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 테라코르:(저 흉터……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도 눈가의 흉터는 선명하게 들어온다. 역시, 낮이라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세상이다.)
이윽고 해석할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면서 당신에게 덤벼듭니다.
아이린 테라코르:
운
기준치:
49/24/9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에게 덤벼드는 남자를 바라보노라면 머지않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까이 다가온 그 남자는 그야말로 악의만 남은 자동 인형 같습니다.
누가 말을 걸든 살이 쓸리든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주변을 전혀 살펴보지 않는 점이 특히 그렇지요.
어쩌면 광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이 남자와 같은 상태인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새벽마다 벌어지는 이 난투극들도 아주 괴이한 일은 아닐 것일테고…….
의구심에 가까운 생각들을 확장하다 보면 불현듯 단단한 팔 한 짝이 당신과 남자 사이를 가르고 들어옵니다.
경찰입니다.
경찰들은 당신과 남자를 분리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상황을 정리합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해 온 손들은 모두 기계적이고 또 정확합니다만,
얼굴에서는 하나같이 전부 감추지 못한 지긋지긋함과 피곤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제압당하는 남자와 우악스러운 몸부림,
흩어지는 군중과 음울한 경찰들의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맞물려 굴러가는 광경이 괜히 기묘합니다.
그러나 남 일 같던 감상도 잠시일 뿐입니다.
남자의 제압을 마친 경찰이 곧 당신에게 다가와 동행을 요청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남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길에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제안입니다.
다친 곳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여 남자의 병이 전이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충격을 받았다면 병원에 머무르고 있는 닐 박사가 적절한 조언을 해 줄 것이고, 하며 덧붙이는 말이 깁니다.
외운 듯 흘러나오는 어투로 보아하니 형식적인 지침인 듯싶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편지 한 번 부치러 가기 험난하구나…… 군데군데 찢어진 드레스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쉰다. 아끼는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아 다행이지.)
(대체 어떤 경위로 이런 광증이 나타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제압된 남자처럼 자동 인형 같은 꼴이 되는 건 사양이다.) 함께 가죠.
당신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들과 함께 런던 시립 병원으로 이동합니다.
.
.
여기 광병이 창궐하기 이전에 한 번이라도 병원을 방문한 바 있는 사람이라면 곧장 알아차릴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이질적이기로는 이 거대한 병원도 옆의 미친 남자와 초췌한 경찰 그리고 삐걱삐걱 굴러가는 우리 사회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신 역시 그 이상한 분위기를 즉각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지하고 보자니 병원은 제2 격리 병동을 기준으로 좌우 건물을 둘러싼 분위기가 아주 판이합니다.
마치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처럼…….
아, 당신은 신문을 읽었으니 알겠지요.
그 이유가 제1, 제2 동에 격리된 환자들 때문임을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경찰은 당신과 남자를 이끌고 제1 병동으로 향합니다.
병동은 전반적으로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습니다.
긴 복도에 늘어선 방 한 칸 한 칸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중얼거림과 우짖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속 절차를 마친 경찰들은 남자를 빈방에 수감하듯 밀어 넣은 후 당신을 가장 깊숙한 방으로 안내합니다.
그러면 이미 그 방에 있던 비쩍 마른 남자 둘 중 하나가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상황을 설명한 경찰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일련의 동작이 이어집니다.
짧은 침묵이 감돕니다.
그동안 남자는 연신 다른 남자 쪽을 힐긋거리다 곧 정중한 투로 당신에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닐 박사:오시는 길에 이름 정도는 들으셨겠지만, 아이작 닐입니다. 이쪽은 존 모어 씨고요. 유명 인사시죠. 병 연구를 위해 간호인 대신 제가 종종 함께 있고는 하는데, 며칠 전부터 이상 행동을 보이시는 순간이 갑자기 늘어서…
그만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지 뭡니까. 모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아마 큰일은 없을 테니까요…….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흉터 유무를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전이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고들 하지요. 주로 얼굴이나 손, 팔 따위에 생기고, 꿈틀거리거나 기어 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어 불쾌한 기분을 유발합니다만…… 며칠에 걸쳐 생기는 경우도 있어서 말입니다. 다만 충격을 받으셨다면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고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왕 오셨으니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편히 질문하십시오.
아이린 테라코르:(병원은 런던의 우울한 분위기를 집약해둔 결정체 같다. 감옥처럼 가두어진 사람들. 빈방으로 밀어넣어지는 또 한 명의 사람. 작은 한숨을 내쉬며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존 모어라는 사람은 환자인 건가? 안심이 되지 않는걸. 최대한 문가에 가까이 섰다.)
치료법은 찾지 못했나요?
닐 박사:찾지 못했냐고요? 방법은 찾고 있습니다. 찾고 있어요. 분명 찾을 터이지요!
다만 이 병의 발단을 포함하여 흉터에 의해 전염이 이루어질 확률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존 모어 씨가 갑작스러운 이상 행동을 보이지만 않으셨다면 연구는 분명 어제보다 진전이 있었을 겁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아직 못 찾았단 뜻이군.) 이 사람에게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요? 일반 환자인 줄 알았는데.
닐 박사:이 치는 일반 환자와는 조금 다릅니다. 한 달 전부터 시작된 이 광병의 초기 발병자들은 모두 이 쪽, 존 모어 씨와 연관이 되어있지요.
