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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31~230925] 아실헬리 - Time out :: Final Salute

 

플레이타임 : 약 19시간

 

 
“예언을 하나 하죠.”
 
“■■를 죽이고자 하면 당신도 죽고, ■■를 살리고자 하면 당신도 살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를 위해 행한다면…….”
 
“당신의 사후,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유언은 오직 구원자만이 베풀 수 있는 구원, 망령은 한낱 인간만이 탐낼 수 있는 영원이었다.
 
언젠가 말하지 않았던가.
 
가장 사랑한 것을 두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향해 옮기는 그 걸음.
 
그 걸음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의 순례라고.
 
이미지
 
“안 들어오세요?”
 
뒤에서 운전사가 타이머와 카운터를 부릅니다.
 
그 목소리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리자 등대, 세계와 장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파도가 들썩입니다.
 
해골도, 난파선도 없는 텅 빈 해안가에 떠나간 아이의 발자국만 작달막합니다.
 
...
 
여느 때와 같은 밤. 겨울이 한창인 12월의 끝자락입니다.
 
날이 추운 탓에 웬만하면 외출을 자제하라고 안내문자가 뿌려지는 시기예요.
 
두 사람은 훈련을 마치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중입니다.
 
창밖에서는 뿌연 회색 하늘이 구름을 잔뜩 끌어안고 있습니다.
 
눈이 함빡 올 것 같은데, 정작 내리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리게 하려는 셈일까요?
 
헬레네 R. 히페리데:(당신이 좋아하는 반찬을 식판 위로 스윽 옮겨준다.) 금세 눈이 올 것 같았는데, 내내 흐리기만 하네요.
 
아실링 펜들레엄:(식사나 창밖에 날씨말고 다른 것에 생각에 잠긴 듯 멍때리다가, 식판 위에 올려진 반찬 보고 눈 동그래진다.) 저는 어린애가 아닌걸요~.. (말은 이렇게 해도 챙겨주는 거 잘 먹는다.) 이상한 날씨네요. 세상을 다 하얗게 덮을 것처럼 눈이 펑펑 내려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 답답함도 좀 줄어들을 것 같은데..
 
헬레네 R. 히페리데:(말은 그리 해도 잘 드시는걸요~ 흐뭇한 얼굴.) 어릴 때는 가득 내린 눈밭 위에 드러누워 놀고는 했었어요. 막내오빠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시는 바람에 오래는 못 했어도……. (창밖의 흐린 하늘을 물끄럼 바라본다.) 이번에 눈이 오면 큰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요? TV에서 3단, 4단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아, 저 그거 뭔지 알아요. 스노우 엔젤이죠? 오빠분께서 현명하신 분이시네요. 오래 있다가는 감기 걸리죠. 저도 한번 해본 적 있어요. 그랬다가 심한 감기에 걸렸었죠. 물론 그 이후로 감기 같은 것은 걸려본 적도 없지만요. (헬레네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시선을 이동한다.) 그럴까요? 저희 둘이라면 큰 눈사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예요. 저희라면 5단도 만들 수 있을걸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랬나요? 이런, 아실은 제때 멈추질 못했었나 봐요. 다음에 또 그럴 기회가 온다면 너무 오래 누워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겠어요. 그 이후론 걸리지 않았더라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요. (5단이라는 말에 눈 살짝 커지더니 푸스스 웃는다) 정말요? 그렇게 높이는 상상도 못 해봤는데……. 맨 위에 눈덩이를 올릴 땐 발받침대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아실링 펜들레엄:저한테는 다정한 오빠가 없었거든요. 그냥 오빠는 있었지만요. 지금은 뭐하나 모르겠어요. (아무런 감정 없는 말이 이어진 후 포크로 브로콜리 찍어 입에 쏙 넣는다.) 그러고 보니 추운 날에 제대로 멈추는 법은 아직도 모르겠어요. 뭐, 이제는 헬리가 옆에 있으니 돌아가자 할 때 따라가면 되겠지만요. 헬리 덕분에 다시 감기 걸리는 일 같은 것은 없을 거예요. (웃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 짓고는 샐러드에 있는 야채 조각으로 작은 탑을 쌓는다. 먹는 것으로 장난치면 안 된다는 것 알지만!) 아이스크림처럼 높게 쌓아보기로 해요. 5단 아이스... 아니 눈사람! 발 받침대 정도는 걱정 마세요. 제 등 밟고 올라가시면 돼요!
 
헬레네 R. 히페리데:(오빠뿐 아니라 당신의 고모도, 다른 가족들도, 지인들도……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을 터다. 지구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적어도 지금의 우리에겐 전무하니까. DOT는 대체 어떻게 지구의 타이머들을 데려온 것일까. 머릿속에 고민이 구름처럼 들어차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평이한 척 식사를 이었다. 단지 제가 확실하게 바라는 건 당신이 더 이상 상처입지도 아프지도 않았으면 좋겠단 것뿐.) 그럼요. 아실이 감기에 걸리면 얼른 9시 페어분들께 도움을 요청하러 달려갈 거예요. (탑 쌓는 모습 봄……. 장난치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아실의 장난기야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네에? 아실의 등을 어떻게 밟나요! 절-대 안 돼요.
 
아실링 펜들레엄:달려가기까지요? 그러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 감기가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요. ... 그럼에도 당신이, 그 대단한 것도 아닌 감기 때문에 저를 걱정해 주셔서 달려가 주신 것이라면... 저는 기쁠 것 같아요.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면서도, 사소한 것에도 제 생각을 해주셨으면 하는 제 마음이 참 이상하죠? 저도 이해 못 하겠어요. (세 번째 단에서 네 번째로 넘어갈 때쯤 쓰러진다. 이후 실패한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탑이었던 야채들을 와구 입에 넣는다.) 밟는다고 부서는 것도 아닌걸요?! 제 등 그렇게 연약하지 않은데...
 
헬레네 R. 히페리데:대단한 게 아니라니요. 아실이 아프신데 어떻게 가볍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겠나요. (절대 그렇겐 못 한다. 고개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그런 게 연인의 마음 아닐까요. 사소한 걸 보더라도 상대가 떠오르고, 좋은 게 있으면 나누고 싶지만 아픈 건 괜히 공유하고 싶지 않은…… 이렇게 말하는 저도 연애는 처음이지만요. 으레 소중한 이들에게는 그리 되더군요. (앗, 쓰러졌다.) 부서지는 게 아니더라도요! 절대 안 돼요. 차라리 제가 허공에 물을 쏘면 동시에 얼려달라고, 5시 페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면 모를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으응... 감기에 걸린 사람이 헬리였다면~하고 생각을 해봤어요. 저라도 그랬을 것 같네요. 열이 너무 나는 것은 아닐까, 약 먹어야 할 텐데 밥은 잘 드실까, 열 기운에 잠 설치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감기에 걸렸다면, 헬리도 그래 주실 건가요? (너무 과한 욕심인 건 아닌가 싶어 말끝이 흐리게 번졌다.) 연인.. (그 단어가 뭐라고 두 볼이 점점 분홍빛으로 물든다.) 방금 말한 것처럼 헬리도 같은 생각을 해주실 것이라는 거죠? 기뻐요. 그렇게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어서요. 제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라니.. (수줍은 표정으로 샐러드를 잘만 먹는다.) 그런 방법이! 제가 5시 페어에게 부탁해 볼게요. 그분들도 재밌어 하실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럼요. 아실이 아프시단 생각만 해도 마음이 좋지 않은걸요. '능력 안정제'를 투여받고 나서도…… 종종 부작용에 시달리곤 하셨잖아요. (실제로는 능력 안정제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저도 알고 있지만.) 그렇잖아도 힘드실 아실이 괜히 더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매번 심장이 조이는 듯했어요. (그러니 감기에 걸렸다면 당신이 나열한 만큼, 그 이상으로 걱정했겠지.) 아실은 원래도 저에게 소중한 분이셨지만…… 저희의 마음이 맞닿고 나니, 저의 감정이 담긴 우물은 갈수록 더 깊어져만 가네요. (부드럽게 웃었다.)
정, 정말로요? (그냥 말을 꺼내봤을 뿐 정말 그러잔 뜻은 아니었는데…… 하긴, 이런 추진력도 참 아실링다운 일이다. 나쁜 일도 아닌데다, 저 역시도 막상 머릿속에 그 모습을 그려보니 즐거울 듯하였다.) 힘을 합쳐 만들면 아주 멋진 눈사람이 되겠네요.
 
아실링 펜들레엄:아... ... 그것 역시 저를 걱정해 주셨다는 것이군요...! 헬리도 차암. 저를 너무 좋아해 주신다니까요. 저는 정말 당신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는 사람이에요. 팬들이 알면 부러워서 배 아프려고 하겠죠?! (꺄~같이 입에서 잘 나오지도 않던 감탄사까지 쓰며 일부러 목소리에 흥을 섞어 조잘거린다.) 그런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제가 말해도 당신은 신경 써주시겠죠.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니까... (돕기는커녕 무거운 마음에 짐만 얹어주는 것 같아 포크를 내리며 식사를 멈춘다.) 어머, 그렇게 다정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해주시다니..! 오늘 디저트 먹을 필요는 없겠군요! 제 디저트는 전부 헬리가 드세요. 저는 헬리가 말씀해 주신 것을 계속 되뇌이며 디저트 대신으로 즐길게요~
네! 정말이죠. 제가 못할 것 같나요? ... 어... 그쪽에서 거절하신다면 못하겠지만... 제가 다리라도 잡고 부탁해 보기로 할게요.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고요! (벌써부터 잡고 고집부릴 생각에 히죽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뚝뚝 꺾어 몸을 푼다.) 저는 욕심쟁이라서... 전부다 잡을 거예요. 5시 페어도, 5단 눈사람도, 헬리와의 데이트까지 전부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이 좋아해주시니 저도 기쁘네요. (조금 쑥쓰러워 볼이 붉어진 채로 수줍게 웃는다) 좀 더 신경쓰게 해주세요. 좋아하는 분이니까요. 아실은 저는 잘 챙겨주시면서, 스스로는 돌보지 않으시는 경향이 있어요. 괜찮아요, 짐은 함께 들 때 더 가벼워지니까요. 오히려 아실이 힘드실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된다면 그게 더 힘든 일이 될 거예요. ……그래도 디저트는 나눠 먹어요. 아실링도 단 걸 좋아하시잖아요. 저 혼자 먹긴 죄송스럽다구요.
후후, 좋아요. 그럼 저도 함께 가서 부탁해 봐야겠네요. 모두 다 잡아서 이번 겨울의 가장 멋진 눈사람을 만들고, 다른 분들께도 자랑하는 거예요.
 
아실링 펜들레엄:알겠어요. 대신 지금 마음 잊지 않고 계속 신경 써주시기예요..! 저는 언제까지나 헬리를 좋아할 거고, 영원히 헬리가 좋아하는 사람 리스트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혹시 몰라요. 당신이 그렇게 신경 써주는 것을 느끼다가 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가 헬리가 힘들지도 모르는데.. ... 제가 당신 고집을 어떻게 꺾겠어요. 절대로 못 꺾죠. 알겠어요. 힘들 때마다 기댈게요. 나중에 가서 당신이 너무 슬퍼하면 안 되니까... (마지막 말에 작게 풋 웃고는 입 벌린다.) 저는 헬리가 준 달달함만 유지하고 싶은데~. 헬리가 먹여준다면! 먹을게요!
한 명이서 가는 것보다 두 명이서 가는 게 더 설득 빠르긴 하겠네요. 서로 잡아야 할 사람 놓지 않고 설득하기예요! 이참에 제 엄청난 고집을 그분들에게 보여드리겠어요. 아주 멋진 눈사람 만들어 자랑하기 위해서!
 
헬레네 R. 히페리데:그러면 앞으로도 더 많이 노력해야겠네요. 아실이 자기 자신을 더 돌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진심을 담뿍 담아 다짐했다.) 힘들더라도 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해낼 거예요.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니깐요. 원하는 만큼 제게 기대주세요. 저 또한, 버팀목이 필요할 때면 아실 곁을 찾아올 테니까요. (빙그레 웃으면서 디저트를 벌린 입 안에 쏙 넣어주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진 모르겠지만, 힘내 볼게요! (꼭 퀘스트라도 받은 기분이다. 신나게 주먹 꾹 쥐었다)
 
대화를 나누는 헬레네와 아실링의 관계는 이전보다도 더욱이 끈끈하고 단단해졌죠.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날카로운 칼날과 가시와도 같으니,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선 손을 꼭 잡고 뭉칠 수밖에요.
 
어른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눈이 쌓이고 녹듯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라곤 하나 없어요.
 
 
절벽 위, 화려하게 빛나는 호텔이 보입니다.
 
DOT의 관사도 아닌데 눈에 익습니다.
 
입구에 선 운전사는 연신 손을 흔들며 어서 돌아오라고 재촉합니다.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상자, 앰플, 서류.
 
쥐고 있던 것들이 홀연히 사라진 두 손은 지나치게 가볍습니다.
 
「손가락에 얽을 수 있는 것은 같은 손가락뿐.」
 
「다각도 시뮬레이션 결과, 지구의 타이머에게는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됨.」
 
...
 
자연히 옆에 선 사람과 시선이 마주칩니다.
 
아실링, 지구의 타이머는 도밍게즈의 타이머에게 묻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방금, 방금 그거 꿈 아니었죠…?
 
헬레네 R. 히페리데:(같은 손가락? 지구의 타이머? …… 지구의 타이머는 맞지만, 우리가 그런 과거를 공유한 적은 없었다. 대체 뭐지?) …… 아실도 봤군요. 파란 머리를 하고 계셨어요. (어쩌면, 미지수라 불렸던 아실링의 기억을 보았던 걸까?)
 
아실링 펜들레엄:저 역시 당신을 봤어요. 지금보다 아직 어린 느낌이 났었죠. ... 그런 머리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해봤지, 절대 해본 적은 없는데... (자신은 알지 못하는 자신과, 자신이 아는 헬레네의 기억인 걸까? 같은 것을 보고 공유했기에 단순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분 나쁜 기시감이 듭니다.
 
잘못된 시점에 불시착한 우주인처럼 발밑이 붕 떠오릅니다.
 
제13구역의 등대에서 목격한 진실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어쩐지 ‘방금’이라는 시제는 입에 붙지 않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환상인지 사념일지 모를 그 속에서는 저와 아실링이 연인 관계로 보였었다. 일단 두 사람의 관계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의문이 너무 많았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같은 환영을 보여준 걸까? 아, 아닌가. 신이라고 했으니, 우리의 의지로 기억을 찾아냈을 수도 있을까…… 자조적인 생각이 흘렀다.) 지구의 타이머와 도밍게즈의 타이머는 협업을 하고 있지만, 절대 그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꼭, 강제로 데려온 것만 같았어요.
 
아실링 펜들레엄:(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곳을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혹여 꿈에서라도 헬레네를 잃을까 봐 다급하게 손목을 잡아든다.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것 따위는 없었다. 이런 꿈에서조차 제 의지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을 아닐까 하는 걱정에 다급하게 먼저 손이 나갔다.) 그들이 살던 곳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어쩌면 저희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납치도 가능했겠죠. 물론 그건 최악의 경우이지만.
 
헬레네 R. 히페리데:(손이 붙잡힌다. 마주 아실링의 곁에 가까이 붙어섰다. 환상이 그림처럼 녹아 사라지면 그제야 가라앉은 눈망울이 주변의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절벽과 호텔? 그리고,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 애초에 우리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지? 으레 혼란해야 할 상황이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심신이 까맣게 타버린 탓인지, 그저 메마른 낯이었다.)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미지수 아실링을 기억하시나요? 추측하기론 그분의 기억을 본 게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왜 저희의 원래 몸으로 돌아왔는데도 이 이질적인 광경은 사라지질 않는지…….
 
아실링 펜들레엄:(목숨을 구해진 이후, 몇 년간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랑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기심 가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쉽게 끝나지 않을 대화임이 확실했었다. 즐거운 호기심으로 끝나지 않고 과거에 붙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무게로 남은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 생각을 전하는 것조차 지금 상황의 짐으로 남을 것만 같아 생각으로만 남게 한다.) 기억 못 할 리가 없죠. 지금 상황에서는 아마 미지수인 제가... 아까 그 사람이 맞을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이 천천히 부스러집니다.
 
스물여덟 송이 장미로 단장한 천장.
 
열네 장의 시든 꽃잎만 바스러진 바닥의 대칭.
 
헬레네 R. 히페리데:…… 천장이.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환상이 천천히 깨어진다. 눈앞의 아실은 자신이 만들어낸 무의식 속 인물이라기엔 선명하고 현실적이다.)
(천장에는 꽃이 가득하고, 바닥의 꽃은 시들었다. 도밍게즈와 지구 중 그 누구도 타이머를 빼앗기거나 내준 적 없는 지금. 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광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만 무너져내리는 천장이 혹여나 아실링을 다치게 하지 못하도록, 반사적으로 팔 뻗어 아실링의 머리 위를 막았을 뿐이었다. 꿈 속이더라도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은 변치 않아서.)
 
그때, 우리는 이미 어떤 규칙을 관측해냈습니다…….
 
어떤 숫자의 규칙.
 
신의 손가락은 각 손에 14개였음을.
 
...
 
끼익. 끽.
 
헬레네는 추위에 떨며 깨어납니다.
 
정신을 차리면 눈을 머금은 북풍이 거칠게 창틀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낡은 침대와 흔들리는 탁자가 고작인 좁은 방은 등골이 시릴 만큼 냉골입니다.
 
땔감이 떨어졌는지 벽난로의 불씨는 까무룩 죽어 잿더미로 만든 무덤만 남겼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떨리는 어깨를 양 팔로 감싸며 고개 돌려 아실부터 찾는다.)
 
불쌍하게 침대 모퉁이에 구겨져 자고 있습니다.
 
추운지 덜덜 떨고 있지만, 깰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얼른 이불을 끌어와 아실의 어깨까지 끌어올려 덮어준다. 그래도 다행이야, 무사히 곁에 있구나…….)
(아실을 깨우지 않기로 하고, 침대가에서 발을 내딛어 벽난로로 다가간다. 여분의 땔감이 없나?)
 
재만 있을뿐 불에 타오를 땔감은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창고에도 남은 땔감이 없었죠.
 
어제 쓴 장작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짧은 한숨 쉰다. 장작을 사러 나가야 하려나. 돈이야 차고넘치지만, 들킬지 모른다는 게 항상 문제다. 이 세계에서 타이머의 존재란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그게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말이다.)
(방을 좀 더 살펴본다. 특별한 건 없나…….)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일단은 방의 온도를 좀 올리는 게 급선무일 것 같은데…… 우선은 부족하게나마 제 군복의 겉옷이라도 아실이 덮은 이불 위에 올려둔다. 한 겹이 추가되었을 뿐이지만 방한은 제대로 되니 없는 것보단 낫겠지.)
(그리고 탁자에 앉아 수첩을 펴고, 방금 꿈 속에서 보았던 광경을 적어내려갔다. 꿈인지 환상인지도 모를 모습들. 손을 흔들던 운전사. 피고 시들던 장미……)
 
내용은 생생하건만, 당최 의미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꿈이 무의식을 반영한대도 지나치게 생생하지 않나요?
 
헬레네는 뒤늦게, 세 번의 봄을 더 보낸 후에야 미지수라 불리던 여자가 하던 말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은… 이곳을 항상 그렇게 소개하네요.”
 
아마도 그때 말하던 과거는 이 꿈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하고.
 
