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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20~220706] 아실헬리 - 우울이 머무는 탑

플레이타임 : 20시간

 

 

우울이 머무는 탑
 
W.무릇
 
KPC 아실링
 
PC 헬레네
 
-
 
매캐한 벚꽃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이상할 만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떠올리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완연한 봄의 풍경입니다.
 
분홍색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점점이 떨어지네요.
 
붕 떠 있는 듯한 느낌과 어딘가 느릿한 사고가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이곳이 꿈속임을 알립니다.
 
자각몽이라, 분명 흔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런데도 어쩐지 이 감각이 익숙합니다.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아, 그러고 보면 처음이 아니었나요.
 
하나의 꿈을 계기로 이전에 꿨던 꿈들까지 한번에 기억해내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죠.
 
헬레네는 자신이 꿈속에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냅니다.
 
커다란 벚나무와 언덕 위의 자신.
 
벌써 몇 번째인지는 두 손으로 헤아리기도 힘듭니다.
 
커다란 벚나무가 잔뜩 늘어선, 헬레네가 서 있는 언덕 아래로 낯선 지붕들이 언뜻 보입니다.
 
낯선 것들로 이루어진 풍경이 익숙하다니. 이상한 기분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또 이 꿈일까... 가만히 벚나무와 언덕 아래의 풍경들을 둘러본다.)
 
그렇게 언덕 아래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도중의 일입니다.
 
헬레네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 그랬죠. 멍한 머리로도 떠올려낼 수 있습니다.
 
이 꿈의 구성 요소들을요.
 
벚나무가 꽃잎을 흘려보내는 언덕, 그 아래로 보이는 낯선 마을,
 
그리고…….
 
……를……줘.
 
그 목소리.
 
헬레네 L. 라세리온:(잘 알아듣기도 힘든 불분명한 목소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특정될 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귀를 기울여본다)
 
나이대도 성별도 가늠할 수 없는 그 목소리는 어디로부터 들려온다고 확언할 수 없을 만큼 사방에서 가냘프게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구태여 찾을 필요도 없어요.
 
주위를 다시 둘러보니 보이는 그 사람.
 
그야 사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법한 것이라고는 이 언덕 위에 단 둘뿐인걸요.
 
당신과, 저기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에 서 있는 흐릿한 인영 말이에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 드디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한 듯하다. 의문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또 묘하게 두렵기도 한 감각을 안은 채로 천천히 인영을 향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를 부르고 계신가요?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목구비는 잉크 위에 물을 뿌린 듯 흐릿하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저 몇 번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아래로 푹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발 아래의 언덕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공포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야 늘 이랬으니까요.
 
그저 무언가 꾹 막힌 듯 갑갑할 뿐입니다.
 
매캐한 봄의 냄새, 먹먹한 목소리.
 
그것들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직접 물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그렇게 눈을 뜹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당신의 방 천장입니다.
 
잠기운에 흐릿한 정신으로도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꿈을 꿨던 것도 같은데, 늘 그랬듯 명확히는 기억나지 않네요.
 
몇 번이고 비슷한 꿈을 반복해 꾸면서도 이런 꿈을 꾸는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지만 그 꿈을 꿀 법한 생각이 제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영문 모를 꿈이 조금 더 이어지면 마을을 나가 근처 도시의 병원이라도 가 보는 게 좋겠어요.
 
헬레네 L. 라세리온:(결국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오늘의 꿈도 끝이다. 눈을 깜박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는다. 눈가를 손끝으로 가벼이 누르며 잠기운을 정리했다. 같은 꿈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건 예삿일은 아닌데. 정말 병원이라도 가 보아야 하나...)
 
똑똑똑
 
몇 없는 저택의 사용인 중 하나일 누군가가 방의 문을 두드립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 들어오세요. (침대에서 일어나 옷차림을 정리한다)
 
시종: 신문과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불안한 얼굴을 한 채로 유명 신문사의 신문 한 부와 편지 한 통을 들고 들어온다.)
 
헬레네 L. 라세리온:고마워요. (신문과 편지를 받아들며 시종을 살핀다.) 표정이 안 좋은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시종: (신문과 편지를 전달한 후에도 영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를 뜨지 않다가 기다렸다는 듯 불안을 토해낸다.) 종종 마을에 들르곤 하던 상인이 혼비백산으로 한 말 탓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소문이요? 대체 무슨 말을 하셨기에 그러시나요. 아무래도 평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걱정스럽게 창가를 바라본다)
 
시종: 그것이... 마을 밖, 황야 저편의 평야에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탑이 불현듯 나타났다고 합니다...! 새까만 벽돌로 만들어졌고, 문도 창문도 존재하지 않다고 하고요.. 탑 주위에는 벚나무들이 계절을 무시하고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 말한다.)
사, 사람들은 이것을 마녀 악마의 소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런 것들의 짓일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탑이 나타났다구요...? (상정 외의 내용에 미간을 가벼이 찌푸린다.) 그런데, 벚나무라면... ... (꿈 속에서 보았던 그 커다란 벚꽃. 지독하리만치 봄의 정취를 풍겨내던 꽃나무가 자연히 상기된다. 혹시 그 꿈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이 짧게 일었다가 도로 사그라든다. 꿈과 현실이 맞닿는다니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가.)
... ... 그런 사악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에요. 하루만에 탑이 생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저 소문일 뿐일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을 다독이도록 해요. (다정하게 시종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그리곤 신문을 확인했다.)
 
시종: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전보다 편안해진 얼굴로 방을 나간다.)
 
인근 도시에 아침마다 시종을 보내 한 부씩 사 오도록 하고 있는 유명 신문사의 신문입니다.
 
1면에는 최근 화형당했다는 마녀의 악행에 대한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삿된 주문으로 민중을 현혹하고 공포심을 조장한 죄라나요.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마녀라니, 그런 게 정말 존재할 리가 없는데. 죄 없는 이들이 박해당했다는 생각에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요. 그런게 존재할 리가 없죠.
 
혹시 모르니 그 생각은 혼자만 간직하도록 합시다.
 
헬레네 L. 라세리온:(신문을 접어두고 편지를 펼쳤다. 누구에게 온 것일까.)
 
가까운 도시에 살고 있는 귀족으로부터의 편지입니다.
 
친하지도 않은데 근처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인맥 관리의 대상이 되는 건 그리 달갑지 않군요.
 
지루한 안부 인사가 줄줄이 이어집니다.
 
편지는 신문에 실린 마녀의 화형 소식에 대해 몇 마디를 더 얹고 끝납니다.
 
눈에 걸리는 건 한 문장 정도네요.
 
깊은 바닷속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푸른 눈을 가진 마녀는 영생을 산다고 하더군요.
 
헬레네 L. 라세리온:(이분도 결국 마녀의 이야기구나. 서랍에서 잉크와 편지지를 꺼내고, 테이블에 앉아 역시나 의례적인 인사말들을 적어내려간다. 그러나 마녀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별다른 내용을 쓰지 않았다. 제 입으로 그 주제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말미의 한 문장은 비교적 오래 맴돌았다. 바닷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푸른 눈... 저 또한 벽안인 것은 마찬가지이나, 저와는 무척이나 느낌이 다를 것만 같았다.)
(편지를 보내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바깥으로 나선다.)
 
저택을 나서면 평소보다 확연히 어수선한 공기가 가장 먼저 느껴집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귀족인 헬레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도 어딘가로 바삐 발을 놀립니다.
 
어디를 가는 걸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어딜 가고 계신가요? 혹시, 그 소문의 탑으로...?
 
마을사람: (헬레네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한다.) 광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상인이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더군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 소문에 대해 말한 상인인가...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광장으로 따라가본다)
 
광장으로 향하자 십수 명의 사람들이 한 명의 주위를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헬레네도 아는 얼굴입니다.
 
종종 마을에 들러 다른 지역의 특산품들을 팔고 가던 행상인이네요.
 
그런데 오늘따라 그 얼굴에 공포와 불안이 가득 서려 있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직접 말을 걸기도 전에 그가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인간의 짓이 아니란 말이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마녀의 짓이라고 주장하려는 걸까... 굳이 들을 가치는 없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들어두자는 내용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횡설수설 되풀이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요지는 여기에서 하루 정도의 거리에 있는 평원에 이전에는 없던 새카만 탑과 벚나무 군락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시종의 입으로 전해 들었을 때는 허황된 허풍에 속았으리라고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뇌까리는 상인의 얼굴을 보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건 무슨 일일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저 허황된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탑이 생겨났다는 것이 정말 진실이었다는 말인가?) 직접 그 탑을 보고 오신 건가요? 이 날씨에 피어있을 리 없는 벚나무가 피어 있었구요? (상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본다)
 
상인은 그제야 마을의 유일한 귀족인 헬레네를 발견했다는 듯 인파를 헤치고 헬레네에게 다가옵니다.
 
상인: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고 온 것은 사실입니다!
나리, 나리께서는 귀족이시지요? 어떻게든 해결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부탁드립니다! 저는 먹고 살려면 그곳을 지나다녀야 합니다. 마녀에게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매달려 봤자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한 귀족일 뿐, 당신은 이런 사건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요.
 
기껏해야 이 일을 외부에 알리고 군대를 파견해 달라 부탁하는 것 정도일 텐데요.
 
불안해하는 이 상인을 위해 그러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좋을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귀족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곤란한 부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인의 위험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을 피우는 출입구 하나 없는 탑이라니, 누가 봐도 불길한 곳임은 명징했기에.) 그렇다면 제가 직접 그 탑에 다녀와 보겠습니다. 특기할 만한 위험한 점이 있다면 연락을 취하고 군대를 파견해 달라 부탁드릴게요. (평소였다면 위험성을 고려해서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 바로 외부에 연락을 취했겠지만, 마녀의 소행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최근에 연달아 꾸고 있는 꿈도 한몫했다. 마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할 겸, 꿈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일석이조일 것이다.)
 
상인은 확답을 받은 후에야 조금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립니다.
 
마녀가 정말 있는 건지 의심한 게 바로 몇십 분 전의 일인데……
 
확실히 하루만에 탑을 쌓는 것도 벚나무 꽃을 피우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헬레네가 마녀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지금은 불온한 소문에 괜히 마음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SANC 0/1.
 
헬레네 L. 라세리온:(일단 나서겠다고 덜컥 결정해 버리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까...)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래도 큰일은 없겠지. 스스로를 다독인다)
 
약속도 했겠다,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서 탑으로 갈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마을 바깥의 황야에 나타났다고 했었지. 튼튼한 옷으로 갈아입고 겉옷을 챙기는 게 좋겠다. 간단히 먹을 만한 요깃거리도 부탁해야겠고... 머릿속으로 준비물을 바삐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헬레네는 저택으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출발하는게 좋겠네요.
 
헬레네 L. 라세리온:(오늘도 그 꿈을 꾸게 될까...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그날 밤 꾼 꿈은 무언가 달랐습니다.
 
언제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주위의 모든 것들이 지나칠 만큼 또렷했고, 목소리 또한 전에 없이 명확하고 선연했습니다.
 
분홍 꽃잎이 그를 잡으려던 느릿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광경을 기억합니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언덕 아래의 지붕들이 어째서인지 늘 봐 왔던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항상 잊어버리고 말았던 그간의 꿈들이 한번에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해져 뇌리를 때리는 그 느낌을 기억합니다.
 
은빛 머리카락과, 소름 끼칠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의 여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처음으로 보는 것들인데도 지금껏 수없이 봐 왔던 것들이라는 확신이 들어 이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꾸던 꿈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벚나무가 꽃잎을 흘려보내는 언덕, 그 아래로 보이는 낯선 마을,
 
그 목소리, 그리고……
 
그 뒤로 높이 높이 치솟은 검은 탑.
 
차마 그 깊이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깊은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묻어나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나를 찾아줘.
 
……쫓기듯 눈을 뜨자 한밤중입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뛰는 심장을 갈무리하고 몸을 일으켜도 귓가에는 여전히 그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검은 탑과 벚나무.
 
지나치게 짜맞춘 듯한 타이밍이 아닌가요.
 
생전 처음 보는 그 여자가 했던 말은 또 뭐였죠?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헬레네는 마음 속에서부터 강렬한 열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 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헬레네 L. 라세리온:(번쩍 눈을 뜬다. 급하게 일어나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반복되어왔던 꿈들과는 달랐다. 사방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빚어내는 말도, 그 목소리의 주인도 알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칼에 새파란 눈이라니... 게다가 그 벚나무는, 그 지붕들의 광경은... 마치 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풍경인 것만 같아서. 어째서 그토록 익숙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나를 찾아줘. 두 마디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창밖은 아직 달도 지지 않은 밤의 한가운데.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상 모든 준비를 착실하게 마치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었건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자꾸만 탑으로 저를 떠미는 것 같았다.)
(결국 미리 꺼내두었던 드레스와 겉옷, 등불만을 챙기고서 급하게 방을 나서 저택의 문을 열었다.)
 
집사: (늦은 시각 저택 밖으로 나가는 헬레네를 발견하고는 급하게 막아선다.)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그렇다면 제게 말씀해 주실 것을.. 빠르게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어디를 가려는 것인지는 모르는 눈치로 다급하게 마부를 부르다가 멈춘다.) 혹.. 소문 때문에 외출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헬레네 L. 라세리온: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는데, 깨어계셨군요. (막상 나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중이던 차에 집사를 맞닥뜨린다. 다소 머쓱하게 웃으면서 겉옷을 어깨에 둘렀다.) 으음... ... 그건 아니에요. 급하게 마을 바깥으로 가볼 일이 생겨서요. (거짓말을 하니 양심에 무척이나 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마부를 불러주시겠어요?
 
집사: 이 시간에 말입니까? ... 알겠습니다. 바로 마부를 부르겠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방금 잠에서 깬듯한 마부가 헬레네를 찾아옵니다.
 
마부: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헬레네 L. 라세리온:으음...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한밤중이었지... 무척 미안해졌다.) 황야에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나요?
 
마부: 황야라면.. 혹시 소문에서 말하는 그 황야로 가시려는 겁니까? (황야라는 말에 잠에서 바로 깬다.)
 
헬레네 L. 라세리온:... 네. 그곳에 가려고 해요. 아무래도 어려우실까요?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곳이니...
 
마부: 마차를 끄는 것은 마부의 일이지만... (소문에 겁을 잔뜩 먹었는지 선뜻 답을 하지 않는다.) 집사님께서는 이걸 알고 계십니까?
 
헬레네 L. 라세리온:아니요.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알면 말리실 것 같아서요. (겁먹은 모습을 보곤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짓는다) 그럼, 제가 말을 끌고 다녀올게요. 승마는 배워두었으니까요. 안내해주실래요?
 
마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집의 고용인으로서 아무 대책 없이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집사님께 말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만큼은 양보 못한다며 고집부리며 마구간으로 이동한다.)
 
헬레네 L. 라세리온:... ... 알겠어요.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까요.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도움을 청해주세요. (순순히 응하며 마구간으로 따라갔다.)
 
승마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마부가 끌어준 말에 조심스럽게 올라타 자세를 잡고, 고삐를 당겨본다. 직접 말을 타는 건 오랜만인데...)
승마
기준치: 50/25/10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마부: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 같이 가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괜찮아요. 죄송해하지 마시고, 무사히 다녀오기를 바라주세요. (미소지어보이곤 박차를 가한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밤의 공기를 울립니다.
 
무언가에 홀린 걸까요.
 
왜 새벽조차 찾아오지 않은 밤에 이렇게 떠나야 했던 걸까요.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행태인가요?
 
마녀의 탑, 그 속에 도사린 푸른 눈의 마녀, 당신은 지금 그 아가리로 뛰어들고 있는 건 아닌가요?
 
헬레네 L. 라세리온:(찬바람을 헤치며 마을을 가로질러 황야를 향해 달리고 있음에도, 꼭 꿈결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평소라면 절대 내리지 않았을 판단에 의거하여 움직인다. 존재한다고 믿어본 적 없던 마녀가 정말 자신을 홀리는 것일까? 그 탑은 역시 꿈과 관련된 곳이 맞았던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 무엇을 바라고?)
 
하지만 당신은 이미 떠났고, 이제 와서 돌아가기에는 찝찝한 면이 지나치게 많지요.
 
지금껏 들어 온 바에 의하면 마녀란 족속들은 죄 인간 아닌 것의 피를 몸에 품은 채로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추악하고 못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맞다면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단 말인가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양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서린,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 오는 그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위의 풍경들이 눈물처럼 번집니다.
 
새벽의 찬 공기가 폐부를 메웠다가, 떠오르는 아침 해의 흐릿한 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낮의 온도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달린 후에야 멈춰섭니다.
 
꽃 향기가 시야를 매캐하게 가렸기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색의 벽돌로 창문도 문도 없이 빚어져 그저 높이 높이 서 있기만 한 탑의 주위에는,
 
역시 단 한 번도 그 근방에서 자라났다는 말을 들어 본 바 없는 벚나무들이 계절을 무시한 채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다 하던가요.
 
무리해서 달린 탓에 숨을 씨근거리는 말을 근처의 벚나무에 묶은 후에야 고개를 들어 살필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꽃을 피운 벚나무의 군락과, 그 뒤에 외로이 서 있는 높고 높은 검은 탑을요.
 
헬레네 L. 라세리온:(옷을 두껍게 걸쳤음에도 새벽 바람에 뺨이 발갛게 텄다. 혹여나 말에서 떨어지지는 않을지, 장애물이 나타나진 않을지 내내 긴장한 채로 달렸다. 그러면서도 탑이 저 멀리에서 서서히 위용을 자랑할수록 심장이 묘한 박자로 두근거려 왔다. 시야를 가리는 것만 같은 꽃향기. 그리고 창문도 문도 없는 탑... 상인의 말대로,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탑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마법이 아니고서야...)
(말을 쉬게 해준 뒤 머뭇거리며 탑의 근처로 다가간다. 문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저기요- 꿈에서 저를 부르셨던 여성분, 혹 거기에 계신가요? 제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계신가요?
 
계절과 풍토상 도저히 자라지 못하는 벚꽃나무가 보입니다.
 
꽃이 만개해서는 끝없이 늘어서 있습니다.
 
벚나무 숲 저 너머의 검은 탑으로 가는 길은 나무가 빽빽합니다.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네요.
 
헬레네의 목소리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이 대답을 해줍니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 같네요.
 
헬레네 L. 라세리온:(벚꽃나무들을 살펴보며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간다. 혹여나 무언가 튀어나오진 않을지 이곳저곳을 경계한다. 이 꽃나무는 어떻게 봄이 아님에도 피어난 것일까?)
 
관찰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벚나무 사이에 어설픈 솜씨로 만들어진 나무 묘비를 발견합니다.
 
나무 묘비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으며, 엉성하게 매듭지어진 탓에 십자가 모양이라는 걸 겨우 알아볼 수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꽃나무 사이 묘비라니...? (괜시리 섬뜩한 느낌에 어깨를 작게 떤다. 가까이 다가가 묘비를 살폈다. 특별한 사항은 없을까?)
 
