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잠자코 듣다가 어이없는지 작게 웃고는) 그 애가 자라서 된 게 나다. 이 시간에 학교 밖에 있는 걸 보면 근처 학교 학생 같은데 벌써부터 수업을 빼먹다니, (지나를 바라보고는) 학교에 한번 연락이라도 해줄까요?
이지나:학생이 되어서 공부는 안 하고 사람한테 물병이나 던지고 있다니. 가정교육도 학교 교육도 알만한 수준이구나. (멸칭에는 패드립으로 갚는다) 학생증 줘보렴. 사과를 안 하겠다면 다른 방식으로 처리를 해야지. 너희가 요새 관공서 주변에 나타나서 혼인신고하는 사람들을 노린다는 애들이지?
유진:이지나 씨, 어른이 되어서 학생한테 쪼잔하게 그러면 안되지. (대충 패드립은 심하다는 어투로 하는 말이다.)
이지나:학생이 학생답게 굴어야 대접을 해주지.
이수현:(학생증은 내밀지도 않을 뿐더러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하면 안되는 짓인 건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가 눈치를 보듯 결국엔 입을 닫아버린다.)
이지나:어머? 내가 학생 몸수색까지 해야겠니? 미안한데 난 형사라서 곱게 대해줄 자신이 없단다. (제 허리에 한 손 얹고 내려다본다.) 잘못된 걸 알고는 있다니 칭찬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 하면 안 되는 짓인 걸 아는데 왜 하는 거지?
이수현:…… 친구 때문에. (웅얼)
이지나:친구가 뭘 어쨌길래 그러니. 결혼의 피해자라도 돼? (가정형편이 안 좋은가?)
학생은 입을 꾹 닫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써보는 게 좋겠어요.
이지나:사정이 있는 건 알겠지만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단다. 최근 너희가 저지른 짓 때문에 민원이 점점 더 많이 들어온다는 거 알고 있니? 직업 때문에라도 우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참작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너흴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어. (협박인지 구슬리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말)
말재주
기준치:
60/30/12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유진:1번 가설 뿐만 아니라 3번 가설도 포함이네. (이걸 어쩐다, 하며 잠깐 생각하다 잠자코 학생의 반응을 살핀다.)
이수현:……나도 잘 몰라. 친구네 오빠가 사고로 죽었는데… 지난달부터 7월이 될 수록 오빠가 죽는 게 자꾸 생각난다잖아.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고싶지 않다고 해서 우리도 고민하다가… 위로해주려고…… (눈치를 보면서 말끝을 흐린다.)
나도 뉴스를 봤고 이제 그만해야하는 걸 알아. 하지만 걔가 너무 즐거워보여서 그만하자고도 못했어. …요.
유진:(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지나와 학생을 번갈아보다가는) 너 이름이 뭐니?
이수현:……이수현.
유진:(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비어있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다.) 그 친구 이름은?
이수현:……연주. 서연주.
이지나:좋아. 드디어 좀 협조할 마음이 생겼나 보구나? 근데 이수현, 너도 알고 있겠지? 오빠가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인데 이런 방법으로 위로를 하는 건 옳지 못하단 거.
나 참. 요즘 애들은 대체 사고회로가 어떻게 되어먹은 거지? 자기랑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걸 보며 즐거워한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네.
유진, 네 가설이 이렇게까지 맞아들어갈 필요는 없었는데 말야.
유진:당사자 입장은 다르겠지. (하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눈이다.) 학생이 한 명 더 있을텐데. 그 애도 친구니?
이수현:연주는 아무 잘못 없어! (뒤이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제안한거야!
이지나:잘못이 없기는? 널 말리기는커녕 즐거워했다며? 너도 악질이지만 그애도 똑같아.
남은 한 명은? 질문에는 성실히 대답해야지. (구두굽으로 바닥 탁탁 두드린다)
이수현:……민… 다윤.
나는 이제 그만하자고 하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 말해도 연주는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이지나:'그만하자고 하고 싶어'가 아니라 그만해야만 한단다.
(와중에 태클검)
유진:지나, 너 애 취조하니? (와중에 태클검222)
이수현:…….
이지나:그래서. 그 다윤이란 애는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고는 있니? 너 혼자가 아니라면 둘이서라도 말려봐야지.
이수현:그건… 나도 몰라. 안 물어봤으니까.
유진:뭐, 그래, 좋아. 그건 둘째치고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수현을 잡은 손을 놓아주고는 웃으며 말을 얹는다.) 학생 말이 짧네요?
(방금까지 마찬가지로 짧았던 사람)
이지나:그러게? 아깐 '요' 자 붙이더니 그새 짧아졌네? (유교girl)
이수현:벌을 받아야 한다면 받을게. …요. 하지만 그 전에 연주 집에도 같이 가 주…세요.
유진:동화같은 이야기네.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공감은 하는 모양인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뭐라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면 이지나 씨도 내가 싫으신가? (작게 웃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간다.)
이지나:글쎄? 너에 대한 내 생각은 이전이랑 똑같은데. (그냥 적당한 비즈니스 관계의 동료. 좀 재수없는 사람. 이라고 말하려던 건 삼켰다. 어쨌건 이수현한텐 우리가 연인으로 보일 테니까.) 보통 동화라면 저주를 풀기 위해 마법사나 마녀를 찾아가지…….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나?
유진:세상 수많은 동화의 결말은 대체로 똑같아요. 진실된 사랑의 키스가 저주를 해제하지. 그 후의 이야기는 (작게 소리내어 웃고는)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지나:쯧. (작게 혀 찬다.) 어딘가엔 다른 결말도 있겠지.
유진:예를 들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기라도 바라시나?
이지나:진짜 그러길 바라줄까? (눈 흘긴다) 최근에 무슨 일 겪은 거 없니? 이런 일 이전엔 없었잖아.
유진:그러지 않을 거잖아. (가만 웃고는) 무슨 일이라고 해도 별 일이 있던가? 내가 모든 걸 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
특별한 일이라고 해도 지극히 사적이고 나보다는 우리 가족 일이었으니까.
이지나: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문득 지나는 지난달 즈음 유진이 휴가를 냈던 것을 기억해냅니다.
가족의 결혼식이라고 했던가요?
지나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계속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이수현이 이지나의 옷깃을 끌어당깁니다.
이수현:역시 저 아저씨 이상해.
이지나:아까부터 대체 왜 그러니?
이수현:나랑 연주 이름을 물어봤으니까 우릴 모를텐데 내가 알려주기도 전에 지금 연주 집으로 가고 있잖아요?
어라, 그러고보니…
유진이 그를 알고 있던가요?
처음 가보는 사람치고는 아주 정확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처럼요.
이지나:……? (그러고 보니 그렇네. 자연스럽게 앞서나갔지.)
유진. 너 길을 알고 있니?
유진:(이야기를 듣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냥. 이쯤일 것 같아서.
이지나:(잠깐 이수현을 뒤로하고 유진에게 성큼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음 솔직히 말해.
유진:숨기다니, 나만큼 솔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이지나:그건 아니지. (정색)
유진:(태평스럽게 웃고는) 자기야, 그렇게 말하면 나 상처받아.
이지나:애도 뒤에 있는데 자꾸 그럴래? (짜증!) 사람들이 널 경계하는 것도 그렇고 좀 이상하잖아. 결혼식에서 무슨 일 없었니?
유진:경계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저 친구 뿐이었는걸. 그리고 결혼식이 결혼식이지, 무슨 일 있었기를 바라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게 관심 있었으면 오지 그랬어. 신랑 측 관계자로 초대해 줄 수 있었는데 안타까워라.
이지나:말은 그래도 동물까지 알아서 포함해서 들어야지. 센스 없긴. 무슨 일 있었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나마 의심스러운 구석이 거기뿐이라 그러는 거야. (듣고 있자니 열받는데?) 기껏 신경써줘도 날 놀리기에만 바쁘구나. 넌 물병으로 한 대 더 맞아야겠어.