특히나 하나같이 사회의 고위계층에 속하는 귀족 나으리들 뿐이시니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 일이 아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가씨께서는 (당신을 한번 바라보다 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무사하신가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귀족……? 왜 하필 그들에게…… 특정한 연관점이라도 있나요? (이는 또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인다.)
(마찬가지로 제 팔을 흘끗 내려다봤다.) 한 번 흉터가 생기고 나면,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며칠 정도 걸리는지 아시나요?
닐 박사: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들과 여기 존 모어 씨의 연관점을 찾고자 알게 된 것은 그저 이 존 모어 씨께서 예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 뿐이었지요. 어찌, 아가씨께서는 예술에 일가견이 있으십니까?
증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사흘이 걸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보름이 걸리는 이도 있습니다. 무엇이 흉터를 전염시키는지 알아내지는 못하였으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이렇게 꿈틀거리는 흉터가 있는 자는 누렇게 살이 퇴색된다는 점 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또 예술인가? 사흘 전 루드베키아와 조우한 이후로 갑작스럽게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 귀족들이 초기 발병자고, 존 모어와 연관이 되어있는 거라면…… 귀족들이나 즐길 만한 고아한 예술을 관람하다가 시작이 된 건 아닌가? 갑자기, 오늘 연극을 보러 가도 되는 건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번 문답을 주고받고 있노라면 언젠가부터 자꾸 잡음처럼 끼어드는 작고 쉰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안드리조 마이. 다사 이 이름을 보게 되는구나. 생각보다도 더 유명한 예술가였네. 하지만 여기엔 석조각가라고 나와 있는데, 알렉사의 집에는 그림이 걸려 있지 않았던가? 조각가와 화가를 겸업할 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건가.)
(남자의 사진을 물끄럼 들여다보다 잡지를 몇 장 넘겼다. 흐으음. 연극을 보러가려고 했을 때 계속 이런 소식들이 보이면, 약속을 취소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단 말이지. 루드베키아와 초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원조자라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도 이런 무리들 중 하나일지 모르지. 의심은 냉정한 갈퀴처럼 뻗는다. 이번 연극을 관람하고 나서 판단을 다시 내려야겠어.)
(문학 칸으로 가본다. 제목만 보면 평범하게 그리스 신화를 다룬 것 같았는데.)
문학 칸에는 주로 유명 극작가들의 희곡이나 시, 소네트 등을 정리한 책들이 책장을 채우고 있습니다.
수요가 많은 부류인 탓에 대부분은 상하고 떨어진 자국이 상당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빽빽하게 끼인 책들 사이에서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를 번역해 소설로 다듬은 도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코트의 벌어진 품을 정리하거나 극장 티켓을 챙기거나 하는 여자의 분주한 움직임만큼은 미약한 태양광을 역으로 받아 가며 짙은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낮 동안 얻은 정보로 미루어 보아 분명 어떠한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도 같으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지금은 그저 평범한 중산층 여성과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은 지 몇 분,
곧 준비를 마친 여자가 방 밖으로 걸어 나오며 묻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시간 맞춰 돌아왔군요. 준비는 다 되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멀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응. 갈까. (표면적으로는 무감한 낯이지만, 속으론 루드베키아가 잡지에 언급된 종교를 숭상하는 건 아닐지, 연극을 보여주는 목적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 마음을 놓지 말아야지.)
루드베키아 히르타:(평소와 다름없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당신과 밖으로 나선다.) 밖에서 무얼 하고 왔어요?
아이린 테라코르:편지를 부치려고 했는데, 광인을 만났지 뭐니. (어깨를 으쓱인다.) 옷 갈아입은 거 보이지? 싸우다가 드레스 곳곳이 찢어졌어. 뜻하지 않게 병원까지 다녀왔지.
루드베키아 히르타:저런. 큰일을 치르고 왔군요. 하지만 극장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사람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다들 쉬쉬해 하는 분위기니까요.
당신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산업혁명 이후로는 관람객들의 계층이 확대되면서 중산층 사람들이 익숙해하던 분위기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시선이 많아요. 뭐,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취객이나 도박꾼들이 그리 기승을 부린다고 극장으로 가는 사람이 대폭 줄었었으니.
요즘에야 공연 규제도 풀리고 소극장도 발달하기 시작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지만 시기가 도와주지를 않네요. 광병만 없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이린, 만약 당신이 곱게 자랐다면 극장가 모습이 불편할 수는 있겠어요. 이 모든 것이 전부 회복되려면 아마 앞으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테니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진짜 의미심장하네. 더 의심스럽게) 몇 년이나 걸리게 되려나. 하긴, 한 번 침체된 시장이 다시 살아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
곱게만 자란 건 아니니 그런 건 신경써주지 않아도 돼. 그래도 조금 걱정되긴 하는구나. 사람이 적다곤 해도 연극의 커다란 소리나 꺼진 조명 탓에 광인이 내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까 봐. 루드베키아, 너도 조심하렴. 알겠지?
