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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240809] 루드베키아&아이린 - 안티고네는 순응하지 않는다

* 렌님

 

플레이타임 : 약 8시간

 

 

 
소낙비가 옵니다.
 
새벽은 황록이오, 부닥치는 비명은 우울합니다.
 
사회의 규범과 위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처절하다고,
 
당신은 쏟아지는 빗물 너머로 한 폭의 지옥도를 보고 있습니다.
 
오물 옆에 늘어진 것은 몇 구의 시체,
 
엉켜 구르고 죽이고 욕설하는 것은 광자들의 집단.
 
거멓게 죽은 채 난투를 구경하는 눈동자 뒤로는 숨죽여 우는 아이가 하나, 둘, ……
 
…….
 
우리는 사회를 새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19세기 런던.
 
사회는 이제 보이는 만상이 곧 졸작인 세상이오,
 
이 새벽은 거동 가능한 생존자가 광인의 수를 이길 시각까지 그치지 않을 진부한 신파이리니.
 
?:…―정말 지겨운 연극이야.
 
창틀 위로 턱을 괸 여자가 조용히 중얼거립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던 이들이 해가 지면 모두 숨을 죽여요.
바깥은 완전히 불 꺼진 극장이나 다름없고요.
미친 자는 배우가 되고 미칠 자는 관객이 되고, 그렇게 이 지겨운 신파를 이어가니 인생이 연극과 다를 일이 무엇 있겠나요. 그러니 극장에 갈 일이 없겠죠.
그래서 나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실성하거나 죽을 상황이라면 오히려 한 번쯤은 제대로 된 극을 보는 편이 더 좋지 않겠어요?
나는 새벽마다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아, 당신은 몸을 틀고 웃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비에 푹 젖은 꼴로 찾아온 옆방의 하숙인.
 
팔뚝에서는 흉터가 꿈틀거리고 손가락 사이로는 티켓 두 장을 끼운 여자,
 
루드베키아 히르타.
 
인륜마저 저버린 이 신파극도 오늘로 어느덧 개막 달포 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미친 자와 미칠 자만 남은 이 멸절할 세상에서,
 
그가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 나랑 연극 한 편 보러 가지 않을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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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7th fan-made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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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도 런던은 소낙비가 옵니다.
 
새벽은 황록이오, 부닥치는 비명은 우울하메,
 
사회 규범과 위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물 옆으로 늘어진 시체, 구르고 죽이고 욕설하는 광인들, 죽은 눈동자, 우는 아이.
 
만상이 처절하고 식상한…,
 
그래요, 사흘 전의 그 여자를 떠올리기 좋은 장면입니다,
 
멸절할 세상을 뒤에 두고 연극 티켓을 내밀던 여자.
 
그때 여자는 웃고 있었던가?
 
아니면 울고 있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다만 여전히 쏟아지는 빗물 너머로 한 폭의 지옥도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알고 있지 않던가요.
 
미치지 않은 런던의 사람 대부분은 당신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지팡이를 짚은 신사든 페티코트를 입은 숙녀든.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일과라고는 각자의 낮을 살다 한밤이 오면 뜬눈으로 밖을 쳐다보는 것,
 
그리고 날이 밝고 나서야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쪽잠에 드는 것 정도가 고작이지요.
 
모든 것은 달포 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유행하기 시작한 광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도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광병은 도시 어디에나 있으리,
 
그래서 이런 우리들도 어디에나 있게 되었습니다.
 
방문 너머도 예외는 아닙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립니다.
 
문을 열어볼까요?
 
아이린 테라코르:(런던에 언제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광증으로 가득해진 이 도시를 더욱 음산하고 어둡게 보이게끔 만든다. 창가에 기대어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느리게 움직여 문가를 돌아보았다.) …… 누구?
 
알렉사 벤:아이린! 나예요!
 
이 목소리는 하숙 치는 여자입니다.
 
이름은 알렉사 벤, 매번 이 시간이면 찾아오고는 하였었지요.
 
아이린 테라코르:(익숙한 목소리를 듣고는 문을 연다.) 알렉사. 당신이군요.
 
알렉사 벤:역시 일어나 있었군요! 물론 예상이야 했다고는 해도 참…… 요즘에는 잠을 못 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니까요.
자,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오늘 자 신문이에요. 배달부가 현관문 아래에 끼우고 가려는 걸 마침 내가 딱 봐 버렸지 뭐예요? 부지런하기도 해라! 사람이 잠을 좀 덜 잔다고 아침마저 빨라지는 건 아닐 텐데 말이죠.
듣자 하니 오늘은 꽤 괜찮은 소식이 실렸다고 하더라고요? 한번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정보 하나하나가 특히 귀하잖아요.
그럼 필요한 게 있을 때 불러요!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친 알렉사 벤은 덥석 신문을 품에 안겨 주고 인사합니다.
 
자리를 비키는 뒷모습에는 미련일랑 없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혼자 대화를 끝내주면 이쪽이야 좋다. 원래부터 사람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나 이 시국에 만나는 이들이란 피로만 가져다줄 뿐이었으므로.)
(저 역시 고맙다거나 잘 가라는 인사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다시 문을 닫았다. 침대에 앉아 신문을 펼쳐본다. 쓸만한 소식이 있어야 할 텐데. 언제까지나 이 광인들만 가득한 런던에서 지내고 싶진 않다.)
 
당신은 일련의 소동처럼 지나간 시간 속에서 벗어나 가만 문을 닫습니다.
 
알렉사 벤이 안겨준 신문은 비오는 날 배부된 것치고는 상태가 상당히 좋습니다.
 
아, 당신은 이 신문을 알고 있습니다.
 
분명 적당히 잘 알려진 신문사의 일간지였지요.
 
신문사 이름 아래로 ‘광병의 새로운 특질 발견’이라는 표제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습니다.
 
알렉사 벤이 말한 꽤 괜찮은 소식이라 함은 이 특질에 대한 이야기일 지 모릅니다.
 
뒷장에는 유행하는 복식, 최근 흥행 중인 연극, 경조사 따위를 다룬 기사들과 각종 가십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시기에도 유행하는 복식이나 연극 같은 게 있구나)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최하단 오른편에서 런던 시립 병원의 사진을 발견합니다.
 
사진은 크기가 작고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아래로 현재 제2 격리 병동까지 광인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부연 설명이 달려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구부러진 흉터……? (고개를 기울인다. 모든 환자들이 갖고 있는 거라면 기억해두는 게 좋겠지.)
(다음 장도 넘겨본다)
 
아이린 테라코르:(연극에 관한 기사를 읽자니 자연히 사흘 전이 떠오른다. 루드베키아 히르타가 내밀었던 그 티켓, 이 연극이었을까.)
 
그렇습니다.
 
신문을 읽다 보면 불현듯 심심한 의문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떠오른 질문인즉,
 
오늘 보게 될 연극의 제목은 무엇이었던가?
 
내용이나 대중들의 평가는?
 
상연 시간과 장소는?
 
……
 
당신은 결국 어떤 이유에서든지 당신이 받은 티켓을 유의해 살피거나 잘 챙겨 둔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겠지요.
 
어차피 챙겨야 하는 물건인 만큼 겸사겸사 약속 시간이 아직 닥치지 않은 때 미리 찾아 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사실 그거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는데. 있을지 모르겠네. 일어나서 주섬주섬 방 안을 뒤져본다.)
 
진심이든 아니든 이미 여자는 티켓을 당신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당신이 머무르는 런던의 작은 공간을 둘러보는 것이 고작일 터입니다.
 
자, 고개를 들어 한번 살펴봅시다.
 
무엇이 보이던가요.
 
창가, 탁상, 그리고 침대가 보이는 것의 전부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탁상부터 보자~)
 
가로로 길쭉한 목재 책상은 당신이 이곳에서 하숙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가구 중 하나입니다.
 
상판 위, 왼쪽 구석으로는 촛대가 올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당신이 자주 읽는 책, 거리에서 얻은 찌라시, 그리고 그 외의 각종 서류와 편지들이 적당히 쌓여 있습니다.
 
바로 아래쪽에 붙은 단칸 서랍이나 탁상과 하나로 구성된 작은 책꽂이도 제법 티켓을 놓아 두었을 법해 보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서랍 열어봄. 뭔가 둔다면 여기일 것 같긴 한데.)
 
서랍은 앞으로 당겨서 여는 구조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기준치: 50/25/10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안에는 당신이 사용하는 만년필, 잉크병, 우표, 편지 따위가 한데 모여 있으나 탁상 위와 마찬가지로 티켓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럼 책꽂이를 본다)
 
책상 우측과 연결된 작은 책꽂이입니다.
 
칸의 반절은 이전 방 주인이 가지고 가지 않은 책으로 차 있고, 책을 꽂고 남은 공간 위로는 무심코 올려 둔 책갈피와 카드 몇 장이 보입니다.
 
꽂힌 책들 틈새에 작은 쪽지가 밀려 들어가는 경우야 종종 있는 일 아니던가요.
 
운이 좋다면 여기서 티켓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좁게 몸을 부대끼는 책등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작은 종잇장을 목격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확인을 해 보았으나……
 
유감스럽게도 티켓은 아닙니다.
 
종이는 반으로 잘 접혀 있고, 감안하고 볼 때 일반적인 책 내지와 겹쳐지는 정도의 크기가 됩니다.
 
꽂혀 있는 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게 있었나? (집어서 펼쳐본다)
 
종이 위에는 간단한 가계도가 그려져 있으며, 보아하니 어느 그리스 신화의 주요 인물 관계에 대한 도식입니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슬하에 딸인 안티고네, 이스메네와 아들인 에테오클레스 그리고 폴리네이케스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수적으로 오이디푸스의 죽음 후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그의 처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교육 판정을 해볼까요?
 
아이린 테라코르:
교육
기준치: 75/37/15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은 오이디푸스가 갓 태어났을 적 버려져 구조될 때까지 나무에 거꾸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부어오른 발’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내가 보러 간다는 연극도 안티고네 및 부어오른 발과 관련된 내용이었지. 하필 이 내용이 적힌 종이가 삐져나와 있다니 우연찮은 일이다.)
(탁상 위에 또다른 볼만한 건 없을까)
 
상판 위에 올려진 종이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둔 모퉁이를 제외하고는 딱히 살펴볼 것이 없어보이지만 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종이 무더기를 슥슥 뒤져본다. 티켓이 이런 데 껴있으면 귀찮아진다니까.)
 
