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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23~250606] 유진&아테나 -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ch2.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초현_c 2025. 6. 6.

 

플레이타임 : 약 24시간

 

 

 
.
 
꿈은, 언제나 그렇듯 바다에서 시작합니다.
 
바위를 가볍게 넘어온 그가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거품처럼 부드럽게 감기는 파도를 느끼며 고개를 젖힙니다.
 
그리고 넘쳐 흐르는 햇빛을 마시듯 하늘을 향해 눈을 감습니다.
 
지는 햇살이 정면으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빛줄기가 눈가 위에 고이자 속눈썹이 황금색으로 반짝입니다.
 
그러다가, 뜨였습니다.
 
무슨 화제인지 깨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말들을 나누다, 악곡이 끝나면 바닷가로 이어진 무도회장을 따라 걸었습니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구성된 해변을 밟으면서 발가락 사이를 간지르는 모래의 온도를 즐겼습니다.
 
오래 걷다가,
 
그가 당신을 돌아보고 오연하게 웃으면,
 
참았던 말을 터뜨리려 입술을 벌리는 순간에 꿈에서 깹니다.
 
그리고 들렸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바보 같은 꼴이구나…… 브리즈.
의식이 있다면 손을 들어 봐.
 
그때 잠에서 깨어.
 
지는 해를 등에 건 탓에 온통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저무는 무역풍과 탄산 같은 폭발음이 세상을 수놓던 현장에서.
 
문장을 나누어 쓸 수밖에 없이 맹렬한 감정 속에서.
 
서로 알았습니다.
 
쾅!
 
규칙 없는 난수처럼 일렁이던 에너지가 허공을 타고 오르는 거미줄을 따라 하나로 모아집니다.
 
곧이어 새파란 에너지가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더니 그의 등 뒤로 차갑게 메다 꽂힙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 유량이네요.
 
먹잇감을 휘감는 거미줄처럼 푸른 에너지는 사방 몇십 미터 안의 모든 것을 옥죄어 삼킵니다.
 
<정신력> 판정
 
유진 N. 브리즈:
정신
기준치: 65/32/13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지난 기억이 산발적으로 돌아옵니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유진의 세 번째 실전 전투였죠.
 
건물 잔해와 부서진 폐허 속에 처박혀 있는 자신이 눈에 띕니다.
 
장벽 바깥에서 크리쳐와 전투 중이었습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군이 열세에 밀려 전멸 위기에 처했고,
 
그것을 막으려다 크리쳐의 공격에 휘말려 날아갔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테나. 그가 보입니다.
 
유진 N. 브리즈:(정신이 들자 주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벌써부터 방심하다니, 나도 글렀어.
 
아테나 K. 히페리데:오랜만에 만나 보여주는 첫 모습이 이런 꼴이라니. 한심하구나? (픽 웃는다)
 
다시 눈을 깜빡한 것 같은 찰나에,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번엔 엉망이던 주변 풍경이 가지런히 정리되었습니다.
 
부상자들을 의료 로봇들이 실어 가고, 그는 당신을 일으켜 로봇의 들것에 실어줍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돌아가자.
 
어디로?
 
다시 눈앞이 흐려집니다.
 
…….
 
…….
 
…….
 
얼마 전 전투에서 유진은 며칠쯤 입원해 안정하고 내상을 점검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정신은 오늘 아침에야 맑아졌습니다.
 
곁에 머무르는 의료 로봇이 멋대로 방송을 틀어 둔 것인지 홀로그램 패널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소식입니다.
 
언론은 각성자사관학교 졸업식 이후로부터 지난 몇 달간 지겨울 만큼 아테나의 소식을 대서특필해대고 있습니다.
 
타이틀은 이러합니다.
 
‘괴뢰 정부(정부가 망명 정부를 지칭하는 어휘는 공식적으로 늘 ‘괴뢰’ 였죠)에 납치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받고도 탈출해 돌아온’,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4년의 시간을 버틴’,
 
아름답고 장한 청년 아테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아테나의 행보는 이러합니다.
각성자사관학교에서 발생한 극렬분자 폭동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사실 망명 정부에 납치되었고, 각종 테러 혐의에 강제로 차출되었지만 의지를 잃지 않아 반항한 끝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런데도 결국에는 살아 돌아와 카사블랑카 장벽의 문을 두드렸다죠.
구조 당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데다 정상체중보다 10kg 이상 말라 있었던 모습이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아버지는 공로를 인정받은 스와콥문트 거주자, 본인은 각성자.
이보다 선전하기 좋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가 ‘붙잡혀 있던’ 4년 동안 카사블랑카 장벽 바깥, 그리고 카사블랑카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는 종종 테러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하위 정부 인사 몇몇이 실종되거나 도시 청사에 폭발물 따위가 설치되는 사건이 갈수록 잦아졌죠.
규모가 점점 커지니 정부도 외부의 저항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괴뢰 정부’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 3년 전.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애국 프로파간다를 하기 딱 좋은 사람이 굴러들어왔으니 정부로서는 환호할 만한 일입니다.
 
유명 MC의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바르게 앉은 아테나는 그가 겪었던 망명 정부의 끔찍한 실상,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구로 이용하는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을 비판하며 증언을 계속해 나갑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아테나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정부친화적 커뮤니티와 기사에선 그를 구국지사로 추앙하는 댓글들이 연이어 달립니다.
 
…이 모든 일을 보고 들으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유진 N. 브리즈:(언론의 힘이란……)
(실시간으로 오르내리는 아테나의 이름을 발견할 때마다 건조한 표정으로 정보를 넘길 뿐이다. 적어도 무엇 때문에 그가 4년 간 죽은 사람처럼 지냈는지 이유를 알았기에, 본인이 이야기해주지 않는 정보는 적당히 넘기는 게 제일이라.)
 
무심하게 지켜보는 사이 화면은 훈장 수여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저번 전투에서 대활약한 공로로 아테나는 또 하나의 약장을 군복에 달게 되었습니다.
 
의례를 따라 한쪽 무릎을 굽혀 훈장을 받은 그는 조용히 일어서 화면 속의 또다른 화면을 응시합니다.
 
대통령 로맹 바투타의 특별 축사입니다.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특진된 아테나가 내달이면 참모총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사관학교를 수료, 졸업한 선후배들 중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대다수가 이 전향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에게 아테나는 개인의 영달을 좇아 정의를 저버린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아버지를 찾아 나서겠다며 사라졌던 그가 어째서 이렇게 나타나 지금까지 연락 한 번이 없는지,
 
당신조차 알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평가입니다.
 
변절자들의 시대가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그 발자취에는 사라진 사람들의 눈물이 고입니다.
 
며칠 뒤, 퇴원하는 날 아침.
 
당신이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작스레 스마트워치가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연달아 홀로그램 패널이 출력됩니다.
 
<지능> 판정
 
유진 N. 브리즈:(뭐야?)
지능
기준치: 85/42/17
굴림: 8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위급 신호? 평소 잘 쓰지 않던 기능이, 그리운 얼굴과 함께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스마트워치 옆면의 S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누르면, 위급상황 시 연락처에 미리 등록해 둔 비상번호 쪽으로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 있다고…
 
분명 유리 모하에 선배가 알려 줬었죠.
 
신호 위치는 군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입니다.
 
방위사령부 주소였으니까요.
 
4년 전 그 위치를 둘러싸고 새벽 내내 발을 굴렀던 소란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듯합니다.
 
때마침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이한영:유진? 나야.
모시러 왔다. 몸은 좀 어때?
 
각성자사관학교 시절 동기이자, 지금은 방위사령부 정보통신단에서 근무 중인 이한영입니다.
 
유진과는 여러 가지로 뜻이 맞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죠.
 
퇴원을 한다고 하니 안부가 걱정되어 살피러 온 모양입니다.
 
유진 N. 브리즈:오, 모시러 왔다니 이거 영광인걸. 움직이는데 무리 없어요. 여유롭게 쉬고 싶어도 현실이 나를 내버려두지를 않네.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는 오른팔을 슬쩍 들어보인다.) 방위사령부에서 위급신호가 떴는데 혹시 아는 바 있어요?
 
위급 신호가 온 곳도 방위사령부,
 
아테나가 근무하는 곳도 그곳, 한영이 근무하는 곳도 거기.
 
어쩌면 한영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이한영:응? 갑자기 방위사령부에서 위급 신호? (흐음- 하며 고개 기울인다.) 짐작가는 사람은 있어?
 
유진 N. 브리즈:있어요, 손이 많이 가는 사람. (팔짱을 끼며 나지막이 답한다.) 아테나요.
 
이한영:아하~ 나도 방위사령부에서 굳이 너한테 신호 보낼 만한 사람은 걔밖에 없을 것 같다 생각하긴 했는데. (키득거린다.) 걔가 비밀리에 널 부르고 싶은가 봐.
정식 페어였으니 대화야 할 수 있지. 그런데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 거면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네.
 
유진 N. 브리즈:오, 그럼 나는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흘린 게 되는 건가? (작게 웃었다.) 방위사령부로 가봐야겠어요.
 
이한영:우리 사이에 뭘. 내가 꼰지르기라도 하겠어? 뭐…… 나였어도 위급 신호 생각부터 했을 것 같긴 하다. 같은 방위사령부 소속인데 걘 혼자 대우가 특이하거든.
그나저나 지금 바로 가보려는 건 아니지? 아서라. 방위사령부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거 알잖아. (말리려는 듯 어깨 두어 번 툭툭 두드린다)
 
유진 N. 브리즈:대우가 특이하다? 이런 곳에서 영웅 대접 받는 건 아닐테고, 내― '전' 파트너는 거기서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방법은 찾으면 되지. 어떻게든 해결법은 있기 마련이라서요.
(내가 직접 갈 수 없다면 한영이 상황을 알아봐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잠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한영:지위가 좀 이상해. (아테나와 유진의 현 관계가 어떤지 정확히는 모르므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분명 어디서나 그 계급 이상의 의전을 받긴 하는데, 내가 보기엔 감시당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것 같거든. 걔의 거만한 성격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건 사관학교 동기인데 인사조차 제지되고, 대화도 금지되어 있다니까. 사무실도 걔 혼자만 다른 층을 쓰고.
그래그래,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이 바로 네 눈 앞에 있지. (우쭐거리는 어조로 말한다) 오늘 우리 오빠가 저녁에 날 보러 온다고 방문자 등록을 해뒀는데 조카가 갑자기 아파서 못 오게 됐어. 그 출입증으로 들어오면 방문 기록이 남지 않으니 추적당하지 않을 것 같네. 어쩔래?
 
유진 N. 브리즈:(감시가 아니고서야 이런 식으로 연락할 리 없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를 마저 듣는다.)
봐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니까. (미소를 띄우고는) 방법을 찾았는데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죠. 조카 분은 쾌유하기를 빌게요.
 
이한영:많이 아픈 건 아니라니 다행이지. 넌 내 조카보다는 네 몸 걱정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지만. (씩 웃는다) 혹시 모르니 변장 좀 하고 와. 모자도 쓰고, 옷도 일반인처럼 입고.
 
유진 N. 브리즈:내 몸은 내가 잘 챙겨요. (어깨를 으쓱거린다.) 모자를 쓰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이지 않겠어요? 오, 요즘은 그렇지도 않으려나. (제복을 벗으면 일반인처럼 보일테니 적당히 사복을 입고 갈 생각을 한다.)
 
이한영:그런 사람이 병원에 며칠씩 입원을 하냐? (쯧쯧 혀를 찬다) 저녁에 방위사령부 앞에서 봐.
 
유진 N. 브리즈:아픈 곳을 찌르시네. 이한영 씨, 나 방금 퇴원한 사람이에요.
(옅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에 봐요.
 
한영과 유진은 병원 앞에서 헤어집니다.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입어볼까요? (궁금)
 
유진 N. 브리즈:(세팅한 머리를 풀어 정리되지 않은 것처럼 흐뜨려 뜨린 다음 반소매 폴로셔츠와 면바지를 입는다. 안경도 벗고 최대한 무해 해보이도록…)
 
잘생겼네요
 
너무 좋습니다
 
밤 9시, 방위사령부 앞.
 
미리 약속해 둔 대로 한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물 바깥에는 별달리 인적이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CCTV며 보초병들이 근처를 감시하고 있겠죠.
 
이한영:오. 좀 달라보인다? (고개 이리저리 기울이며 당신 살펴본다) 이미지 잘 바꿔서 왔네.
 
유진 N. 브리즈:이미지 체인지. (장난스레 웃고는) 웬만한 눈썰미가 아니고서는 알아보기 힘들걸요? 본디 사람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잖아요.
 
이한영:응, 좋아좋아. 이대로 가보자고. 지금부터 한 10분 동안은 네가 내 오빠인 거다? (마주 씩 웃고 뒷문을 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병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는데, 의외로 출입 게이트는 별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게이트 앞에 있는 보초병들이 두 사람을 훑어보네요.
 
보초병: 소속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한영:정보통신단 이한영 소위. 여긴 내 오빠야. 오늘 방문하겠다고 등록해 놨는데?
 
대인 기능 판정 등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
말재주
기준치: 43/21/8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느낌이 왔다. 보초병에게는 말을 걸면 안된다. 자연스레 무해한 일반인 표정을 지으며 한영에게 말을 건다.) 한영아,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이한영:어~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의례적인' 확인 절차를 거치고 계신 것뿐이야. 그렇죠?
 
보초병: (풀풀 풍기는 '일반인스러운' 분위기에 의심이 누그러진 듯 옆으로 한 걸음 비켜준다.) 이한영 소위, 등록 확인됐습니다. 들어가시죠.
 
이한영:그래요. 수고하고. (보초병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유진에게 손짓한다.)
 
유진 N. 브리즈:(눈치껏 한영의 손짓을 따라간다.)
 
이한영:(완전히 안쪽으로 들어오고서야 어깨에서 힘을 뺀다.) 후! 괜히 긴장했네. 후딱후딱 이동하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머지않아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다.)
 
유진 N. 브리즈:(작게 안도한다.) 의례적인 절차라고 하지만 어쩐지 위압적이네요. 방심하면 안되겠는걸.
 
이한영:늦은 시간이니 건물에 사람이 많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움직여. 나올 때도 주변 잘 살피고.
 
한영이 누른 버튼은 5층입니다.
 
7층짜리 건물에 2, 3성 장군들이 즐비하니 방위사령부 위관급 장교 따위가 단독 사무실을 쓸 일은 없다고 봐야 했으나,
 
대위 계급인 아테나는 숙직실까지 딸린 사무실을 홀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유진 N. 브리즈:oO(감시로군.)
 
이한영:각성자인 군인은 대우가 일반 군인이랑 다르기도 하니 특별 취급이 납득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닌데, 진짜 이상한 건 층이지 층.
5층부터 7층까진 거의 플라네타리움이거든? 근데 거기에 아테나 혼자 껴 있으니까 말이야.
 
5층부터는 별 달린 장성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한영이 어깨를 으쓱입니다.
 
그래서인지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출입 카드를 몇 번이나 다시 찍어 통과해야 했습니다.
 
한영이 정보통신단 소속인 것이 다행이네요.
 
본래대로라면 이 출입 카드에는 한영의 사무실인 3층에 방문한 기록만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하자 복도 끝 아테나의 사무실이 보입니다.
 
이한영:저기야. (가볍게 턱짓하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간만에 만나는 거겠네, 잘 얘기 나누고 와.
 
유진 N. 브리즈:플라네타리움에 난데없이 다이아몬드가 등장이라. (낮게 중얼거리고는 한영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고마워요.
(아테나의 사무실로 향합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나요?
 
유진 N. 브리즈:(노크부터 해봅니다!)
 
똑똑 두드리자, 답이 없이 조용합니다.
 
유진 N. 브리즈:……반응이 없는 게 당연한가. (문을 열고 들어가 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내부에는 아무도 없네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샤워실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열린 문이 숙직실이고, 그 안에 또 욕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위급 상황은 아닌 걸까요?
 
단순히 유진을 몰래 불러내기 위해 신호를 보낸 것일까요?
 
무심코 방을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상자가 하나 보입니다.
 
유진 N. 브리즈:(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상자를 확인해 본다.)
 
그 안에는 [수첩]과 [보석함]이 들어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요한이 주었던 수첩인가?)(수첩을 확인합니다.)
 
요한이 준 수첩은 아니네요. 다른 디자인입니다.
 
메모장과 일기장을 겸해 사용한 듯, 첫 장부터 끝까지 글씨가 빽빽합니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날 있었던 일이나 특이사항들을 적어두었네요.
 
:수첩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카사블랑카를 떠난 뒤 그는 보츠와나 망명 정부 산하에 소속되어 스와콥문트 근처에 설립된 나미브 반군기지에서 장교로 활동한 모양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카사블랑카의 각성자사관학교보다는 물자도 지원도 한참 부족했다고 하네요.
그는 가장 잘 개발된 도시 카사블랑카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모자람 없이 자라왔기에, 반군 기지의 비교적 낙후된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제법 어려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망명 정부로 떠난 지 2년여 만에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었으나 사망했다는 사실만은 확인했다고요. 아테나의 필체는 내내 매끄럽고 유려했으나 이 부분만큼은 글씨체가 희미하게 이지러져 있어 그의 심정적 동요를 짐작케 합니다.
처음에는 물자나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보츠와나로 온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대목이 몇 구절 있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는 연합 정부를 향한 강한 적대감과 결의가 드러납니다.
카사블랑카로 다시 귀환하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여러 복잡한 회의와 계산을 거친 듯합니다. 최근 석 달간의 일정표에 ‘회의’ 가 무수히 적혀 있네요.
 
유진 N. 브리즈:(빼곡히 적혀있는 내용을 찬찬히 읽어나간다. 처음 아테나에게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던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한껏 가라앉은 공기를 집어 삼켰다.)
(최근 일정표에 다다라서야 무수히 적힌 회의 일정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이외로 수첩에 무언가 더 살펴볼 내용은 없나? 다시 한번 수첩을 확인해봅니다…)
 
볼만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유진 N. 브리즈:(나름대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건가.)(수첩을 내려놓고 보석함을 확인합니다.)
 
:깔끔한 검은색 보석함 안에는 귀걸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 귀걸이, 하나는 옅은 레몬빛이 도는 페리도트 귀걸이입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4년 전에 당신이 건네준 귀걸이네요. 관리를 잘 해온 건지 흠집 하나 없습니다.
 
유진 N. 브리즈:(오… 이렇게까지 보관을 잘 해줄 줄은 몰랐는데. 조금 감동했다.)
 
그때, 샤워 가운을 걸친 아테나가 욕실 문을 열고 나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물기가 여남은 머리를 수건으로 가볍게 털며 나오다가 소파의 인영을 보고는 멈칫한다)
……
…… 천천히 뒤돌아.
 
유진 N. 브리즈:…―마주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아테나 K. 히페리데:(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일순 긴장으로 굳었던 몸에서 힘을 천천히 뺀다.) 브리즈. 너구나.
타이밍 한 번 절묘하네. 잠깐 기다리고 있어, 바로 옷 갈아입을 테니까. (욕실 밖에 미리 꺼내둔 옷을 갖고 다시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번에는 뒤도는 걸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가 얼굴을 마주했다.) 간만이네, 잘 지냈니?
 
유진 N. 브리즈:이렇게 경계심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어깨에 힘을 빼고 당신을 바라본다.) 우리 구면이죠? '전' 파트너 씨. 당신이 나를 찾는 것 같길래 내가 친히 행차했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내 사무실에 감히 발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그나저나, '전'? (눈을 가늘게 뜬다.) 4년 사이에 변심이라도 한 거니? 이쪽은 네가 준 수수한 귀걸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4년이나 보관해 왔는데 말이야.
 
