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19시간
열대의 달은, 한낱 인간 따위는 너무도 손쉽게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을 정도로 무거운 배를 부풀린 채 거친 눈을 뜨고 있습니다.
18살 9월,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첫 달이 지나갔습니다.
각성자들은 학교에 적응하고 제나름의 친분을 쌓아 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관학교라고 해도 결국 분류는 대학, 지식의 보고죠.
바쁘게 뛰어가는 선배들, 과제 탓에 골몰하며 늦은 시간까지 도서실 불을 환히 밝히는 학생들, 느슨한 자유와 적당히 용인되는 비행.
저 장벽 너머에선 도무지 보기 어려운 녹음이 교정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다 이곳 같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날이 좋아 하늘까지 맑습니다.
그것이 다 갖기 어려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카사블랑카의 시민들은 머리로나 알지 가슴으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문득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반짝이며 알림을 울립니다.
홀로그램 패널이 온통 노란색이네요. 늦지 말라고 성화입니다.
오늘은 1학년 학생들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첫 가상 훈련이 있는 날이니 당연하겠지요.
운동장 두 개 크기만큼 널찍한 홀로그램 단련실에서 특수 렌즈를 착용하면 바깥 사막과 동일한 환경을 구성해 둔 가상 VR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첫 한 달간 이론으로만 배운 전투를 어서 빨리 실전과 비슷한 공간에서 경험하고 싶다며 애가 닳은 학생도, 몹시 긴장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서 있는 학생도 있습니다.
사실 학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자신과 맞는 구현자나 설계자가 누굴까’일 겁니다.
페어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은 70% 가량, 거기서 다시 15% 정도의 비율이 ‘각인’을 맺어 시너지를 내곤 합니다.
페어를 자율적으로 정하라고 하면 보통 친한 친구끼리 무턱대고 함께했다 도리어 전투 방식이 맞지 않아 다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1학년 때에는 하늘길 시스템이 신체 데이터를 통해 서로 보조해줄 수 있겠다고 판단한
후보 학생들과 여러 번 짝을 바꾸어 가며 누가 자신과 알맞는지 테스트를 해 보는 것이 관례입니다.
요한 에를리히:자, 첫 번째 임시 페어 부른다. 구현 A반의 스즈키 와타루, 설계 E반 노노이 라가힛. 앞으로 서. 다음, 구현 B반의 시트라 볼크, 설계 D반 이한영…….
각자 자신의 임시 페어를 찾느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한참 기다린 후에야 불렸습니다.
요한 에를리히:…구현 C반, 에르드. 설계 A반, 베아트리체 힐.
음? 베아트리체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네요.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선배 학생들을 엄청난 힘으로 때려눕혔다는 소문이 나도는 학생이죠.
그 소문답게 덩치도 키도 커서 멀찍이서 봐도 티가 날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소문의 그 애구나. 웅성거리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늘 툭 튀어나온 검은 머리 끝은 종종 눈에 들어왔었으니까. ...그러니까 쉽게 다가가면 안된다 그 소문의...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서도 쉽게 에르드를 찾아낸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만큼 확실한 존재감을 가진 이도 드물었다.)
...안녕. 네가 에르드 맞지?
에르드:(주머니에 양 손을 꽂은 삐딱한 자세로 멀찍이서 걸어와 당신의 앞에서 멈췄다. 금빛 눈이 저보다 한참이나 자그맣고 가녀린 이를 훑는다. '이런 애도 사관학교에 온다고?' 싶은 눈이다.) 그래. 네가 베아트리체 힐? 이름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능력이 뭐였더라, 너.
베아트리체 힐:...맞아. (......이렇게 바로 눈 앞에 있으니 더 엄청나네. 익숙하다는 듯, 저를 향한 시선을 담담히 받아낸다. 한참이나 높은 시선을 올려다 보다 말고 끄덕인다.) ...미래 예지.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볼 수 있어. 접촉하면 잠시 미래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고. ...넌?
에르드:아. (그제야 알았다는 듯 작게 감탄사 뱉는다.)
포춘 쿠키가 너였어? 확실히 능력이 그거라면 몸이 종잇장 같아도 버틸 수는 있겠군. (다소 무례하다 싶은 말을 가감없이 뱉었다. 퍽 까칠한 어조다만 적대감을 품은 건 아니고, 그저 타고난 성격인 듯하다.)
석화야. 눈으로 '본' 대상을 잠시간 멈추게 하는 게 가능하지. (매우 간결한 설명이다.) 넌 공격 계열 능력이 아닌데 무기는 뭘 쓰지?
베아트리체 힐:(깜빡, 무감하던 얼굴에 잠깐 미소가 스쳤다. 언젠가부터 살갑게 다가오던 학생들이 몇몇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났구나? 아마 그럴거야.
...그렇다면 주로 근거리 전투겠네. 난 근거리에는 약해서.. 주로 에너지 병기를 써. 주로 총기류.
에르드:앞날이 보인다니 신기하네. 그럼 너와 내가 파트너가 될 것도 알고 있었어? (감이 오지 않는 듯 고개 살짝 기울인다.)
권총? 아니면 장총? 나도 능력 자체엔 공격력이 없어서 일단 석화로 멈춰둔 뒤에 근거리에서 무기를 써. 주로 칼이나 권총이긴 한데 가끔 주먹도. (크리쳐와 주먹으로 싸운다는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르나 그는 이미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인간흉기 같았다)
베아트리체 힐:...학생부회장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서도, 너와 같이 이름이 호명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나와 관련된 미래는 부러 보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늘은 무척 궁금했거든. 나는 원하는 시간대를 골라 볼 수 있어서. (잠시 말을 멈추더니 따라 고개를 기울인다.) 원하는 페이지를 골라 책을 펼치는 것처럼... 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권총보다는 주로 장총. 소총이나 산탄총같은............. ...주먹을...? (반쯤 내리깔고 있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말이 되나...싶다가도 에르드를 다시 한번 마주하면, 그럴만 하다고 납득되고만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도와줄게.
에르드:(비유를 듣자 새삼스레 그 위력이 와닿는다.) 그거 엄청난 능력이네…… 패널티도 있나? 하루에 몇 번까지 볼 수 있다던가, 너무 많이 보려고 하면 신체에 무리가 온다던가.
너랑 나랑 능력 합이 잘 맞을 것 같긴 한데…… 넌 사실 누구랑 있었어도 잘 어울렸을 것 같거든. 하필 나랑 페어가 돼서 불만스러워도 이번만 버텨. (어깨 가볍게 으쓱인다.) 어차피 임시 페어니까.
베아트리체 힐:제한은 딱히 없지만... 너무 많은 걸 보려하면 두통이 와. 뇌에 과부화가 오는 것처럼.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 임시지만 열심히 할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테니까. (끄덕이던 고개가 슬 기울었다.) ......그리고 전혀 불만스럽지 않은데. (눈을 마주하고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기대하고 있었거든. 잘 부탁해.
에르드:조절이 중요하겠군. 이번 건 가상 훈련일 뿐이니까 괜히 무리하지 마.
어차피 맞춰가는 과정인데 뭐. (눈이 딱 마주치고 당신이 미소를 지어보이자 움찔하며 시선을 슬쩍 옆으로 굴린다.) 뭐, 그러던지……
앞선 순서 팀이 훈련실로 들어가고, 그들이 바라보는 가상 환경과 전투 광경이 부속실의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응원하면서 손에 땀을 쥐는 스포츠처럼 중계를 관람하기 시작합니다.
신체 부위마다 장착된 센서가 타격을 받으면 착용한 방어구가 고정되어 실제 부상처럼 움직임을 차단해 해당 부위를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이 훈련 안에서는 진짜 다친 것이나 다름없죠.
몇몇 팀은 훌륭한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기본적인 타격 범위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제한 시간을 초과합니다.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모두가 처음이니까요.
교수들도 채점 기준을 너그럽게 두는 것 같습니다.
유리 모하에:저기, 지금 좌표 C4에서 총 쏘고 있는 애 이름이 뭐더라?
요한 에를리히:아까 말했잖아. 입학 체력평가 때 5등인가 했다던 애라고.
불쑥 뒤에서 말을 건 사람은 학생회장 유리 모하에와 부회장 요한 에를리히입니다.
3학년 생도들 중 우수한 학생들은 1학년 생도들의 멘토가 되어 졸업하기 전까지 2년간 상급생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제도가 있는데,
구현 C반과 설계 A반의 멘토가 바로 이 페어입니다.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죠. 두 사람은 각 학년 수석 및 차석을 번갈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학기 첫 주에 유리가 구현자, 요한이 설계자라는 소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유리 모하에:긴장돼~? (대추야자 입안에 쏙 집어넣으며 장난스레 미소한다) 몇 번 하다 보면 이제 지루하고 졸려서 빨리 실전 나가고 싶다고 빌게 될걸.
베아트리체 힐:(인사 대신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을 괜히 쥐었다 펴본다.) ....음, 조금은요. 저보다는 페어를 다치게 할까봐서. ...그러니 실전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죠.
유리 모하에:에엥~?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해? 이야, 완전 마음씨 착한 후배네. 가상 훈련이니까 다쳐도 현실의 몸엔 아-무런 지장 없어. 미리 걱정 말라고. (어깨 톡톡 두드려줌)
요한 에를리히:(혀 차며 안경 밀어올린다.) 스크린에 집중해, 유리.
‘입학 체력평가 때 5등인가를 했다던’ 동급생이 화면 안에서 정확한 사격 실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능력이 총과 관련된 학생이었던 것이 얼핏 떠오르네요.
곁에서 그의 페어가 소리를 지르는 게 스피커를 통해 울립니다.
“좀 더 위로 경로를 끌어올릴 테니, 한 번에 쏘아 터뜨려! 마지막 한 방이다 생각하고 해치우자고!”
곧이어 설계자 쪽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미로를 뚫고 지나가듯 구현자의 총알이 궤적을 바꿉니다.
허공에서 몇 갈래로 갈라진 총알 파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크리쳐형 로봇의 머리를 터뜨립니다.
유리 모하에:어때? 저 두 사람은 합이 꽤 잘 맞는 것 같지? 여기 둘은 서로 인사 나눴어?
속 시원한 타격감을 따라 박수를 치던 유리가 베아트리체와 에르드를 돌아봅니다.
베아트리체 힐:(끄덕임에 고개를 들어 에르드를 올려본다.) ...네. 그럼요.
에르드:(말은 없이 고개만 까닥인다.) (싸가지없음)
유리 모하에:그으래그래. 이쪽 후배는 좀 과묵한 친군가 보네. 다행히 긴장한 것 같지는 않고! 베아트리체 네가 설계자였지? 설계 좀 못 한다고 해서 이 곰같은 친구가 쉽게 다칠 것 같지도 않으니 마음 놔. (키득키득 웃었다)
에르드:('말 좀 그만 걸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유리 꼬라봄)
베아트리체 힐:(표정 힐끔 보고는 괜히 유리 쪽으로 막아서듯 다가가 웃으며 끄덕인다.) 네, 그럴게요. ...참, 선배님은 처음 훈련했을 때 어떠셨어요? (말 돌리기)
유리 모하에:(다행히 에르드의 개눈깔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 나야 첫 훈련부터 천재같이 잘 해냈다 이 말씀 아니겠어. 요한이 딱! 설계를 하면 내가 거기에 쾅! 하고 힘 실어서 크리쳐를 꿍!! 해버렸지. (뭔 설명?) 아마 최고점수 받았었을걸?
요한 에를리히:너 처음에 에너지 흐름 못 읽어서 엉뚱한 건물 부쉈잖아. (차분하게 지적한다.)
유리 모하에:에헤이! 후배들 앞에서 가오 살려주진 못할망정 눈치없게 이러기냐? (요한 허리춤을 쿡 찌른다.)
요한 에를리히:……. (허리 부여잡고 한쪽 무릎 털썩 꿇는다. 부들부들……) 네 힘을 좀 생각하라고.
베아트리체 힐:...아하. 그러셨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시 웃었던가. 사이가 정말 좋으시구나..... 페어라는 건 저런걸까......... 생각하다가 에르드 한번 본다...)
에르드:(자기 멘토들이 뭘 하던간에 아-무런 관심 없이 스크린만 보고 있다. 낮은 목소리로 툭 뱉는다.) 이제 우리 차례 같다만.
유리 모하에:아, 그래그래! (요한 팔 잡고 일으켜준다.) 자자- 들어갈 준비 하자.
보급받은 특수 렌즈와 방어구를 착용하자 몸이 다소 무거워졌습니다.
유리와 요한은 통신 인이어를 끼면서 조원들에게 손짓을 합니다.
유리 모하에:자, 절대 긴장하지 말고. 굉장히 현실적이지만 실상은 그냥 거대한 훈련실이란 걸 잊지 마.
요한 에를리히:그렇다고 실전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임해서도 안 된다. 그런 감각에 익숙해지면 장벽 너머로 나아가 진짜 적을 맞닥뜨려도 그 상황을 모의 훈련이나 게임처럼 느껴 버리고 마니까.
유리 모하에:우리가 앞뒤에서 너희를 엄호해 줄 거고, 진짜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곧바로 시계 옆 S 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눌러.
다들 알겠지만 원래 이 버튼 세 번 신호는 실제 위급상황에서 연락처에 등록된 비상번호 쪽으로 연락을 보내는 시스템인데, 이 훈련실 범위에 한정해 그 비상신호가 관리 교수님들께 도달하도록 시스템이 변경되어 있어. 게다가 저기 스크린으로 모두 보고 있을 테니까. 알았지?
베아트리체 힐:네. (몸이 무거워진만큼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렌즈를 다시 고쳐 쓰고는 앞을 바라봤다.)
주의사항을 몇 가지 더 들은 후에야 훈련실 입실이 재가되었습니다.
네 사람이 모두 입실하고 마침내 문이 닫히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는 모래바람이 붑니다.
근래의 방독 마스크는 기능이 좋아 쓴 것 같지도 않게끔 호흡하게 해준다지만 이런 기후 속에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네요.
한 차례 먼지 폭풍이 가셨을 때 비로소 풍경이 보입니다.
‘재앙의 날’을 기점으로 인류가 유사 이래 이룩한 빛나는 문명은 전부 사토 속에 묻혔습니다.
첫 몇 년간은 식물들조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말라 죽어갔던 고로,
당대에 흔히들 ‘인류가 멸망하면 몇 년 안에 건물 벽면을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동물들이 활개를 치며……’ 라고 상상하던 광경조차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었다고 하죠.
가동을 중단한 원자력 발전소가 비상 전력마저 잃고 인간이 직조한 가장 큰 멸망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순간,
갓 개화한 각성자들이 그 위기를 막아 처음으로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찬란했던 문명에 바치는 추모비처럼 모래 속에 묻혀 쓸쓸히 늙어 가는 빌딩숲,
그리고 멀리 가장 거친 먹으로 그려낸 듯이 일렁이는 바다.
장엄한 자연의 비난을 처음 보는 1학년들은 말을 잃기 마련이죠.
이 광경에 익숙한 멘토들이 앞장서 홀로그램 패널을 띄웁니다.
요한 에를리히:이 공간은 카사블랑카 북동쪽 게이트 바깥 구역과 일치하는 구조로 생성된 거야. 설계자들은 각자 지도에서 목적지까지의 최단 경로를 표시해 봐.
베아트리체 힐:
항법
기준치: |
70/35/14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요한이 올바른 경로가 표시되었는지 재차 체크합니다.
요한 에를리히:음…… 아주 좋네. 한 번에 성공했어, 훌륭한걸.
베아트리체 힐:(낮게 숨을 내쉰다.) ......다행이네요.
요한 에를리히:이제 우린 이 경로를 믿고 목적지까지 움직이면서 하나 이상의 크리쳐 로봇을 파괴한다.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은 안전이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조언은 엄폐물과 환경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낡아 가는 건축물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접근했다가,
설계자의 경로 구현에 에너지를 실어 구현자가 한 방을 터뜨리는 것이 기초적인 전투 방식이라고 합니다.
넷은 가장 가까운 폐건물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유리는 에르드에게 단추 정도 크기의 정찰 드론을 건네줍니다.
유리 모하에:이걸 바깥으로 던질 건데, 너네가 할 거야. 서쪽으로 30m 정도 위치에 크리쳐 로봇이 있어. 설계자는 왼쪽 창문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에너지 흐름을 느껴. 구현자는 이 드론에 네 에너지를 실어서 던지는데, 설계자의 경로에 얹어서 실어 보낸다는 느낌으로 해야 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이런 드론 같은 유도장치 없이도 두 사람의 에너지 운용이 손쉽게 합쳐지는 거지.
자, 해 봐! 무서워하지 말고.
구현자는 정찰 드론을 던지면서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시도합니다.
에르드:(베아트리체가 표시해준 경로에 에너지를 싣는다…… 처음 해 보는 감각이라 영 쉽지는 않지만, 드론을 쥐고 힘껏 날린다.)
사격(권총)
기준치: |
80/40/16 |
굴림: |
3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베아트리체 힐:(창문 너머로 에너지의 흐름을 짚었다. ...할 수 있다.)
항법
기준치: |
70/35/14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전신의 감각이 단번에 확장되고, 시야가 환하게 트입니다.
공중에 투명하게 고여 있던 에너지가 희미한 보라색으로 일렁이며 물들고,
제멋대로 엉겼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에너지 흐름이 점차 정렬되어 미로 지도 같은 꼴을 이룹니다.
방향은 서쪽으로 30m, 베아트리체는 에너지의 흐름을 가지런히 한 가닥으로 이어 뽑아 경로를 설정합니다.
에르드가 그 경로 위에 제 힘을 실어 드론을 힘껏 날려 보냅니다.
미끄러지듯 경로를 타고 바깥을 떠가던 드론은 이내 적절한 길을 찾아 크리쳐 로봇에게로 향합니다.
유리 모하에:한 번에 성공했네! 좋아, 잘하고 있어!
매끄럽게 날아간 드론이 곧 네 사람의 홀로그램 패널에 30m 너머의 크리쳐 로봇을 비춥니다.
미끌거리는 피부, 구역질나는 주둥이 속에서 긴 송곳니 두 개가 번쩍이는 크리쳐가 그르릉거리고 있습니다.
몹시도 끔찍한 모습이네요. <이성> 판정 (1/1D3)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
55/27/11 |
굴림: |
64 |
판정결과: |
실패 |
2
베아트리체 힐:
SAN Roll
기준치: |
65/32/13 |
굴림: |
10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베아트리체 힐:(미리 본 모습이라 그런지 묵묵히 화면을 바라본다.)
순서는 민첩 수치에 따라 베아트리체-로봇-에르드...입니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의 부상은 가상 부상으로 처리되기에 실제 체력은 소진되지 않지만, 두 부위 이상 부상을 당할 경우 패널티 다이스 1개를 부여받습니다.
에르드:(곧바로 1층으로 뛰어내리려는 듯 창가에 손을 짚다가 뒤늦게 이것이 페어와 함께하는 전투라는 걸 자각했다. 멈칫하고는 뒤돌아 당신 바라본다.) 시야 공유가 가능하댔지? 얼마나 유지되지?