유진:우리 이지나 씨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었나? (작게 웃으며 농조로 말한다.)
이지나:걱정이 아니라 신경이라니까? 성질 그만 긁어. (그리고 수현에게 고개 돌린다.) 그냥 감으로 갔을 뿐이래. 다시 안내하렴.
이지나:(커피 좋지. 하지만 마실 생각이 없어 아직은 그대로 둔다.) 따님의 행방은 대략 파악이 됐습니다. 다른 친구와 뷔페에 간다는 것 같군요.
아드님의 사망에 관한 전말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서연주의 모친은 느릿느릿 조심스러운 투로 입을 엽니다.
서연주 모친:…1년 쯤 전이에요. 갑자기 사고로 죽었죠. 우리 건우는 원래도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그런 식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희 모두 충격을 많이 받았지만 연주는… 더 상처를 받았나봐요. 애들끼리 아주 친했거든요. 저도 이제는 안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
……7월은 건우의 사혼식을 올려줬던 달이에요. 7일이었으니까… 마침 오늘이네요.
오래 사귄 연인이 있었거든요. 지희 씨가 원래 건우에게 결혼하자고 하려 했었나봐요. (아, 하고 상대 분 이름이에요, 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들어서, 저희야말로 부탁드린다고 했죠.
건우에게도, 지희 씨에게도, 저희에게도… 무언가 하나 일단락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연주는 반대했지만 결국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그러네요.
서연주 모친:(작게 한탄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연주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언제였더라.
이지나:공교롭게도 오늘이군요. (그러고 보면 유진이 칠석 얘기를 꺼냈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모친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인다.) 여쭤볼 게 있어요. 아까 처음 이 집에 방문했을 때 저쪽 형사가 독특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죠. 혹시 그 박자가 아드님과 연관이 있을까요?
서연주 모친:(살짝 놀란 눈치를 보이고는) 어머, 네. 건우가 항상 그런 식으로 노크를 하기는 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주책을 부렸네요.
이지나:(하. 무슨 빙의라도 된 거야? 웃기네 진짜. 이게 소설도 아니고.)
문득 이지나의 눈에 장식장 위의 액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지나:힘드셨을 텐데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주가 결혼을 훼방놓고 다닌 건 자기가 반대한 사혼식을 기어코 강행해서였나?)
3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푸른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들고 흑백의 액자 옆에 앉아 있습니다.
그 뒤에 서연주의 모친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 교복을 입은 서연주가 함께 있네요.
유진: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자연스레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하다가도 살짝 눈을 찌푸리며 눈을 방황하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일을 했더라? 지난 기억을 헤집듯 이어지는 침묵을 깨는 것은 그로부터 수 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학생의 집에서 나왔다가…… 뭘 했었지?
(손바닥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다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기억이 없어.
이지나:그럴 거 같더라. 집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나긴 하니?
유진:(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는) 알면서 물어봤어요?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 거기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지나: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일이어서 말이지. 평소였더라면 너한테 내 생각을 꺼내자마자 비웃음이나 들었을걸?
이상한 기분이라면 어떤 거?
유진:언제는 안 그러셨나, 이지나 씨. (안그랬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얘기해 줄 마음은 있나봐요?
아주 당연하지만 낯선 느낌. 그런데 동시에 처음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사람의 감정이란 복잡해서 때로는 모순적이라고 하지만 이런 느낌을 받은 건 좀처럼 없었던 것 같아서.
이지나:네가 날 비웃는단 소리였단다? 물론 내가 널 비웃는 일도 심심찮지만.
유진:그럼, 내가 당신을 비웃는다는 뜻이었지. (농조)
이지나:흠,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 죽은 서건우의 영혼인지 뭔지가 네게 빙의되었다 방금 사라진 것 같아. 내 꿈에 부케를 든 네가 나왔거든? 그런데 그 집에서 본 사혼식을 올렸다는 여자의 손에 정확히 같은 부케가 들려있었어. 네가 그 어머니에게 또 찾아뵙겠다고 한 것도 영 이상했고.
유진:(이게 무슨 소리람?)
이지나:(그 표정을 익히 알기에 눈썹 한번 치켜올린다.) 나도 이런 말 하고 싶지 않거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안 믿는 게 귀신이니 유령 따위였다고. 그런데 오늘 너한테 일어난 일련의 일을 보면 이것밖에 추론되는 게 없어.
유진:(정말 이상하다는 눈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어이없이 웃으며 작게 속삭인다.) 내가 꿈에 나올 만큼 내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한 거예요? 와, 이 기대에 얼마나 보답을 해야 할 지 모르겠는걸.
이지나:이게 제일 듣기 싫었는데! 진짜 오해하지 말아줄래??!?!?! 난 절대로!!!! 그만큼 네 생각 많이 하지 않으니까!!!! (발 콰아악)
이지나:기막힌 우연? 설마 네 형의 결혼식에서도 부케가 파란 꽃이었니? 짐작가는 게 있다면 모두 말해야 해.
유진:(이어지는 질문에 너를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랑 비슷한 부케였어요. 지금은 나한테 있거든. 형수가 던진 부케를 누가 받고는 나한터 줘서. 그거랑 같은 부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 손을 몇 번 탔던 거라고 하니 어쩌면 동일한 부케일 수도 있겠는걸. (살짝 눈을 찌푸리고는 농조를 띄운다.) 오, 갑자기 찝찝해졌다.
이지나:그러니까 지금 부케가 너한테 있다는 거지? 그게 이 상황의 단서가 되려나? 일단 지금은 네가 멀쩡해진 것 같긴 한데, 서건우가 또 네게 빙의인지 접선인지 될 수도 있잖아. 아니라면 좋겠지만.
유진:정말 빙의인지 접선인지 모르겠지만 예상되는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요?
그리고 나도 귀신이 그렇게 잘 붙들리는 체질이 아니거든. (정정할 건 정정하고 넘어가자는 주의)
이지나:빨리 말해. 알고 보니 니가 서건우 친구였단 소릴 들으면 꽤 놀라울 것 같거든.
(그럴 리 없겠지만)
유진: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이 편하기라도 했겠지 안타깝게도 나도 서건우 씨와는 초면이네요. (양쪽으로 따옴표 제스쳐를 취하고는 말을 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부케가 정말 사진 속의 부케라면 부케 속에는 서건우의 영혼이 묶여있다. 그리고 그 부케가 연인을 데려가려고 한다.
제일 찝찝하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반대로 가장 말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안그래?
그리고 그 꿈 이야기 다시 해 봐요.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늘리는 게 좋으니까.
이지나:내가 본 노트에도 영 꺼림칙한 내용이 쓰여 있었지. 민다윤이란 애가 서연주에게 바람을 넣었던데. 대체 무슨 해괴한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정말이라면 지희란 사람도 위험하겠구나. 빨리 그 애들을 찾아서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내야겠네.
애초에 서건우의 사혼식 때 쓰인 부케가 왜 하필 너희 형 결혼식 때 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눈살을 찡그린다.)
유진:지금 우리 형수 취향에 토다는 거예요? (악의 없음)
이지나:그게 아니라, 사혼식 때 쓰인 부케라면 보관이 되던가 했을 텐데 어쩌다가 그 결혼식까지 흘러들어갔냐는 말이야. (황당)
(꿈을 되새겨본다. 정확히 어떤 꿈이었더라? 부케를 든 유진이 걸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누가 내게 말을 걸었었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오늘은 중요한 날이라고, 너를 지켜야 한다고 했어.
유진:(잠자코 이야기를 듣다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지켜요? 나를? (지금 그런 행동을 보였나 싶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다가는) 부케의 출처는 나도 잘 모르는데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만들어진 건지 전혀 시들지도 않았고 좀처럼 손상되지도 않을 뿐더러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보니 다른 신랑신부들 손에서도 꽤 빙빙 돈 모양이에요.
(손버릇처럼 제 머리를 톡톡 건드리고는 너를 가리켰다.) 요컨대 정말 기막힌 우연인거지.