루드베키아 히르타:꼴이 말이 아니지요, 친절한 사람. (작게 웃는다.) 당신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지요. 그곳만큼은 광병과 가장 관련이 적은 곳일 터이니.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다보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극장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안심이 되네. (진짜 얼마나 관계가 깊은 거야)
가볍게 훑어보자니 여자의 설명에 걸맞게 죽 늘어선 소극장들의 수가 과연 한번 헤아려 볼 만도 합니다.
다만, 동시에 그것들은 모두 그 어귀에서부터 황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또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이는 가로등과 사람 없는 샛길들, 정돈되지 않은 꺼칠한 보도,
이곳저곳 굴러다니는 술병과 옷 조각들, 간간이 건물 밖으로 삐져나오는 고성, 왁자한 조롱, 웃음소리……
뭐 그런 것들 역시도 확실히 중산층 이상의 신사 숙녀에게는 익숙지 않을 풍경입니다.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으며 애당초 괜찮은 척조차 할 의지가 없으므로 더더욱 그렇지요.
루드베키아 히르타:그때도 말했지만 인생이 곡 연극이라고, 현실이 아주 거대한 어항 속에 가라앉은 것만 같지 않나요? 그래도 극에 대한 반응만큼은 좋다고들 하니 기대해도 좋아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당신을 오른편의 구석진 소극장으로 데려갑니다.
당신이 방문한 이 극장은 소극장 중에서 꽤 규모가 있는 편입니다.
무어, 운이 좋다면 공연 규제가 완화되면서 대형 극장이 독점하고 있던 정규 연극의 갈래를 분담하게 된 극장 중 하나라고,
누군가의 설명하는 말소리를 듣게 될 지도 모르지요.
객석은 적당히 한산하므로 관람하기 좋은 자리를 골라 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듯 싶습니다.
당신과 여자가 완전히 착석하고 나면 이윽고 극도 천천히 막을 올립니다.
시점은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명령이 얼마나 부당한지 외치는 때.
그녀의 등장을 알리는 코러스가 천천히 극장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코러스:“저기 들판에 방치당한 폴리네이케스의 육신을 보라! 흙 아래 묻히지 못하고 새에게 살점을 뜯기는 식은 몸뚱이를……. 오, 그쪽으로 그의 누이가 가는구나! 외숙의 명령을 어기고, 도무지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여자가 지금 들판으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울부짖고 있다. 왕이시여, 당신의 처사는 하데스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것 ……”
안티고네:“…… 매정한 테바이의 장군, 크레온이여! 파수꾼이 보고한 바가 실로 옳습니다. 내 오라비는 마르고 차가운 땅바닥 위에서 썩어 가고 있었고, 바로 내가 그에게 모래를 뿌렸지요! 그것은 폴리네이케스에게도 그의 형제와 같은 애곡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내 형제를 매장할 권리가 있듯이!”
크레온:“어리석은 여자야, 너는 테바이 전역에 내려진 명령을 듣지 못했느냐? 폴리네이케스는 조국 땅을 훼손하려 한 반역자,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내가 말한 바에 따라 너를 죽여야 한다! ……”
연기 때문인지 코러스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이 내용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여자가 장담한 대로 연극은 몰입감이 썩 괜찮습니다.
한창 극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장면이 바뀝니다.
막이 잠시 내려가고,
그 사이 여자가 넌지시 당신에게 질문을 던져 옵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이 희곡을 알고 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이런 불경기에서도 몰입이 괜찮은 걸 보니, 노력했겠네. 그나저나 배우들 중에 광증이 도지는 이가 생기기라도 하면 애를 먹겠어.) 줄거리 정도는. 오늘 나갔다가 도서관에 들렸거든. 관련된 책이 있기에 읽어봤어.
루드베키아 히르타:예습에 철저한 사람이었군요.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많은가봐요? (미소를 띄운 채 가만히 당신을 응시한다.)
아이린 테라코르:따지자면 별로 관심이 많진 않아. 이건 너랑 보러 가기로 약속한 연극이고, 마침 책이 있었으니 읽어본 것뿐. 그런 너는? 이 연극이 세워지는 데 얼마간 관련된 것 같은데…… 연극 자체를 좋아하는 거니, 아니면 그리스 신화를 다룬 내용이라 특별히 더 관심을 갖기라도?
루드베키아 히르타:(가만 눈을 깜빡이며 눈웃음을 짓는다. 글쎄요, 하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그리스 신화는 아주 오래 전부터 쓰기 좋은 소재였어요. 으레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리스의 비극 시인이라고 하면 보통 세 사람을 꼽고는 해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극은 소포클레스의 희곡이 각색의 근간이지만 다른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 역시 안티고네에 대해 다룬 적 있었죠. 나는 그 희곡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들어요. 안티고네와 하이몬이 죽지 않고 떠나거든요. 사실 해피엔딩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를 묻어 줄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 극에서는 살아남는 것마저 불가능하겠지만요. 나도 알아요.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가 제대로 된 장례라도 치른다면 좋을텐데 여기나 저기나 그 부분까지는 나오지도 않겠죠.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금세 다시 막이 올라갑니다.
