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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230916] 루린 - 낭화애담 : 파랑이 이는 자리

플레이타임 : 14시간 반

 

 
바다에 머무르자 우리 그렇게 살자, 저녁놀 밟고 날아 거품 이는 물결에 뉘고 살자.
 
천일의 야화를 품은 바다로 가자, 수평선 접붙여 맞닿는 바다서 살자.
 
마침내 어둔 밤 사르고 해 타올라 밝으면 새벽이 올 것이다, 흰칠한 구름 노닐어 새파란 바다로 가자,
 
물 탁 풀어 연해진 창극과 감색 바다 서로 입 맞추는 곳에서 살자…….
 
사금처럼 부서지는 모래가… 머리칼 헤쳐 놓은… 바다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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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답방 나인들이 용포를 조심스럽게 빨아 말리고,
 
좋은 계절을 맞아 솜이불을 일일이 튿어 볕에 말리니 바야흐로 춘삼월 봄입니다.
 
창에서 흔히 비유하기를, 왕은 너른 해양이고 태자는 활기찬 파도라고 하죠.
 
상징에 맞게 태자궁의 전반적인 생김새도 카랑카랑하게 몰아치는 파도 모양을 닮았습니다.
 
날씬한 푸른색 처마, 비취빛 문살 틈으로 햇살이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잘 세탁하여 널어 둔 태자의 아청색 용포 역시 파도를 닮아 푸르게 빛납니다.
 
그러나 동궁에 갑자기 찾아온 봄이 반드시 아청색 용포나 알알이 움튼 매화며 연산홍의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래도록 제자리를 갖지 못했던 안주인께서 마침내 조만간 태자궁으로 오실 모양입니다.
 
금상 폐하께서 갑작스레 미리 약속되었던 정혼을 물리고 간택령을 내린다 하시어 안팎으로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이내 명을 거두셨으니 오래 기다렸던 아린이 소박을 맞을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태자의 가례를 위해 가례청이 설치되었고, 조용하던 관상감도 혼례 길일이 언제인가를 논하느라 바빠졌습니다.
 
덩달아 시강원의 일도 늘어났지요.
 
지금의 태자인 금록은 갑작스럽게 저위에 올라 왕실의 가례 절차에는 익숙지 않으니 익히고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금록은 평소보다 배는 길어진 듯한 교육을 간신히 끝마치고 막 시강원에서 나오던 참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급히 달려오는 자가 있었습니다.
 
직각:전하. 태자 전하!
 
춘추관의 젊은 직각으로, 아린의 먼 사촌형제가 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윤금록:으응~ (간만에 자리보전 좀 했더니 평소보다 배로 긴 수업 듣고 나온 것 같은 느낌에 위로 팔 한 번 쭉 당겨 펴다가 급히 달려오는 익숙한 낯과 마주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 급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즐거운 일이라도 생겼나 본데. 끝나기 전에 데리러 온 거야~? (그럴 리 없지만 던져나 본다.)
 
직각:저는 동궁전 소속도 아닌 것을요. 그건 아닙니다. (칼같이? 잘라냄) 동궁전 내관들에게 태자 전하 옷자락 한 번 붙들기가 그리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요 몇 달은 나름대로 열심히 수업에 임하였다 하시던데 틀립니까?
 
윤금록:방금 굉장히 칼같이? 잘라내지지 않았나 나? (기분 탓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가,) 맞지~ 왕이 된다느니 하는 건 역시 아직 잘 모르겠지만, 뭐어, 나 아니면 누가 할까 싶기도 해서 나름대로 성실함을 보이고 있다 생각했는데. 내관들 성에는 안 찰지도 모르지만 내 최선이니까 지금으로 족하다고 보아. (말을 마치고선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직각은 춘추관 소속이지. 내게 즐거운 일을 보고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주러 왔다든가?
 
직각은 주위를 살피더니 난처함 반, 익살 반이 섞인 얼굴을 합니다.
 
직각:과연 기다리신 바 맞을지는 모르오나, 기대에 못 미치지는 않으리라 사료됩니다.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서찰 한 통을 건네준다.)
 
그리고 속삭인다는 말이 이렇습니다.
 
직각:그 애가 몰래 전해야만 한다고 귀에 딱지 않도록 신신당부하는 것을 받아왔사옵니다. 소신은 모르는 일로 치겠습니다, 전하.
 
윤금록:(서찰 물 흐르듯 자연스레 받아들고서는 그 자리에서 쭉 펼쳐 들, …… 려다가 몰래 전해야만 한다는 말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그럼~ 누구 당부인데 당연히 모르는 일로 쳐야지. (음?) 그럼 나 이거 혼자 있는 곳에서 봐야 해?
 
직각:아, 아닙니다. (주변 슬쩍 두리번거리며 사람 없는 걸 확인하고는 몸을 슬쩍 금록 쪽으로 기울인다) 궁금하니까 저 있는 데서 봐주십시오. (?)
 
윤금록:뭐지? (뭐지?) 직각한테도 비밀로 하라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역시, 제 친애하는 이가 그 정도로 못 믿을 사람이라면 서찰을 맡기지조차 않았을 듯하니 신뢰와 믿음을 근간으로 해서 그림자에 잘 숨어서는 서찰 펼쳐 읽었다.)
 
서찰을 펼쳐 보면 아린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급하다는 투로 쓰여 있긴 한데, 건네 준 직각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금록이 보기에도 별로 급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남대가라면 궁궐 남문 바깥의 저잣거리를 말하는 것인데…….
 
금록을 보고픈 마음에 붓을 들었다 생각하면, 이 서찰은 그냥 편지가 아니라 연서가 될 수도 있겠네요.
 
옆에서 직각이 계속 웃음을 참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입니다.
 
기웃거리며 서찰 내용을 같이 읽던 직각은 몇 번 헛기침을 한 후에야 간신히 웃음기를 덜고 덧붙입니다.
 
직각:(좋을 때구나~ 히죽거리다가 애써 표정관리하며) 솔직히 그 애와 전하께서 연분 맺은 것이야 어디 사는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여러 일로 가례가 몇 해나 미뤄진 것도 사실이고, 얼마 전에 폐하께서 간택령을 내리신다고 시끄럽기도 했고…
아린이 그런 면으론 표 내는 아이가 아니라고는 하나, 애닳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아무렴 어르신들끼리 잘 진행하고 계실 것이야 소신도 그 아이도 잘 알고 있사오나, 그래도 슬쩍 달래 주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윤금록:얼굴 못 본지도 확실히 조금 되긴 했지~ 아무래도 왕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느니 하는 거 너무 바쁜 일이 아닌가 싶어. (교육 중간중간 놀러나간 것은 기억에 없다. 당연하지, 그게 뭐 하루이틀 일이었어야.)
같이 저잣거리로 나가 꽃구경이라도 하란 말이지? 직각이 그리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데~ (말리면 담이라도 넘어가려고 했다. 괜스레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이고는.) 지금 옷은 괜찮나? 이대로 남대가에 나가면 내 미모와 더불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싶은데.
 
직각:창의 들보 되는 자리가 어디 쉽겠습니까. (동정…… 해주려다가도 못하겠다. 그간 도망간 태자를 잡는다며 안간힘을 쓰던 동궁전 내관과 궁녀들을 숱하게 봐 왔는지라) 용포는 아무래도 눈에 띄니, 동궁전에 들려 환복하고 나가시지요.
아, 그리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직각은 귀한 청금 비단으로 감싼 작은 함을 바쳐 올립니다.
 
직각:태자궁에 오기 전에 잠시 태후 마마의 부름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이것은 태후 마마께서 전하께 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왕실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귀물인데, 혼례 전에 정인에게 주는 정표라고 하십니다.
기왕 다녀오실 요량이시라면, 꽃도 흐드러지게 폈고 해변도 가까우니 풍경 아름다운 곳에서 쥐여 주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윤금록:(빨리 오라기에 직각의 옷을 내놓으라 할 명목을 만들려고 했는데, 친절히 동궁전까지 안내해 주는 요량을 보아하니 역시 요령 좋은 사람이네~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잠시.) 얼굴 보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좋은 추억도 쌓고 오라, 연정의 증명도 할 겸, 뭐 이런 말이지? 놀러 나가는 건 나와 나의 정인인데 어째 직각이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워 둔 기분인걸. (함엔 무엇이 들어 있지? 싶어 숄랑 열어 보려다가, …… 이건 혼자 봐야지 싶어서 일단 받아만 들었다.)
 
직각:예에, 그렇습니다. 그야, 아린이 그애가 태자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고 따르는지 익히 봐 왔으니…… 큼. 큼큼. (말하다 말고 얼른 헛기침한다.) 제가 이런 말을 했단 걸 들키면 그애가 아주 경을 칠 겁니다. 부디 이것도 모른 척 좀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뿐 아니라 태후 마마께서도 두 분을 어여삐 보고 계시니 이런 귀물까지 내려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모쪼록 잘 다녀오십시오, 전하.
 
윤금록:듣고도 모른 척 해야 하는 게 너무 많은 거 아냐~? (하지만 즐거웠으니 상관없나?) 배웅을 받지 않아도 이미 잘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직각한테 그런 말까지 들어 버렸으니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써 보도록 할까. 그런 의미에서, (함 위로 서찰을 원래의 상태로 말아 두고는 양 손으로 안아들었다.) 오늘의 의복은 어떤 색이 좋다고 생각해? 내 특별히 직각의 의견을 경청해 볼 테니.
 
직각:제 입이 방정입니다. (손바닥으로 입 찰싹찰싹 때린다) 어떤 색을 입으셔도 전하께는 전부 어울리겠지만, 그래도 태자 전하는 창의 활기찬 파도라 불리시는 분이니……. 감청빛은 어떠십니까?
 
윤금록:흐음, …… (자색을 입고 나가려던 계획이 무산된 낯으로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여 뒀다. 꼭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저 사람, 절대로 방금의 조언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 생각했을 법도 하게끔.) 참고할게~ 그럼. (동궁전으로 걸음을 서둘러 갑니다. 보는 즉시 나오라 했으니,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니까요.)
 
걸음을 빨리하여 동궁전으로 향합니다.
 
어떤 색 옷을 입을 건가요, 왕자님?
 
윤금록:(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는 없으니 - 비록 자주 그래왔다 할지라도 - 조언을 받들어 감청색 도포를 휙 걸치고서는, 거울 앞에 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사이 태후가 전하라 했다던 함도 열어봅니다. 무슨 전통인지 구경이나 해 볼까 싶어.)
 
비단함 안에는 청금석에 금테를 두른 쌍가락지가 한 쌍 들어 있습니다.
 
금선으로 아주 세밀하게 파도 모양을 그려 놓았고,
 
함 윗부분에는 음각으로 ‘낭화지환浪花指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낭화라면… 파도가 부딪힐 때 하얗게 해지는 물방울이 꽃 같다는 시어이니, 과연 그럴듯한 이름이네요.
 
이것을 아린에게 전하라는 걸까요?
 
민망할 수도, 반가울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봄은 봄인가 봅니다.
 
윤금록:(가락지 하나 집어들어 제 손에 잘 맞는지 한 번 슬쩍 껴 보고, …… 잘 맞으면 나중에 전해줄 때 제 몫도 끼워 달라고 해야지, 원대한 계획만 세우며 도로 집어넣어 뒀다. 그것을 옷자락 어딘가에 잘 집어넣고, 서찰이 바람에 날아가는 일 없게 깔끔히 말아 서랍 안에 잘 넣어 두면 이것으로 채비는 끝인가?)
(아! 머리 정돈을 미처 못 했다. 경대 앞에 서서 머리 정돈에 빈말로라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소모하고는 남대가로 걸음을 나섰다. 보는 즉시 와 달라고 서신에 쓰여 있긴 하였으나, 아린이라면 제가 치장에 이 정도 공을 들이리라는 것쯤은 예상했겠거니~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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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록은 감청색 옷을 차려입고, 머리 정돈까지 열심히 한 끝에 궐 밖에서 가장 큰 저자인 남대가로 향했습니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한 다음 날이라도 되는지 손에 꼽을 정도로 하늘이 맑았습니다.
 
멀리 산 능선을 뒤덮은 철쭉, 어린아이들이 바구니에 담아 파는 산수유며 유채가 산뜻하게 마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심이 때때로 변덕스럽고 치졸하다 한들 창은 아직 살기 좋고 부유한 나라입니다.
 
백성들이 밝은 표정으로 오가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 아린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봄꽃 색 저고리와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채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별로 안 급한 것 같다’는 인상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윤금록:(역시 별로 안 급한 것 같지~ 아린은 이쪽을 보고 있는가?)
 
이아린:(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금록을 찾고 있다. 그러다 눈 앞으로 지나가는 흰색 나비에 시선도 빼앗기고…….)
 
윤금록:(그렇다면 뒤에서 발소리 살짝 죽인 채로 다가가서는 어깨 너머로 고개만 빠끔 내밀어 본다.) 무얼 그렇게 봐~?
 
이아린:저기, 나비가 날아가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대답하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휙 뒤돈다. 금세 연분홍빛 미소가 번져든다) 꼭 꽃을 찾아 날갯짓하려는 저처럼 말이지요. 어찌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든지, 저 나비가 찾아가고 있을 꽃으로 따라갈 뻔했답니다.
 
윤금록:그러면 또 이쪽의 만개한 꽃을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만나지 못했을 텐데도~? (슬쩍 한 손으로 제 뺨을 감싸 꽃받침 비슷한 것도 해 보고.) 서신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는 아니지만) 나온 건데, 내가 너무 늦었나?
 
이아린:과연 한가득 만개하였으니 다른 꽃이 아무리 예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입가 가리며 푸스스 웃는다) 아니에요. 준비에 오랜 시간을 쓰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고려하고서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뵙고픈 마음에 일찍이 나와 있었답니다. (이전에 금록이 몰래 놀러 나왔을 적에는 걱정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며 돌려보내 놓고서는, 막상 몇 달이나 보지 못하니 마음 애닳는지라.)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윤금록:그렇지~? 역시 제일가는 꽃은 따로 있잖아. (시원스레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몇 발짝 내딛어 정식으로 당신을 마주하고 앞에 섰다.) 분명 전에 몰래 빠져나와 네 집 담벼락의 헐거운 벽돌 하나를 빼냈을 때엔 엄─청나게 한소리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오늘은 네가 먼저 나와도 된다 허락을 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인걸.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여 당신과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어때 보여? 네가 보기엔. 잘 지낸 사람의 낯으로 보이려나~?
 
이아린:그랬다가 담벼락이 무너져 버리기라도 하면 어찌한답니까? (물론 헐거운 벽돌 하나 정도로 무너질 리 없으므로 그냥 새침 떨어볼 뿐이다) 태자 전하가 그리 몰래 빠져나오시면 발 동동 구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았으니 이전처럼 마냥 즐기기만 할 수 없더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리 오래 뵙지 못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구요. (투정부리듯 말하다가 시선이 맞닿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금 불그스레해진 낯으로 속삭인다.) …… 그리 보입니다.
 
윤금록:무너지면 언제나 보러 갈 수 있고 좋은 것 아닌가? 담벼락을 넘어다니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아도 좋게 되잖아. (담벼락의 순기능: ?) 나도 설마 그렇게나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다니까~ 인기가 많으면 이래서 피곤해. (인기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그런가~ 무어, 못 지내진 않았지. 나야 언제 어디서든 끝내주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잖아. 아주 오래 떨어져 있어도 네 걱정을 사지 않아도 좋을 만큼. (눈만 빠르게 두어 차례 깜박였고.) 그런 너도 나 없는 동안 꽤나 즐겁게 지낸 것처럼 보이는걸? 엄─청나게 재미있어 보이는 서찰도 써서 직각 편으로 보냈고 말이야. 나 몰래 둘이서만 이런 즐거운 일을 하다니, 하고 한바탕 어리광을 부릴 뻔했다니까, 직각 앞에서. (그런 적은 없지만 괜한 말이나 해 보는 중.)
 
이아린:그러다 집에 강도라도 들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가장 귀한 보물을 훔쳐가기라도 한다면 전하께서도 슬프실 텐데요. (두꺼운 낯짝) 즐겁기는요. 나비를 잡는 동안 곁에서 햇볕 쬐며 낮잠 주무실 분도 계시질 않고, 서책을 함께 읽을 분도 검을 가르쳐주실 분도 계시질 않아 별로 재미 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주일 전에는 갑자기 간택령을 내리신다는 어명이 들려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폐하께서 다시 어심을 돌리셔서 망정이었지만……. (그러니 직각 편에 보낸 편지는 단순히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정인 보고팠을 뿐만 아니라 근래의 불안감을 잠재우고픈 마음도 들어가 있었다.) 혹시나 그분이 제 편지를 읽어보셨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요?
 
윤금록:가장 귀한 보물은 내 눈앞에 있는데 이 저잣거리의 누가 태자의 것을 탐낼 수 있지? (유감스럽게도 낯짝은 이쪽이 더 두꺼울 것이다.) 음. (나비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기억은 요만큼도 없으며, 서책을 함께 읽었던 기억도 그리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뭐 네가 좋았다니 딱히 상관없나? 같은 낯이 3초 정도 스쳐갔다.) 아~ 맞아, 정말이지 내 일인데 너무 본인 입맛대로 굴리려 하신다니까. 아바마마 면전에 대고 말한 건 아니니까 이 정도 언사는 괜찮지? (뻔뻔.) 누구? 직각이?
 
