사는 내내 시달릴 것입니다. 양심을 죽인즉 당신이 살고, 양심을 살린즉 당신이 죽습니다. 세계의 모든 구조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훼방을 놓았다간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양심을 따라 행동하고자 한다면……”
예언의 타이머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저 예언합니다.
“당신의 ■■,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겁니다.”
 
모든 진실을 목격한 루이스, SanC(1D2/1D5)
 
루이스 레너드:
SAN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61
판정결과: 보통 성공
rolling 1d2
 
(
2
 
)
 
 
=
2
 
이성 2 감소.
 
연구소는 결백합니다. 천장도, 바닥도 온통 하얀색이었습니다.
 
건조한 공기에는 날 리가 없는 소독약 냄새가 빽빽하게 차 있었고,
 
문득, 하인리히 장교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2053년의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예언의 타이머가 들었던 예언과 똑같았고, 루이스는 다음에 올 문장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눈앞의 이들이 그 증거지.]
 
그가 그때, 루이스의 어깨를 잡아, 한 발 앞으로 끌어냈었죠.
 
단순히 표면적인 행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앞으로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물밖으로…….
 
불쾌한 이야기니 여기까지 할까요.
 
하인리히 장교:[지난 예언의 타이머는 매우 훌륭한 이였지.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거웠어.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점은…… 미래를 바꾸는 방법을 함께 점지받곤 했단 거야. 많은 이들이 세계 멸망의 예언이 예언의 탑으로부터 시작한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미래를 바꾸는 방법이란 건 이런 식이었던가.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겁다는 것은 도덕과 정의의 죽음을 의미했던가.
 
전 세대 타이머는 어떤 심정으로 그 명령에 순응했는가. 자의였는가, 타의였는가.
 
진정으로 그들은 구원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던 걸까.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산재하고,
 
하인리히 장교:[DOT는, 타이머는 이미 그 미래를 알고 있었네. 그 예언이 퍼질 것도, 세계가 혼란스러워질 것도,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날 것마저도!]
 
쏟아지는 깨달음이 선명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탄생을 확신합니다. 스스로 빚어낼 것이기에.
 
그렇다면 하인리히 장교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스스로, 카운터의 창조주를 자처했으므로.
 
깨끗한 대리석 벽면에 얼핏 인영이 비칩니다.
 
서 있는 것은 여덟 명이었는데, 비치는 것은 네 명뿐이었습니다.
 
제대로 비치지 않는 쪽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가지고 있던 기억들은 무엇인가. 왜 축제에는 아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는가.
 
어째서 DOT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족이나 지인의 연락을 받지 못했던가.
 
그 모든 것의 답을 깨닫는 순간,
 
운명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의 운명이었던 거예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너를 위해 예비된 운명이었던 거지.
 
목전의 상황을 두고,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시간이 멈춰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내내 멈춰있었던 것이지만, 귀가 먹먹해서 유난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루이스 레너드:(눈앞에 믿을 수 없는 형상들이 자신을 비웃듯 춤추고 사라진다. 애초부터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런 사실을 깨닫자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분노도 공포도 아닌 허무였다.
내가 지금껏 이뤄왔다고 생각한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모든 것은 타인에 의해 예비된 것이었으며 나는 결코 이들과 동등할 수 없을 것이다.)
하하...... 하, ... (헛웃음이 비질비질 튀어나온다. 제 두 손을 내려다본다. 처음부터 이 두 손 위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떨군 고개를 들어올릴 수가 없다.)
 
비올라 카지안:(첫 영상이 흘러나온 순간부터 입을 틀어막은 손은, 마지막 영상이 끝나고서도 차마 떨어지지 못했다. 유리관이니 보관통이니 하는 물건의 존재만으로도 불가해의 영역이었는데, 이러한 물건이 존재한 진정한 이유를 알고 나니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공포와 분노, 배신감, 절망 등이 뒤섞여 아플 만큼 몸이 오그라들었다. 저도 이렇게 충격일진대 저의 짝인 루이스는 어떨까. 페어니, 파트너니, 운명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손 위에서 입맛대로 갖고 놀아진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대체, 이들은 세상을 구하겠다고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아니, 세상을 구해야만 한다는 절박함과 위기감이 그들을 여기까지 내몰아버린 것일까?)
루이스……. (저는 이 일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는데도 루이스와 카운터들을 향한 죄책감에 심장이 따가웠다. 자신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처럼 느껴졌다.)
 