흐뜨러졌던 분위기도 빠르게 갈무리 되고,
그러면 여자도 마치 처음부터 아무 말 않았던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시선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무대에서는 한창 하이몬 역을 맡은 배우가 크레온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리스 신화가 여러모로 창작에 쓰이기 좋은 소재이긴 하지. 그나저나 엄청난 신화 매니안가 봐)
하이몬:“……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신께서 조국을, 이 테바이를 사랑하는 자애롭고 현명한 왕이라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저는 단지 헤아려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안티고네에게도 그녀 나름의 마땅한 이유는 있었음을 말입니다……. 아아, 가여운 안티고네! 정녕 아버지께서는 저를 시체와 결혼시키고자 하시는 겁니까?”
크레온:“그 여자는 네 혼약자가 아니다. 물론 이스메네의 언니도 아니지! 그러니 시체와 혼인할 일 역시 일어나지 않을 터, 불효자야 괜히 애통해하지 말아라! ……”
코러스:“아이아이, 기어이 안티고네가 끌려간다. 이승도 저승도 되지 못한 곳으로 질질 끌려 죽으러 간다. 송별하는 시민들의 울음이 크레온의 집까지 흘러 지엄한 왕을 괴롭힐지어다! 여자는 그 와중에도 결단코 부끄러워하지 않누나…….”
안티고네:“내가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려 할 때 이스메네가 말하더이다. 우리의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하라고 또 우리의 오라비들이 어떻게 시체가 되었는지 이 집안이 신들로부터 얼마나 큰 미움과 재앙을 받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여자이며 그것은 즉 우리가 약자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그러므로 순응할 수밖에는 없다는 거지요. 다만 나는 이 가련한 누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죽을지언정 오라비를 묻어 주어야겠노라!”
“…… 전부 엉망진창인 극본이야! …… 보다야 한참 못하다고! …… 에 대한 숭배란 이런 게 아니지, 그분께서 원하는 미학이란, 오, 거기 숭고한 의미, 법도, 양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야! 끓어오르는 누런 시체들만이 ……”
……
정말이지 끔찍한 고함입니다.
거하게 난동을 피운 모양인지 사방에는 온통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습니다.
근처 좌석은 싸구려 포도주로 흠뻑 젖어 엉망입니다.
그 덕에 자기 자리를 잃은 여자도 곤혹스러운 얼굴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가장 불운한 사실은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은 만취자의 손등 위에서 갈퀴 모양의 흉터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힘줄처럼.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소리지만, 아무래도 이 치에게 어지간한 대화는 통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흉터를 발견하곤 눈이 가늘어진다. 루드베키아를 말리듯 속삭였다.) 병원에 갔을 적 권위자라는 박사가 말하더라. 흉터가 생기면 곧 광증이 도지게 된대. 저 사람 손등 보이지? 괜히 나섰다가 얽히지 말고 물러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당신의 말을 들었는지 그도 아닌지,
여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취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 정확히는 광병에 걸린 그 자를 말입니다.
허나 당신의 충고도 있으니 여자가 정말 상식적인 인물이라면 그 자리에서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을테지요.
여자가 정말 상식적인 인물이라면 말입니다.
.
..
만취자가 잠잠해지건 기어코 경찰이 그를 끌고 나가건
여하튼 상황이 완전히 정리되고 나면, 연극이 재개되기 직전에 어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말을 걸어옵니다.
가만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방금의 소란으로 좌석을 잃은 여자입니다.
자리를 잃은 여자:도와줘서 고마워요. 비명이 관람에 불편을 끼쳤다면 미안하군요. 다름이 아니라… 원래 앉아 있던 자리가 엉망인데, 다시 혼자 앉으려니 역시 조금 불안해서 말예요……. 혹시 옆 좌석이 비어 있다면 동석을 요청해도 괜찮을까요?
두 사람의 옆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배려를 베풀도록 할까요.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어도 좋겠지요.
아이린 테라코르:그런 상황에선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겠죠. 사과할 필욘 없어요. (내 자리도 아닌데 뭐.) 편한 대로 하세요.
여자는 짧게 감사를 표하고 당신 옆으로 난 빈 좌석에 착석합니다.
그리고 진행되는 극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엽니다.
자리를 잃었던 여자:연극은 마음에 드나요?
아이린 테라코르:네, 극장가 상황이 안 좋은 걸로 아는데도 꽤 수작이네요.
자리를 잃었던 여자:어머, 고마워요. 그것만으로도 멋진 감상평이거든요.
아이린 테라코르:(이 사람도 관계자?)
자리를 잃었던 여자:(당신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작게 소근거린다.) 이 극을 집필한 사람이에요.
무명 극작가의 작품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정말 이름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숨기는 편이 차라리 낫다 보니 자연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뿐인 거지. 이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그렇잖아요. 문학계도 그렇지만…… 조각이나 회화, 음악 같은 경우도 크게 예외는 없을 거예요.
아이린 테라코르:어머, 그렇군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의 예술과 업적은 언제나 가려지기 마련.)
그쪽이야말로 배우들의 연기는 흡족하신가요?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가 있을 거 아녜요.
자리를 잃었던 여자:제가 하는 일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 언제나 거기까지랍니다. 저는 이름없는 창조자에 불과해요. 제가 무엇을 바라던 숨을 불어넣어주는 역은 언제나 저들이 대신해 주는 걸요.
극작가는 조금은 쓸쓸한 듯 웃습니다.
하지만 마냥 싫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아아,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덧 극이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조촐한 커튼콜.