베아트리체 힐:(망설임없이 창가에 내짚어지는 손을 잠시 보다 응하듯 손을 내밀었다.) ...5분에서 10분 정도. ...뛰어내릴거야?
에르드:응, 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하니까. 마침 너와 내가 원/근거리로 나뉘어져 있으니 역할 분담도 적절하군. (내밀어진 손을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맞잡았다.) 인이어로 계속 상황 공유해. 먼저 공격해서 내 쪽으로 가깝게 몰아줘도 되고.
베아트리체 힐:(힘주어 꼭 맞잡았다가 놓아준다.) ... ...그렇게 할게. 모의라고는 해도 조심해.
에르드:너나. (짧게 말하곤 곧장 잔해물 위로 뛰어내렸다.)
베아트리체가 촘촘히 깔아둔 설계의 흐름에 크리쳐 로봇의 움직임이 잡힙니다.
당신이 유인하면 크리쳐 로봇은 곧바로 반응해 폐건물 쪽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기회를 노려 미래에서 읽혀지는 약점을 저격하면 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무사히 뛰어내린 모습을 보고 나서야 후, 작게 숨을 내쉬었다. 순간 앞의 미래. 눈을 감았다 떠올리며 이내 시야를 바로 한다. ...조금만 시선을 끌어도 저 크리쳐 로봇은 이쪽으로 달려올거야. ...그와 동시에 기동력을 줄이면서도 타격이 큰 부위. 조금 빗맞아도 부서지기 쉬운 곳이 있었어. 가장 큰 관절 한쪽을 노려 저격한다.)
(인이어 너머에 또박하게 전달한다.) ...에르드. 내가 저격으로 유인하면 곧장 이 폐건물로 달려올거야. 기동력을 늦춰 다가가기 쉽게 할게.
설계 Roll
기준치: |
70/35/14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창가에 기대어 위치를 잡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에너지를 담은 탄환이 굉음을 울리며 로봇의 한쪽 다리 관절을 정확히 꿰뚫는 순간 미래는 현실이 됩니다.
로봇이 즉시 반응해 공격이 가해진 방향으로 이동해오기 시작합니다.
교육용 크리쳐 로봇:(폐건물 근처에서 끼리릭거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베아트리체의 위치를 유추한 듯 건물을 향해 한쪽 팔을 들어올린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불길이 빔처럼 쏘아져나온다.)
사격 (중화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5 |
로봇이 반격을 시도하나 너무 먼 탓에 닿지 않습니다.
교육용 크리쳐 로봇:1. 에르드 2. 베아트리체
2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건물 주변을 오락가락하더니 조금 높게 쌓인 잔해물 위로 뛰어올라간다. 그곳에서 다시 불길을 쏘려 시도한다.)
사격 (중화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6 |
베아트리체 힐:
회피
기준치: |
60/30/12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불길을 피하려 했으나 눈 앞까지 치미는 밝은 빛에 순간 몸이 굳었다.)
앞날을 읽을 수는 있다지만 단숨에 덮쳐오는 불길 앞에서 재빠르게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크리쳐와 싸워보는 건 완전히 처음이니까요.
뜨거운 불길이 손쓸 새도 없이 복부를 덮쳐옵니다.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정말 아찔할 뻔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순간 복부에 손을 턱 얹는다. 대신 만져지는 딱딱한 방어구. ...경고음이 아니었다면 실제와 구분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편하게 죄여드는 방어구를 내려보다 다시 에르드의 상황을 살핀다.) ...미안, 중화기를 사용한다고 말하는 걸 잊었네.
에르드:(로봇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는 동안 가장 최적의 장소를 찾아 움직인다. 마침내 적당한 잔해물 뒤로 몸을 숨기며 무신경하게 묻는다.) 그걸 직접 몸으로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다만. 괜찮냐?
베아트리체 힐:...괜찮아. 조금 불편한 것 빼고는. (에르드가 제대로 몸을 숨겼으니 다행이다. 말 그대로 최적의 장소. )
다음을 부탁할게.
에르드:(대답 없이 권총을 장전한다. 시야가 공유되는 감각이란 처음이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위쪽에서 바라보는 크리쳐의 모습과 제 망막에 비치는 크리쳐의 모습이 혼재되어 일렁거린다. 감 잡기가 쉽지 않겠는데.)
(로봇의 시야가 닿지 않는 범위를 계산하다 잔해물 뒤에서 총을 들고 재빠르게 뛰쳐나간다. 이미 '보'았으므로, 석화를 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석화 Roll
기준치: |
80/40/16 |
굴림: |
3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척에 뒤돌았다가 완전히 굳어버린 크리쳐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연달아 격발한다.)
2
두 개의 시야가 공존하는 감각이 아직 익숙치 않았던 걸까요?
분명히 머리를 노렸지만 스치듯 지나가는 게 전부입니다.
교육용 크리쳐 로봇:(굳어진 몸이 느슨하게 풀리는 순간 역겨운 입을 쩍 벌린다. 에르드를 향해 송곳니가 순식간에 칼날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비무장
기준치: |
70/35/14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5 |
로봇이 반격을 시도하나, 굳어진 몸이 다 풀려나지 않아서인지 송곳니는 주춤거리다가 발치에도 가지 못하고 땅만을 긁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괜찮아? (공격이 그에게까지 가닿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다시 자세를 잡는다. 움직임이 느려진 사이에 다시금 창가에 몸을 고정하고 어깨에 장총을 기대어 저격한다. ....이쯤이면 송곳니를 부숴버릴 수 있을텐데.)
설계 Roll
기준치: |
70/35/14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처음 겪는 두려움 때문인지, 움직임이 불편해진 탓인지 몸이 굳어 총구 끝이 가늘게 떨린다. ...이래서 실전은 어떡하려고.)
처음 겪는 훈련의 두려움과 낯선 감각 때문일까요. 분명 크리쳐의 약점을 알 것 같은데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입니다. 크리쳐가 완전히 힘을 잃고 쓰러지는 미래가.
에르드:난 괜찮아. 그보다 너야말로. (애꿎은 데로 빗나가는 총알 본다.) 아까 불길이 좀 타격이 강했나 본데.
조심해, 저게 반격하려는 것 같으니!
교육용 크리쳐 로봇:
사격 (중화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2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피해: |
5 |
(입을 쩍 벌리더니 그곳에서도 비슷한 위력의 불길을 일직선으로 내뿜는다. 아플 지경으로 높은 열기다.)
크리쳐 반격 성공. 로봇이 쏜 불길이 반사적으로 들어올린 베아트리체의 팔을 뒤덮습니다.
얼마나 감각이 선명한지 절로 식은땀이 흐릅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다시금 죄어드는 방어구. 살갗이 타오르는 것 같은 감각처럼 교란되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들이킨다.)
(느릿하게 눈을 뜨고서야 겨우 입을 떼었다.) ..........하아. 미안해, 처음이라 너무 긴장했나봐. ...몸이 굳어서.
...난 괜찮으니까, 너도 조심해.
두 부위 부상으로 다음 판정부터 패널티 다이스 1개가 추가됩니다.
에르드:처음부터 잘하는 게 이상한 거지. 이제 시야 공유도 얼마 안 가면 풀리겠군. 아무튼 신경쓰지 마. (딱히 남들보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이나 자만심은 없었으므로, 덤덤하게 답한다.)
교육용 크리쳐 로봇:(베아트리체에게 공격이 직격한 듯하자 또다른 적-에르드-을 향해 고개 돌린다. 날쌘 몸놀림으로 뛰어와 입을 벌리고 물어뜯으려 한다.)
비무장
기준치: |
70/35/14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피해: |
3 |
에르드:
석화 Roll
기준치: |
80/40/16 |
굴림: |
6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에르드가 급하게 크리쳐를 석화시키려 하나 한 발 늦었습니다.
크리쳐가 깜짝 놀랄 만큼 재빠른 움직임으로 다리를 공격합니다.
에르드:(다리 쪽 방어구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알림음을 들으며 인상 찡그린다.) 이 새끼가.
석화 Roll
기준치: |
80/40/16 |
굴림: |
7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8
어디 역겨운 침을 묻혀? (금빛 눈이 번쩍 빛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크리쳐를 굳혀버리고, 어느틈에 꺼내든 단검으로 머리를 단번에 찍어누른다. 칼날이 머리를 뚫고 턱으로 나올 지경으로 강한 힘이었다.)
무언가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총구 아닌 칼날이었습니다.
에르드가 단번에 칼날을 꽂아넣자 크리쳐가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더니 그대로 힘을 잃고 쓰러집니다.
베아트리체 힐:(아무리 미리 보아도 눈 앞에서 직접 펼쳐지는 풍경은 또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쓰러진 크리처와 굳건히 선 에르드를 번갈아 보았다. ... ...보았던 대로 잘 흘러갔으니 된걸까.) ...고생 많았어, 에르드. 실제로 보니... 역시나 멋있었어.
에르드:(혀를 차며 크리쳐의 머리에서 제 단검을 빼낸다. 찐득하게 흐르는 점액을 보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 너도. 둘 중 하나가 행동불능이 되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군.
유리 모하에:고생 많았다, 후배들! 고전하길래 도와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멋지게 잘 해냈잖아?
너희, 최초 동조율이 60% 이상으로 계산됐어. 이거 진짜 높은 수치라고. 합 자체도 아주 좋던데? 첫 전투라 어색해서 그렇지.
반파된 크리쳐를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4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저것은 어떤 길짐승도, 어떤 날짐승도 닮지 않았습니다.
……방사능 탓에 변이된 동식물이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베아트리체 힐:(......아무리 봐도 역시 기묘하게 생겼어. 책 그 어디에도 저런 모습의 짐승은 없었는데.)
(유리의 말에 끄덕이다가 돌아본다.) ...역시 크리처... 조금 이상하네요. 어디에도 없는 생김새일텐데.
유리 모하에:(쓰러진 크리쳐의 시체를 잠시 시야에 담는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근데, 크리쳐들이란 게 절반은 저래. 동식물과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지만 도무지 뭐 어쩌다 저렇게 생겨먹은 건지 모르겠는 놈들도 있거든.
원형이 뭔진 나도 모르겠다~ 으, 징그러.
베아트리체 힐:...그렇군요. (물끄러미 바라보며 방어구를 매만진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방어구를 매만지던 때,
동쪽 모래 폭풍 너머로 멀리 거대하게 솟은 첨탑이 어른거립니다.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상단부에 발린 청록색 염료가 누렇게 바랬고, 아름다운 문양이 둘러쳐졌습니다.
침묵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유리가 두 사람을 돌아봅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인데, 유리는 다른 것을 의식하는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 (...모스크? 끊어진 말에 고개가 기울었다가 돌아온다.) ...갈까? (에르드를 한번 돌아보고는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에르드:그래. 빨리 이 빌어먹을 점액도 닦아내고 싶고. (어차피 VR이니 렌즈를 빼면 사라지긴 하겠다만, 여기에선 질감이나 촉감이 너무 생생해서 진짜 같다.)
첫 가상 훈련이 종료되고 학교는 잠시간 그 화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저마다 제 임시 페어와의 동조율이 어땠는지, 자신이 크리쳐 로봇을 얼마나 멋지게 부수었는지 떠들어 댔죠.
저런 흥분도 반복된 훈련을 거치고 나면 결국 사그라든다는 것을 아는 멘토들만 쓴웃음을 짓습니다.
이윽고 토요일, 학생들은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방금 잠에서 깬 참입니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베아트리체 힐:(느긋하게 일어나 협탁 위에 놓아둔 읽다 만 책을 펼쳐들었다.)
....차도 끓일까. (말만 하고는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갑자기 방문을 열고 동급생이 굴러들어오듯 뛰어옵니다. 헉헉거리던 그가 외칩니다.
갑작스레 들어와 ‘너는 아니지’ 하고 묻는다고 해도, 뭐가 아니냐는 말인가요?
베아트리체 힐:(화들짝. 놀랐음에도 겉으로는 티가 안나니 참 평화로워보였다...) ...응? 무슨 이야기야? 내가 아니냐니.
동급생: 지금
인자 다 뒤집어졌어! 아직 안 봤어?!
아무래도 서버에 접속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인자미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이다가 스마트워치를 톡톡 두드려본다. ...얼마 만에 들어가보는거지? 같은 생각도 잠시.)
베아트리체가 스마트워치를 통해 인자미나에 접속하면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이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이게 무슨 일이야? (의아하게 물으면서도 1위를 차지한 스와콥문트를 검색해본다.)
스와콥문트를 검색하자 가장 상단의 게시글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글의 요지는 ‘정부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사실 스와콥문트에는 뭔가 조작된 구석이 있다’는 것 같네요.
베아트리체 힐:(영상을 보다 말고 댓글들까지 쭉 읽어간다.) ...지워지고도 글을 네 번이나 썼다...
...이것 때문에 지금 시끄러운거구나?
동급생: 나 새벽부터 잠 안와서 계속 새로고침 하고 있었는데 야, 글이 진짜 네 번을 올라왔다니까? 그러다 세 번째 글 삭제됐을 때 인자미나 서버가 잠깐 터졌거든? 그 뒤로 저 네번째 글이 오늘 동튼 직후에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저 글은 삭제가 안 돼.
코딩 동아리 애들이 그러는데 사이트 자체를 해킹해서 글 작성한 아이디를 특수등급으로 빼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 관리자 권한이 있어도 글 삭제가 안 되게.
그러고선 주변 눈치를 본 동급생이 귀에 속삭입니다.
동급생: 왜, 이런 반동분자 같은 글은 애초에 AI가 맥락을 검열해서 작성 자체가 안 되잖아. 글쓴 애도 시스템을 뚫을 줄 아는 녀석이 아니냐는 거지. 서버나 해킹, 계산 관련 이능력 가진 애들 아침부터 다 불려갔어.
그제야 기숙사가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게 느껴집니다.
정부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죠.
베아트리체 힐:...큰일이네. ...여기 보츠와나 망명 정부나 모로코 장벽은... 뭔지 알아?
동급생: 모로코 장벽은 아마 사막을 막아주는 모로코 주변 벽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근데 보츠와나 망명 정부는 진짜 처음 들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간 것도 그래서겠지.
너 능력 미래예지였지? 혹시나 이 일도 알고 있었는데 묵인한 거 아니냐고 뭐라고 할지도 몰라. 절대 몰랐다고 잡아떼. 알겠지?
베아트리체 힐:(가만 웃어보이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응, 그럴게. 걱정해줘서 고마워.
...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이 글.
동급생: 이 동영상이 진짠지 가짠지는 모르겠지만, 스와콥문트 관련된 거 죄다 금지어로 넣어놨을 정도면 뭐가 있긴 한 거 아니야?
으! 근데 난 파헤쳐볼 용기는 안 난다. 괜히 걸렸다가 퇴학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베아트리체 힐:...음, 역시 그렇지? ...그래도 역시 위험하니까 밖에서는 티 안내고 조용히 하는 편이 좋겠다. (동의한다는 듯한 표정과 끄덕임 뒤로 ...좀 더 찾아볼 필요는 있겠다, 고 혼자 생각했다.)
...너도 조심해. 어떻게든 엮으려면 다 엮일거야. (토닥여주고는 책을 접어 얹어둔다.)
동급생: 그래. 베아트리체 너도 조심 또 조심하고! 나중에 보자. (다른 방에도 가보려는 듯 인사하고 나간다.)
이런 상황에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겠으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기숙사 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물론, 아까 본 글에 개인적인 호기심도 피어오릅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아도 되고, 공부를 한다면 과제용 책을 빌려 자습실로 가도 좋겠네요.
베아트리체 힐:(책 표지를 빤히 내려보다가 이내 끄덕인다. 우선 도서관에 가보자. 자료도 찾고, 과제도 해야 하고... 거기엔 다른 애들도 있을테니까.)
(간단히 필기구를 챙겨들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고요한 도서관. 각성자 사관학교의 도서관은 카사블랑카에서도 독보적으로 장서 수가 많아 유명하죠.
다가온 중간고사 때문에 대부분 공부에 몰입해 있지만, 서가와 서가 사이에서 두 학생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니까, 몬로비아에서 시신 발견됐다는 거 구라 아니라니까. 아놀드 박사가 우리 사촌언니 담당교수였잖아.”
아무래도 아까 그 게시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대인 기능으로 직접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내용을 엿들어도 됩니다.
베아트리체 힐:(책을 찾는 척하면서 슬쩍... 내용을 들어본다.)
베아트리체 힐: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베아트리체 힐:(....안 들리네.... 어쩔 수 없지. 슬쩍 끼어보자.... 꾸벅 인사하면서 조용히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말재주
기준치: |
35/17/7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별로 친하지 않은 선배들이라서인지, 베아트리체를 경계하는 것 같네요.
베아트리체 힐:(처음 보는 선배들이라 약간 딱딱하게 굳었다... 최대한 무해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줄인다.) 방금 하시던 말씀이 궁금해서요.
매혹
기준치: |
25/12/5 |
굴림: |
1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천사처럼 착하고 무해한 미소에 선배들의 경계가 눈 녹듯 녹아내립니다.
"아까 하던 얘기라면 아놀드 박사에 관한 내용 말이야? 뭐,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화학자였던 아놀드 박사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낸 공로가 있어 스와콥문트 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이후 제자에게 본인의 연구자료를 전부 넘기고 조용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최근에는 SNS를 통해 요리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는 근황을 업데이트한 바 있습니다.
연구실 제자들 중 두어 사람은 아놀드 박사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화상이나 음성통화도 이루어졌는데, 학생의 사촌언니 말로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하네요.
연구제자와 아놀드 박사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 당연히 알아야 하는 주제에 대해 의례적인 답변이 돌아오거나, 연구주제에 관해 질문해도 정확한 대답을 내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화상 통화도, 음성 통화도 모두 조작이 가능한 시대. AI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죠.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나요?
베아트리체 힐:...얘기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다시금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을 흔들며 슬쩍 빠져나와서는 책장을 쭉 둘러본다. 과제용 책들을 꺼내들고는 어제 본 모스크에 관련된 책은 있는지 살펴본다.)
:모스크에 관한 책을 찾아보아도 특이한 건 없습니다. 상식 수준에서 기술한 도서가 절대다수입니다.
명색이 사관학교 도서관인데 이렇게까지 없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베아트리체 힐:....꼭 일부러 들여놓지 않은 것처럼 안 보이네. (조금 실망한 듯 풀이 죽은 듯 하다가도 손에 가득 들린 책들을 보고는 다시금 기운을 차렸다. ...자습실로 가볼까.)
자습실로 들어서려던 베아트리체의 귀에 복도 끝 학생회실에서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요한 에를리히:입 좀 다물어, 밖에 다 들려!
……저 목소리는 아무래도 유리와 요한 같네요. 말리는 쪽이 요한이고요.
베아트리체 힐:...? (잠시 멈췄던 걸음을 돌려 학생회실 쪽으로 향한다.)