당신은 쌓아놓은 더미를 들춰봅니다.
 
개봉이 누락되었던 편지 한 통을 발견합니다.
 
겉봉에는 정확한 발신인과 수신인 성명 대신 알렉사 벤의 집 주소가 수기로 적혀 있고, 더 찾아보아도 티켓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편지 봉투를 개봉하면 간결하고 짤막한 문장을 몇 줄 읽을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주인을 잘못 찾아온 것 같으나…….
 
아이린 테라코르:(연극의 반응? 원조자? 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단어인 걸 보니, 다른 편지를 전달해줄 때 잘못 끼어들어온 모양이다. 연극을 먼저 보자고 한 건 루드베키아니, 혹 그에게 갈 편지였을까.)
(물어보기나 하기로 하고 편지를 챙긴다. 다음 창가로 가본다.)
 
당신은 다시 삼 일 전, 그 여자-루드베키아가 있었던 위치를 밟고 섭니다.
 
창가는 종전과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바깥은 비도 옅어지고 날도 완연하게 밝아서 이제는 투과된 볕이 비를 뚫고 얼굴 위로 비쳐드는 느낌을 충분히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유리창의 바깥면에는 물 자국이 붙어 있고, 창틀 가쪽으로는 작은 화분이 두어 개 놓여 있습니다.
 
화분에 심긴 식물은 곳곳 잎 끝이 노랗게 바래 버렸고……
 
그러고 보면 문득 그 여자가 방을 떠나기 직전까지 창틀 위에서 팔을 떼어 놓지 않았던 것도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비교적 가까이 놓여 있는 화분 밑에서 티켓 대신 말라비틀어진 죽은 잎과 모서리만 드러난 작은 카드 한 장을 찾아냅니다.
 
카드는 명함의 형식으로 빗물에 글자가 뭉그러져 주인의 이름 정도만 겨우 식별할 수 있습니다.
 
「Andrizo Mai」
 
아이린 테라코르:(루드베키아가 놓고 간 건가? 카드를 물끄럼 바라본다. 이 이름, 들어본 적 있는 걸까?)
 
 
당신이 예술에 일가견이 있다면 예술(공예) 판정을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없다 그런거)
(지나가자)
 
당신이 모르는 정보였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창밖의 물자국을 물끄럼 본다. 눈에 띄는 게 있을지)
 
그 여자가 알고 있는 인물일지도 모르겠지요.
 
창 밖의 물자국을 바라보아도 크게 눈에 띄는 것이 없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창가도 다 본 것 같으니 침대로 가본다)
 
여전히 세상은 소란스럽고 마치 한 폭의 지옥도를 바라보는 것만 같습니다.
 
체형에 적당히 들어맞는 침상입니다.
 
달포 전에 비해 사용감이 없고 이불이며 베개며 모두 습기를 흠뻑 먹어 녹녹합니다.
 
상체를 숙이고 침대 밑을 살펴볼 경우 팔의 사정거리권에 얇고 거뭇한 형체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물건의 정체는 광병에 대한 온갖 가설이 적힌 전단지입니다.
 
모든 재앙은 한 인격신의 분노에서 비롯했고 이 사태는 곧 타락한 인간에 대한 형벌이다.
 
필자는 장황한 주장과 함께 필연적인 인류의 절멸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전단지 외의 것은 더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헛소리나 늘어놓는 데에 종이를 낭비하다니, 나무가 아깝구나.)
(전단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나저나 티켓은 결국 못 찾았네. 어디 있지?)
 
~ 19세기 런던에서 함께 하는 나무야 미안해 ~
 
갖은 허탕과 함께 잠시 허리를 폅니다.
 
움직이던 걸 멈추고 있노라면
 
어느덧 태양 빛이 방안으로 환하게 들어차고 시곗바늘이 규칙적으로 재깍거리는 순간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음울한 상황에서는 달에 한 번도 얻기 어려운 드물고 억겁같은 인식입니다.
 
그리고 한결 밝아진 이 느린 정경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당신은 그제서야 카펫 위에 삼분지 이쯤 걸쳐진 연극 티켓을 발견하게 됩니다.
 
탁상 인근인 걸로 보아 아무래도 잘못 떨어진 모양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방 안을 가득 채우는 햇빛이 얼마나 간만인지.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방은 사람을 다소 감상적으로 만든다. 그 감상 속에서, 찾던 물건이 마침 눈에 띈다.) 이걸 못 봤다니. (작게 중얼이며 허리를 숙여 티켓을 집어들었다.)
 
당신은 티켓을 읽어봅니다.
 
오늘 볼 연극은 저녁 여섯 시 경 런던 소극장에서 상연하는 「테바이의 비극」입니다.
 
적당히 관람하기 좋은 위치의 좌석 번호와 기본적인 주의사항이 제목 아래로 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티켓을 챙기고 나면 어느덧 시계 시침도 사람들이 바깥 활동에 몰두하는 시각에 당도하게 됩니다.
 
오늘은 저녁 때를 제외하고서는 완전히 일정이 비는 날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잠시 고민을 하다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쓴다. 런던의 정세는 어떻고, 자신은 요새 어떻게 지내며, 근시일 내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을 간결하게 적어내렸다. 그리고 편지를 부칠 겸, 산책도 할 겸 바깥으로 나섰다.)
 
자, 오늘의 외출이 결정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1층을 지나가야만 합니다.
 
하숙인들의 방은 모두 2층에 배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방을 나섭니다.
 
길쭉하게 늘어진 복도, 바닥에 어린 엷은 물 자국과 눅눅한 집 냄새
 
그리고 마주 보는 벽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이 곧장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같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이며, 그중에서도 당신 바로 앞에 걸린 액자는 순간 섬찟할 만큼 풍기는 분위기가 음산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집주인 센스 진짜 없네)
 
알렉사 벤의 취향일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유령 나오는 거 아닌가 싶다.)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당신은 그림 구석에서 작게 휘갈긴 글씨를 찾아냅니다.
 
무어, 당신이 원한다면 감정을 통해서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을터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음? (어째 익숙한 철자인데. 아까 방의 명함에 적혀 있던 이름 아닌가?)
 
혹은 예술(공예)라거나요.
 
아이린 테라코르:
감정
기준치: 55/27/11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기껏해야 그린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그림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행깎하겠습니다)
 
행운 1 감소하겠습니다.
 
......
 
얼핏 보기에는 단순히 색이 어두운 그림에 불과합니다.
 
다만 시간을 들여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점점 불길하고 삿된 기운이 그림 주변으로 퍼져나오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SAN Roll
기준치: 45/22/9
굴림: 98
판정결과: 대실패
 
SAN -1
 
아이린 테라코르:(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방을 빼야지……)
(불쾌한 액자 앞을 얼른 지나간다)
 
어쨌든, 불쾌한 감이 없지 않은 그림으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리고 나면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1층에서는 알렉사 벤과 그 여자가 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여자, 당신에게 티켓을 준 루드베키아 히르타 말입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곤란하시다니 별 수 없군요. 다만 벤, 당신께서는 꽤 흥미로워하실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을까요?
 
알렉사 벤:글쎄요, 상영하는 내용을 떠나서 더 이상 고상한 취미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잖아요? 연극 관람이란 게 말이에요. 위험하기도 하고, ……요즘에는 특히 더 그렇죠.
 
루드베키아 히르타:물론 그 부분은 저도 유감이지만. 그래도 병으로 인한 부분만 제한다면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답니다. 모쪼록 생각이 바뀌신다면 부디 꼭 알려 주세요. 저는 언제든…….
 
들리는 바로 미루어 보자니 대화는 이미 막바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여자는 호의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고, 알렉사 벤은 열어 두었던 피아노 뚜껑을 슬슬 닫으며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당신은 자리를 파하는 부산스러움에 새삼 그들이 있던 자리를 인식한다면,
 
그 모습들에서부터 알렉사 벤이 대화 전에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한 흐름은 아닙니다.
 
피아노 실력에 대한 찬양이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빈번하였지 않던가요.
 
또 산업혁명 이후로 피아노 연주와 연습은 곧 중산층 여성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자 취미가 되어 버렸지요.
 
……
 
아, 어쩌면 당신은 여기서 문득 한 가지 물음에 도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 여자도 피아노를 칠 줄 아나?
 
그리고 생각하기 무섭게 곧 그녀와 시선이 맞닿습니다.
 
여자는 그제서야 당신을 발견했다는 양 멀뚱히 눈을 껌뻑이다가 천천히 말을 걸어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아이린, 내려온 줄 몰랐어요. 외출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이린 테라코르:(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인사한다.) 안녕, 루드베키아. 편지를 부칠 일이 있어서. 알렉사에게도 연극을 권하고 있던 참이었니?
 
루드베키아 히르타:이런 세상이라 한들 소중한 여유를 누리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권리이니까요. 그라면 이 연극을 마음에 들어할 줄 알았는데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아쉽네요.
 
아이린 테라코르:네가 연극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묘한 표정으로 보다가, 방에서 주웠던 편지를 꺼내 내민다.) 잘못 온 것 같던데 혹시 네 거니?
 
루드베키아 히르타:(아이린, 하고 네 이름을 가만 부른다. 조용히 미소지으며 살며시 고개를 숙인다.) 인간의 삶이 비록 연극과도 같다 하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로서 예술을 등질 수는 없어요.
(편지를 건네받고는 봉투의 글씨를 읽는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었을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요새 힘들었겠어. 연극을 보러 나갈 만한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잖니. 낮에는 쉬느라, 밤에는 광인을 경계하느라 바빴지. (무덤덤하게 말하곤) 내게 온 건가 싶어서 읽어봤어. 네 것이 맞니?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구나.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루드베키아 히르타:나는 언제나 그랬어요. (말간 보랏빛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느샌가 당신에게 다가가 웃어보인다.) 당신이 일부러 그러지 않았음을 알아요. 때로는 이런 우연에서 시작하는 일도 있는 법이죠.
당신도 편지를 부치러 간다고 하였던가요?
 
아이린 테라코르:(연극의 원조자라는 건 그럼 루드베키아가 맞는 건가? 더 묻고 싶었지만, 남에게 온 편지 내용을 이 이상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닐 듯해 침묵하기로 했다.) 응. 너도 우체국에 갈 일이 있니?
 
루드베키아 히르타:글쎄요. (가만 웃고는) 나는 지금은 일이 없답니다. 아이린, 약속은 잊지 않았죠?
늦지 않게 돌아와요. 다닐 때 조심하고요.
 