이아린:무뢰배는 태자전하의 보물이라 하면 더 신나서 훔쳐가려 들지도 모른답니다. 그러니 저의 집 담벼락을 귀히 여겨주시지요. (한쪽 눈썹만 치켜세우며 황당해한다) 체통을 지키시지요. 저는 지금도 지나가는 누가 듣기라도 할까 '전하'라는 호칭도 조용히 조심조심 부르고 있건만. (직각이냐는 물음에 고개 끄덕거린다)
 
윤금록:누가 듣는다 하여 무어라 할 수 있겠어? 나름 눈에 안 띄겠답시고 봐, 옷도 이렇게 칙칙하게 입고 나왔는걸. 내 존재 자체가 눈에 띄는 것이야 오래 전부터 어쩔 수 없는 사안이긴 하였으나, …… (비록 자수가 좀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취향의 화려함 축에도 안 든다.) 아~ 그거, 비밀스레 보라기에 나는 몰─래 보려고 했는데 직각이 뒤에서 살짝 곁눈질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었어. 네 지시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했거든. (본인의 무고를 알아달라는 듯 양 손 슬쩍 들어 보였다. 물론, 완전 헛소리지만.)
 
이아린:그건 그렇기는 하지만……. 괜히 달라붙어 귀찮게 하는 이가 나올지도 모르는걸요. (어째 태자보다 제가 더 태자를 걱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거의 항상 이래왔기 때문이다) 나중에 퇴궁하시면 한 번 얼굴을 뵈어야겠군요. (토라진 듯 입술 뚱하니 내밀었다가) 계속 서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니 이만 시전 거리로 가시지요. 제 편지를 받고 이리 나와주셨음은 오늘 반나절 정도는 제게 내어주실 수 있단 뜻이겠지요?
 
윤금록:그럼,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니. (직각과의 비밀 보전 약속은 그렇게 저 멀리로, …… 그제야 자세를 바로하고 섰다.) 반나절로 충분하겠어? 더 요청해도 상관없는걸.
 
이아린:더 오래 전하를 붙잡아 두었다간 기껏 얼마 남지 않은 혼례일이 또 미루어질지도 모르니 아니 되겠습니다. (투정부리는 건 아니지만 왠지 그렇게 들림)
 
윤금록:아~ 그건 괜찮아, 한 번 더 혼례일을 미루면 내가 태자 직에서 내려오겠다고 했으니까. (그런 적 없음)
 
이아린:네?!?!!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뛸 뻔함)
 
윤금록:(뛰어올랐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만 함)
 
이아린:농이신 거죠? 그렇지요……?
 
윤금록:…… 이만 걸을까? (시전 거리로 자연스럽게 걸음 옮겨 감, ……)
 
이아린:지, 진정 폐하께 그리 고하신 겁니까? 전하…… (진짜 큰일났다 싶어진 낯으로 뒤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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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상점가가 즐비한 남대가의 중심 저자입니다.
 
전병과 강정, 과편, 숙실과를 좌판에 잔뜩 늘어 놓은 주전부리점부터 시작하여,
 
비녀나 노리개 따위를 파는 장신구점, 서책방, 장터 국밥, 국수 점포,
 
수도에서 가장 품질 좋은 용정차와 벽라춘을 들여 두었다고 홍보하던 다관, 백화주며 숙수전진이 유명한 객잔…….
 
멀리 서역이나 서천에서 이곳까지 와 이국적인 차림새를 한 상인들도 복작복작하니, 명실상부 수도의 제일 번화가라고 할 법합니다.
 
윤금록:(반나절이면 전부 돌아보기엔 차고도 넘치겠지? 성큼성큼 걸어 왼편의 청포전으로 들어섰다.) 얼굴을 가릴 게 필요하진 않겠어~? 볕이 좋고 한바탕 걸어야 할 텐데, 너도 나도 꽤나 눈에 띄는 인상이니까. (여러 의미로.)
 
이아린:쓰개치마를 갖고 왔으니 저는 괜찮을 듯싶습니다. (면포며 모자들을 구경하면서 어깨에 걸쳐진 옷자락 사부작거린다) 사실 시전 거리에서 사고픈 건 따로 있기는 해요.
 
윤금록:(사부작사부작, …… 소리 일부러 더 내며 벙거지인지 삿갓인지 모를 비슷하게 생긴 모자 하나를 제 머리 위로 얹었다. 괜찮냐는 듯 당신을 보며 저를 가리킨 것은 덤으로.) 어떤 건데?
 
이아린:(고른 모자는 무슨 색이지?) 떨잠입니다. 엊그제 어릴 적부터 지니고 다녔던 나비 떨잠이 갑자기 없어졌지 뭔가요. 어릴 때에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이것저것 놓고 다니는 일이 흔했지만, 지금은 그리 많이 움직이는 편도 아닌데…… 아끼던 것이 없어져 아쉽습니다.
 
윤금록:(삿갓이니 적당히 칙칙한 밀색, …… 이라고 생각했는가? 얼굴을 가리는 데에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을, 화려한 꽃분홍이다. 본인 차림새에 어울린다 생각하고 집어들기나 한 건지는 의문.) 그럼 이것만 하나 장만하고 바로 장신구점으로 갈까?
 
이아린:…… 정녕 눈에 띄고 싶지 않으신 것이 맞습니까? (의심스럽게 보며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밀색 삿갓 건네준다) 좋아요. 전하께서도 어울리는 장신구를 사시지요.
 
윤금록:준수하지 않나? (준수하다는 건 아마 은밀함이 아니라 본인의 외모 얘기인 듯. 하지만 순순히 밀색 삿갓을 받아들어 제대로 쓰긴 했다. 눈에 띄는 삿갓도 한참 보다가 잘 돌려놓고, ……) 내게도 나비 떨잠을 하나 골라 주는 건 어때?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잖아.
 
이아린:잘 모르겠습니다. (냉정하리만치 솔직하게 답하고는, 제가 골라준 삿갓을 쓰자 그제야 만족한다) 그건…… 참으로 좋군요. 제 떨잠은 전하께서 직접 골라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떨잠을 볼 때마다…… (전하의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하려다가 부끄러워서 대강 흐려버렸다.)
 
윤금록:볼 때마다 너도 나랑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소리지? 이해했어, 이해했어. 이제 우리 정도 본 사이면 서로 말하지 않아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니까. (안 생겼을지도, …… 태평한 소리나 하며 값을 치르고는 인근의 장신구점으로 향했다.) 서로에게 선물하는 셈 칠까, 그럼~
 
이아린:네, 맞는 말입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태자 덕분에 얼른 긍정해버리고는 청포전을 나선다.) 좋아요. 하지만 전하는 떨잠을 하실 수 없으니 어찌하시겠습니까? 서탁 위에 자주 꺼내두고 들여다봐주시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두 사람은 장신구점으로 들어섭니다.
 
화려한 보석이 박힌 선추, 곱고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든 향낭, 오색 무늬 그려진 부채며 귀고리…… 온갖 장신구들이 휘황한 빛을 냅니다.
 
한쪽에 떨잠들이 고이 놓여 있네요.
 
윤금록:볕 드는 날 창에 걸어라도 두면 되지 무어. 아니면 지금이라도 떨잠을 할 수 있게 머리를 길러 볼까? (위로 상투를 틀면 되니까, …… 따위의 실없는 소리나 하며 자개 장식이 들어간 떨잠 하나를 집어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내려두었다. 음, 방금 건 역시 너무 수수하고, …… 라고, 점주가 들었다면 기함할 생각을 잠깐.) 원래 있던 게 자색이었던가?
 
이아린:떨잠 하나 때문에 머리를 기르시려고요? 그렇게까지는 아니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만으로도 기뻐요. (사실 남대가에서 오랜만에 얼굴 마주한 후로부터 아린의 기분은 저 하늘 끝까지 치솟을 만큼 둥실둥실 떠오른 상태였다. 뭘 해도 좋기만 하여 미소가 마를 새 없다.) 네. 이전과 다른 색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금록에게 선물해줄 만한 떨잠을 찾아본다. 무조건 화려하고 색이 강렬한 게 좋겠지)
 
윤금록:못 할 것도 없지 않아? 네가 원한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게 되기도 할 테니까~ (뭐, 기르다가도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면 홀랑 잘라 버리겠지만, 그런 변덕은 지금의 자신이 고려할 사안은 아니니까 문제 없다는 식이다.) 하지만 기왕 맞추는 거라면 비슷한 것으로 하고 싶은걸. 그게 더 의미가 있잖아. (하고, 이번엔 자색 바탕에 백색 보석이 잘게 박힌 것을 집어들어 당신의 머리께에 엉키지 않을 정도로만 대강 대어 보았다.) 이건?
 
이아린:반대로 전하께서 제게 바라는 건 없는지요? 머리를 잘랐으면 좋겠다거나…… 연지의 색을 바꾸었으면 한다거나, 검을 좀 더 잘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거나. (마지막은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당신이 들어보인 떨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척 어여쁩니다. 마음에 쏙 들어요. 그러면 저는 백색 바탕에 자색 보석이 박힌 것으로 골라 드릴까요?
 
윤금록:음~ 지금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는걸, 생기면 이야기할게. 검은 네가 조금 더 잘 쓰게 된다고 해도 내가 더 잘 쓰니까 문제 없고, (이런 말을.) 연지의 색 같은 건 네 취향이 곧 내 취향이기도 하니. (이어진 물음에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이아린:얄밉습니다, 전하. 하지만 활은 제가 더 잘 쓰니까 괜찮아요. (치졸함) (그리곤 하얀색 배경에 자색과 흰색 보석이 알알이 잘게 박힌 떨잠을 용케 찾아서 들어보였다. 꽂는 것도 아니건만 당신 귓가에 가져다대보면서) 어떠십니까?
 
윤금록:다음에 만날 때는 내가 활을 연습해 올지도 모르는데도?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속출하는 것은 차치하고, …… 귓가에 가져다 대는 양에 슬쩍 허리를 수그린 것은 덤이다.) 어련히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줬을까~ 내가 골랐으면 금색 바탕에 금색 보석이 박힌 걸 들고 있었을걸, 지금쯤. (금색 보석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을 거란 소리다.)
 
이아린:익숙지 않던 실력이 일취월장해진 채로 돌아오실 만큼 오래 저를 만나주지 않으시려구요? 아니리라 믿습니다, 전하. (흡족해하며 값을 치루었다.) 이제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물건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리고는 귓가의 꽃장식을 빼내고 제 땋은 머리 윗부분에 떨잠을 꽂아본다.) 어떤가요?
 
윤금록:설마~ 내가 그만큼 빠르게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소리지. (삿갓을 살짝 위로 들춰 당신과 시선을 곧게 마주하고선 짧은 탄성을 뱉었다.) 누구 안목인지 역시 아름다운걸. 이대로 한 폭 종이에 담아서 어디 역사서에라도 실어 달라고 할까?
 
이아린:그러면 저도 그만큼 열심히 실력을 길러야겠군요. (금록이 활과 상성이 안 맞는단 걸 익히 알고 있어서 별로 긴장은 안 했다) 그, 그 정도까지는…… (금세 부끄러워져서 쓰개치마 뒤집어쓴다) 다음에는 어딜 가시겠습니까? 식사를 들고 오셨다면 다관에 가도 좋겠습니다.
 
윤금록:(실력을 기르겠다는 것치고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표정인데 방금 거.) 왜~? 기록으로 오래오래 남으면 보기 좋잖아. 나 말고도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건데. (사뭇 뚱한 낯이 되었다가도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홀랑 되돌아왔다.) 다관도 좋지~ 마침 입이 심심한 참이었거든. 어쩐지 통했다는 느낌인걸.
 
이아린:굳이 많은 이의 기억에 남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저를 오래 잊지 않아준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뚱한 낯에도 그림자처럼 희미한 미소만 짓는다) 누군가 술수라도 부려 전하와 다인이, 두 사람의 기억에만 남을 수 있게 된다 하여도 좋아요.
 
윤금록:그런가? 하지만 난 역시 네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는걸. 많은 이들의 입에 오래오래 오르내렸으면 좋겠어, 나를 포함해서. (한껏 고개를 기울였다.) 꿈이 너무 소박한 거 아냐~?
 
이아린:어찌하겠습니까. 날 때부터 권력이니 무어니 사람들의 시선 쏠리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을. (잠시 고민하다) 전하께서 성군이 되어 오래 집권하신다면 자연히 기록이 늘어날 테니, 따라 저의 기록도 늘어날 수는 있겠군요.
제 진짜 꿈은 전하가 한 눈 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비를 잡는 걸 도와주시는 거랍니다.
 
윤금록:할 수 있는 한 오래 해 먹긴 할 생각이니까 그런 건 너무 염려 말고. (염려한 적도 없겠지만.)
갑자기 꿈이 좀 커진 것 같지 않아?
 
이아린:너무 소박하다면서요? (빠안히 봄) 그래서 저도 좀 큰 꿈을 점쳐보았습니다만, 아니되나요? (빠아아안)
 
윤금록:…… 다시 생각해 봤는데~ 역시 꿈은 좀 소박한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시선 피, …… 하진 않고 같이 마주하며 이런 말이나.)
 
이아린:(눈 흘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고개 팩 돌리곤 도도하게 다관으로 앞서가버린다. 물론 토라진 '척'이다.)
 
윤금록:(앗, 토라진 같은데. 하지만 역시 장단은 맞춰야겠지 싶어 보폭을 평소보다 조금 크게 하여 당신을 따라 반 걸음 가량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 홀라당 두고 가다니~ 같이 가, 같이.
 
이아린:(쓸데없이 촉이 좋은 전하는 싫……진 않고 얄밉다니깐.)
(다관 문가 앞에 서서 곁에 올 때까지 기다린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살짝 숨가빠진 건 덤.) 달래주시려면 가장 좋다는 차를 하사해주셔야 할 거예요.
 
윤금록:(적당히 따라잡고 있긴 하였으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당신과 나란히 서서는, 허리를 슬쩍 손으로 받치고 안으로 살짝 밀며 들어섰다.) 한 잔으로 되겠어?
 
이아린:(모르는 척 밀림) 몇 잔까지 사줄 요량 있으신지요?
 
다관에는 이미 춘정을 맞이한 연인들이 삼삼오오 들어차 있습니다.
 
산뜻한 찻향이 흐르고 도란거리는 담소가 들려오니 분위기가 퍽 좋네요.
 
윤금록:나의 정인께서는 몇 잔까지 마실 요량이시지? 원한다면 이 다관도 네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긴 할걸. (아마도.)
 
이아린:차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으니 가게는 되었고, 향을 즐기기에는 한 잔으로 충분할 듯싶군요. (역시 토라진 체해봐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그는 가까운 이들에게는 금세 물러지고는 하였으므로. 결국 평소랑 다를 것 없는 답이다.)
 
윤금록:그래서야 평소랑 하나 다를 바 없지 않아? 역시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된다고 생각해, …… 나비 잡는 건, 진지하게 생각 좀 해 볼 테니까. (생각을 오래 한다 하여 무어 달라지는 것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간에.)
 
이아린:그러면…… 두 잔? (나름대로 고심해서 답한 것이다) 서호에서 들여왔다는 용정차라는 것을 마셔보고 싶군요. (뒤쪽에서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주인의 말을 주워섬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어려우신 건가요, 나비 자체를 썩 좋아하지 아니하시는 건가요?
 
윤금록:나비는 좋아해, 그야 그건 네가 좋아하니까. (그럼 그걸로 하자, 고 짤막하게 덧붙이며 접객원을 손짓해 불러 같은 종류의 차 하나에 간단한 다과 몇을 주문했다.) 내가 가만히 있는 거에 얼마나 좀이 쑤셔하는지는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아~? 우리 사이에. (?)
 
이아린:그럼 만일 제가 나비를 싫어하게 된다면 전하도 싫어하실 건가요? (웃으며 양 손 깍지끼고 그 위에 느슨하게 뺨 기댄다) 이래서야 시강원의 수업은 어찌 듣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에도 잔뜩 딴청 피우시거나 주무시는 건 아니겠지요?
 
윤금록:그런 일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나비를 예뻐라 하는 사유에는 네가 가진 지분이 가장 많으니까, 네 몫이 사라진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불규칙적인 박자로 느리게 탁자를 두드리다가, 이어지는 질문에는 잠시 손짓을 멈췄다.) …… 몰래 와서 창문 너머로 보거나 했던 건 아니지? (당연한 말.)
 
이아린:제게 마냥 맞춰주지 않으셔도 되는데도…… 하긴 저도 전하가 나비를 싫어한다고 하면 조금 아쉬울 것 같기는 합니다. (이내 주인이 탁상에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찻잔 둘과 전단병이며 다식 같은 다과들을 올려놓는다) …… 설마설마했지만 정녕이셨습니까. 지난주 폐하께서 어머니와 저를 부르시어 입궐하였는데, 그때 시강원에 직접 가보지 못한 걸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윤금록:너도 나를 위해 꽤 많은 부분을 맞춰주고 있는 거 아니었어? 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다식 하나를 냉큼 집어들어 반으로 쪼개 씹어 삼키고는, 남은 조각은 여전히 검지와 엄지 사이에 쥔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나를 위해 감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나 또한 내가 타협할 수 있는 선 안에서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봐. 그것이 하나의 도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그럼 나비 잡기에 어울리는 행위 제가 타협할 수 있는 선 밖의 이야기라는 소리인가? 뭐, 시답잖은 가정은 됐다.) 에엥,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지금 와서 하는 거야~? 알았다면 내가 직접 빠져나갔을 텐데. (그래서 안 했을 듯.)
 
이아린:제 딴에는 신경쓰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하는 전하신걸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신분의 차이를 거론해보았자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쌓인 시간이 답해주었으므로.) 저를 이리 신경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그 정도로 요약하며 찻잔을 조심히 들어 입가로 기울였다. 맑고 깊은 향기가 입안에 퍼져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떠올렸다.) 그렇잖아도 수업을 빠지고 저를 몰래 보러 오시는 분인데 직접 입궐까지 했으니 앞일이 눈에 훤해서 말입니다.
어머니와 폐하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를 불러 '태자를 잘 부탁한다' 하시더군요. 제게 노하신 것처럼 보이진 않으셨고, 이전처럼 다정하셨습니다. (잔의 표면을 매만진다.) 그러한데 직후에 갑자기 혼례를 물리고 간택령을 내리신다 하여 당황하였었습니다. 전하께도 무어라 언질하신 점은 없으셨는지요?
 
