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약 17시간 반
언젠가 칠흑 같은 밤이 온 사방에 파동치게 되더라도…
고요하고 아련한 꿈을 헤매이던 이화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올립니다.
온몸이 물을 먹은 것처럼 무겁고, 아직 잠에서 다 깨지 않은 것처럼 정신이 혼곤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연입니다.
배이화:... ...아, 응. ...얼마나 누워 있었던거야?
이 연: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어. (애틋한 눈으로 한참이나 당신을 시야에 담으며, 양손으로 이화의 손을 꾹 감싸쥔 채 연신 안도의 한숨을 흘린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몽환의 늪 속에 오래 가라앉은 듯한 기분입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배이화: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65 |
판정결과: |
실패 |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 연:몸은 좀 어때? 겨우 눈은 떴지만…… 아직 아픈 곳이 더 있다면 말해줘야 해.
배이화:(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말라는 듯 간신히 입꼬리를 들어올리기도 했고.) ... ...괜찮아. 미안해,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걱정 많이 했겠네.
당신은 무거운 머리로나마 기억 속을 되짚습니다.
3년 전 숲에서 짐승에게 쫓기던 당신은 우연히 사냥을 하러 나왔던 연의 도움을 받았고,
날이 궂어지며 며칠간 연의 집에 머무르게 되던 게 아주 눌러앉게 되었죠.
그러면서 자연히 서로를 향한 마음이 싹터 왔습니다.
두 사람이 사는 초가집은 마을의 크기만큼이나 자그마하고 형편은 넉넉지 못합니다.
연이나 이화나 숲에 나는 것들을 얻어 내다팔고는 있지만, 이 시대의 평민이 그렇듯 큰 돈을 손에 넣을 순 없죠.
그럼에도 맞닿은 서로의 체온과 귓전에 어리는 웃음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큼 따스하고 소중하였습니다.
이 연:정말, 더 아픈 데 없어? (반대쪽 손 뻗어 당신의 이마에 대어본다. 한참이나 제 이마와 번갈아가며 온도를 재어보고선) 일단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평소에 좀 조심하라고 했잖아. 어쩌다 감기에 이렇게 심하게 들어선…… 사람을 걱정시켜. (무척 걱정했다는 걸 틱틱대는 투로 돌려말한다)
배이화:...정말이야, 이제 괜찮다니까. (바닥을 짚으며 서서히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아 느릿한 동작으로 연의 뺨에 손을 가져간다.) ... 미안.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 ...계속 옆에 있었던거야?
이 연:환자를 두고 그럼 어딜 가겠어. 그래도 약은 사야 하니까 중간중간 사냥은 다녀왔었지. (혹여라도 제가 나간 틈에 병세가 악화되거나 저를 찾을까 봐 오래 나가지 못하고 매번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후다닥 돌아왔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서히 집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화로에는 거의 숨을 다해가는 숯이 타닥거립니다.
짚을 꼬고 있던 것인지 당신이 누운 이불 바로 곁에 짚과 끈 등이 널려있습니다.
양식으로 쓰일 고구마와 밤이 담긴 그릇들, 책상 위에 놓인 몇 권의 책과 문방사우, 낡은 옷장과 서랍.
조촐한 세간살이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너질러져 있습니다.
간호에 힘을 쏟느라 주변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던 거겠지요.
이 연:오래 누워있었으니 배가 많이 고프겠네. 목마르진 않고?
배이화:...조금. (어질러진 집 안을 가만 내려보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던거야? ...기억이 가물해. ...너무 오래 잠들어있어서 그런가?
이 연:기억 안 나? 한겨울에 남은 열매라도 찾아보겠다고 뒷산에 갔다오더니 고뿔에 걸렸어. (금빛 눈엔 여전히 걱정이 가득 어렸다.) 누워있는 내내 정신을 거의 못 차리더라.
그의 말을 들으니, 누워있던 동안 당신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에 매진했었던 연의 모습이 어렴풋 떠오릅니다.
배이화:...아, 그랬지. (고개를 찬찬히 끄덕이다 걱정 어린 눈빛을 마주하고는 살짝 웃는다.) ... 그렇게 안 봐도 돼. 내가 누워있었더니 집도 어지러워졌네. 평소에는 잘 정리해두면서.
이 연:집은…… (그제서야 너저분해진 집을 돌아보곤 머쓱하게 시선 피한다) 어쩔 수 없었어. 간호가 우선이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화로에 불을 좀 더 때야겠으니까. 불씨를 가져올게.
오래된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그 사이로 온통 눈발이 날려 희게 변한 세상이 얼핏 드러납니다.
두 사람도 함께 여러 번의 겨울을 나며 고된 상황을 많이 겪었더랬죠.
비축한 식량이 다 떨어져 높게 쌓인 눈을 헤치고 옆마을까지 다녀오기도 하였고, 간신히 얻은 메마른 나무열매 열댓 개로 하루를 버티기도 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연이 불고무래(*아궁이에서 불을 꺼낼 때 쓰는 나무)를 들고 돌아옵니다.
화로의 불을 살리고, 그릇에서 고구마 두어 개를 꺼내 불돌 위에 올려놓습니다.
열이 올라오며 서서히 고구마가 익어가는 고소한 향기가 풍겨옵니다.
이 연: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 (주전자를 불 근처에 가져다댄다.) 요새는 물도 금방 얼어버린다니까.
배이화:(천천히 끄덕이고는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린다.) ...이리와. 밖이 많이 춥지? 눈이 많이 오는 것 같던데.
이 연:나야 추위를 별로 안 타니까 괜찮아. (그러면서도 곁에 가 풀썩 앉는다. 화로에 부채질을 하면서도 시선은 당신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와병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만 봐야 했으니.) 눈이 많이 쌓여서 바깥을 오다니기가 영 불편하긴 하더라. 장작이 슬슬 떨어져가서 곧 숲에 다녀오긴 해야 하는데 말이지.
배이화:(여전히 무거운 머리를 툭 기대며 불이 피어오르는 화로를 바라본다. 그에 더해 가까워진 체온이 느껴지면 차가운 몸이 조금씩 녹아간다.) ...여지껏 혼자 다녀온다고 고생 많았겠다. ..그럼 눈이 그치면 나가볼까?
이 연:눈이 오면 겉옷이라도 뒤집어쓰고 나갔다 와야지. (어깨에 기대어오자 반사적으로 흠칫하지만, 밀쳐내거나 몸을 빼지는 않는다. 살갗이 닿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였지만 함께한 시간이 첩첩이 쌓이며 경계심은 봄을 맞이한 눈처럼 녹아내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참 아프던 당신이 겨우 일어난 참이니, 더욱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화 넌 한동안은 푹 쉬기만 해. 오래 누워있었으니 힘이 많이 빠졌을 거 아냐.
배이화:...안돼. 그러다 너도 감기 걸리면 어떡해. (잠겨있던 목소리가 단호한 빛을 띄었다.) ...얼마나 더 올지도 모르고 위험해. (잠시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가 잔잔하게 웃는다. ...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신경쓰이게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지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데?
이 연:난 아무리 그래도 너처럼 한 달 가까이 누울 정도로 약하지는 않거든. (투덜거리면서 숯 속에서 고구마를 꺼낸다. 어느 정도 식었다 싶으면 섬세한 손길로 껍질을 까서 두 개 다 당신 앞의 그릇에 올려주었다.) 반박은 안 받아.
배이화:그건 그렇겠지만. ... 그래도 위험한 건 위험한거야. (단호하게 맺은 말에 조금 불만인 듯 입을 다물었다가 앞에 놓인 고구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개중 큰 것을 건넨다.) ... 자, 다는 못 먹어. 연이 너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잖아.
이 연:그렇다고 장작이 다 바닥났는데 그냥 둘 수는 없잖아? 때를 봐서 눈이 내리지 않을 때 서둘러 다녀올 테니 네 몸이나 더 신경 써. (됐단 듯 손 휘휘 젓는다) 됐어. 너나 먹어.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보인다고, 너.
배이화:(가만 화로를 바라본다. 시린 바람이 스미는 작은 초가에 화로까지 꺼지면 버텨내기 어려우니까 마냥 말리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겉옷으로 꼭꼭 싸매고 가야 해? 너무 멀리 까지는 가지 말고. (연에게는 종종 제 또래의 다 큰 어른인데도 꼭 어린아이에게 건네듯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 그 정도는 아니야. (손에 든 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한입 베어물었다.)
이 연:나이가 몇인데. 한 살 많다고 날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거 아냐? (툴툴대면서도 목 막히지 않게 조심히 먹으라며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화롯가에 있었던 덕에 물의 온도는 딱 좋게 미지근했다.) 잘 익었어?
배이화:...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해. (얌전히 물을 받아들었다.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물이 한 모금 넘어가자 그제서야 조금 편안해진다.) 응, 잘 익었어. ... 그러니까 하나 먹으래도. ... 내가 누워있는 동안 제대로 챙겨먹기는 한거야? 조금 수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와중에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친다. 저보다 늘 상대를 걱정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다.)
이 연:내가 아니라 널 걱정해야 한대도. (어투는 퉁명스럽지만, 고구마를 먹는 양을 지켜보는 낯은 온화했다. 매사 불퉁하고 다혈질이던 그의 성격이 이렇게나 풀린 건 전부 이화 덕분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이었다. 오래 앓았는데도 타인부터 신경쓰는 배려와 다정함이 저에게도 자연스레 옮겨붙은 덕이다.) 언젠 배부르게 먹은 적 있다고. 이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 뭐, 그렇게 나눠주고 싶으면 저거 반만 잘라주던가. (좀 더 작은 고구마 가리켠다)
배이화:(그제서야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다. 퉁명스러운 말투 덕에 다른 이들은 몰랐겠지만 저에게는 내보이는 상냥함이 늘 기뻤다. 언제나 그 안에 든 본심을 헤아리고자 했다. 같이 지냈던 시간 만큼이나 서로에게 물들어버린것이겠지. 놓여있던 고구마를 들어서 손에 쥐어준다.) ... 자, 다 먹어야 돼.
이 연:반만 달라니깐.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툴툴거리면서 결국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치켜올라가있던 굵은 눈썹이 이내 슥 처진다.) …… 맛있긴 하네.
배이화:... 거봐, 맛있지? 여기, 물도 마셔. (끝내 물 잔까지 쥐어주고서 연의 내려간 눈썹을 손으로 쓱 쓸어보고는 손에 든 반쪽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어 넘긴다. 남은 반쪽은 다시 그릇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이제 좀 따뜻해진 것 같아.
이 연:그래. (고구마도 받아먹은 김에 물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간호하는 와중에 삼시세끼를 잘 챙겨먹을 만한 정신은 없었으므로 고구마 하나가 별미처럼 맛났다. 결국 게 눈 감추듯 금세 다 먹어치워버렸다.) 배도 안 고프냐. 오래 누워있었는데 그것도 반밖에 못 먹고…… (이불을 들어 당신의 어깨에 잘 둘러주었다.)
배이화:(... 제 걱정에 정작 본인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을테니 당연한 일이었겠지. 언제 거절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런 모습이 퍽이나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이제 막 일어나서 그런가 봐. (둘러진 이불을 여미다 한쪽을 슬쩍 들어보인다.) ...안 추워? 같이 덮을까?
이 연:그럼 조금 지나면 허기가 느껴지려나. 아무튼 그 고구마 꼭 다 먹어야 한다. (경고하듯 말하곤 부삽을 가져와 화로의 재를 퍼올린다.) 덮고 있어. 난 화로 좀 비워야겠으니까.
어느덧 창호지 바깥이 어둑어둑하고, 연신 겨울의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벽을 할퀴고 지나갑니다.
부삽으로 재를 퍼올린 연이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섭니다.
오래 와병했다지만, 밤이 되었으니 이화도 곧 다시 누울 채비를 해야겠어요.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바깥으로 나서는 연의 옷차림이 날씨치고는 단촐했던 것 같은데… 뭔가 잊고 나간 게 아닐까요?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4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방 한 켠에 놓인 연의 겉옷이 눈에 띕니다. 껴입고 나가는 것을 미처 잊은 모양입니다.
바람이 찬데, 당신의 걱정처럼 이번엔 연이 고뿔에라도 걸리면 어쩌죠?
배이화:연아..! (겉옷을 주워 들고 문을 나선다.)
문을 열자 그 사이로 당신이 알던 연령 마을이 빠끔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하얀 이불을 덮은 고요한 뒷산, 고요히 잠든 들판에 우두커니 선 나무들과 그 틈의 정자, 얼어붙은 천(川).
훈기라고는 찾기 힘든 차디찬 한겨울 속이지만, 풍경만큼은 이런 때마저도 절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솜을 넣은 겉옷을 챙겨들고 문 바깥으로 발을 내디딥니다.
좋아요... 이화는 이불을 두르고 나섰습니다.
짚을 꼬아 묶은 식재료 몇 가지가 벽에 매달려 있고, 빗자루나 여분의 짚신 등 갖가지 생활 용품이 마당 한쪽에 정리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 역시 당신이 앓기 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막 재를 버리러 문가로 나서는 연이 보이네요.
배이화:(혹여나 소리가 묻힐까 싶어 조금 크게 불러세운다.) 연아, 겉옷 두고 갔어.
이 연:(저를 부르는 소리에 눈이 커진 채 돌아보더니, 서둘러 다가온다.) 이화? 이렇게 추운데 왜 나왔어! 버리는 건 잠깐이라 금방 들어가면 돼.
배이화:... 눈이 이만큼 쌓였는데. 정말 나처럼 쓰러지면 어떡해. 챙겨 입고 가. (겉옷을 어깨 위로 덮어준다.)
이 연:이 잠깐 정도론 안 쓰러져. 너도 참, 잔걱정이 많다니까. (그래도 결국 순순히 걸치고선 문밖에 재를 쏟아내고 돌아온다.)
내리던 눈이 잠시 그쳤는지, 조용한 밤입니다.
둥글게 뜬 달빛이 두 사람 위로 밝게 떨어져내립니다.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은 유달리 맑고, 시리도록 깨끗합니다.
널따랗게 펼쳐진 청보랏빛 휘장자락에 별빛이 바늘처럼 콕콕 박혀 아룽거립니다.
그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아직 다 차오르지 않은 [달]을 향해 저절로 시선이 향합니다.
배이화:(시선의 끝에 걸린 달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휘영청 떠오른 백금색 명월이 아른한 빛을 흩뿌립니다.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밤공기처럼 마냥 깨끗해보이는 달인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표면에 거뭇한 형상이 비치고 있습니다.
어떠한 모양이라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엔 어렵지만요.
어쩐지 불길한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스물스물 기어오릅니다.
이 연:뭐해. 얼른 들어가잖고. 잠깐 바람이 잦아들긴 했지만 언제 또 눈발이 흩날릴지 몰라.
배이화:(저를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아, 달이 묘해서. 뭔가 거뭇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해. (다시 한번 올려다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들어가야지.
이 연:달이? (고개 삐딱하게 틀어서 흘끗 올려다본다.) …… 기분 탓이겠지. 가자.
월야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간 간신히 나은 고뿔에 다시 붙잡힐지도 모릅니다.
땔감이 부족하여 아궁이의 불은 타오를 때보다는 꺼지는 때가 더 많고, 솜이불 두 겹을 덮어야만 간신히 냉기를 막을 수 있는 겨울밤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온기가 있다면 오늘 밤도 수월히 버텨낼 수 있을 거예요.
배이화:... 잘 자, 연아. (솜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톡톡 두드린다.)
이 연:너야말로. (목끝까지 올린 이불을 들어 당신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바로 눈을 감지 않고, 이부자락 위로 흩어진 보랏빛 머리칼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었다.)
(한참 침묵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오래도록 내 곁에 머물러줄 건가?
배이화:(들린 이불 틈으로 들어가 당신 쪽으로 돌아 몸을 누이고는 머리칼을 쓰담는 손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그맣게 내려 앉는 목소리에 나지막히 감았던 눈을 뜬다.) ...응, 당연하지. ... 왜 그런걸 물어?
이 연:…… 너를 연모하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에게 제 마음 붙잡혔음을 알았다. 하지만 제 감정을 마주보는 데에도 미숙하니 드러내는 데에는 망설일 수밖에. 결국 입 밖으로는 한 번도 내지 못한 채 요동치는 심장만을 간직하고 지내왔다.) 오래 아팠으니 혹시나 다신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수없이 걱정했어. 혹여라도 그렇게 된다면 말하지 못한 게 평생 후회될 것 같아서. (어둑어둑한 방이라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건만 괜시리 부끄러워 시선을 피한다.) 다행히 나았으니까, 쭉 곁에 있어. …… 그래줘.
배이화:(눈이 반짝 크게 뜨인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들었지만 가장 크게 자리한 것은 분명 행복이었으리라. 지금이 어두운 밤인 것에 몹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이렇게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오래도록 걱정시킨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쓰러졌던 일도 외려 기쁘게 느껴졌다. 아마 제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띄고 있었을테다. 잘 익은 홍시 마냥 붉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벅찬 마음이 금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 곁에 있을게. 약조할게. ...언제까지나 그러겠다고.
... 나 역시도 같은 마음이니까.