아이린 테라코르: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지. 연극을 보러 가기로 한 건 기억하고 있어. 조금 있다 보자꾸나.
 
당신은 곧 여자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대문 밖으로 나섭니다.
 
소낙비는 어느덧 그친 모양입니다.
 
이제 떨어지는 빗방울이라고는 몇몇 건물 차양에 매달려 있던 미약한 것들뿐,
 
비가 멎은 직후면 으레 생기는 습하고 차가운 공기는 기다렸다는 듯 뻑뻑하게 폐부로 들어찹니다.
 
거리를 채운 사람들은 모두 어떤 깊은 불안과 우울감에 절어 있으며,
 
끝없이 돌아가는 눈알들은 주변에 대한 불신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입니다.
 
그 울렁거림 사이에 섞여 걷고 있노라면 어쩐지 당신마저 이윽고 정확한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불길함에 수몰될 것만 같아집니다.
 
아주 본능적인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가던 장신의 남자가 돌연 눈을 희번덕거리며 돌아섭니다.
 
초점을 잃은 흉흉한 동공은 도무지 제정신인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상의고 하의고 할 것 없이 차림새가 엉망인 데다 표정은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눈 아래로는 커다란 흉터가 움질거립니다.
 
살갗 위를 기는 것 같은 모습은 언뜻 징그럽고 어쩐지 당신의 이목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느낌을 줍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SAN Roll
기준치: 44/22/8
굴림: 55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남자는 흉흉한 얼굴로 당신을 한참 노려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저 흉터……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도 눈가의 흉터는 선명하게 들어온다. 역시, 낮이라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이윽고 해석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당신에게 덤벼듭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기준치: 49/24/9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에게 덤벼드는 남자를 바라보노라면 머지않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온 그 남자는 그야말로 악의만 남은 자동 인형 같습니다.
 
누가 말을 걸든 살이 쓸리든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주변을 전혀 살펴보지 않는 점이 특히 그렇지요.
 
어쩌면 광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이 남자와 같은 상태인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새벽마다 벌어지는 이 난투극들도 아주 괴이한 일은 아닐 것일테고…….
 
의구심에 가까운 생각들을 확장하다 보면 불현듯 단단한 팔 한 짝이 당신과 남자 사이를 가르고 들어옵니다.
 
경찰입니다.
 
경찰들은 당신과 남자를 분리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상황을 정리합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해 온 손들은 모두 기계적이고 또 정확합니다만,
 
얼굴에서는 하나같이 전부 감추지 못한 지긋지긋함과 피곤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제압당하는 남자와 우악스러운 몸부림,
 
흩어지는 군중과 음울한 경찰들의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광경이 괜히 기묘합니다.
 
그러나 남 일 같던 감상도 잠시일 뿐입니다.
 
남자의 제압을 마친 경찰이 곧 당신에게 다가와 동행을 요청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남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길에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제안입니다.
 
다친 곳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여 남자의 병이 전이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충격을 받았다면 병원에 머무르고 있는 닐 박사가 적절한 조언을 해 줄 것이고, 하며 덧붙이는 말이 깁니다.
 
외운 듯 흘러나오는 어투로 보아하니 형식적인 지침인 듯싶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편지 한 번 부치러 가기 험난하구나…… 군데군데 찢어진 드레스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쉰다. 아끼는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지.)
(대체 어떤 경위로 이런 광증이 나타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제압된 남자처럼 자동 인형 같은 꼴이 되는 건 사양이다.) 함께 가죠.
 
당신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들과 함께 런던 시립 병원으로 이동합니다.
 
.
 
.
 
여기 광병이 창궐하기 이전에 한 번이라도 병원을 방문한 바 있는 사람이라면 곧장 알아차릴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이질적이기로는 이 거대한 병원도 옆의 미친 남자와 초췌한 경찰 그리고 삐걱삐걱 굴러가는 우리 사회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신 역시 그 이상한 분위기를 즉각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고 보자니 병원은 제2 격리 병동을 기준으로 좌우 건물을 둘러싼 분위기가 아주 판이합니다.
 
마치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처럼…….
 
아, 당신은 신문을 읽었으니 알겠지요.
 
그 이유가 제1, 제2 동에 격리된 환자들 때문임을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경찰은 당신과 남자를 이끌고 제1 병동으로 향합니다.
 
병동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긴 복도에 늘어선 방 한 칸 한 칸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중얼거림과 우짖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속 절차를 마친 경찰들은 남자를 빈방에 수감하듯 밀어 넣은 후 당신을 가장 깊숙한 방으로 안내합니다.
 
그러면 이미 그 방에 있던 비쩍 마른 남자 둘 중 하나가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상황을 설명한 경찰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일련의 동작이 이어집니다.
 
짧은 침묵이 감돕니다.
 
그동안 남자는 연신 다른 남자 쪽을 힐긋거리다 곧 정중한 투로 당신에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닐 박사:오시는 길에 이름 정도는 들으셨겠지만, 아이작 닐입니다. 이쪽은 존 모어 씨고요. 유명 인사시죠. 병 연구를 위해 간호인 대신 제가 종종 함께 있고는 하는데, 며칠 전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시는 순간이 갑자기 늘어서…
그만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지 뭡니까. 모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아마 큰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흉터 유무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전이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고들 하지요. 주로 얼굴이나 손, 팔 따위에 생기고, 꿈틀거리거나 기어 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불쾌한 기분을 유발합니다만…… 며칠에 걸쳐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말입니다. 다만 충격을 받으셨다면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고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왕 오셨으니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편히 질문하십시오.
 
아이린 테라코르:(병원은 런던의 우울한 분위기를 집약해둔 결정체 같다. 감옥처럼 가두어진 사람들. 빈방으로 밀어넣어지는 또 한 명의 사람. 작은 한숨을 내쉬며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존 모어라는 사람은 환자인 건가? 안심이 되지 않는걸. 최대한 문가에 가까이 섰다.)
치료법은 찾지 못했나요?
 
닐 박사:찾지 못했냐고요? 방법은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어요. 분명 찾을 터이지요!
다만 이 병의 발단을 포함하여 흉터에 의해 전염이 이루어질 확률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존 모어 씨가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을 보이지만 않으셨다면 연구는 분명 어제보다 진전이 있었을 겁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아직 못 찾았단 뜻이군.) 이 사람에게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요? 일반 환자인 줄 알았는데.
 
닐 박사:이 치는 일반 환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이 광병의 초기 발병자들은 모두 이 쪽, 존 모어 씨와 연관이 되어있지요.
특히나 하나같이 사회의 고위계층에 속하는 귀족 나으리들 뿐이시니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 일이 아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가씨께서는 (당신을 한번 바라보다 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무사하신가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귀족……? 왜 하필 그들에게…… 특정한 연관점이라도 있나요? (이는 또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인다.)
(마찬가지로 제 팔을 흘끗 내려다봤다.) 한 번 흉터가 생기고 나면,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며칠 정도 걸리는지 아시나요?
 
닐 박사: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들과 여기 존 모어 씨의 연관점을 찾고자 알게 된 것은 그저 이 존 모어 씨께서 예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 뿐이었지요. 어찌, 아가씨께서는 예술에 일가견이 있으십니까?
증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사흘이 걸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름이 걸리는 이도 있습니다. 무엇이 흉터를 전염시키는지 알아내지는 못하였으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이렇게 꿈틀거리는 흉터가 있는 자는 누렇게 살이 퇴색된다는 점 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또 예술인가? 사흘 전 루드베키아와 조우한 이후로 갑작스럽게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 귀족들이 초기 발병자고, 존 모어와 연관이 되어있는 거라면…… 귀족들이나 즐길 만한 고아한 예술을 관람하다가 시작이 된 건 아닌가? 갑자기, 오늘 연극을 보러 가도 되는 건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번 문답을 주고받고 있노라면 언젠가부터 자꾸 잡음처럼 끼어드는 작고 쉰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존 모어의 입술이 달싹거리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그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 할리 호수에서 올라온 괴이한 생물들이 모두 그를 섬긴단 말이야! 그 이상한 호수 바닥에는 잔뜩 부풀고 흐늘거리는 시체 더미가 쌓여 있었어,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분명히 그를 섬기는 자가 작품을 판 거야. 그리고 내가 그걸 ……”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존 모어의 흰자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잔뜩 충혈되어 있습니다.
 
눈두덩이는 움푹 패어 버렸고 이불자락을 붙든 손가락은 살가죽만 남아 마디가 다 두드러졌으며 상체는 바짝 수축된 채로 부들부들 떨리기만 합니다.
 
딱 두려워하는 자의 전형적인 자세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휑하고 폐쇄적이고 음산한 납색 병실…….
 
뒷배경과 맞물리며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뭇 불안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남자의 격앙된 목소리와 간헐적인 입술의 우물거림은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이목을 집중시켜
 
결국 닐 박사의 고개도 천천히 그쪽으로 돌아갑니다.
 
…그 순간 박사가 보인 표정이란!
 
남자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집요한 학구열,
 
어떤 절박함,
 
또는 실마리를 잡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
 
이대로라면 귀에 대고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텝니다.
 
이쯤에서 물러나 주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만약 저 광증에 전염된다면 나도 저런 꼴이 되는 건가? 그것만은 사양이다. 박사의 표정은 또한 자신이 돌보는 환자와 별 다를 것 없는 광인처럼 보여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
 
..
 
병원을 나오면 시립 병원 바깥은 여전히 바지런하게 그리고 조금은 고리타분하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거리는 우울하고 식은 공기는 아찔하며 끝없이 돌아가는 눈알들은 불신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모두가 똑같이 바쁜 구둣발을 굴리고 있기도 합니다.
 
종전의 소동이 없던 것처럼 등 뒤의 병동이 없는 것처럼,
 
무엇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박사의 동공 탓일까,
 
어쩐지 부질없을망정 저 바쁜 구둣발들마저 전부 새삼스러운 발악이고 노력인 듯싶습니다.
 
생각을 환기하고자 머리를 젖히면 건너편에는 장대한 도서관이 우뚝 서 있습니다.
 
넓고 각진 건물은 그 외벽에서부터 무수한 장서량을 짐작케 하고,
 
가만히 그 정도를 점쳐 보고 있노라면 문득 당신은 통상적인 진리 몇 가지를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연극 관람은 줄거리를 아는 편이 더 즐겁다거나,
 
대부분의 유용한 이야기들은 보통 도서관으로 모인다거나,
 
질병이 팽배할 때에는 정보가 참 중요하다거나.
 
