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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5~260307] 에이리스 - 12시의 도밍게즈 ch1. 시곗바늘의 방향

초현_c 2026. 3. 11.

 

플레이타임 : 약 29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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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는 DOT의 14회의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살면서 무수히 많이 들어 보았을 이름의 주인. 도밍게즈의 구원자,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시간이 선택한……
 
타이머, 오늘부터 당신의 파트너가 될 프뤼나를.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 미묘하게 기분이 들뜹니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이리스의 삶에는 이상한 일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능>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봄처럼 소리소문없이 드러난 시간의 각인을 발견했을 때부터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12살의 생일과 달리,
 
시간, 운명…… 혹은 이름 모를 무언가가 당신을 붙잡는 것처럼 각인을 따라 희미한 열감이 두드러졌습니다.
 
이리스가 잠에서 깨어 손목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눈부신 빛과 함께 유일한 구원자, 타이머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눈을 문질러 보아도 사라지지 않았죠.
 
이리스 레터:(굉장했지. 누가 소방용 후레쉬 켰냐고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생전에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렇게 환한 빛을 본 건 처음이었을 겁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평화로운 일상이 완전히 뒤바뀌리라는 미래를 어렴풋 예감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리스는 다소 망설였지만, 결국은 먼저 DOT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곧장 당신을 안내하러 온 이들을 따라 DOT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자를 보는 양 황망하고, 황당함을 가득 담아 깜빡이던 눈꺼풀과 다물지 못하던 입술 사이로 새던 신음성…….
 
하인리히 장교: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구원자가 깨어났군.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과 흐릿한 남색 제복을 입은 사무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하인리히 장교가 감탄을 흘렸습니다.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DOT의 장교, 실질적인 책임자로 종종 TV에도 얼굴을 비추곤 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장교를 비롯한 그 누구도 이리스의 자격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손목에 새겨진 숫자란 도밍게즈에서 그토록 절대적이거든요.
 
이리스는 세계를 구원할 새로운 구원자라는 명분하에 DOT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롭고 목가적인 7구역에서 자라온 이리스에겐 엄격하고 체계적인 군사 기관인 DOT에서의 생활이 답답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두 달 남짓이라지만, 아직까지 가족에게 편지 한 통 보내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고 말이에요.
 
하지만 도밍게즈는 세계 멸망의 소문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DOT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일컬어 프뤼나, 타이머의 짝이라 불렀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평이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이리스의 존재는 프뤼나에게도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정확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타이머를 혼란케 하지 않으려는 조치라더군요.
 
이리스는 연구원들이 머무는 동관에서, 사무원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연구원의 신체검사 따위에 응하는 것을 제외하면 쭉 홀로였습니다.
 
이리스 레터:(잊지 않고 민원도 매일매일 넣었다. 젠장, 가족이랑 연락 정도는 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매일매일 민원을 넣어보아도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지만요.
 
긴 밤 동안 당신은 가족뿐 아니라 운명의 짝, 당신의 파트너, 당신과 같은 시간의 타이머인 프뤼나를 자연히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게, 아주 가까이, 바로 너머에 머물고 있는걸요.
 
빛을 화려하게 다루는 솜씨며 예쁘장한 외모, 신사적이고 예의바른 태도의 타이머.
 
상기한 요소들 탓에 DOT의 얼굴마담마냥 이런저런 공식 행사며 광고에 얼굴을 자주 비추지만 정작 개인적인 인터뷰는 별로 없어 묘한 신비주의를 지닌 타이머이기도 하지요.
 
차가운 색채로 일렁이는 그의 빛처럼 성격도 시크하고 철두철미하리라고 추측되곤 했습니다.
 
혹자는 시크한 수준을 넘어 차가운 정도라고들 떠들어 대지만……
 
어쨌건 이번 대의 타이머들 중 명실상부 상위권의 인지도와 인기를 지녔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리스 레터:(에이, 그래도 또래인데. 우리 나잇대 애들이 누구인가. 낙엽만 굴러가도 웃을 나이가 아닌가? 물론 내가 좀 극단적으로 그런 것 같긴 한데, 일단 지금까지 본 또래들은 다 그랬다. 장난 치면 받아는 주는 사람이겠지?)
 
중장년도 아니고 스물도 채 넘지 않은 또래입니다. 공식 석상이니 진중한 태도를 유지했을 뿐, 실은 장난을 잘 받아주고 웃을 줄도 아는 성격일 수도 있겠죠.
 
만약 그렇다면 공사 구별이 아주 뚜렷한 타이머겠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곧 도착한다는군.
 
기나긴 회상을 깨고, 하인리히 장교가 타이머들의 도착을 예고합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타닥타닥, 바닥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복도를 가르고,
 
“왔어요?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안내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상냥하게 건네는 안내가 문턱 너머로 들립니다.
 
프뤼나가 그 복도를 건너 당신에게 오는 동안,
 
당신은 그를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요.
 
세계가 예비한……
 
운명을 마주하기 직전에!
 
이리스 레터:(주변에서 운명이라던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매일같이 들려주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 한번도 대화를 해보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의 성정을 상상해보는 것 뿐이지, 직접적인 교류와 판단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난 두 달, 지독하게 심심하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며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하고 그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법. 그래서 이리스 레터가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막연한 기대 뿐이었다. 부디 좋은 사람이길!)
 
좋은 사람이길. 막연하고 단순한 기대를 품고 문을 바라보고 있자,
 
똑똑.
 
형식적인 노크와 함께 14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섰습니다.
 
도밍게즈의 구원자, 시간이 선택한 타이머.
 
어떻게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있겠어요?
 
그러나 이리스가 그를 알아본 것은 눈에 익은 얼굴이라는, 그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깜빡, 깜빡. 이리스가 눈을 깜빡이자 프뤼나 또한 같은 속도로 눈을 깜빡입니다.
 
그래요, 분명히 낯익은 얼굴이에요. 낯익기 짝이 없어요.
 
도밍게즈의 국민으로 태어난 이래 수도 없이 본 얼굴이었으니까.
 
TV도, 신문도, 휴대폰 속 무수히 많은 게시글마저 그를 주목했는걸요.
 
그러니, 하나도 특별한 것 없는 대면이건만.
 
어째서일까요?
 
이토록 그 ‘존재’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러라고 명령한 것도 아닌데,
 
밑바닥부터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과 기분, 생각과 언어, 감정과 본능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2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가까이 가고 싶다는, 퍽 뜬금없는 욕구가 고개를 쳐듭니다.
 
아, 그래요.
 
이리스는 운명이 안배한 일련의 사건을 따라 새로운 구원자가 되었고,
 
DOT에 도착해, 기어코 눈앞의…… 프뤼나를 만나고 만 것입니다.
 
얼굴을 보자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어째서 ‘운명’이니 ‘파트너’라느니 거창한 칭호를 붙여댄 건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프뤼나:…….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이리스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당신의 것보다 쨍한 보랏빛을 지닌 홍채가 일순 번쩍였던가.)
 
기묘한 이끌림 사이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소리가 가볍게 새어 나옵니다.
 
웃음소리는 방아쇠를 당기고, 지나간 기억을 꿰뚫습니다.
 
무척 익숙한 웃음입니다.
 
그야, 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도 하인리히 장교는 비슷하게 웃었으니까.
 
이리스 레터:(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참 이상한 감각이다. 그는 이 낯선 기분을 떨쳐 내듯 고개를 두어 번 빠르게 젓고는,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왜 웃고 그러세요!)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프뤼나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었던 탓일까요. 장교의 표정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네, 두 사람은 들이닥치는 서로의 존재감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혹은 이끌리거나, 밀어내거나, 도망가고 싶어지는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쓸려가길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타이머에게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프뤼나의 각인이 눈에 띕니다.
 
이리스의 각인과 같은 왼손목에 새겨진, 똑같은 두 자리의 숫자.
 
그가 이리스의 운명이자 단 하나뿐인 파트너라는 증명.
 
고작 숫자에 불과하건만……
 
하인리히 장교:인사들 나누게. 자네의 이 될 사람일세.
 
어쩜 이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지.
 
하인리히 장교는 익숙하게 타이머들에게 카운터들을, 카운터들에게 타이머들을 소개합니다.
 
미리 설명을 들었던 이리스와 달리, 프뤼나는 처음 듣는 모양인지 미간을 미묘하게 찌푸리며 장교를 바라봅니다.
 
지나치게 단출한 문장이군요.
 
프뤼나: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짝이라니,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만.
 
하인리히 장교:말 그대로라네.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다니 프뤼나답지 않군. (비스듬히 웃으며 제 수염을 쓸었다.)
 
하인리히 장교는 타이머의 당황한 얼굴을 한껏 즐기고 난 후에야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리스는 각인이 드러난 후, DOT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설명입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으리라고 생각하네.
물론,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예언의 탑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야. 이미 세간에서는 반쯤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건…… 아주 좋지 못한 조짐일세.
멸망이 실재한다고 해도 문제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더 문제거든. 멸망이 예정된 세계의 법과 도덕, 규칙 따위를 누가 지키겠냔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세계는 무너질 테고, 점차 아수라장이 될 테지. 처리하기 곤란한 쓰레기가 넘쳐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전부터 세계 멸망에 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자신의 수염을 가다듬은 하인리히 장교가 드디어 본론을 꺼내 들곤,
 
하인리히 장교:결론부터 말하지.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눈앞의 이가 그 증거일세.
 
이리스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깁니다.
 
이리스 레터:어... 어? (아니아니, 저 한눈팔다가 인사할 타이밍도 완전히 놓치지 않았어요? 얼떨떨한 얼굴로 끌어당겨졌다.)
아... ... 안녕? (그리하여, 썩 좋지는 못한 첫 인사를 건냈다.)
 
장교는 이리스가 어색하게 건네는 인사를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갑니다.
 
프뤼나도 딱히 답할 생각은 없었는지, 장교만을 바라보고 있네요.
 
하인리히 장교:지난 예언의 타이머는 매우 훌륭한 이였어.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거운 데다…… 미래를 바꾸는 방법을 함께 점지받곤 했거든. 많은 이들이 세계 멸망의 예언이 예언의 탑으로부터 시작한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DOT는, 타이머는 이미 그 미래를 알고 있었네. 그 예언이 퍼질 것도, 세계가 혼란스러워질 것도,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날 것마저도!
반년 전쯤부터, 예언을 따라 새로운 능력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네. 바로 이들이지. 정확히 열네 명, 자네들과 같은 각인이 새겨져 있어.
우리는 이들을…… ‘카운터’라고 부르기로 했네.
 
이미 예비된 만남이었다니. 이것은 이리스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리스 레터:(좀 멍청한 얼굴로 듣고 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 멸망의 초읽기를 앞둔 작금의 상황에,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역할에 도취한 것인지, 예언의 탑을 한 방 먹일 즐거움에 심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인리히 장교는 하나씩, 카운터의 시간과 이름을 소개했습니다.
제0시의 이리스, 제1시의 ■■■, 제2시의 ■■과 제3시의 ■■■, 제4시의 ■■과 제5시의 ■■■,
제6시의 ■■■■■, 제7시의 ■■, 제8시의 ■■■, 제9시의 ■■, 제10시의 ■■■■와 제11시의 ■■■, 제12시의 ■과 제13시의 ■■…….
 
모두 열넷이었지만, 프뤼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오로지 이리스만을 응시합니다.
 
하인리히 장교:연구 결과, 카운터가 타이머와 똑같은 능력, 자질이 있으며 시간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입증됐어. 그뿐만 아니라 타이머의 능력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을 거란 가설이 등장했지.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야.
오늘부터 서관에서 함께 지내게 될 거야. 수업부터 시작해서 모든 타이머의 활동과 역할을 부여받아, 자네들과 동행할 걸세.
그러니 인사들 나누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고.
 
하인리히 장교는 웃는 얼굴로 통보합니다.
 
모든 것은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고.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어떤 재해가 밀려와도 타이머와 카운터가 함께라면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노라고.
 
즉, 이것은…… 대의이자 명령.
 
개인의 의견은 묵살하기 딱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이라네. 서관으로 데려가서 건물 소개도 좀 해주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친해지도록 해. 다음 달쯤, 건국 축제에서 정식으로 카운터의 존재를 발표할 예정이니 외부에 유출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일방적으로 명령한 장교가 절도있게, 그러나 한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섭니다.
 
회의실에는 침묵과 함께 타이머와 카운터, 두 개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고요.
 
…….
 
14명의 타이머 대부분은 시간이 데려온 운명의 상대에게 표정 관리를 하는 법은 훈련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이머와 카운터가 각기 짝을 지어 흩어지고, 이리스의 앞에는 여전히 프뤼나가 서 있습니다.
 
프뤼나는 이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프뤼나:당신 같은 존재가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거죠? 믿기 어렵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리스 레터:(젠장, 장교에게 이젠 좀 편지 쓰게 해달라고 따질 타이밍을 놓쳤다. 황망하게 하인리히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 응? 나? 설마 나한테 물어본 거야?
 
프뤼나:당신이 아니면 누구겠나요? 장교님은 일방적인 설명만 해주고 나가셨으니, 물어볼 사람은 당신뿐이잖아요. 카운터니 짝이니, 똑같은 자질이니…… 전혀 전해듣지 못한 내용들뿐인데요. (게다가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뭐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끌림.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도망치고 싶어지는 이질감…… 그에게는 불쾌하기만 한 감각들이 온몸을 헤집었다가 밀려간다.)
 
이리스 레터:... 나도 여기 온 지 딱 두 달 됐는데? (어색하게 제 뺨을 긁적였다. 그리고 직전 느꼈던 감각을 잠시 복기해본다. 혹시 저 애도 같은 것을 느꼈으려나? 비교할 수 있는 전례가 없으니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냐고 해도, 나는 7구역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던 사람이란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이게 나타났고... (손을 들어 제 손목 안쪽을 보여주며 살짝 흔들었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네 짝이라던가... 파트너라던가... 새로운 구원자라던가. 그런 말들밖에 없었단 말이지.
 
프뤼나:(손목으로 시선이 구른다. 숫자의 위치도 모양도 저와 완벽히 똑같다. 피부를 뚫기라도 할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두 달이면 DOT에서 검증을 마쳤을 테니 거짓은 아니겠군요. 장교님이 방금 타이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들은 미리 들으신 모양이고.
도밍게즈의 사람이라면 아시겠지만 타이머의 각인은 열두 살에 나타나요. 전대 타이머가 죽어야 새로운 타이머가 태어나고요. 한 시간대에 두 명이라니……. (내내 딱딱한 말투와 웃음기 하나 없는 낯이다.) 솔직히 잘 믿기지 않네요.
하지만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선택받은 거라면 납득할 수밖에 없겠지요. (눈을 반쯤 내리깐다.) 0시의 타이머, 프뤼나예요. 본명은 로에른 니아고요. 편한 대로 불러주시죠. 그쪽의 이름은?
 
이리스 레터: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런 게 생겨 있다고 생각해 봐. (슬그머니 당신의 눈치를 봤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아 보이는 것이 영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 좀 재미없는 타입인가? 망했다.)
그럼 로에른이라고 부를래. 코드네임으로 부르는 건 좀 딱딱하잖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살며시 웃으며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마도... 0시의 카운터라는 존재? 이름은 이리스 레터. 코드네임은 짓는 게 좋다고 해서 고민해 보긴 했는데... 그렇지. 모처럼이니까 네가 하나 골라줘 봐. 마침 오늘 제출하랬거든.
오트클레르 베르니스. 뭐가 더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
 
로에른 A. 니아:예상치 못하게 생겼다는 점만은 똑같나 보군요.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죠, 레터. (성씨로 호명하며 내밀어진 손을 짧게 맞잡았다가 놓았다. 피부가 미묘하게 서늘하다. 여전히 무표정인 걸 보아 이 상태가 디폴트인 점을 넘어 웃음기 자체가 없는 사람 같다. 한마디로 이리스의 기대와는 완벽히 다른 인간상이다……)
처음 만난 제게 코드네임을요? 저는 당신을 잘 모르는데요.
 
이리스 레터:이리스라니까. (대체 얼마나 딱딱하고 재미없는 타입인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딱딱한 인간은 완벽하게 예상 밖이다. ... 그래도 잘 지내보자!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딱 어감을 들어 봤을 때 저 사람 분위기랑 어울린다~ 싶은 건 있을 거 아냐. 아니면 발음이 더 괜찮은 쪽으로 골라도 괜찮고. 사실 이거 두 개 사이에서 혼자 한 3일째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로에른 A. 니아:네, 레터. (뭐가 문제냐는 듯 꿋꿋하게 성씨로 부른다.)
당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후로 쭉 불리게 될 이름이니, 고민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건국 축제 때 보인다고 했던가요. (그리곤 잠시 이름과 눈앞의 이를 매칭해보다가 얼마 가지 않아 하나를 골랐다.) 베르니스. 전 이쪽이 좀 더 마음에 드네요. 보다 부르기 편하기도 하고.
 
이리스 레터:아오. (결국 숨기지 못하고 탄식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좋아, 그럼 이따가 베르니스로 제출해야지! 나도 그게 아주 약간 더 마음에 들던 참이었거든. 건국제라면 정말 딱 다음 달 쯤인데. 그때는 가족들도 와주려나... (조용히 중얼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참, 장교님이 서관을 소개해 주라고 하셨잖아. 부탁해도 될까?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이 없거든, 나...
 
로에른 A. 니아:(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대외 활동을 할 때는 코드네임으로 불러 주세요. 되도록 본명을 노출하고 싶지 않거든요.
DOT에 온 지는 두 달쯤 되었다고 하셨던가요. 그동안은 어디에서 지내셨죠?
 
이리스 레터:그러지 뭐. 꺼리는 이유라도 있어? (회의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어서 가보자는 듯 손짓했다.)
동관에서 지냈어. 두 달 내~내 연구원들이랑 사무원들 얼굴만 봤던 것 같아. 군대가 다 그런가? 얼마나 딱딱한지 집에 편지도 못 쓰게 하더라고.
 
로에른 A. 니아:사생활 문제죠. 타이머는 이미 세간에 과하게 많이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간결히 정리한다.) 제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팔리는 것도 싫고요.
(그리곤 회의실 문가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리스보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본관이나 서관엔 와보신 적이 없겠군요.
 
14회의실을 빠져나오면, DOT 본관의 복도입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DOT의 본관은 언제나 그렇듯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로에른에게는 낯익은 풍경이었고, 이리스, 당신에게는……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3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쩐지 무척 그리운 풍경이었죠. 낯익기 짝이 없어서, 꼭 제자리를 찾아온 듯했습니다.
 
처음 발을 들였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공기마저 친숙했어요.
 
이리스는 어떤 감각을 느낍니다. 기시감일 수도, 괴리감일 수도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 ...? (그렇지. 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느껴진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걸음이 머뭇거린다.) ... 여기 혹시 어린이들 상대로 현장체험학습... 같은 거라도 받던가?
 
로에른 A. 니아:……그럴 리가요. DOT는 전통에 따라 건물의 문을 항상 열어두긴 하지만, 들어오려면 엄격한 절차를 필요로 해요.
타이머나 연구원, 군 관계자 외엔 출입이 사실상 금지된 거나 마찬가지죠.
 
이리스 레터:이상하네... 아니면 종종 TV에 소개라도 됐었나? 희한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 탓이려나...
음... 별 거 아니겠지. (손을 휘휘 저었다.) 되게 깔끔하고 예쁘긴 하다.
 
로에른 A. 니아:기밀이 많은 공간이니만큼 그것도 아닐걸요. 기본 인테리어가 비슷한 빛깔이니 동관에 계시면서 익숙해지신 게 아닐지.
(별 생각 없이 본관을 나서서 서관으로 들어선다.) 본관과 서관의 구조는 비슷해요. 처음 각인이 나타났을 땐 서관에서 지내다가 정식 임관을 받으면 본관으로 옮겨 와 지내죠. 따로 관사를 받아 바깥에서 지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서 로에른은 각 구조를 간단하게 설명해 줍니다.
 
로에른 A. 니아:특별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 식당이나 교실은 곧 자주 다니게 되실 테지만.
 
이리스 레터:(그런가? 하고 넘어긴다.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데자뷰라는 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으므로. 서관에 들어서 설명을 들으며 이리저리 기웃대며 둘러본다.) 그러면... 도서관! 혹시 지금 책을 빌릴 수도 있으려나?
 
로에른 A. 니아:물론이에요. 저도 도서관에는 자주 오죠. (로비를 지나 도서관으로 들어선다.) 각자 원하는 책을 고르고 올까요. 설마 도서관 안쪽까지 돌아다니면서 설명해드려야 하진 않겠죠?
 
이리스 레터:그정도로 어리숙하진 않거든~. (손을 휘휘 젓는다.) 두 달 동안 얼마나 심심했다고. 앞으로는 바빠질 것 같긴 하지만... 심심풀이로 읽을 책 하나쯤은 빌려두고 싶었어. (도서관 내부를 둘러보는 시선이 반짝인다. 신난 듯한 걸음걸이가 당신을 앞질렀다.) 그럼 한 10분 뒤에 보자!
(그리고, 소설 코너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로에른 A. 니아:여러 권 빌리셔도 돼요.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는 책장들 사이로 들어선다. 그리곤 책 두세 권을 가져와 책상에 올려놓고 짧게 읽기 시작한다. 과학 분야의, 다소 재미없어 보이는 이론 혹은 논문이다.)
 
이리스 레터:(신나서 소설 코너를 돌아다닌다. DOT의 도서관에는... 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개막장 소설들도 좀 있을까?)
 
<행운> 판정 해봅시다
 
이리스 레터:
기준치: 55/27/11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역대 타이머들 중 이리스와 같은 취향인 이들이 꽤 많았던 걸까요?
 
제목부터가 20자를 거뜬히 넘어가는 개막장 소설들이 책장 하나를 꽉 채워 늘어서 있습니다 ㅋ
 
대대손손 내려온 유산 같네요.
 
이리스 레터:바로 이거야.
(미쳤다 ㅋㅋ 신나서 그중에서 제일 막장같이 생긴 3권짜리 책을 골랐다. 전생했더니 거미였던 건에 대하여~마왕성에서 방패들고 잘자요~... 녀석, 제목 참.)
(활짝 웃으면서 돌아왔다가...)
와우... (재미라곤 1g도 없어 보이는 로에른의 책들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로에른 A. 니아:다 고르셨나요? (책장을 느리게 넘기다가, 이리스가 들고 있는 책과 눈이 딱 마주친다. 제목을 훑어보곤 떨떠름해졌다. '대체 저런 책은 어디서 났지?' 싶은 표정이다.)
 
이리스 레터:응. 완전 재밌겠지. (전리품을 들어올리듯 책 세 권을 들어 보였다.)
 
로에른 A. 니아:…………………… (일순 할 말이 굉장히 많아진 것 같았으나 참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책을 챙겼다.) 그런 취향이시군요. 가죠.
 
이리스 레터:(서로가 서로의 책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꼴을 좀 보라. 이쪽은 로에른의 책을 떨떠름하게 한 번 쳐다보았다...) ... 응!
근데, 옥상은 왜 출입 금지래? (옆구리에 책 세 권을 단단히 끼웠다.)
 
로에른 A. 니아: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서관에까지 본관 옥상처럼 스카이라운지를 만들어둘 여력은 없었나 보죠. 어차피 정식 임관을 받아서 본관으로 이동하고 나면 다음 대 타이머가 올 때까지는 쓰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고.
 
이리스 레터:그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지? (벌써 땡땡이 칠 생각 뿐이다.)
 
로에른 A. 니아:그렇긴 한데. 매우 심히 몰래 들어가실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이리스 레터:내가 뭘? 나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 아니야.
아마도.
 
로에른 A. 니아:음. (애매하기 그지없는 침음성으로 화답했다.)
 
이리스 레터:이해해준다니 기쁘네. (아니다.)
좋아, 이제 훈련실만 좀 구경해보고... ... 그런데 난 서관 어디서 살아야 하지?...
 
로에른 A. 니아:그렇잖아도 훈련실에 한 번 들러보려 했어요. 당신이 이능력을 쓰는 방식이 궁금해서요. 같은 시간대에 속했으니 그것마저 똑같을 것인지. 다르다면 알아두는 게 좋겠죠. 합을 맞출 일이 많아질 테니까.
……숙소는, 그렇네요. 방은 열네 개뿐인데요.
 
이리스 레터:보면 깜짝 놀랄걸.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내가 그렇게 DOT에 오기 전까지 깨먹은 우리 집 화병만 다섯... ...
... 나 혹시 길바닥에서 자야 해?
 
로에른 A. 니아:화병을 깨뜨렸나요? (공격적으로 쓸 수 있는 힘인가. 짧게 추측해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3층을 눌렀다.) 일단은 훈련실에 들렀다가 안내데스크로 가 보죠. 본관의 숙소를 카운터들에게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리스 레터:터지던데? 펑~ 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3층에 도착할 때까지 멍하게 엘리베이터의 안내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멈춘 뒤에는 먼저 가볍게 점프하듯 빠져나왔다.)
 
로에른 A. 니아:터졌다고요? (이건 생각지 못한 방식이다. 완전히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가며 훈련실의 번호를 눈대중으로 훑다가, 4번 훈련실의 문을 연다.) 우선은 이 정도 훈련실에서 시험해볼까요.
 
아까의 회의실보다 두 배는 큰 공간입니다.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도구들이 보이고, 한쪽에는 수건과 가운, 냉장고 등이 놓여 있습니다.
 
로에른 A. 니아:필요한 게 있다면 여기. 호출 버튼을 누르면 준비해 주세요. (벽에 붙은 파란 버튼을 가리켰다. 이어 옆의 붉은색 버튼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건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누르면 구조하러 와주실 거예요.
능력을 쓰기 위해 전제되는 조건이나 필요한 수단 같은 게 있나요?
 
이리스 레터:응급 상황 같은 게 자주 생겨?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음...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던데. (손바닥을 위로 펼쳐 보인다. 온기 어린 작은 빛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아직 실전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로에른 A. 니아:각인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어서 능력의 조절이나 사용이 미숙할 때, 자신의 능력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지 못해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이제는 몇 년씩 숙련되었으니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요. 의무실이 잘 마련되어 있고 치유의 타이머도 있으니 웬만한 부상은 걱정할 것 없어요.
(작은 빛을 물끄럼 바라본다. 각인뿐 아니라 빛까지 불러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시간의 안배다.) 어떤 방식으로 써 오셨죠?
 
이리스 레터:괜히 쫄았네. (가볍게 손짓한다. 빛이 로에른의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그의 손 위로 돌아왔다.) 방식이라고 할 것도 없이... 좀 무식하게 썼어. 보면 알겠지만 꽤 따뜻하잖아? 그래서...
예전에 과학 시간에 배운 게 생각나더라고. 융합? 폭발? 사실 수업 시간마다 졸아서 제대로는 기억나지 않는데, 요 따뜻한 빛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펑! 하고 터트리는 거지.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 정말로 폭발하길래 그렇게 쓰고 있어.
 
로에른 A. 니아:(빛이 저를 휘감고 지나가자 온기가 느껴진다. 퍽 새로운 감상이었다. 그의 빛은 색부터가 시리고 차가웠으니.) 빛을 압축해서 폭발시킨다…… 좋은 발상이네요. 공격적으로 쓰기엔 제격이겠어요. 그 폭발의 위력이나 빛의 온도, 밝기를 올리는 훈련을 해보시면 좋겠군요. (자연스럽게 방향성을 지시한다.)
그럼 제 능력을 설명해드릴 차례군요. 전 빛을 고체화해서 다룰 수 있어요. 무기를 만들거나, 우박처럼 떨어뜨리거나, 방패의 형태로 펼칠 수도 있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바로 광원이 필요하다는 것. 가장 대표적으론 태양. (검지손가락만 들어 천장을 가리켠다) 전등. 하다못해 핸드폰의 불빛이나 촛불까지. 광원에서 빛을 가져와 극대화해서 운용하는 거죠.
 
이리스 레터:(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내 페어가 된 이 애는 싸가지는 좀 없어도 확실히 유능하긴 한 모양이다.) 같은 0시인데도 엄청 다르네!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으음~. 난 아무리 해도 그렇게 쓰진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말이야, 네 조건을 내가 충족해줄 수 있지 않을까? (박수를 짝, 쳤다.) 광원이 필요한 거라면 말이지. 마침 나는 그런 식으로 발현하는 타입이니까.
 
로에른 A. 니아:훈련을 거듭하면 점점 더 발전하게 될 거예요. 지금껏 쓰지 않았던 방식이 가능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마시길. (덤덤하게 말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생각지 못한 이점을 얻었군요. 날이 흐리거나 달이 없는 밤에는 손전등이나 라이터를 이용해야 해서 성가셨거든요.
 
이리스 레터:난 지금 방식도 마음에 드는데. (이내 빤히 당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궁금한걸. 너도 한 번 보여주면 안 돼? 정말로 가능할지 테스트도 해볼 겸, 시범을 보여줄 겸... 이걸 광원으로 삼아서. (그리고 흔들흔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을 앞으로 살짝 들이민다.)
 
로에른 A. 니아:원하신다면야 어렵지 않죠. (이리스의 광원을 향해 가볍게 들어올린 손을 뻗자, 그의 손 안에서 아른거리는 빛무리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리스의 것과는 달리 희미한 푸른빛을 띈 채고, 냉기가 느껴진다. 팔을 몇 번 유려하게 휘젓자 순식간에 빛무리가 공중에서 해체되는가 싶더니 십수 개의 칼날이 되어 공중에서부터 훈련실의 바닥으로 콰가각! 소릴 내며 내리꽂혔다.)
 
이리스 레터:(짧은 휘파람, 박수 소리가 뒤를 따른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걸어가 훈련실 바닥에 꽂힌 칼날 앞에 쭈그려 앉고는 손끝으로 툭툭 건드려 본다.) ... 차가워! 얼음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지만 확실하게 빛나고 있고. 대단한걸...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나는... 이런 느낌이려나! (핑거스냅과 함께 전과는 달리 조금 더 큰 빛무리를 불러낸다. 그 위로 새로운 빛이 덧씌워지고, 한 점으로 압축되고, 또다시 덧씌워지고, 압축되다가... ... 펑! 요란한 폭발음이 울린다. 가벼운 열풍이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로에른 A. 니아:전대 타이머도 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다뤘으니까요. 같은 시간대에 속해도 빛이라는 하나의 큰 대분류만 공유하는 셈인가 보죠.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바닥에 꽂혔던 칼날이 스르르 녹아내려 다시금 빛무리로 화해 그의 주변을 감싼다. 이리스가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다가 폭발하기 직전 빛으로 제 주변을 둘러싸 얇은 방벽을 만들었다.)
조금만 연습하면 금세 위력을 키울 수 있겠는걸요. 장교님이 좋아하시겠군요.
 
이리스 레터:앗, 칭찬인가? (긍정적인 사고방식) 아직 활용은 연습하지 못해서 보여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지만. 추가적인 응용 방식이라고 해봤자... 아까처럼 작은 빛을 만들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정도? 인명 구조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평가는 들었지.
넌 어때, 그 '프뤼나'의 페어로 조금은 합격선이었어?
 
로에른 A. 니아:칭찬이에요. 두 달밖에 안된 것치고는 위력도 방식도 괜찮은걸요. 물론 '프뤼나'의 페어에 걸맞은 분이 되려면 좀 더 노력하셔야겠지만. 저도 훈련은 계속 하고 있으니 숙련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이리스 레터:아싸. 솔직히 네가 엄~청 깐깐해 보여서 좀 불안했거든. 이런 쓸모없는 페어 따위 치워 주세요. 라고 할까 봐. (그래도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슬슬 데스크로 돌아가서 한 번 물어보자. 길바닥에서 자긴 싫단 말이야.
 
로에른 A. 니아:장교님이 인정하셨고, 세계 멸망의 예언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 하셨는데 제가 굳이 그럴 이유는 없죠. 자고로 군대란 상관의 명이 절대적인 법이니까요. (지금껏 명령은 군말없이 따라왔다. 타이머를 애지중지하는 DOT의 특성상 그들이 제게 원하는 바는 세계를 위하고, 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당신의 능력도 확인했으니 더는 의심하지 않으려고요.
그럼 가죠. (훈련실을 나서며 홍채를 인식해 문을 잠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안내데스크에 직원이 앉아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생각보다 괜찮은 앤가? 아니면 그냥 지독한 FM일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썩 좋다고는 말 할 수 없으나... 이리스는 제 페어를 "꽤 괜찮은 애"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저~기~요~. (그리고 안내데스크에 턱, 한 팔을 걸치고서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로에른 A. 니아:(뭐지? 저 불량한 포즈는?)
 
이리스 레터:(뭐긴 뭐야, 친절한 시민 포즈지... 아마도.)
(민원인 포즈일 수도 있고.)
혹시 카운터 숙소는 어디에 있어요? (직원한테 카운터라고 말해도 되겠지?)
 
직원: 어머, 장교님께 못 들으셨나요?
타이머와 카운터는 한 방을 쓴다던데요.
 
이리스 레터:...............
엥?
 
로에른 A. 니아:?
 
이리스 레터:진심으로요?
 
로에른 A. 니아:저는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이리스 레터:저도 금시초문인데요?!
 
직원: 어어, 전 장교님께 들은 대로 말씀드린 것뿐이라서요. 카운터의 짐도 이미 다 4층에 옮겨 두었대요.
이층침대도 벌써 들여 두었다던데요. (살짝 눈치)
 
이리스 레터:제 짐을요??!
 
로에른 A. 니아:……………………침대를 멋대로 바꿨다고요?
 
이리스 레터:... ...
임시죠?
 
직원: 짐까지 옮겨둔 걸 보면, 한 방을 쓰길 바라시는 것 같죠……?
 
이리스 레터:(얼굴을 쓸어내렸다... ...)
... 라는데?
 
로에른 A. 니아:(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
(지금껏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고 군말 없이 따라온 대가가 이건가? 속에서 새파란 불길이 끓는 것 같다.) 무엇보다 제 방은 1인실인데. 멋대로 물건을 건드리고 가구까지 바꿨다는 게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이리스 레터:그리고 사생활은요?! 저희 사생활은요?! 전 집에 있을 때도 동생이랑 방 따로 썼거든요?! (애꿎은 데스크 직원에게 횡설수설하고 있다.)
 
직원: 저저저한테 말하셔도요……!
 
로에른 A. 니아:누군 같이 쓴 줄 아세요? (괜히 딴지걸음)
 
이리스 레터:지금 거따가 태클 걸 때냐고?!
... ...
혹시 남는 창고 방 없어요?
 
로에른 A. 니아:DOT에 창고 같은 건 없어요.
 
이리스 레터:진짜 재미 없는 단체네, 이거!
안되겠다. 장교님한테 항의를... ... (제 옆머리를 죽죽 잡아 당기다가,) ...
그런 짬이 될리가 없잖아~!!
 
로에른 A. 니아:…………. (영원처럼 침묵하다가 다소 날카롭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교님이 결정하신 거라면 아무리 항의해 봤자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거예요.
심히 짜증나지만 하는 수 없죠. 방으로 가서 어떻게 나름의 사생활을 지킬 수 있을지 논의나 해보는 수밖에.
 
이리스 레터:... (천장을 한 번 올려다 보고, 로에른을 한 번 돌아본다. 그리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침대는 네가 1층 써... ... 2층 올라가다가 넘어질 것 같으니까...
가자... 짐이 어떻게 옮겨져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니까...
 
로에른 A. 니아:1층을 쓰려고 하긴 했는데 넘어질 것 같다니 무슨 소리실까요? (짧게 노려봤다가 몸을 홱 돌려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리스 레터:... 말 그대로? (딴청 부리며 따라 탔다.) 음... 책 이상으로 무거운 거 들게 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로에른 A. 니아:……. (말을 말자.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해 자신의 방 앞으로 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기분이 단단히 상했다.)
 
이리스 레터:삐졌어? (삐졌군.)
 
로에른 A. 니아:5년 동안 쓰던 방을 갑자기 어디서 굴러온 사람과 함께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좋을 리가요.
 
'0' 이라는 문패가 붙은 방문 앞에…… 가방 몇 개가 놓여 있습니다.
 
익숙한 모양새. 이리스의 것이 분명합니다.
 
이리스 레터:걱정하지 마, 음...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 코를 골진 않거든.
그나저나 진짜로 옮겨왔잖아~... (익숙한 제 가방을 슬쩍 들어 보고는,) 아예 열어서 풀어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문은 방 주인이 열어줄래?
 
로에른 A. 니아:저도 안 골아요. (키패드를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로에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든 감상은 '깔끔하다' 일 겁니다.
 
결벽적일 만큼 모든 물건과 가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가구 자체가 많지 않네요. 미니멀리즘이라도 지향하는 걸까요?
 
방금 막 들여왔을 새 이층침대가 보입니다.
 
로에른 A. 니아:하아…… (침대를 보곤 한숨부터 내쉰다.)
 
이리스 레터:(그리고, 그 결벽적일 정도로 깔끔한 방을 마주한 이리스 레터는...)
우와........................... (순식간에 자신이 없어졌다.)
... 침대 2층 정도는 좀 어질러도 괜찮지?
 
로에른 A. 니아:가능하면 정리를 잘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난잡한 걸 보면 참을 수가 없어서요. (딱딱하게 말하며 옷장을 열었다.) 왼쪽에는 제 옷을 걸어둘 테니, 오른쪽엔 당신의 옷을 정리해두시죠. 전 숙소에선 주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기만 하고, 훈련실이나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니 개인 시간이 없진 않을 거예요.
 
이리스 레터:딱 침대만 어지를게. 어차피 2층이라서 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걸. (2층 침대의 계단을 손으로 툭툭 건드려 보고는 옷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귀에 들어오는 정보 중 관심이 있는 것만 골라 듣는 능력을 발휘했다.) 차 마시는 건 좋아하는 편이야?
 
로에른 A. 니아:글쎄요. 어쩔 수 없이 눈에 띌 것 같다만. (이내 몸을 돌린다) 네. 주방은 없어도 커피포트 정돈 있으니까. 찻잎이나 티백을 구비해 두었어요. (탁상용 선반을 가리켠다. 티백이나 찻잎이 종류별로 담겨 정리되어 있다.)
 
이리스 레터:헤~. 의외인 것 같기도 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선반에 다가가 정리되어 있는 것들을 구경했다.) 나도 차는 좋아하거든. 주방이 없어서 요리를 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아침이나 오후에 한 잔 정도는 같이 마시는 게 어때? 시간도 겹칠 것 같은데.
 
로에른 A. 니아:당신도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면야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요. (선선하게 고개 끄덕였다.) 또 서로간에 신경써야 할 점이 있을까요? 제가 알아두어야 하는 게 있다면 미리 말씀해주시죠.
 
이리스 레터:글쎄... 난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서. 이건 꼭 지켜야 한다! 하는 사항은 없다... 고 생각해. 아, 그렇지. (짝, 박수를 쳤다.) 아침잠이 좀 많은 편이거든. 그러니까 일어나면 침대 천장 한 번만 쳐주라.
 