꽤나 오래된 묘비로 보입니다.
 
엉성한 십자가가 서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누구의 묘비일까... ... (혹여 마녀사냥에 희생된 이가 잠들었을까? 눈을 감은 채 짧게 묵념했다. 그리곤 다시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더 깊이.)
 
행운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기준치: 60/30/12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어디인지 모를 숲속을 살피다 보면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정말..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째서 익숙하다고 생각한 걸까요.
 
꿈에서 늘 듣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였기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붑니다.
 
정황상 마녀임이 틀림없을 텐데도 더없이 인간 같은 그는, 봄의 냄새와 함께 그렇게 말을 겁니다. 이름이 불립니다.
 
당신의 것이 아닌데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탑은 가는 길조차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이질적인 벚나무 틈바구니에서 헤매이고 헤매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불안감이 들고,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불리는 것은 저의 이름이 아닌데도 봄을 가득 묻힌 것 같은 울먹이는 음성이 익숙하다. 대체 어떤 연유에서일까. 어째서 당신은 그리 울 것 같은지, 어째서 저를 오래 기다린 것처럼 말하는지. 괜시리 저도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저를 기다리셨나요...? 제가 찾아오기를 바라셨나요?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이유를 듣고 싶어요.
 
낡은 두건을 쓴 채로 나무 기둥에 기대 서 있던 인영이 떨리는 손으로 두건을 벗습니다.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꿈에서 몇 번이고 당신을 불렀던 그 사람입니다.
 
그는 어떠한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흐릿한 미소를 띤 채 헬레네를 바라보다가 눈이 커집니다.
 
복받쳐 오르는 무언가를 애써 누르느라 차마 환히 웃지 못하는 것처럼.
 
아실링 펜들레엄:왜 모르는척을 하는건가요. 아... 역시 화가난건가요...? 혼나기에는 너무 기쁜날인데.. 다음으로 미루면 안될까요? (의미모를 말을 하며 사르르 웃는다.)
 
헬레네 L. 라세리온:(인영이 두건을 벗으면, 꿈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눈앞에서 일어났는데도 도무지 믿기 어려워서, 헬레네는 몇 차례나 당신과는 많이 다른 푸른 눈을 깜박거렸다. 게다가 마치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이라니. 정황상 탑을 불러낸 마법 같은 신비한 힘을 사용한 이인데도-세간에서는 마녀라고 불릴-이상하게 위압감이 들기보다는 안쓰럽고 가냘픈 느낌이 들었다.) ... ... 저를 알고 계신가요? 저는 당신을 처음 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모르는척할 정도로 제가 밉나요? (방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안절부절 로브를 꾸깃거리며 네 눈치를 보는 것이 이어진다. 나빴다며 장난스럽게 칭얼거리기를 몇 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을 잃는다.) ... 잠깐 얼굴 좀 확인해도 괜찮을까요? 멀리 있어서 잘 안 보이네..
 
헬레네 L. 라세리온:네...? 모르는 척이라뇨. 저는 정말로 처음 뵙는데... 성함도 모르구요. (아무래도 당신은 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달래주고 싶어진다.) ... 네, 괜찮아요. (저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 걸까? 겉옷의 모자를 벗으며 당신에게로 몇 발짝 다가간다.)
 
아실링 펜들레엄:(미간 사이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진지해져서는 네 얼굴을 요리조리 살핀다. 그러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손을 뻗어 모자를 다시 씌워준다.) 아……미안해요. 제 착각이었어요. 내가 아는 사람으로 착각했지 뭐예요.
 
잠시 형용키 어려운 표정을 짓던 여성은 다시금 두건을 뒤집어씁니다.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습니다.
 
정말 잠깐의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뒤늦게 내밀어진 손은 마녀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합니다. 악수라도 하자는 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자기소개가 늦었죠? 아실링이에요. 그쪽 이름은 뭐예요? 안 알려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헬레네 L. 라세리온:역시 그렇지요? (초면인 사이이니 착각한 게 당연할 테다. 하지만 대체 무엇일까. 탑에서도, 당신에게서도 느껴지는 이 익숙함은. 뒷맛이 괜히 씁쓸했다.) 아실링... 저는 헬레네, 헬레네 라세리온이라고 해요. (내밀어진 손을 잠깐 멍하게 보다가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는 얼른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한다.)
 
아실링 펜들레엄:(잡은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악수한다. 이 악수가 뭐라고 기쁘다는 듯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졌다.) 헬레네...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부모님 두 분 중에 누가 지어준 이름인가요? 정말 당신하고 딱인 이름이라 놀랐지 뭐예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런가요?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표정이 환해지자 안도감이 들었다. 혼란스러워하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리스 신화의 이름을 붙여주는 게 가문의 전통이에요. 지금은 가문을 승계받아 홀로이 이어나가고 있지만요. 아실링의 이름도 무척 예뻐요. ... 아, 그러고 보니... (뒤늦게서야 여러 의문들을 떠올리고는) 아실링이 이 탑을 세우신 분인가요?
 
아실링 펜들레엄:와아.. 잘 사는 귀족 아가씨인 줄 몰라뵀네요. (전통이니 가문이니 같은 것들은 자신의 일과 거리가 멀다며 조잘거리다가 손으로 입을 살며시 가린다.) 탑을 보러 오셨구나~.. 맞는다고 한다면요? 탑을 가지겠다든지.. 그런 말을 할 욕심 많은 귀족으로는 안 보이는데.
 
헬레네 L. 라세리온:그런 건 아니에요. 탑을 원할 만큼 물욕이 강한 성격도 아니구요. 계절과 맞지 않는 벚꽃이 가득 피는데다 황야에 갑자기 없었던 탑이 나타나서 마을의 주민들이 무척 불안해하고 있는 상태예요. 귀족으로서 마을을 대표하여 확인해보기 위해 온 것이랍니다. 게다가... 이건 저의 허황된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 탑이 최근 들어 몇 번이고 꿈에 나왔거든요. 아실링의 목소리도요. '나를 찾아줘' 라고 말씀하셨어요. 우연의 일치 같지는 않아 여러모로 확인해보고 싶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왜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네요. 예쁘기만 한데.. 황야에 이런 꽃이 피면 예쁘다고 구경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동안 아무도 안 와서 놀랐어요. 뭐, 이제 아무 도는 아니긴 하네요. 당신이 왔잖아요. (능청스럽게 대답을 하더니 까치발을 들어 나뭇가지에서 꽃 몇 송이를 딴다. 잠시 꽃을 관찰하더니 네게 선물이라며 건넸고.) 아까 말한 대로 아무도 오지 않아서 주문을 좀 걸었죠. 누군지도 모르는 꿈에 침입했는데, 그게 당신이었나 봐요.
 
헬레네 L. 라세리온:하지만 지금은 이런 꽃이 필 계절도 아니고, 탑과 함께 생겨나서 예쁘다는 감상보다는 불안하고 공포스럽다는 감상이 더 지배적이에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예상은 했지만, 주문이니 꿈에 침입했다느니 같은 말을 들으니 점점 더 당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커져만 간다.) 단지 누군가를 불러들이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탑을 만드신 건가요?
 
아실링 펜들레엄:겁도 많기는. 누가 잡아먹는다나? ...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히죽) 단순히 불러드리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부르듯, 저는 마녀니까요. 가끔 인간을 붙잡아 연구하고 싶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죠. 어때요. 이제 궁금증이 좀 해결됐어요?
 
헬레네 L. 라세리온:네에? 당신이 정말 마녀라구요? (눈이 크게 뜨인다. 죄 없는 이들을 몰아가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왔었는데. 하지만 당신이 탑을 세우고 꿈에 침입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보아도 마법을 쓰는 존재였으니까.) 이곳에서 마녀는 무척 터부시되는 존재예요. 억울하고 무고한 이들이 마녀로 몰려 얼마나 화형당해 왔는지 몰라요. 그저 이야기 속의 존재일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
그러면 이 탑을 만드신 목적도 인간을 붙잡아 연구하기 위해서였나요? 하지만, 꿈 속에서의 아실링은 무척이나 슬퍼 보이셨어요. 맨 처음 이곳에서 만났을 때도 그러셨잖아요. 꼭 금방이라도 우실 것처럼...
 
아실링 펜들레엄:왜요. 마녀로는 안 보여요? 확실히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아니라고 의심하지는 말고요. (미묘하게 씁쓸한 얼굴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생각에 빠져 혼잣말을 한다.) 내가 말해놓고 이상하네. 마녀같이 생긴 것에 대한 기준도 없는데... 뭐, 당신이 놀란 만도 해요.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죠?
마녀사냥을 말하는 거죠? 뭔지 알고 있어요. 그냥 여자라면 다 잡아다가 죽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 속에 마녀는 얼마나 나빠요? 얘기 좀 해줬으면 해요. 아, 걱정하지는 말고요. 사지 멀쩡하게 돌려보내 줄 테니. 한.. 사흘 정도 있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저요..? 그건... 글쎄요. 고급스럽지 않은 표현으로는 개꿈 아닐까요? (방긋)
 
헬레네 L. 라세리온:나이나 외모 같은 기준에는 상관없이, 재산이 많은 과부거나 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면 마녀로 몰리는 이들을 많이 봐 왔거든요. (서글피 말했다) 까만 초커와 로브를 쓰고 계시긴 하지만, 그래도 제 눈에는 평범하게 보여요. (같은 꿈을 겪어와서인지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조금 있기는 했지만.)
세간에서 불리는 마녀란, 삿된 주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현혹하는 존재라고 해요. 이 황야에도 갑자기 없던 탑과 계절에 맞지 않는 꽃들이 피었으니 마녀의 사악한 주문이 아닐까 하며 두려워하고 있고요. (사흘... ... 괜찮은 걸까? 마부에게 부탁을 해뒀었는데. 마부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길 바라야 할 것 같다. 애초에 스스로를 마녀라고 칭하는 이 사람이 정확히 약속을 지켜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딱히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신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만... ...
 
아실링 펜들레엄:어쩜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런 식으로 써먹는 건 변하지 않네요. 언제쯤 진실을 알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척할 수도 있겠죠.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크게 펄럭인다.) 어머, 제 옷차림이 좀 별로였나요? 나름... 의미가 있는 거라 이렇게 입고 있었는데.. 당신이 온다고 해서 좀 차려입은 거예요. 상복치고는 화려하지 않나요?
 
저는 그런 거 한 적 없어요. 공포심과 현혹이라니. 이 탑이랑 꽃들이 뭐라고. ... 생각해 보면 당신 한정으로 그런 행동을 하긴 했네요.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해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아닌가?
 
헬레네 L. 라세리온:... 상복...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묘비를 봤어요. 누구의 묘비였는지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일까.) 별로라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평상복으로 입는 복식과는 조금 다르다는 의미였답니다.
사실, 아실링의 말이 맞아요. 이 탑도, 벚나무들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에게는 본디 없었던 것이 갑자기 생겨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게 큰 것 같아요. (그 예민함과 이기심이 마녀사냥이라는 잔혹한 문화를 만들어낸 거겠지. 사회적인 정상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죄다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짓는...) 당신을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나쁜 존재라는 느낌은 들지 않네요. 그저 궁금할 따름이에요. 어째서 제 꿈에 몇 번이나 나오셨는지... (당신은 단순히 아무도 오지 않아서 아무나의 꿈에 침입했다고 했지만, 왠지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아주 좋아한 사람의 묘비에요. 이름은... 뭐더라? 기억이 안 나네요. 너무 오래돼서. 뭐, 오랜 삶을 사는 마녀한테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죠. 조금 아꼈을 뿐인... (생글 웃으며 말한 뒤에는 후드 모자를 좀 더 눌러쓴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이상한 옷을 입고 있네~.. 같은 평가는 받기 싫거든요. 저라도 마음이 상해서요.
그렇게 말해주니 좋긴 한데.. 원래부터 겁이 없나요? 조금은 무서워해도 괜찮을 텐데? 아, 제가 좀 전에 사지 멀쩡하게 보내준다고 했었죠? 제가 말해놓고 금방 까먹었지 뭐예요. (꽃이 만개한 나무를 가리키며 뿌듯하게 웃는다. 꽃피우느라 꽤나 힘들었다면서. 그럼에도 잘한 일 같다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당신이라면 올 것 같았어요. 왜인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변덕?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잖아요. 마녀를 보러 오면서 간단한 호신 무기도 안 가져오다니. 그 점은 좀 놀랐어요. 음.. 다른 사람을 부를 걸 그랬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십자가는 척 봐도 제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만큼 낡고 바랜 채였다. 당신이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마녀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납득되는 이유였다.) 그랬군요... 혹여나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해요. (마녀라고 한들 소중한 이를 잃어 아픈 것은 똑같구나. 외관만 보기에도 이토록 저처럼 인간 같지 않은가.)
겁이 없진 않아요. 하지만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하면서 대책을 강구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겨서요. (실제로 아직까지 전혀 위협을 받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저를 겁박하려 했다면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는 않았어도 창백하게 질린 채 몸을 떨고 있었을 것이다.) ... ...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신을 해치려 들었을지도 몰라요. 애초에 다들 겁을 내서 제가 대표로 온 것이지만, 그들은 마녀사냥을 할 때만큼은 격분하여 돌을 내던지고 망설임없이 불길을 피워올렸으니까요. 마녀라고 한들 아직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으셨는데 무기를 들 수는 없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무례하긴요. 저는 마음이 넓은.. 마녀라 괜찮아요..! (착하죠? 착하죠? 라구 물어보는 것 같이 헤실헤실 웃는다.)
 
나이는 어린데..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가짐은 일반인 수준보다 더 높네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좀 더 많아야 할 텐데..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가짜 마녀를, 억울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은 한참 먼 일이라며 쯧 하고 혀를 찬다.)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괜찮은 마녀로 보인다는 거죠? 차 한 잔 정도는 같이할 수 있는 마녀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해 주신다면, 이 험한 곳까지 와준 것에 대한 감사로 차 한 잔 같이하려고요. 어때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에요.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마냥 천진하게 보여 저도 모르게 눈꼬리가 살짝 휘어진다.) 이리 마음이 넓은 마녀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네요. 물론이에요. 오히려 환대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은걸요. (딱히 이 마을에 해를 끼치려는 것 같지도 않고... 쉬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저 탑에는 창문도 문도 없는데 어떻게 안쪽으로 들어가나요?
 
아실링 펜들레엄:현명한 방법이에요. 혼자의 힘을 믿지 마세요. 당신의 목숨을 아끼는 편이 더 좋을 거고요. (혼자서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기에는 네게 너무 잔인한지 자기 나름대로 돌려 말하며 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다 들어가는 방법이 있죠. 저를 따라오세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 없도록 발밑 조심하시고요.
이 탑은 제 사념을 빚어낸 거라서, 제가 들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냥 들어올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절대 못 들어오죠. 어쩜.. 이렇게 완벽하다니. (그러고는 보란 듯이 벽을 향해 손을 뻗는다.)
 
분명히 단단한 벽돌로 되어 있는데도 아실링의 손은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합니다.
 
단단하고 두꺼운 벽은 그저 환상이나 안개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아실링이 마녀라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SANC 1/1D2.
 
헬레네 L. 라세리온: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세상에... (사념을 빚어 만든 탑이라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이 벽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곤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소설책 속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던 마법이 실존한다니.) 그럼 저도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탑을 통과한다는 건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머뭇머뭇거린다.)
 
아실링 펜들레엄:멋지죠? 탑 디자인은.. 좀 더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지만요. 나중에 바꿔보도록 할게요. (탑에 몸을 반쯤 밀어 넣다 말고 멈춰 선다. 그러고는 안 들어오냐는 듯 눈을 깜빡거린다.) 당신도 들어올 수 있어요. 밖에서 차를 대접할 정도로 나쁜 마녀로 보이셨나요?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어서 오세요. 마녀가 사는 탑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아요. 어서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 아뇨. 나쁜 마녀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 벽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에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어서요. (곤란한 표정으로 벽과 아실링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본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꾹 쥔 채 망설이다가 결국 눈을 꾹 감고 발을 성큼 내디뎠다. 부딪히거나 끼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헬레네가 손을 뻗어도 탑의 벽은 아까처럼 손끝에서 흩어집니다.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떠올린다. 두리번거리며 탑 내부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없는 탑 안으로 정말 들어오다니... 이 안쪽은 어떻게 생겼을까? 뒤늦게 호기심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본다)
 
탑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탑 가운데에 나선형으로 치솟은 계단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외관치고는 한 층마다의 천장이 높아 정작 층수는 얼마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앞서 계단을 오르며 따라오라는 듯 손짓한다.) 1층에는 별거 없어요. 응접실이라고 만들었는데, 진짜 응접실을 써본 적이 없거든요.
 
그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아무것도 올라가 있지 않은 티 테이블과 그 주위의 안락의자 둘, 구색뿐인 텅 빈 벽난로.
 
그 외에 가구 몇이 드문드문 놓여 있는 걸 빼곤 정말로 별게 없어 보이네요.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가구라는 건 알겠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요.
 
통일성이 없습니다.
 
응접실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는 말은 진짜인 것 같아요.
 
아실링 펜들레엄:2층은 제 방이고, 3층은 전부 당신이 쓰게 될 거예요. 4층은 식당. 5층은 연구실 겸 창고 같은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요. 그 위 층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헬레네 L. 라세리온:사념으로 빚어낸 탑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가구들도 마음만 먹으면 흐려질 수 있는 걸까요? (그런데도 평소에는 만지고 닿을 수 있다니. 제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원리다.)
 
아실링 펜들레엄:네. 제가 원한다면요. 왜요? 혹시 가구가 별로인가요? (유심히 가구를 살펴보다가 위층으로 고개를 돌린다.) 3층은 괜찮아 보일 거예요. 거긴 좀 신경 써서 꾸몄거든요.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3층은 올라오면서 얼핏 보았던 황량한 2층과는 달리 척 보기에도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습니다.
 
[침실]로 보이는 방 하나와 [욕실], 그리고 [1인용 소파]와 [책장]이 서너 개 놓여 있는 거실.
 
커다란 괘종시계가 한낮을 알립니다.
 
낮은 높이의 테이블 위에는 응접실에도 없던 [티포트와 찻잔]이 놓여 있습니다.
 
아실링은 헬레네가 3층을 둘러보는 내내 뒤에 서 있을 모양인지, 당신을 쫓아다니면서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뭐라도 말해 주길 기다리는 사람처럼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뇨, 사념만으로 이런 형체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전부 마법의 일종인 걸까요? (신경써서 꾸몄다는 말이며 저를 쫓아다니는 것까지,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잘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성들여 꾸미셨다는 티가 나네요.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무척이나 세심하고 고아한 모습이에요. 올라오면서 살짝 보았을 때 2층은 비교적 비어 보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은 곳을 손님인 제게 내어주셔도 괜찮으신가요?
 
