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32시간
바깥에서 보았을 때는 안개로 둘러싸인 것 같으나,
막상 안으로 들어서면 드높은 하늘 가운데 구름 몇 조각만이 걸려있는 비옥한 땅이니 구름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하여 운雲국.
이화, 당신이 운국의 왕으로 즉위한 지도 어느덧 8년이 흘렀습니다.
타국과의 소모적인 전쟁 또한 이화가 즉위한 이후로 사라졌고, 운국은 부국하고 강병해졌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어짊을 찬양하고, 그들의 나라와 왕을 사랑하며 충성합니다.
게다가 2년 전에는 공석이던 국서 자리도 다시 채워졌으니 이보다 평화로운 때는 전에도 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속내가 어찌 곪아들어가고 있건 간에 말입니다.
오늘은 오전 일찌감치 대신들과의 회의가 끝났습니다.
낮것상을 들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차, 이화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배이화:(청과 백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하늘을 올려보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문득 고개를 돌린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칼날이 공기를 가르고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집무가 바빠 담을 만나지 못한지도 조금 되었습니다.
마침 여유가 났으니 잠시 연무장에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배이화:(...근래 들어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가. 이리 우연찮게 들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잠시 멈춘 걸음을 돌려 연무장으로 향한다.)
대궐 안쪽에 있는 작은 연무장으로 향하면 검술을 연마하는 담의 모습이 보입니다.
세워둔 허수아비가 거진 잘게 쪼개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네요.
그에게 붙였던 검술 선생이 그의 천재성을 찬사하던 게 그저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궁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화를 보고는 환관들이 허리를 굽히며 물러납니다.
그때 무거운 대검을 휘두르던 담이 새로운 검을 손에 쥡니다.
양손에 긴 검을 든 채 춤추듯 날아오른 그가 칼날을 교차시키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허수아비를 단칼에 베어내어 버립니다.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유려하고 힘이 넘치는 검술입니다.
무예에 무척이나 뛰어난 소질을 보였었지요. 특히나 검술은 당신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신검이란 이명을 얻을 만큼 엄청난 재능이었습니다.
운국에 막 왔을 때의 연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왕자인 당신에게조차 쌀쌀맞게 굴었었지만, 첫 검술 대련 이후 찬바람이 차차 미풍으로 변해 갔었습니다.
햇살을 등지고서 당신에게 검을 겨누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배이화:(담의 뒷모습을 보면 이제야 가끔 걸리던 군자의 미소도 금세 구름에 가리듯 흐려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도 들기 어려운 검을 둘씩이나 들고 춤을 추듯 저리도 가볍게 날아오르는 모습이라니. ...그래, 꼭... 지독히도 그를 닮아서. 검날에서 부는 바람이 제 가슴까지 다 베고 지나갔나. 담을 부르려던 입술이 달싹이다 닫히고 만다.)
허수아비를 바라보던 담이 그제야 당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배이화:괜찮습니다. 내가 그대를 방해한 것이니. ...검술 실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느십니다.
이 담:방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검을 어색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은 한참 미욱한 실력입니다. 과분한 자리에 올랐으니 적어도 제 몸 바쳐 전하를 지킬 만큼은 되어야겠지요. 전하께서도 무예를 배우신 적 있다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배이화:...그대에게 그런 것까지 바란 적은 없는데도. 그대는 그대 한 몸만 잘 보전하면 됩니다. 내 검을 직접 든 지는 오래 되었으나 내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어. (선뜻 다가서서 바닥에 놓인 검을 손에 쥐어본다.) 허나, 걱정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 담:저 홀로 쥔 소망입니다. 전하께서는 귀하신 몸. 칼을 들 일은 웬만해서는 없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잠시 머뭇거리던 시선이 당신의 어깻죽지 즈음을 향한다.) 지난날과 같은 사고가 날 적에 전하를 더욱 중히 보필하고자 함입니다.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과거 이화가 사냥 대회에서 낙마했던 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자신이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이화는 어깨나 허리가 크게 다치고 말았겠지.) 물론, 그런 일은 또 없어야 하겠지만,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니 말입니다.
배이화:(시선이 가닿는 자리를 눈치 채고서야 바로 눈을 마주한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비슷했다. 차마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연을 떠올리다, 사고를 당할 뻔 했었지. ...어린 시절 햇살을 등지고서 내게 검을 겨누던 그의 모습과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렇게 겹쳐 보일 수가 없었는데. 그 너른 품에서 그 날과는 다른 향이 났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 저릴 수가 없어서... 그저 눈을 감아버렸던 것 같다. 대신 다친 당신이 혼자 앓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날의 흉은 당신에게 남았는데, 걱정은 꼭 제게로 향하는 것이 애달파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몸은 비단 그대의 것만이 아니지. 내 것이기도 하니, 또 그런 때가 오면 꼭 그대를 지켜야 해. 나를 지킬 이들은 이 곳에도 많으니.
...아시겠습니까? (마지막 질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층 부드러워져있었다.)
이 담:(내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 기쁘기 그지없으면서도 섧은 건, 그의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알기 때문이겠지. 이화가 이미 먼 곳으로 떠난 전 국서와 저를 겹쳐봄을 모르지 않는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할 터이지. 왕의 처소에는, 왕의 내면에는 아직도 전 국서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으니까. 그럼에도 시기할 수 없고, 왕을 탓할 수는 더더욱 없다. 아픈 이별을 겪고서도 저를 받아들여주고 끝내는 국서로 대우해주는 마음을 안다면 어찌 그러할까. 그러니 제게 내리는 하교를 거부할 도리도 없다. 이화에게 다시금 위험이 닥친다면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여 구하려 들겠지만 적어도 대답만큼은 고분하다.)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러나 저의 몸이 전하의 것이라면 전하가 해를 입기 전 내세울 검과 방패로라도 써 주시기를. 차마 닿지 못한 말이 입 속에 갇힌다.)
이곳에는 어인 일로 들르셨습니까. 조례를 할 무렵인 줄 아온데.
배이화:(온 몸을 내바쳐 왕의 목숨을 구한 공적이라면, 무엇을 달라해도 안겨줄 것인데. 저 하나만 바라보며 어떠한 욕심도 요구도 없이,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하는 이. 이리 달게 구는 이에게 어찌 마음 한구석 쓰이지 않을 수 있을까. 굳게 걸어 잠근 문 틈으로도 햇살 한 줄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노릇이라. 기어이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여전히 곪은 속내도, 눈 앞의 설운 마음도 이렇게 잠시 눈감아 둔다.)
...오늘은 오전 일찌감치 회의가 끝나 주수라를 들려던 참이었으나, 그대가 이리 발걸음을 끌었지.
함께 들지 않겠는가?
이 담:그렇습니까. 근자에는 함께 식사를 할 틈이 없이 바빴지요. (투기나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엿보이지 않던 금빛 눈이 설레임과 기쁨으로 곧잘 반짝인다. 좀처럼 빛 들지 않아 짐승 같던 연의 금안과는 사뭇 다른 점이었다.) 초대해주신다면 감사히 따르겠습니다.
배이화:...근래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지. (금세 빛이 들어 선명하게 반짝이는 금안을 보고 있자면, 가슴께에 고여 있던 것이 다시금 휘몰아치는 감각을 지울 수 없는지라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래, 준비하라 이를테니 함께 갑시다.
예기치 못한 국서의 방문 소식에 궁인들이 바삐 상을 더 채우는 기척이 들립니다.
담은 당신의 곁에 가까이 앉아 희미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낯에서 어딘가 기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배이화:
관찰력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8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담은 날이 갈수록 당신이 기억하던 연과 흡사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 당신의 인식이 그리 변하는 걸까요. 담으로 인해 연이 흐려지고 있다거나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연이 겹쳐보이고, 당신은 묻어두려 애를 쓰던 연심이 다시금 깨어나는 듯한 느낌마저 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금안은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간신히 당신의 정신을 붙잡습니다.
이 담:……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어색하게 제 뺨이나 턱을 문지른다.)
배이화:(...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을 잊은 것인지. 어쩌면 너무 간절히 바라서- ... ...말도 없이 한참을 보고 있었다. 담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그제야 자신이 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저 눈은...) ...아, 아닐세. 내 그대를 신경 쓰지 못한 사이 낯이 상하지는 않았나 하여.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들게.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보다 많은 양의 상이 들어오고, 둘만의 시간을 위해 최소한의 궁인들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물러갑니다.
이 담: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낯이 상할 만큼은 되지 못합니다.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옅게 미소한다) 먼저 드시지요.
배이화:...그래. 많이 들게. 그대가 잘 먹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니. (개중에 고기 반찬을 집어 그릇에 올려주고는 저도 한술 뜬다.)
이 담:(이화가 준 것이니 먹기는 하지만, 채소와 나물이 놓인 그릇에 더 젓가락이 많이 오간다. 그만한 덩치를 유지하면서도 고기를 썩 즐기지는 않는 게 놀라울 따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나라의 대들보이신 전하께서 식사를 잘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는 언제나 과히 적게 드시니…… 걱정이 큽니다.
배이화:(느릿하게 식사를 하는 중에도 담의 수저가 닿는 곳을 유심히 살핀다. ...이런 점도 퍽이나 다른데, 어찌 그렇게 생각했을까. 허나 늘 하던 걱정만큼은 꼭 닮아있어서 수저를 놓기 전에 꼭 한 술을 더 떠넣었다.) ...자, 이러면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겠습니까?
이 담:(그래도 식사 양은 비슷하여 고봉밥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뚝딱 해치웠다.) 이것으로는 부족하겠는데요. 제가 먹는 양의 반만큼이라도 드셔주신다면 좀 더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만. (당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면은 왜 이다지도 똑같은지.)
배이화:(담과 함께 있자면 꼭 쓴 탕약과 다디단 꿀을 번갈아 먹는 것 같다. 입맛이 씁쓸해졌다가도, 염려 어린 다정한 말 한마디가 가슴을 안쪽을 간질이는 기분이 들어서 목소리에 미약하게 웃음기가 묻는다.) ...그대 몫의 절반이면 석수라를 물려야할텐데도.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제 몫을 다 비우고서야 다시 눈을 맞춘다.) 그래, 이제는 되었겠지.
이 담:본디 식사량은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전혀 늦은 때가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한 술씩 더 뜨는 습관을 가져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원체 자주 앓으시니, 이렇게라도 건강을 챙기셨으면 합니다. (궁에서 가장 불이 늦게 꺼지는 곳이 주상의 침소라는 말은 소문을 넘어 공공연한 사실이 된 지 오래다. 어이 안심할 수 있을까. 저와 함께 하지 않았던 수많은 식사에서는 몇 숟갈 깨작거리다 말았겠지. 그래도 이번에는 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고마워 절로 미소가 나온다.) 예. 잘하셨습니다, 전하.
배이화:그대가 이리 가까이서 보필하니 자그마한 잔병도 들 일이 없겠네. ...앞으로는 더 유념할테니 걱정 더시게. (눈에 보일 때나, 보이지 않을 때나 늘 저를 향한 염려와 걱정 뿐인 담의 앞에서는 어째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일이 잦았다.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나선 눈을 마주한다. 그래, 담. ... ...그대가 곁에 있어주어 다행이지. 그대 덕에 놓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니 다행이지.) 그대는 하는 걱정이 너무 많아 염려만으로도 나보다 먼저 병을 살까 외려 걱정이 되어.
이 담:말씀은 그리 하시지만 오늘도 늦은 밤까지 정사에 몰두하실 걸 다 압니다. (쉬이 듣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간언 올리기를 멈출 수 없는 건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은 이화를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는 흔한 고뿔 한 번 앓아본 적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차라리 검술 아니라 의학에 소질이 뛰어났더라면 더 좋았겠습니다. 전하를 막을 수는 없어도 전하의 아픈 곳을 소상히 치료해드릴 수는 있을 테니 말입니다.
배이화:...담. 국서께서 하시는 염려는 잘 알았습니다. ...허나, 나랏일이라는 것이, 사사로이 신경 써야 할 것 또한 한둘이 아닌지라.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괜히 마음이 뜨끔해져 손등을 토닥이던 손이 서서히 멎는다. 그럼에도 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라 손을 들어 뺨으로 가져간다. 염려를 조금이라도 지워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그대가 의학에 소질이 뛰어났어도 좋았겠지. 이리 한시도 눈 떼지 않고 치료하려 들 터인데 낫지 않을 병이 있겠는가. (...그래, 그랬다면 그대와 연을 두고 덜 헷갈렸으려나. 겹쳐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더 자주 상을 같이 들어야 그대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잠재우겠지.
이 담:(뺨에 닿는 손길에 눈을 반쯤 내리감는다. 그 손길을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닿고 있어도 감히 거세게 쥘 수 없고, 원해도 감히 원한다 말할 수 없다.) 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가져서도 안 되나, 정치란 것이 국왕 혼자서만 하는 일이 아님은 압니다. 홀로 모든 짐을 지지 마시옵고 신하들과 함께 나누소서. 태평하기 그지없는 시대에서 전하 홀로 어깨가 지나치게 무거워 보입니다.
(구름처럼 밀려온 걱정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다가도, 식사하는 날이 늘어난다면 이화를 볼 시간도 많아지리라는 사실에 금세 기분이 들뜬다. 이런 저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만 어찌하겠는가.) 저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만……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배이화:...그대의 말이 맞아. (제 것이 다 가리울만큼 크고 투박한 손이나 조심스러운 동작이나 온기는 꼭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제가 놓으면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손에 쥐면 금방이라도 가질 수 있으나, 차마 있는 힘껏 잡지도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는 것이 꼭 지금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눈가를 쓸어내면 힘이 풀린 손이 제자리로 떨어진다.)
...무리라니. 제 부군에게 낼 짧은 시간조차 없는 이가 어디 있겠어. 그대가 또 내 걱정으로 혼자 속앓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간을 내면 되겠구나.
(이리 사소한 것에도 금세 바뀐 담의 낯빛에 또 성큼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평온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던 그때,
바깥에서부터 이화를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외침과 함께 대신 하나가 궁인들을 밀치며 처소로 들어옵니다.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켜서고, 병조판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이마를 바닥에 바짝 붙인 채 절을 합니다.
병조판서: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전하……
해원국에서 전쟁을 선포했사옵나이다.
이미 수천의 군대가 운국을 향해 진군하고 있으며, 수 일 내로 국경에 들이닥칠 것이라 하옵니다. 게다가, 거기다…….
병조판서의 온몸이 공포와 당혹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이 보입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전쟁이라니요. 최근 해원국에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첩보 또한 없었습니다.
전쟁을 위한 군사나 물자는 대관절 어디서 준비했단 말입니까?
대신은 뒤엣말이 남은 모양이지만, 고개를 들어 담을 바라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다시 숙입니다.
이 담:(평온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굳어버린 낯빛으로 병조판서를 응시하다가 이화를 돌아보았다.) …… 제가 자리를 비켜드리는 것이 편하시겠습니까.
배이화:(...... 해원에서 어찌. 굳은 얼굴이 담에게로 돌아간다.)
...아닙니다. 국서께서도 들으시지요. 그대 또한 이 나라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이 담:(눈을 조용히 내리깔아 무언으로 긍정하였다.)
병조판서:(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곤, 조금 더 초조한 기색이 되어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또한, 전쟁을 선포한 이는 해원국에 새로이 즉위한 금왕이온데…… 그가 돌아가신 전 국서, 연 마마라는 말이 있나이다.
연은 당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그 장례까지 치루는 것을 당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대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까요? 대체 어떻게요? <이성> 판정 (0/1)
배이화:
SAN Roll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4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이화:....그럴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평온을 가장하려 애를 쓴 얼굴까지도.) ...연은, 연이 그럴리가.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이겠지.
해원국이 운국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며, 이 땅에 다시금 끔찍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만은 분명합니다.
연에 관한 건 갑작스러운 소식 탓에 덧붙은 소문일 뿐이겠죠.
당장 대신과 장군들을 소집해 전시 상황에 돌입하고, 운국이 입을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배이화:(...감상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흔들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터질듯이 뛰는 심장을 누른다. 입술을 꾹 물었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당장 대신들과 장군들을 모두 소집하게.
이화가 소집령에 대신들이 부리나케 집결합니다.
대개는 이 일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며 해원국에 관한 분통이나 적개심,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고,
그들이 이쪽을 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원국을 쳐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 또한 있습니다.
운국과 해원국이 벌였던 기나긴 전쟁의 역사를 아는 노신들은 과거의 답습에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덜덜 떨 뿐 성급히 말을 보태지 않습니다.
좌의정: 전하! 해원국은 이제까지 운국과 쌓아왔던 신의를 배반한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옵니다. 부디 엄히 다스리소서.
금위대장: 전하, 소신에게 병사와 말을 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출정하여 해원국을 박살내버리고 다시는 운국에게 칼을 겨누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주겠사옵나이다!
대소신들이 한데 입을 모아 조정이 떠나가라 외칩니다.
그들 모두가 적개심과 분노에 불타고 있습니다.
전쟁을 이미 겪었던 이들이라면 해원국에 의해 가족이나 벗들을 잃은 경험이 있어 그간의 화평 탓에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리는 것일 테고,
전쟁을 겪지 못했던 이들이라면 그간 운국과 해원국이 맺었던 친교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일 텝니다.
지나치게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설득
| 기준치: |
40/20/8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해원에 새로이 즉위한 금왕이 연이라, 연, 연... 어째서. 대소신들의 아우성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름 하나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었다. 잠깐이라도 그 이름을 떨쳐내고자 팔걸이를 소리나게 짚는다.) 그대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가 아니나, 우선 진정하시게.
...마음만 성급해서는 될 일도 그르치기 십상이니. 어찌 이뤄낸 태평한 시대인데 한 순간에 떠나보내서는 안될 일이지. 아니 그런가?
과열되었던 대소신들이 이화의 말에 온당하다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잠시나마 평정을 되찾은 듯하나, 해원의 전쟁 선포가 여전한 이상 이 열기를 영구히 식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 중 몇이 온당하고 효율적인 방안을 제시하니, 그것들을 택해 당장의 사태를 해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배이화:(다소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오가는 방안들을 유심히 듣는다. 어느 하나 사소하게 흘려보내지 않고, 가장 온당한 방안을 추려낸다.) ...... 그래, 우의정과 병조판서의 방안이 좋겠소. 당장 전시 상황에 돌입하고 날이 밝는대로 시작하세.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앗으려 임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지키려 임하는 것임을 명심하게.
회의는 외교적인 문제가 끝난 이후엔 전술 회의로까지 이어져, 모든 회의가 끝난 이후엔 벌써 달이 휘영청 떠오른 이후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몰두하였더니 무거운 피로가 몰려옵니다.
배이화:(마치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한 달밤 아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침전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던 중, 이화는 늦은 시간에도 담의 처소에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급박하게 자리를 비웠으니, 원한다면 담의 처소에 들러 잠깐 인사를 나누는 것도 좋겠네요.
피곤하다면 그냥 처소로 돌아가 잠을 청해도 좋습니다.
배이화:(저 멀리 보이는 빛에 잠깐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면, 우스운 일이려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빛을 찾아 걸을 수 밖에 없듯이 마치 홀린 것처럼 담의 처소로 걸음을 옮긴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담의 처소로 향하면, 이화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담의 모습이 보입니다.
방 안에는 전쟁과 전술, 해원국에 관한 서적들이 온통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왕자로서 최소한의 독서는 챙기던 연과 달리 자연과 어울리거나 무예를 연마하길 더 좋아하던 담이건만, 어쩐 일일까요.
배이화:(...그래, 그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면 그 자리에는 당연하게도 담이 있다. 어째서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도 사그라들어서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담. 어찌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어.
이 담:(뒤늦게 기척을 눈치채곤 서둘러 일어나 예를 갖춘다.) 전하. 송구합니다. 전하야말로 어인 일로 침소에 들지 않으시고…….
배이화:...미안해 할 것 없어. 회의가 끝나는 대로 처소로 돌아가는 중이었지. ...늦은 밤까지 켜진 불을 걱정하던 건 그대였는데 말이야. (널브러진 서적 한 권을 손에 든다.) ...내 또 괜한 걱정을 얹어 준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이 담:(그제야 작게 아, 소리를 내며 책을 정리하려 든다. 영 어설픈 손짓이지만.) 낮의 일을 듣고서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던지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책을 무작정 뒤져보는 것밖엔 답이 없더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외려 전하께서 마음이 어지러우실까 걱정이 됩니다.
배이화:차라리 그대를 먼저 물릴 걸 그랬어.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고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지은 웃음이 호롱불에 반쯤 그늘져 더욱 서글퍼 보이기 전에. 앞선 두통으로 느슨해진 이성 때문인가, 평소라면 고개를 저은 데서 그쳤을 것을 느릿하게 다시 입을 뗀다.) ...역시 그대에게 염려를 끼쳤구나. 겨우 그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순간에 지워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어.
(함께 그린 청사진을 혼자 남아 이어가려 했으나, 장본인이 지우고 싶어한다면, 어찌 해야할까. 빛이 일렁이는 담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안에 올바른 답이라도 있다는 듯이.)
이 담:아닙니다. 병판이 가져온 소식이 어찌 그런 내용이리라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누구보다 가장 착잡한 사람은 바로 이화 당신임을 안다. 그림자가 진 덕에 이화의 옆얼굴에 번진 표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굳이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거나 호롱불을 들어올리지는 않았다. 과거에 잃었던 이를 떠올리는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싶지 않아서.) 무얼 그리고 계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배이화:(눈꺼풀이 느리게 닫힌다. 가라앉는 속눈썹이 낯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운과 해원의 끝없는 평화를 그렸지. 원도 한도 모두 파도에 쓸려가기를.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오랜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태평한 시대를 말이야. ...비록 누구 하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평화라 해도, 그것이 영영 이어지기를 바랐다. 허나 이리 쉽게 끊어지리라 생각지는 못했구나.
(여운을 남기듯 느릿하게 뜨인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다시금 담에게 머문다.) ...그래, 그대는 원하는 답을 찾았을까? 그저 떠오른 생각도 좋아. 무어라도 좋으니 편히 말하거라.