이 연:(심장이 황소마냥 거칠게 박동했다. 혹시나 이 소리가 들릴까 봐 괜시리 작게 헛기침을 했다. 같은 마음이라는 대답에 전부 소용없어졌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비슷한 마음이라는 짐작이 있었기에 솔직히 고백하기는 했지만, 막상 답을 듣자 어찌 기분이 이렇게 들뜨고 자꾸만 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려 하는지.) 같은 마음일 수 있어…… 기쁘군. 고마워. 화답해줘서. (감격에 목소리 끝이 이파리마냥 떨려왔다.)
이만 자. 나는 작은방에서 베를 좀 짜야겠으니까.
배이화:(그새 어둠에 길들여진 건지 당신의 얼굴이 흐리게 어른이며 보일 쯤이면 가볍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려준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감정이 고스란히 와닿았기 때문에 가벼운 손짓임에도 그 끝이 약하게 떨렸다.) ...나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뻐. 고마워.
(이어지는 말에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인다.) ...이 시간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텐데. ...연이 너도 간호 한다고 고생했잖아. 오늘은 쉬어.
이 연:사냥은 날이 궂어서 매일 갈 수 없으니까. 시간이 날 땐 베를 짜서 약값에 충당했어. 처음엔 손에 안 맞아서 엉망이었는데 이젠 좀 감이 잡혔거든. 이럴 때 좀 만들어둬야 해. (이불 안을 따뜻하게 덥혀두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혹여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이화에게 이불을 잘 둘러서 입구를 꽁꽁 막았다.) 나는 걱정 말고. (애정어린 손길로 당신의 이마를 쓸어준다.)
연의 온기 어린 손길에 서서히 잠이 몰려옵니다.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고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꽤나 피로하네요.
배이화:...그래도. (걱정스레 올려보다가도 손길이 반복될 수록 눈꺼풀도 점점 무겁게 내려앉더니 머지않아 닫혔다.)
눈이 감기고, 주변의 소리가 먹먹해져 옵니다.
겨우 고뿔이 나았으니 푹 자고 나면 몸상태도 한결 더 좋아지겠지요.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은 채, 애절한 슬픔에 잠겨가는 꿈을…
따스한 체온을 감각하며 눈을 뜹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배이화:
건강
기준치: |
35/17/7 |
굴림: |
63 |
판정결과: |
실패 |
그래도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배이화:(나른하게 눈을 뜨면 곁에는 제 연인이 잠들어있다. 그것 만으로도 잔잔하던 심장 소리가 귀에 닿을만큼 크게 울린다. 늦게 잠들었을테니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보다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레 매만진다. 마음이란 참 이상하지. 닿을수록 더 애틋해지는 것이 이리도 커질 수 있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연:(본디 잠이 별로 없어 일찌감치 일어나곤 했지만, 늦게 잠들었기 때문인지 좀처럼 눈 뜨지 못하고 잠에 취해 있다가 늦게서야 비몽사몽한 눈을 뜬다.) 이화…… 일어났어? (목소리가 잠긴 채다.)
배이화:(천천히 손길을 멈추고 눈을 맞춘다. ) ... 많이 피곤할텐데. 좀 더 자.
이 연:아냐. 일어나야지…… 아침식사도 해야 하고. (여전히 혼몽한 듯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당신의 시선을 흐리게 마주하다가 애써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일어나 걸어가려다 화로에 발이 걸려 대차게 휘청거렸다.)
배이화:연아..!! (걱정하던 눈동자에 놀라움이 금새 덮어 씌워진다.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릎이며 걸린 발이며 꼼꼼히 살핀다.) 괜찮아? 다친 데는? ...눈도 아직 제대로 못 뜨면서 왜 그랬어.
(조그맣게 숨을 내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끊는다.) ...아침은 내가 준비할게. 조금만 쉬고 있어.
이 연:됐어. 발이 좀 걸린 것뿐이야. (발을 몇 번 잘게 털고 벽을 짚고 섰다.) 잠이 확 깨네.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 정도로 약한 소리 할 수 있겠어? 너는 좀 더 쉬어야 하니까, 내가 할게.
참, 몸은 좀 어때?
배이화:...진짜 괜찮아?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툭툭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시선으로 바쁘게 좇아간다.)
...오늘은 좀 괜찮아. 어제보다 훨씬.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이 연:진짜 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넌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멀쩡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어제보다 낫다니 다행이네.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안도의 한숨 내쉬고는 일어나 벽을 짚으며 문을 열고 나선다.)
곧 연이 소박한 찬이 올라간 밥상을 들고 들어옵니다.
상을 들고 문지방을 넘다가 또 한 번 발이 걸려 휘청거리고 마네요.
이 연:어이쿠. (기울어지는 그릇들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밥상을 내려둔다.) 안 쏟아졌지? (다행히 어디 하나 쏟아진 것 없이 멀쩡하다. 모양은 좀 엉망이 됐지만.)
배이화:(놀라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 쏟아진 걸 걱정할 때야? ...정말 괜찮은거야? 고뿔이라도 옮았나..? (제 이마와 몇 번을 번갈아 재어본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은 좀 쉬는 게 좋겠다.
이 연:(손 대보면 그저 평범한 체온이다.) 난 멀쩡하거든. (손 잡아 스으윽 내린다.) 밥이나 먹자. 반찬은 별로 없지만…… 굶는 것보다야 낫겠지.
배이화:(잔 걱정이 많은 터라 대답을 들어도 걱정스러운 기색은 여전했다.) ... 그럼 밥이라도 많이 먹어. (제 그릇에 있는 것을 반이나 덜어주고 나서야 한숟갈 입에 넣었다.)
이 연:너 일어난 지 아직 하루밖에 안 됐거든? 주긴 뭘 줘. (덜어준 밥 다시 그대로 되돌려준다. 그리고서야 수저를 들어 말라붙은 나물이나 나무열매 같은 소박한 반찬과 함께 식사를 했다.)
배이화:...정말. (천천히 씹어 삼키고는 돌아온 밥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찬과 함께 그릇을 비워냈다. 수저를 가지런히 내려두고는 그릇들을 한데 모아 정리한다.) 내가 정리할게.
이 연:(한숨 쉰다. 여기선 더 말려봤자 말도 안 들을 것 같고. 몇 번 휘청거리면서 걱정 끼친 것도 있으니…… 이번엔 한 수 져주기로 하고 고개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따뜻하게 입고.
배이화:응.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겉옷을 찾아 팔을 끼워 넣었다. 대충 정리해 둔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선다.)
단촐한 조반을 먹고 나니, 배가 든든해지면서 활력이 돕니다.
역시 기운이 살기 위해서는 든든한 식사가 답이지요.
모두가 하루를 버티고 또 살아가기 위해 쉼없이 바삐 움직이는데, 그간 너무 오래 누워있었습니다.
기운도 살고 몸도 한층 가뿐해졌겠다, 잠시 뒷산으로 산책이라도 나갔다 오는 건 어떨까요?
배이화:(찬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다. 계속 누워있는 것 보다는 오늘은 좀 움직이는 편이 낫겠지, 그런 생각에 일렀다.) ... 오늘은 뒷산에 가볼까.
이 연:(문 열고 얼굴 빠끔 내민다) 다 했어? 춥진 않고? 얼른 들어와.
배이화:응, 금방 들어가.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당신의 얼굴에 가벼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연:(다시 솜이불 들어서 어깨를 감싸듯이 둘러준다.) 내가 한대도 말을 안 들어.
배이화:...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둘러지는 솜이불을 물끄러미 보다 입을 뗀다.) ...오늘은 뒷산에라도 다녀올까 싶어서.
이 연:걱정되니까 그래. (이불 잘 둘러주다가 눈썹 치켜올린다) 뒷산에는 왜?
배이화:(올라가는 눈썹을 힐끔 보고는 찬찬히 입을 연다.) ...집에만 있으려니 몸이 무거워서. 산책이라도 갈까 하고.
이 연:바로 어제까지 앓느라 누워있었으면서. 산책은 무슨 산책. (한숨 푹푹 쉰다. 답답할 만도 하다는 걸 금방 납득했기 때문이리라.) 그럼 같이 가. 옷도 따뜻하게 몇 겹은 입고.
배이화:(땅이 꺼질 듯 이어지는 한숨에 조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가 금세 끄덕인다.) ... 알겠어. 같이 가.
이 연: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야 해. 알겠어? (걱정이 태산이다. 몇 번이나 물으면서 솜을 가득 채운 옷을 둘러입혀준다.)
배이화:...응, 알겠어.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면 바로 얘기할게. (걱정을 시킨 건 사실이지만, 어째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나 잔뜩 껴입으면 연이 넌 뭘 입고?
이 연:내 것도 있어. (마지막으로 남은 솜옷 하나 들어보인다.)
배이화:...못살아. (가장 겉에 둘러진 옷 하나를 벗어 건낸다.) ...이건 나도 양보 못해.
이 연:상식적으로 감기에 걸렸다가 막 나은 사람이 여러 개 입는 게 낫겠어, 멀쩡한 사람이 입는 게 낫겠어? (멀찍이 떨어짐)
배이화:(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잠잠하다가 자박자박 가다간다.) ...오늘은 안 멀쩡한 것 같으니까 얘기 하는거야. 얼른 받아.
이 연:나 멀쩡해. 아깐 진짜 잠이 덜 깨서 그랬던 거라니까. (방년을 넘긴 나이면서 아이처럼 유치하게 투닥거린다)
배이화:...고집이야. (툭 뱉은 말이지만 웃음기가 서려있다. 아이처럼 유치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기어이 지지 않고 옷을 손에 들려준다.)
이 연:이길 수가 없네. (결국 손에 들린 옷을 내려다보며 고개 절레절레 젓고는 걸쳐입는다.) 자, 만족하십니까, 낭자?
배이화:(...결국에는 웃음이 터졌다. 개울물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간다.) ... 아주 만족스러워요, 낭군님.
이 연:너, 너는 뭘…… 그런 호칭을……. (얼굴이 급격히 빨개져서 말 더듬다가 후다닥 문가로 나선다. 한 번 더 휘청할 뻔해서 벽 짚은 건 덤이다.)
배이화:(웃음소리는 쉬이 그치지 않았다. 또 한번 연이 벽을 짚기 전까지는. 쪼르르 다가서서는 손을 내민다.) ...연아! ...역시 한 겹 더 입히길 잘했지.
이 연:잘 모르겠는데……. (어물거리며 한 손에 얼굴 묻고는, 반대쪽 손으로 내민 손 조심히 맞잡는다.) 빨리 가기나 하자. 누구 때문에 바람이나 쐬어야 정신이 들겠어.
배이화:(걸음을 옮기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반대쪽 손에 가려진 당신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건 덤이었다.) ...얼굴 엄청 빨갛다. 꼭 홍시 같아.
이 연:모른 척 해줘, 좀. 손 잡은 걸로도 떨려서 죽겠다고. (하도 열이 나서 바깥이 춥게 느껴지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와 뒷산을 향해 천천히 걷습니다.
온 사방에 눈이 한가득 쌓여, 사람이 다니는 좁은 곳만 간신히 길의 형태가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두껍게 입고 나온 덕인지, 혹은 오늘따라 바람이 잔잔해서인지 평소의 겨울 날씨에 비하면 싸늘함이 덜합니다.
황량한 나무들은 나뭇잎 대신 흰 눈옷을 겹겹이 껴입었습니다. 바람결에 떨듯이 나뭇가지가 파르르 흩날립니다.
고목들이 내민 촘촘한 가지들에 의해 연푸른빛 하늘이 조각조각 갈라집니다.
눈길이 미끄러울지도 모르니 조심조심 올라가기로 해요.
배이화: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3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길을 오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무열매 한 주먹을 발견했습니다!
운 좋게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아 남아있었나 봐요.
배이화:아, 저기. (나무 열매가 있는 곳으로 찬찬히 걸어간다.) ..나오길 잘했다. 그렇지?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이 연:열매가 아직도 남아있을 줄 몰랐는데. (감탄사를 뱉으며 다가가 열매를 주먹 가득 쥐었다.) …… 그러네. (네 웃음은 하얀 눈발에 내리쬐는 햇살보다도 희고 밝다. 홀린 듯 잠깐 당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배이화:...작은 주머니라도 가지고 올걸 그랬나 봐. (손에 쥐어드는 모습을 좇다 눈을 마주한다.) ...... 왜 그렇게 봐? (새삼스럽게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겨울이라 티나지 않을테니 다행이지.)
이 연:흠흠. (헛기침 하며 고개 돌린다.) 아무것도 아냐. 그냥…… 예뻐서. (모깃소리처럼 중얼거리곤 부끄러움을 모면하려 손 살짝 잡아당긴다.) 가자. 빨리.
배이화:...아. (조그만 목소리가 제게는 큰 북소리처럼 울린다. 겹겹이 둘러싼 솜 옷이 답답하게 느껴질만큼 볼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정말 겨울이라 다행이야.) ... 고마워. (따라 걸음을 옮긴다. 어쩐지 가벼워진 발걸음 위로 흰 눈밭보다 환한 웃음이 언제고 걸려있다.)
느릿하고 여유롭게 산책을 이어가고 있자면, 토도독- 무언가 뛰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잡힙니다.
흰 산토끼가 눈밭 위를 총총 뛰어, 고갯길 너머로 사라집니다.
눈이 쌓인 탓에 행적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찌되었든 식량이 부족한 이 한겨울에는 작은 짐승이라도 간절한 법입니다.
이 연:한 번 가볼까? 토끼는 워낙 발이 빠르고, 나도 활을 안 가져왔으니 잡기 쉬울 것 같진 않지만.
이 연:흠. 좀 살펴볼게. (손을 놓고 조심스럽게 토끼가 뛰어간 방향으로 걸어가 살펴본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길이 있긴 해.
(어떻게 할까, 라는 듯 고개 돌려 당신 본다)
배이화:(멀어지는 토끼를 눈으로 좇는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돌아오자.
이 연:그래. 무리할 것 없어. 열매도 찾았으니까.
그럼, 내 뒤만 조심히 따라와.
(조심스럽게 길 위로 발 내디딘다.)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따라오면 될 거야.
배이화:...응, 조심해. (앞을 수놓는 발자국 위로 발을 딛는다.)
혹여나 미끄러져 비탈을 구르진 않을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딘 지 일각쯤 지났을까요?
이 연:이미 도망쳤나 보네. 예상은 했지만. (아쉬워한다.)
아쉬움에 괜시리 눈밭에 남은 자그마한 발자국을 좇다 보면…
고목의 두꺼운 가지에 웬 [밧줄]이 매인 채입니다.
배이화:... 그러게. 너무 늦었나보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고목으로 향했다.) ... 왜 여기에 매여있을까? (밧줄에 손을 가져간다.)
큰 고목에 걸린 밧줄은, 좀 더 꼼꼼히 보니 옆 나무의 아래쪽 기둥에까지 이어져 단단하게 묶여 있습니다.
이 연:다른 사냥꾼이 설치해뒀나 보네. 난 이 길은 처음 와보거든.
혹시 모르니 손대지는 말고. (당신의 손이 닿기 전 슬쩍 밀어낸다.)
배이화: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으로 적절하게 장소를 선정했군요.
배이화:...이렇게 큰 덫이면 뭘 잡으려고 했던걸까?
(처음 와보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남았다.)
이 연: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거려나. 토끼보다는 큰 짐승을 노린 것 같은데.
수풀이 많네. 토끼는 못 찾을 것 같으니…… 돌아가자.
배이화:응, 그러자. (몸을 돌려 왔던 길에 놓인 발자국을 따라 돌아간다.)
어느덧 해는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떴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흰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옅은 햇빛이 투사합니다.
예정에 없던 길을 밟으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났습니다.
이 연:조금 있으면 점심 때네. 이만하면 산책, 원하는 만큼 했지?
배이화:(천천히 끄덕이고는 손을 잡는다.) 이만 돌아갈까?
이 연:그래. (간결히 고개 끄덕여 답하고는 다시금 손 맞잡은 채 걸어간다. 눈이 많이 쌓인 부분에서는 힘있게 꼭 잡아주었다.) 거기,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왔던 길을 되감으며 눈송이 위로 발자국을 한층 더 깊이 각인합니다.
산을 내려오고 들판을 걸어 두 사람의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연이 꼭 잡고 있던 손을 놓습니다.
이 연:어제 베를 짜느라 실이 다 떨어졌더라. 시장에 좀 다녀와야겠어. 먼저 들어가.
이 연:너, 산책도 꽤 오래 한 거 알지. 찬바람 더 쑀다가 다 나은 고뿔에 또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눈 흘긴다) 금방 갈 테니까, 얼른 돌아가.
배이화:(말을 덧붙이려다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이 연:걱정 마. 그럼, 다녀올게. (손 가볍게 흔들고는, 갈래길로 빠져 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화는 점심 식사 준비라도 먼저 하고 있는 게 좋겠네요.
배이화:(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 집으로 걸어간다. ...다녀오면 시장할테니 미리 점심을 준비해둬야겠네.)
이화가 집에 막 도착하여 점심 준비를 하려는 그때.
누군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옵니다. 몇 년 전부터 안면을 튼 이웃, 김씨네요.
배이화:아, 네. 오랜만이에요. 날이 많이 춥죠?
김씨:난리도 아니야. 우리 집 우물도 싹 얼어버렸지 뭔가? 그래서 강 얼음이라도 깨야겠다 싶어 나가는 길일세.
