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타임 : 15시간 반
바위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온 그가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거품처럼 부드럽게 감기는 파도를 느끼며 고개를 젖힙니다.
그리고 넘쳐 흐르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듯 두 눈을 내리감습니다.
빛줄기가 눈가 위에 고이자 검은 속눈썹이 황금색으로 반짝입니다.
무슨 화제인지 깨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말들을 나누다, 악곡이 끝나면 바닷가로 이어진 무도회장을 떠나 손을 잡고 달렸습니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구성된 해변을 밟으면서 발가락 사이를 간지르는 모래의 온도를 즐겼습니다.
조심스레 손을 찾아 깍지를 끼면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서로 잘 맞물렸고-
참았던 말을 터뜨리려 입술을 벌리는 순간에 정신이 듭니다.
내 말이 들린다면 손을 움직여 봐.
지는 해를 등에 건 탓에 온통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저무는 무역풍과 탄산 같은 폭발음이 세상을 수놓던 현장에서.
문장을 나누어 쓸 수밖에 없이 맹렬한 감정 속에서.
규칙 없는 난수처럼 일렁이던 에너지가 격자 모양을 그리다 하나의 직선으로 모아집니다.
포물선을 그리는 에너지 파형을 두른 채 그가 높이 뛰어올라 검날을 깊이 박아넣습니다.
공기 중에 맴도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유량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미로를 뚫는 경로처럼 황금빛 에너지가 사방 몇십 미터 안의 모든 것을 낱낱이 훑어나갑니다.
베아트리체 힐:
정신
기준치: |
90/45/18 |
굴림: |
8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베아트리체의 세 번째 실전 전투였죠.
건물 잔해와 부서진 폐허 속에 처박혀 있는 자신이 눈에 띕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군이 열세에 밀려 전멸 위기에 처했고,
뒤늦게 읽어낸 미래 예지로 그것을 막으려다 크리쳐의 공격에 휘말려 날아갔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흐리고 어지러운 시야에 불현 너무도 익숙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마는 장면이 새겨진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련하게 갈라진다. 저 뺨을 두 손에 담고, 제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얼마나 꿈에서 바랐던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이 지독히 밉다. ...네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에르드.
다시 눈을 깜빡한 것 같은 찰나에,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번엔 엉망이던 주변 풍경이 가지런히 정리되었습니다.
부상자들을 의료 로봇들이 실어 가고, 그는 당신을 제 망토로 감싼 뒤 가볍게 안아듭니다.
그 품에서 희미하게 황매화의 향기가 풍겼습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베아트리체는 며칠쯤 입원해 안정하고 내상을 점검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곁에 머무르는 의료 로봇이 멋대로 방송을 틀어 둔 것인지 홀로그램 패널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언론은 각성자사관학교 졸업식 이후로부터 지난 몇 달간 지겨울 만큼 에르드의 소식을 대서특필해대고 있습니다.
‘괴뢰 정부(정부가 망명 정부를 지칭하는 어휘는 공식적으로 늘 ‘괴뢰’ 였죠)에 납치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받고도 탈출해 돌아온’,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4년의 시간을 버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에르드의 행보는 이러합니다.
각성자사관학교에서 발생한 극렬분자 폭동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사실 망명 정부에 납치되었고, 각종 테러 혐의에 강제로 차출되었지만 의지를 잃지 않아 반항한 끝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런데도 결국에는 살아 돌아와 카사블랑카 장벽의 문을 두드렸다죠.
구조 당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데다 정상체중보다 10kg 이상 말라 있었던 모습이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가까운 보호자는 공로를 인정받은 스와콥문트 거주자, 본인은 각성자.
이보다 선전하기 좋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가 ‘붙잡혀 있던’ 4년 동안 카사블랑카 장벽 바깥, 그리고 카사블랑카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는 종종 테러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하위 정부 인사 몇몇이 실종되거나 도시 청사에 폭발물 따위가 설치되는 사건이 갈수록 잦아졌죠.
규모가 점점 커지니 정부도 외부의 저항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괴뢰 정부’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 3년 전.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애국 프로파간다를 하기 딱 좋은 사람이 굴러들어왔으니 정부로서는 환호할 만한 일입니다.
바르게 앉은 에르드는 그가 겪었던 망명 정부의 끔찍한 실상,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구로 이용하는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을 비판하며 증언을 계속해 나갑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에르드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정부친화적 커뮤니티와 기사에선 그를 구국지사로 추앙하는 댓글들이 연이어 달립니다.
…이 모든 일을 보고 들으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베아트리체 힐:(언론에서 떠드는 말들이 지겨울 틈이 없었다. 그야 '에르드'의 일이니까. 화면 너머, 곧은 자세로 딱딱하게 말하는 그를 가만히 눈에 담는다. 다만 기묘하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잘못 맞춰진 퍼즐처럼 무언가 걸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걸까.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 만약... 이 모두가 사실이라면, 에르드가 겪었을 모든 모진 일들이 참담할 뿐이다. 그의 타이틀 중도 무엇도 제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긴 사이 화면은 훈장 수여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저번 전투에서 대활약한 공로로 에르드는 또 하나의 약장을 군복에 달게 되었습니다.
의례를 따라 한쪽 무릎을 굽혀 훈장을 받은 그는 조용히 일어서 화면 속의 또다른 화면을 응시합니다.
얼굴과 목덜미를 제외하곤 모든 신체부위를 옷과 장갑으로 감싼 탓에, 제법 멀끔해 보이기도 하는군요.
4년 전의 그가 이런 류의 일에 어울렸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대통령 로맹 바투타의 특별 축사가 이어집니다.
그 자리에서 또 한 번 특진된 에르드가 내달이면 참모총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사관학교를 수료, 졸업한 선후배들 중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대다수가 이 전향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에게 에르드는 개인의 영달을 좇아 정의를 저버린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가까운 이를 찾아 나서겠다며 사라졌던 그가 어째서 이렇게 나타나 지금까지 연락 한 번이 없는지,
당신조차 알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평가입니다.
변절자들의 시대가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그 발자취에는 사라진 사람들의 눈물이 고입니다.
갑작스레 스마트워치가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1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위급 신호? 평소 잘 쓰지 않던 기능이, 그리운 얼굴과 함께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스마트워치 옆면의 S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누르면, 위급상황 시 연락처에 미리 등록해 둔 비상번호 쪽으로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 있다고…
신호 위치는 군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입니다.
4년 전 그 위치를 둘러싸고 새벽 내내 발을 굴렀던 소란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듯합니다.
몸은 좀 어때?
각성자사관학교 시절 동기이자, 지금은 방위사령부 정보통신단에서 근무 중인 이한영입니다.
베아트리체와는 여러 가지로 뜻이 맞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죠.
퇴원을 한다고 하니 안부가 걱정되어 살피러 온 모양입니다.
에르드가 근무하는 곳도 그곳, 한영이 근무하는 곳도 거기.
이 위급 신호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한다면 한영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 힐:...아. 한영아, 와줘서 고마워. (부러 가볍게 웃었다가도 표정이 금새 가라앉는다.)
...방금 위급 신호가 왔는데. 혹시 너라면 자세하게 알 수 있을까? (손목을 돌려 화면을 패널을 비춘다.) 위치가 방위사령부같아.
이한영:음? (고개를 살짝 숙여 패널을 바라본다.) 갑자기 위급 신호?
(그리곤 뭔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네 페어가 비밀리에 널 부르고 싶은 모양이네. 에르드 걔 말야.
베아트리체 힐:에르드가 일하는 곳도 방위사령부일테지만. ......정말 그런걸까?
...비밀리에 불러야 할만큼 위급한 상황이 생긴걸까?
이한영:굳이 위급 신호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겠지. 방위사령부에서 걔 지위는 좀 이상하거든.
분명 어디서나 그 계급 이상의 의전을 받는데, 아무리 봐도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 난 동기인데도 인사하는 것조차 제지되고 대화도 금지야. 사무실도 혼자서 다른 층을 쓰고 말이지.
그 상황에서 누군가를 몰래 불러내야 한다면 나라도 위급 신호부터 생각했을 것 같긴 하네.
베아트리체 힐:감시를? ...이해가 안돼. 그건 너무 이상해. ...최근에도 특진 소식을 들었는데. (불안함에 심장이 술렁인다.)
...한영아, 나 에르드를 만나러 가봐야 할 것 같아. 도와줄 수 있을까?
이한영:잠깐잠깐. 만나러 가는 건 좋은데 방위사령부엔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거 알지? (진정하란 듯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다.)
걔한테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면 오히려 위급 신호 같은 건 못 보내. 방위사령부 지하에 전파 차단기가 있거든.
그리고 너, 병상에서 막 일어난 참이잖아. 좀 더 쉬지 않고?
베아트리체 힐:그래서 부탁 하는거야,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도 없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가 손을 꼭 붙잡는다.) ...그런거라면 다행이지만. 역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불안할 것 같아서.
며칠 쉬었더니 충분해. 다 나은 것 같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한영아.
이한영:에휴…… (한숨 푹 쉰다. 베아트리체가 소식 하나 없는 페어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4년간 써내려간 일기장을 모으면 묵직할 정도로 많아졌다는 것도.)
원래 저녁에 내 동생이 날 보러 온다고 방문자 등록을 해뒀는데 갑자기 아파서 못 오게 됐어. 그 출입증으로 들어오면 기록이 남지 않으니 추적당할 걱정도 없을 것 같네.
대신 변장은 제대로 하고 와. 넌 다행히 나랑 눈 색이 같으니까 머리만 어떻게 적당히 가리면 되겠다.
베아트리체 힐:.....정말? 고마워, 한영아. 정말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안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제야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걷힌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영을 꼭 안아준 다음에야 놓았다.)
응, 그렇게 할게. ...제대로 신경 써야지. 들키면 너도 곤란하게 될테니까. 정말 고마워... (다시 한번 꼭 안아준다...) 불안해서 영영 잠도 못 잘 뻔 했어.
이한영:으이구. 아픈 애한테 뭐라 더 잔소리할 수도 없으니 내가 봐주는 거야. (말은 그리 하면서도 베아트리체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주었다.)
걔가 그렇게 좋아? 4년이나 못 봤잖아. 이젠 네가 알던 애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베아트리체 힐:(예전 같았다면, 슬쩍 말을 돌리고 침묵으로 대신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4년은 길었고, 또 길었으며 혼자서 품은 마음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매일을 그린 얼굴이고, 매일을 키워나간 마음이고, 매일을 그리워한 나날이다. 에르드가 더 이상 그날과 같지 않다고 해도 쉬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좋아. ... ...보고 싶어. 그거면 돼.
이한영:너도 참……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으니 페어를 다시 찾자면 금세 새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됐다. 저녁에 방위사령부 앞에서 만나자.
베아트리체 힐:...그 애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흐릿한 웃음이 걸린다.)
응, 그때 봐.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베아트리체 힐:(캡 모자를 눌러 쓰고 긴 머리칼을 둘둘 말아 아래로 틀어 묶었다. 그 위에 넉넉한 후드까지 뒤집어 쓰고 나서 밖으로 나선다.)
미리 약속해 둔 대로 한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물 바깥에는 별달리 인적이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CCTV며 보초병들이 근처를 감시하고 있겠죠.
베아트리체 힐:(모자 챙을 살짝 들어보인다.) 나야, 한영아. 이 정도면 네 동생 같아 보일까?
이한영:와. 네가 이렇게 입은 거 첨 본다. (작게 감탄한다) 이만하면 완전 가능이지.
자자, 언니~ 라고 해봐. (키득 웃으며 어깨에 팔 걸친다)
베아트리체 힐:... ...나도 지금 내가 너무 어색해. (어색하게 후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마주친다.) ....언니?
이한영:아하하. 귀여워~!! (볼 콕 찌른다) 좋-아. 들어가자!
베아트리체 힐:...아..! (꾹 눌림. 어버버하면서 그대로 따라 들어간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병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는데, 의외로 출입 게이트는 별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게이트 앞에 있는 보초병들이 두 사람을 훑어보네요.
이한영:정보통신단 이한영 소위. 여긴 가족. 오늘 방문하겠다고 등록해 놨는데.
대인 기능 판정 등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설득
기준치: |
50/25/10 |
굴림: |
76 |
판정결과: |
실패 |
'동생 맞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초병이 베아트리체를 바라봅니다.
베아트리체 힐:(...괜히 망설이면 더 의심만 살테니까. 후드만 내리고는 올려본다.) ...아, 최근에 염색을 해서요. 그렇게 안 닮았나요? 다들 저희 언니랑 제가 눈만큼은 꼭 닮았다고 하시는데.
(한영의 옆에 더 꼭 붙어서서 빤히 올려본다...)
이한영:그래그래. 보라고요, 이 예쁜 보라색 눈! (아예 팔짱까지 낀다)
보초병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더니 머지않아 수긍하고 한 발짝 물러섭니다.
베아트리체 힐:감사합니다. 고생이 많으세요. (꾸벅 인사하고는 팔짱 꼭 낀 채로 들어선다)
이한영:휴. (안으로 들어서고서야 어깨에서 힘을 뺀다.) 쫌 쫄렸다. 그치?
베아트리체 힐:.......... ...들키는 줄 알았어..... 고마워... (그제서야 흐물하게 풀어진다.)
이한영:자자, 괜히 꼬리 잡히기 전에 얼른 가자. (엘리베이터로 베아트리체 데리고 척척 간다)
7층짜리 건물에 2, 3성 장군들이 즐비하니 방위사령부 위관급 장교 따위가 단독 사무실을 쓸 일은 없다고 봐야 했으나,
대위 계급인 에르드는 숙직실까지 딸린 사무실을 홀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이한영:뭐, 모든 군인이 각성자 출신인 건 아니고……. 각성자 군인의 경우 그 대우가 일반 군인과는 다르기도 하니까.
진짜 이상한 건 층이지, 층.
5층부터 7층까진 거의 플라네타리움이거든? 근데 걔 혼자 거기에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껴 있으니까.
5층부터는 별 달린 장성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한영이 어깨를 으쓱입니다.
베아트리체 힐:(플라네타리움이라는 표현이 참 한영답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기울어진다.) ... ...정말 그렇긴 하네. 뭔가 이상한데...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어서 더 이상해. (이 와중에도 자꾸만 에르드가 안쓰럽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정말 심한걸까? ...속으로만 삼켰다.)
이한영:워낙 화려한 스토리를 갖고 복귀한 애잖아. 프로파간다로 써먹히고 있으니 이런 특별 취급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지도.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출입 카드를 몇 번이나 다시 찍어 통과해야 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이 출입 카드에는 한영의 사무실인 3층에 방문한 기록만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하자 복도 끝 에르드의 사무실이 보입니다.
이한영:다 왔네. (어깨 가볍게 두드려준다.) 고대하던 만남이잖아. 잘 얘기하고 와. 힘내고.
베아트리체 힐:...응. 그럴게. 나중에 연락할게. ... ...왠지 울 것 같은데. 울지 말라고 말해줄래? (걱정 말라는 듯, 반쯤 농담 삼아 말했다. 손을 꼭 붙잡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을 하고서야 겨우 걸음을 옮긴다.)
이한영:4년 만에 만나는 건데 좀 울면 어때.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와! 왜 이렇게 늦었냐고 뺨 한 대 때려도 되고. (일부러 더 밝게 말하며 웃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사무실이 가까워져 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베아트리체 힐:(사무실 문 앞에서 무언가 가로막힌 듯 멈춰 섰다. 지난 기다림의 세월이 어깨에 얹힌 듯한 느낌. 천천히 숨을 고르고,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쓸어 내린 후 문을 두드린다.)
문을 몇 번 두드리면... 답이 없이 조용합니다.
베아트리체 힐:....후. (대답이 들릴 때까지 다시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기에는 피가 말라 쓰러질 것 같다. 긴장에 현기증이 일 지경이라. 대답 없는 문을 살짝 열어본다.)
문을 살짝 열고 확인하니, …내부에는 아무도 없네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열린 문이 숙직실이고, 그 안에 또 욕실이 있는 구조입니다.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벗어 둔 옷가지가 보입니다.
단순히 베아트리체를 몰래 불러내기 위해 신호를 보낸 것일까요?
베아트리체 힐:(적막 속에 희미한 물소리를 듣고 나서야 긴장이 한껏 풀려 벽에 기대어 선다.) ......다행이다.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또 괜한 불안감이 든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욕실 안에서는 평범하게 물소리만 들려오고 있긴 합니다.
벽에 기대선 채로 무심코 방을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상자가 하나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함부로 물건을 뒤지는 건 실례지만...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 앉아버릴 것 같아서 테이블로 다가가 상자를 확인해본다.)
그 안에는 [일기장]과 [사진첩]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일기장?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본다.)
일기장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쯤의 빈도로 드문드문 일기가 적혀 있네요.