로에른 A. 니아:한 번으로 일어나실 수 있겠나요? (의심스러움) 전 잠이 별로 없고 일찍 준비해서 나가는 편이라 못 일어나면 그냥 두고 갈 거예요.
 
이리스 레터:... ... (잠깐 고민한다.) 그럼 두 번...
 
로에른 A. 니아:(정말 못미덥군.) 알겠어요.
욕실 사용이나 옷 갈아입기나 그런 건…… 적당히 알아서 하죠. 아니면 방 한켠에 따로 커튼이라도 설치해 드릴까요? (방이 좀 못생겨질 것 같은데. 제안하면서도 표정이 영 별로다)
 
이리스 레터:... (표정 봐라.) 표정 봐라.
네가 밖에서 갈아입어, 난 욕실에서 갈아입을게. 커튼 달면 한 3일은 죽상일 것 같아서 안되겠다 야.
그 외에 기본적인 것들도 그냥 상황 봐가면서 맞추면 괜찮지 않으려나? 음... 일이 좀 정신없이 흘러가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잘 부탁해, 로에른.
 
로에른 A. 니아:체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게 좋은데 말이죠. 어쩌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동적으로 정해야 할 사항들이 늘어났는지. (고개를 살짝 내젓는다.)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테니 차차 맞춰가면 되겠지요. 정말이지, 언제까지 함께 지낼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아직도 비현실적이다. 한두 달 정도면 각자 숙소가 생기지 않으려나. 그런 막연한 상상도 잠깐 하게 되고.)
잘 부탁해요. (5년 전부터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 시곗바늘이 다시 한 번 속도를 더하며 굴러가는 듯하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만남도 어색한데 오늘 처음 만난 이와 한 방까지 쓰게 되다니.
 
DOT는 어떻게든 타이머와 카운터를 붙여두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평화롭게 능력을 확인하고 건물을 소개해주던 하루는 이렇게 좌충우돌 사건으로 맺어집니다.
 
우여곡절로 가득 찬 첫날 밤이 지났습니다.
 
바야흐로 정식 카운터로서 보내는 두 번째 날.
 
익숙지 않은 알람 소리가 울립니다.
 
이리스가 이걸 들었을진 모르겠다만...
 
로에른 A. 니아:(알람이 한 번 울리자마자 곧바로 눈을 뜨고 소리를 껐다. 이상할 정도로 천장이 어두워서, 몇 초 늦게야 이층침대가 전등을 가린 탓임을 깨달았다.)
(잠시 곤한 정신을 가다듬다가, 침대 천장을 두 번 두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에요, 레터. (그리곤 곧장 씻으러 간다.)
 
이리스 레터:(위층에서... ...)
(사람 같은 것이 놀라 펄떡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 헉. 어? 어어... ...
(그리고 당신이 씻으러 가고도 5분이 지나서야 늘어지게 하품하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눈을 비비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아우, 진짜 부지런하네... (포트에 물을 올리러 갔다. 당신이 씻고 나오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로에른 A. 니아:(머리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나온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덕분인지 창백하던 혈색에 조금은 생기가 돈다.) 일어나셨나요, 레터?
 
이리스 레터:효과 확실하던데? 앞으로도 그렇게만 부탁해. (로에른 너머, 욕실을 흘금 쳐다본다. 따뜻한 물은 잘 나오는 모양이다.) 찻잎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물만 끓여 놨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찻잔에는 이미 티백이 푹 잠겨 있었다.)
 
로에른 A. 니아:다행이네요. 기억해둘게요. (머리에 물기가 여남은 채로 찻잔에 티백을 넣었다.) 고마워요.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해둔 거니 뭘 넣어도 상관은 없지만요. 당신의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이리스 레터:습관이 된 것뿐이라 아무거나 다 잘 마시긴 하는데... (홀짝, 한 모금 마시고는 표정이 느른하게 풀어진다.) 지금까지 마셔본 것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 ... 설마 엄청 비싼 건 아니지?...
 
로에른 A. 니아:찻잎은 전부 최고급품들이에요. 티백도 제일 유명한 회사에서 주문한 거고요. 돈도 많은데 얼마 안 되는 취미는 확실하게 즐겨야죠. (책 읽듯 평이한 톤으로 말하곤 차가 우러나는 동안 머리를 말린다. 길이가 짧아서 얼마 안 걸린다.)
 
이리스 레터:음... ... (이렇게 막 마셔도 되는 거 맞지? 잠깐 잔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 마저 마셨다.) 슬슬 나도 씻으러 갈까 싶은데... 보통 일정이 어떻게 돼?
 
로에른 A. 니아:(셔츠 위에 조끼와 재킷까지 마저 챙겨 입고 딱 좋게 우러난 차를 마신다.) 저흰 아직 정식 임관을 받지 못했으니 수업과 훈련이 주 일과예요. 식사를 하고 수업을 들으러 가면 돼요. 어서 씻고 오시죠.
 
이리스 레터:수업 때 졸지 않을 자신이 없는데. (제 잔을 평소보다 신경 써서 깔끔하게 치우고는 욕실로 향했다. 20분 정도가 지난 뒤에야 욕실 문을 열고 나온다. 머리를 말리기 위해 앉았다가 문득,) 맞다. 실전에서는 딱히 쓸 일 없긴 한데, 신기한 거 보여줄까?
 
로에른 A. 니아:그럼 일찍 주무시면 되겠네요. (이리스가 씻는 동안 커튼을 걷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찻잔을 비운다. 이미 저였다면 진작 바깥에 나갈 시간이었기에 조금 어색함을 느끼며 시계를 중간중간 바라보곤 했다.) 뭐죠? (새삼스럽게 이리스의 머리칼이 엄청나게 길다는 걸 깨달았다. 말리는 데 한세월이 더 들겠군.)
 
이리스 레터:자, 이거 봐라... ... (그리고, 그의 머리 주변이 엄청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빛공해다.)
(와중에 드라이기 소리까지 착실하게 들린다.) 이러면 빨리 마르더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 빼면.
 
로에른 A. 니아:(눈부시군…… 고개 모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빛에는 온기가 감돌았죠. 그나마 다행이네요. 능력이 없었을 땐 머리를 말리는 데 몇 분 정도 걸렸나요?
 
이리스 레터:흠... 어우, 씨. 생각하다가 드라이기에 부딪힐 뻔 했네. (손이 꼬여 잠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다.) 한 1시간? 말린 다음에는 빗질도 해야 하고. 그래도 이렇게 하니까 10분 정도로 줄어들더라! 평소보다 좀 더 곱슬거리는 것 같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기가 꺼지는 소리와 함께 빛도 사그라든다.) 됐다! 너도 다음에 이렇게 말려줄까?
 
로에른 A. 니아:한 시간이요?? 당신, 이능력이 없었더라면 그냥 두고 갔을 거예요. (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사양할게요. 전 빛을 안 써도 5분 내로 말라서요. (다 비운 찻잔을 깨끗이 씻어 정리해둔다) 다 하셨으면 갈까요.
 
이리스 레터:야속하긴... 하여튼 짧은 머리는 저게 부럽다니까. 그럼 잠시만,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 (투덜거리며 다시 욕실로 돌아가 깔끔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먼저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연다.) 좋아, 가자!
 
로에른 A. 니아:부러우시면 당신도 머리를 짧게 자르시면 되지 않나요? (평생을 숏컷으로 살아온 사람st 발언) 그래요.
 
이리스 레터: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나한텐 짧은 머리가 안 어울려.
 
로에른 A. 니아:그렇군요. (남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어서 어울리는지 아닌지도 모름)
 
이리스 레터:... ...
좀 더 영혼 있는 대답을 해주지 않을래?!
 
로에른 A. 니아:빛에 온기를 더 담아서 5분 만에 말리는 방법을 터득해 보시죠.
 
이리스 레터:폭탄머리 하고 다닐 일 있냐! (씩씩대며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로에른 A. 니아:(왜 폭탄머리가 되는 거지. 평생을 숏컷으로 살아온 그는 또다시 이해하지 못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관 2층의 교실로 들어오면 14개뿐이던 책상과 의자는 28개가 되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이머와 카운터는 서로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고요.
 
로에른 A. 니아:(적당히 앞에서 두 번째 정도 자리에 앉는다)
 
이리스 레터:(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옆에 앉았다.)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도 하나 둘씩 들어와, 자리가 모두 차자 수업이 시작됩니다.
 
창틀 너머로 아침 햇살이 쏟아집니다.
 
꽃샘추위도 누그러진 초봄은 앉아서 수업을 듣기엔 아까울 정도로 완벽한 날씨입니다.
 
교사는 칠판 위로 분필을 움직입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부드럽게 흔들리는 커튼, 책상 위의 그림자…….
 
평소와 똑같지만, 단 하나, 옆에 앉은 사람만이 어제와 다르군요.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나 제법 대단할지도)
 
그러고 보니, 입학하고서도 딱히 교과서나 시간표를 안내받은 적이 없는데……
 
교실에도 교과서는커녕 공책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수업이 이렇담?
 
이리스 레터:... (옆자리 슬쩍 찌름) 교과서나... 뭐... 공책 같은 거 없어?
 
로에른 A. 니아:(뭐가 문제지? 하는 눈으로 이리스를 돌아봤다가 뒤늦게 상대는 수업을 듣는 게 처음이란 걸 기억했다.) 오늘의 수업은…… DOT 자체 과목인 '시간'이에요.
보통 입학 초반에 듣는 수업인데, 저희의 능력에 관해 배우죠. 정의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등. 그래서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아요.
 
이리스 레터:에, 그런 거였어? 난 또. (그제서야 좀 편안하게 앉는다.) 과목 이름이 시간인 건 좀 새롭네... 이런 거라면 졸지 않고 들을 수 있겠는걸. 재밌어 보여.
 
로에른 A. 니아:다른 과목이어도 졸지 마세요.
 
이리스 레터:솔직히 말해서, 그건 자신이 없다.
 
로에른 A. 니아:(어이없음)
 
이리스 레터:선생님 몰래 쪽잠 자는데 도가 텄거든, 나는... (자랑 아님)
 
로에른 A. 니아:자랑이 아닐 텐데요. 수업은 똑바로 들으시길. (앞으로 상당히 거슬리겠군)
 
이리스 레터:(대답이 없다. 대신 뭐 잘못 주워먹은 개처럼 당신의 반대쪽을 본다.)
 
두 사람이 속닥이는 사이 분필이 다각다각 글씨를 새깁니다. 교사가 적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타이머와 카운터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질은 무엇인가?
2. 타이머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멸망할 것인가?
3. 도밍게즈의 건국 신화를 읽고, 시간과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사:자, 새로운 친구들이 왔으니 오랜만에 초심으로 돌아가 볼까요.
 
운을 뗀 교사는 첫 번째 문장을 읽습니다.
 
교사:타이머와 카운터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자질은 무엇인가? 별 것 아닌 문제 같지만, 도밍게즈에서 타이머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따라서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하죠.
카운터 또한 건국 축제를 기점으로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될 테니, 중요한 문제죠.
 
교사는 답을 기다리듯 좌중을 훑습니다.
 
이리스 레터:(건네어진 질문 앞에서, 이리스 레터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
(모르겠는데.)
 
로에른 A. 니아:(반면 별다른 망설임 없이 명료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와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발전시켜나가야만 세상이 바라는 훌륭한 타이머가 되는 데 일조할 수 있겠죠. 때로는 나의 선택이 맞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도 올 테고요.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결단을 내리더라도 최선의 대처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리스 레터:오오... ... (책상 아래에서 작게 박수를 쳤다. 아주 작게.)
 
뒤이어 다른 학생 몇 명도 답을 내놓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교사의 시선이 이리스에게서 멎네요.
 
이리스 레터:... ... (나?)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은가 봅니다.
 
이리스 레터: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뺨만 몇 번 긁적이다가...) 으음... 사실 잘 모르겠는데요. 굳이 따지자면... 진심? 그 왜, 사실 얼굴을 비춘다거나 공익 광고를 찍는다거나... 그런 건 진심이 없어도 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안전한 집 같은 곳에서 매체 속의 타이머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도움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될 때에는... 그 상황에 진심으로 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잡지의 페이지, TV 속의 얼굴이 아니라 저희를 직접 마주 보게 될 사람들은 실제 우리의 얼굴 속에서 안심할 구석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완벽하게 타인에게 공감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상황에 진심으로 임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는 것... 그게 타이머와 카운터에게 필요한 자질 아닐까요?
 
교사:(빙그레 미소한다.) 훌륭한 답입니다, 이리스.
강한 능력, 진심, 자신감, 단호한 결단력……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모두 일리있는 가치들입니다만, 적어도 저는 ‘타이머가 아닌 나와 타이머인 나를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대답인가요? 혹은 의외의 대답인가요?
 
이리스 레터:헤~. (흥미로운 듯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사: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구원자라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이에요. 언제나 구원자, 타이머, 카운터라는 이름에 휘둘렸다간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힘들어진다면 ‘구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사회적인 껍질을 뒤집어쓰고, 개인으로서의 일은 잠시 차치해두는 거죠. 정말 정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단 쉬울 겁니다.
 
가볍게 조언한 그는 이윽고 2번째 문장으로 넘어갑니다.
 
교사:자, 그럼 생각해보죠.
타이머가, 그리고 나아가서 카운터가 사라진다면 세계는 멸망할까요?
 
이리스 레터:(사람 28명 사라진다고 멸망할 세계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음... 잘 모르겠어요!
 
로에른 A. 니아:확신할 수 없는 문제 같네요.
 
교사:(대답을 듣고는) 사실 이건, 도밍게즈가 생겨난 이래 타이머와 카운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으므로 명확히 그렇다, 아니다를 나눌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로 여겨지고 있어요.
 
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사:사람들은 시간이 있기에 타이머가 태어난다고 믿지만, 실상은 반대예요. 타이머가 있기에 시간이 존재하는 거죠.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잊지 않는 법입니다.
물론 이건 전부 가설입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섭리를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하지만,
 
교사:타이머가 둘이라면 시간은 더 안정적으로 존재하며 흘러갈 거예요. 끝은 멀어질 겁니다. 영원히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초읽기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테죠.
 
마지막 문장만큼은 단호했습니다.
 
교사:그러니, 우리는 모두 여러분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바라요.
 
<듣기> 판정
 
이리스 레터: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그 목소리는 어쩐지 유독, 간절하고 집요하게 들렸습니다.
 
로에른 A. 니아:(퍼뜩 고개를 돌린다. 창밖을 바라본다.) ……?
 
이리스 레터:응? ... 무슨 문제라도 있어? (속닥거리며 물었다.)
 
로에른 A. 니아:(몇 초간 더 창밖을 바라보다가 마주 속삭였다.) 뭔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요?
 
이리스 레터:...? 글쎄, 난 못 들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은 거 아냐?
 
뒷자리에 앉은 이들도 속닥거리고 있습니다.
 
"방금 무슨 소리야?"
 
"선생님은 못 들으신 건가?"
 
이리스 레터:(나만 못들었나본데)
...
그냥 내가 귀가 좀 안좋을지도...
 
로에른 A. 니아:별거 아니겠죠. 당신이나 선생님이나 귀가 안 좋으신가 봐요. (무덤덤)
 
이리스 레터:... 이따 수업 끝나고 나가서 확인해볼까? 궁금하긴 한데.
 
로에른 A. 니아:그래요. 큰일이 났다면 DOT 측에서 안내를 하든가 처리를 했겠죠.
 
두 사람이 소리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사이 유인물이 배부됩니다.
 
회색의 종이에는 익숙한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도밍게즈 신화입니다. 도밍게즈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보았을.
 
3. 도밍게즈의 건국 신화를 읽고, 시간과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자.
 
교사:3번 질문은 숙제예요. 방금 나누어준 유인물 뒷장에 적어 제출하면 됩니다.
자, 오늘은 첫 수업이니 조금 일찍 마치도록 할까요? (경쾌)
 
이리스 레터:와! (과제가 생기긴 했지만 신난다!)
 
교사:친해지라는 의미로 주는 휴식이니, 타이머와 카운터는 되도록 함께 다니세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건국 축제 때까지는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하고요.
 
당부와 함께 교사가 먼저 교실을 떠납니다.
 
교실에는 타이머와 카운터, 그리고 유인물이……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66
판정결과: 실패
 
전부입니다.
 
이리스 레터:(머리 긁음)
(교실 한 번 다시 본다... 뭐 재밌는 거 없나?)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60
판정결과: 실패
 
교실에는 자리를 뜨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타이머, 카운터 말고는 별다른 게 없습니다.
 
ㅋ...
 
이리스 레터:(머리 긁음...)
 
로에른 A. 니아:(유인물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종이를 팔랑거린다.) 한 장이 더 있네요.
 
이리스 레터:응? (쳐다본다...)
 
또 다른 유인물은 ‘연구 보고서’입니다.
 
심지어 제일 마지막 줄에, 필수 제출하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아니, 이걸 안내를 안 해주면 어떡해? 모르고 넘어갈 뻔 했네. (투덜거리며 두 장의 유인물을 모두 챙겼다.) ... 그런데 글씨가 좀 번져 있지 않나?
 
로에른 A. 니아:그렇네요. 제 것도 번져 있어요. 인쇄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나.
 
내용상, 꼼짝없이 함께 붙어 있을 수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제출하라는 거지? 소리없이 의문을 표했을 때, 타이밍 좋게 문자가 도착합니다.
 
「 2052-03-08, 09:18
 
제0시 페어 1번 훈련실 사용 가능
 
연구 보고 협조 요망 」
 
이리스 레터:... ... (문자를 바라보다가...)
일찍 마친 의미 있어, 이거?
 
로에른 A. 니아:모든 페어에게 공통 문자가 갔을 테니, 바로 갈 필요는 없어요. 연구원의 수도 한계가 있을 테니. (이런 문자를 여러 번 받아봤는지 대수롭잖게 말한다.)
물론, 저는 바로 훈련실로 가도 상관없고요. 어떻게 하시겠나요.
 
이리스 레터:빨리 끝내는 편이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럼 잠~깐만 바깥 구경하고 가자. 뭐 떨어지는 소리 났다며? 심지어 나랑 선생님 빼고 다 들은 것 같고...
 
로에른 A. 니아:좀 신경쓰이는 소리긴 했죠. 가볼까요.
 
이리스 레터:좋아, 그럼 빨리 가보자! (신나서 뛰쳐나갔다.)
 
이리스는 신나게 교실을 나섭니다.
 
서관 밖으로 나가보나요?
 
이리스 레터:(가보자고)
 
로에른과 함께 서관 밖으로 가봅니다. 역시 아직은 건물의 외양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교실의 창문이 있었던 쪽으로 돌아가 보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DOT의 관계자들이 서 있거나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지도 않네요.
 
이리스 레터:... 너무 아무것도 없는데?
 
로에른 A. 니아:흐음. 누가 몰래 능력을 쓰기라도 했나. 잘 모르겠네요.
 
이리스 레터:에이, 김샌다... (대놓고 실망한 얼굴이다.) 연구 보고나 빨리 해치우고 오자. 이제 오늘은 그거 말고 다른 일정은 더 없는 거지?
 
로에른 A. 니아:네. 당신에겐 잘된 일이네요. 지루한 수업이 없으니.
 
이리스 레터:아싸, 그럼 남는 시간에는 어제 빌린 책 읽어야겠다. 훈련실이 이쪽이던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로에른 A. 니아:……반대예요. (아직 구조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이리스 레터:... ...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돌아왔다...)
낯설어서 그래, 낯설어서...
 
로에른 A. 니아:그럴 만도 하죠. 따라오세요. (먼저 앞서서 훈련실로 향한다)
 
이리스 레터:(저벅저벅 따라감...)
 
시간은 두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신속히 흐릅니다.
 
어쩌면, 함께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호출을 따라 훈련실로 걸음을 옮기면,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로에른의 말대로 페어별로 진행할 모양입니다.
 
문 앞에서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두 사람을 반깁니다.
 
애쉬:왔어?
 
회갈색 머리칼에 자색 눈을 지닌 연구원, 애쉬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겁니다.
 
애쉬는 일지에 ‘제0시 페어, 타이머 로에른, 카운터 이리스’라고 적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연구 방식에 관해 설명합니다.
 
애쉬:보고서로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별로 어려운 건 아냐. 첫 만남의 소감은 되도록 진솔하게 적어주고, 지금부턴 타이머와 카운터 간의 상관관계나 영향력을 검사해볼 거거든.
몇 가지 단계에 맞춰 진행 가이드를 띄워놨으니까 보고 따라가면 돼. 힘들거나 불편하다 싶으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쨌건 오늘은 처음이니까.
 
이리스 레터:네~. (천국의 계단 같은 걸 시키는 건 아니겠지, 싶어서 좀 안심했다.)
 
로에른 A. 니아:(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두 사람이 긍정하자, 애쉬가 로에른에게 작은 패드를 부착하기 시작합니다.
 
이리스에게도 다른 연구원이 같은 위치에 패드를 붙입니다.
 
뺨, 귀 뒤쪽, 목덜미와 손목 안쪽……. 피부색과 엇비슷한 그것은 눈에 띄지 않지만,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왠지 상당히 존재감을 자랑합니다. 연구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서일까요?
 
전혀 끈적거리지 않는데도, 닿은 부분이 질척질척합니다.
 
애쉬: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도 영향을 주지만,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좋은 영향을 준다는 가설이 유력해. 실제로…… 다른 페어들의 결과도 좋았고.
자리를 비켜줄 테니까, 테스트해봐. 수치는 전부 기록될 거야. 뭘 하고, 얼마큼 편차가 있었는지 보고서로 작성하면 끝. 어렵지 않지?
 
애쉬는 상당히 경쾌하게 설명합니다. 설명만 듣자면 별로 어려울 것은 없어 보입니다.
 
세상만사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게 주의점이지만요.
 
이리스 레터:(묘하게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해서 뺨에 있는 패드 긁... 으려다가 그만둠)
체력 훈련 같은 건 아닌 거죠? 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애쉬:후후, 그건 아니야.
진행 가이드는 안쪽에 있으니 어서 들어가봐.
 
애쉬와 연구원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리스와 로에른의 등을 떠밉니다.
 
이리스 레터:에. (떠밀려서 들어가요)
 
연구 보고를 돕는 일이라면 별로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리스가 여태까지, 로에른과 만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카운터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위해서 몇 번이고 거쳤던 과정이잖아요.
 
심장박동과 능력의 효율을 확인하는 패드를 부착하고, 능력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한 후의 신체 변화를 검사하기도 했었죠.
 
건강 검진이랑 비슷해서 조금도 여상히 와닿지 않았습니다.
 
문득 소독약 냄새를 맡습니다. 짭조름하고, 화한…… 약물 특유의 그 냄새.
 
바람도 불지 않는데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리고, 거세게 뛰지도 않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를 막습니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모를 애매한 감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각인이 새겨진 손목까지 패드를 부착한 두 사람은 훈련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내부는 깨끗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장도 바닥도 반지르르하니 윤이 납니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된 건지, 스크린만 바닷속 풍경을 비춥니다.
 
거품이 일다가 흩어지고, 다시 일다가 부서지고……
 
달칵, 문이 완전히 닫히면 스크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한 줄이 전부입니다.
 
손깍지, 포옹, 이마 맞대기, 비쥬, 입맞춤.
 
다시 읽어도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네, 그러니까……
 
이리스 레터:... ...
 
<교육> 판정
 
이리스 레터:
교육
기준치: 60/30/12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머리굴림)
 
Baiser. 흔히 ‘비쥬’라고 알려진 프랑스의 인사법으로 양 뺨을 번갈아 맞대며 마치 입을 맞추듯 ‘쪽’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연구 보고라는 게…… 지금 생각하는, ‘그거’ 맞나요?
 
로에른 A. 니아:…….
 
이리스 레터:(다시 들여다 봄...)
진심?
 
로에른 A. 니아:…………………………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네요.
 
이리스 레터:바로 그거야.
이게 연구라고? 정말로?
 
로에른 A. 니아:이게 다 당신 때문이지 않나요? (죄없는 이리스 공격)
 
이리스 레터:나??? (본인 가리킴)
 
로에른 A. 니아:카운터라며 갑자기 나타난 당신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구를 하게 된 거죠. (신경질적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웬만해선 좋게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왜 자꾸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려 드는 건지.
 
이리스 레터:아니, 누군 억울하지 않은 줄 알아? 나도 그냥 TV에서 타이머들 구경하면서 "와~ 오늘도 멋지네~ 짱이다." 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거든!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하셨으니까... 적당히 요령껏 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 ... 혹시 결벽증, 그런 거 있는 건 아니지?
 
로에른 A. 니아:(제 팔을 겹쳐 팔짱을 낀다.) 결벽증까진 아니지만, 스킨십은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나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리스 레터:이거 답답한 양반이네. 누군 아닌 줄 알아? 라는 말밖에 할 말 없게 만들고 말이야... 아오, 그럼 그냥 좀 큰 곰인형이라고 생각해! (팔짱 낀 팔을 찰싹 때리고, 손을 끄집어내 가볍게 깍지를 꼈다.)
 
로에른 A. 니아:(어쩌다 손이 끄집어내졌다. 한쪽 눈썹만 치켜올린다.) 굳이 하셔야겠다면 예고를 좀 해주시겠어요?
 
이리스 레터:표정 봐라, (거울처럼 똑같이 눈썹을 치켜올려 보였으나... 어차피 한 쪽 눈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리스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어쩐지 심장이 간질간질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아어 <초능력> 판정
 
이리스 레터:
초능력 Roll
기준치: 50/25/10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일순 당신의 능력이 살아 숨쉬듯이 부풀어 오릅니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어제 훈련실에서 띄운 정도의 작은 빛이 이리스의 어깨 위에서 나타납니다.
 
이리스 레터:... 깜짝이야, 언제 나왔어! (어깨에 있던 모르는 새 발견한 투)
 
로에른 A. 니아:당신이 만들어낸 게 아닌가요?
 
이리스 레터:봤어? 아니면 너도 느꼈어? 뭔가... 뭔가 음... ... (표현력의 한계를 맞았다.) 아무튼 뭔가...!!
당연히 아니지. 모르는 빛이야.
내 것 같긴 해. (잡은 손 흔들흔들)
 
로에른 A. 니아: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기분이 영 별로라는 것밖엔. (곧장 손을 놓는다.)
 
저 매정하고 싸가지없는 인간!
 
어이가 없어질 때,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싸가지...)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53
판정결과: 실패
(싸가지에 놀라서 눈도 잘 못 뜬 것 같다...)
(어쩐지, 인생 난이도를 3정도 높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봄)
 
행운 3 감소, 성공으로 판정합니다.
 
어색하게 돌아간 시선이 스크린의 반대편 모서리에 닿습니다.
 
온통 하얘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검은 점이 반질반질 빛나며 이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 동관의 실험실, 연구소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죠.
 
아무리 봐도…… CCTV입니다.
 
이리스 레터:... ...
아~!!!!
(CCTV를 향해 손가락질 한다.) 저거 CCTV잖아!!!
 
로에른 A. 니아:네. 미처 말씀드리기도 전에 냅다 손을 잡으셔서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다.) CCTV가 없을 리 없잖아요?
 
이리스 레터:(미간을 꾹꾹 누른다.) 혹시 DOT, 좀 이상한 단체야? 원래도 좀 이랬어? 타이머의 사생활을 굉장히 궁금해 한다거나...
 
로에른 A. 니아:DOT 정도의 기관에 CCTV가 달려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죠.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여긴 훈련실이잖아요. 선대 타이머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없는 특성상,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겨야 선대들이 어떤 식으로 능력을 썼는지 살펴보고 활용할 수 있어요.
물론, DOT 밖에서나 안에서나 타이머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는 건 똑같죠. 익숙해지시기를.
 
이리스 레터:미치겠네. 이런 건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CCTV를 계속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그럼 이걸 이제 뭐 어쩐다. 음...
 
연구원들은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CCTV는 계속 눈을 빛내고 모든 것은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카메라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이리스 레터:CCTV 쪽이 되게 신경 쓰이긴 하는데, 솔직히 아까 그건 꽤 신기하지 않았어? 능력이 갑자기 불어나는 기분이더라니까.
 
로에른 A. 니아:제가 왜 사생활을 얘기했는지 이해가 좀 되시나요? (어제의 이야기다)
그리고…… 전혀 모르겠는데요. 당신의 체온 말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리스 레터:희한하네. (곰곰...) 그럼 손만 한 번 더 잡아보면 안 돼? 너 기절할까 봐 포옹부터는 하지도 못하겠다, 야.
 
로에른 A. 니아:………………포옹까지는 허락해 드리죠. (심히 깊은 고민이 있었다)
 
이리스 레터:... ... (굉장히 선심 썼군...)
 
로에른 A. 니아:어쨌건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하니까.
 
이리스 레터:좋게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같은 샴푸 쓰고, 같은 밥 먹고, 같은 수업 듣고... 대충 너나 나나 똑같은 상태 아닐까? 별로 나쁘진 않을지도 몰라.
그리고 난 친구랑 하는 포옹은 기분 좋던데.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봐. 너 친구 없지...
 
로에른 A. 니아:정말로, 심히, 불편하네요. (아직도 이리스와 한 방에서 지낸다는 게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정확히 꼬집는 말을 들으니 몹시 떨떠름해졌다.)
친구 같은 걸 왜 만들어야 하죠?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다가오는 만큼 물러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애매하게 팔을 벌렸다.)
 
이리스 레터:있으면 재밌잖아?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가 있으면 종일 떠들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으면 옆에만 있어도 즐겁고... (반응이 조금 재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애매하게 팔을 벌린 그와는 대조적으로, 품 안 가득 다소 와락 끌어안았다.)
 
로에른 A. 니아:전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아요. 혼자 있는 게 편안하고요. (그 말대로, 자세부터 포옹이 익숙하지 않은 티가 풀풀 난다. 어색하게 팔을 움직여, 사실상 이리스의 등에 얹는 수준으로만 올렸다.)
 
이리스 <이성>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안락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완벽하게, 편안하지?
 
이어 <초능력> 판정
 
이리스 레터:
초능력 Roll
기준치: 50/25/10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또다시 능력이 크게 움틀합니다. 태동할 뿐 아니라… 불어나는 게 느껴집니다.
 
고작 손을 잡고 포옹한 것만으로도 능력이 커지다니.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 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리스 레터:음... ... (DOT에 도착하고서 2달. 내가 생각보다도 더 외로웠나? 타인의 온기가 이렇게 편안하게 느껴질 일이던가. 그가 질색하건 말건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아 보고서는 빛무리 하나를 근처에 띄워 보였다. 그것은 온기를 넘어 열기마저 품고 있었다.)
봐. 어제 봤던 그거랑 좀 다르지 않아?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로에른 A. 니아:능력에 변화가 생긴 건가요? (어디에 둘지 몰라 허공만을 보고 있던 시선을 빛무리를 향해 굴린다. 확실히, 어제 느꼈던 것보다 뜨겁다.) 이만하면 머리칼도 5분 만에 말릴 수 있으려나요.
 
이리스 레터:이 정도의 열기면 폭탄머리가 되고 말걸. (작게 키득였다.) 희한하네... 난 이렇게 변화가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지... ... 잠깐. 설마 내가 네 능력을 흡수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로에른 A. 니아:네, 전 여전해요. 능력이 빨려들어가는 느낌도 전혀 없고요. (이리스가 웃음짓자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정말이지 기묘한 기분.) 변화를 확인했으면 이제 좀 떨어져 주시겠어요?
 
이리스 레터: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선선히 물러섰다. 조금 아쉬운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나저나 진짜 말랐다, 너. 밥 좀 잘 챙겨먹어.
 
로에른 A. 니아:죽지 않을 정도로는 먹고 있어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럼, 여기에서 마무리할까요.
 
이리스 레터:(얼씨구, 하는 얼굴) 궁금하긴 하지만... 그게 낫겠다. 어차피 다들 어제 만난 사이고... 다른 페어들도 딱 여기까지 하지 않았으려나? 벌써부터 입맞춤까지 기대한 거면 그건 연구원들이 양심이 없는 거지.
 
로에른 A. 니아:과연. 당신처럼 과하게 거리감 없는 사람들이 둘 있다면 끝까지 했을지도 모르죠. 전 상상도 안 가지만요.
 
이리스, 1d20 판정.
 
이리스 레터:야, 나도 초면에 입맞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즐거운 듯 웃었다.)
20
?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가 20만큼 향상됩니다.
 
이리스 레터:(진짜 무슨 일인가?)
 
로에른 A. 니아:(한편 먼저 뚜벅뚜벅 걸어가서 훈련실 문을 열고 있다.) 애쉬. 여기서 마무리하겠어요.
 
이리스 레터:(난 빛의 지배자다 같은 무드 되어서 빛무리 한 5개 불러다가 쇼하는 중)
 
로에른 A. 니아:(모르는 사람입니다.)
 
애쉬:둘 다 고생했어. 로에른치고 힘내줬네. (웃는다) 이리스도 힘이 커진 것 같고. 그치?
 
이리스 레터:장난 아니죠. 이걸 좀 보세요. (빛의 거신병을 만들었다.)
 
애쉬:와. 동관에서 시험해봤을 땐 분명 이 정도까진 아니었지? 대단하다! (생글거리며서 박수친다)
 
로에른 A. 니아:이만 가 봐도 되나요? (한편, 관심없음)
 
이리스 레터:야, 내 역작에 좀 더 집중해달란 말이야! (소리지르다가...)
(거신병 우르르 무너짐)
... ...
저도 가 봐도 되나요?
 
애쉬:후후. 그래그래. 점심시간 전까지 좀 시간이 남았으니 편히 쉬어.
 
축하해요, 이리스. 이로써 구원자가 되는 한 걸음을 훌륭히 내디뎠군요!
 
로에른 A. 니아:(매정하게 몇 걸음 앞서서 걸어간다.)
 
이리스 레터:야, 같이 가~! (손 휘휘 저어 남은 빛까지 흩어버리고 따라감)
 
로에른 A. 니아:(앞으로 다신 이런 연구는 하고 싶지 않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하 1층으로 향했다.) 전 카페에서 보고서를 쓸 거예요.
 
이리스 레터:(멀뚱히 쳐다보다가...) 맞은편에 앉는다고 하면 쫓아낼 생각이야?
 
로에른 A. 니아:쫓아낼 마음까진 없지만, 24시간 붙어 있어야 하나? 싶어지긴 하네요.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 데 뭐 있는 대답)
 
이리스 레터:24시간은 아니지. 화장실 가고, 씻고 하는 시간을 빼면 대충... 23시간이지. (그리고 꼭 이런 걸 태클 걸고넘어지는 사람) 나도 어지간해선 다른 시간의 페어들이랑 친해져 보고는 싶은데... 걔네도 아직 영 떨떠름해 보이기도 하고.
내가 지금 여기서 친구가 너밖에 없어.
 
로에른 A. 니아:그 정도면 24시간이나 다름없어요. (혀를 찼다.) 당신 성격이라면 다른 분들과 금방 가까워지실 것 같은데. 저처럼 사람과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지만 성격 좋은 타이머들도 많아요.
그리고 왜 제가 당신의 친구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그런 걸 만들지 않는데요. (빤히)
 
이리스 레터:근데 난 우리가 친구면 좋겠는데? (가민히 듣다가... 뻔뻔한 얼굴 함)
 
로에른 A. 니아:전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야멸차게 밀어내곤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뜨거운 카페라떼를 주문한다.) 당신은 뭘 드실 건가요.
 
이리스 레터:친구가 별거야? 그냥 밥 같이 먹고 지내면 친구지... (이쯤 되니 좀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메뉴판을 훑어봤다.) 카라멜 마키아토. 그나저나 의외네, 얼굴만 보면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처럼 생겨서...
 
로에른 A. 니아:마음을 터놓고, 가깝게 지내야 할 것 같잖아요. 저는 딱히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요.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이리스가 말한 메뉴도 함께 계산했다.) 에스프레소도 즐겨 마시긴 해요. 시럽이 들어간 건 별로.
 
이리스 레터:... (내 것까지 동시에 계산하면서 할 말인가?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큰 의미를 둘 필요까진 없는데. 그럼... 나중에 그렇게 되면 그때 친구가 되는 건가? (가볍게 윙크했다. 어차피 눈 하나만 보인다.) 텁텁하지 않나... 아무튼 뭐. 들고 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자리 좀 잡아 줘. 여기서 제일 좋은 자리 같은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아냐.
 
로에른 A. 니아:글쎄요. 당신과 얼마나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직도 이란 단어의 무게를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슴 한켠에 부정하고 싶은 무의식이 산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답은 가정형이다. 시선을 모로 돌리고 있는 탓에 윙크를 보진 못했지만 만약 목격했다면 왜 갑자기 눈을 감지…… 란 의문이나 들었을 듯)
전 무조건 조용한 자리를 선호해요. 다행히 비어 있네요. (카페 안쪽, 안락한 소파가 마련된 자리를 눈짓했다.)
 
카페의 인테리어도 하나같이 흰색과 남색 계열입니다.
 
널따란 카페 중간중간 몇몇 페어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뭔가에 몰두하고 있네요. 아마 보고서를 쓰는 모양이죠.
 
이리스 레터:헤~. 장교님 눈치를 봐서는 한동안 붙어 다니긴 해야 할 것 같던데. (당신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면서 카페 내부도 한 번 둘러보았다.) 쟤네도 다녀온 모양이네.
(구경하는 사이 주문한 음료가 나오면, 트레이를 받아 들고는 조심조심 자리로 걸어가 테이블 위에 올려다 두었다. 그리고 소파에 풀썩! 하고 주저앉았다.) 좋아, 그럼 우리도 과제를 한 번 해보실까...
 
로에른 A. 니아:(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던 청단발의 소녀가 웃으며 아는 체를 한다. 익숙하게(?)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9시의 타이머, 힐다예요. 그 옆은 카운터겠죠.
(음료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이리스와 함께 안쪽 자리에 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며 유인물과 펜을 테이블에 꺼내두었다.)
 
이리스 레터:(방금 되게 익숙하게 무시하지 않았나? 얼떨떨한 얼굴로 자기라도 손인사를 했다...)
흠, 어디 보자... 타이머와 카운터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낀 감상.
(로에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본다. 손이 반사적으로 '싸가지' 라는 단어부터 적으려다가 겨우 멈췄다.)
(대신 보고서를 로에른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을 각도로 고쳐 들고서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음. 신경이 타이머를 향해 집중되는 느낌? 이끌림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로에른 A. 니아:(이리스를 흘끔 보는가 싶더니 펜을 들어 거침없이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순간 들었던, 이끌리는 듯하면서도 도망가고 싶기도 한 이질적인 감정을 건조하게 적어내려갔다. 2번 질문 역시, 훈련실에 다녀오니 질문은 그 내용을 어렵잖게 추측 가능하다. 직전의 광경을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오려 한다. 애써 참으면서 마찬가지로 사감 없이 느낀 바 그대로를 적어내렸다. 능력의 향상이나 기분이 널뛰는 건 제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제하고.)
 