연령 마을은 크기도 작은 편이었지만, 인구수는 더 적어서 가장 가까운 이웃집까지 가는 데만도 이십여 분 정도는 걸어야 했죠.
이 조용한 마을에서는 나름대로 친근한 사이입니다.
배이화:...불편하셨겠어요. 뭐라도 거들어드릴까요?
김씨:아이, 아니야. 얼음 깨는 게 어디 보통 힘 가지고 되는 일인가. (손 내젓는다)
의례적인 인사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김씨가 집안을 기웃기웃거립니다.
김씨:그나저나, 끙끙 앓던 사람은 좀 괜찮아졌는가? 많이 아팠다고 들었는데.
무슨 소리일까요? 어제까지 앓았던 사람은 연이 아니라 당신이었는데요.
이화가 의문을 표하면, 김씨는 잠깐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머리를 긁적입니다.
김씨:으음? 자네 집에 환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내 가족 먹여살리려고 하도 정신없이 살아서 그런가, 잠깐 헷갈렸나 보이. 자네도 알다시피 요새 날씨가 말이 아니잖은가.
어쨌건, 이제 털고 일어났단 거지? 참으로 다행이구만!
배이화:...네. 그렇죠. (들을수록 의문만 가득해져서 답을 얼버무린다.)
...아, 혹시 얼마나 앓았는지는 아세요?
김씨: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나도 이전에 지나가듯 들은 게 다라서. (고개 기울인다)
아무튼, 난 이만 가보겠네.
배이화:(고민에 잠겨있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 네. 바쁘실텐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죠? ...조심히 들어가셔요.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구요.
김씨:아이, 아닐세. 뭐 이런 걸로. 이화도 날 추우니 몸조심하고.
겨울은 제 한 몸 앞가림하기도 힘든 시기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납득이 쉽게 가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으니 연이 간호를 위해 애써 움직이는 모습을 김씨가 목격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따라 거동에 불편함이 있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었죠.
걱정이 됩니다. 시장까지 가는 길도 꽤나 거리가 있는데 혼자 다녀오게 두어도 괜찮은 걸까요?
배이화:(김 씨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다보니 어느새 마음에 불안이 스멀스멀 자리 잡는다.) ...안되겠다.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시장을 향하는 길로 옮기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시장은 조용한 연령마을에서 그나마 가장 북적이는 곳입니다.
그래 보아야 겨우 이삼십여개 남짓인데다 그 중에 절반은 보부상들의 좌판이지만요.
알록달록한 물건들과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절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드문드문 모여 물건을 구경하거나 주막에 죽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비녀, 선추, 노리개, 떨잠, 가락지 등등 장신구들이나 치마와 솜을 누빈 버선 같은 의복, 달콤한 다과 등……
이 거리에는 아직 연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를 찾을 겸, 시장가를 돌면서 연에게 줄 선물이라도 사 볼까요?
배이화:(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어나간다.)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고생했는데. 뭐라도 보답할만한 게 없을까...
(따뜻해보이는 의복이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매색, 청록색, 벽람색, 빛깔도 다양하군요.
배이화:...예쁘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상인에게 인사를 건낸다.) 안녕하세요, 여기 이건 얼마인가요? (앞에 놓인 누비 옷을 가르키며)
"이거? 솜을 꽉 채워 만든 거라 꽤나 비싸. 닷 냥이오."
배이화:
재력
기준치: |
10/5/2 |
굴림: |
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이화:....아, 때마침 딱 있어요. 그럼 이걸로 하나 부탁 드릴게요.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아주 따뜻하고 두툼해 보입니다.
배이화:...감사합니다. 많이 파셔요. (푹신한 누비옷을 손에 들자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떠오른다.) ...좋아해주면 좋을텐데.
..아, 얼른 연이를 찾아야겠다.
누비옷을 잘 챙기고 좌판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위화감이 스물스물 피어올라 어깨를 어루만집니다.
연령마을이 아무리 조그맣다지만 이전에는 시장의 규모가 이보다는 더 컸던 것 같은데요.
드문드문 빈 자리들도 많고, 가판대의 물건들도 하나같이 양질이 빈약합니다.
배이화: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4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뒤쪽의 좌판에서 상인 두엇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상인1:아니, 대체 이 엄동설한은 언제쯤 끝나는 거야?
상인2:이제 조금 있으면 다섯 달째 아니오? 나 참, 연령에 저주라도 내렸는지.
배이화:(대화하던 상인들에게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다섯 달째라니 무슨 이야기인가요?
상인1:보아하니 종종 본 얼굴인데… 밖은 내다보지도 않고 집안에 처박혀있기만 했나? 지금
몇 달째 입춘이 찾아오질 않고 있잖소. 뒷산만 넘어가면 나오는 이웃 마을에선 벌써 새순이 돋고 한창 꽃이 피었는데, 이 연령마을만 도통 눈이 녹질 않는다니까.
상인2:햇빛이 없으니 농작물은 자라질 못하지, 산을 타봐도 어디 눈을 뚫고 풀떼기가 크겠어? 눈 파내서 다 얼어붙은 거라도 간신히 찾아 근근이 먹어야 할 처진데. 여기 시장에 있는 물건들은 아마 대부분이 이웃 마을에서 떼온 것들일걸.
상인1:연령을 굽어살피는 신선께서는 어디로 가셨는지! (탄식한다.) 계속 이 얼어붙은 날씨가 풀리지 않는다면 얼마 남지 않은 이들마저 다 이곳을 떠나고 말 걸세.
기이한 일입니다. 겨울이 그토록 오래 지속되고 있다니요?
좌판의 주인들이 대개 보부상인 이유가 있었군요.
게다가 당신이 누워 있는 사이에 시간이 이토록 빠르게 흘렀다니...
분명 당신이 앓아누웠을 즈음은 한창 동지에 가까웠던 때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한 여인이 이화와 상인들 사이로 끼어듭니다. 당신도 이따금 마주친 기억이 있는 마을 주민이네요.
여인:저, 혹시 제 딸을 보셨습니까? 키가 조그맣고 눈썹이 덥수룩한 아이인데... 왜, 여기에서도 종종 채소를 사가지 않았습니까. 말라빠진 열매라도 찾아보겠다고 어제부터 산으로 올라갔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지 뭡니까. (걱정이 가득한 어조로 말한다.)
상인2:미안하지만 보지 못했다네. 날도 이리 추운데 여즉 들어오질 않았다니... 거 큰일이구먼.
여인의 애타는 눈빛이 이화를 향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대답도 별 다를 바는 없겠지요.
배이화:...아, 죄송해요. ...저도 본 적이 없어요. 혹시 마주치면 꼭 데려다 드릴게요.
여인은 한숨을 쉬며 다음 좌판으로 걸어갑니다.
여인을 따라 다음 좌판으로 가도, 방향을 틀어 다음 거리까지 살펴보아도 연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간다더니, 이 조그만 곳에서 얼마나 동선이 어긋나기에 마주치질 못하는 것일까요?
눅눅히 새겨진 겨울의 공기가 숨을 들이쉴 적마다 시리게 폐부를 찌릅니다.
일단은 돌아가서 연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어요.
배이화:(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길을 나선다.)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아도 찾는 이는 보이질 않습니다.
하릴없이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황량한 마당의 한구석에 웬 [종잇장]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배이화:...이게 왜 여기 떨어져있지. (종잇장을 들어 확인한다.)
책에서 찢어낸 듯, 한쪽 표면이 삐쭉빼쭉하니 고르지 못합니다.
오래된 책이었는지 재질이 아주 낡았고 색은 누렇게 변색되었습니다.
험한 바람에 날리고 구르며 군데군데 찢겨져 글자를 전부 알아보기도 어렵습니다.
배이화:(적힌 글을 의아하게 읽어 내리고는 곱게 접어 소매 안쪽에 넣어두고는 방으로 향한다.) 연아, 돌아왔어?
방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연은 없습니다.
배이화:...이상하네, 어디까지 간거지. (조그맣게 생겨난 불안감이 점점 커져 마음이 어지러이 술렁인다.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다 다시 마당으로 나선다.)
마당으로 나가 한참을 기다려도 연은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 식사를 차릴 시간이 올 때까지도 보이질 않네요.
완연한 어둠의 휘장이 하늘을 수놓고 나서야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연이 보입니다.
이 연:(빠른 박자로 걸음 내딛다가, 문 바깥에 서 있는 이화를 보고는 그야말로 경악하며 뛰쳐온다.) 이화? 왜 바깥에 있어!
배이화:...연아..! (쪼그려 앉아있다가 당신의 인영이 아스라히 보이면 그제서야 자리에서 튕겨져 일어난다.)
어디까지 갔다온거야. ...걱정했어.
(차게 식은 두 손이 애타게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
이 연:손이 차갑잖아. 설마, 계속 기다린 거야……? (흔들리는 눈으로 당신의 손을 꾹 감싸다가, 서둘러 안쪽으로 걸음 옮긴다.) 공기가 이렇게 찬데. 일단,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배이화:...이제 막 나온거야. 한참을 기다려도 오질 않길래.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히 웃어보인다. 꽁꽁 언 손 끝이며 붉은 볼과 귓가가 기다림의 길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할 것도 없었다.)
...응, 들어가자. 밖이 많이 춥지?
이 연:거짓말. 손은 물론이고 귀까지 빨갛게 얼었잖아. 고뿔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왜 이렇게 미련한 짓을 했어. (한숨 쉬며 무어라 책망하려다가도 그만둔다. 결국은 자신 때문이 아닌가. 빨리 돌아왔어야만 했는데…….) 나는 괜찮아. 네가 걱정이지.
(서둘러 안에 들어서 화로에 불부터 붙인다.) 실은 일찌감치 샀는데, 마주친 이웃사람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잡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 간 김에 나무 패는 것도 좀 도와주고 오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 지경이네. 네가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올 걸 그랬나 봐. (혹여나 또 고뿔이 들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책이 비처럼 내린다.)
배이화:...진짜야. 밖이 추워서 그래. 잠시만 나와있어도 이러네. (되려 걱정을 끼친 꼴이 되어 미안함에 더 환히 웃었다.)
...그런거면 다행이다. 못 마주쳐서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했어. ...오늘 상태도 안 좋았으니까. (시린 두 손을 꼭 쥐고 조물거리다 다시 입을 연다.) ... 연이 넌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너 주려고 선물도 샀어. (구석에 개어둔 누비옷을 들어보인다. 걱정스러운 표정에 괜히 더 즐겁게 웃어보인다.)
이 연:선물? (자책에 괜히 주먹만 꾹 쥐고 있다가 고개 든다. 두툼한 누비옷을 확인하고는 미간의 골이 더 깊어진다.) 오래 바깥에 나와 있을 거면, 차라리 저걸 너나 두르고 있지. 마음은 고맙지만 내게 무엇보다 중한 건 이런 옷 같은 게 아니라 너라고. (평소라면 낯간지러워 하지 못할 말이나 걱정을 두르니 솔직한 본심이 튀어나온다.) 네가 또 아파서 눕기라도 하면 옷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배이화:...미안해. (조금 어두워지는가 싶던 얼굴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다. 조물거리던 두 손에 조금 온기가 돌아오면 구겨진 미간을 조심스레 쓸어내린다.) 거기까지 생각이 안 닿았어. (이리 자신을 걱정하는 것에서 드러나는 본심이 달갑기도 하고 그만큼 미안해서 웃는 듯 서글픈 묘한 낯이 되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또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 연:…… 아냐. 내가 미안하지. 다음엔 이런 일 없게 할게. (품에서 실꾸러미를 꺼내 곁에 내려두고는 누비옷을 걸쳐입는다. 당신에게 보여주듯 이리저리 돌아본다.) 따뜻하네. 네가 날 생각하면서 사와준 거라 더 그런가 본데. 어때, 잘 어울려?
배이화:... 연이 네가 왜 미안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옷을 걸쳐입은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알록달록 놓인 색색의 옷들 중 고른 벽람색의 누비옷은 마치 맞춤처럼 잘 어울렸다.) ...응, 아주 곱다. 선녀같아, 예뻐.
이 연:선녀는 무슨. (쑥쓰러운 듯 머리를 매만진다.) 내가 아니라 네가 선녀지. 자, 이제 잘 때까지 네가 입고 있어. (벗어서 이화의 어깨에 잘 둘러준다.) 네 머리색과 눈색과 비슷하니, 꼭 네 것 같네.
배이화:...정말이야. 진짜 고와. (뺨을 가볍게 쓰담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이러려고 사온 게 아니었는데. (가만 둘러지는 옷을 보다 번뜩 고개를 들었다.) ... 아, 그러고보니 저녁은?
이 연:그러면 바깥에 나와있지 말던지. (그런거나 말거나 꼼꼼하게 잘 둘러 준다.) 아직. 대접해준다곤 했는데 거리가 머니, 저녁까지 먹으면 더 늦어질 것 같아서 왔어. 그런 넌? 보나마나 안 먹었지? (제 말이 틀렸냐는 듯 눈초리를 가늘게 뜬다.)
배이화:...다음부턴 정말 안 그런다니까.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입을 조금 삐죽 내밀었다.) ... 먹고 돌아오지 그랬어. ... ......으음, 응. (조그맣게 끄덕이며 시선을 슥 피한다.)
이 연:것봐. (눈 흘긴다.) 안 먹고 오길 잘했네. 한 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냐. 지금 차려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밖으론 나올 생각도 말고. 알겠지?
배이화:... (뭐라 말하려는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결국에는 얌전히 끄덕였다.) ...알겠어.
이 연:(잠시 뒤 단촐하게 차린 상을 들고 온다. 말라비틀어져가는 군옥수수 두 개가 놓여있다.) 이웃이 주셨어. 오래돼서 좀 말라붙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감지덕지지. 내 것까지 먹으라고 하면 순순히 먹어줄래?
배이화:... 감사해라. 다음에 뵈면 인사 드려야겠네. (옥수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나를 손에 쥐어주고야 자신도 한입 물었다.) ...같이 먹어.
이 연:그럴 것 같았지. (기대도 안 했다면서 손에 쥐여진 옥수수를 베어문다.) 몸은 좀 어때? 찬바람을 쑀으니 기침이 난다거나, 기운이 빠진다거나…… 그러진 않아?
배이화:(천천히 씹어 삼키며 천천히 눈을 굴린다.) ......으음, 괜찮은 것 같아. 어제보다 나아지기도 했고. ... 정말 이런거 보면 연이가 나보다도 더 걱정이 많다니까.
이 연:만약 내가 너처럼 한참을 앓았다고 가정해 봐. 조마조마하며 한참을 지켜봤다고. 어찌 네가 나처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안 그래? (부지깽이로 숯을 휘저어 불을 좀 더 키운다.)
배이화:......... 그거야, 그렇지. (...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으리라. 불이 커진 숯을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 ...아, 그러고보니 아이를 잃어버린 분이 계셨는데... 찾으셨을까?
키가 작고 눈썹이 덥수룩한.. (곰곰이 인상을 되짚었다.)
이 연:아이를? (옥수수를 먹다 말고 멈칫한다.) 그런 아이는, …… 마주친 적 없는 것 같은데. 누가 찾았어?
배이화:아, 아마 너도 몇 번 마주친 적 있을거야. ...마을에서 종종 보이는 부인이셨는데.
이 연:그 사람은 또 어쩌다 만났어? 너…… 설마 시장까지 따라왔었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다.)
배이화:.........아. (한참 정적이 이어지다) 아니야.
이 연:그럼 어떻게 들은 건데? 아이 이야긴.
배이화:... ...그러니까 그게. (눈동자가 한참을 데굴데굴 구른다.) .........사실 갔었어.
이 연:선녀님. 너무 말을 안 듣는 거 아닙니까. 예? (제 팔 꼬아 팔짱 끼고선 뚱하니 당신 흘겨본다.)
배이화:...미안. 그렇게 부르지 말아줄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밥그릇에 들어갈 듯 고개가 푹 숙여진다.)
이 연:왜. 선녀처럼 아름다워서 선녀라고 부르는 게 뭐가 나빠, 어? (놀리려는 마음에 제가 말하기에도 낯부끄러운 호칭이란 건 전혀 생각 못하고 실실 웃으면서 고개 기울인다.)
배이화:.... 그... 그렇게 들으니까 부끄러워서... (힐끗 눈만 올려 봤다가 웃는 낯을 마주하자 다시 고개가 떨구고 죄없는 밥만 휘젓는다. 머리칼에 가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도 붉어진 귀는 차마 가려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연:(빨개진 귀며 밥만 휘젓는 모습을 보곤 소리없이 웃는다.
귀엽네.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곤 얼굴에 확 열이 올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다.) 아, 아무튼. 다음엔 이렇게 무모한 짓 하지 마. 알겠어? 나도 일찌감치 돌아오도록 노력해볼 테니까.
배이화:...응, 그럴게. (괜히 의미 없는 손 부채질도 몇 번 하다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괜찮아. 일이 생기면 늦게 들어와도 되니까.
이 연:됐어. 다음에도 또 늦게 왔다간 하루종일 눈발 아래 서있을지 몰라서 겁이 날 지경이야. 난 두려운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지. (네가 나에게 두려움을 가르치고, 걱정을 알려주며, 또한 사랑이란 달콤함을 안겨준다. 볼멘소리를 하고는 있지만 이화를 바라보는 금색 눈에는 잔잔한 별빛 같은 애정이 깔려 있다.)