헬레네 R. 히페리데:(하지만 미지수는 은색 머리였다. 지금의 아실과 같은…… 그 파란 머리칼은 염색이었던 걸까? 파란색 머리도 꽤 잘 어울렸었지. 가만히 있으면 손가락이 얼 것 같으니 아무런 상념이라도 떠오르는 대로 다 적어내려갔다. 아마도 단순한 꿈은 아닐 것이다. 다만, 무엇을 위해 그 광경이 하필 지금의 저에게 보여졌는지가 중요한 쟁점일 터다.)
 
많은 생각으로 심란하던 차, 자고 있던 아실링이 어깨를 한 번 뒤척이곤 잠꼬대를 중얼거립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죽여버릴 거야.
 
꿈결이라기엔 퍽 살벌한 대사입니다.
 
맥락을 알 수 없어 살해 대상도 진정성도 알 수 없지만…….
 
낭만적인 내용은 아니겠죠.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링의 잠꼬대를 듣는 순간 3년의 시간이 되감긴다. 과거가 현실의 무대에 고개를 디밀고 난입한다. 죽여버릴 거야. 분명 미지수도 그리 잠꼬대를 했었다. 다음에 흘러나왔던 대사를 기억한다. 죽여야만 해. 도밍게즈를 위해서……. 정말로 과거 혹은 미래의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되감기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모습도 반복되는 걸까.)
(굳은 채로 고개만을 돌려 아실링을 바라보았다. 혹여, 또 잠꼬대를 중얼거릴까 싶어서. 만약 그런다면 그 잠꼬대는 과연 무엇일까 싶어서.)
 
아이디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4년 전 봄.
 
헤어질 줄 미처 몰랐던 날의 아침과 같은 장면입니다.
 
아실링의 표정과 잠꼬대마저.
 
잠든 옆얼굴이 꼭 그 시절을 닮았다면, 착각일까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래, 그날의 아침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우리는 미리 합을 맞추었던 능력을 펼쳐보였고, 우리를 보던 사람들의 감탄은 이내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새까만 구멍에서 쏟아져나온 외우주의 신으로 인해서……. 모든 게 끝난 이후에는, 미지수가 중얼거렸던 대상이 외우주의 신이라고 생각했다. 명실상부 도밍게즈의 가장 큰 위협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뭇 다르게 들린다. 도밍게즈를 위해 죽여야만 하는 건…… 실은 타이머가 아닌 걸까.)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이미 헬레네는 너무 많이 무너졌고 부서졌다. 비탄과 자조가 조각난 심장의 틈을 비집고 채워드니, 그의 안에서 희망이란 겨우 숨을 붙이고 살아있을 뿐이었다.)
 
...
 
힘든 마음 한 번 위로해주지 않는 곳.
 
현재 위치는 도밍게즈 제6구역의 숲, 그 중심부입니다.
 
제5구역과 밀접해서 겨울이 유달리 거칠고 포악합니다.
 
곧 3월이 될 텐데도 날씨는 누그러질 기미가 없습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냐면…….
 
.
 
.
 
.
 
“헬리!”
 
이번에도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면, 딱딱하고 차가운 뿔이 뺨 옆에 처박힙니다.
 
회상은 싸라기눈이 흩날리는 음울한 검은 숲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이파리를 떨구고 빈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 위, 소복하게 쌓인 흰 눈.
 
설원이라고 불러도 모자람 없는 넓은 공터.
 
두 사람은 새하얗게 언 바닥을 딛고 섭니다.
 
시작부터 과격하게도 맞은 편에는 거대한 눈 괴물이 버티고 있습니다.
 
팔이 네 개, 다리가 두 개 달린 인간도 짐승도 아닌 여섯 발 괴물.
 
온몸을 뒤덮은 털은 곰의 거죽처럼 거칠고 뻣뻣한 데다가, 악귀를 닮은 머리에는 얼음송곳처럼 흉흉한 뿔이 치솟았습니다.
 
게이트에서 여섯 발로 뛰쳐나온 노프케는 성난 울음소리를 터트리더니 곧장 아실링과 헬레네를 향해 돌격합니다.
 
우지끈, 와장창, 뚝.
 
그리고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금속들이 나무를 긁고 땅을 파헤치며 산산이 조각나 천지에 뿌려진 별이 됩니다.
 
고통도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은 우는 대신 윤활유 따위를 흘리며 바닥을 더럽힐 뿐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도망친 곳에서 편들어줄 이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명백한 적의를 품고 있는 신화 생물이라니. 자신들의 앞길을 도와주는 조금의 운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헬레네의 창과 비슷한 모양의 창을 뽑아낸다.) 헬리, 괜찮으시겠어요? 힘드시다면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헬레네 R. 히페리데:(또 나를 먹고 싶어하는 신화생물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구나. 전투도, 신화생물을 공격해 무찌르는 것도 수도 없이 해본 일인데 마음을 송곳으로 깎아내기라도 하는 것마냥 탈력감이 들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겠지, 아실링을 홀로 둘 수는 없으니까…….)
(창을 고쳐쥐었다.) 함께 하죠, 아실. (그러나 이미 헬레네를 안에서 지탱하던 가장 큰 기둥이 꺾여버렸으므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힘없고 메마른 채였다.)
 
아실링 펜들레엄:...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차가운 눈바람에 의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가장 애정 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다가 창을 고쳐잡는다. 잠시 눈이라도 돌렸다가는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인지, 아니면 혹독한 추위 때문인지 창을 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빨리 벗어나기로 해요. 이 정도 녀석을 저희가 해결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롱고미니아드
기준치: 80/40/16
굴림: 11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43
 
헬레네 R. 히페리데:네…… 어렵지 않을 거예요. (칼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추위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건, 이미 제 심장이 만년설로 가득 뒤덮여버렸기 때문이겠지. 만들어낸 물이 찬 공기에 얼어버리기 전 회오리를 만들어내고, 창날을 움직여 노프케를 향해 겨눈다.)
물폭풍
기준치: 80/40/16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30
 
거대한 노프케가 쓰러졌지만, 떠난 두 사람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보고할 곳이 없습니다.
 
사후처리반도 출동하지 않을테죠.
 
헬레네 R. 히페리데:고생하셨어요, 아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노프케를 확인하고서, 무미건조하게 창을 내린다.)
 
아실링 펜들레엄:헬리도 고생하셨어요. (창을 잡지 않은 손을 뻗어 헬레네 이마로 가져가 앞머리와 함께 쓸어본다. 깊게 자리 잡은 눈가의 흉터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눈에 띄는 것인지.)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무리 방한이 되는 옷이라지만.. 지금까지 쌓인 피로 때문에 잘못하면 건강이 상할 수 있어요.
 
헬레네 R. 히페리데:(손이 닿자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눈을 가로지르며 자리잡은 상처의 흔적에서는 이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일단 다친 곳은 없기는 해요. 피로는…… 잘 모르겠네요.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만한 여력이 되진 못하였으므로.) 아실은 좀 어떠세요?
 
아실링 펜들레엄:... 지금 이 상황에 피곤하지 않을 리는 없겠죠. 빨리 쉴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따뜻한 곳에서 몸이라도 녹이면 차갑게 뿌리내린 무력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살의를 가진 생물도, 더 이상 지켜지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닌 뭘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뭘 해도 힘이 나지 않을 상황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억지로 웃음 짓는다.) 저야 뭐... 예전에 다친 쇄골 쪽이 쑤시네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넘어져서 다친 곳이 비 오는 날만 되면 쑤신다는... 그런 건가 봐요.
 
헬레네 R. 히페리데:네, 일단 이 눈이라도 피해야겠네요. 지금은 싸라기눈이지만 언제 더 거세질지 몰라요.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린다. 푸른 조각이라곤 없이 그저 흐린 눈구름만 가득 들어찬 창공. 뿌옇게 날리는 눈. 꼭 자신의 앞날 같기만 했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돌아다닌다 한들 제가 신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쇄골이 아프면 많이 불편할 텐데. 한시빨리 찾아봐야겠네요. (그래도 당신을 향한 걱정과 애정만큼은 흐린 뭉게구름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대로였다. 서둘러 갈 만한 곳을 찾아 달음박질한다.)
 
얼추 상황이 마무리된 그때
 
눈 괴물은 분명히 쓰러졌음에도, 두 사람은 서늘한 기미를 느낍니다.
 
민첩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51
판정결과: 실패
 
꽝꽝 언 눈덩이가 정확히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쉭 날아가는 소리가 첨예한 것이 명백한 공격성을 띠고 있습니다.
 
퍽!
 
아실링은 뒤통수를 얻어맞습니다.
 
신화생물의 공격이라기엔 보잘것없는 강도지만…….
 
인간적인 공격 방식에 되려 치명적인 악의를 느끼고 맙니다.
 
「DOT는 침묵하지 말고 타이머의 존재를 낱낱이 밝혀라!」
 
「애먼 사람들은 무슨 죄로 죽어야 했는가!」
 
DOT 관사 앞에서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던 진실 규명 시위.
 
직접 목격하거나 TV 너머로 접했을 장면은 퍽 잔인했습니다.
 
출동을 위해 나서던, 혹은 도망치던 타이머를 마주친 사람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쥔 무언가를 내던졌습니다.
 
삿대질부터 시작해 날달걀, 돌멩이, 설익은 사과, 쓰레기…….
 
아실링 펜들레엄:(웃지 못하고 눈덩이가 떨어진 자리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아직 눈 뭉치가 남은 머리칼을 툭툭 턴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괜찮으세요? (아슬아슬하게 피한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퍽, 하고 울리는 소리에 놀라서 옆을 돌아본다.)
분명 처치한 줄 알았는데…… 제가 마무리가 미숙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아니에요. 저희는 분명 제대로 처치했어요. 살아있었다면 이 정도 눈뭉치 정도가 아니었겠죠. 근데 이건... 대체...?
 
돌아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진작 따라왔을 비난과 야유도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하긴, 죽기를 각오하지 않은 이상 제5구역과 맞닿은 숲 한복판에 민간인이 얼씬거릴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눈덩이는 어디서 날아온 걸까요?
 
헬레네 R. 히페리데:힘을 잃어 그런 게 아닌가 싶었는데…… 노프케가 아니라면 뭐죠?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이 고요한 설원에 신화생물과 저희 말고 또 누가 있는 거지? 아, 이곳에서까지도 우리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주변을 조사해도 눈을 든 것은 끝없이 펼쳐진 거무죽죽한 나무들뿐입니다.
 
비로소 인기척이 없음을 확신했을 때 눈덩이가 다시 날아옵니다.
 
헬레네와 아실링, 회피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2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42
판정결과: 실패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붑니다.
 
눈덩이가 날아오는 방향을 즉시 확인해도 던지는 주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커녕 짐승도, 신화생물도 없습니다. 어디서 날아오는 거지?
 
다시 회피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대체 뭐죠? (눈살 찡그리며 창을 쥔다.)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27
판정결과: 실패
 
아실링 펜들레엄: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눈덩이들은 형태가 울퉁불퉁하고 크기가 들쑥날쑥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엔 거친 감이 있습니다.
 
건조한 눈 냄새가 납니다.
 
술렁거리는 공기는 꼭 짐승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자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자연
기준치: 10/5/2
굴림: 97
판정결과: 대실패
 
다시 회피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
회피
기준치: 25/12/5
굴림: 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헬레네 R. 히페리데:(느려.)
 
찢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찢었다)
 
아실링 펜들레엄:(이번에는 머리를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계속된 눈뭉치라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자연
기준치: 10/5/2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헬레네 R. 히페리데:짐승인 걸까요? (원숭이? 설마?)
 
아실링 펜들레엄:뭔가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뭐였죠...?
 
「노프케가 사라진 자리에는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칩니다. 당장 빠져나와야 합니다!」
 
둘은 과거에 들었던 지령을 복기해냅니다.
 
세계는 눈치 챈 순간에는 이미 늦은 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휘잉, 거센 눈보라가 밀려오고 시계가 하얗게 물듭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순백 일색이라 원근감이 사라집니다.
 
흰 세상에 오점처럼 남은 것은 두 점뿐.
 
눈을 깜빡이면 파트너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숨 짧게 들이킨다. 너무 늦게야 떠올렸다. 바로 벗어났어야 했는데. 신화생물과 싸울 때도 들지 않던 위기감과 불안감이 그 즉시 닥쳐온다.) 아실, 아실!
 
헬레네의 부름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목소리마저 먹히는 대자연의 백색은 이토록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듣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실링의 목소리는커녕 바람 소리만 먹먹하게 귀를 메웁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대답해주세요. 아실…… 제 곁에 계신 거죠? (방금까지 옆에 있었으니까.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쉽게 침착함을 찾기가 어렵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진정할 수 있었을 텐데, 세상에 저를 붙드는 것이 아실링뿐인 지금으로서는 쉬이 그럴 수가 없었다.)
 
완벽히 조난당했다고 현실을 직시한 순간
 
아실링 펜들레엄:(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눈보라 사이에서 튀어나와 헬레네 손을 붙잡는다. 혹여 눈이 보여주는 허상이 아닐까 싶어 잡은 손을 끌어당겨 껴안은 이후에야 차가운 입김을 한숨과 함께 내뱉는다.) 헬리…! 아… 다행이다. 당신을 잃어버린 줄 알았어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헬레네 R. 히페리데:아, 아실……! (울먹이며 아실링을 와락 끌어안았다.) 바로 곁에 계셨던 거죠? 순간, 사라지신 줄 알고. 그만 제가 놓쳐 버린 줄 알았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네에.. 저 여기 있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투정 한 번, 눈물 한 번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면서. 눈물이 완전히 말라버릴 정도로 부서진 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기며 차가운 뺨에 자국을 남기는 눈물을 쓱 닦아준다.) 눈보라에 의한 일시적 화이트아웃 때문에 안 보였던 것 같아요. 안 보였을 뿐이지 계속 옆에 있었어요. 당신도 저도, 서로를 놓치지 않았고요. ... 바람이 가라앉으면 괜찮을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빨리 벗어났어야 했는데, 노프케와 상대해본 게 오랜만이라 그만 잊고 있었어요. (마구 경고등을 울리던 위기감은 겨우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심장은 두근두근 급박하게 뛴다. 어느새 이토록 유약해져 버렸는지. 살얼음을 걷고 있는 듯했다. 얇은 금만 가도 위태롭고, 무너질까 아슬아슬한 얼음판 위를.) 눈보라가 갈 때까지 이대로 끌어안고 있어요……
 
서로의 체온을 안정 삼아 버텨도 눈보라는 끝날 줄을 모릅니다.
 
새하얀 세상 속에서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눈보라 속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이 둘에게는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헬레네 R. 히페리데:(아무리 꼭 끌어안아 보아도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인정사정없이 몸을 때린다. 귓전에 울리는 바람 소리가 시끄러워 아실링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이대로, 이대로 눈 속에 묻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저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거나 죽음의 위기에 놓일 일도 없을 텐데.)
(무뎌져가는 감각 속에서 그러한 유혹이 헬레네를 덮쳤다. 이대로 몸을 맡기기만 한다면 쉽게 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고.)
(그래도 헬레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아실을 끌어안고 있고, 아실링 역시 저를 꼭 안은 채다. 때로 인생은 거칠고 날카로워 저를 견딜 수 없이 몰아가고 황폐하게 만들지만…… 헬레네는 항상 괴로움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사람이었으니.)
(이렇게 망가지고 바스라진 저에게도 아직, 별빛을 찾고자 하는 소망 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아실링을 한 팔로 끌어안은 채로, 창을 쥔 손을 위로 들어 거세게 홰쳤다. 자신의 물로 더 큰 회오리를 일으켜 눈보라를 찢어놓을 생각이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권능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세상을 분리한 것처럼 찢어진 백색의 틈 사이에서 검은 선 하나를 발견합니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입니다.
 
이정표 삼아 이동할 수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저기 나무가 보여요. 저쪽을 기점으로 이동하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눈보라를 헤쳐 틈을 찾아냈듯, 도저히 미래가 없을 것만 같은 저에게도 다시 나아갈 길이 보일지도 몰라.)
 
아실링 펜들레엄:이 눈보라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것을 보니 근처로 가면 그나마 위험을 피할 수 있겠네요. 눈이 많이 쌓였어요. 발걸음 조심하세요.
 
푹푹 발자국을 남기며 이동한 끝에서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아래에 도착합니다.
 
백색 광경에 선 칠흑. 빛이 들지 않아 거무죽죽한 고목 아래 작은 오두막.
 
가파른 지붕, 비뚤어진 창문과 뒤틀린 현관을 억누르는 한계치의 눈더미.
 
눈을 치우고 간신히 들어가면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납니다.
 
한 칸짜리 별장.
 
난방 시설이라곤 벽난로와 기름 난로가 전부입니다.
 
그나마도 푹 꺼져 있으니 안팎 온도가 똑같이 냉혹합니다.
 
추위를 실감하자 새삼스럽게 체온이 떨어집니다.
 
우선 불을 피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싱크대, 창고, 테이블, 벽난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이런 오두막이 있었다니…… 눈을 피할 곳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싱크대로 다가간다)
 
수도가 얼었는지 레버가 꼼짝하지 않습니다.
 
찬장을 열어보면 생수와 통조림 몇 개가 남아있습니다.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하게 남았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다행히 유통기한이 남아있네요. 어쩌다, 누가 이런 외진 곳에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았어요.
(창고로 가본다)
 
아실링 펜들레엄:이런 곳에서 멀쩡한 식량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떠나기 전 감사 인사 적은 편지라도 남겨야겠네요.
 
모포, 땔감과 공구 따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이나 쓸 법한 긴 장총도 나뒹굴고 있습니다.
 
그 외에 원하는 물품이 있다면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조금 낡은 감이 있지만,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정도의 두꺼운 이불을 발견합니다.
 
이어 양은 아니지만 난로에 넣을 기름통도 발견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안도하며 기름을 꺼내고 벽난로부터 가본다. 불을 피우는 게 우선이니)
 
아실링 펜들레엄:(눈을 녹여 만든 물을 깨끗해 보이는 천에 적셔 쓸만한 가구 위 먼지들을 닦는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있는 동안만이라도 청결유지는 중요했으니.) 어머, 기름도 찾으셨군요. 다행이에요. 오늘만큼은 따뜻한 곳에서 몸을 녹이고 싶었거든요.
 
헬레네 R. 히페리데:맞아요, 특히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 날엔 체온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래도 물은 눈을 녹여 충당할 수 있을 듯하니 다행이에요.
 
아실링 펜들레엄:물 하나만큼은 제대로 충당할 수 있으니 다행이죠. 불 피워지면 적은 양이라도 물을 덥혀볼게요. 따뜻한 샤워는 힘들지만... 천에 적셔서 그동안 고생한 몸 풀어주는 용으로 사용해 보기로 하고요. 그럼 이 피로가 좀 풀어질지도 모르죠.
 
헬레네 R. 히페리데:(그가 가구를 닦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아실, 저 실은…… 아까 눈보라 속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단 마음이 잠깐 들었어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에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고 눈보라는 끝나질 않을 것 같으니, 잠깐 약해졌나 봐요.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이렇게 길이 보이네요. 불을 쬘 수도 있고, 완전하진 않아도 몸을 닦을 수도 있고……
 
명색이 벽난로인데, 불씨가 죽어 냉골입니다.
 
창고에서 찾은 땔감은 겨우 하루, 이틀을 견딜 분량에 불과합니다.
 
땔감을 넣어도 성냥이나 라이터가 없다면 불을 붙일 수 없습니다.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곳곳을 뒤져 화기를 찾아냈습니다.
 