이리스 레터:(그리고 이쪽은... 2번 항목에서 표현력의 위기를 맞은 참이다. 손 잡았더니 모르는 빛이 나옴. 이라는 문장을 적었다가 쓱쓱 지운다.) ...
난 이공계와는 인연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왜 연구 보고서 같은 걸 적게 된 거지? (그래도 적당히 적긴 적었다. 당시 느꼈던 안정감이라던가, 눈에 띄게 증폭되었던 능력에 대해서. 그 사이 커피는 거의 바닥을 보이게 되었다.)
 
로에른 A. 니아:(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써내려간 보고서를 마저 마무리하고 파일에 깔끔하게 넣었다.) 그간 동관에서 지냈다 하셨죠? 그곳은 연구소라 이런 보고서는 하루에도 몇십 개씩 받아볼 텐데. 한 번도 써보지 않으셨나요? 그럼, 무얼 하며 지내셨나요?
 
이리스 레터:그 2달 치까지 합산해서 말이야. DOT에 오기 전까진 아예 담을 쌓고 있었거든. 처음 내가 동관에서 적은 보고서 꼴이 어땠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걸... (자신이 적었던 보고서 하나를 떠올려 본다. 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끔찍했다.) 그래서 교정된 게 지금 수준인 거고.
그래도 뭘 쓸 수 있는 게 이것 뿐이라 꽤 열심히 쓰긴 썼는데. 그러고 보면... 너는 12살 때부터 여기서 지냈던 거야?
 
로에른 A. 니아:수업 때 졸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하신 데서 이미 어느 정도 추측은 했지만. (눈을 잠시 가늘게 떴다가 만다.) 제출할 만큼 쓰기만 했다면 됐죠.
네. 어느덧 5년이 넘었군요. (매일 같은 얼굴들을 보며 지냈으니 DOT의 관계자들이나 타이머들끼리는 가족같다 불러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그의 성격상 별로 친화력 좋은 사이는 아닌 듯하다.)
 
이리스 레터:그럼 가족들은? 편지도 한 장 못 쓰게 할 정도로 관리가 엄청 깐깐하던데. 내 경우에는 보안상의 문제였겠지만... 12살이면 되게 어린 나이잖아.
 
로에른 A. 니아:어머니는 제게 각인이 나타나 DOT에 가게 되었을 때 많이 우셨던 것 같네요. 하지만 저는 딱히 가족이 그립거나 하진 않았어요. 타이머가 되는 건 도밍게즈 최고의 영예니까. 기뻐해야 마땅하겠죠. (제 손목을 잠시 들여다본다.) 편지는 꾸준히 받고 있어요. 방학을 맞으면 가끔 1구역에 돌아가기도 하고요. 당신은 아마 보안상의 문제가 아닐까 싶군요. 어제 듣기론 7구역 출신이라고 하셨던가요.
 
이리스 레터:우와, 넌 가족한테도 똑같네... 나도 건국 축제가 끝나면 편지를 쓸 수 있으려나. (당신의 손목에 시선이 짧게 머무른다.) 응, 7구역. 가본 적 있어? 1구역은 거의 항상 비가 오잖아. 7구역은 습하지도 않고 딱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
 
로에른 A. 니아:건국 축제 때 카운터가 공개되니, 아마 가능해지겠죠. 당신은 저와 달리 가족과 각별한 모양이에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DOT는 여기저기의 행사에 곧잘 초대받곤 하니, 가본 적 있을 거예요. 일일이 기억에 남겨두진 않아서 언제였는지, 왜 갔었는지 분명히 떠오르진 않지만. 제 고향인 1구역관 다르게 날씨가 참 좋았다는 건 기억나네요.
 
이리스 레터:아무렴. 맨~날 싸우던 쌍둥이 여동생도 있는데, 걔가 그리울 정도면 말 다했지.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린 듯 조용히 웃었다.) 어머니가 우셨을 정도면 너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은데, 매정하긴.
그럼 나중에 한 번 놀러 와! 방학에 할 일 없으면 말이야. 네 입에서 "꽤 재밌네요"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보고 싶어졌거든.
 
로에른 A. 니아:쌍둥이라…… 제게도 쌍둥이 동생들이 있어요. 저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사이도 썩 좋지는 않죠. (이리스와 달리 전혀 그리워보이진 않는다. 내내 무표정이라 가족 아닌 완전히 다른 주제를 얘기한다 해도 믿을 정도다.) 도밍게즈의 누구나 아는 타이머가 되었으니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겠죠. 그 정도면 자식 도리는 다 한 것 같은데요.
7구역은 날씨도 좋은 곳이니…… 그럴까요. 하지만 너무 시끄러운 건 사양이에요.
 
이리스 레터:(잠깐 로에른을 닮은 쌍둥이 두 명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가족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런 태도인 거라면, 좋지 못한 사이의 과실은 이쪽에 있겠거니...) 글쎄. 자랑스러움과는 별개로 그냥 곁에 있고 싶었을 것 같은데... ... (그냥 손을 휘휘 저어 주제를 넘긴다.)
그때 가서 다른 말 하기 없기야. 시끄러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 (빤히 쳐다본다.) 1kg쯤 불어서 올 수는 있겠다.
 
로에른 A. 니아:왜 그렇게 빤히 보시는 거죠?
 
이리스 레터: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부터 생각했던 건데...
밥 좀 먹어라. (7구역인)
 
로에른 A. 니아: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면 되잖아요. 당신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실 필욘 없어요. (싸가지x)
 
이리스 레터:하지만 내가 실수로 툭 쳤다가 쓰러지면 어떡해. (명절 할머니 얼굴 됨)
 
로에른 A. 니아:그럼 당신도 똑같이 쓰러지게 만들어 드리죠. (싸늘)
 
이리스 레터:무슨 농담을 못하겠다 야. (어이X) 흠... 슬슬 보고서는 다 쓴 것 같은데. 일어날까?
 
로에른 A. 니아:별로 재미없었어요. (딱딱하게 말하고 컵과 파일을 챙겼다.)
 
이리스 레터:(잠깐 고민하다가...)
(옆구리 콱 찔러봄)
 
로에른 A. 니아:. . . . . . . .?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에 몸이 살짝 휘청거리더니, 곧바로 기계 돌아가듯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간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리스를 꼬라봤다.) 뭐하시는 거죠 지금……??
 
이리스 레터:.............
진짜 휘청거리네? (딴청)
 
로에른 A. 니아:……. (카페의 전등에서부터 옮겨온 빛무리가 그의 주변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이리스 레터:잠깐, 잠깐잠깐잠깐... 우리 말로 해결하자. 우리는 지성인이잖아. 갈등 해결 수단으로 대화라는 좋은 수단이 있어. 대표적인 예시로는 "미안!"이라던가...
 
로에른 A. 니아:당신은 물리적 힘으로 갈등을 유발했는데 왜 저는 대화로 해결을 해야 하죠? (로에른의 성격은 DOT 내에 익히 알려져 있으므로,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타이머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두 배로 황당했다. 똑같이 옆구리를 찔러 복수할까 하다가, 애도 아니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짓이란 생각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앞으론 이러지 마세요. 아시겠나요.
 
이리스 레터:알겠어, 알겠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하여튼 제 페어라고 만나게 된 이 녀석은 장난이라고는 하나도 몰라서... 땅이 꺼져라 한숨이나 한 번 쉰다.)
(그래도 어떻게든 재밌는 구석을 찾아봐야지. 그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로에른 A. 니아:(귀찮은 혹이 붙은 것 같다. 차라리 자기와 비슷하게 조용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만난 지 고작 이틀차지만 모든 면에서 저와 정반대인 것 같지 않나.)
(한숨 푹푹 쉬는 페어가 되어서 돌아간다……)
 
바야흐로 두 번째 밤이 찾아왔습니다! DOT의 흰 건물 위로도 어김없이 밤이 내려앉습니다.
 
12개라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수의 별들이 하늘을 수놓고, 선선한 봄바람이 운동장의 잔디를 부드럽게 훑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로에른과 보낸 시간은 특별했나요?
 
이리스 레터:(카페에서 맞짱 뜰 뻔 했던 것 같은데)
 
야차뜨기도 나름 특별하다면 특별한 이벤트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리스 레터:(그래도 나쁘진 않았을지도?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름 신선한 경험도 했고... 조금 기대되는 일도 생겼고. 물론 저 녀석에겐 그다지 좋지 못한 하루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
(거짓말은 못하겠다. 좋다.)
 
꼬시다. 그런 감상이 들었을지도요 ㅋ
 
아무튼 회상을 하다 보면 종소리가 들립니다.
 
‘저녁 식사’를 알리는 특별한 종소리입니다.
 
두 사람은 서관의 지하로 향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건, 기분이 어떻건 간에 사람이 끼니는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걸요.
 
<행운> 판정
 
이리스 레터:(내말이. 사람이 밥을 먹어야지.)
기준치: 52/26/10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띵.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크게 벌리고 로에른과 이리스를 기다립니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오늘 저녁은 과연 뭘까요? 기대감이 차오릅니다.
 
이리스 레터:맛있겠다, 그치. (옆사람 흔들... 지는 못하고 본다. 딱히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얼굴이긴 하다만...)
 
로에른 A. 니아:식사가 거기서 거기죠. (미각이 존재는 하는 걸까 싶은 인간)
 
이리스 레터:이 냄새를 맡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로에른 A. 니아:식사 때가 됐구나, 말고 또 무슨 생각이 들어야 하는 거죠?
 
이리스 레터:맛있겠다? 기대된다?
 
로에른 A. 니아:잘 모르겠네요. (먼저 올라타선 빨리 오란 듯 눈짓한다)
 
이리스 레터:... (사실 사람이 아니라 AI, 뭐 그런 거 아닌가? 의심하며 올라탔다.)
 
식당은 28명, 아니, 어제까진 14명을 위한 곳이라기엔 지나치게 호화롭습니다.
 
남색 천장, 깨끗한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액자들, 푹신푹신한 흰색 양탄자(식당에 배치하기엔 정말 호화스럽지 않나요?)와 56명은 앉을 수 있을 만큼 길고 커다란 테이블.
 
음식은 이미 차려져 있고, 개인의 앞접시가 있어 원하는 만큼 덜어 먹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미 도착한 몇 명은 식사 중이군요.
 
[액자]와 [테이블]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아니... 다른 곳도 아닌 식당에 하얀 양탄자 이거 감당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액자를 살펴본다.)
 
각각 [알록달록한 하늘], [푸른 장미 아치], [검은 호수]를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식당에 왜 액자까지 냅뒀대. (알록달록한 하늘에 시선이 머문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대조적입니다.
 
창틀 따위에 단단히 매인 긴 줄에는 우산과 깃발, 손수건과 종이학 같은 것이 걸려 있습니다.
 
꽃이 핀 것처럼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 풍경은 도밍게즈 건국 축제의 장면이에요.
 
로에른 A. 니아:꾸며 두고 싶었나 보죠. DOT의 위상…… 뭐 그런 걸지도. (별 생각 없음)
 
이리스 레터:그래봤자 볼 사람도 우리밖에 없지 않나? (그래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곧 다가올 건국 축제를 잠시 그려 보면서, 푸른 장미 아치의 사진도 들여다 본다.)
 
은색 아치문을 따라 피어난 푸른 장미가 유난히 화려합니다.
 
공원에 설치된 조형물인데,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그 아래를 거닐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더군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수도의 연인에게는 꽤 명소입니다.
 
이리스 레터:여기 예전에 구경 가본 적 있는데. 사람 엄청 많더라. 인파에 밀려서 실수로 다른 사람 손을 잡고 걷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쓸데없는 가정이나 해본다.)
 
로에른 A. 니아:왜요, 저 아치에 뭐라도 있나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이리스 레터:설마 몰라? 진짜 아무 관심 없는 모양이네. (그리고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로에른 A. 니아:(듣고는 별 가치도 없단 듯 김샌 표정이 됐다.) 흔한 미신이군요.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진 않겠죠.
 
이리스 레터:많던데. 보면 깜짝 놀랄걸. (키득거리며 다음 사진을 본다. 검은 호수인가...)
 
새까맣게 물든 호수에는 흰 종이꽃이 떠다닙니다.
 
수도의 유명한 관광지, 코마니 호수입니다.
 
건국 축제, 단 이틀간 호수의 수면이 검게 물드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죠.
 
축제 때면 타이머의 이른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이 손수 접은 종이꽃을 띄워 보내곤 합니다.
 
사진 속 호수를 바라보던 이리스는 문득 불안함과 불쾌감을 느낍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이유를 생각할수록, 원인을 찾을수록 두통이 밀려옵니다.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처럼 불안해집니다.
 
이리스, San C (0/1)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이리스 레터:(사진을 바라보던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만큼 곤란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 ...
(글쎄. 이제 저 호수에 띄워질 종이꽃들이 저를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는 생각 때문일까.)
(자리에 앉기 전, 조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코마니 호수의 종이꽃.
 
로에른 A. 니아:타이머를 추모하는 꽃을 띄운다고 했던가요. (이리스가 바라보던 액자를 흘긋 응시했으나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다.) 별 생각 없어요. 타이머는 세상을 위해 이바지하는 이들이니 추모하는 풍습이 있는 건 괜찮다 싶을 뿐. 다만……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직접 보시면 당신도 알게 되겠죠.
 
치솟던 불안감과 두통은, 로에른의 냉담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그러집니다.
 
이리스 레터:뭐야, 그게. 꽤 의미심장한데... (하여튼 이상한 일 뿐이다. 스스로의 감정 기복이 적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애를 만난 뒤로는 컨디션도 감정도 널뛰는 정도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나쁜가? 라고 묻는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린 채 테이블로 시선을 옮긴다. 밥 생각이나 하자!)
 
테이블마다 배치된 네임 카드와 은식기.
 
로에른과 이리스의 이름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습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가까운 곳에 배치한 의도가 훤히 보입니다.
 
냅킨은 토끼 모양으로 접혀 있고, 음식 사이사이 푸른 장미가 꽂힌 화병이 있어서, 꼭 비싼 레스토랑에 데이트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네요!
 
참고로 푸른 장미는 도밍게즈의 국화입니다. 불가능을 넘어선 기적의 상징이죠.
 
이리스 레터:(자기 자리를 찾아 가면서...) 식사 시간마다 토끼를 접어 주려나? 마음에 드는데.
 
로에른 A. 니아:원한다면 다른 모양으로도 접어 줄걸요. 말씀해 보시죠.
 
이리스 레터:어, 진짜로? 복지가 쓸데없는 부분에서 좋지 않아?
 
로에른 A. 니아:DOT의 복지는 모든 면에서 좋았죠. 처음 만난 사람과 뜬금없이 한 방을 쓰게 하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장교에게 앙금을 품음)
 
이리스 레터:같이 화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나보단 네가 좀 더 안타까워 보여서 뭐라 하지도 못하겠다... (자리에 곱게 앉기나)
인테리어도 그렇고, 무슨 레스토랑에라도 온 것 같네.
 
로에른 A. 니아:(쯧, 작게 혀를 찼다.) 저야 5년 내내 이 식당을 썼으니 별로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당신도 곧 적응하시겠죠.
 
오늘의 저녁 식사로는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토마토 두부 카프리제, 잘 녹은 치즈를 얹은 스테이크 정식, 흰 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와 색색의 과일 스프링롤.
 
참치를 깍둑깍둑 썰어 채소와 상큼한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 콩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나는 두유 스무디……
 
디저트로는 바싹 구운 무화과 쿠키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일컫는 구원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진실하고 진솔한지는, 풍성하고 호화로운 DOT의 식단이 증거합니다.
 
집에 가고 싶다니, 함께 있기 싫다니 옥신각신, 소란을 피우던 아이들도 식사 때가 되면 재깍재깍 테이블 앞에 앉곤 했으니 말 다 했죠. (조용히 식사만 하지는 않았어도)
 
이리스 레터:(옆집들도 다사다난하긴 하구만... 쿠키 우물거리면서 다른 페어들 구경함)
 
맛있게 식사합시다. 밥을 먹는 동안은 개도, 애도 건드리지 않는 법이므로 식사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갑니다.
 
물론 투닥거리거나 싸우는 페어들도 보이긴 합니다만.
 
한 마디도 없이 밥만 먹는 재미없는 당신의 페어를 두고 사람 구경을 하다가, 디저트를 먹을 무렵에……
 
<듣기> 판정
 
이리스 레터: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카운터란 거 진짜야?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언은 오늘 또 떨어졌다고.”
 
“아, 무슨 소리야. 아까 분명히 메레디스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랬어. 누구한테 들은 찌라시야?”
 
“뭐? 난 가이아한테…….”
 
“예언의 탑이 아니라?”
 
“거길 누가 믿어?”
 
치열한 대화가 그릇 위를 오갑니다. 세계 멸망? 예언? 메레디스와 가이아라면……
 
이름을 기억해내고 싶다면 <지능>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탄수화물 공급 완료)
 
분명 11시, 예언의 타이머 페어입니다.
 
<대인관계> 판정 성공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입에 들어있던 쿠키를 스무디와 함께 삼켰다.) 뭔데? 나도 들을래!
설득
기준치: 70/35/14
굴림: 6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제 n시 타이머:아, 이리스구나. 그게 말야.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춘다.) 메레디스랑 가이아 알지? 걔네가 같은 날, 같은 시에 서로 다른 예언을 했대.
연구원도 사무원도, 장교님도 다 쉬쉬하는 것 같지만 난 본인들한테 직접 들었다고.
 
이리스 레터:헐...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속닥속닥...) 그게 말이 돼? 그럼 둘 중 하나는 틀린 예언을 했다는 뜻 아냐?
 
제 n시 카운터:그런데 둘 다 그럴듯해서……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건지 전혀 모르는 게 문제야.
 
이리스 레터:어떤 내용이었는데?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들은 10대마냥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좀 심각한 주제기는 해도!)
 
제 n시 카운터:가이아가 들은 예언은 이렇대.
'어떤 소리를 들었다. 세계가 무너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건물이 붕괴하고, 별이 떨어지는…… 요란하고 끔찍한 소리를.'
“멸망이 신속히 임하리니, 아무도 멸망의 때인 줄 알지 못하리라······”
 
제 n시 타이머:그리고 이게 메레디스가 나한테 말해준 예언이야.
'어떤 소리를 들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꽃샘추위가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봄이 오는 소리를. 녹은 눈이 아스팔트 도로를 적시고 스며드는, 겨울이 지난 후의 봄의 심상을 보았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리스 레터:... 그리고? (계속 쳐다봄)
 
제 n시 타이머:이후엔 나도 모르겠는데? (머리 벅벅 긁음)
 
이리스 레터:...
(멍청한 얼굴 됨)
 
제 n시 타이머:예언이 거기까지였나 보지, 뭐. 나중에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거 아니야?
(마찬가지로 바보 얼굴)
 
이리스 레터:난해하긴 하다. 진짜 둘 다 그럴듯한데... 난 이왕이면 메레디스의 예언이 맞았으면 좋겠어. 가이아 쪽은 좀 살벌해서 별로야. (떨어진 예언을 호불호로 신뢰하는 행위)
 
제 n시 카운터:그래. 내용이 불길한 것보단 역시 긍정적인 쪽을 믿는 게 낫지. 하지만 그 애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는데 말야. 대체 뭘까?
 
예언의 내용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차가 있다. 둘 중 한 명이 틀렸다. 서로 다른 경우의 수를 예언했다. 두 가지 모두 결국 같은 이야기다…….
 
세계는 멸망할까요? 멸망하지 않을까요?
 
찜찜한 의문과 함께 저녁 식사가 끝납니다.
 
이리스 레터:(밥은 잘 먹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찝찝해졌다...)
(로에른도 들었으려나?) 아까 들었어?
 
로에른 A. 니아:(샐러드의 마지막 양상추 조각을 씹어 삼키고는 냅킨을 들어 우아하게 입가를 닦았다.) 예언 말씀이신가요.
제 개인적으론 예언은 해석에 따라 내용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는 불확실하고 뜬구름 같은 소리라고 생각해서요. 애초에 당신들-카운터-이 온 것도 세계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어느 쪽이든 진지하게 귀담아들을 내용은 아닌 것 같네요.
 
이리스 레터:넌 미신 때문에 잠 못 자고 그럴 일은 없겠다. (남은 토끼 모양 냅킨을 소중하게 주머니에 챙겼다.) ...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심란했는데, 네가 그러는 걸 들으니까 김이 좀 새는 것 같아.
하지만... 신경 정도는 쓰이지 않아? 마냥 막연하지도 않고 꽤 자세한 묘사가 있었잖아. 으... (소름 끼친다는 듯 제 팔을 끌어안고 한 번 파르르 떨었다.) 보고 있으면 네가 AI보다 더 AI같아.
 
로에른 A. 니아:원래 미신이니 예언이니 하는 건 다 자기가 믿기 나름이에요. 지레 겁을 먹으면 꿈에 나올 만치 무섭게 느껴지고, 자기에게 도움될 내용이라고 믿으면 긍정적으로 여겨지죠. (저걸 왜 챙기는 거지 싶었지만 말리진 않았다.)
당신이 믿고 싶은 걸 믿고, 그게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끔 노력을 하시면 되겠죠. 둘 중 어느 쪽인가요?
 
이리스 레터:당연히 메레디스 쪽이지. (즉답)
(그러다 문득,) 그럼 너는 카운터의 존재도 그다지 무겁게 생각하고 있진 않겠네.
 
로에른 A. 니아:솔직히 말해서…… 지금껏 탈없이 잘 유지되어오고 있던 세계가 갑자기 멸망한다는 말을 믿는 게 쉽지는 않지요.
하지만 장교님을 포함한 상부에서 어떤 식으로든 카운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저도 받아들이는 게 맞겠죠.
 
이리스 레터:사람이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어두는 선은 지나치게 선명하면서 이런 부분에서는 유연한가 싶기도 하고... 물론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또 듣다 보면 틀린 말은 아니란 말이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 이런 경우라면 네 말마따나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네... ... 어쩐지 되게 피곤한걸. 가서 일찍 잘래.
 
로에른 A. 니아:군인은 상관의 명을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요. (짧은 문장으로 일축했다.)
일찍 주무신다니 잘됐네요. 내일도 일찍 일어나시기를.
 
이리스는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DOT는 분명히 그리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이리스가 이곳에 존재함에도 불길한 예언은 끝나지 않는 걸까요?
 
이리스 레터:침대 천장 두드리는 거 잊지만 마.
 
로에른 A. 니아:잊어버릴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세요.
 
예언이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로에른의 말대로 당신이 바라는 쪽을 믿고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게 낫겠죠.
 
기묘한 피로와 함께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릅니다.
 
사건은 고장난 폭탄처럼 순식간에 터집니다.
 
그래, 사건이라고 불러 마땅한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어요.
 
언제냐면, 로에른과 이리스가 막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을 때였습니다.
 
저녁 식사 후 평온한 시간을 누리다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때쯤이요.
 
그러니까······
 
카운터의 능력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DOT의 지시로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된 탓에, 로에른과 이리스는 좋아도 싫어도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차를 마시고 있던 그때, 로에른이 문득 묻습니다.
 
로에른 A. 니아:조금 흐릿해지지 않았나요?
 
쨍한 자색의 시선이 당신의 손목 안쪽에 닿습니다.
 
로에른의 말마따나 다소 옅어진 것 같습니다.
 
한 번 새겨지면 죽을 때까지 평생 지울 수 없는, 각인이자 낙인인 바로 그것이요.
 
아, 물론 착각일 수도 있어요. 잘못 본 걸지도 몰라요. 눈을 깜빡이면 어제와 다를 바 없었거든요.
 
이리스 레터:응? (제 손목을 빤히 들여다 본다. ... 그런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데. 이게 원래 막... 옅어지는 건 아니지 않아?
 
하지만……
 
<초능력> 판정
 
이리스 레터:
초능력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능력의 효율이, 출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호흡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누구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았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 마련입니다.
 
능력자가 능력을 다루는 꼴이 딱 그렇습니다.
 
시간의 선택을 받으면, 능력은 존재의 증명이 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죽음에 이를 때까지 타이머와 함께합니다.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삶에서 유일하게.
 
그래서 타이머는, 어떻게 여기냐와 별개로 단 한 번도, 능력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싫건, 좋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사라진다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카운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각인이 새겨진 순간부터 능력은 온전히 이리스의 것이었고, 이리스의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당신은 당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챕니다.
 
얌전하던 능력이 무언가 이상하게 새고 있습니다.
 
이리스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자꾸만 어디론가 뛰쳐나갑니다.
 
그 종착지는……
 
<듣기> 판정
 
이리스 레터: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너의 타이머를 봐.
 
저 애가 네 모든 걸 뺏어갈 거야.
 
시간이 속삭입니다.
 
능력은 순식간에 이리스의 몸을 빠져나갑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순식간에!
 
타이머 또한 그 과정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었냐고요? 글쎄…… 이리스의 표정에 드러나서? 카운터의 행동이 이상해서?
 
아니면, 능력자 대 능력자로서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서?
 
아뇨, 그저, 스스로가 증거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다루기 쉬운, 당장이라도 넘칠 것처럼 넘실거리는 로에른의 능력은……
 
이례적일 정도로, 완전하게 차올랐습니다.
 
카운터와 함께 있으면 능력의 효율이 오를 거라고 했지. 누군가는 그 설명을 두고, 타이머를 위한 배터리, 소모품이라고 불렀고.
 
그 표현이 꼭 맞아요. 그래, 이건 단순히 효율이 오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저 안에 있던 것이 내게로 넘어온 것처럼·…….
 
뒤섞인 능력은 물과 기름처럼 모호한 경계를 긋고 있습니다.
 
이리스, <초능력> 판정
 
이리스 레터:
초능력 Roll
기준치: 0/0/0
굴림: 54
판정결과: 실패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고작 하루아침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로에른과 이리스는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사라진 것이 저기 있었고, 잃어버린 것이 여기 있었습니다.
 
불을 끄는 것처럼, 그리고 불을 켜는 것처럼.
 
해가 지는 것처럼, 그리고 달이 뜨는 것처럼.
 
네가 ■■ ■ 것처럼, 그리고 내가 ■■■ 것처럼.
 
오롯이 타이머와 카운터만 숨쉬는 작은 방.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떤 얼굴로 보고 있었던가요?
 
이리스 레터:... ...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손목 부근을 만지작거린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쉬움? 아니, 그건 아니다. 어쩌면 후련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우리는 너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소모품이었던 걸까?
 
로에른 A. 니아:(찻잔을 내려두었다. 드물게도 미간이 찌푸려졌다. 각인이 새겨진 왼손목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문질렀다. 두 자리의 숫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능력이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제 몸의 일부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넘어가거나 넘어올 수 있는 개념이라 여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물컵이 가득 차오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듯한 이질감이 몸을 휩쓴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바란 일이 아니란 건 확실해요. 애초, 당신의 능력이 제게 흡수된 게 아니라, 안에서 경계를 나누어 공존하는 느낌이고요.
 
불현듯 스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가 무너지고, 하늘이 찢어지며, 건물이 붕괴하고, 별이 떨어지는······ 요란하고 끔찍한 소리와,
 
“멸망이 신속히 임하리니, 아무도 멸망의 때인 줄 알지 못하리라······”
 
평온하기 짝이 없던 눈앞의 세계와,새순이 돋고, 꽃이 피며, 꽃샘추위가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봄이 오는 소리.
 
녹은 눈이 아스팔트 도로를 적시고 스며듭니다. 겨울이 지난 후의 봄.
 
“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다정하던 그 문장.
 
카운터를 소개할 때, 하인리히 장교는 분명히 세계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세계 멸망과 엮인 사건인 걸까요?
 
어느 쪽의 예언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길하고 불길한 예언이 공평하게 저울 위에 놓여 있습니다.
 
어두운 밤, 사위가 고요하고, 창 너머의 달만 밝습니다.
 
이리스 레터:전례가 없으니 비교해볼 수 있는 대상도 없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간을 몇 번 꾹꾹 눌렀다.) 그런 식으로 공존하고 있는 거라면 언젠가는 다시 나한테 돌아올 가능성도 있겠지만... 사실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된 생각이 잘 안 돼.
컨디션은. 괜찮아? (조심스러운 목소리.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며 당신의 안색을 살폈다.)
 
로에른 A. 니아:저도 그래요. 요 며칠간 능력이 날뛰는 현상은 겪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누군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귀띔해준 것도 아니고요. (우리에게만 일어난 현상인가? 아니면 모든 카운터와 타이머가 공통적으로 겪는 일인가? 의문이 산재한다.)
제 것이 아닌 힘이 넘어와서인지 기분이 안 좋긴 한데, 몸상태는 괜찮아요. 아마도. 그런 당신은 어때요? 타인에게 능력을 모두 넘겨준 타이머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요. (사실상 한몸이나 다름없어지니까. 타이머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다면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이리스 레터:기분이 좋지는 않아. 하지만 그건 능력이 전부 사라져서 컨디션이 악화되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 (짧은 침묵.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 나는 전혀 너를 의심하지 않아. 하지만... 자꾸 그런 기분이 들어. 네가 내 모든 것을 뺏어갈 것이라고.
이상해. 예언과 관련되어 있는 걸까? ... 난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차라리 능력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 했지... ...
 
로에른 A. 니아:……저는 당신의 모든 걸 앗아갈 마음이 없어요. (오해하지 않았음을 알리듯 침착한 음성이었다.) 저 하나로도 이미 부족함이 없었는데 남의 것을 탐낼 이유는 없지요.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지능>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시간의 각인이 아직 선명하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듭니다.
 
일시적인, 일시적인 현상일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돌이키지?
 
DOT에 보고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두고 봐야 하려나? DOT가 꾸민 짓인가?
 
아냐, 아닙니다. 이리스와 로에른에게 이상한 짓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리스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세계를 구원할 유력한 방법인걸요.
 
절묘하게도······ 내일은 시간표상 이론 수업으로 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침묵한다면 하루, 이틀 정도는 무마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습니다. 건국 축제는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거든요.
 
하인리히 장교는 카운터의 존재만이 세계 멸망을 막고, 사회의 평안을 불러올 일인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건국 축제에서는 무조건 등장시키려 들 테니, 그날이 온다면 얄팍한 거짓말은 결국 드러나고 말겠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일까요?
 
이 상황을 묻어두고 해결하거나, 정직하게 보고하고 해결책을 받아 내거나.
 
우선 커다란 선택지는 그뿐인 것 같습니다.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때마침 창 너머로 하인리히 장교가 본관에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하필 이럴 때 눈에 띄다니. 이마저도 퍽 교묘한 배치입니다.
 
보고한다고 한들, DOT는 신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뾰족한 수 따윈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리스 레터:... 보고해야 할까? 연구원들이라면, 어쩌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하다못해 함께 원인을 찾아줄 수라도 있겠지. 그런데... (불안한 시선이 창 밖을 향한다. 딱, 딱... 검지가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 만약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판별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로, 그냥 버리는 패였을 수도 있잖아...
 
로에른 A. 니아:(테이블에 울리는 소리가 이리스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제 각인을 문지르던 손길을 떼고, 천천히 이리스를 바라보았다가 길게 침묵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능력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왜였나요?
 
이리스 레터:... ...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그러다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엎드려버렸다.) ... 에 가고 싶어서. 제일 진부하면서 간절한 이유지... 동관에 있는 두 달 내내 생각했어. 차라리 전부 착각이었던 거라면 좋겠다고.
어린애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도 할 말 없어. 솔직히 그게 맞으니까. 분명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데, 난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
 
로에른 A. 니아:별로 어린애 같다고 여기진 않아요. 모두에게 자랑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테죠. 사람들 앞에 세워져야 하고, 흠모든 질투든 멸시든 수도 없는 시선과 감정을 받아내야 해요. 타이머들 중에서도 막 DOT에 왔을 땐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답니다.
(테이블 위로 긴 밀색 머리칼이 드리워진다. 그 머리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일 능력이 되돌아가지 않아 '쓸모없다'고 판단이 된다면 당신은 그리워하던 집과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겠죠. 능력을 되찾는다면 지금처럼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한 카운터로서 타이머와 똑같은 사명을 부여받아 살아가게 될 테고요.
그렇게 본다면 오히려…… 당신에겐 잘 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나요?
 
이리스 레터:... 사실 그래, 그렇게 풀린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 나는 집에 돌아가고, 너는 다시 쾌적하게 혼자서 생활하고. 그런데... (천천히 고개를 든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다.) 왜 이렇게 마음 한켠에 뭐가 자꾸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일까. 막연하게 먼 곳에서만 바라봤던 너희들이 실은 나와 별 다를 것 없는 애들이라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되어버려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같잖은 오지랖일까...
어느 쪽이든 이전과 같은 생활은 할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좀 그렇네. (마른세수를 한 번, 또 뒤를 따르는 한숨이 두 번째. 검은 호수의 사진을 보지만 않았어도 이런 애매한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이게 뭐야. 차라리 확실한 길이 그려져 있었으면 고민이라도 하지 않는 건데.
아ㅡ 몰라몰라! 난 아직 열일곱이란 말이야! 너무 어려운 생각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아?!
 
로에른 A. 니아:(평범한 이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지녔고 나라를 지킬 이들이라 추앙받고 있지만, 그래, 그들도 결국은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아이들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불확실한 앞날을 염려하는. 그 사실이 그의 고고한 자존심을 조금 건드렸지만, 티를 낼 만한 때가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쓸 수 있는 가장 큰 방패이자 특권을 알려 드릴까요? 우리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우리의 복잡한 고민을 그들이 대신할 수 있게 말이지요. 어쩌면 이미 대비해두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리스 레터: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너희를 동정한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여기서 보낸 시간들이 마냥 싫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특히나 서관에서 생활하게 된 뒤로는. (구태여 덧붙이고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네 컨디션은 문제 없는 것 맞지?
그러면... 말씀드리자. 불확실한 예언도 내려온 마당에 변수를 더할 수는 없으니까. 숨긴다고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인지도 알 수 없고...
 
로에른 A. 니아:그래요. 이곳에서의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니 그건 다행이네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능력이 넘어온 건 처음이라 영 어색할 뿐.
잘 생각하셨어요. 가볼까요.
 
역시 DOT에 보고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린 아직 어렸고, 지고 있는 책임과 무게는 너무 무거우니까요.
 
때론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에요.
 
바로 지금과 같은 일들. 어른의 도움이, 조언이, 결정이 필요한 순간.
 
창 너머로 본관에 들어서던 하인리히 장교를 보았죠.
 
운명이 배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서관을 나서,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지납니다.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해선, 흰 별이 촘촘하게 박혀 있습니다.
 
세계 멸망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많은 별들은 떨어질 기미라곤 보이지 않고, 오히려 반짝반짝하니 내일 날씨도 좋겠거니, 한가로운 감상만 일깨웁니다.
 
빠르고 느리게, 서두르고 미적거리며, 두 사람 몫의 발자국이 운동장을 가로지릅니다.
 
허리가 꺾인 잔디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했고,
 
본관 안내 데스크에는 퇴근하지 않은 직원이 앉아 있습니다.
 
그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면서도, 의외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습니다.
 
하긴, 이 시간에 본관에 방문하는 경우가 워낙 드무니 그럴 만도 하죠.
 
직원: 찾는 사람 있어요? 누굴 불러줄까요?
 
이리스 레터:그... 하인리히 장교님 계세요? 아까 이리로 들어오시던 것 같았는데.
 
직원: 장교님이요? 아….
 
잠시 곤란한 기색을 보인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힐끔 바라봤습니다.
 
지하 2층. 층수를 나타내는 파란 글씨가 점등합니다.
 
그리고는 곧 지하 1층으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정갈하게 웃은 직원이 설명합니다.
 
직원: 마침 올라오시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전히 상냥하지만,
 
<심리학> 판정
 
이리스 레터: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아까, 분명 곤란해했었죠?
 
이리스 레터:...?
 
로에른 A. 니아:(아무 생각 없음)
 
이리스가 직원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에도 웃음은 여전하고, 엘리베이터는 올라옵니다.
 
지하 2층, 지하 1층, 그리고…… 1층.
 
띵.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익숙한 남자가 내렸습니다.
 
칼같이 다린 군복을 입은 하인리히 장교였습니다.
 
식사하거나, 술을 마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음식 냄새도, 술 냄새도 묻지 않았거든요.
 
두 사람과 마주친 하인리히 장교는 의외란 듯 눈을 크게 뜨면서도, 기꺼이 반깁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며칠 전에도 본 것 같은데. 하룻밤 새 많이들 컸군.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사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은 완전히 점멸합니다.
 
하인리히 장교:무슨 일이지?
 
그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봅니다.
 
지난밤 사이좋게 지냈나, 지내지 않았나 감시하는 것 같은 눈초리입니다.
 
이리스 레터:장교님, 그게... (우물쭈물 하다가, 데스크 쪽의 눈치를 본다.) 잠시 이야기 가능하신가요...?
 
하인리히 장교:이야기라. 도밍게즈의 미래를 이끌어갈 이들을 위해서 어떤 이야기든 못 들어주겠나.
(직원의 눈치를 살피는 걸 알아채고는 근처의 회의실로 눈짓했다.) 이쪽으로 가지. 따라오게.
 
이리스 레터:(끄덕이고는 회의실로 향한다. 발걸음이 눈에 띄게 초조했다. 도착한 뒤에는 잠시 말을 고르고,)
그게... 제 능력이, 사라졌어요. (고해하듯 툭, 내뱉었다.)
 
로에른 A. 니아:정확히는, 레터의 능력이 모두 제게로 넘어왔습니다. (무감한 음성으로 설명을 보충했다.) 예고 현상은 없었고, 레터의 각인이 조금 옅어졌다는 걸 발견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갑작스럽게 능력이 변동하더군요. 둘 다 신체적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없었던 일이라 장교님께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일련의 상황을 듣고서도 하인리히 장교의 눈초리는 그다지 심각해지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엄숙하고, 얼핏 보면 거만한 얼굴로 웃은 그는 이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립니다.
 
하인리히 장교:어린 사람들이 걱정도 많긴.
걱정 말게. 이미 들어둔 바가 있어. 환경이 낯설어 그럴 거라고, 마음을 편안히 갖는 게 중요하다더군. 또래라 함께 있으면 나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보지?
프뤼나 군이 텃세라도 부리던가?
 
이리스 레터: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안심이 되기는 커녕, 영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예언은 이런 이야기까지 장교에게 들려주었던 걸까?) ... ...
(이능이라는 것이 원래 마음가짐 하나의 문제로 사라지기까지 하나? 그건... 이상하지 않나. 무슨 이식이라도 당한 것 같이. ...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에게서 이 이상의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리고 켕기는 것이 또 하나.)
(그러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그는 고개를 꾸벅여 인사를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장교님. 아무래도 제가 너무 들떠 있었던 모양이에요...
 
하인리히 장교:(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자네들의 존재가 세계의 평화를 좌지우지해. 그래서 우리는 작은 문제도 괄시하지 않고 방비하고 있다네.
너무 걱정 말고, 내 말을 명심하게. 그러면……
 
녹이 슨 청동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납니다.
 