(싸우시는 건 아니겠지...? 슬쩍 귀를 기울여본다.)
두 사람이 싸우는 내용이 차라리 대놓고 들리면 모르겠는데,
가까이 가 보니 방음설계가 되어 있는지 대강 서로 탓하는 것만 얼핏 알 수 있고 정확한 내용은 도통 파악이 안 됩니다.
베아트리체 힐:
듣기
기준치: |
70/35/14 |
굴림: |
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유리 모하에:애들은 모르잖아! 우리가
모니터링한다는 거!
그때 유리가 갑작스레 학생회실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던 유리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성큼성큼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열린 문 안에서 한숨을 쉬던 요한이 잠시 후 학생회실을 나오다 당신과 딱 마주칩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죄송해요. 지나가던 중에 목소리가 들려서. (급하게 고개를 숙인다.)
베아트리체 힐:....음, 그게. ..........네. (끄덕끄덕)
싸우시는 것 같던데... 괜찮으세요?
요한 에를리히:('내가 늙는다' 표정으로 한숨 푹 쉬며 이마 짚는다.) 그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이거. 유리가 두고 갔다. 내가 가면 또 화낼 테니 네가 좀 전해줘. 아마 학관 뒤뜰 정원에 있을 테니. (스마트워치 하나를 당신에게 내밀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이상한 점은 그게 아닙니다.
현대에 이르러 방수 기능까지 완벽해진 스마트워치는 정말 특이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풀지 않고 늘 착용하는 기기죠.
베아트리체 힐:네, 그럴게요. (...왜 이걸 풀고 가셨을까. 의문도 잠시 뒤로하고 금세 받아들었다.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꾸벅...) ...음, 그 엿듣게 된 건 죄송해요.
요한 에를리히:됐어. 목소리 못 줄이고 싸운 우리 탓도 있으니까. (가보란 듯 손 휘휘 내저었다.)
베아트리체 힐:..그럼 실례했습니다. (작게 끄덕이고는 곧장 학관 뒤뜰 정원으로 향한다)
요한의 예상대로 유리는 학교 뒤뜰에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흡연 구역에.
대기오염 탓에 담배는 굉장히 규제가 심한 기호품이죠.
한 갑에 네 시간어치 시급을 털어 넣어야 하는 그것을 유일하게 좀 저렴히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각성자들입니다.
세상이 한 차례 멸망했어도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담배와 초콜릿인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을 하고는 스마트워치를 내민다.) ...유리 선배님? 이걸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아서요.
유리 모하에:(인기척이 나자 깜짝 놀라며 담배를 눌러 끈다. 옷깃을 탈탈 털어 냄새를 빼고서야 스마트워치를 받아들고 멀찍이 떨어졌다.) 어우, 미안. 냄새나지.
그나저나 내가 이걸 놓고 갔었네. …… 야, 요한 많이 화났냐?
베아트리체 힐:(멀찍이 떨어지는 유리를 본다..) ...아, 아니에요. 제가 방해를 한 건데요.
...음. 괜찮으신 것 같았어요. 이것도 챙겨주셨으니까. (요한의 '내가 늙는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혹시 뭐 때문에 싸우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유리 모하에:그러냐. 하긴 내가 일방적으로 화내고 나오긴 했지.
(주머니에 양손 꽂은 채로 잠시 먼 곳을 바라보다 당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아까 도서관에서 선배들이랑 아놀드 박사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베아트리체 힐:.......네. (끄덕이던 고개가 우뚝 멈춘다.)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유리는 호쾌한 성격답지 않게 한참이나 숙고합니다.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쉿’ 제스쳐를 취한 그는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가리키고선 푸는 시늉을 해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갸우뚱하면서도 말은 잘 듣는다. 착실히 시계를 풀어낸다.)
베아트리체가 지시대로 시계를 풀자, 유리가 옆면의 S버튼을 묘한 박자에 맞추어 여러 번 누릅니다.
갑작스레 홀로그램 패널이 켜지더니 초록색 안내창을 내보냅니다.
베아트리체 힐:...이게 무슨. (방금 들었던 모니터링이 이건가? 패널을 한참 들여다본다.) ... ...이게 모니터링인가요?
유리 모하에:이 학교엔 듣는 귀가 많아. …그런 주제는 조심하는 게 좋을걸.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워치가 학생들의 대화를 수집하고 있었나 봅니다.
유리가 말하던 '모니터링'도 정황상 이것일 테고요.
베아트리체 힐:....이거면 전교생의 대화를 다 들을 수 있겠네요. (의문이 끊이지 않는다.) ...대체 왜?
유리 모하에:그래. 네 말대로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도청되고 그 기록은 학생회실 서버에 쌓이지. 학생회 소속 중에서도 임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지만, 대화 중 특이한 단어가 수집되면 곧장 정부로 보고가 들어가.
이유야 뻔하지 않겠어? 정부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따르지 않는 '불온한' 학생들을 걸러내기 위해서겠지. 나는 이 수집에 반대하지만 당장 학생회장으로서 이런 도청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
이걸 말해 주는 건 아직 학교 규정을 잘 모르는 네가 혹여나 검열 기준에 어긋나는 대화에 끼어 큰일이라도 당할까 봐 걱정돼서야. 고작 1학년밖에 안 됐잖아? 음성 수집 기능을 잠시 꺼 두는 건 그것대로 기록이 남지만, 다행히 이건 내가 지울 수 있어. 앞으로는 조심해라.
베아트리체 힐:...불온한 학생들을 걸러내기 위해서.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인자미나에 올라온 그 글도 그런 이유로 계속 내려갔던 거겠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유리 모하에:(주먹을 불끈 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스러운' 말 몇 마디 지껄였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게 옳은 일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난 오래 전에 이미 한 번 친구를 잃었어.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학생회장이 됐지. 멘토 자리를 자원한 것도 그래서야.
유리는 몸을 바르게 펴고 베아트리체를 응시합니다.
어린 나이에 각성했고, 부모는 국가기관 연구소에서 일하는 ‘출신 성분 확실한’ 가정의 외동딸.
별달리 억압당한 가족도,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재산도 없죠.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1학년부터 학생회에 있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설파하기에 그의 삶은 다소 유복합니다. 일견 기만으로도 보일 수 있겠습니다.
유리 모하에:……간다. 음성인식 다시 켜려면 S버튼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다시 길게 세 번 누르면 돼. 오늘 기록은 내가 한꺼번에 지워줄 테니 자유를 좀 더 누리든가.
뭐라고 더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유리는 고개를 내젓고 베아트리체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후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감사해요. (고개를 짧게 숙였다가 떠나는 등을 바라본다. 버튼에 손을 가져가다 말고 멈췄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아버린 듯 불편한 감각. 이제는 모든 언동을, 심지어는 숨을 쉬는 것 마저 인식하고 검열해야만 해야하나. 나지막한 한숨이 흐른다. 스마트 워치는 결국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에르드:(생각에 잠긴 듯 딱딱하게 굳은 낯이다가 당신을 발견하곤 눈을 끔벅인다.) …… 음?
베아트리체 힐:(불편한 주머니를 만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 안녕. 오랜만이지? (부러 가볍게 웃어보인다.) ...표정이 안 좋아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에르드:별일은 아냐. (무뚝뚝한 성격답게 짧게 일축해버린다.) 넌 어쩐 일로? 여기…… (주변 둘러본다. 그도 작정하려 이곳에 온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발길이 닿은 듯.) 흡연 구역인데.
베아트리체 힐:......아.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건 아니야. ...절대.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잠시 일이 있어서 유리 선배님을 찾다 보니.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올려본다.) ...음, 계속 걸을 거라면 정원으로 갈래? 그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걷다 보면 어디 부딪힐지도 모르잖아. (혼자 있으면 괜히 답답하기만 할 것 같아 산책 계획에 에르드를 슬쩍 끼운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아, 혹시 담배 피우려고 한 거면 자리 비켜줄게.
에르드:아니, 뭐라고 하려던 건 아냐. 어차피 성인이고 네가 뭘 하든 내가 신경쓸 바는 아니지. (그러다 고개 젓는다.) 난 손도 안 대 봤어. 몸에 좋은 물건은 아니잖아.
……. (정원으로 가자는 제안에 잠깐 고민하다 고개 끄덕인다.)
베아트리체 힐:...그것도 그렇구나. (뒤늦게 왜 이렇게까지 격하게 부정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갸우뚱. 의문만 남은 채 가만 웃었다.) .왠지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종종, 옆으로 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긴다. 느긋하게 정원을 훑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깊게 생각할 만한 일이 있는 거구나?
...음, 인자미나에 올라왔던 글 때문에?
에르드:나에 대해 잘 알아? 우리 그날 처음 봤던 거 아니었나. (자기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고개 살짝 갸우뚱하며 공원으로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인자미나란 단어가 나오자 어깨가 움찔한다.) 어떻게 알았어?
(잠깐의 침묵. 낮은 목소리로 중얼였다.) …… 가족 같은 사람이 스와콥문트에 가 있어서.
베아트리체 힐:...아, 몰랐구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유명하거든. 쉽게 다가가면 안된다, 고 하는 소문 덕에. (흐리게 미소 지으며 끄덕인다.) 그때 임시 훈련 때에 보고 생각했는데, 깔끔한 걸 좋아하지? 그런 사람은 왠지 담배에는 손대지 않을 것 같아서.
... ...그래서였구나. ...그 일 때문에 학교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니 너도 그런걸까 싶었거든.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에르드의 옆 얼굴로 향한다.) ......많이 걱정되겠다. 어떤 분이셔?
에르드:그런 소문이 돈단 말이야? (베아트리체의 말을 곱씹는다.) 실제로도 사람들이랑 굳이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으니 나로선 반가운 소문이군.
관찰력이 좋네. 잠깐 합을 맞췄을 뿐인데 그런 것까지 알아채고. (장갑 낀 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날 부모처럼 키워준 사람이야. 보육원 원장이었는데 교육 관련 업적을 세웠댔나…… 그래서 스와콥문트로 가게 됐었지. 훌륭한 사람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입술 달싹인다.) 연락은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원래는 매해 장갑을 선물해주곤 했는데 거기로 간 이후로는 갑자기 모자를 선물해줘.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만 인자 글을 보니까 괜히 의구심이 들더군.
베아트리체 힐:...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비를 거는 선배들을 엄청난 힘으로 때려눕혔다, 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진실인지 거짓인지와는 별개로 그 덕에 에르드에게 더한 호기심이 생겼으니.)
...관찰하는 걸 좋아해서. (작게 웃었다가 장갑에 싸인 에르드의 손에 시선을 둔다.) 장갑에서 모자로...? ...매해 선물하시는 거라면 이유가 있는 물건 같은데, 왜 모자로 바뀌었을까. (의아하다는 듯이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아, 도서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에르드:(애매모호한 표정이 된다.) 선배 놈들이 괜한 시비를 건 것도 맞고 내가 때린 것도 맞긴 한데…… 그냥 그놈들이 능력으로 덤비기 전에 내가 먼저 석화를 걸고 주먹 한 대씩 날려줬을 뿐이야.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만)
왜인지 물어봤더니 나한테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 있었다더군. 날 위해 선물해준 건데 괜히 더 말 얹을 수도 없어서 그냥 일단락하긴 했다만. 도서관에서는 뭘 들었는데?
베아트리체 힐:...그렇게 된 이야기였구나. 필요한 때에 맞설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비로소 오랜 난제를 해결한 학자처럼 눈을 반짝인다.) ...아, 그럼. 왜 사람들과는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거야? (다시 눈 깜빡.)
....음, 그래. (대화를 떠올리듯 시선을 굴린다.) 스와콥문트로 간 박사의 이야기. 연구실 제자들과 간간히 연락은 되는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주제에 대해 의례적인 답변이 돌아오거나, 연구 주제에 관해 질문해도 정확한 대답을 내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예를 들자면, 마치 AI처럼. (괜한 이야기로 더 걱정을 얹어주게 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에르드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에르드:(하나 답해줬더니 곧바로 질문 하나가 추가된다. 깔끔한 걸 좋아한다는 점도 그렇고 어째 제가 털어놓고 싶지 않은 부분들만 콕콕 짚어 물어보는 것 같지? 그러나 눈앞의 자그마한 이에게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게 더 문제 같지만.) 네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까칠하게 되물어 답을 끊는다.)
그 글에 나와있던 아놀드 박산가 뭔가 말이지? (AI라는 단어가 나오자 낯에 그늘이 진다. 나쁜 상상은 그림자보다 빠르게 발을 뻗어가고, 그간 쌓여온 사소한 의문과 의심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살을 붙여 연결되어간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당최 뭐가 뭔지 모르겠군.
베아트리체 힐:...아,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면 미안해. 항상 주의를 들었는데도 잘 안 고쳐지네. (악의 없이 오로지 호기심으로만 시작되는 질문은 쉬이 끝나는 법이 없었다. 이를 걱정한 부모님은 늘 그에게 주의를 주곤 했지만 타고난 성정이 쉽게 고쳐지던가.) ...그저 네가 궁금해서.
맞아, 아놀드 박사님. (시선은 여전히 그늘진 낯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미안,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는데 괜히 더 얹기만 해서.
..AI라는 건 내 생각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마. (어깨를 두드려주려고 뻗은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그때, 손 잡을 때에도 망설이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음, 싫어하려나. 어정쩡하게 멈춰있던 손을 슬그머니 가져간다.)
에르드:…… 뭐, 일부러 그런 거 아님 됐어. (곧바로 사과하는 모습에 까칠하던 반응도 금세 누그러진다. 그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냉담하고 무심했지만,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이상인지 조금이나마 온화해지는지로 갈리곤 했다. 저에게 적대적으로 굴지 않는 이에게까지 성질을 부릴 만큼 못돼먹은 인성은 아니었다.)
또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아놀드 박사한테만 해당되는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리사한테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거나. (가족 같다던 이의 이름인 듯하다.) 일단 돌아가면 편지를 써봐야겠어. (어깨를 향하다 멈칫하는 손을 보았으나 모른척 한다. 스킨십을 환영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굳이 무안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갑자기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에 긴 진동이 느껴집니다.
서사의 판면을 강제로 집어 벌리고 삽입되는 개정 기호처럼 홀로그램 패널은 동의도 없이 방송 창을 띄웠습니다.
화면 너머에는 각성자사관학교의 학장이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학장: 사안이 중대해 전체방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익명 커뮤니티 ‘인자미나’에 게시된 글의 작성 IP가 교내인 것으로 추적되었습니다. 교수진은 불온한 선동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우리 학생 혹은 교원의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에 지극한 유감을 표합니다.
학생 여러분께선 헛된 소문에 경도되지 말고 우리 빛나는 오십 년 사학을 지킬 수 있도록 학업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각성자사관학교는 당 사안을 좌시하지 않고 엄중히…….
정말 헛된 소문이라면 이렇게 대응하는 것보다야 무시하는 것이 일을 덜 키우는 방식일 테죠.
행간에서 윗선의 압력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는 연설이었습니다.
지리한 말들이 이어진 후 학장은 벌떡 일어서 허공을 응시합니다.
화면에는 이제 학장의 얼굴 대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국기가 송출되고 있습니다.
국가 <신이여, 아프리카를 굽어보소서>가 작사될 때에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조사 하나까지 좀 더 서로의 종교에 알맞은 색깔을 담으려 다투는 광경을 보고,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에서 건너온 초기 공화국 시민들은 퍽 당황했다고들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로 아무튼 아프리카의 종교라고 하면 젬베를 두드리며 토착신을 찾는 종류였지 지극히 ‘문명화된’ 메이저 종교를 믿을 리는 없었으니까요.
이 무례하고 순진한 오해를 지닌 산부의 산도를 열고 새로운 공화국이 마침내 세상에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정부는 좀 예민하다 싶을 만큼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출신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재난 때문에 섞여 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교정에, 회사에, 길거리에, 카페에, 펍에 국가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어디에나 설치된 공화국 국기를 향해 경례해야 합니다.
나라 어디서나 국기는 휘날리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땐 하늘길 시계가 국가를 자동 인식하여 홀로그램 패널로 국기 이미지를 띄워 줍니다.
검은 상단은 여러 국가를 뿌리로 둔 시민들이 화합되어야 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대표색상 역시 모든 색을 섞은 검은색이라는 의미이고,
흰 하단은 이 땅이 흐트러지기 전부터 오래 자리를 지켜 온 아프리카 대륙의 사막을 오염 이전으로 돌려놓겠다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가운데 노란 원이 태양을, 태양 안의 붉은 별 일곱 개가 일곱 도시를 나타냅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어린이들은 국부로 추숭되는 초대 대통령의 위인전을 읽으며 자라나고,
‘모든 사람은 동일한 권리를 타고난다’고 교육받으며,
험지를 헤치고 인간의 위대한 문명을 다시 이룩한 조국에 충성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듣습니다.
학교는 고요하여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적은 돈으로 빈 방을 모두 채우라는 요구에 초를 사와 불을 밝혔다던 처녀의 일화처럼 이 광막한 공간에는 오로지 경건하고 엄숙한 국가 선율만이 가득합니다.
바람이 널리 드나들 수 있도록 지은 1층 회랑은 카사블랑카의 자부심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제 그런 통기성 좋은 건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진 시대였기 때문이죠.
때로 함신은 굳건한 도시 장벽 너머로부터 날아와 외벽을 덮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비공식적 별명으로 ‘제1도시’ 라는 명칭을 가진 카사블랑카의 장벽만은, 공화국 시민들을 불편케 하는 모든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지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축복 같은 적도편동풍이 뺨을 어루만지든 어쩌든, 학생들에게는 불행했던 중간고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 1층 회랑을 지나 2층에 도서관이 있습니다.
<전략문화와 전쟁> 중간고사 시험 대체 조별 과제 에세이는 첫 가상 훈련 때 맺어졌던 페어끼리 함께 작성하는 것이 규칙이죠.
…1학년이 당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제네요!
본래 <전략문화와 전쟁> 강의 평가는 늘 심한 호불호 영역에 놓여 있었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머리를 너무 쥐어뜯은 탓에 그걸 다 치워야 하는 근로장학생들의 스트레스도 갈수록 쌓여 갔다나요.
베아트리체와 에르드는 도서관 구석 창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여러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중입니다.
긴긴 고난 끝에 레포트는 결론 부분에 다다랐습니다.
아마도 베아트리체가 거의 다 썼을 것 같습니다만.
에르드:(멍하니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종이를 바라본다. 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 같다.) 난 말이지?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에세이에 그냥 네 이름만 써라. 난 한 게 아무것도 없어.
베아트리체 힐:...그래도 자료 찾아보는 건 재미있지 않았어?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 같잖아. (결론 부분을 마무리 지으면서 레포트와 넋이 나간듯한 에르드를 번갈아본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오른다.)
....음, 그래도 같이 한 거니까. 네가 색다른 견해를 제시해줘서 좋았는데. 정리하는 것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레포트도, 자료도. 에르드의 손에 의해 반듯하게 정리되어 착착 쌓인 자료들을 본다. 가장 앞 장에 에르드와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둔다.)