윤금록:요컨대 전부 나를 위해서였다? (간단히 축약하고선, 다시금 꽤나 뚱한 낯이 되어 남은 다식 반쪽을 입에 넣었다.)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 네게 노할 이유는 없었겠지, 당연하게도. 있었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거고, ……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 부분을 느리게 원을 그려 가며 쓸었다. '생각하는 눈썹'을 해 보인 것도 잠깐의 일이었고.) 없어,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으면 아무리 나라도 기억은 하고 있을걸~ 워낙 자주 깜박깜박하긴 하지만, 기억하려고 마음먹은 건 할 수 있으니까. (제 입술을 가벼이 축였다.) 요즘 들어 변덕이 심해지시긴 했던 것 같고? 이유야 통 말을 안 해 주시니 알 도리 없지만.
 
이아린:전하를 뵈었다간 더 오래 있고 싶어 발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을 듯했으니 저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그렇듯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남은 차를 전부 입안에 흘려넣는다.) 어쩌면 작년 의명태자 전하를 잃으심이 어심에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군요. 전하께서 곁을 잘 지켜주세요. (당신에게 물어도 속시원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저 추측만 연잎처럼 띄웠다.)
 
윤금록:사람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온전히 채울 수는 없을걸~ 물론 나는 누구에 비할 것 없이 뛰어난 태자지만, 나의 자질과는 상관없이 말이야. (퍽 상투적인 소리나 하며 차를 한 모금 더 넘겼다. 아, 그렇다고 곁을 지키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하고 짤막히 덧붙인 것은 덤.) 여긴 자주 오는 곳이야? 이 차, 내 입에도 꽤 잘 맞는걸.
 
이아린:그러하겠지요. 저는 아직까지는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어본 적은 없으나, 만일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만 하여도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으니……. (차 홀짝이는 정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외출을 할 때면 오곤 합니다. 입에 잘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애초에 외출을 많이 하질 않는 내향인간)
 
윤금록:이따금 외출을 할 때, …… (집 밖으로 자주 나오지 않음을 알고 있다.) 누구랑? (중요하지 않은 질문.)
 
이아린:간혹 다인이와 함께하지만, 대개는 혼자입니다. (이게 왜 궁금한 거지?)
 
윤금록:왜 나는 두고 갔어? (이게 중요한 듯.)
 
이아린:전하는 궐에 계시니까요. 게다가 태자 전하시니까요. (눈 게슴츠레해짐)
 
윤금록:하지만 태자이기 전에 네 정인이잖아. (정인이기 전에 태자다, 순서 상.)
 
이아린:순서가 바뀌었습니다만. (물론 원래는 태자가 아니었으니 정인이 먼저였지만……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제 궐에 들어가면 외출을 할 일도 많이 없겠지만, 항상 전하와 함께할 테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윤금록:나야 괜찮지만~ 외출을 할 일이 많이 없어지는 게 심심할 것 같다거나 하지는 않고? (물론 실내파인 당신에겐 오히려 더 좋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
 
이아린:정원을 크게 만들어주세요. 나비가 많이 날아들 수 있도록 꽃도 많이 심고요. 으음, 그리고 이따금 숲으로 여름 피서를 가면…… 그걸로 족할 듯합니다.
 
윤금록:그걸로 되겠어~? 물론 할 거지만. 이러다가 왕비 되는 이가 지나치게 검소하였다고 기록에 오래오래 남을지도 모르겠는걸.
 
이아린: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를 낭비했다 남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습니까. 왕비가 나비를 왕보다 좋아하여 탈이었다, 이런 문장이 적히면 조금 재밌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장난)
 
윤금록:…… 진짜? (진짜?)
 
이아린:……바깥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확인하러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까 태자 직에서 내려오겠다 어쩌구의 복?수)
 
윤금록:말 돌리는 솜씨가 꽤나 능숙해졌는걸. (복수? 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개 설렁설렁 끄덕이며 찻잔 바닥을 보이긴 했다.)
 
이아린:어디까지나 후손들 보기에 그러하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랍니다. (뜸들이다 말해주곤 나비처럼 옷자락 팔랑팔랑 날리며 다관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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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게 벌려 선 백성들 사이에서 광대들이 탈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본래 탈극이라 하면 평민들이 높으신 분들을 희화화하여 다소 속된 내용을 공연하는 문화입니다만,
 
오늘은 저속한 내용이 아니라 창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즐긴 나머지 당대에는 약간 뻔한 내용이 된 <쌍옥루>입니다.
 
‘창’을 건국한 태조 대왕과 요절한 정인 이씨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지요.
 
<쌍옥루>의 내용을 모르는 창 백성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기왕 나왔으니 잠깐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릅니다.
 
윤금록:이거 그건가? (그거.) 오랜만에 본다. (자연스럽게 맨 앞으로 나가, …… 려다가 너무 앞이면 눈에 띄나? 난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 싶어서 적당히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이들 뒤로 자리 잡고 - 시야가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만 - 섰다.)
 
이아린:(그거.) 쌍옥루군요. 저도 저잣거리에서 보는 건 간만입니다. (숨이 차는 탓에 다소 느린 걸음으로 금록 곁에 잘 붙어선다.)
 
<쌍옥루>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 왕조 말기, 명망 높은 수군통제사였던 태조 대왕이 폐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여러 차례 명을 어기고 백성들을 구출했습니다. 폐주가 보낸 암살 위협에서도 벗어나 수도로 입성할 때쯤에는 이미 옥새 없이도 왕이라 불렸으나 정작 태조 대왕을 기다리던 이씨는 폐주를 섬기던 간신의 음모에 빠져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
태조 대왕을 그리다 심장이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이씨를 화장하여 바다에 뿌렸는데, 흰 거품이 발치로 날개처럼 일어 그의 발목을 적시더라는 장면에서는 이미 마르고 닳도록 아는 내용이더라도 배우들의 연기가 좋아 훌쩍이는 자도 몇 있었습니다. 태조 대왕이 그 파도꼴을 따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을 만들었다는 전설도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요.
완결부에서 태조 대왕이 자신을 섬기는 충신에게 묻기를,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하니 충신이 “사람의 마음인가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아린:(훌쩍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집중하여 구경한다. 극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나직하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가장 깊은 것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윤금록:음~ 정석적인 답변을 할까, 아니면 맞춤형 답변을 들려줄까.
 
이아린:전하의 진심을 담은 답변을 듣고 싶군요.
 
윤금록:둘 다 진심이긴 할 텐데?
 
이아린:(곰곰) 그러면 맞춤형 답변으로요.
 
윤금록:나의 정인을 아끼는 나의 마음? (낭만 100% 함유)
 
이아린:(낭만의 파도 그대로 맞고 얼굴 불그스레해짐) 그런 말은 좀 조용히 하시옵소서…….
 
윤금록:앞에 나가서 할까? (한 술 더 뜨는 편.)
 
이아린:절대 안 됩니다! (황급히 옷자락 잡음) 절대 절대 절대 안 됩니다. (강조가 많다)
 
윤금록:문장 하나에 절대가 세 번이나 들어갔어. (셌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니 이번만큼은 내 쪽에서 한 발 물러서도록 할까~ 아, 참고로 정석적인 답변은 바다, 같은 걸 내놓으려고 했어. 바다의 밑바닥을 봤다 자칭하는 이들은 없으니, 분명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건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거든.
 
이아린:어느 쪽이든 아,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자길 생각하는 마음을 제 입으로 아름답다고 하려니 약간 낯부끄러워서 말 더듬었다) 저는 이라 답하렵니다. 숲은 해가 뜨더라도 나무의 그림자에 빛이 가려져 밝지 않지요. 날이 어두워져갈 때에 숲의 한가운데를 조용히 걷고 있자면 풀벌레 소리나 멀리서 우짖는 짐승의 울음,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세상을 채웁니다. 꼭 세상 한가운데에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기분…… 깊다 하여도 무방하겠지요.
 
윤금록:그거, 어쩐지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숲의 한가운데를 홀로 걸어 본 적 있는 것처럼 들리는걸.
 
이아린:당연하게도 있습니다. (태연) 열두어 살 즈음이었던 것 같군요. (겁이라곤 엿장수한테 갖다 판 듯)
 
윤금록:혹시 일곱 살 즈음에 지나가던 방물장수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팔아치운 건 아니고? 잘 생각해 봐.
(참고로 이쪽은 팔았다.)
 
이아린:안타깝게도 옷이나 장신구에는 큰 관심이 없으나, 꽃장수가 그걸 내주고 예쁜 꽃다발을 준다 하였다면 기꺼이 팔았을지도요.
 
윤금록:이미 팔았구나. (확신.)
 
이아린:어찌 확신하시나요. (웃어버림) 겁 많은 것보다야 없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윤금록:네가 겁이 너무 없으니까 그렇지~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의외로 주제파악이 되는 편.) 어린애가 숲 속에 혼자 들어가는 건 위험하잖아. 나도 그 즈음에 혼자 바닷가에 나갔다가 된통 한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이아린:아마 그때에도 집에 돌아왔을 때 유온에게 한 달치 잔소리를 다 들었던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날 이후로는 빈도를 줄였는걸요. (안 가지는 않았다는 건가?) 저나 전하나 겁이 이리도 없으니 참으로 잘 맞는 사이가 아닌가요.
 
윤금록:빈도를 줄였다는 건 안 가지는 않았다는 거 아냐~? (다시금 꽤나 뚱한 낯이 되었다가 이내 콧잔등에 얕은 주름을 잡으며 가볍게 키득거렸다.) 그렇긴 해. 이렇게 둘 다 멀쩡히 살아있으니 괜찮나? 싶기도 하고.
 
이아린:요새에는 낮에만 이따금 가고 있으니 곱게 넘겨주시어요. 저도 절 걱정할 주변인이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요. (과거엔 제 호기심이 모든 가치 중 단연 일등이었는지라, 그런 것엔 하등 관심이 없었다.)
 
탈놀이를 모두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할 때쯤,
 
이아린:ㅡ누구냐! (화들짝 놀라며 뒤돈다.)
 
윤금록:─누가 있어? (뒤쪽에 있는 건가? 버릇처럼 당신을 제 뒤로 살짝 물리며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아린:…… 누군가 제 머리칼을 잘라갔습니다. (한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채의 끝부분이 잘려나가, 머리칼이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나섰지만, 하도 사람이 많아 누군지 알 수가 없네요.
 
윤금록:…… 전수조사─ 하기엔 사람이 좀 많은데. (양 눈썹만 위로 치켰다가 곧 느릿느릿 끌어내렸다. 잘린 길이를 대강 가늠해 보려는 듯 손끝으로 당신의 머리칼을 더듬었고.) 그 밖에 다친 곳은? 무사해 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금록의 손 한 뼘만한 길이가 썩둑 잘려나갔습니다.
 
이아린:(제 옷자락을 이리저리 살피고 돌아본다.) 다행히 머리칼 말고는 멀쩡한 듯합니다. …… 저잣거리에 흔히 돌아다니는 광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칼만 잘라간다는 이가 있다는 소문은 못 들어보았지만.
 
윤금록:흔히 돌아다니는 광인이라는 거 이상하지 않아~? 신경을 써 달라고 언질해 둘 필요가 있겠는걸. (태자로부터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압력은 독인가? 싶지만, 뭐, 무뢰한이 돌아다니는 것을 눈 뜨고 코 베이는 꼴로 구경만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아깝다~ 예뻤는데. 지금도 충분히 예쁘긴 하지만.
 
이아린:광인의 존재는 가둬둔다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아쉬움 묻어나는 손길로 풀려가는 머리채 매만진다.) 공들여 꾸며달라 부탁하였건만…….
 
'점 치시오. 점 치시오!'
 
거리에는 소년이 등에 철학관 깃발을 꽂은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홍보를 하고 있네요.
 
행인 몇이 ‘저 집이 그리 용하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들리고요.
 
기분을 전환할 겸 철학관에 가보아도 좋겠습니다.
 
윤금록:모처럼 꾸민 게 아쉬우니까~ 점이라도 한 번 보러 가 볼까? (당신의 어깨를 잡고서는 곧잘 철학관 쪽으로 몸을 돌려 같은 방향을 보게끔 했다.) 좋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전환이 될지도 모르고.
 
이아린:(어깨 돌려져 소년을 발견했다) 철학관이면…… 궁합 같은 것도 봐주는 거겠지요? …… 혹여나 안 좋게 나오면 어쩌지요? (걱정이 많음)
 
윤금록:그럼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성공적인 여생을 보낸 왕실 부부'로 기록에 남으면 되지. (뭘 이겨내는 건지.)
 
이아린:(뭘 이겨낸다는 거지? 그래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손을 잡고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윤금록:? (?) 어렵지 않지. (망설임 하나 없이 당신의 손을 냉큼 잡았다.) 중요한 거야, 이거? 약간 '분위기 내기' 같은 느낌으로?
 
이아린:그건 아니지만, …… 맞잡고 있으면 안 좋은 점괘가 나오더라도 한결 마음이 놓일 듯하여.
 
윤금록:그런 이유라면 양 손 다 잡을 수 있는데. (오히려 웃겨 보일 것이다.)
 
이아린:한 손만 잡고 있어도 충분히 온기가 전해져 오니 괜찮습니다. (만지작거리던 머리칼에서 미련을 놓아주고 맞잡은 손을 살짝 앞뒤로 흔들어본다.)
 
윤금록:그걸로 네가 충분하다면~ 그런 걸로 할까. (앞뒤로 흔들리는 손에 살짝 힘을 실었다가 이내 철학관으로 걸음을 옮겨 들어섰다.)
 
x
 
철학관은 아무래도 나름대로 주역 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주인이어서인지 일반 점집과는 달라,
 
귀기 서린 물건도 없고 무당집처럼 알록달록한 천끈도 없이 약방이나 서책방처럼 정갈한 가정집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손 맞잡고 사람 하나 없는 문으로 들어서면,
 
마흔쯤 되었을까 싶은 남자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더니 갑자기 큰절을 올립니다.
 
그런데 그 횟수가 한 번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안경과 더불어 가리개 좁은 것이나마 갓까지 눌러 써 서생 같은 남자는 사배를 올렸습니다.
 
임금과 중전, 그리고 태자에게만 올릴 수 있는 네 번의 절 말입니다.
 
이아린:(놀라서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금록을 올려다보며) 미리 말씀을 전해두셨습니까……?
 
윤금록:그럴 리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알아봤다 해도 굳이 알아봤다 증명하진 않아도 좋은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술가:(깊이 허리 숙인 채 입 연다) 이번 주간 소인의 점괘가 상서롭고 길하여 필시 귀인을 손님으로 맞이할 시기겠기에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이 집에는 동쪽으로 난 문과 서쪽으로 난 문이 하나씩 있는데, 동쪽 문으로 어깨에 푸른 파도와 용의 기상을 걸머진 분이 들어오시니 나라의 대들보이시겠거니 짐작하였나이다.
 
어디서 미리 두 사람의 일정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언행인데,
 
생각해 보면 오늘의 나들이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니 이 자가 금록의 방문을 어떻게 들었겠어요?
 
용하다더니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윤금록:그래? 용보다는 말의 기상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쪽이 더 멋있잖아. (용: ?) 인사치레는 그쯤으로 됐어~ 내 앞날을 보러 온 건 아니거든. (하고선 맞잡은 손을 당당히 내보이며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역술가:예, 안으로 드시지요.
 
남자는 상석에 두 사람을 앉게 하고 자신은 반상 반대편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역술가:궁합을 보고자 하심이겠지요. 그에 앞서 간단히 사주풀이를 해보겠습니다. 태어난 날짜와 시각을 적어주시지요. (종이와 붓을 내민다.)
 
윤금록:말로 하는 거 아니고 적기까지 해야 돼? (일단 적으라고 했으니까 적긴 한다, …… 종이와 붓 아린에게도 건네고, ……)
 
이아린:(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 텐데ㅡ 라는 생각밖에 머리에 없다. 생년월일시 잘 적어서 돌려주고)
 
역술가:풀이의 과정이 있는지라…… (종이 위로 쌀알이며 팥 같은 것을 던져보고 무언가 중얼거린다.)
소양태자 전하께서는 수水의 기운을 타고나 한 곳에 매이지 않고 원하는 어디로든 자유로이 흘러가고자 하시니 대양의 기상이 깃드셨습니다. 한 번 서책을 읽으면 금세 머리에 익히고 힘들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르게 하는 기운을 지니셨으니 과연 동궁의 주인 되실 분입니다.
호접 아씨께서는 토土의 기운이 강한 늦겨울에 태어나 동지의 싸늘함과 입춘의 따스함을 동시에 품으셨으니 두 기운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타고나길 자연과 가까우시니 영민하고 지혜로우심에도 권력운이나 재물운과는 스스로 거리를 두려 하심입니다.
 
하나하나 틀린 이야기가 없으니 말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놀람의 연속입니다.
 
역술가:소양 전하께서 가진 수의 기운을 아씨께서 타고난 토의 기운이 보완해주니 지나치게 흘러갈 적에는 낭자께서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시고, 또 호접 아씨께서 어두운 기운에 매몰되려 하면 전하께서 맑은 기운으로 씻어내주시니, 두 마음이 진실로 맞물리기까지는 난관이 있겠으나 전부 헤쳐나오기만 한다면 더불어 백년해로할 상이십니다.
 
윤금록:오, …… (말이 길어지자 사실 반쯤 흘려들었다. 아무튼, 백년해로는 제대로 들었으니까.) 방금 들었지? 좋을 거래.
 