이지나:하. 그러니까 그애들은 죽은 사람 연인을 해치려는 것도 모자라서 부케를 확실하게 보관하지도 않아서 여러 사람한테 닿도록 일을 키웠구나? 이건 안 되겠는데. 굉장히 사적 재재를 하고 싶어져.
자, 그 뷔페까지 빨리 가자꾸나. 낯짝을 좀 봐야겠거든.
그리고 의아해하지 마. 내가 그딴 사소한 꿈을 주의깊게 기억해둘 리 없다는 걸 알잖니?
유진:(잠깐 생각하듯 제 입가를 톡톡 만지다가) 정정할까요. 애들이 부케를 보관하지는 않았을테고 서연주 학생의 노트 내용으로 추정컨데 그 학생은 아무것도 모를 확률이 무척 높다고 생각이 되어서요.
그리고 하나 더 짐작을 해보자면 왜 하필 당신이 그 꿈을 꾼 걸까?
정말 귀신이 있다면, 아니지. (고개를 젓고는) 부케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머문다면 간단하게 말해서 부케의 소유자를 데려간다는 것 아닌가?
(뒤이어 생각났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게 나네.
이지나:난 그애들에게 책임감이 전혀 없단 소리를 하는 거야. 영혼이 머무르니 사람을 데려가니 하는 큰일이 걸려있는데 부케 관리엔 신경 하나 안 쓰고. 서연주는 어느 정도 참작은 되겠지만 책임소재가 전혀 없을 순 없어. 결과를 알면서도 응한 거잖아? 그리고 노트의 지워진 부분이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를 본 것 같던데.
하. 이것 봐. 자기들 행동에 책임을 안 지니 네가 당하게 됐잖니? (짜증스럽게 혀를 찬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다 허황된 말 같지만 보고 들은 게 있으니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유진:이지나 씨, 왜 이러실까. 생각을 바꿔 봐요. (손으로 무언가를 뒤집는 시늉을 하고는) 누가 당신 목걸이에 당신이 그리워하는 사람의 영혼을 머무르게 해주겠다. 그럼 1년 후에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믿을 거예요? (긴 시간이 가시기도 전에 웃고는) 아니잖아.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어쨌든 갈 곳은 정해졌네요. 그 학생들이 간다고 했던 뷔페로 가죠.
이지나:참작할 만한 요소는 있다고 했단다? 책임을 피할 수 없단 뜻이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죄없는 사람을 같이 죽이겠단 거, 누가 봐도 이상한 발상 아니니? (어깨 으쓱한다.)
이지나:(그렇게 유들유들하던 사람이 웃음기가 싹 사라지니 정말 상태가 나빠 보이긴 한다.) 참나. 내 어깨가 얼마나 비싼데. (원래라면 매몰차게 손을 밀어냈겠지만, 유진에게 일어난 현대 과학으론 믿을 수 없는 일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게다가 이전 임무에서 부상을 입고 유진에게 신세를 진 적도 꽤 있었고. 결국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손을 떨쳐내진 않았다.)
업어주는 건 못 한단다? 많이 힘들면 약국 같은 데라도 가던지. 이만한 공간이니 하나쯤은 있겠지.
유진:말 시키지 말아요, 지금 죽을 것 같으니까. (마지막 양심은 있는지 험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새를 쉬지 않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계속 이야기하는 게 정신 유지에 더 도움 되겠어.
(고개를 들고는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애초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고. 약국을 가더라도 약효가 있을지는 장담을 못해서 섣불리 못가겠네요. (그렇다. 약에 사비를 쓰기 싫어하는 중이다.)
이지나:아까는 이 정돈 아니었잖니.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거야?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얹힌 손을 상기하고 멈춘다.)
설마 굳이 약에 돈 쓰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9
(황당하게 본다)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말해 봐. 아무것도 안 하고 억지로 돌아다니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나만 번거롭거든?
유진: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멀미라도 했나 보지. 그게 아니라면 죽을 때가 다가오기라도 하나? (실없이 웃는 듯 하였지만 뒤이은 표정은 영 웃지 않고 있다.)
이지나 씨, 당신이 뭘 모르나본데 이런 곳에 있는 약국은 사람들이 비상약을 사는 개념이라 비싸요. 오히려 바가지만 쓰인다고.
우리 까놓고 얘기해볼까? (눈가를 매만지고는 이어 네게 시선을 맞추었다.) 단시간에 반복되는 일시적인 기억 상실을 해결할 수 있는 약물이 있을 거라 생각해?
이지나:듣기 싫은 말 하지 말아줄래? 재수 없는 소리 하다가 나한테까지 그 재수 옮을라. 우린 아직 창창한 20대거든. (진짜 상태가 말이 아니네.) 네가 약 하나 살 돈도 없는 줄은 몰랐구나. 그깟 약에 바가지가 쓰여봤자 얼마나 쓰이겠어.
반복되고 있단 말이야? (가늘게 눈 찌푸렸다가) 그럼 피로회복제 같은 거라도 마셔보던가. 너 지금 갓 태어난 기린처럼 비실거리고 있거든?
유진: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진담이다.) 원래 진단이란 건 확실하지가 않아서 단순한 두통을 느낀다는 말에 약을 네다섯 개는 권유한단 말이지. 지금 나는 상황이 어떤지조차 모르는데 모든 증상을 말했다가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에요.
(갓 태어난 기린...)(싸늘한 눈) 당신 비위 좋던가?
이지나:진통제 같은 거라도 먹지 그래. 정말 안 필요하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누굴 신경써주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거만하게 말하면서) 비위는 왜? 혹시라도 토하면 버리고 갈 거야.
유진:못 버틸 건 아니야. 물이라도 마시면 괜찮겠지. (여간 거만한게 아니군.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그래, 다행이네. 쉽게 이야기 해 줄게. 지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가 몸 속에 들어가서 기어오르는 느낌이 목 끝까지 찬 상황이야.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말 끝을 흐리고는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그리고 이지나 씨? 당신이 그런다고 나를 버리고 갈 사람은 아니잖아요. (물론 스스로도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지나:그럼 물을 사야겠구나. (짧은 한숨을 쉬며 편의점이나 마트를 눈대중으로 찾아본다.) 정말 끝내주는 감각이겠는데. 영혼 조각 같은 거려나? 안타까워라. (감정이라곤 없는 투)
어머. 내가 못할 것 같아? …… 이놈의 임무만 아니었으면 진짜 버리고 갔을 거야.
유진:오, 그건 조금 상처인데. 나는 끝까지 함께 갈 생각이었거든요.
이지나:내가 가능하다고 해서 상대에게도 똑같은 걸 바라면 안 되지. (냉담하게 대답한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2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근처 안내도를 보니 2층에 편의점이 있는 듯 합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편의점 브랜드가 있나요?
이지나:(딱히 없다. 다 거기서 거기지)
그래요, 다 거기서 거기인 편의점이죠.
파란 간판이 인상적인 편의점이에요.
이지나:끝까지는 못 가도 비위 상할 만한 일을 안 보게끔 도와줄 순 있지. 2층에 편의점이 있다니 가보자꾸나. (엘리베이터로 눈짓한다)
유진: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토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안했어요. (엘리베이터를 한번 보고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찌푸렸다. 2층인데 엘리베이터를 타는건가?)
(내 세금이 이렇게 소비된다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갑니다.
이지나:상태 봐선 할 것 같기도 한데? (질질 끌고 편의점으로 가서 물 한 병을 결제한다.)
오늘 카트가 고장나는 바람에 제가 직접 옮기려다 보니 짐이 너무 많아서 앞을 보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지나:아니에요. 저도 미처 피하질 못했는데요.
(보통이면 이쯤에서 '저희도 마침 박람회에 가는 길이었으니 짐을 들어드릴게요' 라고 해야겠지? 근데 무거운 거 들기 귀찮은데.)