아실링 펜들레엄:마법이라고 생각하세요. 그편이 좀 더 당신의 이해에 편할 것 같고.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답니다? 당신도 할 수 있.. 지는 않겠네요. 제가 마녀고, 당신은 인간이니까.
(졸졸 쫓아다니다 자신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채고는 소파 뒤로 몸을 숨긴다.) 부담스러우면 다른 곳으로 갈까요?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가 이어서 방을 칭찬받자 팔을 기대는 쪽에 볼을 기대 웃는다.) 원래 좋은 곳은 손님 내주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당신도 남을 초대하는 상황이 왔을 때, 손님을 잘 대접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헬레네 L. 라세리온:(고개만 내민 모습에 실례스럽게도 귀엽다는 감상이 들었다. 저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을 텐데... 절로 나오려던 미소를 꾹 참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답한다.) 괜찮아요. 부담스럽지 않답니다. 게다가 이 탑의 주인은 아실링이신걸요. (고개 끄덕인다) 그건 그래요. 저를 방문하러 와주신 소중한 손님이니 가장 좋은 방에 머무르게끔 하는 편이지요. 친절에 감사드려요, 아실링.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고는 천천히 침실을 살펴본다)
 
탑의 크기를 보고 얼추 짐작했지만, 침실 역시 퍽 넓습니다.
 
귀족이긴 하나 외진 곳에 살던 헬레네의 본래 침실 크기와 맞먹거나 심지어는 조금 더 큰 것 같네요.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넓게 깔려 있고, 커다란 [옷장]이 벽에 붙어 있습니다.
 
커튼이 달린 [침대]는 원목부터가 고급품인 것 같아요.
 
헬레네 L. 라세리온:(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될 줄 모르고 여분의 옷은 가져오지 않았는데... 크기가 맞는 옷이 있으려나? 옷장을 열어본다)
 
세심하게 가공된 나무 옷장입니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문을 열어 보면 먼지가 가볍게 흩날립니다.
 
안에 걸려 있는 옷들은……꽤나 낡았습니다.
 
꽤나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조차 우스울 만큼 오래 전의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입으라고 준비해둔 건가요?
 
헬레네 L. 라세리온:(오랜 세월 인간의 복식을 접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라, 잠시 아연해졌다. 그렇지만 손님을 위해 내어준 방인데 어떻게 불평불만을 하겠는가. 개중에서 그나마 깔끔해 보이는 옷을 미리 어림짐작해 눈대중으로 골라놓는다.) 이전에도 저 같은 손님을 이 탑에 초대하신 적 있나요?
 
아실링 펜들레엄:(뒤에서 얌전히 지켜보다가 네가 옷장을 열자 손을 뻗어 옷장 문을 닫는다. 어딘가 미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옷장을 보다가 다신 원래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인간을 기다린 것도 벌써 백 년 가까이 된 일이라, 새로 준비하는 걸 잊었네요. 나중에 다시 준비해 줄게요. 아.. 따로 초대한 손님은 없었어요. 당신이 첫 손님이에요.
 
헬레네 L. 라세리온:기다리셨다구요...? ... ... 그럼 그간은 어디에서 지내셨나요?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서요? (탑이 사념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나타나는 지역도 자신의 맘대로 정할 수 있는 걸까, 추측한다.) 번거로우실 텐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갈아입고 지낼 수 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네. 이곳으로 놀러 올 인간을 기다렸어요. .. 지금 제 걱정하신 거예요? 괜찮아요. 마녀들은 인간하고 다르게 살거든요. 인간의 생활 기준을 마녀한테 맞춰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냥 알아서 살겠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편할 거예요. 실제로 저도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그렇죠? (마녀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금방이라도 마법을 쓸 것 같이 손짓한다.) 불편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줘요. 마녀가 그런 것 하나 못해주겠나요, 설마.
 
헬레네 L. 라세리온:잘 살고 있다고 보이는 것과 실제로 잘 살고 있는지는 꽤 다른 문제인걸요. (주의깊게 말한다.) 물론 당신은 저와는 달리 수많은 편리한 마법을 쓰실 수 있는 걸로 보이지만... ... 그래도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라서, 마음이 쓰이게 되네요.
(정말로 당신은 잘 살고 있을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이니 그런 걸 묻기엔 예의가 없단 생각을 하면서도, 당신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심리학
기준치: 60/30/12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그런가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저는 스스로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럼 잘 살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건 그냥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서 아닐까요?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녀라고 불리며 죽었잖아요. 사람의 모습을 했다고 다 아끼는 건 아니고, 당신이 특별해서인 것 같네요.
 
잘 살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지금 그의 삶은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본 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도, 당신이 별 탈 없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천성적으로 선하기 때문이겠지. 여전히 당신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있었지만, 본인이 잘 살고 이싿고 하는데 토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긍하곤 침대를 본다.)
 
고급스러운 외관의 침대입니다.
 
이불을 만져 보면 새것 티가 납니다.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분명 오래 기다린 탓에 옷장의 옷들이 그 모양인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침대만 새것이라니, 이상한 일도 다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곰곰...) (아실링이 옷장까진 미처 신경쓰지 못했나 보다, 하고 넘긴다. 일일이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이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겠네요. (이번엔 욕실로 향한다)
 
평범한 욕실입니다.
 
씻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소파로도 총총)
 
앉아 보면 딱 좋게 푹신합니다.
 
당신의 키에 이상할 만큼 딱 맞는 크기입니다.
 
단순한 우연이겠지만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이랑 키가 그렇게 차이나지 않으니, 그냥 아실링의 키에 맞춘 게 아닐까- 하고 넘긴다.) (그리곤 책장으로 다가간다. 어떤 책들이 있을까, 가장 흥미있는 곳이었다)
 
낡은 책들이 잔뜩 꽂혀 있습니다.
 
어린아이용 글자 공부 책부터 시작해서 동화책이 한가득이네요.
 
이런 게 당신의 취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마녀란 족속은 참……인간을 잘 모르나 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의 취향...? 인 걸까...? 옷장에도 옛날 옷들이 있었으니, 인간의 문화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인간과 접하는 일이 적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동화책들은 다 어릴 때 뗀 것이라, 아쉬워하며 책을 내려두고 테이블로 다가간다. 차를 마실 수 있으려나)
 
티포트와 찻잔이 놓여 있습니다.
 
차는 이미 식어 있습니다.
 
차를 먼저 마시자고 한 건 아실링이니, 다시 데워 달라고 해 볼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차가 식어있네요, 아실링. (찻잔을 두 손으로 살짝 들고는 아실링 바라본다) 물을 끓일 수 있는 곳이 있나요? 혹은 직접 데워주실 수 있을까요?
 
아실링 펜들레엄:당신 보러 잠깐 나간 사이에 다 식었나 보네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티포트를 들고 4층에 올라가더니 잠시 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티포트를 가져온다.) 이제 따뜻할 거예요~.. (멈칫...) 아, 혹시 마법으로 데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죠? (빤...)
 
헬레네 L. 라세리온:... ... 사실 했어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평범하게 불을 피우셨군요...
 
아실링 펜들레엄:(고개 끄덕..) 주문을.. 그런 잡일에 쓰기엔 좀... (잔잔한 미소 한번 짓고)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래도 쓰실 수는 있군요...? (마법에 정말 능숙하구나...) 잘 마실게요, 감사해요. (잔을 입가에 가져다대고 한 모금 마신다.)
 
데우는 도중 향이 좀 날아갔지만, 평범하게 마실 수 있는 차입니다.
 
차를 한 잔 마시자 새삼스레 피로가 몰려옵니다.
 
밤새 말을 타고 달리고, 숲을 걸어서 통과했으니 지칠 만도 하네요.
 
슬슬 눈을 좀 붙이고 싶어요.
 
그런데 아실링은 왜 나가지 않는 거죠?
 
설마 벌써부터 그 연구라는 걸 하려는 건가요?
 
헬레네 L. 라세리온:(딱히 불편하지는 않지만...) 옆에 앉으실래요? 아실링도 함께 차를 마셔요. 계속 서 계시면 다리가 아프실 것 같은걸요.
 
아실링 펜들레엄:옆에요? (소파 빤히 보다가 침대 끝으로 가 앉는다. 네가 잘 곳에 이렇게 앉아도 되는 건가 싶지만, 동시에 소파에는 너 혼자 편하게 앉게 하고 싶어서.) 맛이 괜찮나 봐요? (제 찻잔에도 차를 따라 한입 마시고는 표정이 묘해진다.) ... 향이 날아갔으면 새로 만들어달라고 얘기를 해주시지..
 
헬레네 L. 라세리온:네, 제 곁에요. (침대에 앉는 모습 의아하게 본다) 아... 제가 좀 불편하실까요? 아무래도 연구 대상으로 데려왔다고 하셨으니... (단순 연구 대상이라기엔 좋은 대접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그래도 따스하고 맛이 좋은걸요.
(차를 몇 모금 더 마시면서) 저에 대해 어떤 연구를 할 예정이신가요?
 
아실링 펜들레엄:네? 아, 아니에요! 그냥.. 저는 당신이 더 편했으면 해서.. 불편했으면 연구 대상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죠! (오해라며 다급한 얼굴로 손을 젓는다.) 다음에 마실 것은 더 맛도, 향도 좋은 걸로 할게요..
인간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서요. 제가 관찰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직접 그들이랑 같이 살면서 보고 느끼는 당신의 생각은 다를 것 같았거든요. 당신이 생각하는 마녀나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는 들었고... 당신에 대해서 얘기해 주실래요? 아무거나 좋아요. 예로 들면.. 가족 이야기라던가?
 
헬레네 L. 라세리온:다행이네요. 절 이렇게 좋은 곳에 머무르게 도와주시는데, 혹여 불편하게 여기실까 봐 걱정스러웠어요. (살포시 미소한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해요. 아실링은 참 세심한 분이시군요.
(호기심이 근원이었던 걸까. 저 또한 모르는 분야에 흥미를 갖게 되면 납득할 때까지 탐구하는 스타일이었으니, 당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에 대해서요? 으음... 저는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귀족이라는 신분인지라, 다른 분들보다는 더 크고 넓은 집에서 사용인들을 두고 지내고요. 약초를 캐거나, 책을 통해 배운 의학 지식으로 아프신 분들을 돕거나, 여러 봉사 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부모님은 먼 도시에서 지내고 계세요. 오빠와는 무척 친밀한 관계였지만... 몇 해 전 돌아가셨답니다. (내내 봄볕처럼 다정하고 밝던 분위기가 조금 처진다. 찻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조용하지만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느끼기에 불편한 사람이었다면 이 탑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거예요. 분명 벽돌 같은 벽에 머리를 콩 박았을 거고요. .. 그냥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 그래요. 가짜 마녀도 아니고, 진짜 마녀한테 세심하다고 해주는 분이잖아요.
(잘 사는 집의 아가씨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네가 직접 말해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욱 흥미로웠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네 얘기를 귀담아듣다가 오빠 얘기가 나오자 안절부절못한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게 한건 아닌가 싶네요.. ... 당신이 평온한 삶을 보내고 하니 다행이다 싶지만요.
 
헬레네 L. 라세리온:진짜 마녀라고 한들 아실링이 그간 나쁜 짓을 해 오진 않으셨을 것 같아서요. 마녀라고 해서 무조건 악한 존재인 건 아니잖아요. (당시의 가치관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말이었다. 그만큼 마녀사냥의 폐해와 무의미함을 잘 알고,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리라.) 아직 짧은 시간 뵈었을 뿐이지만요. 마법을 악한 의도로 사용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조용히 물었다.)
전 괜찮아요. 오래 전 일이고, 이제는 마음을 다 추슬렀으니까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이라면 저 같은 인간은 하등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일일이 안절부절못하며 신경쓰는 모습을 보니 당신의 성품에 대한 확신은 더 커져갔다.)
 
아실링 펜들레엄:아... 제가 마녀여도 잘 대해주신 이유가, 제가 나쁜 짓을 해왔을 것 같지는 않아서인가요? 그러면..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마녀가 왜 마녀겠나요. (안타깝게도 자신은 마녀라고 오해받는 피해 받는 가짜 마녀가 아닌, 진짜 마녀라며 입꼬리를 올린다.) 글쎄요. 말하기 싫어요~ 말하면 좋았던 분위기가 다 깨질 것 같기도 하고.. 당신한테 미움받을 것 같기도 하고.. 아, 다른 차 마셔볼래요? 과일향이 나는 차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는체하며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려고 한다.)
 
헬레네 L. 라세리온:단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힘을 쓰는 이들을 두려워하고 타자화하기 위하여 마녀라는 단어를 쓰고, 자극적인 의미를 붙인다고 여겨왔어요. (당신의 말을 듣곤 눈동자가 흔들린다.) ... ... (구체적으로 어떠한 악행을 저지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너무 섣불리 믿어버렸던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심적으로 어색해지는 듯해 찻잔을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차는... 더 마시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 당신은 저에게 이렇게나 친절한데... 사흘이 지나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걸까?) 으음...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침실에 가도 될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아.. 인간들 세계에서는 그러기도 하겠네요. 뭔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마녀로 몰아간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기도 해요. 제 마법이 재능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이 생각했던 그것과는 다르네요. (네 물음에 답하는 것에 거짓을 섞지는 않았다. 대답을 회피했을 뿐. 묘하게 선이 그어진듯한 것이 보이는지 웃던 낯에 약간의 쓸쓸함이 맴돈다.) 피곤한 사람을 잡고 계속 얘기를 했네요. 네. 편하게 쉬세요. 저는 제 방으로 갈게요.
 
헬레네 L. 라세리온:... 네. 좋은 밤 보내세요, 아실링. (무작정 선한 이라고 믿었던 당신이 실은 악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자신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싶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혼재된다. 무척이나 착잡하다. 찻잔을 내려두고 일어나 가볍게 목례하곤 침실로 들어간다.)
 
아실링을 조금 더 미적거리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갑니다.
 
헬레네는 바로 잠에 드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착잡한 마음에 한참이나 바로 눕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있는다. 창문이 없으니 바깥을 볼 수도 없다. 날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밝은지, 마을이나 탑 주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도. 아실링은 그 오랜 세월을 이 탑에서 살아온 걸까? 그는 마녀이니, 원하는 대로 바깥의 풍경을 볼 수도 있었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밤새 극도의 긴장상태로 말을 타고 달려온데다 경계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쓴 탓인지 금세 피로가 쏟아지듯 몰려왔다. 결국 옷장에서 최대한 덜 낡은 옷을 골라 갈아입고는 침대에 누웠다.)
 
정말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자마자 헬레네는 또다시 무의식 속으로 내던져집니다.
 
마녀의 부름에 응해 탑에 도달했으니 더는 꿈 같은 걸 꿀 필요가 없는데도요.
 
이것도 마녀의 짓일까요.
 
그런데 무언가가 조금 다릅니다.
 
꽃의 향이 나지 않네요.
 
장소가 언덕 위도 아닙니다.
 
헬레네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벚나무 대신 추한 것들로 그득 찬 그림자 진 뒷골목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어쩌다 이런 곳에 들어섰었죠?
 
잠깐, 방금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 않나요?
 
……아, 그랬죠.
 
아름다운 것은 모쪼록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버려져 있는 법임을 알아서였습니다.
 
부조리에 내몰린 푸른 눈이 여전히 맑아서였습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신이 내민 손 위에 작고 상처투성이인 어린 손이 머뭇머뭇 얹히는 걸 보며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봄이 온다고요.
 
꿈에서 깨어나면 아실링이 헬레네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일순 당황한 것 같은 기색이 스칩니다.
 
설마 자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그.. 자고 있는 것 같아서... 아, 깨우려던 건 아니에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식사하실래요?!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린다.)
 
헬레네 L. 라세리온:(이건 또 어떤 날의 꿈인 것일까?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익숙하였다. 꽃향기가 아닌 더럽고 불결한 구석, 그리고 그곳에서 빛나는 맑은 벽안... 그 벽안이 혹 저를 내려다보는 이 마녀의 것과 겹쳐보이지는 않았던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 놀랄 만도 했을 텐데, 꿈의 내용에 혼란스러운 탓인지 눈을 깜박일 뿐 크게 동요한 기색은 아니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써 날이 밝았나요?
 
아실링 펜들레엄:아.. 니요. 아까 방을 나간 뒤로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지났어요. 당신한테 식사 대접을 못한 걸 뒤늦게 기억해서, 혹시나 배고픈 상태로 잠 못 드는 건 아닌가 싶어 내려왔던 거예요. 근데.. 제가 당신 잠을 깨운 것 같네요. (식사 준비가 다 돼서 보러 온 것일 뿐이라고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설명한다.) ... 식사하실래요?
 
듣고 보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해요.
 
식당은 4층이랬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새벽부터 말을 타고 달려와서 지쳐 버렸나 봐요. 식사하지 않은 것도 잊고 잠들었네요. (여남은 졸음기를 떨쳐내고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 안내해주시겠어요? 직접 준비해주셨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나요.
 
아실링 펜들레엄:거절해도 괜찮은데.. (자신 때문에 단잠에서 억지로 깬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해한다.. 네 눈치를 보다 알겠다는 듯 고개 끄덕이고는, 4층으로 올라간다.) 4층은 전체가 식당이에요. 식당이라고 해 봤자 요리하는 곳과 테이블 몇 개가 다지만.
 
아실링의 말대로 식당의 구성은 조촐합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은 꽤나 다양하고 먹음직스럽군요.
 
둘이서 먹기에는 너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한 수프부터 스튜, 칠면조 구이, 스테이크, 샐러드……
 
귀한 손님을 맞아도 이렇게까지는 안 할 텐데요.
 
하물며 한낱 인간에게 마녀가?
 
아실링 펜들레엄:입에 안 맞는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참고할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절로 눈이 커진다) 오지 않았으면 이 음식들이 무척 아까워질 뻔했어요. 이렇게나 진수성찬을 준비해주시다니... 감사해요, 아실링. (당신의 맞은편에 조심히 앉는다. 어느 것을 보아도 먹음직스러운 것들뿐이다. 수프부터 한 입 떠먹으며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호화스레 드시나요?
 
아실링 펜들레엄:아주 대단한 솜씨는 아니에요. 어쩌면 당신이 평소 먹던 것보다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돼서 이것저것 만들게 됐네요. (스푼으로 어색하게 수프를 젓다가 한입 먹는다. 마치 이런 건 오랜만에 먹어본다는 듯) 보통은 이렇게 안 먹죠? 손님을 위한 거예요.
 