이아린:네. 저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처음 사배를 올릴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딱딱 들어맞는 사주풀이까지 들으니 역술가의 점괘에 신뢰가 올라가는 건 당연한 노릇. 그 입에서 '백년해로'라 나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금세 밝아진 낯으로 손을 좀 더 단단히 얽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역술가는 이어서 점괘를 더 풀이해나가는가 싶더니, 금세 낯빛이 어두워집니다.
 
윤금록:(손가락을 움직여 맞잡은 쪽 당신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이야기만 나올 테니까, 나쁜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깜박, 깜박.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는, 썩 안 좋은 빛이 들기 시작한 역술가에게로 시선을 뒀다.) 안색이 안 좋은걸. 속이 안 좋은 건 아닐 테고.
 
역술가:그것이, 두 분 각자의 점괘를 풀이해보았사온데……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소양 전하께는 초년운에도 가족과 이별하는 액운이 있었는데, 성년 무렵에도 액운이 크게 껴 있어 주변인에게 연달아 흉수가 들겠습니다.
올해 봄에는 특히 산(山)과 합이 몹시 나쁘다고 풀이되는데 곧이곧대로 산에 가지 말라는 내용이라기보단 그늘진 곳에 오래 숨은 것과는 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쪽으로 해석되는 수이옵니다. 다만 원체 귀하신 분이라 바다의 기운이 전하를 지켜 주는 형국이니, 큰물을 가까이 두시면 반드시 길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씨께서는……. (주저하다 입을 다물어버린다.)
 
대인 기능 판정이 가능합니다.
 
윤금록:말을 얼버무릴 정도로 좋지 않은 내용이야? 난 듣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그런 거라면. (고개 비스듬히 기울이며 당신의 생각을 물으려는 듯 아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아린:(금록에게 액운이 꼈다는 말에 이미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이 낫습니다. …… 전하보다도 더 나쁜 점괘인 것입니까.
 
역술가:…… 송구합니다. 이를 말씀드려도 될지. (눈치를 본다.)
 
윤금록:나라면 안 듣는 쪽을 택했겠지만~ 나의 정인이 원한다고 하니까, 그걸 내 멋대로 막을 수는 없겠지.
말재주
기준치: 50/25/10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아 막은듯)
 
이아린:저에 관한 일을 제가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설득
기준치: 60/30/12
굴림: 5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윤금록:(잠시만 나도 한 번만)
말재주
기준치: 50/25/10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알겠어)
(하던 거 계속 해)
 
본인의 의지를 존중하는 역술가
 
역술가:(망설이다 겨우 입을 연다.) 호접 아씨께서는 올해의 운이 대단히 나빠 큰 살이 꼈으므로 반드시 방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씀 올리기 송구스러우나, 삿된 기운이 아씨를 겨냥하고 있는데 이것은 선대의 원한과도 얽힌 음모로도 보입니다. 소양 전하와 마찬가지로 큰물 기운을 보하시면 도움이 되겠으나, 본시 살기란 것은 물살을 꿰뚫고 날아가는 법이므로……. (말끝을 흐린다.)
 
이아린:(한참 침묵한다.) 그 살이라는 것이 전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요?
 
역술가:예…… 그러합니다.
 
이아린:……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윤금록:아니, 뭔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뭐가 됐다는 거야)
 
이아린:그 방비라는 것을 하면 되겠지요. (갈피는 잡히지 않지만,) 지금은 저로 인해 전하까지 해를 입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로 족합니다.
 
윤금록:너무 기준이 박한 거 아냐~? 조금 더 네 자신의 안위에 신경을 써 줬으면 하는데. (뚱해진 낯짝.)
 
이아린:제 안위는 전하께서 많이 신경써주고 계시질 않나요. (검지손가락을 빼내어 당신의 손등을 느리게 쓸었다.)
 
윤금록:그러니까 너는 내 안위만 신경쓰겠다? 비율이 안 맞잖아~ 나는 내 안전도 충분히 신경쓰고 있는걸.
 
이아린:(이 정도는 용납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려다가, 대답을 뻔히 알 것 같아 결국 고개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됐는지요? 결국 점괘란 해석하는 이에 따라 갈리기 마련이니 알고 보면 큰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리 생각하기로 해요.
 
윤금록: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상서롭지 못한 것은 아닌 걸로 치자. 그게 낫겠어. (한 번 더 입을 비죽이는가 싶더니 이내 눈썹을 끌어내려 유한 낯으로 되돌아왔다.) 이만 일어날까? 더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면. 역술가는 어디까지나 앞날을 내다보는 입장이니 방비책까지 마련해 두진 않았을 것 같고.
 
이아린:예. 전하께서 기껏 나와주신 좋은 날이니 불길한 점괘는 오래 담아두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해변가에 들리면 좋을 듯한데 어떠하신지요? 석호해변 근처의 석호정도 있고 말입니다.
 
윤금록:(잠깐 뭐 하나만 판정해 봐도 되나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아 하세요하세요
 
윤금록:
사격(활) Roll
기준치: 20/10/4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흠 할만하군
)
 
할만하군
 
윤금록:좋지~ 석호정부터 갔다가 느긋하게 바닷가 산책하는 걸로? 네가 활 쏘는 걸 그냥 구경만 하고 있는 건 재미 없으니까, 내기라도 하나 한다거나. (내가 질 것이다.)
 
이아린:좋습니다. (내기 보상으론 뭘 말해볼까?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기는 상상)
 
윤금록:(시작도 안 했는데 진 것 같아 나.)
 
이아린:(^_^)
 
철학관을 나서려는 때입니다.
 
이아린:ㅡ읏. (순간 눈이 커지더니, 제 가슴 움켜쥐며 짧은 신음 흘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크게 휘청거렸다.)
 
윤금록:…… 괜찮아? (크게 휘청이는 당신을 양 손으로 붙잡고 지탱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 아까 그 역술가보다도.
 
이아린:(미간을 찌푸리며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가까스로 손 붙잡고 중심을 되찾는다.) 갑자기 심부에 통증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조차도 어리둥절한 듯 고개 살짝 기울인다) 급체를 했던가 봐요.
 
윤금록:보통 급체를 그렇게 갑자기 하나, ……? 아, 물론 갑자기 하니까 그렇게 불리긴 하지만. (한쪽 눈썹만 슬 치켰다가.) 또 불편하면 바로 말해 줘야 해~
 
이아린:그래도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끄덕) 알겠습니다. 귀한 시간을 지체하기 아까우니 어서 가요, 전하.
 
x
 
수도 회안은 바다를 끼고 자란 도시라 어느 방향으로 가건 어렵지 않게 아름다운 해변을 찾을 수 있지만,
 
개중 석호해변은 인적은 드물되 유난히 파도는 얌전하고 모래가 곱습니다.
 
우선 중앙 항구와 다소 거리가 있고, 다다르는 길에 왕족이나 사대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활터 ‘석호정’이 있어 평민들이 쉬이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지요.
 
이아린:이곳도 퍽 오랜만입니다. (금록이 활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라 자주 발걸음하는 편은 아니었을 듯…… 두리번거리면서 활터로 들어선다)
 
윤금록:오랜만이지~ 그래도 지지난 봄인가에는 한 번 오지 않았나? 네가 활쏘기랑 나비 잡기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서 주화를 던져 앞면이 나와서 여기로 왔었잖아. (물 흐르듯이 하는 추억 회상)
 
이아린:어느 쪽이라도 전하에게는 안 좋은 쪽 아닌지 반신반의하면서도 주화를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물 흐르듯 추억회상에 동참하며 하얀 활대를 감아쥔다.) 이 활도 아직 그대로 있군요. 우선 한 발씩 쏘아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윤금록:하지만 결과적으로 네가 신궁에 걸맞는 위용을 보여주었으니 된 거 아닌가 싶어. (활 쏘는 법에 대해 배운 적은 있으나, 당연하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쏴 본 적은 있으니 어련히 몸이 기억하는 바 있지 않을까 싶어 이쪽도 망설임 없이 활대를 쥐었다.) 좋지~ 내가 먼저? 아니면 네가 먼저 시범을 보여 주나?
 
이아린:신궁이라 불리기엔 아직 모자랍니다. (겸손한 척 하지만 표정은 딱히 숨기지 않고 뿌듯해하고 있다.) 그럼, 제가 먼저 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익숙하니만큼 화살을 절피에 끼우고 시위를 당기는 동작이 유려했다. 사뭇 진지한 낯으로 과녁을 바라보며 손을 놓는다.)
활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쐐액,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과녁을 경쾌하게 꿰뚫습니다.
 
완전히 정중앙은 아니나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실력입니다.
 
윤금록:모자라, ……? (모자라, ……?)
 
이아린:감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_^)
 
윤금록:혹시 내가 세자 교육을 받는답시고 정신이 없던 사이에 신궁의 정의가 신도 쏘아 떨어트리는 활의 명수로 바뀌었던가?
 
이아린:그 정도까지는 아니래도요. (활대 스윽 내린다. 쑥스러운 탓에 당신을 보채기나 하며) 얼른 태자 전하께서도 시위를 당겨보시지요.
 
윤금록:맞는 것 같은데~ (고개만 기우뚱, 했다가 이어 시위를 당기고는 별 고민도 없이 놓았다. 맞추면 좋고, 안 맞아도 그만이고. 난 다른 걸 잘하니까 결과가 어떻든 반대로 쏘지만 않으면 상관없지~ 식으로.)
사격(활) Roll
기준치: 20/10/4
굴림: 39
판정결과: 실패
 
미련없이 놓은 금록의 화살은 과연 미련없이 과녁을 빗겨나갑니다...
 
쪼금.. 아쉽지않았나이거
 
윤금록:(내가 생각해도 살짝)
 
이아린:(화살이 과녁을 스쳐 빗나가는 모습에 작게 탄식한다.) 오랜만인지라 아직 감이 잡히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래도…… 제가 아직 전하보다는 활을 잘 다루는 것 같지요? (장난기)
 
윤금록:난 네가 늘 나를 좋게 말해줘서 좋더라~ (사실 누군들 안 그러겠나 싶지만, 아무튼 간에.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서.)
나도 한 분야에서는 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참고로 다른 분야에서도 많이 질 것이다.)
 
이아린:실제로 뭐든 잘하는 분이시니까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라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콩깍지도 한몫 하는 듯 하지만)
그래도 이대론 아쉬우니 세 발을 쏘아 누가 더 많은 점수를 내는지 내기를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윤금록:내게 두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소리지 그거? (설렁설렁 고개 까딱였다.) 난 그런 거 사양 안 해~ 알잖아.
 
이아린:(고개 도리도리) 지금부터 세 발입니다.
 
윤금록:아, 세 번의 기회를. (정정)
 
이아린:먼저 쏘시겠습니까? (너그러움)
 
윤금록:나 좀 봐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맞음)
바둑에서 백돌을 양보받은 기분, ……
(하지만 쏨)
사격(활) Roll
기준치: 20/10/4
굴림: 30
판정결과: 실패
(어 이건 아깝다)
 
이아린:(진짜 아깝다)
보십시오, 이렇게 몸을 곧게 세우고…… (시범을 보이려는 듯 정석적인 자세로 서서 시위를 당겨본다.)
활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호흡을 잘 가다듬고, 몸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유지하며 시위를 쏴 보세요. (안 빗나가서 다행)
 
윤금록:(잘한다 잘한다) 네가 좋은 선생님이 될지는 내 다음 발에 달린 셈이구만, ……
(따라하는 데엔 문제가 없다! 한 번 본 그대로 정석적인 자세가 되어 시위를 당긴 손에 힘을 실었다. 실패하면 당신의 가르침이 아니라 손에 힘을 과하게 준 탓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겠지.)
사격(활) Roll
기준치: 20/10/4
굴림: 41
판정결과: 실패
아까보단 좀 나은 것 같기도? (뭐가? 기분이?)
 
아린에게 속성 가르침을 받은 덕분인지 화살이 과녁 정중앙을 향해 가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네요.
 
이아린:(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자세 취하고 활 쏘는 왕자 지켜본다) 전부 과녁에 가깝게 빗나가서 더 아쉽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 차례군요. (호흡 잘 가다듬고 당겨본다.)
활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화살이 거의 정중앙에 가깝게 과녁을 관통합니다.
 
이아린:(그래도 왕자 앞에서 면은 세울 수 있어 다행이다…… 란 표정)
 
윤금록:오오, …… 역시 이름에 걸맞는 솜씨인 것 같은데. (마지막 발인가? 다시금 시위 쭉 당겼다가 놓았다.)
사격(활) Roll
기준치: 20/10/4
굴림: 1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어 이게 왜 되지? 싶은 표정으로 활대 내려뒀다.) 말 몇 마디로 활솜씨를 단숨에 끌어올려주는 선생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일 줄은 몰랐어.
 
시위를 벗어난 화살은 바람을 맑게 가르고 나아가 과녁의 중앙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과연 속성 강의 덕분일까요? 그냥 왕자가 천재라서 그런듯
 
윤금록:과연
 
 
이아린:(눈 커지며 기뻐한다) 전하도 역시 재능이 있으십니다. 정적이고 고요한 무예인지라 자주 들지 않으셔서 그렇지……. (은근슬쩍 저격? 같은 걸 함)
 
윤금록:방금 자주 안 든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어? (은근슬쩍 저격? 당함)
 
이아린:…… 전하는 검을 잘 다루시고 저는 활을 잘 쏘니 좋은 합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니었음)
활 Roll
기준치: 75/37/15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아) 아니 실은 안 맞는 걸지도……
 
귀신같이 빗나가네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과녁을 맞출 수는 없는 건가? (그냥 확률입니다)
 
윤금록:(아)
네 운을 내가 방금 걸로 다 끌어다 썼다고 치면 되지. (긍정적)
 
이아린:그래도 저희 모두 과녁에 멋들어지게 화살을 맞췄으니 만족합니다. (저보다는 금록이 명중했을 때 보다 더 기뻐했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니 넘어간다) 제가 궁에 들어가면 가끔 이리 함께 활을 연마하시겠습니까?
 
윤금록:음~ 좋지. 다만 한 가지 정해 두고 싶은 게 있어. (검지와 엄지를 마찰시켜 딱 하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가끔─이라는 건 어느 정도야? (중요한 문제인 듯.)
 
이아린:……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세 달에 한 번을 생각했는데…… 너무 자주 함께 하자고 하면 도망치실 겁니까? (빠안)
 
윤금록:그 정도는 괜찮아~ 방금 걸로 서약은 체결된 걸로 하자. (빤한 시선, …… 피하진 않지만 아무튼 종결도 지어 버렸다. 더 늘어나기 전에.)
 
이아린:…… 전하께서 저를 서운케 하시면 매주 함께 하자고 궁녀를 보내야겠습니다. 도망치시면 궁궐에서 추격전을 벌일 것입니다. (?)
 
윤금록:우리 정세 안 좋다고 궁궐 담 넘어서 소문 다 나겠다. (?)
 
이아린:그런 쪽으로도 기록에 남을 수는 있겠군요.
아니, 그래도 역시 그런 기록은 남기기 싫어요.
 
윤금록:그러니까 매주 함께 하자는 얘기를 듣지 않도록~ 네가 원할 때마다, 정해진 날마다 제대로 나갈게. (양 손 슬쩍 들어 보였다.) 일단은 이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어때, 네 생각은~?
 
이아린:…… 좋습니다. (새침한 척 받아들인다) 사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전하께서 저를 서운하게 만드실 것 같지도 않으니까요. (이리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새삼스럽게도 궁에 들어가 혼인을 올릴 날이 머지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전하께서도 함께 하길 바라시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통을 넣으시지요.
 
윤금록:연통을 넣을 것까지 있나? 직접 찾아가면 될 것을. (이제는 담을 넘겠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이아린:중궁전의 담을 그리 넘으셨다간 전하가 도둑으로 오인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가볍게 흘기지만, 막상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꽤 재밌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 데서 이쪽도 태생적으로 결이 썩 다르지만은 않은 사람이었다.)
 
윤금록:그렇게 되면 네가 잘 해명해 두면 되지, 사실은 이러이러한 사연이 있어 몰래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연인이었다~ 하고.
 
이아린:비운의 연인보다는 처음부터 원앙처럼 금슬 좋은 부부라고 불리면 더 좋지 아니하겠습니까.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중궁전을 지키는 호위들에게 전하를 도둑과 오인하지 않도록 잘 교육을 시켜두어야겠습니다.
 
뒤로 눈을 돌리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이 있고,
 
서쪽으로 너른 바다가 파도를 던졌다 되감으며 흰 바위 사이로 몸을 내밉니다.
 
고즈넉한 바람이 불고 활대를 밀고 놓아 살을 떠나보낼 때마다 귓가에서 머리카락이 가뿐히 흩날렸습니다.
 
좋은 날이고 좋은 계절이었습니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짓는 정인이 있습니다.
 
비록 여러 일로 잠시 길에서 벗어났으나, 이제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평생을 믿고 신뢰하는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이아린:이만 해변으로 가시지요. 내기는 제가 이겼으니 무얼 보상으로 주시렵니까? (살짝 웃는다)
 
윤금록:내가 네게 줄 수 없는 게 더 남았나? (해변으로 가는 걸음을 뗐다. 아주 천천히.) 보상은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이 먼저 말해야지~ 내가 먼저 '이걸 주겠다'고 해 버리면 그건 하사품밖에 더 되나.
 
이아린:으음……. (사실 보상을 먼저 언급하긴 했어도 딱히 바라는 것은 없었으므로, 고개 갸우뚱 기울이고 고민에 잠긴다.)
전하의 말에 함께 오르는 영광……? (그러면서 역참을 가리켰다.)
 
석호정은 사대부들이 애용하는 활터라 내부에 역참처럼 말 몇 마리를 따로 데리고 있습니다.
 