배이화:...이제는 정말 안 그런다니까. 진심이야. ...약조해도 좋아. (저도 볼멘소리를 하다 그만 웃음이 흘렀다. 환하게 반짝이는 저 눈에 온전히 담긴 것이 자신 뿐이라는 것이 기꺼워서 였을까. 사랑에 빠지면 꼭 바보가 된다더니. 자신이 꼭 그 짝이었다. 걱정에 추위 따위는 까맣게 잊을만큼, 자신은 어찌 되어도 신경쓰이지 않을만큼 빠져버렸으니. 애정을 마주하는 시선은 같은 빛을 띄고 있었다.)
...밥 다 식겠다.
이 연:약조할 수 있어? 정말? 더 이상 내게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시선만 마주하고 있어도 절로 반달이 만월 되듯 웃음이 차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하루종일 신경이 쓰이고, 잠을 잘 때에도 꿈 속에서까지 그를 그리니 사랑이 중증이라면 중증이었다. 이리 오래도록 한 사람을 그렸으면서 겨우 어제서야 연인이라 명명한 것이 의아스러울 만큼이었다. 연인이란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그 모습들이 사랑의 조각이었음을 알았다.)
(뒤늦게서야 수저를 든다.) 그래, 식기 전에 먹어야지.
배이화:...약조할게. ......노력하기로..? (힘있게 끄덕이던 고개가 슬그머니 기울어진다. 달처럼 떠오른 웃음이 그저 기쁘기만 하다. 이렇게 커다랗게 차오른 마음을 어찌 입 밖에 내지도 않고 꽁꽁 묻어둘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리 무서워서. 그래서 먼저 건네 보여준 마음이 고마웠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계속 보고 있어도 애틋하고 눈을 감으면 눈꺼풀에 새겨진 듯 떠오를만큼.)
응, 이것도 좀 먹어. (찬을 집어 숟갈에 얹어주고서 천천히 그릇을 비워간다.)
차디찬 바람과 얼어붙을 듯한 공기와는 달리 하늘만큼은 홀로 고즈넉합니다.
화로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은 소리마저 따사롭네요.
밀어를 주고받으며 어느덧 불길은 차차 가라앉아 가고, 눈꺼풀은 무거워져 옵니다.
졸음이 한가득 얹힌 낯으로 불빛을 응시하던 연이 가만히 시선을 돌립니다.
은하수의 바다처럼 나긋이 빛나는 홍채에는 오로지 당신만이 한가득 담겼습니다.
이 연:이화. (낮은 목소리가 당신의 이름 두 자를 울린다.)
배이화:...응, 연아. (세상 무엇보다 귀한 이를 눈에 가득 담았다.)
이 연:…… 어느 날, 내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화로에서 조용히 타닥거리는 불꽃처럼 고요하고 평이한 음성이었다.) 이 목소리를 잃는 날이 온대도, 그래도 내 곁에 있어줄 수 있어?
그래도…… 나를 사랑해줄 거야?
배이화:(... 왜 이런 얘기를 하는걸까. 가정하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그럼에도 바라보는 눈빛은 쉬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어느 봄 날처럼 따스하고 환했다.) ...그럼.
...그때는 내가 연이 너의 눈이 되어주고 너의 목소리가 되어주어야지.
그럼에도 너를 여전히 사랑할거야. 변함없이.
이 연:…… 고마워. 괜히 걱정은 마. 그냥,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어.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병에 걸린다고들 하잖아. (희미하게 웃으며 당신의 한 손을 감싸듯 붙잡았다. 봄빛처럼 따스한 네 웃음소리가 곁에 있는다면 눈을 잃고 소리를 잃는다 한들 무엇이 두렵고 괴로울까. 나는 언제나 온유한 봄날 속에서 살 텐데.)
점점이 깔리는 목소리는 변함없이 다정하였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물음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입니다.
배이화:
심리학
기준치: |
65/32/13 |
굴림: |
4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답지 않은 말을 하는 연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무상해 보이지만,
오래 함께한 당신은 그의 금빛 눈에 어울리지 않는 물기가 어릴 것만 같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기껍고 벅차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어두운 공허가 그를 한탄으로 몰아넣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이화:(붙잡힌 손과 연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이상하게 더 애틋해보이는 것이 마음이 쓰여 잔잔한 목소리고 다정하게,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며 반대쪽 손으로는 부드럽게 눈가를 쓸어주었다.) ...연아, 나는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네 곁에 있을거야.
(눈가를 쓸던 손이 뺨에 가볍게 내려앉는가 싶으면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걱정하지마.
이 연:언제 걱정 같은 걸 했다고. (눈가를 쓸어주는 손길을 가만 쓸어내리다가, 맞잡아 내린다. 언제 습기 어렸냐는 듯 금세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다.) 넌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예쁠 것 같아. 안 그래?
이만 자자. 눈 감겨.
배이화:(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웃어 넘긴다.) ...콩깍지가 너무 심해.
응, 그만 자자. 피곤하겠다.
이 연:콩깍지 좀 덮였음 어때. 내가 너 좋다는데. (작게 킥킥거리며 이불 속에 눕는다.)
잘 자. (당신의 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느리게 쓸어내린다.)
배이화:...정말. (한숨처럼 뱉는 말에 웃음이 잔뜩 서려있다. 이불 속에 나란히 눕는다.) ...나도 마찬가지인가봐. 이런 것도 귀여워선.
...잘 자. (마주 누워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구슬픈 새의 울음이 한밤의 들판을 아른하게 가로지르니 제 짝을 찾는 것일까 합니다.
당신의 곁을 그득이 채우는 사랑하는 이와 기울어가는 이 밤을 헤입시다.
이화는 뺨에 와닿는 훈기를 느끼며 눈을 뜹니다.
눈가에 달라붙은 여남은 졸음기를 닦아내다 보면, 차차 깨닫습니다.
여남은 잿가루의 열기와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지새고 차디찬 냉골의 방에서 깨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말이에요.
온기에 덥혀진 덕인지 몸은 어제보다 훨씬 가뿐합니다.
마침 연이 화로에 넣을 새 장작들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금 어색한 방의 온기가 실감이 납니다.
연이 아침 일찌감치 추운 날씨를 헤치고 장작들을 새로 패온 것일까요?
배이화:응, 일찍 일어났네. ...왠 장작이야? 어디 다녀온거야?
이 연:응. (고개 가벼이 끄덕인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거세어서 너 추울까 봐 불을 좀 더 세게 땠어. 따뜻하지?
그리 말하며 연은 화로의 불돌을 옆으로 치우고 장작을 밀어넣습니다.
새로운 불길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틥니다.
그런데… 불길이 살갗에 닿을 지경으로 타오르는데도 연은 여전히 맨손으로 장작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배이화:...연아..! 손 조심해..! (얼른 곁으로 달려가 두 손을 붙잡는다.)
이 연:음?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었다가, 당신이 붙잡고 나서야 뒤늦게 제 손길 내려다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모양새가 곧 물집이 잡힐 것만 같습니다.
배이화:괜찮아? ...왜 그랬어! (붉게 달아오른 손을 조심스레 쥐고 불에서 멀찍이 내려둔다.) ...잠시만 기다려봐. (손을 식힐 찬 물을 찾아 방 밖으로 나선다.)
이 연: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 정도쯤. 안 나가도 되는데. (하지만 저지른 게 있으니 더 말리지 못한다.)
하지만 몇 번이나 수통을 내려보아도 담겨오는 건 아무것도 없고, 딱딱한 표면에 맞닿는 소리만 하릴없이 경쾌합니다.
어제 강으로 향하던 이웃 김씨가 떠오르네요. 다 똑같은 처지인가봐요.
이 연:부엌 쪽에 미리 떠놓은 게 있어. 그런데, 굳이 이런 데 안 써도 되는데.
배이화:...금방 가지고 올게. 그러다 덧나. (부엌으로 가 금세 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연의 손을 끌어다가 물 바구니에 넣어두고야 걱정스레 살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했길래 불에 닿는 것도 몰라.
이 연:나무를 패러 가는 길에 사슴을 봤는데 어떻게 하면 사냥을 할지 좀 고민하고 있었지. (어정쩡하게 손 담근다.) 이렇게 불에 가까운 줄은 몰랐네. 정말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대로 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배이화:... 그게 다야? 물집이 잡힐 정도였는네. (물에 담긴 손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얼굴에 미간이 점점 구겨진다. 마치 제 손이라도 덴 양 고통스러워 보인다.)
...정말 안 아파? (평소와 같은 기색에 의아함이 섞여든다.)
이 연:진짜야. 나 못 믿어? 어째 네가 나보다 더 표정이 안 좋네. (반대쪽 손으로 이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배이화:안 아플 리가 없으니 그러지... (고개를 들어 잠시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물에 담궈 둔 연의 손을 다시금 들어 꼼꼼히 살펴본다.)
...당분간은 손쓰는 일은 하면 안되겠다.
이 연:물집 좀 생긴 것뿐인데 너무 유난이네. 이 정도쯤 하루만 지나면 사라질걸. (걱정어린 시선이 좀 부담스러운지 스윽 손을 뺀다.) 조반이나 내올게.
배이화:...아니야, 내가 할게. 물에 손 계속 담그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갈 채비를 한다.)
이 연:너도 참. 별거 아니라니까. (이러다 더 크게 다쳐오기라도 했다간 숨 넘어가겠어.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감추기로 한다.)
배이화:...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아이를 타이르듯 말을 덧붙이고는 부엌으로 사라진다.)
(멀리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조용해지는가 싶으면 소박하게 간단한 찬을 얹은 소반을 들고 나타난다.)
이 연:내가 졌어. (도리가 없단 듯 양팔 들어보이며, 상을 들고 오는 이화를 향해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고생 많았네. 어서 먹자.
조반을 마치고 나면 연은 작은방에 들어갑니다.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챙기는 소리가 나네요. 오늘도 바깥에 나서려는 걸까요?
이 연:옆마을에 그간 짠 베를 좀 팔고 오려고. 지난해 겨울부터 쭉 높은 값에 사주는 부호가 있거든. 이 정돈 손 쓰는 일은 아니지? 베만 잘 챙겨서 주머니에 손 넣고 다녀올 수도 있으니깐.
이 연:어제 뒷산에도 산보를 다녀왔고, 밤까지 밖에서 날 기다렸으면서 산 넘어 옆마을까지 같이 가겠다고? 절-대-안 돼. (단호하게 거절한다)
배이화:...그렇지만. (여전히 걱정만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당신을 담았다가 내리 깔린다.) ... 그럼 옷이라도 따뜻하게 입고 가.
이 연:그래야겠네. (베를 감싸넣은 천보를 들고 일어선다.) 네가 선물로 준 누비옷, 그걸 입고 갈까.
배이화:... 응, 조심해서 다녀와야 해. (두툼한 누비옷을 들고 와 폭 안겨준다.)
이 연:(누비옷을 잘 걸쳐입고 당신을 가볍게 끌어안는다) 그럼, 다녀올게. 이번엔 절대 바깥에서 기다리지 마. 알았지?
배이화:(마주 꼭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알겠어. 오늘은 꼭 집 안에서 기다릴게.
이런 날에 먼 길을 가도 괜찮은 걸까요. 이웃 마을에는 내일 가도 될 텐데.
연이 당신을 걱정하는 것만큼 당신도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배이화:(... 몰래 따라가보면 괜찮지 않을까.)
배이화:(연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두고 따라나섭니다.)
연은 여러 번 당부를 했지만 역시 걱정스럽습니다.
게다가 시장에서 실종 소식을 듣기도 했고 말이에요. 주민의 딸은 오늘 아침에는 무사히 귀가했을까요.
당신은 잠시 집 안에서 채비를 한 뒤, 거리를 두고 연을 뒤따르기 시작합니다.
눈이 시릴 만큼 하이얀 눈밭에 간격을 두고 긴 발자국들이 새겨집니다.
연은 들판을 가로질러 차차 풀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우뚝 선 숲의 초입으로 진입합니다.
바로 오르막길로 올라 산길을 가로질러야 이웃 마을에 이르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쭉 걸어가던 연은 뒷산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옆쪽에 난 숲길로 향합니다.
이곳으로 가면 길을 한참 빙 돌아가야 할 텐데…
배이화:
은밀행동
기준치: |
60/30/12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눈밭에 옅게 묻힌 나뭇가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발을 내디뎠습니다.
혹시라도 밟았더라면 바로 연에게 들킬 뻔했어요.
배이화:(... 들킬 뻔 했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숲길에 들어섰으니 당신도 한결 몸을 숨기기 편해졌습니다.
나무 뒤에 쏙쏙 몸을 숨기면서 연을 뒤따르다 보면 점점 더 의아함이 커집니다.
집에서만 해도 당장 이웃 마을에 넘어가야만 할 것처럼 급해 보이더니, 그런 것치고는 걸음이 느리고 조심스럽습니다.
배이화: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1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배이화:(큰 나무 뒤에 숨어 연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곳에서 누굴 기다리는걸까?)
연의 뒤를 밟다 보면 어느덧 숲의 중턱에 접어들었습니다. 꽤나 안쪽까지 들어왔네요.
그때, 저 멀리 맞은편에서 한 행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연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연은 행인을 향해 걸어가더니… 그를 향해 무언가 읊조립니다.
행인이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는 찰나, 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입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이기라도 한 것마냥 행인의 몸이 그 자리에 딱 굳어 움직이질 않습니다.
행인:다, 당신 뭐요?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요? 내 몸이 왜 이러는 거냐고!
연은 그의 말을 들은 체도 않으며 지체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듭니다.
그것은 단검의 형태처럼 보였는데, 마치 어둠을 응축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새까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봤을 뿐인데도 불길한 감각이 당신의 뒷목을 타고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집니다.
당장이라도 연의 손에 들린 암흑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아찔함이 밀어닥칩니다.
SAN Roll
기준치: |
65/32/13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저 물건이 대체 무엇인지는 당장으로선 길게 고민할 여력이 없습니다.
대체 연이 어디서, 어떻게, 왜 저런 것을 손에 넣게 된 것이죠?
대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것일까요.
배이화:(채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하기 전, 고민에 빠질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인다.) 연아..!
(그에게 달려가 무언가 들려있는 손을 붙잡는다.)
당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연은, 당신이 손을 붙잡기도 전 곧장 꺼내던 것을 다시 집어넣습니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행인이 뒤쪽으로 쾅 나자빠집니다.
행인은 땅을 짚으며 뒷걸음질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로 도망쳐 버립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고요한 숲 속에 급박한 뜀박질 소리가 메아리칩니다.
연은 멀어지는 이를 쫓아가지 않습니다. 숲길을 응시하는 뒷모습이 망연해 보입니다.
이 연:…… 집 안에서 기다리겠다 하지 않았어?
당신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는 연의 표정에 얼핏 원망이 비쳤습니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바람에 잎새 흩날리듯 사라져 버립니다.
배이화:...... 미안해, 정말. 너무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어.
이 연:뭘 한다고 걱정을 해. 그냥 옆 마을에 다녀오는 것뿐이라고 했잖아. …… 이제 그만, 돌아가.
배이화:(잠시 말이 없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의 끝이 미묘하게 떨린다.) ...방금, 뭘 하려고 했던거야?
이 연:딱히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건 아냐. (어깨 으쓱인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질렀는지 나도 당황했다니까.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놀란 거 아닌가. (길 가다 꽃을 봤다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이하고 태연한 태도로 답했다.)
배이화:...... 분명히- (...뭔가 있었는데.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얽어 놓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품에 있던 건?
이 연:품에? 아. (검은색 실타래를 꺼내 보여준다.) 이거. 별 거 아니지?
배이화:(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다. 분명 방금 본 것은....... 의아함은 어느새 걱정과 불안을 불러 한데 뒤섞였다. ...차라리 헛것이라도 본 거라면 좋을텐데. 그러나 이내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가벼이 숨을 내쉬며 털어내고 기꺼이 웃었다. ...일단은 덮어둬야지, 그리 결론을 내린 까닭이었다.) ...검은 실타래였네.
속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네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뿐입니다.
이 연:그래. 정말 실타래였어. (이화의 등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밀어낸다) 혹시나 더 가까운 길이 있나 싶어 숲으로 왔는데, 시간이 지체됐네. 어서 가. 나는 오늘 내로 꼭 부호를 만나야만 하니까. (단호하게 말한다.)
배이화:...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가자. (단호한 말투에 몇 번이고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이 연:안 돼. 돌아가. 내 말 들어, 배이화. (성까지 붙여 부르며, 고집스런 어투로 재차 거절했다.)
배이화:......연아. (흔들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눈꺼풀 아래로 사라진다.) ...그럼 가는 것만 보고 돌아갈게. 그 정도는 하게 해줘.
이 연:가는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지. 네가 또 따라오려 들지 어떻게 알아? (완강하게 자리에 붙박혔다.) 어서 가. …… 이상한 일 하려는 거 아니니까. 그만 걱정하고.
배이화:(한참을 머뭇거리다 작게 숨을 내뱉는다.) ......알겠어, 돌아갈게. (굳건히 서있는 모습을 보니 더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떨어진다.) ...너무 늦으면 안돼.
이 연: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바깥에서 기다리지 마. (그새 겨울을 한껏 들이마신 사람처럼, 그에게서는 찬바람의 냄새가 났다. 이화의 머리에 손을 잠시 올렸다가 뗀다.)