루이스 레너드:(멍하니 저를 부르는 비올라의 목소리를 듣는다. 전에는... 이 목소리를 들으면 웃음이 났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절만큼은 하지 않는 것이 참 웃기다. 이것도 짜여진 것 중 일부일까? 여하튼, 이대로 그냥 서 있으면 엎어져서 기절은 않더라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비척비척 걸어가 근처의 의자에 쓰러지듯이 몸을 맡긴다.)
... ... 끽해야, 이런 비상 사태를 대비해 남겨둔 전 세대의 흔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속으로만 하던 생각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 입으로 그대로 내뱉는다.) 최악을 가정해봤자... 끔찍한 인체 실험이나 고문의 현장 정도였고요. 왜 이런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에 항의하고 싶었어요. 그래도 일단은 대의를 위한 거니까, 설명만 했더라면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결국은 동의했을테니까, 그게 나니까...... 나라는 개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조차 사치인 걸까요. 이 모든 것이 쓸모없게만 느껴지는데, ... ...
 
비올라 카지안:(이곳은 새로운 구원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대한 실험의 장이었다. DOT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별의 구원자이자 타이머들의 운명…… 그러니 장교가 그토록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거겠지. 어쩌면 이렇게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방식이었을까. 저 역시도 너무 큰 충격에 어딘가 얻어맞은 것 같았지만, 루이스가 느끼는 감정과는 비교도 안 될 터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라앉고, 이렇게 무기력한 목소리는 처음이어서…… 막 세상이 멈추어버렸을 때도 침착하게 다음 방법을 떠올리고 나아가던 루이스였는데.)
(대체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제가 감히 위로를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금방이라도 흐를 듯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옆에 다가가 떨리는 손을 그의 어깨에 얹을 뿐이었다.)
 
곳곳의 풍경이 참담합니다.
 
할 말을 찾기 어려워 숨을 크게 들이켰을 때, 소독약 냄새 대신 새파란 장미 향기가 흠뻑 폐를 파고들었습니다.
 
질식할 것처럼 짙은 향기는 엊그제 맡았던 그것과 똑같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시금 새파란 장미로 장식한 아치문이 서 있습니다.
 
멀찍이 서 있는 이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장미 향기가 짙어지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너울, 너울 꽃송이가 흔들립니다.
 
이번엔 또,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요?
 
루이스 레너드:(장미 아치문을 찾아 헤맸던 과거의 나에게 '자, 네가 찾던 거 여기 나왔는데,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 어떻게 할 건데?'라고 말하며 놀리기라도 하는 것 같다. 차갑게 문을 향해 말을 건다.) ... ... 왜, 진실을 알고 나야만 나타나는 구조야? 이것도 다 설계된 거냐? ... (다 부질없다는 생각만 든다. 이대로 세계를 돌려놓는다 해도... 나는 무엇을 어떻게 따질 수 있지? 모든 것이 하인리히의 손바닥 위일텐데. 따지는 것조차도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
 
비올라 카지안:(문득 흘러나오는 장미 향기에 번뜩 고개를 돌렸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치문이었는데, 이 절묘한 등장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려 여기까지 유도하기라도 한 건가. 그런 의문까지 들었다. 저 문이 멸망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넘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진실에 괴로워하는 루이스에게 어떻게 뻔뻔히 제안할 수 있을까.)
(한참이나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이따금 훌쩍이는 소리만 내다가, 겨우겨우 용기를 한 움큼 집어먹고 루이스를 불렀다.) 루이스……. 네가 내게 해줬던 말을 돌려주고 싶어. 이건 우리 둘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사실, 그는 제게도 죄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알았다 한들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벌어진 일이지.
그러면, 우리는 현재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세상을 위하는 마음만큼은 같잖아. 사람들을 위하는 네 마음이 전부 사그라들지는 않았으면 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을래? (혹시나 강요처럼 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이스 레너드:(훌쩍거리는 다정한 목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즉각적인 반응은 하지 못해도 감각은 여전히 쌩쌩하게 살아 있으니. 이전까지는 긴장하고 주눅든 비올라를 내가 도왔는데, 지금은 반대구나. 그런 딴 생각을 하며 당신의 언어를 띄엄띄엄 듣는다.
아, 저 말은 아까 내가 했던...
... ... 그래, 맞는 말이지.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태어난 이는 죄가 없지. 그렇지만...
현재에 집중을... 그래, 비올라의 말이 다 맞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온전히 다 받아들이질 못 해서 문제지. 어디까지가 진짜 나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한참 공허 속에 빠져 있다가 말문을 뗀다.) ... 비올라. 당신은 사람을 구하고 나면 어떤 기분을 느끼나요. 무슨 생각을 하나요.
 
비올라 카지안:(예상 외의 질문에 눈을 잠깐 크게 떴지만, 곧 조용히 말을 정리한다.) 재해 상황에서의 구조를 끝내고서 나는 한 번도 후련함이나 기쁨을 느껴본 적 없어. 언제나, 구한 사람보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뇌리에 더 강하게 맴돌았지.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 그래도 구조된 분들이 내게 감사인사를 하는 잠깐만큼은 그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어.
 