헬레네 L. 라세리온:저도 이 정도의 성찬은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나 먹어요. (연신 감탄하며 스테이크며 칠면조 구이도 골고루 섭취한다. 그러다 문득 당신의 어색한 손길이 눈에 띈다. 손님을 위해 평소보다 화려하게 차린 거라고는 해도 저 동작은 왠지 식사 자체가 어색하다는 느낌이다.) 맛도 무척 좋구요. 대단한 솜씨는 아니라고 하시지만, 무엇보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해주셨다는 게 감동적이에요.
(식사를 이어가다가) 그런데... 아까 잠깐 잠들었던 사이에 꿈을 꿨어요. 이번엔 이전처럼 벚꽃나무나 목소리가 나오는 꿈은 아니었어요. 더럽고 먼지나는 뒷골목이라서 저의 평소 생활과는 무척이나 달랐었는데... 이상하게, 꿈 속에서 보았던 푸른 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네요. 혹시 우리, 이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을까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런가요? .. 저한테는 특별한 날이 맞죠. 제가 언제 또 인간을 식사에 초대하겠어요. 이렇게 탑으로 와주는 사람도 몇 없는걸요. 맛있게 드셔주셔서 다행이에요. (마녀가 만든 식사를 의심도 하지 않고 먹어준 것에 대해 내심 고마워한다. 뭘 잘 먹나 꼼꼼히 살피다가 말고 중간중간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정성 담긴 것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 건 제가 또 잘 하는데.
이전에도 만난 적 있다라니. (샐러드를 제 접시로 옮기려다 말고 멈칫한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이어지며) 좀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말 같아요. 제가.. 인간들하고 붙어살지는 않아도 그런 건 안다고요.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지 않냐 하면서 상대를 꼬시려는.. 그런... (말 잇지 못한다.)
 
헬레네 L. 라세리온:(단순히 연구대상이라기에는 무척 친절한 대우이지 않은가. 그걸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불확실했지만 말이다.) 그럼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같은 그림이더라도 서사가 담겨 있는 그림을 더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걸요. 마음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 어... (어째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스푼을 문 채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 건지 긴가민가하다가 서서히 당황스러움이 찾아온다. 후다닥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한다.) 그-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께 그런... 추파를 던질 정도로 제가 과감한 성격도 아니고, 연애 쪽으로는 애초에 관심도 별로 없어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정말로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혹시나 과거에 만났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하고...!
 
아실링 펜들레엄:예술작품이라.. 제가 예술작품 보는 눈이 없고, 많이 감상한 적은 없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아요. (자신과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이 드는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예술작품 보는 걸 좋아하나요? 미술관 같은 곳에 가는 걸 좋아한다거나.. 당신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궁금하네요. 물론 연구를 목적으로요.
(당황하는 네 모습을 지켜보다가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모든 게 다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말하고는 전보다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한다.) 무의식이 꿈에 반영된다고 하죠. 역시 저를 좋아하시나요? (농담!) 이것도 장난이에요. 저는, 꿈에서 보고 싶은 상대는 아니죠. 마녀가 꿈에 나와봤자 뭐가 좋겠어요. .. 꿈에서 제가 왜 나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마녀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헬레네 L. 라세리온:네, 좋아해요. 사실 전 지식욕이 있어서 새로운 게 있다면 무엇이든 탐구하고 알아가고 싶어하거든요. 서점에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새로운 전시회가 열린다면 구경하러 간답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건 자택의 서가에서 한참 동안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모르는 지식들을 알아가고 새로운 철학을 배워가며 다각적인 면에서 문제를 두고 사고해보려 하죠.
... 자, 장난이었던 건가요? (당황해서 얼굴이 거의 빨개질 정도로 쩔쩔매다가 어깨에서 축 힘을 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성애적인 의미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요. (이번 농담은 어찌저찌 잘 컷해낸다) 저는 타인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아직까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는 조금 애매했다. 저에게는 이토록 잘 대해주는데도, 간접적으로나마 악행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었으므로.) 저는 제 꿈을 아실링이 전부 조종하고 만든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요? (그럼 무슨 내용의 꿈이었는지도 모르는 걸까?)
 
아실링 펜들레엄:당신은.. 대단하네요.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시간을 헛되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 쏟아붓다니.. 마녀가 그랬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거예요. 수명이 다르잖아요. 저 역시 탐구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시간이 많다 보니 힘을 들여서 깊이 빠지는 편은 아니거든요.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 당신과 함께할 시 간이 많았다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같이 탐구도 했을 텐데. 뭔가 아쉽기도 하네요.
그래요? 저는 미움받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면 다행이고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레 울적한 표정을 지어본다. 말하는 것이나 너를 대하는 것을 보면 네게 왠지 모를 호의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방 선을 그어낼 것 같이 적당한 거리를 둔다. 며칠 뒤면 다시 만날 일 없는 관계이니 거리를 둬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이지만 말이다.) 제가 당신을 조종해서 뭘 하나요? 얻을 게 없는걸.. 제가 당신 꿈에 찾아간 건, 이곳에 와달라고 했던 그날밖에 없는걸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런 차이점이 있군요. 얼마나 수명의 차이가 나는 걸까요? (옷장에 있던 낡은 옷들을 보면 몇백 년 정도는 가뿐히 넘기는 걸까 추정해본다.) 마녀와 같이 탐구를 할 수 있다면 새로운 연구의 지평을 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의 말처럼 저 또한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몇 밤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 영영 끊겨버릴 관계.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마녀의 흥미로 만나게 된 것이었으니 흥미의 불씨가 식으면 관계도 이것으로 끝이다. 사실, 몇 번이나 반복된 익숙한 꿈의 내용 때문인지 저는 생각보다도 당신에게 더 많이 마음을 열어버린 것 같았지만. 닫으면 그만인 문제일 것이다.)
미워하지는 않아요. 만약 당신이 저지른 나쁜 짓을 알게 되더라도, 당신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더 나은 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랄 거예요. (샐러드를 오물거린다) ... 나를 찾아줘, 라고 하셨던 그 날 말씀이신가요. 그 때의 아실링은 무척이나 울 것 같은 모습이셨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언제부턴가 나이를 세어본적이 없어서.. 정확한 것을 잘 모르겠네요. 제가 백 살 이후로는 세어본적이 없으니.. 그것보다 더 차이가 나겠죠. (머리 아프니 너무 자세히 파고들지 말라며 손짓한다.) 지식을 위해서라면 마녀와 함께할 수도 있는 건가요? 어디 가서 얘기했다가는 같은 마녀라고 오해받기 딱 좋은 말이네요. 악마 같은 것과 거래해 지식을 얻는, 그런..
... 그래요? 그럼 반대로, 마녀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당신한테 이쁨 받을 수 있나요? (그런 제 모습을 상상하다가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은 것처럼 고개를 젓는다.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나?)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제 눈에서 눈물 안 나온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아, 물론 하품할 때 빼고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과 탐구하는 것이 나쁜 지식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는걸요. ... 물론 세간에는 무척 부정적으로 비치겠죠. 아마 제가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 끌려갈지도 모르겠네요. 진실된 내막은 알려 들지도 않을 테니까요. (씁쓸함이 스쳐간다)
예쁨받는다는 말은 어감이 다소 이상한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마녀라고 한들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고 선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겠죠. (고개를 젓는 것이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백 년이 넘도록 살아온 시간이 차이가 나는데, 그 삶에서 스쳐지나갈 인간일 뿐인 자신이 무어라 말한대도 마녀가 그것을 들어줄 이유는 없으리라.) 잘못 본 것 같지는 않아요. 꿈이었음에도 무척 선명했거든요. 그래도 아실링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거겠죠.
 
아실링 펜들레엄:좋은 지식이라고 해도 저와 함께인 순간 바로 나쁜 지식으로 보일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제 변덕으로 당신한테 나쁜 지식을 보여줄지도 모르죠. 물론 그러지 않을 테지만. 알려주면 제 입만 아파요. 좋지 않은 지식을 당신이 제대로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요.
뭐예요. 저한테는 예뻐해 줄 일 없다는 걸로 들리는걸요. 거짓말이라도 그러겠다 해주시지. (잘 얘기하다가 삐뚠 말 툭 뱉는다.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어떤 장단에 맞춰줘야 하는 건지 모르게 모습이 오락가락한다.) 잘못 보신 거예요. 제가 울 이유가 없어서요. ...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저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싶어 하셨거나? (히죽)
 
헬레네 L. 라세리온:... 아실링의 그 말들은 저에게 예쁨받고 싶다는 말로 들리네요. (금세 헤어질 관계라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제가 당신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는 것처럼 혹 당신도 ㄱ러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당신에게 사로잡히고 있는 것일까. 달콤한 독은 중독되어가는지도 모른 채 빠져들게 된다.) 기뻐서 우는 것도 아니고, 슬퍼서 우는 모습은 볼 일이 적은 게 좋은걸요. 아실링은 정말 장난꾸러기시군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냥 미움받기 싫어하는 마녀일 뿐이에요. 근데 다 그렇지 않나요? 미움받기는 싫고, 예쁨 받는 게 좋고. ... 단순한 호기심인데, 당신은 상대를 예뻐할 때 어떻게 행동하나요? 사람마다 다 다른 걸로 알고 있어요. 예로 들면.. 이렇게.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손가락을 잡아다가, 점점 올라가 손등에 제 손바닥을 올린다. 시선이 맞았을 즘에는 부드럽게 웃으며 닫혀있던 입을 연다.) 손가락 하나부터 시작해서 다정하게 애정을 표한다든지, 아님 말없이 눈으로 바라보면 표현하는 거 말이에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당신의 답을 듣고 싶어요.
이제 아셨어요? 저는 마녀들 중에서도 성격이 나쁘고, 장난 많이 치기로 유명해요. 이런 마녀한테 걸리다니.. 당신은 운도 없네요.
 
헬레네 L. 라세리온:미움받기 싫어하는 것과 예쁨받고 싶어하는 건 다르지 않나요? 관계의 연장선에 있어서 말이에요. (붙잡히는 손끝, 맞닿는 손길, 느껴지는 체온. 부드럽고 느릿한 동작이었으나, 어쩐지 불길에 데인 것마냥, 아주 매콤한 향신료를 뿌린 것마냥 자극적이었다. 희미하게 떠올랐던 미소가 차츰 사라지고, 은근한 분위기에 춤추듯이 홀린다. 목이 바싹 타들어가는 듯하다. 붙잡히듯 손길에 시선이 고정되었다가, 가까스로 물잔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다. 아이마냥 장난스레 웃다가도 단숨에 묘하게 구는 것을 보면, 과연 마녀는 마녀인 것일까. 도통 적응하기가 어려워 연신 물을 마셨다.) ... ... 저는, 우선 시선을 맞추어요. 그리고 다정하게 눈웃음을 짓거나 미소를 짓지요. (그러나 눈을 마주보지도,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박자를 빨리하는 게 느껴졌다.) 웃음은... 딱딱하고 먼 거리의 벽을 허물기에 아주 좋은 요소이니까요.
(운이 없는 것일까? 당신이 지금껏 제 삶에 없었던 독특하고 특별한 유형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헤어지게 되더라도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아실링 펜들레엄:저한테 사람은 딱 두 종류라... 저를 예뻐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이오.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추가하자니, 이것저것 생각해야 될게 많아서 귀찮아요. 두 종류면 간단하잖아요. 예쁨 받는 사람한테는 잘하기, 미움받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심 기대했는지 입꼬리가 타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사라져 흔적만을 남긴 줄만 알았던 호기심이 이상한 부분에서 불타올랐다. 손등 위 손은 손가락을 파고들어 깍지가 껴졌고, 작은 행동들이 이어질 때마다 눈은 활짝 접어졌다. 연신 물을 마시는 모습에 속을 꿰뚫어볼 것 같이 관찰하던 행동은 잠시 멈춰졌다. 예뻐죽겠다는 감정을 담은 시선은 네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착하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잘 대답해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손을 팍 쳐내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저랑 이렇게 닿아있는 게 싫지는 않은가 봐요?
 
헬레네 L. 라세리온:무시하거나... (그 뒤에 분명 이어질 말이 더 있을 텐데. 자세히 파고들어 추측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올라온 손가락이 완전히 얽혀들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작게 움찔 떤다. 물잔을 겨우겨우 내려놓는 손길마저도 새의 날갯짓 같은 진동이 어렸다. 들키지 않았다면 좋을 텐데. 왜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신의 눈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은 직감이 든다. 고작 손 하나 잡힌 것뿐인데. 그 정도의 스킨십은 저도 주변인들에게 자주 해 오던 것이었는데... 왜 지금만큼은 이렇게 진득히 얽혀들고 빨려들어가는 듯한 것일까. 흘끗 들어 본 당신의 시선은 분명히 저를 향한 호감이 담긴 채다. 선을 긋던 것과는 다르지 않나요- 반문하려던 말도 곧 사그라든다. 당혹스럽고 부끄러웠지만,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 ... 싫지는 않아요. (한참 뒤에 들릴락 말락 조그만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게 아실링이 상대방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인가요?
 
아실링 펜들레엄:... 보통은 무시해요.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싫거든요. 상대에 따라 다르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도 여러 가지 무게가 있고요. 제가 마녀라 싫어서 피하는 사람과, 마녀라고 죽이려고 드는 사람은 다르잖아요. 저도 그런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해 달라며 깎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정 표현이 다양하다 못해 변덕스러운 표정은, 이번에는 묘하게 뾰로통해졌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생각만 잔뜩 할걸 알면서도, 괜히 틱틱거리며 자신에게 더 집중하게 만드는 이런 행동은.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유치해 보였다.) 제가 표현하는 호감은 이것과는 조금 달라요. 그렇다고 지금 이 행동에 호감이 완전히 담겨있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고요. 제 방식대로 호감을 표하면.. 당신이 도망 칠지도 모르죠. 나름 당신을 향한 제 배려에요. (마녀를 상대로 도망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금방이라도 다가갈 것처럼 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식탁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네 앞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혹시 제 호감 표현 방식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다른 생각을 하고 싶어도, 지금 제 머릿속은 온통 당신과 관련된 온갖 상념들이 구름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도저히 그럴 틈이 없는 상태였다. 그걸 알면서도 이러는 거라면 정말 독선적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새침하고 매력적인 마녀다.) 당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마치 커다란 짐승 앞의 조그만 새처럼 압도당한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흐트리면 전부 삼켜질 것만 같았고,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그대로 당신이 쏟아질 것만 같다.) 도망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시는 걸 보니, 꽤나 과격한 방법인 걸까요...?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뺏긴 아이처럼 안달나게 만들고, 발돋움하게 만들고, 결국 먼저 손을 뻗을 수밖에 없도록 저를 차근차근 조여오려는 것일까. 순진하고 천진한, 그러나 지금은 어쩔 줄 모르고 제자리에 앉아 숨 내쉬는 것이 다인 그의 위로 마녀의 그림자가 진다. 격하게 움직이지 않았는데 호흡이 가빠오는 기분이었다. 거절한대도 당신은 저를 겁박하거나 해치지는 않겠지. 미지의 인물이다. 곧 헤어지게 될 사람이다. 깊게 얽혀보았자 남은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거부의 뜻을 표하고 싶지 않은 것은. 결국 망설이던 입술이 열린다.) ... 가르쳐주시겠어요?
 
아실링 펜들레엄:확인받고 싶어서요. 제가 이상한 쪽으로 집착이 있는지라.. 욕심도 많고요. 이왕 같이 있는 거면 저한테 모든 감정이 쏠려있는 게 좋아요. 제 생각만 하고, 저만 바라보고.. 관심을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걸까요? 이 나이에? (제가 생각해도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지 픽 웃는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준 마녀가, 이렇게도 유치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그 누가 쉽게 생각할까.) 과격한 방식은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저한테 질려 할 것 같아서..? 당신이 싫어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쉽게 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며 대충 말을 얼버무린다. 적당한 선을 지키고 헤어진다. 그것이 마녀가 생각한 계획이었다. 그런 계획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줄은 생각도 못 했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정해둔 선을 넘은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더 넘어가 버리기 전에, 그래도 더 오래 살은 자신이 나잇값을 해야겠지 않냐며 손을 때려는 순간 의외의 대답을 듣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귀 끝이 붉어졌다.) ... 제가 안 무섭나 봐요. 이래 봬도 마녀인데. ... 정말로 궁금해요? 그러려면.. 이곳은 좀 그런데..
 
헬레네 L. 라세리온:집착, 욕심... (처음 벚나무 아래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슬피 부르던 목소리만이 기억에 남아 아련하고 서글픈 면을 지닌 이가 아닐까 멋대로 추측했었는데 완전히 빗나간 모양이다. 집착도 욕심도 저와는 먼 거리에 있던 것이었다.) 질린다는 건 제가 싫어하는 행태가 몇 번이고 반복될 때에 쓰이는 말이지요. 하지만 저희는 길게 볼 사이도 아닌데다, ... 지금의 상황이 부끄럽고 놀랍기는 하지만 싫지 않아서요. 무섭게 굴지 않으셨으니 무섭지 않아요. ... ... 그런데 이곳이 아니라면... (인간관계에 있어 천진할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한 그였지만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눈치라는 게 고개를 드는 법이다.) ...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실링 펜들레엄:저랑은 안 어울리나요? 놀랐을 수도 있겠네요. 불쌍한 헬레네.. 어떡하죠. 당신은 그런 마녀랑 단둘이 있는 건데.. (그런 말을 하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유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곳의 온 것은 당신의 선택이지 않냐며, 뻔뻔함만이 가득했다. 부른 것도 자신,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자신이면서 말이다.) 괜찮다는 이야기죠? ... 당신한테 제가 겁을 준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장소는 아래층이 제일 좋긴 하죠. 당신이 머물 방이요. 근데, 생각해 보니 여기서도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요. (당신이 보기에 좋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싫어할 거면 나중에 맘대로 표현하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네 좌석 앞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몸이 딱딱한 바닥에 무릎이 닿아지고 드레스가 구겨졌다. 한 손은 네 무릎 위에 올려지고, 다른 무릎에는 제 머리를 올려 기댄다. 흡사 의자에 앉아있는 주인 다리에 달라붙어있는 강아지 같은 모습을 취한 채, 얼굴을 기댄 상태 그대로 너를 올려다본다.) 식당에서 이렇게 있기에는 좀... 그래 보여서요. 식사하는 곳에서 남에 다리에 기대 있는 건 이상하죠?
 
헬레네 L. 라세리온: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 제가 처음 본 아실링과의 이미지하고는 다르단 생각이 들었음은 부정할 수 없네요. (아실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레 깜짝 놀라서 어깨를 한 번 더 떨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긴장감이, 그리고 심장 한구석에 몰래 숨어든 설레임이 조금씩 조금씩 커져온다. 드레스가 사부작거리는 소리, 내려가는 높이, 그 모든 광경을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담기만 하다가... 무릎에 고개를 기댄 당신이 저를 올려다보고 나서야 헛숨처럼 내쉰다. 자신은 무얼 상상했던 걸까? 그것도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어렴풋한 기류였을 뿐인데... 왜인지 긴장감이 쭉 풀리는 듯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작게 올라간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당신의 머리 위에 얹어보았다. 부드럽고 연약하게 은발을 쓸어내린다.)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이러는 건 다소 의아해보일 수 있겠네요. 그래도... 귀여우신걸요, 아실링. 이전에도 좋아하는 분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가셨나 싶어서요.
 