배이화:...응, 너도 걱정하지마. (시린 겨울 냄새가 가득 베인 품에서 떨어지자 그새 마음에 찬바람이 든 듯 허전해진다. 망설이는 발걸음을 몇 번이고 다짐하고서야 무겁게 걸음을 뗀다. 느린 발걸음이 숙인 시선에 들어오다 몇 번이고 고개가 뒤로 돌아간다.)
연은 당신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숲을 나설 때까지 집요하게 뒷모습을 지켜봅니다.
몇 번이고 돌아볼 때마다, 금빛 시선이 맞닿곤 했습니다.
연과 함께 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으나 어쩔 수 없지요.
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이화도 오늘의 하루를 보내도록 합시다.
산에 올라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찾아볼 수도 있겠고, 집 안팎을 청소하고 정리하거나, 강의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려 낚싯대를 드리울 수도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조사 구간은 [방 안], [마당], [들판]입니다.
배이화:...우선은 한동안 못 건든 청소부터 해야겠다.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듯 가볍게 중얼거리며 마당을 쓸 비를 찾는다.)
찬바람 속 내리쬐는 옅은 한 줄기 햇살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뺨을 간지럽히네요.
마당의 [우물]과 [장작]을 살필 수 있습니다.
배이화:(비를 손에 들고 나서다 꽁꽁 얼어있던 우물이 생각나 확인하러 옮겨간다.)
...여전히 얼어있으려나?
우물에 몇 차례 수통을 내려봐도 여전히 딱딱한 표면에 닿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옅은 햇살이 깊은 우물까지 가 닿기에는 부족했나 봐요.
물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강가에 가야겠습니다.
배이화:...정리해두고 나가봐야겠네. (마당을 비로 쓸어 묻힌 길을 다시금 만들어두고는 방을 덥힐 장작을 가지러간다.)
…이렇게 많이? 절로 반문하게 될 정도의 양입니다.
불을 세게 땠다고 했으니 그만큼 땔감을 많이 가져왔겠거니 짐작은 했지만, 겨우 아침나절 사이에 이만큼이나 나무를 팰 수가 있나요?
배이화:...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장작이 다 떨어졌다고 했는데. (가득 쌓인 장작을 의아하게 살펴보다 몇 개 집어 방 안으로 들어선다.)
하릴없이 방 안을 둘러보면, 그제야 집안이 다소 난잡하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아무래도 연이 당신을 간호하면서 집정리까지 성실히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죠.
[작은방]은 연이 베를 짜는 곳이니 적당히 살펴보고만 나오는 게 좋겠습니다.
방 구석에 먼지가 얕게 쌓여있으니 탁자에 놓인 마른 걸레를 적실 필요가 있겠네요.
배이화:(장작을 화로에 넣어두고 어지러운 서탁으로 다가간다.) ... 왠 책이 이렇게나 널부러져있을까?
이화가 독서용으로 자주 읽던 책들과 문방사우가 조촐히 놓인 서탁입니다.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을 잊었는지 몇 권은 펼쳐져 있는 등 꽤나 너저분합니다.
배이화:... 그러고 보니 찢어진 종잇장이 있었는데. 여기 있으려나. (펼쳐진 책들을 훑어본다.)
책들을 훑어보아도, 찢어진 흔적이 있는 책은 따로 보이지 않네요.
정리하다 보면 책 사이에 끼워두었는지 먹이 다 마른 붓이 떨어져 서탁 위로 땡그르르 굴러갑니다.
붓이 떨어진 책은 상대적으로 덜 낡은 재질의 종이묶음입니다.
게다가 잘 보니… 책의 제목이 아니라 [일지] 같네요. 연이 쓴 것일까요?
배이화:...이건 언제부터 있었지? (일지를 주워들어 찬찬히 읽는다.)
일지의 맨 첫 장에 쓰인 날짜는 동짓달 즈음입니다.
일기는 아주 띄엄띄엄 쓰여졌는지 시간이 꽤 되었음에도 채워진 장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중간중간에 먹이 번진 글자들이 많아 읽어내기가 힘이 듭니다.
배이화:
자료조사
기준치: |
60/30/12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을 통해 내용을 유추하며 읽어나갑니다.
배이화:(...연이가 쓴걸까? 번진 글자들을 겨우 읽어내면 차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째서 이런걸 써둔걸까... 책들 사이에 가지런히 꽂아두고 일어난다.)
...물을 먼저 길어와야겠다. (어쩐지 눈앞이 흐려져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마당을 나서 푹푹 쌓인 눈을 헤치며 걷습니다.
이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경입니다.
눈밭을 드문드문 짚을 얹은 초가들이 장식합니다.
마른 억새는 눈의 무게가 버거웠는지 바람이 부채짓을 해줄 때마다 살포시 머리를 떨어 눈송이를 떨구어냅니다.
저 멀리로 나무들이 울창히 선 숲과 바로 곁에 붙은 뒷산이 보입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강가]에는 이화와 같은 목적인 듯한 마을 주민이 이미 드문드문 모여 있습니다.
뒷산의 능선과 들판이 만나는 부분에는 커다란 나무가 두 그루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단아한 [정자]가 한 채 서 있습니다.
배이화:...다들 계시는구나. (고개를 가볍게 털어내고 웃는 낯을 띄운다.) 안녕하세요.
(강가에 모인 주민들에게 다가선다.)
규모가 무척 작고 흐르는 물의 양도 적어 사실 강이라기보다는 천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만한 조그만한 물줄기입니다.
물이 귀한 연령마을 특성상 집마다 우물을 파 물을 끌어쓰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물이 얼어버린 이 한겨울에도 그닥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 자그마한 강가도 두꺼운 얼음이 덮였거든요.
"이화 아닌가. 물을 길어가려 왔는가? 보다시피 우리도 용쓰는 중이라네."
주민 몇이 얼음을 깨려고 끙끙 힘을 쓰고 있습니다.
배이화:네, 얼음이 많이 두꺼운가봐요... 큰일이네요. 길어놓은 물이 다 떨어져서.
"이리 와 같이 얼음을 깨시게. 영 쉽지가 않으니 함께 애써야 할 것이네."
배이화:
근력
기준치: |
50/25/10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연약한 힘으로는 얼음을 깨는 게 영 쉽지만은 않네요.
주민들이 한참이나 애를 먹은 끝에야 겨우겨우 얼음이 깨집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화의 순번은 뒤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네요.
배이화:...별 도움이 못 되어 드려서 죄송해요. (순번을 기다려 뒤쪽으로 선다.)
이화는 한참 기다린 끝에야 물을 길어갈 수 있었습니다.
배이화:(물을 길어 돌아가려던 차에 정자에 잠시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보기보다 무겁네. (고개를 들어 정자를 올려다본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단청들로 곱게 장식된 사모정자입니다.
성인 너덧이 들어가면 비좁다고 느껴질 만큼 조그맣습니다.
세워진 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연령마을의 풍경에 한 폭을 더해주는 아름다움을 지녀 주민들과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꾸준합니다.
이화와 연도 이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었지요.
서로에게 화관을 만들어 씌워주고 꽃팔찌와 반지를 교환하며 놀다 낮잠을 자거나,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정자까지 와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정자 안에 살며시 날아들어온 단풍잎들을 주워 강가에 흘려보내며 놀고는 했었지요.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미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던 것일지도요.
배이화:(화혼정. 명패에 쓰인 글자를 되뇌이며 이 곳에 남은 기억들을 떠올린다. 아, 이미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저 모른 척 묻어뒀을 뿐. 행복하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같은 따스한 기억들이 하나 둘 스쳐가면 어느새 시린 바람이 뺨을 베어간다. 행복한 만큼 유난히 차게 느껴진다.)
...이만 돌아가야지. (올려둔 물동이를 다시금 손에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옮기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네 생각이 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봄의 너, 여름의 너, 가을의 너, 산길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이 겨울의 너까지.)
(...어쩐지 마음도 모르고 고장난 눈가가 자꾸만 뜨거워지는 것 같아 걸음을 빨리했다.)
사계의 연을 되감고, 그 모든 순간에 함께 있었던 당신의 모습을 그립니다.
이화는 물동이를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배이화:(옷 소매로 눈가를 꾹 눌렀다가 방안으로 들어선다. 물을 조금 덜어 탁자에 놓인 마른 걸레를 적셔 들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곳을 천천히 닦아간다.)
...아, 작은 방도 닦아둬야겠다. (허리를 죽 일으켜 섰다가 작은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선다)
작은방은 평소 연이 베를 짜는 방으로, 혹여나 베틀이 망가지거나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이화는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말렸던 곳입니다.
문을 조심히 열면 [베틀]과 근처에 널린 [연의 옷]들이 눈에 띕니다.
배이화:(베틀로 가 먼지가 쌓인 곳은 없나 이곳저곳 살펴본다.)
베틀 곁에는 그간 짜둔 여유분의 무명 몇 필이 정갈히 접혀져 있고 앉을깨에는 북바늘과 실꾸러미가 올려져 있습니다.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4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다소 낡은 티가 납니다.
그런데 앉을깨를 자세히 보니 먼지가 얕게 쌓여있네요. 바로 최근까지 베틀을 사용한 게 아니었던가요?
배이화:...이상하네. (먼지를 조심스레 닦아내면서도 의아함에 고개가 기운다.)
(다 닦아내고서야 근처에 널린 연의 옷들을 정리하려 주워든다.)
갈아입고 정돈할 틈까지는 없었는지 베틀 주변에 옷 몇 벌이 대충 널려 있습니다.
이화가 옷들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으면, 집어든 옷자락들에 무언가 묻은 것이 보입니다.
금세 정체를 알아냅니다. 이미 다 말라 검붉게 변한 핏자국들입니다.
다치기라도 했던 걸까요? 피가 날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기엔 당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배이화:(검붉은 핏자국이 묻은 옷을 한참이고 바라본다. ...언제 다친걸까. 어딜 다쳤던거지. 왜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머무른다. ...혹시 연의 피가 아닌걸까..? 손끝이 차게 식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야, 그럴리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 빨아두는 편이 좋겠다. (옷가지들을 들고 작은 방을 빠져나왔다.)
방을 나오기 전, 방 전체에 <관찰> 판정 (어려운 성공 이상)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의아하지만, 방에서는 달리 눈에 띄는 게 없네요.
배이화:...이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네. (고개를 갸웃하며 방을 나선다.)
청소를 마치고 나서도 시간은 그리 많이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어제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지고 달이 만개할 때에야 문 바깥에서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배이화:(두 무릎에 묻고 있던 고개가 그제서야 들리고 문을 열어젖힌다.) ...어서와.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이 연: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침의 일 때문에 머쓱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지라 방에 쉬이 들어서지 못하고 괜시리 곱슬거리는 제 머리칼 끝 매만진다.) 그래도 오늘은 방 안에서만 기다리고 있었지?
배이화:...괜찮아, 이것저것 정리했더니 시간이 금방 가서. (문 밖을 서성이는 모습에 언제나처럼 다정한 웃음을 띄우며 문을 나서 손을 이끌었다.) 얼른 들어와, 많이 춥지? 오늘은 정말 방 안에서 기다렸어. 자, 손도 따뜻하지? (두 손을 꼭 그러잡고 호, 하고 입김을 불어넣는다.)
이 연:집정리를 했어? 하긴, 간호하느라고 집안 꼴이 좀 너저분하긴 했지. (여즉 머뭇거리면서 손 이끌려간다.) 그러네, 따뜻해. (살갗에 닿아오는 입김이 당신의 마음만큼이나 숙부드러워서, 결국 염치를 잠시 내려놓기로 하고 이화를 제 가슴팍으로 살짝 당겨와 끌어안는다)
팔을 뻗어 당신을 끌어안는 몸이 온통 차갑습니다.
이웃 마을과 거리가 썩 멀지는 않지만, 산을 넘어가야 하는 거리이니만큼 평탄한 길은 아니었을 겁니다.
배이화:응, 몸도 이제 가뿐해졌으니까. (품에 가득 안기면 한겨울을 가득 머금은 듯 차고 시리다. 그것이 안타까워 더욱 품에 파고 들었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다.) ... 온몸이 차가워. 얼른 들어가자. 이러다 고뿔 들겠다.
이 연:…… 몸도 가뿐해졌어? 다행이네, 정말. (크고 건장한 저에 비해 이화는 조그맣고 말랐다. 끌어안고 있자면 그에게 가는 어떤 칼바람이라도 다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 자신이 한기를 잔뜩 묻히고 와서야 무슨 소용인가.) 그래, 들어가자. 난 건강해서 고뿔 같은 건 안 걸릴 테지만. (그제야 빈 봇짐을 들고서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배이화:...연이 네 덕분이야. 고마워. (연의 품에 있을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좀 더 크고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좋을텐데. 그를 온전히 품어줄 수 있을 만큼. 자그만 바람은 웃는 얼굴 뒤로 그렇게 삼켜버렸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돌아오면 추울까봐 화로는 계속 켜뒀어. 따뜻하지?
이 연:내가 뭘 했다고. (난 네게 미안한 것밖에 없어. 마음을 인정하기 전 성정을 누르지 못해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도, 신경쓰게 만든 것도, 걱정하게 만든 것도 전부 다.) 응, 따뜻하네. 너도 계속 화롯불을 쬐고 있었겠지? (눈을 잠깐 내리감았다.) 장작을 넉넉하게 패온 보람이 있어.
배이화:...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데. 늘 뭐든 해주려고 하잖아. (잔잔한 목소리가 잦아들면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응, 그럼. ... 고생 많았겠다. 양이 엄청나던데 그걸 혼자 다한거야?
이 연:그간 너무 못해준 게 많으니까 뒤늦게라도 해주고 싶은 거지. 그리고, 딱히 대단한 것들도 아니고……. (고개 끄덕인다.) 일찍 눈이 떠졌는데, 할 것도 없고 해서 나무라도 패야겠다 싶었지. 하나만 더, 하면서 도끼질하다 보니 금방 쌓이더라.
배이화:... 고마워. 그렇지만 정말이야.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해. (퉁명스러움 뒤에 숨어있는 다정함이 빼꼼 고개를 들 때면 그것이 참으로 따뜻하고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너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겠지.) ...깨우지 그랬어. 이 추운데 혼자서... ...다음에는 꼭 같이 가.
이 연:넌 너무 욕심이 없어. 성격도 지나치게 무르고. 네가 바라는 게 있다면 온갖 애를 써서라도 대령하고 싶은데, 매번 원하는 게 없다고 하고. (저라고 해서 딱히 사치스럽거나 욕심 많은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든 말든 제멋대로 행동하곤 하는데 눈앞의 사랑하는 이는 그런 모습도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참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답답하지 않으려나 하는 감상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오늘 아침의 일만 해도 그렇다. 더 캐묻고 화내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 텐데.) 글쎄, 그건 봐서. 난 처음으로 생긴 연정은 애지중지하고 싶거든.
배이화:...그런가? (잠시 새겨보듯 눈을 천천히 깜빡인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진심이었으니, 바라는 것은 없었다. 해줄 것이 없어 미안한 마음 뿐이었지.) ...너와 이렇게 함께 미래를 그리는 것 만으로도 충만해서, 더 갖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어. (그만큼 이 순간에 별 것 아닌 것에도 깨져 버릴까봐 아침의 일도 더 캐묻지 못하고 있나보다. 궁금한 것이, 무수한 걱정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고 다니는데도 그저 피하려고만 하고 있으니 저도 스스로가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 응. (어느새 수줍은 기색이 돈다. 시선이 여기저기 맴돌다 다시금 마주한다.) ...그렇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그만큼 네가 소중해. ... 마냥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
이 연:그럼 이제부터 떠올려 봐. 마냥 아무것도 없이 미래를 맞이할 순 없잖아? 어떤 미래가 왔으면 하는지 상상해보란 뜻이야. 그러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으려나. 하고싶은 것도, 갖고싶은 것도. 나도 낯간지러운 말에 이제 조금씩 적응해가는 중이거든. (솔직히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수줍어하는 이화를 볼 때면 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만다. 그는 항상 자신의 심정을 숨기고 가려 드러내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짐이라고 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당신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당신이 돌려주는 화답이 불티보다도 따스하게 저의 심장을 밝힌다.)
따뜻한 데 있으니 목이 마르네. 혹시, 오늘 강가에 다녀왔어? 우물은 아직도 안 녹았을 것 같고. 안 다녀왔음 지금이라도 내가 갖다오게.
배이화:...응, 그래볼게. 그렇게 천천히 떠올리다 보면 네 말처럼 정말 원하는 것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아, 하나 떠올랐다. ... 네 다정한 말을 영원히 듣고 싶어. 언젠가 완전히 적응하는 날이 오겠지. 너도 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이 웃었다.) ...그렇지만. (덧붙이려던 말은 따스한 손길에 잊혀졌다. 겨울 밤이 이리도 환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니 그저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오늘 강가에 다녀왔어. 금방 가져다줄게.
이 연:여, 영원히? (당황해서 말 더듬는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매번 그렇게 굴 수 있을진 모르겠네. 알잖냐, 난 건달처럼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횡설수설하다가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꾹 맞물린다. 뭐든 말해달라고 해놓고선, 정작 당신이 겨우 꺼낸 이 정도의 소망도 확답을 해주지 못한다니. 모자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긍정했다.) 그래. 완전히 적응하는 날이 올 테니까. 최대한 앞당길 수 있도록 애쓸게.