유진 N. 브리즈:당신, 밖에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지? (내려보듯 고개를 잠시 뒤로 젖히고는 허리를 앞으로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누구 덕에 60%의 확률에 인생을 걸었는데 말이야.
 
아테나 K. 히페리데:남들의 시선 따위가 중요한가? 물론, 오늘 너와 만나고서 다시 정식 페어로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보고할 예정이긴 했어. 난 4년간 죽은 걸로 처리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일이고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의지잖니? (내려다보지 마렴, 거만하게 말하며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새롭게 인생을 걸어볼 만한 사람을 만나긴 했고?
 
유진 N. 브리즈:글쎄요, 나름? 나한테는 중요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부담스러워서요. 눈에 띄지 않도록 눈치껏 주변에 맞추는 거지. (돌아오는 말에 피식 웃는다. 정말 변함없는 사람이라니까.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쭈그리고 앉은 채 당신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아직 내 인생이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인생을 찾을 수는 없잖아?
 
아테나 K. 히페리데:4년 전에도 시선을 신경쓰더니 지금도 여전하구나? 많이 바뀌지는 않았으려나 싶었는데 많은 부분이 그대로네. 아, 안경은 이제 안 쓰기로 한 거니? (자세가 바뀌자 그제야 만족하는 기색이다. 동시에 당신의 왼쪽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발견했다. 일견 냉정하게도 보이던 창백한 낯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그리움에 울며 밤잠 설친 건 아니지?
 
유진 N. 브리즈:어린 시절에야 긴 시간이지, 청년에게 4년은 짧아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 같은 얼굴이면 재미없잖아요.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아테나 K. 히페리데:아니. 만약 그랬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게 됐구나. (픽 웃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괸다.) 몸은 어떻니? 한동안 병원 신세였잖아.
 
유진 N. 브리즈:그렇게 된다면 평생 비밀로 부쳐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폈다.) 보다시피 움직이는데 지장 없어요. 운이 좋네요. 나처럼 바쁜 사람이 마침 여유가 생긴 참이었거든요.
 
아테나 K. 히페리데:내가 안 구해줬으면 송장 됐을 뻔한 거 아니? (유진을 빤히 바라본다) 그 전투 맡았던 지휘관, 내가 날렸으니까 참고해. 권력이 생기니 이런 건 좋구나? 제법 달콤한 맛이야.
 
유진 N. 브리즈:오,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나? 나는 그때 내가 헛 걸 본 줄 알았지. (눈이 마주치자 가만히 미소 지으며 낮게 대답한다. 고마워요, 하고.) 거기에 너무 취하지는 말아요. 그런 건 몸에 나빠서요.
 
아테나 K. 히페리데:응.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아무튼 원하는 말은 꼭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걱정 마렴. 진짜로 연합 정부의 개가 되어줄 생각은 없거든. 어디까지나 연기하는 김에 즐겨보자~ 같은 거지.
지금이야 연합 정부 아래서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쓰이고 있지만, 내가 따르는 건 망명 정부거든. 이른바 이중 스파이라고나 할까. 임무 몇 가지를 수행하고 나면 다시 카사블랑카를 떠날 거야.
그때, 같이 갈 거니? 이걸 물어보려고 위급 신호를 썼단다.
 
유진 N. 브리즈:(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깜빡인다. 언론에 비치던 아테나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위로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생각하지만 어느 쪽이든 언론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숨을 내쉬었다.) 위급 신호를 이렇게 쓰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 거야. 운이 좋다고 했지만,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요.
다시 만나면 귀걸이를 돌려준다고 했는데 시기를 미루죠. 카사블랑카를 떠날 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내 귀걸이도 그때 가서 돌려받죠.
 
아테나 K. 히페리데:왜,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위급 신호 아니니? (얄밉게 답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정도 방법이 아니었음 너와 대화할 시간을 내는 게 어려웠단 뜻이기도 하단다. 연합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역시 4년이나 떠나 있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쪽에서도 쉽게 믿지는 않고 있거든. 하긴 나 같아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냉소했다.)
괜찮겠니? 망명 정부는 여기만큼 대우가 좋지 않단다? 우리가 축제 때 마셨던 싸구려 맥주보다도 못한 술밖에 없어.
 
유진 N. 브리즈:그 대답 무척 얄밉다는 거 알아요? (지지않고 받아친다.) 나한테 위급 신호를 보낼 만한 사람은 유안(형) 뿐이었거든요. 내가 당신이라는 걸 알아봤기에 망정이지 못 알아봤으면 어쩔 뻔 했어?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돌아오는 반응에 저도 피식거리며 조소를 내비친다.)
미스 히페리데, 내가 대우를 바라고 여기에 온 것 같아?
 
아테나 K. 히페리데:얘 좀 봐. 페어 연락처를 비상 번호에 등록해두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니? (페어가 되자마자 떠나선 4년이나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은 고의적으로 누락했다.) 못 알아봤으면 너와 접촉할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바보 같다고 욕 좀 하면서 말이야. (짓궂게 미소한다.)
하긴, 맨 처음 학생들 사이에서 저항의 불씨가 일어날 땐 나보다 네가 더 적극적이었었지. 네가 승낙할 거라 예상하기는 했어. 그럼 네 형은 어쩌고? 같은 각성자니 너만 나와 함께 떠난다면 곧장 화살이 그 사람에게 돌아갈걸.
 
유진 N. 브리즈:오, 나는 당신이 내 곁을 떠나자마자 내 연락처에서 당신을 지워버렸는데. (거짓말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4년 동안 단 한번도 연락을 안하던 사람이 있어서 말이에요.
유안은 나보다 강한 사람이에요. 분명 형이 나보다 더 잘할 거고 그가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거든.
 
아테나 K. 히페리데:뭐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려는 듯 눈초리가 뾰족해진다.) 네가 내 연락을 그렇게 기다린 줄은 미처 몰랐구나.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란다. 처음엔 금방 돌아갈 테니 연락은 필요없을 거라 여겼지. 시간이 길어지면서는 적응하느라 바빴고. 완전히 망명 정부의 일원이 된 후에는 불확실한 연락을 보냈을 때 너와 나 모두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어. (덤덤하게 풀어 설명한다.) 당연히 짐작했을 줄 알았는데.
형제간의 유대가 깊어 보기 좋구나. 그래도 카사블랑카를 떠나는 건 네 일정에 맞춰줄 수 있으니 형과 어떻게 할지 대화는 나눠보렴. 나처럼 아무 말 없이 떠나서 걱정시키지 말고.
 
유진 N. 브리즈:(말이 길어지는 걸 보니 진실이군.)
나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아요? 물론 그 정도 쯤은 짐작했어요.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건 내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그리고 당신 말마따나 내가 망명 정부로 간다면 유안이 위험해지는 건 사실이라 연락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서요.
 
아테나 K. 히페리데:(손 뻗어서 한쪽 볼살을 꼬집는다.) 짐작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니? 얄밉기는.
그래, 네 뜻대로 하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다.) 전달 사항은 다 전했고, 너도 제안에 응했으니 내일 함께 요한 에를리히를 만나러 가겠니? 그간의 상황이나 내가 해야 할 임무에 관해 그 사람이 전달해줄 내용이 있다고 들었거든.
 
유진 N. 브리즈:아하여. (흘러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뺨을 한번 슥 문지르고는) 내 전우들이 나 몰래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담. 다음부터 이런 일은 미리 이야기해줄래요? 나 혼자 몰랐다는 걸 깨달으면 조금 섭해서. (에둘러 말하고 있으나 대답의 의미는 '예스'이다.)
 
아테나 K. 히페리데:푸훗…… 4년 전의 축제가 떠오르는구나. (못 참고 웃음소리 흘린다.)
나도 4년간 에를리히랑은 한두 번밖에 연락하지 못했단다. 직접 보는 건 떠난 뒤로 처음이고. 너무 아쉬워하지 마렴.
 
유진 N. 브리즈: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에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답한다.) 더 전달할 사항은? (있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미소지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이게 끝. 귀걸이를 돌려받는 시기도 조금 미뤄졌으니 그대로 끼고 다니면 되겠구나. (귀걸이를 하나씩 착용했다.) 여기에 오기까지 힘들진 않았니? 누구한테 들키거나 하진 않았고?
 
유진 N. 브리즈:여기까지 오는데 꼬박 4년이 걸렸어. 무척 힘들었지. (작게 웃으며 농담을 내던진다.) 내 얼굴을 본 사람은 있어요. 출입 게이트를 통과했으니까. 당신, 동기도 잘 둬서 운 좋은 줄 알아요. 이한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나를 못 만났을 거야.
 
아테나 K. 히페리데:이한영? 그 애가 널 도와줬구나? 얘기는 못 나눠도 같은 방위사령부에서 일하다 보니 종종 마주치긴 하지. 쓸모있게 행동해줘서 다행이네.
계획이 늦어지지 않았으니 잘됐지. 내일 연락할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보렴.
 
유진 N. 브리즈:('쓸모있게'. 대단한 자신감이다.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재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내가 직접 당신을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연락해 줄래요? 나도 엄연히 소속이 있는데 이틀을 연속으로 방위사령부에 올 수는 없어서요.
 
아테나 K. 히페리데:물론이지. 내일은 에를리히가 머무는 곳에서 만날 테니 이 지긋지긋하게 복잡한 보안을 뚫고 올 필요는 없을 거야.
 
유진 N. 브리즈:그건 반가운 소식이네요. 내일부터는 그동안 밀린 4년 치 일도 한번에 몰아칠 테니 그렇게 알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어머? 그건 페어 간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말하는 거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에를리히를 만나고 온 다음에 다시 페어 활동을 시작하겠다고 보고하긴 하겠지만. 누가 보면 선전포고인 줄 알겠단다. 설마…… 아직도 그때 널 떠났던 걸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
 
유진 N. 브리즈:(이야기를 다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당신, 아직도 나를 모르네. 궁금하면 기다려봐요. 며칠만 지나도 알게 될 테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눈을 가늘게 뜬다) 어째 스물넷이 됐는데도 여전히 철이 안 든 아이 같지?
 
유진 N. 브리즈:오, 몰랐어요? 내 시간은 남들보다 느리게 흐르거든요. 이참에 알아둬요. 그만큼 많은 걸 기억한다는 뜻이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너랑 더 얘기하다간 답답해서 오늘 잠을 설칠 것 같구나.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빨리 돌아가렴, 몸만 큰 바보.
 
유진 N. 브리즈:(어이없는 말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머리카락에 제 손을 가져다대더니 인사하듯 머리칼 끝에 살짝 입을 맞춘다.) 내일 봐요, 파트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밖으로 나갑니다.)
 
뒤에서 허,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진은 한영의 도움을 받아 방위사령부 건물을 무사히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위급 신호로부터 이어진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
 
지난 4년 간, 요한과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 자취를 감춘 그의 신원에 대해 뜻을 같이 하는 선후배 사이에선 소문이 분분했죠.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는 추측은 그가 도시 바깥의 망명 정부로 귀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종적을 감춘 것인지,
 
예전의 아테나처럼 사망을 가장한 것도 아닌데 완전히 사라진 그가 학장실에 분변 테러를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얼빠진 동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나는 요한이 ‘숨어 있는’ 곳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여기 카사블랑카에.
 
결벽적으로 관리되는 도시인 카사블랑카에는 ‘뒷골목’ 따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대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테나가 유진과 함께 향한 곳은 성심성당이었습니다.
 
각성자사관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그곳.
 
가톨릭이 아직도 힘을 쓸 수 있는 데에는 여러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재해 이후 여러 사이비 종교가 날뛰며 가톨릭의 자리를 대체하려 들었지만,
 
요행히도 바티칸이 살아남은 덕분에 촘촘한 교구 간 연락망을 복구할 수 있었죠.
 
성당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 나간 공동체들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유럽 연합은 아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애당초 ‘재앙의 날’ 이후 사회 재건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이 가톨릭이었거든요.
 
건국 초반만 해도 성당을 통해 제공되는 교육, 의료, 구호 활동 등은 공화국 정부조차 대체하기 어려운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공화국 건설 자체가 가톨릭에 기댄 면이 있으니 정부라고 해도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부도 함부로 참소할 수 없는 성당 문을 아테나는 거침없이 두드립니다.
 
문을 열고 나온 신부는 두 사람의 군복을 보고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아테나가 무어라 언질하자 수긍하고는 안으로 안내해 줍니다.
 
성심성당에서는 아테나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신부는 1층 식당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물러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자, 이쪽. (주방 끝 쪽에 있는 작은 창고로 향한다.)
 
얼핏 보기엔 냉장고가 줄지어 선 평범한 식자재 창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테나는 바닥을 가리켭니다.
 
<관찰력> 판정
 
유진 N. 브리즈: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바닥 타일 사이에서 줄눈이 살짝 뜯겨 나간 자국이 보입니다.
 
유진 N. 브리즈:(지하가 있나?)
(자연스레 뜯겨나간 자국 앞에서 멈춰선다.)
 
아테나 K. 히페리데:(발끝으로 바닥을 몇 번 두드려보다가 유진에게 명령한다. 부탁 아니고 명령조다;) 저기에 대고 말하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하고.
 
유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도문입니다.
 
아니, 저런 이상한 문장이 기도문이기는 한가요?
 
유진 N. 브리즈:(발 끝을 두드리는 행동부터 하며 입에서 나오는 문장을 모두 듣고 가만히 너를 내려다 본다.) 시비야?
 
아테나 K. 히페리데:아니? 처음이니 경험해보게 해주고 싶어서. (^^)
 
문장에 대한 언급은 없네요. 저게 진짜... 암호인지 뭔지 하는 걸까요?
 
유진 N. 브리즈:어이가 없네. (헛웃음 치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계급장 떼고 오라 할 수도 없고.)
(자연스레 한쪽 무릎을 꿇고 문 앞에서 문장을 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괴상한 문장을 발음하자…… 아주 작게 달칵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이 타일 바닥 아래에 뭔가 숨겨진 것 같은데…….
 
<손놀림> 판정
 
유진 N. 브리즈:
손놀림
기준치: 10/5/2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아야! 손톱으로 타일을 들어올리다 손끝을 찧고 말았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저런. (얄미운 목소리로 안타까워하면서 대신 타일을 들어올려 준다.)
 
타일 틈새를 들어올리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것 같이 좁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지만 계단 끝에 문이 있는 듯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내려가자꾸나. (덕분에 편하게 내려감^^)
 
유진 N. 브리즈:당신 솔직히 말해 봐. 궂은 일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럴 리가. 네가 어제 혼자만 빠져 있으니 섭섭하다고 해서 특별히 기회를 준 거잖니. (뻔뻔)
 
유진 N. 브리즈:말은 잘해요. 힘 없는 군인이 뭘 하겠습니까, 상관이 꿇으라면 꿇어야지.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래그래. 내가 네 상관이니 시키는 건 곧잘 들어야겠지? (그걸 또 홀라당 받아치며 문을 묘한 박자로 두드린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다시 짧게 세 번.
 
이건… 음성인식을 끊는 방식과 유사한데요.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문이 열렸습니다.
 
처음 든 인상은, 천장에서 책더미가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미친 사회학자의 방을 그리라고 하면,
 
사회학자가 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 것 같으니 방에 연구 일지와 책을 가득 채워 놓을 겁니다.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공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제멋대로 쌓여 있는 도서, 문서, 기기, 회로.
 
무얼 건드려도 쉽게 쓰러질 것 같은 기물들 사이로 간신히 사람 하나가 걸어갈 만한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누군가 엎어져 자고 있네요.
 
4년 만에 만나는 요한 에를리히입니다.
 
머리카락이 더 자랐고, 살이 내렸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이런. (조금 짜증이 어린 어조로 탄식한다.) 4년 만에 재회하는 선배의 첫 모습이 침대도 아니고 책상에 교양없이 엎어져 자고 있는 꼴이라니.
브리즈 너도 그렇고 어째 사관학교 시절 인연들은 하나같이 영 못난 꼴로 나를 마주하는구나? (갑자기 불똥이 이쪽으로 튄다)
 
유진 N. 브리즈:(갑자기 나에게 불똥이 튀는건가?)
그거 재밌네요. 당신이 원인이라고는 생각 안하나봐?
 
아테나 K. 히페리데:에를리히가 저런 꼴로 잠들어있고 네가 크리쳐한테 당해서 널부러져 있던 게 내 탓이라고 하는 거니? (못 들을 소릴 들었단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린다)
 
유진 N. 브리즈:오, 그럼. 하늘이 파란 것도 당신 탓이지. 대위님께서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다 돌아오셨으니 이만한 리스크는 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 (너무 어이없어서 할 말을 잃음) 너에 대해 알게 될 거라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 됐어. (고개 내저으며 요한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성의없이 흔들었다.) 에를리히. 일어나요.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리는 요한의 뒤쪽으론 웬 콩나물이 수경재배되고 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아…… 음.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여전히 비몽사몽해 보인다. 눈도 못 뜨면서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안경을 꼈다.) 히페리데…… 너구나. 뒤에 있는 건 브리즈인가?
 
유진 N. 브리즈:얼마나 잔 거예요? 이렇게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서.
 
요한 에를리히:(시계 확인한다.) 한 시간쯤 됐군…… 여기서 머물다 보면 낮밤 구분이 어려워져서. 오래 기다렸나?
 
유진 N. 브리즈:oO(안경을 벗어둔 것에서 예상했지만 정말 한숨 잘 생각으로 엎드렸던 거군.)
(고개를 내젓는다.) 우리도 방금 왔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분명 오늘 찾아가겠다고 사전에 연락을 했을 텐데요? (난데없는 낮잠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니 섰다.) 정부가 수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면서요. 그걸 수색하고 나미브 반군기지로 돌아갈 거예요. 브리즈도 함께 가기로 했어요.
 
요한 에를리히:그렇냐. (갈색 눈이 유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4년 만에 만나는 후배를 뇌내에 담아내듯이.) 이미 유리가 죽었던 그 날부터 널 믿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군.
 
유진 N. 브리즈:말로만 말입니까? (작게 웃는다.) 유리 선배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나는 기꺼이 해낼 겁니다.
 
요한 에를리히:든든한 전력이 더해졌다고 보고를 올려야겠군. (희미하게 웃는가 싶더니 아테나에게 시선 돌린다.) 그 수상한 프로젝트 건 말인데, 나도 정확하게 캐낸 건 아니다. 바깥에서 활동 가능한 요인의 도움이 필요해.
정부가 비도덕적인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어.
 
아테나 K. 히페리데:관련된 정보를 참모총장이 쥐고 있다고 했죠? 그래서 일부러 참모총장 비서실로 이동하게끔 입김을 좀 썼어요.
 
요한 에를리히:그래. 참모총장이 자기 공관 서재에 그 ‘프로젝트’ 혹은 ‘실험’에 대한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추측하기론 그 정보가 알려지면 처지가 불리해지는 정적이 있는 모양이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간을 언젠가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일부러 쥐고 있는 것 같더군.
보안이 아주 철저하다. 공관에 침입할 방법이 필요해.
 
아테나 K. 히페리데:(제 머리 끝을 빙빙 꼬며 말한다.) 다음주에 열리는 정재계 자선 파티에 참모총장이 참석한다더군요. 곧 브리즈와 제가 페어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보고할 예정이기도 하니, 자연스럽게 저희 둘이 참모총장의 호위를 맡겠다고 지원하죠.
제가 파티장에 남아 시간을 끌 테니 브리즈가 공관에 침입하는 건 어떨까요. 마침 파티 장소 바로 근처가 공관이던데. (어떻냐는 듯 유진에게 눈짓한다)
 
유진 N. 브리즈:역시 당신 궂은 일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어깨를 으쓱거린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니 그렇게 하죠.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럼 네가 남아서 잘 알지도 못하는 참모총장이랑 수다를 떨래? 참모총장도 남에게 보여줄 트로피로는 나를 더 선호할걸? 아무래도 몇 주간 쌓아온 이미지가 있잖니. (연합 정부 프로파간다로 알뜰히 써먹힌 행보를 이렇게 표현한다) 뭐, 공관에 침입하는 게 궂은 일이 아니란 소리는 아니란다.
 