…….
 
도서관은 쥐 죽은 듯 조용합니다.
 
책이야 애당초 시끄러울 일이 없다지만,
 
유독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손에 든 책에 머리를 박느라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구석 벽에는 경찰들이 붙어 서 있고…….
 
잘못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원하는 정보에 따라 자료를 수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용한 이야기를 찾는다면 잡지 진열대, 연극 줄거리를 알아본다면 문학 칸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아이린 테라코르:(질병에 관한 최신 이야기는 잡지에서 많이 다루고 있겠지. 잡지 진열대로 향했다.)
 
진열대 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다양한 잡지들이 쌓여 있습니다.
 
예술, 정치, 시사, 사교…….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들은 이런 내용입니다.
 
해당 페이지의 끝자락에는 젊은 남자의 흑백 흉상 사진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고 있지만, 그닥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닙니다.
 
조금 지친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안드리조 마이. 다사 이 이름을 보게 되는구나. 생각보다도 더 유명한 예술가였네. 하지만 여기엔 석조각가라고 나와 있는데, 알렉사의 집에는 그림이 걸려 있지 않았던가? 조각가와 화가를 겸업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건가.)
(남자의 사진을 물끄럼 들여다보다 잡지를 몇 장 넘겼다. 흐으음. 연극을 보러가려고 했을 때 계속 이런 소식들이 보이면, 약속을 취소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단 말이지. 루드베키아와 초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원조자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도 이런 무리들 중 하나일지 모르지. 의심은 냉정한 갈퀴처럼 뻗는다. 이번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판단을 다시 내려야겠어.)
(문학 칸으로 가본다. 제목만 보면 평범하게 그리스 신화를 다룬 것 같았는데.)
 
문학 칸에는 주로 유명 극작가들의 희곡이나 시, 소네트 등을 정리한 책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수요가 많은 부류인 탓에 대부분은 상하고 떨어진 자국이 상당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빽빽하게 끼인 책들 사이에서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를 번역해 소설로 다듬은 도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자료조사
기준치: 70/35/14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어느덧 저물어 가는 볕이 도서관 창을 타고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늘은 흐릿하고, 햇살의 뭉근한 열기가 뺨으로 가닿고, 주변은 더없이 적막하고……,
 
……그리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이 먹먹하게 울려 퍼집니다.
 
현재 시각은 네 시 반…….
 
그 여자, 루드베키아 히르타와의 약속 시간도 임박해 갑니다.
 
우체국에 들러 편지를 보낸다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자,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이 내용을 그대로 연극으로 옮긴 거라면, 잡지의 묘사처럼 괴이하고 파괴적인 내용은 없을 것 같지만 앞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덮어두고 우체국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광인과의 뜻하지 않은 마찰 때문에 옷이 군데군데 찢어졌으니 갈아입을 필요도 있고.)
 
*
 
아이린 테라코르:
기준치: 49/24/9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요.
 
다시 19세기 런던으로 떠날 준비는 되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가보자고)
 
아아, 잠시 후 안티고네는 순응하지 않는다 2막이 시작됩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착석 바랍니다.
 
*
 
알렉사 벤의 하숙집으로 돌아가면,
 
그 여자 역시 자신의 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당신 옆방의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우뚝 선 여자가 보입니다.
 
불 꺼진 방 안은 어둑하니 공기까지 가라앉았는데,
 
코트의 벌어진 품을 정리하거나 극장 티켓을 챙기거나 하는 여자의 분주한 움직임만큼은 미약한 태양광을 역으로 받아 가며 짙은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낮 동안 얻은 정보로 미루어 보아 분명 어떠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도 같으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지금은 그저 평범한 중산층 여성과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은 지 몇 분,
 
곧 준비를 마친 여자가 방 밖으로 걸어 나오며 묻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시간 맞춰 돌아왔군요. 준비는 다 되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멀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응. 갈까. (표면적으로는 무감한 낯이지만, 속으론 루드베키아가 잡지에 언급된 종교를 숭상하는 건 아닐지, 연극을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 마음을 놓지 말아야지.)
 
루드베키아 히르타:(평소와 다름없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당신과 밖으로 나선다.) 밖에서 무얼 하고 왔어요?
 
아이린 테라코르:편지를 부치려고 했는데, 광인을 만났지 뭐니. (어깨를 으쓱인다.) 옷 갈아입은 거 보이지? 싸우다가 드레스 곳곳이 찢어졌어. 뜻하지 않게 병원까지 다녀왔지.
 
루드베키아 히르타:저런. 큰일을 치르고 왔군요. 하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사람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다들 쉬쉬해 하는 분위기니까요.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산업혁명 이후로는 관람객들의 계층이 확대되면서 중산층 사람들이 익숙해하던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시선이 많아요. 뭐,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취객이나 도박꾼들이 그리 기승을 부린다고 극장으로 가는 사람이 대폭 줄었었으니.
요즘에야 공연 규제도 풀리고 소극장도 발달하기 시작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지만 시기가 도와주지를 않네요. 광병만 없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이린 테라코르: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루드베키아 히르타:하지만 그것도 결국 어쩔 수 없었던 일인걸요.
아이린, 만약 당신이 곱게 자랐다면 극장가 모습이 불편할 수는 있겠어요. 이 모든 것이 전부 회복되려면 아마 앞으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테니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진짜 의미심장하네. 더 의심스럽게) 몇 년이나 걸리게 되려나. 하긴, 한 번 침체된 시장이 다시 살아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
곱게만 자란 건 아니니 그런 건 신경써주지 않아도 돼. 그래도 조금 걱정되긴 하는구나. 사람이 적다곤 해도 연극의 커다란 소리나 꺼진 조명 탓에 광인이 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까 봐. 루드베키아, 너도 조심하렴. 알겠지?
 
루드베키아 히르타:꼴이 말이 아니지요, 친절한 사람. (작게 웃는다.) 당신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지요. 그곳만큼은 광병과 가장 관련이 적은 곳일 터이니.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다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극장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안심이 되네. (진짜 얼마나 관계가 깊은 거야)
 
가볍게 훑어보자니 여자의 설명에 걸맞게 죽 늘어선 소극장들의 수가 과연 한번 헤아려 볼 만도 합니다.
 
다만, 동시에 그것들은 모두 그 어귀에서부터 황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또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이는 가로등과 사람 없는 샛길들, 정돈되지 않은 꺼칠한 보도,
 
이곳저곳 굴러다니는 술병과 옷 조각들, 간간이 건물 밖으로 삐져나오는 고성, 왁자한 조롱, 웃음소리……
 
뭐 그런 것들 역시도 확실히 중산층 이상의 신사 숙녀에게는 익숙지 않을 풍경입니다.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으며 애당초 괜찮은 척조차 할 의지가 없으므로 더더욱 그렇지요.
 
루드베키아 히르타:그때도 말했지만 인생이 곡 연극이라고, 현실이 아주 거대한 어항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지 않나요? 그래도 극에 대한 반응만큼은 좋다고들 하니 기대해도 좋아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당신을 오른편의 구석진 소극장으로 데려갑니다.
 
당신이 방문한 이 극장은 소극장 중에서 꽤 규모가 있는 편입니다.
 
무어, 운이 좋다면 공연 규제가 완화되면서 대형 극장이 독점하고 있던 정규 연극의 갈래를 분담하게 된 극장 중 하나라고,
 
누군가의 설명하는 말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르지요.
 
객석은 적당히 한산하므로 관람하기 좋은 자리를 골라 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듯 싶습니다.
 
당신과 여자가 완전히 착석하고 나면 이윽고 극도 천천히 막을 올립니다.
 
시점은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명령이 얼마나 부당한지 외치는 때.
 
그녀의 등장을 알리는 코러스가 천천히 극장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코러스:“저기 들판에 방치당한 폴리네이케스의 육신을 보라! 흙 아래 묻히지 못하고 새에게 살점을 뜯기는 식은 몸뚱이를……. 오, 그쪽으로 그의 누이가 가는구나! 외숙의 명령을 어기고, 도무지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여자가 지금 들판으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울부짖고 있다. 왕이시여, 당신의 처사는 하데스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것 ……”
 
안티고네:“…… 매정한 테바이의 장군, 크레온이여! 파수꾼이 보고한 바가 실로 옳습니다. 내 오라비는 마르고 차가운 땅바닥 위에서 썩어 가고 있었고, 바로 내가 그에게 모래를 뿌렸지요! 그것은 폴리네이케스에게도 그의 형제와 같은 애곡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내 형제를 매장할 권리가 있듯이!”
 
크레온:“어리석은 여자야, 너는 테바이 전역에 내려진 명령을 듣지 못했느냐? 폴리네이케스는 조국 땅을 훼손하려 한 반역자,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내가 말한 바에 따라 너를 죽여야 한다! ……”
 
연기 때문인지 코러스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이 내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여자가 장담한 대로 연극은 몰입감이 썩 괜찮습니다.
 
한창 극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장면이 바뀝니다.
 
막이 잠시 내려가고,
 
그 사이 여자가 넌지시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 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이 희곡을 알고 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불경기에서도 몰입이 괜찮은 걸 보니, 노력했겠네. 그나저나 배우들 중에 광증이 도지는 이가 생기기라도 하면 애를 먹겠어.) 줄거리 정도는. 오늘 나갔다가 도서관에 들렸거든. 관련된 책이 있기에 읽어봤어.
 
루드베키아 히르타:예습에 철저한 사람이었군요.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당신을 응시한다.)
 
아이린 테라코르:따지자면 별로 관심이 많진 않아. 이건 너랑 보러 가기로 약속한 연극이고, 마침 책이 있었으니 읽어본 것뿐. 그런 너는? 이 연극이 세워지는 데 얼마간 관련된 것 같은데…… 연극 자체를 좋아하는 거니, 아니면 그리스 신화를 다룬 내용이라 특별히 더 관심을 갖기라도?
 
루드베키아 히르타:(가만 눈을 깜빡이며 눈웃음을 짓는다. 글쎄요, 하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그리스 신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쓰기 좋은 소재였어요. 으레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리스의 비극 시인이라고 하면 보통 세 사람을 꼽고는 해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극은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각색의 근간이지만 다른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 역시 안티고네에 대해 다룬 적 있었죠. 나는 그 희곡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들어요. 안티고네와 하이몬이 죽지 않고 떠나거든요. 사실 해피엔딩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를 묻어 줄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 극에서는 살아남는 것마저 불가능하겠지만요. 나도 알아요.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가 제대로 된 장례라도 치른다면 좋을텐데 여기나 저기나 그 부분까지는 나오지도 않겠죠.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금세 다시 막이 올라갑니다.
 