윤금록:(진짜?)
 
석호해변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 말을 타고 가도 좋겠죠.
 
이아린:그만하면 제게는 꽤 큰 보상입니다. (귀끝이 조금 불그스레했다)
 
윤금록:그건, …… 네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내 실력을 못 믿는 거냐며 태울 생각이었는데. (토로하는 본심.) 하지만 좋아~ 방금 걸로 보상은 접수되었어. 무른다는 선택지는 유감스럽게도 존재하지 않는데, 괜찮으실런지?
 
이아린:거절하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을 테지만요. (말을 다루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사실 꽤 잘 다루는 편이다―함께 타고픈 게 연인의 마음이었다.) 되돌릴 심산은 없으니 물론입니다.
 
윤금록:그렇다면 너를 모시는 영광을 누려 보도록 할까, 나도. (선뜻 답하며 역참으로 가 두 명을 태워도 끄떡없을 정도의 튼튼한 말 한 필을 빌려 나왔다. 고삐를 잘 매어 두었다가 잠시 놓고서는, 두 팔을 뻗어 당신을 안아들고선 안장 위로 잘 올려두었다. 안착했나?)
 
이아린:(사실 같이 타고자 했던 심중에는 은근히 이런 순간을 바라는 것도 숨겨져 있었다. 금록의 앞에서는 평생 털어놓지 못할 속내지만…… 정인의 친밀한 손길이라던가, 포옹이 싫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자기위안을 한다.) 전하께서도 어서 올라오시지요. (깔끔하게 안착하고는 손 내민다)
 
윤금록:그 말씀 잘 받들어~ (말끝에 가벼운 추임새를 넣고는 손을 잡고 훌쩍 올라섰다. 당신을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여 제 자세를 교정한 뒤 고삐를 단단히 붙들어 잡았고.) 우리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속도는 어느 정도~? 단숨에 내달려서 갈까, 아니면 걸음 하나하나 소리가 들릴 정도로 천천히 갈까. (다소 이분법적인 선택지는 덤.)
 
이아린:어째 선택지가 극단적인 것밖에 없는 듯한데 착각일까요? (말머리를 부드런 손길로 쓰다듬어준다.) 너무 느리게 갔다간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져버릴지도 모르니, 시원스레 달려 주시지요.
 
윤금록:기분 탓이야. (진짜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고삐를 한 번 크게 잡아당겨 말을 몰기 시작했다. 뒷발과 앞발이 땅을 박차며 내는 소리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뺨에 닿는 바람은 딱 적당히 시원할 만큼만.)
 
이아린:(바람이 딱 기분 좋게 뺨을 스친다. 머리칼이 흩날리고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악사가 봄의 음률을 연주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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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바닷가로 이울어갈 무렵.
 
말은 해변 근처 마굿간에 잠시 매어 놓고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소담스럽고 높이 낮은 기암절벽 사이에 좁다랗게 난 백사장이 보입니다.
 
모래사장으로 가는 길에는 유채꽃밭으로 뒤덮인 갯바위가 줄을 지어 섰습니다.
 
오솔길 위로 잘 여문 산수유와 매화가 명주실처럼 나부끼며 떨어지니,
 
한삼 비단신 신은 발끝으로 능라 밟듯 사뿐사뿐 움직이면 가는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지나갑니다.
 
이아린:(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얽히고, 걸음 내딛을 적마다 모래가 발밑에서 부드럽게 부스러졌다. 입 열어 꿈결 같은 목소리로 가느다랗게 노래 한 곡조를 읊었다.)
산창 홀로 기대서니 밤기운 차가운데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 떠오르누나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이니
맑은 향 저절로 뜨락에 가득하여라
 
윤금록:(내딛은 쪽의 발을 좌우로 살짝 비벼 발자국을 넓게 뭉갰다.) 방금 걸로 오늘의 나는 네게서 노래 분야에서도 졌어~ 2전 2패네, 오늘의 전적은.
 
이아린:전하께서도 노래를 잘 하시면서……. 다음에는 2전 2승을 하시면 균형이 맞춰지겠습니다. 가만 듣고만 있을 테니까요.
 
윤금록:다음에는 가창으로 승부를 낼 예정은 없는데? 그건 이미 났지 않나. (뻔뻔)
 
이아린:짧은 곡조를 읊었을 뿐인데도요. 그럼 가창이 아니라 무엇으로 승부를 가리시겠습니까?
 
윤금록:그건 그 때 가서 결정해야지~ 춤이라든가?
 
이아린:…… 춤은 썩 자신이 없습니다. 이걸로 1패는 예약된 거나 다름없군요. (그리곤 문득 멈추어서서 바닷가를 응시한다.) 오늘은 바람이 적은 탓인지 파도가 잔잔합니다. 신을 벗고 모래를 느껴보고 싶다 한다면…… 너무 품위에 어긋나는 것일까요?
 
윤금록:흠~ 글쎄. 우선적으로 나 개인의 사설부터 말하자면 품위에 어긋나지 않는다 생각해, …… 쪽이지만, 내궁의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분명 한 번쯤 나무랐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 (말을 마치자마자 냉큼 제 신발에서 내려왔다. 발끝에 닿는 살짝 까끌하면서도 부드러운 모래알의 감각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품위는 잃어도 같이 잃어버리는 걸로~ 어때?
 
이아린:그럼 오늘의 일은 저희만의 비밀로 간직해야겠습니다. 혹여나 책잡히는 일 없도록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신과 버선을 벗고 한 손에 잘 챙겨든다. 맨발로 몇 걸음 조심스레 내딛고는 이내 눈가 휘었다) 모래가 참 부드럽습니다. 바닷물에 젖어 시원하기도 하고…… 신을 벗길 잘한 것 같아요.
 
윤금록:둘만의 비밀이 이걸로 하나 늘었네. (뒤꿈치에 살짝 힘을 실어도 보고, 앞꿈치를 딛는 속도를 조금 빨리해도 보고. 이런저런 변주를 주어 가며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에는 신의 밑창이 아닌, 명백한 맨발의 발자욱이 남겠으나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었으므로.) 그야 당연하지~ 내 정인은 꽤나 현명한 이인지라, 그의 선택은 늘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걸.
 
이아린:그러고 보면 저희에게도 꽤 비밀이 많습니다. 우선 태자 전하가 저희 집 담을 넘으신 것부터 하여, 벽돌을 빼내신 일이며…… 왕궁 옆의 숲에서 나무를 타고 놀다가 전하께 들켰었는데, 눈감아 주신 것도 그렇고 말이지요. (꽤나 위험천만한 과거도 몇 섞여있었던 듯하지만 워낙 겁이라곤 없는 두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모른 척 한다) 저라고 항상 옳은 선택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엇나가려 할 때엔 곁에서 잡아주세요.
 
윤금록:그랬지~ 처음엔 네가 고양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까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 때 내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법을 알려 달라며 네 치맛자락 끝이 보일 때마다 하던 일도 손에서 놓고 뛰쳐 나갔잖나. 붙들려 온 횟수도 제법 됐지, …… (이제 그 당시 일하던 내관은 퇴직하여 더 이상 추억의 비화에 관한 잔소리를 들을 일은 없지만, 나직히 덧붙이며 말끝에 웃음을 섞어냈다.) 내 눈에 띄는 엇나감이라면 그리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네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이야기야.
 
이아린:그래서 괜히 저까지 입궁을 며칠 금지당했던 일도 아직 선연하군요. (이후 다시 입궁했을 땐 보상으로 같이 나비를 잡아달라고 졸랐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면이었다. 그 내관 분은 잘 지내고 계시려나요, 시답잖은 궁금증이 거품처럼 일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체면 때문에라도, 그리고 제 체력 때문에라도 어릴 때처럼 나무를 타는 건 어렵겠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저희라면 또 즐거운 일을 여럿 만들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며 말이지요.
 
발 끝을 여린 파도가 간질이니 자연스럽게 생각은 낭화지환에 미칩니다.
 
정혼자와 해로를 약속하는 반지를 나눠 끼겠다면 지금보다 적격인 시간과 장소가 또 있을까요?
 
윤금록:잘 지낼걸? 맡은 바 소임을 늘상 성실히 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었지. (발끝으로 밀려왔다 멀어져 부서지는 파도를 잠시 내려 보다가.) 꼭 나무를 타는 일만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당장 이리 파도가 발을 멋대로 적시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충분히 새롭고 또 즐거운 일이고, 활쏘기 내기를 다시 하는 것도 좋지. 사자놀음을 정식으로 보러 가는 것도 좋겠어, 점괘의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보러 가도 나쁘지 않겠고~ 나비 잡기도 물론, 한 번쯤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짚고 넘어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리고, ……) 서로를 존중하고 앞으로 또 즐거운 일을 잔뜩 만들어 나가자는 의미에서, ……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어때. 들어 줄 의향은?
 
이아린:맞습니다. 신을 벗고 바닷가를 거니는 건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거든요. 숲을 걸어본 적은 있었어도 말이지요. (쏴아― 몰아치는 파도에서 도망치듯 해변가로 두어 발걸음 내딛는다. 금록이 나열해주는 일들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아로새겨나갔다. 사자놀음을 본다거나, 활을 쏜다거나, 나비를 잡는다던가 하는 일 자체보다도 그를 기꺼이 함께 해 준다 말하는 당신의 배려와 마음이 몇 배는 더 크게 다가왔다.) 어떤 제안인지요? 무엇이든 제가 할 수만 있는 것이라면 들어드리지 못할 바 있겠습니까.
 
윤금록:숲은 있구나. (숲은 있구나.) 별 건 아니야, 사실 이미 약조한 것이기도 한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네게 직접 한 번 더 확인을 받고 싶어졌거든. (이어, 품에 고이 넣어 두었던 함을 열어 작은 호의 반지를 꺼내 당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딴에는 정중한 작태랍시고 품위 비슷한 걸 갖추긴 하였으나, 어딘지 처음 하는 일처럼 - 당연하지! - 어설픈 구색이 없지 않은, 하지만 무엇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영원히, …… (라는 단어를 어딘가의 자신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내 곁에 있어줄 것에 대한 약속의 증표 같은 거.
 
이아린:……! (함을 꺼낼 때만 해도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다가, 열린 함의 안에서 반지를 보고서야 눈이 커진다. 해변을 간질이는 파도보다도 몇 배는 큰 물결이 몰아쳐 가슴을 적시고 채우는 듯했다. 감동으로 얼룩진 낯으로 손 내미는 모습은 마찬가지로 퍽 어설펐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도 둘, 반지를 나누는 정인도 둘뿐이니 그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한참이나 손에 끼워진 푸른 반지를 바라보고, 또 금록을 응시하였다.) 제가 절대로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군요.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기꺼이…… (이러한 반지가 아니었더라도 이미 그리하였을 터이나, 명확한 증표가 있을 때 의미는 보다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반지는 함께 나누는 것이니, 저 또한 직접 끼워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윤금록:(꼭 맞는 반지를 몇 번이고 이리저리 돌려 부산스레 확인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의미 있는 반지라고 들었어. 예로부터 왕실의 백년해로를 약조하며 연모하는 이와 영원을 약조하였던 증표같은 거라고. (이어지는 말엔 그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남은 쪽의 반지를 당신에게 건넸다. 제 왼손을 쭉 펼쳐 내보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고.)
 
이아린:그런 증표를 제게 주셔도 되는 것인가요. (예로부터 내려온 증표…… 더더욱 의미깊게 다가오는 수식어였다. 함께 나눈 약조가 파도의 무늬처럼 몰아쳐 반지에 단단히 각인된다면 꼭 이러할까. 반지를 받아, 떨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사실 엉망으로 떨리는 손길로 금록의 약지에 조심히 낭화지환을 끼워주었다.) 전하와 함께라면 기꺼이 끝없는 시간을 약조하겠습니다. (분명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감과 행복이 만개하여 소슬한 향을 풍겨왔다.) 전하께서도 제 곁에 쭉 머물러 주시렵니까?
 
윤금록:네가 아니면 누구한테 주게 하려고? 달리 줄 이도 없어. 두 개 씩이나 되는데 혼자 양 손에 나눠 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떨리는 손길로 끼워준 반지가 저도 신기하긴 한지 괜스레 이리저리 돌려 보기나 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랜 시간을 머무를 것이라고 약속해. 네게 질리는 내 모습에 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 지금까지 생각한 적 없다면,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저는 미래에 대해 멋대로 확정을 짓는 사람은 못 되었으나, 그래도 역시 이 정도 확언은 괜찮지 않을까.)
 
이아린:(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만 하여도 이런 미래가 올 줄은 상상도 못하였었다. 당연하게도 앞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긴 시간 동안 함께 하며 변하지 않았던 하나가 있다면,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고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 설사 슬프고 괴로운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이 푸른 반지와 약조를 나누었으니, 그 무엇이 두려울까. 그는 감정표현이 썩 커다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흰 낯에 순수한 행복만이 들어찬 채였다.) 함께 미래를 그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정말로 기뻐요.
 
두 사람이 약조를 맺은 순간,
 
저무는 해가 완전히 수평선과 맞닿고 찬란한 등빛이 잘 부서진 유리알처럼 바다 위로 흩어졌습니다.
 
손에 잡힐 듯한 저녁놀이 하늘을 살라 먹는데……
 
불현듯 널리 치솟은 파도가 피할 틈도 없이 성큼 다가와 두 사람의 발목을 온통 적셔 버립니다.
 
흐벅진 매화 꽃잎이 소나기처럼 머리칼 위로 쏟아지고,
 
산들바람인 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휘황히 불어와 두 사람을 휘감더니 옷자락을 온통 헤치고,
 
맞잡은 손 주변을 실타래처럼 빙빙 돈 후에야 흐너져 사라졌습니다.
 
마주친 눈동자에 새벽별처럼 뜬 눈부처가 깜빡, 깜빡, 빛을 냈습니다.
 
철썩, 쏴아아 쏴아아…….
 
숨을 죽이고 귀 기울여 들으면,
 
바다가 흰 거품 같은 팔을 벌리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듯이,
 
내가 너희를 안아 주겠다고,
 
이 창의 들보 될 두 사람을 굽어 살펴 줄 것이라는 듯이.
 
내쉬는 숨소리가 곧 파랑波浪 이는 자리인 것처럼…….
 
...그러나 삶의 모든 좋은 순간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아린:전, 하…….
 
아름다운 철은 지극히 한때고,
 
꽃 여물어 움트는 시기 또한 몹시도 짧아 괴로운 것이 봄이라…….
 
아린이 얼굴이 희게 질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금록의 품으로 쓰러집니다.
 
아린과 금록 모두 <이성> 판정 (0/1)
 
이아린:
SAN Roll
기준치: 45/22/9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윤금록: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윤금록:…… 이번에도 급체야? 아닌 것 같은, (데. 미처 끝을 맺지 못한 문장이 파도 소리에 묻혀 부서져 내렸다. 누구 없냐고 부르기에는 인적이 드문 해변이다. 그렇다 하여 손을 놓고 지나가는 행인을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을 노릇이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지금의 저에게 최선의 선택은, ……)
……답할 수 있나?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돼. 말을 몰고 궁으로 돌아가 의원을 부를 거야. 괜찮다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좋아, …… (적잖이 당황하긴 했는지, 뒤로 갈수록 속삭이는 어투에 가깝다.)
 
이아린:(직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낯빛이 그를 증명했다. 통증에는 꽤 면역이 있는 편이나, 이리 심장을 찌르는 격통은 겪어본 적 없었으므로. 갑자기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오한에 떨려왔다.) …… 네, 전하……. (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으려 애쓰다가,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한다.)
 
윤금록: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 (짤막하게 중얼대고선, 그마저도 망설일 여유는 없음을 예감하였는지 당신을 안아들어 말을 매어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신을 제대로 고쳐신는 것을 깜박했다만, 그런 사소한 것이 길을 재촉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당신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고서는 말을 달려 궁으로 향했다. 이 길 위에서 부디 어떤 일도 없기를, 당신에게 이 이상의 고통이 없기를, 부디 편안하기를, …… 따위의, 되도 않는 소망을 입 속으로 중얼대며.)
 
해변에 올 적보다도 더 빠르게, 최대한 재촉하여 길을 되감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마음을 추스릴 새도 없이 소망을 중얼거리면서.
 
십여 분간 품 안에서 앓던 아린은, 남대가를 지날 즈음 금록의 옷소매를 붙잡습니다.
 
이아린:전하……. (희미하게 속삭인다.) 시간이 지나니 훨씬 괜찮아졌습니다. 의원을 부를 테니, 자택으로 데려다 주시어요.
 
윤금록:…… (들려오는 목소리에 말의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췄다.) 궁에 있는 이들의 실력이 더 출중할 텐데.
 
이아린:곧 식을 올린다고는 하여도 아직은 평범한 규수일 뿐입니다. 섣불리 궁에서 진찰을 받았다간 그 사실이 폐하께 알려졌을 때 혹여나 책이 잡히진 않을지 두렵습니다. …… 몸 상태도 내의원에 갈 정도는 아닌 듯하니, 정말 괜찮아요.
 
윤금록:그런 걸로 책을 잡으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 …… (을 하지만, 글쎄, 원체 변덕이 심해졌으니 마냥 확신할 수는 없나. 그럼에도 저는 최선의 미래를 그리는 방법이 아니면 알지 못해서.) …… 정말? 한 번만 더 괜찮다고 답해 주면, 진짜로 말머리를 돌릴 거니까. 사양하지 않을 마지막 기회야.
 