아실링 펜들레엄:당신이 처음 본 저는 어땠는데요? 궁금해요. 알려주세요.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이라면 한번 그렇게 해보려고요. 아, 혹시 좀 전에 말한 울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나요? (원하시다면 울어볼까요? 같은 능글맞은 소리나 해댄다. 안운지 너무 오래 지나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노력을 해볼 수 있다나 뭐라나.) ... 사실 이건 세 번째로 좋아하는 거예요. 장소가 장소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있는 게 제일 좋고.. 아, 두 번째로 좋아하는 건 지금 당신이 그렇게 해주는 거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헤실헤실 웃어버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이렇게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며 생각하던 것들을 마구 입 밖으로 내뱉는다.) 제가, 예쁨 받는 걸 좋아하긴 하나 봐요. 귀엽다고 해주는 말도, 행동도, 다 좋아요. (이전에도 이렇게 다가갔냐는 말에는 눈을 데굴 굴리다가 묘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가 낸다.) 그때는 더했죠. 맨날 침대 위로 올라가서 끌어안고 안 놔주려고 했죠. 맨날 침대 위로 올라가서 끌어안고 안 놔주려고 했는데. 아, 그게 첫 번째로 좋아하는 거예요. 여기서는 못하는 거죠?
 
헬레네 L. 라세리온:무척이나 서글퍼 보이셨어요. 그러면서도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 북받치는 듯 기뻐 보이기도 하셨죠. 꿈 속에서의 목소리는 아주 가냘프고 간절했었어요. 그래서 전 아실링의 성격도 목소리처럼 여린 분이 아닐까 추측했었답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과거를 회상한다.) 하지만 그게 좋아하는 모습이라고 여기진 말아주세요. 어디까지나 첫인상이니까요. 아실링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요.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가 뒤늦게 불쾌하게 여기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 반대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쓰다듬받으며 좋아하는 모습에서 왜인지 강아지가 연상된다. 마치 폭포수마냥 연달아 쏟아지는 말소리들. 아주 오래도록 그 말을 받아줄 상대방이 없었던 것일까 추측하게 된다. 주인을 잃은 강아지가 외로움과 그리움을 견디고 견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꼭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예쁨받기를 좋아한다는 말도 그렇다. 왜인지 당신이 안타깝고 안쓰럽다.) 운이 좋았네요. 아실링이 좋아하는 걸 맞출 수 있었다니. 그러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귀엽고 예쁘다는 말을 많이 해 드려야겠어요. 정말로 귀여우신 아실링. (이어지는 말을 되풀이한다) 침대 위... 포옹을 굉장히 좋아하셨던 모양이네요. (그런 거라면 위험한 일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꽤나 안일하게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탑으로 향할 때만 해도 가득했던 경계심이 마치 햇살 아래 얼음처럼 스물스물 녹는다.) 식사도 마쳤으니 그리할까요? 안고 지냈던 그 분만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실링이 원하는 것이라면 응해드릴게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런 모습으로 보였나요? 이왕이면 좋은 인상이었으면 했는데.. 좋다, 나쁘다 구별하기 좀 어렵네요. 확실한 건 마지막 말은 틀렸어요. 저는 그렇게 여린 사람은 아니거든요. 당신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고요. (우는 제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네 말과는 반대되게, 장난스레 흑흑 우는 척을 한다. 이 와중에도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인지, 통 알 수 없는 속내다.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예쁨 받는 것을 즐기다가 퍼뜩 눈을 뜬다.) ... 보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을 예뻐하지 않나요? 예쁨 받는 게 싫다는 말은 아니고요, 뭔가 뒤바뀐 것 같아서요. ... 역시 겉모습이 어려 보여야 좋은가 봐요. 새파랗게 젊은 미인한테 예쁨도 받고. 저는 운이 좋은 마녀에요. (시간도 얼마 없겠다 마저 예뻐하라며 찝찝했던 감정을 접어두고 다시 대화에 집중한다.) 보통은 같이 안 자나 봐요...? 제가 교류를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사람들 생활이 좀 바뀐 것일 수도 있고.. ... 어울려주신다면 감사해요.
 
헬레네 L. 라세리온:혹여나 오해하진 마세요, 그게 나쁜 인상으로 보였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요. (부드럽게 말하며 고개 주억였다.) 맞아요. 여린 분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그러면서도 우는 시늉을 하고 있으니, 정말 알기 어려운 마녀다. 확실한 건 장난기만큼은 무척 많은 이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목적이건간에.) 보통은 그렇지만, 아실링은 겉보기에는 저와 동년배처럼 보이시고... 또 먼저 와주셨으니까요. 싫지 않으시다고 하니 저는 원하시는 만큼 예뻐해드리려고 해요. (그 말대로 손길은 여전히 당신의 은발 위에서 노니고 있다.)
지금의 통념으로는, 침대 위에서 매일같이 끌어안고 자는 건 보통 연인 사이에서 하는 일이에요. 가족이나 형제자매 사이도 해당되겠네요. 포옹은 애정과 친근감이 어린 스킨십이니까요. (그런 스킨십을 당신에게 기꺼이 허락한다. 당신이 그만큼 가깝게 느껴져서일까? 당신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들어서, 라는 이유가 더 정확할지도.) 그럼 이제 침실로 갈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오해할 생각은 없어요. 오늘 지켜보면서 느낀 대로라면, 당신은 함부로 남을 나쁘게 생각할 사람도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저도 이렇게 귀여워해 주는 걸 보면 당신이 어떤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지 눈에 훤히 보여요. (그러니 자신도 이렇게 마음 편히 행동할 수 있는 것이겠지. 경계하는 사람에게 마음 편하게 가까이 갈 정도로 느슨한 이는 아니었다. 지금 이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 네 덕분이었다.) 동년배고, 싫지 않다고 하면 다 이렇게 예뻐해 주시나요? .. 이건 이동하고 나서 진지하게 들어보기로 하죠. (다른 이에게 주는 애정은 별로인지 입이 삐죽 나왔다. 매 순간 기분 표정이 왔다가 다하는 것이, 모르는 사람이 봐도 평범한 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생각한 것보다는 범위가 넓네요.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고.. 보통은 그렇단 말이죠? (그럼 자신은 어디에 속한 것일까. 하고 고민해 본다. 마녀인 자신에게도 상냥한 너니까, 이런 것도 쉽게 어울려주는 것이라는 것에 답을 내렸다. 짧은 시간, 좋은 기회를 놓칠 일은 없다. 먼저 몸을 일으키고는 구겨진 옷을 정돈하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짓는다.) 잔뜩 귀찮게 굴 거예요. 나쁜 마녀한테 잘못 걸린걸 후회할 생각은 마세요.
 
아실링은 이동하기 전, 식후에 마실 차를 내오겠다며 자리에서 이동합니다.
 
아까는 몰랐는데, 퍽 피로한 낯입니다.
 
마녀도 피로를 느끼긴 하는 모양이죠.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의자를 밀어넣던 아실링이 잘게 기침을 뱉습니다.
 
작게 시작한 것치곤 꽤나 격렬하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기침이 완전히 멎었을 때, 헬레네는 입을 가렸던 아실링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것을 봅니다.
 
모를 수 없습니다. 피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제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하는 일은 없도록 할게요. (입술 삐죽하는 모습이 문득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살짝 참는다. 아실링을 따라 일어나려다가, 그의 손에 묻어나오는 검붉은빛을 발견하고는 낯이 차게 얼어붙는다. 급하게 아실링에게 다가간다) 아실링...! 어디 편찮은 데라도 있으신 건가요? 피가 묻어나올 정도로 기침을 하시다니...
 
아실링 펜들레엄:(기침이 진정된 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입가의 피를 닦는다. 피가 묻어 나온 장갑을 벗어 식탁에 올려두고는 괜찮다며 오늘 계속 보였던 생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온다.) 별일 아니에요. (그렇게 일축할 말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놀랐죠. 미안해요. 아, 전염병 같은 것은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별일이 아니라뇨. 피를 토하실 정도인데... (마녀이니 막연하게 아플 일도 없으리라고 여겼다. 이제야 당신의 낯에 피로가 얹혔음을 알아챘다. 어째서 이리 늦게서야 알았을까. 일축해 보아도 걱정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부피를 키워간다.) ... ... 의사에게 가보자는 부탁을 드리면 너무 우스운 것일까요?
 
아실링 펜들레엄:별일 아니라니까요. 그냥.. 마녀랑 인간이랑 신체구조가 좀 달라서 가끔 이렇게 피 토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편이 당신 마음에 편하지 않겠어요? 쓸데없는 걱정도 안 할 테니 말이에요. (마지막 대답을 하는 순간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다가, 의사 얘기가 나오자 눈썹이 찌푸려진다. 작게 조소가 이어지고는 손가락으로 툭툭 소리 나게 식탁을 친다.) 마녀를 의사에게로?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가요? 살면서 들어본 이야기 중에 정말 웃긴 이야기였어요. 아, 물론 거짓말이에요. 하나도 안 웃겨요.
 
헬레네 L. 라세리온:신체구조가 아무리 다르다고 해도 피를 토하는 마녀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어요.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요. (명백히 조소가 어린 반응에도 걱정어린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의사에게 보일 수 없다면 자신이 무얼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마음이 드는 스스로를 의사에게 보이고 싶었는지도.) 저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인간의 약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아실링 펜들레엄:똑똑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이해가 느린 건가요? 그냥 무시하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는지.. (좀 전까지의 부드럽던 말투는 어디 가고, 제법 날카로움이 섞인 목소리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한번 찌푸려진 얼굴과, 분위기는 쉽게 풀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제가 너무 잘 대해줬나 봐요. 아, 어차피 사흘 정도 후에는 여길 떠날 거 아닌가요? 너무 과한 오지랖으로 보여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알고 있어요. 사흘 후에는 전 여길 떠날 테고, 당신의 연구도 끝이고, 우리의 관계도 끝이 날 거란 걸.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걸요.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것은 모쪼록 세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버려져 있는 법임을 알아서일까. 부조리에 내몰린 푸른 눈이 여전히 맑았기 때문일까?) ... ... 오지랖으로 느껴지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전 아실링이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아실링 펜들레엄:잘 알고 있네요. 당신이 그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은 아닌가 했지 뭐예요. 그런데도 신경 쓰인다고 말하다니.. 신경 쓰지 마세요. 함께하는 시간도 짧겠다, 어차피 당신은 아무것도 못해요. 의사에게 데려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제 발로 가줄 것 같냐며 코웃음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네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나? 네게 잘 보이려고 했으면 했지, 이렇게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혹시.. 약속한 날보다 더 머물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인간을 챙기는 건 귀찮아요. 제 쪽에서 거절할 거예요. 진심이든 뭐든 걱정 받는 것도 싫고요.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차조차 내주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귀찮게 굴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말은 덤이었고.)
 
헬레네 L. 라세리온:어떻게 마음을 바라는 대로 바로바로 바꿀 수 있겠나요. 아실링은 마녀라서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인간이기에 그리할 수는 없어요. (서글프게 고개를 내저었다. 따스하고 매혹적으로 타오르던 분위기는 화롯불이 꺼지듯 사그라든다. 두 사람 사이에 완연하게 그어지는 선이, 볼 수 없는데도 눈에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갈 곳 없어진 제 손을 서로 맞잡은 채 멀어지는 당신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본다. 함께 침대에 누워 꼭 끌어안고 있다 보면, 당신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또한 제 이야기를 터놓았을 터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그저 가능성으로만 사그라들어 사라져 버린다.) ... ... 더 머물지 않을게요. 사흘만 머물다 떠날 테니 걱정 마세요. 잘 자요, 아실링... (마지막 밤인사는 당신에게 닿았을까 싶을 정도로 연약하게 사그라든다.)
 
건강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건강
기준치: 50/25/10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없던 식곤증이 생긴 것처럼 잠과 피로가 몰려옵니다.
 
새벽부터 승마에, 마녀의 집을 둘러보느라 체력을 많이 쓰기는 했죠.
 
방으로 돌아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몹시 허탈하고 서글펐지만, 몰려오는 피로감을 막을 도리는 못 되었다. 터덜터덜 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는다.)
 
또다시 수마가 몰려옵니다.
 
이번에도 꿈을 꾸게 되는 걸까요?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습니다.
 
마녀의 연구라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면 아실링이 그리 쉽게 당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안심하고 눈을 감을까요.
 
...
 
몽롱한 정신 속에 또다시 꿈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없이, 한없이 쏟아지는 벚꽃에 매몰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숨이 막혀 죽어도 족할 것 같았어요.
 
저 먼 곳에서 절망에 젖은 낯으로 눈물을 쏟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만 아니었어도요.
 
꿈이란 건 정말 편리하죠.
 
아무리 아플 법한 일을 당해도 고통 같은 걸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요.
 
시야가 붉습니다.
 
쏟아지는 건 벚꽃이 아니라 몽둥이와 핏방울이라는 걸 사실은 알고 있어요.
 
움직이지 않는 몸을 끌고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날 네 손을 잡았던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요.
 
아니, 어쩌면 조금은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눈으로 바라봐지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이에요.
 
마녀의 부하, 구제할 수조차 없이 홀려 이제 죽이는 것밖엔 답이 없는 놈.
 
감히 마녀를 숨겨 주다니.
 
이명만이 울리는 귀에 드문드문 분노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목소리가 걸립니다.
 
반박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요.
 
멀어지는 정신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아팠던 그 대신 당신이 고통을 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요.
 
……
 
창문이 없는 탑 안에서는 시간대도 날씨도 알 수가 없습니다.
 
헬레네는 새삼스레 그 사실을 상기하며 눈을 뜹니다.
 
영문 모를 꿈 탓에 안 그래도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주위까지 이상하게 조용합니다.
 
지금 몇 시죠?
 
햇빛의 양으로 가늠할 수 없으니 시계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분명 거실에 괘종시계가 있었죠.
 
헬레네 L. 라세리온:(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뜬다. 지금까지 꿔왔던 꿈과는 현저히 다른 내용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기억에 없는 일들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펼쳐지고 겪은 적 없는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이번에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울고 흐느끼는 푸르디푸른 홍채... 이것도 아실링이 일부러 나에게 보여주는 꿈인 것일까?)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창문이 없어 바깥 하늘의 모습과 시간대를 확인할 수 없으니 더더욱 그렇다. 비척거리며 괘종시계를 보러 간다.)
 
괘종시계를 보러 거실로 나가자
 
테이블 위에 쪽지가 한 장 있는 걸 발견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이 남겨뒀을까? 서둘러 들어 읽어본다)
(아직도 나에게 많이 화가 나셨을까... 쪽지를 속독하고는 착잡한 마음으로 다시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아무래도 아실링은 잠시 탑 밖으로 나간 모양입니다.
 
언제 나갔는지를 모르니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네요.
 
기다리라고 해도 여기서 할 건 없지만요. 어떻게 할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돌아다니는 걸 막진 않겠다 하셨으니 불길해 보이는 5층 외에는 살펴보아도 괜찮은 거겠지. 4층에 올라가본다)
 
어제 봤던 식당입니다.
 
헬레네가 잠든 사이 어제 사용한 식기를 다 치웠는지, 식탁은 아주 깨끗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식당 외엔 별게 없구나... 다시 돌아서 2층으로 가본다)
(같이 치웠어야 했는데...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
 
그러고 보니 2층은 아실링이 쓴다고 했었나요?
 
2층을 둘러보면 처음 만났을 때 아실링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헬레네와 닮았다는 아는 사람에 대한 것도요.
 
...
 
사람의 손이 닿아 왔음이 역력하던 3층과 달리, 2층은 텅 비었다는 인상만을 줍니다.
 
거실이라 부를 만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고
 
침실은 잠을 자는 것보다 서재의 기능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책장이 잔뜩 들어차 있네요.
 
[책장] 십수 개 안쪽에 놓여 있는 [침대]는 헬레네의 것과 비견될 정도로 작고 초라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은 저곳에서 잠드셨던 건가? 제겐 무척 좋은 침대를 주셨으면서.. 짠한 마음에 침대부터 다가가본다.)
 
이불을 정리하지 않았는지 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불의 모양으로 보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누웠던 모양입니다.
 
관찰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베개 옆의 [구겨진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저건 웬 쪽지지...? 이불을 평평하게 잘 정리해주다가 쪽지를 발견하곤 들어서 펼쳐본다)
 
손으로 구겨서 버린 것 같습니다.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어디선가 본 필체이지만..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펴 보면 내용은 몇 줄 되지 않네요.
 
[옛날 얘기 하지 말 것. 예전 옷은 내다 버릴 것. 책들도 빠른 시일 내에 없앨 것.]
 
헬레네 L. 라세리온:... (다소 의문스러운 내용이다. 옛날 얘기라 해 보아도 저는 알아들을 만한 내용도 아닐 텐데... 쪽지에서 지칭하는 대상이 저라는 보장은 없지만, 제가 아니라면 따로 이야기할 만한 대상이 누가 있겠는가.)
(의문을 가져 보아도 답이 나오진 않는다. 쪽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책장으로 다가간다.)
 
동화책과 유아용 글자 연습 책만 꽂혀 있던 3층의 책장과 달리
 
두껍고 딱 봐도 어려운 책들이 잔뜩 꽂혀 있습니다.
 
자료조사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제목은 [생의 순환]과 [꿈에의 침입]이군요.
 
헬레네 L. 라세리온:내용이... (꿈에의 침입. 생의 순환. 이 상황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듯한 제목이다. 과연 내용은 어떨까.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침을 삼키며 [생의 순환] 부터 읽어본다)
 
[생의 순환]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있지만,
 
위대하신 ■■■■의 교리에 따르면 사후 인간의 정확한 행보는 하나의 고리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며, 그 주기에는 개인차가 있다. ……]
 
중간에 펜으로 마구 그어져서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있네요.
 
헬레네 L. 라세리온:다시 태어난다고... ... (사후의 일은 알 수 없다. 게다가 위대한 무언가의 '교리'라는 건 결국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니 신빙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하지만 최근 겪은 일련의 상황 탓인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말이다.)
(자신이 읽어보리란 걸 예상하고 지워둔 것일까? 아쉬운 마음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찾으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다음 권을 펼친다. [꿈에의 침입])
 
[■■■■을 사용하면 일정 거리 내에 있는 대상의 꿈에 간섭하여 환상을 보낼 수 있다.
 
악몽은 뇌를 썩게 하고 부패시킨다.
 
대상은 술자가 아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헬레네 L. 라세리온:(역시 최근 연달아 꾼 꿈은 아실링이 만들어낸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무슨 목적일까? 뇌를 썩게 하고 부패시킨다는 문장은 꽤나 섬칫하지만, 아실링이 저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관찰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책장 중 하나의 위에 올려져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저기엔 뭐가 들어있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의자를 책장 앞에 가져다놓고 그 위로 올라가 꺼내본다)
 
나무 상자는 재질 탓에 작지만 묵직합니다.
 
남의 것을 건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남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았을 때는 이미 뚜껑을 연 후입니다.
 
뚜껑이 열린 건 오랜만의 일인지 나무 가루가 손에 묻어납니다.
 
낡은 물감과 종이의 냄새가 흐릿하게 코끝을 감돕니다.
 