유진 N. 브리즈:대위님, 은근슬쩍 자랑하고 계시지 말입니다.
반대의 상황이 되었더라도 내가 공관에 침입하는 게 나았을 거예요. 실전에 익숙한 건 당신일지 몰라도 잠입에 익숙한 사람은 나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자랑이 아니거든? 너 참모총장 입냄새가 얼마나 심한지 아니? 이야기 들어주는 게 고역이란다, 고역. (혀를 찼다.)
그러니 내가 포지션 분배를 잘 한 거지. (와중에 습관성 자뻑)
 
유진 N. 브리즈:오, 앞으로도 모르고 싶네요. 그 일은 내 담당이 아니라서. (가볍게 웃어 넘긴다.)
 
요한 에를리히:논의 끝났나? (서랍에서 인이어와 렌즈 두 세트를 꺼내 내민다.) 파티 땐 나도 현장 보고 있을 거야. 렌즈 끼면 너희 시야가 나한테도 영상으로 전달되고, 인이어는 소통용.
 
유진 N. 브리즈:(렌즈 위에 렌즈라.)
(인이어와 렌즈를 받아 한 쌍을 아테나에게 넘긴다.) 급하게 당신 이름을 외칠 일이 없기를 바라야겠네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럴 일 없을 거니 걱정 마렴. (받아든다.) 그럼 파티 때 다시 봐요, 에를리히.
 
요한 에를리히:그래.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유진 N. 브리즈:문장 사이의 공백이 너무 길지 않나?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지 말고 최선과 차선을 생각해요.
 
요한 에를리히: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는 건 버릇 같은 거라. (어깨 으쓱인다) 조심히 들어가라.
 
요한은 두 사람을 배웅해줍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아테나는 두 사람이 페어로서 공식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유진은 몇 가지 조사와 사상검증성 면접 같은 인터뷰를 했지만,
 
정식 페어라는 유용한 전력을 깨트릴 수 없으니 효용성 측면에서 어떻게 넘어가는 것 같았죠.
 
애초에 아테나가 넘어올 때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네요.
 
다음 주말, 언급된 행사 자리가 있습니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자선 파티입니다.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테이블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고, 정중한 서버들이 샴페인 등을 가져다 줍니다.
 
두 사람의 파티 복장은 어떨까요? 궁금하니 상세한 묘사 부탁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두 팔을 시스루 원단으로 감싼 오프숄더 디자인의 드레스를 착용했다. 허리까지는 검은색, 치마부터는 어두운 푸른색으로 우아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준다. 몸선에 딱 맞춘 치마는 한쪽이 트여있다. 겹겹의 풍성한 레이스 자락이 걸을 때마다 나풀거렸다. 깔끔하게 틀어올린 머리칼, 귀에는 평소의 귀걸이 대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흔들린다.) 매일 군복만 입고 지내다 보니 이런 드레스는 또 오랜만이구나? (말은 그리하나 이전에 자주 파티에 다녔던 기억이 에티켓과 매무새에서 묻어나온다.)
 
유진 N. 브리즈:(반깐 쉼표머리에 올블랙으로 맞춘 정장. 윙카라 셔츠, 까만 베스트에 소매를 정리할 수 있도록 셔츠 가터를 함께 착용하였으며 그 위로 파티복 정장을 입었다. 공적인 자리이니만큼 타이도 빠뜨리지 않고 반듯하게 van wijk 매듭으로 묶었다. 평소에 이만큼 차려입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아테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모습일지도……?)
말과는 다르게 행동이 무척 익숙해 보이네요.
 
아테나 K. 히페리데:파티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 지겨울 정도로 다녔거든. 흐음…… (당신을 짧게 위아래로 훑었다.) 최근에 네 사복 차림을 몇 번 보긴 했지만 오늘은 또 새로운걸? 제대로 꾸며두니 볼만하구나. 잘 어울려.
 
유진 N. 브리즈:(새삼스럽지만 정말 상류층 자녀처럼 말하는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저를 훑는 네 시선을 보고 소리없이 웃었다. 그리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다.) 격에 맞추어 꾸미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신경을 썼네요. 이런 자리는 항상 불편해서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지만.
당신이 참모 총장을 맡아서 다행이에요. 모처럼인데 그렇게 아름다운 차림으로 궂은 일을 하기는 아쉽잖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러니? 불편하다기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인단다. (웃는다.) 격에 아주 잘 맞게 차려입고 왔으니 내 잔소리 들을 일은 없겠어.
후후…… 공관에 가는 게 내 쪽이었다면 드레스 대신 정장을 입고 왔을 테지만. 의례적인 칭찬이니, 진심이니? (옅은 장난기가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벼운 농조다.)
 
유진 N. 브리즈:이런 가면을 쓰는데는 익숙해서요. 남들이 바라는 기준은 언제나 눈에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잔소리라는 이야기에 잠시 네게 시선을 맞추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는 확실한 대답 대신 평소처럼 가만히 웃어본다.) 글쎄, 어느 쪽일 것 같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이런 데선 어떤 의미로든 가면이 필요하긴 하지. 사교계에서 진심을 내보이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거든. 그나저나 질문한 건 나일 텐데? 나에 대한 감상이 어떨 것 같은지 내게 되물어봤자, 당연히 긍정적일 거란 대답 말고 뭘 내놓을 수 있겠니. (눈을 흘긴다.)
 
유진 N. 브리즈:우리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래서 사교계가 싫단 말이야.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낮게 혼잣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답을 내게서 찾으려 하지 마라는 의미예요. 내가 당신이 싫어할 소리를 할 리 없잖아?
 
아테나 K. 히페리데:걱정 마렴. 바보같은 짓을 유도하게끔 하는 화술은 내 몫이니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유진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말하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게 맞았으므로.) 이런 데선 눈치가 빠르다니깐. 사교계와 안 맞는 것처럼 굴어도 너도 꽤 소질이 있는걸?
 
두 사람은 멋지게 차려입었으나 사실 참모총장 호위 담당이나 다름없습니다.
 
아테나가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며 자원했다는 스토리입니다.
 
요한이 준 렌즈와 인이어는 잘 착용했나요?
 
유진 N. 브리즈:(잊지 않고 착용했다!)
 
굿~
 
참모총장은 파티장 안쪽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번쩍 들어올리네요.
 
참모총장: 오, 히페리데 아닌가. 어서 이리로 오게! (퍽 경박한 어투로 두 사람을 환영한다.)
 
아테나 K. 히페리데:(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다가가 우아하게 목례한다.) 좋은 저녁입니다, 참모총장님. 이쪽은 제 페어, 유진 브리즈입니다. 이전에 보고를 올리며 말씀드린 바 있지만, 총장님과 직접 만나뵈고 싶다고 하여 함께 대동했습니다. (그리곤 유진에게 인사하라는 듯 눈짓한다.)
 
유진 N. 브리즈:(참모총장을 향해 자연스레 미소지으며 목례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진 브리즈입니다. 이렇게 총장님을 직접 뵙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입니다.
 
참모총장: 그래, 그래. (흐뭇하게 웃는다.) 이렇게 번듯한 페어가 내 호위를 맡는다니 아주 든든하군. 브리즈, 자네도 숱한 공적을 세웠다고 들었네. 조만간 내 비서실에서 함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게.
 
유진 N. 브리즈:(정말 원하는 걸 말하면 당신은 이 자리에 없을 텐데도… 라는 생각을 속으로 집어삼키며 사회생활 미소를 띄운다.)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실력, 믿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모총장: 이런, 겸손떨 필요 없다네. 히페리데의 충심과 뛰어난 지략은 높이 사고 있으니까. 자네를 향한 기대도 커.
 
그 뒤로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 비위를 맞추는 것과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참모총장이 꼰대 같은 농담을 하고,
 
감수성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데 적당히 편을 들어 주고, (아테나의 화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거나 주변을 오가는 상관들과 인사를 하고…….
 
그러던 중 옆 테이블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참모총장과는 앙숙 같은 사이인 정치인입니다.
 
“글쎄, 대통령 각하께서 나를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그 말을 들은 참모총장이 킬킬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숫제 껄껄대며 파안대소를 터뜨립니다.
 
왜 저렇게까지 웃는 걸까요?
 
한편 때맞춰 무대 쪽 스크린에 대통령의 축사가 재생되기 시작합니다.
 
“이 뜻깊은 환원에 감사를 보내며…….”
 
<지능> 판정
 
유진 N. 브리즈:
지능
기준치: 85/42/17
굴림: 76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러고 보니, 로맹 바투타 대통령이 저런 특별 담화 등에 단독 촬영된 것 이외에 사람이 많은 자리에 직접 등장한 걸 본 적이 있던가요?
 
유진 N. 브리즈:(그러고보니 대통령이 실제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문득 옛날 인자미나에서 보았던 스와콥문트 관련 게시글이 떠올라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기우려나.)
 
대통령 담화가 지나고, 아테나와 참모총장이 술을 한 잔씩 주거니받거니 하며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무언가를 발견하더니 묘한 미소를 짓는다.) 참모총장님. 서버가 테이블 게임을 나누어주는 걸 보았습니다. 만칼라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될지요?
 
참모총장: 오호! 아주 좋지, 아주 좋아.
 
아테나의 제안에 참모총장이 화색을 띕니다.
 
그 틈을 타 아테나는 유진과 인이어 너머의 요한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입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만칼라는 돌 여러 개로 하는 게임이니, 참모총장이 돌을 쥐면 지문이 남겠지. 브리즈, 네가 하나만 빼돌려서 워치로 스캔하렴. 에를리히가 지문을 따줄 거야.
내가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끌어볼 테니 지문을 얻으면 공관으로 가서 서재를 살펴보렴. 가능하겠니?
 
유진 N. 브리즈:속도전이라는 얘기네. (고개를 한번 끄덕인다.) 가능해요. 가능하도록 만들거고.
 
아테나 K. 히페리데:좋아.
 
유진의 대답을 들은 후 아테나는 서버에게서 만칼라 도구를 받아 와 테이블에 깔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한 수씩 충고를 던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네요.
 
참모총장이 돌 여러 개를 쥐고 통에 넣으면서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유로운 판정을 통해 돌을 훔쳐봅시다.
 
유진 N. 브리즈: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98
판정결과: 대실패
(뒤늦게 도구를 구경하는 척 조용히 통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와당탕! 팔을 뻗다가 그만 테이블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나고 마네요.
 
시선이 모두 당신에게로 쏠립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브리즈, 너도 참여하고 싶었음 말을 하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참모총장님께 배움을 청할 때란다. (유려하게 넘기면서 눈빛으로는 째려본다. 잘 좀 하라니깐!)
 
유진 N. 브리즈:하하, 제가 너무 성급했나요?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웃는 얼굴로 이를 악물고 아테나에게 답한다. 당신이 해 봐요, 이게 쉬운 일인가.)
 
재판정이 가능합니다. (은밀행동 제외)
 
유진 N. 브리즈:
손놀림
기준치: 10/5/2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돌을 모른 척 빼내기엔 너무 서툰 손짓...
 
이런 걸 해봤어야죠.
 
다행히 그때 아테나가 현란한 기술을 선보여 모두가 거기에 집중하느라 유진의 서툰 손짓을 본 이는 없는 듯합니다.
 
다른 판정으로 재도전 가능합니다!
 
유진 N. 브리즈:(후후, 대놓고 가져오는 수 밖에 없나……)(은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테나의 반응을 살피며 타이밍에 맞추어 돌을 빼낸다.)
민첩
기준치: 95/47/19
굴림: 8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돌이 섞이는 틈을 타 자연스럽게 하나를 손 안에 숨기는 데 성공합니다.
 
스마트워치 카메라나 착용한 렌즈를 통해 돌을 스캔해 그 정보를 요한에게 보냅시다.
 
유진 N. 브리즈:(안 어울리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이동하며 돌이 잘 보이도록 렌즈로 스캔한다.)
 
곧 요한이 인이어를 통해 지시를 합니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 다 들리나?
브리즈, 너한테는 공관까지의 최단경로를 보냈다. 생체반응을 스캔해서 사람이 적은 경로만 골라 보여 줄 거야.
너희가 있는 전시장 지하에 차량을 마련해 뒀다. 타고 4분 정도만 달리면 바로 공관이야. 감시가 붙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해라. 지문은 지금 따는 중이니 공관 도착하기 전까지 보내 주마.
 
자연스럽게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겠네요.
 
유진 N. 브리즈:(요한이 보낸 경로를 확인하며 자리를 벗어나 전시장 지하로 갑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는 사람을 두엇 마주치긴 했지만,
 
행사 참여자가 건물을 돌아다니는 게 수상한 일은 아니니 별 일은 없었습니다.
 
요한이 준비했다는 차량번호를 확인해 차에 탑승했습니다.
 
홀로그램 패널이 경로를 띄워 주기 시작합니다.
 
공관촌까지는 경로를 따라 가니 요한의 공언대로 딱 3분 55초가 걸렸습니다.
 
참모총장의 사택인 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에 가까운 집입니다.
 
대문은 지문 스캔 방식으로 열리는 듯합니다.
 
유진 N. 브리즈:요한, 지문은요?
 
요한 에를리히:1분 전에 보내뒀다. 확인해봐.
 
유진 N. 브리즈:(지문을 확인하고 대문 앞에서 스캔해본다.)
 
지문을 찍자 대문이 느리게 열렸습니다.
 
…참 기묘한 정원이네요. 형형색색의 선인장과 특이한 식물들이 널려 있습니다.
 
저건…… 저건 웰위치아 미라벨리스가 아닌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유명한 식물입니다.
 
유진 N. 브리즈:(오…)
높은 사람들 취향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니까. (최대한 주변에 볼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눈에 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조심스럽게 정원을 통과해 안쪽 문으로 향하자. 일단 문 자체는 지문으로 열립니다.
 
현관으로 들어가 봅시다.
 
요한 에를리히:내부 스캔을 해야겠는데……. 보안이 상당히 강력하네. 뭐 눈에 띄는 거 없나?
 
현관 앞에는 신발 여러 켤레, 우산, 발판 깔개, 그리고 로봇 청소기가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있네요, 로봇 청소기. (청소기를 현관 앞에 두는 집이 있던가? 다가가서 확인해봅니다.)
 
로봇 청소기는 집 구조를 직접 스캔하여 경로를 설정하는 기기이므로, 이 데이터를 내려받는다면 내부 구조를 알 수 있겠죠.
 
요한 에를리히:로봇 청소기? 좋네. 전원 한 번 켜봐.
 
유진 N. 브리즈:요한, 내가 지금 당신을 못 믿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잘 들어요. 우리, 여기에 잠입한 거 맞죠? 정말 그냥 켜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요한 에를리히:걱정 마라. 고작 로봇 청소기 켜는 것 정도로 경보 시스템이 발동하진 않아.
 
유진 N. 브리즈:현장에 없다고 태평하시네. (로봇 청소기 전원을 켠다.)
 
요한 에를리히:일반적인 상식을 말했을 뿐이야. …… 신호 들어온다, 5초만 기다려.
됐다. 다운로드했고, 여기서 어디가 서재인 거지? (복잡하게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 …… 2층 오른쪽 두 번째 방 같군. 한 번 가봐.
 
유진 N. 브리즈:(지시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두 번째 방으로 간다.)
 
서재로 가 보자, 특별히 보안 장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문 인식 방식인 듯하네요.
 
손가락이라도 잘리면 어쩌려고 지문으로 모든 걸 해결해 둔 걸까요?
 
유진 N. 브리즈:이걸 꼼꼼하다고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미리 스캔해둔 지문을 가져다 댄다.)
 
:내부로 진입하자 [태블릿 PC] 두 대, [수기 문서], [책상 서랍], [책장]이 보입니다.
 
요한 에를리히:잠깐. (경고한다.) 책장은 조심해서 건드려. 뭔가 있는 것 같아. 특정한 책을 뽑으면 경보가 울린다거나 하는 시스템인 듯하군.
놔두고 다른 것부터 살피도록 해. 다른 쪽에는 그런 게 안 보인다.
 
유진 N. 브리즈:그 말은 책장에 무언가 있다는 뜻이네. 좋아요. 다른 것부터 확인할게요. (수기 문서를 확인한다.)
 
:[대통령 관저 스와콥문트 이관 계획위 필요성에 따라, 대통령 각하께서도 승인하신 바 청사와 관저를 스와콥문트로 이동하는 쪽이 보안 유지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앞뒤가 잘린 문서입니다.
 
일부러 자른 것은 아닌 것 같고, 앞장이 더 있는데 그건 어디론가 사라지고 뒷장만 남은 것 같습니다.
 
유진 N. 브리즈:(대통령과 관련된 문서가 왜 여기있는 거지?) (요한이 확인할 수 있도록 눈으로 빠르게 확인한다.)
 
요한 에를리히:흠…… 확인했다.
 
유진 N. 브리즈:문서가 잘려있네요. 왜 이것만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상 서랍을 확인한다.)
 
간식을 보관하는 곳인지 믹스커피 등이 나뒹굽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유진 N. 브리즈:(아무렇지 않게 책상 서랍을 닫고 태블릿 pc를 확인한다.)
 
태블릿 한 대는 배경화면이 가족사진이고, 잠겨 있습니다. 평범한 9칸짜리 패턴이네요.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건지 손때도 탔고,
 
가죽 케이스 안에는 ‘23일 9시 환경부 장관과 오찬’ 따위의 메모도 남겨져 있습니다.
 
이건 굳이 살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인이어 너머로 목소리가 전해져온다.) [게임이 곧 끝날 것 같아. 얼마나 남았니? 최대한 서둘렀으면 하는데.]
 
유진 N. 브리즈:(벌써?)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일단 좀 더 끌어볼게. 신속하게 부탁해.] (통신을 끊는다.)
 
유진 N. 브리즈:(한 시간이 참 빠르네…… 인이어를 통해 요한에게 말을 건다.) 책장 외에 더 볼만한 건 없어보이는데 어때요, 경보를 피할 방법은 알아냈어요?
 
요한 에를리히:지금으로선 단시간 내에 파훼법을 알아내긴 어렵겠다. 다른 태블릿에 관련된 정보가 들어있길 바랄 수밖에 없겠군.
 
유진 N. 브리즈:당신도 만능은 아니었군요? (다른 태블릿 pc를 살핍니다.)
 
요한 에를리히:아무래도 인간인지라. (픽 웃는다)
 
다른 한 대는 좀 더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양인지 국방부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유진에게도 익숙한 스티커입니다.
 
방위사령부에 공식적인 경로로 출입할 땐 카메라 렌즈에 늘 붙이는 스티커니까요.
 
이 태블릿은 지문 스캔 방식으로 잠금을 풀 수 있고, 바탕화면에 바로가기 문서 하나가 보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군사암호와 일반 문장이 섞여 있어 단번에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유진도 해독이야 할 수 있곘으나, 아무래도 당장 이 자리에서 훑어보지는 못할 것 같네요.
 
유진 N. 브리즈:……프로젝트 아난시?
요한, 지금 확인하는 문서 해독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요한 에를리히:프로젝트 내용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으니 지금 당장 해독은 어렵다. 일단 블루투스로 네 스마트워치에 파일을 옮겨.
 
유진 N. 브리즈:시간은 부족한데 해야 할 일이 점점 늘어나네. (파일을 복사하여 스마트워치에 옮긴다.)
 
파일이 거의 다 전송되어갈 무렵, 아테나가 다시금 통신을 켭니다.
 
보다 다급한 목소리입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상황이 어떻니? 총장이 네가 어디로 갔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어.]
 