이 담:(이미 죽었다던, 저와 똑같이 생겼다던 전 국서와 함께 그린 평화일까? 아. 불경한 상념을 해서는 안 되는데.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티를 내지 않으려 무표정을 유지한 채 조용히 답했다.) 전하께선 분명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위기 또한 언젠가는 지나갈 구름 한 자락일 뿐. (할 수 있는 건 허상처럼 속 빈 위로뿐이다.)
…… 저의 미력한 생각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시선을 떨어뜨린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해원은 운국뿐이 아니라 다른 국가와도 주기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고서야 필시 전쟁을 통해 얻으려는 다른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들불처럼 일어난 전쟁은 또한 들불처럼 가라앉기 마련. 심성이 급한 자들이니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면 허점을 보일 겁니다. 어릴 적부터 싸움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개개인이 우수한 병사들일 것이고, 따라서 정석적인 싸움보다는 함정이나 교란하는 계책을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리라 봅니다.
배이화:(미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술 한잔에 흐린 시야라면 몰랐을 것을. 저도 모르게 눈에 오래 담다 보니 그의 마음에 낸 상처도 눈에 들어온다. 나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아무런 말없이 다 듣고 나서야 느리게 손을 뻗어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긴다. 상념을 헤집으려 했던건지, 작은 위로를 건네고자 했던건지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해 지나간 자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이 짧은 시간에 알아낸 것이 이 정도라니 놀랍구나. 이를 미력하다 말하다니. 담, 그대 또한 회의에 들었으면 좋았을걸.
운국의 웬만한 이들보다 해원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문득 떠오른 질문에 목이 메어 잠시 입을 닫았다. 차마 마주한 얼굴로는 물을 수 없어 숙인 고개가 담의 가슴께에 기대어진다.) .........
...병조판서가 말한 소문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가.
이 담:(머리칼에 닿는 손길에 내리깔려 있던 눈이 조금 커진다. 상처에 바닷물이 닿은 것처럼 쓰라린 마음에 봄볕이 내리앉는 듯하다. 그래,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어찌 슬퍼할 수 있겠는가. 상실의 고통에 누구보다 허덕이고 있을 이는 바로 당신인 것을……)
국서가 어찌 정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될 일입니다.
(기대어 오는 이를 가만 내려다본다. 고개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운데 입술 바깥으로는 어찌 그리 무거운 질문을 건네는지. 일순 한몸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막혀 온다. 그럼에도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다.)
전 국서 마마의 부활이 사실이건 낭설이건, 그분을 자처하였다는 건 곧 전하께 원한을 품었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벌였음이겠지요. 그 명분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모순을 짚어야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우리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을 겁니다.
담의 낮은 목소리가 아스라한 과거를 불러일으킵니다.
먼 옛날 나누었던 대화가 어렴풋 뇌리를 스칩니다.
어린 나이에 반강제적으로 적국에 내던져졌던 연은 오래도록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는 선물도 고사하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거나 품위없는 행동을 하는 등 엇나가기만 하여 운국의 미움을 샀지요.
그러나 이화 당신이 막았습니다. 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신 애쓰고 화를 입지 않도록 상세히 살폈습니다.
그 봄처럼 다정하고 따스한 성정에 마침내 연도 감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 내어준 마음이 연심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고, 마침내 만난 지 6년만에 혼인을 올리게 되었지요.
혼인 전날 밤 두 사람은 약조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 이후 연은 온전히 운국의 사람으로 녹아들었습니다.
만약 연이 당신에게 원을 품었다면, 당장 그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화와 연, 단둘이서 은밀하게 나눴던 이야기.
어떻게 지금 해원국의 왕으로 즉위한 가짜가 그 대화를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연이 정말 되살아나기라도 한 거라면…….
담의 부름에 생각에 잠겼던 정신이 깨어납니다.
배이화:(마치 전생처럼 아스라이 멀었으나, 여전히 어제와도 같이 선명한 기억에 혼탁하게 흐려졌던 눈동자가 서서히 돌아온다.) ......아.
...미안하구나.
(...그래, 분명 그리 약조 했었는데. 그대를 얻는 대신 내 모든 것을 주겠다 약조했는데. 그대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었는데. 연, 당신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음에도 나는 어찌하여, 어찌...... 생각이 멈추지 않고 꼬리를 무는 것은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내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그대를 봤어. 그대의 마지막에 내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당신이 정말 살아나기라도 한 거라면.... 그때는.) ...그래, 원한. 그 명분을 먼저 짚어야겠지.
담의 이야기 중 몇은 아까의 회의에서 현명한 자들이 내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며, 어떤 회의에서도 나온 일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운국의 사람들은 해원국과의 지나치게 오래된 적대 관계 탓에 그들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평화로운 시대를 누린 이들은 그들을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담이 내어놓은 전술들은 해원국과 그 성향을 완전히 꿰뚫어봐야만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담: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어깨를 감싼 손길은 온도와 크기 모두 연과 다를 바 하나 없다. 당신을 향한 다정함조차도.)
배이화:...괜찮, 괜찮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쉰다. 닮았다. 어쩜 이리 닮았을까. 누구보다 저를 먼저 생각하는 다정함조차. 괜한 걱정도 상처도 주고 싶지 않은데, 자신만 그 자리에 있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작 무너진 선이지. 지금의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 미묘하게 유지하려던 거리도 서서히 무너진다. 그저 기대어 있으면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을까 해서. 담에게 배인 드넓은 숲 내음이 마음을 틔워줄까 해서.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언제고 괜찮아야지. (겨우 입꼬리를 들었다가 놓아버린다.)
이 담:…… 사람은 무쇠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백성들은 언제나 굳건하고 단단한 왕을 바랄지 모르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전하의 안위와 행복만을 바랍니다. 그러니 저의 앞에서까지 억지로 괜찮은 척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괴로우면 괴롭다, 힘들면 힘들다 터놓아 주십시오. 전부 들어 드리고 질 수 있는 거라면 함께 나눠질 터이니. (마음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어도 국서와 왕으로서 의지해달라 바랄 수는 있지 않은가.)
배이화:('일말의 빈틈없이, 굳건하라, 너는 그 자체로 나라이니. 절대로 무너지지 말아라.' 평생을 그리 살았다. 허나, 한 나라를 국운을 짊어진 이에게 물러도 좋다. 그저 한 인간이어도 좋다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 ...오로지 혼자, 혼자였을 때에 늦은 밤 홀로 남은 등잔 불 아래, 그 검은 그림자에 얼마나 많은 것을 삭혔던가. 해가 떠오르면 빛에 가리어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겼던가) ...감히 쉽지 않은 말이지.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눈가를 덮는다.) ...허나, 담. 그대의 말을 들으면 정말 그래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한 여인으로 그리 존재해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리해서는 안되는데, 그래. 감히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이 담:전하께서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당신의 망설임에 불을 붙이듯, 흔들리는 불꽃을 부채질하듯 그가 속삭여 온다.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누가 지존에게 오만방자하단 평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전하는 이미 너무도 많은 짐을 떠안고 계십니다. 짓누르는 중압감과 부담감을 저에게만큼은 풀어내셔도 됩니다. 저희가 함께 하는 시간은 길지 아니합니다. 이 잠깐 동안이라도 전하가 편해지셨으면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뜬 달이 구름 속으로 숨어드는 찰나만큼이라도……) 그 누구도 보는 눈 없는 이곳에서만큼은 저 또한 국서 아닌 한낱 사내일 뿐이니.
배이화:(허리에 감기는 단단한 팔과 한층 가까워진 온기에, 짧게 들이킨 숨을 느리게 뱉어낸다. 눈을 덮은 손은 꼭 마른 가지같아서 가리울 잎사귀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묻어두려 애쓰던 것이 사이마다 고개를 내민다. 불빛에 고스란히 물들어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면, 도망칠 수도 없어진다. 지금이라면. 자신만 한걸음 물러나면, 담 역시 놓아줄 것이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 않다. 그를 혼자 두고 가고 싶지도 않다. ...우스운 일이지. 참으로 어리석다. 그럼에도 이 찰나의 순간은 구름이 가리워주지 않으려나. 그런 헛생각에 잠긴다. 뻗은 손이 뺨을 스치고 눈가를 어루어 만진다.)
...누구도 알지 못할만큼 아주 짧은 시간이라면. 그 동안만 이리 있어줘. 구름이 달을 가리는 찰나만큼, 그 짧은 밤 동안만 이리 안아줘.
이 담: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른 가지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한 손에 감싸고, 반대편 팔로는 얄쌍한 허리를 온전히 껴안아 제게 끌어당긴다. 저의 왕에게서는 당당히 서 있으면서도 언제든 부스러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연약함이 느껴진다. 금세라도 거꾸러져 아주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왕에겐 잠재되어 있었다. 저는 뒷배랄 것도 권세랄 것도 없다. 오로지 전 국서와 닮았다는 외모 하나만으로 보통이었다면 평생 꿈도 꾸지 못했을 자리, 당신의 곁에 섰다. 그렇다면 이미 떠나고 없는 이를 대신하여 당신을 힘껏 지탱하고 받쳐주고 싶다. 당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구름이 한참이고, 한참이고 달을 가두어 풀어주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면, 저는 발칙하고 험흉한 자인 걸까……)
배이화:(...가득 들어차는 숲 내음. 그대로 눈을 감으면 어두운 밤, 빛 하나 없는 숲 속에 남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외롭고 홀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대가 품에 있으니까. 든든한 나무가 되어 온전히 자신을 받쳐주고 있으니까. 처음 그대를 곁에 두고자 마음 먹었던 것은 연과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하나뿐일, 유일했어야 하는 반려를 너무나 닮아서 눈 닿는 곳에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국서로 받아들인 것은 그대가 나를 구했기 때문이지. 그 목소리로 나를 애타게 불렀잖아.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등불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야. 팔을 뻗어 목을 끌어당겨 빈틈없이 안는다. 구멍 난 가슴에 시린 바람이 들지 못하게, 불안감의 불씨를 키우지 못하도록.)
(...운은 온통 구름으로 싸여있다. 손을 놓기 전까지 흩어지지 않는 구름이 있다. 그대에게 말로 차마 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가슴에 품은 비밀은, 달은 여전히 구름에 싸여있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어찌 됐을까. (아주 나지막해 힘을 잃은 목소리가 흩어진다.)
담은 그저 말없이 당신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을 뿐입니다.
그런 가정은 하지 말라는 듯이. 이미 저는 당신 곁에 있으니 잃을 일 없다는 듯이.
하지만 당신은 이미 가장 소중했던 반려를 한 번 잃었습니다.
구름 속에 안주하고 싶어지면서도 그리할 수 없는 건, 지나치게 닮은 외모가 자꾸만 떠나보낸 이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일 텝니다.
그가 언제까지 당신 가슴에 난 구멍을 막아줄 수 있을까요.
해원국의 병사가 운국의 국경에까지 당도하고, 운국은 담과 우수한 장군들의 전략과 전투로 조금씩 승기를 거머쥡니다.
그러나 해원국의 병사들은 특유의 근성 탓인지, 혹은 알 수 없는 기묘한 조화 덕인지 전멸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살아나며, 전의를 잃을 법한 상황에서도 목청껏 해원국의 승리를 외칩니다.
그 탓에 전쟁은 승리와 패배를 반복해, 결국 이전처럼 치열한 상황을 유지하는 판국입니다.
장군:전하! 전쟁이 길어지니 탈영병이 늘어나고 병사들의 사기가 위축되나이다.
전하께서 걸음해주시어 잠시나마 병사들을 위로해주신다면 병사들에겐 크나큰 기쁨이 될 것이며,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아깝지 않다 생각할 것이옵니다.
배이화:...그래. 과연 장군의 말이 옳소. 운의 모두가 기꺼이 한 몸 바쳐 나라의 끝을 지탱하고 있는데 과인이 그들을 가만 지켜 보고만 있어서 되겠는가. ...출정을 준비토록 하라.
결국 출정을 결심하고 채비를 끝내둔 전날 밤.
배이화:...국서께서 말인가. (붓을 내려두고 고개를 끄덕인다.) 들라 이르시게.
이 담:전하. (사뭇 진지하게 굳은 낯빛으로 안으로 들어선다.) 내일 친정하신다 들었는데, 진실입니까?
배이화:(흔들리는 등불에 비추어도 눈빛만은 굳건하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 담:(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전하. 그렇다면, 그 출정에 저도 따를 수 있게 허해주십시오. 비록 무예를 정식으로 배운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군사들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이라 감히 자부합니다. 필시 전력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배이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놀란 마음에 몸을 반쯤 일으켜 어깨를 잡는다. 곧은 눈빛은 그렇게 일순간 흔들린다.) 국서께선 고개를 드세요. 어찌 고개를 숙인단 말입니까.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여태 그대의 지략으로 거둔 승리가 한둘이 아니지요. 무예 실력 역시 이미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대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위험합니다. 게다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이가 모두 자리를 비워서야 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사이에는 아직 후사도 없으니.
이 담:무리한 청임을 알기에 그렇습니다.(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직접 떠나신다 하는데 어찌 저만이 안전한 궁에 남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저 홀로 출정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에게 위험하다면 전하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출중한 장군들이 따라나설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제가 곁에서 전하를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들려온 후사라는 단어에, 고개를 아직 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만다. 후사, 후사라. 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볼 용의가 있으시긴 합니까. 그리 묻고 싶은 것을 참아누른다. 당신이 나에게서 누구를 겹쳐 보는지 다 아는데…….) 훌륭한 대신들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만약 전하가 돌아오시지 못한다면 이 궁에 홀로 남아보았자 저에게도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신분도 미천하며 후사도 없는 이를 누가 궁에 굳이 남겨두려 할까.)
배이화:...그대가 불안하듯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서, 제발 고개를 드세요. (눈 앞에 숙인 등이 꼭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처럼 굳건해 보여 결국 바로 앞까지 넘어와 어깨를 잡아 세우려고 애쓴다. 오래 전, 어떤 일에도 끄덕없어 보이던 바위 역시 사람이었던지라. 죽음 앞에 얼마나 허망하게 스러졌는지를 잘 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이 담과 연이 하나처럼 보인다. 그와 똑닮은 등이 그와 같은 운명을 지고 갈 것만 같아 잡은 손이 떨린다. 그때에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 선뜻 두려움이 앞서는 탓이다.) 어찌 그리 말해. 이 궁에선 누구도 그대를 함부로 하지 못해.
(낮은 목소리 뒤로 서서히 힘이 빠진다.)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를 믿기에 이리 말하는 것이라는 걸 어찌 몰라주십니까.
......담, 나는 두 번은 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이 담:(손길이 떨려옴을 깨닫고 그제야 천천히 시야를 들어올린다. 복잡한 속내를 모두 갈무리하여 무감하기 그지없는 낯이 드러난다. 그러나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굳건한 믿음과 당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그 눈 안에 태산 같은 결의로 살아숨쉬고 있었다.) 전하께서 저를 믿고 계심을 압니다. 이는 오로지 저의 과욕입니다. 하루하루 기다리는 나날이 피를 말리듯 괴로울 것 같아 그렇습니다. 무예를 부릴 줄 앎에도 궁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움은 당연하고 말입니다.
기실…… 전하가 곁에 없다면 궁의 일원들이 저를 어찌 대하는지와 상관없이 저는 이곳에 더 남을 이유가 없습니다. (궁에 들어온 것도 국서가 된 것도 모두 이화 때문이었다. 당신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당신의 곁을 채워주어야만 할 것 같아서. 당신을 원해서.)
잃을 일은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 무사하신다면 저 역시 무사할 것이고,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신다면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어떻게든 막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목소리엔 더없는 확신만이 어려 있다.) 저를 이곳에 홀로 남겨두지 마십시오.
배이화:(과거의 슬픔에 잠겨 속절없이 흔들리던 옅은 색의 눈동자가 비로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을 마주한다. 그래, 이 눈에 빛이 들었을 때, 그 선명한 반짝임이 자신을 마주할 때면 언제고 자신은 이기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어찌 태양을 가릴 수 있으랴.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또한, 그 숱한 날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
(무예를 부릴 줄 앎에도, 뛰어난 지략을 세워도 앞에 나설 수 없고, 궁에만 머물러야 하지. 지금 같은 때가 아니라면, 꼭 새장에 갇힌 새처럼- ...그대에게도 모든 것을 내어주고자 하였으나, 결국 내가 준 것은 오로지 부자유 뿐이었을까. 천천히 손을 뻗어 검은 머리칼, 그 아래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어낸다.)
......약조해주시오. 그대만은 마지막까지 곁에 남겠다고. 그대 역시 나를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더이상 나를 후회 속에만 살게 두지 않겠다, 그것만 약조해주시오.
이 담:약조하겠습니다. (눈가에 닿는 손길에도 눈을 내리감는 대신, 당신을 더욱 또렷이 시야에 담으며 답했다. 목소리에는 한 점 망설임도 떨림도 없었다.) 몸이 부서지고 흩어진다 한들 넋은 끝까지 전하의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더는 전하가 후회하시도록 만들지 않겠습니다. (굳건하게 속삭였다.)
배이화:(감아 내린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가 마지막 속삭임을 듣고 나서야 묵은 한숨처럼 내뱉는다.) ......그래, 그거면 되었습니다. 그거면. (엄지가 눈꺼풀을 쓸어내고, 이내 그 위로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오고 간 약조에 확실하게 인을 찍듯이.)
이 담:(허락을 듣고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신의 입맞춤을 기다리듯이. 역설적이게도,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제 발로 가겠다 자청하고서야 비로소 낯빛이 편안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결국 당신은 담과 함께 출정하기로 결심합니다.
왕과 국서는 사흘 간의 행군 끝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국경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의 선대가 끊어내려 했던, 그러나 결국 끊어내지 못했던.
아비규환과 아수라장. 서로의 목을 물고 물리는, 시작한 이상 결코 물릴 수 없는 절벽으로의 걸음.
두 개의 군대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 지 한 시진이 지났습니다.
그때, 저측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려옵니다.
장군:전하, 전하께서 친정하심을 알고 해원국의 왕도 이곳에 걸음하였다 하옵니다.
그가 직접 병사들의 앞에 서 운국을 조롱하고 해원국의 명분을 내세우니 저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습니다. 부디 운국의 병사들도 승리를 확신하고, 전하와 운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하소서!
천막의 너머로 보이는 운국의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듣고 혼란에 빠져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배이화:(천막을 걷고 군중의 앞에 서서 하나 하나, 그들의 낯을 눈에 담는다. 두려움과 혼란, 지친 낯을 빠짐없이 마음에 담는다. 곧게 든 고개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흐른다.)
... ...모두 들으라!
우리는 죽지 않는 구름이오, 흩어지지 않는 구름이라.
...우리는 죽음과 원한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일어났으니.
마땅히 지키라!
함께 하는 군우를, 가족과 벗들을,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그대들이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일어나라.
배이화:나 그대들의 칼이오. 창이며, 방패이자 갑옷이라. 운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치리라. 그리하여 나, 으레 그대들을 지킬 터이니.
... 세상을 두루 품는 구름이여, 우레와 맹우는 바다가 아닌 구름의 것이다. 바람은 구름을 향해, 우리를 위해 분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
폭풍을 떨치며 나아가자.
당신의 깊고 진중한 목소리가 운국의 진지 전체를 울립니다.
해원의 기세에 혼란스러워하던 병사들이 하나 둘 이화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이화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담이 칼을 높게 들어올리자,
그를 시작으로 엄청난 함성이 지진처럼 대지를 울리기 시작합니다.
"흩어지지 않는 구름이 되어 전하를 지키자!!"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과 그들이 맞이할 숭고한 죽음에 한 치의 후회도 없는 낯을 마주합니다.
그들의 왕을, 그들의 나라를, 그들의 벗을, 그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
전열을 갖춘 두 군대가 가까이에 서고, 신호가 울리면 죽음을 불사한 병사들이 서로에게 달려듭니다.
이화, 당신 또한 말에 올라 전투에 참여합니다.
칼끝에 셀 수 없는 해원국의 병사가 베여나갑니다.
지난날 배웠던 무예가 이리 쓰일 줄 누가 알았을까요.
튀어오르는 누군가의 피가 참으로 짙고 뜨겁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눈앞의 다른 군사를 베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군사들이 마구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칼날이 쨍한 햇빛을 반사해 번뜩이는 잔광을 일으킬 때마다 운국의 병사들이 마치 파도에 떠밀리듯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쓰러져 갑니다.
당신은 본능적으로 기시감을 느끼며 그곳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배이화:(베어져 나가는 파도. 붉고 뜨거운 물보라. 검 끝에서부터 손끝을 타고 온 몸으로 느껴지는 선뜩한 감각과 그만큼 무겁게 내려앉는 심장. 그 사이에서 불현 고개를 들어 그 너머를 바라본 것은 꼭 겪어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관찰력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92 |
| 판정결과: |
실패 |
(허나, 강한 빛에 눈이 찡그려진다. 저 멀리에 대체 무엇이-)
그 틈에 한 번 다시 그곳을 바라볼까요. 재시도 가능합니다.
배이화:
관찰력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30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 난장 속에서, 이 전쟁 속에서 단 한 순간 마주치더라도 당신만은 무심히 스칠 수 없는, 몽중에서조차 잊은 적 없던 낯.
양손에 검을 쥔 채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준마에 올라탄, 해원국의 신검神劍, 연.
바람결에 짧게 흩날리는 머리칼은 흑단보다도 더 까맣고, 빛이 깃들지 않은 금색 눈은 먼발치에서도 섬뜩하게 번뜩입니다.
당신을 볼 때면 으레 옅게 미소짓곤 했던 낯은 차갑게 굳은 채로.
배이화:(......아아, 연. 그리운 이름이 입 안을 맴돈다. 소리없이 입술만 달싹인다. ...어찌하여 그대가. 지금이 꿈인가, 현실인가. 너무 간절히 바라면 헛깨비를 본다더니 꼭 그 짝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 일러준다. 한번 고정된 시선은 흩어질 생각 없이 오로지 한 곳에 박혀있다. 그리운 이의 눈가를 물들인 붉은 원願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SAN Roll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92 |
| 판정결과: |
실패 |
꿈일까요. 당신이 너무 그를 그리워한 탓에 헛것이라도 보는 걸까요.