그는 제 턱을 쓸고, 당부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걸세.
도밍게즈는 언제나 평화로울 거야.
 
<심리학> 판정
 
이리스 레터: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55
판정결과: 실패
 
하인리히 장교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리스를 향합니다. 도밍게즈의 평화를 노려보는 것처럼!
 
이리스를 바라보는 눈빛, 대하는 태도, 은근한 목소리에서 집착이 묻어납니다.
 
이리스를 절대적인 구원자로 맹신하는 신도처럼, 절대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돌아올 걸세. 그러니까, 서로간에 더 가까이 붙어있도록 해. 기왕이면 한 침대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아니, 오히려 좋아. 더 가까이 있을수록, 가까워질수록, 완벽하게 적응할 테니까.
 
로에른 A. 니아:(표정이 확 구겨진다. 적당히 좀 하시죠?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 걸 참았다…….)
 
이리스 레터:(이런 부분에선 참 한결같은 사람이군...) 하하, 네...
그,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조용히 신호를 보내듯 로에른의 소매를 두어 번 살살 당겼다.)
 
하인리히 장교:(로에른의 불손한 기류를 눈치챈 건지 아닌 건지,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시간마저도 자네들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꼭 그렇게 굴면 돼. 어렵지 않은 일이잖나?
어차피 자네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으니.
 
세계에는 충성을,
 
명령에는 복종을.
 
군인에게나 딱 어울리는 요구사항을 목에 걸어주는 꼴이었습니다.
 
<지능>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나저나, 본관에 지하 2층이 있었던가?
 
이리스 레터:... ... (무슨 뜻이지? 저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들어갔을 때 그러했듯 여전히 초조한 발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있잖아, 로에른... ... 아까 데스크에 갔을 때 말이야. 혹시 못 봤어?
 
로에른 A. 니아:(두 사람을 붙여놓지 못해 안달난 하인리히 장교에게 한껏 짜증이 일었지만, 그것도 회의실을 나서며 금세 가라앉는다. 어느덧 다시 무감하게 다듬어진 낯으로 되물었다.) 뭘 말씀하시는 거죠?
 
이리스 레터:엘리베이터 말이야. 분명히... (목소리를 슬쩍 낮춘다.) ... 지하 2층에서 올라오고 있었어. 하지만 여긴 지하 1층밖에 없지 않아?
 
로에른 A. 니아:지하 2층…… (본관의 풍경은 제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엘리베이터에 굳이 신경을 기울이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면 분명 이질적인 숫자가 깜박였던 것도 같았다.) 네. 지하 1층뿐이죠.
 
이리스 레터:숨겨둔 층일지도 몰라. 장교님의 태도도 어쩐지 찝찝하고. 애초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확신하고 있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 저건 우리에 대한 예언을 들은 정도가 아니라,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태도잖아.
난 그게 너무 신경이 쓰여. (그러다 당신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넌 군인은 상관의 명을 따라야 하는 법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만약, 내가 이 상황에 의문을 품어서 파헤쳐 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로에른 A. 니아:군사 기관에 숨겨둔 무언가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죠. 무엇을 숨겨 두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로비를 가로지르며 엘리베이터를 흘긋 바라보았다. 뒤이어 안내데스크의 직원에게도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평범한 낯을.)
(이리스의 질문에 잠시간 답이 없었다.) ……파헤쳐서, 끝내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이리스 레터:...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래. 그다지 현명하지는 못한 생각이다. 개인이 군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다고? 운이 나쁘면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처리되어 버릴지도 모르고. 입막음이라는 건 으레 그런 법이지 않나.)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 뿐이다.) 몰라.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휘둘리고 싶지는 않아. 그것 뿐이야, 나는.
 
로에른 A. 니아:무얼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알고 싶으시다는 거죠? (느리게 되묻고는 또다시 길게 침묵했다.)
솔직히 추천드리지는 않아요. 숨겨둔 건 이유가 있어서겠죠. 하지만, 주어진 명령만 따르는 것보단 호기심을 갖고 탐구했을 때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위험에 처하지 않는 선에서 도와드리지요. 다만 그전에 능력부터 먼저 좀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위협적인 상황이 왔을 때 방어 수단 하나도 없으면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을걸요.
 
이리스 레터:...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다운 대답이라 힘이 좀 빠지는데? (물론 농담이다. 그제야 웃어버리며 제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 ... ...
실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나, 엄청나게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시선이 사로잡히고 모든 감각이 한 곳을 향하는 것 같은 느낌. 설레임을, 어쩌면 두려움을 닮았을지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
누군가를 향해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나는... 그건 타인의 개입 하나 없이 온전한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어. 말이 조금 바뀌게 되겠지만... 그런 시시하고 사소한 이유도 있는 거야.
 
로에른 A. 니아:그새 저를 제법 잘 알게 되셨나요? (물론, 그만큼 저도 이리스에 대해 알게 되었을 테다. 한 침대 어쩌고 하는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한 방에서 지내며 누구보다 서로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 왔으니까.)
(회의실에서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상기한다. 모든 기분과 언어와 생각이 죄 상대에게로 집약되는 듯한 순간. 이리스도 같은 것을 느꼈구나. 하인리히의 말대로, 저와 당신이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인 걸까?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다. 그는 지금껏 홀로 완전하다고 믿으며 살아 왔으니까.)
나 자신만큼 중요한 것도 없죠. 시시하지 않단 말은 못 하겠지만, 납득은 되네요.
 
이리스 레터:싸가지 없는 독불장군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가벼운 으쓱임.) 넌 믿기 힘들겠지만, 찌르면 반응이 꽤 재밌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언제 일어나는지, 무슨 차를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도.
그럼 우린 지금부터 공범자가 되는 거야. (그리고는, 썩 장난꾸러기처럼 미소 지었다. 가볍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게 우리 둘 모두에게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로에른 A. 니아:(반박할 말은 없었지만, 공연히 이리스를 째려보았다.)
5년 내내 성실하기 그지없는 DOT의 타이머로 살아왔는데, 카운터라는 이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공범자라는 타이틀을 갖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네요. (손을 몇 초간 내려다보았다가 악수하듯 살짝 맞잡았다.) 당신의 의지로 시작한 일이니, 당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기를 바라요.
 
이리스 레터:(소리내 웃어버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리자 황급히 다물고는, 맞잡은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쥐고 가볍게 흔든 뒤에 놓아 주었다.) ... 그나저나 긴장이 풀리니까 좀 쓰러지고 싶네. 엘리베이터를 조사하기엔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으니 사고를 치는 건 조금 뒤로 미루고...
슬슬 들어가자! (걸음을 옮기려다가, 그냥 골려주고 싶어서 농담을 던진다.) 장교님 말대로 같은 침대라도 써볼까?
 
로에른 A. 니아:겨우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싸늘해진 눈으로 이리스를 노려봤다.) 그 말만 상기하면 본관 로비를 부숴버리고 싶어지니까, 당신도 언급하지 않으시는 게 신변에 좋으실 거예요.
 
이리스 레터:이거 봐. 아는지 모르겠는데, 넌 농담하는 재미가 있어. 이 경우에는 스릴인가? (메롱, 하고는 앞장서 숙소 쪽으로 걸어갔다.)
 
로에른 A. 니아:(천장을 올려다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따라갔다.) 공범자가 되겠다고 한 거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봐요.
 
어른에게 고민을 떠넘기고 확신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돌아온 건 미지근한 대답과 새로이 부상한 의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의문을 파헤치고자 당신의 타이머를 공범자로서 끌어들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군대에 충성하고 복종해 온 타이머를 말이지요.
 
얼음 같은 그가 쉽게 응해준 건 제법 놀라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에게도 자신의 카운터는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커다란 존재가 되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서로뿐이라던 하인리히 장교의 말처럼.
 
한바탕 사건이 있었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입니다.
 
이리스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하인리히의 말을 따라 최대한 로에른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나요?
 
이리스 레터:(해봐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것도 그렇고...)
(솔직히 반응이 재밌다.)
 
솔직히 재밌다
 
스킨십이 무슨 알레르기라도 되는 듯이 반응하는 꼴을 보자면요 ㅋ
 
이리스 레터:(개재밌지 이건 참을 수가 없지)
 
로에른과 접촉한 상태라면 아주 약간의 능력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잠깐일 뿐입니다.
 
무슨 수를 써도 능력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로에른 A. 니아:이번에도 더는 넘어가지 않나요?
 
이리스 레터:음... (한 팔은 로에른의 팔짱을 끼고, 다른 손으로는 손바닥 위에... 반딧불만도 못한 빛을 띄워 보다가 그냥 꺼트렸다.)
그냥 깜빡이가 된 기분인데. 이게 한계인 것 같아.
 
로에른 A. 니아:그렇군요. (전광석화처럼 팔을 빼냈다;)
 
이리스 레터:재미없긴. (팔꿈치로 툭 치고 넘어갔다.) 그래도 닿아 있으면 어째 아주 조금씩 나오긴 하니까... 장교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건지 모르겠다니까. 오히려 말이 들어맞으니까 더 수상쩍은걸...
 
로에른 A. 니아:아무리 그래도 한 침대를 쓸 생각은 절대 없지만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카운터를 데려오면서 다양한 실험이나 가설 등을 토대로 추측해낸 게 아닐까요. 동관에서 머물 때 보고서를 여러 장 쓰셨다고 했죠?
 
이리스 레터:나도 그건 농담이었다니까 그러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음... 그렇지? 매일매일 연구원들 얼굴만 질리게 본 것 같아. 난 내가 무슨 실험쥐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 역시 그 지하 2층을 찾아보는 게 관건일 것 같은데.
(곰곰히 생각해본다. 엘리베이터에 지하 2층 버튼같은 게... 있던가? 당연히 없을 것 같지만.......)
 
직접 본관의 엘리베이터에 가서 확인해 볼까요?
 
이리스 레터:(함 가보자,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거만하게 팔짱 끼고 있는 로에른의 팔을 그대로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로에른 A. 니아:또 어디로 가시는 거죠? 제가 스킨십을 할 때는 예고를 해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었나요? (일단 따라 걷긴 하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이리스 레터:넌 이런 것도 스킨십으로 치는 거야? 왜 이렇게 사람이 빡빡해. (어이없다는 듯 돌아보았다.) 본관. 엘리베이터를 확인해 보려고.
 
로에른 A. 니아:당연하죠. 스킨십뿐 아니라 저와 함께 어디로 가고 싶은 거면 행선지를 말해 달라는 부탁도 같이 드려야 하나요? (이 당연한 걸 말해줘야 아세요? 라는 생각이 눈빛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본관에 자주는 아니어도 종종 가는데, 지하 2층 버튼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뭐…… 그래도 확인은 해보죠.
 
이리스 레터:오늘부터 내가 아무 말 없이 너를 끌고 어디로 가면 아, 쟤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해 그냥. (헛소리로 받아쳤다.)
 
로에른 A. 니아:전 서프라이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딱딱)
 
이리스 레터:지금까지 너한테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 친구가 없었어서 그래. 너 친구 없다며.
 
로에른 A. 니아:필요하다고 여겨본 적 없으니까요. 서프라이즈도 마찬가지예요. 당신도 제가 말도 없이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면 당황스러울 것 아녜요?
 
이리스 레터:음... (잠시 생각해 본다.)
네가 그러면, 드디어 날 처리하고 싶어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긴 해.
 
로에른 A. 니아:……. 그래요. 아무튼 먼저 말씀을 해 주세요.
 
이리스 레터:에이, 이제 친구 생긴 셈이니까 이런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로에른 A. 니아:설마 그게 당신?
 
이리스 레터:당연하지. 그럼 누가 있는데?
 
로에른 A. 니아:금시초문이네요.
저는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으니 포기하세요. (저벅저벅 본관으로 간다)
 
이리스 레터:왜지? 엄청나게 어필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심각한 얼굴로 함께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두 사람은 본관으로 향합니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릅니다.
 
띵, 소리를 내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확인하면…… 정말로 지하 2층의 버튼은 없습니다.
 
버튼은 지하 1층부터 옥상까지 전부 6개뿐입니다.
 
이리스 레터:영화를 보면...
보통... 이렇게 막 눌러서 비밀 층으로 가던데. (그리고, 모든 층을 눌렀다.)
 
로에른 A. 니아:………………. (이게 뭐하는 거지… 천장만 올려다봤다)
 
이리스 레터:진짜야. 첩보 영화에서 그랬다니까.
 
로에른 A. 니아: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네요.
 
엘리베이터는 착실하게 전층에 멈춰섭니다.
 
이리스 레터:...
이 엘리베이터 되게 정직하네.
 
지하 1층의 식당, 2층과 3층의 훈련실, 4층의 숙소와 옥상의 스카이라운지..
 
정직한 엘리베이터입니다.
 
로에른 A. 니아:엘리베이터에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게 맞아요? (어이없음)
 
이리스 레터:... ...
아아아, 답답해! (괜히 죄 없는 엘리베이터 벽이나 한 번 때리고, 저벅저벅 1층에서 다시 내렸다.)
그렇다고 지금 가서 “장교님, 지하 2층이 있는 것 같던데 그게 정말인가요?” 라고 하면 또 허허 웃으면서 타이머랑 놀러 가라고 할 것 같고.
 
로에른 A. 니아:정말로 있다고 해도 장교님이 저희에게 순순히 그렇다고 하실 것 같으세요? (무심하게 답했다)
오히려 존재를 알아챘으니 더 경계하실지도 모르죠. 기억의 타이머를 시켜 저희의 기억을 조작하려 들지도 모르고.
 
이리스 레터:그럼 원점이네. (그냥 가만히 1층 로비를 바라보다가... 괜스레 시비 털듯 가만히 있던 로에른만 툭 쳤다.)
... ... (그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좀 새로운걸 시도해보면 어떨까. 네 뺨을 꼬집어 본다던가... 그러면 좀 더 큰 깜빡이가 돌아올지도 몰라.
 
로에른 A. 니아:? (별안간 툭 맞고 뺨 꼬집는단 얘기까지 들음)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냥 거리를 두고 지낼까요. 가까이 붙어 있었을 때 아무런 변화도 없었으니 아예 멀어지면 좀 달라질지도요.
 
이리스 레터:네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린 쓰고 있는 방이 같아. 싫어도 좋아도 붙어서 살긴 해야 해.
 
로에른 A. 니아:방 안에서도 최대한 떨어져 지내면 되잖아요. (딱딱) 전 하려면 할 수 있어요.
 
이리스 레터:음...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을 했다.) 너한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난 못 해. 일단 눈에 보이면 말을 걸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딱딱하게 굴 생각이야? 슬슬 좀 편하게 대해도 괜찮을 때가 됐다고 보는데.
 
로에른 A. 니아:대체 왜죠? 눈에 보이면 말을 걸어야 한다니. 그냥 조용하게, 개인적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잖아요? (근본부터 다른 성격인지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르시나 본데, 당신을 알게 된 시간에 비하면 제 딴에는 나름대로 당신께 잘해드리고 있는 거예요.
 
이리스 레터:운명이라고 하면 조금은 비슷한 구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 알면 알수록 너랑 나는 다르다는 느낌밖에 안 든단 말이지... (이어진 대답에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럼 내가 싫지는 않다는 뜻이지, 그거?
 
로에른 A. 니아:운명이란 말을 믿으세요? (물론 저 역시 이리스와 같은 존재감을 지닌 사람은 지금껏 만나 본 적이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치미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껏 그런 낭만적인 단어 따윈 사전에 넣어두지 않고 살아왔던지라 괜한 반항심이 든다.)
처음 만났을 때도 딱히 당신이 싫다고 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귀찮게 굴면 싫어지겠죠.
 
이리스 레터:글쎄... 반반? (고개가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또한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러니 더 알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타인의 개입에 의해 조작된 운명일지, 아니면 낭만적인 의미 그대로일지.)
알았어, 알았어... 무슨 말을 못하겠네. (푸념과 함께 한 발 물러섰다.) 너한테서 그정도 대답을 들은 거라면 충분히 만족이야.
... 근데 진짜 한번만 꼬집어 보면 안돼?
 
로에른 A. 니아:싫어요.
제 몸엔 손댈 생각도 하지 마세요. 가깝게 지내는 것도 이제는 끝이에요. 장교님 말씀대로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오겠죠. (매몰차게 몸을 홱 돌렸다)
 
이리스 레터:야~!!! (손가락질) 삐졌지! 너 삐졌지!
 
로에른 A. 니아:아뇨. 당신이 정말 성가시다고 생각 중이에요.
 
이리스 레터:... ...
(그리고, 되려 이쪽이 삐졌다.)
됐어. 나도 너랑 말 안하면 그만이야. 너 말고도 말 할 사람 많거든... ... (없다.)
 
로에른 A. 니아:네. 제발 그래 주세요. 저보다 훨씬 성격 좋은 타이머가 많으니 그분들과 친해지셔서 많은 대화를 나누셨으면 하네요. 전 당신이 원하는 만큼 맞춰드릴 수가 없으니. (달래줄 마음 1도 없어 보임)
 
이리스 레터:...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이다가,) 대체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어? 난 그래도 우리가 좀 잘 지내 보자고 합의한 관계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너한테 너무 부담스럽게 굴었어? 그런데 좀...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내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난 지금 제대로 기댈 구석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로에른 A. 니아:(걸음을 멈췄다.) 전 그다지 돌려 말한 적이 없는데요. 용납할 수 있는 선과 그렇지 않은 선을 뚜렷하게 말씀드렸죠. 당신도 알다시피 저희는 성격이 상당히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단둘이서만 지내라는 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당신은 원체 친화력이 좋아 보이니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게 훨씬 더 재밌지 않겠나요?
 
이리스 레터:이해가 안 돼? 다른 애들도 페어가 함게 다니면서 적응하느라 바쁘단 말이야. 그래, 단 둘이서만 지내라는 명령은 없었지만... 애초에 여기서 그렇게 몰아가고 있잖아! 나랑 대화하다가도 자기들끼리 자연스럽게 자리를 떠버린다고. 그럼 나한테 남는 건 너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 보려고 별 애를 다 쓰고 있는데... 어떻게 조금도 틈을 내주지 않을 수가 있어? 차라리 아예 싫다고 하지. 그럼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또 그렇게는 못하게 굴잖아.
 
로에른 A. 니아:(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씀인지는 이해했어요. 다만, 저는 혼자인 게 익숙해요.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익숙해졌고요. 남을 곁에 들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제 딴에도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다만. (이걸론 안 되나 보군.) 당신에게 틈을 내어드리는 기준은 스킨십을 허용하는 건가요?
 
이리스 레터:(벽과 대화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아니, 차라리 그 편이 덜 답답했을 것이다. 적어도 벽은 이런 대답을 돌려 주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가장 끔찍한 점은, 이런데도 이 인간이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빌어먹을 운명 같으니!) ... 됐어. 아무래도 내가 어제부터 너무 들떠서... 너한테 너무 큰 걸 바랬던 것 같네. 전부 잊어. 그냥 없었던 일인 셈 치자.
미안, 더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
 
로에른 A. 니아:……. (이리스의 얼굴을 몇 초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알게 된 시간이 길지는 않았어도 이리스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본다는 걸 깨달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애초에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대처방법도 잘 모를 수밖에. 아니, 알지 않으려고 한 건가?)
(결국 별다른 말 없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리스 레터:(결국 저런 식이다. 조금은 다른 반응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평생 인간관계라는 것을 아예 만들지 않을 작정이 아니라면, 싫어도 조금은 노력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부르더라? 비참함? 아무 말 없이 뒤돈 그의 모습을 보며, 설움을 꾹꾹 눌러담아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냥 네가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마. 그러다가 분명 후회하는 때가 올 테니까. (그리고, 그 또한 등을 돌려 목적지 없는 걸음을 옮겼다.)
 
이게 운명이라면, 단어의 뜻이 잘못됐거나 상대를 잘못 만난 게 틀림없어요.
 
능력까지 상대에게 넘어가 더 불안한 마음을 왜 몰라주는지.
 
왜 이런 비참한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지.
 
그렇게 서로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이리스가 숙소에 돌아왔을 때 로에른은 보이지 않았고, 당신이 잠들 때쯤이 되어서야 느지막이 돌아와 소리 없이 잠을 청했습니다.
 
하루, 이틀.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능력은 딱히 차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닌가? 어제보다 나아졌나? 싶으면 다시 한 움큼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무엇보다 신경쓰이는 건 당신의 타이머, 로에른이었을 겁니다.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무감하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태도로 이리스를 대했습니다만……
 
이리스는 어땠나요?
 
이리스 레터:(단단히 마음이 상했다. 티타임도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쯤 지나서는 역시 자기가 심했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데면데면해진 사이에 또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니 딱 필요한 정도로만 대화를 하고 지냈을 것이다.)
 
로에른의 성격에 먼저 사과를 할 리도 없고, 이리스는 이리스대로 제대로 마음이 상했죠..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더 데면데면한 나날이었습니다.
 
싸웠던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이 가까이서 지내는 때는 수업을 들을 때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거리가 가까운 쪽이 더 안정적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감각이었을지언정!
 
시간이 흐릅니다. 꺾인 손가락의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는 바닥을 천천히 기어 다녔습니다.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가를 문득 깨달으면, 뱀의 비늘이 스치는 것처럼 서늘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전부 기분 탓이겠죠.
 
일상은 고요합니다. 일어나고, 아침을 먹고,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시시껄렁한 시간을 죽이고, TV를 보거나 훈련하는 평범한 하루의 반복입니다.
 
능력이 사라진 적 따위, 없었던 것처럼.
 
기다리는 것은 초조했지만, 점차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축제를 이틀 앞둔 날,
 
똑똑.
 
손님은 그때 찾아왔습니다.
 
교실에 앉아서 교사를 기다리던 타이머와 카운터의 시선이 모두 앞문으로 쏠렸습니다.
 
수업을 위해 드나드는 이들은 노크하지 않았으므로, 상당히 낯선 소리가 아닐 수 없었어요.
 
문가에는……
 
리슬러 부관:리슬러입니다.
 
정중한 목소리와 함께 하인리히 장교의 부관이 서 있었습니다.
 
타이머에게는 낯익고, 카운터에게는 낯선 남자였습니다.
 
짙은 색깔의 머리칼을 지닌 남자는 정장 차림새로 누런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뱀처럼 얇은 눈꼬리가 새로운 얼굴들을 훑곤,
 
리슬러 부관:아시겠지만, 건국 축제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리슬러 부관:도밍게즈 건국 축제의 마지막 순서는 타이머가 등장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능력을 선보여 시간이 건재함을 알리고, 세계가 평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맨십이죠.
실제로 이 시기면 타이머의 얼굴을 보겠다고 수도로 향하는 관광객의 수가 대폭 늘어나곤 합니다. 보여주기식이지만,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이벤트인 셈이죠.
더군다나 이번에는 카운터……(그 이름이 아직 어색한 듯 느릿느릿하게 발음했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니만큼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질 겁니다.
예년보다 화려하고 완벽하게, 차질 없이 준비되어야겠죠.
 
리슬러 부관은 서류 봉투를 뒤적이며 물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장교님께서도 기대가 크십니다. 능력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카운터…의 존재. 즉, 새로운 능력자의 등장입니다. 친밀하게, 다정하게, 모쪼록 완벽한 파트너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고 하시더군요. 서로 간에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결국, 본론은 그거군요.
 
리슬러 부관:기왕지사 능력을 ‘함께’ 선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그는 진지한 얼굴로 ‘함께’에 악센트를 강조했습니다.
 
이리스 레터:(지루한 듯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하...)
 
로에른 A. 니아:(여느 때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카운터는 능력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만.
 
이리스 레터:맞아요. (턱을 괸 채 시큰둥하게 긍정했다.)
 
리슬러 부관:괜찮을 겁니다. (단 한 문장으로 갈무리한다.)
아, 그리고 축제 때 일정이 정해졌습니다. 첫날에는 자유 시간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아침을 먹고 외출할 수 있을 거예요. 대신, 반드시 사복을 착용하고 타이머와 카운터는 동행한다는 조건입니다.
 
카운터의 존재가 발각되어선 안 된다며 DOT 지부 밖으론 한 걸음도 못 내밀게 했으면서. 상당히 파격적인 ‘허가’입니다.
 
축제이니만큼 어린 것들을 묶어두기가 안타까웠던 걸까요.
 
이리스 레터:...! (외출이라는 소리에 눈에 생기가 돌았다. 금세 자세를 바로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정말요? 진짜 자유 시간인가요?
 
리슬러 부관:예. 그러나 만약 누군가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이야기를 걸어도 되도록 답변하지 마십시오. 공식적인 발언은 언제나 DOT와 사전 협의 후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카운터에 대해서는 더더욱이요.
 
이리스 레터:물론이죠! 저 그런 거 정말 잘해요. 입도 벙긋하지 않을게요. (들떠서 발을 동동 구른다. 어쩌면, 어쩌면... 축제라면 가족들이 찾아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당부를 마친 리슬러 부관은 서류 봉투의 입구를 엽니다.
 
우르르, 안에서 쏟아지는 것은 팸플릿입니다.
 
리슬러 부관:저녁에는 전원 전시회에 참여할 겁니다.
 
전시회?
 
건국 축제와 전시회라니, 상당히 동떨어진, 그러니까, 개연성 없는 조합입니다.
 
이리스 레터:(그리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마는데...)
 
리슬러 부관은 팸플릿을 나눠줍니다.
 
표지에는 타이머 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구원자에 미친 이 작은 행성은, 굿즈와 장난감,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기타 여러 창작물을 넘어서…… 이젠 전시회마저 열 모양입니다.
 
이리스 레터:(와... 징하다 하고 열어본다.)
 
그럴싸한 홍보 문구는 지나치게 유치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니 세계의 섭리니 알 게 뭐람. 거창하게 구원자라고 부를 때부터 알아봐야 했는데!
 
리슬러 부관:도밍게즈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타이머 전시회인 만큼 첫 번째로 관람하고, 이후 DOT로 복귀할 겁니다. 둘째 날은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세팅하고, 리허설에 참여하게 될 거예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첫째 날 실컷 쉬거나, 하고 싶은 걸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설명을 마친 리슬러 부관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리슬러 부관:무언가 문제라던가, 보고할 사항이 있습니까?
 
이리스 레터: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러니까, (자기 입으로 확실하게 말하기는 영 껄끄러운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다.) 제 능력 같은 문제요.
 
리슬러 부관:예.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심히 간결하기 그지없는 음절 하나만 답으로 내놓았다.)
그럼 다음에 뵙죠.
 
그는 의례적으로 물었다는 것처럼 형식적인 인사만 남기고 교실을 떠났습니다.
 
달칵, 문이 닫히고…… 수업을 알리는 종이 커다랗게 울립니다.
 
수학 시간이에요. 수학 교사는 늘 종이 치면 움직이니까, 한 10분의 여유가 남았군요.
 
로에른 A. 니아:이틀 남았는데, 확신하시는군요.
 
이리스 레터:(의미 없이 팜플렛을 뒤적이며 답했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이러다 망하면 손해보는 건 저 사람들일 텐데 뭐...
 
로에른 A. 니아:부관님이 하신 말씀은 들으셨죠? 축제의 자유시간 때는 함께 다녀야 한다고.
 
이리스 레터:들었어. 적당히 거리는 유지해줄 테니까 신경 쓰지 마. (흘긋, 옆을 돌아본다.) 아니면 돌아다니기 싫어서 그래?
 
로에른 A. 니아:나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죠. 특히나 축제 때엔 온 거리에 사람이 넘쳐나고, 알아볼까 봐 변장도 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1년에 한 번뿐인 날이고 당신이 돌아보고 싶으시다면 맞춰 드릴게요. 대신 너무 떨어지지 마세요. 인파 틈에서 잃어버리면 찾기 힘드니까요.
 
이리스 레터:... (아닌 척 하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그, 그러면... ... 하... (결국 이 어색한 상황 속에서 먼저 한계를 맞는 건 이쪽이었다. 애초에 쟤는 어색함을 느끼지조차 못했을지도... 웅얼거리며 얼굴을 한 번 크게 쓸어내렸다.) 답답해 죽겠네. 이것도 영 못 할 짓이야...
나가서 놀래. 솔직히 궁금하단 말이야. (여전히 거리감은 유지하되,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로에른 A. 니아:그러세요. (어색해져버린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딱히 개선할 의지가 없어서 그냥 그대로 뒀다.) 축제 때 4구역에 와보신 적은 없다고 하셨던가요?
 
이리스 레터:종종 가족여행 삼아 4구역에 오긴 했는데, 축제 때는... 어떤지 알잖아. 인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와보지 않았어. (손을 내저었다.) 넌 자주 나가봤어?
 
로에른 A. 니아:맨 처음 타이머가 되었던 해 말고는 없네요. 타이머로서 공개된 뒤에는 어딜 가든 절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요. 사인해 달라느니, 사진을 찍어 달라느니 하는 사람들 틈에 끼는 건 질색이에요.
 
이리스 레터:... ... (잠시 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사복을... 제대로 준비해야겠네. 널 알아본 사람들 등쌀에 밀리는 건 나도 사양이야. 그런데 설마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돌아다닌 건 아니지?
 
로에른 A. 니아:모자 정도는 썼어요. 제가 아무리 그래도 맨얼굴로 나갔을까 봐요. 아무튼……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면 제 곁에 있는 당신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확률이 높아지니 당신도 얼굴을 가리거나 변장을 좀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리스 레터:좀 도와줄까? 나 그런거 잘 하거든. (당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밉상이긴 해도 꾸미는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싫으면 말고.
 
로에른 A. 니아:어떻게 하실 건데요?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이리스 레터:... 변장? 꾸미기? 머리만 가발로 덮어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봐.
 
로에른 A. 니아:가발인가요…… 음. 마스크를 쓰는 것보단 덜 답답할 것 같으니 부탁할게요. 선글라스도 하나 준비할까 싶네요.
 
이리스 레터:네가 오케이라고 한거야. 시간 오래 걸린다고 불평하면 옆머리를 쥐어 뜯어버릴 줄 알아. (툭 쳤다.)
 
로에른 A. 니아:(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몇 시간씩 걸리는 건 아니겠죠?
 
이리스 레터:... ... (시선이 반대로 구른다.)
 
로에른 A. 니아:(빤히…… 보다가 만다.) 기껏 말씀해주셨는데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양할게요. 그냥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말죠.
 
이리스 레터:... 한시간 안에 끝낼게. 진짜로.
 
로에른 A. 니아:(별로 지켜지지 않을 것 같단 직감이 잠시 들었다……) 그러세요……
 
이리스 레터:(분명히 1시간에서 30분쯤 오버될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도 이정도면 굉장히 양보했어.
 
로에른 A. 니아:아, 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이리스 레터:보통은 그래야 할 타이밍이지. 해볼래?
 
로에른 A. 니아:아니요?
 
이리스 레터:괜찮아. 기대도 안했어.
 
교사:늦어서 미안해요. 모두 자리에 앉았나요?
 
그때, 수학 교사가 뒤늦게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는 교탁에 프린트의 모서리를 툭툭 쳐서 정리하곤 수업을 시작합니다.
 
교사:오늘은 3단원을 할 차례였던가요?
 
수학 수업은 유난히 지루하고, 점심시간 직전이기 때문에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사가 무어라고 떠드는데, 아, 이런……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무슨 이상한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아요.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리스 레터:(수학이란...)
(이상하게 이것만 들으면 졸린다. 꿈에서도 산술점이라는 것을 들으면서 존 것 같은 기분이... )
 
주문 같은 소릴 듣고 있자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정말이지, DOT 자체 과목도 겨우 듣는 판에 수학 수업 같은 걸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로에른 A. 니아:(어김없이 조는 모습을 발견하곤 작게 한숨을 내쉰다. 한참을 그냥 뒀지만……) 여긴 중요한 부분이에요, 레터. (교사가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하자 이리스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로에른이 이리스의 어깨를 건드리는 순간,
 
따끔!
 
스파크가 튀더니 시간의 각인이 화끈화끈 달아오릅니다.
 
그리고, 이리스를 떠나갔던 무언가가 다시금 이리스에게 돌아옵니다.
 
텅 비었던 어딘가가 가득 차는 것을 느낍니다.
 
로에른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놀란 눈으로 이리스를 바라봅니다.
 
착각이 아니에요.
 
방금, 정말로,
 
능력이 돌아왔습니다.
 
불을 끄는 것처럼, 그리고 불을 켜는 것처럼.
 
해가 지는 것처럼, 그리고 달이 뜨는 것처럼.
 
네가 ■■ ■ 것처럼, 그리고 내가 ■■■ 것처럼.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3만큼 회복합니다.
 
이리스 레터:... ...? (수학 교사가 떠들건 말건, 각인에서 느껴지는 열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제 손목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로에른을 바라본다.) 방금...?
 
로에른 A. 니아:(제 손과 이리스를 번갈아본다. 드물게도 수업의 집중력이 깨졌다. 선명히 느껴졌다. 넘쳐나던 힘이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로 일부나마 돌아가는 것이.) 돌아갔어요. 맞죠?
 
이리스 레터:아주 조금이긴 한데...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서 손 안에 희미한 빛을 띄웠다. 이전과는 달리 선명한 온기를 품은 것을.) 확실히. ... 뭐지? 네가 날 깨운 것밖에 없었잖아.
 
로에른 A. 니아:……. (잠시 망설이다가 이리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7만큼 회복합니다.
 
로에른 A. 니아:조건은 아무래도 스킨십인 모양이네요. (인상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결국은 붙어 있는 게, 그를 넘어 스킨십을 하는 게 맞았다니. 이건 며칠 전 이리스에게 매몰차게 군 자신이 틀렸단 뜻이 아닌가.)
 
이리스 레터:내가 그렇게 치근덕거릴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허탈하게 웃었다. 이능은 점점 더 선명하게 돌아오고 있었고...) 아무래도 네가 먼저 하는 쪽이 정답인가봐. 손 잡아봐도 돼? 정말일지 궁금해서.
 
로에른 A. 니아:꼭 제가 하는 쪽이 정답일 것 같진 않은데요. (썩 달갑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손을 내민다.)
 
이리스 레터:그럼 그냥 때가 됐을 뿐이라거나... 한 번 해보면 알겠지. (내밀어진 손을 가볍게 쥐어 보았다.)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10만큼 회복합니다.
 
손을 맞잡자, 스치는 정도보다 확연히 더 많은 능력이 돌아옴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진짜네. 정말로 스킨십 같은 게 해결책이었다니... 뭐 이런 능력이 다 있대. (상황 자체가 제법 웃기게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손가락으로 로에른의 각인 위를 살짝 쓸어 보았다.)
 
손끝이 로에른의 각인에 닿자 화끈거리는 열감이 다시 한 번 벼락처럼 전해져 옵니다.
 
로에른 A. 니아:……일단, 수업이 끝난 뒤에 마저 손을 잡든지 할까요. 놀라운 일이긴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선생님의 주의를 끌 테니.
 
이리스 레터:그래도 몇 번만 더 잡으면 전부 돌아올 것 같으니까. (잡았던 손을 놓고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수학 시간 내내 잘 생각이었는데, 잠 다 깼네.
 
로에른 A. 니아:당신이 졸고 있던 덕분에 능력이 되돌아올 기폭제를 발견하다니…… 참 기묘한 일이에요. (놓아진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아직도 스파크가 일었던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종이 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돌아온 것이 맞는지, 정말 사실인지 알고 싶어, 확신받고 싶었습니다.
 
비로소 완전하게 충족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존재의 가치를 증명받은 것처럼.
 
로에른 A. 니아:(수업이 마무리되고 교사가 교실을 나서자, 곧은 자세로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모습은 평소와 같지만…… 동작이 비교적 빨랐다.) 숙소로 갈까요.
 
이리스 레터:(그의 인생 최초로 잠들지 않고서 수학시간을 견뎌냈다. 종이 치자마자 로에른과는 대비되게 자료를 아무렇게나 챙겨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미 문 옆에 선 채였다.) 빨리! 이러다 타이밍 놓쳤다고 없었던 일이 되면 어떡해?
 
로에른 A. 니아:알겠어요. (성큼성큼 발을 내디뎌서 이리스의 곁에 따라붙었다.)
 
이리스 레터:(눈에 띄게 서두르는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짐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손!
 
로에른 A. 니아:(강아지 불리는 듯한 기분이 되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스 레터:미안. ... 좀 옆집 개 부르듯 불러 버렸네. (스스로도 깨닫고는 헛기침과 함께 내밀어진 손을 꽉 붙들었다.)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20만큼 회복합니다.
 
이리스 레터:... 효과 좋은데? (잡지 않은 손 위에는 다시금 빛무리를 띄워 보였다. 확실히 선명해진 모양새다.)
 
로에른 A. 니아:(섞이지 않은 기름처럼 일렁이는 이능력이 점점 더 많이 흘러나간다.) 능력이 넘어오고 돌아가는 거, 두 번 느끼기는 싫은 감각이네요. 그래도 시간 제한 같은 건 없으니 다행이죠.
 
이리스 레터:나도 다시는 이런 경험 하고 싶지 않거든. (키득이며 맞잡은 손을 빤히 내려다 보고는, 가볍게 깍지를 꼈다.) 슬슬 마무리일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참아.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1만큼 회복합니다.
 
이리스 레터:음........
아닐 것 같기도.....
 
로에른 A. 니아:스킨십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걸까요? (어색함을 꾹 눌러참고 있으니, 금방 돌아가줬으면 좋겠다만.)
 
이리스 레터:... 완전히 랜덤인가? 그럼 이러면? (깍지 낀 손을 풀고, 그냥 로에른의 손등을 검지로 쿡쿡쿡쿡 찔렀다.)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4만큼 회복합니다.
 
한번 쿡 찌를 때마다 1씩 넘어온 듯하네요ㅋ
 
이리스 레터:...
(모른척)
 
로에른 A. 니아:(정말 쪼잔하게도 넘어가는군……)
스킨십도 스킨십이지만, 당신은 방식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 한 팔은 등 뒤로하고, 한 손으론 이리스의 손을 아주 정중하게 붙잡아 제 입가로 들어올렸다. 그 위로 입맞춤을 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리스, 초능력 기능치를 26만큼 회복합니다.
 
로에른에게 넘어갔던 능력이 완전히 되돌아왔습니다!
 
몸 안에서 충만하게 휘몰아치는 감각이 선명합니다.
 
이리스 레터:(얼떨떨하게 일련의 과정을 쳐다보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 너 뭐 잘못 먹었어?!?
 
로에른 A. 니아:아뇨. (능력이 모두 넘어가는 걸 느끼자마자 손을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이게 예절이라는 거랍니다, 레터.
 
이리스 레터:예절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내려진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 아무튼 이제 다 돌아온 것 같아. 적어도 무대에서 망신당하진 않을 테니까...
이제야 좀 편하게 건국제를 준비할 수 있겠네. (긴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굳이 말은 안했는데, 솔직히 스트레스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로에른 A. 니아:제 말의 요지는, 스킨십을 해도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할 수 있다는 거죠. 당신처럼 매번 툭 치고 쿡 찔러대고 하는 게 아니라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찻잎을 넣는다. 뜨끈뜨끈한 김이 오르는 잔을 건넸다.) 고생 많으셨어요. 축제 전까지 돌아와 다행이군요. 그럼 논의할 사항이 있겠어요.
 