유진 N. 브리즈:왜 하필 지금 찾는담. (솔직한 마음의 소리) 당장 그쪽으로 가기는 시간이 걸릴 듯 해요. 최대한 빠르게 복귀할 테니 시간을 좀 더 벌어봐요.
 
아테나 K. 히페리데:[이 이상은 어려워. 총장이 점점 더 게임에 흥미를 잃고 있거든. 에를리히, 미리 협의해둔 대로 해야겠어요.]
 
요한 에를리히:그래, 2분 뒤에 크리쳐 로봇 중 하나를 폭주시키겠다. 시끄러워지면 브리즈를 찾을 정신도 없어지겠지.
 
유진 N. 브리즈:나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 이런 작전을 짜셨대? 둘이서만 알지 말고 나한테도 미리 알려달라는 말 하지 않았던가요?
 
아테나 K. 히페리데:[사과해야 하니? 공관 담당은 너고 연회장 담당은 나니까 분담을 확실히 한 것뿐인데. (얄밉)]
[네가 한 시간이나 자릴 비웠다는 걸 들키는 것보단 이쪽이 나아. 로봇 하나 폭주쯤이야 쉽게 제압할 수 있으니 걱정은 마렴.]
 
유진 N. 브리즈:당신 얄미운 거 알아? (솔직!)
제대로 해 봐요. 여기도 그럴 테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그게 내 성격이지.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럼, 빨리 돌아오렴.]
 
곧이어 인이어 너머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얼른 돌아가 보는 게 좋겠네요!
 
유진 N. 브리즈:(프로젝트 아난시와 관련된 파일을 요한에게 전송하고 회장으로 복귀합니다.)
 
급히 속도를 높이자 차량은 금방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쿵, 쿵, 건물 울리는 소리,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때,
 
쾅!
 
2층에서부터 하늘로, 직선으로 내쏘아지는 푸른색 광선.
 
파티장에 들어오기 전, 아테나는 허벅지 가터에 에너지 운용 권총을 찼었죠.
 
그렇다고 해도, 구현자 없는 설계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다시, 쾅.
 
이번에는 미로를 설계하듯 복잡한 나선을 그리며 휘어져 올라갔다가, 바닥을 향해 쏟아져내리는 에너지.
 
유량이 얼마나 거대하고 풍부한지 각성자라면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건물 전체가 아테나가 짠 거대한 그물에 걸려든 것만 같습니다.
 
저 압도적이고, 차갑고, 지나친 힘을…….
 
누구도 무시하거나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2층 회랑 한 쪽이 무너져 있어서, 건물 바깥에서도 안이 잘 보입니다.
 
구조물에 거미줄을 쏘아 붙잡고 반동으로 뛰쳐나온 아테나가 부속지 같은 팔을 휘젓는 크리쳐 로봇에게 권총도 없이 손짓만으로 에너지를 내쏩니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새파란 거미줄이 로봇 전체를 꽁꽁 감싸죄더니 곧장 터뜨려 버립니다.
 
홀로 온전한, 기적에 가까운 경로 구현.
 
구현자 없는 설계자, 저 전능한 구현을 보아라.
 
아테나는 공중에 떠 있듯이 체공 중이었지만 실은 부서진 벽 조각을 밟고 교묘하게 올라타 있습니다.
 
어쨌든 기자들이 사진을 뽑기엔 아주 좋은 구도가 되었겠네요.
 
유진 N. 브리즈:(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평소같았으면 반사적으로라도 움직였을 몸이건만 그 자리에 굳은 것 마냥 상황을 이해하는데 급급하였다.) ……아테나?
 
아테나 K. 히페리데:(거미줄을 근처의 벽에 쏘아 밧줄처럼 지탱하며 바닥으로 내려온다. 그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고 우아하기 그지없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마주한다.) 왔구나? 보다시피 로봇은 깔끔하게 끝장냈어. 내겐 흠집 하나 없단다.
 
유진 N. 브리즈:이게 대체 무슨……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잠시 내저으며 허탈하게 웃는다.) 당신, 이제 내가 없어도 되는 거 아닌가?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랬으면 좋겠니? (바닥에는 여전히 파란 에너지로 짜여진 거미줄의 잔해가 남아 있다.) 카사블랑카로 돌아오자마자 널 찾으러 온 사람에게 서운한 소릴 하는구나.
 
유진 N. 브리즈:누가 할 소리를. 서운한 건 오히려 이쪽이에요.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버렸는데 이제 내가 나설 자리가 없잖아요?
언제부터 혼자 구현까지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러게 좀 더 빨리 돌아오지 그랬니? 참모총장이 내 능력에 반해서 더 귀찮게 굴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격한 움직임 탓에 틀어올린 머리가 풀어져내렸다. 긴 곱슬머리를 어깨 뒤로 넘긴다.) 여길 떠난 후엔 싫어도 함께 활약할 기회가 많을 거란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보는 눈이 많구나. (제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잠시 가져다댄다.) 네 능력도 조금은 성장했겠지? 파티장이 엉망이 됐으니 보수를 좀 도와주면 고맙겠어.
 
유진 N. 브리즈:어련하시겠어. (입고있던 재킷을 벗어 네 어깨에 걸쳐주었다.) 함께 하고 싶다면 지금은 눈에 띄는 짓은 자제하면 좋겠네요. 당신은 주변 시선을 잘 모으거든.
미리 말해두지만 내게 많은 걸 바라지 말아요.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뿐이라서.
 
아테나 K. 히페리데:어머. (어깨에 걸쳐진 자켓을 흘끗 내려다보다가 희미하게 눈가를 휜다.) 그런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끌어모으는 타입인데 말이야. 천성과 바람이 맞지 않아서 아쉽게 됐구나.
네게도 '활약할' 기회를 주려는 거잖니? 마침 기자들이 우릴 주목하고 있으니 함께 있는 사진이 몇 장 찍히면 좋겠지. 괜히 네 행적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없게끔.
 
유진 N. 브리즈:남들이 내게 관심이 많은 건 내 탓이 아니잖아요?
그건 참 '고맙네요'. 나는 또 당신이 나를 잊은 줄 알았지. 이제 당신 계획대로 해 볼까? 미스 히페리데, 파트너로서 함께 하시죠. (네게 오른손을 내민다.)
 
아테나 K. 히페리데:널 잊어버리는 건 내게도 손해인 일이라 말이지. (고아한 동작으로 제 손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널 위한 설계를 해줄 테니 따르렴.
 
이후 두 사람은 한동안 망가진 파티장을 보수하는 데 시간을 쏟았습니다.
 
아테나가 거미줄로 경로를 설계하면, 그 길을 따라 유진이 바람으로 잔해를 들어올려 치우거나 끼워맞췄죠.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척척 합이 맞는 모습에 파티에 참석한 이들이 감탄하는 건 당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조간 신문의 1면은 대부분 두 사람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위상이 한층 올라갔네요.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
 
유진이 빼내 온 '프로젝트 아난시' 관련 문서를 요한이 해독하는 동안, 다시 일주일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동안 아테나와 유진은 각성자사관학교로부터 실습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전에 나선 선배 페어들은 대부분 전장에 투입되어 있으니,
 
페어를 맺고도 두 사람이 카사블랑카에 머물고 있는 틈을 타 학생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의도였죠.
 
별달리 연설 같은 것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기술 시연 정도야 보여주지 못할 건 없다는 게 아테나의 생각입니다.
 
애초에 상부 지시를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각성자사관학교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유진에게도 익숙한 훈련실이네요.
 
VR 가상훈련실과는 또다른 곳이었는데, 순수하게 이능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강도가 드센 재질로 만든 교실입니다.
 
3교시짜리 수업에서 교수의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남은 두 시간이 두 사람의 몫입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경로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깨끗한 시야를 만드는 거야. (평소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유려하게 설명을 해나간다.) 시력의 좋고 나쁨이 아닌, 목표물을 겨냥하는 마음가짐에 흔들림이 없이 단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지.
(정순한 푸른색의 에너지가 왼손을 휘감으며 피어난다.) 잡념이 없을 때 에너지는 가장 순도 높은 열기를 가져. 너흰 아직 정식 페어가 없겠지만 임시 페어와 합을 맞추는 건 몇 번쯤 해봤겠지? 두 사람씩 짝지어 서렴. (세워 둔 과녁을 가리켠다) 교실 끝에서 이 과녁 정중앙을 얼마나 가깝게 맞출 수 있는지를 테스트해줄게.
 
아테나와 유진이 먼저 시범을 선보입시다.
 
아테나 K. 히페리데:준비는 됐니, 브리즈? 긴장해서 말도 안 나오는 건 아니지? (태연하게 목소리 낮춰 묻는다)
 
유진 N. 브리즈:(그 말에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긴장하는 거 봤어?
 
아테나 K. 히페리데:혹시나 후배들 앞에서 입이라도 얼어버린 건 아닌가 살짝 걱정을 했단다. (능청스레 대답하며 교실 뒤쪽으로 향해 손을 가볍게 튕겼다. 파란 거미줄이 허공을 빠르고 능숙하게 가로지르며 과녁을 향한 경로를 만들어낸다.)
설계 Roll
기준치: 90/45/18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유진 N. 브리즈:당신, 본인이 말할 때 말이 끊기는 걸 싫어하잖아요.
(아테나의 설계를 확인하고는 손가락을 튕겨 경로 위에 바람을 일으킨다.)
사격(권총)
기준치: 90/45/18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촘촘히 뻗어나간 푸른빛의 설계 위로 바람 한 줄기가 쏜살같이 불어와 과녁을 관통합니다.
 
“와…!”
 
“봤어, 방금? 난 제대로 못 봤어.”
 
“총알처럼 눈 깜박했더니 뚫려 있던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테나와 유진의 협력에 경탄합니다.
 
애당초 아테나가 꽤 유명인사이기도 했고,
 
이 고아한 설계와 유려한 구현은 각성자라면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기 모인 학생들은 1학년이어서, 학교를 일찍 떠난 아테나는 물론이거니와 유진과도 재학 기간이 겹치지 않아 아는 얼굴들이 없습니다.
 
유진 N. 브리즈:(학생들의 반응을 살피듯 가볍게 주변을 눈으로 훑는다. 분명 익숙한 교실임에도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고, 앉아 있는 후배들은 모두 둘을 알고 있습니다.
 
4년 전 학내 시위 이후 두 분파로 갈라진 세력은 저마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가 없는 동아리를 형성해 각자의 세력을 내세웠습니다.
 
정부를 위시하는 축이 교지편집부,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을 그대로 계승한 축이 전통음악 동아리입니다.
 
자기 자리 옆에 작은 젬베를 내려 둔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불쑥 말합니다.
 
학생1: 히페리데 선배님. 선배님께선, 외람되지만, 4년 전 학내 시위 중 끌려가신 후 계속 괴뢰 정부 (라고 발음할 때 학생은 굉장히 냉소적인 어조를 사용했다)에 붙잡혀 계셨던 걸로 아는데요. 이능력을 어떻게 그렇게 다듬으셨습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어머나? (냉소적인 어투에 숨겨진 의도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싸늘해져 버린 분위기 속에서 건너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대들듯이 반박합니다.
 
학생2: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도 있잖아! 넌 맨날 실습 점수 하위권이니까 질투 나냐, 마르보?
 
그러자 마르보라는 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학생1: 나는, …나는 정보의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야!
‘충성하는’ 자들에게 좀 더 능력을 개화하기 쉬운 법을 알려 줘서 자기 사람으로 키운다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마르보는 돌아 돌아 결국 아테나가 정부에 충성하는 것을 비꼬고 싶었나 봅니다.
 
유진 N. 브리즈:(속 보이는군.)
 
아테나 K. 히페리데:흐음. (실상이야 이중 스파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정부의 프로파간다로 써먹히고 있으니 학생운동을 계승한 쪽의 학생이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감히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비꼬는 행태에 화를 내야 할지, 제 완벽한 이중 스파이 연기에 감탄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어쨌건 이 자리엔 초대받아 온 거니 괜히 시끄럽게 만들면 저만 귀찮아지겠지.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선 특유의 오연한 웃음을 띈다.) 그건 페어의 유무가 아닐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난 1학년 때부터 정식 페어를 맺었거든. 뜻하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에너지 효율을 안정시키는 데엔 큰 도움이 됐단다.
 
유진 N. 브리즈:정보와 재능의 영역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테나의 대답을 들으며 시선이 학생들 쪽을 향한다.) 자신의 이능력이 어디에 강점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페어를 믿고 자신도 믿을 수 있으니까요.
 
아테나 K. 히페리데:지금은 실습 점수가 낮더라도, (마르보라 불린 학생을 정확히 응시한다) 노력만 하면 나나 브리즈만큼 훌륭한 각성자가 될 수 있을 거란다. 그러니 힘내보렴?
 
학생1: (머뭇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 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생들은 유진과 아테나가 얼마나 이능력을 잘 운용하던지 저마다 감탄하며 재잘재잘 강의실을 나섭니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쪽도 있었고요.
 
아테나 K. 히페리데:뭣도 모르는 애들 다루는 건 귀찮다니까. (사관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성인이다)
 
유진 N. 브리즈:당신 덕에 배로 주목받는 나는 어떻고?
견뎌요. 뜻이 있으니 하는 행동이잖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후후, 너도 곧 괴뢰 정부로 가게 될 텐데 뭘. (작은 한숨 내쉬며 고개 끄덕인다.) 그래야지.
1학년 때 지도교수가 강연이 끝나면 날 좀 보자더구나.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겠니?
 
유진 N. 브리즈:내 파트너가 나를 두고간다니, 이번에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제 워치를 톡톡 두드린다.)
 
아테나 K. 히페리데:얼마 안 걸릴 거야. 한 자리 얻으려고 아첨이나 하겠지. (얼마나 많이 봐 왔는지 지겨움이 낯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겠어. 조금 있다 봐.
 
유진은 아테나를 두고 먼저 1층으로 향합니다.
 
로비에 앉아 있을 때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키가 작은 금발의 여학생입니다.
 
명찰에 쓰인 이름은 ‘릴리안 웨즐리’.
 
릴리안 웨즐리:저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까 강의 들었던, 릴리안 웨즐리라고 합니다.
 
유진 N. 브리즈:(빠르게 명찰을 확인하고 아, 하는 짧은 반응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바라본다.) 반가워요, 후배님.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릴리안 웨즐리:아, 저, 앉아계셔도 돼요……!
 
잔뜩 긴장한 그는 당신에게 대뜸 태블릿 패드를 내밉니다.
 
릴리안 웨즐리:저, 사, 사인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패, 팬이어서요! 제가! 선배님하고, 히페리데 선배님하고…….
 
유진 N. 브리즈:(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태블릿 패드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웃는다.) 후배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지만 나는 군인이지 연예인이 아니라서요. (태블릿을 돌려주듯 네 쪽으로 밀어준다.) 팬이라는 이야기는 고마워요. 선배로서 존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릴리안 웨즐리:그, 그렇구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납득하고 태블릿을 받아든다. 그러고도 바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사람 한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공간을 두고 옆자리를 가리켠다.) 괜찮으시다면 옆에 잠깐 앉아도 될까요?
 
유진 N. 브리즈:(납득해주는구나.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며 네 손을 따라 시선을 제 옆자리로 두었다.) 그럼요. 같이 앉아요.
 
릴리안 웨즐리:감사합니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앉아 목소리를 조금 낮춘다.) 저, 실은…… 인자미나 아시죠? 선배님들 1학년이실 적에 꽤 유명하셨어서…… 이,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느끼실진 모르겠지만……. 자, 잘 모르는 사이에 겨우 사진 몇 개만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요, 굉장히 동경했거든요.
 
당신은 남의 눈에 띄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학내에선 좀 달랐나 봅니다.
 
아무래도 차석까지 한데다 시위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으니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 없었을지도요.
 
그렇지만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었습니다.
 
릴리안 웨즐리:지금까지 임시 페어를 몇 번이고 거쳐 보았는데, 저는 동조율이 하나같이 몹시 낮아서……. 선배님들께선 오랜 기간 떨어져 계셨는데도, 각자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으신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수업을 듣고 더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시간이 없으신 게 아니라면… 몇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릴리안이 그렇게 입을 떼던 순간에, 난데없이 복도 저쪽 끝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유진 N. 브리즈:(아, 눈에 안 띄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 띄었나보네.)(당연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 또 연구동아리 미친 애들 짓이야?!”
 
“꺅! 악! 으악! 난 귀신은 괜찮아도 벌레는 질색이란 말이야!”
 
…….
 
유진 N. 브리즈:(벌레라니?)
 
복도에서, 로비로, 거대하고 꿈틀거리는 다리와 더듬이, 역겹게 번쩍거리는 갑주를 갖춘…
 
어디로 보나 보편타당하고 완전한 바퀴벌레가 기어 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의 크기가 4m쯤 되었다는 것이겠죠…….
 
조금 이성을 갖춘 학생들은 그 안에서 키잉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었으므로, 이것이 연습용 크리쳐 로봇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혐오감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상한 실험으로 학내 사고의 주요 원인이 되곤 하는 연구부가 또 폭주 로봇을 만들어냈으리라는 추측,
 
그 폭주 로봇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걱정은 모든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듭니다.
 
유진 N. 브리즈:미친 저게 뭐야 (깜짝 놀라 속으로 내적비명 지르는 중)
 
아테나 K. 히페리데:(그때 막 계단을 내려와 1층에 도착한다. 유진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리다 바퀴벌레를 딱 발견하고는 오만상을 찡그린다.) 뭐니? 이 교양이라곤 내다버린 로봇은.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는 실험정신을 가진 애들이 꼭 있다니까. (한숨을 내쉬며 처리하려는 듯 손을 앞으로 뻗는다.)
 
그가 손을 뻗은 순간에, 바퀴벌레가 돌아봅니다.
 
눈이 달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크리쳐 로봇이니 감지 센서가 있는 건 당연하죠.
 
폭주 직전이었던 바퀴벌레는 갑작스레 입을 쩍 벌리고 몸을 구부려 뒤로 돌아 아테나에게 달려듭니다.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나가 활약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온 후배들이 대다수였으니까요.
 
한두 사람 나와 있었던 교수들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아테나가 손을 들어올렸으므로 그를 믿고 기다리는 기색이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생각보다 정교하게 잘 만든 것 같은데? (크리쳐 로봇이 돌아보는 것을 보고 감탄한다. 위급 상황은 위급 상황이고 그와 별개로 실력은 실력이다.)
 
유진도 와중에 감탄할 만큼, 갑작스럽긴 해도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파란색 에너지가 넘실거리지도,
 
단숨에 뻗어나온 거미줄이 로봇을 옭아매는 일도 없었습니다.
 
아테나는 드물게도 입술을 벌린 채 굳어 있습니다.
 
크리쳐 로봇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데도!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죠!
 
유진 N. 브리즈:(어?)
(아테나의 반응에 반사적으로 그에게 다가가 제 안쪽으로 몸을 제끼고 바람을 일으켜 로봇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움직임을 막는다.)
사격(권총)
기준치: 90/45/18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유진은 아테나를 뒤쪽으로 밀어내며 이능력을 사용합니다.
 
휘오오- 하는 웅장한 소리가 로비를 가득 채우고, 마치 폭풍처럼 강력한 바람이 로봇을 완전히 봉쇄합니다.
 
그와 더불어 뒤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릴리안이 기지를 발휘해 던진 사과에 맞은 바퀴벌레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꿈틀거립니다.
 
소름끼칠 정도로 잘 만든 형상이었지만, 그런 재현에 감탄할 때가 아니겠죠.
 
유진 N. 브리즈:(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눈을 찌푸리며 뒤집힌 거대한 벌레 모형의 로봇을 보다가 아테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테나,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아테나 K. 히페리데:(크리쳐 로봇이 어떻게 됐는지 신경쓸 틈도 없다. 멍하니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능력이…… 나오지 않아.
 