수사가 거의 없는 간결한 문장 몇 개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참 그답다 싶습니다.
:일기를 읽어본 바, 카사블랑카를 떠난 뒤 그는 보츠와나 망명 정부 산하, 스와콥문트 근처에 설립된 나미브 반군기지에서 장교로 활동한 모양입니다.
후배들을 가르치는 게 적성에 영 맞지 않아 힘들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네요.
맨 처음 목적이었던 리사의 행방도 오래가지 않아 찾아낸 듯합니다. 다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이따금 날짜 아래에는 다른 내용 없이 베아트리체, 당신의 이름 다섯 글자만이 쓰여있곤 했습니다.
그는 글씨를 상당히 날려 쓰는 편이라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당신의 이름만은 고민을 거듭하며 정성들여 썼는지 반듯하고 매끄럽습니다.
가장 최근의 일기에는 마침내 내일. 너도 날 기다릴까? 라고 쓰여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답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간결한 문장들은 눈에 새기듯 천천히 읽어나간다. 지난 4년,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원하는 것은 찾았는지. ...나를 한번 쯤은 떠올렸는지. 그런 것들은 모조리 알 수가 없어서 애타는 시간들이었다. 가장 반듯하게 쓰여진 제 이름을 그 위에 몇 번이고 덧그려본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 됐어, 에르. 나는 언제고 너를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가장 최근에 쓰인 문장의 밑에는 '언제나.' 손 끝으로 답을 써넣었다.)
(표지를 엄지로 쓸어 보다가 반듯하게 접어 넣어 넣고, 사진첩을 펼쳐본다.)
사진첩이라고 해도 사진 위쪽에 구멍을 뚫어 한데 모아둔 것에 불과합니다.
보츠와나 정부에서 머물렀던 4년간의 사진인 모양입니다.
:막 그곳에 도착했을 4년 전의 그는 긴장감 탓인지 표정이 굳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분위기에 녹아드는 것이 보입니다.
사진을 찍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그가 찍힌 사진은 많지 않고, 찍혔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장면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4년간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것과 다르게 고문을 받았다거나 강제로 끌려다닌 듯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종종 다친 모습이 있긴 하지만 대개 이능력 대련 중에 생긴 상처 같네요.
최근의 사진으로 갈수록 각성자사관학교에 있을 때보다 편안하고 풀어진 표정입니다.
사진 속의 에르드는 대부분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지만, 가장 최근의 사진에서는 카사블랑카의 군복을 차려입은 채입니다. 저 사진을 마지막으로 카사블랑카로 향한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상처가 늘어난 모습은 어쩔 수 없지 마음이 아프지만...편안해보여서 다행이다. 걱정만큼 힘들지는 않았던걸까. ... 정말 다행이야. 짧은 감상이 때마침 들려오는 소리에 끊어진다.)
....아.
(자연스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매일 꺼내보면 닳을까, 꿈에서도 애가 탔던 그 사람이 정말 맞을까.)
에르드:(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즉 나신인 채로 샤워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가 베아트리체와 눈이 딱 마주친다.)
……
…………………… (죽음 같은 침묵 끝에 옆에 놓아둔 옷을 들고 번개처럼 다시 샤워실 문을 닫는다. 쿵!!!)
베아트리체 힐:.................
(... ...세상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본 게...... ...말도 안돼. 뺨이며 귀 끝 할 것 없이 드러나는 살갗이 모조리 붉게 달아오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득 덮었다.)
... ... ...미안.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목소리가 닫힌 욕실까지 들릴 리가 없을텐데도.)
에르드:(본래 옷을 갈아입는 데 그렇게까지 오래 걸릴 리가 없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아트리체와 나신인 채로 마주쳐버렸다는 충격 탓인지 5분이 넘게 지나고서야 간신히 다시 문이 열렸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서 귀끝이 빨개진 채로 허공만 본다.)
온 줄 몰랐어.
베아트리체 힐:(그리운 목소리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역시 제대로 마주하기에는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겨우 빠져나온 귀 끝만 마찬가지로 빨갛다.)
...................미안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 문이. 문이 열려있어서.
에르드:닫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었나. (괜히 젖은 제 머리만 흐트러뜨리며 물기를 턴다. 이 어색해진 공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가에 기대어 서 있다가 겨우 시선을 상자로 돌린다.) 그건……
베아트리체 힐:...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 마음이 급해서... (겨우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낸다. 시선은 에르드 근처도 가지 못하고 상자로 옮겨간다.)
...아. 이것도 멋대로 손대서 미안해. (...어째 미안하다는 말만 자꾸 되뇌이게 된다. 이것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걱정이 되어서, 뭐라도 하고 싶었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힘들지는 않았어? 지금은 어때? ...그 곳에서도 내 생각을 가끔, 아주 가끔씩은 했을까? 말은 떨어지지 않고, 사진만 괜히 만지작 거린다.) ...표정이 생각보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에르드:아냐. 일기장은 몰라도 사진들은 보여주려고 했었어. 만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고개 내저으며 느리게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위급신호가 제대로 간 모양이네.
(그제야 베아트리체를 똑바로 바라본다. 얼마 전 전투에서 만나기는 했었지만 원체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었지. 제대로 마주하는 건 4년만이다.)
나쁘지 않았어. 사람들이랑 섞이는 건 어색하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많더군. 여기선 고문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 몸은 좀 어때?
베아트리체 힐:...맞아, 위급 신호.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나했어.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한참 뒤에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역시 그때, 그건 꿈이 아니었구나.)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이야. 정말. (눈을 내리감으며 천천히 숨을 몰아쉰다.) 며칠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네가 도와준거지?
에르드:(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해 사이에 널부러진 베아트리체를 봤을 때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더랬다.) 나아져서 다행이군. 그래도 후유증이 없게 각별히 관리해야 돼.
……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안 됐어. 너는 미래를 읽을 수 있으니까 어쩌면 나와 만나는 미래를 보지는 않을까 추측했었는데. (어땠냐는 듯 가만히 눈을 응시한다)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덕분이야. (괜히 손을 몇 번 쥐었다가 떨어트린다. 금색의 시선에 걸려들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만 알았어. 이상하게도 너와 관련된 미래는 안 보였거든. 다른 것들은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것만 안 보였어... 그래서 기다렸어.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그 날을.
네가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에르드:이런…… 페어라서 그렇게 된 건가. 나는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어도 너는 나에 관해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작게 탄식했다.)
(무심하고 딱딱한 성격인 에르드지만, 재회하면 무슨 말을 하고 무얼 해야 할지 꽤 여러 번 고민했었다. 재회의 첫 순간이 당혹스러워서 한순간 다 날아가버리긴 했지만, 침착함을 되찾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짧은 침묵 끝에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4년이란 세월은 그의 외모에서도 여러 변화를 이끌어냈다.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듯 더 커진 덩치, 우묵히 패인 눈매라던가 날렵해진 턱선 등이 그러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앳된 티는 전부 날아가고 퍽 성숙한 이가 되어 돌아왔다. 기다리던 당신에게로.)
베아트리체 힐:...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애가 탔던 쪽이 한 쪽만 아니었던 것이 다행일까, 혼자만 속 편히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되었으니.)
(잠시 바닥으로 내리 깔렸던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가 닿는다. 어쩌면 4년 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지금 제게 닿을 걸지도 모르겠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기에 꾹꾹 눌러 썼던 하고 싶었던 말들을 송두리채 잊어버릴 만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움에 심장이 뛰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뛴다. 못 박힌 듯 자리를 지키던 걸음을 떼어 다가간다. 지난 세월이 빚어 놓은 그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보면서. 그 때, 안녕을 고했던 뺨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직접 닿지 않고서는 애가 타 말라버릴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손이 턱 끝에 가 닿았을 때, 그대로 끌어안을 수밖에.)
......왜 이렇게 늦었어.
에르드:(그리고 베아트리체의 등을 마주 끌어안는 동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4년 전보다도 더 마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제 체구가 커졌기 때문일까, 당신이 마음고생을 했다는 증거 중 하나일까. 한 팔만으로 베아트리체의 등과 어깨를 모두 감싸안고 반대쪽 손으로는 뒷머리를 느리게 쓸어내린다. 망명 정부에서 머무른 4년 동안 필요 외의 접촉은 일절 하지 않으며 지내왔는데 베아트리체와의 스킨십은 마치 숨을 들이쉬는 것마냥 자연스럽고 기껍다. 아주 오래 이 순간을 원했던 것처럼…… 베아트리체가 그에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포옹의 따스함을, 입맞춤의 달콤함을. 그가 남긴 흔적은 4년 내내 한 치도 지워지지 않은 채 제 모든 심장에 새겨져 있었다.)
미안해. (아까 연신 사과를 늘어놓던 쪽은 베아트리체였는데 이번엔 위치가 반전되었다. 그는 당신의 체향을 느끼려는 듯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베아트리체가 저에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면 바로 그리움일 것이다.)
베아트리체 힐:(커다랗고 넓은 품에 안기고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얼마나 에르드를 그리워했고,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비어있던 자리가 제 자신을 다 갉아먹어도 모자랄만큼 컸다는 사실을. 그리웠던 온기를 가득 끌어안아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어깨에, 목에 고개를 잔뜩 파묻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 누구도 너의 빈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눈시울이 뜨겁다. 그대로 방울져 떨어질 것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역시,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힘들지는 않았고? ...나는 잘 지냈어. 그러니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를 언제 만나게 될지 몰라서, 만나게 되면 머리가 새하얗게 될 것 같아서. 늘 이런 저런 말들을 생각해봤어.
...그런데, 그냥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정말... ...너무 보고 싶었거든.
에르드:보고 싶었어. (눈을 내리감고, 암흑 속에서 베아트리체를 한가득 느끼면서 그가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베아트리체. (여린 목소리로 늘어놓는 질문들만 들어도 그가 저 없이 보낸 4년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외로웠고, 힘들었고, 저를 그리워하였을지. 제가 그에게 느끼던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카사블랑카로 돌아온 지는 몇 달이나 되었는데도 이제야 제대로 귀환한 것 같았다. 와야만 하는 곳으로. 있어야 할 곳으로.)
(사막처럼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 물막이 차오르고, 생기가 어리고, 싹이 움튼다. 벅차오르는 가슴이 어색한데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두지 않고 싶어.
베아트리체 힐:...나도. 나도야, 에르. (다정한 말 한마디에, 쌓아둔 둑이 터진다. 감추어둔 마음에 작게 난 금으로, 갈라지고 쏟아져 나온다. 결국 턱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뺨을 타고, 어깨를 적셔간다.) ...그러웠어. ...네가 너무 그리워서, 매일 밤 간절히 빌었어. 네가 꿈에 나오게 해달라고. ...그런데, 어떤 날에는 그게 너무 무서웠어. 꿈에, 네 얼굴이 흐려지면 어떡하지... 너무 꺼내어보다 닳아버리면 어떡하지, 하고. (꺼져있던 발 밑이, 무너진 바닥이 차오른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그 어디도 아니라 너였다.)
......이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아.
에르드:너무 오래 외롭게 했군. (댐이 무너지듯 터져나오는 울음소리가 심장 박동과 아릿하고 처절하게 공명해 온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울어본 적 없으나 지금만은 마치 눈가를 타고 당신의 슬픔이 흐르는 듯했다.)
좀 더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고, 어려운 일이라면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끝도 없이 단련했다. 신체에 한계가 올 때는 항상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츠와나로 떠난 시간이 한 달, 반 년, 햇수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베아트리체가 아직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회의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저는 기다리기에 적절한 만한 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에르드는 여전히 밤마다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떠올렸다. 별이 쏟아질 듯 맑은 사막 하늘에서 별빛을 담은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마침내 재회한 지금, 조금이나마 의심한 스스로가 부끄럽다. 베아트리체는 이렇게나 한결같이 저를 기다려 줬는데. 변절자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서도…… 그러니 이제는 더더욱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망명 정부에서 뭘 했고, 왜 여기 왔는지 모두 이야기해줄게. 그걸 듣고 결정해 봐.
베아트리체 힐:(기어이 품에 가득 채워 넣으면서 느리게,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에르드였기에 4년 만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고. 나지막히 숨을 고른다. 가장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예상했던 가장 최악의 모습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손등으로 남은 물기를 닦아내고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저를 희망으로 끌어냈던 금색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러니 듣고 싶어, 여태 네가 한 일도, 네가 하려는 일도.
에르드:일기장을 봤다면 알겠지만, 난 보츠와나로 간 후에 반군 기지에서 애들을 가르쳤어. 카사블랑카에 대항하기 위해서. 비록 이곳의 체계적인 군대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라지만. 4년 동안 애써서 겨우 기틀을 닦은 정도야.
여기서는 프로파간다처럼 쓰이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따르는 건 망명 정부야. 이중 스파이인 셈이지.
카사블랑카에서 임무를 몇 개 수행하고 다시 이 도시를 떠날 계획이야. 네게 같이 떠나자고 하고 싶어. 하지만…… 네 다른 가족들이 카사블랑카에 살고 있지. 가족을 두고 무작정 떠나자고 할 수는 없으니 계획을 세워보는 게 좋겠군.
베아트리체 힐:...역시 그랬던 거구나.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만은 알 수 있었다. 에르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화면 너머로 기묘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태도는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니까. 어깨에 얹은 손을 가볍게 토닥인다.) ...고생이 많았겠다.
...임무를 수행하고 난 후에... (마음 같아서는 에르드와 함께 얼마든지 떠나고 싶다. 하지만 혼자 떠나버리면 가족들은?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래.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어떤 임무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
에르드:그래. 네가 내 정식 페어로 복귀하고 나면 정부에 네 이름이 대대적으로 알려질 텐데, 우리가 보츠와나로 떠나면 너희 가족에게 불이익이 가해질 위험이 높아. 아예 함께 망명하거나 다른 나라로 떠나는 걸 고려해보는 게 좋겠군.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정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관한 거야.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서 내일 요한 에를리히와 접촉하기로 했어. 쭉 감시당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외출 정도는 자유로워졌거든. 너도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지?
베아트리체 힐:...어느 정도 정해지면 미리 이야기를 해볼게. (다소 심각한 얼굴로 끄덕이던 고개가 의외의 이야기와 이름에 기울어진다.) ...정식 페어? 요한 선배를?
에르드:…… 혹시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랑 페어를 맺었나? (이쪽도 어리둥절한 낯으로 반문한다)
베아트리체 힐:........아니, 전혀. 다시 페어를 맺게 될 거라고... 까지는 생각을 못했거든. (어리둥절한 낯을 보고 더욱 기울어진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충분히 많고, 네게 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좋지 않을까... 했어. 요한 선배같은...?
에르드:다시 페어를 맺을 필요도 없이…… 우린 이미 언약을 나눴잖아. 설마 내가 다른 사람이랑 새로운 페어를 만들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나를 그렇게 그리워한다 말해 놓고서? (눈을 가늘게 뜬다. 베아트리체도 참 자기객관화가 안 된다니까) 만일 그래도 안 된다고 해야지.
베아트리체 힐:.......그야. (그건 그렇지만. 최근에도 특진으로 저만큼 높아진 에르드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대를 버리고 있었다.) .......내가 안된다고 해도 되는거야?
에르드:당연하지. 네가 내 원래 페어잖아. 애초에 끊을 마음도 없지만. (이쯤 되면 좀 어이가 없어진다)
페어 계속 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렇게 똑바로 물어봐두지 않으면 또 헤매겠다 싶어졌다)
베아트리체 힐:(눈이 동그래져서 끄덕인다...) ...할거야.
에르드:그래. (양 어깨 감싼다) 꼭 나랑 하는 거야. (맨 처음 페어를 맺기로 한 결정은 베아트리체가 내린 거였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이런 제 모습이 조금 웃기다)
(어째 어린애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조그맣게 웃었다.)
에르드:(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따라서 바람 새듯 웃어버린다.) 다른 사람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 애초에 그때도 말했었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난 그냥 혼자 활동했을 거라고.
베아트리체 힐:...맞아, 그때도 그랬었지. (좋아하는 얼굴. 좋아하는 웃음.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이 웃음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 뭔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인다. 쪽,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귀여워.)
에르드:(예상치 못한 버드키스에 눈이 동그래진다. 일순 몸이 돌처럼 굳더니 귀끝이 슬슬 빨개지기 시작한다.) 너는…… …………이런 건 말 좀 하고 해.
베아트리체 힐:... ...미안, 너무 귀여워서. (합, 그제야 입을 가렸다가... 갸우뚱? 기울어진다.) ...말하면 해도 되는거야?
에르드:…… 뭐, 남들 앞 같은 데만 아니라면야. 너무 자주는 좀…… (부끄러울지도.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이놈의 가오)
베아트리체 힐:........응. 알겠어.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 조그맣게 끄덕인다...)
