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드:(전장마다 적군의 피를 바다처럼 흩뿌리며 휩쓸고 다녀 적군에게는 악명을, 아군에게는 명성을 드높이던황금의 늑대는 이 순간 모든 전의를 잃는다. 짐승의 것과 다름없이 잔인하게 번뜩이던 금빛 눈은 단 한 사람을 담자마자 광채를 놓쳤다. 길게 흩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칼과 긴 속눈썹 아래의 눈망울, 왼쪽 눈가의 점과 하얀 피부까지…… 전부 당신이다. 10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음 속에서 놓아본 적 없었던 이.)
(숱한 나날을 그리움에 지새웠고 숱하게 포기해왔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처음부터 사는 세계가 달랐다고.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결말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이며 쇠비린내가 난무한 삶을 살아왔는데, 어째서 당신이 나의 검 너머에 서 있지? 꽃다발 대신 검을 겨누고서.)
(검을 억세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는 그토록 목표하던 궁전에 도달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황망한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 베아트리체 힐?
베아트리체 힐:(부러 굳게 다문 입술. 옅은색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린다. 그토록 바라던 황금빛을 담은 채로. 늘 꿈에 손을 뻗었던, 잡을 수 없었던 그를 담은 채로. ...늘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소식에는 황금의 늑대가 중심이었다. 부디, 그이길. 부디 그가 아니길. 몇 번을 바라고 포기했던가. 금방이라도 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나라. 그 끝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으로서 확신한다. 자그마치 10년. 족쇄에 발묶여 성에 갇힌 듯 살았어도, 생각의 끝에 늘 가닿던 이. …도저히 잊을 수 없던 이. 그가 지금 눈앞에 있다.)
(왜 우리는 꽃다발이 아닌 칼을 겨누고 있는가. ...그럼에도 다시 한번 칼을 고쳐 잡았다. 제가 마지막까지 해야할 일은 주군을 지키는 것. 그것 뿐이다. ...그래, 당신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르드.
에르드:(목소리까지 들으니 더는 부정할 수 없다. 황궁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내 혹은 트로피 같은 신세일 거라 여겼지, 황제군의 소속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재회를 바라며 떠올린 의문도 많았다. 10년 동안 무얼 했는지, 왜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는지, 적어도 행복했는지. 이 예상치 못한 대립의 순간 그 물음들은 전부 사라지고 갈 길을 잃은 듯한 공허함과 천 길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참담함만이 남는다.)
(칼을 고쳐잡는 동작에 그는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사방이 맞서싸우는 이들의 고함과 창칼이 부딪히는 시끄러운 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래. 어떤 세월을 거쳐 왔건 나는 지금 당신과 반대에 서 있다.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위치에.)
투항해.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가 흘렀다.)
전황은 결론이 났어. ……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베아트리체 힐:(저 만했던 이가 저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다. 번뜩이는 칼을 겨눈 채. ...어떤 모습으로 자라났을까, 끝없이 떠올리곤 했던 무수한 상상은 이제 의미 없다. 진실로 그가 앞에 있으니까. ...그래, 그러니. 이렇게 마지막에 담는 것이 당신이라 다행이다. 칼 끝에서 당신에게로 시선을 맞춘다. 저 눈에 깊이 담기는 것이, 저라고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때와는 다른, 확연히 낮은 목소리가 날칼보다 깊이 박힌다.)
...마지막까지 주군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야.
에르드:(입술을 짓씹는다. 차라리 곧이곧대로 칼을 버리고 따르기라도 하면 좋았을걸, 아주 충직한 기사가 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하긴. 다정하면서도 언제나 올곧은 그였으니.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여기는 길이라면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 그런 면은 여전하구나.)
(힘이 빠졌던 손이 다시금 강하게 칼손잡이를 말아쥔다.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게끔 만들 수밖에. 키도 몸집도 한참이나 작은 당신에게 진심으로 검을 써야만 한다니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거대한 체구와 달리 민첩한 움직임으로 당신에게 파고들며 칼을 휘두른다. 목적은 검을 쥐고 있는 팔. 다른 이를 상대할 때보다 힘을 덜 쓰게 되는 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베아트리체 힐:(...차라리 그의 손에 제 마지막을 맡기게 된다니. 그것만큼은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당신이 슬퍼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단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무수히 전장을 재패한 이와 조각상처럼 자리를 지킬 뿐인 이의 겨루기란 물보듯 뻔하다. 당신보다 퍽 작은 체구로는 저 힘을 그대로 감당할 수 없다. 보다 한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 밖에는. 보다 크게 휘둘러지는 칼의 틈을 노려 칼등으로 비켜낸다.)
에르드:안 돼…… (허망하게 새까만 공동을 내려다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어디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왜 베아트리체를 데려간 거지? 대체 왜? 걱정과 분노로 이성이 휘발되고,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다.)
빛이 꺼진 눈동자에는 오로지 검은 구덩이 뿐입니다.
깊고 어두운.
에르드:(지원군을 불러오기에는 저 구덩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베아트리체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성이 끊기기 직전인 채로 빠르게 상황을 곱씹고 판단을 내린다. 어차피 궁은 혁명군이 점령했다. 목적은 달성했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찾으러 간다.)
(망설임없이 구덩이 속으로 몸을 날렸다.)
에르드는 결국 그 구덩이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베아트리체가 저기 어딘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라,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분명 발에 닿아야 할 바닥이 그 자리에 없습니다.
떨어지는 시야로 입구가 사라집니다.
결국 에르드는 그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에르드, 이성판정 1/1d2.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1
(평범한 구덩이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얼마나 깊은 거지? 황제는 대체 뭘 저지른 거야?)
에르드:우욱. (토기를 참으면서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다. 분명 궁에서 떨어졌는데, 잔디라고?)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듭니다.