삐걱이며 열린 것은 상자만이 아니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에 있는 것을 살펴보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원래라면 남의 물건에 이리 손대지 않았을 텐데. 머뭇거리면서도 책장 높은 곳에 손을 뻗은 건, 처음부터 상자가 완전히 타인의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는 새 뚜껑을 열고 있는 순간도 그렇다. 꼭 이미 이 행동이 손에 익어 있는 사람 같지 않은가. 직감적으로 이 상자가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줄 것임을 꺠달았다. 그 진실은 과연 저에게 어떤 감정과 미래를 선사할 것인가.)
(떨리는 손길로 뚜껑을 옆에 내려두고 안에 든 것을 살펴보았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한낱 종이 더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걸 보자마자 숨이 막히고야 말았던 건,
 
그 위에 서툰 솜씨로 그려져 있는 것이 틀림없는 당신이었기 때문이겠죠.
 
종이 위에는 온통 당신의 그림뿐입니다.
 
조악한 선이 몇 년일지 모를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점차 가지런해집니다.
 
갈수록 선명해지는 그림 속의 얼굴은 곧 누가 보아도 당신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헬레네를 닮아 갑니다.
 
그러다, 그러다가……어느 순간 다시 모호해지는 게 아닌가요.
 
머리의 길이는 어느 정도였지?
 
햇빛을 받으면 어떤 빛의 눈이 되더라.
 
고작 얼굴 한 번 다시 보면 알 수 있었을 법한 것들을 그리려 들었을 손이 망설였으리라는 게 붓에서 느껴집니다.
 
어째서?
 
헬레네 L. 라세리온:(오랫동안... 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나를... ... 나는 분명, 아실링을 이 탑에서 처음 만났는데.)
 
대체 아실링은, 당신의 무엇이었던 걸까요.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합니다.
 
아래층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종이 더미 속 자신의 모습을 숨 막힐 듯 바라보다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꿈에서 깨듯 파르르 어깨를 떤다. 일단은 서둘러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고 책장 위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이걸 보았다는 걸 아실링이 알면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좀 전에 난 큰 소리 이후로,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아랫층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것일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금방 아실링이 올라올 줄 알았으나,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혹시 아실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젯밤 피를 토하던 그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더럭 겁이 나서 서둘러 계단참으로 달려가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1층으로 내려와 보면 아실링이 탑의 벽에 기댄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눈을 감은 채 땀에 젖어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딱 봐도 피로에 젖어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 (비명처럼 새된 소리를 지르곤 그에게 달려간다.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네?
 
아실링 펜들레엄:... 무슨 일이긴요. 별일 아니에요. (몸을 가리고 있던 망토를 힘겹게 벗어 대충 바닥에 내려놓는다.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눈에 보이자 숨을 고르다가 말고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간다.) 쪽지에 적은 내용 대로에요. 연구 재료를 모으러 밖에 잠깐 다녀왔을 뿐이에요. 주위를 둘러봤지만 쓸만한 게 없어서 빨리 돌아온 거예요. 자, 정말로 별일 아니죠?
 
헬레네 L. 라세리온:아무리 사흘 뒤면 헤어져야 할 사이라지만, (자신이 지금껏 알아낸 진실들을 보면 헤어져선 안 될 것 같았지만.) 이런 거짓말을 하실 필요가 있나요.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아실링은 무척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세요. 제가 약초에 관한 지식이 조금 있어요. 구체적인 증세와 병명을 알려주신다면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어디가 아프신 건지 말씀해주세요. 네? (땀에 젖은 당신의 이마를 안타까운 손길로 닦아준다)
 
아실링 펜들레엄:네, 금방 헤어질 사이죠. 잘 알고 계시네요. ... 약초 지식이요? 저도 그런 거 정말 좋아해요. 우리 좀 이따가 티타임 하면서 약초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지금은 말고요. (네가 무어라 반응하든 제대로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내며 주제를 바꾸려고 든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힘이 모자란 건지 오래가지는 못했다.) .. 잠시 쉬고 싶어요. 그냥 혼자 있게 해주세요.
 
잠시 쉬어야겠다고 말하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던 아실링은, 아무런 예고 없이 실 끊긴 인형처럼 쓰러집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황망하게 곁을 스치는 당신을 돌아보다가, 이번에야말로 사색이 되어선 쓰러지는 그를 아슬아슬하게 붙잡는다.) 아실링!! (괜찮은 척 하더니, 이렇게 금세 쓰러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인가. 눈가가 문득 젖어드려는 것을 애써 닦아내고는, 그를 부축한 채 힘겹게 2층으로 올라간다. 방금 단정하게 개 두었던 이불 위로 겨우겨우 눕히고 그의 낯을 살폈다. 어떤 처치를 해주어야 하지?)
 
손을 대 보면 확연히 뜨겁습니다.
 
이런 고열로 어디를 돌아다니다 온 거죠?
 
침대에 눕혀진 아실링은 저항하지 않으며 열에 달떠 씨근거리는 숨을 뱉을 뿐입니다.
 
상자 속에 담겨 있던 그림에 대해 묻고 싶었어도 물을 수가 없게 됐네요.
 
지금은 아실링의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불러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둘째치고서라도 탑에 들일 수가 없으니 의사를 부를 수도 없고……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초조하게 그의 이마에 손을 대 본다. 이렇게나 뜨겁다니. 이렇게나 상태가 안 좋은데 왜 굳이 바깥에 나갔다 왔을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행운 9 깎겠습니다)
 
5층에 창고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5층에는 인간이 보면 제정신이 아니게 될 법한 것들이 가득하다고 했었죠.
 
조심해서 다니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이성적으로 생각해요, 헬레네.
 
만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마녀 따위를 위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약을 찾으러 목숨을 위협받을 필요는 없는 겁니다.
 
어떻게 할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당장 약초를 찾으러 가기에도 어려운 상황.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가 5층에 있다던 창고에 생각이 미친다. 아실링은 쪽지로 그곳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여러 진실들을 알게 된 이상 이제 저는 마냥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아실링과 저는 오래 전 만난 적이 있다. 과거의 자신이 죽었고, 목숨이 순환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라면... 창고에 접근한대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도저히 아실링을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사흘이 지나도 저는 돌아가지 않을래요, 아실링. 모든 걸 당신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저희 사이의 모든 해후가 풀리기 전까지는요.
(그의 손을 잠시 꾹 잡았다가, 5층을 향해 계단참을 뛰어올랐다. 한시가 급했다.)
 
4층을 지나 5층에 도착하면, 발을 내딛는 순간 해묵은 옛 것들의 향이 코를 찌릅니다.
 
창고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많은 물건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지만,
 
아실링이 경고했던 부류의 물건들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는 도중 낡은 양피지 몇 장이 발에 채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잔뜩 긴장한 채 안쪽으로 걸음한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과 연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아실링의 말이 거짓이었던 건지, 위험할 만한 물건들은 없어 보인다.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발에 채인 양피지를 들어 읽어본다.) 치료법 같은 게 쓰여 있다면 좋을 텐데...
 
주워서 확인해 보면, 어린아이가 글자를 연습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내용은 군데군데 철자가 틀렸지만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오늘은 ■■■가 산수를 가르쳐 주었다. 나이는 비슷한데 알고 있는 게 훨씬 많아서 부럽다.
 
나도 어렸을 때 가족이 있었으면 ■■■처럼 될 수 있었을까?
 
물어보니 ■■■는 이제부턴 우리도 가족이라고 했다. 기뻤다.]
 
이건……아실링이 쓴 걸까요?
 
다른 종이는 온통 ■■■의 이름과 아실링의 이름을 쓴 필적뿐입니다.
 
본인의 이름을 연습한 종이보다 ■■■의 이름을 연습한 종이가 훨씬 많네요.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 아실링이 당신을 그렇게 불렀었죠.
 
헬레네 L. 라세리온:(여러 단서들로 보았을 때 전생의 자신이 어릴 적의 아실링을 돌보고 기른 것 같다. 양피지를 읽으니 더더욱 확실해진다. 하지만 어째서 아실링이 혼자 남게 되었을까. 어젯밤 꾸었던 그 불길한 꿈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었던 것인가.)
 
양피지를 내려놓고 안쪽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바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무언가의 잔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무토막, 동물의 뼈, 찢어진 옷감……
 
군데군데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
 
보는 것만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될 법한 것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리 유쾌한 것들도 분명 아닌 물건들이 한가득입니다. SAN 1/1D2.
 
헬레네 L. 라세리온: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1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실링, 당신이 경고했던 건 이것들인가요...? ... ... 저를 너무 겁주셨군요. 그만큼 이곳에 숨기고 싶은 것들을 보관해두셨다는 거겠죠. (씁쓸하게 잔해들을 응시한다)
 
이성 -1
 
난장판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온통 엉망인 주위와 달리 그나마 그 위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책상 위에는 뚜껑이 열려 있는 잉크병과 오래 쓴 게 눈에 보이는 깃펜,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첩 몇 권이 놓여 있습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여기엔 좀 도움이 될 만한 게 적혀있어야 할 텐데... 책첩을 조심스레 펼쳐 본다)
 
책첩을 펴 보면 편지를 엮어 둔 형식입니다.
 
첫 권의 첫 번째 장은 너무 낡은데다 물에 젖었다 마른 상태라, 잘못 손대면 부스러질 것 같습니다.
 
글씨는 점차 알아보기 쉬워지고, 종이는 점차 새것이 되어 갑니다.
 
그리하여 헬레네는 또다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실링의 필체라는 것을요.
 
편지를 다 읽은 헬레네, SAN 1/1D3.
 
헬레네 L. 라세리온:(전부, 짐작한 사실이었다. 당신이 저에게 거두어졌다는 것도, 자신이 당신을 감싸려다가 죽었다는 것도, 다시금 태어나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런데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이 종이와, 당신의 것임이 분명한 이 필체와, 마지막에 쓰인 헬레네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은 왜일까.)
... ... 그런... ... (죽는다니. 수명이 다하고 말았다니. 그럼 당신이 아픈 것도, 어떠한 질병이 아니라 그저 타고난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란 것일까? 안 돼. 보낼 수는 없다. 이제야 진실을 알았는데, 이제야 당신을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잠들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는데...)
(자각할 틈도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창고를 뒤지고 또 뒤진다. 쓸만한 건 없는지. 약초로 보이는 건 없는지. 사실을 부정하고픈 발악에 가까웠다.)
 
눈물을 흘리던 중에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실링은 병에 걸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저 남은 시간이 거의 없는 것뿐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아실링을……
 
아니, 잠시만요. 왜 그를 구할 생각을 하고 있나요?
 
아무리 당신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해도, 편지에도 나와 있었잖아요.
 
악마의 주문을 사용하는 극악무도한 살인자입니다.
 
구할 이유도 없고 소용도 없잖아요. 그렇죠?
 
그럼에도 그를 구하고 싶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에 당신을 멀리하는 반응을 보였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얼마나 씁쓸했을까. 당신은 그 오랜 세월 저를 찾아 한 순간도 쉬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온 세상을 헤매었는데.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당신이 진정 악한 면모를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불편해하였다. 그가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면, 그 죄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지탄의 형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수를 살인한 것은 분명한 죄이다. 그러나 아실링은 법을 대신하여 그들을 단죄한 것이다. 그 힘을 악마에게 받은 독이라 칭한다면 저는 기꺼이 독을 품고 스러지리라.)
(책첩을 읽은 순간부터 당신을 위한 약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병이 아니라, 그에게 남은 시간이 모래시계 떨어지듯 줄어들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도저히 모른 척하고 물러설 수 없다. 이대로 끊어져선 안 된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몇백 년을 헤매어 당신이 저를 찾아와주었으니 이번엔 자신이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잡을 차례다.)
지능 판정
 
헬레네 L. 라세리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편지에서 읽었던 수명을 빼앗는 주문 내용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요. 당신의 앞으로의 나날을 일부 떼어 주면 아실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인 당신의 찰나를 쪼개어 마녀인 그에게 나눠준다면요.
 
헬레네 L. 라세리온:(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녀의 삶에 비하면 저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 한날 한시에 눈 감을 수 있다면. 방법을 떠올렸으니 망설일 시간이 없다. 주문의 내용을 상기하자마자 2층으로 뛰듯이 내려간다. 너무도 정신이 없어 중간에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 뻔했다.)
 
아래로 달려 내려갑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촛불은 흔들리고, 시간은 새벽 바람이 달빛을 좀먹듯 아실링을 집어삼킵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전생, 분명 오래는 아니었을 함께였던 시간, 고작해야 그게 뭐라고 몇백 년을 찾아 헤맨단 말입니까.
 
그런 생을 세간에서는 마녀라 부른단 말인가요.
 
불에 살라 먹혀야 마땅하다 생각한단 말인가요?
 
아실링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침대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불덩이에 숨결도 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헬레네가 곁에 오자 빛 없는 눈이 힘겹게 뜨인다.) 뭘... ... 피곤해요. 혼자 있게 해주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링... ... (당신의 초췌한 낯을 보자, 겨우 진정되었던 눈물이 다시금 왈칵 터져나왔다. 당신의 양손을 잡은 채 애타게 흐느낀다.) ... 과거의 저는 분명 당신을 아실, 이렇게 불렀을 거예요. 당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을 테니까요. 그렇죠? 그리고 당신도 저를 애칭으로 불러주었을 테지요.
5층에 다녀왔지만, 미치지 않았어요. 이렇게 멀쩡하게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네요. 제가 멀쩡할 수 있었던 건 창고에 있던 것들이 당신 말만큼 위협적이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무의식간에 저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셨던 걸까요? (말도 안 되는 가능성임을 알면서도 읊는다. 눈물이 당신의 뜨거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왜 저에게 숨기셨나요. 겨우 사흘간의 인연, 그 뒤론 절대 만나지 않을 사이. 정말 이대로 되어도 괜찮으셨어요? 저를 오랫동안 찾으셨잖아요. 종이도 옷들도 그림도, 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도록 기다리셨잖아요...
 
아실링 펜들레엄:... 잠도 못 자게, 왜 울고 그래요... (우는 네 모습을 보자 금방이라도 힘없이 감길 것 같던 눈이 다시 떠진다. 울고 있는 네가 걱정되는 것인지, 힘겹게 뜬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써 노력한다.) ... 애칭 같은 거 안 불러본 지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네요. ... 헬리. 지금은 이렇게 부를까요...?
미쳤을 수도 있죠.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을 죽인 마녀 곁에 이렇게 있다니.. 아니면 제가 미쳤을 수도 있겠네요. 미친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나? 이렇게 있는 당신이 환상이거나.. 내 꿈일 수도 있겠네요. 좋아요. 좋은 꿈이에요. (지금 보는 것이 꿈이라면, 마지막을 장식하게는 정말 미련 없는 꿈일 것이다. 네가 울고 있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말이다.) ... 나는 그냥 당신을 한 번만.. 단 한 번만 더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어차피 시간도 없을 것 같고. 당신은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요. 종이나, 옷, 그리고 이곳에 남겨진 낡은 것들은 다 저와 같은 것들이에요. 제가 남긴 미련이에요. 당신이 그것에 묶여있을 필요는 없죠. 그것이 마녀라면 더더욱 함께할 필요도 없고요. 자, 이제 자유로워지기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 당신 마음이 편하면 좋을텐데..
 
헬레네 L. 라세리온:지금 눈을 감으면 당신이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될 걸 아니까요. 그건 싫어요... 이대로 당신이 잠드는 모습을 볼 수는 없어요. (헬리, 마주 애칭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아련하게만 들리는지.) 아실, 당신이 계속 저의 애칭을 불러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게 저의 욕심이라고 해도... 도저히 당신을 보내드릴 수 없어요. 그 편지를 읽은 이상, 당신이 저를 그리며 보내 온 세월을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당신이 죽인 이들은 저를 죽인 이들이었잖아요. 저, 꿈을 꿨어요. 전생의 제가 죽는 순간의 꿈을요. 그때 서럽게 울던 당신의 파란 눈이 너무도 강렬했었어요. 당신에게 선을 그어 미안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당신은 그만 미안해했으면 좋겠다고 썼지만, 도저히 뻔뻔하게 저의 행위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과의 말을 빚는다.) 당신은 저를 위해 그렇게 애써주었는데, 왜 저는 기억하지 못했을까요... ... (흐느끼다가 입술을 꾹 깨문다. 여리고 가냘픈 목소리는 점차 힘이 실린다. 이미 결정하고 온 바였다.) 미련이 아니라 추억이에요. 묶여있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제가 맞잡겠어요.
저를 위해 몇백 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살아와주셨으니, 이 짧은 인간의 생이라도 당신을 위해 살아가려 해요. ... ... 당신이 과거에 썼던 수명을 빼앗는 주문을 비틀면 저의 수명을 당신에게 나눠줄 수 있어요. 우리, 함께 살아가요. 이번에는 함께 벚꽃을 보고 봄나들이를 가요. 헤어질 걱정 없이 살아가요. 전생에 다 마무리짓지 못했던 추억들을 쌓아가요. 그렇게 해주지 않을래요? (촉촉히 젖어든 목소리로도 끝끝내 웃음짓는다)
 
아실링 펜들레엄:저 졸린데.. 성격이 좀 나빠졌군요? 졸린 사람 잠도 못 자게 하고.. (이런 와중에도 다시 봤다는 말이나 하며 농담이나 한다. 울지 말고 미소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정말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어떡하죠? 계속은 힘들어요.. 지금 이 상황은, 제게 상이면서 벌인걸요. 아, 과거에는 벌이었어요. 당신 없는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헬리, 당신을 찾아다녔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당신을 잃는 것은 아닐까, 너무 걱정됐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을 찾았으니 이것은 상이죠. 저한테 다시는 없을 상이고, 구원이에요.
부디 행복하길. 나 같은 사람과 만나지 않기를, 주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만이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신 님에게 기도도 해봤어요. 저한테는 쓸모없었던 그 기도가, 당신에게는 이뤄진 것 같네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울음 가득 찬 목소리 이후에는 창백한 손이 올라와 네 뺨을 감쌌다. 열에 감싸 뜨겁지만, 금방이라도 차갑게 식어버릴 것 같은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마녀라고 불리는 저한테, 당신은 많은 것을 알려줬어요. 세상을, 글자를, 그리고 행복한 생활을.. 당신이 없었다면 공허하게 끝났을 제 인생에 많은 것을 안겨줬어요. 저는 정말로 행복해요, 헬리.
모르는 게 당연하죠. 저도 그럴 줄 몰랐는걸요. 그런 것에 미안해하지 마세요. (맞잡겠다는 네 말에도 미련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는 듯이, 한 줌의 미련 없이 오직 너만을 눈에 담는다. 잡힌 손에 벗어나 멀어지려는 듯, 작별을 고하듯 네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한다.) 아... 다행에요. 당신에게 받은 것을 전부 전해줄 수는 없지만, 이 마음만큼은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 과거에 쓴 주문이라뇨.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물기에 가득 찬 눈이 일그러진다.) 내가... 제가 어떻게 당신의 수명을 받아 가요. 당신의 수명을 앗아간 것은 저번으로도 충분해요. 더 이상 당신한테서 뭔가를 뺏어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나인데, 당신은 왜 자꾸 뭘 주려고 하나요?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 부디 저한테 그러지 마세요. 저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세요.. (자신이 행복을 꿈꾸었다가는, 다 일이 잘못되고 만다며 엉엉 울며 거부한다. 이러다가는 네 행복까지 앗아갈 것 같아 두려움이 가득 찼다. 저번에도 그랬던 것을, 이번 생이라고 안 그럴 수 있겠는가.)
 