불을 피우나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을 마주보며 하기에는 좀 머쓱하고 미안한 이야기인지라, 등 돌려서 불을 피운다)
 
좁은 오두막인지라 불을 때면 금세 훈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산소를 태우며 뭉근한 연기, 그을린 냄새가 굴뚝 안으로 피어오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아, 따뜻해라.. (천으로 주전자를 닦다가 후다닥 헬레네 곁으로 다가간다.) 감사해요. 말 안 해서 그렇지 조금 투정 부리고 싶을 정도로 추웠거든요.
 
온기를 나누기 위해 어깨를 바싹 붙이고 앉습니다.
 
붉은색, 노란색, 그 사이 주홍색. 따뜻한 빛이 옆 사람의 얼굴을 물들입니다.
 
모닥불을 나른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진 것 같아서.
 
눈보라 속에 단절되고서야 비로소 짧은 평화를 누립니다.
 
아실링 펜들레엄:포기하지 않길 잘한 것 같죠? 사실 저도 헬리한테 뭐라 말할 자격은 없어요. 문조차 저희를 돕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에요. 근데 그렇게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이 있었죠. ... 네, 당신이 만들어줄 그 길이요. 덕분에 이렇게 도착해서 몸도 녹이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헬리는 저의 희망이에요. 언제나 제 영웅일 거고요.
 
헬레네 R. 히페리데:희망…… 제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이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정말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을 때, 저도 모르게 희망을 찾고 싶어하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더군요. 아른한 별빛 같아서 닿지 않는 것이더라도, 그걸 위해 달려가는 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열정이고 투지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저를 영웅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텐데, 아실에게만큼은 제가 아직 영웅이군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 코를 살짝 훌쩍인다. 어깨를 맞대고 난로의 불빛을 쬐다가 테이블로 시선 돌린다)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보는 당신이라는 사람은 항상 올곧은 사람이었어요. 당신과 함께 오래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금의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요.. 헬리, 희망을 버리지 말아 주세요. 고개를 들어주시고요. 그동안의 일들로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무력함에 의해 무너지고 수많이 한탄했었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앞으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난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무력함에 눈이 가려졌을 뿐 우리는 계속 별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이에요.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건 언제나 있었던 일이죠. 그러나 저희가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길을 찾게 될 거예요. 저희가 찾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저희가 찾아온 길을 향해 걸어올 것이고요. 그러니... 저희 계속 노력하기로 해요. 끝까지 영웅으로요.
 
헬레네 R. 히페리데:네. …… 맞아요. 무너져서는 안 되겠죠. 몇 년간 열심히 싸운 순간들과, 제가 사람들을 구해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찾아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쉬운 길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현재가 무거운 돌덩이처럼 저를 짓누르더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별을 찾아 점을 연결하고, 선을 긋고, 빛을 향해 손 뻗을 테지.)
전부 아실이 제 곁에 함께 있어 줘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실 덕분에 얼마나 힘을 얻는지 몰라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실은 끝까지 제게 영웅으로 남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눈이 돌려집니다.
 
통나무의 원형을 살려 다듬은 테이블입니다.
 
반지르르하게 마감한 상판은 아실링이 한차례 닦아 먼지 없이 깨끗합니다.
 
산지기가 차를 끓이던 주전자나 낡은 커트러리, 꽤 오래된 신문 몇 부가 굴러다닙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신문을 들어 읽어본다)
 
...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온 별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했고, 당신의 부재를 그리워했으며, 당신의 복귀를 환영했었죠.
 
문득 비교하고 맙니다.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당신이 위험에 처하면 걱정할까요?
 
당신이 행방불명된다면 찾으러 나설까요?
 
당신이 돌아온다면 환영할까요?
 
답할 말도, 답해줄 이도 없지만, 이 작은 오두막에는 언제나 당신의 행복을 빌어줄 이가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4년 전이 다 뭔가. 당장 4개월 전만 해도 사람들은 저를 보며 환호했고, 고마워했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저 역시 그들의 환대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과 환희를 함께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신문을 읽는 것도 겁이 났다. 한순간에 돌아섰을 게 뻔한 여론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이 오두막에는 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이가 없다. 저를 아껴주고 소중히 여기는 파트너만이 있다. 장작이 벽난로 안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벽에 일렁이는 불빛이 따스하다.)
 
클라커 프로젝트가 인류의 반격이 되리라 믿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4개월 전, 진실 게임의 신호탄이 터지기 전까지는.
 
도래솔 광장에 출동했던 클라커는 총 다섯 명.
 
그중 세 명이 사망, 두 명이 중태에 빠지는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전부 고등 쇼고스의 포식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생중계 후 사람들은 DOT를 의심했습니다.
 
타이머를 먹으러 왔다는 선언 앞에, 클라커를 묘사하는 수식어들이 ‘가짜’, ‘부족함’, ‘모자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심란한 마음에 신문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런 프로젝트는 폐기되어야 하죠. 클라커들이 잡아먹히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것들이다. ‘정말로’ 우리 때문인 것이니.)
 
고등 쇼고스야 어차피 식인을 통해 형체를 유지하는 신화생물이라지만, 그 외의 것들은 오직 타이머만 탐한다고 밝혀졌습니다.
 
신화생물들의 침략은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그저 거대한 재난일 뿐이었는데.
 
진실을 알고 보니 명확한 인과가 드러납니다.
 
어떤 외우주의 종도 타이머를 두고 피난 행렬에 눈독들이진 않았다고…….
 
방벽을 자처했건만 실체는 미끼, 아니, 생크림 케이크 위 딸기였던 것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타이머의 피로 만들어낸 이들이니, 가짜라 불리는 것도 다르지는 않지. 신화생물을 막고자 타이머의 피를 이용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클라커에 쓸데없는 눈독을 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니.) 로잘린과 클라커 분들에게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에요. (눈을 감는다. 참담한 심정이다. 타이머의 피를 이런 식으로 이용한 DOT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위험천만한 일을 진행하고, 그 진실을 알리려 한 줄리아 박사는 죽이고.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대체 어떻게 대항하려던 작정이었을까.)
 
...
 
아실링 펜들레엄:거기서 뭐 하세요?
 
멍하니 벽난로를 바라보던 헬레네를 아실링이 부릅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불씨는 죽었고 장작은 다 떨어졌으며 눈보라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조난 이튿날.
 
한 박자 늦게 깬 아실링도 뼛속을 파고드는 오한에 어깨를 떱니다.
 
올해 겨울 조짐이 영 심상치 않더라니 노프케의 저주도 쉬 끝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영하의 기온에서 이대로 무작정 버티다간 얼어 죽기 십상일 것입니다.
 
구조대도 제때, 제대로 도착할지 모르겠고요.
 
창밖에는 아직 얼음송곳 같은 눈발과 날카로운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당장 뚫고 가는 건 무리지만, 해가 높이 뜨는 정오라면 이 기세도 한풀 꺾일 테니까, 그때를 노려서…….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아, 일어나셨군요. 아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00
판정결과: 대실패
 
아실링 펜들레엄:좀 달콤한 꿈을 꾸나 싶었더니 추위가 제 잠을 깨우지 뭔가요. 아직도 날씨가 그대로인가요? 날씨가 따뜻해지는 것은 기대도 안 했지만요... 덜 춥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창문 근처로 이동해 밖 날씨를 확인한다.)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헬레네 R. 히페리데:(따라서 밖을 확인한다. 물자가 많지 않으니 날이 조금이라도 개어야 할 텐데.)
 
하얗게 겨울이 서린 숲 너머, 하늘로 솟아오르는 뭉게구름이 보입니다.
 
둥글고 따뜻한 훈김으로 구성된 기둥.
 
굴뚝에서 불을 때는 흔적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인가가 있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 고민이네요. 인가가 있다는 것은 일단 이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지만...
 
헬레네 R. 히페리데:(구조대를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DOT가 그리 찾아다니는 걸 알면서도 지금껏 도망쳐온 건 우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DOT에 연락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우선은 저곳으로 가볼까요. 이대로 있다간 버티지 못할 것 같네요.
그런데…… 아실, 악몽을 꾸셨나요? 좋지 않은 잠꼬대를 하시는 듯해서…….
 
아실링 펜들레엄: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곳에 있다는 것 정도는 이야기가 퍼져나가겠죠.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저희를 찾아다닌 DOT이다 보니 그들에게는 더 빨리 닿을 테고요. 그렇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조금이라도 몸을 녹여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악몽이요? 아니요. 전혀요. 좋은 꿈을 꿀락말락 하다가 잠에서 깼는걸요. ... 제가 설마 이상한 잠꼬대를 했나요? 어, 어떤 것이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악몽이 아니라면 다행이에요. (말해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 죽여버릴 거야, 라고. 실은 제가 이전에 만났던 미지수 아실링도 똑같은 잠꼬대를 하셨어요. 그날, 도밍게즈에 외우주의 신들이 나타나 세계를 파괴하고 망가뜨렸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금 불안해졌던 것 같아요.
 
아실링 펜들레엄:네? 제가요?? (제대로 놀랐는지 벌려진 입을 빠끔거리다가 바로 고개 젓는다.) 제가 싫어하는 것들이나 사람은 많아도 죽인다...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맹세코요...! (절대로 아니라며 연신 표현하다가 미지수 아실링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떨림이 멈춘다.) 아.. 정말 누구를 어떻게 한다.. 이런 식의 잠꼬대였던 것이 좋았을까요...? 불안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안 그래도 지금 힘드실 텐데..
 
헬레네 R. 히페리데:아, 아니에요. 무의식중에 하신 말로 사과하실 이유가 어디 있나요. (손 뻗어 아실의 어깨를 가벼이 감쌌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 거겠죠. 저도 금방 잊을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한기가 더 들기 전에 슬슬 나가 볼까요? (양손을 몇 번 쥐락펴락하며 조금이나마 얼어붙은 몸에 열기를 만들어보려 시도했다.)
 
아실링 펜들레엄:그거야... ('저 때문에 당신에게 안 좋은 일만 가득해지는 것 같아서요.' 같은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어떠한 길이던 같이 걸어주려는 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니.) 네. 저희 둘 다 잊기로 해요. 그저 꿈일 거예요.
(장갑 끼기 전 아진 따뜻함이 남아있는 두 손으로 헬레네 볼을 감싸 문질 거린다. 온기 나눠주려는 목적 반, 말랑한 감이 남아있는 볼 만지고 싶은 마음 반에서 나온 행동.) 이 예쁜 볼 얼기 전에 빠르게 가기로 해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도, 참. 부끄럽네요……. (수줍어하며 볼에 닿아오는 손등을 가만 쓸었다. 힘들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당신과 함께라면 사소한 몸짓과 표정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럼 이만 출발하죠. (정오 쯔음까지 기다렸다가, 최대한 옷을 단단하게 여미고 연기가 올라왔던 방향을 향해 나선다.)
 
나가기 위해 문을 열자면 흐릿해졌던 꿈이 재부상합니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바다와 등대, 그리고 꿈이라기에는 손에 잡힐 듯 생생했던 기억.
 
꿈속에서 본 등대와 스케치북의 잔상에서 찾아냈던 등대는 매우 유사했습니다.
 
제1구역의 기상 관측소, 제2구역의 가장 높은 굴뚝, 제3구역의 세계수…….
 
마지막으로 제12구역의 등대까지 그려져 있던 스케치북.
 
특출난 솜씨는 아닌지 거친 펜 터치지만 제법 특징을 잘 잡아낸 그림이었죠.
 
그 신성하다는 기둥 아래에는 언제나 익숙한 인물이 서 있었습니다.
 
남색과 흰색을 배치해 깨끗한 느낌을 풍기는 디자인.
 
목을 꼼꼼하게 둘러싼 차이나 카라, 상체의 절반을 덮는 망토와 은색 시계.
 
도밍게즈와 지구의 사람들이라면 모를리 없는 타이머.
 
그러고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죠.
 
기상 관측소, 가장 높은 굴뚝, 세계수, 시계탑, 얼음 기둥, 갈대밭, 풍차, 전망대, 놋뱀 기둥, 최초의 우주선, 예언의 탑, 등대
 
……버려진 등대?
 
스케치북에 그려진 건 딱 열두 개의 신성한 손가락이었습니다.
 
그야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상징은 그뿐이니까요.
 
그런데 어째선지 망막에 맺힌 마지막 상이 잊히지 않습니다.
 
섬의 테두리, 질척한 회색 모래, 쓰러진 낡은 배, 굴러다니는 사람의 뼈.
 
검고 자욱한 먹구름이 드리우고 성난 파도가 흔들리는 외딴섬.
 
그곳에 홀로 서 있던 제13구역의 등대.
 
알 턱 없는 풍경이 기억을 덮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차가운 칼바람에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옷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눈보라를 헤치며 걷는다. 그러자면 기이했던 꿈이 다시금 기억 속을 부유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아실링이 생생했는데. 꿈이라는 걸 믿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13구역은 인간이 갈 수는 없는 곳.) 아실, 그러고 보니 저는 무척 이상한 꿈을 꿨어요. 지금보다 훨씬 앳된 저희가 함께 도밍게즈에 머물렀던 꿈이었는데…… (그러면서 간략하게 꿈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아실도 이 꿈을 꾸지는 않으셨나요?
 
아실링 펜들레엄:꿈이요? 저 오늘 꿈은 자세히 기억... 이... (순간 지끈거리는 두통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싼다. 순간 물 밀려오듯 차오르는 기억에 자그마한 탄성이 이어진다.) 기억.. 나요. 당신과 함께였죠. 제가 파란 머리였고요.
 
헬레네 R. 히페리데:……! 역시, 아실도 같은 꿈을 꿨나 봐요. 파란 머리의 아실링, 어릴 적부터 함께 했던 저희,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등대의 모습까지…… 그 꿈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요?
 
본 적 없는, 하지만 직접 경험한 것 같은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던 등대.
 
먼지가 자욱한 바닥.
 
그곳에서 발견한 지도.
 
28송이의 장미.
 
이어서 밝혀진 도밍게즈가 지구의 타이머를 훔쳤다는 내용까지.
 
아실링은 헬레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명한 문장을 읽습니다.
 
「손가락에 얽을 수 있는 것은 같은 손가락뿐.」
 
과거인지 헛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무의식의 파편입니다.
 
듣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동시에 바람이 속살거립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갈비뼈를 꺾어 준 순간부터 우리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분명히 아실링의 목소리입니다.
 
눈앞의 입술은 조금도 벙긋거리지 않았건만.
 
아실링은 이 기묘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잠자코 헬레네를 바라봅니다.
 
동시에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벌어진 간격에 강렬한 충동이 범람합니다.
 
모든 감각과 기분, 생각과 언어, 마음과 본능이 상대를 향합니다.
 
닿고 싶어.
 
아니, 먹고 싶어.
 
아니, 그것도 아니야.
 
하나가 되고 싶어…….
 
온전한 하나가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다는 확신.
 
모래를, 섭리를, 시간을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
 
외우주의 것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탐스러웠구나.
 
충동에 탑승하여 상대의 각인을 물어뜯습니다.
 
동시에 여태 손실했던 모든 이성과 체력을 회복합니다.
 
…….
 
휘몰아치는 눈보라, 뼈에 사무치는 추위, 얼어붙은 소리…….
 
공포를 초래할 요소는 전부 머릿속에서 휘발됩니다.
 
다시금 재난을 목전에 두고 열렬해지는 클라이맥스.
 
그래, 우리 운명은 나선형 모래시계를 맴돌고 있었던 거야.
 
그런즉 벗어나려거든 통째로 부수는 수밖에.
 
헬레네 R. 히페리데:네?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라니 그게 무슨……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목소리가 들리는 기이한 순간. 눈이 마주치고 몰려오는 감정과 충동의 해일. 이성이 뒤섞이고 본능이 거품처럼 일어 아가리를 벌리고 덮쳐들었다. 어떤 공명, 어떤 이해, 어떤 끔찍한― 끔찍한 충동.)
(정신을 차리면 아실링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혈향이 비릿했다. 스스로가 아실링을 상처입혔다는 충격과 제가 저지른 짓에 지나치게 놀라 반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죄송, 죄송해요, 아실! 제가 대체 무슨 짓을……. 어, 어째서…….
 
아실링 펜들레엄:... 헬리, 괜찮으세요? 제가 뭐라 하는지 아시겠어요?? 아.. 놀랐어요. 이상한 것에 당신이 홀린 것은 아닌가 해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상처의 고통을 따지자면 수없이 겪으며 가진 전투의 부상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헬레네가 이성을 되찾았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 아, 이거요. ... 아주 헬리 것이라고 제대로 자국을 남기셨네요. 헬리한테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헬리도 참~. 놀리는 투로 속 편한 소리만 한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이런……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충격에 빠져 침착함을 되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한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충동이 들어서…… 닿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꼭 하나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 꿈이 기폭제였던 걸까? 저 스스로를 점점 더 이해하기가 어렵다. 소우주의 신이라는 정체가 이제야 오래 참아왔던 숨을 내쉬기라도 하는지.)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실링뿐인데, 그 유일한 존재를 내 손으로 해치려 들다니.)
 
아실링 펜들레엄:충동이요? (직접 겪지 않아 깊이 이해할 수 없었으나, 헬레네가 그렇게 느낀 것에는 이유가 있으라고 생각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하며 알게 된 헬레네라는 사람은, 자신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낼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 전 괜찮아요. 당신이 무는 걸로 제가 죽는 것도 아닌걸요. 그보다는 이 추위가 더 무서운데. (덜덜덜...)
 
헬레네 R. 히페리데:(제 아랫입술을 몇 번이나 잘근 깨물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피의 맛이란 참으로 섬뜩했고, 그 피의 주인이 아실링이라는 사실이 참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충격에 오래 사로잡혀 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겨울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우리를 베어대고 있었으니까. 피를 흘렸으니 열이 빠져나가 더 추울지도 모른다. 실상 피를 많이 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까지 잡아낼 만큼 이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아, …… 그래요. 일단 어서 이동하죠……. (하지만 걸음을 내딛는 동안에도 여전히 수많은 의문과 공포가 뇌내 안을 부유했다. 아실링에게서 두어 발자국은 더 거리를 벌렸다.)
 
아실링 펜들레엄:(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슬쩍 거리를 두는 헬리 때문인지 욱신거리던 손목의 통증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리를 좁히려고 여러 번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평소 보이지도 않던 급한 성미가 튀어나와 냅다 팔을 뻗어 헬레네와 팔짱 낀다.) 이대로 가죠! 불만은 없으실 거라 믿어요! (그래 주실 거죠?라며 고집을 부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 저는 당신이 거리 벌리는 게 무서워요. 당신이 거리 벌리는 걸 원하신다면... 그리해드려야겠지만요. ... 저 외롭게 하실 건가요?
 
헬레네 R. 히페리데:(팔이 닿자 깜짝 놀라 흠칫하며 아실을 바라본다. 겁에 질려 있음이 선명했다.) 아실, 전……. 제가 또 언제 충동에 휩싸여서 아실을 다치게 할지 몰라요. 정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잖아요. 다음에는 손목이 아니라, 목덜미일지도 모르잖아요. 이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괴롭지만 이미 아실을 상처입히고 말았는걸요. (눈보라에서 겨우 삶의 의지를 한 줌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너무도 거칠고 냉담하여 의지를 되찾은 만큼 앗아가고 만다.) 저도 아실과 떨어지고 싶지 않지만, 저 때문에 아실에게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조금은 거리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강한 투로 말하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유대감과 신뢰는 깊었고, 저 역시 외로움은 싫었으니까.)
 