흐뜨러졌던 분위기도 빠르게 갈무리 되고,
 
그러면 여자도 마치 처음부터 아무 말 않았던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시선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무대에서는 한창 하이몬 역을 맡은 배우가 크레온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리스 신화가 여러모로 창작에 쓰이기 좋은 소재이긴 하지. 그나저나 엄청난 신화 매니안가 봐)
 
하이몬:“……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께서 조국을, 이 테바이를 사랑하는 자애롭고 현명한 왕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단지 헤아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안티고네에게도 그녀 나름의 마땅한 이유는 있었음을 말입니다……. 아아, 가여운 안티고네! 정녕 아버지께서는 저를 시체와 결혼시키고자 하시는 겁니까?”
 
크레온:“그 여자는 네 혼약자가 아니다. 물론 이스메네의 언니도 아니지! 그러니 시체와 혼인할 일 역시 일어나지 않을 터, 불효자야 괜히 애통해하지 말아라! ……”
 
코러스:“아이아이, 기어이 안티고네가 끌려간다. 이승도 저승도 되지 못한 곳으로 질질 끌려 죽으러 간다. 송별하는 시민들의 울음이 크레온의 집까지 흘러 지엄한 왕을 괴롭힐지어다! 여자는 그 와중에도 결단코 부끄러워하지 않누나…….”
 
안티고네:“내가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려 할 때 이스메네가 말하더이다. 우리의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하라고 또 우리의 오라비들이 어떻게 시체가 되었는지 이 집안이 신들로부터 얼마나 큰 미움과 재앙을 받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자이며 그것은 즉 우리가 약자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그러므로 순응할 수밖에는 없다는 거지요. 다만 나는 이 가련한 누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죽을지언정 오라비를 묻어 주어야겠노라!”
 
그렇게 외치는 배우의 목소리가 극장을 뒤흔듭니다.
 
배우의 처절한 목소리가,
 
아니,
 
한 여자의 처절한 목소리가,
 
굳세고 처절한 고함이자 비명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섞여 울리는 또 다른 비명이 있습니다.
 
연기되지 않은, 아주 긴박하고 새된 비명입니다.
 
분위기가 영 이상합니다.
 
연극은 부자연스럽게 뚝 끊겨 버렸고,
 
어수선히 자리를 옮기는 관객들이 당신 옆을 스쳐 지나가고,
 
여전히 다급한 비명은 멎지를 않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릴 경우 그 근원지가 앞줄의 관객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위가 어두운 탓에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으나,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저 한쪽 구석에서 무대 조명을 번쩍 반사하는 술병 하나가 불현듯 곡선을 그립니다.
 
어딘가 휘둘러 부순 건지, 유리가 산산이 깨지거나 내용물이 튀거나 하는 그런 잇따르는 소리들이 죄 어지럽기만 합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무사히 연극을 마저 관람하고 싶다면,
 
누가 되든 간에 나서서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이 한 명은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와중에도 연극을 꼭 봐야 하는 거?)
 
고고한 분들의 취미이니 알 수가 있나요.
 
당신의 곁에 있던 여자가 소란의 한가운데로 나아갑니다.
 
오, 물론 당신을 이끌고 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나는 왜)
 
소동의 근원지……
 
즉 몇 줄 앞의 관객석에서는 얼굴이 다 붉어진 만취자가 한 손으로는 술병 머리를 붙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좌석 등받이를 붙든 채 왁자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광증에 걸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단순히 취객이었나?)
듣기
기준치: 55/27/11
굴림: 98
판정결과: 실패
 
“…… 전부 엉망진창인 극본이야! …… 보다야 한참 못하다고! …… 에 대한 숭배란 이런 게 아니지, 그분께서 원하는 미학이란, 오, 거기 숭고한 의미, 법도, 양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끓어오르는 누런 시체들만이 ……”
 
……
 
정말이지 끔찍한 고함입니다.
 
거하게 난동을 피운 모양인지 사방에는 온통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습니다.
 
근처 좌석은 싸구려 포도주로 흠뻑 젖어 엉망입니다.
 
그 덕에 자기 자리를 잃은 여자도 곤혹스러운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가장 불운한 사실은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은 만취자의 손등 위에서 갈퀴 모양의 흉터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힘줄처럼.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소리지만, 아무래도 이 치에게 어지간한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흉터를 발견하곤 눈이 가늘어진다. 루드베키아를 말리듯 속삭였다.) 병원에 갔을 적 권위자라는 박사가 말하더라. 흉터가 생기면 곧 광증이 도지게 된대. 저 사람 손등 보이지? 괜히 나섰다가 얽히지 말고 물러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당신의 말을 들었는지 그도 아닌지,
 
여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취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 정확히는 광병에 걸린 그 자를 말입니다.
 
허나 당신의 충고도 있으니 여자가 정말 상식적인 인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을테지요.
 
여자가 정말 상식적인 인물이라면 말입니다.
 
.
 
..
 
만취자가 잠잠해지건 기어코 경찰이 그를 끌고 나가건
 
여하튼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고 나면, 연극이 재개되기 직전에 어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어옵니다.
 
가만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방금의 소란으로 좌석을 잃은 여자입니다.
 
자리를 잃은 여자:도와줘서 고마워요. 비명이 관람에 불편을 끼쳤다면 미안하군요. 다름이 아니라… 원래 앉아 있던 자리가 엉망인데, 다시 혼자 앉으려니 역시 조금 불안해서 말예요……. 혹시 옆 좌석이 비어 있다면 동석을 요청해도 괜찮을까요?
 
두 사람의 옆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배려를 베풀도록 할까요.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어도 좋겠지요.
 
아이린 테라코르:그런 상황에선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겠죠. 사과할 필욘 없어요. (내 자리도 아닌데 뭐.) 편한 대로 하세요.
 
여자는 짧게 감사를 표하고 당신 옆으로 난 빈 좌석에 착석합니다.
 
그리고 진행되는 극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엽니다.
 
자리를 잃었던 여자:연극은 마음에 드나요?
 
아이린 테라코르:네, 극장가 상황이 안 좋은 걸로 아는데도 꽤 수작이네요.
 
자리를 잃었던 여자:어머, 고마워요. 그것만으로도 멋진 감상평이거든요.
 
아이린 테라코르:(이 사람도 관계자?)
 
자리를 잃었던 여자:(당신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작게 소근거린다.) 이 극을 집필한 사람이에요.
무명 극작가의 작품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정말 이름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숨기는 편이 차라리 낫다 보니 자연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뿐인 거지. 이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그렇잖아요. 문학계도 그렇지만…… 조각이나 회화, 음악 같은 경우도 크게 예외는 없을 거예요.
 
아이린 테라코르:어머, 그렇군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의 예술과 업적은 언제나 가려지기 마련.)
그쪽이야말로 배우들의 연기는 흡족하신가요?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가 있을 거 아녜요.
 
자리를 잃었던 여자:제가 하는 일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 언제나 거기까지랍니다. 저는 이름없는 창조자에 불과해요. 제가 무엇을 바라던 숨을 불어넣어주는 역은 언제나 저들이 대신해 주는 걸요.
 
극작가는 조금은 쓸쓸한 듯 웃습니다.
 
하지만 마냥 싫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아아,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극이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조촐한 커튼콜.
 
어수선한 무대 인사와 박수 소리 사이로 자리를 잃었던 여자-극작가도 곧 몸을 일으키고 가볍게 인사를 건넵니다.
 
자리를 잃었던 여자:관람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럼 남은 하루도 무탈하게 보내시기를.
 
지그시 앞섶을 누른 손, 살짝 숙인 상체, 정갈히 잡아 들어 올린 치맛자락,
 
그리고 멀어지는 뒷모습…….
 
슬금슬금 가로등에는 불이 붙고…
 
루드베키아 히르타:무슨 생각이 들어요?
 
아이린 테라코르:연극을 끝까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연극에 대한 감상을 좀 더 풀어 말해줄까?
 
루드베키아 히르타:극에 대한 감상은 나보다 그이에게 하는 편이 더 좋았을텐데도. (작게 웃는다.)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수작이란 정도로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극작가에겐 그만하면 아주 좋은 칭찬 아니니? (천성적으로 낭만이나 화려한 화술과는 연이 없는 사람.)
난 안티고네가 죽지 않았음 좋겠어. 내가 읽은 책에선 크레온을 국가, 안티고네를 국가에 대항하는 개인으로 보던데, 국가의 강압적인 힘에 밀려 무릎 꿇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끝끝내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이도 있잖니.
 
루드베키아 히르타:그도 당신이 남긴 감상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군요. 예술가에게 그보다 더한 칭찬은 아마도 없을 거예요. 무어, 타인에게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조금 아쉽지만.
박한 세상이지요. 어느 곳이든 그들이 존재하는 것을 반겨주지 않는 것처럼 세상은 그를 내치기도 하고요.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안티고네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나는 그래서 안티고네가 마음에 들어요, 하고.)
…―누군가는 안티고네의 장례를 치뤄주었으면 했어요. 그게 내가 바라는 일이라서요.
 
……목소리를 따라 흔들리는 구름의 빛깔이 문득 청회색을 띱니다.
 
자각지도 못한 새 하늘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찾아온 관객들도 거의 기존의 자리로 되돌아갔고
 
훅 줄어든 유동 인구 탓에 자연히 주변 분위기도 한껏 가라앉습니다.
 
껌벅거리는 깨진 가로등의 불빛과 형형한 눈을 하고 기어 나올 순간을 재는 광자 무리들 탓에 더욱이 그러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약자를 대표하는 사람 같아서? (마음에 든다는 질문에, 그리 물었다.) 혹은 소수자일 수도 있겠구나. (극장가에서 상연될 만한 극을 썼음에도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무명으로 적힐 수밖에 없던 그 극작가처럼.)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 (씁쓸한 세상이다.)
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안드리조 마이라는 사람이랑은 어떤 관계니? 그 사람 조각가라던데, 가장 찬사를 받은 작품이 안티고네와 관련있어 보여서 말야.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이랬던가.)
 