유진 N. 브리즈:하?
 
낯빛이 창백합니다. 의무실에라도 들러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때 릴리안이 달려옵니다.
 
릴리안 웨즐리:선배님! 괜찮으세요?
 
유진 N. 브리즈:(아무래도 안 괜찮은 것 같다. 나 말고 아테나가...)
(잠시 상황 파악을 한다. 이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의미이지? 지금까지 이런 일이 있었던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겨우 한마디를 내던진다.) 다친 데는 없고?
 
릴리안 웨즐리:(아테나의 얘기는 듣지 못한 모양이지만, 눈치로 그의 안색이 나쁘단 걸 알아챘는지 조심스레 제안한다) 제가 보건위원인데 지금 의무실이 잠깐 잠겨 있을 거거든요. 열어드릴 테니 가시겠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게도 평정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래야겠구나.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제2의무실이죠.
 
두 사람이 언약을 했던 그 장소.
 
유진 N. 브리즈:(릴리안의 말에 숨을 토해내듯 내뱉으며 작게 말한다.)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내가 다치지도 않았는데 거기를 또 가게 될 줄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되뇌이며 자연스레 아테나를 양팔에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테나 K. 히페리데:(혼란스러움에 이마를 짚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안겨진다.) 어머! 브리즈, 너…… (눈을 크게 떴으나, 내려달라 실랑이하는 데 쓸 여력도 없는지 금방 포기하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릴리안이 열쇠를 꺼내 의무실의 문을 열어줍니다.
 
안쪽은 적막하네요. 침대가 모두 비어있어 편히 쓸 수 있겠습니다.
 
유진 N. 브리즈:(비어있는 침대 중 하나에 아테나를 앉힌다.) 아테나, 내가 지금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조금 전에 있었던 일 다시 말해줄래요?
몇 시간 전에는 괜찮았잖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래, 아까 강의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미간을 찡그렸다.) 능력 자체가 사라진 것 같진 않아. 에너지 흐름도 이전처럼 평범하게 느낄 수 있고. 그런데 쓰이질 않았어.
 
유진 N. 브리즈:능력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굳은 얼굴로 당신을 내려다본다.) 능력이 무언가에 막혀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가? 진단이라도 받아보는 건 어때요?
 
아테나 K. 히페리데:누구한테 뭐라고 진단을 받겠니? 이걸 알리는 건 내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내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 짚이는 게 없진 않아. (무언가를 곱씹다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다. 몸에 가득 들어간 힘을 의식적으로 빼려는 것처럼.) 얼마 전 자선 파티 때 기억하니? 일부러 폭주시킨 로봇을 파괴할 때 엄청나게 큰 힘을 썼었지. 그렇게 과시해본 건 나도 처음이었어. 애초에 내 능력이 이토록 커진 것부터가 의도한 일이 아니었거든.
 
유진 N. 브리즈:그래서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전쟁터로 다시 뛰어들어가시겠다? 히페리데 씨,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깜빡인다. 생각하듯 웃음기 걷힌 눈이 당신을 응시한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겠네요. 이상이 있거나, 무언가의 전조 증상이거나.
촛불이 언제 가장 세게 타오르는지 알아요? (수 초간의 적막을 끝으로 답을 보낸다. '불이 꺼지기 직전', 하고.)
 
아테나 K. 히페리데:말을 끝까지 들으렴. 누가 곧바로 전쟁터로 돌아가겠대? 남이 보면 능력 사라지라고 저주하는 줄 알겠어. (눈을 흘긴다.)
내가 강해진 건 노노이 라가힛과 얽힌 사건 때문이야. 그 애가 죽던 날 나와 에를리히가 피를 엄청 뒤집어썼었지. (그때를 떠올리면 다시금 불쾌함이 이는지 입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그 이후로 에너지 유량이 이상할 만큼 요동쳤었어. 라가힛이 뭔지는 몰라도 정부가 진행한 찜찜한 실험에 얽힌 건 확실해.
그래서 4년 동안 에너지 유량을 컨트롤할 방법을 찾으면서 라가힛과 관련된 실험을 추적해 왔단다. 각성자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뭔가라는 것밖엔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무튼, 에너지가 안정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추측컨대 자선 파티 때 너무 큰 힘을 쓰고, 아까 강의 때 시연하면서 여남은 힘까지 다 써버린 게 아닌가 싶구나.
 
유진 N. 브리즈:오, 내가 정말 저주라도 해주기를 원해요? 이걸 어쩌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저주에 재능이 없네요. (능청스럽다.)
그때 일을 어지간히 잊을 수 없나 봐. (라가힛의 죽음보다는 피를 뒤집어 쓴 데 초점을 맞춘 듯 하였다.) 아테나, 그걸 이상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일지 몰라도 무언가 반응으로 인하여 변화가 있었다는 건 확실하잖아요?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다행일테지만. (일시적일지 아닐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뜻이겠지. 뒷말은 집어 삼키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자연스레 말을 바꾼다.) 그전까지 당신은 괜찮겠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내가 타오를 날은 아직 한참 남았어. 초의 길이도 아주 길고 말이야. 꺼지기 직전이 아니란 뜻이지. (눈을 흘긴다.)
너 같으면 잊혀지겠니? 피를 맞은 일도 일이지만 요동치는 에너지를 안정시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나니까 이 정도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거지. (투덜거리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에너지가 자연적으로 차오르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리지. 그 대신 효율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잖니?
 
에너지가 고갈된 상대에게 접촉을 통해 에너지를 주입해줄 수 있었죠.
 
새삼 4년 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도 이곳에서 아테나에게 에너지를 건네줬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유진 N. 브리즈:(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네 이야기를 듣는다.) 글쎄요, 생각 좀 해 보고. 당신이 정중하게 부탁한다면 내가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겠네요.
 
아테나 K. 히페리데:하? (어이없어한다. 아테나 자존심에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다.) 너는 이런 상황에 나한테 정중하게 부탁해보란 소리가 나오니?
 
유진 N. 브리즈:싫으면 자연회복을 기다리시던가.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려본다.)
 
아테나 K. 히페리데:(부들부들) 페어가 걱정도 안 되니!? (한 대 치고 싶다)
 
유진 N. 브리즈:오, 나는 어떠한 순간에도 내 파트너를 걱정하며 정중히 대하였는데 내 파트너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나 보지요? (당신을 내려다보다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지금 네 태도는 전혀 '정중하게' 느껴지지 않거든? (한때 자기가 못되고 얄밉게 군 건 다 잊고 당신을 째려보기만 하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유진 N. 브리즈:그럼 당신은 여전히 나를 모르는 거네요. (손이 겹치자 느껴지는 차가움에 온도를 전해주듯 반사적으로 감싸 쥔다. 시선을 맞추기 위하여 그 자리에 앉고는 옛날에 자신이 했던 것처럼 에너지를 주입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테나는 돌아온 날부터 반 년 내내 병자처럼 안색이 창백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난 몇 주간, 정확히는 다시 만난 날부터 조금씩 회복되어갔죠.
 
이게 우연일까요?
 
아테나 K. 히페리데:너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에너지가 몸 안으로 퍼져나가자 냉골 같던 몸이 조금씩 따스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한결 편안해지는 감각에 눈을 반쯤 내리감았다.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진다.) …… 고마워.
 
유진 N. 브리즈:맹세컨대 이곳에서 나만큼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걸요? (돌아오는 온도에 손을 쓸어내리듯 만지고는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라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자신만만하긴. (4년간 떠나 있던 제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번만큼은 굳이 반박하지 않기로 한다. 내내 얼음 속에 있어 추운 줄도 몰랐던 몸이 녹기 시작하자 눈이 조금씩 무거워져 왔다.) 오후 일정은 없으니 여기서 조금만 더 쉬다 가도 괜찮겠니? 피곤하구나.
 
유진 N. 브리즈:이제 아셨나?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인다.) 그래요. 여기서라도 편하게 쉬어야지. 침대가 너무 푹신하면 잠이 잘 오지 않잖아요. (농조)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래, 내 숙직실 침대는 호텔 침구 수준이지. (픽 웃는다) 너도 지쳤으면 조금 쉬어 두렴. (모자를 벗고 천천히 몸을 기울여 누웠다.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감았다.)
 
아테나는 곧 풀어진 얼굴로 잠들었습니다. 저런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이네요.
 
그러던 차에 조심스럽게 보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유진 N. 브리즈:(릴리안인가? 문득 문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곁에서 잠든 아테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문을 향해 작게 네, 하고 대답한다.)
 
릴리안 웨즐리:선배님……! 저예요. 릴리안.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나누실 수 있을까 해서요.
 
당신의 예상대로 릴리안 웨즐리입니다.
 
유진 N. 브리즈:(다른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아테나가 잠귀가 밝던가, 잠시 생각하고는 문 밖에 서 있는 릴리안에게 긍정하는 답을 돌려준다.) 들어와요.
 
릴리안 웨즐리:(문가에서 쭈뼛거리다가 조심히 들어온다.) 가, 감사해요…… 혹시 회복제가 필요하실까 해서 이걸 좀 들고 왔어요. 히페리데 선배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셔서요.
 
릴리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농담 삼아 포션이라고들 부르는, 각성자들이 자주 마시는 체력 회복제입니다.
 
유진 N. 브리즈:(체력회복제.) 아테나가 제 일에는 워낙 열정적이다보니 무리를 했었나 봐요. 잠시 쉬고 나면 괜찮을 거예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회복제는 아테나가 깨어나면 내가 전해줄게요. (잠시 생각하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직접 전해줄래요? 아테나는 그 편을 더 좋아할 것 같아서.
 
릴리안 웨즐리:아……! 그,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선배님들의 시간을 너무 뺏는 건 아닐지 조심스럽네요……. (그래도 아테나에게 직접 전해준다니 설레임과 기대감이 동시에 드는 듯, 유진 너머로 아테나를 슬쩍 흘끔거리며 회복제를 꼭 쥐었다.)
(바로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거리다가 아까보다 조금 더 작아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연다.) 그, 선배님 주무시는데 방해될까 봐 죄송스럽지만…… 아까 하던 이야기가 제게는 무척 중요한 거라서요. 선배님께 조언을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유진 N. 브리즈:이런 일에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는데. 후배님이 아니었다면 아테나는 여기서 쉴 여유도 없었어요. (회복제를 꼭 쥐는 모습에 조용히 미소만 짓는다.)
웨즐리라고 했던가? 나는 후배님의 질문이 실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 조언이 정말 필요할 지는, 글쎄요. (작게 웃고는) 조언을 바란다는 건 이미 스스로 잘 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초조해 하지 말고 평소처럼 해 봐요. 그래도 모르겠다면 다시 물어보고. 연락처 알려줄게요.
 
릴리안 웨즐리:아, 아뇨……!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어서요.
저, 사실 동조 장애가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거든요.
 
유진 N. 브리즈:(아 생각지도 못한 게 튀어나왔다)
 
릴리안 웨즐리:그런데 저는… 저는 꼭 멋진 각성자가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 좀 tmi인데요……. 저희 부모님이 각인하신 각성자 부부였다고 하시는데, 스와콥문트 시민이시거든요. 저랑 오빠가 아주 어릴 때 떠나 버리셨어요. 그 뒤론 연락도 끊어 버리시고……. 그래서 저랑 오빠는 오랫동안 부모님이 저희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직접 만나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우연찮게 저도 각성자로 태어났으니까, 제가 공적을 세워서 시민권을 따려면 구현자로서 멋진 행보를 보여 주어야 가능성이 생기고……. 그, 그런데 이런 상황이니까요. 혼자서도 전투할 수 있는 노하우를 익혀야 해서……. 그래서 선배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두 분의 동조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나 어떤 조건 때문일 수 있지만… 선배님께서 페어가 사라진 상황에도 이능력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임관하신 건 선배님의 노력 때문이잖아요?
 
그러고서 릴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어올립니다.
 
눈 안에서 신뢰가, 동경이, 반짝거리는 경탄이 빛납니다.
 
릴리안 웨즐리:저는 강해지고도 싶지만… 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도 싶어요. 뭐, 딱히 누가 뭐… 세상을 구해라! 하고 시킨 건 아니지만요, ……오빠도 각성자인데 질 수 없어서요! 저는 선배님 덕분에 용기를 많이 얻었거든요. ……저어, 예전에 사관학교 시위 때에도 계셨다고 들었어서요.
 
우습네요. 동경할 거라면 아테나를 좇아가지, 유진에게 이럴 건 뭐란 말인가요.
 
유진이 아테나 없이 졸업한 게 딱히 유진 본인의 선택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한 일도 아니거니와 학내 시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릴리안은 거기서 느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어떤가요? 이 일방적인 동경이.
 
유진 N. 브리즈:(아하, 왜 아테나가 아니라 나인가 했더니 그런 이유였구나?)
 
릴리안 웨즐리:죄송해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했죠. 일단 선배님께서 설계가 없이도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훈련을 하셨는지 궁금하고…
그리고, 음……. 두 분은… 시위에 나갔을 때와 지금, 마음가짐이 여전히 같으신지 궁금했어요. 뒤에 건 그냥…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꼭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유진 N. 브리즈:(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이유를 깨닫고서야 실소가 터져나오고 만다.) 내가 말했죠, 후배님 질문은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다고.
나와 아테나의 동조율이 높았던 건 우연이 맞아요. 하지만 페어 없이 혼자 이능력을 다루었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네요. 나는 단 한번도 아테나가 죽었다 생각한 적이 없었고 내가 혼자 남았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어요. 노력이라기보다는 나를 믿고 아테나를 믿은 거예요.
(이어지는 질문에는 웃으며 짧게 답한다.) 마음이 변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어요.
 
릴리안 웨즐리: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까지 해 가며 열심히 경청한다.)
여전히 같은 마음이시라니 기뻐요. 저도 부끄럽지 않도록…… 기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면서 릴리안은 머쓱하게 웃습니다.
 
릴리안 웨즐리:제가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냐 싶긴 하지만요. 하지만 원래 영웅은 그런 데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시계를 흘끗 본다) 시간을 너무 오래 뺏어서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그냥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는데요.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존경하는 선배님께 말씀드린다 생각하고 들어 주세요. (짧게 심호흡.)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시더라도,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걸 하고 있나’ 싶은 시간이 오시더라도, 순간순간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후배들이 선배님들 동경하고 좋아하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선배님들께선 저희 하나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되어 주시고 계신 거예요.
…… 그러니까 건강하셔야 해요!
 
그런 후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집니다. 부끄러웠던 모양이에요.
 
유진 N. 브리즈:(릴리안이 사라진 자리를 수 초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이건 나도 부끄러운걸.')
(그런 생각이 드는 한 편 아테나가 지금 상황을 모른다는 것이 어쩐지 안심이 된다. 빈 손으로 자연스레 입을 가리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아테나가 짧은 낮잠에서 깨어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곤한 눈을 살짝 비빈다.) …… 브리즈?
 
유진 N. 브리즈:(아, 하고 짧게 반응하고는) 몸은 괜찮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끄덕) 에너지 보충도 받았고, 조금 자고 나니까 몸에 열이 돌아서 한결 나아진 것 같구나.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니?
 
유진 N. 브리즈:(릴리안이 전해주고 갔던 체력 회복제를 네 뺨에 갖다댄다.) 당신 안부를 걱정하던 좋은 후배님 덕에 그리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네요. 그 친구가 전해달래요.
 
아테나 K. 히페리데:어머?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병을 받아든다.) 내게 그런 후배도 있어? 학교에 1년밖에 안 다니고 떠났으니 인맥은 나보다야 네가 더 많을 텐데. 어쨌건 고맙구나. (딱히 마시진 않는다)
 
유진 N. 브리즈:(마시지 않는군. 거기까지는 예상했다.) 당신이 워낙 유명인사라 이 학교에 팬이 많아요. 직접 전해주고 갔으면 했는데 휴식시간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나.
 
아테나 K. 히페리데:후후, 나만 그렇니? 너도 만만치 않을 텐데. (흐음, 하며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고 정복의 모자를 눌러썼다.) 그 애 이름이 뭐니?
 
유진 N. 브리즈:오, 나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농조)
――릴리안 웨즐리. 다시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내가 이런 감은 좋거든요.
 
아테나 K. 히페리데:릴리안 웨즐리…… (곱씹는다.) 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나도 기억해둘게.
(자켓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진짜 목적에 관한 얘긴데. 카사블랑카를 떠나려면 준비 기간이 얼마나 필요하겠니? 오늘 아침 에를리히에게 연락을 받았어.
 
유진 N. 브리즈:정말 갑작스럽다는 거 알아요? 떠날 준비야 미리 해두고 있었다지만 글쎄, 아직은 시간이 좀 필요하겠는걸요. 파티날 입수한 정보를 확인하려면 카사블랑카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래도 얘기할 건 얘기해야지. 에를리히에게 연락받은 것도 파티 때 얻은 정보에 관한 내용인데, 네가 떠날 준비를 마치면 그 이후에 진행하려고 물어본 거란다.
 
유진 N. 브리즈:해독에 꼬박 일주일이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나 보네. 여유 부릴 시간 줄 수 있어요? 가능하다면 일주일, 아니라면 3일. 준비 기간은 그거면 충분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절반 정도뿐이라더구나. 뒷부분은 아예 파쇄돼서 읽을 수 없었다던데. (혀를 찬다.) 당연하지, 일주일 정도 여유는 충분해. 그럼 시간은 그때로 정해둘게.
프로젝트 내용은 방위사령부 지하에서 뭔가 부적절한 실험이 이뤄졌다는 것. '아난시' 가 뭔가 했더니 옥수수알 한 알로 사람 백 명과 맞바꿨다던 도곤족 신화에 나오는 신 이름이라더구나. 분명 이유 없는 명명은 아닐 테지.
학생 때 돌았던 소문 기억나니? 아놀드 박사 말이야.
 
유진 N. 브리즈:오, 부적절하다는 단어를 쓸 정도라면 범인의 방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라는 건데. (아난시라고 해서 거미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한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 예정이라도 되나 보지.
(네게 시선을 맞추었다.) 아놀드 박사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희생된 사람이 한 명이기만 하면 다행이지.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건 아니고, 아놀드 박사가 그 실험 총책임자였는데 뭔가에 반발을 했다가 숙청당했다는구나. 이후로는 프로젝트가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도록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다는 기록이 있었대. 실험실에 사람은 없겠지만 로봇은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지.
자, 정리하자면 우린 일주일 뒤 방위사령부 지하로 간다. 그곳에서 아난시 프로젝트 과정인 실험에 관해 알아낸 다음 가능한 한 증거물을 챙기고 도시를 빠져나간다. 장벽 밖에서 망명 정부 사람들과 만나 나미브 사막으로 향한다. 내가 세운 계획은 이래. 네가 동의한다면 말이지.
 
유진 N. 브리즈:세상에 이유가 정당화 되는 죽음이란 없어. (다행인 일이 아니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는 단호한 투로 답한다.) 들리는 이야기가 워낙 많으니 평범한 소문이 하나 없네요. 무인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라. (믿을 수 있나? 머릿속에서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는 낮게 왼손을 들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계획을 다시 짤 의향은 있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럼. 어느 부분이 불만스러운지 말해준다면 가능한 한 맞춰서 변경해줄게. 어쨌건 이 계획의 참여자가 나 혼자만은 아니니 말이지. (제 팔 겹쳐 팔짱 끼며 비스듬히 웃는다.) 내가 그렇게까지 독선적이진 않단다?
 
유진 N. 브리즈:(오?) 불만스러운 점은 없어요. 당신 의사만 확인하고 싶었던 거라서. 처음 세운 계획대로 가죠.
 