어라,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런….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어느새 웬 꼬마 아이 하나가 바닥에 누운 에르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어린 베아트리체:...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그런데… 어라? 이상하네요.
어딘가 익숙한 것이…. 아, 알겠습니다.
이 애는 분명 에르드의 기억 속의 베아트리체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열 세살의 그 꼬마 베아트리체라는 말입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에 놀란 에르드, 이성판정 0/1.
에르드:……?
………………?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꿈……? (자신을 내려다본다. 제 몸은 어떻지? 나도 아이인가?)
에르드는 자신의 몸을 확인해봅니다.
구덩이에 떨어지던 그 모습 그대로 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무기며, 수중에 있던 것들이 몽땅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요.
어린 베아트리체:.....? 괜찮으세요..? (조그만 손을 내민다.)
에르드:(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제 칼과 텅 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당황해하다가 뒤늦게 아이가 된 베아트리체를 올려다본다. 꿈일까? 그렇다기엔 너무 선명한데.)
날 몰라?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린 베아트리체:(손을 잡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일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고개를 기울였다.) ... ...처음 뵈어요.
....음, 누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듯 한참이나 높은 이를 올려본다.)
에르드:(아직 나를 만나지 않았을 때의 베아트리체인가. 이렇게 다시 보니 그때의 그가 얼마나 조그마했는지 새삼 실감이 난다. 현재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걱정과 불안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즐겁게 어울려 놀기만 했던 그 시절들.)
올려다보기 힘들지. 안아줄까?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베아트리체와 시선을 맞춘다.)
아직 어린 베아트리체는 눈 앞에 있는 이가 자신의 소중한 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친구는 저와 비슷한 눈높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어린 베아트리체:...음. (처음 보는 이가 낯설 법도 한데, 미묘하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그의 따스한 눈동자와 마주치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책이 들려있는 두꺼운 책만 보아도, 그의 눈에는 이미 호기심이 가득 차있었으니까.)
...네. (두 팔을 뻗어 보인다.)
에르드:(아차. 너무 친근하게 대했나? 하긴 겉모습만 보면 상당히 험악하고 무서운 인상이지. 뒤늦게 자신이 아이들을 대할 만한 인상은 아님을 자각하고 물러서야 할까 고민하다가, 두 팔을 뻗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한다.)
(베아트리체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너무 깃털 같아서 힘을 주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난 에르드라고 해.
어린 베아트리체:(...와아, 높다. 조그만 입에서 탄성이 흐른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목을 꼭 둘러 안았다.)
...에르드? (갸우뚱) ...제 친구와 이름이 같으시네요.
에르드:(날 아예 모르는 건 아니군.) 우연의 일치겠지.
여긴 어디지?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어린 베아트리체:...? (갸우뚱. 이름이 같으면 얼굴도 닮는걸까?)
...이 마을에 처음 오세요? 저는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갈 곳이 없으시다면, 함께 돌아가시겠어요?
에르드:(꿈 속인가. 과거인가. 아직도 영문을 알기 어려운 공간이지만, 일단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아는 베아트리체를 따라가는 게 좋겠다.) 그래 준다면 고맙지.
(머리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준다. 마냥 이때만 같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린 베아트리체:(쓰다듬는 손길에 눈만 깜빡였다가 조용히 웃어 보인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퍽 기분이 좋았다.) ...그럼 저기 큰길을 따라가면 돼요.
둘은 그렇게 베아트리체의 집으로 향합니다.
꼬마 베아트리체의 집…은 꽤나 좋습니다.
그야 당연합니다. 이건… 성에 가깝지 않나요.
함께 풀을 뜯고, 꽃을 꺾고. 허름하고 소박한 비밀 장소에서 둘 만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떠들고 웃었어도
눈치가 빠른 에르드라면 짐작했을겁니다.
주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소재의 옷, 차분한 말씨,
헤어질 때면 가끔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보았더라면요.
처음 만났던 날 역시 그랬지요.
에르드를 위해 마차에서 내리던 꼬마의 모습은- 여느 귀족 아가씨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나 큰 집이라니, 부모님의 신분이 꽤나 높겠습니다.
베아트리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에르드의 손을 잡고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갑니다.
조심히 문을 닫고는 한 손의 검지를 입에 대더니 쉿. 에르드에게 이불을 폭 덮어줍니다.
숨어있어야 한다면서요.
어린 베아트리체:... ... ...어머니께 들키면 곤란해서요.
에르드:(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으리으리한 집 출신이었다니. 황궁에 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이불 속에 가려진 채 눈만 내놓고 방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어릴 때 베아트리체가 머무르던 방에 올 수 있다니, 귀한 기회다.) 그래. 들키지 않게 조심할게.
에르드:뭔 여행자? (일단 알아볼 수 있는 글씨기는 한데, 해석이 어렵다. 눈살을 찡그려 가면서 열심히 읽어가다 보면 대략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산딸기…… 설마 저건가? (물음표 라벨이 붙었던 병을 돌아본다. 2번 항목은 머리카락 같은데. 아무리 봐도 황제가 구덩이로 빠지기 직전 한 짓이 떠오른단 말이지.)
(이 빨간 글씨는 뭐야? 이것만 제대로 해석이 된다면 단서를 좀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용을 잘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몇 장 더 넘겨본다. 더 관련된 내용은 없나?)
책에는 읽을 수 없는 언어들이 가득합니다.
다만, 모든 페이지가 같은 순서대로 쓰인 것을 보아하니 언어만 다른 모두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에르드:(이렇게까지 여러 언어로 같은 내용을 써둬야 할 이유가 뭐지? 이 방법을 아는 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건가? 좀 불쾌하군.)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두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꽤나 크기가 큰 창문입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볕을 쬐기에도 딱 좋아보이지만.
여차하면 이곳으로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어쩌면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나가야 할 수도 있겠다. 황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베아트리체의 방에 버젓이 이런 책이 있는 거라면 부모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식한테 대체 무슨 일을 시킨 거야?)