루드베키아 히르타:후후, 글쎄요. 어쩌면 내가 안티고네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걸지도 모르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웃는다.)
내리쬐는 빛이 강하다면 그림자 역시 더욱 짙어지기 마련인데 많은 이들은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요.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이릅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미안해요, 그 질문에는 내가 대답하지 못하겠네요. 그에 대한 평가는 내게는 힘든 일이라서요.
아이린, 나는 들러야 할 곳이 있어요. 당신 먼저 돌아가도 괜찮겠나요?
 
아이린 테라코르:그저 네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이번 연극에도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서.
 
루드베키아 히르타:(가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벤에게 내가 늦을 수도 있다고만 전해주세요. 다만 걱정하지 마라는 말도 함께요. 늦지 않게는 돌아갈테니.
 
아이린 테라코르:밤은 위험해. 너라면 알아서 오겠지만. (일별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들릴 건지 물어봐도 되니?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에게 알려주기는 조금 이르러서요. (그리 말하며 살며시 웃는다.) 나중에 만나요.
 
아이린 테라코르:나중엔 알려줄 수 있단 의미로 들리는구나.
그럼, 나중에 봐. (손을 가볍게 흔들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발길을 돌려 사라지는 여자를 뒤로 하고, 당신은 당신대로 길을 되짚어 돌아갑니다.
 
당연하게도, 올 적에는 차 있었던 동행인 자리가 비고 나자 지나치는 온갖 것들이 전보다 명확히 눈에 밟힙니다.
 
당신은 그로부터 여러 가지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래요, 귀가를 재촉하는 익숙한 타종 소리,
 
혹은 낮에 비해 순찰을 도는 경찰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나
 
덜 마른 빗물 웅덩이 위로 나부껴 떨어지는 낱장의 신문지 조각 같은 것들……
 
눅진하게 젖어 들어가는 잿빛 종이 위로는 청년의 번진 초상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젊은 조각가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당신 옆을 지나쳐 가는 남자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안드리조 마이?
 
예술계의 신흥 유명 인사를 이런 시각에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경우는 꽤 드문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대중적인 인식상 안드리조 마이와 같은 사람일수록 더 되는 대로 몸을 사리기 마련이고,
 
‘그 같은 사람’이라 함은 곧 유명세와 부, 형편이 되는 사람이란 의미인 탓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남자는 단지 한 명의 평범한 시민처럼 손목에 찬 시계를 연신 확인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노골적인 태도이므로, 주의를 기울였다면, 당신은 마이와 당신이 서로 교차하는 그 순간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대강 보았든 상세히 파악했든 급한 약속이 있는 사람이 으레 보이는 흔한 모습입니다.
 
다만……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아주 사소한 이질감이 있습니다.
 
시계를 찬 손에서부터 비집고 나오는 느낌입니다.
 
일정 시간 동안 못과 정을 든 조각가의 손이라면 무릇 굳은살과 잦은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진대, 어쩐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굳은살의 위치를 볼 때 그의 잘 정돈된 손은 펜을 쥐는 사람의 손과 더 유사해 보입니다.
 
당신은 그 모든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안드리조 마이는 주변을 한껏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보다 서두르기 시작합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이 수상쩍은 동태입니다.
 
또, 그 움직임은 불현듯 일전의 어떤 외침을 자극해 상기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즉…
 
…이런 말 말입니다.
 
어쩌면 도시를 덮친 이 원인 불명의 유행병에 안드리조 마이가 무슨 기여를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추측이 뇌 내에서 성립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 당신은 여기서 기로에 놓입니다.
 
이 수상쩍은 조각가를 쫓아가 볼지 외면할지에 관한 기로.
 
아이린 테라코르:(존 모어의 중얼거림이 문득 오버랩된다. 초기 발병자들은 모두 그와 연관되어 있었고 하나같이 귀족이었다 하던가. 작품, 그리고 떠오르는 신흥 예술가 안드리조 마이…… 꺼림칙한걸.)
(곧 어두워질 텐데. 안전을 위해 귀가를 할지, 수상한 예술가를 좇아갈지…… 평상시라면 당연히 전자겠지만, 광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면 눈을 감고 지나치긴 어려운 일이다. 편지를 보내는 평범한 외출에서 광인과 마주쳐 위협을 당하는 일을 다시금 겪는 건 질색이었으므로.)
(인적을 숨기는 데는 능숙한 편이었으므로, 깔려오는 어둠 사이에 숨어 조각가의 뒤를 밟기로 한다.)
 
당신은 안드리조 마이의 뒤를 밟기로 합니다.
 
남자는 수로를 따라 한참을 움직이더니 머잖아 좁고 깊숙한 골목 구석의 작은 건물로 들어갑니다.
 
또 두 사람이 나란히 오르내리기에는 비좁은 계단을 올라갑니다.
 
삐걱거리는 층계의 양쪽으로 버티고 선 벽에는 꽤나 삭고 오래된 티가 납니다.
 
갖은 불온한 작품들도 규칙성 없이 걸려 있습니다.
 
바닥을 기고, 엎드리고, 무릎을 꿇은 캔버스 속 각각의 사람들……
 
그들의 샛노란 눈동자가 지나가는 사람을 번뜩이며 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주변을 누르는 공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묵직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SAN Roll
기준치: 43/21/8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이게 다 뭐람. 불쾌하네)
 
이성 -1
 
그런 것들을 모두 견디어 내고 나면 비로소 나오는 곳은 작업실입니다.
 
채 다 닫히지 못한 문의 틈새로 단출한 목조 가구들과 만지다 만 석고 같은 게 언뜻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잠시 시야를 허락하는 순간, 당신 본연의 목적, 기존에 쫓던 사람의 인기척은 어느새 묘연해져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성 싶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들어가도 안 들킬까??)
 
당신에게 운이 따른다면 그럴테지요.
 
아이린 테라코르:(쉽지 않네. 작업실까지 오는 동안 사람은 몇 명이나 마주쳤을까?)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친 이는 글쎄요,
 
적어도 당신이 알고 있다면 안드리조 마이, 그 남자 하나 뿐일 겁니다.
 
그 외에 본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럼 더더욱 들키지 않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조용히 작업실 문을 연다)
 
작업실은 사방이 막힌 공간이라면 무릇 가질 법한 옅은 먼지 냄새를 내뿜습니다.
 
모서리에 비치된 간소한 탁자 위로는 방금 켠 듯한 밀랍 초가 우뚝이 서서 희미하게 주변을 밝히고,
 
그 빛 덕택에 드러난 방 내부란 보아하니 조각을 하고자 마련했다기에는 영 변변치 못한 모습입니다.
 
안드리조 마이로 추정될 사람은 형체는 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적당히 시선이 가닿거나 살펴볼 만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웬 종이 다발이 가지런히 쌓인 탁자와 잡동사니가 흩어져 있는 바닥 정도가 전부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당연히 여기로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없다고? 작업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단시간 내에 빠졌거나, 아님 작업실 안에 비밀 공간이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최대한 빠르게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탁자의 종이다발을 본다.)
 
탁자는 이 협소한 작업실 가운데 가장 밝은 부분입니다.
 
누렇게 빛을 받은 나무 상판은 뜨뜻미지근하고 결이 고집스러울 만치 뚜렷합니다.
 
정중앙을 기준 삼을 때 왼편으로는 무난한 촛대 위에 오른 촛불 심지가 바지런히 연소하고 있으며, 오른편으로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종이 다발이 크게 두 더미로 묶인 채 쌓여 있습니다.
 
윗자리를 차지한 쪽은 신문, 아랫자리를 차지한 쪽은 잡다한 서류 뭉치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신문부터 읽는다)
 
불쏘시개로 쓸 요량이기라도 한 건지 부러 닥치는 대로 모았다는 양 쌓인 신문의 두께가 겉보기로도 지나친 면이 없잖습니다.
 
내용을 살펴본다면 수집된 기사들이 ‘발행일은 제각각일지언정 모두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공통된 주제인즉슨 존 모어의 미술 전람회입니다.
 
더 구체화하자면 존 모어의 전람회……
 
그리고 전람회에 작품을 전시한 예술가들과,
 
전람회 주인을 필두로 번지기 시작한 유행병 간의 어떤 연관성을 추측하는 이야기들.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당신은 기민하게 발견합니다.
 
더미의 가장 위에 올라와 있던 신문의 양쪽이 약하게 우그러져 있습니다.
 
주로 얇고 약한 재질의 종이에 사람의 온기가 닿았을 때 종이가 수분을 먹어 일어나곤 하는 현상입니다.
 
안드리조 마이가 막 두고 간 모양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지능
기준치: 80/40/16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그러고 보면 여태껏 벤 부인이 전달해 준 신문에서 존 모어의 전람회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없습니다.
 
관련된 내용이라고는 도서관 잡지에서 읽은 내용이 고작이고, 그마저도 존 모어의 외침과는 배치되는 소리입니다.
 
마치 누군가 안드리조 마이와 당시의 미술 전람회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를 차단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아이린 테라코르:(전람회에는 으레 귀족들이 오지. 거기에서 첫 광병이 시작되었을 확률이 있다. 안드리조 마이가 굳이 이 정보만 모아두었다는 건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있거나, 혹은 저와 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다는 가설인데. 아무래도 전자가 높아 보이지.)
(그리고 우그러진 신문을 보니 작업실에 비밀 공간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마주쳤다간 좋은 일을 겪을 것 같진 않다. 이어 서류 뭉치를 살폈다.)
 
한편, 신문 아래로 쌓인 서류의 내용은 전부 괴이하고 수상쩍기 그지없습니다.
 
구불구불 일그러진 글자들이 낱장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고, 모독적이거나 삿된 모양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반적으로 올라오면서 보았던 섬뜩한 그림들과 내보이는 분위기가 유사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자료조사
기준치: 70/35/14
굴림: 99
판정결과: 실패
 
이하의 자료를 찾아냅니다.
 
휘갈긴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황색의 징표’에 관한 내용입니다.
 