아테나 K. 히페리데:(눈을 가늘게 뜬다) 내 자비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니? (예전에 유진이 말했던 대로 4년간 몰랐던 그의 성질을 점점 더 잘 알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진 N. 브리즈:(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잖아요. 플랜 B가 있을까 싶어서 물어봤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플랜 B도 준비하긴 해야지. 사람은 없는 곳이지만 그만큼 감시 체계를 빡빡하게 해뒀을 수 있으니 잠입이 들켰을 때의 가능성을 고려하긴 할 거야. (그래도 재수없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유진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도도하게 침대에서 내려온다.) 일주일 동안 더 자세하게 논의해자보꾸나.
 
유진 N. 브리즈:(감시 체계라.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니 옛날 영화에 나올 법한 감시망은 없을 거고… 되려 그 자리에서 살상을 시킬 가능성이 높지 않으려나?)
플랜 B가 아니더라도 감시 체계에 대한 대비는 해야겠네요. 사람이 없는 곳은 빡빡하기보다 허술하지만 한 방이 강한 쪽이잖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끄덕) 보안에 관한 건 에를리히와 함께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우선은 돌아가자. 일주일간 신변 정리 잘 해두렴.
 
유진 N. 브리즈:(고개를 끄덕인다.) 가서 이야기하죠.
 
실습 강연 일정은 여기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숫기 없는 후배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일주일 뒤, 결행일이 되었습니다.
 
그간 두 사람은 현금을 조금씩 바꾸거나 짐을 싸는 등 티나지 않게 준비를 마치고 중간중간 임무에도 얼굴을 비추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죠.
 
결행 시각은 새벽 1시.
 
보초를 서던 헌병대도 꾸벅꾸벅 졸 시간입니다.
 
방위사령부 앞에서 아테나가 유진을 맞이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안녕. 정신은 멀쩡하니? (시간상 졸리지 않냐는 뜻)
 
유진 N. 브리즈:잠이 통 오질 않아서. (짧게 인사하고는 가볍게 되받아쳤다. 용케도 알아들은 모양이다.)
 
지하실 앞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뭔가를 지키고 있다는 티를 내면 지하실 존재가 들통나니 아예 입구 안쪽에서 로봇들로 경비를 서는 것 같았다는 게 아테나와 요한의 분석이었죠.
 
아테나 K. 히페리데:다행이네. 졸음에 겨워 있으면 에너지 샤워로 시원하게 깨워줄까 했는데. (소통용 인이어 내민다.)
 
유진 N. 브리즈: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네요. 효과는 어떨지 몰라도 경험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인이어를 받고 귀에 장착한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 다 잘 들리나?
 
유진 N. 브리즈:(귀에 인이어를 장착하기가 무섭게 요한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상 없음. 잘 들립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문제없어요. (미리 끼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답한다.)
 
요한 에를리히:확인. 입구에 경비 로봇이 있을 텐데, 그 로봇들 상대만 조용히 좀 해 주면 걔네들 통해서 내부 설계도를 다운로드해 보겠어. 부탁한다.
 
두 사람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합니다.
 
평상시에 이 철문은 굳게 닫혀 있죠.
 
인이어 너머에서 바쁘게 무언가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히 문이 열립니다.
 
지하 출입 권한이 있는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킨 모양입니다.
 
실험실로 향하는 주요 입구에는 푸르고 조도 낮은 조명이 밝혀져 있습니다.
 
다중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것이 감각만으로도 느껴집니다.
 
홍채 인식 장치는 요한이 무효화했고, 남은 것은 발 앞의 각성자 에너지 감지 장치입니다.
 
이 레이저 선을 넘었을 때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의 출입이 느껴지면 보안 로봇이 튀어나오는 구조라고 요한은 설명합니다.
 
요한 에를리히:여긴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로봇이 튀어나오자마자 조용히 처리하는 방법뿐인 것 같다.
단, 설계도를 다운로드할 시간이 필요하니 14초쯤 시간을 끌어야 해. 히페리데가 설계를 열면서 동시에 발을 내딛어라. 그리고 브리즈가 위에 에너지 구현을 얹어. 로봇은 부수든 말든 상관없고 시간 끄는 게 중요해.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구현자는 <이능력> 판정을 시행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준비됐니?
 
유진 N. 브리즈:oO(요구조건이 까다롭군.)
(고개를 끄덕인다.) 가죠.
 
아테나 K. 히페리데:(바닥 가까이로 몸을 숙여 손을 뻗는다.)
항법
기준치: 90/45/18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응?
(파란빛이 나오려다가 멈칫하자 눈살을 찡그린다.)
잠깐 기다려. (유진이 구현을 얹는 것을 말리듯 한 손을 쳐든다.)
 
유진 N. 브리즈:(핑거스냅을 준비하다 잠시 대기한다. 지난번처럼 이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인가? 그런 생각에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너를 내려본다.) 문제라도 있나봐요?
 
아테나 K. 히페리데:…… 14초를 생각하다가 집중력이 좀 떨어졌어. (스스로 인정하는 게 자존심 상하는 듯 못마땅하게 답한다.) 다시 할게.
항법
기준치: 90/45/18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손끝에서 뻗어나가던 푸른색 에너지가 또다시 뭔가에 가로막히듯 멈춥니다.
 
에너지를 다루는 데 능숙한 설계자인 아테나가 웬일일까요?
 
유진 N. 브리즈:(가만히 지켜보다 말없이 네 손을 잡고 에너지를 주입시킨다.) 집중력만 좀 떨어진 게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당신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테나 K. 히페리데:무리 안 했어. (손을 내어준 채 아랫입술 깨문다.) 중요한 상황에 머저리처럼…… (따스하게 몸 안을 휘도는 에너지를 감각하며 제 자신에게 짜증스럽게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아예 눈을 감고 에너지의 흐름을 읽는다.)
 
유진 N. 브리즈:미스 히페리데, 당신이 모든 걸 책임지려 하지 마. 나도 있으니까.
 
아테나 K. 히페리데:
항법
기준치: 90/45/18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제야 매끄러운 푸른색 거미줄이 에너지의 흐름을 촘촘히 훑어나가며 바닥 위로 퍼져갑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 (자존심이 매우 상해서 만족스러운 기색도 없이 일어난다.) 바람을 일으키렴, 브리즈.
 
유진 N. 브리즈:(당신을 바라보다 퍼져 나가는 푸른 거미줄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가락을 튕긴다.)
사격(권총)
기준치: 90/45/18
굴림: 84
판정결과: 보통 성공
 
레몬빛 에너지가 거미줄을 휘감듯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두 사람의 설계와 구현은 정확히 맞아들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로봇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잘했어. (유진의 어깨를 한 번 툭 쳐주곤 발을 내딛는다.) 간다.
 
아테나가 한 발짝 내딛은 순간,
 
굉장히 귀엽게 생긴, 고전 애니메이션 월-E에 나오는 흰색 로봇 같은 비주얼의 보안 로봇이 튀어나와 전자기 파동을 퍼뜨립니다.
 
유진, 지금입니다. 미리 펼쳐둔 구현으로 로봇을 공격합시다.
 
유진 N. 브리즈:(14초라 하였던가? 로봇의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반사적으로 바람의 위치를 옮겨 그 움직임을 막아본다.)
 
미리 설계된 경로를 따라 유진의 바람이 로봇을 에워싸고,
 
공기의 흐름에 떠밀려 바닥에 나동그라진 로봇은 얼마간 팔을 떨다 액정을 깜빡거리며 이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한 에를리히:…보안이 상당한데. 일부 구역은 아예 폐쇄되어 기록에 남질 않았어.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설계도가 이 정도였다. 일단 참고해.
 
한편 쓰러진 경비 로봇이 웅얼거립니다.
 
경비 로봇: ……저는 제 할일을 다 했어요! 공격하지 마세요!
 
기술이 발전되면 인간과 닮은 로봇이 시장을 지배하리라는 과거의 예측과 달리,
 
로봇들은 귀엽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점점 일원화되었습니다.
 
인간과 닮은 로봇을 개발하는 것은 여러 윤리적 관념상 굉장히 심한 규제를 받는 일 중 하나죠.
 
유진 N. 브리즈:(생긴 월-E인데 말을 잘 하네.)
 
경비 로봇은 액정에 T_T 표정을 띄웠다가,
 
경비 로봇: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예요! 어떤 목적으로 방문, …….
 
라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치지직 소리를 내며 꺼지고 맙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거슬리네. (거미줄로 로봇을 옭아매 옆쪽으로 치운다.) 어디부터 보겠니?
 
유진 N. 브리즈:등록되지 않은 각성자라는 걸 인지해버렸는데 이대로만 두어도 괜찮아요? (옆으로 치워지는 로봇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거린다. 설계도를 확인하고는) 데이터 분석실부터 가죠. 실험과 관련된 자료는 전부 그쪽에 모일테니 우선적으로 보는 게 좋겠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꺼졌으니까 괜찮아. 아님 부숴버릴까? 거미줄에 조금만 더 힘을 실으면 그만이니.
 
유진 N. 브리즈:아테나, 증거를 더 남기려 하지 말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이대로만 둬도 괜찮겠냐고 한 건 너란다? 경비는 무력화했으니 난 어찌해도 상관없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곤 눈짓한다) 그럼 가자.
 
유진 N. 브리즈:그냥 두는 것과 부수는 건 다른 이야기지. (위치를 확인하고는 데이터 분석실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곳은 수집된 모든 실험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대형 서버 룸과 여러 개의 분석 스테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네요.
 
로봇이 즐비해야 할 것 같은데, 캐비넷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로봇이 케이스에 담겨 잠들어 있습니다.
 
에너지 변환기, 고성능 PC가 늘어서 있습니다.
 
뭔가 복잡한 스트림이 화면에 표시되고, 중앙 실험실을 도식화해둔 듯한 원형 챔버가 모니터에 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메인 PC]입니다.
 
유진 N. 브리즈:(이렇게 얌전하게 있으면 불안하더라~)
(메인 PC를 확인해봅니다.)
 
메인 PC는 잠겨 있네요.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켜 잠금을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진 N. 브리즈:(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켜 본다.)
 
지문을 인식하자 잠금이 풀리고,
 
인공지능 제어 시스템인지 화면에는 대화 창이 떠 있습니다.
 
이전 대화 내역은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단서를 획득한 후에 물어볼 내용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유진 N. 브리즈:결국 기록이 남는다는 거네. 섣불리 움직이면 안되겠어.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더 살펴본다.)
 
데이터 분석실에서 볼만한 건 이 정도입니다. 다른 장소를 보러 갈까요?
 
유진 N. 브리즈: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야겠어요. (대화창이 뜬 메인 PC를 손등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동하죠.
 
아테나 K. 히페리데:그래. 최대한 의미있는 정보만 뽑아가야 하니까. 어디로 가겠니?
 
유진 N. 브리즈:(제어실 A로 향합니다.)
 
실험실의 모든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는 곳처럼 보입니다.
 
문은 딱 로봇이 드나들 만큼만 열려 있습니다.
 
<크기> 판정 (실패해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
크기
기준치: 70/35/14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먼저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가 낀다.) 하. 키가 큰 것도 문제구나.
 
유진 N. 브리즈:…… (착잡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크기
기준치: 80/40/16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테나는 다시 뒤쪽으로 빠져나오기라도 했지. 유진은 완전히 껴버렸습니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네요! 이런~
 
유진 N. 브리즈:(시도도 하지 말 걸 그랬나……)
 
아테나 K. 히페리데:저런. (웃참)
바람으로 한 번 문을 밀어서 열어보지 그러니? 안 되면 부술 수밖에.
 
유진 N. 브리즈: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왼손으로 핑거 스냅을 하여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 Roll
기준치: 90/45/18
굴림: 7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테나 K. 히페리데:뭐어…… 어쩔 수 없지.
 
유진은 바람을 일으켜 문을 밀어냅니다.
 
겨우 넉넉히 들어갈 만큼 문이 밀려났습니다.
 
유진 N. 브리즈:(지금까지 단 한번도 키가 큰 것을 후회하지 않았건만 이 순간만큼은 후회가 된다.)
 
아테나 K. 히페리데:고마워, 브리즈. (얄밉게 인사하며 넉넉하게 열린 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유진 N. 브리즈:(아, 진짜 얄미워.)
(뒤통수 한번 노려보고는 따라 들어간다.)
 
해프닝도 잠시,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방 전체에 낭랑한 울림이 퍼집니다.
 
이후로도 음성은 두 사람의 신체 정보를 몇 가지 더 읊고 풀썩 꺼집니다.
 
요한 에를리히:…… 뭐냐, 방금?
 
유진 N. 브리즈:――오. ……개인정보 빠져나가는 소리?
 
아테나 K. 히페리데:뭐가 이렇게 태연하니? (눈 흘김) 저도 모르겠네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울린 거라서.
 
그때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안내 로봇 하나가 팔을 흔듭니다.
 
안내 로봇:이리 오세요! 두 분의 신체 상태를 점검해 드릴게요, 각성자님!
 
아테나 K. 히페리데:흠? (눈썹 치켜올린다.)
 
유진 N. 브리즈:증거가 이미 남을대로 남아버려서 나름 타협을 한 거라 생각해 줘요. (안내로봇을 보고는 살짝 눈을 찌푸린다.)
 
아테나 K. 히페리데:웬 안내 로봇이란 게 나타났는데요, 에를리히. 신체 상태를 점검해 준다는데 어쩔까요. 정지시킬까요?
 
요한에게 상황을 전달하자, 요한은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 카메라로 비치는 내부를 파악하며 바쁜 판단을 내립니다.
 
요한 에를리히:위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닌 것 같군. 단순히 신체상태를 점검할 뿐인 것 같아.
 
그러는 사이에 로봇은 아테나에게 달라붙어 팔 길이를 재고, 손을 내 보라고 하며 에너지 상태를 점검하는 등 소란스레 굽니다.
 
유진 N. 브리즈:조금 전에 개인정보를 빼앗겼는데 이제 직접 주기도 해야하는군요. (증거가 더 남는다. 이래도 괜찮은가.)
 
요한 에를리히:우리 임무엔 문제가 없어 보이니 괜찮아. 적당히 상대하고 찾아봐.
 
그러거나 말거나 안내 로봇은 줄줄이 떠들어 댑니다.
 
안내 로봇:오래 떨어져 계셨군요! 두 분은 정식 페어이신데도! 이러면 안 돼요. 동조율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페어 간 의존도가 강해진다구요.
지금까지 두 분이 페어인데도 떨어진 채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테나 님의 에너지 유량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에너지 파동이 갑자기 일치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군요?
아테나 님의 에너지 파동과 유량은 지금 굉장히 불안정해요. 안정시키려면 유진 님이 반드시 필요해요! 떨어지지 마세요!
 
유진 N. 브리즈:(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다 가만히 아테나를 바라본다.) ……그렇다고 하네요?
 
아테나 K. 히페리데:(곁에 들러붙어 수선스레 구는 안내 로봇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다 팔을 홱 뺀다.) 지금도 떨어져 있진 않잖니? 이 로봇이 뭐라고 불안정하니 뭐니 떠들어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파동이 불안정해서 아까 설계도 연달아 실패한 건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진 N. 브리즈:갑자기 이능력이 나오지 않는다고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게 누구시더라? (그런 말 한 적 없다.)
 
아테나 K. 히페리데: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해한다.) 에를리히도 듣고 있는데 창피하게!
 
유진 N. 브리즈:동조율이 상승할 수록 페어 의존도가 강해진다면 페어가 없을 때는 혼자서 버틸 수 없다는 뜻인 거죠? (아테나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다.) 요한, 당신은 지금 괜찮은 거 맞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무시하니?! (등짝 한대 침)
 
유진 N. 브리즈:악. (맞았다)
 
요한 에를리히:뭐 하냐 너희…… (어이없어하면서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한다.) 난 페어가 없으니 딱히 의존도를 따질 것도 없어. 걱정은 고맙다.
(말 그대로 세상에 없으니까.)
 
유진 N. 브리즈:그런 식으로 확인 사살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네요. …우선 넘어갈까요?
 
요한 에를리히:어차피 내 능력은 전투 쪽도 아니니까.
 
유진 N. 브리즈:현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방해되지는 않고 말은 많지만 유용한 정보를 주는 이 로봇은 계속 곁에 둘까요?
 
요한 에를리히:그건 히페리데랑 더 떠들게 두고 내부를 한 번 살펴봐. 어차피 무해하니까. 시끄러우면 전원 버튼을 찾아서 끌 수도 있긴 하다만.
 
아테나 K. 히페리데:전 떠들고 싶지 않거든요?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로봇의 전원을 끈다.)
 
유진 N. 브리즈:응, 아테나가 저럴까봐 물어봤어요. 보다시피 해결했네요.
 
아테나 K. 히페리데:(짜증)
 
유진 N. 브리즈:(방을 둘러본다.)
 
잠든 로봇이 여러 개체 보이네요.
 
깨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자동화되었다는 연구 프로토콜 탓인지 연구 일지라든지, 사람이 쓰던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유진 N. 브리즈:(깨울 방법이 있다 한들 옆에서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어 정말 깨워도 되는가? 하고 1차적으로 생각한다.)
제어실에 무언가 특별히 보이는 게 없네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로봇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테나 K. 히페리데:나한테 묻는 거니?
 
유진 N. 브리즈:(네게 시선을 던지고는 인이어를 톡톡 가리킨다.) 둘 다요.
 
아테나 K. 히페리데:당연히 살펴봐야지. 그 안내 로봇 같은 게 또 나와도, 쓸모있는 다른 뭔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 (조금 툴툴대는 어투긴 하지만, 조사하려고 온 거니까.) 전원 버튼이 있으니 금방 켤 수 있을 거야. 아무거나 하나 켜 보렴.
 
유진 N. 브리즈:(물어보길 잘했군.)(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로봇의 전원 버튼을 켠다.)
 
가까운 로봇 중 하나를 켜 보면 자연스레 액정에 불이 들어옵니다.
 
눈을 깜빡거리는 이모지를 화면에 내세우더니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게 퍽 '인간다운' 행동입니다.
 
AECE:연구원 님! AECE 기상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유진 N. 브리즈:(연구원님?)
(잠시 고민하다 단어를 정리하여 로봇에게 질문을 던진다.) 프로젝트 아난시의 실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어.
 
AECE:대부분의 연구 과정은 데이터 분석실의 메인 PC에 담겨 있어요!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건 '프로젝트 아난시'의 개요와 그에 따른 안내 방식입니다!
 
유진 N. 브리즈:('질문 선택을 잘못했네.' 작게 중얼거리고는 로봇을 향해 다시금 말한다.) ‘프로젝트 아난시’의 개요를 알려 줘.
 
AECE:‘프로젝트 아난시’ 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예요! 한 명의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들 수 있지요.
중앙 실험실에서 자세한 내용을 열람하시겠어요?
 
유진 N. 브리즈:(한 명의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든다?)
(안내하는 설명에는 눈을 잠시 찌푸렸으나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 여겼기에 아테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한다.) 갈까요?
 
아테나 K. 히페리데:X각성자라…… (고개 끄덕인다.) 거기에 뭔가 중요한 게 있을 것 같구나.
 
두 사람은 중앙 실험실로 이동합니다.
 
이동하면서 복도 너머로 실험실처럼 보이는 공간 몇 군데를 지나치는데,
 
대부분 결벽적일 정도로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잠든 로봇들이 몇 개체 보입니다.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여러 개의 에너지 챔버와 복잡한 기계 장치가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실험실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존재합니다.
 
녹색으로 빛나는 유리관 안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차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 보면, 벽감을 따라 비슷한 유리관이 늘어서 있습니다.
 
같은 용액이 들어찬 내부엔… 마치 태아를 닮은 모양으로 배태되고 있는 어떤 존재들이 수십 개 보입니다.
 