에르드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깨끗한 옷과 간단한 먹을거리, 작은 양동이에 세숫물까지 들고 베아트리체가 돌아왔습니다.
에르드:(혼자 다 들었다고?) 무겁겠다. (얼른 양동이랑 옷을 뺏어든다.) 챙겨오느라 고생했겠네.
어린 베아트리체:(도리도리) ...이 정도는 괜찮아요. 도와달라고 했다가 들키면 안되니까요. (다시 검지를 대고 쉿, 하고는 조용히 들어온다.)
어머니께서 꽤 엄하시거든요.
에르드:그런 것 같더라. (세수부터 한다. 머리도 감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으니 목까지 씻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좀 개운해졌다.)
기다리는 동안 네 방을 좀 봤거든. (특이한 열매가 든 병을 가져와 보여준다.) 이건 뭐야?
어린 베아트리체:(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구경하다가 갸우뚱, 기울어진 고개로 빤히 올려본다.)
......아. (방을 보셨구나.) ...그건 방금 에르드님을 만난 동산에서 발견한 거에요.
...처음 보는 열매라 물음표를 붙여두었어요.
에르드:…… 님 자는 안 붙여도 돼. (매우 어색) 처음 본 거라고?
그럼 저 책은? (황금색 책을 가리켰다.)
어린 베아트리체:(끄덕끄덕) ...하지만 에르드. ... ...에르는 제 친구 이름이라- 어색해서요.
... ...아, 제가 책을 좋아해서요. 아버님께서 먼 곳에서 온 귀중한 책이라며 선물로 주신 거에요.
에르드:그 애는 에르라고 부르지? 난 그냥 에르드라고 해. (어차피 둘 다 나지만)
그 책…… 읽어본 적 있어? 부모님이 별개로 그 책에 관해 언급한 점은?
어린 베아트리체:....음, 네. 에르드....(...님.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네, 읽어본 적 있어요. (도리도리) 거기에 따로 말씀하신 적은 없었구요.
... ...타국의 말을 공부하려고 본거라.
에르드:그럼 저 책 내용은 전부 이해하고 있어? 나는 잘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모르겠던데.
어린 베아트리체:(책의 내용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아직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요. ...음.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다짐한다.)
에르드:(공부에 관심없는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 나도 태반은 못 읽었으니까 괜찮아. 다 알고 있으면 설명해달라고 하려고 했을 뿐이니까 신경쓰지 마.
그보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열여덟 살만 되었더라도 차마 묻지 못했을 텐데, 훨씬 더 어린아이여서인지 쉽게 입이 열린다.) 그 애를 좋아해? 날 닮았단 아이 말이야.
어린 베아트리체:.........그래도. 제가 도움이 못되어 드린 것 같아서요. (표정은 없어도 눈썹만 슬쩍 내려가는 게 조금 시무룩해보인다...)
.......... .........아. .............음, 그게. (도자기 인형처럼 새하얀 얼굴에 담담한 표정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힐끔, 올려봤다가 시선을 슬.... 피한다.) ...음, 그러니까.
............ ...네. (귀 끝만 새빨갛다.)
에르드:(웃음 꾹 눌러참는다. 어린 시절에는 그를 보기만 해도 부끄러운 마음에 오래 눈을 마주보지 못했어서, 이렇게나 섬세하면서도 귀여운 외모인 줄 미처 몰랐었다. 지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 좋네.)
(베아트리체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된 근 십년 간 웃어본 적이 손에 꼽는 그였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기분이 들뜨고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베아트리체 말고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라는 걸 아직은 둘 다 모르겠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어린 베아트리체:... (.......왜 처음 보는 분인데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한 적 없는 이야기가 풀어지는지 모르겠다. ...그 애를 닮아서 그럴까? 이름이 같아서? ... ...저런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계셔서? 자꾸만 그 아이와 겹쳐 보여 어느새 눈을 맞추기가 어렵게 되었다. 애꿎은 손끝만 내려본다.)
... ... ...그래서. ...꽃다발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곧 생일이거든요.
....에르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에르드:분명 좋아할 거야. 너처럼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가 만들어주는 꽃다발이니 싫을 수가 없지. (마냥 웃으면서 그 모습 바라본다. 이렇게 평온하고 밝은 분위기를 누렸던 게 대체 얼마 만이더라. 너무 오랜 시간을 칼을 쥔 채 굴렀더니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린 베아트리체:(문득 내려가 있던 시선이 맞춰진다. ...아주 잠깐.) ... ...저를 오늘 처음 보시는데도 그리 말씀해주시네요. ...정말 그럴까요? ... ... ...만약, 저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죠?
에르드:그럴 일은 없을걸. (딱 잘라 말한다.) 내가 보장하지. 원래 이름이 같고 외모도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좀 통하는 법이거든.
잘 생각해 봐. 그 애가 너를 대하는 태도랑 남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어린 베아트리체:....? (단호함에 갸우뚱...)
...그럼, 에르드...(...님.) 이 좋아하시는 분은 저를 닮으셨나요?
(문득 떠오르는 질문을 던져 놓고는 곰곰.... 생각에 빠진다.) ...상냥해요, 다정하고... 또 제게 웃는 모습이 예뻐요.
에르드:(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에 웃다 말고 삐끗한다. 역시 은근히 예리한 면이 있다니까…….)
그래, 맞아. 널 닮은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좋아해 왔지. 비록 그 사람은 얼굴도 볼 수 없고 연락도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났지만…… 내 마음은 십 년이 지나도 여전해.
(나직하게 말하다가 다시금 미소한다. 날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혁명군의 동료들이 들으면 하나같이 기겁할 평가다.) 하지만 남한테는 무뚝뚝할걸. 잘 웃지도 않고. 그럼 역시 널 좋아하는 게 아닐까.