아실링 펜들레엄:그런가요? 저는...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정말로 당신이 이성을 잃은 사이에 제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다면 손목이 아닌 목을 공격했을 것 같아서요. 물린 부위가 각인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제 목숨을 거두어가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요. (팔짱 낀 고개를 기울여 어깨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다. 당신이 살린 목숨이니, 당신이 거두어가려고 해도 괜찮기도 하고.) 그리고 제가 설마 당신을 못 막겠나요. 제가 헬리보다 힘 자체는 더 센걸요. 제 몸 하나는 제가 지킬 수 있어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러면, 만일 제가 또 갑작스럽게 이성을 잃고 아까처럼 아실을 해치려고 하면 저를 꼭 막아주셔야 해요. (어깨 위로 흐트러지는 은색 머리칼을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다. 스스로에게 놀라고 두려웠을 뿐 당신을 향한 감정이 바뀐 건 아니었으니까.) 제가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아실을 해치게 두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실링 펜들레엄:당신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는데 제가 어떻게 안 하겠다고 할 수 있겠나요. 당신이 아껴주는 만큼, 저 역시 자신을 잘 지킬게요. 동시에.. 당신 마음도 지키고요. 제가 상처 입으면 당신은 자신을 원망할 테니까요. (겨울바람에 차가운 기운 가득한 어깨 장식에 애정을 담아 뺨을 부비적거린다.) 저도 지키고, 당신도 지킬게요. 이제 든든하시겠죠?
 
헬레네 R. 히페리데:…… 좋아요. (그제야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세상을 지키고 싶었지만 이제 저에게 그럴 자격은 없단 걸 알았어요. 제가 지킬 수 있는 건 아실뿐이에요.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요. 아프신 모습도 보고 싶지 않은걸요. 아실이 스스로도 저도 지켜주신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아실링 펜들레엄:(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선한 진심과, 그를 영광스럽게 만든 명예를 박탈당한 영웅을 가만히 보다가 앞머리에 입술을 꾹 누른다.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든 일들이 자신의 영웅 앞을 가로막을지는 모르나, 그 역경 속에 자신만큼은 포함되지 않으리라 굳게 맹세하며 입술을 뗀다.) 더 든든한 파트너가 될게요.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헬레네 R. 히페리데:그 말만으로도 이미 든든하네요. 감사해요, 아실. (걱정하는 건 당신이 아닌 저다. 소우주의 신이라는 사실을 쇼고스의 입에서 들은 이후로 쭉, 헬레네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고 의심했으며 두려워했다. 당신은 무너지려던 저를 붙잡아주는 유일한 동앗줄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 밧줄을 제 손으로 끊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눈보라도 차차 잠잠해집니다.
 
인가까지 가장 빠른 루트는 숲을 벗어난 후 과수원을 거치는 것입니다.
 
만……. 세상만사 어디 마음대로 되는 법이던가요.
 
막상 숲에 들어오니 우뚝 선 나무들이 시야를 떡하니 차지합니다.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굴뚝 연기는 아니 뗀 것처럼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연기가 분명 보였는데…… 그새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버린 걸까요? 나무들만 빽빽하군요.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산지기 혹은 사냥꾼들이 나뭇가지에 묶어둔 이정표를 찾아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 아실. 여기 이정표가 보여요. 이걸 따라가면 숲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정표를 찾기 위해 주변을 잘 살피며 걸어나간다)
 
아실링 펜들레엄:이정표요? 아..! 다행이에요. 길을 헤매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표시를 찾게 되다니. 그럼 이것 따라가보도록 하죠! (같은 이정표가 없나 열심히 고개를 돌리며 찾아걸어간다.)
 
... 방향을 정하고 부쩍 걷다 보면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흑, 흑흑…….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면 깃털이 온통 푸르른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파랑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울리지 않는 소리로 또 울어댑니다.
 
흑흑, 흑, 흑흑흑…….
 
새 소리라기엔 불길할 정도로 선명한 발음.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시기에 새가 날아다니는 건 이상합니다.
 
진즉 겨울잠에 들건 따뜻한 남녘으로 날아가야 했을 텐데.
 
파랑새는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뿐한 날갯짓으로 겨울나무 사이로 사라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파랑새가 이 겨울에……? (상식적으로는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온통 하얀 눈 속에 파란 새는 무척 이질적이면서도 눈에 띄었다.)
(한참 망설이며 새를 바라본다. 새가 날아간 방향에 이정표가 있나?)
 
새가 날아가 곳은 빽빽한 나무숲입니다.
 
따라 들어가나요?
 
헬레네 R. 히페리데:따라가보아도 괜찮은 걸까요, 아실? 원래라면 이런 기후에서 파랑새가 살 수 있을 리 없는데, 무언가의 안배처럼 느껴져요.
 
아실링 펜들레엄:이런 기후에서 살수 없는 새이니 그럴만하네요. 이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한 번 따라가볼까요?
 
헬레네 R. 히페리데:좋아요. 어떻게든 여길 나가긴 해야 할 테니까요. (마지막 이정표가 있던 곳을 기억해두려는 듯 한 번 뒤돌았다가, 파랑새가 사라진 곳을 향해 나아간다.)
 
들어갈수록 나무의 간격이 빽빽해집니다.
 
피하며 걷는 게 꼭 구불구불한 미로를 헤매는 느낌입니다.
 
파랑새는 휙 떠날 듯 굴면서도 쉬 떠나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합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평행선을 그리는 활로는 작정하고 따라오라는 것처럼 인위적입니다.
 
잠자코 추격하던 아실링이 중얼거립니다.
 
아실링 펜들레엄:DOT이 훈련시킨 새는 아니겠죠?
 
파란 것이야 응당 기적의 상징이었으니 그럴싸한 추론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그럴 만도 하네요. 하필이면 파랑새인 데다 꼭 저희를 이끄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4개월 내내 도망쳐 왔지만, 이제는 한계가 온 게 아닐까? 문득 스치는 상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그대로 얼어죽고 말 테니, 지금으로선 저희에게 선택지는 없는 것 같네요.
만일 DOT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실링 펜들레엄:이끌어주는 길이 좋은 길이 길어야 할 텐데 말이죠. (조용해질만하면 들리는 울음소리에 어쩐지 자신들을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희의 행운을 저 새에게 모두 맡겨보기로 하죠. 당신도 저도 무사히 나간다에 모두 올인할게요.
만약 만나게 된다면... 그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양심이 남아있다면 저희에게 함부로 굴지는 못할 테죠.
 
헬레네 R. 히페리데:저도 저희를 해치려 들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DOT가 저희를 확보한다면 그건 금세 세간에 알려지게 될 테고, 저희는 좀 더 날것의 반응을 직면하게 되겠죠. (꼭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처럼 말이다. 지금은 도망치고 도망치면서 언론마저 회피하고 있었지만 관사에 돌아가서도 그게 가능할까?)
제가 어떻게든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해치거나 위험이 되는 방향이 아니라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을 알 수 없으니, 연약한 희망에 불과했다.)
 
아실링 펜들레엄:해치는 쪽보다는 확보하는 쪽을 선호할 것이라 생각하긴 해요. DOT 쪽에서 숨기려고 한다고 해도, 알리려는 세력에 의해 숨겨지는 것도 얼마 가지는 못할 테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양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사람들이 이해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고.) 저희가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희는... 어떤 반응을 받던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지 말라고 하셔도 어차피 헬리는 사람들을 도우실 거잖아요.
 
헬레네 R. 히페리데:(항상 저를 선망하고, 동경하고, 감사하는 시선만 봐 왔던지라 사람들의 날서고 차가운 반응이 더욱 큰 상처와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제 날카로운 칼날이 내려칠지 모르는 도마 위로 돌아가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아직도 저는 바보처럼 영웅이었던 과거를 잊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방이 불에 이끌리는 꼴이 되더라도 날아가고 말겠지…….)
죄송해요.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서글프게 웃어보이는 것 말곤 도리가 없다.) 아실의 말대로, 할 수 있는 걸 해요.
 
아실링 펜들레엄:죄송하긴요. 가끔은 제가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말해서 좋으시죠? (헬리한테만큼은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좋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이 아니었기도 하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므로.) 저는 당신이 뭘 해도 좋아요. 당신 곁에서 항상 자리 잃지 않고 있을 테니까요.
 
헬레네 R. 히페리데:(희미하게 웃는다) 그럼요. 어찌 싫을 수 있겠나요. (자신이 망설이거나 흔들릴 때면 밧줄마냥 단단히 감아와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당신. 이럴 때면 우리는 참 합이 잘 맞는 파트너구나,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 감사해요. 저 또한 사그라들지 않도록 힘내볼게요.
밤하늘의 별은 아주 긴 수명을 갖고 있다지요……. 비록 수명이 끝난다 하더라도 아득히 거리가 먼 탓에 저희가 보는 하늘에서는 여전히 빛이 난다고 해요.
영웅으로서의 저는 끝났다 하더라도, …… 타이머로서 조금이라도 오래 빛을 발하고 싶어요.
 
아실링 펜들레엄:초신성이라고 하던가요?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들어본 적은 있어요. 종국에 사라지기는 하지만, 절대 잊지 못한다고 한다죠. (죽어서도 살아서도 가장 빛나는 것으로 자리 잡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단번에 아니라고 할 것이다. 타오르든 말든 상관없는 생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장 빛나는 별의 곁에 자리를 잡고 그 별의 빛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
사실 당신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빛이 미약해졌다고 해도 당신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반짝거릴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는 무척이나 행복하겠죠. (마지막까지 그 곁에서 별의 마지막을 지켜보리라 결심했다. 별의 종국에서 같이 불타오르는 것인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겼고.)
 
헬레네 R. 히페리데:(폭발하면 몇 주 혹은 몇 개월에 걸쳐 은하에 필적하는 크기로 빛이 난다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로 잊히지 않도록 아름답고 광대한 빛을 내보이는 셈이다. 어차피 끌려내려와야만 하는 삶이라면 차라리 마지막까지 한 명에게라도 더 닿을 수 있도록 빛나고 말리라.) 제가 빛날 수 있는 건 저를 곁에서 응원해주시고 지켜주시는 분들 덕분이에요. 저를 사랑해주시고, 제가 사랑하는 분들. 아실이 지금 제게 그런 분이시지요. 아실과 함께라면 사그라들 위기에 처했더라도 다시 힘을 얻고 숨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만일 끝내 종막을 맞이한다 하여도 외롭지도 춥지도 않겠지요.
 
아실링 펜들레엄:정말이지... 헬리는 바보예요.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인걸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일찍이 온기를 잃었을 몸이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 하얀 입김을 뱉으며 배시시 미소 짓는다.) 뭐, 그래도 듣기는 좋네요. 제가 당신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뻐요. 별의 마지막, 당신이란 이야기의 종장까지 제가 함께 있을게요. 따뜻한 당신이 외롭거나 춥지도 않도록.
 
얼마나 뛰었을까, 숲속에 숨겨져 있던 동굴을 발견합니다.
 
한껏 벌린 신화생물의 아가리처럼 새카맣게 벌어진 입구.
 
파랑새는 딱 그 위에 앉아서 깃털을 고르고 있습니다.
 
우주가 몰고 온 풍랑이 나뭇잎을 마구 흔들자 괴물이 입맛을 다시는 효과음처럼 들립니다.
 
딱 한 번 눈을 깜박거리면 파랑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파란 깃털이 팔랑팔랑 떨어집니다.
 
파랑새는 희망 대신 석회동굴에 우리를 데려다 놓습니다.
 
시간이 깎아낸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바닥엔 옅은 물기가 찰박거립니다.
 
억겁을 머금은 물방울들은 낙하 직전의 순간을 박제하고 있습니다.
 
천장이 무너졌는지 심부로 들어갈수록 도리어 시야가 환해집니다.
 
표면에 낀 살얼음이 정오의 햇살을 머금지 못하고 온갖 방향으로 산란합니다.
 
빛이 방울진 종유석은 거꾸로 늘어뜨린 손가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웬 동굴이 있네요. 아주 긴 것 같은데……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요?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때마다 작게 찰박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실링 펜들레엄:쉴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안의 상황은 좀 다르면 좋겠어요. 많이 걸었으니 한차례 쉬어줘야 하니까요.
 
홀린 듯 걸음을 옮겨 끝에 다다르면.
 
높고 긴 종유석이 보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유달리 긴 종유석을 물끄럼 바라본다)
 
하나의 돌이 세월의 정에 맞아 깎여나간 건축물.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꼭대기에서 한 점으로 모이는, 기다란 피라미드꼴입니다.
 
눈높이를 한참 벗어난 규모는 기둥이라 불러야 마땅할 정도입니다.
 
태양이 쨍쨍합니다.
 
빛은 종유석의 표면을 따라 흘러, 얄팍한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웁니다.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사막의 아지랑이, 온통 새하얀 모래, 풍화된 군번줄, 나뒹구는 타이머의 유골.
 
쨍쨍한 태양이 내리쬐면 시곗바늘을 닮은 긴 그림자가 지던 제단.
 
모든 것의 중심축이던 제0구역의 오벨리스크.
 
흰 바닥, 검은 그림자, 그리고 숫자.
 
알지 못하는 풍경이 ‘또’ 기억에 물듭니다.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이건……? (눈살을 가볍게 찡그린다. 13구역의 등대에 이어, 이번에는 0구역의 오벨리스크일까?)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모르는 기억속 제0구역의 오벨리스크를 어렴풋이 떠올립니다.
 
가본 적도, 목격한 적도 없건만 제0구역이 분명합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이것도……. 본 적이 있어요. 저만 그런것이 아니죠? 그렇죠?
 
아실링이 대답을 구합니다.
 
우리는 겪은 적 없는 경험을 나눠 갖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네, 저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인데, 꼭 가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라요.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하필 종유석을 보고 그곳을 연상하다니.)
 
둘은 방언처럼, 자기도 모르는 새 봉헌의 명문을 소리 내어 읽고 있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그런즉 너희는 본분을 다하라. 자리를 지키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헬레네 R. 히페리데:정확히 칠 년째 되는 날 문이 열릴 것이오, 순응하지 않는 자 저주받으리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과정은 사람을 예민케 합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기분.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위험을 감지한 생존 본능이 날뛰어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칠 년째 되는 날 문이 열린다. 자리로 돌아가라, 순응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으리라?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말뿐인데. 주변은 아무것도 없건만 전류가 울리는 것처럼 온 감각이 예리하게 날뛰었다. 창을 꾹 쥔다.)
 
아실링 펜들레엄:전부터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나네요. 방금 저희 말한, 모르는 말도, 이곳도 전부...
제13구역도, 제0구역도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이잖아요. 저와 당신 포함해서 보통 그곳에 갈 일이 없는데 말이죠. 딱히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고요…….
근데 저도 모르는 기억들이 익숙함을 불러와요.
 
아실링도 혼란한지 빠르게 의문을 읊어댑니다.
 
그렇다고 한들 명쾌한 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요.
 
종유석만이 수상한 빛을 낼 뿐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저희가 아는 신의 손가락은 열두 개 뿐이죠. 그런데, 하필이면 13구역과 0구역의 환영이 차례로 스쳐지나가네요. 환영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너무나도 선명한 기억이어서. (13구역의 등대, 0구역의 오벨리스크? 새로이 추가된 신의 손가락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다가 창을 뻗어 물막을 만들어냈다. 종유석을 씻어내리듯 에워싸보았다.)
 
종유석을 건드는 순간 쨍하고 깨져 나옵니다.
 
한낱 돌이 아닌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수정.
 
깨진 모양새가 우연히도 사파이어 펜듈럼과 닮아서…….
 
새삼, 일련의 과정이 익숙하단 사실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이곳을 항상 그렇게 소개하네요.”
 
“내 첫인상은 늘 똑같은가 봐.”
 
“세계가 멸망한 건 4월 20일, 도밍게즈의 축제 마지막 날이에요.”
 
“아마도 저는……. 당신을 구하러 왔던 것 같아요.”
 
“이렇게 되려고.”
 
... 그 과정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셀로판지를 겹쳐 더 깊고 진한 색을 찾아내는 것처럼…….
 
어쩌면 이 모든 건 당신의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이성 판정(0/1).
 
헬레네 R. 히페리데: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깨져나가는 모양새가 제 목덜미에 걸려있는 펜듈럼과 비슷함을 깨닫는 순간 사색이 되어 펜듈럼을 꾹 쥐었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미지수 아실링의 기억들. 그의 목소리. 저를 구하고 스러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선혈. 감기던 짙푸른 눈……. 이게 정말로 나의 기억이라면, 나는 대체……)
 
4년 전, 아실링은 도밍게즈에 불시착했습니다.
 
자신을 도밍게즈의 카운터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군복, 기억, 존재.
 
무엇 하나 제대로 일치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가설②아실링의 도밍게즈는 과거 혹은 미래의 도밍게즈로 추정된다. 복식 수준을 보면 과거일 가능성이 크지만, 과거에 멸망한 경우 현재가 존재할 수 없으니 미래일 가능성도 있다. 이 가설은 시간이 직선으로 흐른다는 전제하에 성립한다.그래서 과거 혹은 미래의 도밍게즈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가설③아실링이 살던 도밍게즈는 평행우주, 혹은 우주 너머의 또 다른 도밍게즈로 추정된다. 게이트 너머가 우주 건너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블루 아버가 열린 후에는 지구의 아실링 혹은 또 다른 우주의 아실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 선 당신이 그의 과거인지 미래인지 혹은 완전한 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답은 달리 외부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니라, 평행선이나 은하수 너머가 아니라…….
 
우리가 잊어버려 잃어버린 파편일지도 모른다고…….
 
―――――♬
 
가사 없는 노래가 뇌리를 파고들며 생각을 방해합니다.
 
느릿하면서도 쨍하게 울리는 소리.
 
잘못 든 자개바람이 종유석을 때려 만든 공명입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일어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립니다.
 
아이디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일부러 음계를 짚지 않더라도 익숙한 멜로디입니다.
 
반사적으로 흥얼거리게 됩니다.
 
가사가 있었는데. 노랫말이 어땠더라.
 
차근차근 돌이켜보면 결국, 음질이 나쁜 스피커가 불러주던 노래에 도달합니다.
 
[♪ Ground Control to Major Tom, Take your protein pills and put your helmet on. (Ten) ♪]
 
[♪ 관제실에서 톰 소령에게 알립니다. ♪]
 
[♪ You’ve really made the grade. ♪]
 
[♪ 당신은 이미 정해진 궤도에 올랐습니다. ♪]
 
[♪ Can you hear me, Major Tom? ♪]
 
[♪ 들립니까, 톰 소령? ♪]
 
지구에서 들었던 마지막 노래였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무리 바람이 몰아친다고 해도 이리 절묘한 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또, 신화생물인가. 외우주의 신이 기어코 또 찾아들었는가? 창을 쥐며 경계 태세에 돌입한다.)
 
따각.
 
돌이 구르는 소리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화들짝 정신을 차립니다.
 
종유석 아래에 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뜬 채 헬레네와 아실링을 바라봅니다.
 
“어, 어어.”
 
“타이머다!”
 
“뭐? 타이머가 왜 여기 있어?!”
 
꽁꽁 싸맨 제6구역의 마을 사람들과 조우합니다.
 
...
 
타이머라는 말에 분위기가 얼어 붙습니다.
 
마을사람1: 조난 당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더니, 타이머였단 말이야?
 
마을사람2: 그래도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마을사람3: 눈보라가 심해요.
 
아마도 산지기의 오두막에서 인기척을 발견하고 민간 조사대가 파견됐던 모양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갑론을박하기 시작합니다.
 
마을사람: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해! 함부로 마을에 들였다가 거, 거 게이트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겁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꽥꽥 고함을 치며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소렌: 아, 거 과수원 아저씨는 왜 자꾸 소리를 질러요? 그러다 곰 깨도 난 책임 못 집니다.
 
조금 뒤, 마지막으로 도착한 소렌이 마을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내밉니다.
 