에르드:보물찾기? 글씨가 눈에 안 들어와서 내용이 뭐가 뭔지 이해하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고. 하, 나처럼 머리 나쁜 애한테 이런 과제는 진짜로 최악이다 최악.
(보기 좋게 정리해주었을 뿐 그 자료들에서 중요한 부분을 골라 에세이에 쓸 만큼 다듬은 건 베아트리체의 몫이었을 터다.) 각성자면 능력만 잘 다루면 되는 거지 뭐하러 이런 시험까지 치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제 이름 꿋꿋히 적히는 걸 보며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난 다른 시험도 실기 말고는 완전 망쳤어. 아마 거의 빵점일걸?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얼굴을 마주하거나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니 에르드의 얼음 같던 경계도 천천히 녹아내려갔다. 꼭 필요한 말만 냉정하게 뱉던 이전과 달리 제법 일상적인 푸념도 늘어놓게 되었다.)
베아트리체 힐:....으음, 내가 생각하기엔 분명히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나 오타는 없는지 다시 천천히 눈으로 훑기 시작한다. 모든 글자들이 흥미롭다는 듯, 쓰고, 고치며 보고 또 본 글임에도 눈이 반짝인다.)
(베아트리체라면 분명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과제 였을테지만, 에르드와 함께 작성할 수 있어서 였을까.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과제를 수행하는 내내 미묘하게 표정이 밝았다. 그마저도 무표정한 얼굴이 대부분이었으니 묘하게 분위기가 풀어진 정도였을테지만.)
...그래도 실기는 잘 봤다니 다행이야. (그제야 글에서 눈을 떼고 에르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던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에르드를 바라보는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로만. ) ...그럴 줄 알았으면 다른 과제도 같이 공부하자고 할걸 그랬네. ...난 아직 실기가 어려워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에르드: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가 없단 말도 있잖냐. (어디에) 넌 진짜로 이런 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네.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학자 같은 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반짝이는 눈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다들 어려운 과제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데 혼자 표정이 은근히 밝은 것도 그렇고. 이건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겠지만 에르드는 그다지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손 안에서 하릴없이 펜을 돌리기나 한다.) 너한테도 부족한 부분이 있어? 너는 능력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앞날을 보는 거니 어렵잖게 잘해낼 것 같은데.
베아트리체 힐:......그럼 난 몸이 안 좋으니 머리가 대신 고생해야겠네. (농담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검토를 마친다.) ...그랬으려나, 그래도 이쪽이 더 재미있어. 각성자가 되었으니 이렇게 너도 만날 수 있었고. (바람에 흘러가듯 가볍게 말을 마치고는 손 안에서 돌아가는 펜을 바라본다.)
...으음. 보는 것까지는 좋은데, 생각한 때에 움직이지 못하면 쓸모가 없으니까. 미리 알아버려서 좋지 않은 일도 있고. 저번처럼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리면 안되잖아. (들고 있던 펜을 가지런히 내려둔다.)
에르드:너 같은 경우엔 머리가 좋으니 몸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 라고 해야지. (픽 웃었다. 그의 능력처럼 시종일관 돌처럼 딱딱하기만 한 낯이었으나 웃는 법을 아주 모르는 남자는 아니었는지라.) 난 딱히 네게 도움되는 파트너는 아닌 것 같은데? 보통은 나랑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데, 너도 참 특이하다니까. (저와 달리 베아트리체는 온화한 성격이라 인기도 많을 듯한데. 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의아하기만 하다.)
하긴. 미래를 알아도 몸이 민첩하게 따라주지 않으면 쉽지 않긴 하겠지. 운동은 얼마나 하고 있어? 신체 훈련도 최소한으로는 해두는 게 좋아.
베아트리체 힐:...... (에르드의 웃는 얼굴에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닌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걸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능력으로 미리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미리 보았다면, 오늘 하루 종일 그의 얼굴 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 일까, 이유를 떠올리기도 전에 가슴 깊숙이 박혔다. 이어지는 대답은 조그맣고 아주 느리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괜히 시선을 책상에 고정하며 애꿎은 펜만 이리저리 굴린다.) .......음,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닌데. 혼자서는 재미가 없어서. 맞게 하고 있는지도 헷갈리고.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나? 횡설수설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온전한 지구에 불었을 봄바람이 머릿 속을 헤집어 놓는다.)
에르드:……? (아까와 달리 급격히 작아지는 목소리에 의아하게 고개 기울인다. 갑자기 왜 그러지. 체하기라도 했나?) 하긴, 나야 몸 쓰는 게 익숙하지만 너는 주로 책상 앞에 앉아있을 것 같으니까. 내가 공부를 어려워하는 것처럼 안 하던 운동을 하려면 재미없겠지. 자세가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까? 그래도 이쪽엔 나름 지식이 있어서 봐줄 수 있어.
베아트리체 힐:........응? 아, 응. ...그래주면 정말 고마울거야.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베아트리체의 손에 데굴데굴,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펜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다. 저도 테이블 아래로 숨어버리고 싶어진다. ...왜지, 얼굴을 못 보겠어.)
에르드:그래. 그럼 일단은 시험을 끝내고서…… (고개까지 떨어지자 이제는 조금 걱정되기 시작한다.) 갑자기 왜 그래?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온다.) 어디 아파?
베아트리체 힐:.....아, 아니야. 괜찮아, 정말. 그냥 펜이 떨어져서...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내저었다. 다가오는 발걸음만큼 심장이 크게 뛴다. 주변의 소리가 멀고, 그의 발자국과 제 심장 소리만 남았다.)
에르드:진짜로? 안 좋으면 보건실 데려다줄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펜을 주워 당신에게 건넨다.)
베아트리체 힐:....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아무것도 정말로... (횡설수설하며 펜을 받아 든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치치 못하고 목소리는 기어 들어간다. 창가에 든 빛은 가리워진 눈동자에도 들어 오색으로 빛을 내고, 귀 끝을 붉게 물들였다.)
에르드:(돌아간 고개가 펜을 받아들며 잠시 제 쪽으로 기울었고, 그 틈에 창가를 투과한 빛이 연보랏빛 눈동자를 비춘다. 순간 홍채가 자수정보다도 투명하고 아름답게 반짝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앗긴다. 미감도 없고 남의 외모에도 하등 관심이 없는 에르드였지만, 세간이 정의하는 '미인'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깨닫는다.) ……. (그 역시 말문이 막혀 한쪽 무릎을 꿇은 그대로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기묘한 감각에 빠져있던 그때, 근처에서 골머리를 썩던 동급생이 다가와 에르드에게 말을 겁니다.
노노이 라가힛:에르드. 30분 남았어. 우리 슬슬 준비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남은 시험 중 다른 강의인 <군사전략 입문> 가상 훈련에서 에르드와 또다른 임시 페어를 맺고 있는 노노이 라가힛입니다.
에르드:(벼락처럼 정신이 든다. 짧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
그럼…… 간다. (반쯤 몸을 돌린 채 베아트리체에게 짧게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제법 편안하게 느껴졌던 상대이건만, 얼굴을 마주하기가 괜히 낯부끄러워서.)
베아트리체 힐:(다른 이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저조차도 형용할 수 없었던 표정을 천천히 갈무리한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다.) ...아, 응. 잘가. ...가상 훈련이라도 꼭 몸 조심하고. (그럼에도 당부는 잊지 않았다.)
에르드:가상인데 뭐 별거라고. 아무튼 알겠어. (뒤돌아 노노이를 따라갔다.)
베아트리체 힐:(손에 든 펜을 물끄러미 보다가 반짝 뒤를 돌아본다. ...방금 오신거겠지?) ...아, 유리 선배님. 안녕하세요.
...과제하러 오신거에요?
유리 모하에:아니~ 난 시험 끝났거든. 우리 후배들은 뭐하고 있으려나- 싶어서 와 봤지. (책상에 놓인 레포트 바라본다.) 아, 이거 <전략문화와 전쟁> 레포트지? 그 끔찍한 거? 어떻게 매해 이렇게 참신하게 엿을 먹이시냐.
유리는 근처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뽑아 오더니 에르드가 있던 자리에 앉습니다.
후르륵 몇 장을 넘겨 문단 하나를 가리킵니다.
:「…전쟁이란 냉병기를 쥔 영웅들이 대강 ‘와아아’ 하고 몰려왔다가 단신으로는 보일 수 없는 무위로 세상을 휩쓸어 ‘그리하여 여기서 역사의 지도는 변곡점을 맞았다’ 따위로 묘사되는 일이 아니다. 레마르크의 ‘이 책은 고발도 아니고 또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은 피했다 할지라도 역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어느 시대를 보고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문장이 저 사막의 신체를 입은 재앙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 우리 세대로 전해진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전략문화와 전쟁> 담당교수가 집필한 도서가 분명합니다.
그 교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전쟁의 비극과 날것 같은 참호전의 참상을 묘사하는 습관이 있었죠.
유리 모하에:그 교수님, 자기 책 인용하면 되게 좋아해. 이런 거 참고해서 써봐. 어디까지 썼냐?
베아트리체 힐:끔찍한가요...?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와, 감사해요. 거의 마무리했는데- 이거라면 결론을 조금 수정해서 적어도 괜찮겠네요. (에르드의 앞에서 보였던 표정은 백일몽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활자에 붙은 시선은 다른 이유로 반짝인다.)
유리 모하에:그럼 이게 안 끔찍해? 너 설마…… 이 과목에 진심으로 몰두했다던가, 재밌다던가. 그랬어? (경악 반 감탄 반으로 입이 벌어진다.)
베아트리체 힐:.....? 네, 1학년부터 이렇게 수준 높은 강의를 듣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끄덕이다 말고 벌어진 입을 슬 닫아준다.)
유리 모하에:(닫힌 입이 다시 떡 벌어진다) 와. 이거 물건이 들어왔네. 너 능력도 미래 예지라지 않았어? 능력도 뛰어난데 머리까지 좋다고…… 이거이거, 미리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호탕하게 웃었다.)
다들 너랑 페어 하고 싶어서 안달날 것 같은데. 넌 어때? 지금까지 몇 번 임시 페어 바꿔가면서 해봤잖아. 가장 잘 맞겠다 싶은 애 있었어?
베아트리체 힐:...저를 너무 좋게만 봐주시는 게 아닐까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선배님한테는 아직 못 따라갈걸요. (웃는 낯에는 조그만 미소로 답했다.)
...음, 그럴까요? 저와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질문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떠오른 구체적인 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야 지금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정말 오늘 하루종일 떠오르려나.)
선배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누구랑 페어를 맺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유리 모하에:아냐. 너한테는 정말로 싹수가 보여. 나중에 큰일을 해낼 것 같은 그런 싹수 말이지.
그나저나~ (제 양손을 겹치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는다. 씩 미소짓는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하다.) 나는 당연히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임시 페어 맺은 애 말이야.
평균적으로 첫 임시 페어와의 동조율이 50%만 넘어가도 정식 페어로서의 가능성이 있다고 쳐. 보통은 이것보다 낮은 동조율로 시작해서 합을 맞출수록 상승해나가곤 하니까. 그런데 너흰 시작부터 60%를 넘어섰잖아. 에르드를 놓치는 건 네게도 아까운 일일걸?
베아트리체 힐:..........아. (부자연스럽게 미소가 걷힌다.)
....그건 그렇지만, 에르드의 의견도 중요하고. ...또 동조율은 합을 맞출수록 상승하는거니까요. 다른 페어와 더 잘 맞게 될 수도 있으니. ...역시 그 애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서요.
유리 모하에:흐음. (베아트리체의 낯을 유심히 살핀다.) 하긴- 걔는 타고나길 타인이랑 동조율 자체가 좀 높은 애 같더라. 아까 데려간 라가힛인가, 다른 애랑도 수치가 낮은 편은 아니었어.
하지만 페어는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 그애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 네 생각도 중요하지. 네 마음은 어떤데?
베아트리체 힐:....그렇군요. (어쩐지 모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긴 침묵 뒤에 어렵게 입을 뗀다.)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어요.
유리 모하에:그으래. (기다렸던 대답이라는 듯 그제야 시원스레 미소한다) 솔직히 내가 봐도 너희는 진짜 잘 어울렸거든. 한 명은 원거리에 한 명은 근거리. 심지어 걔는 직접적으로 몸을 써서 접근해야 하는 타입인데 네가 예지한 결과를 공유까지 해줄 수 있다며. 능력만 놓고 봐도 합이 잘 맞는데 동조율까지 높게 계산됐으니, 이건 놓치기 아까운 인연이지.
내가 다음에 에르드 걔한테 한번 슬쩍 말 흘려볼까? 페어로 고려 중인 애 있냐고 말야.
베아트리체 힐:...정말요? (에르드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텐데. 유리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져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에르드한테요? 미리 이야기하는 건 너무 얌체같지 않을까요... 자리를 빼앗는 것 같기도 하고.. (줄줄이 변명처럼 말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부탁은 하고 싶고, 그러기에는 쑥스러운 것처럼 조금 망설인다. 머지않아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유리 모하에:얌체같긴. 원래 이런 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거라고. 망설이는 사이에 다른 애가 걜 홀랑 낚아채가면 어쩔래? 그래도 괜찮겠어? 보아하니 너도 그애가 꽤 맘에 든 것 같은데~ (내가 이런 쪽으로 제법 촉이 좋거든, 하며 장난스레 웃는다.)
베아트리체 힐:..... ...그게. (매끈한 도자기 같던 뺨이 조금 붉어진다. 왠지 열기가 느껴져 손으로 제 뺨을 꼭 감싸 쥐었다.) ...네, 부탁 드릴게요. 아주 살짝만 물어봐주세요.
유리 모하에:조오아, 접수 완료! (뺨을 감싸는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킬킬거린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유리와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도서관 내 정숙이라는 예절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옵니다.
그가 누군지 보기도 전에 베아트리체는 팔을 잡아채여 일으켜 세워졌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벌떡 일어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누구..?)
“베아트리체! 너 가상훈련 때 에르드랑 임시 페어 맺었던 애 맞지?"
유리 모하에:얼른 가자. 설계 반동이면 제2의무실로 실려갔을 거야!
베아트리체 힐:....네. (에르드가 다치기라도 한건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가 빠르게 펄떡인다. 그의 말에 빠르게 의무실로 달려간다.)
의무실 바깥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상황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황금색 에너지가 문 밖까지 일렁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 위로 검붉은색 에너지가 얹혀 피처럼 뚝뚝 흘렀습니다.
의료진 두 사람이 발작하는 에르드를 억누르고 약을 주사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를 지경이고, 식은땀이 침대보를 적십니다.
항상 무뚝뚝하던 낯은 잔뜩 일그러졌고, 입술 새로 괴로워하는 신음이 새어나옵니다.
유리가 침대 곁으로 달려가 의료진까지 제치고 화면에 표시되는 에너지 파동을 읽어냅니다.
유리 모하에:안정도가 엉망이야! 선생님, 약물로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인가요?
의사: 반동이 너무 심하게…… 같이 시험 치르던 학생이 심하게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에르드의 페어는 노노이 라가힛, ‘입학 시험 때 5등인가 했다던’ 그 동기.
정확히는 정체 모를 검붉은색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서.
유리 모하에:당장은 방법이 하나뿐인 것 같다. 이 정도로 설계 반동이 심하게 왔으면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러다 얘 죽어!
의사: 아니, 유리 학생. 설계 반동이 위험하긴 해도 죽는 정도까지는…….
무슨 확신이라도 있는지 고함을 지른 유리가 올올히 일어섭니다. 금색 눈동자가 불타는 듯 빛납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바라보다가 유리의 고함에 번뜩 정신을 차린다. ...그래, 정신 차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떨리는 손을 꾹 쥐어 본다.) ...제가,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제가 뭘 해야. (간절하게 유리를 잡고 선다.)
유리 모하에:이거 에너지 주입 정도로는 안 돼.
언약해. 정식 페어 맺으라고.
정식 페어가 된 순간 에너지 유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니, 날뛰는 각성자를 안정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야. 어쩔래?
베아트리체 힐:(...정식 페어. 검붉은 색의 흐름, 잔뜩 일그러진 에르드의 얼굴, 낮은 신음, 불안감, 터질듯한 심장 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죽으면 안돼, 에르드. 살아, 살아야 해.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래,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세상이 옳은 길로 등을 떠밀어주는 꼴이었으니까.)
네, 할게요. 맺을게요, 언약.
유리 모하에:…… 잘 결정했어. (등을 토닥여준다.) 그럼 우린 자릴 비워줄게.
유리가 의료진을 이끌고 의무실 바깥으로 나갑니다.
‘페어 언약’ 절차시엔 근처에 다른 각성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에너지가 엉킬 수 있기 때문이죠.
에르드는 몹시 괴로워 보이지만 의식은 있는 듯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 손을 잡는다.) ...에르드, 미안. 네 의견을 물을 시간도 없었네. ... ...후회할 일은 없게 할게.
에르드:(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감각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조차 없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익숙한 이가 보인다.) 윽…… 너, 뭘 하려는 거야. (그는 베아트리체가 제 손을 붙잡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베아트리체 힐:(젖어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을텐데. 심장이 저려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를 살리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아서. 너와 정식으로 페어를 맺으려고. 미안해, 미안.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에르드:페어를……? 언약을 맺겠다는, 뜻이야? (이마에 살짝 닿는 그의 손길이 무척 시원하게 느껴졌다. 무심코 더 원하게 될 만큼. 지금 그의 몸은 마치 극심한 가뭄 탓에 쩍쩍 갈라져 비 한 방울이라도 간절한 대지 같았다. 밭은 기침 몇 번. 열이 오른 탓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최대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더듬더듬 내뱉었다.) 후회할 거야…… 다시 생각해, 너 같은 애가 굳이 나와……?
베아트리체 힐:응. 그럴거야. (고통으로 일그러진 미간이며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조심스레 쓸어 내렸다. 너무 뜨거워, 눈 앞에서 녹아내리는 건 아닐까. 불안감은 커다란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힌다. 얼마나 괴로울까, 입술이 다 갈라질 만큼.) ...아니, 그 반대야. 너 같은 애가 굳이 나와.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돼. 더 많은 기회를 내가 빼앗는 거니까. ...괜찮을까?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에 어느새 물기가 어린다. 겨우 삼켜내며 달래듯, 어르듯 말을 이어간다.) ...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힘들어. 페어를 맺으면 금방 안정될거래. 괜찮아질거야, 분명.
에르드:(오래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색 에너지는 점점 더 저를 좀먹어가는 듯하고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전신을 잠식해간다. 누가 보더라도 저보다 베아트리체가 훨씬 아까운 상황이었고 저 역시 그리 여겼기에 한 번은 말렸지만, 이제는 여유가 없다. 다른 이가 상대였다면 제가 어떻게 되건 말건 단번에 거절했겠지만 하필 언약을 제안해 오는 이가 당신이라서 더더욱 그렇다. 당신의 보랏빛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 버렸기 때문에. 항상 다정하고 상냥한 이였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네가 괜찮다면…… 뜻대로 해.