어수선한 무대 인사와 박수 소리 사이로 자리를 잃었던 여자-극작가도 곧 몸을 일으키고 가볍게 인사를 건넵니다.
자리를 잃었던 여자:관람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럼 남은 하루도 무탈하게 보내시기를.
지그시 앞섶을 누른 손, 살짝 숙인 상체, 정갈히 잡아 들어 올린 치맛자락,
그리고 멀어지는 뒷모습…….
슬금슬금 가로등에는 불이 붙고…
루드베키아 히르타:무슨 생각이 들어요?
아이린 테라코르:연극을 끝까지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연극에 대한 감상을 좀 더 풀어 말해줄까?
루드베키아 히르타:극에 대한 감상은 나보다 그이에게 하는 편이 더 좋았을텐데도. (작게 웃는다.)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린 테라코르:수작이란 정도로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극작가에겐 그만하면 아주 좋은 칭찬 아니니? (천성적으로 낭만이나 화려한 화술과는 연이 없는 사람.)
난 안티고네가 죽지 않았음 좋겠어. 내가 읽은 책에선 크레온을 국가, 안티고네를 국가에 대항하는 개인으로 보던데, 국가의 강압적인 힘에 밀려 무릎 꿇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끝끝내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이도 있잖니.
루드베키아 히르타:그도 당신이 남긴 감상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군요. 예술가에게 그보다 더한 칭찬은 아마도 없을 거예요. 무어, 타인에게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만큼은 조금 아쉽지만.
박한 세상이지요. 어느 곳이든 그들이 존재하는 것을 반겨주지 않는 것처럼 세상은 그를 내치기도 하고요.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안티고네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나는 그래서 안티고네가 마음에 들어요, 하고.)
…―누군가는 안티고네의 장례를 치뤄주었으면 했어요. 그게 내가 바라는 일이라서요.
……목소리를 따라 흔들리는 구름의 빛깔이 문득 청회색을 띱니다.
자각지도 못한 새 하늘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찾아온 관객들도 거의 기존의 자리로 되돌아갔고
훅 줄어든 유동 인구 탓에 자연히 주변 분위기도 한껏 가라앉습니다.
껌벅거리는 깨진 가로등의 불빛과 형형한 눈을 하고 기어 나올 순간을 재는 광자 무리들 탓에 더욱이 그러합니다.
아이린 테라코르:약자를 대표하는 사람 같아서? (마음에 든다는 질문에, 그리 물었다.) 혹은 소수자일 수도 있겠구나. (극장가에서 상연될 만한 극을 썼음에도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무명으로 적힐 수밖에 없던 그 극작가처럼.)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이들에게 눈을 돌리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 (씁쓸한 세상이다.)
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안드리조 마이라는 사람이랑은 어떤 관계니? 그 사람 조각가라던데, 가장 찬사를 받은 작품이 안티고네와 관련있어 보여서 말야.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이랬던가.)
루드베키아 히르타:후후, 글쎄요. 어쩌면 내가 안티고네와 닮았다고 생각되는 걸지도 모르죠.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웃는다.)
내리쬐는 빛이 강하다면 그림자 역시 더욱 짙어지기 마련인데 많은 이들은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요.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어지는 당신의 말에 여자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이릅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미안해요, 그 질문에는 내가 대답하지 못하겠네요. 그에 대한 평가는 내게는 힘든 일이라서요.
아이린, 나는 들러야 할 곳이 있어요. 당신 먼저 돌아가도 괜찮겠나요?
아이린 테라코르:그저 네가 그 사람과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을 뿐이야. 이번 연극에도 관련이 있는 건가 싶어서.
루드베키아 히르타:(가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벤에게 내가 늦을 수도 있다고만 전해주세요. 다만 걱정하지 마라는 말도 함께요. 늦지 않게는 돌아갈테니.
어쩌면 도시를 덮친 이 원인 불명의 유행병에 안드리조 마이가 무슨 기여를 한 것은 아닌가.
그런 추측이 뇌 내에서 성립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 당신은 여기서 기로에 놓입니다.
이 수상쩍은 조각가를 쫓아가 볼지 외면할지에 관한 기로.
아이린 테라코르:(존 모어의 중얼거림이 문득 오버랩된다. 초기 발병자들은 모두 그와 연관되어 있었고 하나같이 귀족이었다 하던가. 작품, 그리고 떠오르는 신흥 예술가 안드리조 마이…… 꺼림칙한걸.)
(곧 어두워질 텐데. 안전을 위해 귀가를 할지, 수상한 예술가를 좇아갈지…… 평상시라면 당연히 전자겠지만, 광증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면 눈을 감고 지나치긴 어려운 일이다. 편지를 보내는 평범한 외출에서 광인과 마주쳐 위협을 당하는 일을 다시금 겪는 건 질색이었으므로.)
(인적을 숨기는 데는 능숙한 편이었으므로, 깔려오는 어둠 사이에 숨어 조각가의 뒤를 밟기로 한다.)
당신은 안드리조 마이의 뒤를 밟기로 합니다.
남자는 수로를 따라 한참을 움직이더니 머잖아 좁고 깊숙한 골목 구석의 작은 건물로 들어갑니다.