루이스 레너드:... ... 제 안의 무언가가 좀 많이 깨지긴 했나봐요. 비올라의 말을 들으면서 이런 삶에라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지, 어떻게든 나를 일으켜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인간을 위해 설계된 기계가 그 임무를 다했다고 해서 칭찬하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는 조소어린 반박으로 끝나는 걸 보면요.
... 당신을 탓하는 게 아니예요.
(기분이 착잡한지, 그렇게 말한 뒤 또다시 말이 끊어진다. 영영 무언으로 도망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세상을 위하는 마음은... 어차피 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제 의지겠죠. 하지만... 그것 역시 '그렇게 생각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은 나아가고 보는 것이 맞는 걸까요.
 
비올라 카지안:아니야. 나였어도 너랑 비슷했을걸. 내가 생각하는 게 과연 진정한 나의 것인지 모르겠고, 끝없이 의심했겠지. (이곳에서의 진실을 보기 전의 루이스와 모든 것을 안 루이스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져서 가슴이 쓰라려 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게 설계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는 부품이 필요한 기계가 아니잖아? 살아숨쉬고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네가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게 누군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저는 무척이나 부정적인 인간이었는데, 지금만큼은 어 떻게든 희망적인 방향으로 한 가닥 동앗줄을 잡아보려 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지금껏 친구이자 페어로서 루이스의 현명함과 생동감을 접해 와서였기도 하였고, 냉철한 현실에서 눈 돌리고 싶은 반발심이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너의 의지도 나와 같다면, …… 나아가자. 막막하더라도.
 
루이스 레너드:(비올라의 마지막 말을 곱씹는다. 그리고 그녀의, '케레스'의 굳센 의지를 떠올린다. 가장 사람을 중히 여기는 타이머.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타이머. ... 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부모는 자식의 모든 면을 알 수 없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타인이기 때문이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더라도 그 행동 안에 어떠한 의미가 담겼는지 CCTV 화면은 전해주지 않는다.
나의 부모, ... 는, 나를 잘 안다. 사람과 도밍게즈를 구원하라며 날 만들었고, 구원을 위한 최적의 인재로 길러내기 위해 온갖 자원을 쏟아부었다. 내 기억이랄만한 것은 모두 그들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아마 이것도 다 알겠지. 그렇지만...... 실제로 내가 행한 행동에 어떠한 의도가 담겼는지 아는 것은 오직 비올라와 나뿐이다. 단상에 올라가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 손을 잡은 이유는 그렇게 명령받았기 때문이지만, 서로 의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나는 비올라를, 비올라는 나를 지지대 삼아서. 조금씩 부족한 우리가 덩굴을 하늘로 더 높이 뻗기 위해서.
그리고 하인리히는 결코 모를 것이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머리가 다시 맑아진다. 여전히 슬프고, 착잡하고, 모든 것이 의미없어 보이고, 그저 쓰러지고만 싶지만, ... 그래. 당신이 말했듯이.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화내고 체념하고 울고 마음 아파하는 일은 시간이 있을 때 하자. 일단은 나아가보고.
 
루이스 레너드:조용히 한 쪽 손을 비올라에게 내민다.) ... 잡아줄래요? 제 부목 좀 되어 주세요. 혼자 못 걷겠어요.
 
비올라 카지안:응.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 시간 동안 루이스에게 어떤 결심과 생각들이 스쳐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당신이 제 말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힘을 주어 손을 꾹 잡아주었다. 두려워서나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로하고 받쳐주는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어서.)
(손을 맞잡고서 아치문을 바라본다. 느리게 발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코를 짙게 찔러오는 장미 향기를 맡으며, 그 문을 건넌다.)
 
기적과 같은 존재가 기적 아래를 건넙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아치문을 넘어서면 그곳은……
 
코마니 호수였습니다.
 
검게 물들어 있던 호수가 달빛을 받아 순간 반짝이고, 종이꽃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축제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은 물러가고 희고 투명한 물결이 찰랑거립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수면의 색이 밝아옵니다.
 
둥글게, 둥글게, 원만한 원을 그리며 물결이 칩니다.
 
호수 바닥이 반짝이는 것과 동시에 종이꽃이 소금기에 녹아 물속으로 스며들고……
 
비올라와 루이스는 호수 아래에서, 어떤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수도입니다.
 
꽃가루가 흩날리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웃고 떠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태로’ 멈춰있습니다.
 
호수가 비춰야 할 것은 밤하늘이어야 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에는 어젯밤 무대의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관찰> 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어제와 똑같은 광경입니다. 아닌가? 하지만 분명히 그 무대예요.
 