어린 베아트리체:(삐끗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만 끄덕인다. 손가락 몇 개를 접어보다가) .....십 년 동안이요. 굉장히 긴 시간이네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그때에는 마음을 고백하실 건가요?
(저 미소는 역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구석이 있어서 결국 마주 미소 지어보였다.) ..... ...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지만 자주 눈을 피하기도 하고. 훌쩍 멀어지기도 하는걸요.
에르드:글쎄. (조금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너무도 먼 곳에 있어서, 이제는 나 같은 건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눈은…… 전부 기억하는 것만 같았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같지만 쉽사리 고백하진 못할 것 같아. (어쩌면 베아트리체가 하는 것과 비슷한 고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열세 살 아이와 같은 걱정 중이라니. 이런 제 신세가 우스웠다.)
그런 게 있어. (대답 은근슬쩍 피한다) 그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일걸?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거 아닐까.
어린 베아트리체:(문득, 쓸쓸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 ...그럼, 언젠가 두 분이 꼭 행복해지실 수 있도록 제가 선물을 드릴게요. ... ...원래는 에르에게만 주는 건데, 비밀이에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반에 있던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온다. 온전히 잘 말린 황금빛 메리골드가 담긴 병.)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이 꽃의 꽃말이에요. ... ...제가 에르가 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에르드의 행복도 빌어드릴게요.
(손에 꼭 쥐어주고는 가만 웃는다.) ...... ...그런거라면 좋겠다. ...네, 꽃다발은 꼭 만들래요.
에르드:선물을? (그가 유리병을 향해 움직이고, 꽃을 꺼내어 건네어주는 순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는다. 내밀어지는 꽃은 제 눈을 연상시키는 황금빛을 띄고 있다. 유리병에 담아둘 정도라면 분명 소중한 꽃일 텐데. 처음 만나는 저에게 행복을 바라면서 주는 마음이 봄빛처럼 상냥해 문득 목이 메인다.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면서 기억 속에 퇴색되어 가던 당신의 다정한 성정을 다시금 사무치게 느낀다.)
…… 고마워. (꽃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모습이 온화하다. 얼마 전까지 칼을 휘두르고 피를 뒤집어쓰던 전쟁광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소중히 간직할게.
그리고 나 역시 너의 행복을 바라. 네가 어디에서든 상처 입는 일 없이 평안하기를. (내가 그렇게 되도록 지켜주고 싶었어. 그 말만큼은 꺼내지 못하고 삼킨다.) 잘 될 거야.
어린 베아트리체:(...왜 일까, 이토록 다정한 말인데 저 아래 잠긴 슬픔이 느껴지는 것이. 가만 손을 뻗어 에르드의 뺨에 가져갔다.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그에게는 한참이나 작은 자신의 손. 그저 조그만 온기로 위로가 되었을까. 그 눈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그래주시면 기쁠 거에요.
....네.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로지 에르드의 앞에서만 짓곤 했던 그 웃음을.)
에르드:(하염없이 웃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그 시절에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던 웃음이 이제 와 이토록 그리워질 줄 누가 알았을까. 어른이 된 당신이 저에게 다시 웃어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뺨을 감싸는 자그마한 손을 살짝 잡으며 애써 미소했다. 위로도 바람도 응원도 전부 우리의 이야기인데. 정작 그 끝은 어디로 향하는가.)
어린 베아트리체:(커다란 손이 참 따스하다. 분명 이 사람의 다정함만큼이나 따스하겠지. ...문득, 저 손을 다 덮어줄 수 있을만큼 자신이 커다랬다면 좋았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
두툼하게 썬 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끼워 넣은 간단한 샌드위치와 신선한 우유로 요기를 달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은 흘러, 둘은 밤을 맞습니다.
에르드는 압니다.
이 밤을 틈타 이곳을 벗어나야 꼬마 베아트리체가 더는 곤란해지지 않겠죠.
에르드:(베아트리체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중간중간 창밖을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밤이 찾아온다. 베아트리체를 이대로 두고 간다면 황금빛 책에 쓰였던 대로, 그리고 자신이 황궁에서 보았던 대로 황제의 노리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겠지. 대체 부모가 무슨 생각으로 용인한 것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저는 베아트리체가 그런 책임을 감수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바란 건 그때도 지금도 그의 행복뿐이다.)
베아트리체. (그를 부른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내 말을 순순히 믿고 따라줄까?)
어린 베아트리체:(부름에 갸우뚱, 기울어진 고개만 들어 반쯤 올려본다.) ...네, 에르드.
에르드:…… 저 책의 내용을 아직 잘 모른다고 했지? 나도 전부 해석한 건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 가면 너는 언젠가 반드시 황제에게 이용당하게 될 거야. 에르드 그 애와 다시는 만나지도 못하고.
그러니 지금 나와 함께 이 집을 벗어나자.
어린 베아트리체:......제가 황제 폐하께요...? ...게다가 에르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눈만 동그랗게 커진다.)
에르드: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리겠지. (내가 오늘 베아트리체를 데려간다면, 베아트리체가 나에게 결혼하자 말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는 건가?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 괜찮아.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믿어줘, 베아트리체. (망설이다 결국은 모두 털어놓고 만다.) 난 십오년 뒤의 미래에서 왔어. 십 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는 사람이 바로 너야.
넌 언젠가 황궁으로 간 이후로 어떤 소식도 닿지 않았지. 마침내 널 재회했을 때 황제가 네 머리칼을 잡고 저 괴상한 산딸기를 사용했어. 그래서 내가 시간을 돌아와 여기에 와 있는 거고.