구현자는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시도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응, 허락해줘서 고마워. 에르드. (흐릿하게 웃어 보이고는 손을 꼭 잡는다.)
항법
기준치: |
70/35/14 |
굴림: |
1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에르드:
사격(권총)
기준치: |
80/40/16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간난신고 끝에 뜨겁고 전류 같은 에너지가 심장까지 메다 꽂혔습니다.
일견 자해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 만큼 무자비한 방식의 지배입니다.
심장을 움켜쥐는 에너지의 흐름, 온전히 열어젖힌 정서, 경로,
녹은 금속처럼 무섭도록 달아오르는 두 사람의 체온.
세상을 묘사한 페이지가 불타 부스러지고 판정과 글줄로 이루어진 우주에 오로지 둘만이 온전한 것처럼.
잠시 후, 황금빛과 연보랏빛으로 감싸인 에너지가 허공을 맴돌며 흩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거칠고 급박하던 에르드의 숨이 한결 진정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되지 않던 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수월하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르드가 아주 멀어지더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베아트리체 힐:(뜨거운 감각에 덜컥 들이킨 숨을 겨우 뱉어낸다. 그와 동시에 잃어버린 조각을 찾은 것처럼 기묘한 기분. 그와 동시에 먼 미래를 예고하듯이.... .... . 뺨을 타고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따스한 봄의 색을 엮어 만든 듯한 에너지가 주변을 감싸면 차분하게 돌아온 숨소리에 마음이 놓여 반쯤 주저앉았다.) ......에르드, 괜찮아?
에르드:(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과 감정의 연속이다. 연보랏빛 에너지가 홀로 부족함 느껴본 적 없이 견고하던 제 세상을 불쑥 비집고 들어와 이제부터 여기 제 자리이노라 주장하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언제든 저를 떠나가버릴 것처럼, 언제든 제 심장에 공허라는 구멍을 낼 것처럼 간절함과 애틋함이 맴돌았다. 이것이 페어가 되는 과정. 서로의 에너지를 묶고 섞는
언약인 걸까.) ……. (정신이 들자 이제야 제 곁에 있는 이가 보다 또렷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젖은 뺨에 가져다대었다.) 아까보단 괜찮아. (그러나 이제는 몸이 잘게 떨려오고 있었다. 추위 속에 있는 사람처럼.)
베아트리체 힐:(...조금 전, 그의 손이 닿았을 때 만해도 이렇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던가? 제 세상을 송두리 채 뒤집어 놓을 만큼 거대한 울림을? 닿는 곳마다 싹이 돋아나듯 간지럽다. 그럼에도 안정이 되어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진다. 커다란 손에 뺨을 기대었다가 천천히 팔을 뻗어 잘게 떨리는 몸을 가득히 끌어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몸을 겹친 채로 온기를 나누어 주려고. 차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편안히 돌아올 때까지.) ... ...다행이야, 정말.
에너지 유량은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반동으로 인해 고갈된 에너지가 도로 채워지질 않으니 추위를 느끼는 것이죠.
이것을 안정시키는 방법은 사람의 체온, 그리고 접촉으로 건네주는 에너지 주입뿐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에르드:(거부하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지금은 스킨십을 향한 거부감보다도 제 몸을 덥혀줄 체온을 반사적으로 갈구하고 있었으므로. 어색하게 허공에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가 느릿하게 작고 마른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누군가를 안아주거나 안기는 게 아주 오랜만처럼 느껴졌다. 타인의 체온이 퍼지자 떨리던 몸이 놀라울 만큼 빠르게 안정을 찾아간다. 조금은 놀랍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누군가와 페어를 맺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해봤었는데.
베아트리체 힐:(마치 열병에 걸린 아이라도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이 한참 이어졌다. 어느새 떨림이 멎어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만 잠시 들었다. 그 덕에 에르드의 얼굴 옆으로 연보라색의 머리칼이 길게 늘어진다. 금빛 눈의 한뼘 위로 연보라색 눈이 자리한다.) ... 그럼 구현자가 설계자도 없이 혼자 움직이려고 했었단 말이야? ...무모해.
에르드:(새삼 그의 머리칼이 정말 길다랗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반대쪽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맞닿자 괜히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을 슬슬 옆으로 굴렸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색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큰일이다 싶을 만큼 체감하게 되어버린다.) 모두가 페어를 맺고 활동하는 건 아니야. 그리고 나는 원래 근거리 능력자잖아. 설계자가 있는 구현자만큼 정교하거나 광범위한 공격은 구사하지 못하겠지만 최전방에서 날뛰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베아트리체 힐:(기울어진 고개로 시선을 쫓아간다. 빤-히. ...괜찮다고는 했지만 역시 싫었던걸까. 굳이 물어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속으로 꾹 삼켜두었다. 이제 와서 싫다고 해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효율적으로 힘을 쓸 수 없으니까. 그럼,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누가 페어를 맺자고 했어도 거절했겠네.
... ...아까는 어떻게 됐던거야?
에르드:내가 혼자 활동하려던 가장 큰 이유는, 너도 알겠지만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야. 남들이랑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꺼려졌고 스킨십을 하는 건 더더욱 싫었어. (베아트리체라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그의 말은 전부 과거형이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은 듯 다시 천천히 눈을 마주한다. 햇빛이 들지 않아 그때처럼 반짝이지는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만일 또 그때처럼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홍채를 마주했다면 바보처럼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페어를 맺는 게 안 맺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받아들였겠지. 아직 1학년일 뿐이고 실전 훈련도 많이 해보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얘기한 게 어떻게 됐던간에…… 이젠 네가 내 페어가 됐잖아. 갑작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딱히 싫진 않아. 너랑 나 능력 합도 좋고. (무엇보다 그가 거절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베아트리체의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 때문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나도 쑥스러워 생략했다.)
글쎄. 나도 정확힌 모르겠어. 동조율도 나쁘지 않고 성적도 좋은 편인 애로 아는데, 아깐 이상하다 싶을 만큼 에너지 제어를 못 하더군.
베아트리체 힐:...응, 그렇지. (에르드의 말을 가만 듣는 동안 다시금 시선을 얽었다. 왜일까, 빛이 들지 않는 눈은 평소보다 다정하게 느껴진다. 과거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풀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일러주듯이. 무감한 얼굴에 그려졌던 미소며, 그의 변화가 기껍기에 그지없어서 저도 모르게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 ...그럼 다행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고맙기도 하고. (아, 이대로 겹쳐있으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다 느껴질텐데. 그제야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그랬었지, 성적도 좋았다고 들었는데. ...아까 에너지의 흐름도 색도 묘했어. ...혹시 너도 봤어?
에르드:이미 맺어버린 걸 무를 생각은 딱히 없다만, 혹시 네가 뒤늦게라도 후회되거나 정말로 페어가 되고 싶은 다른 이를 만난다면 말해. 언약을 푸는 수단도 있다고는 들었어. (두 에너지가 섞여들며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몸상태가 온전하지만은 않았으므로, 베아트리체가 멀어지는 게 아쉬웠다. 무심결에 더 있어 달라며 팔을 붙잡을 뻔하기까지 했다. 그걸 자각하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에르드…….)
봤지. 원래의 색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보통 에너지 색은 연기 같아서 어느 정도 투명하잖아. 그런데 걔 에너지는 앞이 안 보일 지경으로 짙은 검붉은색이더군. 그러니 내 구현이 가려진 거지.
베아트리체 힐:(가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를 생각이 없다면, 나는 절대. 한번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일을 되돌리는 재주는 없어서. (눈가를 덮는 손을 보고서야 다시금 옆에 조심히 앉는다. 커다란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그 안들 들여다본다. 지금 안정되었다고는 해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걱정이 한가득이다.) ...아직도 불편해? 춥다거나. (뺨을 가볍게 쓸어본다.)
...그래서 그런거였구나. ...유리 선배는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그러니 그리 단호하게 이야기한 거겠지. 그 애는 괜찮은 걸까. 걱정도 잠시 스쳤지만 역시 눈 앞에 있는 이에게 온통 신경이 쏠린다.)
에르드:(손에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감에 뭐지? 하면서도 따라 움직였다가 베아트리체의 두 눈을 정통으로 마주하곤 크게 당황한다. 눈을 연신 깜박거리다가 뺨에 손길이 닿아올 즈음 고개를 반대쪽으로 비스듬히 돌려 버렸다. 왜 자꾸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일깨우는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바보처럼 외치고 싶기라도 한 기분이었지만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일 뿐 소리가 되어 나가진 못한다.) 아, 아까보단 괜찮아. 이불 좀 덮고 있으면 나아지겠지. (겨우 대답하긴 했지만 말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그대로 혀 씹고 싶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정신 없어서 못 알아들었어.
베아트리체 힐:(저만치 돌아간 고개를 물끄러미 내려본다. 괜히 곱슬한 머리칼만 손끝으로 정리해둔다.) ...정말? ... ...안 괜찮아 보이는데. 역시 이불 만으로는 부족할거야. 계속 손 잡고 있을까? 다시 안는 편이 나을까? 괜찮아질 때까지만. (돌아간 고개만큼 돌아가서는 다시 들여다본다. 이불을 토닥여주면서도 제가 곁에서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얼어 죽지는 않을까, 저보다 한참이나 큰 이를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게, 의사 선생님께서도 반동이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입을 다물고는 잠시 침묵에 잠긴다.) ...그냥 두면 죽을 거라고.
에르드:아니! (돌아간 만큼 시선이 따라오자 미칠 노릇이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됐어. 진짜로. (계속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거나, 손을 잡거나, 아무튼 닿고 있다간 무슨 일이 나도 나겠다 싶어서 완강하게 거절한다. 건장한 스무 살 성인인데 어째 완전히 어린아이마냥 대해지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묘해졌다. 스와콥문트로 가기 전의 리사가 몇 번 이렇게 재워주곤 했었는데…… 그 이후로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도 가까운 거리를 허락한 적도 없었는데 베아트리체가 그 모든 선을 아주 간단히 넘고 들어온다.)
…… 그 정도인가? 내가 설계 반동을 겪는 건 처음이지만 아주 드문 일도 아닌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죽을 위기에 처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에너지 색도 그렇고 뭔가 심각하긴 했나 보군.
베아트리체 힐:......그래.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얌전히 이불을 토닥여준다. ...왜 아쉽다고 생각했지. 헛된 생각을 푸르르 털어낸다. 간간히 머리칼도 쓸어 넘겨주기도 하고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곁을 지키려는 듯 자리에 있었다.)
...응, 그랬던 것 같아. 이제 앞으로는 괜찮을거야.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는데.
에르드:…… 언약을 맺어서 에너지가 안정되었으니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언약을 한 건 이미 일어난 사실이고 저도 동의한 바이지만 입 밖으로 내자니 괜히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넌 좋은 설계자잖아. 그런 걱정 마.
베아트리체 힐:...응. (평소라면 그런 말에는 아니라며, 과찬이라고 손을 내저었겠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토닥이는 소리. 나지막하기 읊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고요하고 차분하다.) 그런 설계자의 페어인 너는 아주 좋은 구현자고.
(천을 스치는 소리가 문뜩 멎는다.) ...... ....참. 에르라고 불러도 돼?
에르드:(쑥스럽고 당혹스러운 순간이 몇 지나가기는 했지만, 에르드는 곧 자신이 무척이나 편안함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만큼은 어떤 걱정도 날 세우는 경계도 필요없었다. 그저 저와 페어가 된 이의 사근한 목소리와 손길을 받으며 회복에 전념하면 된다. 온몸에 가시 세운 고슴도치마냥 뻣뻣이 힘을 주고 있지 않아도 된다…… 온전히 긴장을 놓아본 것이 대체 얼마만이었더라. 베아트리체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너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정을 마구 불러일으키더니 이제는 아주 오래 전 잃어버린 것 같은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도 허락하려 들지 않았을 애칭에 관해서도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예외를 가져갈 셈이야?) 마음대로 해.
베아트리체 힐:(문득 시선이 마주치면 눈만 휘어 웃어 보였다. 속눈썹 아래로 옅은 색의 눈동자가 사라진다. ...참 이상하지, 어렸을 때는 표정이 없다며 온 가족이 걱정을 했는데. 에르드, 네 앞에서는 나도 모르는 얼굴이 나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저도 모르는 새에 에르드의 모든 예외를 가져가듯, 베아트리체 역시도 자신의 모든 예외를 내어 놓을 터였다.)
응, 에르. 편히 쉬어. 곁에 있을게.
두 사람은 언약이라는 형태로 단단히 묶였습니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어렴풋하게 머리를 스쳤습니다.
이미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처음과 예외를 허락하였으므로.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모하메드 알 한살리 거리를 따라 바다 쪽으로 10여분 걸으면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카사블랑카 항구가 나타납니다.
유럽 국가들과의 거의 유일한 교역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곳이죠.
오전부터 카사블랑카 항구에서 짐을 잔뜩 실은 트럭 여러 대가 각성자사관학교로 들어옵니다.
새 나라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 벽돌을 올릴 까닭은 없었으므로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도시들은 저마다 기존 건축 양식을 아직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상징은 흰 벽에 녹색 지붕을 이은 호화롭고 장대한 건물들.
아라베스크 문양이 조각된 나무판이 벽면을 둘러싸고, 안뜰은 대리석으로 꾸몄죠.
젤리즈 타일이 섬세하게 벽을 장식했고, 세밀한 조각과 촘촘한 문양은 사람을 황홀케 합니다.
종교 건축물처럼 웅장한 파사드를 지나 여러 개의 건물을 거쳐 이르는 중앙 정원은 안달루시아풍입니다.
오늘은 각성자사관학교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베로니카 주간’ 둘째 날입니다.
본래 카사블랑카에는 없었던 명절이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래한 것도 아닌 절일이지만 학생들은 베로니카 주간을 퍽 좋아합니다.
초대 학장이 어릴 적 동생의 생일이 되면 가정에서 하던 놀이를 시험 삼아 내놓았던 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어 이제는 아예 축제 주간으로 확장된 것이죠.
학생들은 이미 손에 맥주 한 잔씩을 든 채 동아리들이 준비한 행사에 참여하거나 미로 찾기 놀이에 끼는 등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숙사 밑에선 에르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베아트리체 힐:....후. (조금 긴장된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반쯤 덜어 길게 땋아내렸고, 옆 머리에는 하늘한 꽃잎 장식이 매달린 은색의 핀을 나란히 꽂아 고정 시켰다. 귀에는 새끼 손톱만큼 조그만 진주 귀걸이가 반짝인다. 부모님의 취향으로 선물 받은 원피스를 언제 입나했더니... 이렇게 꺼내게 될 줄이야. 옅은 하늘색의 단정한 셔츠 원피스의 끝단을 툭툭 털어내고야 문을 나섰다.)
에르드:(기숙사 문가에서 멀뚱하니 서 있다. 남색 점퍼에 검은색 슬랙스와 남색 캔버스화, 언제나처럼의 가죽 장갑 차림이다. 모자가 없으니 머리가 한결 더 부스스해 보인다.)
베아트리체 힐:(멀리서부터 익숙한 뒷모습을 찾아낸다. 부스스하게 떠오른 검은 머리칼에 작게 미소 지었다. 조용히 그 뒤로 다가가 등을 톡톡 두드린다.) ...에르. 오래 기다렸어?
에르드:아니, 별로. (무심하게 뒤돌다 잠시 말을 잃는다. 항상 똑같은 사관학교 교복만 입다가 한껏 꾸민 사복 차림을 보니, 원래도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서 더 예뻐질 수도 있는 건가? 싶어진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에르드는 꾸미는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베아트리체의 변화(?)가 놀랍기만 했다.) 좀 달라 보이네, 오늘. (다만 그가 관심이 없는 건 꾸미는 쪽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전반에 해당했으므로…… 이럴 때 으레 해주어야 하는 예쁘다던가 잘 어울린다던가 하는 칭찬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다. (사복을 입은 에르드의 모습이 새삼스레 바라본다. 역시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예쁘다. 남색이 이렇게 예쁜 색이었던가. 끄덕이던 고개가 슬 기울어진다. 시선이 제 옷차림을 따라 쭉 내려간다. 어째 뚫어져라 보는 것 같은데... ...별로인가? ...역시 두번째로 입었던 옷을 입었어야 했는데. 매끈한 단화의 끝을 내려보다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별로야?
에르드:아니. (고개 젓는다. 이럴 땐 뭐라고 해줘야 하는 거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머리 열심히 굴린다.) 음…… 엄청 잘 어울려. 내가 너에 비하면 너무 우중충하게 입은 것 같은데.
베아트리체 힐:.....아, 정말? 고마워. (그제야 안심이라는 듯 표정이 풀어진다. 도리도리.) 아니야, 정말 예뻐. 색도 잘 어울리고. (빠르게 덧붙이고는 옆에 나란히 선다. 평소보다 조금 들뜬 것도 같고.) ...음, 갈까?
에르드:예쁘단 말은 처음 들어본다, 진짜. 나한테 너무 안 맞는 칭찬 아니야? (괜히 머리 쓸어넘기며 고개 끄덕인다. 나보다는 좀 더 잘생긴 애가 네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굳이 꺼내지 않은 말.)
베아트리체 힐:...내 눈엔 무척 예뻐 보이는데. (틀림없는 진실이라는 듯 반듯하게 웃어 보인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 거절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에르드:진짜 어색하니까 예쁘단 말은 그만해. (절레절레) 뭐, 어차피 축제 주간이고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남들이랑 왁자지껄하게 모여서 돌아다니는 성격도 아니고.)
이 계절이면 흐벅지게 피어 살랑이는 아모리베늄 꽃이 너른 정원과 온실에 가득합니다.
황금빛 꽃잎과 연보라색 잎으로 이루어진 이 식물은,
따로 쓰면 독이 되지만 함께 쓰면 약이 되는 특이한 성질을 지녀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꽃‘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본디 희귀한 꽃이지만 구근을 어떻게 구했는지 사관학교의 정원에는 가득 심겨 있습니다.
황금빛 꽃잎이 태양빛보다도 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은은한 연보랏빛 잎이 바람 받아 흔들릴 때면 새벽하늘이 대지에 펼쳐지면 이럴까 싶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야자수 아래의 흰 벽돌과 로코코식 낮은 울타리 안에 피어나 깨질 듯이 반짝이는 꽃들.
군데군데 켜 놓은 조명이 부드럽게 퍼지면서 만드는 야경, 속살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 낭만적이고도 뜨거운 열대의 밤.
축제 둘째 날, 이 밤에는 베로니카 주간의 핵심적인 행사인 ‘아모리베늄 찾기’가 열립니다.
종종 피어나는 돌연변이를 아예 품종으로 만든 은색 아모리베늄이 있는데,
이 은색 꽃을 황금빛 꽃들 사이에 단 서른 송이만 숨겨 놓습니다.
학급마다 정원을 돌며 은색 꽃을 가장 많이 찾아낸 사람이 상품을 받는 놀이죠.
두 사람이 짝을 짓는데, 이번에도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한 팀이 되었습니다.