내가 가도 되는데……. 부탁해도 되겠어?
배이화:(예상한 반응이었는지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있다. 이어지는 말에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지만.)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 그래도 반쯤은 농담이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너도 좋으니까. (뺨을 가볍게 쓸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마든지. 금방 다녀올게. 쉬고 있어. (문을 열고 나선다.)
이화는 미리 길어놓은 물을 뜨러 방문을 열고 나섭니다.
이화의 시야에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이 들어옵니다.
회오리마냥 강렬한 직감이 이화의 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화혼정. 지금 당장 화혼정에 가보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꼭 달빛이 그곳으로 당신을 부르는 것만 같습니다.
어째서일까요? 많은 추억을 쌓은 장소라고는 하나 지금은 길디긴 겨울의 늦은 밤인데…
배이화:... (어째서일까. 멈춰서 문을 몇 번이고 돌아보다 홀린 듯 화혼정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연:이화! 어디 가려고? (금방 돌아올 줄 알았던 이가 오래 오지 않자 의아함에 문을 열었다. 밖을 살피다, 마당을 나서는 이의 뒷모습에 급하게 그를 소리쳐 부른다.)
배이화:... ...아. (목소리에 돌아보면 손에 든 물동이 가득 든 물이 함께 찰랑인다.) ...아, 그게. 강가에 뭘 잊고 온 것 같아서.
...물 가져다 주기로 해놓고, 정신이 없었네.
이 연:강가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린다.) 나한텐 산에 갈 일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해놓고, 너는 혼자 가려고 한 거야? 게다가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연에게 함께 달구경을 하자 제안하는 건 어떨까요?
이성이 미처 당신을 붙잡지 못하는 지금. 하늘에 뜬 하얀 달이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배이화:(조금 어색하게 웃다가 물에 비친 달에 시선이 꽂힌다.) ... 그럼 같이 갈까? 겸사겸사 달 구경을 해도 좋을 것 같아.
이 연:달……. (맑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예쁘기는 한데. 그럼 기다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가야지.
배이화:응. (물동이를 마루에 올려두고는 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섰다.)
이 연:(두꺼운 솜옷을 두르고는 이화가 사준 누비옷을 들고 나와 당신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무얼 잊고 왔는데 그래?
배이화:...너도 더 껴입지 않고. (옷깃을 여미다 말고 올려본다. 잠시 말이 없다가 담담히 이었다.) ...주머니를 떨어트린 것 같아.
이 연:난 이만하면 됐어. 아까까지 오갔으니 추위엔 좀 더 익숙하기도 하고. (당신의 한 손을 맞잡고 걸음 옮기기 시작한다. 방에 있으며 금세 체온이 돌아왔는지 손이 뜨끈했다.) 주머니를? 강물에 흘러가지 않았으려나 모르겠네.
배이화:그러니까 더 단단히 입어야 되는데. (손을 맞잡고 나란히 옆에서 걸어간다. 따뜻한 온기가 스미는 것이 온전히 느껴진다.) ...그러려나. (읊조리듯 답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 따라 달이 유난히 밝네.
고요한 들판에 가야금의 현마냥 우아한 달빛실이 갈래갈래 늘어뜨려졌습니다.
숨을 들이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한 바람이 폐부를 채웁니다.
이 연:(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낭만이나 감성 같은 건 잘 모르는 이였지만, 그런 연에게도 오늘의 밤하늘은 아름다운지 한동안 금빛 눈에 하얀 달의 빛이 비쳐든다.) 그렇네. 눈보라가 오래 쳤으니, 이렇게 맑은 날도 드물어.
들판을 가로질러 정자 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름모를 끌림은 더욱 강해집니다.
배이화:...응, 긴 눈보라였으니까. (달빛에 박혀있던 시선이 서서히 내려오며 정자에 머문다.) ... ...아, 저기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인해볼까? (손 끝이 정자를 가르킨다. 왜인지 모를 끌림에 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발걸음이 천천히 옮겨간다.)
이 연:저긴…… 화혼정이잖아. 오늘 저기에도 들렸었어? (과거에 쌓았던 수많은 추억들이 자연스레 떠올란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그래, 가자.
배이화:...응, 잠시 쉬어갔었거든. (미소 띈 연의 얼굴을 올려보며 저도 웃어 보인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쉬어갈 곳이 되어준 화혼정. 가까워질수록 달빛 속에 서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꾹꾹 눌린 눈 사이로 삐져나온 메마른 억새들과 말라비틀어진 잡초들을 밟아 화혼정에 도착합니다.
이 연:여기에도 오랜만에 오네. 겨울이 오고, 또 네가 아프기까지 하면서는 함께 갈 일이 없어지니…… 나도 자연스레 발걸음이 뜸해지게 됐거든. (정자 안으로 들어가 털썩 앉는다. 이화가 앉기 전 제 겉옷을 벗어서 방석처럼 깔아주었다.)
배이화:...정말. (걸치고 있던 옷을 연의 어깨에 둘러 주고서야 자리에 깔린 옷의 끝자락에 앉아 그 옆을 톡톡 두드린다.) 자, 여기 앉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정자의 기둥을 따라 시선이 지붕까지 올라간다.) ...응, 같이 오는 건 오랜만이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달 만에 일어났다고 했었지?
이 연:아, 됐어. 진짜 됐다니까. (고집 부리면서 누비옷을 다시 이화의 어깨에 둘러준다. 그리곤 옷 끄트머리에 앉고 이화를 제 곁에 딱 붙도록 끌어당겼다.) 자, 옆에 앉을 테니까. 됐지?
그래……. 한 달 만에. 그건 갑자기 왜?
배이화:...은근히 황소 고집이야. (조금 불퉁해진 얼굴로 빤히 쳐다보다 결국 어깨에 머리를 툭 하고 기대었다. 닿은 곳마다 은은하게 온기가 스민다.)
...시장에 갔을 때, 눈보라가 다섯 달이나 불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이 연:시장에도 기어코 따라왔었지, 너. 들었구나. (이화가 걸친 누비옷도 그때 사왔던 물건이었으니. 팔을 느리게 뻗어 제게 기댄 이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네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
배이화:...응. (어깨에 커다란 손에 내려앉으면 가만히 몸을 그에 더 기대었다. ) ...그럼 내가 다섯 달을 누워있었다는 얘기야?
이 연:아니, 세 달.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겠지?
배이화:...그 시간을 어찌 혼자 그리 애썼어. (저를 이리도 금세 깨어질 것처럼 걱정하는 마음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저였어도 마찬가지 였을테니까.)
(그러다 의아함에 고개가 기운다.) ...그럼 다른 곳은 이미 봄이 왔을텐데.
이 연:혹시라도 네가 앓다가 떠나갈까 봐…… 두려웠어. (가정만으로도 아픈 일인지라, 떨리려 하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래도 이렇게 일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네가 멀쩡히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한테 웃어주는 모습도 다시 볼 수 있으니 기뻐. 정말로.
그래, 이웃 마을은 봄이 왔는데 이 연령만 얼어붙고 있지.
배이화:(말아 쥔 주먹 위로 제 두 손을 겹쳐 얹어 아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몇 번이고 토닥인다. 나는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몇 번이고.) ...미안해. 늘 걱정만 시켜서. ...다 네 덕분이야 연아. (환하게 웃어보이는 얼굴에 미안함이 뒤섞여 눈썹이 애처로이 쳐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네.
이 연:미안해하지 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좋은 것만 얘기해도 모자라. (당신의 손길이 닿고서야 핏줄 설 만치 꾹 쥐고 있던 주먹을 자각하고 힘을 푼다. 대신 환히 웃는 당신의 어깨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체온을 감각한다. 너는 달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에겐 네 웃음이 달빛보다도 더 밝고 곱게만 보여.) 이 겨울도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영 아니라면 옆 마을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배이화:(복잡하기만 했던 마음도 당신의 품에 안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워진다. 체온이 맞닿으면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시린 겨울 바람도 무서울 일이 없었다. 품에 안겨 시선 만을 올려 바라보면 달빛은 은은히 머금은 금빛 눈동자가 저 달보다도 반짝이며 환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얼른 봄이 오면 좋을텐데. ...이 마을을 떠나야하는걸까.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난다니. 마음 한 구석이 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럼에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겠지.)
화로와 이불을 챙겨왔대도 버티기 어려운 한겨울이건만, 화혼정에 앉아있자면 이상하게도 그리 춥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만 같습니다. 이곳에서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정도로요.
당신과 연이 쉬어가고, 앉거나 드러눕고, 웃거나 울며 보냈던 수많은 시간 동안 화혼정은 언제나 두 사람에게 친절하고 쇄탈했습니다.
멀리서 철새가 짝을 찾듯이 가련하게 울음을 흘립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자의 양쪽에 버티고 선 나무의 가지들이 파르르 떨며 단청에 스치웁니다.
얼어붙은 강가마저 온몸으로 빛을 받아들이기에 바빠 보이는, 향기롭게까지 느껴지는 월야입니다.
그림자 드리운 보름달이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니 온 세상이 서정적인 은빛입니다.
이 연:그래서, 찾으려던 건 있어? 주머니라고 했던가. (정자를 두리번거린다.)
배이화:...아, 여기엔 없는 것 같아. (정자를 휘 둘러보는 척한다.) 누가 이미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다.
정자를 대강 둘러보는 이화의 곁시야에, 희미한 빛 한 줄기가 비쳐듭니다.
월광이 반사된 것일까 눈을 깜박여 보면, 정자 내부의 한구석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하도 깊은 안쪽이라 눈에 띈 것이 기적적일 정도입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던 주민이 떨어뜨린 것일까요?
배이화:...이게 뭐지? (자리에서 일어나 빛이 드는 것을 주워들었다.)
누가 떨어트린걸까? (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이 다가가보자 형태가 뚜렷이 눈에 띕니다.
한 손 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크기인 결정입니다.
초생달 모양으로, 옅게 흰 빛을 발하고 있으며 속이 다 비칠 만큼 투명합니다.
강가의 얼음이 절묘하게 얼어붙기라도 한 것일까요?
이 연:(당신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결정을 살펴본다.) 얼음 같은 건가? 그렇다기엔 쥐고 있어도 녹는 것 같지 않고…….
배이화:
정신
기준치: |
65/32/13 |
굴림: |
81 |
판정결과: |
실패 |
아찔한 감각과 동시에 눈앞이 희게 점멸합니다. 일순 다리에 힘이 풀립니다.
어떠한 광경이 머릿속을 빠르게 헤집고 지나간 것 같았으나 확실치가 않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성> 판정 (0/1)
배이화:
SAN Roll
기준치: |
64/32/12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결정은 차갑게 보이는 모양과는 달리 오히려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배이화:(스쳐간 감각에 잠시 멍해져있다 눈을 깜빡인다.) ...아, 응. 녹지는 않는 것 같아. ...무슨 결정인걸까?
이 연:글쎄.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잘 모르겠네. (결정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 돌린다.) 달구경, 더 할 거야? 아니면 찾는 것도 없으니 이제 돌아갈까.
배이화:...응, 그만 돌아가자. 너무 오래 나와있었네. 피곤하겠다. (손을 맞잡으며 웃는다.)
이 연:난 별로 피곤하진 않아. 너는, 춥진 않아? 업고 갈까?
배이화:...뭐? (고개가 번뜩 들린다. 머뭇머뭇하더니 고개를 저어보인다.) .... ....아냐, 괜찮아. 무거워.
이 연:(어이없단 듯 코웃음친다.) 너랑 나 덩치 차이를 봐. 무거울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말랐으면서. 안 그래? 한 손에 허리가 잡히겠어. (좀 과장 보태 말하면서 양손으로 당신 허리를 둘러감싸는 시늉을 해본다)
배이화:...그래도. 오늘 멀리 다녀오느라 고생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 네 손이 너무 큰거야. (손을 내저으며 시늉하는 손을 물린다.)
이 연: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정말. (못 들은 척 하고 정자 단 아래로 내려가 무릎 굽혀 앉는다.) 자, 업혀.
배이화:...정말 안 이래도 되는데. (굽혀 앉는 모습에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등에 업힌다. 팔을 목에 꼭 두르고 고개를 푹 묻었다.) ...이제 와서 무겁다고 하기 없기야.
이 연:깃털같아서 업힌 줄도 모르겠는데? (그 말처럼 가뿐하게 일어서서 걸음 내딛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감도, 귓가를 간지럽히는 길다란 머리칼도, 조마조마해하는 당신의 반응도 전부 다 새순이 물 받아들이듯 기껍기만 했다.)
이화 넌 좀 더 많이 먹어야겠다. 하지만 연령은 겨울이 길어지며 먹을 만한 열매도 사냥감도 다 떨어져 가니…… 정말 곧 마을을 떠나야 될지도 모르겠어.
배이화:...거짓말. (쑥스러운지 조그맣게 속삭이고는 팔을 꼭 그러 안았다. 살랑살랑 닿는 검은 머리칼에 마음마저 간지럽게 흔들린다.)
...지금도 충분히 먹고 있는걸. ... 그러게, 정말 떠나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네. 우물도 녹을 생각이 없고, 눈은 담처럼 쌓이고만 있으니. ...연이 넌 이 마을을 떠나도 상관없어?
이 연:내가 왜 거짓말을 해?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하루 종일 업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니까. (큰소리를 치며 억새들을 헤치고 눈길 위를 걸었다. 혹여나 거친 억새에 이화의 다리가 긁히거나 하진 않을까 신경을 기울였다.) 맨날 나한테 양보나 하고 있으면서 많이 먹기는 뭘. …… 사실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살기 힘들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나 혼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혹시나 힘들고 어렵다 싶으면 말해. 언제든 짐 챙겨서 갈 준비 하면 되니까. 알았지?
배이화:알겠어, 알겠어. (작게 새어나가는 웃음소리와 억새가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며 흩어진다.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 넓은 등과 저 사이에 틈이 없을만큼 꼭 붙는다.) ...나도 그래. 그래도 연아, 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아.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너도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
이 연:(혼자라면 거슬리거나 굳이 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일이라도, 이화 당신과 함께를 상정하면 고민할 틈도 없이 팔 걷어붙이고 하게 된다. 나비처럼, 들꽃처럼 곁에 날아든 배이화라는 이의 존재가 그리 소중하고 중요했다. 물결치는 은애를 풀어놓는다면 화혼정이 잠기고도 남을 것만 같다. 이토록 늦게 깨달았음이 번번이 신기해질 정도로, 보를 한 번 열어주자 둑이 터진 것처럼 사랑이 쏟아졌다.) 그래, 그럴게.
두 사람은 다시 들판을 가로질러 익숙한 집에 도착합니다.
이 연:(마당에 들어설 때까지도 이화를 쭉 업고 있다가, 집 툇마루에 도달해서야 그를 그 위로 잘 내려준다.) 덕분에 좀 덜 추웠으려나 모르겠네.
배이화:(내려서서 연의 옷 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해주고는 방긋 웃는다.) 고마워. 정말 추울 새가 없었네. 넌 괜찮아?
이 연:나도 네 체온 덕분에 따뜻해서 괜찮았어. (문 열어준다.) 얼른 들어가. 난 잠깐 뭐 좀 가져올 테니까.
배이화:그럼 다행이다. (고개가 슬 기운다.) ...뭘 가지러 가려고?
이 연:난 누구랑 달리 금방 갖고 오니까 얼른 들어가 있어. 바람 불기 전에.
배이화:...하여간. 그럼 얼른 다녀와, 이부자리 펴둘게. 바람이 차.
연은 그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들어옵니다.
이 연:이전에 얻어온 거야. 날도 좋고 하니, 자기 전에 함께 들지 않겠어?
...이런 것도 오랜만이네.
이화가 응하면, 연은 술병을 받쳐들고 조심스레 잔으로 기울입니다.
당신의 잔이 채워지면, 이제 이화가 연의 잔을 채워 줄 차례입니다.
배이화:(술병을 받아들어 잔을 반쯤 채울만큼 기울여 붓는다.)
연은 채워진 잔에 희미하게 반사되는 모습을 응시합니다.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대는가 싶더니, 당신을 향해 살짝 내밉니다.
이 연:…… 합환주는 세 차례 술잔을 바꾸어 마시는 게 예라고 하더라.
입에 올리는 말은 뜬금없게도 혼례의 한 절차입니다.
이전부터 이날을 상상하거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투였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맞닿았음을 알았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일까요?
날씨가 조금 더 좋아지면 정식으로 날을 잡을 수도 있을 텐데요.
배이화:...연아. (뒤이어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졌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거칠게 뛰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문득 문득 당신과의 미래를 생각해볼 때면 어김없이 이 장면이 떠올랐으니까. ...그러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손에 들린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다시금 내밀었다. ...나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이 연:조금 뜬금없단 거 알아. (장난치던 가벼운 태도는 어디로 가고, 풋사랑을 하는 이의 수줍음과 진중함이 뒤섞여 묻어난다.) …… 솔직히 너랑 나는 아직 어리고, 네가 다른 사람이랑 사랑할 수도 있는 거지만…… 아니라면 응해줬으면 해서. 나는, 너 말고는 누구와도 이러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연모의 감정 품을 일 없을 테고 누구에게도 이리 합환주를 내미는 일은 없을 거야.