어린 베아트리체:... ......에르드, 거짓말이시죠?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요. 당신이 미래에서 온 에르...라는 게. 어떻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잠시 말이 없이 생각에 잠긴다. 산딸기와 황제... 시간들 돌아간다는 말이 복잡하게 뒤엉켜 조그만 머리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떤 책에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 그럼에도 그가 했던 말에서 느꼈던 감정, 그의 절박함만은 느껴지는 듯해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 에르드는 절 걱정하시는거죠?
에르드:네가 아는 에르드와 나를 자세히 봐. 우연일 뿐이라고 둘러넘겼지만 이름과 외모가 일치하는 이가 또 존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면 베아트리체가 또다시 황제에게 휘말려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급해져 왔다.)
…… 그래. (혁명군에 들어간 것도, 행동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치 싸움에 매진했던 것도 전부 베아트리체와 연결된 이유였다.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싶어서. 황궁에 들어가면 그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어린 베아트리체:.........하지만 그게 어떻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에르드와 눈 앞의 에르드를 겹쳐본다. ...말도 안돼. 있을 수 없는 일일텐데.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조그만 손을 들어 뺨에 가져간다.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꼭 닮은 이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에르드:(뺨에 닿아오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내리감는다.) 응. 아직 기억하고 있어. 네가 내게 꽃다발을 건네줬던 것도. 그때 했던 말들도…… 전부.
그러면 일단은 이 집을 떠나 다른 곳에 머무르자. 밤이 지나고 나면 동산에서 그애를 만나.
어린 베아트리체:......아주 오래도록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에르드. (걱정 말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눈가를 어루어 만지다가 가만 웃어 보인다. 저보다 훌쩍 커다란 이가 지금만큼은 꼭 저와 같은 아이처럼 보였다.)
...이곳은 지키는 병사들이 많아요. 저희 어머니께서 이 곳의 영주시거든요.
에르드가 꽃다발 만드는 걸 도와주시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릴게요. ......저만 아는 작은 비밀 통로가 있거든요.
에르드:(한참이나 어린데도 너는 생각이 깊고 다정하구나. 아마 어릴 적의 저도 당신의 이런 면모에 반하고 만 거겠지. 그 사랑이 심장을 죽기 직전까지 옭아매고 갈라지게 만드리라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러니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을 잃을 수 없다.) 응. 도와줄게. 그런 쪽으로는 미적 감각이 없어서 영 엉성할지도 모르지만…… 너만 괜찮다면야. (와중에도 작게 웃음이 나고 만다.)
어린 베아트리체:....다행이다.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고민이 많았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조그맣게 마주 웃어 보이고는 한참이나 작은 고사리 손으로 에르드의 손을 붙잡는다.)
....제 비밀 통로는 부엌에 있어요. ...쉿.
에르드:잠깐만. (손 뻗어 정체 모를 산딸기 병을 챙긴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당신의 자그마한 손을 소중히 감싸쥐었다.) 이제 가자, 베아트리체.
어린 베아트리체:....네. 에르드.
고개를 끄덕이던 베아트리체가 다시금 검지를 입가에 올리는 것을 보니
몰래, 조심해서 나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살금, 문을 열고 계단으로 향하는 동안 병사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베아트리체가 아주 조그맣게 속삭입니다.
어린 베아트리체:...방금 말씀 드렸듯이 저희 어머니께서는 이 곳의 영주세요. …그래서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많구요. 지켜야 하실 것이 많으시니까요. 엄하시지만 정말 다정하고 상냥하세요. 또 영지민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끼시구요. 아, 물론 아버지도 엄청 좋은 분이세요. … …저는 꼭 어머니같은 영주가 되고 싶어요.
자그만 미소를 끝으로 소중한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양 속삭이던 목소리가 잦아듭니다.
에르드:(너는 그토록 부모를 존경하고 따르는데, 그들은 왜 너에게 그리 모질게 굴었을까?)
(부모에게서 아이를 앗아간다는 죄책감 따윈 한 톨도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베아트리체뿐이야.) 될 수 있을 거야. 분명.
에르드:(날을 꼼꼼히 살펴본다. 손에 쥐고 몇 번 휘둘러보기도 했다. 이만하면 만족스럽군.) 그래, 이걸로 하지. (값을 지불한다)
무기상 주인:고오맙소! 아주 좋은 걸세, 주인을 딱 잘 만났구만. 바라는 바 이루시게!
주인은 에르드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사라집니다.
구할 것도 구했겠다, 알아야 할 것도 알았겠다.
베아트리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
에르드:(과거의 나는 잘 만나고 왔을지 모르겠군…… 검집을 허리춤에 차며 동산으로 되돌아간다)
동산으로 돌아가던 중, 저 멀리서 소란이 들려옵니다.
저 방향은 분명 베아트리체의 집...이었지요.
에르드:괜찮을 거라더니. (그새 무슨 일이라도 났나?)
(그래도 일단은 동산으로 먼저 가본다. 베아트리체에게 별 일 없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결국 에르드는 동산으로 도로 돌아왔습니다.
둘도 막 동산에 도착했나 봅니다.
어린 베아트리체가 어린 에르드에게 꽃을 내밀며
" 어른이 되어... 그때에 네 마음이 나와 마음이 같다면. "
“...결혼하면 좋겠어.“
숨겨온 진심을 꼭꼭 눌러담은 고백을 전합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제 곧 에르드는 저 꽃다발을 받아들겠죠.
쑥스러워 돌린 시선 끝에 산딸기처럼 새빨갛게 익은 귀 끝으로요.
에르드:(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바라본다. 좋을 때군…….)
숨어서 지켜보는 에르드는 어린 에르드가 괜히 어색해 덧붙일 말도 이미 알고 있을겁니다.
… …
그런데 그때, 누군가 어린 에르드를 덥썩 낚아챕니다.
황제:...그래, 이래야지. 미리 뿌리를 뽑아야 한다니까.
그는 다름 아닌 황제입니다.
호박색 머리칼을 가진 그는 칼을 들이밀고 어린 에르드를 위협합니다.