에르드:(은근히 돌발행동을 많이 한다니까. 그 옆모습 빠안히 바라보다 만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분이 붕 뜰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다.)
베아트리체 힐:(시선이 느껴지면 천천히 눈동자를 마주하고,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미소를 그린다. 처음 재회하는 얼굴이 아닌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뺨에도 하고 싶어, 해도 돼?
에르드:(잠깐의 침묵. 닿지도 않았는데 벌써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시선을 살짝 피하며 답했다.) …… 그래.
베아트리체 힐:(몸을 가볍게 기울여 뺨에 입을 맞추고 만족스럽다는 듯 다시 웃었다. 새삼스럽게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고.)
...넌 내게 하고 싶은 말 없었어?
에르드:이미 다 했어. (그 말대로 제법 후련해 보인다.) 난 속에 뭘 많이 담아두질 못하는 성격이라. 원래 오래 담아두지도 않는데 너한테 하고 싶은 말들이라 그런지 잊히지도 않고 차곡차곡 잘만 쌓여가더군.
쑥스러우니까 또 해달라고는 하지 마라. 기회 끝났어.
베아트리체 힐:......녹음이라도 해둘걸.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뺨을 쓰다듬다가는 끄덕인다. 그래, 한번으로 족하다. 네 목소리를 잊을 리 없으니.)
... ...아, 그래서 요한 선배는? 내일이라고 했지.
에르드:다음 기회를 노려 봐. (희미한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
응. 근데 나도 요한이랑은 거의 연락 못 했어. 4년 동안 고작 한두 번? 너나 나나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엇비슷할걸.
...나도 그동안 제대로 못 봤으니까.
에르드:내일 만나서 얘기 나눠보자. 일단 오늘은 푹 쉬고.
그보다 너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그제야 이게 생각난 듯)
베아트리체 힐:....아. 한영이가 도와줬어. 기억나? 같은 사관학교 동기인데... 한번은 마주친 적 있을거야.
에르드:…… 잘 기억 안 나. (사람에 전혀 관심 없는 그답다. 애초에 학교엔 1년밖에 다니지 않기도 했으니) 문제 없이 들어온 거지? 여긴 장성들이 머무르는 곳이라 감시가 촘촘할 텐데.
베아트리체 힐:(자연스럽게 수긍한다.) 정보통신단에서 일하고 있어서 도움을 좀 받았어. ...동생의 방문증을 빌렸거든. (그제야 변장이랍시고 입은 후드티를 들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가는 것도 문제겠네.
에르드:아, 이거…… 변장이었어? 축제 때 입은 옷이랑 엄청 다른 느낌이란 생각은 했는데. (이것도 귀엽긴 하다)
일단 방문증으로 들어왔으면 나갈 땐 사람 마주치지만 않으면 문제 없어. 밤이니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제는 돌아가는 게 좋겠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베아트리체 힐:평소에는 잘 안 입는 옷이라... 사실 지금도 어색해. (그제야 떨어트린 캡 모자까지 주워 쓴다.)
...그럼 다행이다.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는 잠시 에르드를 올려다본다. 가야하는 건 맞지만, 역시 조금은 아쉬워서 오래 눈에 담다가 끄덕인다.)
응, 이제 가볼게.
에르드:(뭔가 오리 같다. 후드까지 눌러쓴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다 슥슥 쓰다듬어 준다)
조심히 돌아가. 내일 연락할게.
베아트리체 힐:응, 걱정마. 기다릴게. (손길에는 다시 올려보지 않았다. 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대로 바닥만 보고 끄덕이고 돌아선다.)
방위사령부를 빠져나오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발걸음을 떼기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건.
두 사람은 마침내 재회했고 다음을 약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합시다.
지난 4년 간, 요한과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 자취를 감춘 그의 신원에 대해 뜻을 같이 하는 선후배 사이에선 소문이 분분했죠.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는 추측은 그가 도시 바깥의 망명 정부로 귀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의 에르드처럼 사망을 가장한 것도 아닌데 완전히 사라진 그가 학장실에 분변 테러를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얼빠진 동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르드는 요한이 ‘숨어 있는’ 곳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결벽적으로 관리되는 도시인 카사블랑카에는 ‘뒷골목’ 따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대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있단 말인가요?
에르드가 당신과 함께 향한 곳은 성심성당이었습니다.
각성자사관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그곳.
가톨릭이 아직도 힘을 쓸 수 있는 데에는 여러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재해 이후 여러 사이비 종교가 날뛰며 가톨릭의 자리를 대체하려 들었지만,
요행히도 바티칸이 살아남은 덕분에 촘촘한 교구 간 연락망을 복구할 수 있었죠.
성당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 나간 공동체들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유럽 연합은 아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애당초 ‘재앙의 날’ 이후 사회 재건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이 가톨릭이었거든요.
건국 초반만 해도 성당을 통해 제공되는 교육, 의료, 구호 활동 등은 공화국 정부조차 대체하기 어려운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공화국 건설 자체가 가톨릭에 기댄 면이 있으니 정부라고 해도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부도 함부로 참소할 수 없는 성당 문을 에르드는 거침없이 두드립니다.
문을 열고 나온 신부는 두 사람의 군복을 보고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에르드가 무어라 언질하자 수긍하고는 안으로 안내해 줍니다.
성심성당에서는 에르드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신부는 1층 식당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물러납니다.
에르드:이쪽으로. (주방 끄트머리의 작은 창고를 향해 눈짓한다.)
냉장고가 줄지어 선 평범한 식자재 창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에르드는 바닥을 가리켭니다.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쪽? (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뭔가.)
유심히 들여다보니, 바닥 타일 사이에서 줄눈이 살짝 뜯겨 나간 자국이 보입니다.
발끝으로 바닥을 퉁퉁 두드려 본 에르드가 쭈그려앉아 속삭입니다.
에르드: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베아트리체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도문입니다.
아니, 저런 이상한 문장이 기도문이기는 한가요?
아무래도 이 타일 바닥 아래에 뭔가 숨겨진 것 같은데…….
베아트리체 힐:
손놀림
기준치: |
10/5/2 |
굴림: |
75 |
판정결과: |
실패 |
(갸우뚱...? 한 얼굴로 타일만 두드렸다...)
통통... 두드리는 것 말고는 딱히 감이 오지 않는데요.
그러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것 같이 좁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납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지만 계단 끝에 문이 있는 듯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그제야 끄덕이며 일어난다.)
(좁게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계단참을 내려간 에르드가 문을 묘한 박자에 맞추어 두드립니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다시 짧게 세 번.
처음 든 인상은, 천장에서 책더미가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미친 사회학자의 방을 그리라고 하면,
사회학자가 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 것 같으니 방에 연구 일지와 책을 가득 채워 놓을 겁니다.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공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제멋대로 쌓여 있는 도서, 문서, 기기, 회로,
무얼 건드려도 쉽게 쓰러질 것 같은 기물들 사이로 간신히 사람 하나가 걸어갈 만한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들어오다가 익숙한 모습에 가까이 다가선다. 많이 피곤해보이신다. ...곤히 주무시는데 깨우자니 미안한데... 결국 조용히 책상을 통통 두드린다.) ...선배, 주무세요?
책상을 두드리는 걸로는 기별도 안 오는지, 그는 깨어날 기미가 없습니다.
에르드:(결국 그의 어깨를 턱 잡고 불친절하게 흔든다.) 이봐, 일어나지.
요한 에를리히:……? (흔들리면서 비몽사몽한 눈을 뜬다.) 뭐야, 아…… 너희냐.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리는 요한의 뒤쪽으론 웬 콩나물이 수경재배되고 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여즉 잠에 취한 듯 눈가를 비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고선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를 번갈아 봤다.) 그런데 나와 접선하겠다고 온 건 한 명이었던 것 같다만…… 힐, 너는 웬일이냐.
베아트리체 힐:(...콩나물...? 을 잠시 보다가는 정신을 차린다.) 아,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에르드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에르드:다시 페어로 복귀했다. 공식 보고는 며칠 뒤에 올릴 생각이지만.
감시가 덜해지면 당신을 찾아가란 말을 들었어. 정부가 수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던가. 그걸 수색한 뒤에 나미브 반군기지로 돌아갈 생각이야.
요한 에를리히:아…… 그거. 나도 정확하게 캐낸 건 아니야. 그래서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요인의 도움이 필요했지.
정부가 비도덕적인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어. 에르드, 네가 참모총장 비서실로 이동하게 된 건 의도한 일이지?
에르드:(고개를 간결히 끄덕인다.) 당신이 그 실험에 관한 정보를 참모총장이 쥐고 있다고 보고했었으니까.
요한 에를리히:그래, 참모총장이 자기 공관 서재에 그 ‘프로젝트’ 혹은 ‘실험’에 대한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추측하기론 그 정보가 알려지면 처지가 불리해지는 정적이 있는 모양이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간을 언젠가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일부러 쥐고 있는 것 같더군.
보안이 아주 철저해. 공관에 침입할 방법이 필요한데.
에르드:다음 주 열리는 정재계 자선 파티에 참모총장이 참석한다더군. 베아트리체만 괜찮다면 우리가 그 호위를 자원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내가 파티장에서 참모총장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네가 공관에 잠입하는 거지. 공관 바로 근처에 파티 장소가 있기도 하고. (베아트리체를 바라본다)
베아트리체 힐:(둘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다가 천천히 끄덕인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에르드:어느 쪽이든 위험하긴 하지만, 네겐 미래 예지가 있으니 비상 상황이 생긴다면 금방 알 수 있겠지. (그렇지만 만나자마자 위험한 임무를 맡기는 게 내심 미안한 듯하다.)
베아트리체 힐:...굳이 그런 표정 안해도 돼. (부러 가볍게 웃어보인다.) 다시 페어가 되겠다고 했을 때 이 정도는 생각했어. 네가 위험하지만 않으면 됐어.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서랍에서 인이어와 렌즈 두 세트를 꺼내 내민다.) 파티 땐 나도 현장을 보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렌즈를 착용하면 너희 시야가 나한테도 영상으로 전달될 거고, 인이어는 소통용이다.
베아트리체 힐:네, 감사해요. (렌즈와 인이어를 나란히 받아든다.)
베아트리체 힐:......참. 저 뒤쪽에 콩나물...은 뭔가요? (못 참고 물어본다.)
요한 에를리히:(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인다. 짧은 침묵.) 유리가 키우던 거야.
베아트리체 힐:...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는다.) 선배가 돌봐주신 덕분에 언제나 잘 크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쉴 때는 쉬시구요.
요한 에를리히:죽이진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는다.)
아직 걱정받을 정도는 아냐. 그래도 신경써줘서 고맙다.
조심히 들어가라.
베아트리체 힐:...네. (꾸벅 인사하고 콩나물 다시 한번 보고... 손잡고 나온다.)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에르드는 두 사람이 페어로서 공식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몇 가지 조사와 사상검증성 면접 같은 인터뷰를 했지만,
정식 페어라는 유용한 전력을 깨트릴 수 없으니 효용성 측면에서 어떻게 넘어가는 것 같았죠.
애초에 에르드가 넘어올 때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네요.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자선 파티입니다.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테이블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고, 정중한 서버들이 샴페인 등을 가져다 줍니다.
베아트리체 힐:(매끈한 새틴 소재의 짙은 푸른색 드레스는 구두를 덮을 듯 부드럽게 아래로 흘러내린다. 큰 장식 없이 주름만으로 선을 살린 드레스는 빛을 받아야 비로소 은은한 푸른빛을 내며 반짝이고, 아래로 갈수록 한 쪽으로 트여 걸음마다 같은 색의 심플한 키튼힐이 드러난다. 긴 머리는 부드럽게 곡선을 살려 한 쪽으로 넘겨두어, 흰 목에 걸린 은백색의 목걸이가 은은하게 반짝인다. 목덜미를 따라 올라가면 귓가에는 귀에 딱 붙는 시트린 귀걸이가 머리칼 사이로 한번씩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에르드:(치수가 딱 맞는 검은 정장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선 이는 파티의 참석자라기보다는 차라리 경호원 같다. 섬세한 연보라색 자수가 놓인 정장의 카라와 아가판서스로 만든 부토니에르가 겨우 파티에 걸맞는 화려함 한 스푼을 더해준다. 본디 이마를 덮는 앞머리는 가르마를 냈다. 왼쪽 귀에는 작고 심플한 황금색 귀걸이 하나. 꾸미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므로 누군가의 정성 어린 손길이 만들어낸 결과물일 것이다.)
두 사람은 멋지게 차려입었으나 사실 참모총장 호위 담당이나 다름없습니다.
에르드가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며 자원했다는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를 한참 눈에 담다가 렌즈 낀 눈을 한번 깜빡이고 인이어를 톡톡 두드려본다. ...됐어.)
에르드:(인이어를 고쳐 착용하곤 파티장의 입구에 서서 당신에게 한 손을 내민다. 본래도 아름다운 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파티를 맞이해 작정하고 꾸민 베아트리체는 정말로 눈부실 지경이다.)
베아트리체 힐:(이 곳의 어떤 이도 당신보다 제게 빛나지 않으리라. 부드럽게 웃으며 내밀어진 손을 잡는다.) ...갈까.
에르드:(마주 희미하게 미소한다.) 응. 솔직히 이런 파티는 가본 적이 거의 없어서 저 작자들의 말솜씨에 맞춰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베아트리체 힐:너라면 잘 해낼거야. 예전부터 넌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필요할 때에 곁에 있을게. (손을 뻗어 한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겨준다.)
다들 널 보면 차마 말도 못할지도 모르고. ...오늘도 예쁘다. (맞잡은 채로 걸음을 옮긴다.)
에르드:날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말이야. (손길에 맞춰 허리를 살짝 숙인다.) 예쁘단 칭찬은 나랑 너무 안 어울리지 않나.
베아트리체 힐:...내 눈에는 제일 예쁜 걸 어떡해. (에르드에게만 들릴만큼 작게 속삭인다.)
에르드:(고개 절레절레) 차라리 잘생겼다고 해라. 물론 그것도 나랑은 도통 안 맞는 수식어지만.
아무튼, 들어가자. (칭찬 세례가 더 쏟아지기 전에 사람들한테 인사나 하러 가는 게 낫겠다)
참모총장은 파티장 안쪽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번쩍 들어올리네요.
베아트리체 힐:(또박한 걸음은 그의 앞에 가서야 멈춰선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에르드:(나름대로 정중함을 표방해 목례한다.) 안녕하십니까. 이쪽은 제 페어, 베아트리체 힐이라고 합니다.
참모총장: 그래, 그래! 날 호위하기 위해 직접 나서주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네. 특히나 에르드, 자네는 최근 떠오르는 별이 아닌가. 설마하니 페어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거이거 점점 더 놓치기 아까운 재원이 되어가는군. (경박하게 웃으며 에르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베아트리체를 향해 고개 돌린다.) 자네에게도 거는 기대가 커. 베아트리체 힐 소위라고 했던가. 불편하거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게. 내 힘으로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 지원해줄 테니 말이야.
베아트리체 힐:...처음 뵙겠습니다, 총장님. 말씀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든다.)
에르드:(어깨에 닿은 참모총장의 손길을 당장이라도 잡아 내던지고 싶지만 애써 꾹 눌러 참으면서 표정관리를 한다. 정말이지 본질적으로 저와 맞지 않는 자리다)
그 뒤로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 비위를 맞추는 것과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감수성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데에 적당히 편을 들어 주고,
같은 테이블에 앉거나 주변을 오가는 상관들과 인사를 하고…….
그러던 중 옆 테이블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글쎄, 대통령 각하께서 나를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그 말을 들은 참모총장이 킬킬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숫제 껄껄대며 파안대소를 터뜨립니다.
베아트리체 힐:(들고 있던 잔을 가만히 내려두고 참모총장을 바라본다. ...무슨 이야기라도 하려는지.)
참모총장: 후후, 아하하하. (눈물까지 닦아가며 웃다가 베아트리체의 시선을 알아채곤 손을 휘휘 내젓는다.) 아아, 신경쓸 것 없네. 워낙 재미있는 소리를 들어 말이지.
한편 때맞춰 무대 쪽 스크린에 대통령의 축사가 재생되기 시작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에르드:(참모총장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베아트리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이 이런 사람 많은 자리에 직접 나온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매번 저런 특별 담화에 단독 촬영만 한단 말이지.
베아트리체 힐:(시선은 자연스레 스크린에 두고 에르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목소리는 아주 조그맣다.) ......이상하네.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저것도 조작된 영상일까?
에르드:조작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어쩌면 그럴지도.
대통령 담화가 지나고, 에르드와 참모총장이 술을 한 잔씩 주거니받거니 하며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에르드:참모총장님. 저기 서버가 테이블 게임을 나눠 주고 있는데, 제게 한 수 가르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침 서버가 나누어주는 게임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테이블 보드게임 '만칼라'네요.