‘미친 자들이 섬기는 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형언할 수 없는 자의 산물은 목격자에게 지독한 저주만을 가져올 뿐이다. 표식과 저주는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간혹, 몇 세기에 한 번씩 미쳐 버린 예술가들이 재현하고자 만들어 내는 모조품 역시 작동 원리는 매한가지다. 물론 한갓 인간 따위가 흉내 낸 가짜 문양은 원조만큼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원인이 되는 모조품을 완전히 훼손할 때 영향력이 소거된다는 한계가 있다. 만약 이미 징표를 목격한 자들마저 구제하고 싶은 혹자가 있다면 그 방법에 유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아이린 테라코르:(흉터라고 여겼던 게 실은 증표라는 것이었군. 꿈틀거리는 듯 보이는 외견과 발병하는 증세마저 동일하다. 이런 자료를 모아둔 걸로 보아 혐의는 명백하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지만, 미친 자의 심리는 제가 안다고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지.)
SAN Roll
기준치:
42/21/8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아이린 테라코르:(자료의 아랫부분을 손끝으로 훑는다.모조품을 완전히 훼손할 때 영향력이 소거된다…… 파훼법은 이것일 테다. 그 모조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가 문제겠지만.)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다. 숨겨둘 만한 비밀 공간이 있다면, 문도 있겠지.)
정돈되지 않은 바닥은 난잡합니다.
정과 망치 같은 작업 도구들, 부서진 돌조각,
구겨진 종이와 목탄이 발에 차이고, 바닥 틈새에는 석고 가루가 껴 기관지에 유해할 게 뻔한 얇은 연기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분별없이 굴러다니는 것 중에는 완성되지 못한 작품의 일부도 있습니다.
석고상의 부러진 목, 떨어져 나온 팔뚝 같은 류 말입니다.
미관상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마는…
그렇다고 벽에 걸려 있던 작품이나 서류의 삽화만큼 불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창 작업실을 뒤적이는 데 몰두하고 있노라면, 당신은 문득 갈빗대 바로 밑으로부터 어떤 선득함을 수신받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당신이 예민할수록 혹은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해 보았을수록 마땅히 익숙할 느낌입니다.
남몰래 무언갈 시도하는 자들의 몸이 으레 가지는 육감.
그래요, 그런 느낌.
잘못 맞물린 문틈은 신체 반응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무섭게 음산하고 섬뜩한 소음을 내지릅니다.
양 귀가 예측하기로 당신이 들어온 방향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리를 뱉은 쪽은 반대편 벽…….
잘 보이지도 않고, 기껏해야 옷가지 아니면 벽시계나 걸려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벽에서,
…툭 튀어나온 작업실의 주인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 젊고 지친 얼굴은 경악스러움으로 잠시 굳는가 하더니 빠르게 의심 가득한 낯으로 변화합니다.
또 신속히 당신을 훑어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식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안드리조 마이:누구십니까? 어떻게 들어왔지요?
아이린 테라코르:(아무래도 당연히 그런 걸 물어보겠지. 뭐라고 해야 하지 진짜? 그냥 상식적인 침입자인데요.)
(상식적인 침입자)
아이린 테라코르:…… 루드베키아 히르타의 친구예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아는 이름을 내뱉어본다. 미안해 루드베키아.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니?)
안드리조 마이:히르타 양의 친구요? 그 아일랜드 여자 말입니까? (뒤이어 작게 소리가 들려온다. 오, 하느님 맙소사.)
아이린 테라코르:멋대로 쫓아온 건 미안하지만, 좀 수상해서요.
당신, 황색의 증표와 어떤 관련이 있죠?
안드리조 마이:이봐요, 아가씨, 그건 내가 하고싶은 말입니다! 나도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단 말이오.
아이린 테라코르:……?
안드리조 마이:나는, 나는 안드리조 마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안드리조 마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각가는 존재하지 않아요. 아마 동명인도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그렇습니다.
이건 후원자의 죽은 아들 이름을 빌렸으니까.
아이린 테라코르:루드베키아의 생각을 말하는 건가요? (원조자라는 것처럼 말해서 가까운 줄 알았는데. 이용당하고 있던 건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겠군요. 왜죠?
안드리조 마이:히르타 양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녀의 대역에 불과하고.
허수아비 대역이 실제로 조각을 할 일은 아무래도 없잖습니까?
당신이 조각가 안드리조 마이를 찾았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가 아닙니다.
조각가는 언제나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이 이름을 사용할 때든 그러지 않았을 때든.
당신이 찾은 자료들은 전부 제가 조사한 것들입니다. 모두 히르타 양때문에요. 물론 동업자를 의심하는 일이 여러모로 좋을 게 없는 짓이란 건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그냥 두기에는 어느 순간부터 상황이 영 미심쩍게 돌아갔어요. 추측하기론 웬 무명 화가가 돌연 히르타 양에게 접근했을 때 즈음부터…….
안드리조 마이:내가 달리 뭘 어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한배를 탔는걸, 뭐라도 알아보아야지… 모르는 체하기에는 늦었더군요. 덕분에 이제는 그 화가가 그린 그림만 봐도 넌더리가 납니다. 아가씨가 올라오면서 벽에 걸린 섬뜩한 것들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보는 되는 대로 모았습니다. 겸사겸사 안 좋은 소문들은 좀 가렸고, 어쨌든 확정된 사실은 아니니까요……. 히르타 양이 존 모어나 유행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가정 말입니다. 이렇게 무너뜨리기엔 명성 쌓자고 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사실로 판명이 나면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대도요.