이리스 레터:난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내가 지금까지 스킨십 할 대상이라고 해봤자 동생이랑 친구들밖에 더 있었겠어? (고마워, 덧붙이고는 내밀어진 잔을 받았다.)
연출같은 거? ... 앗뜨.
 
로에른 A. 니아:저도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조금씩 절충해서 바꿔나가 보죠. 당신을 마냥 거절하거나 혼자 남겨두는 일은…… 되도록 없도록 해 볼 테니까요. (며칠 전의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과인 듯하다.)
네. 축제 무대에서의 연출 말이에요. 타이머는 시간대마다 한 명씩 무대에 올라가 자신의 소개를 하고 능력을 펼쳐 보이죠. 이번에는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되었으니, 어떤 식으로 능력을 사용할지 정해 봐요.
 
이리스 레터:... 너도 생각이란게 바뀌긴 하는 사람이구나? (솔직히, 그는 이제 당신에게 절대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지금 이 순간의 사과 하나로 한번에 풀어진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지만, ‘절대’라는 명제 정도는 지워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가 능력을 쓰는 방법은 거의 반대니까, 그 점을 이용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데... 네가 만든 결정들을 내가 터트린다거나. 반짝거리고 예쁘지 않으려나?
 
로에른 A. 니아:가족을 그리워하는 당신에겐 모두와 떨어져 혼자 지내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성가시긴 했어도 악의를 갖고 한 행동들은 아니기도 했었고. 어쨌건 간에 한 시간대에 두 명밖에 없는 페어이니 저도 예의를 다해야겠지요. (느릿하게 말했다.)
(이리스의 말을 듣곤 곰곰이 고민한다.) 지금 막 떠오른 안이 있는데. 당신이 무대 위에 태양처럼 거대한 빛을 띄우면, 제가 그걸 광원으로 이용해 결정들을 만들어 낼게요. 당신의 광원이 결정이 된 것처럼 때를 맞추어 당신이 띄운 빛을 거두고, 결정들을 터뜨리는 건 어떤가요.
 
이리스 레터:예의라는 점까지 해서 상당히 너답네... 이건 뭐 고맙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도 뭐... 고마워.
연습은 죽어라 해야겠지만... 좋은데? (머리속으로 살짝 상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지난 며칠 능력 없이 살아서 컨트롤 실력이 왕창 떨어졌을지도 몰라. 답답한 건 네가 감당해야 해.
 
로에른 A. 니아:그럼 연습을 하러 가죠.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시간이 없어요. (곧장 찻잔을 내려두고 일어선다.) 전 가능한 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항상 그래 왔었고요. 그러니 따라 주셨으면 하는데요.
 
이리스 레터:... ... 나 지금 긴장 풀려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있어봐. 딱 5분만...
 
로에른 A. 니아:그 정도로 긴장하고 계셨어요? (당장이라도 신발을 신을 기세였다가 다시 탁자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리스 레터:며칠짜리 스트레스까지 합산해서. (말도 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널 볼때마다 짜증이랑 어색함 참는데 소모된 심력도 있고...
아무튼 최악이었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옷을 탁탁 털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로에른 A. 니아:(멀뚱하니 바라봤다. 아까 그 말로 사과를 대신했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하단 말을 할 법도 한데 조용하기만……)
 
이리스 레터:........
그래. 기대도 안했어.
 
로에른 A. 니아:다 쉬고 나면 훈련실로 가자고요. (뻔뻔)
 
이리스 레터:넌 꼭 밤에 혼자 복도 걸어다닐 때 뒤통수 조심해.
 
로에른 A. 니아:흐음. (무시)
 
이리스 레터:이젠 무시를 하시겠다?
 
로에른 A. 니아:그럼 제가 앞에서 절 때리겠다고 작당모의를 하는 사람한테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이리스 레터:두려움에 떨기?
 
로에른 A. 니아:전 아무것도 무섭지가 않아서요. 안타깝게 됐네요.
 
이리스 레터:괜찮아. 무섭게 만들어주면 그만이야. (허리까지 통통 두드리며 현관으로 나왔다.) 가자...
 
로에른 A. 니아:(과연. 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정도의 눈치는 갖췄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두 사람은 훈련실에서 무대 연출의 연습에 매진하고 또 매진했습니다.
 
완전히 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어찌저찌 다시 이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를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닙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상처가 아물듯, 아주 조금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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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축제의 전야.
 
매해 봄의 가운데, 4월 19일이면 도밍게즈의 건국 축제가 열립니다.
 
이튿날 동안 사람들은 꽃을 달고, 등을 띄우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냅니다.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지독하게 깨끗한 하늘 위로, 매달릴 곳을 잃은 우산이 홀로 떠다닙니다. 창 너머가 왁자지껄합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건물 사이 엮인 긴 줄마다 색색의 것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깃발, 손수건, 우산…… 다 나름의 소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의 장막을 비유하는 깃발.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손수건. 날씨가 맑기를 기원하며 활짝 펴둔 우산.
 
건국 축제가 끝날 때까지 화창하기를 비는 거예요.
 
정말로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도 날은 화창합니다.
 
로에른 A. 니아:(이리스는 오늘도 늦잠을 잤는가? 일단 로에른은 평소처럼 새벽같이 눈을 떴다. 침대를 쿵쿵 쳐본다.) 레터. 아침이에요.
 
이리스 레터:(당연하지. 훈련하다 힘들어서 뻗었다. 하지만 침대를 두들기는 진동에는 다소 요란스럽게 눈을 떴다.) ... 씁. 버, 벌써?
 
로에른 A. 니아:네. 변장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니 최대한 일찍 일어나는 게 좋겠죠. 잠은 잘 주무셨나요?
 
이리스 레터:음... 영 찌뿌둥해. (늘어지게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래도 널 괴롭... 꾸미다 보면 컨디션이 돌아오겠지. 먼저 씻을래? 준비를 좀 해두게.
 
로에른 A. 니아:방금 괴롭히겠단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이리스를 흘겨봤다가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린다. 옷은 그냥 평범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다.)
 
이리스 레터:기분탓이야. (그리고 그가 씻고 나오는 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테이블 위에 죽 늘어놓았다. 특별히 준비한 가발이라던가, 순전히 사욕을 위해 꺼낸 화장품이라던가.) 여기 앉아. ... 옷은 그러고 나가게?
 
로에른 A. 니아:이것저것 많이도 준비하셨네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자리에 앉았다.) 네. 특별히 입어야만 하는 게 있을까요?
 
이리스 레터: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심심해서. 다음에 나랑 옷 좀 사러 가자. 내 옷을 너한테 입힐 수는 없잖아. (상상해보니 좀 웃긴다. 머리가 마르는 동안 피부톤을 살펴보는 얼굴이 다소 심각해졌다가...) 햇빛 좀 보고 살아.
 
로에른 A. 니아:격식 차릴 만큼의 옷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당신의 옷이 맞을 리가 없잖아요. (쇼핑을 별로 안 좋아하는 듯 표정이 미묘해졌다.) 전 바깥보단 실내에서 차분하고 조용하게 보내는 걸 좋아해서요. (머리를 금세 다 말리고 드라이기를 내려놓았다.)
 
이리스 레터:힘내면 맞을 것 같기도... (아마도 농담이다. 당신이 드라이기를 내려둔 뒤, 눈썹을 가볍게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창백한 것 아냐. 넌 어릴 때도 나가서 놀지도 않고 집에 앉아서 책만 읽었지?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
 
로에른 A. 니아:(조각상처럼 가만히 앉은 채 이리스의 손길을 받는다.)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런 당신은 매일 바깥에서 뛰어노셨고요?
 
이리스 레터:당연하지!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놀지 않으면 손해라고. (모양새를 다듬고, 가볍게 주변을 턴다. 하여튼 생긴 것 하나는 예쁘네-하는 작은 중얼거림.) 이 얼굴을 가지고 꾸미지 않는 것도 아깝잖아. 나가서 쇼핑할 여유가 있는 날 딱 세 벌 정도만, 어때? 그 정도면 사는 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도 않아.
 
로에른 A. 니아:당신도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그 쌍둥이 동생과 함께 어울려 놀곤 했나요? (저와 달리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이의 낯을 흘끗 바라보았다.) ……음. (짧은 침음성으로 달갑지 않단 의사를 표현한다. 그래도 이어지는 말은 사실상의 승낙이다.) 너무 화려한 옷은 취향이 아니에요.
 
이리스 레터:아무래도 그렇지? 최근에는 걔가 날 좀 귀찮아 하긴 하던데... 애들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나 몰라. (쌍둥이며, 당연하게도 동갑이다.) 참고할게. 근데 이 근처 어디서 옷을 살 수 있는지는 모르니까, 네가 안내해줘야 해.
 
로에른 A. 니아: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아직 애인데요……. (그리고 로에른은 시비를 걸 틈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멀지 않은 곳에 백화점이 있어요. 그곳으로 가죠.
 
이리스 레터:얜 하나를 그냥 넘어가질 않네. (꼬집으려다 참았다.) 무대를 무사히 마치면 포상 삼아서 외출증 좀 끊어 달라고 해자. (그리고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면, 가발을 꺼내들기 전에 심각하게 들여다 본다... ...)
딱 한 시간만 더 쓰면 재밌을 것 같... 아니다. 검은 가발로 괜찮아?
 
로에른 A. 니아:제가 똑같이 말했으면 당신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적반하장) 그래요. 건국 축제만 지나면 카운터의 운신도 비교적 자유로워질 것 같으니. ('한 시간 더'라는 말에 이리스를 잠깐 노려본다) 네. 무난하네요.
 
이리스 레터: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태클 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잖아. (긴 속눈썹 끝을 검지로 톡 건드리고는 살짝 물러났다.) 그럼 거울 좀 보고 있어봐. 거의 다듬기만 한 수준이긴 한데... 어때. 그래도 좀 다르지?
 
로에른 A. 니아:저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리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깔끔히 다듬는 것 외에는 얼굴에 손대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옅게나마 화장하고 다듬어진 차이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아요. 좀 더 부드러워졌나.
 
이리스 레터:혈색도 좀 올렸어.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얼굴이 되어 제 옆머리를 빙글빙글 꼰다. 제 실력에 감탄하며 감상하기를 1분 쯤, 곧 가발을 챙겨 들고는 마지막까지 꼼꼼히 마무리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끝까지 남았지만...) 됐다! 이러면 알아보는 사람도 많이 없을걸. 아마도...
 
로에른 A. 니아:(평소의 밝은 은빛 머리칼과 달리 완전히 어두운 흑발이 되자, 마치 환각의 타이머의 능력을 받은 것처럼도 보인다.)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모자는 써야겠지만, 마스크랑 안경을 빼도 되니 한결 다행이에요. (이마를 덮은 검은 가발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당신도 어서 준비하시죠.
 
이리스 레터:오래 걸린다고 잔소리 하지나 마. (그리고 그 말대로, 이리스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간 뒤부터 준비를 완료하기까지...)
(2시간 정도를 썼다.)
 
로에른 A. 니아:(………………)
(시계를 오십 번쯤 바라본 듯)
당신은 저처럼 가발을 쓰는 것도 아닌데 왜 두 배는 걸리는 거죠?
 
이리스 레터:내 머리를 봐. 단순히 말리는 걸로 끝이 아냐, 이건... (고데기 쭉쭉...)
(풍성... ...)
 
로에른 A. 니아:기다리는 데 진을 다 쓰겠어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지루해한다.)
 
이리스 레터:그렇다고 우리가 농담 따먹기나 끝말잇기 같은 게임을 할 수는 없잖아. 그... 전에 빌려온 책 다 읽었어? 완전 재미없어 보이던 그거.
 
로에른 A. 니아:그것도 그렇죠. (동의) 거의 다 읽긴 했는데, 아직 뒷부분이 남았어요. 책이나 읽고 있어야겠네요. (차를 한 잔 더 타오고, 그대로 테이블에 앉은 채 개노잼 개두꺼운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리스 레터:아깝다. 그거 다 읽었으면 내가 빌려온 책 한 번 읽어 보라고 하려 했는데. (방 구석에 놓인 전생했더니 거미였던 건에 대하여~마왕성에서 방패들고 잘자요~. 가리킴)
 
로에른 A. 니아:다 읽었어도 재독을 하지, 당신이 빌려온 책은 안 읽어요. (이리스 손끝의 제목을 다시 한 번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런 해괴한 제목의 책이 다 있다니……
 
이리스 레터:편견을 가지지 마. 나름... 시간은 죽여주게 잘 가. (시시콜콜한 잡답이나 하면서 준비를 마무리했다. 머리 일부는 사이드테일로 묶어 올리고, 교복 색에 맞춰 하고 있던 어두운 색의 리본 대신 눈 색과 같은 보라색 리본을 달았다. 패션은... 힘들다 그냥 에이블리 폭닥여리하찌라 하자)
 
로에른 A. 니아:과연 의미있는 정보값을 가진 책일지 모르겠는걸요. (책을 서슴없이 악평하면서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긴다. 이후로는 이리스가 다 했다고 말할 때까지 독서에 몰두했다.)
 
이리스 레터:책에 꼭 정보값이 있어야만 읽어? 재밌으면 그만이지. (그로부터 또 10분이나 지난 뒤에야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다. ) 됐다, 가자!
 
로에른 A. 니아:(시계를 본다. 과연 몇 시일까? 참고로 로에른이 이리스를 깨운 시간은 여섯 시)
 
이리스 레터:(음...... 우리 자유시간 몇시부터랬지?)
 
로에른 A. 니아:(아침식사 이후)
 
이리스 레터:(음.............)
(아침 굶자)
 
로에른 A. 니아:(대체 몇 시가 된 거지?)
 
이리스 레터:(대충 여덟 시 반~아홉 시인 셈 쳐)
 
로에른 A. 니아:당신 DOT에 오기 전에 바깥에 나가 놀 때도 매번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나요? (무한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신발을 신는다.)
 
이리스 레터:매번은 아니고... (아껴둔 구두까지 꺼내 신었다.) 특별한 날만? 오늘처럼 축제를 간다던가, 애들이랑 제대로 놀기로 약속한 날 같은 거.
 
로에른 A. 니아:그런가요…… (앞으론 그냥 들키든 말든 제가 혼자서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본인 준비만도 두 시간씩 걸리는데 저한테까지 시간을 쏟아서 하염없이 지체되게 할 수는 없다)
 
이리스 레터:너 지금 괘씸한 생각 하고 있지.
 
로에른 A. 니아: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각 중인데요. (무뚝뚝하게 말하며 문을 열고 나섰다.)
 
이리스 레터:방금 분명 괘씸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뒤통수였는데.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따라 나갔다.)
 
아침식사는 스킵하나요?
 
이리스 레터:(밥 준다니까 먹자 배고프다)
 
사람이 밥은먹고 살아야한다
 
식당으로 내려가면, 축제 때문일까요? 가벼운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치아바타와 세 종류의 치즈, 구운 햄, 부드러운 스크램블드에그.
 
우유와 시리얼은 상비되어 있으니 배가 고프다면 그릇에 따라 먹으면 됩니다.
 
오늘의 아침 주스는 사과와 케일, 당근을 갈아 넣은 건강 주스입니다.
 
이리스 레터:(다른 타이머랑 카운터들도 꾸미고 나왔나? 치아바타에 치즈랑 햄 올리며 구경해봄)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페어가 바깥에 나갈 요량인 듯합니다.
 
남색과 흰색 일색이던 교복 대신 온갖 색의 사복들로 꾸며 입었네요.
 
일 년에 한 번뿐인 축제란 타이머들에게도 놓칠 수 없는 날이니 말입니다.
 
이리스 레터:쟤네도 되게 신났나 봐. (팔꿈치로 로에른 툭툭...) 기죽지 마. 여기서 네가 제일 예뻐.
 
로에른 A. 니아:(치아바타를 한 입 먹다가 어이없어진다. 당연하게도, 남들에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다.) 제가 뭐에 기죽어야 하는 거죠?
 
이리스 레터:음... 궁중암투. (아무 말이나 하면서 주스를 가져와 마셨다.) 하여튼 농담하는 재미가 없다니까. 나가서도 재미없어서 사람 잘 안 오는 포인트로만 가는 거 아니지?
 
로에른 A. 니아:(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제가 밖에 나가길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아차리셨으면 농담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도 눈치채셨을 줄 알았는데요. 뭐…… 저야 사람 없는 포인트만 다니면 좋지만. 당신은 그걸 원치 않으실 거 아녜요?
 
이리스 레터:이미 알고는 있었는데, 매번 새롭게 감탄 중일 뿐이야. (의외라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본다.) ... 어쩐 일로 예쁜 말을 하지? 그럼 추천하는 코스같은 거 있어? 여긴 꼭 봐야 한다~ 라던가, 평범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던가.
 
로에른 A. 니아:유명한 건 역시 광장의 시계탑, 코마니 호수 정도려나요. 노점상들이야 거리마다 널려 있고…… 일전 당신이 말한 그 장미 아치도 사람들 사이에선 입소문을 탄 곳이죠. 대체 왜 인기가 있는지 저로선 이해가 안 되지만요.
 
이리스 레터:흠. (치아바타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고는 장난스레 미소지었다.) 내가 그걸 싹 다 둘러보고 오자고 한다면?
 
로에른 A. 니아:(건강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식사를 마친다) 따라가 드리긴 하겠지만, 전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에 앉아서 보내겠죠.
 
이리스 레터:체력이 부족한 거야, 그냥 움직이기 싫은 거야? (냅킨으로 입가를 가볍게 두드려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쯤 즐기려고도 해봐. 혹시 알아? 나름대로 재밌는 구석이 있을지도.
 
로에른 A. 니아:사람들 틈에서 오가는 건 금세 지치는 일이기도 하고, 움직이기 싫기도 해요. (결국 둘 다다) 좋은 날이니 지루하진 않겠네요.
 
이리스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즈음, 아침부터 반듯한 차림새의 리슬러 부관이 식당에 들어옵니다.
 
리슬러 부관:오늘 나가볼 건가요?
 
타이머와 카운터들이 외출할지, 외출하지 않을지 확인하러 온 모양입니다.
 
모처럼의 외출입니다. 게다가, 건국 축제는 매년 한 번밖에 돌아오지 않아요.
 
이리스 레터:(누가 봐도 외출할 사람처럼 입고 있다.) 네!
 
리슬러 부관:(별다른 반응 없이 당부했다.) 잊지 마십시오. 군들은 타이머와 카운터고 세계의 구원자지만, 동시에 개인입니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입니다. 개인적인 행동을 할 때마저 '구원자처럼' 굴 필요는 없습니다.
 
타이머가 어딘가를 나갈 때마다, 무언가를 할 때마다 따라오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담을 갖지 말라는 건지, 오히려 부담을 갖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저의가 헷갈릴 정도로 집요한 충고였지만, 그는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타이머가 본인이 개인임을 이해하고, 행동해야 사회 또한 받아들인다는 것’을요.
 
세계의 구원자라며 추켜 올리는 하인리히 장교의 언행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행보였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그래, 그래. 내 훌륭한 부관께서 그렇다고 하시는군.
 
그러나 하인리히 장교도 말리는 대신 싱거운 농담이나 덧붙일 뿐이었습니다.
 
부관이 다시금 묻습니다.
 
리슬러 부관:누군가 바깥에서 군들에게 무언갈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거죠?
 
어깨를 반듯하게 편 리슬러 부관이 두 사람을 내려다 봅니다. 상당히 고지식한 얼굴입니다.
 
로에른 A. 니아:침묵하고 무시로 일관할 것. 어떤 이야깃거리도 흘리지 말 것.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 세 가지입니다. (수도 없이 들어온 듯 익숙하게 답했다.)
 
이리스 레터:... 얘처럼 하면 되는 거죠? (로에른을 슬쩍 고갯짓한다.)
 
정말 우리를 위한 조언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문제가 될 상황에서 ‘그것은 타이머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발을 빼기 위한 수작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렴풋이, 리슬러 부관이라면 후자를 의도했을 것 같단 의심이 들지만……
 
그래도 상관없죠. 나가서까지 체통을 지키라고 요구받는 것보단 낫잖아요?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별다른 동경도, 애정도, 호의와 영광, 감사마저도 깃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좋아했고, 싫어했고, 편히 여겼고,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이리스의 대답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 그가 작은 종이를 내밉니다. ‘외출증’입니다.
 
이리스 레터:(확 밝아진 얼굴로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그... 말씀하신 것도 지키고요!
 
로에른 A. 니아:그럼 가죠. (문가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다)
 
이리스 레터:(구겨지기라도 할까 외출증을 아주 조심조심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가자!
 
경비실에 외출증을 제출하고, DOT의 정문을 나서, 긴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수도 외곽이기 때문에 축제가 열리는 중심지까지 가려면 약 20분을 걸어야 합니다.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화한 향기가 밀려듭니다. 때 이른 장미 향기가 은은하게 밴 탓입니다.
 
아파트 베란다며 학교의 창문마다 수놓은 새파란 장미가 시선을 훔칩니다.
 
누군가 장미 다발을 한 아름 안고 지나가면, 미처 챙기지 못한 눈물처럼 꽃잎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마주친 몇몇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도심의 풍경은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건물 사이로 엮은 긴 줄마다 색색의 깃발, 손수건, 혹은 우산 따위가 걸려 화려하게 하늘을 수 놓습니다.
 
도밍게즈의 국화인 새파란 장미가 창틀과 문지방마다 걸려 있고, 꽤 많은 사람이 품에 안고 있기도 합니다.
 
늘 이맘때쯤이면 날씨가 좋아요. 하늘은 깨끗하고, 바람은 살랑이고, 때 이른 장미 향기가 향긋합니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에게 흰 리본을 묶은 새파란 장미라던가, 풍선을 선물 받을 거예요.
 
거리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광장]과 [골목], [공원]으로 흩어집니다.
 
이리스 레터:수도는 확실히 사람이... ... 많네! 응, 많아도 너무 많네! (저녁까지 다 돌아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마음은 확실히 들뜬다.) 이렇게까지 화려할 줄은 몰랐는데...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저쪽이 광장인가 봐! 그럼 뭔가 이벤트라도 하고 있지 않으려나?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로에른을 재촉했다.)
 
로에른 A. 니아:(거리에 막 접어들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드는 기분. 수도에서의 축제도 벌써 다섯 번째고, 원래도 감수성 떨어지는 그로선 별다른 감흥이 없다. 곁의 이가 무척이나 들뜬 게 느껴지니 초를 치진 못하겠고, 괜히 모자 챙만 만지작거렸다.) 항상 많지만, 축제니 더하겠죠.
이벤트가 있으면 참여하시게요? (이리스를 따라 광장으로 향한다)
 
흰 돌이 깔린 광장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시계탑]과 [분수]가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이만큼 많은 사람은 처음 봐. (이쪽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하는 타입이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벌써 시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히 참여해야지! 그런 걸 즐기려고 축제에 오는 거잖아?
가령... (무언가 예시를 들어보려 하다가, 금세 시계탑에 정신이 팔려 버린다.)
 
로에른 A. 니아:누차 말씀드렸지만 눈에 띌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시계탑은 분침과 초침이 존재하지 않으며, 시침만 존재합니다.
 
타이머의 존재를 기념하는 시계입니다. 정각이 될 때마다 긴 종소리가 울립니다.
 
시계탑 옆에는 거대한 게시판이 놓여 있어,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감이나 염원 등을 적고 갑니다.
 
이리스 레터:괜찮아, 눈에 띌만한 성적을 내본 적은 아직 없거든. (딱히 자랑은 아니지만, 덧붙이고는 게시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밍게즈 전체가 그렇긴 한데... 수도가 특출나게 타이머를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인걸.
(게시판을 쭉 둘러보면서,) 있잖아, 넌 소원 같은 거 없어?
 
로에른 A. 니아:아무래도 DOT가 있는 곳이니 더더욱 타이머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요. (게시판엔 시선도 두지 않고 시계탑만 짧게 올려다본다.)
타이머로서 마땅한 바람이라면 도밍게즈의 평화겠죠.
 
이리스 레터:그런 딱딱한 걸 물어본 게 아닌데. 한테 물어본 거야, 난.
 
로에른 A. 니아:저는 타이머예요. 타이머의 바람이 곧 저의 바람이죠. 물론 추구하는 가치는 있죠. 조용하고 차분한 시간. 평온과 평화 같은 것. 모두 도밍게즈의 안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어요. 그러니, 그 외의 소원은 딱히 없네요.
 
이리스 레터:진짜 재미없게 사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돌아본다. 역시나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지만, 딱히 의외는 아니었다.) 부관님이 그랬잖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고. 그리고 넌 그렇게까지 희생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로에른 A. 니아:저는 어릴 때부터 타이머가 되길 바랐으니까요. 부관님은 개인과 구원자의 자아를 분리하는 게 좋다고 하시지만, 저는 동일시해도 딱히 부담감을 느끼진 않아요. (살짝 끄덕였다.) 그러니 제가 희생하러 나설 일이 없도록 평화로운 게 좋지 않겠어요? '제가' 평화를 지키고 싶단 게 아니라, 제가 나설 일이 없도록 세상에 시끄러운 일이 없길 바라는 거예요.
그런 당신은요? 소원이 있나요?
 
이리스 레터:널 더러 참 바람직한 타이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기할 정도로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감탄해야 할지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짧은 한숨. 시선은 다시금 게시판을 향해 흘렀다. 소원이라...) 나? 난 잘 모르겠네. 소원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걸 원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따지자면 가족이랑 친구들에게 편하게 연락하고 싶은 것 정도... 하지만 이런 사소한 바램 정도에 소원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잖아. 김샌다, 결국 우리 둘 다 저기 적을 만큼 특별한 소원은 없는 거네.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로에른 A. 니아:대체 왜 불퉁해지신 거죠? 소원이 있어야만 하는 건가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간절히 바라는 게 없다는 건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지 않나요.
 
이리스 레터:(아마 평생 오지 않겠지...) 그렇긴 한데, 막연하게 원하는 게 있으면 더 즐겁잖아. 떠올리기만 해도 설레고,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벅차고... 너한테 이렇게 이야기 해봤자 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짓겠지만.
난 남의 소원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아하거든.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기 즐거워서? 근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소원이 없다 못해... 아니다, 됐다.
 
로에른 A. 니아:저로선 공감이 어렵긴 하네요.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대답) 그럼 막연하게 원하는 걸 만들어 보세요. 꼭 거창하기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물론 타이머는 세상을 구하는 이들이라지만 재해나 사건사고가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우를 받고 이능력을 쓴다는 것 외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잖아요.
 
이리스 레터: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다.) 흠... 그러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봐. 누가 사탕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
 
로에른 A. 니아:(하늘을 올려다본다.) 애 취급하지 말아주실래요? ……
 
이리스 레터:그냥 하는 소리지. (키득이고는 게시판의 반대쪽 구석으로 갔다. 한참이나 고민하고는, 주변 사람에게서 펜을 빌리는가 싶더니... 귀퉁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서 돌아왔다.) 됐다, 이제 다른 거 구경하러 가자. 저쪽에 분수가 있는 것 같던데.
 
로에른 A. 니아:다시 고민해 보니 사소한 거라도 떠오르셨나 보죠? (멀뚱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분수로 향했다.)
 
분수에 새파란 장미의 목을 꺾어 던지며, 어떤 소원을 비는 것은 도밍게즈의 흔한 의식입니다.
 
커다란 삼단 분수대의 물 위에는 사람들이 던진 파란 장미가 가득합니다.
 
광장에는 장미를 파는 사람과 가족 나들이, 데이트를 나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리스 <행운> 판정?
 
이리스 레터:
기준치: 52/26/10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장미를 한아름 들고 지나가던 이가 이리스를 보고 멈칫합니다.
 
"아니, 이렇게 아리따운 분이 있다니! 자, 받으세요. 제가 어제부터 공들여 만든 화관입니다."
 
"마땅히 당신 같은 사람에게 가야만 하겠죠! 즐거운 축제가 되길!"
 
그러면서 파란 장미와 흰 안개꽃을 엮어 만든 화관, 장미 다발을 건네네요.
 
이리스 레터:가, 감사합니다...? (얼결에 받았다. 나쁜 기분은 아니라, 괜히 푸슬푸슬 웃음이 나왔다.)
 
로에른 A. 니아:(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도 당신이 바라던 이벤트라면 이벤트인가요?
 
이리스 레터:나름? 기분 좋잖아. (키득이며 머리 위에 화관을 얹었다. 푸른 장미와 자신은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때, 어울려?
 
로에른 A. 니아:2시간 가까이 공들여 꾸민 보람이 있겠네요. (살짝 끄덕였다.) 분수에 장미도 던져보실 건가요?
 
이리스 레터:방금 소원이 생긴 참이니까, 응. (받은 장미 다발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한 송이를 꺼내 내밀었다.) 모처럼이니까 너도 해봐. 미신이라고 해서 아무 의미 없는 건 아니거든.
 
로에른 A. 니아:미신은 믿지 않는대도요. (장미를 받아들기는 했으나 영 떨떠름하다. 꽃송이 하나가 바람을 이루어줄 리 만무하다. 그럴 만한 힘은 신에게나 있는 것이고, 신의 존재 또한 불분명하다. 이리스가 들었다면 '재미없어 죽겠다'는 핀잔이 쏟아졌을 생각들만 하면서 장미의 목을 꺾어 분수대로 살짝 던졌다.)
 
이리스 레터:어디서 들었는데, 정말로 이런 행위에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저 또한 다발에서 제일 예쁜 한 송이를 꺼내, 목을 꺾어 분수대를 향해 던졌다.) 이렇게 잊지 않고 상기하면서, 스스로가 소원을 이루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거래.
 
로에른 A. 니아:그런가요.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물 소리가 청량하다. 이미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로에른에겐 당연히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당신은 뭘 떠올렸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리스 레터:음... (물 위에 떠오른 장미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그건 비밀. 네가 들으면 코웃음 칠 것 같아서.
 
로에른 A. 니아:……? 유치한 소원인가 보죠? (비웃거나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만, 비밀이라고 하니 굳이 더 묻진 않는다.)
 
이리스 레터:잠깐만, 유치하다는 가정부터 하는 거야?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아니거든! 나중에 이루어지면 말해줄게.
 
로에른 A. 니아:코웃음칠 만한 내용이라면 그런 게 먼저 떠올라서요. (덤덤) 비교적 현실적인 소원인가 보네요. 기억해 두죠.
 
이리스 레터: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뒤돌아 다시금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골목에선 뭘 하고 있는 거지?
 
수도의 골목 곳곳에는 노점상이 열렸습니다. 온갖 축제 음식이란 음식은 다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종류의 소스를 바른 꼬치구이라거나, 과일을 정교한 모양으로 깎아 설탕물을 입힌 사탕,
 
바람에 흔들리는 색색의 솜사탕, 캐러멜을 입혀 튀겨낸 과자들.
 
수도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전부 가게를 접고 노점을 냅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념품이나 액세서리, 수공예품을 팔기도 합니다.
 
가장 인기인 것은 이번 세대의 타이머를 본떠 만든 봉제 인형이에요.
 
물론, 프뤼나의 인형도 놓여 있습니다!
 
트레이드 마크인 뚱한 표정에 쨍한 색의 자안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와............. 저기 네 인형 판다.
 
로에른 A. 니아:피규어도 만드는 판에 인형이 없을 리 없죠. (약간 달관했다) 저는 싫다고 했지만 DOT 측에서 홍보를 위해서라며 마구잡이로 IP를 팔아넘기더군요…….
 
이리스 레터:피규어도 있다고? (그건 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흠... 저 인형, 사서 방에 앉혀두면 가위는 눌릴 일 없겠다. 귀신 그딴 게 어디에 있냐고 내쫒아 줄 것 같아.
 
로에른 A. 니아:온갖 캐릭터 상품이란 상품엔 다 이용되죠. 당신도 공개되고 나면 곧 저런 상품들이 쏟아져나올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싫다고 해도 소용없답니다. (약간 놀리는 투) 인형 따위 없어도 제가 똑같은 말을 해드릴 수 있는데요. 귀신을 믿으시는 건 아니겠죠.
 
이리스 레터:... 그건 좀 싫은데?! 그냥 공개 안 하면 안 돼?! (상상해보니... 진짜로 싫다!) .......... 아니 뭐, 아주 믿는다는 건 아니고. 응.
... 그래도 하나만 사면 안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네가 얄미울 때마다 너 말고 인형한테 화풀이 하게.
 
로에른 A. 니아:저도 장교님께 비슷한 항의를 했었죠. 기각당했지만요. (이리스의 반응을 즐기고 있다.) 이 나이에도 귀신을 믿는다니……. 제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근거없지는 않은 것 같죠?
마음대로 하세요. 화풀이하실 용도면 대여섯 개씩 사지 그러세요. (한 술 더 뜬다)
 
이리스 레터:야, 그래봤자 우리 아직 열일곱밖에 안... ... (눈이 가늘어진다. 뭐지? 인형 여섯 개만큼 빡치게 굴겠다는 뜻인가?) 네가 사라고 한거다?
(그리고, 진짜로 프뤼나 인형 여섯 개를 사러 간다.)
 
가격은 이리스의 용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법합니다.
 
여섯 개나 되면 좀 아슬아슬할지도 모르지만 ㅋ
 
이리스 레터:(한다면 하는 여자, 이리스 레터. 탕진하다.)
 
로에른 A. 니아:(진짜로 사네……) 그것들로 방을 어지럽히지만 말아주시길.
 
이리스 레터:현관, 주방, 테이블, 창가에 하나씩 둘 생각이었는데.
 
로에른 A. 니아:싫어요. 난잡스럽잖아요. (딱 잘라 거절한다)
 
이리스 레터:그럼 이걸 전부 어디에 둬?! (프뤼나 1을 쥐고 흔든다.)
 
로에른 A. 니아:당신 침대에나 올려두시던가요. (외면)
 
이리스 레터:................. (프뤼나 123456을 올려둔 침대를 상상해 본다.)
가위는 피해도 악몽은 꿀 것 같다...
 
로에른 A. 니아: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기부하는 방법도 있겠네요. (매몰참)
 
이리스 레터:하... (일단 쇼핑백에 전부 집어넣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 잘 때 몰래 옆에 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 마주치게 할거야.
 
로에른 A. 니아:그런 짓을 하셨다간 제가 하루아침에 죄다 없애 버리는 수가 있어요. (심드렁) 아,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네요. 카운터의 인형이 나오면 당신에게 똑같이 해 드리죠.
 
이리스 레터:진지하게, 그냥 사이드킥 정도로 셀링해달라고 건의할 거야. 이런 상품까지는 나오는 일 없게... ...
간식 먹을래? (말돌리기)
 
로에른 A. 니아:카운터는 타이머와 대등한 존재인 게 DOT의 목적이었을 텐데요? 절대 안 될 걸요. (꿋꿋하게 시비를 건다) 전 아까 식사를 하고 와서 별로 당기지 않네요. 그래도 당신 몫은 사드릴게요. 저 쓸모없는 인형을 사느라 용돈을 거의 다 쓰셨을 것 같으니까.
 
이리스 레터:........ (자기 지갑을 들어본다. 헐빈하다.) 사람이 이래서 충동적이면 안돼... ...
... 솜사탕 하나만. (자존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로에른 A. 니아:솜사탕 하나로 괜찮으시겠어요? (늘어선 노점상으로 다가간다. 이런 데서 무언가를 사먹어본 적은 손에 꼽게 적은지라 다소 어색하기도 했다. 색색의 솜사탕을 가리켠다) 색은요?
 
이리스 레터:나도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 입이 심심한 정도... 건국제니까 하늘색으로 할래. (빤히 보다가...) 솜사탕은 먹어도 배가 차지는 않는데. 너도 하나 먹지 그래?
 
로에른 A. 니아:전 괜찮아요. 손이 끈적해지는 것도 싫고. (파란 솜사탕을 골라서 계산하고 당신에게 건넸다.)
 
골목은 내내 시끌벅적하고, 맛있는 냄새가 가득합니다.
 
이리스 레터: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몰라. (솜사탕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골목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이런 시끌벅적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러다 문득,) 참, 혹시 지나가다가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을 찾으면 알려주지 않을래? 내가 놓칠 수도 있으니까.
 
로에른 A. 니아:모두가 웃음 넘치는 삶을 사는 건 아니랍니다. (먹을 걸 쥐여주니 조금 조용해졌군……같은 생각이나) 모두 당신과 닮았나요? (새삼스럽게 이리스의 얼굴을 몇 초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리스 레터:(7살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동생은 말 할 것도 없고, 부모님 중에서는 아빠가 좀 더. 모처럼이니 와주지 않았으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일 뿐이지만.
... 역시 더 넓은 쪽으로 가볼까? 공원이 어느 방향이더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로에른 A. 니아: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쉽진 않겠지만, 나름대로 잘 찾아볼게요. (그에게 타인들이란 지나가는 NPC 1 정도의 인식에 불과했으므로, 노력을 해도 이리스보다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공원은 이쪽이에요. 그곳에 호수와 아치가 있어 사람이 더 많을 테니, 서로를 놓치지 않게 잘 따라오세요.
 
이리스 레터:(별로 믿음직스럽진 않군...) 미아가 되면 시계탑에 돌아오는 걸로 하자. 아니면... 이거 반대쪽 잡아. (프뤼나 123456이 담긴 쇼핑백의 손잡이 하나만 잡고, 다른 쪽을 내밀었다.)
 
로에른 A. 니아:(쇼핑백 안에 오밀조밀하게 담겨있는 자가복제 프뤼나들을 무시무시하게 내려다봤다.) 싫어요.
 
이리스 레터:깐깐하긴. 너 그러다 미아 돼.
 
로에른 A. 니아:장교님께 찾아와 달라고 애원하죠, 그럼. (고개 절레절레 저으면서 앞서나갔다.)
 
광장에서 조금 걸으면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나옵니다.
 
꽃과 나무를 잘 가다듬어 조경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공원의 한편에 설치된, 파란 장미로 장식한 아치 모양의 터널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어요.
 
조건은 반드시, 손을 잡고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원의 구석에는 낡은 [교회]가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곳이라 드나드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코마니 호수]입니다.
 
이리스 레터:(터널에 인파가 얼마나 있는지 본다. 축제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기 바글거리고 있을까...)
 
장난 아닙니다. 줄서서 통과하고, 사진을 찍고 있네요...
 
사랑이란 뭘까
 
이리스 레터:어우...
사랑이란 뭘까?
 
로에른 A. 니아:모르겠네요. (뻣뻣하게 서 있다. 마치 죽는 날까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양철로봇마냥)
 
이리스 레터:넌 진짜 그래 보인다.
 
로에른 A. 니아:전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이리스 레터:너처럼 말하는 애를 본 적 있어. AI라고...
 