그 틈을 타 에르드는 베아트리체와 인이어 너머의 요한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입니다.
에르드:만칼라는 돌 여러 개를 갖고 하는 게임이니 참모총장이 쥐면 지문이 남겠지. 하나만 빼돌려서 워치로 스캔해줘. 요한이 지문을 딸 수 있게.
한 시간 정도는 끌어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틈에 공관에 가서 서재를 찾아봐. 할 수 있겠어?
베아트리체 힐:(조그맣게 끄덕이며 인이어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대답한다.) 그래, 해볼게.
베아트리체의 대답을 들은 후 에르드는 서버에게서 만칼라 도구를 받아 와 테이블에 깔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한 수씩 충고를 던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네요.
참모총장이 돌 여러 개를 쥐고 통에 넣으면서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은밀행동
기준치: |
60/30/12 |
굴림: |
1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이리저리 섞이는 손들 사이로 돌을 하나 집어들었다.)
테이블을 둘러싸 시끌벅적한 인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돌을 손 안에 감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마트워치 카메라나 착용한 렌즈를 통해 돌을 스캔해 그 정보를 요한에게 보냅시다.
베아트리체 힐:(테이블 아래, 무릎 위로 가져가 렌즈로 스캔 해보낸 후 다시 자연스럽게 섞어둔다.)
힐, 너한테는 공관까지의 최단 경로를 보냈다. 생체 반응을 스캔해서 사람이 적은 경로만 보여 줄 거야.
너희가 있는 전시장 지하에 차량을 마련해뒀어. 4분 정도만 운전하면 바로 공관이야.
감시가 붙진 않겠지만 조심해라. 지문은 지금 스캔 중이니 공관 도착하기 전까지 보내줄게.
베아트리체 힐:...네, 감사해요. (요한의 말에 조그맣게 대답하고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게임에 정신 없어진 사이,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옆사람 근처로 잔을 옮겨둔다. 그의 팔꿈치에 밀린 잔이 결국 제 무릎으로 쏟아지도록.) ......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부러 가볍게 웃어보이고는 드레스 자락을 쥔 채 밖으로 나선다.)
에르드:(멀어지는 베아트리체를 잠시 눈길로만 좇았다가 다시 게임판을 내려다본다. 별 탈 없이 다녀오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는 사람을 두엇 마주치긴 했지만,
행사 참여자가 건물을 돌아다니는 게 수상한 일은 아니니 별 일은 없었습니다.
요한이 준비했다는 차량번호를 확인해 차에 탑승했습니다.
홀로그램 패널이 경로를 띄워 주기 시작합니다.
공관촌까지는 경로를 따라 가니 요한의 공언대로 딱 3분 55초가 걸렸습니다.
참모총장의 사택인 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에 가까운 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역시 선배는 정확하네. 지문... 스캔본은 왔을까? 패널을 확인해본다.)
스캔본이 도착해 있습니다. 운전 중에 보낸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다. 속으로 감사 인사를 꼭 전하고는 지문 스캔본을 대문의 지문인식기에 닿게 띄워본다.)
…참 기묘한 정원이네요. 형형색색의 선인장과 특이한 식물들이 널려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정원에서 키울만한 것들이 아닌데. (웰위치아 미라벨리스의 앞까지 가서 유심히 살펴본다. 그 외에도 기묘한 정원을 눈에 담으며 저택 안으로 향한다.)
조심스럽게 정원을 통과해 안쪽 문으로 향하자. 일단 문 자체는 지문으로 열립니다.
베아트리체 힐:(문을 밀고 현관으로 들어선다. ...서재라고 했었지.)
요한 에를리히:내부 스캔을 해야겠는데……. 보안이 상당히 강력하네. 뭐 눈에 띄는 거 없나?
현관 앞에는 신발 여러 켤레, 우산, 발판 깔개, 그리고 로봇 청소기가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우선 현관에는 신발... 우산, 발판 깔개랑... 로봇 청소기가 있어요. ...이것도 해킹이 가능한가요?
(괜히 발판 깔개를 살짝 들춰본다.)
요한 에를리히:흠…… 로봇 청소기 한 번 켜봐. 그게 쓸모있어 보인다.
로봇 청소기는 집 구조를 직접 스캔하여 경로를 설정하는 기기이므로, 이 데이터를 내려받는다면 내부 구조를 알 수 있겠죠.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네요. (위 쪽의 전원 버튼을 눌러 켠다.)
요한 에를리히:신호 들어온다. 5초만 기다려.
다운로드…… 됐다. 여기서 어디가 서재인 거지? (분주하게 무언가를 확인하는 소리가 난다.)
흠. 2층 오른쪽 두 번째 방 같은데.
베아트리체 힐:...네, 바로 가볼게요. (패널로 비춰가며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의 끝에 다다라서는... 오른쪽으로 하나, 두 번째 방. 방문을 천천히 밀어 열고 주변을 둘러본다.)
서재로 가 보자, 특별히 보안 장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문 인식 방식인 듯하네요.
손가락이라도 잘리면 어쩌려고 지문으로 모든 걸 해결해 둔 걸까요?
베아트리체 힐:...전부 지문 인식이네요. 이렇게까지 하기도 드물텐데. (갸우뚱)
요한 에를리히:꼰대 정치인들 감각이 다 그렇지. (신랄하게 깐다)
:지문을 인식하고 내부로 진입하자 [태블릿 PC] 두 대, [수기 문서], [책상 서랍], [책장]이 보입니다.
요한 에를리히:잠깐, 책장은 조심해서 건드려. 뭔가 있는 것 같다.
특정한 책을 뽑으면 경보가 울린다거나 하는 시스템인 듯하군. 놔두고 다른 것부터 살펴. 다른 쪽엔 그런 건 안 보이니까.
베아트리체 힐:(신랄한 비판에 잠시 웃음이 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는다.) 네, 그럴게요. ...우선 태블릿부터.
(태블릿 PC두 대를 나란히 켜본다.)
태블릿 한 대는 배경화면이 가족사진이고, 잠겨 있습니다. 평범한 9칸짜리 패턴이네요.
가죽 케이스 안에는 ‘23일 9시 환경부 장관과 오찬’ 따위의 메모도 남겨져 있습니다.
다른 한 대는 좀 더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양인지 국방부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방위사령부에 공식적인 경로로 출입할 땐 카메라 렌즈에 늘 붙이는 스티커니까요.
이 태블릿은 지문 스캔 방식으로 잠금을 풀 수 있고, 바탕화면에 바로가기 문서 하나가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하나는 개인용이고... 이 쪽이... (스캔본을 인식 시켜 잠금을 풀고 문서를 열어본다.)
그 다음부터는 군사암호와 일반 문장이 섞여 있어 단번에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에르드:(인이어 통해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행도가 어떻지? 곧 게임이 끝날 것 같아.
베아트리체 힐:...서재에 들어왔어. 태블릿을 찾았는데, 프로젝트 아난시 자동화 계획에 대한 문서가 들어있어.
에르드:그게 찾던 건가? …… 일단 좀 더 시간 끌어볼게. 최대한 서둘러줘.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최대한 빨리 찾아볼게.
시간이 있다면 해독이야 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당장 이 자리에서 훑어보지는 못할 것 같네요.
요한 에를리히:프로젝트 아난시라고 했던가? 블루투스로 네 스마트워치에 파일을 옮겨줄 수 있겠어?
베아트리체 힐:...네, 그럴게요. (패널을 몇 번 두드려 문서 파일을 옮겨온다.)
...암호와 섞여있어서 지금 알아보기는 힘들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요한 에를리히:그거면 됐다. 다른 것도 살펴봐.
베아트리체 힐:(책상 위에 놓인 수기 문서를 펼쳐본다.)
:대통령 관저 스와콥문트 이관 계획위 필요성에 따라, 대통령 각하께서도 승인하신 바 청사와 관저를 스와콥문트로 이동하는 쪽이 보안 유지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일부러 자른 것은 아닌 것 같고, 앞장이 더 있는데 그건 어디론가 사라지고 뒷장만 남은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나머지는 어디로 간 거지. (문서를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살핀다.)
간식을 보관하는 곳인지 믹스커피 등이 나뒹굽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그때 인이어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전달됩니다.
에르드:상황은? 참모총장이 네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는데.
베아트리체 힐:...아. 미안해, 아직 책장을 제대로 못 살펴봤는데.
...경보 시스템까지 있는 걸 보면 중요해보여서.
요한 에를리히:그것까지 볼 시간 없을 것 같다. 맞나?
에르드:말대로. 베아트리체,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겠어. 이쪽에서 시간을 좀 더 끌어야겠는데.
요한, 미리 얘기했던 대로 하자.
베아트리체 힐:...그래, 금방 돌아갈게. (아쉬움이 남은 얼굴로 책장을 보다가는 원래의 자리로 말끔하게 돌려놓고 서재를 빠져나온다.)
요한 에를리히:전시된 크리쳐 로봇 중 하나를 폭주시키자는 거 말이지. 괜찮겠냐? 시간 끌려면 에르드 네가 단신으로 나서야 할 텐데.
에르드:상관없어. (평소처럼 무뚝뚝한 답이다.)
베아트리체 힐:......잠깐만, 에르. 내게는 그런 말 없었잖아.
에르드:어제 요한이랑 계획을 한 번 더 체크해보다가 혹시나 비상상황이 올 경우를 대비해서 얘기했었어. 괜찮아. 네가 자리를 한 시간 가까이 비웠다는 걸 들키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낫지.
베아트리체 힐:(잘 정돈된 머리를 한숨처럼 쓸어 내린다.) ......부디 다치지만 마. 널 믿으니까.
에르드:다칠 일 없으니 걱정 마. (한결 부드러운 톤으로 답한다.)
그럼 부탁한다, 요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인이어 너머로 들리는 소란을 들으며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세워둔 차량에 올라탄다. 공관촌에 갈 때와 다르게 속력을 올려 행사장으로 돌아간다.)
급히 속도를 높이자 차량은 금방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쿵, 쿵, 건물 울리는 소리,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옵니다.
2층에서부터 하늘로, 직선으로 내쏘아지는 황금색 광선.
파티장에 들어오기 전, 에르드는 허벅지 가터에 에너지 운용 권총을 찼었죠.
그렇다고 해도, 설계자 없는 구현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더군다나 에르드는 에너지를 운용하기보다는 신체적 능력으로 밀어붙여 공격하는 타입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미로 속에서 경로를 찾듯이 ㄷ자 형태로 꺾여 올라갔다가, 채찍처럼 날카롭게 바닥으로 내려쳐지는 에너지.
유량이 얼마나 거대하고 풍부한지 각성자라면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건물 전체가 황금색 에너지에 감싸여 일렁거릴 지경입니다.
2층 회랑 한 쪽이 무너져 있어서, 건물 바깥에서도 안이 잘 보입니다.
벽을 짚고 달리며 뛰쳐나온 에르드가 부속지 같은 팔을 휘젓는 크리쳐 로봇을 간단히 석화시키곤, 권총도 없이 손짓만으로 에너지를 갈겨 터뜨렸습니다.
여남은 잔해물은 몸을 빙글 돌려 그 반동을 이용해 힘껏 걷어찹니다.
설계자 없는 구현자, 저 전능한 구현을 보아라.
에르드는 공중에 떠 있듯이 체공 중이었지만, 실은 부서진 벽 조각을 밟고 교묘하게 올라타 있습니다.
어쨌든 기자들이 사진을 뽑기엔 아주 좋은 구도가 되었겠네요.
4년 전만 해도 그의 에너지 유량이나 다루는 실력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망명 정부에 가 있던 동안 얼마나 많은 수련을 한 걸까요?
하지만 설계자도 없이 이 엄청난 위력과 정확도라니,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이게 어떻게....?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싼 황금색의 향연에 커진 동공이 부서지는 빛에 눈부셔 감기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으니까.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온전한 힘. 신의 은총이 땅에 비춰 닿으면 이런 모습을 할까?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여태 이런 사례는 한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공중에 떠있는 듯, 마치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듯 선 모습에, 굳어있던 발걸음이 건물 쪽으로 느리게 움직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에르드:(벽에서 가볍게 뛰어내려와 당신에게 다가온다. 일련의 동작 탓인지 왁스로 넘긴 머리칼이 흐트러져 이마를 덮어내렸다. 폭주에 놀라 경악하던 사람들은 이제 에르드의 경이로운 힘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반응도 제 엄청난 힘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무덤덤한 낯이다.) 다칠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나도 이렇게까지 이능력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손끝에서 황금빛 에너지가 몇 번 더 불티처럼 탁탁 튀어오르다 서서히 잦아든다.) 좀 예상 외긴 했어.
베아트리체 힐:........놀랐어. (그럼에도 뻗은 손은 다정하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내는 손길은 부드럽다.) ...네가 안 다쳤다면 됐어.
(손 끝에서 완벽히 사그라드는 빛을 보고서야 다시 시선을 마주한다.) ...언제부터 이랬던거야?
에르드:글쎄. (버릇처럼 고개를 숙여준다. 이내 베아트리체의 손을 감싸쥔다.) 이야기해줄 때가 올 거야. 지금은 주목하는 눈이 너무 많군.
힘이 강해졌으니 위험한 상황에서도 너를 지켜낼 수 있을 거야. 네 미래예지에 내가 승리하는 미래가 많았으면. (희미하게 미소한다. 이건 온전한 그의 진심이지만, 보는 눈이 많은 지금은 일부러 베아트리체와 가까운 페어 사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해 괜히 베아트리체의 행방에 의문을 갖는 이가 없게끔.)
베아트리체 힐:....그래. 다음에 꼭 이야기해줘.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키려는 듯 나지막히 숨을 내뱉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남은 손을 들어 에르드의 뺨을 천천히 쓸어낸다.) ...강한 힘으로 너를 먼저 지켰으면 좋겠는데. 내가 보는 미래에는 네가 승리할 일밖에 없을 테니까. (진심에 더한 걱정과 염려로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보다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에르드 스스로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게 될까봐. 자신에게는 그를 지켜줄만큼의 힘이 없었으므로.)
에르드:난 굳이 지키지 않아도 튼튼해. 원래도 신체 단련은 게을리하지 않았었고, 4년 동안 더 열심히 했으니까.
망명 정부에서 정보를 찾아다니던 때 리사가 죽었단 걸 알았어. (눈빛이 일순 침체된다.)
너만은 잃고 싶지 않아, 베아트리체. (짧은 문장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시간만큼은 가늠할 수 없이 깊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차마 묻지 못했던 이야기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가라앉은 눈빛에서, 그럼에도 눈물 흘리지 않는 눈가에서, 마음을 고하는 목소리에서 무엇 하나 당신의 아픔과 다짐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난 늘 네 곁에 있을거야. 언제나, 사라지지 않을게. (희게 드러난 팔을 가득 뻗어 넓은 등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위로처럼 쓸어내린다.)
에르드:…… 그래줘. 꼭. (저보다도 한참이나 작고 마른 이인데도, 왜 한없이 넓은 대지에 안긴 듯 포근하고 안정감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다. 베아트리체의 마음이 그만큼 깊고 다정하기 때문이리라고 추측해볼 뿐이다. 그는 애초부터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고, 없는 수준을 넘어 엮이기조차 싫어하는 편이었으므로, 남에게 의지해본 적도 의존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제 많은 유일을 가져간 베아트리체가 이번에도 단 하나의 예외가 된다.)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상황에 대한 영문은 몰라도 두 사람이 완벽한 한 쌍의 페어로 보인다는 사실만은 자명한가 봅니다.
그러나 그날, 파티에 참여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겠죠.
"그토록 놀라운 광경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다!" 라고 말이에요.
베아트리체가 빼내 온 '프로젝트 아난시' 관련 문서를 요한이 해독하는 동안, 다시 일주일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동안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각성자사관학교로부터 실습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실전에 나선 선배 페어들은 대부분 전장에 투입되어 있으니,
페어를 맺고도 두 사람이 카사블랑카에 머물고 있는 틈을 타 학생들을 교육시키겠다는 의도였죠.
별달리 연설 같은 것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기술 시연 정도야 보여주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만약 연설을 해야 했다면 에르드 쪽에서 무척 괴로워졌겠죠.
애초에 상부 지시를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각성자사관학교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VR 가상훈련실과는 또다른 곳이었는데, 순수하게 이능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강도가 드센 재질로 만든 교실입니다.
3교시짜리 수업에서 교수의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남은 두 시간이 두 사람의 몫입니다.
에르드:(연설은 아니어도 수업 자체만으로도 싫을 법하건만, 망명 정부에서 후배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낮은 목소리로 퍽 자연스럽게 설명을 해나간다.)