…어떻게, 레이디께선 어떻게, 감이 오십니까? 나는 머리도 더 안 굴러갈 지경입니다. 대놓고 얘기라도 꺼내 볼까 싶어서 찾아온 건데 정작 약속한 사람은 오지도 않고, 저 안에 있나 해서 들어갔더니 텅 빈 건 다를 바 없고.
상황을 설명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주인의 피로를 대변하듯 한숨처럼 흩어집니다.
유별나다 할 것도 없는 맥 빠진 울림. 그러나 그런 남자의 탄식조 목소리 사이에서 탁 걸려드는 두 음절이 있습니다.
‘저 안’.
그가 사라지고 또 도로 모습을 드러냈던 벽과 벽 너머를 지칭하는 말 말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등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곳은 벤 부인의 관리하에 있는 하숙집 방을 제외하면 당신이 살펴보지 않은 거의 유일한 장소입니다.
바닥에 설치된 쪽문은 대강 살피는 사람은 미처 존재 여부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감쪽같습니다.
손잡이 대용으로 바닥 결을 따라 작은 홈이 파여 있고, 평균 크기의 손가락 네 개 정도는 끼울 수 있을 법합니다.
밀거나 당겨 여는 형식으로 비추어지나, 바깥에서부터 잠가 버렸는지 실제로 열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방을 다 둘러보고 난 후.
감각하기로, 어느새 주변은 한 박자 느릿하게 굴러가는 중입니다.
뒤에서 당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청년의 움질거림도 바닥 위로 얇게 이는 먼지와 석고 가루도 입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공기 냄새도.
어쩐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부여받은 것 같습니다.
비록 연극 관람을 마치고서처럼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어 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얻어 낸 정보들을 수합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채우거나 추론해야 하며, 스스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렇게 할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어느 정도 생각과 감정을 정돈했을 때 즈음, 그쯤이면, 을씨년스러운 소음과 함께 문득 바닥이 덜걱입니다.
낭패감 어린 얼굴로 청년이 중얼거립니다.
그러니까, 이건 꼭, 종전에 살핀 쪽문 밖에서부터 누군가가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새라고.
더하여,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고.
…….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런 짐작은 금세 확신으로 탈바꿈합니다.
벽에 걸려 있던 희미한 불빛이 가볍게 한 차례 휘청거리고, 그 소란스러운 덜컹거림 끝에 드러나고 만 것은,
더없이 새카만 통로와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은 그 여자, 루드베키아 히르타의 멀건 정수리…….
결국 고개를 꺾은 여자와 눈이 마주칩니다.
쪽문 뚜껑은 넘어가고, 침을 삼키던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키고, 난입한 한 명분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지는 와중에.
여자는 상체를 들이밀다 만 자세로 당신을 바라보고, 말간 보랏빛 두 눈을 두어 번 껌뻑이다가,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엽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이군요.
아이린 테라코르:그래, 나야. (태연하게 대답한다. 루드베키아를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끔 톤을 유의하며) 갈 곳이 있다더니 여기였니?
루드베키아 히르타:당신이야말로. 돌아갈 곳이 이 곳이었던가요?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당신을 바라본다. 당신의 뒤에 있는 남자도 함께.) 나는 그저 당신이 벤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했었는데 말이죠. 할 이야기가 정말 많겠어요.
어디까지 알아낸 거죠?
아이린 테라코르:일부러 온 건 아니었단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이 사람을 봤는데, 어딘가 석연찮지 뭐니. 혹시나 광병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와 보았는데…… 예상 이상이었어. 루드베키아, 네가 조각가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광병을 퍼뜨린 당사자일 줄이야.
(제 팔을 겹쳐 팔짱을 낀다. 일견 냉막한 음성이다.) 그림자 속에 숨을 수밖에 없는 여성 예술가들의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지 않니? 경위를 듣고 싶구나.
루드베키아 히르타:그건 내가 아니에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팔짱을 낀다.) 나는 그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라서요. (낮은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여성 예술가라고 하지 말아요, 하고.) 당신 생각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들은 많아요. 그 모든 이들이 그림자 속에 숨은 게 아니라 빛이 그들을 가린거지. 보이지 않도록, 그리도 선명한 그림자를 내세우면서. 당신이라면 그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별반 다를 게 없었네.
내가 원한 건 동등한 위치이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서요. 이제는 지긋지긋하고 지독한 연극을 끝내고 싶네요.
벤의 집에 장식되어 있던 그림을 보았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스스로 그림자로 숨어든 것과 빛에 의해가려질 수밖에없었던 건 분명 다른 거겠지. 네 말대로 내 표현이 미숙했구나. 하지만 루드베키아, 내가 놀란 건 감히 여자가 예술을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가 조각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불평등한 사회에 동의 내지 일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오해란다.
광병을 퍼뜨린 당사자가 너는 아니었더라도 조각에 증표를 심은 건, 혹은 그러도록 동의한 건 너잖니? 책임이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상황을 모두 예상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 봤어. 그 화가는 대체 누구지? 누구길래 네게 그런 제안을 한 거야?