당신은 찾은 자료의 바로 아래에서 이런 정보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미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형언할 수 없는 자의 산물은 목격자에게 지독한 저주만을 가져올 뿐이다. 표식과 저주는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간혹, 몇 세기에 한 번씩 미쳐 버린 예술가들이 재현하고자 만들어 내는 모조품 역시 작동 원리는 매한가지다. 물론 한갓 인간 따위가 흉내 낸 가짜 문양은 원조만큼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원인이 되는 모조품을 완전히 훼손할 때 영향력이 소거된다는 한계가 있다. 만약 이미 징표를 목격한 자들마저 구제하고 싶은 혹자가 있다면 그 방법에 유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아이린 테라코르:(흉터라고 여겼던 게 실은 증표라는 것이었군. 꿈틀거리는 듯 보이는 외견과 발병하는 증세마저 동일하다. 이런 자료를 모아둔 걸로 보아 혐의는 명백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지만, 미친 자의 심리는 제가 안다고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SAN Roll
기준치: 42/21/8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아이린 테라코르:(자료의 아랫부분을 손끝으로 훑는다. 모조품을 완전히 훼손할 때 영향력이 소거된다…… 파훼법은 이것일 테다. 그 모조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가 문제겠지만.)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다. 숨겨둘 만한 비밀 공간이 있다면, 문도 있겠지.)
 
정돈되지 않은 바닥은 난잡합니다.
 
정과 망치 같은 작업 도구들, 부서진 돌조각,
 
구겨진 종이와 목탄이 발에 차이고, 바닥 틈새에는 석고 가루가 껴 기관지에 유해할 게 뻔한 얇은 연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분별없이 굴러다니는 것 중에는 완성되지 못한 작품의 일부도 있습니다.
 
석고상의 부러진 목, 떨어져 나온 팔뚝 같은 류 말입니다.
 
미관상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마는…
 
그렇다고 벽에 걸려 있던 작품이나 서류의 삽화만큼 불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창 작업실을 뒤적이는 데 몰두하고 있노라면, 당신은 문득 갈빗대 바로 밑으로부터 어떤 선득함을 수신받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당신이 예민할수록 혹은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해 보았을수록 마땅히 익숙할 느낌입니다.
 
남몰래 무언갈 시도하는 자들의 몸이 으레 가지는 육감.
 
그래요, 그런 느낌.
 
잘못 맞물린 문틈은 신체 반응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무섭게 음산하고 섬뜩한 소음을 내지릅니다.
 
양 귀가 예측하기로 당신이 들어온 방향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리를 뱉은 쪽은 반대편 벽…….
 
잘 보이지도 않고, 기껏해야 옷가지 아니면 벽시계나 걸려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벽에서,
 
…툭 튀어나온 작업실의 주인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 젊고 지친 얼굴은 경악스러움으로 잠시 굳는가 하더니 빠르게 의심 가득한 낯으로 변화합니다.
 
또 신속히 당신을 훑어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식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안드리조 마이:누구십니까? 어떻게 들어왔지요?
 
아이린 테라코르:(아무래도 당연히 그런 걸 물어보겠지. 뭐라고 해야 하지 진짜? 그냥 상식적인 침입자인데요.)
 
(상식적인 침입자)
 
아이린 테라코르:…… 루드베키아 히르타의 친구예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아는 이름을 내뱉어본다. 미안해 루드베키아.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니?)
 
안드리조 마이:히르타 양의 친구요? 그 아일랜드 여자 말입니까? (뒤이어 작게 소리가 들려온다. 오, 하느님 맙소사.)
 
아이린 테라코르:멋대로 쫓아온 건 미안하지만, 좀 수상해서요.
당신, 황색의 증표와 어떤 관련이 있죠?
 
안드리조 마이:이봐요, 아가씨, 그건 내가 하고싶은 말입니다! 나도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단 말이오.
 
아이린 테라코르:……?
 
안드리조 마이:나는, 나는 안드리조 마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안드리조 마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각가는 존재하지 않아요. 아마 동명인도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그렇습니다.
이건 후원자의 죽은 아들 이름을 빌렸으니까.
 
아이린 테라코르:루드베키아의 생각을 말하는 건가요? (원조자라는 것처럼 말해서 가까운 줄 알았는데. 이용당하고 있던 건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군요. 왜죠?
 
안드리조 마이:히르타 양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녀의 대역에 불과하고.
허수아비 대역이 실제로 조각을 할 일은 아무래도 없잖습니까?
당신이 조각가 안드리조 마이를 찾았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가 아닙니다.
조각가는 언제나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이 이름을 사용할 때든 그러지 않았을 때든.
당신이 찾은 자료들은 전부 제가 조사한 것들입니다. 모두 히르타 양때문에요. 물론 동업자를 의심하는 일이 여러모로 좋을 게 없는 짓이란 건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그냥 두기에는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영 미심쩍게 돌아갔어요. 추측하기론 웬 무명 화가가 돌연 히르타 양에게 접근했을 때 즈음부터…….
 
안드리조 마이:내가 달리 뭘 어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한배를 탔는걸, 뭐라도 알아보아야지… 모르는 체하기에는 늦었더군요. 덕분에 이제는 그 화가가 그린 그림만 봐도 넌더리가 납니다. 아가씨가 올라오면서 벽에 걸린 섬뜩한 것들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보는 되는 대로 모았습니다. 겸사겸사 안 좋은 소문들은 좀 가렸고, 어쨌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니까요……. 히르타 양이 존 모어나 유행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가정 말입니다. 이렇게 무너뜨리기엔 명성 쌓자고 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사실로 판명이 나면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대도요.
…어떻게, 레이디께선 어떻게, 감이 오십니까? 나는 머리도 더 안 굴러갈 지경입니다. 대놓고 얘기라도 꺼내 볼까 싶어서 찾아온 건데 정작 약속한 사람은 오지도 않고, 저 안에 있나 해서 들어갔더니 텅 빈 건 다를 바 없고.
 
상황을 설명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주인의 피로를 대변하듯 한숨처럼 흩어집니다.
 
유별나다 할 것도 없는 맥 빠진 울림. 그러나 그런 남자의 탄식조 목소리 사이에서 탁 걸려드는 두 음절이 있습니다.
 
‘저 안’.
 
그가 사라지고 또 도로 모습을 드러냈던 벽과 벽 너머를 지칭하는 말 말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등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곳은 벤 부인의 관리하에 있는 하숙집 방을 제외하면 당신이 살펴보지 않은 거의 유일한 장소입니다.
 
당신은 압니다.
 
이제 와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 버렸습니다.
 
만일 당신이 살펴보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낼 경우,
 
안드리조 마이는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이어지는 문을 열어 줍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곳곳에 불을 붙임에 따라 전경이 훤히 드러납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곁으로 딸린 것치고는 상당한 면적의 방.
 
검은 천으로 덮인 대형 조형물에 의하여 입구 맞은편 벽으로부터 삼분지 일 되는 공간 정도는 거뜬히 채워진 것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결국 안드리조 마이가 광병과 연관되어 있다는 제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안드리조 마이는 이 남자가 아니라 루드베키아였으니까. 화가가 접근한 이후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이거, 걷어봐도 되는 거죠? (조형물 톡톡 건드림)
 
안드리조 마이:어차피 내 소관이 아닙니다.
 
덮인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할 경우 직접 천을 벗겨 보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남은 여백의 공간에는 각종 작업 도구들과 함께 상자 두 개가 쌓여 있으며, 나무 바닥의 무늬를 방패 삼아 달아 둔 작은 쪽문도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천을 걷어본다.)
 
당신은 천을 걷습니다.
 
방 삼분지 일을 거뜬히 채우는 대형 조형물, 그것은 사람 둘을 조각해 놓은 대형 환조 작품입니다.
 
한 명은 마치 죽은 것처럼 팔을 떨구어 가며 누웠고,
 
다른 한 명은 그 옆에 꿇어앉은 채, 왼손으로는 누운 이의 뺨을 쓸고 오른손으로는 무언가 뿌리는……,
 
그런 내용의 작품.
 
그리스 복장 특유의 얇은 직물이 팔을 따라 흘러내리고 누운 자의 드러난 가슴팍 위로 조각된 것은 켜켜이 쌓이는 모래를 닮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꼭 이런 장면을 몇 시간 전에―즉 극장에서― 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심지어 작품의 이름마저 짐작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하필 극장에서 언급했던 작품인데. 그걸 몇 시간 만에 두 눈으로 만나다니. 운명의 장난 같네.)
감정
기준치: 55/27/11
굴림: 58
판정결과: 실패
 
환조 조각은 한 바퀴 돌아가며 양방향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특히 주요한 특징입니다.
 
이에 따라 작품 면면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자면 해당 작품은 내용상으로도 시기상으로도 금일 감상한 연극보다는 안티고네 신화 자체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처럼 비추어집니다.
 
사용한 재료는 석고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5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존 모어가 구입한 작품이 그의 사유 공간 대신 이런 장소에 숨겨져 있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텝니다.
 
겉보기에는 마냥 생동감 넘치고 아름다운 작품이나…
 
머지않아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생동감 외의 또 다른 기운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길하고, 삿되고, 소름 돋게 모독적이며,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는 순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법한…….
 
당신은 곧 이 작품이야말로 존 모어를 통해 유행병을 퍼뜨린 직접적인 원인임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꿇어앉은 안티고네의 눈동자에서 ‘황색의 징표’를 발견합니다.
 
눈동자에 각인된 징표는 둥글게 구부러져 있고, 한편으로는 어지러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마치 한 마리의 생동하는 벌레라도 된다는 양…….
 
징표의 징그러운 움직임을 따라 뒤에서 당신을 기웃거리던 청년의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얇게 일던 석고 가루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고인 탓에 텁텁해진 공기의 냄새도 잠시 옅어집니다.
 
일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이린 테라코르:
SAN Roll
기준치: 41/20/8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는 없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대체 왜 여기에 증표를…… 그러다, 뒤에 서 있던 이의 움직임이 멎어감을 깨닫는다. 아, 안 되는데. 여기에서 광병이 발현하기라도 하면.)
(천천히 뒤돌아 그를 확인했다.)
 
그는 괜찮습니다.
 
잠깐 놀란 것 같군요.
 
아이린 테라코르:모조품을 훼손하면 광병의 영향력이 약해질 거라고 했었죠.
흠. 작품을 망가뜨리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일단 작업 도구가 든 상자들을 살펴본다.)
 
적당한 크기의 두 개의 나무 상자는 각각 망가진 조각 작품의 잔해와 끈으로 동여맨 편지 꾸러미로 채워진 모양입니다.
 
끈을 풀고 편지 봉투 몇 봉을 개봉할 경우 간결하고 짤막한 문장을 몇 줄 읽을 수 있습니다.
 