…… 경로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야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
시력이 아니라 목표물을 겨냥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다. 흔들림 없이 하나만을 생각해 집중해야 돼.
잡념이 없을 때 에너지는 가장 순도 높은 열기를 가진다.
두 사람씩 짝지어 줄 서. (세워둔 과녁을 가리켰다.) 가장 정중앙에 가깝게 맞추는 페어가 점수를 가져간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가 먼저 시범을 선보입시다.
에르드:설계를 부탁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의 설명을 흐뭇하게 듣다가 앞으로 나선다.)
설계 Roll
기준치: |
80/40/16 |
굴림: |
11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앞선 설명을 들었다면 쉬울 거에요. (담백하지만 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인다.)
에르드:(에너지 운용 권총을 손에 쥐고 연보랏빛으로 깔린 설계를 따라 과녁을 겨냥했다. 짧은 장전음, 격발.)
사격(권총)
기준치: |
90/45/18 |
굴림: |
3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황금빛 탄이 설계를 쏜살같이 타고 지나가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에르드와 베아트리체의 협력에 경탄합니다.
이 우아한 설계와 무심한 구현은 각성자라면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죠.
여기 모인 학생들은 1학년이어서, 학교를 일찍 떠난 에르드는 물론이거니와 베아트리체와도 재학 기간이 겹치지 않아 아는 얼굴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고, 앉아 있는 후배들은 모두 둘을 알고 있습니다.
4년 전 학내 시위 이후 두 분파로 갈라진 세력은 저마다 겉으로 보기엔 별문제가 없는 동아리를 형성해 각자의 세력을 내세웠습니다.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을 그대로 계승한 축이 전통음악 동아리입니다.
자기 자리 옆에 작은 젬베를 내려 둔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불쑥 말합니다.
학생1: 선배님께선, 외람되지만, 4년 전 학내 시위 중 끌려가신 후 계속 '괴뢰 정부'(라고 발음할 때 학생은 굉장히 냉소적인 어조를 사용했다)에 붙잡혀 계셨던 걸로 아는데요.
이능력을 어떻게 그렇게 다듬으셨습니까?
에르드:……. (지금 나한테 시비 터는 건가?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그 침묵 가운데에서 건너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대들듯이 반박합니다.
학생2: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도 있잖아! 넌 맨날 실습 점수 하위권이니까 질투 나냐, 마르보?
그러자 마르보라는 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학생1: 나는, …나는 정보의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야!
‘충성하는’ 자들에게 좀 더 능력을 개화하기 쉬운 법을 알려 줘서 자기 사람으로 키운다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마르보는 돌아 돌아 결국 에르드가 정부에 충성하는 것을 비꼬고 싶었나 봅니다.
베아트리체 힐:(한 쪽 눈썹이 올라간 에르드를 보고는 학생들에게는 안 보이게 등을 토닥여준다.)
에르드:(어쨌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저는 카사블랑카 정부의 개나 다름없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한층 어른이 되어서 다행이지. 예전이었더라면 머리론 알면서도 다혈질인 성격 때문에 욱해서 대거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베아트리체가 곁에 있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을 느끼니 잠깐 끓어올랐던 열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괴뢰 정부에 잡혀 있었어도 이능력을 연마할 시간은 주더군. (비스듬히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리고 나 혼자서 뛰어나선 안 돼. 결국 능력이란 제 페어와 얼마나 합이 잘 맞는지에 따라 결정되니까. 운 좋게도 나는 아주 뛰어난 설계자를 만나서.
베아트리체 힐:(느리게 등을 쓸어주다가 제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이 동그래진다.)
... ...페어와의 합은 굉장히 중요하죠. 설계자와 구현자 모두에게 중요한거니 여러분도 꼭 맞는 이를 찾기 바라요.
에르드:자, 왼쪽에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해 봐. 구현자와 설계자별로 고칠 점이 있으면 봐줄 테니까.
학생들은 베아트리체와 에르드가 얼마나 이능력을 잘 운용하던지 저마다 감탄하며 재잘재잘 강의실을 나섭니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쪽도 있었고요.
그렇게 두 사람 몫의 강의가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에르드:고생 많았어, 베아트리체. 예전이었으면 애들 가르치는 덴 나보다야 네가 훨씬 더 소질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익숙해지게 됐군.
베아트리체 힐:에르 네가 더 고생 많았지. 그거야 경험이 더 중요한 거니까. (오히려 제게 즐거운 일이었다는 듯 한결 가벼운 얼굴로 토닥인다.) 참느라고도 고생했어.
4년간 네가 어땠을지 조금 더 상상이 되서 난 좋았어.
에르드: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내가 참아줘야지 뭐. (어깨 가벼이 으쓱인다.)
1학년 때 지도교수가 잠깐 보자고 하더라. 내용이야 뻔해 보이지만. (잠시 질린 표정 지어보인다) 먼저 1층 로비 가 있어.
베아트리체 힐: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질린 뺨을 콕 찔러주고는 먼저 돌아서 내려간다.)
(간만에 보는 1층 로비를 천천히 둘러본다.)
로비를 둘러보던 도중,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릴리안 웨즐리:저어…… (머뭇거리며 인사한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까 강의 들었던 릴리안 웨즐리라고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아, 릴리안. 방금 봤었죠. 무슨 일이에요?
잔뜩 긴장한 그는 대뜸 태블릿 패드를 내밉니다.
릴리안 웨즐리:저, 사, 사인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패, 팬이어서요, 제가! 선배님하고, 에르드 선배님하고…….
베아트리체 힐:? (이해가 안 되서 잠시 멈춰 서있다.) ...........저를요? 에르드도 아니고...?
(갸우뚱하면서도 패드를 받아든다. 깔끔하고 단정한 글씨체로 제 이름을 적은 다음 돌려준다.)
릴리안 웨즐리:저, 저,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곁에 잠깐 앉아도 될까요……? (말이 곁이지,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지점을 가리켜며 물었다)
베아트리체 힐:(정말 귀여운 학생이네...... 금방 끄덕인다.) 그럼요, 편히 앉아요.
릴리안 웨즐리:감사합니다아…….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앉아 목소리를 조금 낮춘다.) 저, 실은…… 인자미나 아시죠? 선배님들 1학년이실 적에 꽤 유명하셨어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자, 잘 모르는 사이에 겨우 사진 몇 개만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요.
선배님들을 무척 동경했었거든요.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는 1학년 때부터 페어를 맺은 일로 교내에서 꽤 유명세를 탔었죠.
4년 후에 돌아온 에르드의 행보는 물론이고, 베아트리체 역시 3학년 때 미래 예지로 전멸 위험이 있었던 전투를 막아낸 적이 있으니 두 사람의 성격과 별개로 퍽 인상깊게 남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뿐. 딱히 대단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릴리안 웨즐리:지금까지 임시 페어를 몇 번이고 거쳐 보았는데, 저는 동조율이 하나같이 몹시 낮아서……. 선배님들께선 오랜 기간 떨어져 계셨는데도, 각자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으신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수업을 듣고 정말 감탄했어요.
시간이 없으신 게 아니라면… 몇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베아트리체 힐:...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조용히 웃으며 끄덕인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괜찮아요. 편히 물어봐요.
릴리안이 그렇게 입을 떼던 순간에, 난데없이 복도 저쪽 끝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꺅! 악! 으악! 난 귀신은 괜찮아도 벌레는 질색이란 말이야!”
거대하고 꿈틀거리는 다리와 더듬이, 역겹게 번쩍거리는 갑주를 갖춘…
어디로 보나 보편타당하고 완전한 바퀴벌레가 기어 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의 크기가 4m쯤 되었다는 것이겠죠…….
조금 이성을 갖춘 학생들은 그 안에서 키잉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었으므로, 이것이 연습용 크리쳐 로봇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혐오감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상한 실험으로 학내 사고의 주요 원인이 되곤 하는 연구부가 또 폭주 로봇을 만들어냈으리라는 추측,
그 폭주 로봇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걱정은 모든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듭니다.
에르드:나 왔어, 베아…… (타이밍 좋게 1층으로 내려왔다가 그 자리에 굳어선다.)
……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크기에 곧바로 크리쳐 로봇이라는 걸 알아챈 듯하나, 생리적인 혐오감에 오만상을 찌푸린다.)
에르드가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바퀴벌레가 돌아봅니다.
눈이 달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크리쳐 로봇이니 감지 센서가 있는 건 당연하죠.
폭주 직전이었던 바퀴벌레는 놀랍게도 갑작스레 입을 쩍 벌리고 몸을 구부려 뒤로 돌아 에르드에게 달려듭니다.
에르드가 활약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온 후배들이 대다수였으니까요.
게다가 에르드의 이능력은 석화가 아닌가요.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거슬리는 존재는 언제든 쉽게 멈추고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한두 사람 나와 있었던 교수들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에르드가 손을 들어올렸으므로 그를 믿고 기다리는 기색이었습니다.
바퀴벌레의 속도가 줄어든다거나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멈춰서거나,
황금빛 에너지가 에너지 운용 권총에 감겨드는 일도 없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죠!
베아트리체 힐:.......에르..! 조심해! (그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뭔가 이상하다. ...안돼. 본능적인 섬뜩함에 허벅지에 차고 있던 에너지 운용 권총을 꺼내 들어 크리처 로봇의 머리를 노린다. 장전에 격발까지, 망설일 틈이 없었다.)
베아트리체가 로봇의 머리에 권총을 명중시키는 것과 더불어,
뒤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릴리안이 기지를 발휘해 던진 사과에 맞은 바퀴벌레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꿈틀거립니다.
소름끼칠 정도로 잘 만든 형상이었지만, 그런 재현에 감탄할 때가 아니겠죠.
베아트리체 힐:(인간이라면 기절할 법한 형상을 보고도 주변은 전혀 아랑곳 않고 에르드에게로 뛰어간다. 혹시 파편에 다친 곳은 없는지. ...갑자기 왜 이렇게 된건지. 안색을 살피는 얼굴이 파리하다.) ... ...에르! 에르, 괜찮아?
에르드:……. (언제나 무덤덤한 낯에 옅은 당황이 묻어나왔다. 작게 속삭인다.) 이능력이…… 나오질 않아.
낯빛이 창백합니다. 의무실에라도 들러 봐야 하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 힐:........이능력이? ....우선 자리를 옮기자, 에르. (팔을 끌어당겨 반쯤 제게 기대게 한다. 계속 낯을 살피며 의무실로 향한다.)
(눈치로 에르드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심스레 속삭인다) 제가 보건위원인데, 지금 의무실이 잠깐 잠겨 있을 거거든요. 필요하시면 열어드릴까요?
베아트리체 힐:(돌아보며 끄덕인다.) ...고마워요.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릴리안은 문을 열어준 뒤 물러가고, 에르드가 침대에 걸터앉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괜찮아? (시선을 맞추고 여전히 안색을 살핀다.)
에르드:그래. 일단…… 능력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닌 것 같아.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에너지 흐름도 평범하게 느껴지고.
그런데 쓰이질 않는군. (눈가를 미묘하게 찡그렸다.)
베아트리체 힐:...사라진 것도 아닌데, 사용할 수가 없다니. (에르드의 손위로 제 손을 겹쳐 쥔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에르드:(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짚이는 게 있긴 해.
며칠 전 자선파티 때, 능력을 크게 사용했었지. 원래는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과하게 다루려던 건 아니었어. 애초에 내 전투 스타일이 능력은 적을 멈추는 데 사용하고 육탄전으로 승부를 보는 거였잖아.
내 힘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부터가 의도한 게 아니었어.
4년 전 노노이 라가힛이 죽었던 사건, 기억나?
베아트리체 힐:...응, 기억나. 그때... (엉망이 된 교정하며, 섬뜩하던 가면까지. 그야말로 평범한 죽음은 아니었다.)
에르드:그가 죽었을 때 곁에 있던 나와 요한이 피를 엄청 뒤집어썼었지. (덤덤한 투로 말 이었다.) 그날부터 에너지 유량이 이상할 정도로 요동쳤었어.
라가힛이 정부한테 무언가 심상찮은 일을 당했단 건 너도 짐작했을 테지. (다같이 벌건 눈으로 휴게실에 모여 증거를 캐고 CCTV를 살펴보던 날이 떠오른다.)
에너지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컨트롤하느라 4년 내내 꽤 애를 먹었어. 방법을 찾다가 라가힛과 관련된 일을 추적해 왔고, 그가 어떤 실험 대상이었단 걸 알아냈어. 각성자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무언가라는 것 이상으론 찾아낼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 피가 영향을 미친 건 확실해.
(맞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를 감각한다.) 최근에야 에너지를 안정시킬 수 있었어. 그래서 널 만나러 여기 되돌아올 수 있었던 거기도 하고. 힘을 크게 써본 건 그 자선파티 때가 처음이었는데, 아마 반작용이 닥친 게 아닌가 싶군. 여남은 힘마저 아까 수업 때 시연하면서 써버린 것 같아.
베아트리체 힐:...그래, 그때 요한 선배도 그랬었지. ... ...살아있을 때 가지고 논 걸로 충분하지 않냐고. 그 뒤로 금지 물약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다독이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은 한동안 이어진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염려스러운 눈빛과 손길은 멎을 새가 없다.)
......큰일이네. 네 임무에도 지장을 줄 텐데. ...다시 돌아올까?
에르드:이 정부는 사람을 장난감 정도로 아는 게 분명해. 망가지거나 부서지더라도 죄책감 없이 던져버리고 다음 '장난감'을 찾지. 내가 떠나 있는 시간 동안 혹시나 네가 정부의 실험에 엮이지는 않을지 걱정한 적도 있었어.
아마 자연적으로도 조금씩 차오르긴 하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지. 처음 언약을 맺었을 때처럼 네 에너지를 나에게 넘겨줘. (마침 손도 잡고 있으니. 맞잡은 손을 살짝 흔든다.)
베아트리체 힐:......장난감. (절로 나지막한 숨이 새어 나온다. 대체 이 정부는 얼마나 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쌓아둘 셈인지.)
...응, 그렇게 할게. 네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손을 힘주어 맞잡은 채로 천천히 온기를 더해 에너지를 넘겨준다.)
안아주는 편이 더 빠를까? (부러 가볍게 웃어 보이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불안함에 뛰는 심장을 애써 눌러보려.)
에르드:(베아트리체가 넘겨주는 에너지를 받아들이고서야 에르드는 제 몸속이 무척 차가웠음을 자각한다. 얼음장 같던 뱃속이 부드러운 온기로 덥혀진다.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간 것처럼 긴장이 풀렸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 (두 팔 벌려보인다)
베아트리체 힐:(팔을 뻗어 너른 품을 안는다. 제가 다 묻혀 사라질 정도지만. 언약을 했던 그날보다 한층 커버린 몸은, 제 팔로 다 안아들기에 버거울 정도가 되었다. 차게 식은 몸을 데우려 빈틈없이 끌어안는다.)
...네가 또 이렇게 될까 봐 무서워.
에르드:에너지를 다루지 못하게 되더라도 칼도 있고, 총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한 팔만으로도 베아트리체를 간단히 감싸안고선 그 어깨에 제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그리고 곁에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지? 같은 일이 또 생겨도 네가 에너지만 전달해주면 되는데. 너랑 난 페어잖아. 혼자가 아니라고.
베아트리체 힐:맞아, 분명 너는 아주 강한 사람이지. 그런데도 나는 늘 네가 가장 걱정이 돼. (어깨에 위로 내린 둥근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는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망설임 없이 나온다는 것이 기껍기 그지없다.)
응, 그래. 걱정되는만큼 곁에 있을 테니까. 난 네 페어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에르드는 돌아온 날부터 반 년 내내 병자 같은 행색이었습니다.
학생 시절보다 더 떡 벌어진 체구를 가졌음에도 낯빛이 나쁘다는 걸 당신은 알아볼 수 있었죠.
그러던 것이 지난 몇 주간, 정확히는 다시 만난 날부터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에르드:네가 날 그만큼 생각해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과분한 애정을 받고 있는 건 아닌가. 커다란 마음에 다 보답하기에는 성격적으로도 타고난 천성으로도 쉽지가 않아서.)
(긴장이 풀려서일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안은 팔을 풀어내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조금만 잘게. 괜찮지? 시간은 있으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러니 너는 늘 곁에만 있어줘. 나지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기며 너른 가슴께를 두드린다.) ...응, 한숨 쉬어. 눈 뜰 때까지 기다릴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차에, 조심스럽게 보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베아트리체 힐:(잠에 든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린 문을 조용히 열어본다.)
(...누구세요? 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릴리안 웨즐리:아, 저, 선배님…… 저예요. 방해하려던 건 아니고요……! 혹시 이게 필요하실까 해서요. 뭔지는 잘 몰라도 심상찮은 상황인 것 같아서.