헬레네 L. 라세리온:스스로를 '나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마세요. 아실, 당신은 현명하고 매력적인 분이에요. 그리고 사랑스러운 분이고요. 저를 진심으로 아끼셨잖아요? 저를 좋아해주셨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오랜 세월 동안 저를 찾아 떠돌아다녔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당신의 뺨을 손등으로 천천히 쓸어준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당신이 자괴감과 죄책감에 깊게 매몰된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스스로를 그리 끌어내리지 않아도 되는데. 당신은 이미 충분히 속죄해왔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떠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살인죄에 대한 벌은 충분히 받은 셈이다.) 저 같은 사람, 잊어버리셨어도 됐어요. 하지만 기억해주셨죠. 덕분에 저는 당신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전생을 떠올리게 되었어요.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
저는 이번 삶에서 많은 인연을 만났어요. 소중한 사람들도 분명 있지요. 그렇지만 그분들보다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당신과의 연을 더 중히 여기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나요. (미련 없이 고개 젓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당신의 행복이 이 짧은 순간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저의 삶의 한 조각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실, 당신이 저의 행복이에요. (명료하면서도 진실된 문장이었다.) 그러니 당신을 잃는다면 저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이번에는 제가 매일 밤마다 당신을 찾아가려는 꿈을 꿀지도 모르지요. 찾고 찾아, 영혼의 바다 속에서 당신의 끝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을 때까지요.
아무것도 주지 못하셨다니요. 당신이 저에게 추억을 주셨잖아요. 사랑을 되찾아 주셨는걸요?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은 바로 저예요. 그러니, 조금 더 욕심을 내도 괜찮아요. (결국 목놓아 우는 당신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몸을 기울여 어깨를 꼭 끌어안는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었지. 저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함께하고픈 애틋한 마음이 닿기를.) 행복해도 괜찮아요. 이번엔 더 이상 당신의 앞에서 제가 죽는 것 같은 비참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무엇을 믿고 그리 확신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실링과 저 사이에 이어진 단단한 세월의 결속을 믿는다고 답할 것이다.) 제가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라셨다고 했죠? 전 아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요. 그러니 부디 받아주세요.
 
아실링 펜들레엄:당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제 전부였는걸요.. 넓은 세상에서 저한테 잠깐 주어졌던 행복은 당신밖에 없었어요. (자신을 받아준 것도, 숨이 끊기기 전까지 행복을 빌어준 것도 너였다. 많고 많은 세상 사람들 중 오직 한 명, 너만이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여겨줬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저를 살아있게 만들 정도로는 충분했는데. 당신은 자꾸 그 이상을 원하게 해요. 내 계획을 망치려고 들어요.
무시하면 될 연이에요. 다 꿈이었다, 나쁜 마녀가 수명을 빼앗으려고 당신을 조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모든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마녀는 위험하다고, 악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좀 멀어져주면 안 돼요? 마녀를 죽게 내버려 둘 영웅이, 당신이 될 수도 있는데. (모든 것이 끝난 후, 작은 마을의 귀족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녀가 있는 성으로 찾아가 그것의 죽음을 확인했다. 얼마나 용감한가. 그 이야기가 마을에, 세상에 퍼진다면 당신은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을 텐데.) ..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저랑 똑같은 짓을 하겠다는 거예요? (온 힘을 쥐어짜 네 손을 잡고 안된다고 뜻을 전했다. 그런 일은 하는 것은 자기 혼자면 충분했다. 네가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좋은 것만 보고, 행복하게 살기만 해도 짧은 수명에 왜 자신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네 귀한 시간을, 감정을 잡아먹게 두고 싶지 않았다.)
... 저와 어울렸다가는 분명 후회하게 될 거예요. 마녀와 어울렸다가는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요. (그동안 쌓아왔던 울음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듯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중간중간 이런 짓을 하는 네가 밉다며 원망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밀어내지 않는 것은, 그 잠깐의 사이 욕심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것을 쥐어짜내어 만든 작은 욕심. 흐려지는 이성 사이로 희망이 아닌, 약간의 욕망을 품는다. 부디 이것을 용서해 주길. 큰 욕심이 아니니, 네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숨죽여 빈다.) ... 제 맘대로 할 거예요. 어차피 당신은 주문을 사용할 줄도 모르고.. 아, 이것은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웃음을 짓는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저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셨잖아요. 그런데 이 잠깐, 고작 사흘밖에 안 되는 시간으로 만족하고 죽고 만다니... ... (그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 않은가.)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아실. 이 탑에 처음 와 아실을 만나고 대화를 하며 누누이 말씀드렸죠. 저는 마녀가 진실로 나쁜 존재라 생각치 않는다고. 그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실체 없는 허상을 만들어 누명을 덧씌우는 것뿐이라구요. 당신은 그와는 다른 진짜 마녀라고 했지만, 제 눈에는 결국 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고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걸로 보여요.
똑같은 짓을 할 만큼 당신을 아껴요. 당신이 소중한 존재예요, 저에겐.
영웅 같은 건 관심없어요. 귀족이라는 신분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애초부터 명예나 권력은 욕심내본 적도 없어요. (단호히 말을 잇는다. 결국 당신이 저를 말리는 이유는 저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차라리 당신을 위해서라고 했다면 망설였을지라도 모르는데. 그만큼 저를 향한 깊고 너른 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끝이 좋지 않는다는 건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평가하는 것이잖아요? 저희가 생각하기에 행복했고 기뻤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끈질기게 당신을 설득하고 안심시키려 한다. 소중하게 되찾게 된 인연, 놓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결정을 바꿀 일도 후회할 일도 없으리라.)
걱정하지 마세요, 아실. (당신을 꼭 끌어안은 채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이미 당신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더없이 기쁘니까요.
 
아실링 펜들레엄:행복해지는 방법 같은 건 몰라요. 적어도 세상 사람들에게서 마녀는 불살라 없애야 한다는 존재라고 알려졌다면, 더더욱 그런 방법은 알고 싶지 않고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 너를 그리워한 시간들은 당연한 대가인 것이다. 그러니 자격 같은 것은 더더욱 모른다. 모르고 살아도 괜찮았다. 단 한 번만 너를 볼 수 있다면, 그 단 한 가지 소원만을 바란 자신에게 그것 말고 여러 가지 생기는 것은 두려웠다. 끝이 아닌, 나머지 삶이 두려웠다. 그럼에도 네가 이런 자신을 가엽게라도 봐준다면, 가끔 바라봐 주고 쓰다듬어주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한 번쯤 해봐도 괜찮은 도박인 것일까? 쉽사리 답을 결정하지 못했다.)
남들은 다 갖고 싶어서 난리 치는걸, 당신은 거부하고 있네요. 이미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망설임도 없고... (다 자신을 다시 만나면서 잘못된 게 아닐까? 그런 걱정도 들었다. 평탄하던 네 길에 자신이란 잘못된 갈림길이 생겨, 네가 잘못 들어서는 것을 아닐까. 그런 걱정이 가득 찬 마음에 작은 욕심이 파고든다. 조금은 괜찮을 것이라며. 아주 조금이니 괜찮다고. 탑이 아닌 바깥에서 다시 그 행복한 날을 한 번이라도 보내고 싶었다.)
제 걱정 말고, 당신 걱정하세요. 예쁘게 웃는다고 안 넘어가요. (훌쩍)
 
헬레네 L. 라세리온:모르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하루하루 함께 일상을 보내다 보면 웃는 날이 늘어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워지는 삶이 온다면... 봄볕과도 같은 삶,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걸 자각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게요. 그런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럴지도 몰라요. 명예도 권력도 시간이 지나면 전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사그라들어 버리지요. 하지만 인정과 친애는, 베푸는 마음과 다정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버텨낼 수 있는 따스한 힘을 준답니다. 저는 그 가치를 알아요. (손수건을 꺼내 젖어든 눈가를 톡톡 닦아준다.) 저는 걱정하고 싶지 않네요. 좋은 날만 올 거라고 믿고 싶어요! (희망이 가득 찬 말이었다.)
 
아실링 펜들레엄:그런 날이 온다면요... 그때는 같이 어울려 드릴게요. (또 삐딱하게 말하기는. 상상되지 않는 그런 날들이 온다면, 자신이 먼저 손을 잡고 너와 뛰어갈 것이다. 지금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저는, 당신한테 뭔가를 쥐여줄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뺏어갔으면 뺏어갔죠. 그런데도 당신이 두렵지 않다면, 걱정하고 싶지 않다면.. 저도 잠깐이나마 함께해볼게요. 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이 세상이니까요.(자기 나름대로 긍정적인 말..)
 
아실링이 죄책감과 슬픔으로 얼룩진 낯을 한 채 손을 뻗어 당신의 귀를 막습니다.
 
그 입모양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눈감아주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그래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말하려는 게 보여서 작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꼭 절반을 가져가주셔야 해요, 아실.
 
그 말에 눈을 감으면, 일순 몸이 얼어붙더니 감은 눈앞이 번쩍입니다.
 
몸을 돌던 무언가가 강제로 뜯어내어지는 느낌.
 
몸의 말단부터 중심부까지,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어찌 저항해 볼 겨를도 없이 얼어붙습니다.
 
정신이 아득합니다.
 
아픈 게 아닙니다.
 
다만 확실히 무언가가 덜어내졌을 뿐입니다. SAN 1D2/1D4.
 
헬레네 L. 라세리온:
SAN Roll
기준치: 68/34/13
굴림: 35
판정결과: 보통 성공
rolling 1d2
 
(
2
 
)
 
 
=
2
 
이성 -2
 
그렇게 정신을 잃기 직전 들려온 것은, 결국 또다시 흐느낌입니다.
 
-
 
아실링 펜들레엄:...나세요. 일어나세요..!
 
몸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아실링 펜들레엄:ㅇㅇ
 
혼곤한 정신을 붙들고 눈을 뜨면, 눈앞에 있는 것은 조금 앳된 얼굴의 아실링입니다.
 
당신이 입을 떼기도 전에, 아실링은 미간을 좁힌 채 핀잔 아닌 핀잔을 줍니다.
 
못 일어나는 줄 알았다고 말이에요.
 
그런 얼굴도 금방 웃는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오늘 밤엔 벚꽃을 보러 나가기로 했잖아요. 약속 잊은 것은 아니죠?
처음 같이 보는 건데...
 
뒤따르는 것은 핀잔이라기보다는 칭얼거림입니다.
 
……아, 그랬죠.
 
오늘은 아실링과 함께 벚꽃을 보러 가기로 했었습니다.
 
마녀로 몰려 마을에서 쫓겨날 뻔했던, 당신이 몰래 데리고 온 고아 소녀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보면 큰일날 테니 마을을 벗어나 뒷산에 올라가서요.
 
멍하니 그런 것을 생각하며 헬레네는 이것이 망령 같은 과거의 기억임을 알아차립니다.
 
바꿀 수 없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결과가 뻔해서 더 고통스러운, 그런.
 
아실링은 당신과 함께 밤벚꽃을 보러 나간다는 생각에 들떠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당신은 알잖아요.
 
둘이서 함께 벚꽃을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은 곧 밀려들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를 도망시키고 죽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실링은, 마녀가 되어 수백 년의 시간을 홀로 떠돌겠죠.
 
매 순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영원 같은 나날을 견딜 겁니다.
 
아실링 펜들레엄:(들떠있다가 말고 의아한 눈으로 돌아본다.) 왜 그러세요? 악몽이라도 꾼 것 같은 얼굴이에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 너무 오래 누워있었나요? (수명은 제대로 가져가셨죠, 그리 물으려던 순간 시야에 보인 앳된 모습에 숨을 삼킨다. 이 모습은, 이 나잇대는 분명 과거의 아실이다. 이건 꿈일까? 하필 전생의 꿈을 꾸게 되다니. 맞아 죽게 될 자신의 미래보다 기대감에 젖은 당신의 고운 낯이 순식간에 슬픔과 절망으로 얼룩지리라는 것이 가슴아팠다.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가, 의아한 시선에 애써 표정을 갈무리해본다. 아마도 이것은 꿈, 자신이 무얼 한대도 미래가 바뀌지는 않겠지.) ... 꿈자리가 조금 사나워서 그랬나 봐요. 괜찮아요, 아실.
(조금만 지나면 이 평온하고 다감한 순간이 깨져 버린다니. 그저 벚꽃을 보러 가고팠던 아이일 뿐인데. 대체 얼마나 악하고 못된 짓을 했다고 그리 우르르 몰려들어 분노를 표출해야만 했던가... 서글프기 그지없는 심정에 금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제가 아실과 한 약속을 잊을 리가요.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을지 기대가 되네요. 그래도 아실보다는 못하겠지만요.
 
아실링 펜들레엄:너무 곤히 자서 안 좋은 꿈을 꾸는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빨리 깨웠을 텐데..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라며 네가 덮고 있던 이불도 빠르게 정리한다.) 약속, 깜박했다면 좀 삐질 뻔했어요. 장난도 좀 칠 생각이었고요. 안 잊었다니 다행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자신의 장난은 좀 심하지 않냐면서 농담 섞인 이야기를 줄줄 이어간다.) 밥도 잘 먹고, 키도 쑥쑥 크면 같이 꽃 보러 나가준다고 했잖아요. 솔직히 얘기해 보세요. 제가 이렇게 쑥쑥 클 줄은 몰랐죠? 그렇죠?
 
헬레네 L. 라세리온:네에. 우리 아실은 장난기도 많죠. (겉으로나마 웃음을 보이며 일어난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도 시선은 당신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피로와 수척함이 아닌 설렘과 기대감이 엿보이는 아실링의 모습은 무척 소중한 순간이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겨두고 싶었다.) 아실의 말이 맞아요. 이렇게 물을 가득 받은 화초처럼 쑥쑥 자라나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답니다. 그래도 제 눈에는 언제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 아실이에요. (쓰다듬)
 
아실링 펜들레엄:저랑 나이 얼마 차이 나지도 않으면서.. 너무 어린애 취급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 대우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처음 만났던 그날의 어린애가 아닌, 너와 같은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다.) 제가 그때 너무 비쩍 마르고 키도 작긴 했지만.. 이제는 당신보다 더 큰데..! (억울!)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투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아실이 저보다 자그마할 때부터 봐 와서 그런지 아직 저에겐 아이처럼 느껴지네요. 이리 보는 건 싫으신가요? (웃었다. 현재의 모습을 보다가 과거의 어린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가 되었다. 전날 식사 시간 때에도 그렇고 이때부터 당신은 저를 좋아해오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새 저보다도 더 자라셨는지... 감회가 새로워요.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한 번 꾹 끌어안아 준다.) 알겠어요. 아실은 저와 동등한, 멋지고 성숙하신 어른이랍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정말요? 아닌 것 같은데... (장난 섞인 말이 아니냐며 농담하고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꼬옥 안고 있는다. 그러던 것도 몇 분, 품에서 벗어나더니 빗을 들고 와 네게 쥐여준다.) 머리카락 빗겨주세요. (누가 봐도 혼자서 빗을 수 있는 나이지만, 머리카락은 꼭 네가 만져줘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곤 했다.) 이 길이가 너무 어색해요. 머리카락이 너무 상한 상태라 자를 수밖에 없었지만... 당신이 예전에 묶어줬던 것처럼 땋고 싶었는데..!
 
헬레네 L. 라세리온:진심이랍니다. (마주 농담하듯 말한다. 빗이 쥐여지자, 역시 이런 면은 아이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당신이니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알겠어요. 여기 앉아보세요, 아실. (부드럽고 느릿한 손길로 짧은 머리칼을 빗어준다. 다시 만난 당신은 아주 긴 머리칼이었었기에 세월의 흐름을 다시금 실감한다. 그리고 그 은빛 머리칼은 곱게도 땋아내려진 채였더랬다. 사소한 헤어스타일마저도 자신의 흔적이 구석구석 남아 있음을 실감하자면 심장이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아파온다. 당신을 떠나게 될 시간은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헛된 마음이 들었다.) 짧은 머리도 땋을 수 있답니다. (옆쪽으로 머리를 작게 잡아 곱게 땋아준다. 거울에 비춰주며) 어때요?
 
아실링 펜들레엄:(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 머리 빗어지기를 기다린다. 네가 이렇게 머리를 만져줄 때는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이 들지 않았다. 마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때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당신이 마법을 쓰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마법을 쓰는.. 마녀는 아니고 요정? 이런 저를 돌봐주고 함께해 주는 건 착한 요정 말고 없는 것 같고요. (생각나는 대로 줄줄 말하다가 멈칫한다. 너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저..를 나쁘게 말한 건 아니에요. 아니.. 그냥 습관이에요. 이게 잘 안 고쳐지네요. 당신이 좋아하지는 않는 것인데.. (이걸 어떡하지? 하고 눈만 도로록 굴리다가 대화 주제를 돌린다.) 짧아도 좋아요. 그렇게 묶어주세요.
 
헬레네 L. 라세리온:'이런 저' 라뇨. (당신이 예상한 대로 표현을 지적한다.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무척 자신을 낮게 보고는 했었지. 세상이 당신을 마녀라 몰아가고 핍박하였으니 그런 성격인 것이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욱 함께할 수 있었다면 그 성격도 언젠가는 고칠 수 있지 않았을까. 제가 떠난 이후 당신의 자존감은 더욱 낮아졌을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저를 요정이라 곱게 봐주시는 것만큼 아실 본인도 좀 더 긍정적으로 보실 필요가 있어요. 아실은 착하고 멋진 분이세요. 세간이 당신을 미워하는 건 경직되고 고지식한 사회적 통념 때문이지, 아실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제 말을 꼭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꼭.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나 강조하고 싶다. 리본을 가져와 땋은 머리를 잘 고정시켜 묶어주었다.) 자아, 다 됐네요. 무척 잘 어울려요.
 
아실링 펜들레엄:(네 반응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머리카락을 빗는 중이라 어디에 숨지도 못하고 얌전히 제 잘못을 받아들인다. 요놈의 입! 요놈의 입! 고친다고 노력하는 것이 제 맘대로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제가 잘못한 건 알아서 얌전히 네 눈치를 보다가 우물쭈물 입 연다.) 당신이 한말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전부 기억하고 있는걸요.. 앞으로는 그런 생각 더 안 하도록 노력할게요. (입도 조심하고!) 아! 어때요? 잘 어울린다 말고 다른 것은요. (귀엽다거나, 예쁘다거나. 그 외 다른 것도 얘기해달라며 네 손을 잡고 매달린다.)
 