(라는 생각이 함축된 표정으로 당당하고 뻔뻔하게 유진을 본다.)
유진:(부딪힌 상대를 보며 잠깐 한눈 팔린 표정으로 있다가 너의 시선을 느끼고는 짧게 반응하였다. 이어 잠시 생각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네게 속삭인다.) 이지희 씨 맞지? 그 부케 들고 있던 사람.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이지나:어머. 그새 알아본 거니?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확실히 사진 속 사람과 닮았다.) 흐으음. 그래. 그들이 노리는 게 이 사람일 테니,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지켜줘야지.
(이지희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외용 미소를 장착한다.) 그럼, 짐이 많으니 저희가 들어드릴게요. 마침 저희도 박람회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유진:(잠깐 기다리라는 듯 급한 손짓으로 네 어깨를 잡았다.) 저기,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줄래요?
이지나:(그럼, 까지 말하다가 막힘)
유진:(이지희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보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네게 다시 속삭인다.) 지나 네가 화낼 것 같긴 한데 나는 애들을 찾으러 가고 혼자 가는 게 좋겠어.
그 집에서처럼 내가 언제 정신이 어떻게 오갈지 모르는데 상대가 이지희라면 아무래도 위험 요소가 커.
이지나:뭐라고? 그럼 내가 짐을 혼자 들…… (짜증이 팍 깃든 목소리로 말하려다가 말고 멈칫한다. 확실히, 이유를 들으니 납득이 갔기 때문이다.)
…… 연락 자주자주 해. 사실 난 네가 서연주를 혼자 보는 것도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서건우의 동생이잖아?
유진:(처음 들리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역시, 하는 반응을 내보이며 쓴웃음을 짓는다.)
오히려 동생 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네 어깨를 툭툭 두어번 두들기고는) 그래요, 연락하면 잘 받고.
이지나:상태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그냥 쉬고 있어. 알겠지? (쯧, 하여간 신경쓰인다니까.)
유진:(의외라는 듯 너를 한번 바라보고는 슬 웃었다. 인사하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네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린다. 이어 무언가를 잊은 듯 초조한 목소리로 너를 부르고는 너와 시선을 마주하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쓸쓸한 미소를 짓고서 나지막이 마지막 말을 전달한다.) …지희랑 이야기 좀 해 줘. 부탁해.
유진은 알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떠납니다.
이지나:(으. 이놈의 영혼조각, 아직도 안 빠져나갔나? 갑자기 변화한 태도와 의미심장한 말에 괜히 소름이 돋는다. 사고로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긴 한데, 익숙한 사람한테 들어가서 안 익숙한 말 하게 만들지 말라고!)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다시 이지희에게 고갤 돌린다.) 죄송해요. 잠시 이야길 하느라.
짐이 많으니제가들어드릴게요. 마침 저도 박람회에 가는 길이었거든요. (아…… 정 말 귀 찮 다)
이지희:(조금 놀란 듯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이다 뒤에 있는 짐을 보고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 가, 감사합니다. 지금 들고 가는 게 마지막이라 이것만 들어주시면 되세요.
(상자 몇 개를 지나가 무리하지 않을 선에서 올려주고는 자신도 상자 여러 개를 들어올렸다.)
이지나:네. (하아…… 짐꾼 역할은 매번 유진에게 시켰는데. 내가 맡게 되다니. 불만을 속으로 꾹 누르며 상자를 들고 이지희의 뒤를 따른다.)
짐꾼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게 다 유진이 이상한 것에 씌여서 그래요.
이지나:(잡것 취급 안하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돼)
모든 일이 끝나면 굿이라도 해보는 게 좋겠어요.
이지나는 이지희를 따라 박람회장으로 이동합니다.
이제 막 시작하기라도 하였는지 행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이지희의 안내대로 부스 한 군데에 짐을 가져다 두었습니다.
분명 짐카가 고장났다고 들었는데 기존에 가져다 두었다던 짐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
아무튼, 이제 두 사람도 손이 빈 모양이군요!
이지희:(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나:네. 그나저나 짐이 엄청 많으시네요. 혼자 나르기는 어려우셨겠어요.
이지희:아무래도 중요한 행사다 보니까요. 그래도 도와주신 덕에 늦지 않게 옮길 수 있었어요.
(아, 하고 품 속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네게 건낸다.) 도와주시기까지 했는데 소개가 늦었네요. 이지희라고 합니다. 사진사로 일하고 있어요.
스튜디오 77, 포토그래퍼 이지희
이지나:(명함을 받고는 마주 제 경찰증을 보여준다.) 반갑습니다, 이지희 씨. 저는 형사로 일하는 이지나입니다. 사실, 이미 성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건우 씨의 자택에 들렸거든요.
웨딩박람회에는 어쩌다 참여하게 되셨나요? 취조를 하려는 목적으로 온 건 아니고, 그냥 질문이니 편하게 답해주셔도 돼요.
이지희:(이름을 알고 있다는 말에 놀라는 반응을 보이다 이어지는 말에 안색이 조금 흐려진다.) 아… 형사님이셨군요.
박람회는 업무 차 참가하게 되었어요. 제가 일하는 사진관이 업체로 참가를 한 거라……
저기… 서건우… 씨의 자택에 들리셨다고 하셨는데 제게는 무슨 일로……?
이지나:……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이지희 씨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서연주가 사혼식을 못마땅해했던 것이며, 민다윤과 함께 영혼을 부케에 붙잡으려 했다는 등……. 서연주의 노트에 적힌 내용들을 요약해 설명했다.)
저는 혹시 모를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이지희 씨를 보호하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이지희:(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연주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네요. 건우가 죽은 건 제 탓이었으니까요.
사고가 났던 날… 제가 건우에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했었어요. 절 보러 오는 길이었죠.
건우네 가족에게는 그 사실을 밝히기가 너무 죄송스럽고 무서워서 저는 입을 다물었고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연주는 알고 있었군요.
모두 제 탓이에요. (쓰게 웃고는) 그런데도 결혼이라니, 그런 걸 부탁할 자격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지나:서건우 씨의 죽음은 이지희 씨 때문이 아닙니다.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사고를 의도하신 것도 아니지 않나요.
책임이 있다 여기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서 서연주 양과 민다윤 양의 행적이 옳은 것도 아니고요.
최근 이상한 일을 겪으신 적은 없나요? 혹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신 적은요?
이지희:…제가 그날 건우를 부르지 않았다면 건우는 살아있었을지도 몰라요. (으음, 하고는 짧게 반응하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신변의 위협이라고 할 일까지도 없었고…
사람 사는 게 다들 비슷하잖아요. 이상한 일이라고 하여도 지금처럼 믿을 수 없을 일은 아니에요.
이지나:서건우 씨는 지희 씨가 자신 탓을 하길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제 직장 동료에게 서건우 씨 영혼이 들어가서 압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쨌건, 제 동료가 지금 서연주 양과 민다윤 양을 찾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예요. 이지희 씨는 예정대로 박람회에 참여해주시되 다가오는 이들을 예의주시하시길 바랍니다.
이지나:(저 애가 나를 직접 풀어줄 줄이야.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일이다. 결박이 풀리자마자 빠르게 창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여기, 그 호텔이 맞긴 한 거야?)
믿을 수 없는 광경이지만 그 호텔이 맞습니다.
여기는…
주변 표지를 찾아보니 81층인가 봅니다.
이지나:(이지희는 어떻게 된 거지? ..... 아니, 그보다도 일단은 유진을 찾는 게 우선이다. 위층에 있다고 했었지. 바로 위층을 말하는 건지, 90층까지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으니 하나씩 확인하는 수밖에. 계단을 통해 82층으로 달려올라가며 크게 이름을 외친다.) 유진. 유진!
유진:(주변을 딛고 일어서려다 잠깐 멈칫한다. 애써 침착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지나 씨, 우리 지금 몇 층에 있지?
설 수는 있겠는데 걷지는 못하겠어. (양쪽 발을 제대로 딛기가 힘든지 한쪽에 체중을 실은 듯 몸을 기울였다.)