이아린:(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품에 안겨 있을 시간을 놓치는 것은 아쉽지만, …… 오래 나와 계셨으니 이만 환궁하셔야지요. (나름대로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이다)
 
윤금록:그렇게 오래 나와 있지도 않았을걸, 나, ……~ (나름의 농담에 그럭저럭 응수했다. 완벽히 평상시의 어조로 되돌아오지는 못했으나, 그럭저럭 봐 줄 만한 투가 되긴 했다. 아까보다야.) …… 후회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나 또한 오늘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머리를 돌려 당신의 가택으로 향했다. 그래, 당신이 원한다면.)
 
이아린:……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어깨에 가만 고개를 기댔다.) 의원이 처방을 하면, 바로 궁으로 연통을 넣겠습니다. 차도가 어떠한지도 상세히 말씀드릴 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 돌아가세요.
 
윤금록:…… 연통이 오기 전까지는 뜬눈으로 밤을 샐 거야. (괜히 투정 부리는 소리나 잠깐.)
 
이아린:최대한 빨리 사람을 보내야겠군요. (희미하게 웃었다.) 저 때문에 전하까지 건강을 해치면 저는 그 두 배로 걱정을 할 거예요.
오늘을 후회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일부러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윤금록:그럼~ …… 네 걱정을 사지 않도록 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해 줘. (말끝에 일부러 잔웃음을 섞어 냈다. 당신이 괜찮다면, 분명 저도 괜찮아야 할 터다.)
그것도 약속이지?
 
이아린:네, 이것도 약속이라면 약속이겠군요.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 부디 편한 밤을 보내셔야 해요.
 
윤금록:…… 네 소식이 들려오는 한. (머리카락 끝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서는, 말에서 내림과 동시에 당신을 안아내렸다.)
 
자택에 도착하자 하인들이 두 사람을 맞이하고자 나옵니다.
 
"아이고, 아씨!"
 
하인들은 아린의 상태를 확인한 뒤 몇은 아린을 부축하고, 몇은 호들갑을 떨며 의원에게 뛰쳐갑니다.
 
이아린: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전하. (느리게 고개 숙여 인사 올린다.)
 
윤금록:그래, …… 조심히 들어가. 편안한 밤이 되었으면 좋겠네~ 너한테도, 나한테도. (가볍게 고개만 까딱여 마주 인사했다.)
 
금록은 아린을 뒤로하고 궁으로 말을 돌립니다.
 
약조는 파랑처럼 겹겹이 쌓입니다.
 
어둠 같은 후회 덮치지 않도록, 달빛이 밝혀주기를 바라는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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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통은 금록이 환궁하고서도 한참 늦은 밤에야 도착했습니다.
 
연통: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바깥바람을 많이 쐰 탓에 몸살이 들었다 합니다. 탕약을 지어 마시니 한결 몸이 나아져 잠을 취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지만, 만일 깨어 계시다면 이 편지가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찰도 받았고 약도 제대로 들었다고 하니, 조금이나마 안심한 채 잠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종일 불길한 비가 내렸습니다.
 
한 단 높게 쌓은 어도가 잠길 정도로 물이 불어 포졸들이 천변으로는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날씨 따위가 나쁜 것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구나 싶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입니다.
 
천지가 뒤집혔습니다.
 
아린의 어머니에 대한 역모죄 고변이 잇따라 들이닥쳤습니다.
 
전날 밤만 해도 상태가 나아졌다던 아린이 점심 무렵 급격히 상세가 나빠져 와병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임금께서 친히 태의와 함께 귀한 약재까지 보내셨건만.
 
날이 저물 때쯤 갑작스러운 고발을 듣고는 대단히 진노하여 대제학을 당장에 추포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가례청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모든 일을 멈추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윤금록:(역모야 뭐, 역사 속에서도 흔히 그러하였듯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곤 하니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추문이라 하여도 무시할 만한 것은 못 될 터다. 반역을 꾀한다는데 왕의 어전이 마냥 평화로울 리는 없겠지, 그것은 제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허나, ……)
……아바마마께서는 내빈을 들이겠다고 하시던가? 뵙고 싶은데. (아래쪽으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건 성미에 맞지 않으니 가장 직통으로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 법한 사람을 찾는다. 몸을 빙글 돌려 제 주변에 서 있던 이에게 묻습니다.)
 
"그것이…… 전하께서 그 누구도 대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리셨다 합니다."
 
내관이 쩔쩔매며 허리를 숙입니다.
 
윤금록:나도? (당연히 나도겠지만.)
 
"예, 특히 태자 전하께서 들지 못하도록 신경쓰라는 명이 있었사옵니다."
 
그때, 한 나인이 바깥에서 급박하게 뛰어들어와 허리를 숙입니다.
 
나인: 전하, 영곤궁의 태후께서 급히 전하를 찾으십니다.
 
윤금록:음. (음.) 지금은 좀 바쁜데. (왕께서 만나주지 않는다면 다음은 제 약혼자에게 달려갈 의향으로만 꽉 차 있다가 제 3의 선택지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는 듯 묘한 낯짝이 됐다.)
많이 급하시다 하던가? (그렇겠지.)
 
나인: 그렇사옵니다. 태후 마마께서도 많이 당황하신 듯하여, 태자 전하와 상황을 논하시고자 저를 보내신 것으로 압니다.
 
윤금록:…… 오래 시간은 못 낸다고 전, …… 할 필요는 없겠네, 내가 직접 가서 전하면 되니까. (고개 가볍게 까딱이며 성큼성큼 걸음 옮겨갔다.)
 
금록은 영곤궁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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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것은 영곤궁도 마찬가지라, 태후궁 나인들이 모두 입조심을 하며 금록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고개를 수그리고 움츠러든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얼굴이 희게 질린 태후와 사망한 태자의 비 선화궁이 들어 있습니다.
 
태후는 온후하고 차분한 노인으로 평소 경거망동하지 않는 편이나,
 
아린을 금록의 짝으로서 아껴 주신 분인 만큼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리고 선화궁이 태후의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태후:어서 오세요, 태자. (초조한 낯으로 한숨부터 내쉰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랍니까.
 
윤금록:그건 모를 일이지요~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일인데. (뒷말은 중얼거리듯 덧붙으며 방 안을 한 번 에둘러 훑었다.) …… 시간은 많이 못 내 드립니다. 힘 닿는 데까지 직접 알아보고 싶은지라.
 
태후:주상의 성정이 마치 날뛰는 파도마냥 앞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태자에게까지 괜한 불똥이 튈지 모르니, 조심히 행동하셔야 할 것입니다.
 
한편 선화궁은 침착하려 애쓰는 듯하지만 손을 크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돌연 금록에게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 아닙니까?
 
선화궁:전하, 제발 제 한을 풀어 주시옵소서. 비명에 가신 사랑하는 임의 원통하고 분한 누명을 벗겨 주소서!
 
비명에 간 임이라면 죽은 태자이자 금록의 동생인 의명태자를 이르는 것입니다.
 
선화궁은 정말로 괴롭고 분한 듯이 이마로 바닥을 찧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선화궁:오늘 벌어진 모든 상황이 의명 전하께서 승하하실 적의 일과 같습니다. (흐느끼며 말 잇는다.)
당시 일이 창졸간에 벌어져 전하께선 정확한 사유를 모르시고 그저 의명 전하께서 급살을 맞아 승하하셨다고만 알고 계실 것인데, 의명 전하가 갑작스레 사망하기 전 호소하였던 병증과 지금 아린 비씨께서 앓고 있다는 병, 가슴 통증이 몹시 심하고 오한이 들다 결국 앓아눕는 증상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폐하께서 친히 병세를 살펴 황은을 내려 주시는 듯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손바닥 뒤집듯 진노하신 것도 같습니다. 그때에도 의명 전하가 앓기 시작한 후 난데없이 의명 전하의 행실에 크게 문제가 있고 폐하께 역심을 품었다는 고변이 있었는데, 폐하께서 의명 전하의 입장을 들어 보지도 않고 당장 추국을 시작하라 명하셨나이다.
그러나 조사가 시작되기 전 전하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끝내는 승하하시었으니, 명예를 더 더럽히지는 않으셨으나 삼도천을 건너고 나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행히 저는 태후마마의 은혜를 입어 궁에서 계속 살았고, 폐하께서도 의명 전하가 죽은 후로는 어쩐지 저에 대한 관심마저 끊으시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숨을 죽인 채 홀로 지냈사오나, 이제 죄도 없는 비씨마저 같은 일을 겪으려는 듯하니 어찌 애수가 끓지 않겠습니까.
의명 전하가 급사하고, 뜬금없는 역모로 고발까지 당한 것이 반드시 누군가의 악의에 의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바라건대 제 임의 원을 풀어주시고 정혼자의 목숨도 보전하시어 한을 풀어 주십시오, 전하. (서럽게 목놓아 운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요?
 
평소 건강하던 의명태자가 갑자기 사망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원인을 짚어내지 못하는 병으로 급사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죽음은 그저 흘러간 재액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증상이 아린의 것과 같다니요?
 
게다가 태후마저도 이런 말을 덧붙여 줍니다.
 
태후:선화궁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당시 상황이 이상했던 것이, 모든 일이 지나치게 빠르게 처리되었습니다. 의명을 시료하였던 당시 태의는 귀양길에 올랐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주상은 의명이 사망한 전후의 승정원일기마저 ‘의명 태자의 역모 고변 기록을 없애 주겠다’며 세초하셨으니... 당시에는 태자가 갑자기 죽었으니 아들이 대역죄인 취급당할 수도 있는 기록을 지워 주시려는 것인가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상께서 본시 이러시는 분이 아니었건만, 영명하고 침착하셨는데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매일 앞뒤가 다르시니 대체 언제부터 일이 이리 되었단 말입니까?
 
윤금록:…… 음, 잠깐, 잠깐~ 이야기를 좀 정리할까요. 상황이 긴박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짚고 넘어갈 것은 확실히 해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여. (굉장히 답지 않은 대사를 치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은 했지만, 뭐, 특수 상황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한 번 정도는 말입니다.) 요컨대 의명이 쓰러지기 전과 지금 나의 비가 처한 상황이 정확히 같다, 증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상의 반응까지도. 그 때도 일이 빠른 시일 내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다소 급박하게 마무리된 감이 없지 않아 그것이 제대로 된 일이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으며, 꼭 같은 전개라는 가정 하에 이번이라고 하여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이고, …… (미간에 얕은 주름을 잡았다가.) 주상의 명안이 흐려지신 듯하니 아직은 제정신 박힌 것 같은 내가 어떻게 좀 해 봐라, 라는 소리지요 이거.
 
태후:태자가 정리한 바가 틀리지 않는 듯합니다. 낭자에겐 내가 믿을 만한 사람과 의원을 보내 몸을 살피게 하고, 직접 주상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심상찮은 일이 아닌 듯하니.
태자는 의명이 승하했을 때의 기록을 찾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윤금록:썩 유쾌하지 못한 일을 맡기시네. (표정은 느슨하게 풀어 평상시의 낯 비슷한 것으로 되돌아왔다.)
 
태후:태자가 지금 경거망동하여 좋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비씨의 집안이 뒤집혔지만, 그 다음으로는 태자에게까지 주상의 진노가 닿을지도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윤금록:일단 조용히 몸을 사린 뒤에 정보전을 개시해라? 멋진 말이지만, 태후, …… (말끝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섞어냈다.) 그래, 태후께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잖습니까. 지금의 주상보다 더 잘, …… 내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당장 고개를 끄덕이고 영곤궁을 나서자마자 말을 몰아 대제학의 안채 앞에 서 있지 않으리라 어찌 확신하시려고.
 
태후:태자, 차분히 생각하세요. 지금 대제학은 역모의 혐의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내 역시 그것이 진실일 리 없음을 압니다. 허나 지금으로서는 역모죄로 고변당한 자의 사가에 찾아가보았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탄식하며 금록의 어깨에 한 손을 감싸듯 올린다.) 알아내셔야만 합니다, 누가 대제학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웠는지. 주상의 영명함이 어찌 이리 흐려지셨는지. 숲을 보지 않고 나뭇잎만 바라본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윤금록:…… 알아. 주상의 판단은 잘못되었고, 그걸 누군가 바로잡아야 한다면 아마 나여야겠지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이미 없어졌으니까. (음, 하지만 역시 머리 쓰는 일은 영 내키질 않는데. 시답잖은 생각이 이어지려던 것을 손으로 대강 흩어 없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안 하자는 주의로 살아 왔건만, 가끔은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고.)
일단, 그래, 그렇게 하지요. (괜한 말을 더 하기 전에 몸을 돌려 영곤궁을 나섰다. 모든 기록을 모아둔 승정원, …… 이 가장 빠르고 쉽겠지만, 한 번 세초하였으니 그쪽은 논외겠고. 그렇다면 어디부터 가는 게 좋을까.)
 
승정원일기를 세초했다 하나 궁에서 모든 기록을 전부 다 지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록 중에는 동궁일기(태자의 교육일지)나 일성록(왕의 일지)도 있지요. 특히 개중에선 임금 부처와 태자 내외만이 열람할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던 관원들이며 궁인들도 차고 넘치니, 당신이 진정 원하는 바와는 다르더라도, 우선 상황을 좀 알아 보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라면 국사 기록 기관인 [춘추관], 왕실 서고인 [경륜각]이 있습니다.
병증과 관련된 사건이니 [내의원]에도 예전에 의명태자를 시료한 기록이 남았는지 확인하면 좋을 테고, 지금 금록을 모시는 [태자궁] 궁인들 중에도 의명태자 시기부터 그대로 동궁에 남았던 자들이 있습니다.
 
윤금록:3
(발길 닿는 대로 내의원부터 갑니다.)
 
<은밀행동> 혹은 <민첩> 판정
 
윤금록:(은밀행동? 매혹 60인 나한테 은밀행동 같은 게 있을 리가)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이것도 없기까지, .......)
 
내의원으로 향하던 금록은 한 상궁과 마주칩니다.
 
"전하. 침전에서 조용히 처결을 기다리라시는 폐하의 명이 있었사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대인기능 판정 혹은 말로 설득하여 회피할 수 있습니다.
 
윤금록:내가 궁 안을 좀 돌아다니겠다는데 누구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직 남아있었던가~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고, 내가. (평소 행실로 설득 시도)
매혹
기준치: 60/30/12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이건 해야 될 거 아니야)
(행운, …… 이미 한 번 깎았네 하지만 5 더 깎을게요)
 
행운 5 감소, 성공으로 판정합니다.
 
"……심각한 상황이니만큼 행동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상궁은 미심쩍게 바라보다가도 곧 인사를 하고 자리를 물러납니다.
 
아무래도 금록의 행실이야 왕궁 사람들에겐 널리 알려져 있을 테니까요.
 
x
 
내의원에 도착하니,
 
안으로 들어설 것도 없이 문앞을 초조하게 서성거리는 내의녀 한 명을 마주칩니다.
 
이이는 금록도 얼굴을 아는 이입니다.
 
아린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는 이죠.
 
내의녀:전하. (좋지 못한 낯빛이나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내의원에는 어쩐 연유로 발걸음하셨나이까.
 
윤금록:오. (오.) 찾고 있는 게 좀 있거든~ 마침 이렇게 아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결 풀어진 얼굴로 목조 기둥이나 두어 번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
 
내의녀:…… 아린이의 일로 오신 것이 맞으시지요? 잠시 기다리시지요. 안에 있는 이들을 물리고 오겠습니다.
 
윤금록:음~ 맞기도 하고, 온전히 그것만은 아니기도 하고. 의명의 건도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어 버렸거든, …… (설렁설렁 고개 끄덕였다. 뭐, 편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면야 나쁠 것도 없지.)
 
안으로 들어선 내의녀는 잠시 후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며 금록에게 들어와도 된다는 듯 눈짓합니다.
 
내의녀:의명이라면…… 전 태자전하 말씀이십니까? (눈살을 찌푸린다.) 의명태자 전하가 강건하시던 시절부터 내의원에 있었으나, 아린과는 무슨 관련이……?
 
윤금록:증상이 비슷하다던데. 전황도 그렇고. (휘적휘적 들어가서는 손에 집히는 것부터 아무거나 하나둘 뒤졌다. 서책이면 읽어봤자 이해도 못 하면서 펼쳐도 보고, 약재는 거꾸로 뒤집어도 보고.) 네 쪽에서 뭐 집히는 건 없어? (없겠지만)
 
내의녀:당시 의명 전하의 검시 현장에는 저도 있었습니다. …… 태자 전하의 가슴을 갈라보니 심장이 돌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이전에 전혀 기록된 바 없는 병증이므로, 다들 무슨 저주를 받아 그런 것이라고 몰래 수군대고는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린의 증상이 그와 비슷하다니……. (아랫입술을 깨문다.)
 
내의원에는 그다지 특별한 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의명태자가 죽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겠죠.
 
윤금록:암암리에 말이 오갔던 것치고는 나한테 들려온 말이 너무 없는데~ (괜히 멀쩡한 풀뿌리나 몇 번 잡아당기다가 내려두었다.) 태의는 뭐래? 아무리 급사했다고는 하나, 주치의 하나쯤은 있었을 거 아니야. 검시까지 했다면 더욱이.
 
내의녀:(고개를 젓는다.) 의명 전하를 시료하였던 태의는 태자전하가 승하하신 후 자결하였습니다. 의명 전하가 급살을 맞아 승하하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석연찮다며 폐하의 허락도 없이 검시를 하였던 일로 꼬투리를 잡혀 가문 전체가 치도곤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또한 태의가 자결하기 전 남긴 유서가 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으나 몇몇 구절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폐하께서 아편에 중독되어 옥체가 크게 상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윤금록:(그건 유서에 남길 게 아니라 다른 기록으로 남겨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건 태의 쪽이 아닌 것 같은데, ……) 음, 알겠어. 주상의 흐려진 영민함을 풀 몇 잎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다만. (환각을 보고 환청을 보게 하는 향초라고는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직접 본 것이 아니기에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싶은 생각이 있는 윤금록 씨.)
네가 서성대고 있던 것도 나의 정인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너무 염려 마, …… 같은 방식으로 흘러가게 두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명확히 잡히는 것도 떠오르는 것도 없지만, 그냥, 확신을 가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특기다.)
 