편지 더미를 들어낸 상자의 바닥 틈 사이로는 여타의 쪽지도 한 장 보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금속…… (피는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중얼거리며 쪽문을 찾아본다)
 
바닥에 설치된 쪽문은 대강 살피는 사람은 미처 존재 여부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감쪽같습니다.
 
손잡이 대용으로 바닥 결을 따라 작은 홈이 파여 있고, 평균 크기의 손가락 네 개 정도는 끼울 수 있을 법합니다.
 
밀거나 당겨 여는 형식으로 비추어지나, 바깥에서부터 잠가 버렸는지 실제로 열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방을 다 둘러보고 난 후.
 
감각하기로, 어느새 주변은 한 박자 느릿하게 굴러가는 중입니다.
 
뒤에서 당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청년의 움질거림도 바닥 위로 얇게 이는 먼지와 석고 가루도 입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공기 냄새도.
 
어쩐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부여받은 것 같습니다.
 
비록 연극 관람을 마치고서처럼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어 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얻어 낸 정보들을 수합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채우거나 추론해야 하며, 스스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렇게 할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어느 정도 생각과 감정을 정돈했을 때 즈음, 그쯤이면, 을씨년스러운 소음과 함께 문득 바닥이 덜걱입니다.
 
낭패감 어린 얼굴로 청년이 중얼거립니다.
 
그러니까, 이건 꼭, 종전에 살핀 쪽문 밖에서부터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새라고.
 
더하여,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고.
 
…….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런 짐작은 금세 확신으로 탈바꿈합니다.
 
벽에 걸려 있던 희미한 불빛이 가볍게 한 차례 휘청거리고, 그 소란스러운 덜컹거림 끝에 드러나고 만 것은,
 
더없이 새카만 통로와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은 그 여자, 루드베키아 히르타의 멀건 정수리…….
 
결국 고개를 꺾은 여자와 눈이 마주칩니다.
 
쪽문 뚜껑은 넘어가고, 침을 삼키던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키고, 난입한 한 명분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는 와중에.
 
여자는 상체를 들이밀다 만 자세로 당신을 바라보고, 말간 보랏빛 두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엽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이군요.
 
아이린 테라코르:그래, 나야. (태연하게 대답한다. 루드베키아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끔 톤을 유의하며) 갈 곳이 있다더니 여기였니?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이야말로. 돌아갈 곳이 이 곳이었던가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뒤에 있는 남자도 함께.) 나는 그저 당신이 벤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했었는데 말이죠. 할 이야기가 정말 많겠어요.
어디까지 알아낸 거죠?
 
아이린 테라코르:일부러 온 건 아니었단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이 사람을 봤는데, 어딘가 석연찮지 뭐니. 혹시나 광병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와 보았는데…… 예상 이상이었어. 루드베키아, 네가 조각가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광병을 퍼뜨린 당사자일 줄이야.
(제 팔을 겹쳐 팔짱을 낀다. 일견 냉막한 음성이다.) 그림자 속에 숨을 수밖에 없는 여성 예술가들의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지 않니? 경위를 듣고 싶구나.
 
루드베키아 히르타:그건 내가 아니에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팔짱을 낀다.) 나는 그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라서요. (낮은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여성 예술가라고 하지 말아요, 하고.) 당신 생각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은 많아요. 그 모든 이들이 그림자 속에 숨은 게 아니라 빛이 그들을 가린거지. 보이지 않도록, 그리도 선명한 그림자를 내세우면서. 당신이라면 그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별반 다를 게 없었네.
내가 원한 건 동등한 위치이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서요. 이제는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연극을 끝내고 싶네요.
벤의 집에 장식되어 있던 그림을 보았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스스로 그림자로 숨어든 것과 빛에 의해 가려질 수밖에 없었던 건 분명 다른 거겠지. 네 말대로 내 표현이 미숙했구나. 하지만 루드베키아, 내가 놀란 건 감히 여자가 예술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가 조각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불평등한 사회에 동의 내지 일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오해란다.
광병을 퍼뜨린 당사자가 너는 아니었더라도 조각에 증표를 심은 건, 혹은 그러도록 동의한 건 너잖니? 책임이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상황을 모두 예상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 봤어. 그 화가는 대체 누구지? 누구길래 네게 그런 제안을 한 거야?
 
루드베키아 히르타:(오랜 시간 당신을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깜빡임을 반복한다. 때로는 간혹 내비치던 미소조차도 띄우지 않았다. 수 초 간의 침묵 끝에 스스로에게 말하듯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는다. 당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어.)
그 화가가 내게 제안하더군요. 세상을 바꾸어보지 않겠느냐고. 그 이유만으로 나는 수락했어요. 다만 그가 간과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내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거죠. 아이린, 나는 신을 믿어요. 아주 지독하게. 하지만 그건 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통해서예요. (이건 흘려듣도록 해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인다.)
이 광병의 원인은 그예요. 내게 그림을 선물하였던 화가, 나의 다른 동업자. (당신의 곁, 어딘가에 있을 남자를 바라보며 가만 미소 짓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믿는 신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하더군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신용하지 않아서. 그의 말과 다르게 세상을 고쳐보기로 했어요.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건 그쪽이었으니까.
어느 쪽이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까요? 결국 미쳐버린 안드리조 마이가 스스로 조각에 흠을 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까? (뒤이어 남자에게 말을 걸듯 소리를 전한다.) 에릭, 대답해봐요. 아니, 대답하지 말아요, 그냥 들어요.
아이린, 나는 사람을 찾은 거예요.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했던 사람을요.
 
루드베키아 히르타:그게 당신이었던 거고.
 
아이린 테라코르:내가 무얼 이해하지 못했단 거니? 예술가의 세계란 참 피곤하다니깐……. (작게 한숨을 내쉰다. 작품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다들 자신만의 강한 에고가 있는 법이라지.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걸 용인해주고 싶진 않지만.) 네가 모르는 것 같아 말해주자면 나비를 다루는 것도 예술의 한 형태에 속한단다.
세상을 바꾸어보고 싶단 포부, 좋지. 달콤한 제안이었을 거야. 이야기를 듣자하니 그 화가는 괴상한 신에 미쳐있는 것 같지만. (나였더라도 응했을 터다.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뒤에 숨어야만 하는 삶이 어찌 긍정적이겠는가. 뒤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있는 힘껏 손 내밀어 붙잡을 수밖에.)
(연극 때 루드베키아가 했었던 말이 지금 이렇게 연결된다. 누군가는 안티고네의 장례를 치루어주길 바랐다고 했었지.) 쭉 사람을 찾아다녔구나. 과연,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겠어. 하지만 네가 앞으로도 안드리조 마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상 오롯한 루드베키아 히르타로서의 업적은 가려지게 될 텐데, 괜찮니?
결국은 이 세상에 순응해야만 하는 처지잖아.
 
루드베키아 히르타:아이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내가 세상에 순응한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세상을 바꿀 거예요. 그게 내가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아이린 테라코르:……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되길 바라줄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된 거겠지. 위압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이 바라는 길을 간 안티고네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신념을 지킨 의지만은 불티처럼 남을 테니까.)
나 또한 불합리한 세상에 고개 숙이며 살고 싶지는 않거든.
자, 이 쪽지, 네가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증표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같구나. 이런 도구가 있니? (칼날 축성 방법이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많아요. 이곳에는 얼마든지 있어요.
 
자,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입니다.
 
당신은 마음을 정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좋아. 그걸 내게 주렴.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뤄줄 테니.
 
여자는,
 
아니,
 
조각가는 당신에게 눈짓합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정이 저곳에 있습니다.
 
순수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바꿀 도구가 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럼, 쪽지에 쓰여 있는 대로 칼날을 축성한다.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고, 그리 만들어진 도구로 황색의 증표를 내리쳤다.)
 
이성 1D4 주사위 판정하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3
 
정신력 5, 이성 3을 소모하여 칼날 축성을 시도합니다.
 
.
 
..
 
……오늘도 런던은 소낙비가 옵니다.
 
어김없이 새벽은 황록이오, 부닥치는 비명은 우울하메,
 
사회 규범과 위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물 옆으로 늘어진 시체, 구르고 죽이고 욕설하는 광인들, 죽은 눈동자, 우는 아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처절하고 식상한 만상,
 
그 속에서, 변수라고는 오로지 여기 이 작은 곁방 새벽 햇빛도 들다 말고 통풍도 영 볼품없는 작은 먼지 구덩이 방뿐인 것만 같습니다.
 
덕택에 당신은 쏟아지는 빗물 너머를 바라보는 대신 쇠로 된 연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조용히 한 시간이 지나 예물로 바친 피가 달라붙기를 기다립니다.
 
내리꽂히는 정에 걸릴 제동이란 없습니다.
 
반년을 꼬박 채운 여정 끝에 끼여, 당신은 비로소 세 갈래로 쪼개지는 안티고네의 눈동자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또 산산이 조각난 황색의 징표, 화가의 소원과, 언젠가 비에 푹 젖은 꼴로 찾아왔던 옆방 하숙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팔뚝에서는 흉터가 꿈틀거리고 손가락 사이로는 티켓 두 장을 끼운 채로 연극 한 편 보자고 묻던 여자.
 
루드베키아 히르타는, 다만 남은 작품을 마저 부수고 잔해를 쓸어 담습니다.
 
그리고 수로의 빈 배에 실어 선박 째로 밀어 버립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날이 완전히 밝으면 기사를 낼 거예요.
모든 전말에 대한 기사.
대중이 믿을지 그러지 않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거기까지가 내 목표였으니까요.
 
시원섭섭한 듯 홀가분한 듯 알 수 없는 덧붙임이 묵직한 새벽 공기를 타고 번집니다.
 
목소리의 스러지는 자취와 함께 동도 어느새 완전히 터 가고……
 
그렇게 어쩌면 무언가 바뀌었을지 모를 하루가 새로이 밝습니다.
 
.
 
.
 
.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들을 살펴보면
 
안티고네는 개인의 양심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폴리네이케스의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는 국가로서의 입장에 반해
 
안티고네의 장례는 폴리네이케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고 한
 
인간으로서의 인륜적·도덕적 행위
 
불공정한 사회 불문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ENDING 1: 안티고네는 순응하지 않는다.
 
PC 아이린 테라코르 생환
 
KPC 루드베키아 히르타 생환
 
시나리오 보상입니다.
 
칼날 축성 주문 획득, 이성 1D4 회복
 
아이린 테라코르:3
 
황색의 징표는 발동 효력을 상실하고 런던은 차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