재판정!
 
루이스 레너드: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대 뒤에, 원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시계탑이 서 있어요.
 
광장에 서 있는 그 시계탑입니다.
 
루이스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호수 속의 시곗바늘은 보란 듯이 움직입니다.
 
결국, 닿은 곳은 정확하게 12시 정각입니다.
 
그 순간 다시 꽃가루가 흩날리고, 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타이머와 카운터들이 무대 위에서 손을 흔듭니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위를 향했습니다. 광장의 시계탑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바늘은 11시와 12시 사이에 애매하게 멈춰있습니다.
 
호수 아래의 세계는 여전히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화려하게 춤을 춥니다.
 
자정을 기점으로 풀리는 마법이라니.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시계의 바늘을 움직이면 무언가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물론 세계를 구하고 싶은가, 아닌가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루이스 레너드:... 아직은 생각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당신의 의견에 따를게요. 내가 이 자리에 같이 서 있도록 함께 와 준 건 결국 비올라니까요. 물론... 움직여보자고 대답할거죠?
 
비올라 카지안:(코마니 호수에 비친 놀라운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본다. 그 잠깐이었는데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광경이 아주 놀랍게 느껴졌다. 그래. 세상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모두가 아주 잠깐 발 붙이고 떠나는 곳. 그렇기에 더더욱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만 하는 곳.)
내 의견에 따른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물론…… 내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야.
친절하지 못하다고 해도 나는 이 세계를 지켜야 하는 숙명이 있어. 구한 이보다 구하지 못한 이들을 떠올리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날만이 반복되더라도, 그 고통마저 끌어안고 살아가야겠지.
…… 이 세상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네가 DOT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또다른 단서를 찾을 길이 올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우리 모두 힘들겠지만, 그래도ㅡ 그래도 시곗바늘을 돌렸으면 해.
 
루이스 레너드:(내내 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나의 파트너이기 전에 선배인 거겠죠. 그래요... 가요. 시간을 다시 도밍게즈에 불러오러요. 삶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비올라 카지안:(여전히 네 선배일 수 있을까?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조금은 펴진 얼굴에 안도하며 옅게 미소했다.) 고마워.
덩굴을 만들게, 네가 조종해서 바늘을 움직여줄래?
 
루이스 레너드:(고개를 끄덕인다. 대답은 없고 행동은 소극적이더라도, 이제 와서 거부할 정도로 무너지진 않았다.)
 
비올라 카지안:(가만히 손을 뻗는다. 흙바닥에서부터 길고 가느다란 덩굴이 뻗어올라와 시계탑을 옭아매듯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루이스 레너드:(덩굴과 인사하듯 교감한다. 그들이 제 응답에 반응해주자 조금씩 위로 올려나간다. 두 줄기에서 시작된 덩굴은 하늘로 올라가며 서로를 얽고, 결국은 한 기둥에 두 팔이 달린 형태가 되어 시계탑에 도달한다. 파트너의 손을 잡고, 바늘을 조금씩 옆으로 밀어보낸다.)
 
덩굴줄기가 멈춘 바늘을 떠밉니다.
 
비올라의 덩굴에 루이스의 힘을 더하여 시간을 되돌리자, 그제야 시계가 정각을 알리며 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세계가 순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웠던 밤하늘은 급격하게 색을 바꾸어 청명한 새벽이 되었다가 새파란 아침이 되고, 자줏빛 노을을 지납니다.
 
재빠르게 회전한 도밍게즈가, 다시금 어두운 밤하늘을 드리웠을 때,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크기의 달과 다른 위치의 별이 머리 위에 찾아옵니다.
 
눈을 깜빡이면, 다시 무대입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향한 환호성이 객석에서 터져 나옵니다.
 
무대 위건 뒤편이건, 그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시간이 멈추기 직전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원자의 이름을 부르짖고,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합니다.
 
누군가 놓친 풍선이 저 멀리, 하늘 위로 두둥실 날아오릅니다.
 
익숙한 밤하늘을 가르는 풍선은 붉은색. 너머에 뜬 별은 마냥 희고 곱습니다.
 
세계를 구원한 것을 후회하고 있나요?
 
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할지언정…… 현실은 이토록 당신에게 다정해요.
 
구원받은 것들은 구원자를 잊었지만, 그럼에도 맹목적으로 비올라를, 루이스를, 타이머와 카운터를 사랑합니다.
 
눈 아래 사람이 가득한 탓에 광장의 시계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 선 바늘의 끝은 정확히 우리를 가리키고 있었을 거예요.
 
Chapter 1. 시계 바늘의 방향
 
: 현실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1년은 366일이 되어버렸고, 하루의 여백은 온전히 우리의 것입니다. 세계는 당신에게 구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