헬레네 L. 라세리온:네, 아실이 그 말을 반드시 지켜주셨으면 좋겠네요. 언젠가는 저에게서 떠나 홀로서기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은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닥쳐올 미래는 너무도 지독하고 뼈아픈 것이라서, 이렇게 떠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나마 간접적으로 전해본다.)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꽃보다도 아실이 더 아름다울 것 같네요! (뒤쪽에서 당신의 목덜미를 다시금 폭 끌어안는다)
 
아실링 펜들레엄:제가요? 당신을 떠나요? (어떻게? 왜? 그렇게 말하는듯한 눈으로 본다. 너와 함께 살게 된 이후, 떨어져 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제 세상이 이 작은 집안이어도 좋았다.) 저는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요. 저의 성장을 응원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 당신은 저랑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아요? (궁금해서 물어본 대답이었으나, 뒤늦게 그 물음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네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면 어떡하나, 내심 두려웠다.) 그렇게 얘기해 주시면 제가 엄청 좋아할 것 같나요? 맞아요! 기분 좋네요! (끌어 안겨져서 헤실헤실 웃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면 좋을 텐데.)
 
헬레네 L. 라세리온:아무렇지 않을 리가요. 저도 아실을 떠나고 싶지 않답니다. 하지만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잖아요. 혹여 저희가 싸우거나 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면, 함께 지내지 않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릴지도 모르지요. (척 봐도 놀란 듯한 반응에, 안심시키려는 듯 밝게 말 잇는다) 그런 날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혹시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다거나... 장기간 멀어져야 하는 날이 온다면 아실이 너무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기억해주시는 한 저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것이고, 당신 안에 남아 있을 테니까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럴... 수도 있겠죠.. (네가 자신에게 실망하는 날이 온다거나.. 네가 의미한 것과 다르게 다르 게 해석해 크게 오해한다. 네가 자신에게 실망해, 다시는 보기 싫다는 날이 온다면 자신의 손으로 먼저 네 곁을 떠날 것이다. 자신에게 행복이 뭔지 알려준 너는, 계속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이어갈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계속 당신을 기억하면 되는 건가요? 저 그런 거 엄청 잘해요. 솔직히 말하면, 기억할 만한 사람은 당신 말고 없고. ... 그래도,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아직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공부를 더 많이 하면 알게 될까요?
 
헬레네 L. 라세리온:네, 저를 계속 기억해주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외롭고 힘들 때 돌아가고픈 안식처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천천히 땋은 머리칼을 매만진다) ... ... 제가 너무 보고 싶을 때는 꿈을 꾸시는 거예요. 눈을 감고 저를 상상해주세요. 머릿속에 깊게 각인된 기억은 무의식 중에 꿈결에 나온다고 해요. 그러면 그곳에서 다시 저를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당신이 저의 꿈을 찾아오는 날까지, 당신이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아실링 펜들레엄: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제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인걸요. 제가 당신을 기억 못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저를 보면 어떻게 웃어줬는지, 어떤 목소리로 불러줬는지.. 저를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전부 기억할 거예요.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너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할 자신이 있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상대, 다시는 없을 소중한 사람이니 말이다.) 좋은 방법이네요. 그런 방법이라면 현실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헬리는 역시 똑똑하네요..! 앞으로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돼볼게요.
 
헬레네 L. 라세리온:우리 아실은 정말 똑똑하기도 하죠. (자신이 더 뿌듯한 심정으로 담뿍 칭찬해준다.) 그렇게 세세하게 저를 기억해 주시겠다 말씀해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러면 아실이 조금 더 또렷이 기억할 수 있게 웃는 모습도 많이 보여드리고 아실의 이름도 많이 불러드려야겠네요. (아실, 아실- 당신의 애칭을 몇 번이나 부른다. 책이 오래 되어도 활자는 사라지지 않듯 제 목소리가 새겨지도록.) 조금만 지나면 아실이 저의 지혜를 넘어설 것 같은걸요. 저도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야겠네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렇죠? 다 당신 덕분이에요. 공부가 얼마나 재밌는 것인지 알게 돼서 기뻐요. 당신한테 똑똑하다고 칭찬받을 수 있어서 좋고요. (너와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글자를 읽는 법도, 공부를 하며 느끼는 성취감과 지식욕도, 사랑받는 기분 모두 너를 통해 배웠다. 너한테 받은 이 애정을 언젠가는 다른 사람한테 베풀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계속 지켜봐 주세요. 당신의 아실이 어떻게 자라는지요.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될 테니까요. 기대해도 좋아요.
 
평화로운 대화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도 마음 한켠으로는 기억이 밀려듭니다.
 
봄이 오기 시작하던 날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버려져 있던 그 애를 주워 왔던 것,
 
글자를 가르쳤던 것, 함께 그림을 그렸던 것,
 
같이 벚꽃을 보기로 약속했던 것……
 
잊어서는 안 됐던 것.
 
그리고 쾅, 소리와 함께 불시에 문이 흔들립니다.
 
어리둥절하던 아실링의 얼굴에 다음 순간 공포가 스밉니다.
 
그 뒤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깁니다.
 
제 옷가지와 책들을 아실링에게 안겨 그를 뒷문으로 밀었던 것,
 
곧 따라가겠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
 
눈물에 젖은 푸른 눈이 당신을 봅니다.
 
또다시 그림자에 숨어서.
 
...
 
같이 도망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손을 잡고, 같이.
 
-
 
눈을 뜹니다.
 
이 탑에서 일어나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흐릿한 시야를 가다듬으면 눈가가 발개진 아실링이 헬레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울었나 봅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저 또한 울었는지도 모른다. 잊어서는 안 되었던 기억이, 뒤늦게서야 저의 심장에 스며들어 회상을 꽃피운다. 그날 했던 말이 마지막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을 오래도록 혼자 두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우셨나요, 아실...? (그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매만진다)
 
아실링 펜들레엄:... 안 울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일 것 같네요. 보이는 대로에요.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하고는 물기 머금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얘기한다.) 일 년 정도의 수명만 앗았어요. (결국 네 말은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겠다고 확답한 적도 없고. 자신한테는 네 1년분의 수명도 과분했다.) 제가 없는 동안 아주 여기저기 신나게 돌아다니셨더군요.
 
헬레네 L. 라세리온:... 어째서 그러셨나요. 절반의 수명을 앗아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렸었잖아요. (눈썹이 서글피 처졌다. 과거를 보고 온 후, 당신을 향한 죄책감과 아픔이 더 커지면 커졌지 해갈되지는 않았다. 아직도 쿵쿵, 시끄럽게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릴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집안을 돌아다니는 걸 막지는 않겠다고 하셨기에, 이리저리 살펴보았어요. 제가 호기심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실도 잘 아시잖아요.
 
아실링 펜들레엄:... 그럴 상황이 아니었는걸요. 애초에 당신만 보고 사라질 생각이었던 사람한테 그 이상의 시간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조용한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섞여있었다. 충분히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 네 부탁만 아니었다면 수명을 가져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5층에 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제가 그렇게 말했는데... 쥐는 무서워하면서, 이상하게 다른 일에는 겁이 없어서 위험한 일에도 도망치지 않고... (이번 생에도 어쩜 그렇게 똑같냐며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과거에, 두려운 그 순간에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혼자 남은 사람이 너인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헬레네 L. 라세리온:저에겐 이 상황이 가혹하지 않다고 여기시나요? 저, 과거의 꿈을 꿨어요. 사람들이 저희의 집으로 쳐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평화를 누리던 그 순간의 꿈을요. ... ... 그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꿈은 꿈일 뿐이지만, 그 순간에라도 다르게 행동해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어땠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어요. 당신을 혼자 남겨둬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어요, 아실. (당신의 손을 붙잡은 채 눈 감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신을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함께 눈을 감고 싶었어요... ... 아픈 당신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어서 물불 가릴 상황이 아니었죠. 쥐가 나왔더라도 꾹 참고 전부 찾아봤을 거예요.
 
아실링 펜들레엄:당신은 저랑 다르죠. 당신은 저한테 해줄 만큼 다 해줬어요.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은 걸을, 당신 부탁에 못 이겨서 가져간 것이에요. (죽기 직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무슨 염치로 네 수명을 받아 갔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네 수명이었다. 자신 때문에 짧고도 짧은 인간의 수명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너였다. 자신의 손으로는 조금도 건들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그것을 스스로 행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꿈은 그냥 꿈으로 여기지 그러셨어요. 나쁜 꿈이니 빨리 잊은 것이 좋을 것이고요. ... 역시 당신과 함께하는 것은 힘들어요. 저를 돕는 것은 수명을 나눠준 그것을 마지막으로 하세요. 더 이상 저랑 엮일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헬레네 L. 라세리온:... ... 싫어요, 아실. 전 ... ... 수명을 받아가기 전 제가 했던 말들은 한 치도 거짓 없는 진심뿐이에요. (결국 울먹이기 시작한다.) 해줄 만큼 다 해주지 않았어요. 전혀 그러지 못했어요. 아직 밤벚꽃을 보러 가지도 못했잖아요. 고작 어릴 적 짧게 함께 한 정도인걸요, 저는 당신을 보낼 수 없어요. 이번에는 전생에서 못다한 추억들을 함께 쌓아가고 싶단 말이에요. 생이 얼마나 짧아져도 상관 없어요. 당신 곁에 있게 해 주세요, 아실... (뺨을 타고 눈물이 굴러떨어진다)
 
아실링 펜들레엄:거짓말이 아니라면 더더욱 다시 생각하셔야죠.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치고는 다르게 하인도 고용할 수 있는 귀족이겠다, 뭐가 아쉬워서 저와 함께하나요.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당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들지 마세요. (울고 있는 네 모습은 심히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네 울음과 자신의 감정 때문에 현실에서 시선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너와 자신의 길은 다르다. 함께 하기를 원하지만, 너를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됐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주 사랑받는 사람인가 봐요. 저택 사람들이, 당신이 걱정되어 군대를 불렀더군요. 밖에 아주.. 잔뜩 와있지 뭐예요. 뭐.. 마녀의 성을 찾아 떠난 이후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으니 걱정될 만도 하죠. 저라도 군대를 불렀을 거예요. ... 지금 나가면 다들 당신을 보호해 줄 거예요. 마녀에게 붙잡혀 갔던 불쌍한 귀족 연기를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고요. (그러고는 꿈에서 본 것 같은 얼굴로 웃어 보인다.) 현명한 선택을 하세요. 당신을 위해서요. 네? 헬리. 부디..
 
헬레네 L. 라세리온:인생을 망치는 길이라뇨. 그렇게 표현하지 마세요! (벌떡 일어난다. 목소리에 끝내 분노가 어린다. 야속하기 그지없는 사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과 함께하는 삶을 원한다 말하는데도 저의 마음을 잘못된 선택으로 치부하며 밀어내고 있다.) 제가 원하는 삶은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에요. 기억을 잃었다가 뒤늦게 되찾은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스우실 수도 있겠죠, 짧은 시간 내에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셨다 여기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모든 기억을 알게 된 이상 저는 당신을 원한단 말이에요, 아실. (하지만 그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당신이 저를 끝끝내 돌려보내려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군대가 왔다는 말에 눈이 커진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확실히, 이곳에 오기 전 마부에게 연락이 없으면 군대를 불러달라는 말을 전했었다. 이제 와선 후회스러운 부탁이었다. 이런 진실이, 아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없는 사람처럼 사라져야 했는데.) 아뇨, 돌아가지 않을래요. 보호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은 저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저랑 있다가는 그렇게 될 거예요. 당신 손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질 테고요. 저번처럼 마녀와 함게 했다며 죽을 수도 있죠.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음을, 너 역시 알고 있지 않냐고 전하며 내심 쓸쓸함을 보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해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신이 저를 돌보았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없었으면 하고요. 함께할 사람을 마녀로 고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어요. 좋은 사람은 넘쳐흐를 텐데..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은 많은데..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탄한다. 네가 자신과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견고했던 마음이 수없이 흔들린다. 낡아서 움직이지 않았던 장치들이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해칠 것 같아서 무서워요.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럴 바에는 그냥 제가 먼저 사라질 거예요.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좋을 일이 없다며 네 손을 잡고 1층으로 이끈다. 빨리 이곳에서 너를 내보내야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벽 앞에 다다르자 꾹 다물어져있던 임이 열리더니, 끝까지 말하지 않기로 하던 것들이 새어 나왔다.) 저랑 도망칠 수 있어요? 제 손을 잡고 도망 쳐줄 수 있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쥐지 못할 거예요.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어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저와 함께하고 싶어요?
 
헬레네 L. 라세리온:저는 명예욕도 권력욕도 없다고 말씀드린 바 있는걸요. 그런 가치들은 잃어버린다고 해도 아쉽지 않아요. 제가 진정으로 지키고픈 가치들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과 인애예요. ... ... 또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제 당신은 능숙하게 마법을 다루실 수 있는 마녀잖아요. 이 탑을 나타나게 만들고, 제 꿈을 찾아오셨던 마력이라면 도망치는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당신의 힘을 믿고, 저의 마음을 믿어요. (제 가슴팍에 손 얹는다.) 아실, 당신은 어째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저를 찾아 헤매이셨나요? 과거가 소중했고 그리웠기 때문에 긴 세월을 헤매셨던 게 아닌가요. 저에게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기만 하는 게 아닌,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믿어요. (힘 있는 음성이다. 굳어버린 마녀의 심장에 기름칠을 하고, 멈추려 하는 장치들에 손을 올린다. 아집이라고 해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다시 한 번 웃기를 바랐다. 당신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신은 그래도 되니까.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을 가졌으니까.) 싫어요. 싫어요, 아실! (1층으로 강제로 붙잡혀 내려가며 당신의 이름을 애타게 외친다. 목소리엔 다시 울음기가 어린다. 몇 번이나 당신을 붙들려 한다. 아이였던 당신을 돌봤던 게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마침내 멈춰선 곳은 문앞. 당신과 저를 단절시키고, 강제로 원래 향유하던 세계로 향하게 될 통로. 공포와 슬픔과 분노가 어지러이 뒤섞인 감정에 어깨가 여리게 떨렸다. 눈물 고인 채로 당신을 올려다본다. 꾹 닫힌 입에서 금방이라도 관계의 사형 선고가 내려질 것 같아서. 이어지는 말들이 마치 우물 속에 떨어진 자에게 내려온 동앗줄 같아, 황급하게 붙잡는다. 애원하듯 긍정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랑 앞에서 한없이 강해지면서도 때로는 약해진다. 그것이 사랑의 변덕이다.) 어떤 것도 쥐지 못해도 괜찮아요. 넘어져도 상관없어요. 당신의 손을 맞잡으면 그만이니까.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면 그만이니까. 함께하겠어요, ... 세상의 끝까지라도!
 
아실링 펜들레엄:사람들한테서 마녀라고 불리고, 주문으로 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대단한 주문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닌걸요. 민망할 정도예요.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목숨 하나 겨우 지키는 사람이라, 당신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어요. (또다시 네가 없는 삶을 맞이했을 때, 그때는 정말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네가 자신을 어떻게 아꼈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혼자 남았다는 슬픔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너를 다시 만나겠다는 희망조차 갖지 못한 체 슬픔에 취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저는 이렇게 두려운데.. 당신의 고집은 꺾일 생각을 안 하네요. 이상해요. 원래는 당신이 더 두려워해야 하는데.. 당신이 먼저 저를 내쳐야 하는데... (처음 만났던 날, 너는 어린 자신을 혼자 둬야 했다. 서럽게 울지도 못하고, 그럴 힘도 없었던 자신을 혼자 죽든 말든 뒀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을 돌보았을 때도 어리광을 다 받아주지 않았어야 했다. 네가 잡아주고 받아줄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을 몰랐다면 자신은 너를 더 매섭게 내쳤을까? 망설임 없이 벽 너머로 너를 보냈을까?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은 내심 네가 자신을 잡아주기를 원했으니까. 염치없게도 그것을 원했으니 말이다.)
많이 힘들 거예요. 기절할 것 같이 숨이 가쁠 거예요. 안전하다고 생각되기 전까지는 쉬는 것은 사치일 것이고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검은색 로브를 가져온다. 로브를 착용하고 모자까지 써 얼굴을 가린 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곤란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에도 괜찮다면.. 헬리, 도망칠 준비는 됐나요?
 
헬레네 L. 라세리온:저 또한 물리적인 힘은 미약하지만... 세상의 시선과 악의로부터 있는 힘껏 당신을 지킬 수는 있어요. 이번에는 결코 당신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당신 곁에 함께 있을게요. 외로움과 쓸쓸함이란 단어를 잊으실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마녀라고 손가락질당하는 당신과 함께하는 이상 내내 들키지 않을까 고민하며 도망치는 삶을 반복하게 되겠지. 그런데도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저의 삶에서 비어버리는 것이 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겠지. 당신의 손을 꼭 맞잡았다.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이번에는 당신에게 쓰디쓴 절망을 맛보이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게 당연한 일이겠지요. 괜찮아요. (당신을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내치리라 여기셨다면 그건 오산이에요. 저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든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만물들보다도 아실, 당신을 사랑해요. (언젠가 자연으로 녹아 스러지더라도 저는 당신과 함께일 터이다.) 힘들고 괴로운 삶이라도 받아들일게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그렇다고 해도 저는 그 안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아가고 싶어요. 마치 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가듯이 말이에요.
준비는 됐어요. (더없이 결연한 의지를 지닌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떠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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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도망칠 수 있어요?.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정말로 실감이 납니다.
 
정말로 모든 걸 버릴 각오가 되었나요?
 
고작해야 곧 죽을 마녀 하나를 위해서?
 
그렇다면 떠납시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요.
 
아실링이 손을 들자 탑 근방에서 무언가가 터져나갑니다.
 
군인들의 당황한 음성과 함께 발소리들이 멀어집니다.
 
당신과 아실링이 연기를 틈타 최대한 멀리 달려나간 끝에, 저 멀리서 탑이 흐릿해지기 시작합니다.
 
빛의 파편이 되어 날아가는 우울의 탑은, 마찬가지로 저 너머서 흩어지는 벚나무 군락의 꽃잎들과도 닮았습니다.
 
함께 벚꽃을 보자고, 그런 말을 했었죠.
 
당신이 멍하니 떠올리는 동안에도 탑은 흐릿해집니다.
 
그때 손에 타인의 온기가 와 닿습니다.
 
당신의 손을 움켜쥔 것은 아실링입니다.
 
기쁨이, 슬픔이, 죄책감이, 그밖에 명확히 이름붙일 수 없는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엉킨 얼굴로 그렇게 당신을 봅니다.
 
그래요, 당신은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 대가는 앞으로 천천히 알게 될 겁니다.
 
후회하나요?
 
아니면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라는 기분인가요.
 
달립시다.
 
머물 틈 같은 게 있다면 턱끝까지 숨이 차오르게 달려요.
 
함께니까 괜찮습니다.
 
이제는 혼자 우울에 매몰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게, 그게 당신을 부른 그에 대한 예우입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찾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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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4 : 머무는 잔향
 
헬레네 생환, 아실링 생환.
 
아실링이 앞으로도 살아가려면 타인의 수명을 빼앗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