설계 반동이라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1학년인 주제에 벌써부터 정식 페어가 되었다는 것이 소문났기 때문이죠.
에르드:꽃은 좋아하는 편인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고 껄렁하게 화원을 걷는다.)
베아트리체 힐:응, 좋아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소담하게 피어난 꽃들에 하나하나 시선을 둔다.) 에르는?
에르드:별 생각 없어. 뭐…… 보기 좋긴 하네. 이거 희귀한 꽃이라고 들었는데. (고개 숙여 활짝 만개한 아모리베늄을 들여다본다. 꽃과 잎의 색이 꼭 저희 둘의 에너지 색을 떠올리게 한다.)
베아트리체 힐:(나란히 허리를 숙여 향을 맡기도 하고, 손끝으로 꽃잎을 톡톡 간지럽히기도 하다가 돌아보았다.) ...색이 예쁘지. 꼭 그날 의무실에서 본 풍경 같기도 하고, 금빛과 연보라색이 섞여서. 아모리베늄은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꽃이라고 한대. 따로 쓰면 독이 되지만 함께 쓰면 약이 되는 특이한 성질이 있거든. 둘을 떼어 놓아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가봐. (즐겁다는 듯 조잘대며 허리를 폈다.)
...은색 꽃, 찾아볼래?
에르드:그래?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말이 많은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잠시 그 모습이 병아리 같다- 라고 생각했다. 귀엽다는 감상이었지만 에르드의 표현력으로는 거기까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아트리체의 다양한 면모를 접하고 알아간다.) 저 꽃은 잎과 따로 떼어두면 안 되겠군.
좋지. 1등을 하면 무슨 상을 줄지 궁금한데. (승부욕 같은 것이 반짝였다)
베아트리체 힐:응, 서른 송이라고 했으니까.... (에르드의 점퍼 끝 소매를 잡고는 꽃이 더욱 흐드러지게 피어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만약 1등을 하면 상품은 다 네가 가져도 좋아.
에르드:같이 찾은 건데 나눠가져야지. 무슨 소리야? (따라가면서 한쪽 눈썹 치켜올린다.)
베아트리체 힐:...난 괜찮은데. (베아트리체는 이렇게 에르드와 축제를 즐기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라 생각한다. 정말로.) ...이쪽에는 있으려나. (빤-히...)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제일 커다랗게 핀 금빛 아모리베늄만 눈에 띄었다. ...어째 금색밖에 눈에 안 들어오네.)
에르드:난 저쪽 볼게. (베아트리체의 반대편 꽃밭에서 허리 숙이고 꽃을 찾아본다.)
관찰력
기준치: |
55/27/11 |
굴림: |
79 |
판정결과: |
실패 |
…… 은색 심어둔 거 맞아? (안 보임)
쉽지 않네요! 금색 틈의 은색 꽃은 잘 찾기 어려워서 더더욱 그럴지도요.
베아트리체 힐:음... 서른 송이는 있다고 들었는데... .... ....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다른 쪽을 둘러본다.)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그렇게 빙 돌아서 에르드 뒤통수를 보고있다. ...아, 이게 아닌데.)
에르드:(한편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쉽게 안 보이니 괜히 승부욕이 끓는다.)
관찰력
기준치: |
55/27/11 |
굴림: |
66 |
판정결과: |
실패 |
(이쪽도 빙~ 돌다가 베아트리체 신발을 발견하고서야 멈췄다.) 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본다. 달빛이 그를 비추고 가로등의 불빛도 퍽 낭만적이다.) 꽃은 찾았어?
베아트리체 힐:.....아. (은은하게 주변을 감도는 달빛, 가로등 불빛 아래, 눈이 딱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굴린다. 괜히 발끝을 톡톡 구르고...) ....음, 아니 아직. 잘 안 보이네... ... (말을 흐리며 슬금슬금 걸어간다.)
(등을 보이게 서서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쥐었다. ... ...깜짝이야.)
이번에는 <행운> 판정으로 해보자! 마지막...!!!!
베아트리체 힐:(손 부채질...하다가 다시 집중...)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60 |
판정결과: |
실패 |
에르드:
운
기준치: |
50/25/10 |
굴림: |
52 |
판정결과: |
실패 |
두 사람은 열심히, 집중해서 은색 아모리베늄을 찾아보지만...!!
화원을 다 뒤지고 다녀도 도저히 보이질 않네요. 찾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에르드:(한숨 푹 쉬며 무릎 짚고 일어난다.) 이거 심어둔 게 맞긴 한 거야? 이미 다른 애들이 다 찾아갔나?
베아트리체 힐:........그럴지도 모르겠네. (애꿎은 금색 아모리베늄만 톡톡 두드린다.)
... ...음, 돌연변이니까. (특이한 곳에 있지 않을까.)
자연
기준치: |
10/5/2 |
굴림: |
100 |
판정결과: |
대실패 |
(..........머릿 속에 떠오르는 건 온통 방금 마주친 에르드의 금빛 눈동자 뿐이다. 왠지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머리칼을 슬 내린다.)
베아트리체는 꽃을 찾으러 가다가 그만 벌과 마주치고 맙니다...!
벌을 맞닥뜨렸는데도 머릿속에 에르드만 가득한 건 중증이라면 중증이겠네요.
베아트리체 힐:...! (소리없이 최대한 조심조심 돌아간다.)
에르드:(다시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 껄렁하게 집어넣는다.) 아무래도 상은 물 건너간 것 같다. 대신 뭐라도 먹든가. 술 좋아해? 난 딱히 입에 대지는 않는다만.
베아트리체 힐:(....벌 때문에 더욱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본다.)
...그럴까? 오래 걷기도 했고. (끄덕) 좋아해. 잘은 못하지만... 네가 안 좋아하면 괜찮아.
(맥주 들고 지나가는 친구들 빤히 본다...)
에르드:그런 것치고는 되게 마시고 싶은 표정인데. (옆에서 그 모습 보다가 작게 웃는다) 생맥주 정도면 괜찮겠지. 한 잔씩만 사서 벤치에서 마시자.
베아트리체 힐:....아, 그래도 괜찮을까? (아마 안 괜찮을 것이다.) 한잔만. (다시 소매 끝을 잡고 아이들이 맥주를 사서 나오는 곳으로 종종 걸어간다.)
축제를 맞이해 사관학교에 온갖 천막 노점들이 세워졌습니다.
동아리별로 특별한 이벤트를 하거나, 인형뽑기나 사격 게임 등 다양한 부스도 있습니다.
술을 파는 곳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시원한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파는 곳이네요. 천막 안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마시다 가도 되고, 테이크아웃할 수도 있습니다.
에르드:술은 센 편인가? (마시고 싶어하는 걸 보면 주량이 많으려나)
베아트리체 힐:으음, 아마 한 두 잔 정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안주도 필요해?
에르드:맥주로 두 잔? (그럼 완전 약하잖아?? 마시게 해도 되는 거 맞아?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응, 아무래도 꼭 있어야겠다. 말린 과일 정도면 돼.
베아트리체 힐:(얼굴을 가만 보다가는 가볍게 웃는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사서 나갈까?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면 더 아름답다고 하던데.
에르드:(눈을 가늘게 뜬다.) 그래. 너 너무 빨리 마시지 마. 너는 따로 먹고 싶은 안주 없고? (생맥주 두 잔과 말린 과일을 주문한다.)
베아트리체 힐:응, 괜찮아. 충분할 것 같은데. (빨리 마시지 말라는 말에는 조그맣게 끄덕인다.)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 천막을 둘러보다가 주문한 것들이 나오면 손에 착착 든다.)
얼음 속에 넣어두었는지 아주 시원한 잔에 생맥주가 담겨 나옵니다.
같이 주문한 말린 과일도 나름 퀄리티가 나쁘지 않네요.
에르드:(맥주 잔을 들고서 2층으로 향한다. 시끌벅적하고 신나는 분위기가 낯설지만 나쁘진 않다. 울려퍼지는 재즈풍 음악을 듣고 있자면 기분이 조금 들뜨기까지 하는 듯했다.) 축제 같은 거 참여해보는 건 처음이야.
베아트리체 힐:(그 옆을 나란히 걸어 오른다.) 정말? 처음을 함께하게 된다는 건 영광인데... 옆에 있는 게 나라서 괜히 미안하네. (걸음을 따라 가볍게 찰랑이는 잔을 내려본다. 하얀 거품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떤 것 같아? 즐거워?
에르드:왜 미안해?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 기우뚱한다. 그는 혼자가 지극히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언약을 맺은 이후로는 베아트리체에 한해 경계의 허들이 크게 낮아졌다. 베아트리체가 좋은 사람이어서이기도 하고, 언약할 때 느꼈던 기이한 감각 때문이기도 할 테다.) 너 아니었음 이런 데 나오지도 않았을걸. (그렇다고 무뚝뚝한 성격이 개선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낯부끄러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시선을 옆으로 굴렸다.) 꽤 재밌네.
베아트리체 힐:...그야, 너와 같이 오고 싶었을 다른 애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여럿이었다면 더 즐겁지 않았을까 하고. 더 친한 사람이랑 온다거나. (혼자가 익숙한 에르드의 인간관계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늘 되묻고는 했다. 이러다가 저만 독점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니 다행이다. 나도 즐거워. (어느새 저만치 돌아간 에르드의 시선을 보다가는 나지막히 웃었다.)
에르드:그런 애들이 있을 것 같아?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단 듯이 픽 웃어버린다.) 맨 처음 나를 만났을 때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더니 실은 몰랐던 거야? 사람이랑 닿기는커녕 가까이서 대화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난. 너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언약까지 한 사이가 됐지만. 매번 널 볼 때마다 놀랍다니까. 내가 어떻게 누군가와 이 정도로 어울리게 됐지…… 싶어서. (잔을 당신 쪽으로 내민다.) 건배나 하자.
베아트리체 힐:그건 알고 있지만... (역시 혼자만 보고 있기에는 아쉬울만큼 좋은 사람인데.) ...말을 못해서 그렇지, 꽤 있을거야. 정말. ...응, 그랬지.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일이 아니었다면 역시 말도 못 꺼냈을 것 같거든. 자, 건배.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히고는 한 모금 꼴깍 들이킨다. 시원하고 톡쏘는 탄산이 꼭 제 마음 같아서 안 쪽부터 은은하기 온기가 도는 것 같다.)
에르드:(저와 베아트리체는 첫 전투부터 동조율이 높았었다. 설계 반동으로 인해 급히 언약을 하게 되었지만,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깊이 얽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떠오른 가정이었다. 자신이 이런 내용을 떠올렸다는 자체가 놀라워 베아트리체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지만.) 너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애들이랑 어울렸을지도 모르지. 객관적으로 따지면 나보다 너랑 함께 놀고 싶어하는 애들이 많을걸. (이렇게 예쁘잖아. 또 튀어나가려던 마지막 말을 참고 부딪힌 잔을 입가에 가져가 꿀꺽꿀꺽 연신 마셨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더더욱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한켠에서는 아모리베늄이 달빛과 조명 빛을 받아 바람이 불 때마다 차르르 반짝이며 흩날리고,
한켠에서는 학생들이 저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멋진 여름밤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잔을 입에서 떼어내고는 조용히 호선만 그렸다.) 날 그렇게 좋게 봐주는 건 늘 고마워. 맥주 시원하니까 좋다. 맛있어. (즐겁다는 듯 평소보다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참, 이것도 먹고. 그렇게 급하게 마실 줄은 몰랐는데.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서 건내준다. 그리고는 혼자 또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둔다.)
에르드:너도 날 좋게 보고 있잖아. 아마 너보단 내가 좀 더 객관적일걸. (그는 돌처럼 메마르고 딱딱한 사람이었으나 오늘만은 사관학교의 풍경이 꽤 아름답다는 데 동의하기로 했다. 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학교인데도 희귀하단 꽃이 은은한 향기를 가득 뿜어내고 조명이 낭만적인 빛을 비추어내는 광경은 색다른 감상을 가져다준다.) 목이 좀 말라서. 시원하고 좋네. (과일을 받아 입안에 집어넣는다.) 난 너처럼 주량이 약하진 않으니까 걱정 마.
베아트리체 힐:지나가는 애들한테 물어보면 좋을텐데. (농담처럼 가볍게 스쳐가는 말. 잔잔하게 들리는 음악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떠드는 즐거운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어 잠시 말이 멎어도, 그 간극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눈 앞의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지금 제 옆에는 자신이 가장 바라는 사람이 있다. 무엇도 더 바랄게 없는 순간이라 이대로 잠시 멈출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있었던가. 이런 감정은 꼭 자신을 잃게 하는 것 같아, 아주 어린 시절에는 바보 같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쯤 그렇게 되어도 좋지 않을까.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떠올린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다. (이어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찬기가 남은 탄산을 시원하게 목으로 넘긴다. 볼에 열기가 도는 것이 조금씩 느껴진다. ...어쩐지 웃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즐거우니까.)
(시원한 숨을 뱉어내고는 에르드와 시선을 마주한다.) 늦었지만, 짠.
에르드:그건 내가 싫어. (마찬가지로 가벼운 어조로 답하며 잔을 입가에 기울인다. 평소의 사관학교는 아무래도 군대의 체계를 닮아 있다 보니 경직된 분위기가 컸다. 고작 1년에 일주일 정도인 축제지만 평소의 무거움과 긴장감을 풀어주기에는 제격이다. 에르드는 축제의 효과를 가장 잘 누리고 또 체감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처음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가 베아트리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묘하게 들뜨는 기분도 불쾌함 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도 모두 어색하지만 특별한 날이니 괜찮겠지- 하고 넘기게 된다. 곁에 있는 이도 즐거워 보이니까.) 그래, 짠.
베아트리체 힐:(잔을 부딪힌 다음에는 머지않아 투명한 바닥이 드러난다. 한층 풀어진 얼굴에 발갛게 달아오른 볼. 기울어진 고개가 휘청이다가는 어깨에 툭 기대어진다. 눈이 마주치면 눈을 휘어 웃어 보이고는 손을 뻗어 눈 앞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칼을 간질였다.) ...오늘은 네가 편해 보여서 다행이다. 늘 굳어 있으니까. (목소리도 늘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에르드:(어깨에 닿는 가벼운 무게감에 고개 돌린다. 접촉에 놀라지 않게 되거나 밀어내지 않는 것도 베아트리체에게만 허락하는 일들 중 하나다. 시간은 밤이었지만 조명이 켜져 있었기에 불그스레해진 볼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두 잔 정도라며. 너 벌써 취한 것 같은데. (다만 그가 적응한 건 손을 잡는다거나 기대는 일 정도로, 이렇게 적극적으로 팔을 뻗어 다가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너 때문에 굳을 것 같다만……) 손가락 몇 개야? (조금 멀찍이서 손가락 세 개 흔들어보인다)
베아트리체 힐:응? 아니야, 괜찮은데.... (고개가 기우뚱...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눈을 반쯤 접는다.) ...두 개, 아니 세 개. 맞지? (흐물하게 웃으며 흔들고 있는 손을 덥썩 잡아 확인해본다.) 음, 맞췄다. 그렇지? (헤헤-)
에르드:(고작 생맥주 한 잔으로 이렇게 된다고? 앞으로 술은 절대 안 먹여야지.) 너 앞으론 술 말고 다른 거 마셔. 주스라던가. 알겠지? (손이 덥썩 잡히는 모습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도, 헤롱헤롱거리는 모습에 다시 가늘어진다.)
베아트리체 힐:(잡은 손에 꼭... 힘을 준다.) .........으응, 하지만. 좋아하는데. (물끄러미 올려본다...)
에르드:좋아해도 안 돼. 너 고작 한 잔으로도 이렇게 풀어지는데 좋다고 덥석덥석 마셨다가 무슨 일 나면 어쩌려고? (손을 떨쳐내지는 않았지만 시선은 피했다. 아, 저 순진한 눈 보고 있기 힘들다……)
베아트리체 힐:..........음. (그러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잠시 눈을 데굴.... 굴리더니 반짝 떠올린다.) ...아. 그럼, 그때에도 에르가 옆에 있어주면 되겠다.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거고... 그럼 되지 않을까.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따라간다.) 응?
에르드:너…… 내가 너랑 정식 페어를 맺긴 했지만 언제나 네 곁에 있어줄 수는 없어. (아예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베아트리체와 제 얼굴 사이를 가로막아 버렸다.)
베아트리체 힐:............그건 그렇겠지..? 역시. (잔뜩 시무룩한 목소리가 너머로 들린다.) ......그럼 아주 가끔만.
에르드:(왜 마음이 이렇게 콕콕 찔리는 거지) 그래. 아무튼 내가 하려던 말은 술을 덜 마시라는 거야. 주스 중에도 맛있는 거 많잖아? 아님 무알콜 샴페인이라던가.
베아트리체 힐:...그런 것도 좋지만. 역시 진짜가 좋아서. 그럴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솔직해지는 기분이 들거든. (잡고 있던 손을 꾹꾹 눌러보다가 슬 놓아준다. 이렇게 있다가는 어쩐지 그 이상의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목에 걸리는 말을 삼켜낸다.)
.......그래도 금방 가라 앉을거야. 걱정하지마.
에르드:평소에는 솔직하게 굴지 않아? 딱히 네가 뭔가를 돌려 말하는 성격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하긴 말수가 적은 편이기는 하지. 착하게 구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이런저런 추측만 할 따름이다. 손이 놓아지자 그제야 얼굴 새를 가로막던 반대쪽 손도 내린다.)
그럼 깰 때까지 여기 앉아 있다가 가자. 어차피 급할 것도 없으니까.
베아트리체 힐:...으음, 그건. 생각나는 모든 말들을 꺼내어 놓을 수는 없으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다시금 얼굴이 보이면 그제야 다시금 풀어진 얼굴로 옅게 웃어보였다.)
...그럼, 조금만 기대있어도 돼?
에르드:그런가. (베아트리체보다 더 과묵하지만 할 말은 솔직하게 다 내뱉는 편이었으므로 공감이 잘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개인의 고충이 있으려니 하고 넘긴다.)
(고개 끄덕였다.) 응.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그대로 어깨에 툭 기대인다.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마음이 놓여 가만 눈을 감고 열대의 바람을 맞았다.)
열대야의 바람은 끈적하면서도 끄트머리에는 서늘하게 피부를 훑고 지나갑니다.
맥주로 달뜬 몸을 곁의 에르드에게 기대면 긴장감에 불편한 것 같으면서도 안정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말은 많이 오가지 않았지만, 아주 즐거운 축제의 밤이었다는 데에는 두 사람 모두 이견이 없겠죠.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던 학생들이 오전나절 내내 침대 위나 뒹굴며 쉬고 있었기에 학내는 고요했습니다.
평화를 깬 것은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입니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학생이 그 방향으로 뛰쳐나가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창문을 통해 내다봐도 좋고, 직접 가 봐도 좋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무슨 소리지. (창가로 다가갔다가 온몸을 감싸듯 무거운 불안감에 서둘러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나간다.)
급하게 달려가니, 사람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한 학생이 쓰러진 채로 발작하며 피를 토합니다.