로에른 A. 니아:그렇군요. (무슨 반응을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냥 건조하게 답했다. 그게 한층 더 기계적이다)
 
이리스 레터:아니다. 걘 이렇게 말하면 너 진짜 핵심을 찔렀어. 라는 말이라도 해주더라.
네가 걔보다 더 기계같아. (어깨 툭툭 쳐줌)
 
로에른 A. 니아:칭찬인가요?
 
이리스 레터:칭찬이지 그럼.
 
로에른 A. 니아:네. 고마워요.
 
이리스 레터:돌겠네.
(그냥 AI 데리고 좀 한적해 보이는 교회 구경이나 가자.)
 
AI와 함께 교회로 들어섭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떨어지는 색색의 빛이 꽤 장관입니다.
 
이곳만은 시끌벅적한 바깥과 달리 조용해서 다른 세계에라도 온 것 같은 이질감을 줍니다.
 
먼지 냄새가 묻어나지만, 기도를 올리는데 장소는 중요치 않죠.
 
이리스 레터:여기도 나름 예쁜데... (먼지를 살짝 쓸어 본다.)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네.
AI야, 네가 좋아할 만한 장소인 것 같아.
 
로에른 A. 니아:조용하니 좋네요. 전 신앙은 별로 없지만요. (스테인드글라스를 물끄럼 응시했다.) 당신이 축제를 원하는 만큼 즐길 때까지 쭉 여기 앉아있고 싶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
 
이리스 레터:내가 그러면 일어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말해줄게. (가까운 의자의 먼지를 대충 털고 앉았다.) 네가 여기 남고, 내가 혼자 축제를 보러 간다고 가정해보자...
일단 전제를 하나 해야 해. 난 길치야.
 
로에른 A. 니아:결과가 너무 뻔한데 계속 가정해야 할까요?
 
이리스 레터:당연하지.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면서 너 쉴 틈 주는 거야. (앉으라는 듯 옆자리의 먼지를 탈탈 털었다.)
그리고 난 길을 잃으면 무조건 직진을 해. 그러면 저녁이 될 때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넌 혼자 복귀해야 하겠지. 장교님 화가 머리 끝까지 날걸.
 
로에른 A. 니아:그런 깊은 뜻이. (먼지 털어진 옆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당신도 저도 장교님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털리겠네요. 정말이지 불운한 신세군요.
 
이리스 레터:바로 그거야.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혼자 쭉 앉아있기?
 
로에른 A. 니아:마음만은 그러고 싶지만 당신과 함께 공원을 전부 다 돌아보고 가야겠죠. (스무고개 하는 것 같군)
 
이리스 레터:옳지. 칭찬 스티커 받아. (쇼핑백을 뒤적여 프뤼나 4를 안겨 주었다.)
 
로에른 A. 니아:필요 없는데요. 교회에 놓고 갈까요? (먼지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카락 부분을 손끝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이리스 레터:네 인형이 불쌍해 보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시 이리 내, 하고 가져갔다.) 그래도 정 힘들면 오래 쉬다 가도 되니까... 아직 여유는 좀 있었던 것 같고.
... 그나저나 교회도 되게 오랜만이다. 나도 그다지 신앙심이 있는 편이 아니라서. 타이머나 카운터일 거면 좀... 신실한 사람이 선택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로에른 A. 니아:(망설임없이 주인에게 되돌려줬다) 글쎄요. 만약 그랬다면 종교인들만 우르르 선택받았겠죠. 하지만 전혀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이리스 레터:기준이 뭘까... 정말로 무작위?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 듯,) 넌 처음 각인이 나타났을 때 어땠어? 나처럼 사고를 쳤다던가.
 
로에른 A. 니아:생일을 축하받고 있었는데, 케이크의 촛불을 끄려던 순간 저도 모르게 빛을 가져왔는지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었죠. 어머니도 저도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리스 레터:... (생각보다 웃기다.) 넌 처음부터 때가 됐네요, 어머니. 시간의 각인이 나타났으니 이만 입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줄 알았는데.
 
로에른 A. 니아:상황을 파악한 후에는 대략적으로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바로 DOT에 알리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절 보내기 싫으시다고 하셔서 며칠간 유예를 두다가 연락을 했었죠.
 
이리스 레터:진짜냐... ... (농담이 아니라 정말 AI인가? 잠시 도밍게즈의 기술력을 되짚어 본다.) 무슨 타이머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애 같네.
너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어째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 (가볍게 기지캐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충분히 쉬었지?
 
로에른 A. 니아:좀 충전이 됐네요. (말과 달리 일어나기 싫어 보이지만…… 몇 초간 앉아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이젠 호수를 보러 갈까요.
 
이리스 레터:이상하게 거긴 좀 꺼림찍한 기분이 들어. 저번에 식당에서 호수의 사진을 봤을 때, 갑자기 머리가 아팠거든...
가기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직접 보면 좀 다르겠지. (이전보다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로에른 A. 니아:아침에 볼 만한 곳이 어딘지 물으셨죠? 코마니 호수가 공원에선 장미 아치보다도 인기가 많은 장소인데요. 물론 저도 그 장소를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가 보죠.
 
축제가 아니라도 유명한 관광지로 꼽히는 코마니 호수입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호수라서 물에서 짠맛이 나고, 물살이 둥글게 돌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호수의 바닥은 반짝입니다. 자갈과 모래 사이에 묻은 소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바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데, 보기보다 수심이 깊어 성인도 발을 딛지 못합니다.
 
그런 탓에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는 경우가 왕왕 생기곤 했습니다.
 
호숫가에는 옅은 색의 잔디가 자랐습니다. 봄이 찾아오는 시기, 희고 노란 들꽃이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드는군요.
 
호수는 온통 검고,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종이꽃이 몇 송이 떠다닙니다.
 
호수에 들어갈 수 없도록 세워둔 울타리에는 매달리지 마세요. 삭막한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이 무렵 호수에 들리는 사람들의 목적은 ‘타이머의 추모’입니다.
 
감히 도밍게즈의 모든 국민, 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꽃을 띄웁니다.
 
이것은 그저, 로에른과 이리스 또한 겪게 될, 우리가 공유하는 미래입니다.
 
죽은 후에 기리는 일이 무에 중요할까요?
 
일평생 세계를 위해 살고, 사람을 구원하고, 죽은 후에도 결국 구원자로 추모받는 삶.
 
누군가는 명예롭고, 영광되며, 훌륭하다 칭송할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미묘한 감상을 남깁니다.
 
이리스 레터:(잘 모르겠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고, 그냥 생각하기 싫어서일지도 모르고... 사진을 보았을 때는 저 꽃들이 곧 나를 향하게 될지도 몰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아직 피부에 와닿는 현실은 아니지 않나.)
... 그런데 왜 넌 여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데?
 
로에른 A. 니아:여길 보면, 언제 어느 틈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제 미래가 떠올라서요. 타이머의 추모로 대표되는 장소니까요. (쯧, 혀를 찼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예상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어쨌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면 오래 살 수 있다는 지표라도 있잖아요? 타이머는 그런 게 없죠. (타이머의 탄생은 영광스럽지만, 종막은 유독 불친절하고 갑작스럽다. 시간의 힘을 사용하고 온갖 명예와 부, 인기를 누린 대가인가.)
그래서 전 한 번도 이곳에서 추모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추모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니.
 
이리스 레터:(시선이 잠시 검게 물든 호수의 수면에 머문다.) 모두가 추모하기만 하고, 타이머의 삶을 위로해 주지는 않는 거네. 구원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당연한가... (구원자는 초월자와도 비슷한 의미로 쓰이던가. 평범한 사람들의 위기를 압도적인 능력으로 해결해주는 존재. 그렇다면 그런 존재의 삶은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누군가의 염려를 받을 수 없는, 받아서는 안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당신이 불만을 가진 부분은 이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너를 모르니까.) 그럼 더 많은 꽃이 떠오르기 전에는 여기를 뜰까, 우리 둘 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것 같으니까.
무서운 거야? 아니면 그냥 짜증이 나는 거야.
 
로에른 A. 니아:전 무서운 게 없어요. 그건 제 죽음도 마찬가지죠. 짜증이란 표현은 너무 원초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쪽이 좀 더 적확한 것 같네요. 제가 누리는 삶을 한순간에 앗기는 게 싫어요. 죽음을 반가워하는 이가 누가 있겠냐마는. (낮게 중얼거렸다.) 언제 죽을 거다 시한부라도 내려진다면 신변과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있으니까요.
 
이리스 레터:가만 보면 너는 되게, 뭐라고 할까...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음... (역시 이해하기는 힘든 사고방식이다. 자신은 죽음이라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부터가 무서운데.) 그럼 네가 네 마지막을 결정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싫지 않은 거야?
 
로에른 A. 니아:(이리스의 말을 곰곰이 곱씹는다.)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래서 제가 DOT의 군대식 체계에 쉽게 적응한 건지도. 여긴 규칙이 정해져 있고 그에 맞추어 돌아가니까요.
네. 그건 훨씬 낫네요.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끝을 맺을 수도 있을 테고.
 
이리스 레터:(타인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 대해 말을 얹을 수 있는 권리같은 것은 제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제 입가를 매만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이상해.
 
로에른 A. 니아:(호수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무엇이?
 
이리스 레터:보통은... 죽음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 통제되지 못한 이라는 명제 말고.넌...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야. (껄끄러운 듯,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 그러면 대체 뭘 위해서 살아가는 건데?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고, 무엇에 의미를 두면서... 네 삶을 이어가고 있느냔 말이야.
 
로에른 A. 니아:저도 죽기 싫다는 의사 정도는 있어요. 그게 두렵지 않을 뿐이랍니다. AI, AI 하지만 저를 정말로 기계처럼 보시면 곤란해요. (로에른도 자신이 비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와 가까이 어울리는 이가 전혀 없었으니, 이런 평가를 면전에서 듣는 것도 꽤 간만이다.)
전 이미 제 목표나 추구하는 가치를 여러 번 드러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자꾸만 저에 대해 캐물으시네요. (상대를 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의문이라는 걸 아직 깨닫지 못했다. 만인에게 무관심하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제게 중요한 건 저 자신의 발전이에요.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뛰어나고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러니 끝없이 훈련하고 독서를 하죠.
 
이리스 레터:두렵지 않다는 게, 그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야! 아니, 그래, 나도 농담이지. 진심으로 너를 기계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야. 나와 다르다고 해서 너를 추궁할 자격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
(잠시 입이 다물린다. 그런데?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이렇게 구는 거라고? 하지만 이 말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대체 뭐지? 그리 말한다면, 맞은편에 있는 저 인간은 분명 대답할 것이다. 굳이 왜 그래야 하죠? 하고.)
... 그럼, 네가 생각하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건 대체 뭔데?
 
로에른 A. 니아:제가 그럼 두려움에 벌벌 떨기라도 하기를 바라시나요? (검게 물든 호수의 수면이 찰랑인다.) 끝은 누구에게나 찾아와요. 그 사실을 자각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두려움도 조금은 잦아들지도 모르죠.
저는 타이머니까, 그 질문의 답은 완벽한 타이머와도 일견 비슷하겠네요. 보통 사람들이 타이머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 누구도 잊지 못할 이름을 떨치고, 후대에도 널리 기억될 만한…… 이것도 당신에겐 이상하다고 느껴지시려나요.
 
이리스 레터:아무리 네가 재수 없어도 누가 그런 걸 바란대? 난 그냥... (결국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 건 항상 이쪽이다. 기실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몇 번이고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잖아.
친해지고 싶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넌 또 이해하지 못하겠지. 사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그냥 DOT에서의 생활이 외로워서 그럴 수도 있고,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이 너니까 계속 실망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한데... 근데 계속 신경 쓰이는 걸 어떡해? 너를 알고 싶은 게 이상한 거야? 내가 잘못한 거야, 이거?
그놈의 완벽한 타이머 말고, 로에른에게는 대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은 거라고, 나는.
 
로에른 A. 니아:(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미 거짓 없이 자신의 미래나 원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는데, 왜 자꾸만 그 이상을 물으려고 하고,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하는 거지? 친화력이 많은 사람이란 역시 퍽 성가시다.) 정말로 저를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타이머와 저를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부터 확실하게 알아두시는 게 좋겠네요.
아시겠어요? 이미 각인이 나타난 지 5년이나 되었고, 한창 자아 정체성을 확립할 시기에 제가 배우고 흡수한 건 모두 그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요. 저는 발전해 나가는 저 자신에 보람을 느껴요. 능력을 갈고닦아 더 강한 위력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매체에 저를 추앙하는 내용이 나올 때 만족스러워해요. 당연히 제가 바라는 완벽한 인간상도 그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죠. 저는 각인이 생기길 오래도록 바라왔고, 마침내 나타난 시간의 기적을 놓칠 이유가 없으니까!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당신은 열일곱까지 쭉 7구역에서 지내 오셨죠. 가족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시면서. 그런 당신과 제가 다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지 않아요? 당신이 정말 저를 알고 싶으시다면, 먼저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셔야겠어요.
 
이리스 레터:... ...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인정하기 싫었다. 이상하잖아. 그의 말마따나 평생을 7구역에서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온 이리스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성을 배반한 오만이 계속해서 그것을 이상하다고 규정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애와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가? 대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저 애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그저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건 틀린 일이 아니야. 하지만...)
(결국 얼굴에 열감이 몰린다. 시야가 차츰 흐려지고,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분명 흉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이래서야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논리도 무엇도 아닌 어린애 투정일 뿐이다.) ... 난 그런 거 싫어... ...
난 그냥 너랑 잘 지내고 싶을 뿐인데, 자꾸 선 긋기만 하니까 이러는 거 아냐... ...
 
로에른 A. 니아:네? (갑자기 왜 우는 거지? 성이 났다가도 당황스러움에 가라앉는다.)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친구 같은 걸 바란 적 없고, 혼자가 익숙해요. 그럼에도 당신이 같은 시간의 카운터가 되었으니 제 딴에는 당신에게 나름대로 거리를 많이 좁혀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바라는 친구며, 원하는 선 너머가 어떤 개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당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이리스 레터:... 내가 욕심이 많은 거야. (손수건을 홱 낚아챘다. 눈가를 꾹꾹 눌러 닦는다.) ... 미안. 나도 억지라는 건 아는데, 네가 많이 양보해주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있잖아, 싫어하는 것보다 더 너무한 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거야. 당장 더 원하지는 않을게, 그런데...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것들을 천천히 이야기하면, 그걸 들어보기나 해줄 의사는 있어?
 
로에른 A. 니아: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꼭 짚어서 말해주어야 하나?) 맨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꼈으니까요, 저도.
당신이 쿡쿡 찔러대는 걸 참아주고, 아이 같은 농담에 함께 시시덕거리는…… 그런 것들요?
 
이리스 레터:... (킁, 코를 먹는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났다.) 솔직히 그게 제일 거짓말 같다... ... 농담이야. 아마도.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 7구역에 놀러 오는 것도.
 
로에른 A. 니아:그러니까 먼저 말씀드린 두 개도 해당인 거죠? 들어드릴 수는 있겠지만 제가 행하기까진 쉽진 않겠는데요. (솔직) 당신은 너무 스스럼없어요. 만약 제가 세간에서 명명되는 '친구'라는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지금처럼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은 어려울걸요.
제게 무언가를 바라신다면 당신도 그만큼은 제게 맞춰 주셨으면 좋겠네요. 예를 들어 스킨십을 하기 전에는 먼저 언질을 주신다거나. 아이처럼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행동은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7구역에 놀러가는 건 이미 알겠다고 약속을 한 것 같은데요?
 
이리스 레터:(죄 없는 손수건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눈물이 묻어 조금 눅눅하다.) ... 무, 물론 내가 좀 많이 그런 편이긴 한데... 너한테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해되지 않는다고 선 긋지만 마... 응, 나도 네가 싫다는 건 하지 않을 테니까.
............................................. 저번에 그렇게 되고 당연히 없던 일이 된 줄 알았지... ...
 
로에른 A. 니아:알겠어요. 저도 노력해 볼게요. 이해해보려고 할 테니까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문득 억울해진다.) 평생 규범과 질서를 따라온 사람에게 대뜸 공범자가 되자는 걸 받아드렸던 건 다 잊으신 모양이죠.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런 부탁은 다 듣지도 않고 거절했을 텐데.
그때 일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어요. 당신이 절 다시 초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 정돈 했었네요.
 
이리스 레터:... 그것도 그 직후에 그렇게 되어서 다 말아먹은 줄... ... (눈을 질끈 감았다. 돌이켜보면 죄 본인이 급발진한 기억뿐이다...)
...그럼 이번에는 확실하게 약속하자. 너만 괜찮으면 말이야...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확히는 새끼손가락을.) 내가 무슨 떼를 쓰고, 사이가 얼마나 나빠지든 7구역에 놀러 오는 건 지키는 걸로...
 
로에른 A. 니아:멋대로 제 선을 넘어오실 땐 언제고, 날 선 대화 하나로 전부 없던 일로 만드려 하셨군요? (살짝 황당해한다) 당신은 참…… 뭐랄까, 기분파시네요.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아도 전 지킬 테지만. 그래요. (참 어린아이 같은 제안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리스 레터:그런 말 자주 들어. (고리 건 손을 위아래로 두어 번 흔들고는 놓아주었다.) 네가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이렇게 해둬야 내가 다 망했어, 분명히 취소됐어! 하고 착각을 안 해서...
그... 손수건은 내가 빨아서 돌려줄게. (헛기침이나 하고 어정쩡하게 넘겼다.)
 
로에른 A. 니아:아, 네. (이리스 성격으로 봐선 아주 사소한 다툼에도 다 망했다고 착각할 게 분명하다)
손수건은 가지셔도 돼요.
 
홧홧한 눈가를 바람에 말리며 둘레를 따라 쭉 걷다 보면, [종이를 파는 노인]이 보입니다.
 
[함께 종이꽃을 접는 연인]과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이]도 보입니다.
 
이리스 레터:(그럼 난 땡큐지... 주머니에 손수건을 챙기며, 종이를 파는 노인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얇고 흰 종이를 차곡차곡 쌓아둔 사람은 로에른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이 손짓합니다.
 
노인:어이, 자네들도 꽃을 접고 가게!
 
이리스 레터:어... 저희요? (본인을 가리킨다. 얼떨떨한 목소리다.)
 
노인:그럼 자네들이지. 코마니 호수에 왔음 종이꽃을 접는 게 관례 아니겠어? 자자, 어서들 받아. (마구잡이로 종이를 건넨다)
 
이리스 레터:어, 엑... (제일 받고 싶지 않았던 선물 1위를 받은 사람 얼굴이 된다) 가, 감사...? 합니다...?
 
로에른 A. 니아:(왜 내가 종이꽃을 접어야 하는 거지? 종이를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
 
이리스는 ㅋ 종이꽃을 접나요?
 
노인은 불꽃 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 ... (두뇌풀가동)
그... ... 저희가 지금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요...! 종이는 갖고 있다가 이따 돌아와서 접을게요! (애써... 웃는다!)
 
노인:떼잉, 쯧쯧. 요즘 놈들은 타이머에게 감사한 줄을 모른다니까. (대놓고 혀를 찬다.)
 
이리스 레터:(하지만 노인분... 지금 제 옆에 있는게 그 타이머입니다...)
에, 에이~. 물론 감사하죠! 그... (차마 옆사람한테 그치? 라고는 하지 못하고, 하늘을 잠시 바라본다...)
... 정말로요! 이따가 진짜로 접을게요! (자리를... 뜨자!)
 
노인이 혀를 차는 소리를 뒤로하고 후다닥 자리를 뜹니다.
 
로에른 A. 니아:(한숨을 쉰다.) 성가시네요.
 
이리스 레터:그러게, 호수 근처라 유독 더 그런가... (빠르게 자리를 뜨면서, 함께 종이꽃을 접는 연인에 우연히 눈길이 간다.)
 
데이트 중인 연인 같습니다. 종이꽃을 접고, 검은 호수에 띄워 보내는 동안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네요.
 
<듣기> 판정
 
이리스 레터:(어우...)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연인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어때. 예쁘지?”
 
“우리 자기는 손재주도 좋지. 그래도 자기가 더 예뻐.”
 
“아이,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입니다. 아, 그래요. 타이머의 죽음을 추모한다니 뭐니, 다 그럴싸한 명분인 거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도 꽃을 띄우며 진심으로 슬퍼하거나 울지 않습니다.
 
이리스 레터:총체적으로 유쾌한 장소가 아니긴 하네. (짧은 감상을 덧붙였다. 관광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 이건 그냥 버리고 올까? (방금 전 받은 종이를 달랑 들었다.)
 
로에른 A. 니아:제가 썩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좀 아시겠나요? (근처의 쓰레기통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종이를 버렸다.)
 
이리스 레터:(따라서 종이를 버렸다.) 완전히 이해했어. 하기사... 이런 곳은 보통 의미야 뭐가 됐든 보기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그랬고.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 가 저렇게 난간에 매달려 있어도 괜찮은 건가?)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눈이 마주쳤나? 의심했을 때, 아이가 먼저 말을 겁니다.
 
아이: 아빠를 만나러 왔어요. 수도에서 일하시거든요.
 
이리스 레터:응? 아아... (애 보니까 또 표정 풀어짐) 하지만 축제 기간에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걸. 아빠는 잘 만났어?
 
아이: 아직요. 일이 바쁘시대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에서요.
 
아이는 앳된 얼굴로 당신과 로에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퍽 친밀하게 굽니다.
 
아이: (눈을 내리뜨곤) 오빠, 타이머지요? 옆의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 알고 있어요.
 
이리스 레터:(헐;)
 
아이: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에리카! 위험하다고 했잖아. 어서 이리 와!”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챙겨서 끌고 갑니다.
 
로에른 A. 니아:……뭘까요. 방금 그건.
 
이리스 레터:... (얼떨떨...)
어... 어디서 도시괴담 같은 거라도 잘못 들은 모양이지. 그런 거 많잖아.
 
로에른 A. 니아: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고 다니다니. 교육을 잘못 받은 모양이죠. (노빠꾸 패드립)
 
이리스 레터:허억.......................
 
로에른 A. 니아:아무튼 잊어버리세요.
 
이리스 레터:(패드립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애가 했던 말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냥 얼떨떨해진 채로 남았다.) 어... 응...
 
어느덧 하늘이 슬금슬금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댕, 댕, 댕…… 광장의 시계탑이 울어댑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입니다.
 
즐거웠나요? 행복했나요?
 
혹은, 설렜나요?
 
이리스 레터:(일단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내 손에 남은 건 다섯 프뤼나의 인형 뿐...)
 
하나는 어디 갔어
 
이리스 레터:(여섯이지 참...)
(반대쪽 옆구리에 있었다고 치자.)
 
반대쪽에 끼어있었군요
 
어떤 시간을 보냈건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저 멀리 DOT의 꼭짓점이 보입니다. 우리가 떠나온,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이리스 레터:그래도... (시계탑 방향을 슬쩍 바라보면서, 즐거운 듯 아쉬운 듯 미묘한 헛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나오니까 확실히 좋네. 재밌었어.
 
로에른 A. 니아:즐기셨다니 다행이에요. 아…… 당신의 가족은 결국 발견하지 못한 것 같지만.
 
이리스 레터:그건 뭐...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이렇게 많은걸. 이런 날은 미리 약속이라도 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게 정상이야.
어차피 곧 연락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때 가서 실컷 이야기하면 돼. (옆구리에 끼고 있던 프뤼나 인형 하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로에른 A. 니아:인형은 왜 흔드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애써 외면함) 이만 돌아가요.
 
이리스 레터:네 머리맡에 둘 인형이라서. (농담이다.) 솔직히 재미없을 것 같은데... 가긴 가야겠지, 전시회.
 
로에른 A. 니아:참 싫네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타이머 전이니 저희가 빠질 수는 없겠죠. 아마 부관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이리스 레터:너 닮은 부관님 말이지... (지나가듯 덧붙이고는, 앞장서서 쓱 걸어갔다.)
 
시곗바늘이 아래로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모두 로비에 모였습니다.
 
눈대중으로 인원을 헤아린 리슬러 부관은 서류철에 무어라고 적었습니다.
 
아마 전원 출석했다거나, 문제없음, 이런 걸 쓴 거겠죠.
 
리슬러 부관:타이머 展은 내일, 축제 마지막 날에 정식 개장합니다.
오늘 군들에게 먼저 시간을 내준 것은, 정식 개장 후 방문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죠. 꽤 많은 사람이 몰려오리라고 예상 중인데……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러분에게’ 위험하잖습니까.
 
무해한 국민이라도, 타이머에게 집요한 팬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곳을 놓칠 턱이 없죠.
 
카운터의 존재가 소개된 후에는 훨씬 더 유난스럽게 들끓을 거라고, 무미건조한 우려가 덧붙었습니다.
 
리슬러 부관:공식 일정이라곤 했지만, 견학에 지나지 않으니 가볍게 다녀오면 됩니다.
 
개인으로서!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묻는 시선이 뺨에 달라붙습니다.
 
설명을 끝낸 리슬러 부관이 자리를 비킵니다.
 
서관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너머에선 하인리히 장교가 몇몇 연구원이나 일반 군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슬러 부관이 앞서 걷자, 곧 어른들이 먼저 DOT를 벗어났습니다.
 
전시관은 DOT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립되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기도 우스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검은 철창을 넘어, 아침에 걸었던 야트막한 내리막길을 다시 걷자면,
 
“타이머다.”
 
“하인리히 장교도 있어.”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말이 도화선이 되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아침보다 선명한 시선이 따라옵니다.
 
호감, 호의, 온갖 곱고 귀한 것들을 모아 가루를 낸 것처럼 부드러운 시선들이…….
 
“그런데, 쟤네는 누구야?”
 
채 떨어지기도 전에, 누군가 묻습니다.
 
“그러게. 저런 교복도 있었나?”
 
“본 적 없는데. 다음 기수의 타이머 아냐?”
 
“그럴 리가 있어? 타이머는 한 세대에 하나뿐이잖아.”
 
“그럼…… 타이머의 부관이라던가?”
 
질문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꼬리를 잘라, 계속해서 새로운 꼬리가 돋아납니다.
 
타이머의 근처에서 걷는 카운터의 존재가 퍽 이질적이었던 모양이에요.
 
하긴,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하죠. 시선은 어느새 호기심이 점철되고,
 
“오, 오, 오빠!”
 
소란 사이로 톡 튀어나온 것은 어린 목소리였습니다.
 
어딘가 낯익은 여자아이 둘이 앞을 막고 두 사람을, 아니, 정확히는 로에른을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쌍둥이처럼 차려입은 아이들은 처음 보는 상대였지만 낯이 익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결벽적일 만큼 깔끔하게 단장한 옷매무새나 짧은 은빛 가발이 척 봐도 로에른을 흉내 낸 꼴이었으니까.
 
다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에른처럼 꾸며 달라며 부모를 신나게 닦달했겠지, 싶을 정도로 쏙 빼닮았습니다.
 
로에른 A. 니아:(무감한 시선을 아이들에게로 내린다.)
 
무려 타이머의 시선이 향하자 두 뺨을 발갛게 붉힌 아이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장미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꽃송이가 활짝 만개한 푸른 장미입니다.
 
로에른의 근처에 선 이리스에게도 성큼, 장미 향기가 다가옵니다.
 
로에른과 이리스에게 각각, 장미를 건넨 어린 눈동자들은 오직 두 사람이 그것을 받아주기를 바라며 간절함으로 반짝거립니다.
 
자, 어떻게 할까요?
 
이리스 레터:앗... (로에른을 흉내냈는데 어떻게 귀여울 수가 있지? 흐물흐물 웃으며 허리를 숙여 주었다. 자신에게 건네진 장미 다발을 향해 손을 뻗는 동시에, 로에른은 어떻게 하는지 살핀다.)
 
로에른 A. 니아:고맙지만 원칙상 선물은 받을 수 없어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반면 무표정으로 딱 잘라 거절한다. 말투는 평소보다 부드럽게 하려고 애쓴 것 같긴 하다만, 원체 차가운 편이라 그리 다정히 들리진 않는다.)
 
이리스 레터:...이런 장미도 안돼? (조용히 속닥이며 물었다.)
 
로에른 A. 니아:괜한 후환을 만들지 않으려면 뭐든 거절하는 게 좋죠. 그런데 이미 당신은 받아버렸군요.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췄다.)
가족 같으니 한 명의 꽃다발만 받을 수도 없고…… 당신이 제 것까지 대신 받아주시겠나요.
 
이리스 레터:애들이 주는 선물인데 무슨 후환이 생기려고? 좋아, 어차피 지금 내 신분으로는 받아도 괜찮을 것 같고... (로에른의 몫까지 제가 받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이 예쁜 장미들은 언니가 오빠한테 전해줄게. 고마워!
 
이리스가 기껍게 꽃다발들을 받아들자,
 
누군가 총성을 울린 것처럼 하나둘 선물과 이야기를 안겨주기 시작합니다.
 
아직 따뜻한 애플파이, 빨간 풍선, 손수 엮은 사탕 목걸이와 흰 리본을 묶은 파란 장미 수십 송이. 구름보다 커다란 솜사탕이라거나 갓 짠 우유와 치즈까지!
 
이리스 레터:우와아아아악!
 
누군가 이리스의 목에 사탕 목걸이를 걸어주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또 다른 누군가가 로에른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구먼!”
 
꺄악, 꺄아악. 환호성도 끊이지 않습니다.
 
인산인해. 그야말로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낱말과 단어로 구성된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올해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를! 더 평온한 내년이 찾아오기를!”
 
누군가 예언의 타이머, 메레디스를 끈질기게 쫓아오며 소리칩니다.
 
“세계 멸망이란 게, 진짜인가? 무언가 신의 계시를 받지 못했냐고?”
 
“자네들만 믿고 있어. 우리는 언제나 그래.”
 
언니, 오빠, 형, 누나! 저기요! 타이머! 온갖 호칭이 물거품처럼 귓가에 스칩니다.
 
대답을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질문과 호의가 꽃가루처럼 허공을 떠다녔습니다.
 
그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것은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는 것처럼 향기로웠어요.
 
향기로웠지만, 숨을 쉬기 어렵단 점에서도.
 
“그런데, 옆에는 누군가?”
 
순간, 바람이 불었습니다.
 
희고 고운 바람과 함께 쏴아아, 파도 소리 같은 것이 일렁이고 줄에 매달린 것들이 일제히 몸을 흔듭니다.
 
꽃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것처럼 시선의 일부가 카운터를 향합니다.
 
“처음 보는데, 역시 부관을 들이기로 한 건가?”
 
곤란한 질문이 당도합니다.
 
로에른 A. 니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조금은 질린 낯으로, 누구의 인사나 응원도 받아주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리스 레터:(시선이 빙글빙글 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그냥 처음 받은 장미로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택한다... ...)
 
주의받았던 대로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걸음만 옮기던 그때,
 
잠깐의 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듭니다.
 
리슬러 부관:잠시만요.
 
리슬러였습니다.
 
리슬러 부관:지금 다음 장소로 이동 중이라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기계적으로 모든 질문에 대응한 그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눈짓했습니다.
 
1. 침묵하고 무시로 일관할 것, 2. 어떤 이야깃거리도 흘리지 말 것, 3. 최대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날 것.
 
지금 필요한 것은 3번이겠군요.
 
이리스 레터:(빠르게... 걷자...!!)
 
흰 돌이 깔린 바닥을 밟습니다.
 
건물 사이사이로 난 골목과 도로는 아주 깨끗했습니다. 캐러멜 냄새가 설탕 냄새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시끌벅적한 인파를 물리치며 걷는 사이 점점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도 하인리히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거리가 꽤 벌어졌던 걸까요.
 
리슬러 부관:받아주지도, 대답하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발 뒤에서 쫓아온 리슬러 부관이 한숨을 섞어 책망합니다.
 
하지만 그도 쉽지 않은 일임을 아는지 크게 탓하진 않네요.
 
이리스 레터:애들이 너무 기대하고 쳐다보길래... (꿍얼거리며 변명 시~작)
어린 시절의... 그 뭐야, 우상...? 히어로...? 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그리고, 기세 좋게 헛소리를 했다.)
 
리슬러 부관:네, 세계가 군들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이상입니다. 그러니 가끔은 깨트릴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보여주는 거죠. 그건 나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닙니다. 그저…… 필요한 일일 뿐.
 
골목을 완전히 내려간 후에는 광장을 가로지르는 대신 옆의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도로에는 사람들이 없어 한적합니다.
 
술에 취한 이들이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떠들긴 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어요. 드물게 지나가는 차량의 창문이 열리고,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손을 흔들곤 했습니다.
 
타이머를 알아본 거겠죠.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곳곳에서 타이머를 부르고, 외치고, 눈짓하고, 손짓하며, 끌어당깁니다.
 
단순히 개인을 향해 쏟아지는 호의와 호감이라기엔 지나치게 두터운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본 일련의 광경은……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무척 낯선 풍경이었죠.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 와보는 곳이잖아요.
 
이리스는 어떤 감각을 느낍니다. 기시감일 수도, 괴리감일 수도 있습니다.
 
리슬러 부관:(손목시계를 확인하곤 앞서 걸었다.) 딱 맞춰 도착했군요.
 
도밍게즈의 달은 휘영청 밝기만 합니다.
 
하늘에 뜬 달이 너무 밝아서, 전시관이 아니라 달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검은 하늘에는 소원 대신 별이 떠서, 흰 별이 촘촘하게 달려 있었고요.
 
그 밤, 걷는 길은 왜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던가요.
 
감상과 달리, 실제로는 도로를 따라 오 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도요.
 
전시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나치게 익숙한 생김새였습니다.
 
DOT의 본관을 본떠 지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거든요.
 
마중을 나온 전시관의 담당자가 “일부러 그렇게 지었습니다.” 간결한 설명과 함께 하인리히 장교의 옆에 섰습니다.
 
본관의, 아니, 전시관의 문을 넘기 위해 얕은 계단을 오르려던 하인리히 장교가 문득 멈춰섭니다.
 
하인리히 장교:이런. 주인공들이 먼저 들어가도록 양보해야겠군.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아까 나섰던 문과 꼭 닮은 문이 보입니다.
 
좌우로 나뉜 문은 청동으로 빚고 남색으로 덧칠했는데, 무척 크고 두꺼웠습니다.
 
상당한 무게를 자랑했지만, 누구도 문을 여느라 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어요. 언제나 열린 문이었으니까.
 
DOT의 모든 건물은 현관을 닫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통입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공간은 단절되지 않는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전시관은 생각보다 더 정교하게 베껴다 둔 것 같군요.
 
이리스 레터:(이렇게까지 빼다박아야 했던 이유가 있나? 의아함을 느낀다. 어째 아까부터 영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기웃거리며 걸었다.)
 
열린 문 너머로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익숙한 로비가 펼쳐집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DOT의 본관처럼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합니다.
 
타닥타닥, 바닥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립니다.
 
다른 점이라면…… 안내 데스크에 아무도 없단 걸까요. 그야, 전시관의 근무시간은 DOT보다 훨씬 짧고, 일찍 끝날 테고.
 
뒤에서 어른들이 느긋하게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잘 만들었군.”
 
“장교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저희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둘씩 나란히, 복도를 거닙니다.
 
이렇게 걷자니 첫 만남이 떠오릅니다.
 
영문도 모른 채 걸었던 복도, 괜스레 뛰던 심장, 수런거리던 목소리, 그리고……. 문 너머의 상대.
 
그러나 이곳은 DOT가 아니고, 두 사람은 이미 만났습니다.
 
:벽 좌우에는 섬세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해와 달이 뜬 하늘과 끝을 알 수 없는 넓은 바다, 희고 고운 모래사막, 얼어붙은 땅과 바람이 머무는 들판. 곳곳마다 열네 개의 기둥이 서 있습니다. 신의 손가락이건, 최초의 시곗바늘이건, 혹은 그 둘 다일 기둥들이. 기둥 아래에 진 그림자가 유난히 캄캄합니다. 섬세하게 신경을 쓴 티가 났습니다.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은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해가 떴는가, 달이 떴는가의 차이입니다. 왼쪽 복도는 아침을 맞은 세계였고 오른쪽 복도는 저녁을 맞은 세계였거든요.
 
하인리히 장교:이 그림은 세계를 상징하기에 앞서 하루를 상징한다네. 하루는 아침과 저녁, 둘로 나뉘어 있지 않은가.
 
뒤따라오던 하인리히 장교가 아는 체를 합니다.
 
열네 개의 구역을 따라 그린, (정확히 말하자면 구역의 최초, 첫 모습을 그렸을) 벽화가 끝나자 전시관의 입구가 펼쳐졌습니다.
 
문은 세 개입니다.
 
전시관Ⅰ. 구원의 시간
 
전시관Ⅱ. 쌓여온 역사
 
전시관Ⅲ. 지나간 생애
 
문에는 각각 패널이 붙어 있습니다. 원하는 곳부터 둘러보면 됩니다.
 
이리스 레터:(줄지어 다니는 게 아닌가? 슬쩍 눈치를 봤다.)
 
페어들은 각각 원하는 곳으로 흩어집니다.
 
자유롭게 관람합시다!
 
이리스 레터:원래 이런 전시관은...
물론 난 교양이 좀 부족한 편이지만.
아무튼 순서대로 보는 편이 좋댔어.
 
로에른 A. 니아:전시의 목적이나 의도에 따라 다르지만. 그렇게 해요.
 
이리스 레터:그랬어? (몰랐어 얼굴 됨)
하지만 뭐든 숫자 순서대로 가는 편이 속 편하잖아. (1번 전시관으로 저벅저벅...)
 
:천장과 벽을 모두 남색으로 칠한 곳에는 흰 석고로 빚은 조각상들이 서 있습니다. 조각상의 수는 스물네 개입니다. 두 명의 사람이 한 쌍을 이루는 구조입니다. 하나하나 섬세하게 조각한 것으로 유려한 곡선이 진짜 사람 같습니다.
 
이리스 <관찰> 판정 (어려운 성공)
 
이리스 레터:(씁........)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57
판정결과: 실패
(머리를 긁는다.)
 
무엇에 조각을 했는진 몰라도,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습니다.
 
조각상은 전시관 곳곳에 배치된 구조로 시곗바늘의 방향을 따라 걸으면 차례대로 살필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중앙에는 [높은 탑]이 서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되게 잘 만들었다, 이거. (평범하게 감탄하면서, 높은 탑에 다가갔다.)
 
하나의 거대한 석고를 깎아 만든 탑으로 그저 새하얗습니다.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입니다.
 
<교육, 지능, 예술, 역사> 중 택 1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다른 걸로 다시. 다시해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
 
R E T R Y
 
이리스 레터:(머리에 힘을 준다...)
(비록 내가 수업시간마다...)
(...열심히 졸았거니...)
교육
기준치: 60/30/12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
 
너무 졸았잖아
 
이리스 레터:(머리를 긁는다)
 
로에른 A. 니아:
교육
기준치: 80/40/16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리스 레터:(와똑똑해)
 
로에른 A. 니아:(탑을 올려다본다.) 오벨리스크네요.
 