유들유들한 목소리, 능청스러운 말투.
 
헬레네가 알고 있는 그 장사꾼입니다.
 
잃은 이를 향한 슬픔을 채 삭히지 못하고 흰 등을 날리던.
 
헬레네 R. 히페리데:(신화생물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나? 한껏 예민해진 채로, 기척이 들리자마자 창을 휘두르려다가 민간인임을 확인하고 멈칫한다. 하지만 이 노래가 들렸을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전부, 신화생물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지. 이들 역시 그들에게 잡아먹힌 게 아니리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이런 가정을 하게 되는 것조차도 암담했다.)
(다만 뒤늦게 고개 내민 이의 얼굴이 익숙하여, 창을 쥐고 있던 손에서 조금 힘이 빠져나간다. 여전히 당황과 경계로 낯은 희게 굳어 있었으나.) 소렌 씨― 맞으신가요? …… 이런 상황에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소렌: 이거 오랜만입니다. 저번 그날 이후로 못 만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운명은 아니고 신기한 우연이라고 치죠.
 
헬레네 R. 히페리데:안부를 묻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네요. …… 저희를 받아주기 어려우신 마음도 충분히 이해해요. DOT에 대신 연락을 취해 주셔도 상관없어요.
 
소렌: 예, 지금 안부고 뭐고 상황이 좀 그렇긴 합니다. 이, 일단 이곳은 나가서.
으악!!!!!
 
눈앞의 청년이 천적을 만난 소동물처럼 바짝 얼어버립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상황을 녹일 새도 없이, 지축이 흔들리고 종유석들이 불안하게 달그락거리기 시작합니다.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7
판정결과: 실패
 
사상 최악의 눈사태를 앞두고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기 시작합니다.
 
헬레네는 그들을 구할 수도, 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권능을 사용한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만…….
 
마을사람1: 사, 살려 주시오!
 
마을사람2: 어떻게 좀 해 주세요! 타이머잖아요!
 
이 사람들에게 마땅히 그럴 가치가 있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렸으므로.
 
헬레네 R. 히페리데:(그들이 저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지금껏 자신이 막아왔다고 여겼던 게이트는 실상 제 존재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스스로 낸 구멍을 스스로 땜질해왔던 거나 다름없지. 그 땜질조차 완벽하지 못해 수많은 희생을 내고……)
(그러니 마을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비소할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모두 살아남고 싶을 뿐이다. 모두, 살아가고 싶을 뿐이야.)
아실. 도움을! (단번에 창을 휘둘러 방패를 만들어내어 쏟아져내는 눈사태를 막아내려 시도한다.) 제가 눈사태를 막아낼 테니 어서 도망가세요!
권능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당신 정말...! (아직도 저를 모르시나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투정 부릴 틈도 없이 헬레네를 따라 창으로 방벽을 만들어내기 바쁜 상황이었다.)
권능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둘의 선택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도망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 보이는 것은 동굴을 덮치는 눈사태.
 
닥친 재난을 직면하던 둘은
 
쾅!
 
발아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세월 중 어느 날처럼.
 
.
 
.
 
.
 
크레바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통째로 잡아먹었습니다.
 
어쩐지 괴물의 아가리가 찢어진 꼴 같더라니.
 
이리 되리란 예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져서…….
 
익숙한 패턴이 헬레네를 스쳐 지나갑니다.
 
지하의 흙냄새, 먼지 냄새, 곰팡내 같은 것으로 케케묵은 공기가 호흡기를 뜨겁게 거머쥡니다.
 
숨을 쉬기가 퍽 괴롭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추락이 끝납니다.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그대로 머리부터 처박히고 맙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어쩐지 익숙한 느낌)
(머리를 힘겹게 빼낸다. 눈사태에 이어 추락이라니…… 여긴 어디지?)
 
끝없는 백야와 희디흰 소금사막이 펼쳐집니다.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없다는 미지의 장소.
 
제0구역, 빛이 스며든 사막인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는 높고 긴 기둥이 서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환상처럼 봤던 이 사막에 오고야 말았군요. (6구역에서 사막이라니, 상식적으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딱히 놀랄 만한 힘도 없었다. 제 기억이 실제라면 이미 한 번 와본 적이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높고 긴 기둥을 올려다본다. 종유석과 겹쳐 보이는 기분.)
 
들려야 할 아실링의 대답이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높고 긴 기둥 근처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그제야 기둥 근처에 쓰러진 아실링을 발견하곤 사색이 되어 뛰쳐간다.) 괜찮으신가요?! (상처는 없는지 확인부터 한다.)
 
의식을 잃었는지 숨소리가 희미합니다.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시체보다 창백할 지경입니다.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료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의료
기준치: 12/6/2
굴림: 18
판정결과: 실패
(행운 깎겠습니다)
 
행운 -6
 
기절하거나 잠든 것이 아니라 가사 상태에 접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가사 상태라니, 어째서? 왜 나만이 깨어있고, 아실링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외상은 없으나 그보다 심각할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길한 가정이 뻗쳐가니 아실링을 받쳐 안은 손이 떨려왔다.)
(아실링을 꼭 끌어안은 채로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던 이 우리를 부른 것인가.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하나의 돌을 정으로 때려 깎아낸 건축물.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져 꼭대기에서 한 점으로 모이는, 기다란 피라미드꼴입니다.
 
입구도, 창문도 없고 벽면을 따라 세밀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모국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언어(모국어)
기준치: 70/35/14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황금에 몸체에 빛처럼 흰 글씨.
 
엇비슷하게 밝은 배색인데도 한 자 한 자 적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시작과 끝이오, 알파와 오메가이며 우림과 둠밈이라.〉
 
... 반사적으로 이 오벨리스크의 정체를 깨닫습니다.
 
아까부터 당신을 뒤쫓던 기시감이 증거합니다.
 
분명히 와본 적이 있다고.
 
무엇을 했는지, 어째서 잊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헬레네 R. 히페리데:(그 환상이 정말로 나의 기억이라니. 그건 과거인가, 미래인가? 나에게 왔던 미지수 아실링은 과거의 인물인가, 미래의 인물인가. 대체 과거는 무엇이고 미래는 무엇인가. 시간의 축이 흔들린다. 모래시계를 마구 뒤흔드는 것처럼.)
(바싹 말라가는 입을 다시금 꾹 다물며 글자를 더 읽어내려갔다.)
 
오벨리스크의 글자들은 점점 형태를 알 수 없게 사라지며 모래사막을 가리킵니다.
 
오벨리스크 중심으로 가득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글자들이 가리켜는 모래사막을 돌아본다. 아실링을 두고 혼자 가고 싶지 않은데. 만약 아실링이 깨어났을 때 자신이 없다면 놀랄 것이고, 저 또한 무척 불안한 탓에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명백히 무언가가 이끄는 것 같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기둥이 만들어내는 그늘에 아실링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몇 번이나 그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사막으로 나아간다. 기둥이 사라지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야 언제든 다시 되돌아올 수 있으니까.)
 
헬레네, 1D3
 
헬레네 R. 히페리데:
rolling 1d3
 
(
3
 
)
 
 
=
3
 
헬레네가 사막을 걸어가던 중 순간 시야가 하얗게 변합니다.
 
녹지 않는 흰 눈이 내립니다.
 
입에 넣으면 사탕처럼 달고 뺨에 닿아도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기만 합니다.
 
아, 익히 알고 있는 맛입니다.
 
체력을 1D3점 회복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rolling 1d3
 
(
2
 
)
 
 
=
2
 
체력 +2
 
헬레네 R. 히페리데:(왜 이 맛이 익숙한 걸까?)
 
끝에는 과일의 향이 남습니다.
 
기억속 모르는 사탕의 맛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이것도 내 기억 아닌 기억에서 느꼈던 맛이려나. 기묘한 일이다. 아실링에게도 먹일 수 있다면 한결 기운을 차리는 데 도움이 될 텐데. 한 번 더 오벨리스크를 뒤돌아봤다가 다시 느리게 걸음 내디뎠다.)
 
사박사박 모래를 밟던 중 저 너머에서 세모난 귀가 톡 튀어나옵니다.
 
날카로운 눈과 동그란 코를 가진 사막여우입니다.
 
제0구역에는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헬레네 R. 히페리데:어머. 여우가 어떻게……. (여우를 향해 조심히 다가가 한쪽 무릎 꿇고 손을 내민다.)
 
여우는 발치를 맴돌며 낯선 인간을 관찰합니다.
 
겁도 없는지 손가락을 내밀면 코를 촉 갖다 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이런 곳에서 덥지도 않나요? (손가락에 코가 닿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다.) 귀여워라.
 
애교를 부리듯 이마를 헬레네 손에 부비적거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살거립니다.
 
〈또 올 줄을 너와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한 마디 인사를 건넨 후 사막여우는 무너진 모래성처럼 스르르 흩어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흠칫 놀란다.) 마, 말을…… (여우마저도 평범하지 않구나. 하긴 평범한 여우라면 사막에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을 얻었다. 다시 걷는다.)
 
...
 
걷던 중 누군가 발목을 잡아챕니다.
 
딱딱하고 버석버석하게 마른, 딱 불쾌할 정도로 미지근한 온도의…….
 
뼈만 남은 앙상한 손아귀입니다.
 
살점이 내리고 피가 날아가 새하얗게 빛바랜 유골이 모래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헬레네, 이성 판정(0/1D2).
 
헬레네 R. 히페리데:
SAN Roll
기준치: 70/35/14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rolling 1d2
 
(
2
 
)
 
 
=
2
 
이성 -2
 
헬레네 R. 히페리데:(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선다. 처참한 시신이나 백골을 한두 번 봐온 건 아니었다지만, 역시 예상치도 못한 등장 앞에선 놀랄 수밖에 없는지라.)
(놀라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팍을 쓸어내리다 보면, 금세 침착해진다.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막이니 시신 한두 구쯤 있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짧게 명복을 빌며 백골을 살펴본다)
 
유골의 차림새도 해진 터라 신변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다 제0구역까지 들어온 걸까요?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60
판정결과: 보통 성공
 
품에서 군번줄을 발견합니다.
 
익숙하게 생긴 군번줄에는 익히 아는 양식으로 신변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Do■in■■ez at 1■
 
On ■he d■t― ■■e ■th Timer
 
■■■ ■■■■.
 
뭉툭하게 닳은 글씨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지만, 한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품없는 시체가…… 타이머라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닳고 닳아 이 죽음을 파헤칠 방법도 없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타이머라니. 푸른 눈이 크게 뜨인다. 얼마나 먼 과거였으면 기록에도 채 남지 못한 걸까. 이 사람의 동료도 모래사막 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까? 참으로 쓸쓸하고 비참한 끝이 아닌가.)
(짧게 명복을 빌고 군번줄을 챙긴다. 유품으로나마 되돌려주기 위해서)
 
... ... 얼마나 더 걸었을까요?
 
아지랑이가 헬레네를 현혹하던 그때
 
“헬레네…….”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이 쨍쨍합니다.
 
빛은 오벨리스크의 표면을 따라 흘러, 얄팍한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웁니다.
 
그 끝을 밟고 아실링이 서 있습니다.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깨어나신 걸까? 곁에 제가 없어서 많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신은 분명 오벨리스크를 등지고 걸어왔는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어디지? 시야에 담기는 아실링을 바라보는 시선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샅샅이 살펴도 달라진 점은 없는데…….
 
어쩐지 상대의 존재 자체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바닥에는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만 그어져 있고, 헬레네의 발끝에는 한 줄도 매달리지 않았단 사실을 눈치챕니다.
 
아실링인가, 맞나?
 
정말로?
 
헬레네 R. 히페리데:…… 아실? 정말, 아실이신가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여린 미성. 사막의 열기와 모래의 건조함이 저를 괴롭혀서 환각이라도 보는 것일까?)
(설마 고등 쇼고스는 아니겠지. 그것이 나타났다는 건 먹혔다는 뜻일 테니까. 아, 만약 그런 거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경계 태세에 들어가며 아실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헬레네의 반응을 살피던 아실링은 딱 한 마디를 건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그거 전부 가짜에요. 홀리지 마세요.
 
그 말투는 오래된 책을 읽는 것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확실히 아실링의 목소리인데도 억양의 고저가 전부 삭제돼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아실링에게 틈탄 것은 정체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부딪칩니다.
 
딱, 가뿐한 소리와 함께 유골도 군번줄도 한 줌 모래로 스러지고, 아실링이 거침없이 다가옵니다.
 
무게가 없는 유령처럼 군화는 모래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불러놓고 늦었네요,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오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좀 헤맸지 뭔가요. (마침 처음 장난감을 작동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있잖아요, 저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나요?
 
눈 깜짝할 사이 코앞에 당도한 아실링은 얼굴을 바짝 들이밉니다.
 
깜빡거리는 눈동자 저편에는 여태 쌓아온 시간 대신 단발적인 호기심만 가득합니다.
 
내가 불렀다는 대사, 손끝으로 부리는 권능, 제0구역의 주인.
 
상대를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손 안에 분명히 쥐었다고 생각한 군번줄이 스러져간다. 부자연스러운 말투, 단조로운 억양, 삐걱거리는 몸짓…… 순간적으로 4년 전 게이트에서 나왔던 또 다른 헬레네가 상기된다. 이루어져선 안 될 최악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일까 하는 마음에 낯빛이 시체마냥 창백해졌다.) 아실이, 아니군요…….
(공포에 질려 이성이 완전히 제 기능을 잃어버리기 전, 그나마 남은 한 조각이 쇼고스와는 다른 이질감을 간파하는 데 성공한다. 내가 불렀다니. 설마,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신, 이라 불리는 존재인 건가요?
 
아실링 펜들레엄¿:정말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아실링이면서 당신, 타이머이자 인류. 전부이되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 이어진 헬레네의 물음을 듣고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그래요, 당신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그거.
그거 말고도 제 이름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대충... 56개? 어쩌면 그 이상을.
 
헬레네 R. 히페리데:…… 아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요. (여전히 창백한 낯빛으로 겨우 대답한다.) 아실은 괜찮은 건가요? 어째서 아실에게 현현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빌리셨을 뿐인 거죠? (가장 먼저 묻는 건 역시나 제 파트너의 안위였다.)
 
아실링 펜들레엄¿:아? 그래요? 그럼 어쩐다... 영 별로다 싶으면 다른 말투로 사용할까요? 저는 이런 것 가지고 당신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요. (표정은 여전히 웃는 낯 그대로 인체 손으로 턱을 감싸며 인간의 모습을 따라 한다.) 그 질문을 바로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근데 내가 빌린 게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나설 건가요? 뭔가 할 수 있나요? (하얀 손을 뻗어 헬레네의 손등을 감싼다. 순수한 호기심을 가득 찬 눈이 대답을 기다렸고.)
 
헬레네 R. 히페리데:…… 말투를 제 마음대로 바꾸라 마라 말씀드리고 싶진 않아요. 다만, 지금 저와 대화하는 분이 제가 아는 아실이 아니라는 것만을 확신했을 뿐……. (닿아오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원래라면 반갑게 마주잡았을 손인데. 두려움과 경외, 혼란이 덩굴처럼 깊게 얽혀 맞닿은 손을 떨면서 내려다볼 뿐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음을 깨달은 것도 동시였다. 무력감의 모래늪 속에 발이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제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지요. 그러나 기도할 수는 있겠어요. 신은 흔히 기도와 바람을 들어주는 대상이라고 하지요. 아실을 무사히 놓아달라, 돌려달라고 빌 거예요.
…… 아실의 모습을 빌려 제 앞에 나타나신 이유가 있나요? (그제야 본론일 법한 질문을 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려는 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맹랑하기는. 지금 신 앞에서 그렇게 나오는 건가요? 흠... 그래도 당신 같은 사람은 꽤나 사랑스러운 편이죠. 좋아요. 마음에 들었으니 말해줄게요. 이 몸의 주인은 괜찮아요, 그냥 깊이 잠든 것뿐. 싱크로 하느라 부하가 걸려서 그런 것이니 걱정 말고요. 저번에는 이래서 거리를 뒀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직접 말해야 할 것 같길래 강행했다가 그만. 아,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웃던가? (이후 짧게 꺄르르 웃는 소리를 내고는) 두 번이나 날 깨웠으니까 좀 괘씸……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민간인보단 타이머가 상성이 좋기도 하고.
이유라... 본래 의도가 있긴 하죠.
 
헬레네 R. 히페리데:(신에게 잘못 보인다 하여도 사실,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이미 반쯤 놓아버린 생이다. 살아갈 의지를 겨우 붙들어주는 부표가 눈앞의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을 지닌 이였다. 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해일과도 같은 절망 앞에서 신의 분노가 옷깃을 적신들 소용이 있을까. 신의 입으로 아실의 안부를 듣고서야 겨우 제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막혔던 호흡이 이제야 가느다랗게 새었다.)
이전에도 시도하신 적이 있었던 건가요? (기억을 더듬어봐도 딱히 그럴 법한 때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언제……?
 
아실링 펜들레엄¿:호기심이 많군요? 음.. 이걸 어떡하죠? 그걸 설명하기는... ... 인간의 의식 수준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가끔은 모르고 넘어가도 괜찮답니다. 대신 다른 것이라면 아~마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헬레네 R. 히페리데:말씀하기 어려우신 거군요. 알겠어요. 그러면, 무엇을 위해 아실의 몸을 빌리셨는지. 그 본래 의도를 듣고 싶네요.
 
아실링 펜들레엄¿:모든 걸 쪼개고 나누어둔 의도...라고 말하면 이해가 편할까요? 인간들이 살아남으려는 걸 생존 본능이라고 부른다던데, 그럼 이쪽은 보호 본능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묻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많은 얼굴이네요.
 
헬레네 R. 히페리데:지구와 도밍게즈를 의미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외우주의 신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고자 하셨던 건가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어째서 저는 소우주의 신이라 불리나요. 어째서 이들을 지키라 주신 힘이 외우주의 것들을 불러들이는 달콤한 먹이가 되었나요? (신의 말대로 한 번 열린 말문 끝에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쏟아져나왔다. 저에게 쥐여진 권능은 실상 생존 본능이나 다름없었고, 사람들을 살린다 믿었으나 입안으로 밀어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어요. (나 또한, 보호 본능으로 행동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아실링 펜들레엄¿:질문이 많기도 하지.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요. 당신과 대화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그걸 다 말하려면 뭐부터 말해야 할까요... 그래, 좀 긴 이야기인데 우선 들어봐요.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짓궂게 웃던 신은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팔짱을 끼고 먼 과거를 가늠하기 시작합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역시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죠? 영광으로 생각해도 좋아요. 이 세상에서 딱 하나, 당신만 아는 이야기가 될 테니.
저는 우주가 폭발했을 때 태어났어요. 언제였는지는 묻지 말고요. 아무튼, 모든 생명체는 성장기의 에너지가 가장 왕성하다는 거, 아시죠? 그때의 저도 무럭무럭 자라났어요. 인간의 성장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속도로.
 
신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묘사합니다.
 
28개의 손가락이 얼마나 길쭉했는지, 혼돈으로 가득한 피부가 얼마나 매끄러웠는지…….
 
뻔뻔하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말투에 반해 모든 억양은 한 음을 고수하니 좀 우습습니다.
 
기가지니 혹은 시리도 이보단 사람처럼 말할 텐데.
 
아실링 펜들레엄¿: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도 외롭지는 않았어요. 제게는 둘 이상이라는 개념이 더 낯설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영원토록 나 혼자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죠.
 
홀로 오롯한 신격은 외로움을 모르는 법.
 