릴리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농담 삼아 포션이라고들 부르는, 각성자들이 자주 마시는 체력 회복제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릴리안.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손에 들린 회복제도 받아든다.)
릴리안 웨즐리:(베아트리체 너머로 침대를 흘낏 본다.) 그, 선배님 주무시는데 방해될까 봐 죄송하지만…… 아까 하던 이야기가 저한텐 되게 중요한 거라서요.
서, 선배님께 조언을 듣고 싶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눈치)
베아트리체 힐:...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다고 했었죠. (들어오라고 하는 편이 좋을까, 잠시 나가는 편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괜한 잠을 깨울까봐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앞에 의자에서 얘기할까요?
조심스러운 기색이던 릴리안은 의자에 앉아서도 눈치를 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엽니다.
릴리안 웨즐리:저, 사실 동조 장애가 의심된다는 소견이 있어서요.
릴리안 웨즐리:네. 많은 임시 페어를 만나 봤지만…… 동조율이 다 20%를 채 넘지 못해서…….
그런데 저는…… 저는 꼭 멋진 각성자가 되어야 해요. 어, 그러니까, 좀 tmi인데요……. 저희 부모님이 각인하신 각성자 부부였다고 하시는데, 스와콥문트 시민이시거든요. 저랑 오빠가 아주 어릴 때 떠나 버리셨어요. 그 뒤론 연락도 끊어버리시고…….
그래서 저랑 오빠는 오랫동안 부모님이 저희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직접 만나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우연찮게 저도 각성자로 태어났으니까, 제가 공적을 세워서 시민권을 따려면 구현자로서 멋진 행보를 보여 주어야 가능성이 생기고……. 그, 그런데 이런 상황이니까요. 혼자서도 전투할 수 있는 노하우를 익혀야 해서…….
그래서 선배님께 여쭙고 싶었어요. 두 분의 동조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나 어떤 조건 때문일 수 있지만…… 선배님께서 페어가 사라진 상황에도 이능력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임관하신 건 선배님의 노력 때문이잖아요?
눈 안에서 신뢰가, 동경이, 반짝거리는 경탄이 빛납니다.
릴리안 웨즐리:저는 강해지고도 싶지만…… 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도 싶어요. 뭐, 딱히 누가 뭐… 세상을 구해라! 하고 시킨 건 아니지만요, 오빠도 각성자인데 질 수 없어서요.
저는 선배님 덕분에 용기를 많이 얻었거든요. ……저어, 예전에 사관학교 시위 있었을 때에도 계셨다고 들었어서요. 전투에서 크리쳐 군단이 갑작스럽게 나타났을 때도 미래 예지로 막아내셨다고.
우습네요. 동경할 거라면 에르드를 좇아가지, 베아트리체에게 이럴 건 뭐란 말인가요.
베아트리체가 에르드 없이 졸업한 게 딱히 베아트리체 본인의 선택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한 일도 아니거니와 학내 시위와 미래예지로 막아낸 전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릴리안은 거기서 느낀 게 있는 모양입니다.
릴리안 웨즐리:죄송해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했죠. 일단, 선배님께서 구현이 없어도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훈련을 하셨는지가 궁금하고……
그리고, 음…… 두 분이…… 시위에 나갔을 때와 지금의 마음가짐이 여전히 같으신지도 알고 싶었어요. 이건 그,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라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베아트리체 힐:......릴리안. 우선 나를 좋게만 봐주어 고마워요.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위로 대신 작은 손을 도닥여보였다.) ...하지만 내가 따로 해줄 말이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난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을 했을 뿐이거든요. 그러니 이 질문은 나보다는 에르드에게 묻는 편이 맞을 테고요.
...에르드의 몫까지는 대답해 줄 수 없지만.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다. 두 사람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릴리안 웨즐리:…… 그렇군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되게 오랫동안 두 분을 동경했거든요. 선배님께서 여전히 같은 마음이라고 하시니, 저도 부끄럽지 않도록…… 이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요.
선배님께서 생각하시는 '옳은 것'은 예전과 같은가요, 다른가요? 다르다고 하셔도 나쁜 건 아니지만요. 사람 생각은 계속 바뀌니까요. 그치만 전 역시…… 엄마, 아빠한테 부끄럽지 않도록 정의로운 선택을 하고 싶어요.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요.
릴리안 웨즐리:제가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냐 싶긴 하지만요. 하지만 원래 영웅은 그런 데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의자에서 조심히 일어난다.) 시간을 너무 오래 뺏어서 죄송해요.
선배님, 오랜 팬으로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시더라도,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걸 하고 있나’ 싶은 시간이 오시더라도, 두 분을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후배들이 선배님들을 동경하고 좋아하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선배님들께선 저희 하나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되어 주시고 계신 거예요.
…… 그러니까 건강하셔야 해요!
그런 후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집니다. 부끄러웠던 모양이에요.
베아트리체 힐:.......아. (사라지는 뒷모습에 대고 전한다. 저만치 멀어져 들릴지도 모를 거리에서.) 그런 마음을 가져주는 것 만으로도 누군가에는 힘이 되요. 단 하나라도 좋으니. 그러니까 지지 말아요. 부모님께서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실테니까... ... 그러니까. 나도 고마워요.
(조그맣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문 안으로 들어선다.)
에르드:(눈가를 비빈다.) …… 오래 잠들어있었나?
베아트리체 힐:(곁에 앉는다.) 아니, 더 자도 되는데. 일찍 일어났어.
이제 좀 괜찮아졌어? 몸은?
에르드:한결 가뿐해진 것 같아. (여전히 누운 채로 시선만 들어올린다.) 원래 낮잠은 잘 안 자는 편인데, 에너지를 받아들이니 안심이 돼서 그랬나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혼자 심심했겠어.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다. (머리칼을 가볍게 넘겨준다.) 심심하지 않았어. 귀여운 후배님이 잠시 왔었거든.
고마운 이야기를 해줬어.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동경하고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다고 하던데. 네 모습에 반한 애들이 한 둘이 아닌가봐. (조금 장난스레 웃는다.) ... ...질투해야하는 부분일까?
에르드:후배? …… 그런 모습을 동경하고 좋아해도 되는 건가? 정부의 앞잡이인데. (픽 웃는다) 질투는 무슨. 1학년 때 떠났고 와서도 학교에 와본 건 처음이라 아는 후배 아무도 없어. 애초에 선배나 동급생도 요한이랑 너 아니면 연락도 안 하는데 뭐.
베아트리체 힐:...나처럼 너를 의심없이 믿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 정부의 아래잖아. ...모든 것이 조작이었다. 알게 모르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거야. (눈가를 쓸어주며 웃는다.) 고마워,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답해줄 줄은 몰랐는데.
에르드:그런가…… 대항하는 사람이 우리뿐만은 아니어서 다행이네. 내가 세간에 보이는 모습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너 말고 누군가는 알아주려나.
난 너를 만나기 전만 해도 아무랑도 엮이려 들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주면 고맙겠어. (옅은 장난기가 묻어난다)
베아트리체 힐:그 날의 우리를 여전히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나 봐. 시위 때에도, 함께였잖아. ...정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때에 옳다고 믿었던 것을 너와 함께 계속 믿고 싶어. 아무리 힘들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런 나라도 응원해준다고 하니까.
(누워있는 반듯한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채로 나지막히 웃는다.) 응, 이렇게 믿음직스럽기도 드물지.
에르드:아무것도 한 게 없기는. 그때, 그 학생 시위에 함께 했었던 마음을 지금껏 변질되지 않고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사람을 부속품처럼 쓰다 버리고 입맛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하는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죽여버리는 이 썩어빠진 사회에서 굴복하지 않고 버텨온 것만으로도. 그러니 너를 보고 희망을 갖고 응원하는 애들이 늘어나는 거겠지. 이젠 내가 네 곁에 있으니 좀 더 안심해도 돼.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내가 일차적으로 막아설 테고, 그럴 수 없더라도 함께 나눠 질 테니까.
(이마를 맞대고서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오늘 아침 요한에게서 연락을 받았어. 카사블랑카를 떠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얼마쯤 필요할 것 같아? 가족 문제는 생각해봤어?
베아트리체 힐:...그래. (그 누가 몰라주어도 괜찮다. 너만이 알아주고 함께 그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힘이 될 테니까.) ...함께 이주하면 좋겠는데. 지금 이야기들을 전하면 가족들은 흔쾌히 허락 할 거야. 늘 내 편이 되어주셨으니까. 얼마나 걸릴지는... 정리 하는대로 2주면 될까?
에르드:그렇잖아도 아예 함께 보츠와나로 가는 건 어떤지 제안하고 싶었어. 2주라…… 좋아. 우린 정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확인한 후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하니, 네 가족이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이동하는 게 좋겠어.
요한이 참모총장 공관에서 가져온 '프로젝트 아난시' 관련 문서를 절반쯤 해독해냈다더군. 뒷부분은 아예 문서가 파쇄돼서 읽을 수 없었지만, 방위사령부 지하에서 뭔가 이상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나 봐.
'아난시'는 옥수수알 한 알을 갖고 사람 백 명과 맞바꿨다던 아프리카 도곤족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라던데. 이유없는 명명은 아니겠지.
우리가 학생일 때 아놀드 박사에 대한 소문이 돌았었는데. (기억나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베아트리체 힐:응, 돌아가는 대로 연락을 해둘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기억나. 아놀드 박사남이 AI가 아니냐는 소문 말하는거지? ...모든 영상은 조작이고.
에르드:정확히는 그가 스와콥문트로 간 후의 행방이 그랬었지. 아놀드 박사가 이 실험의 총책임자였는데, 뭔가 반발을 하다가 숙청당했다는군. 이후로는 프로젝트 전체가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는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대. 그래서 실험실에 사람은 전혀 없겠지만, 로봇은 조심해야 한다는군.
그곳에서 실험에 관해 알아낸 다음, 증거물을 챙길 수 있으면 챙기고 그 길로 도시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장벽 바깥에서 망명 정부 사람들과 만나 나미브 사막으로 이동. 이게 내가 생각해본 계획이야. 괜찮겠어?
베아트리체 힐:아, 그랬었지. (느즈막히 끄덕인다.) ...그래, 이해했어. 괜찮지, 그럼. 네가 있잖아. 나도 최선을 다할게.
에르드:반군 기지에서 지내는 건 녹록지 않을 거야. 여기보다 물자도 시스템도 여러모로 부족하지. 너뿐 아니라 네 가족 전체에게 이런 짐을 지워도 될지…… 이제 와서는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미안해지네.
베아트리체 힐:...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고 괜찮아. 네가 미안해 할 일도 아니고. 오히려 이곳에서 구해주어 고맙다고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젠가 이 곳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에르드:…… 그래. 이곳의 비정상적인 정부를 완전히 몰아내고 개혁에 성공해낸다면 다시 여기 머무르게 될 수도 있겠지. 아직 고맙단 말을 듣기는 이른 것 같지만.
흔쾌히 응해줘서 내가 고마워.
베아트리체 힐:(어깨를 토닥이듯 쓸어낸다.) ...서로 고맙다고 하는 말이 닮아있어서 웃겨. 어쩜 이런 부분까지도 닮았을까?
에르드:그만큼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증명인가 보지. (낮은 웃음소리가 목을 울린다.)
베아트리체 힐:(가장 좋아하는 웃음,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 가장 사랑하는 사람. 제 심장을 울리는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는다. 만면에 환한 봄꽃같은 웃음이 피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로를 향한 믿음과 애정을 가슴에 품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지라도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간 두 사람은 현금을 조금씩 바꾸거나 짐을 싸는 등 티나지 않게 준비를 마치고 중간중간 임무에도 얼굴을 비추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죠.
하루 전 베아트리체의 가족들이 먼저 카사블랑카를 떠났습니다.
보초를 서던 헌병대도 꾸벅꾸벅 졸 시간입니다.
방위사령부 앞에서 에르드가 베아트리체를 맞이합니다.
뭔가를 지키고 있다는 티를 내면 지하실 존재가 들통나니 아예 입구 안쪽에서 로봇들로 경비를 서는 것 같았다는 게 에르드와 요한의 분석이었죠.
에르드:준비는 됐지? (소통용 인이어를 내민다.)
베아트리체 힐:응. (고개를 끄덕이며 내밀어진 인이어를 끼운다.)
요한 에를리히:들리나? 입구에 경비 로봇이 있을 텐데, 그 로봇들 상대만 조용히 좀 해 주면 걔네들 통해서 내부 설계도를 다운로드해 보겠어. 부탁한다.
에르드:확인. (간결하게 답하고 베아트리체에게 고갯짓했다.) 가자.
베아트리체 힐:네. (짧은 대답 끝에 끄덕임. 같이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합니다.
인이어 너머에서 바쁘게 무언가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히 문이 열립니다.
지하 출입 권한이 있는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킨 모양입니다.
실험실로 향하는 주요 입구에는 푸르고 조도 낮은 조명이 밝혀져 있습니다.
다중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것이 감각만으로도 느껴집니다.
홍채 인식 장치는 요한이 무효화했고, 남은 것은 발 앞의 각성자 에너지 감지 장치입니다.
이 레이저 선을 넘었을 때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의 출입이 느껴지면 보안 로봇이 튀어나오는 구조라고 요한은 설명합니다.
요한 에를리히:여긴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로봇이 튀어나오자마자 조용히 처리하는 방법뿐인 것 같다.
단, 설계도를 다운로드할 시간이 필요하니 14초 정도 시간을 끌어야 해.
베아트리체가 설계를 열면서 동시에 발을 내딛어라. 그리고 에르드가 위에 에너지 구현을 얹어. 로봇은 부숴도 괜찮지만, 시간만 좀 끌도록.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구현자는 <이능력> 판정을 시행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네, 그럴게요. (숨을 천천히 뱉어내고는 에너지의 흐름을 눈에 담는다. 한 발을 뻗어 냄과 동시에 경로를 읽어낸다.)
항법
기준치: |
80/40/16 |
굴림: |
7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에르드:
석화 Roll
기준치: |
90/45/18 |
굴림: |
4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베아트리체가 펼쳐낸 설계에 황금빛 에너지를 천천히 퍼뜨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설계와 구현은 정확히 맞아들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로봇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귀엽게 생긴, 고전 애니메이션 월-E에 나오는 흰색 로봇 같은 비주얼의 보안 로봇이 튀어나와 전자기 파동을 퍼뜨립니다.
미리 설계된 경로를 따라 에르드의 석화가 번개처럼 로봇을 정지시키고,
반동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로봇은 얼마간 팔을 떨다 액정을 깜빡거리며 이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요한 에를리히:……보안이 상당한데. 일부 구역은 아예 폐쇄되어 기록에 남질 않았어.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설계도가 이 정도였다. 일단 참고해.
경비 로봇: ……저는 제 할일을 다 했어요! 공격하지 마세요!
기술이 발전되면 인간과 닮은 로봇이 시장을 지배하리라는 과거의 예측과 달리,
로봇들은 귀엽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점점 일원화되었습니다.
인간과 닮은 로봇을 개발하는 것은 여러 윤리적 관념상 굉장히 심한 규제를 받는 일 중 하나죠.
경비 로봇: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예요! 어떤 목적으로 방문, …….
라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치지직 소리를 내며 꺼지고 맙니다.
베아트리체 힐:(... ...이런 때에 할 생각은 정말 아니지만... 귀엽게 만드는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데이터 분석실로 이동한다.)
이곳은 수집된 모든 실험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대형 서버 룸과 여러 개의 분석 스테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네요.
로봇이 즐비해야 할 것 같은데, 캐비넷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로봇이 케이스에 담겨 잠들어 있습니다.
에너지 변환기, 고성능 PC가 늘어서 있습니다.
뭔가 복잡한 스트림이 화면에 표시되고, 중앙 실험실을 도식화해둔 듯한 원형 챔버가 모니터에 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메인 PC를 먼저 확인해본다.)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켜 잠금을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워치의 패널을 몇 번 톡톡 두드리더니 익숙하게 지문 스캔본을 띄워 인식시킨다.)
인공지능 제어 시스템인지 화면에는 대화 창이 떠 있습니다.
아무래도 주변을 둘러보며 단서를 획득한 후에 물어볼 내용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 힐:(빈 대화창에서 시선을 돌린다.) ...옆으로 넘어가볼까? 다른 곳을 둘러보고 와야할 것 같아. (제어실A 방향으로 고갯짓한다.)
에르드:살펴보고 나면 뭘 물어봐야 할지 단서가 잡히겠지. (고개 끄덕이고 그쪽으로 향한다.)
제어실 A는 실험실의 모든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는 곳처럼 보입니다.
문은 딱 로봇이 드나들 만큼만 열려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크기
기준치: |
50/25/10 |
굴림: |
68 |
판정결과: |
실패 |
에르드:
크기
기준치: |
80/40/16 |
굴림: |
3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육중)
(에르드의 팔을 잡고 안 아프게 살살 당겨본다... 완전히 끼었나...?)