그 틈을 뚫고 몇 사람들이 군홧발 소리를 내며 다가옵니다.
2주 전 들이닥쳐 아직도 ‘불온 게시글’ 사건을 수사 중인 헌병대원들입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헌병대 예장에는 기묘한 모자-가면-투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아프리카 도곤족의 전통을 따른 사팀베 마스크가 그것입니다.
디자인 자체는 서아프리카 전통에서 따온 것이니 이상하다고 할 게 없지만,
가면을 쓴 헌병대가 붉은 줄과 구슬을 관자놀이에 드리우고 표정을 감춘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아무래도 조금 두렵기 마련이죠.
죽음의 사자가 내려다보는 광경 속인 것처럼, 노노이 라가힛은 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손톱이 깨지고 피를 토하는 소년의 몸 위에서 검붉은 에너지가 마치 자아를 가진 듯이 움직이며 그를 감싸죕니다.
라가힛의 꼴을 보고 놀란 요한이 달려와 몸을 구부립니다.
엎드려 울부짖는 소년을 껴안아 달래고, 뒤집어 똑바로 눕히고,
눈에 품은 렌즈로 아주 오랜 노출을 주어 사진을 찍듯이 그 광경을 들여다봅니다.
요한 에를리히:의료진 아직 안 왔어?! 누가 에르드, 1학년 에르드 좀 불러! 라가힛은 그 애와 동조율이 가장 높지 않았나?!
부르지 않아도 소란을 듣고 이미 에르드는 군중이 둥그렇게 모여 선 한중간으로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모여 있던 학생들은, 사람이 터지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강제로 알게 되었습니다.
안에서부터 폭탄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노노이 라가힛은 말 그대로 터져버렸습니다.
공중에 살점과 피가 흩날리는 광경을 굳이 무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겠죠.
곁에 서 있던 요한과 에르드는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베아트리체, <이성> 판정 (1/1D4)
베아트리체 힐:
정신
기준치: |
90/45/18 |
굴림: |
2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SAN Roll
기준치: |
64/32/12 |
굴림: |
1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이라 비명은 뒤늦게 산발적으로 커집니다.
비틀거리며 도망치거나 주저앉아 구토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헌병대 한 사람이 노노이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집어들었습니다.
도곤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가면을 자아 표현과 제식 수단으로 썼지만,
장례식에서 쓰는 가면은 오로지 사팀베 마스크 하나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 표정 없는 얼굴은 더욱 두렵게 느껴집니다.
인류의 기원 이후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가질 수 있었던 아프리카인들이
‘문명국’에서 넘어온 ‘비흑인’들을 ‘비문명적’ 방식으로 위압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아니었나 논설했더랬죠.
억압받지 않던 자가 억압받던 자들의 방식을 야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야만이 될까?
어떤 역사의 신성한 전통을 압제에 사용하는 것은 야만이 아닐까?
이 아프리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부터 그러하였듯 기록보다는 구전이어서,
말할 입이 없어진 목소리는 이내 사그라들었습니다.
오래 내려앉은 그 침묵을 사르고 타는 불꽃처럼, 요한이 고함을 지르며 라가힛의 다리를 붙잡습니다.
그러자 라가힛을 집어들던 헌병대원이 빈 손으로 가면을 밀어 벗었습니다.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인상이 참 좋은 청년이라고 평가했을 법한 남자의 얼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남자: 노노이 라가힛의 신병은 헌병대에서 인수하겠다. 손을 놓기를 권유한다, 요한 에를리히.
요한 에를리히:이 애를 더는 훼손하지 마! 살아있을 때 가지고 논 걸로 충분하잖아, 미친 자식들아!
그러자 남자는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남자: 사관생도 노노이 라가힛에게는 즉결 처분 가능한 혐의의 증거가 있다.
남자: 그가 불법적인 약물을 도핑해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증언이 접수되어 수사한 결과 여러 혐의를 확보했다. 이 폭사(爆死) 역시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부검이 필요하겠군.
수사가 종료된 후에는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하여 유해를 화장하겠다.
불만 있나, 요한 에를리히? 그렇다면 정식으로 소를 제기하는 건 어떤가.
요한 에를리히:개새끼야!
닭이 시장 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이야!
이제 공화국 시민들은 다양한 옛 지역에서 유래된 속담을 다 섞어 씁니다.
이성적으로 구는 요한답지 않게 점점 격앙되고 있습니다.
헌병대에게 이런 식으로 반항하다간 징계 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끼어들어 요한을 말릴 수도 있고, 그들은 내버려두고 피를 뒤집어쓴 에르드를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일련의 광경들이 꼭 악몽 같다. 언젠가 보았던 것도 같고, 눈 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안개에 가린 듯 흐리다. ...이렇게 못 박힌 듯 서있으면 안된다. 생각이 미치자 얼른 걸음을 옮겨 요한의 곁으로 다가선다.) ...선배님. 이만 하세요. 마음은 알겠지만... . (위험하다. 단호한 투로 고개를 저었다.)
베아트리체 힐:
설득
기준치: |
40/20/8 |
굴림: |
1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요한 에를리히:이런, 말도 안 되는…… (무어라 더 항의하려는 듯하였으나, 베아트리체의 단호한 시선에 씨근거리면서도 시신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베아트리체 힐:...선배님도 위험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정말. (작게 꾸벅이고는 피를 뒤집어쓴 에르드에게 곧장 달려간다.)
......에르, 괜찮아? 바로 앞에서.... (제 소매를 잔뜩 끌어당겨 곳곳에 묻어난 것들을 닦아낸다.)
에르드:…… 다치진 않았어. (일차적인 충격이 가시자 제 몸에 흠뻑 튄 타인의 피가 무척이나 예민하게 감각되어온다. 뜨거웠던 것이 점차 식어가는 온도나 자신을 온통 뒤덮은 액체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유발했다.)
베아트리체 힐:(이내 끈적하게 남을 것들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야. ...일단 들어가자. 일단 우선 씻고....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 할까.
에르드:(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죽은 것도 죽은 것이지만 헌병대까지 우르르 몰려온 현 상황에서 눈에 띄는 건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베아트리체 힐:
민첩
기준치: |
70/35/14 |
굴림: |
6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에르드는 꽤 거구인 편이지만, 작고 마른 베아트리체가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퇴로를 뚫어주었기에 눈에 띄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노노이 라가힛의 시신은 결국 헌병대가 회수해 갔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로 돌아가 경거망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식의 공지가 내려왔습니다.
그나마 기숙사 안에서는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으므로 친구들의 방과 방을 건너다니며 몰래 저들만의 추측을 속삭이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은 학생회로 처음 전해져서, 기숙사 휴게실을 몇 개 거쳐 교정 전체로 퍼졌습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지독하리만치 세련된 통치 방식은 사람들을 자기 주도적으로 감화시켰습니다.
한번 스러진 인류를 복구해 빛나는 새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어.
나라가 잘 하고 있으니 박수를 치는 것은 시민의 지지이지 신민의 굴종이 아니야.
사람들은 공화국 정부가 정상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전시도 아닌 교내에서 헌병대원의 손에 학생회장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문명적인 나라에서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졌습니다.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잔인한 억압을 보면 일단 공포에 질려 입을 닫는 법입니다.
함께 기숙사로 돌아온 이후, 일단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죠.
베아트리체는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정보 없이 가만히 숨어 있어서는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릅니다.
학생들이 많이 가는 장소를 떠올려 보니 기숙사 1층 학생식당이나 2층 휴게실 정도가 떠오릅니다.
우선 학생식당부터 가볼까요? 에르드를 기다렸다 함께 가도 상관없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후. (낮게 숨을 내쉰다. 지금의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라 무언가 정보라도 얻어야만 하는데. 쉽사리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금방 오려나. 조금만 기다려볼까.)
얼마간의 시간 후 에르드가 베아트리체의 기숙사 문을 노크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노크 소리에 바로 방문을 열었다.) 아, 에르. 괜찮아? 주변을 좀 돌아볼까 했는데. 네가 올까 봐.
에르드:나도 그럴까 했는데 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먼저 노크해봤어. (미처 다 말리지 못한 건지 머리칼에 물기가 옅게 배여 있다.) 너도 그 소문 들었나?
베아트리체 힐:(급하게 왔구나. 끝에 맺힌 작은 물방울을 손끝으로 털어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소문인지 모르겠어.
에르드:유리 모하에 말이야. …… 죽었다던데. (이런 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에르드의 귀에도 들어왔을 만큼 학내 분위기가 난리도 아니었다.)
베아트리체 힐:........아. 세상에. 정말...? ...어떻게 그런.
...설마 헌병대에게?
에르드: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애초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 사람 페어는 요한 에를리히니, 그에게 물어야겠지.
베아트리체 힐:...응. 그럼... 학생식당부터 가볼까?
에르드:(끄덕인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더군.
학생식당에는 헌병대원 두 사람이 경계를 서고 있습니다.
들어 보니 공식적인 사유는 어제 라가힛의 사건 탓에 교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감시가 있는 탓인지 학생식당은 영 조용합니다.
학생들 몇몇이 눈치를 보며 식사를 하고, 주방 직원들도 친근하던 평소와 달리 좀처럼 말을 걸지 못하고 허둥거립니다.
그때 직원 한 사람이 베아트리체를 향해 손짓을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직원을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함께 걸어간다.) 저를 부르신 게 맞나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그맣게 속삭여 옵니다.
직원: 학생, 요한 군이랑 그 멘토인가 그거지?
요한 군이 어제부터 통 안 보이는데, 큰일이네……. 괜찮으면 이것 좀 전해줄 수 있겠어요?
직원이 건넨 것은 웬 달걀 두 개와 음료수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네, 그럼요. 꼭 전해드릴게요. (건넨 것을 양손에 받아든다.)
달걀은 묘하게 가볍고, 안에서 달각달각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그때,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학생 하나가 눈에 띕니다.
1학년 명찰을 달고는 있는데 영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그는 멀찍이 선 헌병대원들의 눈치를 보더니 식판을 돌려놓는 척 다가와 속삭입니다.
우리 빨대가… 아니, 미안해요. 그러니까 우리 취재원이, 학교에서 어제 큰일이 있었다고 하길래 내용을 알고 싶어서 몰래 들어왔어요. 뭐 얘기해줄 거 없나요?
앙셰네 지라면 풍자와 비판으로 유명한 대형언론사네요.
베아트리체 힐:...어제의 일이라면. (경계를 서고 있는 헌병대원들을 한번 돌아본다.)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힘들 것 같아요.
학생:…… 그렇군요. (당신의 손에 명함 하나를 쥐여준다.) 혹시 나중에라도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줘요.
주변 학생들에게 요한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네, 그럴게요. 꼭.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주변의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실례할게요. 혹시 요한 선배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까 2층에서 본 것 같다’는 말을 해 주는 선배가 하나 있네요.
베아트리체 힐:..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꾸벅 인사하고는 2층 기숙사 휴게실로 향한다.)
에르드:(식당 앞을 지키는 헌병대원을 고까운 눈으로 봤다가 베아트리체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다.)
이상하게 식당을 제외하면 기숙사엔 헌병대원이 전혀 없습니다.
헌병대 수색이 학교와 전부 다 협의되지 않기라도 한 걸까요?
휴게실은 각층마다 2개씩은 있고, 퍽 넓어서 작은 도서관처럼 여러 학생들이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인구밀도가 심하게 높네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수십 개의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거나 경계하는 시선으로 돌아보다가, 같은 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안도합니다.
학생 몇이 다가와 베아트리체에게 말을 겁니다.
“얘기 듣고 온 거야, 아니면 그냥 들른 거야?”
베아트리체 힐:...요한 선배가 이쪽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리, 그 소문이 맞는지 확인 좀 해보려고 모였어. 진짜라면 학교를 다 뒤집어야 할 사안이잖아. 유리 선배 얘기 말이야.”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들, 어디론가 연락을 잔뜩 돌리는 학생들.
그는 태블릿 디바이스를 조작하고 있었는데, 요즘엔 잘 쓰이지 않는 물리 키보드까지 두드리는 중입니다.
요한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는지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베아트리체 힐:(다들 얼굴들이.. 그까지 가는 걸음이 무겁다.) ....괜찮으세요? 참, 이걸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달걀 두 개와 음료수를 요한에게 건넨다.)
요한 에를리히:그냥저냥. (내민 물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받아들었다.)
부활절도 아닌데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그 달걀에는 ‘성심성당’ 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은 달걀 껍질을 깨트립니다.
안에서 나타난 건 삶은 달걀 흰자가 아니라 빈 내부입니다.
요한 에를리히:너희 마침 잘 왔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오전 04시를 기해 정부지침으로 학교와 외부 통신이 완전히 차단됐다. 인자미나도 접속이 안 돼. 학교가 정보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지.
내 설계로 이 차단 시스템을 잠시 들어내는 중이야. 유리 얘기가 사실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맞다면 다음 대응 방침을 생각할 거다.
베아트리체 힐: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요.
...이 메모리 카드도 그것 때문에 필요하셨던 건가요?
요한 에를리히:그래. 내가 신부님께 부탁드려서 보내주신 거야. 애초에 유리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연락주신 분도 신부님이고.
만일을 위해 물리적인 공간에 데이터를 저장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서버에 뭘 기록해 봤자 검열당하면 끝이니까.
에너지를 섬세하게 다루어 서버 간 데이터 전자 신호에 간섭하는 용도로 활용하곤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거기에 두 사람의 도움이 왜 필요할까요?
에르드:일단 뭔지 들어봐야겠는데. (언제나처럼 싸가지 없음)
요한 에를리히:(그 태도도 이제 익숙해진 듯 별말 없이 안경을 벗고 제 눈가를 꾹 누른다.) 학교 서버는 규모가 몹시 크고 복잡해. 보안도 아주 철저하지.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는데, 내 설계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바로 추적될 거다.
너희는 이 학교의 유일한 정식 페어지. 동조율이 안정된 페어가 에너지를 뒷받침해 주면 안정적인 설계에 도움이 돼.
…하지만 에르드, 그리고 힐. 이 일을 돕는다는 건 너희도 이 학교나 정부 지침에 반기를 드는 동조자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유리와 관련된 진실을 파헤쳐야 할 필요가 있고, 여기 모인 애들도 그 목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지만, 너희 생각이 어떨지는 몰라. 괜찮겠어?
베아트리체 힐:...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해야만 하는 거라고. ...저도 진실을 알고 싶어요. (말을 마치고는 에르드를 가만 올려본다.)
에르드:…… 1층 꼬라지 보니 학교가 헌병대에게 반쯤 먹혔더군. (이전, 인자미나에 올라왔던 게시글을 기억한다. 베아트리체가 아놀드 박사에 관해 해주었던 이야기도. 그때에도 의구심을 품었었는데, 헌병대가 학교를 이 지경으로 휘젓고 다니는 꼴을 보니 정부를 향한 적대감과 경계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는 딱히 정의로운 성격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억압당하고 짓눌리는 걸 당하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이 개같은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진실이 필요하다면 까짓것 반기 좀 드는 게 두렵진 않아.
요한 에를리히:(잠깐의 침묵.) 둘 다 선뜻 응해줘서 고맙다. 그럼 부탁할게.
구현자는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시도합니다.
에르드:
사격(권총)
기준치: |
80/40/16 |
굴림: |
6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베아트리체 힐:
항법
기준치: |
70/35/14 |
굴림: |
89 |
판정결과: |
실패 |
베아트리체 힐:
항법
기준치: |
70/35/14 |
굴림: |
5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황금색과 연보라색 에너지가 조화롭게 피어올라 넘실거립니다.
그 가운데 요한이 조심스럽게 명령어를 입력하고,
학생: ……돼! 잠깐만,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볼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학생들은 단계별로 차단이 해제되었는지 확인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요한 에를리히:좋아, 이 휴게실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내 태블릿 핫스팟으로 데이터가 연결된 범주 내에선 추적당하지 않고 기록 없이 자유롭게 웹에 접속할 수 있다.
우선 유리가 정말 헌병대에게 끌려간 게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해. 신부님이 목격하셨다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요한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패널을 위로 끌어올려 크게 키웁니다.
화면이 여러 개로 분할되며 다양한 각도의 CCTV를 재생하기 시작합니다.
새벽 시간대를 계속해서 돌려 보며 유리를 찾아내고 있는데, 쉽지 않아 보이네요.
베아트리체 힐:
자료조사
기준치: |
90/45/18 |
굴림: |
3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화면 구석 ‘16번 카메라’에서 헌병대원 네 사람이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기숙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발견합니다.
베아트리체 힐:(화면을 유심히 바라보다 구석에서 짚어낸다.) ...저기 16번 카메라에요. 오늘 새벽 1시 24분에.
베아트리체가 한 화면을 가리켜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됩니다.
:“근데 저게 유리 선배라고 어떻게 확신해?”
“바보야, 덩치가 크고 짧은 적발 머리면 확실하잖아!”
“어, 차에 태운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봐!”
“미카엘관 뒤쪽으로 나갔네. 저기로 가면 방위사령부 방향 아냐? 헌병대 본부가 거기잖아!”
“하지만… 저건 ‘끌려갔다’지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근거는 아냐.”
요한 에를리히:만일 방위사령부로 끌려 갔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치료를 위해서든 은폐를 위해서든 병원으로 연락이 갔을 거야. 군 내부에서도 난리가 났을 테고.
저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이 어디지?
학생1: 하씬느. 근데 거기 물어본다고 이렇다할 대답이 나오겠어?
학생2: 괜히 우리가 들쑤셨다가 더 큰일나는 거 아냐?
학생3: 정보 캐는 건 기자들이나 능숙한 일이잖아. 차라리 어디 제보를 하는 건 어때?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베아트리체 힐:...아. 여기로 오는 길에 앙셰네 지 수습기자님을 만났어요. 잠입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때 명함을 받았어요. (자켓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을 꺼내 놓는다.)
...이 쪽에 연락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요한 에를리히:…좋아, 앙셰네 지는 그나마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로 기사를 많이 내는 곳이지.
한 번 제보해 보자. 그쪽에서 취재해 주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가능한 많은 학생들을 모아 항의를 하는 거다.
유리가…… 유리가 지금 어떤 상황이든 간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대학 내에서 학생을 헌병대가 새벽에 몰래 끌고 갔다’는 사실 자체가 특종 감이니.
베아트리체 힐:...네, 그럼 전화해볼게요. (명함에 적힌 번호대로 전화를 걸어본다.)
베아트리체가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걸면 학생식당에서 마주쳤던 수습기자가 연락을 받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안녕하세요, 기자님. 방금 식당에서 마주쳤던 학생입니다. ...제보 드릴 것이 있어서요.
...어제 학생회장님이 헌병대원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서 그와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헌병대에 끌려간 게 맞다는 CCTV영상을 찾았어요. 어제 새벽쯤. ...이와 관련해서 취재를 해주셨으면 해요.
수습기자: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우린 우리대로 알아보고, 정황이 나오면 공유해 줄게요. 급한 일이 있으면 이 번호든, 앙셰네 지 공식 번호든 연락해요. 위에 보고해 둘 테니까요.