이지나:82층. (간결하게 답하곤 팔을 붙잡아준다.) 어쩔 수 없지, 기대렴. 이 상태로 도망칠 수나 있겠니? 민다윤을 만났어, 널 자정까지는 살려둬야 한다던데. 뭔가 들은 건 있고?
유진: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법적으로 고층 건물은 못 짓게 해놔야 해. 이런 데서 사람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자기들이 겪어봐야 안단 말이야. (반쯤 체념한 듯 팔을 자연스레 네 어깨에 걸친다. 연행 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기에.)
들은 건 있지만 (서연주와 이지희를 바라보더니) 여기보다는 나가서 얘기하는 게 좋겠어. 가면서 얘기할게.
거기 두 분,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감동 좀 더 오래 느끼고 싶으시다면 같이 나가시죠?
그제서야 서연주와 이지희는 상황을 다시금 깨닫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현재 좌측 계단은 불이 붙어 이동할 수 없다, 라고 이지희가 알려줍니다.
이지나:(과연 반갑기만 할진 모르겠지만. 유진을 부축하고 움직인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위, 아래? 옥상에서 비행기라도 불러야 하나?
유진:옥상에서 비행기를 부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입장 아니야? 80층을 내려가거나 10층을 더 올라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니 선택지가 너무 극단적인걸.
(지나에게 기대어 자신의 발 아래를 한번 보는 듯 하더니 골치아프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이지나 씨, 나를 데리고 위로 올라갈 수 있겠어? 지금 나는 올라갈 여건이 되지 않아. 내려가면서 구조대를 만날 확률이 더 높을 거야.
이지나:10층과 80층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전자인데, 네 상태가 엉망이긴 하구나. (이 상황이 굉장히 짜증스러워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다.) 그럼 지체할 시간 없으니 이동하자. 나에게 최대한 체중을 지탱하렴. (우측 계단참으로 지체없이 이동한다. 서연주와 이지희에게 눈짓한다) 이쪽으로. 제 동료가 상태가 안 좋으니, 아무래도 아래쪽으로 가야겠어요.
유진:조심해주시죠, 섬세한 몸이라서요. (그 상황에서 조용히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조용히 내던진다.) 당신이야말로 버틸 수 있겠어? (뒤따라 오는 서연주와 이지희를 향해 아래로 내려가자 안내한다.)
네 사람은 아래층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지나:어쩌겠니. 같이 타죽을 수는 없어서.
서연주는 이지희를 따라, 이지희는 서연주와 함께 유진과 이지나를 따라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갑니다.
이지나:(혀를 찬다. 화상은 흉터가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적어도 구조요청이 들어가긴 했겠지? 이렇게 큰 건물에 사람이 가득할 텐데.
이지희:괜찮아요!? 건너올 수 있겠어요?
저 반대편에서 이지희와 서연주가 소리칩니다.
그러나 다친 유진을 부축하며 이 불길을 뚫고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유진:오, 여기서 죽는 건 내 계획에 없었는데. (네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시덥잖은 농담을 내던졌다.)
이지나:내 계획에도 없거든? (뾰족하게 말하곤 주변을 둘러본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네.
주변을 살펴보는 이지나를 향해 이지희가 소리칩니다.
이지희:전망대에 비상용 낙하산을 뒀다고 들었어요!
이지나:전망대? 그게 몇 층이죠?
방법이 아주 없는 모양이 아닌가 봅니다.
전망대는 90층에 있네요.
전망대니까 전망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있겠지요.
이지나:(유진의 상태로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을 택했던 건데.) 너, 90층까지 견딜 자신 있니? 내가 업어주기라도 해야 할 지경인데, 지금으로선.
유진:자신은 없는데. 당신이 나를 업고 올라갈 수는 있어?
(작게 숨을 내쉬고는) 81층에 전망대로 올라가는 리프트가 있어. 목숨 걸고 도박하는 셈 쳐야지.
민간인 둘을 안 데리고 간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겠네.
이지나:내 곁의 형사가 지금은 민간인보다도 더 못한 몸상태가 되긴 했지만 말야. (평소처럼 뼈 있는 말을 하면서 그를 부축한 채로 방금까지 열띠게 내려오던 계단의 위쪽에 발을 내디딘다.) 자, 3층만 올라가자꾸나. 겸사겸사 아까 저 민간인들 앞에선 못한 얘기도 해보고. 민다윤에 대한 거 말야.
유진:이지나 씨, 당신 지금 말에 뼈가 있지 않아? (평소같은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지금 우리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야. (네게 몸을 기대고는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두 사람이 위로 올라가기를 다짐한 순간,
서연주:아, 잠시만요! 부케! 오빠가 했던 말이 있어요!
오빠가 평소에……!
이지나:(가려다가 멈칫하고) 평소에?
다음 순간,
쾅!
폭발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합니다.
“연주야, 내려가야 돼!”
“자, 잠깐만…!”
건너편에서 소리가 멀어집니다.
이지나:(열받음) 정말로 절묘한 상황들만 이어지고 있구나.
유진:클리셰적인 무언가네. 영화였으면 위기의 클라이맥스겠어.
이지나:지금 네가 50%쯤 서건우니까 한 번 깊이 생각해보지 그래? (열받아서 아무말이나 내뱉으며 다시 올라간다.)
유진:지금 저주 걸어? 나는 나로 살고 싶지, 다른 사람으로 죽을 생각은 없거든.
이지나:분명 그 부케가 뭔가 연관이 있을 텐데. 이 난장판 속에 푸른색 꽃을 찾아나설 수도 없고 말이야.
유진:푸른색 꽃은 없지만 푸른 것에 해당되는 무언가가 있긴 해. 그러니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거겠지. 민다윤하니 생각난 건데, 부케를 없애지 않더라도 해결 방법은 있다고 했어.
그게 조금 골치 아프고 지나 네가 반기지 않을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이지나:이미 충분히 골치 아프고 반갑지 않은 상황이란다. 여기에서 더 나빠져 봤자 크게 다를 것도 없겠지. 어서 말해보렴.
유진:중요한 건 부케잖아? 부케가 누구한테 있어? (나지, 하고 조용히 읊조리고는 숨을 골라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건데 어떻게 본다면 내가 부케이고 부케가 나인 상황이야.
그렇게 된다면 선택 사항은 두 가지. 첫째, 나와 부케를 떼어놓거나 둘째,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더니 덤덤히 말을 잇는다.) 부케를 없애거나.
이지나:형의 결혼식에서 쓴 부케, 네가 받았다고 했었지. (곰곰) 하지만 그걸 지금 네가 갖고 있는 건 아니잖니?
유진:민다윤은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어야만 한다 했거든. 그럼 내가 부케와 연관이 되었다는 건 확실하지.
그보다 서연주 학생이 하려 했던 말은 뭐야? 짐작 가는 게 있어?
이지나:아니, 짐작가는 건 따로 없지만…… 서연주와 서건우의 집에서 노트를 봤었어. 암호를 1년간 지키면 부케가 시들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암호가 뭐지? 눈살을 찡그렸다.)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지나는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아, 분명 민다윤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올해 7월 7일까지,
그러니까 오늘까지 부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서건우를 불러와 주겠다고요.
그렇지 않다면 부케를 없애는 방법도 있겠지요.
부케를 어떻게 할 지는 서연주가 알고 있다고 했어요.
어쩌면 서연주가 하려던 말이 부케를 시들 수 있게 하는 암호가 아닐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며 두 사람은 힘겹게 81층에 도착합니다.
이지나:(오늘이 7일인데. 오늘 안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그야 가짜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긴 했지만 아직 최종 제출을 하지 못했다.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게다가 서연주의 말은 듣기도 전에 헤어져 버렸잖아?!)
지금 몇 시지? (나에겐 핸드폰이 있나)
유진:아마 10시 쯤?