에르드:(완전히 꼈다……) 로봇 한 번 작게 만들어뒀군…….
베아트리체 힐:......(아프겠다...) ...잠깐만. (문을 더 열만한 공간은 없는지 찾아본다.)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73 |
판정결과: |
실패 |
.......(미안해) 문이 제대로 끼었나봐.
잠깐 옆으로 비켜봐.
베아트리체 힐:...응? 잠깐만. (갸우뚱...한 얼굴로 문을 살짝 당겨본다.)
손놀림
기준치: |
10/5/2 |
굴림: |
71 |
판정결과: |
실패 |
베아트리체 힐:(아. 손톱만 문 끝에 걸렸다....... 얌전히 옆으로 비켜준다....)
에르드:
근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5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베아트리체 힐:............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른척.)
부서진 문 잔해를 내려다보기도 잠시,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방 전체에 낭랑한 울림이 퍼집니다.
이후로도 음성은 두 사람의 신체 정보를 몇 가지 더 읊고 풀썩 꺼집니다.
그때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안내 로봇 하나가 팔을 흔듭니다.
베아트리체 힐:(깜짝. 놀라 에르드 옆에 착 붙는다.)
안내 로봇:이리오세요! 두 분의 신체 상태를 점검해 드릴게요, 각성자님!
에르드:뭐야? (베아트리체 어깨 한 손으로 감싼다) 이것도 부술까?
요한은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 카메라로 비치는 내부를 파악하며 바쁜 판단을 내립니다.
요한 에를리히:아니, 뭐든지 부수려고 하지 말고. (어쩐지 이마 짚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
위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닌 것 같군. 단순히 신체상태를 점검할 뿐인 것 같아.
그러는 사이에 로봇은 에르드에게 달라붙어 팔 길이를 재고, 손을 내 보라고 하며 에너지 상태를 점검하는 등 소란스레 굽니다.
안내 로봇:오래 떨어져 계셨군요! 두 분은 정식 페어이신데도! (꿋꿋하게 지 할 말 함)
이러면 안 돼요. 동조율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페어 간 의존도가 강해진다구요.
지금까지 두 분이 페어인데도 떨어져 있으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에르드 님의 에너지 유량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에너지 파동이 갑자기 일치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으셨군요?
에르드 님의 에너지 파동과 유량은 지금 굉장히 불안정해요. 안정시키려면 베아트리체 님이 반드시 필요해요! 떨어지지 마세요!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다가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런 것까지도 확인할 수 있구나.
(끄덕끄덕. 열심히 대답해준다.)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에르드:…… 얘한테 대답해줘도 되는 거 맞아? 우리 정보를 실시간으로 저장하거나 어디 넘겨준다던가. (못마땅)
베아트리체 힐:..............아. 미안해. (귀엽게 생긴 탓에 잠시 경계심이 흐물어졌다.)
에르드:…… 아니. 사과할 것까진 아니고. (누그러짐)
베아트리체 힐:......(역시 로봇이 아무리 귀여워도 에르보다는 아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끄덕인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걸까?
베아트리체 힐:(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어준다.)
요한 에를리히:딱히 위험해보이진 않으니 그건 내버려둬. 다른 쓸만한 게 있는지나 살펴봐라.
안내 로봇이 떠들어대는 동안 베아트리체는 내부를 조금 더 둘러볼 수 있습니다.
자동화되었다는 연구 프로토콜 탓인지 연구 일지라든지, 사람이 쓰던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액정을 톡톡 두드려보고는 전원은 없는지 확인해본다.)
베아트리체 힐:...아, 찾았다. (버튼을 꾹 누른다.)
로봇 중 하나를 켜 보면 자연스레 액정에 불이 들어옵니다.
눈을 깜빡거리는 이모지를 화면에 내세우더니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게 퍽 '인간다운' 행동입니다.
AECE:연구원 님! AECE 기상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베아트리체 힐:(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준다.) 데이터 분석실에 필요한 정보가 일정 부분 손상된 것 같아서. 남아있는 정보가 있다면 확인해줄 수 있겠니?
AECE:구체적으로 어떤 정보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대부분의 연구 과정은 데이터 분석실의 메인 PC에 담겨 있어요! 혹은 '프로젝트 아난시'의 개요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까요?
베아트리체 힐:(끄덕끄덕) 그것부터 알려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AECE:‘프로젝트 아난시’ 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예요! 한 명의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들 수 있지요.
중앙 실험실에서 자세한 내용을 열람하시겠어요?
베아트리체 힐:...에르드의 말이 맞았네. 응, 그래줄 수 있을까?
이동하면서 복도 너머로 실험실처럼 보이는 공간 몇 군데를 지나치는데,
대부분 결벽적일 정도로 완벽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여러 개의 에너지 챔버와 복잡한 기계 장치가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실험실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존재합니다.
녹색으로 빛나는 유리관 안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차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 보면, 벽감을 따라 비슷한 유리관이 늘어서 있습니다.
같은 용액이 들어찬 내부엔… 마치 태아를 닮은 모양으로 배태되고 있는 어떤 존재들이 수십 개 보입니다.
…가운데의 [에너지 코어]를 더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늘어선 유리관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가운데의 에너지 코어로 다가선다.)
생명을 배아해 내는 빛깔, 녹색 용액 안에 푸르게 잠들어 있는 심장.
검붉게 바랜 색상 위로 밝고 인공적인 초록빛이 감돕니다.
심장은 아주 느린 박동을 지닌 채 떨듯이 뛰고 있었지만,
맥박을 전달해야 할 혈관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동맥에는 실험 장치의 일부 같은 관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탯줄처럼 보였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사람을 이런 식으로 쓰다니. (...역시 입맛이 쓰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보색에서 아래의 네임 태그로 시선을 내린다.)
AECE:‘프로젝트 아난시’ 의 핵심 에너지원을 보셨군요!
강력한 각성자였던 구현자 ‘유리 모하에’ 의 심장이랍니다. 이 심장에서 발산되는 혈액과 약품을 섞어 일반인에게 주사하면 거기서 파생된 ‘X각성자’가 탄생하지요. 지금까지 실험 성공률은 43%로 목표 수치인 55%까지 순조롭게 도달해 나가고 있어요!
여기 대동맥에 연결된 것은 엄빌리컬 케이블이에요. 이 케이블을 통해 전기 신호를 공급하면 뇌 없이도 심장이 혈액을 생성해 내는데, 신진대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프로젝트 아난시’ 초반의 가장 힘든 지점이었답니다. 아놀드 박사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 께서 이번에도 옳으셨던 거죠!
그러나 유리 모하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어 저 홀로 머나먼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기일마다 열리는 추모제에서 학생들은 사상과 정치 신념을 떠나 적어도 교내에서 더는 이러한 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데에 뜻을 모아 왔습니다.
누구도 그의 심장이 이런 모독적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죠.
에르드:……. (실험실 자체의 광경도 역겨웠지만 태그에 적힌 이름을 보자 마치 해일처럼 충격이 닥친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사람에 관심 없는 에르드조차도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카사블랑카의 헛점을 지적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최초로 혁명의 불씨를 틔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오래 전 죽었음에도 여전히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의 시신을 이런 실험에 이용하고 있었다니.)
베아트리체 힐:(희게 질린 얼굴에 독과도 같은 녹색 빛이 일렁인다. 가라앉는 눈동자에는 그 깊이만큼의 충격도 분노도 슬픔도 잠재되어 있었으리라.)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인데. 어째서. (유리관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에게 있어 가장 모독적인 곳에, 가장 모독적인 용도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못내 원망스럽다.)
(...당장이라도 저 케이블을 끊어내고 싶다. 억울한 죽음에 편안한 마지막까지 앗아갔어야 했을까.)
요한 에를리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힐?
로봇이 뭐라고 말하던데 잘 안 들렸어.
거기 뭐가 있는데?
베아트리체 힐:(... ...떨리는 숨을 천천히 고른다. 잠깐의 침묵이 너무도 무겁다.)
... ...죄송해요, 요한 선배.
.......이곳에, 유리 선배의 심장이 있어요. ...가장 중심인 에너지 코어에.
상황을 전달하자, 그는 통신이 끊겼는가 의심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 눈감고만 있었으면 이 풍족한 도시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갔을, 지금의 우리보다도 어렸던 청년에 대해서요.
아무도 그에게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라 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여러 비밀을 일러 주고,
불길처럼 삶을 태우며 분투하다 지금 여기 차가운 용액에 갇혀 비참한 꼴로 떠 있습니다.
세상은 악하고 모든 것이 헛된 것만 같습니다.
죽어가던 순간에 유리 모하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오래도록 감정을 정돈하지 못하던 요한은 겨우 말 한 마디를 뱉어 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유리가…… (숨을 들이마신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리의 심장이 그 실험의 핵심 재료라면, 전략적으로 당연히 파괴… 파괴해야 한다. 부술 수 있다면… 그래도 경보 시스템 같은 것에 걸리지 않겠다고 판단되면…….
그런데도 구태여 지시하는 행위는 오히려 요한 자신에게 상황을 들려 주고 납득시키기 위한 일처럼 보입니다.
…파손 없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법은 없을까요?
베아트리체 힐:(홀로 차갑고 시린 곳에서 분투하고 있었을 심장에 마지막을 고하는 것은 역시 힘든 일이다.) ......대동맥에 연결된 케이블만 분리할 수 있다면. 파괴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핵심 에너지원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시다면 메인 PC의 아난시 시스템 전체 관리자에게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베아트리체 힐:...... (말없이 에르드를 올려본다.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비탄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는다.) ...가보자.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겨우 떼어내며 데이터 분석실로 걸음을 옮긴다.)
에르드:…… 그래. (녹색으로 빛나는 심장을 잠시간 더 바라보다 발을 옮겼다.)
데이터 분석실에서는 메인 PC의 화면이 깜박이고 있습니다.
대화창에 질문을 입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우선. 화면에 질문을 적어 넣는다. 아난시 시스템의 핵심 에너지원의 정보에 대해 알려줘.)
메인 PC:['프로젝트 아난시'의 핵심 에너지원은 강력한 각성자 '유리 모하에'의 심장입니다. 심장에서 발생되는 혈액과 약품을 혼합해 일반인에게 주사하면 파생되는 'X각성자'가 탄생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시스템의 작동을 정지 시키는 방법이 있을까?)
베아트리체 힐:....음. (X각성자에 대해서도 알려줄래?)
메인 PC:[각성자로부터 파생된 인공 각성자의 명칭입니다. 개체가 가지고 있던 기본 역량에 따라 X각성자들의 특징이 모두 다릅니다만, 에너지 색상에서 공통점을 보입니다. X각성자들은 대부분 검붉은색 에너지 색상을 나타냅니다.]
베아트리체 힐:(프로젝트 아난시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말해줄래?)
메인 PC:[‘프로젝트 아난시’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입니다. 8년 전 처음 시작된 실험 계획으로, 각성자의 이능력은 혈액과 관련이 깊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진 후 ‘그렇다면 수혈 등의 방식으로 비능력자를 각성자로 만들 수도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출발했습니다.]
[총책임자 아놀드 박사님께서 실험을 지휘하던 시기에는 각성자들에게 기증받은 수혈팩을 사용해 적은 양의 혈액으로 연구를 이끌어 나갔으나, 대부분 실패하거나 효율이 좋지 못해 다량의 혈액 내지는 장기를 이식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이 4년 전의 일로, 아놀드 박사님께선 이 방침에 반발하였다 책임자 위치에서 경질되셨습니다. 이후로는 실험 전체가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아놀드 박사님이 이 실험의 아버지인 걸까?)
메인 PC:[
‘최초의 설계자’ 에 대해 모르는 당신은 누구죠?]
[…생체 정보 스캔중…….]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경비 시스템을 개시합니다.]
문장이 완성됨과 동시에 에너지 코어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합니다.
발딛고 선 땅이 지진처럼 뒤흔들리고, 사방에서 방화문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내려가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합니다.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이 두 사람을 내던집니다…….
요한 에를리히:……리체! 베아트리체! 정신 차려!
인이어 너머에서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에 눈이 뜨입니다.
정신을 차리니 베아트리체는 무너진 캐비넷 옆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희뿌연 시야를 문지른다. 몸이 어긋난 듯 무겁다.) .........네. 들려요.
(주변을 둘러본다. ...에르드는?)
요한 에를리히:몸상태는 어떻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베아트리체 힐:.....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욱씬거리는 관절을 구부려 일어난다.)
...프로젝트의 최초의 설계자에 대해 물었더니 경비 시스템이 작동된 것 같아요.
에르드:(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통신에 참여한다.) 성대하게 내던져지긴 했지만 일단 정신은 차렸다.
요한 에를리히:둘 다 의식은 있군. (작게 한숨 내쉰다.) 방화문이 내려와서 격리된 상태다. 실험실 내부 경비 시스템이 활성화되면서 출구가 봉쇄된 모양이야.
중앙 컨트롤 시스템이 비상 상황에 따른 내부 보안 프로토콜을 활성화한 듯해. 전기가 안 들어오는 건 전체 실험실에 에너지 공급을 차단해서 그럴 테고. 정보가 더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겠지. (이를 간다.)
경비 시스템을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볼 테니 너희도 탈출 경로를 모색해 봐!
상황이 다급한 탓인지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요한이 이를 악문 채 내뱉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네. 찾아볼게요. (에르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안심한 듯 낮게 숨을 내쉰다. 깜깜한 시야를 다 잡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모든 전력이 비상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는지 온통 캄캄하여,
비상등이나 일부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에만 옅은 불빛이 들어와 있습니다.
요한 에를리히:추가 보안 시스템이 가동된 것 같다. 뭔가 달라진 것 있나?
무색무취였지만, 분명 바람 같은 게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어디선가 바람이 새어나오는 것 같아요.
...향도 색도 없는데. (바람이 나오는 방향을 찾아본다.)
에르드:(그때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 이능력 사용이 안 돼. 이 바람 때문인가.
베아트리체 힐:
파이오니어 Roll
기준치: |
0/0/0 |
굴림: |
100 |
판정결과: |
대실패 |
당신과 에르드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혹은 영영 갇히게 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 아무래도 이능력을 차단하는 가스 같습니다.
능력도 사용되지 않고, 사방은 방화문이나 기물로 고립되어 있는데 전력마저 끊겼죠.
두 사람이 탈출하려면 봉쇄된 출입로를 열 만한 전력 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요.
베아트리체 힐:(.......아무것도 안 보여. 머릿속마저 검게 물든 기분이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다시 주변을 돌아본다.)
관찰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92 |
판정결과: |
실패 |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질 않는지 잘 보이지 않네요.
베아트리체 힐:(어둠에 익숙해지려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본다. ......뭔가 없을까.)
팔을 뻗어 여기저기를 더듬다 보니, 벽에 무언가가 걸립니다.
돋을새김으로 ‘비상 공급장치’ 라고 쓰여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장치를 열어 손의 감각으로 전원을 찾아 켠다.)
장치를 열려면 납득 가능한 판정이 필요합니다!
에르드:벽에 '비상 공급장치'라고 쓰인 게 있는데.
베아트리체, 네 쪽에도 보이나?
베아트리체 힐:응, 보여. (...비상 공급 장치를 켜려면 어떻게 해야 했더라. 머리를 굴려본다.)
지능
기준치: |
65/32/13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어둠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구조를 알기 어려우니, 요한에게 스마트워치로 내부 구조를 전송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예전에 비슷한 장치를 본 기억이 납니다.
장치의 하단부에 버튼 두 개가 있는데, 동시에 누르면 열 수 있었죠.
베아트리체 힐:...아. (하단부의 버튼을 동시에 눌러 장치를 연 다음, 스마트 워치로 내부를 찍어 전송한다.)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구조를 전송받고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어렵게 입을 뗍니다.
요한 에를리히:그 장치는……. 아래쪽에 긴 플러그가 있을 거다. 끝이 날카롭고 굉장히 긴. 맞나?
내용을 전달하자 요한은 더욱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합니다.
…….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이 답잖게 한참이나 망설이네요.
에르드:제대로 말해. 그래야 여길 나가든 뭘 하든지 할 거 아냐.
그는 두 사람이 채근한 후에야 어렵게 말을 잇습니다.
요한 에를리히:그 플러그는 엄빌리컬 케이블의 일부야. 비상 에너지 공급장치인데, 동력원이 각성자의 에너지다.
지금 너희 두 사람은 가스 때문에 이능력을 사용할 수 없고, 그 실험실 전체의 봉쇄를 풀 정도로 큰 전력을 일으키려면 아까, 유리처럼……. 플러그에 직접적으로 각성자의 에너지원을 접촉시켜야 하는 것 같다.