그 앞에서 어린 베아트리체는 안절부절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베아트리체는 그 앞을 가로막고 섰으나, 굳은 듯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야 저 손 안에 들려있는 건 바로 에르드, 당신의 목숨이니까요.
에르드 역시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지금 저 꼬마 에르드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금의 에르드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던 중, 눈에 무언가 들어옵니다. 익숙하고도 낯선 것이-
어린 베아트리체가 어린 에르드에게 건넨 꽃다발에서 데구르르 떨어져나온,
-반은 피처럼 붉고 나머지 반은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그 산딸기입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 열매로 황제를 막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치에 떨어진 산딸기의 개수는7개 입니다.
에르드:(베아트리체……!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킬 뻔했다가 겨우 참아낸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어린 내가 죽으면 지금의 나도 없어. 그때 마침 발치에 굴러온 산딸기를 발견하곤, 하나만을 제외하고 재빠르게 병에 담았다. 이걸로 시간여행의 기회는 많아졌다. 산딸기 한 개를 입에 물며 재빠르게 뛰쳐나가 황제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뿌리뽑아야하는 건 너겠지. 이 개자식. (산딸기를 아득 깨물며 정확한 시간을 새기듯 떠올린다. 황궁에서 대치했던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서있는 황제를 죽이고, 국민들에게 자유를 알리고, 다시 바른 나라를 세울 때입니다.
픽, 바닥에 쓰러져 앉은 황제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에르드를 바라봅니다.
에르드는 그런 황제에게 칼을 쥐고 다가갑니다.
한 발, 두 발, 세 발.
툭, 에르드의 발에는 그날의 꽃다발이 걸렸습니다.
아마 이 급박한 상황에 저를 따라 딸려왔나 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발걸음.
그 발이 땅에 닿기도 전, 베아트리체는 에르드를 가로막습니다.
…아. 어른이 된 베아트리체 역시 알고 있었나봅니다.
시간 여행자가 되는 방법을.
그 책은 분명 베아트리체의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있었을테니까요.
순식간에 눈 앞에 나타난 베아트리체는 검 끝을 겨눕니다.
끝까지 자신의 주군을 지키겠다는 이유에서.
애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잘게 떨리는 검의 끝으로.
대체 무엇 때문에요.
이리도 지독한 충성이 있답니까.
목숨을 다한 나라의 구더기 같은 군주를 지키겠다니, 대체 무슨 연유로.
아, 이 미련한 사람. 지금 상황이 어떤줄도 모르고.
창과 칼, 축포처럼 울리는 격발음이 멀지 않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곧 혁명군이 들이닥칠 겁니다.
그럼 그 이후의 상황은 너무 뻔하잖아요.
에르드:베아트리체? (눈살을 찡그렸다. 마침내 황제를 처단할 기회였다. 마침내, 이 나라를 망치고 너를 해치려 한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대체 왜?)
(무엇보다도 또다시 황제에게 이용당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검을 들어 베아트리체의 칼을 유려하게 쳐내며 그의 허리를 단번에 한 팔로 감싸고 제 쪽으로 끌어오려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그자를 지키려는 이유가 뭐야? 저자는나를 죽이려 했어. 그리고 너를 이용했다고.
베아트리체 힐:(힘없이 손에 들린 검이 순식간에 튕겨져 바닥을 구른다. 성큼 가까워진 시선에는 망설임이 담겼으나, 애써 밀어내려한다.)
…황제를 벨 거라면, 차라리 나를 먼저 베어내. (...…비킬 수 없다. 제게 달린, 제가 짊어진 목숨이 한둘이 아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사랑하는 이에게 편히 안기지도 못하는 이 순간이 못내 밉다. 밉다. 차라리 그 끝을 제 심장 깊이 박아넣고 싶은 심정이다. 그대로 붉게, 붉게 물들어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입술을 으득, 물었다. 지금 이곳에는 셋 뿐이다. 너와 나 그리고 목숨을 갈구하는 저 자. 그러니 당신만 못본 척해준다면.) ……이대로 못 본 척 해줘. 저 자와 다시는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테니. … …보내줘, 부디.
에르드:그럴 수 없어. (벗어나려는 당신의 허리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연보랏빛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대체 왜? 저자가 네게 약점이라도 잡고 있어? 나에게 말해, 베아트리체. 난 온 힘을 다해서라도 널 도울 거야. 알잖아. (십 년이나 어떤 연락도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 버렸으면서, 겨우 다시 마주한 이 순간마저 나에게서 벗어나려 한다고?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발 나에게서 멀어지지 마.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타는 눈빛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베아트리체…… 네가 내게 꽃다발을 주었던 나날부터 쭉 너를 사랑해 왔어. 널 다시 만난 이상 이번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베아트리체 힐:(환한 금빛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긴다.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간 당신과 달리 스스로를 저버리고, 속절없이 흔들리고 마는 초라한 모습이 비친다.) ... ......절대 황제의 목이 나보다 먼저 떨어져서는 안돼. 그가 모두를 죽일거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애써 밀어내려는 제게, 참으로 달콤하고도 가혹한 말이다. 언제고 바라왔고, 또 바라왔던 말이다. ...왜 이런 순간에.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 한 줄기가 소리없이 떨어져내린다. 이 품에 안겨 영원을 약속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내줘, 제발.