핸드폰이 있네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면 유진이 말한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지나:2시간 안에 혼인신고를 하던지 서연주한테 빨리 말을 들어야겠어. (투덜거리면서 리프트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유진:?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진심이야? 지금 구청 문 닫았어.
이지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리프트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지나: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고. (하지만?)
지금은 작동이 멈춰있네요.
기계를 고쳐야만 정상적으로 작동이 가능할 듯 합니다.
이지나:불이 옮겨붙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냉소적으로 말하면서 유진을 잠시 멀쩡한 곳에 앉혀두고 기계를 살펴본다. 어딜 고쳐야 하지?)
유진:아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걸. (발로 퍽퍽 까는 걸 막고 한번 살펴본다.)
기계수리
기준치:
10/5/2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오, 봐도 모르겠다. (솔직!)
이지나:뭐, 우리 둘 다 그쪽 전문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거 아니면 타죽는 수밖에 없는데 큰일이구나.
유진:우리 걸어 올라갈까?
이지나:네 상태로 가능하겠니?
유진:내가 당신보다 체력이 좋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데요. (명백하게 과거형이다.)
지나야, 나는 힘들지 않아. 네가 힘든거야. (......)
이지나:안 힘들면 너 혼자서도 갈 수 있겠어, 안 그러니? (갑자기 개열받음)
입이 산 거 보니까 부축 없이도 가겠는데?
유진:……자기야, 날 버리고 가려고? (갑자기 지나 어깨 꼭 잡음)
이지나:네 발이 이미 난리가 나서 또 밟아줄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럽구나. (손을 팍 쳐내고 아까처럼 유진을 부축한다. 물론, 그러려면 어차피 유진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어야 하지만…… 성질 한 번 내고 싶었다.) 힘든 소리 내면 버리고 갈 거란다.
유진:(손이 팍 쳐내진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마냥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받아들이는 듯 숨을 한번 내쉰다. 뒤이어 조그맣게 한마디 내뱉는다. 이지나 씨, 성질 머리 하고는.)
혼자 걸을 수 있는 상태였다 하더라도 오늘 발이 남아나질 않았겠는데.
이지나:날 긁어놓고서 내 성질을 탓하는 거니? 네 인성이야말로 뒤지지 않는다는 거 알지? (뾰족하게 말하고 계단에 발 디딘다.) 네가 입만 다물었어도 성했을 거란다.
운
기준치:
70/35/14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오늘 하루 이지나의 운은 영 좋지 못한 것 같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 혼인신고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결혼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 오기까지 했는데
하물며 상대가 유진이라니...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유진을 데리고 부지런히 계단을 올라가던 중
침묵이 짧게 이어집니다.
유진:(침묵 속에서 나지막이 네 이름을 부른다.) ―지나야.
할 말이 있어.
이지나:낯간지럽게 왜 그렇게 부르는 거니? (툴툴대고선) 뭔데?
유진:네가 그동안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못할 거란 것도 알아. 여기에는 너를 지긋지긋하게 하는 것들이 많고 네가 그런 것들을 모두 답답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쓰게 웃고는) 그동안 내가 했던 말은 전부 진심이야. 네가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 줘.
마지막에는 나와 함께 있지 않을래?
떠나고 싶다면 마음껏 다녀도 돼. 하지만 여기로 다시 돌아와 줘. 그리고 언젠가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질릴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있자.
이건 유진의 말일까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
얼핏 프러포즈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이지나:하아? (한쪽 눈썹 치켜올린다. 누가 봐도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저는 제 주변의 환경을 자유롭지 못하다 여긴 적도, 답답하다는 감상을 받은 적도 없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또네가 튀어나온 거니? 미안한데 나는 이지희가 아니거든. 미처 프러포즈를 하지 못하고 죽은 건 안타깝지만 대상은 똑바로 해야지.
이 말이 유진 네 본심이라 하더라도, 고백 멘트는 좀 갈고닦아 오렴! 난 아직 누구랑 질릴 만큼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단다.
계단을 올라가던 이지나의 어깨 위로 강한 압력이 느껴집니다.
유진:(네 몸에 의지하기라도 하듯 어깨 위에 올린 손에 스스로의 체중을 싣고는 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해주면 안될까?
사랑한다고 해줘. 늘 그랬듯이.
이어 계단 위로 유진의 몸이 쓰러집니다.
......
아무래도 의식을 잃은 듯 합니다.
이지나:난 이지희가 아니래도. 안타깝네. 나랑 유진이 아니라, 이지희와 네가 같이 고립됐어야 했는데 말이야. (한숨 쉬면서 유진을 흔든다.) 얘,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버리고 갈 거란다?
이지나:너였어도 자기보다 한참은 큰 상대를 힘들게 부축하면서 올라가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에 갑자기 상대가 픽 쓰러졌으면 나처럼 했을걸. (가책이라곤 1g도 안 느껴지는 태연한 낯으로 말하고는 일으켜세운다.) 정신 차렸음 어서 가자.
유진:저기요, 나 지금 안경 깨졌었거든요? 이지나 씨, 안경 쓴 사람 치면 위험하다는 거 몰라?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가 않네. (당연하게도 본인보다 큰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하... 잠깐 이마를 짚더니 머리를 흐뜨러뜨리고는 네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일으켜세워달라는 듯이.)
이지나:네가 여기에서 타죽는 것보단 덜 위험하겠지. 그러게 누가 괴상한 프러포즈랑 사랑고백의 발언을 내뱉고 의식을 잃으랬니. (손 잡아당겨 일으켜준다.)
유진:…내가 멋없는 말을 했을 리 없을텐데. 당신이 감정이 메마른 건 아니고? (네 힘과 반동으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진이 일어나며 반사적으로 층수를 확인합니다.
이지나도 시선을 함께 따라 층수를 확인해봅니다.
어느샌가 89층에 올라왔었네요.
옥상 전망대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지나:너 그거 진심으로 한 말이었니? 당연히 네 안의 서건우가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진짜라면 넌 플러팅 방법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무척 힘들지만 입은 살아서 나불대는 중……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90층까지 가자!)
유진:(셔츠 앞주머니에 안경을 넣어두고는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글쎄,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모르겠네.
(네 몸에 기대어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다.)
이지나: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해?
유진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정말 기억하는지는 혼자만 알고 있겠네요.
이지나:(싱겁긴)
두 사람은 어느덧 90층에 도착합니다.
옥상 전망대로 올라오면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감쌉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지희의 말대로 낙하산 하나가 보입니다.
2인용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니 두 사람이 함께 사용가능한 모양입니다.
이지나:이 지경인데 옥상에 구조 헬리콥터 하나 오질 않았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낙하산을 집어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류 (GM):비상 탈출용 낙하산 사용 방법
하네스를 빠짐 없이 장착한다.
착륙 지점을 계산하여 장애물이 없을 방향으로 선 후, 낙하한다.
직후 손잡이를 강하게 잡아당긴다.
착륙 시 부상에 주의할 것.
(07.05) 자동 손잡이 제외 사용에 이상 없음.
류 (GM):현재 자동 손잡이의 기어에 트러블이 있어 사용시 낙하하며 세 개의 기어를 동시에 작동시켜야 합니다. 곧 수리 예정입니다.
세 개의 기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으나 크기가 제법 큰 탓에 한 손에 하나를 쥐는 것이 고작입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타이밍을 맞춰 동시에 잡아당겨야 겠어요.
이지나:하나같이 멀쩡한 게 없어. (진짜 열받음) 트러블이 있는 걸 왜 비상용으로 갖다놓느냔 말야. 이 안전불감증 대한민국 같으니.
유진:새삼스럽네. (안내 문구를 보자마자 손은 멀쩡한지부터 확인해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이지나:(유진에게 하네스를 건넨다) 어때, 손등뼈는 멀쩡하니?
유진:부서진 건 다리지, 손이 아니네요. (자연스레 왼손으로 하네스를 받는다.)
너야말로 날 때렸던 걸 보면 잡아 당길 힘은 있겠네.