…혈액이나, 심장을…….
…각성자가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처럼 보이는군. 봉쇄 때문에 1차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고,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공급하려면 동료나 자기자신을 다치게끔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 공간에서 나가려면 누군가는 심장이든 어디든 날카로운 플러그 끄트머리를 찔러 넣어 배전함에 혈액을 공급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설마?
요한이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냉정한 목소리를 냅니다.
두 사람의 에너지 유량으로 계산했을 때… 한 사람분의 에너지로는 실험실 봉쇄를 해제하는 정도가 가능하고, 두 사람 분의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실험실 자체를 무너뜨리거나 코어를 손상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실험은 완전히 중단될 테고, 저 심장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도 더는 없겠지. 만일 지하가 무너진다면 방위사령부에서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니 파급력도 클 거야. 각성자는 일반인보다 회복력이 강하니 치명상을 입어도 당장 죽지는 않아.
……하지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분명 크게 다치게 될 테고, 그것보다 더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들려준 것뿐, 너희들이 이런 선택을 하길 결코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내가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아 보겠어.
하지만 요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혼자서 찾기는 어렵겠죠.
제공된 상황만 놓고 보자면, 한 사람이 희생한다면 다른 사람은 안전하게 탈출이 가능하다는 맥락입니다.
만일 두 사람 모두 여기서 꺾인다 해도, 적어도 유리의 심장과 이 실험실 자체를 파괴할 수는 있을 겁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세상에 퍼뜨릴 역량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죠.
베아트리체 힐:(요한의 말을 들으며 긴 플러그를 손에 쥐었다. 어둠 속에서도 날카로운 끝만큼은 눈에 들어온다.) .........에르. 아마도 다른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찾는다고 해도 너무 긴 시간이 걸릴거야.
에르드:…… 나도 동의해.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든다. 얼굴을 마주볼 수 없다는 게, 눈을 보고 대화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나 불안한 일이었다니.) 베아트리체. 내가 케이블을 사용할 테니 넌 빠져나가.
베아트리체 힐:.......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우리는 이런 부분까지 닮았구나. (에르드의 손에도 역시 이 긴 플러그가 들려있을까?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눈을 꾹 내리 감는다.)
... ... 에르,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고통받는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싶거든.
에르드:베아트리체. 내려놔. (낮은 목소리에서는 간절함마저 읽힌다. 인이어 너머로 들려온 짧은 문장에서 이미 베아트리체가 무슨 선택을 하려 드는지 짐작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고통받은 적 없어. 난 괜찮아. 다치는 데는 익숙해, 아픔에도 무뎌져서 잠깐이면 지나갈 뿐이지. 이깟 공간쯤 나는 힘으로 다 뚫고 나올 수 있어. 하지만 너는…… 베아트리체, 너는 아니잖아.
베아트리체 힐:(차라리 서로가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다. 에르드가 눈 앞에 있었더라면, 이리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을테니까. 나는 너에게 한없이 약해서, 결국 너에게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어.
......나는 네가 고통에 무디고 익숙하다는 사실이 지금만큼 가슴 아릴수가 없는데. (나지막하게 떨리는 숨을 뱉어낸다.) ...늘 네 곁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널 혼자 두고는 안 가.
...그래, 너는 그만큼 강하니까. 내가 이곳에서 꺾인다고 해도 나를 찾아 구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이 플러그의 끝에는 네가 없었으면 좋겠어, 에르.
에르드:그래서? 나더러 너를 두고 떠나라고? (목구멍 너머로 신음이 끓는다.) 네가 스스로를 찌르도록 두고서 나 혼자 여길 빠져나가라고?
(4년 전에는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베아트리체를 뒤로하고 리사의 행방을 찾아 망명 정부로 떠날 때는 제 발로, 제 의지로 망설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었다. 베아트리체를 향한 마음을 자각하지 못해서이기도 했고, 홀로 남은 그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지는 미처 생각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 재회하고 난 후로는 떨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 곁에 유일하게 두고픈 이가 바로 베아트리체였기 때문에. 당신 역시 저를 원했기 때문에.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고 현실은 냉정한 법이라. 마침내 함께하리라고 믿게 된 순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이별을 들이민다.)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내가…… 내가 너를 두고 떠나서…… 그때 남겨졌던 네 마음을 이해해보라고 지금…… (이성이 흐려진다. 알아듣기 힘든 말을 뇌까리는 모습이 반쯤 정신을 놓은 듯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이 가늘게 떨린다. 목소리에도 참기 힘든 감정이 실린다.) 그런 말이 아니란 걸 알잖아. ...난 늘 네 걱정 뿐이야. 단 한번도 널 원망한 적 없어.
(제가 지금 얼마나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리에 힘이 빠져 결국 벽에 기대어 선다.) ....에르. 봉쇄가 풀린다고 해도 나는 너를 이곳에서 끌고 나갈 힘이 없어. 너를 두고 이곳을 나갈 자신이 없어. 하지만 너는 나를 찾아줄 거잖아. 지금처럼 다시 내게로 돌아와줄 거잖아. 그렇지? ... 너를 믿으니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거야. ...이번에는 그만큼 길지 않을 테니까.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늘 곁에 있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위로하며, 무수히 약속 했으면서 지금 자신의 입에서 떨어지는 것은 또 다른 이별이고 잔인한 현실이다.)
에르드:항상 말했는데. 나를 걱정할 필요 없다고. 나는 튼튼하다고, 언제든 너를 지켜줄 거라고……
그런데 너는 널 사지에 두고 나 혼자 가라고 하는구나. (절망과 비탄으로 빚어진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이를 악문 채 겨우 내뱉고 있었다. 말을 잇기조차 괴로워서. 현실을 돌아보게만 만드는 상황이 고통스러워서. 넌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너의 그 말 자체가 나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어.)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이성을 제어하기가 어렵다. 이만큼 흔들려 본 적이 있었던가. 리사의 죽음을 알았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친 곳 없이 멀쩡한데도 벌써부터 회오리에 휩쓸려 목이 졸려오는 기분이다.)
…… 네가 죽게 두지 않아. (죽음 같은 침묵 끝에 마침내 탁한 목소리로 뱉었다.)
널 반드시 구해낼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는 결국 당신에게 백기를 들고 만다.)
베아트리체 힐:에르, 너는 늘 나를 지켜줘.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이 너머에 네가 있으니까. (절망의 늪으로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를 들으며, 제가 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에게 잘 벼린 칼이 되어 심장을 난도질 했을지 짐작한다.)
...맞아, 너는 날 살릴거야. 날 죽게 두지 않을거야, 반드시. (당신이 다시 올 때까지 버티리라는 약속이자, 닿지 않을 위로.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 플러그를 고쳐쥔다. ...안타깝고 애틋한, 영영 사랑스러운 사람. 너에게 이런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혼자면 충분했는데.)
...... ...미안해. 그리고...
... ...정말 사랑해. (흩어질 듯 가녀린 고백은 웃음과 함께 너머로 전해진다.)
상황에 내몰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이토록 어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 도대체 선택지가 맞단 말인가요?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다 무슨 의미인가요?
릴리안 웨즐리:「저도 부끄럽지 않도록…… 이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요.」
우스운 일입니다. 누가 동경 같은 걸 하라고 영웅 행세라도 했나요?
유리 모하에:「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스러운' 말 몇 마디 지껄였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게 옳은 일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난 오래 전에 이미 한 번 친구를 잃었어.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학생회장이 됐지. 멘토 자리를 자원한 것도 그래서야.」
그 결과 자신은 어떻게 되었죠? 포르말린에 담긴 실험 표본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았나요?
체제가, 사상이, 신념이 돈이라도 준단 말인가요?
에르드라고 해서 대단한 혁명 투사가 되려고 세상에 태어났겠나요?
그는 그저 사라진 이를 찾고 싶었고, 그것을 추적하다 망명 정부에 투신했을 뿐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결말이 우리가 쌓아 온 선택의 결과라면 세상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가요?
세상을 구성하는 어떤 언어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던 것 같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상황에 내몰렸다고, 제 선택이 선택이 아닌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으라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러나... 손에 쥐어진 것을 움직이는 데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두 손에 가득히 쥔 반짝이는 날은 여린 살갗을 가르고 심장을 새장처럼 두른 뼈에 걸린다.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 다물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다. 네게만큼은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다해 참아낸다. 날을 박아넣는 손이 떨릴 만큼 밀어넣었다. 끝끝내 에너지의 근원에 날이 닿으면 온 몸에 힘이 풀린다. 가슴 언저리가 뜨겁고도 시리게 젖어온다. ...... ...나를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너였으면 좋겠다가도, 아니었으면 싶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입안에서 흩어진다.)
(부옇게 어두워지는 시야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너. 그 뿐이다.)
케이블을 심장에 깊이, 아주 깊이 밀어넣습니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눈물 같은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합니다…….
눈 앞은 눈물일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흐리고, 세상은 붉게 소용돌이칩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선뜩히 남아 가슴을 쾅쾅 두들겨 발기는 풍경이 있습니다.
세상에 찬란한 것들은 모두 그것의 모사품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하느님, 만약 정말 당신에게 의지나 사고가 있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었다면,
우리 시간은 왜 그날 그때로 고정되지 않았을까요.
에르드는 왜 떠날 수밖에 없었고, 베아트리체는 왜 그걸 붙잡지 못했을까요.
서로 온전히 이해할 수도 함께할 수도 없고, 하나가 될 수도 없다면 우리 사이에 머무는 감정은 대체 사랑일까요, 다른 무엇일까요.
치열하지 않게, 세차지 않게, 거센 소리가 나지 않게.
눈물처럼 품 안으로 번지는 온도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달군 찻잔처럼 가볍게 따스하다가, 급기야 절절 끓는 불꽃이 되어 심장을 가르고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에 꽂힌 엄빌리컬 케이블에서부터 가장 뜨거운 불꽃이 연보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체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힘이 빠졌던 손끝에 감각이 돌아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지독하게 느리거나, 작거나, 너무나 연약하게 느껴집니다.
저것이 ‘나’ 아닌 다른 어떤 자아일 수가 없습니다.
이다지도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심장 위로 불타는 빛깔이 이렇게나 한 사람 것처럼 똑같은데!
달이 기어코 지구를 벗어날 수 없듯이 가까워집니다.
세상은 오로지 두 사람의 인력을 구성하기 위해 46억 년의 세월을 버티고 여기 존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도달합니다. 그가 여기 있고, 내가 저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처럼 꿰뚫는 깨달음.
지금까지의 삶은 다 어딘가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비어 있었는데, 서로 같아지고서야 비로소 완전해졌구나.
심장이, 서로 마주 안으면 같은 방향에서 뛰는 맥박이,
이제는 속도와 횟수마저 맞추어 작게 쿵쿵거립니다.
방화문이 쿵, 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봉쇄된 통로가 다시 열리는데 그런 것쯤은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습니다.
에르드가, 베아트리체가, 아무튼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껴안습니다.
이제 결코 헤어질 수가 없으리라는 게 느껴집니다.
그가 숨쉬고 움직이며 감정을 느끼는 매 순간이 이토록 생생히 전달되는데 우리가 따로 떨어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
(당신의 심장에서 엄빌리컬 케이블을 조심히 잡아뺀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끌어안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페어를, 어쩌면 나 자신처럼도 느껴지는 사람을.) 사랑해, 베아트리체.
널 살리기 위해 왔어.
베아트리체 힐:(빈틈없이 가득 끌어당긴다. 가득 끌어안고, 들이마신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뼛속 깊숙이, 하나 된 심장 박동에 새긴다.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지금만큼은 온 우주가 오로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 ...내가 말했잖아, 너는 반드시 나를 살릴 거라고.
... ...사랑해, 에르드.
이것만큼은 온 우주가 끝나는 그날까지 영원할 거야.
에르드:(어쩌면 아주 오래 전 우리는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것이 운명의 장난으로 나뉘고 갈라져서, 너는 나의 조각이 되고 나는 너의 잔흔으로 남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렸던 조각이 마침내 맞추어진다. 어떤 금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맞아든다. 환희와 격정이 끓어넘친다.)
(이제 그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끝없던 공허가 베아트리체로 하여금 충만해졌으므로, 그가 빠져나가면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다.) 응. 분명히 그럴 거야.
다신 널 놓지 않아……. (같은 박자로 뛰는 심장 박동이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진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절대로. (영영 놓을 수 없다. 우리의 작은 박동이 메마른 땅에 내릴 한 방울이 되길 바란다. 그 작은 방울, 방울이, 마침내 땅을 울리고 온 대지를 적셔 비로소 봄을 불러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그 푸르른 끝에,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수놓으며, 꽃처럼, 울창한 나무처럼. 그렇게 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네가 없는 밤에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래도 역시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입속에 단단히 묶어둔 말들, 그 말들이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완결을 맺어야 하나요?
마침내 유실된 서로를 찾았고 마침내 봉오리 틔워 활짝 만개하였는데 대체 어떻게요?
손을 잡고 지옥으로 가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들이 남기고 간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껴안고 떠나자고.
네가 없는 현실과 네가 있어 악몽인 무저갱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겠어.
이 순간 어려서 끔찍한 오늘과 참신할 것 없을 내일에 너를 홀로 두진 않겠어.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기로,
우리는 그저 서로를 구원하여 카사블랑카를 벗어날 거야.
감미로운 볕이 피부를 적시고, 발목을 데우는 바닷물은 고요하고 우묵한 소음을 내면서 우리를 간지럽히던 여름으로 돌아갈 거야.
마지막 틈새에서 연보라색 에너지가 잉걸불처럼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르다 잦아듭니다.
실험실을 부수거나 유리의 심장을 되찾고 자료를 챙기는 등,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에르, 갈까. (같은 손을 잡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선다.)
잘못된 것들은 모조리 부숴버리자. 저 심장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주자.
에르드:그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에서 황금빛 에너지가 타오른다. 안광 없는 눈마저 타오르는 듯했다. 마침내 뼛속 깊이 깨달은 사랑으로, 증오로, 분노로.)
가자.
베아트리체 힐:(나의 빛, 나의 태양. 너를 업은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 이토록 마음이 뜨거울 수 있을까. 바라는 것은 하나고, 해야할 것도 명확하다. 이보다 시야가 선명할 수는 없을테다.)
(주변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흐름도 모두 제 것마냥 읽힌다. 내가 원하는대로, 네가 원하는대로. 선명하게 뻗는 연보랏빛은 실험실로 향한다. 생명을 경시하는 것들에게, 비로소 선고를.)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6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두 사람은 부서진 방화벽을 넘어 다시금 윤리를 짓밟는 지하실로 되돌아옵니다.
읽힙니다. 보입니다. 마침내 안식을 되찾을 유리 모하에의 심장이. 완전히 파괴될 모독적인 공간이.
에르드:
사격(권총)
기준치: |
99/49/19 |
굴림: |
8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베아트리체가 만들어낸 설계 위에 망설임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황금빛 에너지를 품은 탄이 뻗어나간 경로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모든 것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유리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진다. 기계 장치가 박살나 잔해가 된다.)
죽어서도 죽을 수 없게끔 유리의 심장을 붙잡고 있던 엄빌리컬 케이블이 떨어져나갑니다.
베아트리체 힐:(잔해를 지나, 녹색의 물결을 거슬러, 검붉어진 심장을 품에 안는다.) ... ...이제 돌아가요.
온갖 자료들이 모여 있던 실험실과 컴퓨터들이 이어 박살납니다.
경비 로봇들이 몇 튀어나왔으나, 어렵지 않게 박살냈습니다.
동조율 99%의 페어가 피워내는 연보랏빛과 황금빛 이능력은 마치 한 떨기의 꽃처럼, 새벽을 이는 구름처럼 지하를 완전히 휩씁니다.
이슬이 반짝이는 아모리베늄은 새벽 하늘을 뿌려 녹인 보석처럼 흔들립니다.
방위사령부를 이렇게나 헤집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위협사격과 추적이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시민들이 겁에 질려 기상했죠.
두 사람은 30여분 정도를 달려 도시 외곽으로 이동합니다.
이보다 더한 암실로, 서글픈 화재 속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이토록 너를 정전시킨 세계에 파도 같은 등불을 켜자.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이 도로 눈을 뜨는 순간이 오면,
파사삭 파사삭, 낙엽처럼, 이 끔찍한 나라가, 우리의 이기로 감전될 거야.
거기엔 계급도, 사회도, 이데올로기도 없을 거야.
우리가 머나먼 자오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후의 우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
네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늘에도 얼비칠 것이 분명하니까.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도 강력하기에, 누구도 이날의 사건을 무시하거나 묻어 버리지 못했습니다.
또다른 사라예보처럼 카사블랑카가 불안하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끝.
3부, ‘적도편동풍을 타고 영원으로 가자’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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