내의녀:예, 그리고…… (기억을 더듬는다. 특히나 아린과 관련된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아는 건 다 털어놓아야 도움이 될 테니.) 또 수상한 점이 있다면 있었습니다.
그 무렵 좌의정께서 편전에 특히 자주 드나드셨는데, 그분은 의명 전하와 평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특히 좌의정께서 수상한 무당들과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잦아 더욱 그런 소문이 돌았었던 듯합니다. 좌의정께서 북문 근처에 웬 사당을 꾸미고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습니다.
혹여 이 일이, 아린에게도 영향이 갈까 불안하고 초조하여 바깥이나마 서성이고 있던 차였습니다. 부디 태자 전하께서 그 아이를 구해 주십시오.
 
윤금록:(아편에 무속인까지.) …… 이미 그럴 생각이었어~ (괜히 손이나 휘적휘적 두어 번 흔들며 춘추관으로 향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내의녀를 뒤로하고 춘추관으로 향합니다.
 
x
 
국사 기록 기관인 춘추관은 다른 궁내 관청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중요한 기록물을 다수 보관하는 곳이기에 관리가 엄중합니다.
 
저녁이라 관원들이 퇴청하였을 시간이지만 늦게까지 일하던 관원이나 숙직자가 있을 법합니다.
 
진입 전, <행운> 판정
 
윤금록:(다소 깎아먹었는데 그거)
기준치: 58/29/11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다행이다다행이다
 
문 앞에서 퇴청하던 관원 하나를 마주칩니다.
 
아린의 사촌형제인 젊은 직각입니다.
 
직각:(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걷다가 금록을 발견하고 눈이 커진다.) 태자 전하 아니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춘추관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윤금록:오. (오.) 더 늦어지기 전에~ 뭐 좀 찾아볼 게 있어서. 직각은 오늘 당직 아닌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직각:그렇잖아도 아린이 일로 심란한데, 숙모가 역모죄라며 집안이 뒤집어졌다지 뭡니까. 제 목이 날라갈지 모르는 상황에 누가 당직을 맡기겠습니까. (한숨 푹) 무얼 찾아보려 하시는지요?
 
윤금록:더 얽히기 전에 빨리 퇴궁시키겠다는 심리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만. (하지만 그걸로 될 일인가? 느리게 눈만 깜박이다가,) 아, 그래. 의명에 관한 기록을 좀 보고 싶어서~ 일 끝났으면 안내 좀 해 주지 않겠어? 당직도 아니라면서, 반역자 집안이라 일도 안 맡긴다며. (X) 한가하잖아. (X)
 
직각:저기, 저도 상처라는 걸 받습니다 전하……. (ㅠㅠ)
 
윤금록:그런데? (X)
 
직각:……
 
윤금록:하지만 태자는 나잖아.
 
직각:예, 맞는 말이지요…….
의명 전하의 기록을 찾으시려면 차라리 사초를 직접 열람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포기) 위험하긴 하겠지만, 제가 바깥에서 망을 보고 있겠습니다.
 
윤금록:다음 생에는 네가 태자 해. (X)
그렇게까지 해 준다면야 거절할 이유도 없지~ 누가 뭐라고 하면 반역자로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태자에게 직통으로 오해를 푸는 중이라고 해 두고.
 
직각:됐습니다. 역모죄에 새롭게 죄목 얹힐 일 있답니까?
그럼 다른 관원이 지나가기 전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주변 눈치를 보며 얼른 열쇠로 춘추관의 잠금쇠를 푼다)
 
윤금록:(냉큼 춘추관 안으로 쏙 들어가서 의명에 관한 기록 있나 손에 집히는 대로 이것저것 읽어 봅니다.)
 
이것저것 살펴보다, 의명태자가 죽은 시기의 사초를 찾아내었습니다.
 
크게 세 개의 기록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사초 1: 임금이 좌의정을 굉장히 자주 불러 독대하였는데, 그런 후에는 반드시 머리가 아프다며 지밀상궁을 불렀다고 합니다. 단순히 ‘지밀상궁 김씨가 들었다’ 정도로 쓰여 있지만, 그가 들었다 나간 후 침전에서 달고 톡 쏘는 냄새가 났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행간에서 사관의 탐탁찮은 어조가 눈에 띕니다. 더불어 기록의 앞뒤를 잘 살펴 보면, 좌의정이 편전에 든 날짜 전후로 반드시 임금의 어심이 크게 바뀌어 전날 내렸던 전교를 다음날 뒤집어 엎는 일이 잦았습니다.
 
사초 2: 의명태자가 죽기 석 달 전쯤, 임금이 좌의정의 ‘도성 북문 근처의 절 계명사 전각 하나를 새로 꾸밀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에 동의하였다고 합니다. 계명사는 전대 태후들이 종종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절이라 왕실 소유인데, 현 태후는 불공을 드리는 일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오래도록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허락한 듯합니다.
 
사초 3: 의명태자가 죽기 한 달 전쯤 임금이 잠시 와병하여 태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태자의 일처리에 대해 전날에는 크게 칭찬하였다가도 다음 날에는 같은 일을 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임금의 성노가 잦은 데 반해 그 기준은 공고하지 않아 태자가 국사를 돌보는 데에 있어 크게 어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임금이 특별히 노한 처결은 태자가 예문관 대교로서 새로이 부임한 좌의정의 아들을 징계한 건, 그리고 계명사 전각을 꾸미는 두 차례 공사에 있어 좌의정이 재산을 착복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니 사실인지 철저히 조사하라 명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왕의 손으로 직접 처분을 없었던 것으로 돌려놓은 다음 주에 좌의정의 아들이 크게 승차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윤금록:(달고 톡 쏘는 냄새야 아편이겠고, …… 좌의정과 계명사에 관한 기록이 더 있는지 추가로 찾아봅니다.)
 
<자료조사> 판정
 
윤금록:(잠시만 마음의 준비 좀 기대는 안 하지만)
자료조사
기준치: 30/15/6
굴림: 1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오우
 
계명사에 관해 추가적인 기록을 찾아냅니다.
 
사초 2: 의명태자가 승하한 다음날 좌의정이 ‘계명사의 처리 문제’에 대하여 여쭈었는데, 임금이 ‘임의대로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합니다.
 
볼만한 건 이 정도쯤인 듯합니다.
 
윤금록:이래서야~ 누가 주상인지 모르겠어.
(애먼 직각이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한소리 듣기 전에 이만 나갑니다.)
별 일 없었고? 이 쪽은 끝났어~
 
직각:전하, 원하시는 바는 찾으셨는지요? (주변 눈치 잔뜩 살피다가 금록이 나오자 안도한다)
 
윤금록:음~ 대충은.
 
직각:몇 지나가긴 했지만 다행히 이쪽엔 관심 갖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어느 정도는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만…….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스럽지만, 저희 집안을 구명해 주십시오. 숙모님은 절대로 역모 같은 것을 저지를 분이 아닙니다. 더 높은 벼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머무르신 분인데…….
 
윤금록:죄송해할 것까지도 없지 않나? (고개 비스듬히 기울였다.) 사유가 어떻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생략된 단어: 사촌형제)가 없으면 나도 곤란하거든~
 
직각: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 그럼, 저는 이만 퇴청해보겠습니다.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전하.
 
윤금록:(직각한테 설렁설렁 마주 인사 건네고, …… 경륜각으로 향합니다. 서책만 하루종일 들여다 보고 있는 건 확실히 적성에 안 맞는 일이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야, 가끔은 해 줘야겠죠.)
 
x
 
궁궐에서 가장 큰 2층짜리 서고입니다.
 
평상시에도 인적 없는 전각이고, 지금도 시간이 늦은데다 비까지 와 특별히 드나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서책이 대단히 많은데 무엇부터 골라 보아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자료조사> 혹은 <관찰> 판정
 
윤금록: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다...다시
 
윤금록:(아 진짜)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75
판정결과: 실패
 
인생은 삼세판
 
윤금록:(다른 데 다녀올까?
)
 
인생은 삼세판!!!
 
윤금록: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라취
 
이게인생입니다 (?
 
최근에 누군가 뽑아 본 것인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책상 위에 쌓여 있는 <태조실록>이 눈에 띕니다.
 
윤금록:그렇구나.
(그럼 단순하게 제일 먼저 보이는 것부터 뒤져봅니다.)
 
태조실록: 전 왕조의 폐주가 삿된 사술에 홀려 나라일을 그르쳤는데, 이 무리들이 새 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세력을 유지하여 폐단이 심하므로 태조께서 친히 골로낙 신도들의 잔당을 모두 소거하라 명하였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골로낙 신도들’에 대한 언급은 많지 않으나, 전 왕조가 쇠할 무렵 강성했던 사교 무리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퍽 사악하고 끔찍한 취급을 받은 모양이지만 백성들에게까지 그 위명이 퍼지면 오히려 세를 불릴 수 있으므로 조정 내부에서만 쉬쉬하였다고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탈극으로도 공연되는 <쌍옥루>의 내용이 아무래도 각색이 아니라 실제 역사인 듯합니다. 태조 대왕의 왕후 이씨가 심장이 돌처럼 굳어 급사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태조는 왕후 이씨를 갑자기 잃은 일로 크게 상심하여 매해 그의 기일이 다가오면 반드시 정무를 쉬고 바다를 거닐며 이씨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태자궁 권역 몇몇 전각이 그 위엄과 걸맞지 않게 부실하다 하여 재공사를 명하였는데, 특히 태자궁 후원 호수 위의 누각 연흔정 건물을 태조 대왕께서 직접 재설계, 점검하셨다고 합니다. 전각 현판도 태조께서 직접 쓰셨는데, 그가 이르기를 ‘훗날 만일 나라에 재액이 닥친다면 반드시 내가 이 현판을 적은 뜻을 헤아려라’ 하였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유의미한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윤금록:(태조도 꽤나 바빴구나,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태조실록 다시 덮어뒀다. 앞에 본 사람도 정리 안 했으니까 굳이 내가 정리할 필요도 없겠지 싶어.)
(더 볼 건 없나? 더 없다면 슬쩍 빠져나와 태자궁으로 갑니다.)
 
x
 
전각 전체에 청기와를 사용한 동궁 권역입니다.
 
오후 햇살이 느리게 반짝이는 시간쯤에는 푸른 빛이 기세 좋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보여 절경이지만,
 
이토록 세차게 비가 내려서야…….
 
순간 번쩍하고 뇌편이 명멸하더니 눈 몇 번 깜빡인 후에는 천지를 울리는 우레 소리가 들렸습니다.
 
용마루에 걸린 암운이 쩌렁쩌렁 울음을 토했습니다.
 
태자궁 권역에는 침전이며 시강원, 검술을 연습하는 연무장, 서고, 부속 전각까지 여러 건물이 있으나,
 
태조 대왕께서 특별히 설계하고 현판까지 적었다는 <연흔정>이 아무래도 눈에 뜨이는군요.
 
평소라면 한적하고 고요하여 쉬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호수에 나룻배처럼 고인 정자지만 오늘은 특별한 불운이라도 암시하듯 귀기 서린 그림자를 내뿜는 것만 같습니다.
 
윤금록:(시끄러운 소리에 가만히 인상 잠깐 찡그렸다가 연흔정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오릅니다. 비에 젖은 꼴이야 진작에 됐을 테고, 이제 와서 날씨 좀 안 좋다고 둘러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리고 물에 젖은 미남은 원래 열 배 정도 더 미남으로 보인다는 말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사유같지만 중요합니다.)
 
물에 젖은 미남 왕자 금록은 연흔정으로 걸음 내딛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순간 멀리 편전에서, 어쩌면 북문 근처의 자해산에서, 혹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사특하고 악한 노래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환청처럼 들리는 이 저주스러운 악곡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성> 판정 (1/1D3)
 
윤금록: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1 감소.
 
억지로 정신을 다잡으며 다리를 건너 정자로 다가가니,
 
과연 태조 대왕께서 직접 쓰셨다는 현판이 올려다보입니다.
 
연흔정連痕亭…….
 
<지능> 판정
 
윤금록: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연흔’이라면, 지층이나 바위에 남은 파도 모양의 흔적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인데요.
 
태조 대왕께서 직접 지은 이름이라니 필시 보이는 것 이상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잠깐, 태조 대왕이 남긴 ‘파도’라고 하면, 금록이 가진 것이 하나 더 있지 않나요?
 
윤금록:…… 바다 말고? (한쪽 눈썹만 슬 치켰다가.) 아.
이건가. (손을 쭉 펼쳐 보였다. 네 번째 손가락에 제대로 있을 테지, 반지.)
 
<관찰> 판정
 
윤금록: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젖어서 시야 방해)
 
빗속에서 낭화지환을 바라보는 그 순간 다시 한 차례 번개가 번쩍이고,
 
잠시 밝아진 사위에 현판 왼쪽 아랫기둥 중간 부분의 갈라진 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옵니다.
 
윤금록:(방금 저쪽에 뭐가 있지 않았나? 손 뻗어서 갈라진 틈에 있는 거 꺼낼 수 있나 봅니다.)
 
틈은 성인 남성의 손가락 서너 개가 들어갈 정도로 깊고 넓은데, 안을 더듬어 만져 보면 동그란 원 모양의 홈이 패여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무언가 들어 있지는 않지만, 크기가… 낭화지환과 꼭 알맞을 것 같은데요.
 
윤금록:(내 거랑?)
 
그렇습니다!
 
윤금록:(내 거라면야 잠깐 뺄 수 있으니, …… 홈에 맞춰서 반지 넣어 봅니다.)
 
금록이 낭화지환을 빼내어 홈에 끼우자,
 
달칵 맞물리는 느낌과 함께 정자의 현판 한 쪽의 연결부가 훅 풀립니다.
 
다른 한 쪽으로만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군요.
 
현판으로 감춰졌던 가로대 안에는 낡고 오래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윤금록:(현판을 소중히 여기라더니 부숴버린 후손이 된 기분인걸.)
(하지만 전리품인 책은 발견한 사람이 임자니까 일단 꺼냅니다.)
 
다…… 다시 끼우면 되니까 괜찮아
 
반지도 다시 꺼내 가져갈 수 있습니다.
 
윤금록:(다시 끼우는 건 태자 소관이 아니라서 안 할 건데?)
(반지만 꺼내갑니다.)
 
궁궐 사람들이 해줄 거니까 괜찬아
 
윤금록:(그럼 반지도 다시 제자리에 끼고, …… 방금 꺼낸 책 읽어봅니다.)
 
<낭화록>
 
*오컬트 기능 +2, 역사 기능 +2
 
연흔정 현판과 같은 필체로 쓰인 책입니다.
 
첫 장만 읽어 보아도 태조 대왕이 직접 남긴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낭화록: ‘창’의 전 왕조는 말기 무렵 나날이 부패하였고, 급기야 ‘골로낙’이라는 사이비 신을 섬기는 자들이 세력을 불려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허수아비 왕을 제멋대로 올렸다 폐위하기를 반복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던 골로낙의 신자들을 몰아내 정리하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이 ‘창’의 태조입니다.
정인 왕후 이씨마저 이들의 요사스러운 저주로 잃은 태조는 신자들이 돌아와 나라를 어지럽힐 것, 그리고 같은 저주에 당할 것을 우려하여 왕가의 후손들에게 특별한 유물을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쌍가락지 ‘낭화지환浪花指環’입니다. 파도 문양을 새긴 가락지라고 해서 낭화지환인데, 영험한 기운이 서린 청금석으로 만들고 몇 가지 주술을 걸어 두었습니다. 진실로 애정하고 신뢰하는 상대와 나눠 끼면 서로를 악운으로부터 지켜 주는 효과를 가지는 부적이라고 합니다.
왕후 이씨를 죽인 주술이 정확히 어떤 절차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모르나, 일단 걸리고 나면 드물게 통증을 앓던 대상은 갈수록 상세가 심해져 심한 몸살에 걸렸을 때와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오한이 들고 운신이 힘들어지더니, 심장의 통증이 계속되며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완연한 병색을 띠고, 급기야 내장이 손상되기 시작합니다. 심장이 완전히 굳고 장기가 손상되는 데에 나흘에서 닷새 정도가 걸립니다. 이 주문은 일단 시작되면 대상자의 심장이 멎을 때까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후손들이 혹시나 다시 이 같은 재액을 겪게 된다면 이것은 모두 골로낙의 신자들을 모조리 없애지 못한 자신의 탓이니 스스로의 죄가 깊다고 한탄하는 내용으로 끝맺어집니다.
 
그러니까, 의명태자를 죽이고 이제는 아린마저 겨냥한 이것이 질병조차 아니고 삿된 주술이라는 건가요?
 
심지어 일단 시작되면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고요?
 
금록, <이성> 판정 (1/1D3)
 
윤금록:
SAN Roll
기준치: 69/34/13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2
 
이성 2 감소.
 
오한이 들고 운신이 힘들어지더니 심장의 통증이 계속되며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완연한 병색을 띠고, 급기야 내장이 손상되기 시작한다,
 
심장이 완전히 굳고 장기가 손상되는 데에 나흘에서 닷새 정도가 걸린다…….
 
아린이 이러한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죠?
 
바로 오늘 오후입니다.
 
쌍가락지를 나눠 낄 무렵까지만 해도 봄꽃처럼 말갛게 웃어주던 사람이……
 
그저 사특한 자들의 주술에 휘말려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니요.
 
순간적으로, 정말이지 어떤 사고도 무엇도 없이 뚜렷한 불안감이 덮쳐옵니다.
 