그는 분명히 당신의 눈앞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그의 장례를 치르며 쓰러져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한데……
이화 당신이 연을 발견함과 동시에 연 또한 당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칼을 휘두르다 말고 멈춘 채 잠시간 당신을 바라보다가, 말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대로 당신 쪽으로 다가오는데,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더니 끝내는 당신이 올라탄 말에 스치듯 부딪힙니다.
배이화:
민첩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급히 고삐를 틀어 가까스로 심하게 부딪히는 것은 면했지만, 놀란 말이 갈피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당신 또한 자칫했다간 낙마해 크게 다칠 뻔 했습니다. <이성> 판정 (0/1)
배이화:(무의식적으로 고삐를 당겼으나, 정신이 든 것은 이미 이리저리 흔들리는 말 위였다.)
SAN Roll
| 기준치: |
62/31/12 |
| 굴림: |
2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 연:(말 위에서 마구 흔들리는 당신을 보며, 웃었던가?)
(당신을 초겨울의 살얼음마냥 조심스럽게 대하며 작은 상처만 나도 종일 걱정하던 이는 없어져버렸다는 듯이.)
(뒤돈다. 왼손에 쥐고 있던 피 젖은 검을 검집에 밀어넣으며 입을 연다. 난전 속에서도 탁하고 거친 소리는 묵직한 울림을 띄고 퍼져나간다.) 전군, 후퇴하라.
직전까지 격렬히 싸우던 해원국의 병사들이 왕의 말에 일사분란하게 뒤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후퇴하는 군대를 쫓아가고 싶더라도, 운국의 병사들 또한 피해가 막심해 쫓을 여력이 없습니다.
장군들과 담이 뒤늦게 말을 박차고 당신 근처로 달려옵니다.
이 담:전하. 괜찮으십니까? (다급히 당신 곁으로 말을 붙이고 상태를 확인한다.) 낙마할 뻔하지 않으셨습니까.
배이화:(멀어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눈으로 좇았다. 생각이 멈추고, 시간이 멈추고, 눈에 보이는 것은 그토록 그리던 이의 등 뿐이라서... ...)
(한참 만에 고개를 돌린다.) ......아. 괜찮습니다. 국서께서는 무사하십니까.
...나는 괜찮으니 다들 걱정 말게. (고삐를 놓칠 것 같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장군:무사하시다니 천만다행이옵니다, 전하. 아무래도 지금은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정말로…….
이 담:경솔한 언사를 삼가시오. (차갑게 제지한다.)
전하. 어서 돌아가시지요.
배이화:...그래, 돌아갑시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는 바람을 따라 말을 돌린다. 눈에 띄는 곳에 분명 다친 곳이라고는 없는데, 어찌 이리 온 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지. 칼바람처럼 서늘하게 식은 낯에 베인 곳이 아리게 울려온다.)
당장은 연을 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해원국의 병사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장군들과 담의 의견을 따라 운국의 진지로 말을 돌립니다.
분명 당신의 몸에 튄 것은 죄 남의 피인데도 당신이 흘린 것처럼 아리고 쓰립니다.
진영으로 되돌아온 후에도 직전의 만남과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잠식합니다.
어느덧 밤이 깊었으나, 잠은 조각조차 오지 않습니다.
낮에 당신이 마주했던 장면이 눈앞에 여즉 생생합니다.
당신이 보았던 것은 결코 환영 따위가 아닙니다.
연과 마주했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당신은 그가 연의 형제자매도, 가짜도 아닌 그 본인임을 직감합니다.
그의 차게 굳어버린 얼굴을 더듬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태산과 바위처럼 굳건하던 그가 아무런 힘조차 없이 관 속에 옮겨지던 순간은 또 어떻고요.
이미 죽은 지 8년이나 지난 그가 대체 어떻게……?
배이화:(손을 몇 번 쥐었다 펴보았다. 그대로 눈가를 덮는다. 눈 뜨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을 덮어보고자. 쓰러져 간 이들에 대한 애도나 쓰러트린 이들에 대한 죄책보다 마음을 더 가라앉게 하는 것은, 8년- 그 긴 세월동안 꿈에서나 생시에서나 늘 그리던 얼굴 때문에. 군주의 인덕은 어디로 잊었는지 모를 일이다. ...분명 그의 마지막을 내 손으로 보냈는데, 뛰지 않는 심장을 안고, 뜨이지 않는 눈꺼풀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데. 어찌하여 그때와 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여전히 아련한 향으로 돌아와 내가 모르는 낯을 하고 바라보는지.) ...연.
(서늘하게 식은 밤바람에 실어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불러본다.)
마치 당신의 부름에 답이라도 하듯, 막사의 바깥에서 조심스레 당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목소리조차 지나치게 닮은…… 그러나 분명히 다른, 담의 음성입니다.
배이화:(그 목소리에 깊게도 잠겨있던 우울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천막을 걷는다. ...꼭 닮았으나, 역시나 다르다. 그대는 담이고, 낮의 그 이는 연이지.) ...늦은 밤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 낯을 마주하면 잠시나마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아예 잃어버릴 것만 같기도 합니다.
이 담:금일의 일로 전하께서 마음이 과히 심란하실 듯하여…… 조금이나마 달래드릴 수 있을까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실은 걱정이 되어서다. 금왕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당신이 금방이라도 훌쩍, 저편으로 떠나가버릴 것 같아서.)
배이화:(물끄러미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대에게 괜한 걱정을 끼쳤군요. 들어오세요. ...바람이 찹니다.
이 담:직접 나오지 않으셔도 되었는데, 제가 전하께 찬바람을 맞혔습니다. (안으로 조용히 들어선다.)
다친 곳은 없다 하셨으나 정말 괜찮으십니까? 어의가 다녀갔는지요.
배이화:(자리를 내어주고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필요 없어 물렸습니다. ...국서께선 정말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늘 숨기기만 하시니 걱정이 되어서요. (달빛 한 줄기가 얼어붙은 강가를 비추니, 자연히 반짝이게 된다.)
이 담:예.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나아가며 상대의 전열을 뚫고 싶었으나 전하께서 걱정하실까 후방에서만 머물렀습니다. 덕분에 다친 곳도 없고 멀쩡합니다. 전하께서도 무사하시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지만 베이지 않은 곳은 몸뿐. 당신의 마음도 과연 멀쩡할까? 한참 주저한 끝에 입을 열었다.) 금왕이라 불리는 자를…… 저 또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전하께서 감히 어떤 심경이실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배이화:...참으로 잘하셨습니다. (흑단과도 같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긴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들이,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그대에게는 꼭 족쇄 같습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내며 조용히 웃었다.)
(잠시간 말이 없었다. 풀벌레의 울음이 멈추는가 하는 찰나, 잠긴 목소리가 천천히 흐른다.) ...담, 그대의 앞에서 할 이야기인가 생각이 듭니다.
(머리칼을 쓸던 손이 뺨을 타고 내려간다.) ...내가 받은 상처를 그대에게 고스란히 내어주는 꼴이 아닐까.
이 담:무리하여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혹여 가슴이 답답하여 터놓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들어드리고자 할 뿐. (어둑한 막사 안에는 호롱불만이 유일하게 아른한 빛을 발하고 있다. 빛 아래에 드러나는 왕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를 가늠해보듯이. 금왕이라 불리던 자와 한때를 보냈을 지난날의 이화는 과연 어떠한 표정이었을까.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더 행복했을까.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그의 완전한 대체제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저는 신경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바위에 금을 몇 개 긋는대도 부서질 일은 없으니.)
배이화:(...바보 같은 이. 한결같은 이. 나를 무어라 탓하고 욕해도 좋은데, 한 없이 나를 물러지게 하는 이. 헌신과도 같은 애정에 응하듯 담의 옆에 기대어 앉는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정말 어찌 되었을까. 한숨처럼 말이 흐른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쉬이 정리되지 않는구나.
...어린 시절부터 친우로서, 또 약혼자로서 함께 자란 이를 그리 허망하게 보냈으니 남은 삶이 꼭 저주 같았다. 금방이라도 그를 따라가고자 몇 번이고 마음 먹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럼에도 그럴 수 없었지. 그와 약속한 것이 있었고, 그가 남긴 것들이 있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지만.... ... 홀로 남아 그와 그렸던 것들을 하나 둘 이루어 나가면, 그것이 그가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어.
...그렇게 매일을 국정에만 매달렸다. 담,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 ...다 죽어가는 나를 살렸던 것은 분명 그대지. 어쩌면, 나는 그와 나눈 가장 소중한, 또 유일한 약조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지 몰라. (기대어 있던 고개를 들어 담의 옆 얼굴을 올려본다. 분명 닮았지만,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 그래, 단 한번도 그를 마음에 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할 수 있나? 그대의 다정함이 얼어붙은 마음 한 구석을 조금도 녹이지 않았다고?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나를 저리 시린 눈으로 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라.
이 담:(무리하여 말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지만, 이화가 보낸 길고 긴 세월을 듣고 있노라면 대체 당신이 저 아닌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싶어진다.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이화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얼마나 큰 부담감과 절망에 짓눌려 살아왔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왕궁에서 가장 불이 늦게 꺼지는 장소가 왕의 침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도. 그 정도로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거겠지.)
그 지난한 시간을 딛고 지금까지 버티시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다만 당신의 양손을 제 손으로 천천히 덮어누를 뿐이다. 남보다 비교적 뜨거운 체온도, 당신보다 한참이나 커다란 손도 꼭 죽었던 이와 같다. 흡사하나 다르다. 대관절 저로서도 어찌 이토록 닮은 이가 존재할 수 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기이하기 그지없는 일이나 이미 벌어졌고, 소문이 아닌 진실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이화가 그와 나눈 약조가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이미 어렴풋 알 것만 같다.)
허나, 약조를 정말 어겼다 한들 한때의 정을 나누었던 이를,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짓밟는 것이 정녕 온당하단 말입니까? 진정 사랑한다면 어찌 그러할 수 있습니까?
금왕이 정말로 되살아났건, 아예 죽지 않았건 간에 그는 제 형제를 죽여 해원국의 왕이 되었으며 되도 않는 명분을 내세워 운국을 능멸하고 전하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부디 마음을 굳게 다잡으십시오. 금일 그의 출정은 전하를 흔들기 위함이 명백하니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담이 무어라 덧붙이려던 순간, 막사 바깥에서 급하게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밖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당신에게 서신 한 통을 들고 옵니다.
호위병: 전하. 해원국의 왕이 전하께 서신을 보냈다 하옵니다. (이화에게 공손히 바쳐올린다.)
배이화:....직접 서신을? (서신을 들어 천천히 펼쳐본다. 대체 무엇을 전하려 했을까. ...무덤도 박차고 나올 만큼의 지난한 원을? 잊지 못할 한을?)
폭풍마냥 휘몰아치는 듯한 글줄이 종이를 검게 채웁니다.
배이화:(한 자 한 자, 눈에 새길 듯 오래도록 검은 획들을 바라본다. 그 안에 담겼을 마음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고자. ...마치 폭풍과도 같이 제 모든 것을 뒤섞어 놓는 것. 꼭 그의 존재와도 같다. ......그대의 마음이 이리도 거세게 휘몰아치는가.)
...수고가 많았다. 그만 물러가보거라.
"알겠사옵니다." 호위병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고 막사를 빠져나갑니다.
이 담:…… 무어라 적혀 있습니까? (불길함이 창끝처럼 날카롭게 폐부를 찔러온다.)
배이화:...해원국의 왕께서 나를 부르는구나. ......명일 오후에 최소한의 호위병만을 이끌고 해원국의 진영으로 찾아오라, 그리 적혀있다.
(말미에 적힌 줄은 자연히 삼켰다.)
이 담:(일순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하다. 즉시 이화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가시면 아니 됩니다.
배이화:(서신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맞춘다. 제 애간장마저 녹일 듯 간절한 얼굴에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어찌하여.
이 담:낮에 금왕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마음이 무너진다.) 필시 함정입니다. 전하를 욕보이고 해할 것입니다. 무사히 돌려보내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배이화:...나를 욕 보이고 해하려 한들 무엇이 두려울까. 응당 내가 갚아야 할 죄인데.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다만, 당신이 나와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커다란 손을 끌어와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나, 나는 한 여인으로서만 있을 수 없지. (왕자로서 제 모든 것을 걸고 한 약조이나, 그때와 지금의 짊어진 무게가 달라 섣부르게 나설 수 없다. 여태 이뤄온 것은 연, 그와 그린 것이니 이대로 지워지게 두고 싶지 않다.) ...누가 뭐라 한들 나는 운국의 왕이 아닙니까. 홀로 사라지면 운은 누가 지키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마세요.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기어이 끝에는 모든 것을 감추고 여상한 미소를 내걸었다.)
이 담:대체 무엇이 죄입니까. 이미 오래 전 떠나보낸 이를 두고 다른 이를 국서로 들인 것이? (누군가 가슴을 갈퀴로 긁기라도 하는 듯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힘있게 잡았던 당신의 손이 불에 달군 쇠라도 되는 듯 맞잡기가 어렵다.)
자그마치 8년입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남겨진 이가 평생 독수공방하며 살기를 바라는 대신 새로운 행복을 찾아 웃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괴로이 중얼거리다가, 응하지 않겠다는 말에 겨우 떨구었던 시선을 맞춘다. 분명 당신은 미소를 띄고 있는데, 왜 저에게는 우는 듯 보이는지.)
기어코 금왕이 전하께 추궁한다면 이리 답하시지요. 제가 전하를 은애하여 유혹했다고 말입니다.
배이화:......허나- (당신의 말을 듣고서야 깨닫는다. 제가 꺼내 놓은 말이 지나간 자리마다 얼마나 많은 상처가 생겼을지. 사과의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채 알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라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대의 상처를 헤집어 소금을 뿌리기만 하고 있지 않나.)
...아니, 그리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대를 곁에 두겠다 생각하고, 국서로 맞이하겠다 마음 먹은 것은 나입니다. 그리고... ... (그래, 그 밤 또한 있었다. 기어이 정신을 놓은 나를, 눈물만 흘리느라 말도 못하던 나를 밤새 다정하게 안아준 당신이 있었지. 그 모두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내 죄다. 내가 더 굳게 마음먹지 못해서, 그래서 지은 업이다.)
...그대에게까지 화가 미치지는 말아야지.
이 담:…… 전하께서 진정 그에게 화를 입고 만다면 저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전하가 죄를 지었다 여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버텨 온 시간을 안다면, 삼켜 온 눈물을 안다면 그 누구도 그리 말할 수 없을 테지요.
(전시의 다짐을 하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도 입지 않고 칼도 차지 않았지만 태세만큼은 장군처럼 굳건했다.) 언제고 전하를 지킬 것입니다.
배이화:...담. (그대는 어찌 한결같을 수 있을까. 평소였다면 기어이 담을 이끌어 세웠겠지만, 그대로 한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침소에 들기 전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이 장막처럼 주변을 드리우고, 은은하게 비쳐 들어오는 달빛마저 가리운다. 이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그대의 헌신에 내어줄 수 있는 친애의 표시로써.)
...그대가 있어 다행이야.
이 담:(이마에 닿는 입맞춤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숨이 콱 막혀 오는 것도 같다. 저는 당신에게 친애 이상의 감정은 받을 수 없겠구나. 그런 직감이 퍼뜩 고개를 들어서.)
(한참의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다.) 전하. 오늘 밤은 함께 머물러도 괜찮겠습니까. (마음은 얻을 수 없어도, 저의 온기를 당신에게 나누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배이화:(담을 일으켜 세우는 대신,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추었다. 당연하게도 손을 내밀면서. 낯에는 달빛과 닮은 은은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국서께서 돌아가시는 길이 너무 어두울까 걱정되니 이곳에 머무르세요. (시린 밤 혼자서는 밤새 뒤척였을지 모르나, 당신의 온기가 있다면 안심이 될 것 같아, 그렇게 붙잡는다.)
이 담:(그 손을 붙잡은 채, 애써 입꼬리를 옅게 끌어올렸다. 고작 미소 하나뿐인데 심력을 한참이나 끌어 써야만 했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은 얇은 이불과 불편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전혀 춥지 않았습니다.
두 진영이 맞서 서로의 동태를 살피고, 나팔 소리와 함께 두 군대가 부딪힙니다.
그러나 운국의 병사들이 아무리 사력을 다해 싸워도 해원국의 병사들은 죽을 것처럼 쓰러질지언정 다시 몸을 일으켜 전투에 돌입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들을 상대로 칼을 맞댄 끝에 서서히 승기가 해원국을 향해 기울어지는 듯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또다시 승기가 잡힐 듯한 때에 재해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해원국의 병사들은 마치 이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가벽을 세우고, 무너지는 흙과 먼지를 막아냅니다.
어안이 벙벙하던 차에 당신의 곁을 지키던 병사가 힘없이 쓰러집니다.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를 내며 칼날이 당신의 목덜미를 향해 겨눠집니다.
연이 당장이라도 당신의 목을 베어낼 듯 날 선 칼을 겨누고 있습니다.
주변의 병사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칼을 겨눈 채 둘의 근처를 에워쌉니다.
이 연:피를 흘리지 않고 끝내려 했거늘, 우둔한 왕을 둔 죄로 병사들만 고통받는군.
주변을 보아라. 운의 병사는 더는 싸울 수 없고 그대는 포위되었다.
배이화:(서늘하게 겨누어진 검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낮게 숨을 몰아쉰다. ...무엇 하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어. 예전의 그대였다면-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지금 눈 앞의 상황을 보라. ...틀린 것 하나 없는 말이지. 그러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꿈에 그대가 나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늘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웃음만 지었던 것처럼. 한참 끝에 겨우 떨어진 입에서 나온 것은 한 글자다.)
......연.
(오래도록 그리워한 이름 한 글자.)
연의 말대로 운국의 병사들은 대부분 더는 싸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혈흔이 낭자합니다.
해원국의 병사들은 분명 운국의 병사들만큼 다치고 손해를 입었으나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안광이 맴돌고 있습니다.
배이화:...... (연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미묘한 광경을 보고서야 겨우 다시 입을 뗀다. 그럼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백성들을, 군사들을, ...내 나라를.)
...그대 해원국의 왕이 원하는 것은 나 하나가 아닙니까.
이 연: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칼을 좀 더 아슬아슬하게 당신의 목에 겨눈다. 살갗에 쇠의 선득한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딱딱해도 당신에게만은 다정했던 성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게 당신을 내려다본다. 본래 해원의 왕궁에서도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위치는 아니었거늘 처음부터 타고나기라도 한 듯이 냉혹한 위엄이 감돌고 있다. 짐승의 것과 같은 금빛 눈에서는 원과 증오가 불타오른다.)
그래도 말을 아주 못 알아듣는 천치는 아니군. 투항하라. 그리한다면 그대의 병사들은 돌려보내고, 그대는 귀빈의 신분으로 해원국에 초대하마.
배이화:(...목에 겨누어진 칼날보다 당신이 뱉는 말 한마디가 더 날카롭게 저를 더 잔인하게 벨 수 있다는 것을 그대는 알까? 더이상 주변 그 어느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증오로 들끓는, 짐승을 더 닮아버린 눈동자에 사로잡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병사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주겠다, 그 말만큼은 온당히 지키실 것이라 약조하십시오.
이 연:약조하지. 내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담는 취미는 없으니.
배이화:(그래, 당신이라면 응당 그리하겠지.)
......... 투항하리다. (검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어낸다.)
이 연:(천천히 검을 거두며 곁의 병사들에게 눈짓한다.)
해원국의 병사들이 이화의 무기를 빼앗아갑니다.
그들에게 에워싸여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 갑자기 운국의 한 병사가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더니 연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운국의 병사: 금왕이시여, 부디 운국의 전하를 보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사를 허하소서. 말씀하신 대로 귀빈의 신분으로 초청하신다면 전하께서 단신으로 해원국에 가시는 것은 운국에게 그저 조롱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근처에 있는 병사라도 따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연:(발걸음을 멈추고 흘끗 그를 내려다본다) 그저 조롱하기 위한 초대였다면 어찌할 것이냐?
운국의 병사: 그런 것이라면, 귀빈으로 초청하시는 번거로운 일을 하시기보다 이 자리에서 운국의 전하를 욕보이고 승전보를 알렸겠지요. 왕의 말은 곧 나라의 말. 타국의 왕과 백성을 속여 능멸하고, 끝내 모든 것이 그저 조롱을 위한 거짓된 언사임이 밝혀진다면 해원국 또한…….
연은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그 병사에게 다가가 칼을 겨눕니다.
이화, 당신은 그 병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당신을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채 적국의 왕에게 무릎꿇고 있습니다.
연은 당장이라도 담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다가도 곧 칼을 거둔 채 돌아섭니다.
이 연:다섯에서 열. 근처의 병사들을 알아서 소집해 뒤를 따르라. 네놈이 자처한 일이니 대접 따위는 기대치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담은 깊이 고개를 숙인 뒤 일어나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해원국의 진영에 들어서면, 이화와 병사들은 강제로 해원국 진영의 막사에 밀어 넣어집니다.
그마저도 다른 병사들은 한 막사에 몰렸지만, 이화는 대우인지 분리인지 다른 막사로 보내집니다.
방 안 탁자 위에는 갈기갈기 찢긴 운국의 깃발이 올려져 있으며, 깃발의 정중앙을 칼로 찍어두었습니다. <이성> 판정 (0/1)
배이화:(...담. 담을 돌아볼 새도 없이 떠밀려 들어온다. 막사에 들어서기 까지 몇 번이나 휘청일 뻔 했으나, 꿋꿋이 섰다. 그럼에도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무너지기에 충분한 것이라.) ...... 아아. (한 때 '우리'의 나라였으나, 이제는 오로지 그대가 등을 돌린 '나'의 나라구나.)