헬레네 R. 히페리데:(신이 정말로 실존한다는 사실이 재차 놀라웠고, 그에게 유년 시절이 있었다는 것 역시도 믿기 어렵기만 했다. 그야 이런 이야기는 정말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일반적으로 신은 관념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도밍게즈와 지구에 신화가 밀접하게 얽혀 있듯이 신은 이 세계와 진득하고 가까웠다. 목소리는 단조로웠으나 이야기는 다채로웠다. 어느새,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을 기다리며 푸른 눈에 옅은 호기심이 묻었다.)
 
외로움이란 결여가 있는, 불완전한 것들에게만 허락되는 하사품.
 
아실링 펜들레엄¿:제가 겪은 탄생 이래 위기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타종이었죠.
... 잠깐 졸다가 깼더니 난장판이더군요.
점과 점은 연결되질 않나, 손가락들은 끼리끼리 깍지 끼고 있질 않나……. 피하고 싶던 최악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서 손 쓸 도리도 없었어요.
 
이채가 서린 시선이 오벨리스크로 향합니다.
 
감정을 배우지 못한, 배울 필요조차 없는 신치고는 인간다운 채도입니다.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헬레네는 기억의 편린을 하나 더 얻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본분을 다하라. 자리를 지키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멀고도 가까운 미래에 받았던 예언과 명령을.
 
……헬레네의 기억이 맞는지 이제는 혼미할 지경입니다.
 
관자놀이에 대고 못질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두통이 내리칩니다.
 
이성 판정(0/1).
 
헬레네 R. 히페리데:
SAN Roll
기준치: 68/34/13
굴림: 100
판정결과: 대실패
대체 이건 누구의 기억인가요?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 날카로운 두통이 제 머릿속을 조각내는 것만 같다. 헬레네는 누구고 아실링은 누구인가. 등대를 바라보던 바닷가의 두 사람은, 눈사람을 만들고자 이야기하던 이들은…… 이 편린 속에서 맴도는 예언은 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내려지는 것인가.) 알 수가 없어요. 미지수라 불리던 아실링도…… 저는 단순히 다른 세계의 아실링일 거라 생각했지만.
저와 아실은 끝없는 시간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건가요?
 
아실링 펜들레엄¿:어허, 말했잖아요, 그건 전부 가짜에요. 당신의 것이 아닌 것에 홀리지 마세요.
 
사막의 열기를 담은 손끝이 헬레네의 이마를 쓸어 넘깁니다.
 
순식간에 통증이 흩어지고 눈앞의 얼굴이 선명해집니다.
 
아실링이면서 아실링이 아닌…….
 
아실링 펜들레엄¿:두 명의 나를 만났죠? 저도 두 명의 당신을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두 번째거든요.
 
쌍둥이도, 형제도 아니고 두 번째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도플갱어라도 되는 것처럼.
 
아실링 펜들레엄¿:처음 만난 당신들은 이미 단단히 결속해서, 외우주에게 숨길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진 상태였어요. 존재만으로 멸망을 부르는 신격 덩어리들이었죠. 뒤늦게나마 이편과 저편으로 찢어발기는 게 최선이었어요.
 
듣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아실링 펜들레엄¿:그러고도 안전하리라 확신할 수 없어서 세계를 한 번 더 찢어냈어요. 여기는 그렇게 재편성된…… 일컨대 두 번째 세계.
 
헬레네 R. 히페리데:재편성…… 이라는 건. (너무 많은 사건과 시간의 무게에 다시금 두통이 밀어닥치는 듯했다. 눈가를 작게 찡그린다.) 그러면 그 세계의 저와 아실은 그대로 각자의 세계로 갈라져버린 건가요? 이곳의 세계에서도 결국 만나게 되었는데…… 외우주에게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게 아닌가요. (저희의 세계를 침범한 수도 없는 신화생물을 상기한다.)
 
신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논리로는 이해 못 해.
 
내가 너희의 감정 회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냥 그러려니 해.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거잖아.
 
아실링 펜들레엄¿:됐어요, 그만 얘기하죠. 어차피 이 문제에서 첫 번째냐 두 번째냐는 중요하지도 않으니까요.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찢어냈다고 생각한 나선은 다시 이어져선 같은 궤도를 심지어 가속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멸망까지 일곱 해가 걸렸지만, 이번에는 한 해를 채 못 넘겼던 것처럼. 아마 몇 번을 더 찢어내도 마찬가지일 테죠.
……내가 간과했죠. 죄를 지은 손가락을 찢어낸들 원죄가 사라지는 게 아닌데.
저는 당신들의 근원. 당신들은 저의 일부고. 당신들이 속절없이 끌리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 외우주가 당신들을 노리는 원인 또한 그래요.
 
한 템포의 침묵 후,
 
아실링 펜들레엄¿:그래서 나는 죽기로 했어.
 
헬레네 R. 히페리데:(내가 아실링과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도, 식욕을 느꼈던 것도 결국 이 때문이었구나. 신의 일부였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도 잘 믿기지는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긴장된 낯으로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만다.) 네?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살해 위협을 가뿐하게 회고한 신은 자살 계획마저 담백하게 추억합니다.
 
슬픔을 거세한 목소리는 더 이상 아실링의 것과 헷갈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이질적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면요... 그런 말 들어봤어요?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처음에도 그럴 작정이었어요. 산목숨을 탐내니 죽으면 해결되리라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죽을 방법을 몰라서 찢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본능에 가까운 확신이 고개를 듭니다.
 
그때는 없었지만, 지금은 존재하는 것.
 
‘죽을 방법’으로 신은 헬레네를 낙점했다고.
 
지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타이머는 ‘원래’ 인간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인간과 근본부터 달라지는 걸까?”
 
닥터가 곱씹던 의문이 뇌리를 스칩니다.
 
타이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각성하며 신격을 담는 그릇―
 
즉 작은 신의 파편으로 완전히 거듭났습니다.
 
신이 죽는다면, 신격이 세상에서 말끔히 사라진다면…….
 
텅 빈 그릇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실링 펜들레엄¿:아, 이런.
 
동족상잔이자 동반 자살.
 
아실링 펜들레엄¿:한계에 다다랐네요.
 
해명을 구하기도 전에 신은 인상을 찌푸립니다.
 
감정이 물들자 퍽 익숙한 사람을 연상시킵니다.
 
고장 난 전구처럼 눈꺼풀이 깜빡거릴 때마다 신과 아실링의 얼굴이 번갈아 교차합니다.
 
황급히 헬레네의 손을 거머쥔 신이 마지막 대사를 읊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아마도 이런 걸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거겠죠.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그 대사는, 퇴장할 준비를 마친 신의 초라한 유언.
 
거대한 탈력감과 함께 아실링이 헬레네의 품으로 고꾸라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이미 소우주의 신이라 불리는 타이머들이다. 신이 죽는다면 비어버린 그릇은 어찌 되는 것인가? 그간 알지 못했던 근원과 원리의 바다에 이제야 한 발을 걸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썰물처럼 저 멀리로 떠나가버린다.)
(품안에 쓰러지는 아실링을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신이라 불리는 것이 떠나갔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실. 아실! 정신이 드시나요? (대체 어떻게 신을 죽여달라는 것인지, 그 이후의 일은 어찌 되는 것인지, 막대하게 떠도는 의문들은 우선 차치하고 아실링의 상태를 살폈다.)
 
아실링 펜들레엄:아, 머리 아파……. (헬레네의 어깨를 간신히 잡고 바로 선다. 신이 떠나간 자리를 대신하는 두통으로 미간을 좁힌다.) 정말, 그 신정말 미친 거 아니에요?! (뿌앵 하며 어리광 부르듯 헬레네 어깨를 끌어안는다.) 진짜 다시 만나기만 해봐, 정말 가만 안 둘 거예요! 내가, 내가 죽일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고생하셨어요, 아실. 많이 놀라셨죠……. (속상함에 처진 눈썹으로 아실링의 이마를 쓸어준다) 아실에게도 그 이야기가 다 들리셨던 거죠? 솔직히 들었는데도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죽고자 한다니. 신이 죽으면, 그의 일부라 불리던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정말 저딴 게 신이라고...! ... ... 네에, 저 엄청 놀랐어요. (답지 않게 감정 숨기는 일 없이 투정을 마구 늘여놓다가 이마 쓸어주는 손길에 금방 진정한다.) 신이 머무는 동안 있었던 일은 저도 전부 체득했어요. 다만 역시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네요.
 
헬레네 R. 히페리데:계속 또다른 저와 아실링에 대해 궁금했어요. 그런데 이전에 첫 번째 세계가 있었고, 이게 두 번째 세계였다니……. (과거도 미래도 아닌 제 3의 답이 존재했던 셈이다.)
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도밍게즈와 지구는 안전해질까요? (유달리 쓸쓸한 음성이었다. 신의 죽음은 즉 우리의 죽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가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아실링 펜들레엄:제 일이 아니었으면 잘 만들어진 공상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러지는 못하겠네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어요.
...저는 신이 도밍게즈와 지구의 안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여길게요. 그리고, 저희 안전까지요. 신의 자비라는 것 이참에 알고 싶네요. 물론 그것도 이곳을 나간 뒤에야 알든지 말든지 하겠지만요.
 
막막한 현실로 복귀합니다.
 
제0구역의 사막은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습니다.
 
이정표 삼을 만한 굴뚝 연기조차 없으니 어디로, 얼마나 걸어야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두 세계의 안전을 위해 우리가 버림패가 되어야만 한다면. 가설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형체를 얻어가니 무시하기 어렵다. 만일 정말 그 방법뿐이라면 저는 목숨을 내놓을 수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는 게 좋겠지. 우리도, 세계도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러게요. 일단은 벗어나야 할 텐데. 6구역의 크레바스에서 떨어지니 이 0구역이었죠…….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이곳에 도착했으니... 아마 나가는 방법도 상식은 통하지 않을 것 같네요. 그 신도 참... 나가는 길이라도 바로 보이게 열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가만 안 둔다며 투덜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둘러본들 이 새하얀 사막에 덩그러니 선 것은 오벨리스크뿐입니다.
 
황금에 몸체에 빛처럼 흰 글씨.
 
〈나는 시작과 끝이오, 알파와 오메가이며 우림과 둠밈이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는 순간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시곗바늘처럼 보입니다.
 
헬레네는 이다음 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장면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내내 뇌리에 남던 겪어본 적 없는 환상. 그런데도 본래의 기억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하던 모습.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주체가 또 다른 우주의 나였을 뿐. 이미 가정해본 적 있는 경우의 수들 중 하나였으나, 이 순간 시간을 벽을 타넘어 겹쳐지고 두 빛은 서로를 향해 곧게 마주선다.)
(갈라졌던 기억이 이어붙는다. 멸망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그 세계의 이들. 그럼에도 눈물과 웃음, 비탄과 환희 속에서 끝까지 발버둥쳤을 그들의 삶과 기억을.)
아실도 떠올리신 거죠? (답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었음을.) 저희의 시간으로 가요.
 
아실링 펜들레엄:그럼요, 당신과 저의 이야기인걸요. 많이 절망도 하고, 기뻐도 했던... 당신과의, 그리고 세상과의 소중한 기억들이에요. 다시는 잊을 일 없을 거예요. (나아가는 길을 알았으니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가장 소중한 이에게 손을 뻗는다.) 다시 저희의 시간을 움직여보도록 하죠.
 
...
 
사막의 열기가 피운 아지랑이.
 
망막에 맺히는 거짓된 환상.
 
그럼에도 믿게 될 만큼 생생한 연출…….
 
...
 
정신을 차리면 두 사람은 아실링의 관사,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찌는 듯한 직사광선 대신 적당히 선선한 바람, 색이 없는 모래 대신 딱 알맞게 물든 창가의 단풍.
 
예상과 달리 위험하지도, 위태롭지도 않은 일상의 한 구간 같은데…….
 
달력을 보면 2035년 10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파악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스스로 켜진 TV가 DOT의 인터뷰를 떠들어대기 시작하니까요.
 
「신화생물은 타이머를 탐해 도밍게즈를 침략하고 있었다.」
 
「2032년 12월경, 클라커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故 애벗 박사가 처음 발표한 가설입니다. 8개월의 연구 결과, 신화생물의 체세포가 타이머의 혈액에 반응한다는 데이터를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은폐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확신할 만큼 사례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증명 중인 가설에 불과했으며, 클라커 프로젝트를 병행한 것은 만약을 대비해 타이머의 활동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故 애벗 박사의 의견을 존중한바…….」
 
미스터 블랙의 고발을 시발점으로, 여론은 나날이 악화됐습니다.
 
온갖 음모설이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가 하면 목적을 잃은 분노와 원망은 눈사태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여긴... 헬리, 저희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헬레네 R. 히페리데:(눈을 끔벅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곧 익숙한 장소임을 알아채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0구역에 갑작스럽게 오게 된 것처럼 귀환도 갑작스럽네요. 이런 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아실링 펜들레엄:(TV 화면으로 보이는 각종 뉴스들을 보다가 여러 번 채널을 바꾼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뭔가 이상해요. 저희가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일까요? 무슨 이유로...?
 
헬레네 R. 히페리데:(달력에 적혀 있는 선명한 숫자. TV에서 떠들어대는 시끄러운 뉴스들은 지금에 와서는 꽤나 구닥다리일 법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무슨 농간인지는 몰라도 신은 시간을 되돌렸고,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화덕에 내던져진 셈이 되었다.) 이쯤, 저희는 원래 도망치고 있어야만 했는데…… 4개월간 저희가 했던 일이 전부 없는 것이 되어버린 걸까요? 분명 신이 일부러 시기를 조정했을 텐데, 의도를 모르겠어요.
 
지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거 전부 가짜에요. 홀리지 마세요.”
 
익숙한, 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 속살거림을 남기고 떠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이것마저도 환상인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체 뭘 위해서?
 
듣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1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브라운관 속에서 쩔쩔매며 변명하던 대변인은 곧 휴식을 선언합니다.
 
화면이 재조정되는 동안 음성이 소거되자 창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들어옵니다.
 
「DOT는 진실을 밝혀라! 무고한 희생을 묵과하지 마라!」
 
「이 사태를 책임져라! 타이머들은 DOT 뒤에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한 뼘 틈으로 보이는 건 단풍나무의 가지가 전부였는데.
 
원한다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그래,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우리가 마주해야 했을 광경…….)
(환상이라고는 하나 실제와 다를 바 무엇 있겠는가. 망설이다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우리 역시도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저들이 이를 알 리가 없겠지.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살얼음에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박힐 것을 알면서도.)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만은 없을 테니까.)
 
관사 앞에는 해명을 요구하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들을 보는 심정이 어떤가요?
 
감정이 뭉쳐 소용돌이칩니다.
 
그중 어떤 것의 이름은 회의감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존재를, 다음에는 태어난 별을, 종내에는 반쪽을 걸어서 구해낸 세계.
 
노력을 해도 아직 이정도이던가........
 
하물며 이번에 걸어야 할 대가는 목숨이라면.
 
아실링 펜들레엄:……이런 장면을 보여주다니. 환상의 질이 좋지 않군요. 이런것보다 더 최악인 것도 경험해 봤어요.
 
아실링이 커튼을 닫으며 묻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네요. 이 꼴을 보고도 세계를 구할 셈이냐고. 저와 당신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네요. 물론... 마음아픈 일이긴 하죠. 근데 그렇다고 저희가 이렇게 그만둘 사람들도 아니잖아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럼요. 저는 분노하는 시민들을 이해해요. 저희도 아무런 사실도 몰랐지만, 저분들은 보다 더 혼란스러우시겠죠.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지금껏 가장 최전선에 섰던 타이머들에게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말이죠.
그러니 끝까지 힘내봐야죠. 저희가 더 이상 먹잇감으로 노려지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요.
 
헬레네의 답을 기다렸다는 듯 세계가 움직입니다.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
 
체코, 프라하. 하늘이 유달리 맑은 날.
 
천문시계 오를로이는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노을을 받아 오묘한 황금색으로 빛납니다.
 
아래쪽 시계에는 황도 12궁을 테마로 타이머의 현신이 그려져 있고, 위쪽 시계에는 각종 시간을 열네 등분해 두었습니다.
 
오를로이를 마주 보는 도로에 게이트가 열려 있습니다.
 
경보가 웽웽 울리자 사람들은 황급히 대피하기 시작합니다.
 
“다들 밀지 마세요! 순서대로 움직이십시오!”
 
“아직 전조 증상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지시를 따라야 빠른 대피가 가능합니다!”
 
도로로 쏟아진 사람들은 서로를 밀고 밀쳐댑니다.
 
톤이 높은 비명도 여러 차례 울립니다.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00
판정결과: 대실패
 
아실링 펜들레엄: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람의 물결 사이, 아슬아슬하게 떠밀리기 시작한 구간이 눈에 띕니다.
 
버려진 차들로 길목이 좁아져 내보낼 머릿수를 소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신화생물이 등장하기도 전에 인명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차들을 치워준다면 대피 행렬의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지겠지만…….
 
그들을 돕는가, 돕지 않는가는 전적으로 두 사람이 결정합니다.
 
이 시점에는 도와준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테니까요.
 
오히려 나쁜 반응이 돌아올 확률이 높겠죠.
 
헬레네 R. 히페리데:(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모르지 않으나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주변의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고 차를 얼마나, 어느 쪽으로 밀어야 퇴로가 뚫릴지 계산한다.) 아실. 저쪽으로 차를 밀죠! (아실링이 함께 해 주리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외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만일 이게 환상이라 하더라도, 저는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낼 것이다.)
 
아실링 펜들레엄:(머리를 울리는 갖가지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퇴로를 찾으려 눈을 굴린다. 환상이든 현실이든 어떻게든 해결해야 마음에 편할 것이라는 핑계를 붙인다. 내가 이것을 핑계라고 생각할 때, 당신은 이것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겠지. 자신이 아닌 사람들을 향해 뛰어가는 영웅을 보며 미소 짓는다.) 당신다워요. 네, 헬리. 안 그래도 몸 제대로 못 움직여서 심심하던 차였어요.
 
헬레네 R. 히페리데:(창을 크게 휘저어 물을 만들어낸다. 물의 무게로 차가 밀려날 수 있도록 사정없이 내리부었다.)
권능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5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
권능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44
판정결과: 보통 성공
 
끼기긱,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차들이 도로에서 밀려납니다.
 
인파 위로 차체의 그림자가 내리고, 한결 어두워진 얼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집니다.
 
심리학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심리학
기준치: 60/30/12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실링 펜들레엄:
심리학
기준치: 70/35/14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공포, 경계, 원망, 포기, 분노, 슬픔.
 
거의 다 비슷한 색의 감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 얼추 상황을 마무리해 도주로를 활짝 열어두어도 인파는 쉬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팽팽한 침묵이 줄다리기를 이어갑니다.
 
그때였습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 하나가 손에 잡히는 것을 되는대로 집어 던진 것은.
 
민첩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아실링 펜들레엄: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헬레네 R. 히페리데:(피할 틈이 있었을까? 팽팽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 팔을 크게 휘젓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고개를 조금 모로 돌릴 뿐이었다.)
 
작은 돌멩이가 정확히 이마를 노리고 날아들었습니다.
 
팍. 정확히 이마를 타격하고 떨어집니다.
 
신화생물의 공격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위력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이고, 치명적입니다.
 
지금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도 그저 환상통인 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시선이 돌아가는 것보다 더 먼저 들린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진다. 가장 겪기 싫은 일이 환상에서, 그것도 하필 헬레네에게 일어나다니. 급하게 헬레네 몸을 자신의 뒤쪽으로 숙이게 한다.) 헤, 헬리... ... (아,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지금 괜찮냐고 물어볼 수 있을까. 당신은 전혀 괜찮지 않을 텐데.)
 