루드베키아 히르타:(오랜 시간 당신을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깜빡임을 반복한다. 때로는 간혹 내비치던 미소조차도 띄우지 않았다. 수 초 간의 침묵 끝에 스스로에게 말하듯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는다. 당신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어.)
그 화가가 내게 제안하더군요. 세상을 바꾸어보지 않겠느냐고. 그 이유만으로 나는 수락했어요. 다만 그가 간과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내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거죠. 아이린, 나는 신을 믿어요. 아주 지독하게. 하지만 그건 축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통해서예요. (이건 흘려듣도록 해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인다.)
이 광병의 원인은 그예요. 내게 그림을 선물하였던 화가, 나의 다른 동업자. (당신의 곁, 어딘가에 있을 남자를 바라보며 가만 미소 짓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믿는 신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하더군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신용하지 않아서. 그의 말과 다르게 세상을 고쳐보기로 했어요. 처음부터 내가 원하던 건 그쪽이었으니까.
어느 쪽이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까요? 결국 미쳐버린 안드리조 마이가 스스로 조각에 흠을 내었다.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을까? (뒤이어 남자에게 말을 걸듯 소리를 전한다.) 에릭, 대답해봐요. 아니, 대답하지 말아요, 그냥 들어요.
아이린, 나는 사람을 찾은 거예요.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했던 사람을요.
루드베키아 히르타:그게 당신이었던 거고.
아이린 테라코르:내가 무얼 이해하지 못했단 거니? 예술가의 세계란 참 피곤하다니깐……. (작게 한숨을 내쉰다. 작품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다들 자신만의 강한 에고가 있는 법이라지.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걸 용인해주고 싶진 않지만.) 네가 모르는 것 같아 말해주자면 나비를 다루는 것도 예술의 한 형태에 속한단다.
세상을 바꾸어보고 싶단 포부, 좋지. 달콤한 제안이었을 거야. 이야기를 듣자하니 그 화가는 괴상한 신에 미쳐있는 것 같지만. (나였더라도 응했을 터다. 자신의 이름조차 드러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뒤에 숨어야만 하는 삶이 어찌 긍정적이겠는가. 뒤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있는 힘껏 손 내밀어 붙잡을 수밖에.)
(연극 때 루드베키아가 했었던 말이 지금 이렇게 연결된다. 누군가는 안티고네의 장례를 치루어주길 바랐다고 했었지.) 쭉 사람을 찾아다녔구나. 과연, 극적인 효과를 낼 수 있겠어. 하지만 네가 앞으로도 안드리조 마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상 오롯한 루드베키아 히르타로서의 업적은 가려지게 될 텐데, 괜찮니?
결국은 이 세상에 순응해야만 하는 처지잖아.
루드베키아 히르타:아이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내가 세상에 순응한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세상을 바꿀 거예요. 그게 내가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아이린 테라코르:……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되길 바라줄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된 거겠지. 위압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신이 바라는 길을 간 안티고네처럼.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신념을 지킨 의지만은 불티처럼 남을 테니까.)
나 또한 불합리한 세상에 고개 숙이며 살고 싶지는 않거든.
자, 이 쪽지, 네가 찾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증표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같구나. 이런 도구가 있니? (칼날 축성 방법이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다.)
루드베키아 히르타:…―많아요. 이곳에는 얼마든지 있어요.
자,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입니다.
당신은 마음을 정했나요?
아이린 테라코르:좋아. 그걸 내게 주렴. 안티고네와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뤄줄 테니.
여자는,
아니,
조각가는 당신에게 눈짓합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정이 저곳에 있습니다.
순수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바꿀 도구가 말입니다.
아이린 테라코르:(그럼, 쪽지에 쓰여 있는 대로 칼날을 축성한다.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고, 그리 만들어진 도구로 황색의 증표를 내리쳤다.)
이성 1D4 주사위 판정하겠습니다.
아이린 테라코르:3
정신력 5, 이성 3을 소모하여 칼날 축성을 시도합니다.
.
..
……오늘도 런던은 소낙비가 옵니다.
어김없이 새벽은 황록이오, 부닥치는 비명은 우울하메,
사회 규범과 위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오물 옆으로 늘어진 시체, 구르고 죽이고 욕설하는 광인들, 죽은 눈동자, 우는 아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처절하고 식상한 만상,
그 속에서, 변수라고는 오로지 여기 이 작은 곁방 새벽 햇빛도 들다 말고 통풍도 영 볼품없는 작은 먼지 구덩이 방뿐인 것만 같습니다.
덕택에 당신은 쏟아지는 빗물 너머를 바라보는 대신 쇠로 된 연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조용히 한 시간이 지나 예물로 바친 피가 달라붙기를 기다립니다.
내리꽂히는 정에 걸릴 제동이란 없습니다.
반년을 꼬박 채운 여정 끝에 끼여, 당신은 비로소 세 갈래로 쪼개지는 안티고네의 눈동자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또 산산이 조각난 황색의 징표, 화가의 소원과, 언젠가 비에 푹 젖은 꼴로 찾아왔던 옆방 하숙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팔뚝에서는 흉터가 꿈틀거리고 손가락 사이로는 티켓 두 장을 끼운 채로 연극 한 편 보자고 묻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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