이지나:나야 쌩쌩하지. 이 정도로 지치면 형사란 직업이 부끄럽지 않겠니. (제 몫의 하네스를 몸에 딱 맞게끔 둘러 장착한다. 훈련을 받을 때 낙하산을 타본 경험이 있으니 처음 겪어보는 경우는 아니라지만, 이 고층에서 뛰어내리는 건 좀 아찔하긴 하네. 게다가 트러블이 있는 낙하산 확정이라니.) 호흡이 안 맞아서 낙사하지나 않게 주의하자꾸나.
유진:(익숙하게 하네스를 착용하고는) 하고싶은 말이 하나 있는데 해도 되나요?
영화에서 보면 그런 대사가 클리셰적인 요소더라.
낙하산 사용을 위해 뛰어내릴 준비가 되었나요?
이지나:어디 한 번 해보렴. (기어를 잡아당길 준비를 한다.) 까딱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할 말은 하고 가야지.
그래도 여름인데 덥지는 않구나.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인내심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해보려 한다.)
자, 너는 응급처치를 좀 받고 있으렴. 나는 서연주를 찾아봐야겠어.
유진:서연주를 찾겠다고? 너도 지금 치료 받아야 하는 사람이야.
이지나:어차피 화상은 응급처치론 안 돼. 나중에 피부과에 제대로 가던가 해야지. 지금은 급한 게 있잖니? 자정 전에 해결을 봐야지.
유진:뭘 모르는 소리를 하시네, 화상도 응급 처치가 중요한 건 맞아. 내 말은 서연주 학생이 지금의 우선순위는 아니라는 거지.
그 학생에게 들었던 이야기 없어요? 그, (생각하면서 버릇처럼 머리를 톡톡 건드리다 조용히 이름 석자를 부른다. 민다윤… 이어 자연스레 그리 좋지 못한 언행을 입에 올린다.) 개자식한테서.
아, 실수. 나도 모르게 그만. (뻔뻔한 얼굴)
이지나:개자식이 맞으니깐 실수라고 할 필요 없어. (그 인간도 아닌 것 때문에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오만 욕이 다 쏟아져나올 지경이니 지적이나 정정 따윈 하지 않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뀐다고 했지. 백귀야행이 온다나. (칠월 칠석에 관한 무대 포스터가 갑자기 떠오른다.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결혼밖에는 답이 없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치만 구청은 문을 닫았잖니?
유진의 답을 듣기 전에 지능 판정 한번 해볼까요?
이지나: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6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유진:오, 미안하지만 나는 애인도 있고 이지나 씨와는 사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 않아서. (농조)
정말 결혼 밖에 답이 없을까요?
이지나: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발끈)
서연주의 일기장이 기억나나요?
암호만 지킨다면 부케가 시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던가요?
아, 민다윤은 또 무어라 했었지요?
부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준다면 된다 하였지요.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라면…
원인이 된 부케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부케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유진:농담도 못하나. 아마 우리 팀에서 당신이 나를 제일 싫어할 거예요.
이지나:너뿐 아니라 모두에게 다 똑같이 대하니까, 네가 특별취급받는단 생각은 안 해도 돼. (그냥 평소 태도가 모두에게 고압적이고 거만한 사람이다.) 물론, 너는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좀 얄밉긴 하지만.
(부케를 없애는 건 안 될 일이지. 유령 사건 하나 해결하겠다고 애꿎은 동료를 죽여? 평소 유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라도,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고를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 남은 건 하나. 어젯밤의 꿈에서 들려왔던 말처럼 부케를 지키는 것인데…… 암호. 암호가 대체 뭘까. 화상을 입은 곳이 시큰거리는 것도 무시한 채 이전의 상황을 복기하고 또 복기한다.)
유진:아무렴. 당신이 누구인데. (작게 웃어보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내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조용히 너를 바라본다.) 그래서, 생각 정리는 되었고?
이지나:(이질적인 그의 언행…… 설마, 그 말은 아니겠지. 아니, 이건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으면서 이마를 짚는다.) 아무래도.
유진:이지나 씨, 하기 싫은 일이나 궁지에 몰리면 아무 생각도 안 나서 얼굴만 찌푸리거든요. 본인은 그걸 아시나?
이지나:하기 싫은 거니까 당연한 노릇이지. (냉담하게 답한다. 아, 이거 진짜 내가 해야 돼?)
(저는 저 자신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인간인데, 아무런 감정도 없는 팀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정말 죽을 맛이다. 적어도 한 시간 내로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세상에 큰 혼란이 일어난다는 대전제만 없었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눈을 꾹 감고 심호흡을 한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일 뿐이란다. 사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어, 알아듣겠니? 이걸로 놀리면 네 발이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또 밟아줄 거야.
유진:(오)
환자 앞에서 발을 밟겠다는 이야기를 이리 정성스레 해주실 줄은 몰랐네. (덤덤히 네 반응을 이어 보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사실 방법이야, 알겠지. 그렇기에 네가 무얼 원하고 무얼 바라는지 알겠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나야,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방법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이지나:(제 팔끼리 겹쳐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방법이 뭔지는 알고? 내가 널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니라도, 그에 준하는 중상을 입혀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좋니?
유진:(우리가 바라보던 시선이 이리도 달랐었나? 이제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외면한 채, 너를 올려다보며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눈동자에 시선을 둔다.) 뭐, 거기까지 생각도 해봤죠. 지금 다리도 못 쓰겠다, 나는 네가 망설임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부러진 다리에 영향이 없도록 조심스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지나:내가 빈말로라도 좋은 성격은 아니라지만, 날 너무 나쁜 사람으로 보는 거 아니니? 그깟 부상이야 치료받으면 되는 건데 내가 그 정도로 널 죽음의 저울에 올려둘 거라 여겼다고? (혀를 찬다.) 총을 쏘는 것보다야 혀를 움직이는 게 몇 배는 쉽지. 심적으로는 더 어렵긴 하지만.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이 다시금 천천히 올라간다. 분노와 부아, 짜증, 고민 등이 뒤섞인 눈빛으로 잠깐 말이 없다가) 눈 감아. 사실 맘 같아선 귀도 막으라고 하고 싶구나.
유진:이지나 씨, 야박하시네. 왜요, 사랑하는 동료를 편히 보내줄 생각도 못하신 건가? 여기서 죽는 건 내 계획에 없었지만 나도 나름 각오를 다지고 한 말이라서요.
이지나:뭘 편히 보내? 누가 보면 곧 죽을 중상인 줄 알겠어. (한 번 더 혀를 찼다.) 다른 방법을 택할 건데 그 표정을 네가 보게 하기 싫어서 그런 것뿐이니까 빨리 눈 감아. 넌 말 한 마디 듣기만 하면 돼. 이 방법이 안 통한다면, 널 죽이는 방법은 그때 고려해보겠단다.
유진:아, 이래 보여도 사람 구하다 다쳤지만 실비 처리도 안되는 아주 악독한 중상이에요.
(팔짱을 끼고 자연스레 너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거절한다면?
이지나:음, 대한민국의 암담한 현실이니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럼 내가 감을 수 있게 해줘야지. 자, 뭘로 해줄까? 주먹질? 발길질? (뼈를 뚜둑거리며 손을 풀기 시작한다.)
유진:남일이라고 막 던지시네.
어? 그럼 폭력에 대한 증거를 남겨놔야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낸다.)
이지나:대신 살려준 거에 감사하고? 자, 셋 셀 테니까 결정해. 한 대 맞을지 얌전히 눈 감을지.
하나, 둘-
유진:지금 생색내는 거예요? (이어오는 말에는 가볍게 반응하며 버튼을 조작하여 빠르게 카메라 어플을 켰다. 지나에게는 안 보였겠지만!)
이지나:좀 내도 되지 않겠어? 살려주는 건데. (그리고 망설임없이 빡! 유진의 명치를 갈긴다. 급소인 걸 알고 있으니 적당히 눈 못 뜨고 괴로워할 정도로만 조절해서 때렸다.)