…가운데의 [에너지 코어]를 더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진 N. 브리즈:(에너지 코어를 살펴본다.)
 
생명을 배아해 내는 빛깔, 녹색 용액 안에 푸르게 잠들어 있는 심장.
 
검붉게 바랜 색상 위로 밝고 인공적인 초록빛이 감돕니다.
 
심장은 아주 느린 박동을 지닌 채 떨듯이 뛰고 있었지만,
 
맥박을 전달해야 할 혈관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동맥에는 실험 장치의 일부 같은 관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탯줄처럼 보였습니다.
 
아래에 [네임 태그]가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 (네임 태그를 확인한다.)
 
AECE:‘프로젝트 아난시’ 의 핵심 에너지원을 보셨군요! 강력한 각성자였던 구현자 ‘유리 모하에’ 의 심장이랍니다.
이 심장에서 발산되는 혈액과 약품을 섞어 일반인에게 주사하면 거기서 파생된 ‘X각성자’가 탄생하지요. 지금까지 실험 성공률은 43%로 목표 수치인 55%까지 순조롭게 도달해 나가고 있어요!
여기 대동맥에 연결된 것은 엄빌리컬 케이블이에요. 이 케이블을 통해 전기 신호를 공급하면 뇌 없이도 심장이 혈액을 생성해 내는데, 신진대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프로젝트 아난시’ 초반의 가장 힘든 지점이었답니다. 아놀드 박사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 께서 이번에도 옳으셨던 거죠!
 
알아갔던 시간은 고작해야 두어 달,
 
그러나 유리 모하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어 저 홀로 머나먼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기일마다 열리는 추모제에서 학생들은 사상과 정치 신념을 떠나 적어도 교내에서 더는 이러한 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데에 뜻을 모아 왔습니다.
 
누구도 그의 심장이 이런 모독적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 다 왜 말이 없지? 로봇이 뭐라고 말하던데, 잘 안 들렸다. 뭐가 있는데?
 
유진 N. 브리즈:(요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믿을 수 없고 충격적인 상황이건만 이를 요한에게 전달해도 되는 상황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긴 침묵 끝에 입을 연다.) …… 프로젝트 아난시의 핵심 에너지원이요.
 
아테나 K. 히페리데:(한 명의 각성자로 X 각성자 80명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 '한 명의 각성자'는 누구인가? 질문의 답이 이렇게나 빨리 눈 앞에 나타난다. 자신이 카사블랑카로 향하게 된 가장 큰 계기. 그의 죽음으로부터 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되었고 저는 아버지에 관한 단서를 좇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이용하고 있었을 줄이야. 정부의 잔인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다지만, 인간의 악의가 어디까지 기능할 수 있는지를 이렇게 재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숨겨봤자야. 전달할 건 전달하고 논의를 해야지.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아테나답게 금방 침착함을 되찾는다.)
 
유진 N. 브리즈:(하, 하고 조소를 터뜨린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잖아.
요한, 어디까지 들었어요? 아놀드 박사가 생명을 창조하였다는데 생명은 절대 인간이 창조할 수 없는 것이라서. (뒷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까.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무고한 이가 이 프로젝트에 이용되었다, 그런데 그 자가 '유리 모하에'다. ……아니, 말할 수 없다. 생각하던 그는 결국 입을 닫는다.)
 
아테나 K. 히페리데:그러니 더더욱 얘기해야 해. 이걸 여기 그대로 둘 거니?
(유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잠시 올린다. 나직하게 말을 잇는다.) 프로젝트 아난시의 핵심 에너지원에 유리 모하에의 심장이 이용되고 있어요. 이걸 기반으로 해서 X각성자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을 전달하자, 그는 통신이 끊겼는가 의심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떨리는 숨소리만이 간신히 들려옵니다.
 
그 올곧은 여자를 생각해볼까요.
 
모든 것에 눈감고만 있었으면 이 풍족한 도시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갔을, 지금의 우리보다도 어렸던 청년에 대해서요.
 
아무도 그에게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라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 홀로 분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여러 비밀을 일러 주고,
 
불길처럼 삶을 태우며 분투하다 지금 여기 차가운 용액에 갇혀 비참한 꼴로 떠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모든 것이 헛된 것만 같습니다.
 
죽어가던 순간에 유리 모하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오래도록 감정을 정돈하지 못하던 요한은 겨우 말 한 마디를 뱉어 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유리가…… (떨리는 목소리에는 무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유리의 심장이 그 실험의 핵심 재료라면, 전략적으로 당연히 파괴… 파괴해야 한다.
부술 수 있다면… 그래도 경보 시스템 같은 것에 걸리지 않겠다고 판단되면…….
 
그건 아테나와 유진도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지시하는 행위는 오히려 요한 자신에게 상황을 들려 주고 납득시키기 위한 일처럼 보입니다.
 
…파손 없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법은 없을까요?
 
유진 N. 브리즈:…….
(진정하자, 진정해. 스스로에게 여러번 암시를 하고 AECE에게 질문한다.) 이걸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AECE:핵심 에너지원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건 제 권한이 아니에요! 메인 PC의 아난시 시스템 전체 관리자에게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유진 N. 브리즈:(안경 벗고 잠시 마른 세수한다.)
가지고 나갈 수 없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겠습니다. (메인 PC를 확인하러 데이터 분석실로 향합니다.)
 
다시 데이터 분석실로 돌아옵니다.
 
메인 PC에는 질문을 입력할 수 있는 대화창이 떠 있습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물어봅시다.
 
유진 N. 브리즈:(대화창에 질문을 입력한다. '프로젝트 아난시는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
 
메인 PC:[‘프로젝트 아난시’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입니다. 8년 전 처음 시작된 실험 계획으로, 각성자의 이능력은 혈액과 관련이 깊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진 후 ‘그렇다면 수혈 등의 방식으로 비능력자를 각성자로 만들 수도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출발했습니다.]
[총책임자 아놀드 박사님께서 실험을 지휘하던 시기에는 각성자들에게 기증받은 수혈팩을 사용해 적은 양의 혈액으로 연구를 이끌어 나갔으나, 대부분 실패하거나 효율이 좋지 못해 다량의 혈액 내지는 장기를 이식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이 4년 전의 일로, 아놀드 박사님께선 이 방침에 반발하였다 책임자 위치에서 경질되셨습니다. 이후로는 실험 전체가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실험이 자동화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메인 PC:[지시대로 효율만을 중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진 N. 브리즈:그놈의 효율…… (작게 탄식을 내뱉고는 질문을 입력한다.)
[현재 실험의 진행 상황은?]
(잠시 생각하다 질문을 바꾸어 다시 입력한다.) [현재 실험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가?]
 
메인 PC:[4년 전 입수한 실험체 ‘유리 모하에’ 의 심장을 에너지 코어로 삼아, 한 명의 강력한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들 수 있다는 결과가 산출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험체들을 모집, 현재는 혈액을 이식받은 X각성자의 안정성 유지를 목적으로 실험 진행중입니다.]
 
유진 N. 브리즈:[X각성자는 무엇인가?]
 
메인 PC:[각성자로부터 파생된 인공 각성자의 명칭입니다. 개체가 가지고 있던 기본 역량에 따라 X각성자들의 특징이 모두 다릅니다만, 에너지 색상에서 공통점을 보입니다. X각성자들은 대부분 검붉은색 에너지 색상을 나타냅니다.]
 
유진 N. 브리즈:…….
(아테나를 힐끔 보고는 질문을 다시 입력한다.)
['노노이 라가힛'에 대해 알 수 있는가?]
 
메인 PC:[노노이 라가힛은 N-28 실험체로, 6년 전 처음 각성자의 혈액을 이식받았습니다. 혈액 이식만으로도 반응을 보인 특이한 케이스로 성장하면서 단계적으로 혈액을 더 주입받아 X각성자들 중에서는 가장 두드러지는 에너지 유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비각성자의 신체가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사망했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익숙한 이름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제게 설계 반동이 오게 했던, 그리고 끝내는 고통 속에 폭사했던 이.) 분명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그게 뭔가 했더니…… 정부의 실험체로 이용당했던 거였구나.
 
유진 N. 브리즈:다르게 말하자면 그로 인해 당신과 요한도 X각성자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아니리라 믿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날' 이후 에너지 유량이 급격히 늘어난 아테나의 상태가 설명되지 않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면을 노려보더니 곧바로 질문을 입력한다.)
[유리 모하에의 심장을 꺼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권한이 있는가?]
 
아테나 K. 히페리데:내 에너지 유량이 기이하게 늘어난 것도…… 그래. 완전한 X각성자까지는 아니겠지만 조금은 관련되어버린 것 같구나. (불쾌하다. 그들에게 이용당하려고 사관학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메인 PC:[권한이 없습니다.]
 
유진 N. 브리즈:……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없앨 수 밖에 없나.
 
아테나 K. 히페리데:아무런 처리도 없이 바로 건드리면 분명 경보 시스템이 울릴 텐데. 성가시네.
 
유진 N. 브리즈:경보 시스템이라……
그러고보니 메인 PC가 처음 구동될 때 하늘길 시스템이라고 적혀있지 않았던가요?
(그쪽도 AI 아니었나? 잠시 고민하다 다른 질문을 입력한다.)
[프로젝트 아난시의 자동화 프로토콜은 '하늘길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가?]
 
메인 PC:[그렇습니다. 하늘길 엔진은 '프로젝트 아난시'뿐 아니라 다양한 요소에 쓰이고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여기서 알려주지 않더라도 경보를 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모스부호를 많이 이용했잖아요. (왼손으로 반대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킨다.)
물어볼 만한 내용은 거의 다 물어본 것 같은데…… 아난시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내용 없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관리자 권한이 없는 상황에서 빼낼 수 있을 만큼 빼낸 것 같구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AECE가 '아버지' 인가 뭔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었니?
 
유진 N. 브리즈:아, 그랬지. 얼핏 들었을 때는 아놀드 박사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문장을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서요. 아놀드 박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프로젝트 총책임자를 말할텐데…… (이전의 질문과 답변을 확인한다.)
[프로젝트 총책임자는 아버지인가?]
 
메인 PC:[‘최초의 설계자’ 에 대해 모르는 당신은 누구죠?]
[…생체 정보 스캔중…….]
 
유진 N. 브리즈:(어?)
 
메인 PC:[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경비 시스템을 개시합니다.]
 
문장이 완성됨과 동시에 에너지 코어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발딛고 선 땅이 지진처럼 뒤흔들리고, 사방에서 방화문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내려가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합니다.
 
유진 N. 브리즈:(조졌군.)
 
시야가 새하얘지고,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이 두 사람을 내던집니다…….
 
...
 
요한 에를리히:……테나! 유진! 정신 차려!
 
인이어 너머에서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에 눈이 뜨입니다.
 
온몸이 얼얼하고 시야가 이상합니다.
 
정신을 차리니 유진은 무너진 캐비넷 옆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들리나? 들리면 대답해!
 
유진 N. 브리즈:(어지럽다. 이 느낌은 뭐지? 인이어에 손을 올리고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다.) ―요한, 경비 시스템이 가동되었어요.
이거 돌아가면 할 얘기가 많겠는걸. (주변을 살피며 아테나를 찾아봅니다.)
 
아테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정신이 드나? 후…… (안도와 착잡함이 뒤섞인 한숨을 내쉰다.)
 
유진 N. 브리즈:(아테나가 없다. 이상한 감각에 요한의 숨소리를 뒤로 한 채 조심스레 인이어 너머로 아테나의 이름을 부른다.) ……아테나?
 
인이어 너머는 응답 없이 조용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당신이 점점 초조해질 즈음 아테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 들리니?
 
유진 N. 브리즈:(들려오는 아테나의 목소리에 인이어에 올라간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테나? 아테나, 당신 지금 어디야?
 
아테나 K. 히페리데:―하아. (다소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쉰다.) 나도 모르겠구나. 시야가 어두워서 잘 파악이 안 돼. 그리고 어디다 부딪힌 건지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모양인데.
 
유진 N. 브리즈: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죠. 요한, 이곳의 시스템이 우리를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최초의 설계자를 언급한 걸로 보아 단순히 자동화만 된 건 아닌 것 같네요.
 
요한 에를리히:둘 다 무사하니 일단 다행이다.
너흰 지금 방화문으로 격리돼 있어. 실험실 내부 경비 시스템이 활성화되면서 출구가 봉쇄된 모양이야. 아마 비상 상황에 대비한 내부 보안 프로토콜인 거겠지…… 정보가 더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경비 시스템을 해결할 수 있나 살펴볼 테니, 너희도 탈출 경로를 모색해 봐!
 
상황이 다급한 탓인지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요한이 이를 악문 채 내뱉습니다.
 
유진 N. 브리즈:지금이 비상 상황이다? (틀린 말은 아니네. 요한의 말을 들으며 눈으로 빠르게 주변을 살핀다. 작게 숨을 내쉬고는 방화문 쪽으로 다가가 막힌 공간을 몇 번 두드린다.) 아테나, 소리 들려요?
 
아테나 K. 히페리데:(잠시 침묵했다가 답한다.) 아니. 안 들려. 벽이 두껍거나 우리가 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전력이 비상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는지 온통 캄캄하여,
 
비상등이나 일부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에만 옅은 불빛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때 묘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옵니다.
 
동시에 당황한 요한이 외칩니다.
 
요한 에를리히:추가 보안 시스템이 가동된 것 같아. 뭔가 달라진 것 있나?
 
무색무취였지만, 분명 바람 같은 게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바람 소리가 들리네요. 지금 상황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 리는 없고 (침착하게 오른손으로 입가를 막는다.) 가스라도 내보내는 모양인데?
 
아테나 K. 히페리데:이쪽도 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어디서 불어오는 거지? (무언가를 몇 번이나 휘젓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층 심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해진다.) …… 이능력이 사용되지 않는구나.
 
유진, <이능력> 판정
 
유진 N. 브리즈:
바람 Roll
기준치: 0/0/0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손가락을 튕겨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능력을 차단하는 가스 같은데요.
 
유진 N. 브리즈:(이쪽이었나. 저도 모르게 쯧, 하고 혀를 찼다.)
 
아테나 K. 히페리데:혹시나 싶지만 브리즈, 너도 역시 사용이 안 되니? 나야 그렇다 쳐도 구현자인 너까지 막히면 좀 위험한데.
 
유진 N. 브리즈: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어볼래요?
 
아테나 K. 히페리데:(작은 한숨) 나쁜 소식부터.
 
유진 N. 브리즈:긴장감을 아는 사람이네. 당신 말이 맞아요. 이능력이 막혔어요. 공기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테나 K. 히페리데: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소식이랄 게 있니?
 
유진 N. 브리즈:오, 그럼요. 그걸 제외하고는 내 몸과 정신은 멀쩡하다는 것?
그게 좋은 소식이네요. 탈출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게 아니잖아요?
 
아테나 K. 히페리데:(헛웃음을 짓는다. 그래, 비록 어이없어서라도 웃음이 나오기는 한다는 게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긴 하겠다.) 좋아. 계속 주변을 찾아보자. 손전등이나 비상 탈출구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니.
 
능력도 사용되지 않고, 사방은 방화문이나 기물로 고립되어 있는데 전력마저 끊겼죠.
 
두 사람이 탈출하려면 봉쇄된 출입로를 열 만한 전력 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죠.
 
유진 N. 브리즈:(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는 동안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다. 이능력이 차단되는 거면 기존에 있던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 거지?)
 
정확한 건 알 수 없으나, 에너지를 읽는 감각 자체를 차단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각성자란 에너지와 친숙하며 흐름을 능숙하게 읽고 다룰 수 있는 자들을 칭하는 말이니까요.
 
상념에 잠겨 있자면 차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집니다.
 
<관찰력> 판정
 
유진 N. 브리즈: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그래도 아직 세세한 것까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네요.
 
유진 N. 브리즈:실루엣을 구분하는 게 고작인가……
 
하는 수 없습니다. 손발로 직접 사방을 더듬어서 모양을 확인하는 수밖에요.
 
유진 N. 브리즈:(근처에 있는 벽을 짚어 주변을 살펴봅니다.)
 
벽을 더듬어가던 유진의 손끝에 무언가 걸립니다.
 
유진 N. 브리즈:(응?)
 
어떤 보관함 같은데요.
 
유진 N. 브리즈:(손으로 더듬어 보관함을 열어본다.)
 
돋을새김으로 ‘비상 공급장치’ 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뭔가 찾았어. 배전함 같은데. (비슷한 타이밍에 통신이 온다.)
 
배전함을 열려면 적절한 판정이 필요합니다.
 
유진 N. 브리즈:이쪽도 뭔가 찾았어요. 잠시만 (말을 하면서 손을 더듬어 배전함을 열어본다.)
기준치: 65/32/13
굴림: 87
판정결과: 실패
 
이리저리 더듬어봐도 여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진 N. 브리즈:―안 열리나.
 
조금의 빛만 있었더라도 좋았을 텐데요.
 
유진 N. 브리즈:분명 여기 어디 있을텐데…… (다시 한번 배전함을 만져본다. 열 수 있을까?)
손놀림
기준치: 10/5/2
굴림: 21
판정결과: 실패
 
손끝에 뭔가 닿는 것도 같았지만…… 역시 감 잡기 어렵네요.
 
유진 N. 브리즈:(안 열린다. 착잡함에 잠시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고는 다시 배전함을 만진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근력
기준치: 80/40/16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근력
기준치: 80/40/16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안되면 될때까지
 
드가자
 
유진 N. 브리즈:내가 미친 소리 하나 해도 될까요?
근력
기준치: 80/40/16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손이 얼얼해질 즈음 마침내 배전함의 잠금쇠를 부수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진 N. 브리즈:열었어요. (손 아프다.)
 
아테나 K. 히페리데:잘했어. 나도 어찌저찌 열긴 했단다. (이 모든 상황이 열받아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다)
 
요한 에를리히:뭔가 찾았나? 스마트워치로 내부 구조를 전송해줘. 탈출에 도움될 만한 물건인지 분석하겠다.
 
유진 N. 브리즈:배전함을 찾은 게 전부인데…… 잠시만요. (자연스레 손을 털고는 배전함을 열어 전력을 공급해본다. 불이 들어올까요?)
 
불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일단 요한의 말대로 스마트워치로 촬영해 전송해볼까요?
 
유진 N. 브리즈:……되는 게 없어. (스마트워치를 이용하여 요한에게 내부 구조를 전송합니다.) 요한, 지금 보냈어요.
 
요한 에를리히:확인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부 사진을 전달받고 나서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어렵게 입을 뗍니다.
 
요한 에를리히:그 장치는……. 아래쪽에 긴 플러그가 있을 거다. 끝이 날카롭고 굉장히 긴 모양이 맞나?
 
확인해 보니 요한의 말이 맞습니다.
 
유진 N. 브리즈:예, 맞아요. 어떻게 할까요?
 
내용을 전달하자 요한은 더욱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합니다.
 
요한 에를리히:……그건,
…….
 
설명하기 어려운 건지 답잖게 한참이나 망설이네요.
 
유진 N. 브리즈:……요한?
 
아테나 K. 히페리데:뭔데 말을 못 하나요? 탈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있다면 어서 설명해주세요.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어요.
 
그는 아테나의 채근에야 겨우 다시 입을 엽니다.
 
요한 에를리히:그 플러그는 엄빌리컬 케이블의 일부야. 비상 에너지 공급장치인데, 동력원이 각성자의 에너지다.
지금 너희 두 사람은 가스 때문에 이능력을 사용할 수 없고, 그 실험실 전체의 봉쇄를 풀 정도로 큰 전력을 일으키려면 아까, 유리처럼……. 플러그에 직접적으로 각성자의 에너지원을 접촉시켜야 하는 것 같다.
…혈액이나, 심장을…….
…각성자가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처럼 보이는군. 봉쇄 때문에 1차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고,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공급하려면 동료나 자기 자신을 다치게끔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 공간에서 나가려면 누군가는 심장이든 어디든 날카로운 플러그 끄트머리를 찔러 넣어 배전함에 혈액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설마?
 