이리스 레터:오벨리스크? (난생 처음 들어보는 얼굴 함)
 
로에른 A. 니아:고대에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탑인데, 비슷한 모양의 탑들도 으레 그렇게 부르게 됐죠.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바닥으로 드리우면, 꼭 시침 같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조각상들은 각자의 시간에 맞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제1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유리구슬이 쏟아진 바다에 선 조각상.
제2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불붙지 않은 성화에 화살을 겨눈 조각상.
제3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세계수라 부를 법한 커다란 고목 아래 선 조각상과,
제4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번개를 쥐고 휘두르는 조각상.
제5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얼음처럼 투명한 유리 속에 갇힌 조각상이라든가,
제6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발아래 온갖 동물을 거느린 조각상.
 
:제7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유일하게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리는 조각상도 있었고,
제8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꿈을 꾸듯 눈을 감은 조각상도 있었으며,
제9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발아래 해골을 쌓은 조각상.
제10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각각 허공과 구덩이 안에 서 있는 조각상과,
제11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조각상.
제12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차마 잊지 못한 무언가를 돌아보는 조각상……
 
정확히 열두 개. 시작과 끝이 없는 불완전한 조각상들이 서 있습니다.
 
석고로 빚었다지만 온전히 하얀 것을 제외하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것의 얼굴은,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1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로에른도, 이리스도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계가 바라고, 열망하는, 가장 완벽한 구원자의 모습이 그곳에 서 있을 뿐입니다.
 
이리스 레터:헤... (조각상들을 살펴본다. 글쎄...) ... 그런데 0시랑 13시는 없는 건가?
 
로에른 A. 니아:안 만들어두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보통 시간은 12시간 단위이니 그걸 표현하려 1시부터 12시까지만 한 곳에 둔 건가……
 
이리스 레터:이건 0시랑 13시 차별이야. (정말 어디 다른 데 있나? 조각상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리저리 둘러본다.)
 
일단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다음 관에 두었을 수도 있으니 우선은 넘어가볼까요?
 
이리스 레터:(없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다음 관으로 넘어간다.)
 
다음 관으로 떠나기 위해 걸음을 떼는데, 무언가 앞을 막아섭니다.
 
<행운> 판정
 
이리스 레터:
기준치: 52/26/10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하게 이마를 부딪치고 맙니다.
 
이리스 레터:아야!
 
로에른 A. 니아:저런. 조심하세요.
 
문 좌우에 태양과 달을 끌어안은 조각상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어찌나 반질반질하게 닦아두었는지 지독하게 투명해서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제0시와 제13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분명합니다.
 
0과 13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수. 그럴싸한 연출이네요.
 
이리스 레터:... ...
 
로에른 A. 니아:차별은 아니었네요.
 
이리스 레터:아무리 그래도 너무 숨겨놨잖아?!
너무 투명하잖아?! 나같은 관람객이 분명 나올 거라고?!
 
로에른 A. 니아:이렇게 문 옆에 있는걸요. (약간 재밌음)
안내판 정도는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나 공을 들였으니 누가 맞고서 뇌진탕이라도 오는 게 아닌 이상 그냥 둘 것 같기도 하지만. (먼발치의 하인리히 장교를 흘끗 바라본다)
 
이리스 레터:내가 뇌진탕에 걸렸다고 주장할 거야. (부딪힌 곳을 만지작댄다. 복수하리라.)
...혹 생기진 않겠지?
 
로에른 A. 니아:글쎄요. 그건 가 봐야 알겠죠. (근데 생겨도 앞머리로 가리면 되지 않나?) 만일 상태가 안 좋다 싶으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이리스 레터:(전부터 자꾸 핵심을 찌르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라.) ...그냥 엄살 좀 부려봤어. (다시 걸었다. 대신...)
(이번에는 묘하게 허리를 구부정하게 해서 걸어나갔다.)
 
로에른 A. 니아:(반면 그냥 곧게 서서 뚜벅뚜벅 걸었다)
 
전시관Ⅱ의 내부는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암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요!
 
이리스 레터:(침침...)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고, 전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흘러 내렸습니다.
 
때마침 스크린에는 어떤 영상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리슬러 부관:시청각실이에요. 타이머와 관련된 뉴스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따위를 볼 수 있죠.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생략할 겁니다. 원한다면 수업 시간 중 여유가 있을 때 틀어달라고 요청해두죠.
 
얼핏 스쳐본 영상에는 낯익은 얼굴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로에른과 이리스입니다.
 
무언가 이상합니다. 뉴스, 애니메이션 따위라고 했는데, 저건 진짜 우리잖아?
 
때마침 영상 속 이리스가 입을 엽니다.
 
이리스 레터:[아... ... 안녕?]
 
맙소사! 로에른과 이리스가 처음 만났을 때예요. 언제 촬영한 거야?!
 
이리스 레터:엥??!??!
 
로에른 A. 니아:(이마를 짚는다.)
 
이리스 레터:(말없이 스크린을 손가락질한다.) 저... 저...!!! 저...!!!
저게 왜 찍혀 있는 건데요??!?!
 
하인리히 장교:타이머와 카운터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관심을 끌지. 문제가 없는 수위로 편집해서 내보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이리스 레터:(문제 있잖아, 내 사회적 위신, 내 사생활, 아무튼 전부 문제잖아 지금)
(그냥 천장을 본다.) ...
... 우리 방엔 cctv 없는 것 맞지?
 
로에른 A. 니아:네. 없어야죠. (심기가 뒤틀려서 목소리도 싸늘해졌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라지만. (생각해보면 타이머의 이름을 떡하니 붙여둔 전시회에 저희의 영상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대외 활동도 아니고, DOT 내에서 찍힌 장면이라니.)
제 본명은 제대로 묵음처리하셨겠죠? 최소한의 신상은 지켜 주셔야죠.
 
하인리히 장교:그쯤이야 당연히 알아서 처리했지. 걱정할 것 없네.
 
이리스 레터:(와... 당당하다, 라고 생각했다.) ...이거 이상으로 뭐가 더 나오지도 않는 거죠?
 
하인리히 장교:자네들이 회의실을 나서기 전까지의 영상만 내보내고 있다네.
 
이리스 레터:... ... (그때 뭐했더라? 잠시 회상해보다가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새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변화도 참 빨랐다.)
내 사생활................ (힘이 쪽 빠진 목소리로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어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새삼스럽단 식입니다.
 
아무튼 어른들이란!
 
로에른 A. 니아:포기하고 다음 전시관이나 보러 가죠. 여긴 이 지긋지긋한 영상밖에 없나 봐요.
 
이리스 레터:젠장, 언젠가 장교님의 사생활도 폭로하고 말겠어. (또 한 번 복수를 다짐하며 다음 전시관으로 간다.)
 
턱 없는 문을 넘어서자 전시관Ⅲ의 내부가 훤히 보입니다.
 
복도가 없고, 벽도 없는 전시관Ⅲ은 한눈에 모든 곳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천장이 무척 높아서 고개를 다 들어도 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이라면…… 전면의 [액자]들일까요.
 
이리스 레터:...높아! (목을 거의 뒤로 넘어갈 듯 한 번 젖혔다가 돌아오며 액자들을 바라본다.)
 
흰 액자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입니다. 어찌나 개수가 많은지 한 벽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세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였어요. 수백, 수천 개는 되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액자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걸려 있습니다.
 
역대 타이머.
 
여태까지 우리가 나고 자라며, 혹은 책과 영상을 통해 보았던 이들의 사진이 액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까마득하게 기억나지 않는 얼굴도,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얼굴도 있습니다.
 
장교를 비롯한 어른들은 짧게 묵념합니다.
 
하인리히 장교:이곳에는 타이머의 사진이 걸릴 예정일세. 죽은 이들을 잊지 않도록.
 
천장이 유난히 높더라니. 1대, 2대쯤 되는 이들의 얼굴은 까마득해서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사진 속에 갇힌 얼굴들은 하나같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서로간에 닮아서가 아니라 모두 타이머라서. 사진이란 피사체를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담는 법이니까.
 
……조각상과 마찬가지예요.
 
아래쪽의 빈 액자들에 시선이 닿습니다. 아마 저 중에는 우리의 액자가 될 것도 있겠지.
 
언제가 될까? 평균 연령이 반백 살이라지만, 어디까지나 통계입니다.
 
사진 속에는 상당히 앳된…… 또래의 얼굴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이라는 건 결국……
 
당장 내일, 새로운 부품으로 갈아 치워질지도 모르는 운명인 거였죠.
 
이리스 레터:(성숙한 얼굴들보단, 앳된 얼굴들에 더 오랜 시선이 머무른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희생되어야만 유지되는 세계라는 건...)
어쩐지 싫네. (조용히 읊조렸다.)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서는 시간을 보낼수록 복잡한 마음만 드는 법이다. 조금 서둘러 앞장서 걸었다.)
 
로에른 A. 니아:(저들 모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급작스러운 끝을 맞이했겠지. 그것이 제 미래가 되리라 생각하면 역시 코마니 호수를 보았을 때처럼 달갑진 않다.)
 
고개를 돌리자,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이미 자리를 비켰습니다.
 
전시관을 모두 살피고 돌아 나오면,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문]이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응...? 로에른, 저기 봐봐.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원래 저기에 문이 있었나?
 
로에른 A. 니아:음……? (이리스가 가리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내 데스크 옆에 딸린 문은 특이하게도 아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데, 철제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장미가 덮여 있습니다.
 
장미 향기가 전시관의 바닥으로 가라앉습니다. 죽음을 추모하는 것처럼.
 
어른들은 이미 보여주기식의 묵념을 마치고 다음 전시관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고,
 
남아있는 것은 미래를 목격한 아이들뿐입니다.
 
이리스 레터:저기, 저거. 아치 모양의 문. 저렇게 요란한데, 아까는 왜 못 봤지?
 
로에른 A. 니아:저 정도로 파란 장미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면 못 볼 리가 없는데.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한 걸까요? ……어떤 조건을 만족했을 때 열리는 특별한 이벤트 같은 건가.
 
이리스 레터:한 번 가볼까? 어차피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로에른 A. 니아:그래요. (간결하게 답하곤 걸음을 옮겼다.)
 
장미는 활짝 만개한 탓에 내일이면 시들기 시작할 것 같았습니다.
 
밤 내내 화려하게 피어있다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꽃잎을 떨구겠죠.
 
지금 우리가 가장 아름다울 때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아치문 아래에 섰을 때였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자네들, 거기서 뭐 하는 건가?
 
하인리히 장교가 우리를 부른 것은.
 
목소리는 분명히, 등 뒤에서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하인리히 장교와 리슬러 부관, 그 외 일행들은 입구 근처에 서 있었습니다. 마치……
 
그곳으로 나가려는 것처럼.
 
이쪽은 보지 않는 건가?
 
이리스 레터:네? 그야... (멈춰선 채, 아치문 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문이 있어서요. 혹시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인가요?
 
아치문을 가리켜며 돌아보자,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하인리히 장교:거긴 아무것도 없어. 뭣들 하나, 이만 돌아가야지.
 
흰 벽이 시야를 가립니다. 새파란 장미도, 은색 아치도 없는 평범한 흰 벽.
 
이상한 일입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환각인가? 싶지만 제8시의 타이머와 카운터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도 모두 이 광경을 목격한 거예요.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걸까요?
 
바깥에선 어른들이 “빨리 나오라”며 우리를 재촉합니다. 이리스, SanC (0/1)
 
이리스 레터:어어? ...분명 여기 있었는데? (벽을 더듬더듬...)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로에른 A. 니아:여기에 파란 장미로 장식된 아치문이 있었습니다. 전시회의 일부인 줄 알았는데요.
 
어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딱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파란 장미라니 도밍게즈의 국화가 아닌가. 길한 일이 있으려는 걸지도 모르지.
 
하인리히 장교는 오히려 반기는 모양새였습니다.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니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리스 레터: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역시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이리스 레터:... 단체로 환각을 봤을 리도 없잖아. (로에른에게 살짝 속닥이면서도, 우선은 장교의 말을 따라 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로에른 A. 니아:타이머와 카운터에게만 보였던 걸까요? 의미를 모르겠네요. (미련없이 장교들에게로 걸어갔지만, 의문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관람은 끝났고, 조각에 불과한 타이머와 카운터에게 이별을 고할 때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돌아갈 시간입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잊을 수 없는 장미 향기가 발목을 붙잡습니다.
 
타이머의 상징은 그저 시간일 텐데, 이곳의 시간은 멈춘 듯했고 오히려 때 이른 장미만 만개했습니다.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름도 뭣도 아닌 계절에 핀 장미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기적의 상징이었어요.
 
전시회를 벗어나, 도로를 걸어, 달에서 멀어지는 동안 때마침 광장의 시계탑이 정각을 알리며 울어댔습니다.
 
밤이 깊어 하늘은 어두컴컴합니다.
 
우연일까?
 
혹은 이 또한 어떤 운명인가?
 
그런 생각에 빠진 두 사람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따위 알지 못했습니다.
 
내일의 ‘그 일’이 훗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도 알 수 없었어요.
 
만약 알았더라면……
 
오늘의 우리는, 결단코 그 문을 열어젖혔을 테니까.
 
축제가 한창입니다. 거리는 떠들썩하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하늘은 구름과 흰 새, 손수건과 종이 가루 따위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타이머의 교복, 제복과 비슷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유난히 많습니다.
 
희고 고운 색으로 점철된 세계란 어찌나 완벽한지.
 
땅거미가 건물을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하늘은 딱 좋은 색으로 물듭니다.
 
오렌지 마멀레이드처럼 윤기가 도는 주황색이었습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구름은 어렴풋하게 사라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래,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꼭 그랬어요.
 
수도의 광장에는 커다란 무대가 설치됐습니다. 매해 이맘때쯤이면 설치하고 철거하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르내리는 흰 차양이 비스듬하게 하늘을 가립니다.
 
가장 어두운 밤이 찾아오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가라앉는 시간을 기다리며.
 
“언제 시작한대?”
 
“곧 시작할걸. 이제 10시잖아.”
 
“나 너무 기대돼.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객석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습니다. 어느 곳이랄 것 없이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무대 뒤편에 서 있는 타이머와 카운터의 귀에도 그들의 소리가 확연히 들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존재가…… 이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네, 오늘은 바야흐로 축제의 마지막 밤.
 
타이머의 존재를 드러내고, 카운터의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입니다.
 
‘사이좋은 파트너’의 모습을 연출하라고 내내 요구받은, 그 순간이에요.
 
인이어를 귀에 걸고,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이런저런 상황을 살핀 스태프 하나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스태프: 준비됐나요?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들 물릴 수도 없었지만.
 
이리스 레터:(이리스 레터. 그는 타고나기를 외향적이었고, 겉보기에는 꽤 관심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느, 네, ... 네!! (심하게 손을 떨고 있다.)
 
로에른 A. 니아:(반면 이 무대도 벌써 다섯 번째인 로에른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다. 첫 번째 무대였다 해도 그가 긴장을 느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침착해요. 올라가서 선보이기로 한 이능력, 기억하고 계시죠? (어제도 짬을 내어 훈련을 하고 왔다)
 
이리스 레터:그건 기억하고 있지. 그, 그런데... 내가 실수하면 어떡해? 거기서 손이 삐끗한다거나, 사람들 소리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져서... 공중에서 그걸 냅다 폭발시키면 어떡하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31편 정도까지 연재되고 있었다.)
 
로에른 A. 니아:당신……. 이런 무대도 즐길 줄 알았는데. (평소의 깨발랄한 모습과 지금의 초긴장하는 모습을 겹쳐 보니 어째 어이가 없어진다.)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저기에 당신만을 보며 환호할 사람들이 천지인데요.
 
이리스 레터:그거랑 그거랑은 다르지!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이, 이런... (손을 휘적거리며 무언가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1:1로 교류가 불가능한 불특정 다수의 관심은 사양이라고나 할까,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
 
로에른 A. 니아:이상한 데서 까다로우시군요. 쓸데없는 걱정은 마세요. 과정이 좀 틀어진다고 해도 제가 커버해드릴 테니까.
 
이리스 레터:내가 인명사고를 내면... (최악의 시나리오 32편)
 
로에른 A. 니아:그냥 생각을 멈추세요, 레터.
 
이리스 레터:응. (멈췄다.)
 
스태프: (한편 바삐 움직이느라 두 사람이 뭔 얘기를 하는지 관심도 없다.) 신호하면 제0시부터 순서대로 나오면 돼요. 두 사람이 함께 나와야 하고, 되도록 친한 티가 나게. 친밀하게. 무슨 뜻인지 알겠죠? 손이라도 잡으면 더 좋고요.
 
스태프는 카메라는 정중앙의 2번을 보라던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사회자의 지시를 잘 따르기만 하라는 시시콜콜한 조언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리스 레터:(왜 하필이면 우리가 0시인가? 괜히 제 시간의 각인까지 원망했다. 그래도 말은 잘 들어야지 어쩌겠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로에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돼?
 
로에른 A. 니아:잡으면 마음이 좀 놓이겠나요?
 
이리스 레터:쥘 게 있으면 확실히 좀 나아질지도?
 
로에른 A. 니아:그래요, 그럼. 대신 지금 말고 무대에 올라갈 때 잡아드릴게요. (손을 살짝 잡았다가 다시 원위치시켜준다)
 
무대 뒤편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이 화려한 쇼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거든요.
 
이곳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 어느 곳보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위한 자리인데, 우스울 뿐입니다.
 
시곗바늘도 평소처럼 움직입니다. 하나, 둘, 셋…….
 
공연 시작인 10시까지는 채 3분이 남지 않았습니다.
 
무대로 올라가는 문을 통해 환한 조명이 떨어집니다.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가득한 곳에서, 옆에 선 사람의 존재감만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들뜨기 시작한, 혹은 긴장하기 시작한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었을 때,
 
스태프: 자, 이제 시작합니다. 제0시 페어부터 올라오세요.
 
스태프가 손짓했습니다.
 
두 사람이 첫 번째 순서입니다.
 
이리스 레터:(죄없는 자기 옆머리만 죽죽 잡아당기고 있다가, ...)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손!
 
로에른 A. 니아:(또 강아지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손을 맞잡았다.) 가죠.
 
이리스 레터:(지금까지 잡았던 어떤 때보다도 더 단단히, 꽉 붙들었다. ...가자!)
 
무대 위로 걸음을 옮기자, 숨 막힐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발아래에 선 사람들의 수는 도저히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골목에서 겪었던 인산인해는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보일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찬양하고, 기뻐합니다.
 
익숙하게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팔려나간다면, 이 순간 또한 온갖 곳에서 부티나게 팔리리라고.
 
프뤼나! 프뤼나! 프뤼나!
 
환호성이 터지고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로에른의 코드네임을 연호합니다.
 
그중에는 종종 이리스를 향한 시선이 섞여 있기도 했습니다.
 
타이머를 위한 자리에 등장한 새로운 사람이라니! 이상히 여길 만도 하죠.
 
타이머가 부관을 들였다더라. 그런 입소문이 돈 탓인지 그다지 부정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의문이 가득했습니다.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도망치고 싶어! 모든 것이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시선과 관심에 압도당할 지경입니다. 당장 이대로 뒤돌아서, 무대를 뛰쳐나가고 싶단 충동이 입니다.
 
이리스 레터:(잡은 손이 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로에른이 이리스의 손을 끌어당깁니다.
 
여전히 서늘한 손이 조금은 당신을 안심시켜줍니다.
 
손을 맞잡고, 한 걸음, 두 걸음, 무대의 중앙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완벽한 중앙에 섰을 때,
 
두 사람의 능력을 위해 무대의 조도가 일시적으로 어두워집니다.
 
오래도록 준비해 온 무대를 펼칠 순간입니다.
 
이리스 레터:(크게 숨을 들이쉰다. 차라리 조명이 어두워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폐가 조여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
(맞잡은 손을 다시 한번 고쳐 잡고는, 반대쪽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가 해야 할 일, 이미 밤의 어둠이 내린 하늘 위로 태양을 끌어올리는 것. 그리하여 이 세계의 시간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하는 것.)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걸! 이리스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자신은 구원자도 아니고, 희생이니 세계니 하는 것들은 아직까지 멀게만 느껴졌다. 애초에 군중 앞에서 이렇게나 떨어버리는 사람의 어떤 면에서 구원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아, 조각상들. 액자 속의 얼굴들. 나는 당신들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당신들 또한, 분명 그런 얼굴을 한 영웅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은 어깨를 느슨하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선보이는 것이 구원자의 빛이 아닌 쇼의 일부일 뿐이라면, 저들이 구원을 바라는 민중이 아닌 코마니 호수의 관광객들과 같은 관객일 뿐이라면, 그리고 실은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거라면? ... ... 들어올려진 손끝에서 경쾌한 핑거스냅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둠이 내린 도밍게즈의 하늘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로에른 A. 니아:(타이머가 된 이래로 건국 축제의 무대에는 언제나 홀로였다. 오롯이 각 시간대만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으므로 이 넓은 무대를 채우는 이도 한 명뿐인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만인 앞에 서는 건 적응될 대로 적응된 로에른도 누군가와 함께 선 이 순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손을 맞잡고 있어 더더욱 그러했다. 조금의 곁조차 내어주지 않던 자신이 누군가와 단단히 맞잡아 결속된 채 이곳에 서 있다니. 사실 이리스가 능력을 쓸 때는 손을 놓을 줄 알았지만, 재빨리 계산해 보니 이것도 관중들에겐 나쁘지 않은 그림이 될 것 같다.)
(각인이 나타난 지 고작 석 달여가 된 이와 달리 그는 태생부터 타이머로 태어난 이처럼 완벽한 구원자의 역할과 힘을 선보여 왔다. 멸망의 예언이 불안하게 요동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타이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란 역시 안심일 터. 이곳에선 압도적인 능력을 펼치는 게 그 방법이다. 그건 로에른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맞잡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이리스가 띄운 거대한 태양을 광원 삼아 수십 개의 칼날 같은 결정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마치 태양이 결정으로 화하는 것처럼, 이리스의 능력과 합을 맞추어 교묘하게 조절해나갔다. 무대가, 무대의 주변이, 우리를 올려다보는 관중들이 시리고 따스한 빛무리에 밝혀져나간다.)
 
이리스 레터:(가장 완벽한 때를 맞추어 빛을 거둔다. 맞잡은 손에 약간의 힘을 주는 것으로 신호를 대신하고,)
(마지막 빛이 거의 거두어졌을 쯤, 다시금 경쾌한 핑거스냅의 소리가 장내를 가른다.)
(이어 거울이 깨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저 먼 하늘에 떠올라 있던 태양이 폭발한다. 큰 결정에서 작은 결정으로, 작은 결정에서 더 작은 결정으로. 폭발은 연쇄적이었으나, 그 일련의 과정은 먼 발치에서 본다면 몇 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관객들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ㅡ)
(ㅡ찬연히 부서진 태양이, 찬란한 빛을 머금은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흩날리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군중의 사이사이 그 열띤 기대에 호응하여.)
 
이리스가 만들어낸 태양이 로에른의 손길에 의해 수백 개 결정으로 나누어지고, 이내 다이아몬드 더스트처럼 찬란히 폭발합니다.
 
시간의 현신. 세계의 구원. 타이머와 카운터.
 
그 이름을 증명하는 능력의 존재에,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로에른과 이리스가 모든 것을 끝낸 후에도 잠시간 침묵이 맴돌았습니다.
 
긴 침묵을 깬 것은, 무대 한 편에 비켜 서 있던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자:도밍게즈가 가장 사랑하는 타이머가 드디어 이 자리에 섰군요. 오, 그리고 가장 사랑하게 될 타이머도요.
프뤼나, 우리에게 직접 소개해주겠어요?
 
매해, 이 쇼맨십의 사회를 맡은 여자입니다.
 
로에른 A. 니아:(마이크를 받아들고, 냉담하면서도 정중하고 분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제0시 빛의 타이머, 프뤼나입니다. 올해 건국 축제에서도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간 타이머는 각 시간대에 한 명뿐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시간에게 선택받은 이이자 세계의 원군이 한 명 더 늘어나게 되었음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곤 이리스에게 눈짓했다.)
 
이리스 레터:(로에른의 마이크를 살며시 가져와 쥐고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경쾌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제0시, 빛의 카운터, 베르니스!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굉장히 긴장했다. 가까운 거리에서라면 묘하게 그의 입매가 굳어있는 것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회자:반갑습니다, 베르니스!
이 자리에서 소개될, 타이머의 새로운 파트너를 오매불망 기다렸어요.
 
사회자는 그들이 카운터이며 타이머의 곁에서 세상을 함께 구원할 자라는, DOT의 진부한 대본을 아주 그럴싸하게 연기합니다.
 
새로운 구원자. 타이머의 파트너.
 
시간이 선택한…… 또 다른 증명.
 
이리스의 능력을 두 눈으로 보고, 카운터의 존재를 실감한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객석이 술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자라는 말에 눈을 홉뜨고, 숨을 들이켜기도 했어요.
 
세계 멸망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으며…… 빼내기엔 너무 두려운.
 
그런 세계 멸망의 징조를, 정확하게 깨부수는 존재의 등장인걸요.
 
로에른의 코드네임을 연호하던 외침 사이에 이리스의 코드네임이 자연스럽게 섞여들었습니다.
 
태초부터 두 사람이 짝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누구도 그 존재에 의문을 표하거나 반감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카운터의 존재를 실감하는 것도 잠시, 사회자는 익숙하게 다음의 순서를 진행합니다.
 
사회자:DOT의 말로는 타이머와 카운터는 서로 선택받은 운명이라던데,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졌나요?
 
이리스 레터:글쎄요,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수줍음이라도 타는 것처럼 웃음을 가장하며, 옆머리를 빙글빙글 꼬았다. 아마도 군중이 원하는 건...) 그냥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거든요. 음... 확실히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로에른 A. 니아:(군중이 원하는 건 어차피 자극적인 내용뿐이겠지. 하지만 거기에 순순히 넘어가주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말할 필요도 당연히 없고.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간결하게 답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각이었습니다.
 
사회자:아아, 운명적인 존재란 말은 얼마나 낭만적인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오는 기분입니다.
베르니스, 타이머가 되었을 때 상당히 놀랐겠어요. 본래 타이머는 열두 살 생일에만 각인이 나타나는 법이니까요. 어떻게 능력을 자각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궁금해해요. 짧게라도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이리스 레터:글쎄, 들어보세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손목에... (자신의 소매를 걷어, 시간의 각인을 군중을 향해 드러냈다.) 시간의 각인이 새겨져 있는 거예요! 저는 열일곱이나 되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런데 아까 보셨다시피, 저는 0시의 카운터잖아요? 그만 침대 위에서 번쩍-하고 빛나고 말았어요. 아까 그 빛처럼 밝게요.
아, 옆방에서 얼마나 강한 민원이 들어오던지. (편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손을 휘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로에른 A. 니아:(왜 긴장한 거지? 나보다 잘하는데?)
 
이리스 레터:(내 손을 봐라. 겁나 떨리고 있으니까.)
 
로에른 A. 니아:(어쨌건 긴장하던 모습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다)
 
사회자:저런. 빛의 능력 때문에 고역을 겪었군요! 저는 항상 궁금했답니다. 빛의 타이머들에게 시력 문제는 없는지 말예요. (그러면서 군중들에게 자연스런 호응을 유도한다)
그래도 이렇게 어엿한 카운터가 되어 건국 축제 무대에까지 올라왔군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럼 운명으로 엮인 이들에게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파트너로서 프뤼나는 몇 점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리스 레터:(절대로 0점이라고 말하면 안 돼, 절대로 0점이라고 말하면 안 돼...) 글쎄요... 10점 만점에 5점? ...제가 너무 인색했나요? 하지만 아무리 운명이라고 해도... 저희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한 참인걸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맞는 모습보다는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편이 더 낭만적이지 않을까요?
그래도 프뤼나에게는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있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 파트너는 엄청나게 유능하고 멋진 타이머잖아요?
 
로에른 A. 니아:(예상보다 많이 받았다. 고 생각함)
 
이리스 레터:(알면 됐다)
 
사회자:어머, 점수가 아주 높지는 않네요? 하지만 베르니스의 말대로 아직 두 사람은 알아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만점이 되기를 기대해 보죠!
 
몇 가지 짓궂은 질문이 섞여 있지만 대체로 상냥한 편입니다.
 
이리스 레터:(이리스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훌륭하게 구라를 쳤다.)
 
이후로도 탈탈 소리가 날 정도로 털리고 난 후 무대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면, 그건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겠죠.
 
이제는 남은 순서를 기다릴 뿐입니다. 무대 뒤편에 내려오자 스태프가 의자와 마실 것을 갖다 줍니다.
 
스태프: 수고하셨어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이리스 레터:(그대로 의자에 퍼지듯이 쓰러졌다...) 흐어어어어...........
 
로에른 A. 니아:(마이크를 빼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고생하셨어요. 저희가 첫 순서인데, 당신 덕분에 시작을 아주 잘 열었네요.
 
이리스 레터:...나 실수한 거 없지? 말실수라던가, 중간에 실수로 깜빡이를 켰다던가... ...
 
로에른 A. 니아:딱히요. 텐션이 높단 생각은 들었지만 당신의 본래 성격이랑 크게 다르지도 않고.
 
이리스 레터:그거면 됐어...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물까지 알차게 마셨다.)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솔직히 내가 올라가서 무슨 말을 하고 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일단 머리에 힘을 줘서 네가 0점이라고 말하는 건 열심히 참았던 것 같아...
 
로에른 A. 니아:제가 하나 예상하자면, 타이머 전시회의 영상이 나오던 2전시관에서 곧 건국 축제의 영상도 재생하게 될 거예요. 카운터의 첫 등장이니 DOT가 놓칠 리가 없겠죠.
0점까진 아니고 한 1, 2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했는데. 0점이 본심이셨나 보죠?
 
이리스 레터:와, 그거 정말 끔찍한... ... (얼굴을 쓸어내리며 전시관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이어지는 질문에는 잠시 침묵했다.)
0.5점 정도로 하자.
 
로에른 A. 니아:네, 그래요. (한달 반 동안의 수많은 말다툼과 갈등을 되새기고 납득했다.)
 
다음 순서도 무탈하게 흘러갑니다.
 
누군가 내려오면 누군가 올라가고, 능력이 무대 위를 환하게 장식하고, 사람들의 환호성과 연신 쏟아지는 익숙한 이름들을 듣다가,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와 QNA가 이어지는 식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차례입니다. 제13시, 어둠의 타이머와 카운터의 순서예요.
 
두 사람은 오래 기다린 것이 지루했는지, 금세 계단을 오릅니다.
 
이쯤 되면 이리스도 지루해졌을지도? 어떤가요?
 
이리스 레터:(그다지 지루해하지는 않았다.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을 구경하는 게 꽤 재밌었다.)
 
하긴 건국 축제 무대는 처음이니까요.
 
무대 뒤쪽에도 작은 화면이 있어, 다른 페어들은 어떤 무대를 펼치는지 볼 수 있습니다.
 
13시 페어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대의 조명이 먹히고, 어둠이 가득해집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이리스가 폭발시킨 보석 같은 빛이 희미하게 별처럼 반짝입니다.
 
밤보다 안온하고, 검정보다 진한 어둠이 완벽히 무대에 내려앉았을 때,
 
파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대 뒤편의 조명이 꺼집니다.
 
정전이라도 온 것처럼, 혹은 능력에 잡아 먹힌 것처럼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무대를 비추어 주던 화면도 순식간에 멈춰 버렸습니다.
 
이리스 레터:응...?!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쟤들이 이런 퍼포먼스를 하기로 했었나...?
 
로에른 A. 니아:무대 뒤편의 조명까지 끈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요. (눈썹을 치켜올렸다.)
 
로에른과 이리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가까이 있던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도 놀랐는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리고……
 
<듣기> 판정
 
이리스 레터: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문득 깨닫습니다.
 
묻는 목소리도, 대답하는 목소리도 모두 우리, 타이머와 카운터의 것이라고.
 
스태프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득 몰려 그렇게나 혼란스러웠는데.
 
무대에서 쏟아지던 환호도, 놀란 관객의 수군거림도, 사회자의 양해 멘트도! 모두 들리지 않아요.
 
사위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사회자는 더 말을 하지 않았고, 무대 뒤편에서 바삐 소리치던 사람들도 모조리 조용해졌습니다.
 
똑딱똑딱, 끊임없이 흘러가던 시계 소리도 멈춰버렸어요.
 
제13시 페어가 어둠을 거두자, 인공적인 태양도 조명도 없는 온전한 밤이 찾아왔습니다.
 
희미하게 보라색이 섞인 하늘에는 불온한 별들이 총총 떠 있습니다.
 
붉은색 별이에요. 달도 어쩐지 붉은 듯했어요.
 
그리고 달빛 아래 드러난 광경은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산 사람도, 죽은 것들도, 움직이지 않고,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들마저……
 
모두 멈춰버린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 그랬습니다. 구름도 흘러가지 않았고, 달도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멈춰 서 있습니다.
 
12시를 알려야 하는 광장의 시계탑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세계의 종말이라기에도, 축제의 마무리라기에도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이었습니다.
 
이 순간이 소설이라면, 아마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을 겁니다.
 
4월 20일, 도밍게즈의 건국을 축하하는 마지막 날.
 
타이머와 카운터만을 남겨두고, 세계가 멸망했다.
 
……라고!
 
이리스 레터:(눈을 비비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풍경을 한 번 더 바라본다. 여전히 상황판단이 되지 않는 얼굴로 다급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게 대체 뭐야?!
 
로에른 A. 니아:(인산인해를 이룬 곳에서 오로지 타이머와 카운터 스물여덟 명이 내는 소리만이 울린다. 스태프들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뒤따라 무대로 향해 무대 앞에 모인 시민들과 시계와 하늘의 구름과 달까지 멈추었음을 차례로 확인했다.) ……. (두 눈은 작금의 풍경들을 차례로 인식했으나 뇌는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다려 보세요. 다른 구역의 DOT 지부에 연락을 취해볼 테니. (대규모로 사람이 멈춰 버리는 재해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재차 끊어가며 몇 번이고. 하지만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건 '고객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라는 삭막한 문구뿐이다.)
 
이리스 레터:여, 연락 돼? (안절부절, 불안을 숨기지도 않은 채 돌아본다. 처음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경악은 서서히 공포가 되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괘... 괜찮은 거지?
 
로에른 A. 니아:……안 돼요. (핸드폰 화면을 껐다.) 이런 걸 겪은 적이 있었다면 뉴스에 대대적으로 났겠죠.
객관적으로, 전혀 괜찮지 않은 상황이네요.
 
이리스 레터:... ... (다시금 군중 쪽을 돌아본다. 금방이라도 다시 움직일 듯, 그러나 모두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모습은...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어 도무지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들에게 말을 건넨다.) 얘, 얘들아! 너흰 괜찮아?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로에른처럼 연락을 돌려 보거나, 사람들을 마구 흔들어 보는 이들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반응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런 게 멸망이라고? 거짓말. 멸망은 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흐느끼거나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나도 울고 싶다, 얘들아. 더 불러 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한참을 서있다가...)
...그,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지 않을까? 이렇게 언제까지고 멈춰있을 수는 없잖아. 그냥...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우리가 전시회에서 봤던 문처럼 말이야. 그것도 금방 사라졌었고... ...
일단 기다려 볼까? 어디 멀리 갔다간 다들 돌아왔을 때 또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으니까... (애써 미소지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세계는 타이머와 카운터를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멸망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오늘, 애석하게도 로에른과 이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멈추어버린 시간이 알아서 축을 되찾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뿐.
 
로에른 A. 니아:(무대에 석상처럼 서 있는 사회자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어 본다. 시신도 아닌데 이런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질감이라니. 아니, 모두 멈춰버린 시간에 갇혀 버렸으니 사실상 죽은 건가.) 과연 일시적일까요. 만일 돌아간다고 해도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있고요?
하긴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언제'라는 말도 이제는 부적절하겠군요. 저는 적어도 재해나 운석 같은 게 원인이 될 줄 알았는데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세상에 스물여덟 명만이 남는 건 그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양상이었다.)
 
타이머와 카운터들은 이리스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여전히 혼란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우린 고작 열일곱인데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온 이 사태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건 어른들이라도 힘들 겁니다.
 
이리스 레터:...그렇게 말하지 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가, 한 박자 늦게 조용히 덧붙였다.) 애들 불안해하잖아. ...나도 그렇지 않다고는 말 못 하겠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멸망이 신속히 임하리니, 아무도 멸망의 때인 줄 알지 못하리라... 이게 가이아가 들은 멸망의 예언이라면...
차라리 이게 먼저 이루어졌으니 잘됐어. 분명 메레디스의 예언도 실현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기 버겁다.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봄... ...
 
로에른 A. 니아: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뿐이에요. (여전히 무표정이나, 그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무쇠 같은 인간이라도 이런 상황 앞에서 덤덤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가뜩이나 그는 세계의 구원자이자 영웅으로 칭송받는 타이머. 그런데 그 명성과 명예다운 힘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세상이 멸망하다니. 당황스러운 걸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언을 반추했다. 뜬구름 같은 소리라며 무시해 왔던 그 한 문장이 그를 비웃듯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하나의 예언인 걸까요? 당연히 별개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멈춘 상황에서 다음 계절을 기대하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다른 지역의 DOT 지부도 연락이 되지 않는 걸 보니, 전 도밍게즈가 멈춰 버린 건 확실해 보여요. 이 상황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죠. 우선, DOT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머리가 좀 맑아지면 다시 논의를 해보자고요.
 
이리스 레터:(가만히 로에른을 올려다본다. 응시하는 시선이 가늘어지나 싶더니, 뒤따르는 긴 한숨 소리의 마지막에는 허탈한 듯한 웃음소리가 묻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괜찮아? 따위의 말을 덧붙여 혼란을 부추길 생각은 없었다.) 글쎄... 내 희망 사항이긴 해. 하지만 아무리 두루뭉술하다고 해도, 예언의 힘도 실존하는 시간의 힘이니까 둘 다 믿어보려는 거지.
(그리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려다가,) ... ...여유가 되면 나 좀 일으켜 줄래?
 
로에른 A. 니아:(하나의 예언이 이루어졌으니 다른 쪽의 예언도 이루어지는 게 마땅하다. 정말로 시간이 내려준 힘이라면 말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예언이란 걸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 따위는 없었을 텐데.)
(다른 페어들에게 DOT를 향해 고갯짓하고는 이리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걸어갈 수 있겠나요?
 
이리스 레터:(완전히 일어서기 직전 살짝 휘청였지만, 중심은 금세 잡을 수 있었다.) 고마워. 음... 걸어갈 수는 있을 것 같아. 방금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서 그랬고...
...그냥 돌아가서, 자고 일어났더니 전~부 해결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은 질질 끌리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로에른 A. 니아:(그런 편안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어 태클을 걸진 않았다. 건물로 돌아가는 스물여덟 모두가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지쳤을 테니.)
 