SAN Roll
| 기준치: |
62/31/12 |
| 굴림: |
66 |
| 판정결과: |
실패 |
단순한 전쟁이 아닌,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증오,
이유는 알지 못해도, 당신은 연이 가진 서슬퍼런 감정의 잔흔을 시리도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제 부대를 이끌어 본국으로 귀환하며, 그 행렬에 당신 또한 함께합니다.
도주를 우려해 직접 말에 태우는 것이 아닌 마차를 제공하니, 조롱뿐인 말일지라도 '귀빈' 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그마저도 전시 중인지라 일국의 왕의 대접치고는 초라하지만요.
마차 안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 행렬이 멎는 것을 느낍니다.
배이화:(내내 바닥에 못 박혀있던 고개가 그제야 들린다.)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셨습니다, 전하. 그런데, 혹 저 마차에는……?"
이 연:돌아오던 중 귀빈을 모셨다. 그의 병사들은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고, 귀빈께는 궁에 방을 내어드리도록.
해원국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들의 승리를 알리고 멸시할 수도 있었을 것을, 정말로 '귀빈' 취급을 하고 있으니 영문 모를 일투성입니다.
이화는 궁의 한편, 타국의 사신 등이 머무르는 별채로 안내됩니다.
타국의 궁에서 불편하기 그지없는 휴식을 취하자니 어느덧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집니다.
그에 맞추듯 바깥에서 궁인이 찾아들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궁인: 전하께서 귀빈 마마를 뫼셔오라 명하셨나이다. 따르시지요.
배이화:('귀빈' 취급이라는 것은 정말 말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으면 어두워진 방 안에서 정신을 차린다. 생각이 늦어 답도 한 박자 늦다.) ...전하께서 말인가. (그럼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선뜻 일어선다.)
궁인을 따라가는 길, 자연스레 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느긋하고 운치 있는 분위기의 운국의 궁과는 달리, 화려한 장식과 강렬한 조각들로 해원국의 위용을 한껏 자랑한 듯한 꾸밈새입니다.
드나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축되게끔 만드는 분위기네요.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 입구부터 용의 조각으로 장식된 내전으로 들어서면 공기부터 다름을 실감합니다.
곧 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물에 도착하면, 이렇다 할 경계도 없이 그저 호위병 한둘 정도만 입구에 서있습니다.
배이화:(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운국과 달라, 불청객이 된 기분으로 멈춰선다. ...이 곳에서는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짧게 숨을 내쉬고 호위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상을 가득 채우는 음식들입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나라답게 운국에서는 구경하기 힘들었던 싱싱한 해산물들이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화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연, 그이겠죠.
그는 자리에 앉아 한 팔로 고개를 받치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떠올립니다.
이 연:…… 왔군. 앉으시오. (제 맞은편의 의자를 향해 눈짓한다.)
배이화:(차게 식었던 얼굴이 떠올라 순간 덜컥 숨이 막혔다가, 연이 눈을 뜨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가라앉힌다. 맞은편에 앉으며 시선을 맞춘다.) ...나를 불렀다 들었습니다.
이 연:맞습니다. (냉혹한 비웃음과 싸늘한 분노가 몰아치던 전쟁터와 달리 무감하기 그지없는 낯이다. 목소리 역시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적국에 끌려온 기분이 어떻습니까. 내 의지나 바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치 팔려가듯 말이야.
전쟁에서 마주했던 때보다는 목소리에 날이 서있지 않습니다.
이제야 조금쯤, 과거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연을 그에게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그를 구별할 수 있는 차이는 해원국의 왕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눈가의 붉은 원怨 뿐입니다.
배이화:(그래. 정말 연, 당신이구나. ...해원의 왕들은 그들의 원怨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눈가에 붉은 화장을 한다고 했던가. 마주한 얼굴에 그때와 다른 것을 찾자면 붉은 것 저 하나인데, 둘을 둘러싼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어있다. 언젠가의 그대는 괜찮다 하였지만, 역시 마냥 괜찮을 수는 없었겠지.) ... ...먼 기억에 어린 그대 또한 이런 마음이었다면, 그만큼 슬픈 일이 없겠습니다.
...그대의 마음을 이리 온전히 이해하게 될 날이 오다니, 다행이라 할까.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해 서글피 웃는 낯이 된다.)
이 연:돌아보면 참으로 어린 나이였지. 꼭 아이처럼 철없게 행동하기도 했었고 말입니다. 그러니 네가 황제가 될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정비의 소생인 황자들이 나를 놀려대던 일이 어렴풋 기억나는군. 세상만사 어찌될지 모른다고 한다만……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당신의 서글픈 낯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술병을 들어 제 잔에 부었다.) 슬프신 모양입니다.
배이화:(이토록 화려한 궁에 오롯이 혼자였을 연을 생각하면 꼭 같은 자리가 아릿해진다. 자신을 배척하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 정점에 자리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행복할까? 그렇다면 좋을텐데. 참 다행인 일일텐데.) ...그래요, 정말 그렇지요. 이리 그대를 다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잔이 이는 물결을 가만 내려본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났구나. 허나 마땅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도요.
허나, 장성한 그대의 모습을 보니 마냥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 연:(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이화를 한참이나 응시한다. 이내 술잔을 들어 입에 천천히 흘려넣었다.) 그래. 다시 만나게 되었지. 다만 그때도 나는 거진 성년이었던 것 같은데. 그간 내 모습을 잊어 새삼스레 달리 보이기라도 합니까? (비스듬히 물음을 던지고는,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과 고요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신의 깊은 상처 하날 헤집는다.) 그랬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와 꼭 닮은 이를 곁에 들였다 들었습니다.
(차마 아물지 못했을 상처를 비집어댄 뒤에 내놓는 물음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또 자연스러워서, 외려 괴리감을 더한다.) 8년간 무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배이화:(무엇 하나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명치에 턱하니 얹힌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이 흐린 탓인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 내내 피하기만 했으며, 가끔 꿈에 나오는 연은 이상하게도 아직 앳된 시절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얼굴. 숨이 편히 쉬어지지 않아 가슴께를 꾹 눌렀다. 손바닥 아래가 통증으로 저릿하다.) ......어찌. 그까지 다 알고 계십니까?
(...8년간 무탈했느냐니. 내가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홀로 눈 감은 그대를 두고 죄스럽게 살아서 하루도 편히 잠에 든 적이 없었다. 대답없는 심장에 그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는데. 어찌 오지 않았어. 이리 살았으면서 왜 한번을 찾지 않았어.
가장 부드러운 떼를 가져다 덮었다. 홀로 잠든 당신이 추울까 봐서. 늘 불을 켜두었다. 혹여 혼으로 찾아온 당신이 길을 잃을까 봐서. ...바라건대 당신의 능침을 침상삼아 잠들고 싶었다. 한날 한시에 눈을 감고 싶었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을 탓하는 말처럼 들릴까 봐서 숨을 삼킨다.)
...그대, 내가 밉습니까?
이 연:적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태연자약한 태도다. 한때 저희의 혼인으로 도모하였던 양 국가간의 화합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지 오래임을 제 입으로 공언한다. 가슴팍을 누르는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한 나라의 지존으로서 8년간 호의호식하며 살아왔을 것 아닌가? 공석인 국서까지 채워졌으니 외롭지도 않을 터. 당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의문들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술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잔을 입가에 기울이면서, 옷소매와 잔으로 낯을 가리면서 과거의 한 자락을 회상한다. 복식이며 식습관이며 모든 문화가 해원과는 완전히 다르던 나라에 외딴섬처럼 홀로 떨어졌던 순간을. 제 의지 하나 없이 결정된 약혼이 싫어 태자를 피해다니고, 매몰차게 굴었으며, 방종하게 궁을 헤집었다. 저를 원치 않는 세상에 억지로 눌러앉혀질 바에야 차라리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당하거나 쫓겨나는 게 나았다. 그런데도 태자는 저를 내치지 않았다. 뒤이어 연무장에서 처음으로 칼날을 맞대며 그의 얼굴과 표정을 자세히 시야에 담았던 순간이 태동한다. 함께 말을 타고 궁 바깥을 시찰하던 나날. 수많은 역경과 고난 끝에 우리는 혼례를 올렸다. 운과 해원의 진정한 화합이라며 만인이 기뻐하였다. 이화가 바라는 태평성대한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단단히 다짐했었던 것 같다. 짐승 같던 저를 당신이 길들였다. 당신 손에라면 목줄이 쥐여 험하게 다루어져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당신은 꽃잎 같은 손길과 봄날 같은 웃음으로 저를 안아주었고… 바라주었고……)
(우리는 분명 행복했었다. 당신을 사랑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어 있지?)
질문한 건 나입니다. 그대가 물어도 된다 허락한 적 없습니다. (연은 잔을 내려두었다. 텅 빈 잔이 상 위를 한 바퀴 구른다.)
…술이나 한 잔 따라보시오. 적국의 왕을 기껏 사로잡았으니 이 정도 흥취는 있어야겠지……
배이화:(적국, 적국이라. ...그렇지, 그랬지. 갈기갈기 찢어진 운국의 깃발로 당신은 공고히 말했었다. 그리운 마음에 허상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자신이 당신에게 내어 주었던 것 중에 가장 커다란 것, 부자유. 무게조차 쉬이 가늠할 수 없는 족쇄를 채우고 끝끝내 벗어날 수 없게 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어찌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자신의 곁이 조금이나마 편했으면 해서, 행복을 조금이라도 닮은 것을 찾아주고자 했다. 빛을 등지고 반짝이던 금빛 눈동자는 살아있는 이의 것이었으니까. 이기적이나 제 곁에서 살아주었으면 했다. 함께 말을 달리고, 몰래 잠행을 나서고, 점점 가까워진 품에, 그 고아한 황매화 향에 매료되었다. 웃음을 띄는 얼굴을 보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고, 당신 또한 그랬으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높이 난들, 새장에 갇힌 새였지. 그러니 죽음으로써 되찾은 것이 자유라면, 자신만 슬프면 되었다. 눈을 감은 그대는 편했으면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보아.)
(행복하다 생각했는데, 분명 사랑한다, 사랑했었다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차라리 답해주지 않아 다행이다. 바다는 미처 다 품지 못할 만큼 드넓다 했으니, 그대의 원 역시 바다를 닮았다면 함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대의 원이 이다지 깊다는 것은 나를 향한 마음 또한 그만큼 깊었다는 것의 방증일까. 말도 안되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묵묵히 손을 뻗어 쓰러진 잔을 세웠다. 내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겠다 했으니 욕보이려 한대도 기어이 받아들일 뿐. 몸을 일으켜 반쯤 남은 술병을 잔에 따른다.)
(찰랑이는 잔을 보며 묵묵히 입을 연다.) ...더 바라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 연:(액체가 부딪히며 나는 청명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 가득히 내려앉은 무거운 중압감을 그나마 환기한다. 금빛 눈은 다시금 야생의 짐승으로 돌아간 듯이 절제되지 못한 거친 이채를 띄고 있다. 그 눈으로 이화를 꼼꼼하게, 집요하리만치 담았다. 하고 싶은 말도 쏟아내고 싶은 감정도 잔뜩인데 어쩐지 말로 꺼내려니 혀가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득 차오른 물이 아주 조그만 돌 틈새로 방울방울 흘러나오듯 한 토막씩밖에 꺼낼 수가 없다.)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그는 이화가 다시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차오른 잔은 아직 집어들지 않은 채로 말을 잇는다.) 그대는 아직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지냈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새로 들인 국서는 나와 얼마나 닮았지? 키도, 머리칼과 눈의 색도 같은가? (물음이 하나씩 더해질수록 차분했던 음성이 조금씩 격해져 간다. 그러자면 깨닫는다. 정말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는데.)
배이화:(병을 내려놓고 나서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드는 일이 없다. 상을 가득 채웠으나, 다 식고 색을 잃어가는 것들에게 시선을 흘린다. 거센 파도가 쓸고 가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진다.) ...지키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아 살아있는 것이 죄 같았습니다. 저주 같았어요.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매일 같았고- (가슴에 묻은 것이 많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병처럼 달게 된 두통 또한. 그러나, 그것 또한 당신이 남긴 것이라 생각하면 손에 쥐고 놓을 수가 없었다.
내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대로 이루어져 있으니.)
(입술을 뜯어낼 듯 세게 물었다가 느리게 고개를 든다.) ......그대에게 호소하던 병사 하나를 기억하십니까. 그이입니다.
...연, 그대와 꼭 닮았어. 키도, 검은 머리칼도, 내가 좋아하는 꽃을 빼닮은 눈의 색도. 무엇 하나 닮지 않은 것이 없어.
...그래서 한시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어. 잊을 수가 없었어.
이 연:(몇 번씩 끊겨 가며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표백된 듯 낯에서 표정이 사라져 버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신이 전혀 읽을 수 없게끔.)
(길고 긴 정적 끝에, 해원의 왕이 툭 내뱉는다.) 과거형이군.
그래, 그자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나와 그토록 닮은 이를 솜씨 좋게도 찾아내셨습니다. (심해와 같은 슬픔을 눈으로, 표정으로 표현하는 이를 외면하듯이 시선을 내리깐다.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억눌린 것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듯하다.) 이제 그가 곁에 있으니 편히 잠들 수 있겠군. 죄는 그가 나누어질 테고. 잊지 못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지? 그대의 국서 자리는 그자가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내게 약조했었잖아.
나만을 연모하겠다 약조하였잖아. 나는 그 말을 믿고 운의 사람이 됐습니다. (해원국의 황자로 보낸 세월이 13년, 운국 세자의 약혼자이자 반려로 지내기를 6년. 거의 제 인생의 절반과 같은 시간을 운국에서 보냈다. 자신은 이미 그곳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대가 나를 버렸어. (아니다. 이화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미물 하나에도 정을 주는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지 않은가? 6년간 제 눈으로 똑똑히 봐 왔지 않았던가? 흐린 머릿속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입 밖으로는 매몰차고 싸늘한 비난만이 흘러나간다. 운국에 적응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날선 말들을 당신에게 칼처럼 꽂아댄다.)
이 연:그대는 나를 잊은 거야. 아니 그런가?
배이화:(표정이 사라지는 낯을 보면서, 몇 번이고 뻗어나가려는 손을 쥐어 눌렀다. 죄인이 함부로 닿아서는 안되니까. 약조를 어긴 것은 자신이다. 그러니 그로 인해 상처를 말할 수 있는 것도, 원망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이지. 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왜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싶을까.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깨끗하게 꺼내 보이지도 못할 거면서. 심장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 같아 숨을 쉬기가 어렵다. 제대로 표정을 짓고는 있나? 저 혼자만 온갖 상처를 다 떠안은 듯 보이기 싫은데.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다.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기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연. 그렇지 않아. 당신을 연모해, 사랑해. 그대를 버리지 않았어. ...내가 어찌, 어찌 그래.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야.
...어찌 잊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조한 이를.
(마른 가지같은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내가 무얼 하면 좋겠어? 어찌하면 그대가 예전처럼 웃을 수 있을까.
이 연:잊지 않았다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 헛웃음을 친다.) …… 나를 연모해?
내가 많은 것을 바랐나? 강제로 끌려와 두 손과 발이 묶일 것을 알면서도 혼인을 승낙했던 건 오로지 그대가 내게 해준 약조 때문이었다. 그대를 믿었기 때문이었어.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그런데 지금, 어떻지? 정녕 나의 행복을 안다면 그대가 그자를 옆에 둘 수 있단 말인가! (이유 모를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화가 긴 세월을 홀로 외로이 살아가길 바라지는 않았는데. 분명 그리했을 텐데.)
그 입에 나의 웃음을 거론하다니. 참으로 뻔뻔하군. (연은 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다. 술병을 들어 넘치도록 잔을 채우다가, 그것도 모자란 듯해 병째로 입에 들이부었다. 어찌하여 취기는 오르지도 않는 것인지. 이화의 존재감은 왜 자꾸만 커져만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괴롭다. 이미 한 번 멈추었던 심장이 재차 찢어지는 것처럼.)
그자의 목을 치라 해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에 튀어버린 술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배이화:(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래, 오로지 마음 하나였어. 순수한 마음 하나로 내 곁에 남아주었는데. 나는 무엇도 지키지 못했구나. 약조도, 당신도...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마저도. 생각이 구름처럼 흐르다가 술을 들이붓는 연을 보고 덜컥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괴로우면 저에게 풀어내지. 왜 스스로를 괴롭히는지. 생각보다 움직이는 것이 빨랐다. 차게 식은 눈물 같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조심스레 닦아내던 손 끝이 멈춘다.) ......... 그이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대의 원이 향하는 곳은 내가 아닙니까. 차라리 내 목을 내놓으라면 기꺼이 그리 할 것 입니다.
......그대가 이리 살아 돌아온 것이, 내 그대에게 약조한 모든 것을 거둬가기 위함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이 연:(닿아오는 손길을 반사적으로 밀어내려다가 움직임을 멈춘다. 한결 가까워진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손목을 붙잡았다. 원래 이렇게나 말랐던가.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잡아본 것이 너무 오래 전이어서……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아른하게 어렸던 그리움은 금세 흐려지고 허탈한 웃음 소리만 흘릴 뿐이다.) 그래도 국서라고…… 내 앞에서 그를 감싸는 건가.
이상한 일이지. 그대가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미운데, 그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으니. 그대는 나에게 이토록 냉정한데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반대쪽 팔로 당신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아 당겨온다.) …… 나를 은애한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배이화:(잡힌 손목이 낙인처럼 뜨겁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다시 멀어질까봐서 그대로 있었다. ...당신의 손이 이렇게나 따스했었지. 그 손으로 내 등을 쓸어줄 때면 무엇도 두렵지 않았는데. 가까워진만큼 들이마시는 숨에 온통 당신의 체향이 들이친다. 차게 식은 입술과 굳게 눈 감은 얼굴이 아니라, 나를 말하는 입술과 나를 비추는 눈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리 잔인한 말과 시선으로 난도질해도 그대가 살아서 다행이야. 내가 밉다 말해도 좋아....) .....연, 그대를 은애해.
은애해. ...언제까지나.
(힘없이 고개가 기운다. 그리운 품에서, 묵혔던 숨을 쉰다.) ...되살아난 그 날에, 왜 곧바로 나를 찾지 않았어? ...이리 원망하면서. 내가 밉다면서.
이 연:되살아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 내 나름의 '준비'를 마치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서 있는 당신의 가슴팍에 그대로 잠시 고개를 묻는다. 여전한 황매화의 체향과 당신의 체향이 천천히 뒤섞인다. 은애한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끝없이 반복하게 하고 싶을 만큼 이 말을 원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술병이 발에 채여 굴러가지만 그딴 것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취기라곤 없이 선명한 시야에는 오롯이 이화만이 들어찬다. 쥐고 있던 손목을 천천히 놓고 대신 이화의 뺨을 감쌌다. 커다란 손에 다 들어오는 조막만한 얼굴에서 세월의 흐름을 더듬어 찾아본다.) 기실 나는 운국을 짓밟기보다는…… 그대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대도 내가 보고 싶었나?
배이화:(...은애해, 연. 입이 다 닳도록, 바다가 다 마르도록 하고 싶은 말이었다. 잠꼬대처럼 속삭이다 눈물에 지워지는 말이었다. 이제야 제 주인을 찾은 듯 생기를 띄고 움을 틔우는 말. 섞여든 체향은 어느 봄 날의 향을 꼭 닮아있었다. 눈에 담기는 것은 환하게 피어난 황매화와 같고... 꽃을 시기하듯 기어이 뺨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것이 봄비다.) ...너무. 너무나.
...... 네가 너무도 보고 싶었어.
(얕게 자리한 지난 세월이 눈물에 지워져 간다.)
이 연:그대는 웃는 모습이 어여쁜데. 울리고 말아 미안하군. (저지른 짓이 있으니 웃음을 기대하는 건 분에 넘치는 일임을 잘 안다. 그러므로 뺨을 적시는 눈물을 손끝으로 천천히 닦아내기만 했다. 눈물 한 방울이 흐를 적 꽃다운 스무 살의 당신을 연상하고, 두 방울이 흐를 적 8년의 시간을 건너뛰고, 세 방울이 흐를 즈음에는 함께 하였던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하다.)
많이 말랐구나. 나와 있던 시절보다 끼니를 챙기지 않는 건 아니냐. 술은 여전히 잘 마시지 못하고?
배이화:(잃었던 이를 이제야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을 탁 놓아버리고 울고만 싶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그러나 닿은 손길은 여전히 다정하고 따스해서 꼭 어딘가를 간질이는 것만 같다. 결국 눈물과 흐린 미소가 뒤섞여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한다. 그대가 걱정할까봐서, 들어가지 않는 끼니도 겨우 챙겼어. 이리 만날 줄 알았다면, 더 신경 쓸 것을. 술은 여전히 잘 못해.) ......그대가 기억하던 나와 같아? 달라서 실망했어?
이 연:(울먹이며 겨우 내놓는 대답을 성심껏 경청한다. 싸늘히 원망하고 성토하던 직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다. 지고지순한 애정을 고백하는 당신에게 감화된 덕분일까. 8년 전과 똑같은 얼굴로 옅게 미소를 지을 적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함께 행복하였던 그 시절에 있는 것만 같다.) 실망은. 전혀. 여전하기도 하고 바뀐 것도 있군. 그래도 나의 눈에는 언제나 어여쁘다.
배이화:...그대는 언제고 나를 그리 봐주는구나. (어쩌면 내게 보여준 마음도 그 날과 같을까. 눈을 감은 채 모든 것들 다 품어줄 듯 커다란 손에 고개를 기댄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훨훨 너를 따르고 싶었어. 몇 번이고 그리하려 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야. ...이렇게 다시 그대를 만났으니.
...연, 나를 한시도 잊은 적 없어?
이 연:(뒤를 따르려 할 만큼 저를 깊이 여기던 이에게 나는 무슨 모진 말들을 쏟아낸 것인가. 혀로 칼을 꽂은 지금도 당신은 저에게 서운한 말 한 마디 하지 않는데. 돌이켜보니, 채 이각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제 행동이 기이하리만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본래 우리 사이엔 상상조차 가지 않는 짓이다.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 제대로 사과해서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그리고……)
그래, 8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이화의 뺨을 감싸던 손길이 멎는다. 금색 눈이 크게 뜨인다.)