헬레네 R. 히페리데:(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지독하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환상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그러나 이마보다도 더 아픈 곳은 옷을 몇 겹이나 둘러싼 가슴, 심장이었다. 돌을 맞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왜 이리도 욱신거리는 것일까?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일까.) 전 괜찮아요, 아실…….
(제가 돌에 맞은 일 자체는 환상이겠으나 저를 향한 사람들의 공분과 격정만큼은 진실이겠지. 가장 처음 자신이 소우주의 신임을 알았던 4개월 전보다야 감정적으로 많이 안정된 상태였지만, 그건 더 다칠 곳도 없을 만큼 심하게 마모되었기 때문이었다. 깎이고 깎였던 마음 한구석이 돌멩이로 인해 다시금 푹 파인다. 아, 지독히도 아프다. 그래서 슬프다.)
일부러 숨긴 게 아니에요. 저희도 모르는 사실이었어요. 알았더라면 타이머로 나서지 않았을 텐데. 알았더라면 세상이 그들에게 삼켜지도록 두지 않았을 텐데! (아실링에게만 들릴 만큼 작았던 목소리는 점차 커져 가뭄 온 땅처럼 갈라진다. 눈물 흘리지 않았으나 흐느낌이었다.)
 
아실링 펜들레엄:(순수하게 타인을 구하고 싶어한, 어떤 사람을 알고 있다. 그가 사랑한 것들이 그를 짓눌러도 마땅히 그 무게를 견딜 사람. 그리고 나는 그 무게마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한 만큼 더 가깝게 있고 싶었고, 가깝게 있는 만큼 그 사람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고, 오늘따라 유독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환상임을 아는데도... 아프군요. 그래서 미워요. 이 사람은 환상인 당신들도 이렇게 사랑해서 아파하는데... 당신들은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신호탄이 된 양 사람들은 분노에 떠밀려 손에 쥔 무언가를 내던집니다.
 
삿대질부터 시작해 날달걀, 돌멩이, 설익은 사과, 쓰레기…….
 
퍽.
 
날달걀이 깨지는 질퍽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화면이 전환됩니다.
 
...
 
자그만 등대 안에는 나선 모양으로 계단이 쭉 뻗어 있습니다.
 
소라 껍데기처럼 둥글게 둥글게.
 
한 칸을 오를 때마다 작달 만한 창밖의 색이 바뀝니다.
 
탁 트인 바다에 밤이 내리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저는 이런 세계라도 구하고 싶어요.”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못 돼죠."
 
“왜냐하면 세계가 곧 나니까."
 
“세계를 지키는 건 결국 저 자신을 지키는 일인 거죠."
 
“그러니 인간의 기준으로 감히 내 죽음을 판단하려 들지 마세요.”
 
억양이 없는 비스듬한 목소리.
 
아실링의 모습을 빌린 신은 나지막하게 속삭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나를 죽이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전혀 폭력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아요. 그저…….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아실링 펜들레엄¿:당신 몫의 권능에 대고 명령하세요. 세계의 모든 구성으로부터 나를 지우라고.
 
새로운 스킬이 추가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 인간의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해선 안 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죄송해요. 이런 결말을 드릴 수밖에 없게 돼서. (아랫입술을 자근히 깨물었다. 코끝이 찡했다.)
 
관측되지 않는 것은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법.
 
신 또한 신앙 없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말을 걸어도 자동 응답처럼 정해진 대사만 되풀이합니다.
 
아실링 펜들레엄¿:당신 몫의 권능에 대고 명령하세요.
세계의 모든 구성으로부터 나를 지우라고.
 
어느새 등대 꼭대기에 선 아실링이 손짓하며 헬레네를 부릅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선택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리곤 지척에 다가온 순간 손을 뻗어 난간 아래로 확 밀어버립니다.
 
떨어진다.
 
중력에 멱살을 잡혀 끌려가며, 생경한 부유감과 함께 장면이 종료됩니다.
 
세 번 행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기준치: 60/30/12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기준치: 60/30/12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기준치: 60/30/12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거꾸로 역행하는 환상은 죽기 직전 본다는 주마등을 닮았습니다.
 
...
 
선언했던 휴식이 끝나고 브라운관 속으로 돌아온 사람은 대변인이 아닙니다.
 
헬레네에게는 익숙할 얼굴.
 
바로 하슬러 원수입니다.
 
거만한 태도를 지운 그는 단상을 차지한 채 사뭇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하슬러 원수: 지금 도밍게즈는 명백한 전시. 타이머는 인류의 유일한 영웅, 아니, 아군입니다.
아군을 공격해선 안 됩니다.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구분하십시오. 내부 분열은 최악의 사태를 불러들일 뿐입니다.
 
하슬러 원수의 전술을 여전히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판국에는 여론의 거센 반발을 끌어낼 뿐입니다.
 
쾅! 단상을 때린 그가 고함을 칩니다.
 
하슬러 원수: 설사 타이머가 원인이라고 할지언정 어쩌란 말인가! 그들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어. 사지에 내몰린 것은 타이머라고 예외가 아니야!
영웅이란 이름하에 누린 만큼 희생한 것을 알면서 이러다니, 파렴치해도 정도가 있지.
그래, 터진 입이라고 그리 잘 떠드니 어디 말해보게.
당신은,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연인은, 당신의 가족은 결코 시간의 선택을 받지 않으리라 자신하나?
공포에 휘둘려 헛소리들 작작 지껄이고 정신들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카메라 세례가 뚝 끊깁니다.
 
하슬러 원수가 성질을 못 이겨 단상을 걷어차는 장면이 기자회견의 마지막 컷이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DOT의 지지하에 여전히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설사 떠났더라도 돌아갈 자리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적으로 돌아선 마당에 고작 한 뼘짜리 홈그라운드가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혼자가 아니란 확신이 필요한 법이니까.
 
....
 
“아마도 이런 걸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거겠죠.”
 
“미안해요.”
 
“그래도 이번만큼은…….”
 
아이디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마지막 대사를 곱씹다가 홀연히 찾아온 깨달음을 마주합니다.
 
어쩌면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임했던 게 아닐까.
 
눈을 깜빡거리면 도로시를 쓸어간 태풍처럼 아지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입니다.
 
환각에 시달린 머리가 일순 어지럽습니다.
 
가운데 놓인 오벨리스크는 여전히 건재하나 봉헌의 명문만은 달라졌습니다.
 
모국어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언어(모국어)
기준치: 70/35/14
굴림: 40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런즉 너희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자리를 떠나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순응하는 자 축복받고 순응치 않는 자 칭찬받으리라.〉
 
모래뿐인 바닥에서 순식간에 파란 장미가 만개해 오벨리스크를, 아실링과 헬레네의 발목을 휘감습니다.
 
파랑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하늘을 메꾸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
 
 
현실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마을에서 깨어납니다.
 
사람들이 걱정했는지 침대맡은 온갖 꽃으로 덮여 있습니다.
 
방안을 훈훈하게 데운 온기와 코밑의 꽃향기.
 
머리맡에는 벚꽃 다발과 말린 과일,종이 뭉치,작은 인형부터 반짝거리는 돌멩이까지.
 
쓸모없지만 어딘가 다정한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스쳐가는 모습들. 연설하는 하슬러 원수, 카메라 세례를 쏟아붓는 기자들, 뒤바뀌는 명문. 자신의 오랜 기억 속, 아니, 또다른 평행우주의 자신에게는 자리를 지키라 하였으나 이제는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 말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가능하다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 멸망을 막아라……. 신의 죽음은 슬프지 않고 아프지 않을 것이다. 꼭, 그리 말하는 듯해서. 그 고저 없는 목소리에마저 그새 정이 들어 버렸다면 미련한 것일지도.)
(느리게 눈을 뜬다. 의식의 저편에서부터 느린 꽃향기가 스며들어 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쌓인 물건들을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면 타이머들에게는 선물을 받는 것이 일상 같았지. 쌓이는 선물들을 처리하기 곤란해 결국 받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됐던 것도 떠오른다. 이 방만큼은 그간 4개월의 시간이 없던 것 같았다.)
(벚꽃 다발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겹쳐 핀 동그란 꽃잎 사이 얇은 술이 벌어졌습니다.
 
자그맣고 분홍색이라 벚꽃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초봄에나 피는 꽃이 한겨울 병문안 선물로 가당할 리 없습니다.
 
교육 판정 혹은 자연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교육
기준치: 70/35/14
굴림: 5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매화라는 걸 알아냅니다.
 
어리석게도 가장 빨리 피어 추운 겨울을 버텨내는 꽃.
 
또 다른 이름은 봄의 전령사, 조춘 만화의 괴.
 
엄동설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화하는 기개야말로 다른 꽃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꺾인 가지인데도 달고 감미로운 향기는 여전합니다.
 
선물한 사람도, 담긴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겨울에 꽃을 구하느라 매화였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요. 이런 순간에도 깨달음은 찾아옵니다.
 
블루베리와 닮은 독과가 있었다면, 향기 옅은 꽃을 닮은 매화도 있노라고.
 
닮았어도 각기 다른 것들은 이렇게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존재는 원치 않게 태어난 목숨.
 
우연과 필연이 난도질해 수십, 수백, 수천 갈래로 찢어진 괴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
 
한낱 인간인 이상 태어날 이유도 죽는 순간도 고를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절대 침해받지 않는, 신성불가침 영역이 있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어떻게 하고 싶나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헬레네 R. 히페리데:…… 세계를 구하고 싶으신 거죠. 저희의 목적은 똑같네요.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권능을 쓸게요. 세상을 위해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을 바치려 했던 저예요. 그러니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다만…… 모두에게 잊혀지는 건, 쓸쓸할 것 같아서…… 세상을 위해 이토록 애쓰셨는데,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스러지는 게 안타깝지 않으신가요.
제가 권능을 쓰면 저마저 신을 잊어버리게 될까요?
 
아실링 펜들레엄¿:따라준다니 고마워요. 그래. 나는 현명했어요. 두 번이나 나를 깨운 이 사람이 이제는 이해가 가요. 누군가 꼭 만나야 한다면 당신이어야 한다는 게 정말 틀린 게 아니었어요.
신에게 그런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걸요. 뭐, 일단 고맙다고 해둘게요.
아마 잊겠죠. 왜요. 망각이 무서운가요? 당신이 아니라 내가 잊히는 건데?
 
헬레네 R. 히페리데:무섭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은 슬프잖아요. 하물며 자그마한 성취마저도 주변인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이들인데. 하긴, 이 또한 지극히 인간의 기준이니 신께서 보기엔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적어도 저희만은 신을 기억하고, 책에 적어 전승으로나마 남기고 싶어요. 신으로서가 아니라 어떠한 이야깃거리 속의 존재로라도…… 그것마저도 어려울까요?
 
아실링 펜들레엄¿:나한테는 당연히 이상해요. 나는 나를 위해 망각을 만든게 아니라서요. 인간을 위해 만들었지. 인간에게 망각을 필수적이에요. 상실을 잊기 위한 것이 망각이죠. 당신, 인간들은 상실을 하면 꼭 슬퍼하던 군요. 버티기는커녕 그대로 전부 놓아버리는 이들도 있었고요. 그래서 내가 망각을 만들어낸 거예요. 인간들이 상실에서 벗어나 회복할 수 있도록.
어떤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괜찮지 않나요?
나라는 존재를 다 잊어야 하는 게 조건일 텐데요? 뭐, 노력해 보세요.
 
헬레네 R. 히페리데:그렇게 보면, 또 금방 납득이 가네요. 소중한 존재를 잃는다면 가슴 한 곳이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할 테니까요. 평생 그 구멍을 떼우지 못하고 헤매이는 이들도 많지요.
…… 무슨 말씀이신지는 이해했어요. (그래도 역시 바로 권능을 쓰고 싶진 않았다. 매화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종이 뭉치를 바라본다)
 
엉성한 그림, 단정한 글씨로 적어 내린 편지, 색색의 종이학과 소원 종이가 겹쳐 있습니다.
 
자료 조사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3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 글줄에 겹친 목소리를 떠올려냅니다.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어리구먼.”
 
“도움받은 처지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가 싶지만, 힘들지는 않으신가?”
 
“목숨을 건다는 건 어느 시대건 쉬운 일이 아니니 걱정이라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영웅을 걱정하고,
 
“고마워요, 하필 게이트가 나타난 게 댐 상류라길래 걱정이 많았는데.”
 
“아침부터 욕봤소. 고생이 많구먼.”
 
“이번 신화생물도 무시무시했어요? 댐보다 커요?”
 
“다친 데는 없어요?”
 
그 마음들은 찰나가 아니라 지금도 여기 남아 있습니다.
 
“알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목숨을 걸라고 말하는 건 명령하는 처지에서도 늘 내키지 않지. 어떤 위로도 소용없겠지만, 이건 그대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별의 운명이 달렸어. 온 도밍게즈가 함께 할 거야.”
 
“저는 이런 세계라도 구하고 싶어요.”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못 돼요. 왜냐하면 세계가 곧 나니까. 세계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인 거죠. 그러니 인간의 기준으로 감히 내 죽음을 판단하려 들지 마세요.”
 
살면서 구원자가 신으로부터 났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아마 지금이 아닐까요.
 
이런 세계라도 구하고 싶다는 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반드시 동의하겠다는 것도 아니지만…….
 
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건 조금이라도 더 작아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신격을 조각 내 작은 개체로 나누었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도 외롭지는 않았어요. 내게는 둘 이상이라는 개념이 더 낯설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영원토록 나 혼자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해요.”
 
그런즉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어버려서,
 
“저는 너희의 근원이에요. 당신들은 저의 일부고. 당신들이 속절없이 끌리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고요.”
 
외로움을 하사받고 만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걸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미안해.”
 
감정을 배우지 못한, 배울 필요조차 없는 신치고는 인간다운 채도라니.
 
이제는 그 문장의 어폐를 압니다.
 
세상 만물이 신으로부터 났다면 이 마음 또한 그에게서 났을 것입니다.
 
인류가 느끼는 공포와 영웅이 느끼는 고독은 결국 같은 원점에서 태어났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온갖 마음이 담긴 종이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타이머들의 안에 이토록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데도, 결국 타이머들로 인해 세계가 공격받은 것과 다름없음에도 여전히 저에게 줄 동경과 다정, 상냥함이 남아있었다니. 돌을 맞았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그제서야, 너무도 손쉽게, 샘솟아 뺨을 타내린다.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상처받고, 사람으로 치유받으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구원받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들. 사회. 고독을 알기에 함께 맺어지려 하는 인연의 집합.)
(신은 인간이 아니나, 신으로부터 하여금 인간이 태어났으니 어찌 닮지 않았다 할까. 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이 순간 진실로 이해한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곧 잊어버릴 존재라 하더라도 저는 마지막까지 감사를 표할게요. 세계를 만들어주셔서, 외압에도 끝내 지켜주셔서, 마지막까지 버텨 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마음에 들었나요? 그래야 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지막이에요. 부탁은 들어줄 거라고 믿어요. 가세요. 가서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 것들은 당신들의 손으로 지켜주세요.
당신은 누가 뭐래도 영웅이니까.
 
헬레네 R. 히페리데:네. 저희의 손으로 꼭 지켜낼게요. 그리고 신께서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저희 세계의 영웅이세요. (희미하게 웃어보이고 종이를 잘 모아 품안에 넣는다.)
(세상을 구하고, 유지를 이어받을 때다.)
 
...
 
톡.
 
콧잔등에 차가운 감촉이 떨어집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뜨면
 
아실링 펜들레엄:어라... 눈이네요...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세상을 뒤덮습니다.
 
겨울이니 당연한 타이밍이지만, 시간이 멈춘 세계에 눈만 내리다니
 
이 얼마나……. 불가해한가요?
 
문득 주변이 어두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식이 벌어질 때처럼 사위가 어둠에 침잠합니다.
 
관찰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눈이 내리는군요. (새까만 하늘을 물끄럼 올려다보았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고개를 들면 멸망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떨어지던 건 눈송이 따위가 아니고, 벌어진 건 기상이변 같은 게 아닙니다.
 
하늘이 깨지고 있습니다.
 
차가운 조각들은 그 파편입니다.
 
“맙소사.”
 
누군가 잡아 뜯은 것처럼 길게 갈라진 하늘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고입니다.
 
무대의 뒤편 따위가 아니라 그림자라고 확신한 건, 다닥다닥 달라붙은 눈알들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또 저 눈입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시선이 타이머를 주시합니다.
 
모든 눈알이 전부, 하나 같이, 한 쌍도 빼놓지 않고!
 
지구와 도밍게즈를 잇는, 거대한 게이트의 등장입니다.
 
헬레네, 이성 판정(1/1D10).
 
헬레네 R. 히페리데:
SAN Roll
기준치: 67/33/13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수도 없이 세계를 집어삼키려 입맛 다시던 외우주의 삿된 것들이 다시금 모습을 보인다. 눈이라 여겼던 것은 부서진 세계의 조각들. 그러나 다시는 무력하게 무너지는 일 없으리.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세계를 내어주는 일도 없으리. 우리는 지켜낼 것이다. 강한 의지로 빚어진 마음을 한데 모아서.)
 
깨진 틈새로 거대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사삭, 다리 많은 벌레가 어둠을 기는 소리를 시작으로 시간을 붙잡아둔 마법이 풀리고 세계가 소란해집니다.
 
비명이 난무하고 두려움이 팽창합니다.
 
「제4차 코스모스 웨이브 발생!」
 
「제4차 코스모스 웨이브 발생!」
 
「제4차 코스모스 웨이브 발생!」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무전.
 
웨엥, 웨엥, 웨에에엥―
 
경보를 울려대는 스피커,
 
“도, 도망칩시다!”
 
“산을 내려가!”
 
“타이머는 어디에…….”
 
온갖 마디가 뒤섞인 비명.
 
모래 대신 눈이 떨어집니다.
 
위에 펼쳐진 하늘이 아래로 쏟아지는 장면은 거대한 모래시계를 연상시킵니다.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건 구원자의 숙명을 버텨낸 모든 타이머와 카운터에게 전하는 헌사.
 
결말은 오직 꽉 닫힌 해피엔딩.
 