이미 하나의 예언이 이루어졌으니, 이리스의 말대로 남은 예언도 곧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는 로에른의 제안에 따라 멈추어 버린 사람들을 뒤로하고 우선 DOT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 밤, 걷는 길은 왜 그리 길게 느껴졌던가요.
 
아침이 왔습니다.
 
아침이 밝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밝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해는 고개를 내밀지 않았습니다.
 
달과 별은 그 자리에 풀칠한 것처럼 불온한 색으로 빛날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멈춰 서 있어요.
 
웃고 떠들던 그대로, 손을 잡고 걷던 그대로, 돌아서던 그대로, 박수갈채를 보내던 그대로.
 
무구하고 기쁨에 찬 얼굴이 생생합니다. 자신의 시간이 멈췄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폼페이의 그 날처럼!
 
다른 점이라면 화산재 대신 부서진 빛만 떠다닌단 걸까요.
 
문득, 전시관에서 보았던 조각상들이 떠올랐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퍽 닮았거든요.
 
사람이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들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마저 멈추어 버린 걸까요?
 
혹은 생생하게 움직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라고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을 확신하는 건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우리는…… 고민할 따름입니다. 시간이 왜 멈췄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다시 돌이킬 수 있을지.
 
구원자로서 우리가 처음 가진 사명이니까요.
 
:시간은 왜 멈췄을까? 답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맞이했고, 답을 내놓고, 정답인지 오답인지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자, 이상했던 징조를 돌이켜 볼까요.
세계 멸망의 예언과 전 세대 예언의 타이머가 내놓았던 해결 방법. 갑자기 나타난 카운터와 홀연히 사라진 새파란 장미의 아치문…….
불가능과 기적이 순서대로 교차하는 배치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떠들던, 일어날 리 없다고 부정한 세계 멸망.
 
:시시각각 다가오던 세계 멸망으로부터 세계를 구해낸, 한 줄의 예언.
타이머는 오직 하나뿐이라던 세계의 섭리를 깬 카운터의 등장과,
기적을 상징하는 새파란 장미의 아치문.
데칼코마니처럼 좌우의 아귀가 딱 들어맞습니다.
이것이 만약, 정말로 예정된 멸망이라면……
타이머와 카운터로서,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단 건 아닐까요.
 
:그래서 예언의 타이머는, 카운터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멸망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걸지도 몰라요.
물론 모두 추측입니다.
 
시계는 울지 않습니다. 세계는 고요합니다.
 
새파란 장미는 무르익었지만, 꽃잎을 떨구지 않아요.
 
문득,
 
<이성> 판정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치문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단 사명감에 가까운 감각이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리스와 비슷하게, 로에른도 아치문을 떠올린 것 같습니다. 다른 타이머와 카운터도 그런 눈치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이미 사라졌던, 전시관의 그곳에?
 
아니라면, 흡사한 공원의 장미 터널로?
 
아뇨, 전혀 다른, 세계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지능> 판정
 
이리스 레터: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전시관은 금세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나치게 익숙한 생김새였습니다. DOT의 본관을 본떠 지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거든요.
 
마중을 나온 전시관의 담당자가 “일부러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시관은 본관을 본떠지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오히려, 전시관이 아니라……
 
이리스 레터:...DOT의 본관. (조용히, 스치듯이 중얼거렸다.)
뭔가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그 때 아치문을 넘을 수 없었던 건, 그곳이 여기를 본따서 만들어졌을 뿐인 장소였기 때문일 거야.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래.
 
로에른 A. 니아:하지만 본관에도 아치문 같은 건 없는데요. (이 사명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도 일단은 가볼까요.
 
이리스 레터: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이다. 기대도, 불안도 아닌 감정을 품고서 걸음을 옮겼다.)
 
DOT 본관은 언제나처럼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지금도 그렇습니다.
 
청동으로 빚은, 남색으로 덧칠한 문을 지나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본관의 로비입니다.
 
흰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려진 남색 천장,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붓의 흐름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섬세하게 회칠을 한 벽.
 
언제나 그렇듯 흠 없고, 점 없이 완벽하기만 한.
 
안내 데스크에 앉은 직원도,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도 모두 멈춰선 상태입니다.
 
그때, 전시관의 구조가 어땠더라.
 
전시관을 모두 돌고 난 후, 안내 데스크의 옆에 세워졌었지.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돈 시선이 비로소 장미 아치가 있던 곳에 다다릅니다.
 
그곳에 있던 것은,
 
엘리베이터입니다.
 
띵.
 
멈춘 시간을 깨트리고, 요란한 소리가 울립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였습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선 채, 내려갈 채비를 마치고 있습니다.
 
열린 문이 어쩐지 우리를 기다리는 괴물의 입속인 양 께름칙합니다.
 
우연인가?
 
혹은 운명인가?
 
새파란 장미는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의 문설주는 둥글긴커녕 각지고 네모나지만…… 위치는 분명히 같았습니다.
 
때마침 도착한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시간이 멈췄다면 엘리베이터 또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데, 어째서 이것만은 움직이는 건가요?
 
그러나 장미 아치와 달리, 엘리베이터는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들어오라는 것처럼, 문을 닫지 않고 내내 그렇게 서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리스 레터:(지하 2층, 어쩌면 지금이라면 그곳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곳에서 어떤 해답을 얻게 될지도.)
(손을 한 번 쥐었다 핀다. 긴장한 듯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진 채였지만, 애써 뒤를 돌아본다.) 다들, 괜찮지?
 
로에른 A. 니아:네. (망설임없이 끄덕였다.) 정확히 아치문이 있던 자리인데다, 알아서 내려오기까지 하는 걸 보니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리스 레터:저번에 봤을 때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긴장을 풀려는 듯 농조로 던지며,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러나 타이머와 카운터가 모두 탄 후에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몇 층으로 갈지, 버튼을 눌러주어야 움직일 모양입니다.
 
지하 1층부터 4층, 그리고 옥상까지. 총 6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몇 층으로 가야 하지?
 
이리스 레터:(지하 2층으로 가는 버튼은 없을까?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본다...)
 
<초능력> 판정
 
이리스 레터:
초능력 Roll
기준치: 50/25/10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어떤 위화감이 움틉니다. 능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잠잠하던 그것들이 요동칩니다.
 
그러나 이유도, 종착지도 알 수 없는 파도일 뿐입니다.
 
다른 판정으로 대체 가능합니다.
 
이리스 레터:(능력이 향하는 곳이 어딜까. 어째서 지금 반응하는 걸까, 차분히 생각해보기로 한다.)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움트는 초능력은 버튼을 훑어가듯 움직이더니,
 
정확히, 엘리베이터의 버튼 중 가장 아래, 긴급 호출 버튼을 가리켭니다.
 
꼭 그것을 누르라는 것처럼!
 
이리스 레터:에이, 설마... (설마 이거겠어? 생각하면서도...)
(꾸욱 눌렀다.)
 
그 버튼을 누르면, 파란 LED 램프가 점등합니다.
 
엘리베이터의 안내판에는 정확히 B2, 지하 2층이라고 쓰여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공간입니다.
 
제 8시 타이머: 이거…… 비상 호출 버튼이 아니야.
 
뒤이어 제8시의 타이머의 이야기에 모두 깨닫습니다.
 
버튼에, 환각이 걸려 있노라고.
 
이리스 레터:하...?
 
마치 비상 호출 버튼인 것처럼. 원래 지하 2층으로 향하는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상당히 정교한 방식의 환각입니다. 만져본다고 해도 손끝에 걸리는 홈 따윈 없습니다.
 
이리스 <행운> 판정
 
이리스 레터:
기준치: 52/26/10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덜컹, 덜컹, 덜컹! 갑작스럽게 엘리베이터의 몸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리스 레터:... 어?!
 
쾅! 소화라도 시작한 것처럼 요란하게 좌우로 뒤틀던 그것은 곧 문을 닫아 젖히고……
 
우당탕탕! 아래로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단 것처럼 성급하기 짝이 없는 속도입니다.
 
이리스 레터:어?!??!
 
내장이 위로 치밀고, 공기가 역류하는 감각이 선명하게 뇌를 흔듭니다.
 
멀미라고 표현하기엔 지나친 부유감은,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로에른 A. 니아:(욱, 입가를 틀어막는다.) 당신. 뭔가 행동을 할 때엔 주변과 상의를 좀 하라고 했죠?
 
이리스 레터:아, 아니 나는, 나는 그게~!!! (필사적으로 난간을 붙들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흔들거리며 내려가는 동안, 우리 모두 엄청난 멀미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불이 꺼진 탓일까. 옆에 선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위가 어두웠습니다.
 
제13시 페어가 내린 어둠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독약 냄새가 싸하게 코끝을 스칩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것도 내키지 않는 냄새입니다. 병원이라기엔 지독하게만 느껴집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일까요?
 
로에른 A. 니아:(급격히 닥친 멀미 탓에 비틀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전등에서 빛을 가져올 여력도 없어서-사실 좀 열받기도 해서-이리스에게 부탁한다.) 레터. 좀 밝혀주시겠어요.
 
이리스 레터:(상당히 초췌한 몰골로 따라 나서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주변을 밝히기 적당한 빛을 불러냈다.) 미안.......... 다음에는 조심할게...
 
이리스가 불러낸 빛이 주변을 비춥니다.
 
그곳에는……
 
14개의 [원형 유리관]과 [컴퓨터 PC], [멈춘 연구원],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원통]이 놓여 있습니다.
 
안쪽에는 [철제문]이 딸려 있습니다.
 
여러 대의 CCTV가 모서리에 매달려 있었지만, 모두 멈췄는지 움직이거나, 액정을 빛내진 않습니다.
 
어느 것 하나 수상쩍기 짝이 없습니다. DOT 본관 지하에, 이런 것들이 왜 필요로 한단 말인가요?
 
이리스 레터:...이게 다 뭐야? (원형 유리관 쪽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풍경이 어째서 하필 이곳에 있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선 원형 유리관에는 모두 정체불명의 액체가 꽉 차 있습니다.
 
투명한 파란색으로 물든 그것은 꼭 장미의 색을 훔친 것처럼 흐릿합니다.
 
각 유리관에는 숫자와 간단한 낱말이 적힌 네임택이 붙어 있습니다.
 
〈제0시, 빛〉, 〈제1시, 물〉, 〈제2시, 불〉, 〈제3시, 식물〉, 〈제4시, 전기〉, 〈제5시, 얼음〉……
 
구태여 더 읽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전부 시간이 부여한 숫자와 능력을 적어둔 것이었으니까. 마침 수도 14개였으니 딱 떨어집니다.
 
이리스 레터:...왜 이런 것들이 여기에 있지? 연구라면... 여기 말고 다른 곳도 있잖아. (유리관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짝 훔쳐 보았다.) ...
(아, 클리셰 공상과학 영화. 꼭 저런 곳에 메시지가 남아 있고는 했다. 굳이 그런 역할인 게 아니라도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으니 이런 곳에 있는 PC겠지만... 약간의 불안을 느끼며 컴퓨터 PC의 전원을 살폈다.)
 
엘리베이터와 센서 등이 작동하기에 기대했는데, PC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4시 페어가 고치려고 해봐도, 고장난 것이 아니라 멈춘 것이기 때문에 소용없습니다.
 
이리스 레터:하긴, 이런 상황에 켜지는 것도 웃기긴 하겠다. (컴퓨터 모니터를 툭툭 두드려도 보았다. 멈춘 연구원에게는 무언가 남아 있을까?)
 
로에른 A. 니아:레터, 잠시만요. (연구원에게 다가가는 이리스를 부른다.) 여기. 유리관 아래에 뭔가가 적혀 있어요.
 
이리스 레터:응? 뭔데? (다시금 몸을 돌려 유리관 가까이 다가갔다.)
 
네임택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숫자] 몇 개가 적혀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웬 숫자가? (뚫어져라 쳐다본다...)
 
〈2052. 1. 08〉, 〈2052. 02. 27〉, 〈2052. 01. 01〉, 〈2051. 12. 17〉……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날짜들은, 대략 반년 전부터 일주일 사이의 어느 날들이었습니다.
 
이날이, 무슨 날이었더라.
 
…….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카운터들이 곧 익숙한 날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네, 그들이 DOT에 처음 발견되었던, 혹은 스스로 발을 들였던…… 그 날짜였습니다.
 
불길하게도 유리관은, 딱 한 명의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타이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입니다.
 
카운터인 이리스도, 연구를 도왔지만 이런 곳의 존재는 알지 못했어요.
 
이리스 레터:(얼굴이 살짝 파랗게 질렸다. 치밀어오르는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
이곳에 온 날짜인데, 이건.
 
로에른 A. 니아:당신이 이곳에 온 날짜라고요? (DOT에 온 날짜, 시간대 별로 붙어 있는 네임택. 교묘한 사이즈의 유리관…… 어떤 장면이 상상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리스 레터:응. 내가... (손을 들어 입가를 살짝 가렸다.) ...
우연이겠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회피해버린다. 도망치고 싶은 듯 시선을 돌렸다.)
 
도망치듯 연구원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얼굴이 어쩐지 낯익더라니. 연구 보고를 설명하고 지시한 애쉬입니다.
 
그 또한 [가운]을 입고 [커다란 책]을 든 채 조각상처럼 꼿꼿하게 멈춰버렸습니다.
 
이리스 레터:(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운을 살펴보았다. 주머니에 무언가 있지 않으려나?)
 
가운 주머니에는 사원증과 담배 한 갑, 라이터가 들어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음... (도움이 되려나? 일단 사원증을 가져간다. 라이터는 뭐... 수틀리면 2시 페어에게 빌리자. 화력도 그쪽이 더 나을 것이다.)
(다른 눈에 띄는 것이 없다면, 커다란 책을 조심조심 꺼내본다.)
 
미묘한 색의 가죽 표지가 눈에 띕니다. 요즘 책도 이런 가죽 표지를 쓰던가요?
 
<근력> 판정에 성공하면 책을 꺼낼 수 있습니다.
 
이리스 레터:(진짜로?)
(배에 힘을 딱 준다.)
근력
기준치: 45/22/9
굴림: 85
판정결과: 실패
(어림도 없지.)
로에른... (슬쩍 불러봄)
 
로에른 A. 니아:
근력
기준치: 40/20/8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리스 레터:?
 
로에른 A. 니아:감각이 좀 불쾌하네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책을 건넸다.)
 
어쩐지 가죽은 서늘하고, 끈적거리며, 희미하게 사향 냄새가 납니다.
 
불길한 감촉에 이리스, SanC (0/1).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이리스 레터:그러게, 좀...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렇지?
(살짝 열어본다. 최대한 손가락 끝으로 집어서...)
 
아무리 봐도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읽을 법한 책은 아닙니다.
 
책 표지에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씨로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무언가를 사용하기 위한 설명서라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문장도 로에른과 이리스가 가진 의문에 해답이 되진 못합니다.
 
이런 건 왜 읽고 있던 걸까요?
 
이리스 레터:이게 대체 뭐야? (덮는다.) ...취향 특이하시네. 그냥 신경 끄는 편이 낫겠어. 무슨... 소설에나 나올 법한 것들만 잔뜩이야.
 
로에른 A. 니아:애쉬가 이런 이상한 책을 읽는 줄은 몰랐네요.
 
이리스 레터:그러게. 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휴대폰으로 찍어둘 수 있으려나?)
 
가능합니다.
 
이리스 레터:(한 페이지씩 찍어서 저장은 해둔다. 정말로 혹시 모르니까! 전부 촬영하고는 책을 적당한 곳에 올려둔다. 대신 이번에는 커다란 원통의 가까이에 다가갔다.)
 
빛나는 원통은 단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높이 30cm 정도에 지름은 그보다 약간 작고, 볼록한 앞부분에 신기한 소켓 세 개가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생김새인데, 유리창도 없어서 내용물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무척 무겁고, 움직이면 내용물이 출렁거립니다.
 
라벨에 낯선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아르고.
 
원통 뒤에는 렌즈와 진공관, 금속 원반을 연결한 작은 상자라던가, 그 외에는 통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매달린 기다린 기계가 서 있습니다.
 
도저히 도밍게즈의 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수상쩍은 물건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책에서 이 원통과 비슷한 그림을 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리스 레터:(뚫어져라 원통을 쳐다보다가...) 아, 아까 그 책.
(조금 꺼림찍하긴 했지만, 다시금 책을 펼쳐 비슷한 그림을 찾아보았다.)
 
<자료조사> 판정
 
이리스 레터: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제야 책의 내용이 읽히기 시작합니다.
 
커다란 원통의 용도가 뇌를 보관하는 것이며, 안에 든 것이 라벨에 적힌 이름의 뇌라는 걸 알게 된 이리스, SanC (0/1D2)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2/26/10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1
 
이성 1 감소.
 
이리스 레터:아, 찾았... ... (그러나 내용이 시선에 담김과 동시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려 다시금 입을 가린다.) ... ...
그럼 저게 지금... 살아 있다는 거야?
왜... 왜 이런 게 DOT의 지하에 있는 건데? 왜 이런 시설이 필요했던 건데...?!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려, 거의 우는 것처럼 들렸다.)
 
로에른 A. 니아:(누군가의 뇌를, 그 안에 담긴 무언가를 이용하려고 든 건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곤 해도 상식과는 너무나 빗나간 것들이다.) 뇌의 주인은 죽었겠죠.
동관에 못 들어오게 한 이유가 있었군요.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리스 레터:하지만, 이게 정말로 주변을 인식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라면... (살아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지 않나. 그것도 육신을 잃은 채로, 저 통 안에 갇혀서. 그는 이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끔찍하다? 그런 간단한 말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 ...역겨워. (조용히 중얼거리며, 마지막 남은 철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로에른 A. 니아:레터. 이 책에 나온 대로라면 저 원통 뒤의 기계를 조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를 멈춰세운다.) 참담할지언정, 그들이 이 뇌로 무엇을 연구하고 있었는지 봐야 하지 않겠나요?
 
이리스 레터:난, ...나, 나는, 모르겠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봐야 한다는 건 알아. 여기서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그게... ...
...무서워.
 
로에른 A. 니아:당신, 저더러 공범자가 되어 달라고 하셨죠? 그때의 각오와 용기는 어디로 갔나요? (어투는 느릿하고 고저 없으나 내용은 다정하지 않다.) 그들이 숨기는 거라면 일반적인 일은 아니리란 걸, 추측할 수 있잖아요.
쉬었다가 다시 오자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게 멈춘 기간이 길어질수록 되돌리는 조건이 더 어려워질지도 몰라요. 컴퓨터도 켜지지 않는 판에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지 않는다면요?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이리스 레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로에른의 말에는 틀린 구석 하나가 없었다. 애초에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던 것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고작 열일곱 먹은 어린애가 이런 끔찍한 진실을 어떻게 염두에 둘 수 있었겠느냐고.)
...그래. (결국 잇새로 새어 나오는 것은 건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여전히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다시금 원통 앞으로 가서 섰다. 휴대폰으로 찍어둔 페이지를 펼쳐 장치를 조작해 본다.)
 
뇌 보관통을 정확히 사용하자,
 
렌즈를 통해 벽면에 어떤 장면이 투영되고 단조로운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흑백 영화처럼 모두 회색인 데다 상당히 화질이 좋지 못해서, 더더욱 도밍게즈의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TV도, 녹화한 영상도 아니므로 장면은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운 좋게 흘러나오는 것들을 훔쳐보고 주워들을 뿐입니다.
 
:어떤 예언
깜빡, 깜빡,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시야가 재조명되더니, 낯익은 얼굴이 떠오릅니다. 예언의 타이머입니다. 그는 신중하게 말합니다.
“세계가 멸망할 거예요. 시간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 다 닳아가기 때문이니, 이제 타이머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주변에는 하인리히 장교와 리슬러 부관을 비롯해 몇몇 연구원이 보입니다. 모두 DOT의 직원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새로운······”
뒷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이리스는 이미 다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샘플
“정말 괜찮겠어요? 내키지 않아요.”
기억의 주체인 연구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키지 않는다거나, 두려워한다기엔 지나치게 삭막한 나레이션입니다.
시야의 맞은편에 선 것은 마찬가지로, 전 세대의 타이머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팔을 내밀었고,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잘랐고, 누군가는 또 다른 신체 일부분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를 위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죠.”
“이 방법뿐이니까.”
목소리 너머로 장면이 바뀝니다.
시체 안치실입니다. 냉동 보관되어있는 것들은 전부…… 익숙한 시체들입니다. 전전 세대, 혹은 전전전 세대……. 죽어서도 시체조차 묻히지 못한 그것들은 서랍에 얌전히 들어 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가 문가에서 지시합니다.
“유전자 샘플 확보해. 조심히 다뤄.”
 
 
:어떤 기적
“타이머의 능력은 유전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누군가 밋밋하게 소리를 지르자, 하인리히 장교가 단언합니다.
“그걸 해내기 위해 자네를 고용한 거야.”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겁니다.”
“자네가 가부를 판단할 일이 아닐세.”
“이건, 불가능해요.”
영상 속 하인리히 장교의 입이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라도 만들어 내.”
 
 
:어떤 괴물
다음의 장면은 상당히 끔찍했습니다. 흐물거리고,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 다닙니다. 흰 대리석 바닥은 그것이 흘린 진액으로 끈적끈적해졌습니다. 화질이 나쁘고, 음질이 더러운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누군가 한숨을 쉬고, 가운의 소매를 걷어 올립니다.
“실패라니까. 도저히 무리야. 다른 방법이 필요해.”
마찬가지로 지친 누군가 “다른 방법?” 이라고 물었고,
“그래, 전혀 다른……“
지직, 지지직.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름
“성공, 성공이야!”
여전히 억양과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뛸 듯이 기뻐합니다. 두 눈은 똑똑히, 원형 유리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옅은 회색으로 보이는 그 물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들어있습니다.
네, 이리스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목격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말합니다.
“이들을 카운터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어떤 대화
“표정이 좋지 않네요, 아르고.”
또다시 예언의 타이머입니다. 뇌의 주인을 부르며 곁에 앉은 그는 커피잔을 들고 있습니다. 아르고는 한참 고민하다가, “정말 괜찮겠어요? 내키지 않아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나는, 분명히 세계 멸망을 봤어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뿐이에요.”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지만, 연구원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입니다.
“예언을 하나 하죠.”
“아르고, 당신은 양심으로 인해 사는 내내 시달릴 것입니다. 양심을 죽인즉 당신이 살고, 양심을 살린즉 당신이 죽습니다. 세계의 모든 구조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으니 훼방을 놓았다간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양심을 따라 행동하고자 한다면……”
예언의 타이머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저 예언합니다.
“당신의 ■■,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을 겁니다.”
 
모든 진실을 목격한 이리스, SanC (1D2/1D5)
 
이리스 레터:
SAN Roll
기준치: 51/25/10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1
 
이성 1 감소.
 
이리스 레터:하하, 뭐야... ...
더 볼 것도 없네. 다 거짓말이야. 그렇지?
 
로에른 A. 니아:…….
 
연구소는 결백합니다. 천장도, 바닥도 온통 하얀색이었습니다.
 
건조한 공기에는 날 리가 없는 소독약 냄새가 빽빽하게 차 있었고,
 
문득, 하인리히 장교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하인리히 장교:[세계는 멸망하지 않아. 도밍게즈는 2053년의 새 계절을 맞을 거야.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예언의 타이머가 들었던 예언과 똑같았고, 이리스는 다음에 올 문장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하인리히 장교:[눈앞의 이들이 그 증거지.]
 
그가 그때, 이리스의 어깨를 잡아, 한 발 앞으로 끌어냈었죠.
 
단순히 표면적인 행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앞으로 끌어당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물밖으로…….
 
불쾌한 이야기니 여기까지 할까요.
 
하인리히 장교:[지난 예언의 타이머는 매우 훌륭한 이였지.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거웠어.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점은…… 미래를 바꾸는 방법을 함께 점지받곤 했단 거야. 많은 이들이 세계 멸망의 예언이 예언의 탑으로부터 시작한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
 
미래를 바꾸는 방법이란 건 이런 식이었던가.
 
눈과 귀가 밝고, 입이 무겁다는 것은 도덕과 정의의 죽음을 의미했던가.
 
전 세대 타이머는 어떤 심정으로 그 명령에 순응했는가. 자의였는가, 타의였는가.
 
진정으로 그들은 구원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던 걸까.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산재하고,
 
하인리히 장교:[DOT는, 타이머는 이미 그 미래를 알고 있었네. 그 예언이 퍼질 것도, 세계가 혼란스러워질 것도,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가 나타날 것마저도!]
 
쏟아지는 깨달음이 선명했습니다.
 
신은 인간의 탄생을 확신합니다. 스스로 빚어낼 것이기에.
 
그렇다면 하인리히 장교가 그토록 확신에 차 있던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스스로, 카운터의 창조주를 자처했으므로.
 
깨끗한 대리석 벽면에 얼핏 인영이 비칩니다.
 
서 있는 것은 스물여덟 명이었는데, 비치는 것은 열네 명뿐이었습니다.
 
제대로 비치지 않는 쪽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가지고 있던 기억들은 무엇인가. 왜 축제에는 아는 이를 찾아볼 수 없었는가.
 
어째서 DOT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족이나 지인의 연락을 받지 못했던가.
 
그 모든 것의 답을 깨닫는 순간,
 
운명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의 운명이었던 거예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너를 위해 예비된 운명이었던 거지.
 
목전의 상황을 두고,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시간이 멈춰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내내 멈춰있었던 것이지만, 귀가 먹먹해서 유난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이리스 레터:상식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 그럼, 내 기억은 뭔데?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평생을 살아온 7구역의 풍경이 어땠는지, 바람에서는 어떤 향기가 났는지, 내 이름을 부르는 가족들의 표정은 어땠는지...
시시콜콜한 일상들, 그 하나하나를 나는 잊지 않고 어제 있었던 일들처럼 기억하고 있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거짓말이야. 전부, 전부, 이딴 게 진실일 리가 없잖아!
 
로에른 A. 니아:(이리스가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는 중에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말아쥐었는지 여리게 떨려 올 지경이었다. 막연히 뇌가 보여줄 것이 카운터에 대해서라고만 예상했나?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 건 이리스뿐만이 아니라 그도 마찬가지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채 이용당하는 타이머라니. 세계를 위해서니까. 정말,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나? 구원자라는 사명이 신체를 내놓고 죽은 후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까지 감내할 정도로 깊었던가? 아무런 의문 없이 충성해 온 대가가 바로 저것이었나?)
(바로 맞은편에 동관을 두고선, CCTV로 제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실험하거나 희생시킬 구석을 찾고 있었으리라 상상하니 절로 핏발이 섰다. 해일처럼 몰아닥치는 감정에는 너무나 많은 게 뒤섞여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이리스 레터:싫어, 싫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그럴 거라면 이런 기억이라도 주지 말지. 날 이런 사람으로 만들지라도 말지, 차라리 아주 멍청한 인형으로... (스스로가 말하고도 비참해 토악질이 나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강하게 긁어내렸다. 손톱자국이 길게 남으며, 그 사이로 핏방울이 희미하게 맺힌다.)
(곧 그의 시선이 다시금 유리관을 향한다. 여전히 그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저기에 다른 이리스 레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저기에 있는 것이 피조물이고, 나는 진짜 인간인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어느샌가 유리관의 사이에서 열기를 품은 빛무리가 피어오른다. 압축되고, 또 줄어들어서, 종래에는 한 점에...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터트려버릴 것처럼.)
 
삽시간에 생겨난 빛무리가 공기를 밀어내고, 응축되고 모이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킵니다. 쾅! 요란한 소리가 지하를 울립니다.
 
잠시간 먼지가 일었습니다.
 
희뿌연 먼지가 가신 끝에 보이는 건…… 금 하나 가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 유리관들입니다.
 
내부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처럼. 그건 당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처럼.
 
이리스 레터:... ...역시 그렇지? (하나의 현실도피가 무산되면, 그다음 방어기제가 고개를 든다. 부서지지 않았어. 여전히 나는 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그렇다면...) ...나는 진짜인 거야.
 
로에른 A. 니아:(빛이 터지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제게 닥친 일도 근간을 흔들 만큼 큰 충격이었지만, 당신에겐 몇 배는 더하겠지. 어쩌면 근간부터가 모두 만들어졌을지 모를…… 그러나 영상을 모두 믿을 수 있을까? 목에 맺힌 핏자국을 보곤 다리를 굽혀 높이를 맞췄다. 정말로, 이토록 인간적인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나? 손수건을 꺼내 이리스의 목덜미를 살짝 닦았다.) 당신은 진짜예요. 당연히.
 
이리스 레터:...정말이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이 로에른을 돌아본다. 그는 자신의 표정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겨우 눈앞의 존재를 인식한 이의 손이 간절하게 뻗어져, 제 목을 닦아주는 손목을 강하게 붙든다.) 네가 그렇게 말한 거야. 네가...
 
로에른 A. 니아:네. 당신에겐 기억이 있어요. 아무리 정밀한 수술을 한대도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뇌에 새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확신할 수 없다. 기억과 환각의 힘이 있다면 아주 어려울지언정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에른은 이리스의 말에 긍정했다. 자신이 두 달 가까이 봐 온 이리스는 다른 인간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AI라고 하는 저도 인간인데, 저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밝은 당신이 인간이 아닐 리 없잖아요.
 
이리스 레터:그래, ... ... (손목을 붙든 손에 천천히 힘이 빠진다. 대신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웃었다. 싸가지는 조금 없어도 로에른은 똑똑해. 그리고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러면 믿어도 돼. 저 애가 긍정한다면, 나는 이런 곳에서 만들어진 괴물 따위가 아닌 인간일 거야, 분명...) ...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당장 마주하게 된 진실을 차치하고서도 기묘할 정도로 확신하는 하인리히의 태도와, 모습을 볼 수 없고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가족들... ...이리스 레터는 그것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기를 택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해줬잖아... ... 그거면 괜찮지 않을까. 너라면 말을 바꾸지도 않을 테니까. ...참 편리하고 불안정한 도피였다. 그러므로 그의 얼굴에 다시금 내걸리는 것은, 분명 평소와 같았으나 어딘가 심하게 뒤틀려버린 미소였다.)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만... 다치지는 않았지?
 
로에른 A. 니아:(남에게는 하등 관심이 없었던 그였지만, 두 달 사이 이리스 레터라는 파트너가 제 삶에 갑작스럽게 깊이 침투해 왔다. 많은 시간과 대화를 거쳐 이제 그는 이리스의 표정을 제법 잘 읽어내게 되었다. 지금의 미소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단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는 의미다. …이제는 이전과 같은 밝고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단 직감이 든다. 마냥 시끄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전 다치지 않았어요. 당신이 다쳤죠. (목덜미의 피가 지혈될 때까지 닦고 눌렀다.) 앞으론 이렇게 자해하지 마세요.
 
이리스 레터:(넌 참 사람을 헷갈리게 해. 선 안으로 전혀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할 정도의 곁만은 허락해 주지. 지금도 그래. 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아마 너와 내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지금 이런 행동들도 그저 내가 성가시게 굴면 귀찮아지니 내밀어 주는 희미한 온기에 불과할지 몰라... ... 희미하게 흔들리는 시선은 여전한 몰이해를 담고 그에게 못 박혀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라는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 이 몸뚱이를 혐오하지 않을 자신이. 아... ... 그렇구나. 단순히 네가 나의 파트너이기 때문에, 심심하고 외롭기 때문에 네가 필요한 게 아니야. 내게는 이제 정말로 너밖에 없어. 희미한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곳곳의 풍경이 참담합니다.
 
할 말을 찾기 어려워 숨을 크게 들이켰을 때, 소독약 냄새 대신 새파란 장미 향기가 흠뻑 폐를 파고들었습니다.
 
질식할 것처럼 짙은 향기는 엊그제 맡았던 그것과 똑같습니다.
 
고개를 돌리면,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시금 새파란 장미로 장식한 아치문이 서 있습니다.
 
멀찍이 서 있는 이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장미 향기가 짙어지고,
 
바람도 불지 않는데 너울, 너울 꽃송이가 흔들립니다.
 
이번엔 또,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요?
 
이리스 레터:... ...(천천히 고개가 돌아간다. 아치문을 향해서.)
넘어가야겠네. (형편없이 갈라지고 마른 목소리가 짙은 장미 향기의 사이로 가라앉았다.)
 
로에른 A. 니아:우리가 찾던 게 나타났군요. (기묘한 타이밍이다. 진실을 알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갈까요.
 
이리스 레터:(몇 번 휘청이고는 일어나 제대로 선다. 대답하는 대신, 홀린 듯 아치문의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기적과 같은 존재가 기적 아래를 건넙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아치문을 넘어서면 그곳은……
 
코마니 호수였습니다.
 
검게 물들어 있던 호수가 달빛을 받아 순간 반짝이고, 종이꽃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축제가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은 물러가고 희고 투명한 물결이 찰랑거립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수면의 색이 밝아옵니다.
 
둥글게, 둥글게, 원만한 원을 그리며 물결이 칩니다.
 
호수 바닥이 반짝이는 것과 동시에 종이꽃이 소금기에 녹아 물속으로 스며들고……
 
로에른과 이리스는 호수 아래에서, 어떤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수도입니다.
 
꽃가루가 흩날리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웃고 떠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상태로’ 멈춰있습니다.
 
호수가 비춰야 할 것은 밤하늘이어야 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에는 어젯밤 무대의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관찰> 판정
 
이리스 레터: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니,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대 뒤에, 원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시계탑이 서 있어요.
 
광장에 서 있는 그 시계탑입니다.
 
이리스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호수 속의 시곗바늘은 보란 듯이 움직입니다.
 
결국, 닿은 곳은 정확하게 12시 정각입니다.
 
그 순간 다시 꽃가루가 흩날리고, 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타이머와 카운터들이 무대 위에서 손을 흔듭니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위를 향했습니다. 광장의 시계탑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바늘은 11시와 12시 사이에 애매하게 멈춰있습니다.
 
호수 아래의 세계는 여전히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화려하게 춤을 춥니다.
 
자정을 기점으로 풀리는 마법이라니.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시계의 바늘을 움직이면 무언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시선이 바삐 오갑니다.
 
물론 세계를 구하고 싶은가, 아닌가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이리스 레터:(한참이나 호수 속의 풍경에 시선이 빼앗겨 있었다. 저 풍경 속에 내가 돌아갈 곳이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이어지는 시선이 로에른의 발치에 닿는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스쳤던 상념은 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어린애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장치네...
시간이 되돌아오면 빠르게 무대 뒤로 빠져야겠다. 퇴장했던 다른 시간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걸 보면... 다들 놀랄지도 몰라.
 
로에른 A. 니아:(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이 호수도 아치문도 신의 안배인가? 설화일 뿐이라고, 뜬구름 같은 소리일 뿐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마다 반박하듯 자신을 증명해 보인다. 시곗바늘이 움직이자 연기를 마치듯 다시 웃고 떠드는 이들을, 돌아가는 세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솔직히 회의감이 드네요. 하지만 지하에서 보고 들은 건 모두 DOT가 한 일일 뿐.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우리를 연호하고 경애하겠죠. (차라리 절대악이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난해대기라도 할 텐데, 그들이 한 일은 어쨌거나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손톱 아래에 난 거스러미처럼 껄끄러웠다.)
(허나 그 광경은 로에른의 어떤 내면을 영원히 바꿔 버렸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무런 의문 없이 DOT에 충성하고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이리스가 맨 처음 제게 공범자가 되자고 제안했듯, 이제는 어쩌면 그가 더 적극적인 이가 되어서, 의문과 의심을 품고 그들을 바라보리라.) 당신은 괜찮겠나요? 바늘을 돌려도.
 
이리스 레터:구원자라는 단어는 우리의 이름을 가리키지 않으니까. 개인의 삶, 생각, 감정...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심지어는 DOT의 내밀까지도... 알게 된다 한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 버리기도 하겠지. (문득 밝은 하늘 아래에서 마주했던 코마니 호수의 모습을 떠올린다. 동시에 다시금 목덜미 부근으로 손이 올라가려다가 멈추었다.) ...
하지만 이대로 영영 멈춰있을 수도 없고... (입안이 쓰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어떻게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돌아가야지. 아무런 문제 없잖아.
 
로에른 A. 니아:(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구원자라는 명패가, 지금만큼은 조금 거북하게 느껴졌다.)
문제가 없기는요. (이리스의 억지 미소를 들여다보았다.) 당신, 아무리 힘들지언정 아까 보았던 광경을 잊지 말아요. 그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대비해야만 해요. 계속 놀아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리스 레터:알아, 잊지는 않을 거야. 공범자가 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하 2층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기 싫은 듯 얼굴에 금이 갔다.)
...말 그대로 돌아가도 아무 문제 없다는 뜻이었어. 여전히 너는 너고, 나는 나잖아. 그거면 돼.
 
로에른 A. 니아:그래도 그 약속은 아직 기억하고 계셨군요. ……좋아요. 그럼, 가보죠.
 
두 사람은 함께 시계탑 앞으로 향합니다.
 
로에른이 두 사람의 발밑에 빛으로 된 발판을 만들어, 시곗바늘 앞까지 올려줍니다.
 
로에른 A. 니아:당신이 하시겠어요? (바늘을 눈짓했다.)
 
이리스 레터:같이 해. (바늘에 손을 얹었다.)
 
로에른 A. 니아:(말없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정각을 향해, 바늘을 돌린다.)
 
손을 겹쳐 시간을 되돌리자, 그제야 시계가 정각을 알리며 긴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세계가 순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웠던 밤하늘은 급격하게 색을 바꾸어 청명한 새벽이 되었다가 새파란 아침이 되고, 자줏빛 노을을 지납니다.
 
재빠르게 회전한 도밍게즈가, 다시금 어두운 밤하늘을 드리웠을 때,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크기의 달과 다른 위치의 별이 머리 위에 찾아옵니다.
 
눈을 깜빡이면, 다시 무대 뒤쪽입니다. 타이머와 카운터를 향한 환호성이 객석에서 터져 나옵니다.
 
무대 위건 뒤편이건, 그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시간이 멈추기 직전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원자의 이름을 부르짖고,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합니다.
 
누군가 놓친 풍선이 저 멀리, 하늘 위로 두둥실 날아오릅니다.
 
익숙한 밤하늘을 가르는 풍선은 붉은색. 너머에 뜬 별은 마냥 희고 곱습니다.
 
세계를 구원한 것을 후회하진 않나요?
 
진실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할지언정…… 현실은 이토록 당신에게 다정해요.
 
구원받은 것들은 구원자를 잊었지만, 그럼에도 맹목적으로 로에른을, 이리스를, 타이머와 카운터를 사랑합니다.
 
눈 아래 사람이 가득한 탓에 광장의 시계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날 선 바늘의 끝은 정확히 우리를 가리키고 있었을 거예요.
 
Chapter 1. 시곗바늘의 방향
 
:현실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1년은 366일이 되어버렸고, 하루의 여백은 온전히 우리의 것입니다. 세계는 당신에게 구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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