일순, 연이 입을 다물더니 급하게 숨을 삼킵니다.
배이화:.....연, 연. (급히 얼굴을 살핀다. 왜 갑자기-)
심리학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연의 눈에 어린 감정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입니다.
그는 불에 덴 듯이 이화에게서 멀어지더니, 제 목을 움켜쥐었다가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마냥 귀를 틀어막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에요.
그토록 단단하고 강한 정신을 지녀 웬만해서는 슬퍼할 일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가 무엇에 홀리거나 씌이기라도 한 듯 괴로워했죠.
어떤 용하다는 어의도 치료할 방도를 찾지 못한 병증이었습니다.
이 연:아, 아아…… 시끄럽다. 그만, 그만하거라. 닥치라 하지 않았느냐!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사방을 둘러보며 뇌까리고 호통친다. 온몸이 불안정하게 떨리고 흔들린다.)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다…… 무, 물러가라. 내가, 내가 잘못했다.
(자신이 무어라 말하는지도 모르는 듯 지리멸렬하게 중얼이고, 외치기를 반복했다.) 멈춰, 멈춰다오.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싫다고 하였느니라!
배이화:.....연, 연..! 어째 이래. (뻗은 손과 팔로 연을 붙잡고 품으로 끌어당긴다.) ...무엇을 보고 있는거야,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해. 그대 곁에 내가 있어, 연. ...누구도 그대를 해치지 못해... (편안해진 낯은 어딜 가고 없다. 그 날과 같이 허옇게 질리다 못해 시체처럼 창백해져서는 품에 다 안기지도 않는 이를 어르고 달랜다. 자장가처럼 나지막하게 이어진다.) ...괜찮아, 괜찮아. 내 목소리만 들어, 연. ...아무도 그대를 해치지 못해.
이 연:아, 흐윽, 헉…… (턱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온온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숨 하나 제어하지 못하고 불안에 휩싸여 한참을 헐떡였다. 이화의 목소리도 온기도 전혀 와닿지 않는 듯, 이화의 품에서도 끊임없이 벗어나려 몸을 비틀기를 반복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른 후 마구 떨리던 연의 몸이 차차 진정해갑니다.
그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더니, 당신을 응시하는 눈에 다시금 붉은 원망과 증오가 이글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연:감히 포로 주제에 지존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가? 썩 물러서지 못할까! (마치 서로를 끌어안고 짧게나마 해후를 터놓던 순간이 싹 지워지기라도 한 듯 딴판인 태도다.)
직감합니다. 그가 당신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가 단순히 '자신과 나눈 약조를 어기고 다른 이를 만났기 때문' 만은 아님을.
당신이 알 수 없는 그의 시간 동안 그가 겪은 고통, 그것을 해갈할 수 없는 이상 이 원한을 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배이화:(성난 어조에 과거의 흔적에서 강제로 깨워진다. ...아. 그때에는 내 사람을 잃는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 뒤늦게 깨닫는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대가 그리 되었던 것은, 또한 지금 내가 이리 대하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았다 한들 내가 무얼 할 수 있지.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연.
...그때와 같이 되지는 말아. 그건, 그것만은 안돼...
이 연:왕의 이름을 멋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목에 한 번 더 칼이 겨누어져야 정신이 들겠느냐? (다시금 전쟁터에서 봤던 때와 같은 위압적이고 차가운 이연이다. 이화가 넋이 나가건 불안해하건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배이화:(그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았으니 이대로 놓아둘 수 없다. 시린 겨울 바다에 다 집어 삼켜져도 좋으니, 당신을 혼자 둘 수 없어. 다시는 그리 두지 않으리라. 흔들리기만 하던 눈에 선명하게 빛이 든다.) ...그리하여 그대가 이전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 연:그럴 일은 없다. 그대는 이미 나를 배신하고 국서를 들였지. 과거를 저버린 건 그대면서 이제 와 되돌아오기를 바라나? (비웃는다.) 헛된 꿈을 꾸지 마시오, 운국의 왕.
전시 중에 적국의 왕을 귀빈으로 초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촌극은 잠깐뿐. 곧 그대의 목을 잘라 해원국의 성문에 걸어둘 것이다. 그전까지 찰나나마 남은 삶을 누리도록 하라. 이 궁 안에서라면 무얼 원하건 들어주지. 그대는 나를 저버렸으나 나는 그대에게 한때 반려였던 자로서 마지막 은혜와 공덕을 베풀 것이다.
배이화:(...무얼 원하건. 그렇다면 이전처럼 한 줄기 봄볕같은 눈빛으로 나를 봐달라할까. 목숨 따위의 것, 아깝지도 않으니 그것 하나만 바란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헛된 꿈을 꾸고 싶다고? ...아니, 아니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내 마지막 순간에 웃어주시오. 그거면 됩니다.
(멀쩡히 살아 차라리 나라는 것도 잊고 그리 웃어주면 좋겠어.)
이 연:(걸쳐 있던 옅은 웃음이 사라진다. 그는 날카로운 듯 공허한 낯으로 이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미련하기 그지없는 부탁이군.
죽음에 즐거워해주기를 바란다면야. 그리하지.
배이화:(...그리하여 그대는 영영 자유로워지세요. 그대를 옭아매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행복해지세요. 그렇게 남은 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러나 그리 깊이 생각하기에 이화는 눈 앞의 이에게 너무 절실했고, 그렇게라도 자유를 찾아주고자 했다.) ...예, 그거면 편히 눈 감을 수 있겠습니다. (구름은 비되어 바다로 흐르니, 내 마지막에 눈 감을 곳은 그대의 곁이라-)
어느덧 바깥은 달이 휘영청 떠오른 깊은 밤입니다.
배이화:(굳게 닫힌 문이 그대의 마음을 대변하는가. 고개를 들면,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을 닦아내고서 조용히 돌아간다.)
이화는 별채의 곁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듣습니다.
배이화:
듣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제대로 된 의식이라기보다는 비명이나 울음 소리가 섞이는 걸 보아 마치 방언을 하고 있거나 광인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섬뜩한 기시감. 당신의 정신 기저를 첨예하게 꿰뚫는 소리.
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봐야겠다는 직감이 당신을 사로잡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저런 소리에 기시감을 느낄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배이화:(무언가의 충격같은 것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간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별채로 가는 걸음이 빨라진다.)
나무 판자로 온통 막힌 문, 창호마다 빽빽하게 붙어있는 부적.
바깥으로부터 안을 지키는 건지, 안으로부터 바깥을 지키는 건지 모를 호위병들.
아, 당신은 이 광경이 익숙합니다. 운국에도 이런 곳이 한 번 있지 않았습니까.
도저히 인간이 내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비명과, 본인은 알지도 못한 것들을 떠들어대는 방언.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이성> 판정 (1/1d2)
배이화:(...그때와 같아. 그때와 너무도...)
SAN Roll
| 기준치: |
61/30/12 |
| 굴림: |
1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배이화:(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문을 열어본다.)
문을 열려 하자 곁에 있던 해원국의 궁인이 만류합니다.
궁인:마마……! 이곳은 함부로 들어가셔서는 아니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귀빈이란 말을 들어서인지 강하게 말리지는 못한다.)
배이화:......비켜서시게. 저 안을 확인해야겠으니. (말리는 궁인을 뒤로 하고 다시 문을 열어본다.)
궁인은 쩔쩔매면서도 이화를 더 막아서지 못하고 비켜섭니다.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방, 난장판이 된 내부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온통 머리를 풀어헤치고, 벽마다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어둔 그는 비명을 지르고 흐느끼다가도, 알 수 없는 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처럼 온 몸을 뒤틀고 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합니다.
배이화:(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잠시 굳어있었다.) .......거기 누구시오. 괜찮으신 겝니까.
그는 이화의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더니, 당신을 발견하고는 느리게 기어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눈가에는 해원국의 왕처럼 붉은 자국이 남아있으나, 화장으로 칠한 것이 아닌 제 몸에 피를 내어 눈가에 바른 것마냥 덕지덕지 검붉습니다.
???: : ……연, 연이냐? 연아, 나는, 나를……. 나를 부디 용서해다오. 내가 다 잘못했다. 나라고 네가 미워서 그랬겠느냐, 살기 위해 그랬을 뿐이야. 그런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냐? 그분께서는 왜 너여야만 한다시는 거냐? 응?
아니다, 내가 다 잘못했다. 감히 내가 어찌 그분께……. 해원님께…….
아,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고면하여주소서…….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상대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처럼 되는대로 떠들던 끝에는 실성한 이처럼 웃어제끼다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방의 구석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얼마 가지 않아 그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기 시작하며 몸을 뒤틀어댑니다.
그 순간, 다급하게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와 이화를 끌어냅니다.
궁인2: 여, 여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분명 잠시 뒷간에 다녀올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해두었는데, 분명…….
이화를 바깥으로 끌어내고는 단단히 문을 걸어잠근 채, 이화를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궁인2: 어,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전하께서 이 안의 일들은 모두 발설하는 것을 금지하셨으니, 함부로 떠들고 다니셨다간 혀가 잘리실지도 모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이, 적당히 구슬린다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배이화:...다른 곳에서 함부로 입 열지 않을테니 안심하게. 궁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예가 아닌가. ...안에 계신 분께서 해원국 왕의 이름을 입에 올리던데... 대체 누구신가?
대인관계 판정 해볼까요? (매혹, 설득, 말재주, 위협)
배이화:
설득
| 기준치: |
40/20/8 |
| 굴림: |
78 |
| 판정결과: |
실패 |
궁인2: 흠, 흠! 궁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 그런 것을 여쭤보셔서야 되겠습니까. (헛기침을 한다.)
배이화:(잠시 눈여겨보다 바로 선다.) ...눈가에 꼭 해원국의 왕처럼 붉은 것을 칠하고 계시기에 왕가에 속한 분이시라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 모셔두는 것이 여간 이상해서 그런단다. 조금이라도 이야기해줄 수는 없겠니? 꼭 비밀로 하마.
말재주
| 기준치: |
45/22/9 |
| 굴림: |
3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궁인은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가 싶다가, 결국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입니다.
궁인2: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안에 계신 분은 본래 해원국의 왕이셨던 분입니다. 현 금왕 전하의 배다른 형제시지요. 세간엔 돌아가셨다 알려져 있으나 실은 폐위되어 여기 갇혀 계십니다.
배이화:...폐위되었다고? 말이나 정신이 많이 혼란하신 듯 하였는데 그 때문인가?
궁인2: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릴 더욱 낮춘다.) 어느 순간부터 저리 광기에 휩싸이셔선, 방언을 하시고 환각과 환청을 보십니다. 병자처럼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가 어느 순간엔 장정 몇이 달라붙어도 이기지 못할 만큼 힘이 솟기도 하십니다. 참으로 기이하지요.
(그러다 정신이 들었는지 숨을 핫 들이키며 주변을 미친 듯 두리번거린다.) 제, 제가 이곳의 일을 발설한 걸 전하께서 아시면 제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겝니다. 부디, 부디 방금 말씀드린 건 모두 비밀로 해주십시오!
배이화:(그 앞에 무릎을 굽혀 나란히 높이를 맞춘다. 누가 들을까 속닥인다.) ...무척 고맙구나. 내 원은 잊어도 은혜는 잊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 걱정마렴. 이 비밀은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지키마.
궁인2: 감사, 감사합니다. 저는 마마만 믿고 있겠습니다!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다.)
그럼 저는 다시 감시를 위해 되돌아가보겠습니다. 마마께서도 속히 돌아가시길……
처소로 돌아온 당신은 안쪽에 낯선 인기척이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화에게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연이 당신과 다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왔을 리도 없습니다.
혹 전시 중에 적국의 왕이 기거하는 곳을 알고 해원국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 자객이 되어 숨어든 것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배이화:(......숨을 삼킨다. 밤 중에 숨어든 자객일까.) ...누구냐.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면 없는 일에 부칠 것이다.
순간적으로 완전히 착각할 뻔했지만, 그는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도 않고, 적의를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다만 연처럼 눈가에 새긴 붉은 원怨 의 자국,
그리고 그처럼 해원국의 복식으로 차려입은 모습 탓에 눈앞에 그를 두고도 기묘한 감각에 심장이 자맥질합니다.
배이화:......세상에, 담..! 그대- (반가운 발걸음은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익숙하고 기묘한 모습에 잠시 말이 멎는다. 차게 식은 손이 더듬더듬, 눈가를 어루만진다.)
...그대가 어찌하여 해원의 복식을 하고 계십니까.
이 담:아. (잊고 있었던 듯 무심결에 제 눈가를 매만지다가 희미하게 웃어보인다. 옅으나 온정적이고 부드러운 웃음. 지금의 연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온도다.) 용서하십시오. 막사에 따로 갇힌 채 지내다 보니 전하의 소식을 접할 길이 없어 옷과 분을 훔쳐 금왕 행세를 잠시 하며 궁을 돌아다녔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금왕에게 들켜 이곳으로 내쫓겼지만, 차라리 전하와 함께할 수 있으니 잘되었다 싶습니다.
겉옷을 벗고 있던 걸 보아하니 이 방으로 보내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네요.
배이화:(분명 똑닮은 얼굴인데, 눈빛이며 표정의 차이로 꼭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새삼스럽다.) ...사과를 해야할 건 나이지요. 그대의 처우를 더 우선했어야 했는데.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험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는지 서둘러 살핀다.) ...막 돌아오셨습니까? 금왕께서는 별말씀 없으셨고요?
이 담:아닙니다. 따라오겠다고 자청한 건 저이지 않습니까. (옷자락 찢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하다.)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금왕을 맞닥뜨렸을 땐 그대로 목이 날아가는가 싶었으나 별 말 없이 보내주더군요.
그가 전하를 불렀다 들었습니다. 전하야말로 변고 없으셨습니까. (걱정 어린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배이화:그대가 앞서 나섰을 때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압니까. (그제야 눈에 띄게 안심하며 손을 꼭 붙잡는다.)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별말씀 없으셨다니 그 또한 다행이고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고는요. ...참, 금왕께서 궁에 있는 동안 마지막 은혜와 공덕을 베풀어주신다 하였습니다. 담, 그대와 병사들의 안위는 내 꼭 책임질테니 걱정마세요. 꼭 운국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비록 나를 원망한다하나, 뱉은 말을 돌이킬 성미도 아니거니와 도리를 아시는 분이니까요.
이 담:멋대로 나서 송구합니다. 허나 전하께서 홀로 적국에 끌려갔다 어떤 고초를 겪으실지 걱정이 되어 몸이 먼저 움직여 버렸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러다 의아함에 시선을 들어올린다. 마지막 은혜와 공덕이라니? 투명한 연보랏빛 홍채와 눈을 맞춘다.) …… 전하께서는? 가장 중요한 건 전하의 안위입니다.
배이화:(눈가에 그려진 붉은 화장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부드럽게 웃는다. 웃음만큼 손길도 조심스럽다.) ...내게 사과하지 마세요. 고개 숙일 것은 나인데, 항상 그대가 먼저군요.
(여느 때처럼 선명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면 물든 소매를 가지런히 내린다. 짦은 침묵 뒤에는 거짓을 택했다.) 국서께서는 걱정 마세요. 금왕과의 일이 풀리면 금세 따라 돌아갈 수 있겠지요. 지금도 나를 귀빈으로 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담:전하께서는 제게 사과할 일도, 이유도 없습니다. (손길에 가만 제 얼굴을 맡기면서도 말투만은 자못 단호하다. 마음 한 조각 받지 못한대도 그는 제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지.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사냥꾼 이담으로서의 삶도 분명 있었을 테지만 궁에 들어와 당신을 본 후에는 그런 것쯤 전부 무용해졌다. 운이 좋아 국서라는 자리까지 받게 되었으나 직책이 없더라도 그저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한 떨기 꽃처럼 빛나고 한 마리 나비처럼 연약한 당신을.)
(그러니 알아챌 수 있다. 예측할 수 있다. 안심시키려는 말 뒤에 숨긴 진실을. 하지만 그는 캐묻는 대신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낮게 중얼일 뿐이다.) …… 전하께서 걱정하지 말라 하신다면 마땅히 따라야겠지요.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묻는 대신 담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전하. 그렇다면 오늘 밤은 저에게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다시금 전하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할 것만 같으니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배이화:...나는 늘 그대에게 미안함 뿐인데. (어디 하나 발 묶인 곳 없는 자유로운 삶에서 떼어내 좁은 새장 안에 가두었으니까. 그대가 단 하나 바라는 것을 여즉 쥐어주지 못해서 미안함 뿐인데.)
(담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눈치챈다. 그 역시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을 책망하지도 캐묻지도 않는다. 무엇을 내어주어도 그저 감내하는 이. 참으로 고맙고 미안한 사람. ...그대에게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담과 함께한 시간이 짧지는 않았다. 메마른 겨울 가지에도 움이 트기 시작했었으니까. 겨우 되찾은 미소를 얼굴에 그린다.) ...얼마든지.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 이곳에 있는 동안 무엇이라도 들어줄테니.
이 담:미안함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감정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욕심입니까? (미소한다. 저와 같은 무게의 마음이 아니더라도 좋으니 얼어붙은 동토 속에 갇힌 듯한 당신이 조금이나마 안정과 평온을 얻을 수 있었으면……)
전하의 남은 밤을 저에게 온전히 내어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어느덧 눈화장이 지워지고, 해원의 겉옷을 완전히 벗어낸 그가 이화의 한 뺨을 부드럽게 감싼다.) 깊은 새벽까지 말동무나 해주시겠습니까?
배이화:(봄 볕에 서리가 녹듯, 편안한 웃음으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끌어올리려 목소리는 되려 가볍다.) ...아니, 욕심은. 국서께서는 늘 포부가 겸손하셨지요.
(온기에 뺨을 기대어 올려본다.) ...그래, 내게 남은 밤은 그대의 것이야.
이 담:(제가 욕심내고픈 건 단 하나뿐입니다. 전하의 마음. 그러나 그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
운국에 돌아가면 함께 말을 타고 너른 들을 누비고 싶습니다. 전하를 닮은 보랏빛 꽃이 만발한 곳을 말입니다.
배이화:(언젠가의 광경을 떠올리듯 눈을 감는다. 그러나 그것이 연과 함께 말을 달리던 때의 일인지, 담의 품에 안겨 있을 때의 일인지 뒤섞여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좋지, 너른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늘 좋으니까.
분명 아름다운 풍경일 거야.
그대를 닮은 금빛 꽃도 섞여 있다면, 더더욱이.
(들판에 피어난 꽃처럼 소담하게 웃는다.) 그래, 또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 담:금빛 꽃보다야 보라색 꽃이 훨씬 보기 좋습니다. (침상에 걸터앉는다. 곁에 오라는 듯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바람과 풍경만을 즐기며 달리고 달리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도 깨끗이 환기되겠지요.
그리고…… 대련이라도 해 볼까요. 각자의 실력을 점검하기도 할 겸 말입니다. (당신이 연과 쌓은 추억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제안이다.)
배이화:정원에 그대를 위해 보라색 꽃을 잔뜩 심어뒀어야 했는데. (나지막히 웃으며 침상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그렇게 아주 멀리 멀리, 가보지 못한 곳까지 달려보고 싶구나.
(침묵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나란히 앉아 목소리만 듣고 있자면 예전의 다정하던 연인지, 담인지 보고도 헛갈려하는 자신이 퍽 우습기도 하다.) ...대련이라.
(그 날, 서로를 향한 마음에 빛이 들었던 날. 연의 눈이 꼭 지금 담의 눈처럼 선명하게 빛이 났다. 빛을 등지고도 선명하게 살아 숨쉬던 그 눈동자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잠시 목이 메어 목을 가다듬는다.)
...내가 그대에게 또 커다란 상처를 내면 어쩌려고? (담의 등을 커다랗게 가로지른 상처를 말하는지 고개를 뒤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 담:지금도 아름답습니다. 전하의 눈길이 닿아 이미 세심하게 꾸며져 있지 않습니까. (한 팔을 뻗어 이화의 어깨를 자연스레 감싼다. 기대어도 된다는 듯 감싼 몸을 살짝 당겨왔다.) 어디든 가실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길이라 걱정이 된다면 제가 앞장서서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니.
(이화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뜻을 눈치채고는, 부러 어깨를 가벼이 으쓱인다.) 그쯤은 별일 아닙니다. 상처야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에 지장이 갈 만한 부상도 아니었고. 흉터가 백 개가 생긴대도 상관없습니다. 전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배이화:(손길에 이끌려 그대로 어깨에 기댄다. 흔들림없이 늘 그 자리에 한결같은 온정에 온몸을 맡긴다.) 그대의 말을 들으면, 정말 무엇도 무서울 것이 없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지. ...그대는 내게 그런 존재야. 참으로 소중해.
...그러니 조금도 상처 나지 말았으면 하고. 그대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내 어찌나 안달이 나는지. ...지금도 보아. 자신보다 늘 나를 먼저 세우고.
(기대어있던 고개를 조심스레 든다.) ...담, 내게 등을 보여줄 수 있겠어?
이 담:제가 전하께 소중한 존재입니까? (이화의 말을 가만히 되풀이한다. 이화가 그 문장에 얼마의 무게를 실었을지는 모르나, 저에게는 얼마나 무겁고 깊게 다가오는지 과연 당신은 알까. 떠나버린 전 국서와 같지는 않을지라도 제가 이화의 내면에 조금이나마 들어갔다면…… 그의 안에 저를 위한 자리가 조금이라도 생겼다면…… 그건, 정말로 기쁜 일이다.)
운국에서 가장 귀한 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저에게 전하는 지존일 뿐 아니라 은애하는 분이기도 하니 더더욱. (고백은 물길처럼 망설임없이 흘렀다. 끝을 직감해서인 걸까. 이제는 저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는 것처럼……)
(눈을 내리감아 수긍의 뜻을 표하곤 천천히 몸을 돌린다. 고름을 풀고 겹옷을 벗어내리자 떡 벌어진 어깨와 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두운 피부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깊고 길게 패인 흉터다. 벌써 몇 년이 지났음에도 도무지 지워질 기미 없는 지난날의 흔적.)