배이화:(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당신이 이만큼 솔직한 진심을 내보인 적이 있었던가. 진중함을 마주하는만큼 자세를 예를 갖춰 다시금 똑바로 보고 앉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 눈동자 안에는 굳건한 확신이 마치 은하수가 흐르듯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 말고는 누구와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기뻐. 정말, 눈물이 날만큼.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너라서 정말 다행이야.
이 연:(굳이 정취를 찾고자 밤하늘 올려다볼 필요가 있겠는가. 이화의 눈 안에 별이 있고 달이 잠겼으며 은하수가 흐르는데.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질릴 것 같지 않은 청혜한 용태가 일렁였다. 눈에 한 번 담을 적마다 연모의 샘은 깊어져 가고 당신에게 저를 또 한 줌 내맡기게 된다. 자갈밭에 구르는 돌멩이처럼 거칠고 투박하기만 하던 제가 이런 고운 행복을 누려도 되는 걸까? 의문을 되짚으면서도, 이리 응해주는 이에게서 멀어질 도리가 없었다.) 그때 너를 만날 수 있어서, …… 정말 다행이었어.
한 번, 두 번, 세 번. 서로의 잔을 받쳐들어 입가로 가져다대고 차가운 술을 넘깁니다.
한 모금에 앞으로도 서로의 마음이 변할 일 없기를 기원하며,
두 모금에 평안하고 안온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모금에 끝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맞잡은 손 놓지 않기를 간원하게 되어요…
이 연:너를 정말로 은애해. (합환주로 젖은 목소리의 끝이 약하게 떨려왔다. 너는 내 상처난 손도 야생적인 성미도 전부 보듬어 안아주겠지.)
언젠가 내가, 지금과 같은 외모를 전부 잃어 흉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날 변함없이 사랑할 거야?
배이화:(언제나 그렇듯 작은 손이 커다란 두 손을 가득 그러 안았다. ...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나의 연인. 네 모든 걸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리라.) ...너를 은애해. 또한 사모하고 오래도록 연모할거야.
...그럼. (어느새 두 손은 당신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제 기쁨이 온전히 드러나는 환한 웃음이 네 모든 불안과 걱정을 잠재웠으면 해서 달빛보다 빛나길 바란다.) ...연아,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을 해도 너를 사랑해.
이 연:고마워. …… 고마워, 이화야. (그는 거듭 속삭였다. 한쪽 손 들어 뺨에 닿은 손길을 감싼다. 저보다는 자그맣고 가느다란 손길. 체온을 느끼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운다.)
…… 나 역시,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널 사랑할 거야. (심장이 북소리처럼 크게 두방망이친다. 혼례의 한 과정을 간소하게 흉내내었을 뿐이지만, 이미 가락지를 나눈 것과도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음을 두 사람 모두가 알 테지.)
(그 심장소리와 열기가 가려줄 테다. 들판에서 헤매는 듯 언뜻 공허한 표정을. 아프게 짓는 미소를.)
배이화:...너의 반려로 맞아줘서 고마워. (깍지 낀 손을 제게로 당겨와 당신의 상처 가득한 손등에, 그리고 언젠가 서로의 가락지를 나눠 끼울 네번째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널뛰기 하듯 주체 못하고 뛰는 심장 소리가 손 끝으로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간다는 그 어떤 부호도 심지어는 나랏님도 부럽지 않았다. 오로지 기쁨으로 달뜬 마음에 그 뒤에 가려진 공허와 아픔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언젠가 한으로 남겠지.)
이 연:(평생을 함께할 반려. 자신에게 그런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도, 그이가 이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이라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합환주를 담은 잔은 세 번을 돌았고 당신은 저의 손을 애정 가득 담아 붙잡는다.) 언젠가 봄이 오면…… 혹은 우리가 옆마을로 가게 되면 제대로 혼례를 올릴까? 돈 열심히 벌어올 테니까.
배이화:(맞잡은 손을 사랑해마지 않는 눈빛으로 언제고 내려보다 가만히 끄덕인다.) ...응, 그러자. 그럼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네. .......우리 연이 혼례복 입은 모습 얼른 보고싶다.
...분명 그 누구보다 멋진 새신랑일거야.
이 연:(혼례복을 입은 이화의 모습을 상상해보곤 얼굴이 금세 붉어진다.) 넌 지금도 예쁜데, 혼례복을 곱게 차려입으면 선녀 같겠네. 하늘에서 오라고 부르면 어떡할 거야?
배이화:.......과장이 심해..! (비할 바 못 될 만큼 역시 붉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괜히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 화로의 불이 너무 센가. 덥네...
이 연:난 사실만 말했는데. (금세 짓궂게 씩 웃어보인다) 그럼 불을 좀 낮출까? 마침 잘 때가 되기도 했지.
배이화:...못 말려. (손 부채질을 몇 번 휘휘 저으며 끄덕인다.) 응, 그러자.
이 연:잔은 내가 가져다둘 테니 누워. (불씨를 죽이며,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아챈다. 이화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웃게 된다.)
배이화:(홧홧한 얼굴을 그제서야 들어 제대로 마주한다. 겨우 마주한 얼굴에 걸린 미소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내가 해도 되는데.
이 연:기껏 온기가 돌았는데 또 찬바람 쐬서 식힐 순 없지. 금방 다녀올 테니 어서 이불 안에 들어가. 방문 열때 찬기운 들이칠라.
배이화:...응.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워 올려다본다.) ... 추우니까 얼른 갔다 와.
이 연:그래, 조금만 있어. (이화가 이불 안에 잘 들어가 눕는 걸 확인하고는 잔과 술병을 챙겨 문을 최대한 조금만 열고 나간다. 빠르게 뛰쳐갔다 왔는지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다닥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금방 왔지?
배이화:(문을 나서나 싶더니 금새 돌아온 연을 보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 걸린다. 연을 볼 때면 언제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응, 엄청 빠르다. (이불을 슬쩍 들어 바닥을 톡톡 두드린다.) 자, 얼른 들어와.
이 연:내가 다녀오길 잘 했어. (그러면서 얼른 이불 안으로 들어가 당신 곁에 눕는다. 이내 몸을 모로 돌려 당신을 바라보고 눕는다. 가까이서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새삼스레 또 가슴이 뛰어온다.) …… 잘 자.
배이화:많이 춥지. (그 짧은 새에도 찬 기운을 잔뜩 머금은 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긴다. 그 사이로 마주한 얼굴에 괜히 심장이 크게 뛰어 고개를 품에 푹 묻었다.) ...응, 잘자.
이 연:(이리 닿으면 내 빠른 심장 소리가 네게도 들려올 텐데. 가라앉히려고 해도 품에서 전해지는 온기와 당신의 체향에 외려 더 빠르게만 뛴다. 너무 설레어서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도 있다. 그러나 반려를 밀어내는 대신 등줄기를 감싸안고 눈을 감는다. 일상이 될 수 있는 풍경이기를.)
행복과 설레임에 젖어들어 잠든 그날 밤, 꿈을 꿉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음성과 감정이 제멋대로 뒤섞여 우박처럼 거세게 내리꽂힙니다.
‘네가 이리 스러져가는 걸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어. 바람 앞 호롱불도 이보다 아슬아슬하지는 않을 텐데. 내가 대체 어떻게……‘
목소리가 비탄과 괴로움으로 이그러집니다. 눈가에 지난한 절망이 주렴처럼 알알이 꿰여 아롱거립니다. 가슴이 쓰리도록 아려오는, 아프기 그지없는 꿈입니다.
눈폭풍처럼 자비없이 몰아치는 불안을 이기지 못한 이가 끝내 어떠한 제안을 입에 올립니다. 아아, 파멸의 늪에 서로를 밀어넣게 되리라는 앞날을 알지 못하고.
‘…를 네게 줄게.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야. 너를 잃고 싶지 않아. 제발, 내 뜻을 이해해줘…….’
혹은, 외면하고서. 그리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하였기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와 풍경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뒤섞이고 엮여갑니다.
정신이 어지럽게 얼키고설켜 갈피를 잡기가 힘듭니다.
서글프게 식어가는 온기와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손길만이 마지막으로 남아 꿈결의 장막을 맺습니다.
밤을 보내면 당연한 이치로 아침을 맞이합니다.
어젯밤은 그토록 날이 맑아 별을 알알이 셀 수 있을 것만 같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어 흐립니다.
연은 조반을 먹을 때부터 수저를 움직이는 속도가 빠른가 싶더니, 그릇을 비우자마자 바삐 일어나 작은방의 문을 엽니다.
이 연:작일에 부호를 만났잖아? 베가 마음에 들었는지 되는 대로 더 사주겠다 하더라. 돈 많이 벌려면 오늘은 하루 종일 베를 짜야 할 것 같아.
집중할 수 있게 작은방에는 들어오지 말아줘. 괜찮지?
배이화:...하루종일? (걱정이 떠오른 얼굴이 의아하게 기울어지는 듯 하다가 이내 끄덕인다.)
...응, 그럴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이 연:아, 맞아. (들어가려다 몸 돌려 첨언한다) 강가에서 물을 좀 길어와줄 수 있어? 점심이랑 저녁식사 때 쓸 물이 부족해보이더라. 원래라면 내가 하는 건데…… 지금은 아직 해가 떠 있으니 어제만큼 춥지는 않겠지.
배이화:응, 내가 다녀올게. ...몸 상해, 무리하면 안돼.
이 연:적당히 할게. 너도 너무 무겁게 꽉 채워오지 말고.
드르륵, 오래된 문이 닫힙니다. 오래잖아 베틀이 둔탁한 음과 함께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이화도 연의 부탁대로 강가에 다녀오도록 할까요?
배이화:(작은 방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 물동이를 챙겨 나선다.)
강가는 어제 열심히 깨두었던 것이 무색하게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화혼정 안에서는 추위가 느껴지기는커녕 따스했는데, 기이한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요?
그렇다기에는 고뿔이 재발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데요.
배이화:(어젯밤에는 그리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의아함에 고개가 기울었다.) ...큰일이네. 다시 얼어서는.
근력
기준치: |
50/25/10 |
굴림: |
57 |
판정결과: |
실패 |
배이화:
근력
기준치: |
50/25/10 |
굴림: |
81 |
판정결과: |
실패 |
배이화:
근력
기준치: |
50/25/10 |
굴림: |
5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열심히 빙판에 돌을 내려친 끝에 겨우 손바닥만한 구멍을 낼 수 있었습니다.
배이화:......... 이래선 물을 긷는데도 한참 걸리겠네. (작은 구멍 틈으로 열심히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운다.)
얼음이 두꺼운 탓에 물을 긷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렸습니다.
배이화:(고작 손가락 한마디 정도를 남겨두고 찰랑이게 담은 물동이를 들고선다.)
집에 돌아와 벽의 갈라진 틈을 짚으로 채워 보수하고, 아궁이에 불을 단단히 때고, 마루의 먼지들을 털어내고…
점심 식사도 깜박 잊고 끊이지 않는 일감을 해치우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연은 배도 고프지 않은 것일까요?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베틀 앞에 앉아있는 것이 걱정됩니다.
배이화:(걷어두었던 소매를 털어 펴고서는 작은 방의 문을 똑똑 두드린다.) ...연아. 쉬엄쉬엄해.
이화의 목소리에도 연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배이화:...연아?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두드렸다.)
안에 있는거지?
배이화: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72 |
판정결과: |
실패 |
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깜박 졸고 있기라도 한 걸까요?
배이화:...나가는 건 못 봤는데,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베틀이 돌아가는 소리가 멈췄었죠?
배이화:(그제서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덜컥 불안이 몰려온다.)
...연아, 들어가도 돼?
배이화:(돌아오지 않는 대답과 고요함이 심장을 무겁게 짓누른다. 더 기약없는 답을 기다렸다가는 정적에 질식할 것 같아 문고리를 잡아 문을 당겼다.)
베틀과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은 실꾸러미만이 덩그러니 당신을 반길 뿐입니다.
베틀 뒤편, 뒷문이 조그맣게 열려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며 벽에 부딪힙니다.
그 사이로 작게 눈발이 새어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당신만을 두고, 당신만 알지 못하는 사실을 숨긴 채로?
배이화:...연아, 연아. 이 연.... (사라진 이를 부르는 공허한 목소리만 갈 곳 없이 흩어진다. 비척이는 걸음이 베틀의 뒷편에 삐걱이는 뒷문으로 향한다.)
뒷문으로 가보니, 툇마루 아래 연의 신발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이 흐리더라니 끝내 눈발이 드문드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문설주 너머로 이어지는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연의 것이겠지요.
연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돌아올 것입니다. 단지 잠깐 산보를 간 것일지도 모르지요.
요 며칠 연이 당신에게 절대 벙긋하지 않은 여러 의문들이나, 묘한 눈빛과 표정들이 요사스러이 직감을 괴롭힙니다.
배이화:(불안한 심장 소리가 머릿속에, 귓가를 시끄럽게 울린다. 눈길에 놓인 발자국이 눈에 덮힐세라 망설임 없이 뒷문을 빠져나와 뒤를 쫓는다.)
혹시 모르니 호롱불을 챙겨가는 것이 좋겠어요.
배이화:...아. (이리 대책없이 갔다가 눈보라에 길이라도 엇갈리면 큰일이니, 근처에 놓여있던 호롱불을 쥐어들었다.)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발자국은 문가를 넘어 들판을 가로지르고, 우뚝이 선 억새밭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금 이어집니다.
눈이 더 쌓이기 전 유심히 흔적을 살피며 좇아가던 당신은 곧 발자국이 숲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배이화:... 대체 어디까지 간거야, 연아. (숲으로 향하는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이파리 없이 헐벗은 나무들이 빽빽한 숲입니다.
덤불은 누렇게 뜬 채 죽은 지 오래이고,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눈옷을 무겁게 덮은 채 침묵합니다.
큼직하니 높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산골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어두캄캄합니다.
발자국으로 동선을 유추하면서 이곳까지 오는 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희미한 빛을 투영하던 태양도 달에게 자리를 내어주겠지요.
발자국은 숲의 초입까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산짐승들의 흔적과 나무에서 떨어진 마른 열매 등으로 인해 그마저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렸습니다.
연이 대체 언제쯤 집을 나간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애가 탑니다.
이웃 마을에 가는 것이었다면 굳이 말없이 갔을 이유가 없는데…
배이화:...점점 어두워지는데 큰일이네. 어딜 간거야, 연아... (호롱으로 주변을 비춰보다가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혹시라도 들린다면 돌아와줄까하고.)
이즈음에 당신 발자국 살포시 상흔을 남겼을까 하며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발을 내디딥니다.
갈수록 주변은 어두워지고, 호롱불은 차가워지는 칼바람에 아슬아슬하게 흩날리며 간신히 버텨내고만 있습니다.
크게 이름을 불러도 되돌아오는 답은 없습니다.
걷고 걸어 어느덧 숲의 가장 깊은 중턱까지 접어들었을 즈음, 나무들이 두껍게 몰려 선 부근의 눈이 유달리 파헤쳐진 모습이 눈에 띕니다.
가까이 가 보면, 눈이 다 파헤쳐지다 못해 진흙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입니다.
주변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바랑과 지팡이 등이 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여기에서 격렬하게 몸싸움이라도 한 것 같아요.
배이화:(호롱으로 어지러운 흔적을 살피다가 이어지는 비탈길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긴다.)
나뭇기둥을 붙잡고 조심조심 비탈 아래로 내려가보자, 경악스러운 광경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사지가 마구 뒤틀린 사람 세 명이 눈밭에 어지럽게 쓰러져 있습니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흐른 피가 옷깃과 주변의 바닥을 시뻘겋게 적셨습니다.
끔찍한 살인 현장을 목격한 이화, <이성> 판정 (1/1d3)
배이화:
SAN Roll
기준치: |
64/32/12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배이화:(비명에 새어나올세라 입을 틀어막는다.) ... ... ........이게 대체...
(울렁이는 속을 다독이며 쓰러진 이들의 상처를 확인한다.)
배이화: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전부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채 죽어 있으며 유독 한 명에게만 정확히 심장 부근에 상흔이 남은 것을 발견합니다.
상흔 주변의 살갗이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검은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시신들 너머로 펼쳐진 하얀 눈밭 위, 핏자국이 길을 남기듯이 저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살해한 자일까요? 혹은 살인자에게서 겨우 도망친 생존자일까요?
부정적인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갑니다.
배이화:(... ... ...안돼. 안돼... 제발 그것만은.... 참혹한 상상을 떨쳐내듯 고개를 털고 핏자국을 따라간다. 눈길을 헤치는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피의 양을 보아 꽤나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결국 또 시체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날이 완연히 어두워졌을 즈음, 이화는 [동굴] 앞에 도착합니다.
발을 질질 끌면서 왔는지 더더욱 핏빛이 짙어졌습니다.
배이화:(불을 비춰가며 동굴의 안쪽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연아?
작은 노란 빛을 앞세워 한 걸음, 한 걸음. 동굴의 안으로 들어섭니다.
깊숙한 숲 속에 자리한 동굴인지라 바닥에는 이끼가 깔려있고 산짐승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혹여나 겨울잠에서 깨어난 위험한 산짐승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스럽게 진입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요, 분명 이런 깊은 숲까지는 걸음해본 적 없는데도 이곳이 익숙한 것은.