이 이야기에 배드엔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헬레네 R. 히페리데:(제 3차 웨이브가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의 수많은 인연과 사건과 감정은 얼려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만져졌다. 순식간에 사그라든 건국 축제의 열기. 피난하는 와중에도 타이머를 향해 응원의 말을 건네던 로잘린.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격렬하던 전투, 끝내 저 대신 목숨 잃은 이.)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니 오늘도 잊혀지지 않겠지. 다만 이번에는 모든 장면이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래가 떨어지면 다시 그러모아 몸체를 뒤집으면 그만. 더 이상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아. 불필요한 희생을 내지도 않을 것이다.)
(헬레네는 떨지 않았다. 낯이 창백하지도 않았다. 침착하게 장갑을 재차 당겨 끼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칼날에 파도가 음각된 창을 쥔다. 주변으로 물방울이 회오리처럼 떠돌았다.)
아실, 저희가 신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더 이상 외우주의 신들이 이곳을 탐내지 않게 된다면, 타이머도 더 이상 기능할 일이 사라지려나요? 그러면 저희 여행을 가는 건 어때요? 제가 도밍게즈의 7구역 출신이거든요. 그곳은 건물이 대부분 하얀색이라 참 예쁘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아마 더 이상 세상에는 타이머라는 존재가 필요 없겠죠. 저희는 아마 역사 속에 기록된 마지막 타이머일 거예요. ... 그런데 저는 단순히 기록되는 건 싫어요. 글자에서 벗어나서 타이머가 아닌, 사람으로서 다시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옆에 당신이 있길 원해요. 아마 타이머로 살 때의 역사보다 저희의 이야기는 하찮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당신이 저와 함께해 주시겠다 한다면, 제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드릴게요. 저희 이야기의 첫 장은 여행으로 시작되겠네요. 좋아요. 시작은 당신의 7구역으로 가요. 그곳만큼 하얀 저희의 이야기에 당신과 저 같은 색을 남기는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역사에 기록되는 마지막 타이머라, 꽤나 멋지게 들리는걸요! 더 이상 타이머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세계의 위기가 사라졌단 뜻일 테니까요. 그럼 저희는 기꺼이 타이머의 종막을 맺을 수 있겠어요.
아주 오래 사람 아닌 소우주의 신으로서 살아왔지요. 때로 신화생물에게 먹혀지고, 신화생물을 끌어들이면서. 세계를 지키되 파괴하면서. 이제는 조금 더 평범하게 살아보아도 좋을 거예요.
아실과 함께 하는 여행이 얼마나 즐거울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세계의 파편이 유리처럼 떨어져내리는 와중에도, 헬레네의 어조는 최근 들어 가장 밝았다. 기대감과 설레임이 매화처럼 피었다. 가장 추운 계절에 피어 싸늘한 날을 버텨내는 아름다운 색의 꽃잎. 지금이 우리에게 가장 추울 때라면, 곧 이 추위도 지나고 봄이 오겠지. 매화는 지겠지만 나무뿌리는 여전히 땅에 박혀 새로이 올 계절을 기다릴 테다. 타이머로서의 헬레네는 지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헬레네는 나뭇잎이 되고 가지가 되어 새로 피어난다.)
 
아실링 펜들레엄:내가 온전히 나이고, 당신이 온전히 당신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거예요. 나침반이나 텔레미터 없이 모두 경험하기로 해요. 타이머나 카운터가 아닌 인간으로서. 기쁨도, 슬픔도 전부 함께요. 힘든 일도 분명 있겠죠. 하지만 외롭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 많은 일들을 거쳐왔음에도 이렇게 함께였으니까요.
타이머로서의 저희의 마지막 이야기를 당당하게 펼치도록 하죠! 모래바람이 덮쳐진 땅에서 저희가 푸른 장미를 피우기로 해요. 관객들과 불청객에게 제대로 보여주자고요. 여기 이곳에 당신이, 제가, 그리고 우리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어떤 신의 명을 받고, 줄곧 자리를 숙적들에게서 지키고 있었다고요.
 
...
 
“그래서 나는 죽기로 했어요.”
 
신이 죽거든 외우주가 탐낼 신격은 사라지고, 창백하고 푸른 점들은 흔한 별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안전하게 원죄를 청산할 방법이지만.
 
타이머의 안위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제군, 신을 죽일 준비는 되었나요?
 
두 사람은 겨울의 한복판에 섭니다.
 
저번 이별은 지독하게 평화로운 여름에 이루어지더니 이번 이별은 혹독하게 얼어붙은 겨울에 이루어질 작정인가 봅니다.
 
대칭이라면 끝과 끝일 연출 방식에 조금 웃음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신을 죽이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한 가닥 불안은 가슴 깊은 곳에 묻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신성을 살해하기 위해선 토대가 되는 신앙을 지워야 합니다.
 
그런즉 당신이 다스리는 권능에 명령하세요.
 
‘세계는 신을 잊으라고.’
 
헬레네가 관장하는 속성은 망각의 매개체가 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신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잔인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아프지도 않을 테지……. 슬퍼할 필요도 없다. 상실의 아픔조차 가져가주겠다지 않나. 그저, 끝까지 세계를 위하는 신에게 감사의 경례를 올리면 될 뿐.)
더 이상의 희생을 용납지 않겠습니다.
세계는 이제 신을 잊을 테니, 모든 권능이 거두어진다 하여도 아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을 높이 든다.) 오늘을 진정한 승리의 날로서 기록에 남기기 위하여, 명령하겠습니다. 이 세계에 망각의 축복을 내려주세요.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신성 살해
기준치: 80/40/16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39
 
난데없이 쏟아지는 세찬 비가 하늘을 덮는 파도가 되어 신격을 쓸어냅니다.
 
연약한 덩굴이 신의 축복을 받아 마침내 신까지 잡아둡니다.
 
그 덩굴에는 있는 것은 연약하지만, 동시에 절대 부서지지 않는 희망.
 
그리고 기적.
 
땅을 정복하고 바다를 거느리고 하늘을 다스려……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지워내면 비로소 모든 장례 행렬이 끝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세상에 맺힌 습기와 물기가 모든 신격을 머금어 삼킨다. 신격이 사라짐에 따라 부서지던 세계는 다시 아물어가겠지. 하늘에 금이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망각이 자신에게까지 물줄기를 뻗치기 전, 웃음기를 되찾은 낯으로 높은 창공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신, 당신이 만들어낸 승리. 우리가 만들어낼 승리다.)
(그러니 최후의 경례를 바친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되 두 사람은 확신합니다.
 
체내에 머물던 권능이 떠나기 시작했으니까요.
 
... 엄습했던 불안과 달리 예고된 페널티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신이 모르지만 알고있는 ‘헬레네’의 권능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때마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것도 아니었고.
 
정답은 들을 수 없겠지만, 추측하자면 신으로부터 이미 분리된 존재이기 때문이거나……
 
“그래도 이번만큼은.”
 
작은 신이 남긴 마지막 유산일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걱정과 달리 상황은 무던하게 수습됩니다.
 
아실링 펜들레엄:... 어떠신가요, 헬리?
 
헬레네 R. 히페리데:권능은 사라져가나 기억에서는 사라지지 않았군요. …… 그게 무엇보다도 기꺼워요. 함께 세상을 구해낸 존재를 잊지 않을 수 있어서요. 그리고, 아실과 함께 지낼 미래를 서둘러 꿈꾸고 싶어지네요.
 
아실링 펜들레엄: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저라는 사람이 그대로 남음을 느끼고요. 이젠 정말... 정말 끝이에요. 정말 해치웠어요.
 
「야, 그건 사망 플래그인 거 몰라?」
 
최후의 클리셰, 사망 플래그가 발동합니다.
 
「제4차 코스모스 웨이브 발생!」
 
끝나야 했던 경보가 다시 외칩니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 드리운 멸망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당신의 안에서 말라붙은 줄 알았던 권능도 딱 겨자씨 한 알만큼 남아 있습니다.
 
왜,
 
신을 죽였는데도,
 
끝나지 않지?
 
아이디어 판정
 
아실링 펜들레엄:
지능
기준치: 75/37/15
굴림: 7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헬레네 R. 히페리데: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죽은 계시가 빛의 속도로 도착합니다.
 
“여기는 그렇게 재편성된…… 일컨대 두 번째 세계야.”
 
즉, 첫 번째 세계― 원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에서는 아직 신격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입니다.
 
이 나선에 꿴 창백하고 푸른 별은 총 네 점.
 
우리 우주만 구원해서는 궤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야…….
 
생각나는 수가 없습니다.
 
블루 아버를 여는 방법이라면 알지만, 우주 저편도 아니고 평행우주입니다.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무엇 하나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좌표가 정해진 것도 경로가 기록된 것도 아닌데 권능은 바닥을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전부 끝난 줄 알았는데. 멸망을 막아낸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끈질기다니. 더 이상 창으로 이끌어낼 만한 권능도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으로 긴장감의 끈을 놓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직도 먼 모양이다.)
 
헬레네가 혼란에 빠지면 무의식이 타인의 기억을 건져 올립니다.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예언의 타이머가 원작 아실링에게 남긴 마지막 예언.
 
아실링은 그때 받은 예언과 주문으로 평행우주의 도밍게즈에 불시착했다.
 
우리는 이미 평행우주를 건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제4의 벽의 규칙을 따라 두 사람은 ‘미지수 아실링’이 사용한 주문을 습득합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아무래도……
여행을 가기까진 조금 더 오래 걸릴 것 같네요.
아실. 저는 이곳에 왔던 미지수 아실링에게 목숨을 빚졌어요. 그러니, 이번엔 제가 갚을 차례네요.
세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 이번에도 들어주실 거죠?
 
아실링 펜들레엄:빚이라뇨...?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럼 제 빚은요? 당신에게 생을 구원받은 저는요...? 왜 저에게는 기회를 주시지 않는 거예요?
그런 말씀 마세요. 나는 당신이 있는 세계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있는 세계니까. 당신이 스스로보다, 그리고 나보다 그 세계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나도 사랑한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나는 이미 아실링의 생을 구했구나. 맥이 탁 풀리는 것 같다.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와서 애써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지만 넘어갈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에요. 제가 아실링을 눈앞에서 또 잃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건 싫어요!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 수 있게 해주세요. (사실 헬레네는 이미 아실링에게 수없이 이기적으로 굴었을지도 모른다. 아실링은 언제나 헬레네만을 보았는데, 헬레네의 시선은 그 아닌 그가 포함된 더 큰 사람들, 세계로만 향해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다시 한 번 선(善)이라 포장한 날카로운 부탁을 건네고.) 원 세계의 기억을 일시적으로 잃는다 했으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거예요……. 다시 떠올리기 전까지 되돌아올게요. 어떻게든요.
 
아실링 펜들레엄:... 당신은 그때와 똑같으려는 건가요? 그때도 갑작스럽게 내 세상에 찾아와줬죠. 그리고 이제는 내 곁을 갑작스럽게 떠나려고 하고요. 마치 그때 나를 구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처럼... 이젠 정말 나와 함께 있어 주려는 줄 알았는데. 이젠 나만 바라봐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와 손바닥으로 거칠게 닦는다. 아 이렇게 또 당신을 뺏기기 싫었는데. 한참을 어린애같이 와앙 운다. 당신이, 그리고 세상이 야속해서.) ... 내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면서! 내가 이렇게 울어도 갈 거면서!
(목 위까지 울음 범벅인 숨이 차오르고 나서야 새파란 눈으로 마주한다.) 당신이 미워요... 근데 나는 그런 당신도 좋아서... 마지막으로 거짓말 한번 해줘요. 세상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정말이라고... ... 그럼 보내드릴게요.
 
헬레네 R. 히페리데:떠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떠날 수밖에 없어요. 아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어쩌면 제가 돌아와 손에 쥘지도 모르는 함께할 미래를 위해서. (그토록 의연하고 담담하던 아실링이었다. 세계가 우리를 적으로 돌려, 자신이 하염없이 무너질 때에도 곁에서 묵묵히 저를 지탱해주던 당신이었는데. 그런 아실링이 너무도 쉽게 운다. 아이처럼. …… 나 때문에.)
미안해요. 미안해요……. (실상 이 만남과 헤어짐에 우리의 책임은 한 톨도 없었는데. 신이 사라졌다고 해도, 소우주의 신으로 남은 힘마저 거의 잃었기에, 우리는 그야말로 바다에 표류하는 작은 부유물처럼 휩쓸릴 뿐이다. 미지수 아실링의 이별에 목놓아 슬퍼했던 헬레네는 이제 제가 고할 이별에 사과를 건넨다.)
사랑해요, 아실. (그런 거짓말,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어. 세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픈 짓을 해야만 한다면 몇 번이라도. 참 너무한 사람이지. 이러고서 동경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당신을 세계보다도 더 사랑해요. (세계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을 진정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거짓과 진실을 동시에 고한다.)
(아실링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췄다. 작별이 길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과 깊은 은정의 마음을 담아.)
(투명한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는 주문을 속삭인다.)
우리의 사랑은 장미처럼 피어날 거예요.
 
헬레네 R. 히페리데:(이로써 모두를 추방한다.)
 
날선 바늘의 끝은 정확히 우리를 가리켰다.
 
달칵,시곗바늘이 제자리에 돌아옵니다.
 
일정한 규칙 속 우리는 발견했다.
 
철컥,숫자들이 새로운 규칙을 따라 재배열됩니다.
 
규칙을 부수고 다시 한번 너를 만나러 갈게.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빙글.모래시계가 뒤집힙니다.
 
모래를, 섭리를, 시간을 거스르자.
 
...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뜨자…….
 
그곳은 수도였습니다.
 
푸른 하늘, 흰 길, 끈을 엮어 매단 색색의 깃발과 우산.
 
정처 없이 부유하는 풍선과 꽃가루.
 
건국 축제를 맞은 수도에는 오직 사람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틀마다 핀 새파란 장미가 외우주의 침입자를 환영합니다.
 
시계탑의 흰 벽에 새겨진 새파란 글씨가 다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세계를 두고 홀로 떠나온 수도는 공허하다.)
(시계탑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었다. 몇 번이나 휘청거렸고 넘어질 뻔했지만 끝내 멈추지는 않은 채로.)
 
〈정확히 7년째 되는 날 문이 열릴 것이오,〉
 
〈순응하지 않는 자 저주받으리라.〉
 
...
 
그 아래 나란히 선 두 사람.
 
당신이 아는 아실링.
 
꺾인 고개를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친숙한 색을 띠고 있어 퍽 그리워지고 맙니다.
 
분수대에 고인 물은 유일한 등장인물을 고스란히 비춰줍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우리.
 
아실링 펜들레엄:왜 꼭 필요한 순간이 되고 나서야 부족해지는 걸까요.
 
아실링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홀린 듯이 상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맙니다.
 
우주를 건넌 대가로 기억이 재조정됩니다.
 
확장판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원작의 기억이 물씬 밀려옵니다.
 
아,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이성이 뭉개지고…….
 
정신력 판정
 
헬레네 R. 히페리데: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추방 주문을 외는 아실링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의지를 발휘해 본 목적을 기억해내는 데 성공합니다.
 
가까이 가고 싶은 욕구, 헤어지기 싫은 설움, 무정한 신을 향한 원망.
 
원작 헬레네가 겪었을 모든 기억이 날뛰기 시작할 때
 
주머니에 든 종유석 파편이 쨍하고 빛납니다.
 
...
 
순식간에 호흡이 가라앉습니다.
 
확장판의 기억이 부상하고, 헬레네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자, 이제…….
 
아실링 펜들레엄: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이미 정해져 있었을 거예요.
내가 당신과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이게 운명이었던 거예요.
 
〈그런즉 너희는 본분을 다하라. 자리를 지키라.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아무것도 모르는 아실링의 선택지는 원작 3부에 한정됐지만
 
모든 걸 아는 헬레네의 선택지는 무한대로 확장됩니다.
 
〈그런즉 너희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자리를 떠나라.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헬레네는 아실링에게 새로운 엔딩 분기, 신성 살해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제 것이 아니나 저의 것처럼 익숙한 기억이 밀려든다. 이곳에서의 두 사람은 결국 신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결속은 강해지고 또 강해졌고, 두 편으로 세계를 찢더라도 외우주의 신들을 막을 수 없었던 거겠지.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이 평행 세계에서도 신을 망각하게끔 할 수 있다. 모든 세계에서 위협을 없앨 수 있을 테지.)
아실. (이곳의 아실도 머리가 짧구나. 이런 면은 참 닮았네. 그래도 자신이 알던 아실보다는 좀 더 성숙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선택의 길이 하나 더 남아 있어요.
신을 기억에서 지우세요. 그리한다면 신을 먹잇감으로 여기던 외우주의 신들은 더 이상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을 거예요. 우리의 별은, 우리의 두 세계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거예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능히 전부 구원해보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실링은 길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제4의 벽이 무너진 결과, 원작 아실링에게도 막연한 확신이 스미기 시작했으므로.
 
아실링 펜들레엄:내 사랑은 단절된 운명까지 피워낼 거예요.
 
모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 범우주적 구원 사역을 개시합시다.
 
그래, 우리 운명은 나선형 모래시계를 맴돌고 있었던 거야.
 
그런즉 벗어나려거든 통째로 부수는 수밖에.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며,
 
길고도 괴로웠던 영웅 서사는 드디어 종장을 덮습니다.
 
.
 
.
 
.
 
“헬리!”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타고 급박한 외침이 당신을 깨웁니다.
 
목소리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전에 거대한 탈력감과 함께 헬레네는 아실링의 품으로 고꾸라집니다.
 
당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우주의 어떤 별과도 같지 않은 색.
 
두 번째 지구의 타이머가 분명합니다.
 
아실링 펜들레엄:성공한 것 같아요. 게이트가 닫히고 있어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아실……! (눈앞에 들어찬 어느 해구보다도 깊은 푸른색에 비로소 긴장감이 풀리는 듯했다. 아실링을 와락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제가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나요?
 
아실링 펜들레엄:오래 긴요. 절대 아니.. ... 아니에요! 제가 힘들어한 시간 생각하면 엄청 길죠! (이제 더 이상 나올 일 없이 말랐다고 생각한 눈가가 다시 촉촉해진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쁜 사람이라고는 안 할게요. 당신이 돌아와 줬으니까...
 
간신히 정신을 차리면 하늘이 닫히며 희미해지는 균열과 물러가는 무수히 많은 다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의 부재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헬레네 R. 히페리데: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방금까지 거대한 슬픔에 잠겨 있던 것이 마치 거짓말 같다. 또 하나의 다른 아실링을 만나고 왔다고 하면 당신은 질투하겠지? 그러니 이건 저만의 기억으로 남겨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탓이다.)
이제는 정말로 여행 계획을 짜볼 수 있겠어요. 일단은…… 커, 커플링부터 맞춰도 좋구요…….
 
아실링 펜들레엄:헬리?? 다, 당신 지금 웃으시는 거예요? 제가 우는 게 웃기신 건가요?! (울어서 붉어진 뺨 불룩 올라왔다가 째릿 노려본다.) 나만, 나만 보고 싶었던 거죠?! (답지 않은 투정. 말은 저렇게 해도 보고 싶어서 이리 빨리 왔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몰라요! 오늘은 일단 당신이랑 쉴 거예요. 오늘만큼은 세상한테 안 뺏길 거야! (아직 힘이 남아있는지 그대로 품에 안아들어 헬레네 다리가 땅에 애매하게 닿는 상황이 되었다.) 오늘은 안 내려줄 테니 체념하세요.
 
헬레네 R. 히페리데: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요. 아실을 다시 만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저희의 세상을 지킬 수 있어서. 그래서 웃은 거랍니다.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드리고 돌아왔어요.
어머! (달랑 안긴다. 확실히 이전에 비해 살도 많이 빠지고 힘도 없어서 가볍긴 하겠지만 그건 아실링도 마찬가지일 텐데. 얼른 목덜미를 잘 끌어안았다.) 그러면 얼른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죠! 저도 아실 품 안에서 푹 자고 싶어요.
 
아실링 펜들레엄:몰라요! 미워요! (손 동그랗게 말아서 아프지 않게 툭툭 친다.) .... 그렇지만 좋아요. 당신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이야.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으나, 피로와 과격한 감정 때문에 잠시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다.)
제 힘이 예전 같지 않아서 가는 데 좀 걸리겠지만 참으세요. 투정 부리기 없어요. 오늘은 정말 안 떼낼 거니까요. 씻고, 옷만 갈아입고 그대로 바로 침대. 약속. 그리고... 좀 자고 나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우리 여행이랑 커플링에 관한 것이요.
 
이제 더는 영웅이 될 수 없겠죠.
 
세계를 구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잊은 인류가 당신의 공헌을 기억할지도 장담할 수 없지만.
 
……막연히 괜찮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한낱 인간이더라도.
 
나의 타이머,
 
나의 파트너,
 
나의 운명,
 
나의 세계.
 
외로울 때 손을 잡아줄 당신이 있으니까.
 
이곳의 설산에도 은매화가 만개합니다. 죽은 자가 두 영웅에게 보내는 꽃다발입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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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생환. 아실링 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