배이화:...소중하고 말고. 그대가 그리 느끼지 못했다면, 내 무척이나 소원했나보아. 이 또한 마땅히 사과해야 할 일이겠지. (평생에 걸쳐 지켜야 할 약조가 있으니, 되려 거리를 두었던 탓이리라. 담의 물음에 담긴 마음의 크기를 깨닫고, 자신의 말의 무게를 탓하기에 충분한 말들이 이어진다. 어두운 밤, 구름이 달을 가리는 순간에 전해지는 고백에 제 행동과 말들이 두 사람 모두에게 얼마나 잔인했을지 이제야 실감한다.)
(...담이 나를 은애한다, 은애한다. 정말로. 한순간도 그리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냐기에는 아니다. 담은 행동이며, 따스한 말,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마음에는 갑옷을 두를 수 없어 내내 상처만 받았으면서. 그럼에도 직접 입으로 들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라. 때마침 담이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다. 기쁜가? 무척이나. 또한 슬픈가? ...무척이나.)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야. 평생을 다해도 갚지 못할까봐 너무 두렵구나. (잘게 떨리는 손을 여전히 선명하게 남은 상처 위에 얹는다. 소매로 문지른들 지워질까, 귀한 약을 가져다 얹어도 조금 희미해지는 것이 다였다. 그 상처가 귀한 것이라도 되는 듯 소중히 덧그린다.) ...왜 한번도 말하지 않았어? 그대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이 담:이 또한 사과하실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는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당신은 나를 중하게 여길 의무가 없다. 그저 지난날의 사랑을 닮아 곁에 들였을 뿐이라며 냉대하여도 견뎠을 텐데. 오히려 빈자리를 꿰찬 이에겐 과분한 대접이었다. 결코 동일한 무게와 깊이만큼 돌려받을 수 없더라도 괜찮다. 함께 보낸 3년의 시간으로 됐다. 이렇게 진심을 전할 수 있으면 족하다. 연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이화는 욕심을 부리려고 해도 부릴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원한다 하여 감히 가질 수 있다 자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선이 차단되어 이화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가 분노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으리라 추측하지만, 거절할 여유를 얻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피했을 수도 있으리란 가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화는 상냥한 사람이니 제게 상처주지 않을 방법을 고심하겠지. 저는 아무렴 괜찮은데. 무쇠처럼 굳건하고 돌처럼 강인한 심신은 이때를 위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같은 마음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기에.
전하의 안에는 이미 오래 전 떠났음에도 잊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을 거라 여겼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저에게 억지로 맞춰주시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담을 지워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전하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전하의 일상과 지난한 위기를 모두 함께 맞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비로소 기쁘겠습니다.
배이화:(지울 수 없는 상처를 손끝으로 더듬어 덧그리고, 경계를 흐리면서 담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비로소 온전히 전해진 마음은 자신이 받아 들기에는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말없이 품고만 있었다.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다. 그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이를 만났으면 좋았을걸. ...겨우 내가 아니라, 그대의 바다 같은 마음을 다 품어줄 수 있는 이를 만났어야 했어. 그대를 자유롭게 사랑하며,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이를 사랑했어야 했어. ...나는 그대의 고백에 응할 자격이 없으니.)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끝에 손이 떨구어진다. 대신 힘없이 고개가 기대어진다.) ...미안하구나. ...억지가 아니야, 부담 또한 아니다. 그대의 마음이 무척 기뻐...
(순순히 응할 수 없으면서도 자유로이 놓아 주지도 못하는 것이 참으로 이기적이다. 그럼에도 곁에 남겠다는 말에 기뻐해도 되는 것일까. 연의 손에 목이 떨어지는 그 때에 꼭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그래, 나 역시. 그대가 곁에 남아준다면 비로소 기쁘지 않을리가 없겠어.
(등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잠시 멀어지는가 싶더니, 뒷 목 언저리, 길게 이어진 상처의 시작점에 무언가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이 담:(맨살갗에 닿아오는 이화의 살결이, 머리칼이, 옷자락이 참으로 생경하면서도 기껍다. 보드랍고 은은하여 영영 떨어지기 싫어진다. 길어지는 침묵도 쉬이 나오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대답도 모두 예상한 바다. 그는 연정을 자각하는 동시에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 받을 수 없다 하여도,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도 납득하였을 터인데. 당신은 너무도 다정하여 저의 하찮은 고백마저 진실되게 귀기울이고 고찰해준다.)
예. 그거면 됩니다. (등 하나만이 켜진 별채.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담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사랑이란 가당찮은 감정을 품었음에도 밀쳐내지 않는 당신에게 그저 고마울 뿐.)
(목에 닿아오는 촉감은 머리칼이나 피부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무엇인지 깨닫는 동시에 귀끝에 열이 오른다. 짧으나 가벼운 입맞춤이 마치 달아오른 쇠로 새기는 각인처럼 뜨겁게 남는다. 죽는 순간까지도 지금을 잊지 못하리라.)
(옷을 느슨하게 어깨에 걸치고 뒤돌아 저의 국왕이자 짝사랑하는 이를 마침내 마주본다. 소년 같은 열꽃이 뺨에 점점이 번진 채다. 당신의 얼굴을 감싸더니 드러난 이마에 스치듯 입술을 붙였다. 투박하고 거친 손과 다르게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찰나였다.)
배이화:(어둑하고 고요한 공간. 다른 색의 시선이 잠시간 교차하고 이내 맞닿았다. 아주 짧았으나, 영원같이 긴 순간이었다. 닿은 이마가 불에 댄 듯 뜨겁다. 분명 발그레하게 열꽃이 핀 저 뺨과 제 이마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의 낯은 이토록 아름답구나.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꼭 그대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 슬픔과 상처를 다 끌어안고 이 생에 다 못한 마음을 갚아주리라. 그대는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나는 반드시 그대를 사랑하게 될테다. 그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돼. 그저 자신만을 사랑하며 살아. 그리하여 누구도 슬프지 않은 사랑을 하리라.)
(반대로 제 손을 당신의 뺨에 가져간다. 단 하나, 엄지의 끝만 입술 위를 가로지른다. 다른 색의 눈이 다시 가까워진다. 겹쳐 올린 엄지의 위로, 입술을 맞추고 느릿하게 몸을 물린다.)
그대에게까지 죄를 짊어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담:(시선이 맞닿고, 고개가 가까워지고, 숨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딱 손가락 하나만큼의 거리. 이것이 우리 관계 사이에 그어진 선이다. 단번에 넘어갈 수 있을 만치 짧으나 마치 드넓은 강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도저히 거스를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낯으로 하염없이 이화를 응시했다. 기쁘면서도 야속하였고, 슬프면서도 고양되기도 하였다.)
(그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다. 내세라는 건 너무도 멀고 아득한 개념. 눈앞의 현실만을 직시하는 이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지금 주어진 삶을 후회 없이 불태우며 살다 구름 속에서 물방울로 흩어지리라. 사랑이 연료가 될 것이고 의지가 연기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죄라 하여도 나누어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 하시면 따르지요.
대신 전하를 힘껏 붙들겠습니다. 함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배이화:(명료한 목소리. 언제나 선은 긋는 것은 자신이고, 당신은 언제나 그 밖에서 머무른다. 떠나지 않고 멀어지지도 않고, 늘 바로 앞,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망설임과 미련이 뒤섞인다. 뺨에 닿은 손은 여즉 붙어있다. 비슷하게 맞아든 온기가 꼭 하나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지을 수 있는 죄로서, 그대를 기쁘게 한다면....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 남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라면-)
...그대의 후회로는 남고 싶지 않았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목을 타고 넘는다. 그래, 마침내. 오로지 자신만을 말하는 입술에 죄의 무게를 겹친다. 부드러우나, 눈물이 날 만큼 아프다. 눈물로 젖은 밤, 흐린 기억이 되살아난다. ...숨을 나누는 만큼 죄가 나누어지는 걸까. 하늘로 날아갈 그대를 무저갱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닐까. 미련스럽게 떨어진 낯에는 달무리를 닮은 미소가 걸렸다.)
이 담:(이게 전부다. 더는 욕심내서도 탐해서도 안 된다. 저의 자리가 어떠한지 이화가 친절히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멈추어섰다. 원망스러워도 야속해도 한낱 삿된 감정일 뿐. 가라앉히고 삼키며 제 위치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깜짝 놀랄 만큼 강하면서도 때로는 한없이 약한 왕은 저희 사이 벌어져 있던 강을 고갯짓 한 번에 뭍으로 만들어 버린다. 손가락 대신 저의 입술과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 겹친다. 온도가 나누어지고 호흡이 뒤섞인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맞닿은 곳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열기로 달아오르면서도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충동이 당신을 부채질했을 가능성을 냉정하게 점친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전부 눈에 담아야만 한다. 당신의 머리카락과 뺨의 색과 숨을 뒤섞는 소리가 어떤지 올올이 조각하여야만 한다. 영영 잊지 않도록. 아, 이것으로 함께 지옥으로 떨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밀어내지 않으리라.)
후회할 일 없으나, 만일 후회라 하여도 전하가 담겨 있다면 그 또한 기꺼울 것입니다. (섞이는 숨결 사이사이로 나직한 속삭임이 샌다. 이화를 향해 보내는 손짓과 눈빛과 입맞춤 하나하나가 전부 연모한다는 외침과 같다.)
배이화:(떨리는 숨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떨린다. 어둠 속에 감촉이 더욱 선명하다. 닿은 입술이 뜨겁고, 가까워진 몸이 따스하다. 반듯하게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비스듬히 맞아 들어간다. 둑이 터진 듯 몰려드는 열기에 생각이 멀어진다. 이대로 녹아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리 선을 그었으면서 멋대로 휘저어버린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당신이 있어서일까. 나의 열렬한 구애자.
...우리 사이에 남은 밤은 얼마나 될까. 당신이 온몸으로 외치는 사랑에 함뿍 적셔진다. 지금이 한 순간이 누구에게도 후회로는 남지 않도록.)
(짧은 숨 사이로 흐르는 것은 담의 이름이다.)
너무도 애틋해 도리어 아프기까지 한 사랑이 당신을 연기처럼 감싸고 불길처럼 고양시킵니다.
이토록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연모하는 이를 무정히 내칠 만큼 매정하지는 못했으므로, 하여 숨을 겹칩니다.
함께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여도 이 순간을 후회치 않을 테지요.
서로를 향한 눈빛이 이렇게나 깊고 아득한데요……
별채에서 지낸 것은 하루 뿐이나, 시간 흐르기만을 막연히 기다리고 있자니 마치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축생이 된 듯합니다.
담은 잠을 설친 것처럼 깨어나지 못하니 달리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요.
그를 깨워 단잠을 방해하느니 차라리 잠깐 나가 산보나 즐기고 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이화:(잔불이 꺼지고 나니 시린 아침이다. ...금방 돌아오면 괜찮겠지. 혹여나 담을 깨울까 싶어 조심조심 소리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선다.)
별채 바깥으로 나서니 옆의 길을 따라 길게 난 화단이 보입니다.
여태까지는 정신이 없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네요.
아니, 그보다 화단이 눈에 띈 건 그 길을 따라 연이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이화:......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를 볼 낯이 없어 느리게 바닥으로 고개를 내린다.)
이 연:(느리게 화단가를 따라 걷다가 이화를 발견한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한다.)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내가 어려워졌나?
배이화:(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산보를 나오셨나 봅니다.
이 연:그렇소. 어려워진 게 아니면 그대가 머무는 곳인 별채까지 내려온 게 심기라도 불편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시선을 맞추려는 듯이.)
배이화:...아니, 그것이 아니- (고개가 들리면 시선이 딱, 겹친다. 변명은 입 안에서 구르다가 삼켜진다.) ...그럴 리가요. (언제가 되었든 보고 싶던 얼굴인데.)
...여기까지 오시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어젯밤의 마지막이 그러했으니까.)
이 연:짐의 궁이니 어디를 가든 짐의 마음이오. 그렇지 않은가? (무심히 답하곤 몸을 돌린다.) 그대도 산보를 나온 듯한데, 갈 곳이 없다면 따라오시오. 구경 정도는 시켜줄 수 있으니.
배이화:...그렇지요. (돌아서는 등을 아쉽게 담던 눈이 커진다.) ...따라가도 괜찮겠습니까?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금세 따라붙는다.)
이 연:아무리 증오스러워도 하루 내내 화를 내는 건 불필요한 감정 소모지. 그런 데에 여력을 두는 건 기력 낭비야. (무뚝뚝하게 일관하며 몇 걸음 앞서 나갔다. 보폭이 큰지라 몇 번이나 멈추어서며 이화를 기다렸던 한때와 달리,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다.)
배이화:(자신과 키가 저만치나 차이 나는 이와 나란히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가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맞춰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등이 멀어지는 것이 괴로워 몇 번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금방 숨이 찬다.)
이 연:(한참을 앞서다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호흡 소리가 거칠어진 걸 깨닫고서야 멈춰선다. 그러나 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배이화:(겨우 가까워진 등을 보고서 잠시 숨을 고른다. 별 것 아닌 것에 왜 눈이 시려지는지 모를 일이다.) ...미, 미안합니다. 기다려주어 고마워요.
이 연:(대꾸 없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속도가 비교적 느려진 것 같다면 당신의 착각일지, 진실일지.)
연과 함께 화단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덧 길은 언덕을 따라 미로 같은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화단마다 색색의 꽃이 심어져 있으며, 정원의 중앙에는 보라색 나리꽃이 한가득 심어져 있습니다.
운국에서 지낼 적에도 정원에 향기로운 나리꽃과 황매화를 가득 심고는 했었죠.
배이화:(나를 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어제의 그대가 진실일까, 다시 불같은 눈으로 나를 내쫒던 그대가 진실일까. 비교적 가까워진 지금의 등이 진실일까. 조용히 생각을 좇으며 정원을 거닌다. 이어진 익숙한 풍경에 멍한 눈에 빛이 든다.) ...여전히 보라색 나리꽃을 좋아합니까? 황매화는요?
......운국의 정원에도 여전히 소담히 피어납니다.
이 연:(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 글쎄. 원예에는 그리 소질이 없어서. 정원사들에게 마음대로 꾸며 보라 명했을 뿐이오.
아직 황매화 뿌리를 다 뽑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아직 나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겠군.
배이화:...그렇습니까. (지나간 추억처럼 흐린 목소리가 지나간다.)
예, 언제고 운국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인걸요. 어찌 뿌리를 뽑습니까.
...언제고 잊은 적이 없지요. 황매화가 잔뜩 피는 계절이면 가끔 그 덤불에 파묻혀 있기도 합니다.
이 연:미련한 짓을…… (저를 잊었다 비난하던 이치고는 다소 의아스러운 말을 중얼인다.)
정원을 거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황금빛과 연보랏빛의 꽃잎을 무기질적으로 내려다본다.) 이제 난 꽃이나 자연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그러니 이곳에 피어난 꽃을 얼마든 구경하거나 꺾어가도 좋아. 그리도 향이 마음에 든다면 운에서 하였던 것처럼 덤불에 파묻혀 고국을 그리워하시오.
배이화:...미련하다 하여도 좋습니다. 저마다 영영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모양이니까요. (조용하나, 곧은 미소를 지으며 나란히 선다.)
...그렇다면, 보통 무얼 하십니까? 이제는 무엇에 관심을 두세요?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시금 입을 연다.) ...꽃은 꺾으면 금세 시들어버리지 않습니까. 저는 아주 오래 두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연:그대는 이제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약조는 깨졌다. 그래도 나를 잊지 않을 텐가? (바람결에 실려오듯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고자 힘쓰지. 한 나라의 왕이니까. 전쟁, 약탈, 복속. 내게 남은 건 그뿐이야. (천천히 읊어나가는 음성은 어딘지 공허하게도 들린다.) 마음대로 하도록. 내가 베푼 자비를 어찌 받아들이느냐는 그대의 몫이니.
배이화:예, 그렇다 할지라도. 잊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다 해도요. 바라는 것, 그거 하나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 이루어질지 모르지요.
(그의 입에서 차마 듣고 싶지 않았던 단어들이다. 어린 시절 나누었던 미래에는 없던 것이었다. 이미 두 사람이 그린 미래는 일그러졌고, 지워져 그 위에 덧칠되고 있으니 아쉽다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말이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들리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
...그럼, 잠시만 손을 빌려주세요.
이 연:하. 누가 그 소원을 이루어주지? (작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천천히 손을 내민다. 무기도 없고 가냘프게 마른 이가 제게 해를 끼치지는 못할 테니.)
배이화:...글쎄, 누가 들어주면 좋겠습니까? 그대가 바라는 대로 될지도 모르겠어요. (내밀어진 손을 조심스레 받아든다. 황매화를 줄기 채로 길게 꺾어다 손가락에 감는다. 어렸을 때에 가끔 치곤 했던 손장난이다. 들꽃을 꺾어 꽃반지로 만들던 것.)
...여전히 이 꽃이 잘 어울리십니다.
이 연:(하얗고 섬세한 손이 꼬물거리는 동안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내 완성된 꽃반지를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피부에서 홀로 황금색을 지닌 꽃송이는 유독 강렬해 보였다. 익히 잘 아는 향기가 풍겨온다.)
참으로 하찮군……. (퍽 냉담한 말이나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진 않다. 홍채는 분명 꽃송이와 같은 색인데 생동감도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소꿉놀이를 할 나이는 애진작 지났을 터인데.
배이화:...예. 진작 지났지요. (가만 올려본다. 낯에는 고요한 웃음 뿐이다.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야했다. 꽃잎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둔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자가 이리 하찮은 것들만 좋아합니다. ...내게는 과분한 자리라는 방증일지도 몰라요.
...그런 자가 그린 평화이니 이리 깨어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연:과분한 자리라…… 그런 마음을 품고 있으니 나에게 이리 허무하게 붙잡힌 게 아니겠는가? (한때 운국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머리 맞대어 논의했던 적이 있었다. 이화가 그려나가던 다채로운 그림에 색을 더하고 종이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상상하며 즐거워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전부, 전부 안개처럼 흩어져버린 허상에 불과하다.)
(그는 전 반려가 직접 만들어준 꽃반지를 여전히 손에 끼운 채 눈을 잠시 내리감았다가, 떠올리며 입술을 벌린다.) 금일 저녁 축하 연회를 열 것이오. 거기서 그대의 목을 베어 오랜 전쟁의 끝을 해원국의 승리로 장식했음을 널리 알리고, 날이 밝는 대로 출정하여 운국의 궁을 복속시키리라.
배이화:...커다란 주춧돌이 빠져버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숨과 닮은 고요한 목소리. 커다란 나무 위에 나란히 앉아, 운국을 내려보며 미래를 그렸던 때를 생각한다. 혼자였다면 절대 다 그려나가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이제 와서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어, 그대가 사라진 후로 조금씩 망쳐갔는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전쟁이 끝을 맺는군요....
...예,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깨어진 약조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기로 했으니까요. 허나, ...군자의 덕에 마지막 인정을 빌어 하나만 청하나이다. 운의 백성들을 가여이 여기고 어여삐 여겨주소서. ...군주의 우둔함이 어찌 백성들의 죄가 되겠습니까. ......부디 그들을 가여이 여기소서. (두 손을 모으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인다.)
이 연:(주춧돌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터이나 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조할까, 혹은 새로운 국서를 들이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불경하다고 화를 낼까. 어떤 선택지도 흡족하지 않다.) 참으로 길었지.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데 말이야. 긴 길을 돌아왔소.
…… 운국의 궁에 해원의 깃발을 꽂는다면 그 순간부터 그곳도 해원의 땅.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지. 정세가 뒤바뀌며 다소의 혼란은 있겠지만 그들을 짓밟지는 않으리다.
배이화:(지금의 연이 비록 그때와는 달라졌다 한들,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는 연이다. 보고 싶었다, 잊은 적 없다 하였다. 그러니 이 대답이면 되었다. 가리워진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진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느리게 고개를 든다. 다만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해있다.)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친우이자, 한때 반려였던 이로서요. ...전쟁과 약탈, 마음없는 복속. 그런 것들은 그대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겁니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대를 웃게 할 것을 찾으세요. 나는, 그대가 피웅덩이에 홀로 서있지는 않았으면 해요. 그대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행복할 자격이 있으니까.
이 연:나의 행복은 그대가 신경쓸 바가 아니야. (차갑게 잘라낸다. 이어지는 말은 제 생각이라기보단 어딘가에서 듣고 배운 말을 그저 되뇌이는 것에 가깝게 들린다.) 모든 업이 제자리를 찾아가기만 하면 돼.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하다.
이야기를 하며 연은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합니다.
배이화:(업이라, 그대가 완수해야하는 업이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 되었을까. 겨우 들린 고개가 연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돌아간다.)
배이화:
관찰력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4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연의 시선 저편, 내전의 옆쪽에 위치한 호수가 있는 정원이 보입니다.
내전 옆을 드나들 때는 건물과 나무들로 교묘하게 가려져 알지 못했는데, 꽤 큰 규모의 호수네요.
그런데 궁 안에 저런 규모의 호수를 메꾸지 않고 두는 이유가 뭘까요?
배이화:(저렇게 큰 호수가 있었던가. 저 곳에 무엇이 있길래 당신의 시선을 끄는가.)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이 연:(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화를 돌아본다. 당신이 제가 보던 방향을 알아챘을까?) …… 그대가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곳. 어떤 일이 있어도 발을 들일 생각은 마시오.
배이화:(고개가 기울어졌으나 이내 끄덕인다.) .......그리하겠습니다.
이 연:명심하는 게 좋아. 모든 것을 보려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지.
(정원을 짧게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연회가 열리는 밤에 다시 봅시다.
배이화:(의아함에 돌아가려는 고개를 바로 한다.) ...예. 이리 다시 마주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화도 다시 처소로 향할까요. 시간이 제법 지났습니다.
배이화:(가는 등을 잠시간 눈에 담다가 정원을 나서 처소로 돌아간다.)