위태롭게 걸린 연흔정의 현판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윤금록:(수리가 필요해 보이는 현판 - 본인이 그렇게 만들었지만 - 한 번 올려보다가, 서책을 대강 품 속에 구겨넣고 걸음을 옮겨 갑니다. 주술에 대해 일절 문외한인 자신이 설령 주술의 근원지에 들이닥친다 하여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은 알고 있습니다만, ……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꼬락서니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선조의 죄의식이니 사특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이 주술을 막을 방도가 있는지, 그럴 힘이 제게 있는지 없는지만이 생사여부를 가를 뿐. 말을 몰고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가정 하에 - 아주 지척이라면야 걸어서도 가겠지만, 그 정도의 여유를 부릴 틈은 없을 것 같으니 - 제가 가장 즐겨 타던 말을 몰고 계명사로 갑니다. 빗길에 뛰쳐나가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이번 건을 잘 끝내면 당분간은 고집 부릴 일 없을 테니까 한 번만 봐 달라고는 말 안 해도 이해하겠죠, 제 말도.)
 
금록, <승마> 및 <은밀행동> 판정
 
윤금록:(진짜인가 싶어)
 
가짜였음 좋겠다
 
윤금록:
승마
기준치: 5/2/1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승마
기준치: 5/2/1
굴림: 33
판정결과: 실패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26
판정결과: 실패
(음? 일단 은밀행동은 행깎... 그런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요 승마가 안 될 것 같은데)
 
행운 6 감소, 은밀행동은 성공으로 판정합니다.
 
윤금록:(비가 추적추적 내리니까 추적으로 가 보는 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보자고
 
윤금록:
추적
기준치: 10/5/2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눈치가 없네
(그럼 말재주도 말이니까 말재주로 말 타고 가는 건?)
 
가까스로 태자궁까지는 조용히 빠져나오나 싶었으나, 소란스럽게 내리는 비에 말조차 불안감에 젖은 것일까요?
 
말이 투레질을 하며 쉽게 움직이질 않습니다.
 
ㅋ 아 그래 말재주로 말 설득해보자
 
윤금록:(말horse도 말word이다)
말재주
기준치: 50/25/10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ㄱㄱ)
 
말도 말이다
 
금록은 가까스로 말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고삐를 당겨 박차를 가합니다.
 
x
 
빗물에 말발굽이 미끄러집니다. 파도 우는 소리처럼 암랄한 우뢰가 연신 동토를 살랐습니다.
 
비록 낡은 절이라 하나 태후들이 오가던 곳이라 길은 잘 닦여 있습니다.
 
이름대로라면 소박하고 고즈넉한 절이어야 할 것 같은데 오르는 길마다 사당나무에 푸르고 붉은 천이 묶여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오 분 정도 달리면 계명사 입구에 다다릅니다.
 
헌데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이상합니다.
 
절이라면 아무리 작은 암자라도 응당 지키는 승려가 있을 것인데…
 
어째서 아무도 없나요?
 
대웅전 위치일 법한 전각 하나만이 안쪽에서 가는 촛불 불빛을 내고 있습니다.
 
말굽 아래에서 자갈이 둥글게 굴러 깎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윤금록:너무 조용하지 않아~? (괜히 혼잣말이나 하며 말 잘 세워두고 전각 안으로 들어섭니다.)
 
전각 내부에도 인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는 것은 사람일 뿐, 금록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한, 것들이…
 
고개를 들어올리면,
 
있어야 할 불상 대신 벽면에 걸린 것은,
 
화살을 맞아 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정인의 초상화…….
 
그의 무수한 불운과 재액을 비는 부적, 아마도 사술에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잿덩어리, 활과 화살, 영문 모를 끈,
 
…그리고 초상화 앞에 밀짚으로 만든 인형이 한 채 앉아 있습니다.
 
인형의 가슴 정중앙에 대못이 박혀 있는데, 분명 밀짚으로 만들었을 이것에서 기이하게도 피가 흘러나오다 멎은 상태입니다.
 
멎은.
 
지금 당장 아린의 상태를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논리도 근거도 없이 절박하며 본능적인 감각이 척추를 내달렸습니다.
 
당연하죠. 사랑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은 숫자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두 사람이 반지를 나눠 끼고 파도 앞에서 진실한 애정을 약조하였을 때부터 또아리 튼 용처럼 얽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내밀하고도 차가운 불길함이 뱃속을 저몄습니다.
 
윤금록:……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봅니다. 엉망이 된 초상화에, 악의로 가득한 공간에, 멎은 피라, …… 최악을 가정하는 건 솔직히 특기도 재주도 뭣도 아니라서 자신 없지만,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때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날이 오는 법이죠. 곧잘 말에 올라 대제학의 집으로 내달립니다. 늦기 전 - 라고 하기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 에, 그러니, 아직 내가 너의 최선임을 자부할 수 있을 때.)
 
금록은 홈에서 도로 꺼냈던 낭화지환을 낀 채 빗속을 내달립니다.
 
아린은 궐 동문 바깥 북촌에 살지요.
 
이 모든 것이 그저 기분나쁘게 잘 꿰여맞춰진 우연이나 괴담 따위고, 아린은 그저 고뿔처럼 잠시 지나가는 병에 걸린 것뿐이라고...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x
 
가장 깊은 것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이고 때로는 천 길 물속이며 때로는 동짇달 한 허리 베어낸 달밤이라 하나…….
 
아니요, 전부 틀렸습니다.
 
깊은 것은 필시 달려가는 길 고개 너머너머 우묵하게 패인 어둠입니다.
 
북촌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는 거리가 어찌 이리 먼 것일까요?
 
스스로의 숨소리가 날카로운 갈퀴처럼 귀를 갉는 것 같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도록 대문을 걸어잠근 북촌 길을 마구 달려 오르면,
 
창졸간에 가장이 끌려가면서 대문도 제대로 잠그지 않은 대제학의 고택이 나옵니다.
 
이 시간이라면 아린은 분명 내실 쪽에 있겠죠.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윤금록:(들어갈 수 있나? 아니, 태자가 못 들어가는 곳이 어디 있나 싶기도 하고. 누가 붙잡든 말든 안쪽까지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식솔들도 모조리 끌려가기라도 한 것인지, 내실로 가는 동안에도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창호지 너머로 불 켜진 방이 하나 보입니다.
 
그러나 금록이 어떤 최악을 생각했건 그것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 눈에 담깁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실에는 아린이 있었습니다.
 
벽에 등을 기대 앉아서, 눈을 감은 채로,
 
옷깃에 시뻘건 피를 묻히고,
 
희미하게, 숨을, 쉬면서…….
 
윤금록:…… (습격인가? 그렇다기엔 침입의 흔적이 없고, …… 따위의 총명한 사람들이나 할 법한 논리를 전개하기에 생각이라는 것은 감정 앞에서 쉬이 무너지는 류의 것이라. 되는대로 급하게 당신에게로 다가가 숨을 살폈다. 꺼져가는 숨, 내의를 불러도 오는 자가 있을까? 그렇다면.) …… 선택지 두 개를 줄 테니 들린다면 답해 줘. 첫 번째는 내가 이대로 네 곁에 앉아있는 것, 두 번째는 내가 나가서 근방의 의원을 불러오는 것. 나는 고집이 센 사람이라 원래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원하는대로 했겠지만~…… 그래, 오늘만이야.
 
이아린:(힘없이 기대어 옅은 숨을 몰아쉬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뜬다. 눈앞이 흐려 정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팔을 뻗어본다. 뺨을 감싸려는 듯이, 그도 아니면 손을 잡고자 하는 듯이, 그도 아니라면 그저 닿기만 해도 좋을 테지.) 전하……. 와주셨군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송구합니다.
이 밤만은 어디도 가지 말아주세요. 부디, 제 곁에 머물러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한 선택을 들으신다면, 화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록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린이 본시 어떤 사람인가요?
 
누군가 그의 인생을 제멋대로 쥐어잡고 흔드는 것을 용납할 만한 인물인가요?
 
손 안에 쥐려 하여도 나비처럼 꽃향기를 찾아 날아가버릴 자유로운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때로는 냉정하리만치 지혜로운 자.
 
당신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선도 그렇고요.
 
아린의 곁에 나뒹구는 것은 흰 그릇입니다.
 
희미하게, 검은 물 같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윤금록:(고개를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당신의 손끝에 제 뺨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보일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용납이 안 되는걸, 여러 의미로, …… (말끝에 허탈한 웃음을 섞어냈다.) 화낼 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니 무슨 말을 해야 맞는지 모르겠네.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나 이거.
 
이아린:홀로 잠들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역모로 몰린 집안이 아닙니까. …… 누군가 저의 영원한 죽음을 바라나 그들이 바라는 바를 손쉽게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슴에서부터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에 작게 숨을 들이킨다. 밭은 기침이 이어졌다.)
저조차 확신할 수 없는 길이나, 지금으로선 이것 외에는 걸어볼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점집의 역술가가 백년해로를 논하였었지요…… 백년해로를 위한 짧은 별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 바라고 저지른 짓입니다. 칭찬은 기대하지 않으나 적어도 저의 심중만은 믿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윤금록:…… 나 또한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어. 다만, …… (긴 숨을 들이켰다.) 잘, …… 이해가, 그래, 이해가 안 가는데. 나와 오래 함께 있기 위해 지금 이런 선택을 했고, ……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너를 믿고 네가 무사히 돌아올 언젠가의 기약을 기다리면 된다, …… 는 건가?
 
이아린: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선 이해도 납득도 가지 않으시리란 걸 압니다. 다만 이리 받아들여 주세요. 흙에 파묻히기 전의 마지막 날갯짓이라고.
 
아린이 다시 한 차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합니다.
 
그러나 새벽하늘을 닮은 눈, 그 눈만은 도저히 병자의 것이 아닙니다.
 
타인이 자신의 일생을 쥐는 것을 허락하는 사람의 시선도 아닙니다.
 
그 무엇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자약히 비상하고 말 사람.
 
숨이 점차 흐트러져, 단어와 단어 사이로 밭은 숨결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아린:전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힘을 짜내어 속삭인다.)
이 방의 서랍에 화첩이 있습니다. 그를 가져가 후일을 도모하세요. 실마리를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가 보위에 오르시고 나면, 반드시 다시 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 믿고 싶습니다.)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부디, 낭화지환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간직해주세요…… 저희가 바다 앞에서 나누었던 진실된 약조에 또 하나의 바람을 걸고자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였음에도, 전하의 정인으로 남고 싶어요.
 
윤금록:…… 마치 미래를 볼 줄 아는 것처럼 말하는걸. 간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기억하고 싶은 건 마음만 먹으면 잊지 않을 수 있어, 그건 아마 너도 잘 알고 있겠지, …… (나직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속닥였다.) 그걸로 괜찮나? 네가 가진 각오와 행동에 비해 내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약하지 않아, ……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내줄 수 있어, 약속했잖아.
 
이아린:네, 알고 있습니다. 전하는 총혜한 분이시니 마음만 가지신다면 어렵지 않겠지요? 그래도, 동시에 전하는 너무도 빛나는 분이시니, 분명 전하의 빈 곁을 차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아…… 조금은 겁이 나는 것 같습니다. 질투인 걸까요. (힘없이 미소했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당신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진정 검은 늪처럼 저를 휘감았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더라도 전하만은 저의 존재를 믿어주세요.
전하만은…… 저를 사랑해주셨으면 해요.
 
윤금록:…… 내가 빛나는 것과 너의 부재와는 사실상 상관이 없지 않나 싶지만. (말끝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섞어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나도 너를 믿고 네가 돌아오지 않을 날에 대해 가정하지 않을 생각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당장 의원을 부르러 간다거나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이냐며 묻고 따지지 않고.
(제 뺨을 감쌌던 당신의 손을 그대로 입가로 당겨 느리게 입을 맞추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언어로 한 번 더 약조해야만 할까? 네가 원한다면 이번 한 번 정도는 그리해 줄게. 이걸로 부족하다면.
 
이아린:저는 쉽사리 망설이곤 하는 일을, 전하께서는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십니다. (기약 없는 약조를 요구하는 지금도 그렇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데도 당신은 망설임 없이 걱정하지 말라 저를 위로하고……. 저조차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믿어주질 않는가.) 그래서 전하가 좋습니다. 꺼지지 않는 빛인 것만 같아서.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어도 길을 밝혀줄 것 같아요.
한 번 더 혼례일이 미루어지면 태자 직을 내려두겠다 하셨었지요. 그 말은 어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위를 받잡아 주실 테지요? 제가 돌아왔을 때 사관이 남긴 기록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 재밌는 기록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때가 오면 순간적으로 아린에게 눈빛이며 혈색이 확 돌아옵니다.
 
가늘게 저며지던 목소리도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어떤 현상인지 알고 있습니다.
 
윤금록:…… 나를 누구로 알고? 한 번 입 밖으로 한 말을 번복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야, …… 두 번은 없을 거니까. (있을 것이다. 당신이 돌아온다면, 비단 두 번만이 아니라 스무 번이라 하여도.)
기록만 사흘 밤낮으로 꼬박 읽어도 모자랄 만큼 즐거운 것들을 잔뜩 남겨둘 테니까 기대 무지막지하게 하고 와도 좋아. (괜스레 이런 말이나 했다. 아, 저는 역시 중요한 순간에도 무게를 잡고 구는 것만큼은 도무지 재주랄 게 없어서.)
…… 이별의 시간인가? 내가 네게 다음에 또 봐, 곧 내가 찾아갈 테니~ 가 아닌 다른 인사를 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 없는걸.
 
이아린: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아마 당신이라면 제가 생각치도 못한 일들을 벌여두겠지. 그래서 책을 읽어내려갈 때 몇 번이나 놀라며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도록. 어쩐지 눈앞에 선연히 그려지는 듯하여, 꺼져가는 숨으로도 희미하게 웃음이 샜던 것 같다.)
긴 이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떨리는 손을 품 안에 넣어, 떨잠을 꺼냈다. 자색 배경에 흰 보석이 박힌, 섬세한 장신구.)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단 하나만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 떨잠을 저와 함께 묻어주세요. …… 비슷한 물건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까이 있는 것 같을 테니 말입니다.
 
윤금록:같은 떨잠을 삼백 개 더 만들어서 묻어달라 해도 그리하고 역사에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한 세자 기록으로 남을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내가 유쾌한 기록을 남길 틈을 주지 않는구나, 너는. (이 순간마저도 시답잖은 소리나 하며 남은 쪽 손으로 당신의 떨잠을 꼭 쥐었다.) 물론, 기꺼이. 대신 돌아올 때는 가져와야 해. 난 옛 연인의 무덤을 파헤친 자로 저잣거리에 소문이 나고 싶진 않거든, ……
 
이아린:삼백 개나 만들었다간 같은 색의 보석이 전부 거덜나겠습니다. (당신의 품에 무거운 고개를 기댄다. 이 품안에 영영 있을 수만 있다면.) 걱정 마세요.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전하가 골랐던 그 화려한 색의 밀짚 모자도 쓰고 올지 모르지요. 그때 가서 우습다고 하시면 아니 됩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벌써 그리우니 어쩌면 좋지요? 차마 새어나가지 못한 물음을 갈무리하고, 그저 가만히 시선을 맞춰왔다. 평소에는 자주 먼저 피하곤 했지만, 이제는 얼마나 오래 마주하지 못할지 알 길 없기에. 점점 더 숨은 가늘어져 가고, 몸에서는 힘이 빠져간다. 그래도 끝끝내 사랑하는 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간의 추억과 바다처럼 깊은 은정과 언젠가를 기약하는 아득함이 뒤섞인 자색 홍채를.)
 
윤금록:그 정도 사치는 부릴 수 있다니까 그래~ (오늘은 눈을 피하지 않네, 따위의 말이나 입 속으로 중얼대며 눈을 맞췄다. 지금 웃는 얼굴을 하고 있던가? 제가 제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낯짝이 전부니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습관을 떠올려서, …… 한쪽 눈썹만 한 번 슬 치켰다가 이내 표정을 완전히 풀어내며 눈썹을 늘어트려 웃는 낯을 만들어 보였다.) 넌 무얼 하든 내 취향이니까 아무렴 상관없어, …… (하고는, 익숙한 인사가 하나 남았지.) 잘 자. 편안한 밤 되기를.
 
기약이 없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만날 것이고,
 
너른 창해와 파도에 걸고 드린 약속은 결코 깨지 않을 것이라고.
 
당연한 것을요. 그대가 저의……
 
저의 큰물이신데, 하는 말은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달싹이는 것으로만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서로 닿지는 않았으되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입맞춤이었고-
 
다음에 벌어질 전개를 반드시 알기에 심장을 쥐뜯는 일입니다.
 
두 사람 모두가 해가 해海로 넘어가던 그날의 바다를 떠올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린은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저를 비추는 것이 그 아른한 눈에 새겨지는 눈부처였으므로.
 
잦아들던 옅은 숨결이 이내 온전히 멎습니다.
 
아, 잠시 쉰다는 것이, 이리도 안온하고, 춥고, 떨려서…
 
사랑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어서, 판정하는 것도 아니어서…
 
수를 읽는 것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희뿌옇게 새벽이 밝아 버리지 않겠어요.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 꺼진 불이 그 하나뿐만도 아닌데…
 
새벽별을 잡아 죄어도 아침은 옵니다. 오고야 맙니다.
 
자란다는 것이 이럴 필요는 없고,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만 성장하는 것도 아닐진대…
 
하지만 비가 멎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단죄해 마땅한 아침이 타오릅니다.
 
이제 금빛 꽃을 맴돌던 나비는 스러졌고, 당신의 향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알아줄 이도 없겠지만,
 
그러나 약속하였으므로.
 
이내 기다리는 것만은…….
 
낭화애담 : 파랑이 이는 자리 完.
 
낭화애담 : 해국 떨어지는 소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