요한이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냉정한 목소리를 냅니다.
 
요한 에를리히:결과만 놓고 말하겠다.
두 사람의 에너지 유량으로 계산했을 때… 한 사람분의 에너지로는 실험실 봉쇄를 해제하는 정도가 가능하고, 두 사람 분의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실험실 자체를 무너뜨리거나 코어를 손상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실험은 완전히 중단될 테고, 저 심장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도 더는 없겠지. 만일 지하가 무너진다면 방위사령부에서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니 파급력도 클 거다. 각성자는 일반인보다 회복력이 강하니 치명상을 입어도 당장 죽지는 않아.
…하지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분명 크게 다치게 될 테고, 그것보다 더한 일이 생길 수도 있지. 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들려준 것뿐이지 너희들이 이런 선택을 하길 결코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내가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아 볼 테니까.
 
하지만 요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혼자서 찾기는 어렵겠죠.
 
제공된 상황만 놓고 보자면, 한 사람이 희생한다면 다른 사람은 안전하게 탈출이 가능하다는 맥락입니다.
 
만일 두 사람 모두 여기서 꺾인다 해도 적어도 유리의 심장과 이 실험실 자체를 파괴할 수는 있을 겁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세상에 퍼뜨릴 역량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죠.
 
유진 N. 브리즈:내 안전이 우선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요한, 다른 방법 찾을 생각 하지 말아요. (오른손목의 단추를 풀고 피부가 드러나도록 소매를 최대한 걷어올린다.) 아테나, 지금 몸 상태는 어때요, 이상 없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요한의 설명에 내내 침묵하고 있다가 답했다. 어두운 음성이었다.) 타박상 때문에 여기저기 쑤시긴 하지만 거동엔 문제 없어.
브리즈. 너 무슨 생각 하니?
 
유진 N. 브리즈:(재킷을 입은 채로 소매를 걷어올리기란 역시 무리였을까. 인이어 너머로 음성이 들려오는 동안 조용히 재킷을 벗어 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올렸다.) 무슨 생각 하긴, 어떻게 하면 당신을 여기서 내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하지.
한 사람 분의 에너지라면 봉쇄가 해제된다고 했잖아. 움직일 수 있다니 다행이네. 빨리 일어나서 나갈 준비나 해. 요한, 봉쇄 해제에 걸리는 시간은 예측 가능해요?
 
아테나 K. 히페리데:하? 나더러는 행동하기 전에 상의 좀 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더니, 정작 너는 네 맘대로 결정내리고 실행까지 하려는 거니?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케이블을 꽂을 준비를 하고 있겠군. 케이블을 들고 있을 그를 상상하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이마를 짚는다.)
 
요한 에를리히:…… 한 명분의 에너지라면 방화벽을 해제하는 데 1분에서 3분 정도 걸릴 것 같다.
 
유진 N. 브리즈:내 몸에 대한 상의는 나하고 끝냈어요. 실행하고 통보한다면 당신이 싫어할 게 뻔한데 행동하기 전에 예고하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나?
 
아테나 K. 히페리데:브리즈! 너 진짜― (격앙된 목소리로 유진을 부르려다 멈춘다. 기실, 아테나는 희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과정 속에나 남을 고귀한 죽음 따위보다는 무수한 고난을 밟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해 성공의 깃발을 널리 휘날리는 쪽을 원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발판이 되어주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유진이 먼저 희생을 자처하니 저로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너 죽을지도 몰라.
 
유진 N. 브리즈:(누가 죽는다 그래, 나는 여기서 안 죽어. 평소의 그라면 그리 대답하였을 것이다. 제게 돌아오는 무게 실린 말을 들으며 유진은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말을 하기 전 매번 생각에 잠기는 그에게 있어 긴 침묵은 긴 고민을 의미한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무엇을 하겠다 그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던가.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숨을 고르듯, 옅게 내쉬고는 나지막이 답을 보낸다.)
그런 걸 두려워했어?
 
아테나 K. 히페리데:(내가 두려워하는 게 있을 것 같니? 마찬가지로, 원래의 아테나 히페리데라면 망설임없이 했을 말. 그런데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지 온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와중에 이능력조차 쓸 수 없고, 케이블이 제대로 작동할지도 확신할 수 없다. 아테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대담하고 자신감이 넘쳤으나 그건 자신이 쓰고 부릴 수 있는 자원이 뒷받침되기 때문이었다. 유진 브리즈는 한 번 쓰고 버릴 장기말로 취급하기엔 아까운 존재였다. 그는 현명하고 유능했으며…… 무엇보다 제 페어였다. 그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아니, 사실상 자신이 그를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만이 아니니까.)
(아테나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매무새를 정리하여 언제든 벗어날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인이어를 타넘는 목소리는 고요하고 냉정했다. 그는 결코 약한 티 내는 법 없었으므로.) 아니.
후회하지 않니?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유진 N. 브리즈:(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년 전의 그날에도,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후회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당신을 살리는데 후회는 없어.
 
아테나 K. 히페리데:…….
다시 보자. (말하는 바를 반드시 지키는 아테나였다. 그러니 짧은 한 문장에 담는다. 당신이 스러질 자리 여기가 아니라고. 우리의 끝이 지금은 아니리라고.)
(통신은 거기까지였다.)
 
언제나 그랬죠.
 
이게 정말 선택일까요?
 
상황에 내몰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이토록 어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 도대체 선택지가 맞단 말인가요?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다 무슨 의미인가요?
 
릴리안 웨즐리는 말했죠.
 
릴리안 웨즐리:「저도 부끄럽지 않도록…… 기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요.」
 
우스운 일입니다. 누가 동경 같은 걸 하라고 영웅 행세라도 했나요?
 
유리 모하에:「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지. 내가 이런 소리 했답시고 네가 당장 어디 날 고발할 수도 있고.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스러운' 말 몇 마디 했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드네.」
 
유리 모하에의 말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어떻게 되었죠? 포르말린에 담긴 실험 표본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았나요?
 
체제가, 사상이, 신념이 돈이라도 준단 말인가요?
 
아테나라고 해서 대단한 혁명 투사가 되려고 세상에 태어났겠나요?
 
그는 그저 사라진 아버지를 찾고 싶었고, 그것을 추적하다 망명 정부에 투신했을 뿐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결말이 우리가 쌓아 온 선택의 결과라면 세상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가요?
 
세상을 구성하는 어떤 언어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 이 얼마나 기만적인가요…….
 
유진 N. 브리즈:(이 모든 것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할 뿐이라.)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심호흡을 하고는 이를 악물고 케이블 끝을 오른팔에 꽂는다.)
 
날카로운 케이블이 오른팔을 꿰뚫습니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눈물 같은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합니다…….
 
눈 앞은 눈물일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흐리고, 세상은 붉게 소용돌이칩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선뜩히 남아 가슴을 쾅쾅 두들겨 발기는 풍경이 있습니다.
 
세상에 찬란한 것들은 모두 그것의 모사품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불로 빚은 여름처럼 숨차게 아름다웠던 계절,
 
흐드러지는 수선화가 발끝을 적시던 날들.
 
믿지 않는 하느님, 만약 정말 당신에게 의지나 사고가 있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었다면,
 
우리 시간은 왜 그날 그때로 고정되지 않았을까요.
 
아테나는 왜 떠날 수밖에 없었고, 유진은 왜 그걸 붙잡지 못했을까요.
 
서로 온전히 이해할 수도 함께할 수도 없다면 우리 사이에 머무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러나 무언가 넘실거립니다.
 
치열하지 않게, 세차지 않게, 거센 소리가 나지 않게.
 
눈물처럼 품 안으로 번지는 온도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달군 찻잔처럼 가볍게 따스하다가, 급기야 절절 끓는 불꽃이 되어 심장을 가르고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진은 눈을 뜹니다.
 
사방이 밝습니다.
 
실험실에 전력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른팔에 꽂힌 엄빌리컬 케이블에서부터 가장 뜨거운 불꽃이 레몬빛과 푸른빛으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힘이 빠졌던 손끝에 감각이 돌아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지독하게 느리거나, 작거나, 너무나 연약하게 느껴집니다.
 
불현듯 강제로 고개가 돌아갑니다.
 
무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전부 부수고 던지면서,
 
콘크리트와 강철을 찢어 발기면서,
 
보석 같은 돌멩이를 흩뿌리면서,
 
다가오는 것은 옛 신화 속 신의 이름을 가진 자.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은 밤하늘의 장막 같고, 시리도록 새파란 홍채는 번개처럼 빛납니다.
 
그의 심장 위로 당신의 것과 똑같은 빛깔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일순 온 감각이 그에게로 이끌립니다.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무서울 만큼의 존재감이 파도처럼 밀어닥칩니다.
 
오만하고 냉막한 여자. 두 정부의 이중 스파이. 언젠가 당신에게서 미련없이 등을 내보이고 떠나갔던……
 
가장 정순한 에너지를 섞고 나눈 당신의 파트너.
 
마침내 그가 당신 앞에 도달하는 순간,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처럼 꿰뚫는 깨달음.
 
이게 각인이구나.
 
당신의 일부가 내 것이 되고, 나의 일부가 당신에게로 나눠지는 감각.
 
동조율 99%. 그가 숨쉬고 움직이며 감정을 느끼는 매 순간이 생생히 전달됩니다.
 
피가 멎고 상처가 회복됩니다.
 
심장이, 같은 방향에서 뛰는 맥박이,
 
이제는 속도와 횟수마저 맞추어 작게 쿵쿵거립니다.
 
방화문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봉쇄된 통로가 다시 열립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여기 있었구나, 브리즈. (타오르는 불길이 당신의 얼굴을, 케이블이 꽂힌 팔을 비춘다. 푸른 홍채가 불길만큼 번뜩이고 있었다. 방화벽이 올라가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당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감정이 치솟고 가슴이 빠른 박자로 뛴다.)
(당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오른팔에 꽂힌 케이블을 단숨에 빼냈다. 레몬빛과 푸른빛의 불길에 감싸인 상처가 곧바로 아물어간다.)
나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유진 N. 브리즈:(가슴이 뛴다. 가빠졌던 호흡이 서서히 돌아오고 주변의 빛에 적응된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케이블을 쥐고 있던 왼손이 어느샌가 케이블을 욱여넣었던, 이제는 사라진 상처 부위를 매만진다.) ……아테나?
(이를 악물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참아내던 고통은 어디로 갔는가. 네 이름을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실없이 터져나오는 웃음에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신이 후회할 줄도 알았어?
(너를 향해 비어있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치 잡고 일으켜 세워달라는 듯.)
 
아테나 K. 히페리데:심장에는 안 찔렀구나. 잘했어. (당신의 오른팔을 가볍게 툭 두드린다.) 의식 잃고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너는 키가 지나치게 크니까 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번쩍 안아서 들고 갈 수는 없거든.
(유진이 앉은 자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선의 높이가 맞는다. 그를 빤히 바라본다. 하얀 머리칼, 안경 너머의 밝은 노란색 눈동자, 눈가와 목덜미의 점. 이미 잘 알고 있는 면면인데도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수첩을 처음으로 펼친 듯 새롭게 느껴진다. 당신의 존재가 제 안에서 해체되고 재정립된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얼마나 멀리 떨어지더라도 당신의 위치와 감정을, 맥동하는 심장의 소리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각인이다.)
그렇게 될 것 같았어. (먼저 몸을 일으켜 오른손을 붙잡고 당신을 힘주어 당겼다.) 혼자 두고 가면.
 
유진 N. 브리즈:심장을 찌를 용기도 없고 당신만 혼자 살려보낼 만큼 숭고한 희생 정신도 없었거든. (거짓말이다. 못 따라갈 각오도 하고 있었다.)
(네 손길을 따라 반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것 참 감동이네. 우리 아가씨께서 이제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아셨나 봐.
준비되었어요?
 
아테나 K. 히페리데:(거짓말임을 눈치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한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다시 만났으니까.)
아직도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거니? (픽 웃는다.) 너한테도 내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유진 N. 브리즈:오, 아가씨가 싫으면 말해요. 호칭을 바꿔드릴 의향도 있으니까. 공주님이라 불러드릴까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당신을 따라간다 했을 리 없잖아. (네게 시선을 맞추고는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안 그래요?”)
 
아테나 K. 히페리데:됐거든! 이 철부지 도련님 같으니. (등짝을 때릴까 하다가 당신의 오른팔을 꽉 쥐었다 놓는 걸로 대신한다.)
그렇다면 가자꾸나. 난 언제나 완벽하게 채비되어 있으니까.
 
더는 작별 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 없는 밤에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당신 존재 하나쯤은 남기고자 합니다.
 
우리가 입속에 단단히 묶어둔 말들, 그 말들이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완결을 맺어야 하나요?
 
우리가 써내려갈 발자취가 여기에서 끊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들이 남기고 간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껴안고 떠납시다.
 
불길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네가 있는 곳을 택하겠어.
 
이 순간 어려서 끔찍한 오늘과 참신할 것 없을 내일에 너를 홀로 두진 않겠어.
 
그러니까, 일어나자.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어.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기로,
 
우리는 그저 서로를 구원하여 카사블랑카를 벗어날 거야.
 
그것만으로도 벅차잖아.
 
1만 km를 달려서, 저 사막을 넘어서,
 
감미로운 볕이 피부를 적시고, 발목을 데우는 바닷물은 고요하고 우묵한 소음을 내면서 우리를 간지럽히던 여름으로 돌아갈 거야.
 
베인 상처가 완전히 나았습니다.
 
마지막 틈새에서 레몬색 에너지가 잉걸불처럼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르다 잦아듭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두 사람의 무대입니다.
실험실을 부수거나 유리의 심장을 되찾고 자료를 챙기는 등,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유진 N. 브리즈:가죠.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를 해방시켜 드리러. (언제나처럼 시작을 알리듯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이라면 실험실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테나 K. 히페리데:(익숙한 신호탄이다. 페어가 곁에 있고 힘이 되돌아온 지금,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입가에 다시금 특유의 오만한 미소가 걸린다.)
(그리하여, 아테나 역시 익숙한 말을 건네며 바닥을 향해 손을 내린다.) 설계할 테니 따르렴.
아라크네의 실 Roll
기준치: 90/45/18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새파란 빛을 발하는 거미줄이 손끝에서부터 재빠르게 뻗어나가 바닥을 덮고, 벽을 감싸고, 심장을 옥죄는 유리관을 옭아맨다. 방위사령부의 지하가 모두 그의 설계 하에 있다.)
 
유진 N. 브리즈:(렌즈 너머로 공기의 흐름을 찾아본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사방으로 펼쳐지는 푸른 설계에 따라 손을 움직여 미세하게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 Roll
기준치: 90/45/18
굴림: 3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자, 마음껏 날뛰어보라. 지금 이 곳이 바로 나의, 우리의 무대일지어니.)
 
지하를 뒤덮은 파란색 거미줄 위로, 바람이 붑니다.
 
아테나의 우아한 설계 위로 유진의 유려한 구현이 얹힙니다.
 
거미줄이 진동합니다.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실험실에 불어닥치기 시작합니다.
 
미약하게 시작되었던 바람은 아테나의 설계를 타고 나아갈수록 점점 더 거세지고 강해져, 종내는 폭풍처럼 공간을 휩쓸어갑니다.
 
로봇들이 뒤집히고 컴퓨터가 떨어져 박살납니다. 유리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연달아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집니다.
 
삿되고 모욕적인 실험이 자행되던 방위사령부의 지하가 엉망이 되기까지 단 5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선배, 혁명의 구심점이자 최초의 불꽃인 유리 모하에의 심장을 가둔 에너지 코어 역시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녹색 용액이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와 바닥을 적십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X각성자를 만드는 데 이용당하던 심장의 여린 박동이 마침내 온전히 멎습니다.
 
되찾읍시다. 페어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유진 N. 브리즈:(유리의 심장을 챙긴다. 외로운 싸움을 끝내고 이제는 안식처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테나 K. 히페리데:(유진이 심장을 거두기를 기다렸다가 거미줄을 뽑아내어 반파된 에너지 코어를 가루가 되도록 자근자근 깨부순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복이다. 마침내 우리가 혁명의 깃발을 들어올릴 때 완전한 복수가 이루어지리라.)
 
지하를 엉망으로 만든 두 사람은 유리의 심장까지 품에 안고 탈출구로 향합니다.
 
나아가는 과정에서 경비 로봇을 세 번쯤 마주쳤으나, 모두 단번에 해치웠습니다.
 
동조율 99%를 이루어낸 각성자 페어를 가로막을 수 있는 로봇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테나 K. 히페리데:(저 먼발치에 바깥으로 나가는 계단이 보인다. 마지막 경비 로봇을 거미줄로 결박해 넘어뜨리며 우아하게 말했다.) 받아야 할 게 있단다.
 
유진 N. 브리즈:시간을 벌어둘까요? (네 말에 무언가 빠뜨린 게 있는가 잠시 생각하였다.)
 
아테나 K. 히페리데:나 또한 네게 돌려줘야 할 게 있고. (픽 웃으면서 제 귓가에서 페리도트 귀걸이를 빼내어 건넸다.) 카사블랑카를 떠날 때 돌려받겠다고 했잖니.
 
유진 N. 브리즈:(시선이 어느덧 너에게로 향한다. 제 앞에 내밀어진 노란 보석이 박힌 수수한 귀걸이를 바라보다 저 역시 픽 웃고 만다.) 이제 때가 되었네요. 당신이 준 부적 덕에 내가 살았어요. (귓가에 걸린 푸른빛의 귀걸이를 빼내어 네게 건넨다.) 이제 빚은 없는 걸로 하죠. (서로가 서로를 구했으니. 이어 나지막이 웃어 본다.)
 
아테나 K. 히페리데:다른 사람이었으면 인정 안 해줄 텐데, 너니까 특별히 인정해 줄게. (네가 나를 구했기에 나 역시 너를 구할 수 있었다. 사파이어 귀걸이를 끼워넣는다. 비로소 약속의 증표가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오연하게 미소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 됐니?
 
유진 N. 브리즈:――언제나Always.
 
서로를 향해 웃음짓는 그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계단 위를 내달려 지하를 벗어납니다.
 
박명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슬이 반짝이는 수선화는 은가루를 뿌려 녹인 보석처럼 흔들립니다.
 
방위사령부를 이렇게나 헤집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위협사격과 추적이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시민들이 겁에 질려 기상했죠.
 
그러나 바람의 힘을 다루는 이에게 추적을 떨쳐내는 것 따위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따라붙는 헌병대를 가뿐히 피해 도시 외곽으로 이동합니다.
 
저 바깥에 새로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자, 세상의 끝으로.
 
낙진처럼 쏟아지는 저 비를 뚫고 가자.
 
이보다 더한 암실로, 서글픈 화재 속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끝내는 타오르자.
 
이토록 너를 정전시킨 세계에 파도 같은 등불을 켜자.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이 도로 눈을 뜨는 순간이 오면,
 
파사삭 파사삭, 낙엽처럼, 이 끔찍한 나라가, 우리의 이기로 감전될 거야.
 
거기엔 계급도, 사회도, 이데올로기도 없을 거야.
 
우리가 머나먼 자오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후의 우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살아지자, 살아가자.
 
조명은 없어도 좋아,
 
네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늘에도 얼비칠 것이 분명하니까.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도 강력하기에, 누구도 이날의 사건을 무시하거나 묻어 버리지 못했습니다.
 
또다른 사라예보처럼 카사블랑카가 불안하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끝.
 
3부, ‘적도편동풍을 타고 영원으로 가자’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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