처소로 돌아오자, 담이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화가 잠시 산책을 다녀온 사이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네요.
이 담:전하. (옅은 반가움이 낯을 스쳤으나, 이내 갈무리하듯 고개 숙여 인사한다.) 잠에서 깬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산보라도 다녀오셨습니까?
배이화:(그대로 다 드러내어도 좋을텐데, 작게 미소하며 끄덕인다.) 예, 그대가 잠든 틈에 다녀오려 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많이 곤하신듯 하여, 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무료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담:전혀 무료하지 않았습니다. 배려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숙인 고개를 여전히 들지 않은 채 그가 나직하게 묻는다.) 혹, 금왕을 만나고 오셨습니까?
배이화:...예, 마주쳤습니다. 어찌 계속 숙이고 계세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감싸듯이 턱을 들어올린다.)
이 담:전하. (드러난 얼굴은 사뭇 가라앉아 있다. 전날 밤의 아련함과 풋풋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다.) 금왕이 전하께 가진 원怨이 무엇인지 이제는 아시나이까.
배이화:(말없이 살살 쓰다듬는 손끝이 애처롭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깨어진 약조가 가장 큰 이유이리라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것이 다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천천히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급작스러운 변화며 그와 비슷한 증세를 보이던 그의 혈연..)
대답을 들은 담은 이화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품에서 꺼내 내미는 것은... 은빛 단도입니다.
칼날이 창틈을 넘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거렸습니다.
배이화:(희게 비치는 것을 어떠한 표정도 담기지 않은 낯으로 내려본다.) ......담. 지금 그대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이 담:전하. 부디 노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전하가 진정으로 마음에 둔 이는 따로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무게만큼의 마음을 결코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해원국의 새로운 왕인 금왕이 저와 혼인한 전하께 원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면 제 목숨을 거두시어 금왕의 원을 풀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전하를 향한 진노를 거둔다면 해원과 운은 다시 화합할 수 있을 것이며 전하 역시 옛 연인을 되찾으실 것입니다.
전하와 운국을 위하여 이 자리에서 저를 죽여 주십시오.
배이화:...죄를 나누어지고 싶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담의 손에서 빛나는 것을 쥐어 들고 거의 무너지듯이 주저앉는다.) ...아니요, 아닙니다. 나는 그리는 못합니다. 하지 않을 거에요.
...내게 이러지 마세요. 그대의 죽음으로 원한을 끊어내는 것이 어찌 나와 운국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두 번은 눈 앞에서 내 사람을 잃지 않을 거에요. 그것이 내 잘못으로 인한 것라면 더더욱. (날을 제 쪽으로 돌려 다시 담의 손에 쥐어준다.) 그대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그대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담, 그대에게 검은 당신을 해하는 것이여서는 안됩니다. ...그대를 지키는 데 쓰세요, 부디.
이 담:그때는…… 이런 생각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험지더라도 가능한 한 살아서 전하의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왕의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그러나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저로 인해 전하가 위험하신 거라면? 저 때문에 적국에 끌려와 겪지 않아도 될 고초에 시달리시는 거라면. 그렇다면 저는, 제 몸 말고는 마땅히 내걸 만한 수단이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한 번이라도 답례를 받았으니 되었다. 한 번이라도 연모하는 이와 입술을 겹쳐 보았으니 더는 부족할 것도 없다. 자신의 목숨을 장기말로 활용해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길로 닿게끔 만드리라.)
배이화:...담. 그대를 국서로 맞아 들인 것은 오로지 제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되었다 한들, 응당 내가 선택한 고초겠지요. 그대에게 이런 각오를 하게 한 것 역시 내 탓입니다. 모든 시초가 나인데, 어찌 그대가 이유가 됩니까.
(사랑 앞에 쉽게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이를 바라본다. 통촉이라, 담담히 늘어놓는 그의 각오는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흰 손은 날카로운 비수의 손잡이가 아니라 날을 붙잡는다. 잘 벼려진 날은 손바닥을 쉽게 파고든다. 예리한 통증 뒤로 뜨뜻한 것이 울컥, 안쪽을 간질인다.)
...내게는 그대를 해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해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이 담:시작이 전하께 있다 할지라도 더 우선하여야 할 목숨을 따진다면 당연히 저보다는 전하입니다. 전하께서 제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전하를 위해 한 몸 바치겠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게 아닙니까. (실은 그도 뇌내 어딘가에서는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이 완전한 해결책은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이화를 해칠 게 분명한 금왕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다면.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걸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바위나 태산처럼 무겁게 무릎 꿇은 채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었으나, 이화의 고운 손을 적시는 선혈을 본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전하! (황급하게 이화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칼이 어디에 놓이는지도 신경쓸 새 없이 자루를 놓아버리고는 다급히 그의 손을 살핀다.) 어찌, 어찌 이러십니까.
배이화:(새하얀 손 위로 선혈이 흐르는데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잔잔한 낯으로 담을 바라본다. ...참으로 미련한 사람.) ......이리도 나를 걱정하면서. 두고 간 내가 걱정되어 저승으로 편히 가지도 못할 테지. 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야, 왜. ...그대의 목숨을 앗아 평화를 되찾고 나면 그 후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 수 있겠어. 옛 연인을 되찾았으니 그저 행복하게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해?
...나를 기어이 살려두고선 또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대는.
이 담:(급한 대로 방에 있는 면포를 찢어 이화의 손을 감싼다. 따지자면 미약한 부상인데도 마치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극히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상처를 완전히 감싸 지혈하고서야 제 심장이 미친 듯 빠르게 뛰고 있음을 자각했다. 저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도 멎게 하는 것도 모두 당신일진대. 당신을 위해 태어난 인생이니 당신을 위해 모두 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정녕 전하를 살렸습니까?
배이화:(비바람에도 꿈쩍 않을 태산같은 이가 겨우 이 정도 상처에 이리도 다급하게 굴다니. 나는 그대의 마음을 아주 일각만 보았나 보다. 살짝 닿은 손끝을 붙들어 강하게 잡는다.) ...그래, 그대가 나를 살렸지. 눈 감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나를. ......꼭 끝없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 같았어.
그러니 마지막까지 내 곁을 밝혀줘. 이리 쉽게 꺼트리려 하지 말고.
이 담:(제가 당신을 살렸다면, 몰아치는 바다를 막기 위해 몸을 던지려던 저를 살린 이 역시 당신이다.) 스스로가 빛이 난다고 여겨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붙잡은 손길을 잠시 부드럽게 감쌌다가, 품 안에서 종이조각을 꺼내어 건넨다.) 일전 제가 해원국의 궁을 돌아보았다 하였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이 나라와 왕은 운국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저로선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들뿐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길을 걸으려 하실지 저로서는 알 수 없으나…… 여기, 별채를 나서 길을 따라 걷다보면 꺾인 채 드리워진 소나무 아래 작은 장서각이 있습니다. 그 안에 해원국에 관한 비서祕書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조금이나마 전하의 안위를 보중할 단서를 얻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배이화:(마지막을 말하는 그대보다, 미래를 도모하는 그대가 훨씬 아름답다. 그제야 다시 그늘이 가신 낯에 은은한 미소를 그리며 종이를 받아든다. 대체 무어라 적혀있을까, 조심스레 펼쳐본다.)
배이화:(시선이 한참 종이에 박혀있다가 떨어진다.) ...고맙습니다, 담. 그대는 늘 내게 힘이 되어주는군요. (담이 말한 곳으로 가기 위해 종이 조각을 품에 곱게 접어 넣고, 기약없는 약속을 남긴다.)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돌아오겠습니다.
(머리칼을 흩어 놓고서 별채를 나선다.)
이 담:(고개 숙여 인사한다. 길게 흩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칼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별채를 나서 걷다 보면 꺾인 채 드리워진 소나무 아래 있는 작은 건물이 보입니다.
입구에는 호위병 둘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도문원濤文院 이라 적힌 것을 보아하니 장서각인 모양입니다.
이화, 당신은 허가를 받지 못했으니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겠네요.
배이화:(앞에 호위병이 둘... 장서각은 중요한 곳이니 허가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다. 따돌리기에도 적합하지는 않을 테고... 호위병들이 잠시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몰래 숨어 들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소나무 아래에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다가 반대쪽 풀 숲으로 던져본다.)
흠칫한 호위병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숲을 향해 뛰어갑니다.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이 틈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배이화:(...다행이다. 틈을 타 소리를 죽여서 도문원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가라앉은 서책의 냄새들이 코끝을 간질입니다.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건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며, 그리 크지 않은 규모 덕에 내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장서각과는 별개로 위치해 있는 것을 보니 특별히 관리되는 서책이나 기록들이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
여섯 개의 책장이 2열로 세 개씩 늘어서 있습니다.
그 중, 당신은 어쩐지 낯익은
표식을 발견합니다.
운국에서 서책을 정리할 때에는 특별히 다섯 권마다 책을 조금 빼두고, 그 사이 확인이 필요하거나 중요한 책은 거꾸로 뒤집어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원국의 장서각도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 있기라도 한 걸까요?
잘 살펴보니 두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책장이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 누군가 먼저 이곳에 다녀가, 당신을 도우기 위해 표식을 남겨둔 걸까요?
배이화:(낯선 곳이나 익숙한, 친근한 냄새가 난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면... 어쩐지 낯익은 표식에 이끌려 책장으로 다가간다. ...해원 역시 이리 정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갸우뚱한 고개로 두번째 책장에서 뒤집어진 책을 먼저 살핀다.)
종교적인 서책이나 기록들이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해원국은 자체적인 종교를 믿으나,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폐쇄적인 탓에 왕과 귀족, 사제들이 아닌 이상 그 상세한 교리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이곳에서 신을 알고 있다는 건 일종의 특권입니다.
그렇기에 이화, 당신 또한 적국의 세자로서 그들에 관해 알아갈 때에도 그들의 종교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고요.
세 번째 줄에 책 하나가 거꾸로 뒤집혀 있습니다.
배이화:
자료조사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6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적당히 종이를 넘겨가며 들여다보자, 눈에 띄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제들에 관한 기록 같습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들이네요.
정황상 연의 즉위 이후 일어난 일인 모양입니다.
소해호小海湖라면, 낮에 연과 궁을 돌아보았을 때 보았던 정원을 말하는 걸까요?
배이화:(지금 연은 유일하게 해원의 신과 맞닿아 있는 이. ...소해호에서 흘러나오는 삿된 기운이 연을 그리 만든 걸까? 그 정원에 무엇이 있기에... 활자들을 외듯 꼼꼼히 읽고는 다시 넣어둔다. 다음은... 네 번째 책장.)
(거꾸로 뒤집힌 책을 찾는다.)
네 번째 책장은 이전의 기록들을 모아둔 책장 같습니다.
다른 책장에 비해 크기가 크고, 오래된 기록들이 한데 묶여있습니다.
선대 왕들부터 이어진 기록들을 보관해두는 모양이네요.
책장의 오른쪽 아래, 뒤집힌 책 한 권이 보입니다.
그 이후로는 빈 책장인 걸 보아 연이 즉위하기 바로 전쯤의 기록이겠죠.
배이화:
자료조사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58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선대 왕, 그러니까 연의 친족이 왕으로 즉위했던 때의 기록 같습니다. 순조로운 즉위는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배이화:(두꺼운 책을 훑어나가다가 중간 쯤에 멈춘다. 의식 이후 알 수 없는 병증... 그가 겪은 광증과 비슷했을까? 소해호에서 지낸 의식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서둘러 다음 다섯 번째 책장으로 넘어가 뒤집힌 책을 찾는다.)
다섯 번째 책장은 지금의 왕이 즉위한 이후의 기록들을 따로 모아둔 것인지,
다른 책장에 비해서는 작은 책장이며, 기록 또한 수가 적습니다.
첫 번째 책, 그리고 왼쪽 아래에 있는 책 한 권이 뒤집어져 있습니다.
자료조사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95 |
| 판정결과: |
실패 |
(...무슨 내용이지...종이만 한참 넘어간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눈에 띄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정말 부활한 것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지 적혀있지 않겠습니까.
책을 펼치자마자, 당신이 지니고 있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록들이 이어집니다.
배이화:(......세상에. 지금 제대로 된 글을 읽고 있는 것이 맞나?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같은 구간을 반복해 읽었다. 연이 이렇게 되살아났다니. ...그렇다면, 별채 근처에 갇혀있던 이가 차왕인가 보구나. ...아니, 그전에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이 내용대로라면, 그래요. 연은 정말로 부활한 겁니다.
그가 왜 당신에게 원한을 품었는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하지만 이화, 당신이 그걸 알아낼 수 있을까요?
당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임을, 그저 무력하게 추풍의 낙엽처럼 휩쓸릴 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성> 판정 (1/1d2)
배이화:(대단한 것을 알았으나, 한참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으니까. 아니, 모든 것들 다 알 수 있다 한들 어찌 해결할 수 있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SAN Roll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이화:(책장에 기대어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숨을 고르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다. 한참만에야 왼쪽 아래에 뒤집힌 책을 꺼내든다.)
배이화:
자료조사
| 기준치: |
80/40/16 |
| 굴림: |
8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왕의 일상적인 하명이나 대화를 기록해둔 책 같습니다만, 어째서 이 책이 뒤집혀있는 걸까요?
책을 펼쳐 읽다 보면, 굳이 집중해 보지 않아도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록 몇 개의 위로 검은 칠이 되어 있습니다.
애초부터 기록을 지우려 한 것이 아닌, 예전에 남은 기록을 최근에 지우려 한 흔적입니다.
최근에 이 내용을 이런 식으로 조악하게 지울 이유가 있던 걸까요?
다만, 지워진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적힌 내용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연은 재해가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당최 누가 그리 정해두었단 말입니까? 그렇게 정해둔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배이화:(...이건 최근에 덧그린 것 같은데. 검은 칠이 된 부분을 엄지로 슬 문지르며 적혀진 대화를 계속 중얼인다. 글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되는 것이 드물다. ...정해져 있는 일.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 중 발생한 재해를 미리 알고 있었어. 문득 기묘한 안광을 빛내던 해원의 병사들을 떠올린다.
무언가에 덧씌워진 듯 알맹이가 비어버린 연이 잇달아 떠오른다. ...업이라 하였지. 대체 누가? 그들의 신이?)
그때, 장서각의 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려옵니다.
하지만 숨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다 따로 도망갈 곳조차 없습니다.
배이화:(...큰일이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한 방도가 없으니 더 수상해보이기 전에 가만 서있기를 택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는 연과 비슷하게 눈가에 검은 화장을 한 채로, 사제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화를 훑어보고는, 마주보지 않으려는 듯 책장을 가운데에 두고서 입을 엽니다.
사제장:이곳에 있는 기록이 어떤 것들인지 알고 출입하신 겁니까, 운국의 왕이시여.
해원국에서는 해원의 법도를 따라야 하는 법이거늘, 설령 일국의 왕이라 해도 책임을 지셔야 할 겝니다.
당신에게 적의를 지닌 것 같지는 않네요. 당장 경비를 부를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배이화:(들고 있던 책을 잠시 덮는다. ...금방 쫒겨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제장이십니까. 허가없이 들어온 이가 쉬이 열어서 되는 기록이 아니란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 책임 또한 마땅히 질거요.
사제장:책들을 읽어보았다면 현 전하의 즉위에 관해서도 마땅히 알고 계실 터.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생각이신지요?
배이화:...그가 가장 바라는 방식으로. 허나 사제장께서는 더 좋은 방법을 아실지도 모르지요. (...정말 연이 되살아난 것이 맞구나. 짧게 숨을 삼킨다.) ...다만 알게 되었으나, 이해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입니다. 금왕께서 어찌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겁니까?
......소해호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요.
사제장:…… 그는 저희 사제들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중요한 정보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모르는 듯, 답답해보이기까지 한다.)
해원국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해원. 호전적이고 공격적인데다 결코 왕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신이 아닙니다. 허나 전하께선 신의 힘으로 부활해 홀로의 힘만으로 감당하고 계시니 영혼이 많이 망가지신 상태일 겁니다. (한탄한다.) 그 짐을 마땅히 나눠지는 것이 사제들의 일일진대, 그리하고 싶어도 사제들의 출입을 금하셨으니 얼마나 통탄스러운지.
배이화:...신의 힘으로요. (어째서 홀로 감당하고 있는 걸까. 그것마저도 정해진 일이며 흘러가야 할 업인가. 영혼이 망가진 탓에 지금의 연이 되었다면...) ......정녕 그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도 없단 말입니까.
사제장:(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전하는 신과 상당 부분 동화되셨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운국을 파멸시키고 해원국의 백성 또한 기나긴 전쟁에 고통받겠지요.
…… 한때 전하의 배필이셨고, 운국의 왕으로서 인애와 민심을 아신다면, 부디 전하를 막아주십시오.
그리할 수 없다면, 끝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께서 완전히 해원께 잠식되는 일만은 없어야 합니다.
배이화:(사세장의 말을 들으며 침묵에 빠진다. 이대로 끝을 맺는다 생각했으나 또다시 파멸과 전쟁이 이어진다면... 그건 아니 될 일이다. 입술이 느리게 떨어지면 한숨처럼 맥빠진 중얼거림이 흐른다.) ......내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
(허나,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해야만 하는 일. 끝까지 발버둥쳐보기는 해야지. 그저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래요, 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사제장:…… 곧 소해호 옆 우연루에서 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고자 궁인이 별채로 향했으니, 그대가 처소에 없음을 알면 곧 그대를 찾으러 병사들이 나설 것입니다. 신속히 우연루로 향하신다면 후환을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명심하소서. 모든 것을 알려 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 흐름을 거스른다면 가진 기회마저 놓치기 마련이니까요.
도문원을 나서 다른 궁인들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간다면 우연루로 갈 수 있으실 것입니다.
말을 마친 사제장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고 도문원을 나갑니다.
배이화:(감사의 말 대신, 마주 고개를 숙인다. 사제장이 나가는 것을 보고서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 ...적은 날에 시간 차가 있다면 비춰보면 보일지도 몰라.)
관찰력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25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검은 칠을 햇빛 아래에 비추어보자 어렴풋이 지워진 글씨가 보입니다.
운국에는 ■가 있을 것이니, 비록 ■■이라고는 하여도 그 또한 ■라.
운국에는 내가 있을 것이니, 비록 조각이라고는 하여도 그 또한 나라.
배이화:.........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머릿속에 꼭 백지 같다. 무얼 써도 곧바로 지워지는 백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되내인다. 연의 조각이 운국에 있다. ...그의 조각이 설마. ...아니, 그럴수가 있나. 어찌 이럴수가 있지. 서둘러 책을 덮어 원래의 자리에 돌려둔다. 이전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다시금 울려온다. ...답답해, 나가야겠어. 우선 바람을 쐬고... 그 다음에. 다소 멍한 낯으로 도문원을 나선다.)
복잡한 머리를 안고 도문원을 나서자,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궁인들이 보입니다.
배이화:(떨리는 손으로 심장께를 짚어보곤 서늘한 공기를 폐에 잔뜩 집어넣는다. 차라리 잠시 잊자. 바람결에 생각을 털어낸다.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다. 병사들이 찾기 전에, 연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덜 망가졌을 때에 움직여야지.)
(...궁인들이 향하는 곳이 우연루라 했으니. 우선 궁인들의 뒤를 따른다.)
궁인들의 뒤를 따르니 저 멀리 우연루라 쓰인 현판이 보입니다.
동시에, 그 곁으로 난 길 뒤로 보이는 거대한 호수도요.
연회를 준비하는 탓에 소해호로 향하는 입구의 경비가 소홀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소해호로 향하고자 한다면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우연루로 향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룰 것입니다.
배이화:(걸음을 바삐 하는 중에도 거대한 호수에 시선이 이끌린다. 저 곳에... 저기에 모든 것의 원흉이 있을지 모른다. ...경비가 소홀해진 지금이라면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모든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면 늦을거야. 연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를 영영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한다. 우연루로 향하는 걸음은 체통도 잊고 점점 빨라진다.)
모든 것을 알려 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연을 구할 수 없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어떤 이유에서건 좋습니다. 당신은 소해호를 지나칩니다.
우연루의 입구에서 이화를 발견한 궁인들이 황급히 당신을 안쪽으로 모십니다.
연회의 상석에 지루한 듯 앉아있던 연이 당신을 발견하곤 나른하게 웃습니다.
이 연: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거늘, 스스로 걷어차고 끝내는 이곳에 도달하였군.
각오는 되었겠지?
배이화:
심리학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실패 |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야. 진정해, 이화. 지금에서 떨고 있으면 안돼. 앞을 보고 생각을 해. 잘게 떨리는 손을 가슴께에 얹어 숨을 천천히 고른다. 다르지 않아, 늘 그리고 그리던 익숙한 얼굴이다. 내가 잊지 못하는 사랑하는 얼굴이야. ...그간의 세월이 있다 한들 그를, 그의 의중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행운 소모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를 얼마나 오랜 세월 봐 왔는데요. 얼마나 오래도록 함께 해 왔는데요.
금빛 눈이 아무리 병증으로 흐려졌다 한들 당신만은 그 심중을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날이 선 말과 달리, 연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립니다.
투박한 이목구비 곳곳에 당신을 향한 아득한 그리움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배이화:...내가 도망치기를 바랐습니까. (... ...여전히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서. 그대도 나도 미련하기는 매한가지라. 우리는 서로가 그렇게도 닮아있어 홍연으로 엮여있었나 보아.) ...각오는 되었지요. 진작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그대에게 드리겠다고. (...그래, 또다시 그대를 혼자 둘 수 없으니까.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주한 그리움을 이 자리에 다 풀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흐린 미소 끝에 안내된 자리에 앉았다.)
이 연:(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이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태어나길 붉은 실로 단단히 엮여 있던 인연이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온다. 심장이 태동하고 원과 한과 정이 뒤섞여 날뛴다. 어지럽다. 암흑 속에서 유일하게 이화와 관련된 색채만이 정신없이 흩날리며 시선을 앗는다. 그 색채를 따라 걸음 옮길 수밖에 없듯이.) 진실로 나를 잊지 않았나 보군. (고개를 돌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당신이 자리에 착석한 이후, 연회가 시작됩니다.