베아트리체 힐:...네, 감사합니다. 부탁드려요.
전화를 끊은 뒤 학생들은 저마다 할 일을 하며 상황 정리를 기다립니다.
에르드:유리가 왜 그렇게 된 건지 짐작가는 일 없나? (요한을 가만 바라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생회장을 잡아갔을 리는 없을 텐데.
요한 에를리히:…… 인자미나에 올라온 글로 한 번 학교 뒤집어졌던 거 기억나지? 그 글을 쓴 게 유리다. 내가 그걸 도왔고.
근거 없이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 뭘 알아낸 거야?
요한 에를리히:(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첫 가상 훈련 때 유리가 하산 2세 모스크를 보고 있었던 거, 떠오르나? 우리는 하늘길 시스템의 크로노미터 지도를 그대로 따른, 북동 게이트를 묘사한 가상세계에 있었지.
그 모스크는 그 방향에서 보일 수 없어. 좀 더 서쪽에 있으니까.
유리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지도마저 조작되고 있다고.
정부가 뭔가 말도 안 되는 걸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스와콥문트는 카사블랑카로부터 정확히 1만 km 떨어져 있다. 진실을 호도하기엔 너무 좋은 거리감이지.
카사블랑카의 지도가 스와콥문트 문제를 증거한다는 이야긴 아니다. 처음의 의심이 그렇게 시작됐다는 거지. 보여서는 안 될 게 보이니까. 그때부터 유리랑 내가 손을 잡고 스와콥문트 문제를 파 보기 시작했어. 아놀드 박사와 관련된 소문이 그때부터 돌고 있었거든.
설령 그 모든 소문이 거짓이라서 처벌을 받아야 한들, 새벽에 남몰래 끌려가 종적을 감추는 형태여야 하나? 난 동의할 수 없어.
베아트리체 힐:(가만 끄덕이며 요한의 말을 듣는다. 들을수록 차게 식은 어느새 심장이 일렁이며 끓어오르는 것만 같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그 글을 쓰셨다면 혹시 그 글에 있던 보츠와나 망명정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건가요?
...어디서도 찾지 못한 이야기라.
요한 에를리히:…… 그건 지금 당장은 말해주기 어려워. (에르드를 바라본다.) 네 가까운 분이 스와콥문트에 계시다고 들었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에르드:뭔가 아는 게 있나 보군. (찜찜하지만 단서를 잡을 수 있단 것만으로도 놓칠 수 없는 이야기다. 고개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베아트리체가 앙셰네 지에 한 제보는 상당한 유효타였습니다.
똘똘 뭉친 기자들이 병원과 군 양쪽에 '빨대를 꽂고' 소식을 물어 왔죠.
오전 07시 04분, 유리 모하에의 시신이 하씬느 병원 응급실로 실려 들어왔습니다.
심폐소생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시신이 구급차에 실릴 때부터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고 증언했습니다.
헌병대는 참으로 교묘한 방식을 사용해 유리의 혐의와 라가힛의 죽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노노이 라가힛이 금지 약물 혐의를 썼고, 그 공급책으로 유리 모하에가 지목된 것이죠.
수사 과정 중 라가힛과 동일하게 약물을 과용한 유리가 쇼크사했다는 것이 군과 정부의 입장이었습니다.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고작해야 가끔 강성 노조의 시위 정도나 일어나던 도시에서 갑작스레 불길이 치솟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기술은 재앙의 날을 거치며 실전되었지만, 화염병만 저항의 상징인가요? 무기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누구도 공격하지 않은 채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한번 폭력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상황을 겉잡을 수 없다는 학생회의 판단이 들어맞았죠.
4학년 학생들이 학생회관을 겹겹이 둘러 지키고,
아직 전투 역량이 모자란 저학년들은 내부에 모여 앉아 손을 잡고 촛불을 들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굳게 다문 입들, 아무런 공격도 없이, 오로지 침묵의 농성. 그 안에 들어있다. 차마 저 밖에 나서 겹겹이 둘러 지킬 힘이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한 뜻을 품은 이들의 손을 잡고, 촛불을 들고, 모여 앉았다.)
에르드:(본래라면 이런 일에 참여했을 리 없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그러나 리사가 스와콥문트에 있고, 스와콥문트에 석연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제 유리의 사망은 저와 '관련없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진실을 알아내야만 한다. 학생의 석연찮은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겠는가? 어쩌면 다음은 자신이 될 수도, 베아트리체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여러 번 선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 당하고 살 수는 없었다.)
굳건히 바깥을 바라보는 시선은 건물과 옥상을 타고 흘러 모래바람에 실립니다.
생생하게 살아 지펴진 격노가 그 부르짖음 안에 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높으신 분의 말 한 마디는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눈썹 하나 까딱하면 날벼락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낮추고는 풍자시를 달콤한 아부의 시로 고쳐 버린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우리…….
차마 목이 메어서, 요한은 더 말을 잇지 못합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어떤 시입니다. 그것도 수첩에 메모한.
어떤 역사의 기로에서 적극적이거나 방조적이거나 소극적일 수 있죠.
베아트리체 힐:(제 앞에 떨어진 수첩을 주워들었다. 격노로 떨리는 그의 손은, 메인 목소리를 눈에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선 연단을 등지고, 손을 마주 잡은 모두를 바라보고 선다. 제 목소리가 모두에게 닿을 수 있기를. 보다 힘주어 외친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테니.)
........
「그러나 우리 노래의 선율이 서글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그 문장이 베아트리체의 맑고 명료한 발음을 타고 터진 순간,
근처 반경에 있던 모든 스마트워치가 새빨갛게 진동하며 경고음을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를 악문 요한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어 나갑니다.
요한 에를리히:이 시를 아십니까? 세상에서 삭제된, 기록말살형을 받은, 끝없이 무수한 텍스트를 아십니까? 러시아 땅이 절반쯤 황폐화되었다고 해서 네크라소프의 시까지 사라져야 합니까?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던 우리는 어제 학우 두 사람을 잃었습니다.
울며 더듬더듬 준비한 말을 읽는 학생도 있었고, 분노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학생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평화로웠습니다.
지나치게 큰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이 들립니다. <이성> 판정 (0/1)
베아트리체 힐:
SAN Roll
기준치: |
89/44/17 |
굴림: |
7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지금 즉시 학생회관 점거를 중단하고 해산하도록 한다. 00시 정각까지 해산하지 않을 시 헌병대는 강경 진압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반복한다, 각성자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알린다…….”
자정까지는 이제 4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새하얘진 얼굴, 벌건 눈동자들이 요한과 학생회 임원들에게 향합니다.
진압이란 단어까지 썼다면 학교 징계 따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체포당했다가,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빠져나갈 사람은 지금 나가도록 해.
학생1: 선배는요? 지금 제일 위험한 거 사실 선배예요.
학생2: 1학년, 2학년부터 일단 내보내. 농성을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지 전교생의 절반이 여기 몰려 있을 필요는 없잖아.
베아트리체 힐:......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빠져나가고 싶지 않아요. 선배님들은요.
...에르. (옆에 선 이의 손을 간절하게 붙잡는다.)
에르드:(고개를 젓는다.) 우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네가 다치면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할지를 생각해라.
베아트리체 힐:....하지만. (슬퍼하는 낯들이 떠오르는 만큼 물러서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이, 그러한 다음이 또 생긴다면.)
....함께 나갈거야?
에르드:응. 여긴 3, 4학년에게 맡기고 우린 이미 빠지자. 무력 충돌이 분명 있을 텐데 우린 아직 능력 사용도 능숙하지 못하잖아.
괜찮아. 들고 일어나는 일은 이걸로 끝이 아닐 테니.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찬 비가 내려도 쉬이 꺼지지 않을 불이.)
베아트리체 힐:..........그래.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차게 피어 눈에도 담겼을 에르드의 환한 불꽃을 보았고, 그것이 제 심장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기다렸다가, 베아트리체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을 불태운다.) 옳은 말은 거세되어선 안 돼.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살아서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야 다음 세대로 우리 말들이 전해질 수 있어.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도 강력하다. 내 말 이해하겠어?
베아트리체 힐:...네. (그것이 요한에게서도 살아 숨쉰다는 것을. 이어 끄덕이는 고개는 시원스럽다.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이야기하리라.)
...부디 조심하세요.
몇 마디 말이 더 오가고, 치솟는 말들을 삼키던 그는 에르드에게 급히 제 수첩을 쥐여 줍니다.
요한 에를리히: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 주는 거다. 네가 가져가. 가면서 빨리 읽어보고. 난 내용 다 외우고 있어.
에르드:(갑작스레 수첩이 쥐여지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곧 군말없이 고개 끄덕였다.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가자, 베아트리체. (당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베아트리체 힐:....응. (내밀어진 손을 힘주어 잡는다. 그가 처음으로 내민 손에, 절대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로 아우성치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겨우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었을 즈음 에르드가 멈춰섭니다.
에르드:(자리에 멈춰서서 급하게 요한이 준 수첩을 읽어본다.) …….
베아트리체 힐:(그 옆에 천천히 멈춰선다) ....무슨 내용이야?
에르드:망명 정부와 관련된 내용이군. 연락책과 위치가 쓰여 있어. 칼라하리 사막 너머의 보츠와나.
그때 탕! 소리가 들립니다. 분명한 총성입니다.
사이렌 소리, 확성기 소리가 뒤엉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에르드:(총성에 고개를 들어 학생회관 방향을 바라본다.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뇌내를 휘젓고, 그는 오래지 않아 결단을 내린 이의 얼굴로 입술을 한 번 짓씹었다.)
가봐야겠어.
(그는 침묵 끝에 단 한 마디만을 내뱉으며, 베아트리체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베아트리체 힐:(총성과 함께 소란이 이는 곳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그 것도 잠시, 눈 앞에 있는 이의 얼굴에 스며든 기색에 묻혀간다. 이어지는 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라.)
....어디로? 어디로 간다는거야.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순식간에 허무만 남는다. 손을 뻗어 힘 빠진 그의 손을 다시금 잡아들었다.)
에르드:너도 이미 직감했잖아.
보츠와나 망명 정부, 그곳으로 가야 해. 리사의 단서를 얻기 위해서라도.
학교를 떠난 게 들키면, 각성자가 사관학교를 떠났다는 것 자체가 중죄니 페어인 너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겠지. 혹은 고문까지도. 그러니 베아트리체, 넌 오늘 사건과 아무런 연관도, 나를 본 적도 없는 거야.
내가 오늘 사고에 휘말려 죽었다고 증언해 줘.
베아트리체 힐:(내내 마음에 걸리던 그 곳이 결국 에르드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절망스럽다. 가족같은 이를 찾아나서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릴 수 가 있을까, 싶다가도 제 곁만큼은 떠나지 말았으면 한다.)
...그 곳이 어떤 곳일 줄 알고.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는거잖아. ....에르.
...내가 어떻게 그래.
(떠나지마, 내 곁에 있어줘. 이 곳에서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그런 무책임한 말들이 떠올랐다가 저 아래로 가라앉는다. 겨우 붙잡은 손에 힘만 주었다.)
에르드:알아. 얼마나 위험할지는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어.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지. (자신의 안위를 통째로 내거는 선택을 하는 사람치고는 지독하게 담담하고 무심한 어투였다. 한 번 결정을 내리면 그는 망설이지도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정한 길을 향해 발을 내디뎌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나 험한 가시밭길이더라도.)
떠난다면 지금이 적기야.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진 지금 떠나야 그들 사이에 휩쓸려 죽었다고 적당히 무마할 수 있으니까.
스마트워치는 각성자를 에너지 파동으로 구분하지. 우린 언약을 했으니 내가 이걸 풀어서 네게 주고, 네가 이 시계를 학생회관에 던져 놓으면 그들이 위치 추적을 할 수 없을 거야. (제 손목으로 시선이 떨어진다. 당장이라도 시계를 풀고 싶으나 당신이 손을 붙잡고 있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베아트리체 힐:(아.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다짐을 한 그는, 아무리 잡는다고 해도 돌아서지 않는다. 제가 해야할 일을 할 것이며, 궂은 길도 헤쳐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베아트리체는 너무도 잘 알았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 뿐이라는 게. 가슴이 너덜하게 조각나는 기분도 어쩔 도리가 없다. 손에서 느슨하게 힘이 풀린다. )
에르드:…….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알았음에도 바로 시계를 끌러낼 수 없었던 건, 베아트리체의 연보랏빛 눈에 비치는 절망과 슬픔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제 마음을 불쑥 비집고 들어왔는데, 이제는 제 발로 그를 밀어내고 떠나야만 한다.)
(항상 먼저 시선을 피하던 과거와 달리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미안해.
돌아올게, 꼭. (타인을 달랠 만한 뛰어난 화술도 기교도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투박한 약속뿐이다.)
베아트리체 힐:(음울하게 잠긴 어느 작은 바다에 태양처럼 환한 빛이 깃들었다. ...에르드의 얼굴을 마주 할 때면, 온 바다가 쏟아져 흐를 것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떠나야만 하는 이의 어깨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 차라리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덜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아내야지.)
...살아. 살아야 해. 반드시.
...그리고 꼭 돌아와. 부디.
언약이 끊어지는 순간 페어였던 이들은 기억을 잃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죠.
오직 상대가 죽어 해제된 언약만이 기억 손상을 일으키지도 않고 에너지 색상을 원래대로 돌이키지도 않습니다.
에르드의 말대로, 그가 떠나기에는 지금만큼 완벽한 조건이 없습니다.
에르드:(천천히 스마트워치를 풀어내어 당신의 손바닥 위에 건네주었다. 줄 수 있는 게 온기나 곁에 있어 주겠다는 확신 대신 후환을 덜어줄 증거뿐이라니.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약속하지. 살아남아서 돌아올게.
그때는 아주 가끔보다는 좀 더 오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스마트워치를 받아들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무겁고 또 가볍게 느껴져서 금방이라도 놓칠 것 같아 세게 손 안에 쥐었다.)
.....그래. 그때에는 좀 더 오래 곁에 있어줘. 기다릴게.
(내리 깔린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금색의 눈동자는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제 안에 언제고 떠올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에르드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숨결이 닿을만큼.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증명한 손이 아니라, 온전히 당신의 삶을 기원하는 손이 그의 뺨에 가져가 닿았다. 온 마음을 담아 쓸어내린다. 지금의 마지막 인사가 너무 슬프지 말았으면. 천천히 발끝을 들어올려, 의지로 굳은 입술 위에 가볍게 제 입술을 맞대었다. 스치듯이 가볍고 다정한 인사.)
...날 잊지마.
에르드:(일순 눈이 커졌다. 많은 선을 허용해준 에르드로서도 입맞춤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밀어내는 일은 없었다.)
(뺨을 감싼 손길에서 당신의 비탄과 바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애의 의미였다.)
절대 잊지 않아. (모든 걸 두고 보츠와나로 떠나는 이유가 리사였다면, 아무것도 잊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다.)
(다시 고개는 떨어지고 체온이 삽시간에 멀어진다. 아주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었으나 오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갈게. (안녕이라 말하진 않았다. 영원한 작별은 없을 테니까.)
베아트리체 힐:(감촉을 새기듯, 따스한 뺨에 오래도록 닿아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심장이 진창에 나동그라지고, 너덜하게 찢겨도 그의 앞에서는 드러내지 말자.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환하게 웃어보였다. 물기어린 눈은 제대로 휘어졌을까? 턱 끝까지 차오른 울음에 제대로 미소는 지었을까? 베아트리체는 알 수 없다. 다만, 너무 슬퍼보이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녀와. (역시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돌아올테니까. 잠깐의 헤어짐이 길지는 않으리라.)
멀리 모래바람 소리, 발밑에 흐트러진 아모리베늄, 스무 살의 한 갈피에 고인 너.
돌아올게… 널 잊지 않고, 돌아올게. 그 약속밖에는 할 수 없겠죠.
이제야 조금씩 서로를 향해 열리게 된 마음을 모두 미뤄두고 떠나야 하는 심정이란.
꺼내 보고 쓸어 만질 때마다 닳아 없어지니까.
이윽고 그것으로조차 견딜 수 없을 때가 오면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텅 빈 구멍이 남게 되니까.
하지만 그라면 당신의 가슴에 영원한 구멍이 남기 전에 돌아와 자리를 채워주겠죠.
이제 우리는, 멈추지도 망설이지도 말아야 할 순간이 닥쳤다는 것을 압니다.
상황에 내몰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 스무 살에, 죽기보다도 힘든 순간을 고르는 것이 선택이기는 한가요?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대체 의미가 있기는 할까요?
돌아보지 않고 걷던 그가 기어코 뛰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연보랏빛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아아. 떠나는 등 뒤로 하염없이 비가 쏟아져 내린다. 주저앉은 메마른 땅이 멍으로 물들어간다. 저 등에 대고 차마, 미처 말로서 전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제야 막 피어난 감정을.)
................사랑해.
사랑해, 에르.
(듣는 이 없는 고백은 마른 땅에 스며든다.)
이제야 막 싹을 틔운 고백은 모래바람에 연약하게 흩날려 사라지고,
두터운 의지와 황금처럼 단단한 결심을 품고서 에르드는 달립니다.
눈망울을 타고 내리던 비가 하늘에서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소나기로 길어져 키질되는 쌀처럼 땅바닥에 까불렸습니다.
어떤 빗줄기는 해풍의 구조를 이루는 방파제처럼 윤무의 일부에 이르러 춤을 춥니다.
세상의 모든 경로와 진실이, 구현이, 설계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만 같은 감각.
그러나 신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라면 이런 이별은 겪어도 되지 않겠죠.
학생회관 쪽에서 울분에 찬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계절에 맞지 않게 일부러 피워낸 아모리베늄이 지천을 뒤덮은 오늘은 각성자사관학교의 49기 졸업식입니다.
4년 전의 소요는 학교에 짐승이 할퀴고 간 듯한 총탄 자국 몇 개만 남겼을 뿐이었죠.
그마저도 오발에 의한 사고라고 판단되어 몇 사람이 징계를 받고 군복을 벗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공화국에 악의적인 사고란 것이 있기나 하겠나요?
도열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태도로 바로서 연단을 응시합니다.
학장의 지루한 축사가 끝나고, 귀빈들의 특별 축사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4년 전 학생회관에서의 일 이후, 학생들은 두 파로 갈려 서로를 물고 뜯었습니다.
'순수한 운동'이란 말이 그 시절쯤에는 농담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분기마다 한 번씩은 누군가가 밀고당하여 학교 바깥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체제에 반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변절은 사람을 이토록 지난하게 만듭니다.
절도있고 묵직한 걸음걸이. 떡 벌어진 어깨와 훌륭한 풍채를 지닌 어떤 사람입니다.
빛이 들지 않는 금빛 눈이 학생들을 응시합니다.
에르드:여기, 사랑했던 동기들을 길러낸 자랑스러운 나라의 요람에 돌아오게 된 것을,
…… 기쁘게 생각합니다.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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