(난장판이 되는 그 와중에, 빠르고 낮게 속삭였다.) ……사랑한단다.
유진:(갑작스레 명치를 얻어맞고는 숨을 토해낸다. 컥, 하며 소리없는 비명과 함께 앞으로 몸이 고꾸라졌다. 손 안의 핸드폰은 어느샌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고 하늘로 향한 액정은 어느샌가 여러조각으로 빛을 낸다.)
(땅 위에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 호흡을 크게 반복하던 중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이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이 제법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여 네게는 퍽 재미있는 모습이었으리라.)
무슨 소리야?
이지나:(깨진 핸드폰에 짧게 시선을 두었다가 별것도 아니란 듯 제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게 누가 감히 핸드폰을 들이미래? 목적은 달성했으니 됐다.) 반응 보니 전혀 예상 못했나 보네?
네가 나한테 해달라고 한 말이잖니. 정확히는 네 안에 있는 서건우의 영혼이겠지만.
내가 왜 이렇게 질질 시간을 끌었는지 알겠지? 그리고, 이 일은 기억에서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유진:(아프다. 호흡을 진정시키며 바로 옆의 주머니 속에 있는 안경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깨진 모습 그대로. 자시 주머니 속에 안경을 집어넣고는 네게 손을 내밀었다.) 맨입으로?
이지나:(눈살을 찡그린다.) 뭘 원하니? 오히려 넌 나한테 목숨을 빚진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인성쓰레기)
유진:우리 지나 씨, 인성 왜 이러실까. (솔직!) 이렇게까지 했는데 눈치도 없으실 줄은 몰랐네.
일으켜 달라는 거잖아.
이지나:(안경 수리비라도 달라는 줄 알았다. 물론, 그것 또한 쓰러진 유진을 깨우려다 깨진 거였으니 안 주려고 했지만.)
(아하, 하는 표정을 짓더니 손을 맞잡고 힘주어 그를 일으켰다. 다친 다리에 무게중심이 들어가지 않게끔 힘을 잘 조절했다.) 이번에야말로 병원에 갈 때가 된 것 같네.
유진의 내민 손을 붙잡고, 이지나는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자,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끝났어요.
적어도 당장은 평화로울 거예요.
그렇죠?
.
..
병원으로 향하는 길.
어두워진 하늘에는 구름마저 껴 더욱 우중충합니다.
구급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코에 물방울이 내려앉습니다.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집니다.
“아, 비다.”
“다행이다. 곧 불도 꺼지겠네요…”
건물로 들어섭니다.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현장에 있던 관공서 직원의 말에 따르면 이지희나 서연주는 이미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하는군요.
적절한 처치를 마치고,
뒤이어 출동하였던 동료 형사에게서 하루 이틀은 입원해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두 사람의 부상이 말이 아니었어요.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는 더 길어질 수도 있겠죠.
이지나는 힐끔 유진을 바라보았겠지만…
뭐, 자업자득인 것을요.
어느샌가 병원에 앉아 유진과 입원실이 배정되기를 기다립니다.
……아.
이지나는 한순간 유진을 바라봅니다.
오늘 종일 유진에게 느껴졌던 묘한 거슬림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 모든 것이 끝난 걸까요?
이제 슬슬 졸음이 몰려옵니다.
피곤한 하루였어요.
대기하는 주변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작게 들립니다.
“비 많이 내리네.”
“칠석이라 그래.”
.
..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서연주는 무사히 귀가하고 이수현과 함께 학교에서 처분을 받았습니다.
다만 민다윤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주소지를 따라가 봐도 그 곳에 사는 사람은 전부터 아무도 없었다고 하네요.
경찰이 수색에 들어간 모양이지만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지희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 준 동료 형사의 말에 의하면 서연주가 귀가하는 길에 함께 동행해주었다고 하네요.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모양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하였다는 평화로운 소식이에요.
언젠가 거리를 걷다보면 이수현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서연주나
스튜디오에서 손님들을 배웅하는 이지희의 모습을 마주칠 날도 있겠죠.
다시 평일 낮.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지만 이지나는 여전히 유진과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병문안 하러 온 지인들이 가져온 음료수가 한 구석에 쌓여있습니다.
유진은 심심하다며 어디선가 가져온 잡지에서 크로스워드를 풀고 있네요.
유진:이지나 씨? 사람들에게 가장 선호도가 높은 색이 뭔지 알아요?
이지나: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TV 화면을 바라보다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유진:싱겁기는. 당신처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줄 알았죠. (빈 칸에 펜으로 몇 자 적어 내려간다.)
이지나:사람마다 취향은 다 다른 법이잖니. 너는 알고?
유진:그럼요. 이런 문제의 답은 앞뒤를 끼워 맞추면 알 수 있는 법이니까.
파란색이에요.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는 색이기도 하죠.
이지나:왜 가져가지 못하는 색이지? (재밌다는 듯 눈가를 살짝 휘며 웃는다. 그 안에서 푸른 홍채가 빛났다.)
유진:태양이 탐을 내어 그 빛을 가져간다 한들 세상은 여전히 푸른빛으로 가득하니까요.
그래서 형이 그러더라고요. 영원을 고백하는 자리에서는 푸른색이 좋겠다고. 왜, 그 부케도 푸른색이었잖아요?
이지나:흐음. 과연 그랬지. 흥미로운 가설이구나. 당분간 그 부케 관련된 일은 생각도 안 하고 싶지만.
유진:델피늄이래요.
우리 형 결혼식에서 내가 받았다는 꽃.
원래 부케로 자주 쓰인다나봐요. 꽃말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요’ 라고 하던가.
이지나:내가 결혼할 일은 한참이나 뒤일 것 같으니 내 부케에 어떤 꽃이 쓰일진 모르겠구나.
어쨌건, 너희 형도 행복하셨음 좋겠네. (이런 말을 해줄 정도의 사회성은 있음)
유진:(한번 너를 바라보는 듯 하다가 다시 잡지 속 크로스워드 퍼즐에 시선을 옮긴다.) 이지나 씨, 결혼할 생각은 있었고? (악의 없는 말이다.)
이지나:상대가 나타나면 할 수도 있겠지. 영원이니 사랑이니 하는 낭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 같지만. (철저히 실리주의인데다, 저 자신조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니.)
유진:재미없어라. 지금 그 말, 나는 관심도 없고 평생 혼자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걸. 이래서 혼자 살고 싶지는 않지만 결혼은 하기 싫은 이들을 위해 생활동반자법이 제정이 되어야 된다니까요.
내가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
이지나:그런 넌 내게 관심이 있고? 직장 동료에게 동료 이상 무슨 관심을 가져야 하니? (매몰차게 대답했다.)
애인 있다더니 그 사람이랑? (헛소린 줄 알았는데) 결혼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란 거 알지?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유진:오, 나한테 관심 있었어요? (그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작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이고는) 나는 모두에게 관심이 많아요. 아무렴, 사랑하는 동료인걸.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애인의 유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지나:동료로서의 관심밖에 없다는 말이잖니? 꼬투리 잡지 마. (괜히 투덜거렸다.)
뭐니? 싱겁게.
유진:그야 이지나 씨가 내게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 떠 본 거지. 8월 13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이지나:(며칠 전 나눴던 대화를 머리 한구석에서 뒤져본다. 칠석이라고 했지만 음력은 8월이라고 했던 것 같다. 진짜 칠석은 10일이었고, 13일이란 날짜도 분명 들은 기억이 나는데…….) 아하. 네가 한 살 더 나이드는 날이었구나.
유진:오,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선물도 줬는데 기억 못하면 섭할 뻔 했어요.
(제 옆에 잡지를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하는데 같이 갈래요?
이지나:내 기억력을 무시하지 마렴. (선물은 아직 안 정했지만.)
그러자꾸나. 누워있기만 해서 몸이 찌뿌둥한 참이었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