넓게 트인 공간에서 무희들이 춤을 추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나 연주할 법한 음악이 연주됩니다.
연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무희들이 하늘거리며 천을 흩날립니다.
허공을 물들인 천은 흩날리는 물감에 의해 푸르게 물들어 아래로 떨어지고, 쌓인 푸른 천들은 파도처럼 물결칩니다.
이 연:구름이 무거워지면 비가 되고, 그 비가 모이면 끝내 바다가 될 테지.
그것이 두려웠다.
그는 모든 것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끝없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듯도 합니다.
배이화:(마치 구름이 내려 파도를 이루는 듯한 광경을 눈에 담는다.) ...여전히 두렵습니까?
이 연:그런 데 두려움이란 감정을 쓰기엔 너무나 닳고 바래버렸지.
이미 발치에 고인 바닷물에서 도망치지 않은 건 나였으니……
더는 후회는 없소.
배이화:(비어버린 그대의 안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오직 고통과 업뿐인가.) ... 후회는 않으신다니, 그것만은 기쁩니다. (당신과 만나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세상의 이치였을지 모른다. 응당 그러해야만 했던 것들. 거스를 수 없는 파도에 휩쓸린 것 뿐일지 모르나, 후회라고는 없다. 발치를 적시는 바닷물을 따라 오래도록 나란히 걸을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이 연:(옥좌 아래에서 펼쳐지는 연회는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건만, 정작 그 연회의 주인공은 모래처럼 삭막하고 초탈한 낯을 하고 있다.) 그대야말로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인데, 두렵거나 후회되지는 않소?
배이화:(화려한 광경에서 눈을 돌려 초연한 시선을 마주한다. 이 연회를 진정으로 기뻐하는 이가 있을까. 가장 위에 앉은 그대도 기뻐하지 않는데.)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후회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대를 잃은 날에 자신을 함께 묻었으며, 한 톨 남은 후회도 모두 그대에게 드릴 것이니. 남은 것이라고는 없어야한다. 그러나, 자꾸 입안에 까끌한 모래알 하나가 남는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평생 내지 않을 말이 턱 끝까지 미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있군요. ... ... 그대를 꼭 닮은 아이를 품에 안아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때에야 생각이 드는군요. 참 우습지요.
이 연:…… 아이? (아주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오듯 힘겹게 먼 기억을 되새긴다. 얼굴을 마주하고 지낸 세월은 길었으나 혼인을 올린 시기는 뒤늦어서, 두 사람은 겨우 초야를 함께했을 뿐이었다. 이후로는 저를 좀먹어오는 광증에 잠식되기 바빴다. 그대로 숨이 멎었고,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치가 떨리는 길고 긴 고난의 시간을 거쳐 해원의 왕으로 서 있다. 후사라곤 미처 생각할 수도 없던 생이었다. 하지만, 그래. 분명 혼인을 할 때, 옷을 차려입고 식을 올릴 때 그러한 축복을 들었던 것 같다. 많은 후계를 낳아 다복한 왕실을 만들고 운국의 토대를 튼튼히 해 달라고……)
(새 국서를 들였으니 그와의 사이에서도 충분히 후사를 볼 수 있지 않았던가? 마침 얼굴도 나와 똑 닮았다면서? 그런 말들로 마지막까지 상처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연은 곧 죽음을 앞둔 이에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나보단 그대를 닮았더라면 아껴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야.
배이화:(승리를 부르는 나팔이 혼인식 날 울리던 음악과 겹쳐들린다. 잃은 것들이 많아 실연과 상실로만 보낸 날이 길었다. 부부의 연으로 맺어져 있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행복이 얼마나 짧았던가. 우리의 평화는 너무나 짧았고, 결실은 너무나 미약했다. ...결실. 그대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것. 비 그친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지개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웠던 생명. 그렇게 짧게 반짝이다 사라진 우리의 아이. 무의식적으로 배 위로 손을 얹는다. 겹겹이 쌓인 옷 아래에서도 메말라 납작하기 그지없다.) ...나를 더 닮았더라면? ...그래요, 누구를 더 닮았더라도 그대의 아이라면 분명 귀하고 예뻤겠지. ... ...내가 아는 그대라면 분명 성심성의껏 아껴주었을거야.
......그때의 그대라면.
(과거에서부터 휩쓸려 다시 지금에 닿는다.) 그대는 누구보다 강인한 분이셨지요. 거센 풍랑에도 흔들림 없이 늘 자신의 뜻을 따르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십니다, 분명. 허나, 나는 이 모든 것이 그대의 뜻이라고만 생각되지 않아요. 그대가 이리 된 것에는 나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 있었겠지요. 어쩌면 지금도 그대를 갉아먹고 있는 고통이.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이 연:(반쯤 내리감은 눈의 짧은 속눈썹이 바람에 흩날린다. 지독히도 무감한 낯은 더는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혼인하며 맺은 부부의 깊은 연도, 서로를 닮은 아이를 보았다는 기쁨도, 함께 다스려나갈 왕국의 평화로움도 전부 그에게는 너무나 멀어져 버린 개념이다. 다시 숨을 얻어 되살아났으나 인간이라 불러주기에는 삿된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더욱 거친 풍랑에 잡아먹히기 전에, 그 풍랑이 당신마저 삼키기 전에―)
(그는 이화에게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왕이 몸을 일으키자 음악과 춤이 멈추지만, 연이 손짓합니다.
이 연:계속하거라. 잠시 바람을 쐬고 올 터이니.
자리를 뜨기 전, 연은 이화에게 따라오라는 것처럼 눈짓합니다.
배이화:(눈짓을 보고 뒤이어 일어나 따라간다.)
우연루를 내려간 연은 등을 보인 채 침묵하다, 차고 있던 칼집에서 번개처럼 칼을 꺼내 이화의 목을 겨눕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아득한 밤하늘 아래, 바다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 속에서 그가 입을 엽니다.
이 연:그대가 눈치챘듯 나는 긴 고통에 시달려 왔다. 지금도 시시각각 갉아먹혀가고 있지. 하지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을 것이오. 지난한 나날을 줄줄이 풀어두는 건 내 성미에 맞지도 않고, 들어 좋을 것도 없는 이야기니까.
여전히 구름은 조각나고 바다는 흐를 것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당장이라도 목을 칠 것 같던 연은 천천히 칼을 내리더니, 검의 손잡이를 천천히 이화 쪽으로 돌립니다.
살고 싶다면, 그대의 나라와 백성과 반려를 지키고 싶다면―
그대의 손으로 나의 숨을 거두시오.
배이화:...그대는 늘 속으로 삼키고 혼자 묵묵히 감내해내는 이니까. (어둠 아래 날이 빛나는 것을 바라본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미련 없이 눈을 감았을 것인데, 끝내 손잡이가 돌아온다. ...아무리 같은 사람이라고 어찌 이런 결정까지도 똑닮아야 했을까. 뻗은 손은 손잡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칼을 떨어트렸다. 챙그랑,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 짊어진 무게를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지켜내야 할 것에는 늘 그대가 중심에 있는데.) ...그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했어. 허나, 그대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이 연:(금속이 땅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서로를 가로지르던 칼날이 없어져도 두 사람의 거리는 그대로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
(칼에는 신경도 두지 않은 채로 이화만을 응시한다. 금빛 눈은 심해처럼 고요하고 깊게 가라앉아 있다.) 이것이 나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하여도 듣지 않을 텐가?
나는 해원에 매여 있다. 죽고 싶어 죽은 것이 아니듯 살고 싶어 되살아난 게 아니야. 지금은 그대 덕분에 그나마 이성을 차리고 있으나, 그대를 죽인다면 나는 이 나라의 신에게 온전히 잠식되어버릴 것이다. 운국을 짓밟지 않겠다는 약조 따위 바람에 날아가는 풀잎처럼 간단히 잊어버릴 테지. 왕을 죽인 내가 그 다음으로 거둘 목숨이 누구라 생각하나?
배이화:... ...죽음이 지난한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인지는 모르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사제장도 그리 말했다. 당신을 막을 수 없다면, 끝을 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이 완전히 해원에 잠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떨어진 칼을 뒤로한 채 다가간다. 채 한걸음을 남겨두고.) ...그대의 삶에 온통 그대의 선택이라고는 없구나. 새로이 맞은 삶까지도. ...겨우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죽음 뿐이라니.
...그대는 참 내게 잔인해. 여전히 그리움이 남은 눈으로 나를 보면서 원망을 말하지.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숨을 내 손으로 앗으라 해. ... ...연, 나는 두 번은 못해. 차게 식은 그대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얼마든지 이기적이라 욕해도 좋아. 어떻게든 그대를 붙들어두고 방법을 찾겠어. ... ...내게 이런 부탁은 하지 말아, 부디.
이 연:이것이 최선이다. 죽음이 아니라면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선을 가르듯 일자로 놓인 검을 뒤로한 채 이화가 가까워져 온다. 구름과 바다가 맞닿아가는 순간이다. 저도 모르게 팔이 움직인다. 이화의 뺨을 쓸어주려는 듯 얼굴 근처까지 뻗었으나, 멈칫하더니 천천히 떨어진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심장에 수백 번은 더 칼을 찔러넣었을 것이다. 허나 자결조차 나에겐 허락되지 않아. 한때 사랑했던 이의 나라를 내 손으로 짓밟는다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물릴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꾹 말아쥔 주먹이 떨려 왔다.)
그대를 원했다. 그대를 사랑해서 내린 비가 바다가 되어 발목에 고이고 허리까지 차오를 때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끝내 잠겨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신에게 붙잡힌 지금,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켜 하늘까지 삼켜 버리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고 업이 되었다. 이것이 정녕 살아가는 게 맞는가? 내가 살아있다고 볼 수 있는가?
나는 너무 지쳤어. (눈을 천천히 내리감는다. 짙은 피로가 더께처럼 얹혀 있었다. 아무리 무겁고 힘든 일일지라도 항상 속으로 삼키며 태산과 바위처럼 견뎌 왔던 그가 비로소 무너진다. 진심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거칠고 버석해서…… 헤어진 지는 8년인데, 80년은 더 먹은 사람 같다.) 괴롭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댓 살 먹은 소년과 같은 말투로 당신을 어르는 것이다.) 나를 자유롭게 해줘, 이화.
배이화:...알아, 그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마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손을 애석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굳게 말려 떨리는 것까지도. 바다와 하늘은 수평선 너머에서 언제나 맞닿아있다. 떨어진 듯 보이나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수평선 끝에서 바다와 구름은 언제나 맞닿아있었다. 한 손으로는 연의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너무나 지쳐버린 낯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굳건한 태산과 바위가 이렇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더한 슬픔이구나. 가슴에 찢어지고 구멍이 난다는 말로는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다.)
(...지난 8년이 그대에게는 영원 같은 고통이었으리라, 짐작하는 것 만으로 같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다. 차게 식은 그대의 얼굴만 두려운 줄 알았더니, 기어코 무너진 당신을 보는 것이 더욱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상처 받은 어린 소년처럼 작아 보이는 당신을 품에 가득 안는다. 그간의 시간을 메울 수도 없을 텐데도 조금의 빈틈이라고는 없이 가득 끌어안았다. 아이를 달래듯 손길이 다정하고 부드럽다. 또 애틋하기 그지없고...) ... ...그대를 새장에 가둔 것은 나이니, 그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나라는 걸까.
그대에게는 귀한 것들만 주고 싶었는데, 겨우 마지막에 줄 수 있는 것이 죽음으로 인한 자유라니. ...참으로 잔인하기 그지 없는 인연이야.
(숨죽인 울음이 가랑비처럼 천천히 옷깃을 적신다.)
이 연:(아무리 타고나길 무쇠처럼 단단하고 무심한 사람이라 한들, 필요없는 전쟁을 일으켜 수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편할 리 없다. 특히나 그 상대가 사랑하는 이의 나라라면 더더욱. 원하긴커녕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을 강제로 되살아난 목숨줄로 저지르고 있었다. 끝없는 행복을 약속했던 이에게 상처를 입혔다. 의지는 갈대처럼 꺾여 심해에 처박혔고, 신이란 존재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나는 꼴이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죽은 것도 아니니, 이도저도 못한 어중간한 채로 불길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을 떠안아야만 했다. 태산은 무너졌고 바위는 부서졌다. 회복될 길이라곤 요원하니 오직 끝을 바랄 뿐이다.)
(뺨을 감싸는 손길과 저를 가득 끌어안는 품이 꿈처럼 편안하다. 이대로 잠들어도 전혀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억지로 되살아났을 때부터 이것만을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닿고만 있어도 족쇄가 느슨해진 듯 편안한데, 당신에겐 지금만큼 괴로운 순간이 없겠지.) 가혹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다.
걱정하지 마라. 그대는 나를 잃은 게 아니야. (그는 다시금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이화의 얼굴을 감싼다. 머리칼을 쓰다듬고, 등줄기를 도닥였다.)
산산조각난 나의 영혼 한 줄기가 흘러 그대의 곁에 닿았으니…… 나의 숨이 멎어도 그에게 내 모든 것이 돌아가리라.
(바다는 그렇게도 흐른다.)
배이화:(손에 잡히는 대로 품으로 당긴다. ...이 따스한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이대로 놓고 싶지 않은데, 스스로 잘라내야만 한다. 잔인한 마지막을 뒤로 미루고만 싶어서 품에 파묻혀만 있었다. 그대로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당신의 목소리만 남으니까. ...그런데, 돌아간다니. 처량하게도 젖은 얼굴로 문득 고개를 들었다.) ... ...어째서. 그대를 잃는 게 아니라니.
이 연:전쟁터에서 그대를 따라가게 해 달라 말하는 이를 보자마자 곧장 알아보았지. 그가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러니 결국 당신은 또 다른 나를 만나 곁에 들인 셈이다.) 원에 사로잡혀 그대에게 모진 말을 하여 정말 미안했다.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춘다.) 그 조각은 홀로 오롯하지. 나의 마모된 혼은 얼마 가지 않아 흩어지겠으나 기억은 본래 있었던 곳을 향해 되돌아갈 것이다.
그때는 비로소 진정한 그대의 반려가 될 테니, 나를 운국으로 돌려보내 주겠어? (연이 비로소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배이화:......그때부터- (그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그대는. 울음에 말이 자꾸만 먹혀 몇 번의 뻐끔거림 끝에 겨우 다시 목소리라고 할만한 것이 나온다.)
...본래 있던 곳으로. (아아, 그리워한 얼굴.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보고 싶었던 미소. 떨리는 손은 각오를 다진다. 사랑하는 이를 잔뜩 붙잡아 끌어당기며, 발 끝을 들어 겨우 입술을 가볍게 겹친다. 눈물에 젖어 바닷물처럼 짠 맛이 나는 작별의 인사였다.) ...우리는 헤어지나, 영영 하나야. 그렇지? ... ...그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이 연:그래. (바다 내음이 난다. 이제 저는 바닷속에서 안식을 취하겠으나 반려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이역만리를 건너서라도 다시 제자리를 찾아 되돌아갈 것이다. 익숙한 황매화 향기를 두르고서 보랏빛 나리가 어울리는 고운 이에게로. 가녀린 이를 한껏 끌어안았다. 짧은 입맞춤 사이로 우리의 세월이 나누어진다.) 올바른 길로 나아갈 것이다.
배이화:...그래, 그러면 되었어. (언제고 기다릴 수 있으니. 흠뻑 숨을 들이키고, 향을 머금는다. 이내 기약하는 손끝이 뺨을 스쳐 떨어져 나간다. 엉망이 된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손등으로 뺨의 물기를 닦아내고, 기어이 떨어진 칼을 들었다. 고작 한 두 걸음 되는 거리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발걸음은 또 왜 이리 무거운지. 어둠 아래 벼려진 칼날이 은색으로 번뜩였다가, 겹쳐진 인영에 가리운다. 지독히 얽힌 연을 꿰뚫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당신의 영겁같은 고통에 끝을 맺고, 마침내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손잡이 너머로 감각이 온전히 전해진다.)
......연, 그대를 은애해. 구름이 더이상 맺히지 않고 바다가 다 마르는 그 날까지.
이 연:(살갗을 뚫고 파고드는 칼날이 아프기는커녕 되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영혼이 해원에게 복속되는 과정에서 가해졌던 지옥 같던 나날에는 비할 바도 못 된다. 신과 강제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칼날 아래 끊어져나간다. 족쇄가 부서진다. 닳고 닳아 본래의 색채를 찾을 수도 없게 된 영혼이 마침내 안식을 찾아 가라앉는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이화를 다시금 끌어안는다. 당신의 옷을 적시는 뜨거운 피가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상징함을 부디 알아주기를.) 은애한다, 이화. 천지에 피어난 어떤 꽃들보다도 아름다운 그대를.
이 구름을 타고, 물길을 타고 그대에게 가리라…….
배이화:(겨우 끌어올린 입꼬리가 애틋하다. 제 옷이 엉망이 되는 것은 시야에 담기지 않고, 신경을 끌 것도 되지 않는다. 또 다시 보는 얼굴과 마지막 고백. 사실 그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나 보다. 당신이 새로 쥐어준 씨앗은 당신으로 인해 다시 피어날 테다. 다시금 젖어가는 얼굴로 연을 끌어안는다. 식어가는 뺨을 쓰담으며 멎어가는 가슴에 대고 사랑해, 사랑해, 끝도 없이 외쳤다.)
(고통에 시들어간 차게 식은 얼굴이 아니라, 비로소 안온함을 되찾은 얼굴을 기억에 새긴다.)
이 연:(가물가물해지는 눈으로도 끝까지 이화를 담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할 사람. 제 마음을 가져간 유일한 사람. 숨이 꺼진다 하여 사랑의 불길마저 사그라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화의 고백이 계속해서 풀무질을 해줄 테니까.)
그는 반항하지 않은 채 당신의 손에 제 목숨을 내맡깁니다.
마치 본래 그래야 했던 운명이었다는 듯, 당신의 품에서 잠든 것처럼 조용히 숨을 멈춥니다.
바다의 승리를 외치는 나팔소리 가운데에서 그들의 가장 강인하고 웅장하던 바다가 메마릅니다.
그와 동시에, 우연루의 옆쪽에 위치해있던 호수에서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사람 백 명이 동시에 우는 것과 같은 서글프고 끔찍한 울음소리.
동시에 알 수 없는 검은 것이 들끓더니 하늘 가득 그림자가 집니다.
연회는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군주를 잃은 이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당신은 깨닫습니다.
지금, 우연루를 벗어나 말을 달린다면 누구도 당신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배이화:(기이한 소리에 고개를 든다. 멀리서 들리는 소란 속에 품에 안은 이를 소중히 내린다. ...안녕, 반려였던 이여. 영영 반려일 이여. 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고했다. 그대가 살린 목숨이니,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겠어. 치맛단을 세게 쥐어들고 우연루를 벗어난다.)
서둘러 우연루를 벗어나자, 말을 세워둔 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담:(말 고삐를 쥔 채 그림처럼 서 있다가, 당신을 보자마자 이끌리듯 다가간다.) 전하.
(순간 삿된 것의 울음이 우레처럼 하늘을 울린다. 그와 동시에 번개를 맞은 듯 자리에 멈추어섰다. 눈이 크게 뜨이는가 싶더니, 혼란과 당황이 섞인 눈빛으로 제 손과 이화를 번갈아본다. 맑던 황금빛 눈에서 안광이 차차 사라져간다.)
이 연:…… 이화야.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젠가를 꼭 닮아 있어서.)
배이화:(...담. 담이 시야에 들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 앞에서 입을 떼려던 순간 울리는 소리, 그 뒤로 무언가 달라진 모습. 가라앉는 눈동자며 목소리는 그리운 향수를 부른다. 그때와 같은 목소리. 생각보다 먼저 몸이 튀어나갔다. 뛰어들듯 품에 안긴다. 연이든, 담이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언제고 하나뿐인 내 반려이니까.) ...그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연.
이 연:(아주 가뿐하게 이화를 안아든다. 과거 그대로. 원에 사로잡히지도, 복수와 정복욕에 물들어있지도 않은 본래의 그다.) 새로운 연을 쌓기 위해 구름과 물길을 타고 돌아왔어. 나도 정말,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은 숨을 들이킨다.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너의 일상과 지난한 위기를 모두 함께하겠다. 지옥에 떨어질 죄라도 나누어지고, 네가 위태로울 적엔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힘껏 붙들겠다.
돌아가면 또 다시 황매화로 반지를 만들어줘. (마른 손길을 감싸고, 약지 위에 입술을 내리누른다.)
배이화:(바람이 우리의 시작에 등을 떠밀어주는가.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다. 비어있는 줄 알았던 그대의 안에 가장 크게 남은 것은 나를 향한 마음이었구나. 맑은 웃음소리가 겹친다. 비로소 우리는 살기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응. 돌아가면 이번에는 제대로 청혼할게.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 황매화로. 그러니 연, 내 모든 것은 다 네 것이야.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너의 모든 것을 내게 줘. 앞으로의 고난과 역경에도 늘 함께 할테니. ...이제는 혼자 짊어지게 하지 않겠어.
이 연:나의 전부를 네게 줄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당신의 숨을 찾아들어 겹치고, 섞인다. 직전 모래처럼 버석하고 까칠하던 입술과는 달리 생명력이 가득 넘친다. 이것이 본래 제게 주어진 삶. 본래 당신과 누렸어야 하는 삶이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
나는 네 사람이다. (마침내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 궁을, 해원국을 벗어납니다.
당신의 뒤에 버티고 앉은 연의 체온이 얼마나 따스하던지.
당신의 귀환을 운국의 백성들이 눈물 흘리며 기뻐합니다.
강대한 해원국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영웅이라 칭송한 것은 물론이오, 곁을 지킨 국서를 향한 환호도 대단했습니다.
세상에 그는 담이겠지만, 오로지 당신에게만은 연입니다.
복잡하게 꼬이고 설켰던 우리의 연이 비로소 다시 이어지니,
오래 전 함께 그렸던 그림에 다시 한 번 새로운 색채를 입혀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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