에르드:무슨 소리야, 그게……? 죽은 자가 어떻게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거야. (미간을 찌푸린다. 죽었는데도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는 법인데.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이 정도로 확신하고 있는 거라면 황제에게 더러운 구석이 더 있는 거겠지. 산딸기를 대체 몇 개나 갖고 있는 거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나에게 산딸기가 있어. 시간을 돌려서 어떻게든 너와 황제가 엮이는 일이 없게 만들게. 아니, 아예 그자를 죽여버릴까? 내가 뭘 하면 되지? (그의 입가에 맺힌 피를 느릿하게 닦아주었다. 아, 슬플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
베아트리체 힐:........... (꽃다발을 전해주고, 맑게 웃으며 미래를 약속하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까마득하나 여전히 선명하다. 나라에 바칠 작물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황실의 위엄을 떨어뜨렸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영주이신 어머니의 자결을 명한 황제. …다 무너져내린 그 집안에, 손을 내민 황제는 자신을 대가로 거래를 제안했다. 남은 이들의 목숨을 걸고. 겨우 살아남은 제 가족과 영지민, 그 모두의 목숨을. 귀족들에게 내보일 '본보기 장난감'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을의 수로에 독을 풀거야. 자신을 마지막까지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 할거야. ...저 자라면 반드시.
....나는. 나는 그들을 저버릴 수 없어, 에르드.
에르드:(주먹을 꾹 말아쥔다. 베아트리체가 꽃다발을 전해주는 걸 보기 위해 지나쳤던 소란이 그거였나. 차마 벗어날 수도 없는 공포의 새장 안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가슴이 사무치게 아프고, 황제를 향한 분노가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른다.)
(마을의 사람 따위는 상관없다고, 나는 너만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 당신은 너무도 선한 사람이니까.) 그때로 되돌아가자. 내가 황제를 죽일게. 너희 어머니에게 애초에 자결을 명하는 일이 없도록 할게. 그러면 네가 본보기로 끌려갈 이유도 없겠지.
베아트리체 힐:(그저 넓고 따스한 품에 안겨,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진다. 스스로를 버리고, 죽이며 다짐했던 지난 10년이 이렇게 쉽게도 무너질 수 있을까. 이렇게 저 자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걸까. 너와 함께라면. ) .......그 날로. ...그 날로 돌아가면, 모두를 지킬 수 있을까...? 저자가 보낸 전령이 마을에 독을 풀기 전에.... 모두를 구할 수 있을까....?
에르드:할 수 있어. 내가 너를 구하고, 모두를 구할게. 안 된다면 몇 번이나 시간을 돌려서라도. (당신의 여리고 불안한 물음과 달리 확고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달래듯 그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등을 쓸어내렸다.) 오랫동안 많이 힘들었지. 이제는 저딴 쓰레기 자식한테 휘둘릴 필요 없어.
내가 널 구해줄게. (베아트리체를 제 뒤에 두고, 검을 빼낸다. 스릉- 검집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린다. 황제에게 한 걸음 다가갈수록 황금빛 눈에서 조용한 분노의 불길이 타오른다.)
(이 순간을 아주 오래 기다려왔으나, 칼을 휘두르는 데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긴 시간 동안 괴롭게 한 죄를 더하여 벌할 것이다.)
(칼을 단숨에 뻗어 황제의 저항을 떨쳐내고 그의 가슴을 찌른다. 칼날이 심장을 파고드는 감각과 고통이 선명히 느껴지도록 아주 천천히.) 네놈에겐 빠른 죽음조차 아까워. (증오로 이를 갈며 황제의 목숨을 앗아갔다.)
에르드의 번뜩이는 검 아래, 황제가 발악합니다.
황제:…미친 것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천한 두 년놈들이 제대로 돌았구나! …그래, 네 놈. 네가 죽고 못사는 저것의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걸 보아라. 내 전령이 벌써 마을에 닿았을테니. 후회해도 늦었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네깟 것의 명줄보다 내 목숨이 먼저 떨어지는 그 날, 네가 죽고 못사는 그것들의 시체산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그 말을 끝으로 황제의 심장은 붉은 피를 뿜어냅니다.
...진정 끝일까요?
에르드:사소한 것 하나로도 약점을 잡아 협박하며 갖고 놀았겠지. 쓰레기 같은 자식. 걱정 마, 되돌아간 시간에서도 네놈을 또 베어줄 테니까. (식어가는 시체에 대고 뱉듯이 말한다.)
베아트리체. (피를 닦아내며 뒤돈다.) 가자. 늦지 않았어.
베아트리체 힐:..............아. (붉게 물드는 바닥을 보며 쓰러진 황제의 마지막 말을 되새긴다.)
.........정말 늦었다면, 그런 거라면.
붉게, 붉게 물드는 융단 위로 잠깐의 적막이 내려앉습니다.
... ...
그 때.
탕, 탕탕.
뒤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에르드는 뒤를 돌아봅니다.
에르드의 뒤에는 동료들이 서있습니다.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입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총을 높게 치켜듭니다.
다시 에르드는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심장이 붉게 물든 베아트리체가 황제의 발 아래에 쓰러져있습니다.
붉게, 더 붉게. 두 사람만큼 더 붉게 물들었습니다.
아, 아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머리가 무겁습니다.
에르드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발을 딛습니다.
에르드의 발치에 꽃다발은 무참히 채이고 밟힙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에르드:(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무릎이 꺾인다. 베아트리체의 앞에 주저앉아 붉게 물들어가는 그를 느릿하게 품에 안았다.) 구해주겠다고 했는데. (미처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지조차 못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황제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이 문제였을까?)
…… 아니야. 되돌릴 수 있어. 아직 늦지 않았어. (베아트리체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에게 중얼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길로 병에서 산딸기를 꺼냈다.) 널 고통 속에서만 살다 죽게 하지는 않을 거야…….
(저의 머리칼을 쥔다. 산딸기를 깨문다. 베아트리체가 어린 나에게 꽃다발을 주었던 바로 그 시간으로. 가자. 떠나자. 다시 너를 만나러.)
그래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손에는 산딸기가 남았으며, 그날의 기억과 의지를 품고 있으니까요.
시간을 넘나드는 것은 여전히 기이한 감각입니다.
이성판정 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3/26/10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저릿저릿한 머리를 감싸쥐고 에르드는 그 날으로 도로 돌아왔습니다.