오래지 않아 노란 불빛이 돌로 가로막힌 회갈색 벽을 비춥니다.
차례차례 드러나는 광경은 바닥에 부산스럽게 깔린 짚단과, 제단을 세운 것 같은 조악한 흔적…
연은 숨은 붙어 있었으나, 척 보기에도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드러난 살갗에는 타박상이 가득하고, 배와 팔뚝은 깊게 베여 아직까지도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의 옆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떨어진 채입니다.
[연]과 [책], [제단]을 살필 수 있습니다.
배이화:...연아...! (그에게 다가가 호롱을 옆에 놓아 두고는 찬찬히 살핀다. 심장이 몹시 너덜해져서 저 바닥을 구르는 것 같았다.)
이화가 말을 걸어도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끊어질 듯 가쁜 숨만을 내쉽니다.
안색이 창백하고,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체온이 낮습니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이 차갑습니다.
배이화:...연아 ...연아, 정신 차려. 정신 놓으면 안돼. (뺨을 쓰담는 손길이 애처롭다.)
응급처치
기준치: |
30/15/6 |
굴림: |
63 |
판정결과: |
실패 |
연의 모습에 너무 놀란 탓일까요? 손이 떨려 제대로 된 처치가 어렵습니다.
배이화: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러고 보니, 지난날 책에서 언뜻 상처에 좋다는 약초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굴의 근처에 약초가 있다면 환부에 붙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배이화:...연아, 잠시만 기다려. (제 겉옷을 덮어주고 동굴 근처에 혹여나 있을 약초들을 찾는다.)
자연
기준치: |
60/30/12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다행히 금방 기억에 남은 약초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배이화:...다행이다. (약초를 있는대로 뜯어와 짓이겨 연의 환부에 붙여두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옷깃을 들추자 드러난 살갗은…
상처가 남은 배와 팔 부근은 물론이고, 심장이 자리한 가슴팍 부분이 온통 까맣습니다.
눈밭에 나뒹굴던 시체들의 상처 부근이, 꼭 이런 검은빛으로 물들지 않았었나요?
마치… 까마득한 밤에 삼켜져가는 것만 같아요.
불길한 광경에 이화, <이성> 판정 (1d2/1d4)
배이화:
SAN Roll
기준치: |
63/31/12 |
굴림: |
5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배이화:(...보통 짐승에 당해서는 이런 상처가 생길 리가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연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시선이 옆에 놓인 책에 꽂힌다.)
낡은 책은 제목조차 거의 지워질 듯 닳아 있습니다.
시간의 눈을 가리고 생명을 붙잡는다는 뜻이네요.
배이화:.......왜 이런걸. (책을 주워들어 펼쳐본다.)
펼쳐보면, 척 보기에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도 힘든 괴상한 내용의 말들이 온 책장들을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주의깊게 읽어보자 끔찍하게 묘사된 이계의 신들을 소환하는 온갖 제문, 효능과 영향을 미처 짐작하기도 어려운 주술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책을 넘기다 보면 유달리 닳은 책장에서 멈춥니다.
어찌나 이 부분만을 읽고 또 읽었는지, 그렇잖아도 낡은 책이 너덜너덜합니다.
책장의 가장 서두에 적힌 단어는 단 두 글자입니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글줄들은, 분명 주제와 관련된 주술의 일부이겠지요.
배이화:... (책을 든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린다. ...어째서 이 부분만 이렇게 닳고 닳은건지. 왜 책에 적힌 내용이 눈 앞에서 실제로 펼쳐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건지.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계의 신. 제물. ...그럼 저기의 저 제단이...? 이까지 생각이 닿자 조악하게 만들어진 제단으로 시선이 향한다.)
나무를 어설프게 깎고 돌로 구색을 맞춘, 조악하기 그지없는 제단입니다.
그릇 몇 개와 이미 다 타 녹아버린 초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릇을 채운 것은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썩은 덩어리들입니다. 역겨운 썩은내가 희미하게 감돕니다.
연의 행적을 추측해나가며, 지금껏 듬성듬성 비어있었던 조각들이 하나 둘 맞추어져 갑니다.
사람들을 죽여 제물로 쓰고, 제단을 만들어, 주술을 외운 것인가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때, 연이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무거운 눈을 뜹니다.
배이화:(멍한 시선에 빛이 돈다.) ... ...연아! 연아, 정신이 들어?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
이 연:(괴로이 기침을 토한다. 그때마다 상처에 새로운 피가 스물스물 배어나와 옷깃을 적셨다. 피와 흙으로 더러워진 손을 뻗어 겨우 당신의 손끝을 감싼다. 와중에도 당신까지 더러워질까, 내쳐지기라도 할까 온전히 닿지 못했다.) 여기에 왔다는 건…… 전부 봤다는 거구나. 그렇지……?
배이화:...연아, 연아... (상처가 여기에 있다고 이렇게나 너덜하다고 알리듯 새로이 베어나오는 핏물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손끝이 닿으면 놓칠세라 두 손으로 붙잡아 제 뺨으로 가져간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가는 줄기가 손등을 타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천천히 끄덕이며 파르르 떨리며 내리깔리는 속눈썹에 걸린 한 방울이 아련하게 굴렀다.)
... 왜 이랬어. 왜... (전하고 싶은 말은 가빠지는 숨에 막혀 뚝 뚝 끊어진다.)
이 연:미안해. (네 찬란히 빛나는 눈에 눈물 고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홍채 안에 움틀던 은하수가 눈가를 타고 이끼 낀 바닥으로 굴러떨어져내린다. 저의 상처보다 이화의 눈물이 더 묵직한 둔통을 남겼다.) 미안해……. 전부 내 욕심이었어.
알게 된다면 네가 이리 상처받으리란 걸 예상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어.
이 연:사랑하는 이의 숨이 나로 인해 앗겼으니, 되돌려주는 게 마땅하다 여겼어.
게다가, 이화 너는…… 한낱 인간인 나에게 매여서는 안 되는 존재잖아.
배이화:...왜 그랬어. ...왜. 너의 숨을 다시 앗아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늘 밝은 태양처럼 환한 달처럼 반짝이는 별처럼 자신만을 향하던 금빛 눈동자가 꺼져가는 것을 마주하면 한번 터진 둑은 결국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이러지 말았어야 해... 이러지 말았어야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닌데, 자꾸 원망 어린 말들만 쏟아진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함께 봄을 맞자고 했잖아.
이 연:이러지 말았어야만 했는데, …… 네가 나를 잃는 게 슬픈 것만큼, 나도 너를 잃는 게 싫어서. 그래서…….
함께 봄을 맞고 싶었어. 하지만, 이화. 너는ㅡ
(당신의 눈물이 떨어져 저의 눈가를 적신다. 그렇잖아도 흐렸던 시야가 안개처럼 뿌얘져만 왔다. 함께 봄을 맞고, 제대로 된 혼례를 올리기로 약속하였던 지난밤이 생생하게 뇌리를 맴돈다.) 그 모든 약속이 어그러질 걸 알면서도 행하지 않을 수 없었어.
너는 나의 사랑하는 반려지만, 동시에 천하를 굽어살피며 구름을 벗 삼는 신이기도 했으니까.
그 순간 얼어붙어 있었던 강둑의 보가 터져나갑니다.
억류되어 있던 기억들이 해일과도 같이 쏟아져 옷깃을 흠뻑 적셔옵니다.
당신은 낡은 옷을 걸치고 고된 삶 버텨가는 민가의 평범한 이가 아닙니다.
풍류가 아름답고 고즈넉하기로 유명한 이 연령 마을의 수호신이자,
그것이 당신 타고난 자리이며, 당신 손에 처음부터 쥐여져 있었던 힘입니다.
연령의 수호신으로서 당신은 이따금 영물인 학으로 변하여 마을을 둘러보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얀 세상 노니던 어느 겨울, 전설과 얽힌 영물을 노린 한 사냥꾼에 의해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던 연의 눈에 당신이 띈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필연이었을까요.
그래요, 연의 치료 끝에 당신은 기력을 되찾았고,
그 마음이었는지 혹은 스치는 웃음결과 고운 낯에 반하여 연정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인간으로 화한 당신과 연이 서서히 마음을 터놓아가던 어느 날.
이 연:중병에 걸린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였어. (당신의 뺨을 몇 번이나 쓰다듬는다. 아, 고운 낯을 내가 이리 망가뜨렸구나.) 네가 나를 구하기 위해 깃을 뽑아 베를 짰어.
하나 어떤 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지. 죽음만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 그래서, 그래서 네가 날……
떠오릅니다. 죽음이 연의 턱밑까지 닥쳐오는 것을 보며 불안에 떨던 나날이.
점점 더 초췌해지는 연의 손을 붙잡고 흐느끼던 순간이.
연심을 품은 이가 품 안에서 죽어가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요.
결국 당신은 스스로의 숨을 친히 깎아내어 연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합니다.
하나 수호신에서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며 불로불사의 힘을 잃어,
그저 자신과 연의 수명을 바꾸는 것만이 남은 권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입니다.
이 연:내가 어떻게 네 목숨을 받아 살아갈 수 있겠어? 가벼워진 몸으로 눈을 떠 곁에 스러진 너를 보고서야 은정의 마음을 깨달았어. 너 없이 어찌 살지도 아득한데, 하물며 네 목숨으로 내가 살아간다니.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어. 그래서, 다시 돌려주려고……. (잔상처가 가득한 손이 젖어든 이화의 눈가를 쓸어내린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 용서는 빌지 않을게. 마음껏 탓해도 좋아, 이화…….
격렬히 비탄하고 다시없을 후회에 잠겼을 테죠.
당신이 없는 세상은 청수하지도 고아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어떠한 풍류도 의미를 갖지 못하고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찾아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배이화:(제 눈가를 쓰는 손을 붙잡는다. 혹여나 힘을 잃을까 더 힘주어 잡고 놓지 않는다. 제 눈물이 상처 난 손을 훑고 떨어져 내려간다. 울음에 잠긴 목소리가 한동안 나오지 않아 그저 몇 번이고 하염없이 고개만 저었다.) ... ...내가 어찌 너를 탓해. 나 역시 너와 같은 선택을 했었으니 어찌 너를 탓할 수 있겠어. ... ...미안해, 미안해... 결국 너를 이렇게까지 만든건 나야. 나를 용서하지마.
...연아. 연아... (너를 온전히 눈에 담고 싶은데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가 너무나 밉다.)
이 연:그러지 마. 나 역시 너의 마음을 이해해. 그래서, 내가 저지른 짓이 네가 한 일을 전부 뒤집어버리는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어. 결국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러워진 손길이 붉은 눈가를 더듬을 때마다 당신의 흰 살갗에도 핏자국이나 검댕이 묻어난다. 내가 널 더럽게만 만들고 있구나.)
죄업으로 물들어 새까만 피부와 달리, 찬란한 생을 담은 그 구슬은 하얀 빛을 발합니다.
구슬에 연의 피를 묻히자, 그것은 피를 삼키고선 일순 강한 월광을 뿜어내더니…
마치 눈물방울과도 같은 모양의 아름다운 보랏빛 보석으로 화합니다.
이치를 거스르고 무고한 이들을 살인한 손이 떨립니다.
연은 옥새라도 다루는 것마냥 보석을 세게 쥐지도 못한 채 어루만지다가,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억지로 띄는 미소가, 아아, 달빛보다 연약하고 별빛보다 흐무레합니다.
하루의 유예기간이 지날 때마다 일과처럼 건네었던 그 질문에 도대체 얼마나 깊은 뜻과 눈물이 섞여들어갔을까요.
이 연:내가 더 이상 인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더라도, 나를 사랑해줄 수 있어? (목이 메여 목소리가 탁했다.)
배이화:(흐려지는 시야에 너를 담으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언제나 그랬듯.
이 연:(이렇게 죄를 쌓았고, 더러워졌고, 추락했는데도 너는 날.) 날 사랑한다면, …… 부디 받아줘.
본래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품어야만 하는 수명이 한낱 인간의 욕구로 인해 주인이 바뀌었으니 마땅히 당신의 것입니다.
대들보 한 짝을 잃은 하늘이 차차 무너져 갑니다.
수호신을 잃은 마을이 본래의 고즈넉한 풍경을 잃고 매몰되어 갑니다.
신이라면 필히 어그러져가는 이치를 되돌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신으로서의 책무가 아무리 무거워도, 반려 위하는 마음마저 짓누를 수 있을까요.
당신이 어떤 심정으로 연의 부탁을 들어주었었는데.
주인 찾지 못한 쌍가락지가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고 텅 빈 달은 새까만 흉수를 품은 채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호롱불은 숨을 잃어가는데도 이 순간이 마치 낙인처럼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돌과 흙마저 투과할 듯한 은색 월광 때문일까요.
배이화:...연아, 사랑해. (애처로이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온다. 제 연인의 이름을 부르고 연심을 고백하던 입술이 가여운 제 반려의 메마른 입술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진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저 하고 싶은대로 영원히 흐를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너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데.)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93 |
판정결과: |
실패 |
화혼정에서 주웠던 결정을 상기합니다. 화혼정에 그리도 이끌렸던 건, 혹 초생달 모양의 그 결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며칠 전 마당에 날아왔던 종이에서 무언가 심상찮은 내용을 봤던 것도 같은데…….
배이화:....아. (주머니 속에 넣어둔 결정을 꺼내든다.)
지능
기준치: |
55/27/11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어쩌면 이 결정이 바로 월화운(月龢澐)인 게 아닐까요?
혈액에 월화운을 녹아내면 연이 당신에게 주려는 수명을 절반만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이화:(연의 심장 부근에 난 상처 위로 손에 든 월화운을 녹여낸다.)
그렇다면, 연과 이화 그 누구도 서로의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손 안에 쥔 투명한 결정은 여전히 훈훈하게 온기를 발합니다.
당장이라도 연인의 마음을 온유하게 어루만져 줄 것만 같습니다.
함께 살아남아 생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테지요.
생명의 보석을 그대로 흡수하지 않는다면 이화는 신으로 되돌아갈 권리도, 갖고 있던 불로불사의 힘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주인을 잃은 달은 차차 악한 힘에 물들어갈 것이고, 이는 연령마을뿐이 아니라 세상 전체에 위협이 될지도 모릅니다.
기껏 얻게 된 두 사람의 삶이 언제 부서질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여 선택을 강행하겠습니까?
배이화:(자신의 선택을 돌아보지 않기를 다짐했다.)
이 연:이화…… 이건? (결정과 당신을 번갈아본다.)
배이화:... ...미안해. 나를 용서하지마.
이 연:…… 무얼 하려는 건지 말해줘. 죽으려는 건 아니지? …… 나를 두고, 또 떠나지는 않을 거지? (불안감이 위태롭게 닥쳐온다.)
배이화:...너를 살릴거야. 그렇지만 너를 떠나지도 않을거야. ... 이기적이라 욕해도 좋아. 그래도 작은 희망이라도 놓고 싶지 않아서.
이 연:이걸…… (결정을 내려다본다.) 이걸 쓰면,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야? 정확히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정제해낸 보석도 함께 받아줘. 함께할 수 있는 미래라면 우리 서로에게 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건네자.
배이화:...응. 분명 그럴거야. (보석을 함께 받아든다.)
차디찬 감각이 일순 눈덩이처럼 뭉쳤다가, 따스한 끝마무리로 화하여 파동칩니다.
월화운이 녹아들자 연도 마찬가지의 온도를 느끼는 듯 벅차오르는 표정입니다.
그의 몸을 가득 채우던 새까만 어둠이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치명상처럼 깊던 상처도 며칠 휴식을 취하면 될 정도로 서서히 아물어갑니다.
서로의 숨을 나누고 명을 갈라 삼켰으니 내일의 어스름한 새벽녘을 맞이하는 이는 하나 아닌 둘입니다.
새벽을, 아침과 낮을, 노을을 지나 다시 밤하늘이 자락 펼칠 때까지.
이 연:나는 연령에서 봄을 앗아갔지만, …… 후회하지 않으려 해. 사람들이 날 욕한다고 해도 좋아. 어차피 남들의 시선 같은 거 신경써봤자 의미없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당신을 양팔로 한껏 끌어안는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미래를 그리고 싶어.
배이화:......네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워서 미안해. ...다 내 욕심이야. (두 팔로 당신을 가득 마주 끌어안는다.) ...언젠가 끝을 맞을 때까지 너와의 미래를 그릴게.
이 연:자책하지 마. 차라리 나를 탓하는 게 나아. 네가 아프고 힘든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끊어질 줄 알았던 숨이 질기게도 명을 잇는다. 당신으로 하여금 이어나갈 수 있게 된 생. 온전히 당신에게 바치리라.) 사랑해.
비록 태어난 날 다를지라도 눈 감는 나날만큼은 한날한시겠지요.
아직 봄은 오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영원히 찾아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도 봄꽃이 간지러이 떠는 것만 같았습니다.
언젠가 칠흑 같은 밤이 온 사방에 파동치더라도, 그 어떤 일이 두 사람을 덮칠지라도…
서로를 향한 새하얀 마음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이화가 수호신으로서의 권능을 잃음에 따라 흉조는 차차 세를 불려갈 것이고, 종막은 예상치 못한 때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연령마을의 눈은 언젠가 녹을 것이고, 화혼정 역시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