꽃다발을 주고 받던, 바로 그 날로요.
다만 처음 구덩이에서 떨어졌던 그 동산이 아닌, 소란이 들리던 베아트리체의 집 근처입니다.
에르드:(설마 집안까지 병사들이 침입하진 않았겠지? 어린 베아트리체와 빠져나왔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다행히 안 쪽까지 침입해오지는 않은 듯 합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성 안의 병사들과 식솔들은 우왕좌왕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면, 베아트리체의 어머니. 힐의 영주를 찾는 것도 수월하겠습니다.
에르드:(사람들을 마구 헤쳐가며 영주가 있을 만한 방을 찾아 헤맨다. 시녀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영주는 어디 있지? 그를 구하러 왔다. 병사들이 시시각각으로 포위해 오고 있는 상황이니 어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시녀는 순간 두려운 눈빛을 띄었으나, 에르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습니다.
그의 곧은 눈빛을, 절박함을 읽었을까요?
시녀:....영주님이라면 이 복도의 가장 끝 방에 계십니다. ...저희 영주님을 구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저리 험하게 잡혀가실 분이 아닙니다.
에르드:나도 알아. (조용히 말하고는 곧장 복도의 끝으로 향했다. 방문을 두드린다.) 힐 영주.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어서 저와 이곳을 빠져나가시죠.
힐의 영주:......누구시길래 이런 시기에 저를 찾습니까.
에르드:내 이름은 에르드. 당신이 알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바깥이 병사로 포위되어 있음은 알고 있겠죠. 그들은 당신에게 자결을 명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식까지 노리갯감으로 삼으려 들 셈이고. 난 그걸 막기 위해 왔습니다.
처음 보는 이를 믿기는 어렵겠지만, 당신을 죽이려 드는 황제에게 가느니 나를 따라오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딸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내 말을 들으십시오.
베아트리체와 꼭 닮은 중년 여인이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세로 에르드를 맞이합니다.
힐의 영주:......믿기 힘든 말만 하는군요. 그러나 어찌 황제의 명을-...
힐의 영주:(제 죽음에도 흐트러짐 없던 곧은 시선이 일순 흔들린다.) ...제 아이가 노리갯감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에르드:그자는 당신의 딸을 귀족들에게 보일본보기로 삼을 셈입니다. 약점을 쥐고 흔들며 몇 년을 치밀하게 괴롭힐 테죠.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당신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이려는 자가, 당신의 딸은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힐의 영주:... ...어찌 그리 될 것이라 예견합니까. ...우리 리리가 그리 될 것이라고. (의자에 못박힌 듯 앉아있던 자세를 일으킨다. 이 순간을 피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다시 모두를 지킬 수 있게 된다면. ...눈 앞의 이를 믿지 못할 것도 없지.)
에르드: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베아트리체가 늙는다면 저런 모습이 될까, 싶을 정도로 닮은 사람이다. 그를 보고 있자니 자신의 눈앞에서 스러진 베아트리체가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괴로워진다. 몸을 돌렸다.) 서둘러 따라오십시오.
힐의 영주:...제 아이만은, 영지민들만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라 약속하세요. 그렇다면 따라가겠으니.
에르드:그들을 지키려고 당신에게 온 겁니다. (간결하게 답했다.)
힐의 영주:...그거면 됐습니다.
힐 영주는 에르드를 따라 몸을 일으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자이니, 여기서 쉽게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이겠죠.
에르드:(신속하게 그를 비밀 통로로 이끈다.)
두 사람은 비밀통로를 지나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지금쯤이면, 동산에는 어린 베아트리체와 에르드가 마주 하고 있겠지요.
힐의 영주:...성벽에 있는 병사들에게 전해 몸을 숨길터이니. ...당신은 그들을 지켜주세요. 제 아이를.
에르드:무사하시길. 당신의 안위가 곧 딸의 안위임을 기억하십시오. (영주의 병사들을 잠시 올려다본 뒤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한다.)
(이렇게 과거를 바꾸었다. 황제도 어린 저를 죽이려 동산으로 오지는 못하겠지. 그러면, 이제 베아트리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적어도 황제를 지키려 내 앞을 가로막지는 않겠지. 혁명군의 손에 죽는 일도 없어야만 해……)
(어린 두 사람이 있을 동산을 가만히 응시한다. 다시 저때처럼 행복한 나날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딸기를 깨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다만, 베아트리체가 죽음을 맞이하기보다 좀 전으로. 즉, 황제와 대치하러 향하던 순간으로.)
...다시금 시간을 넘나듭니다.
이성판정 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2/26/10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에르드는 창과 칼, 축포처럼 울리는 격발음이 멀지 않은 그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나라의 혁명군의 행동대장 에르드.
혁명을 일으킨 이들은 마침내 궁까지 점령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새하얀 기사복이 아니라...
혁명군의 붉은 망토를 두른 베아트리체가 서있습니다.
아아, 뒤바뀐 과거가 이렇게 현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목에 겨누어진 에르드의 칼.
또, 황제의 목에 겨누어진 베아트리체의 칼.
베아트리체 힐:...에르. 마지막이야.
에르드:(곁에 서 있는 베아트리체를 보자마자 안도감이 몰려온다. 아, 마침내 당신이 나의 곁에 있게 되었구나. 그 사실이 혁명의 고양감마저 짓누르고 기쁨을 선사한다. 나를 에르라고 부르고, 붉은 망토를 두르고, 당연하게 나의 곁에 서 있는 사람. 오직 이 사람만을 원했다.)
그래.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연을 끊을 때가 됐군.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다.)
(베아트리체와 함께 칼을 휘두른다. 우리 모두의 원수를 향해.)
베아트리체 힐:........마침내. (에르드와 함께 칼을 내리친다. 우리 모두의 원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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