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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2~260503] 에르리체 - 101일의 구혼자

초현_c 2026. 5. 10.

* 엣또님 디자인

 

플레이타임 : 약 3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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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피부를 찢어갈기듯 거친 파도가 온몸을 휩씁니다.
 
입술 사이로 밀려들어온 서늘한 해수에 폐가 난도질당합니다.
 
성난 물결이 맞부딪히며 터져나온 거품이 시야를 어지럽힙니다.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사지는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허망하게 암흑을 가릅니다.
 
누군가가 붙들고 끌어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당신의 몸은 끊임없이 바닥 없는 어둠으로 잠겨듭니다.
 
에르드: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포도주 빛의 바다 아래서, 당신은 눈을 뜹니다.
 
이성 판정(0/1d6)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어째서 이런 곳에?
 
모호한 기억을 되짚으려는 찰나, 급류가 당신의 몸을 끌어올립니다.
 
하잘 것없는 인간의 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푸른 해일에 휩쓸립니다.
 
물 속에서 이리저리 내던져지고 부딪히며, 에르드를 보호하던 갑옷이 산산이 부서져 나갑니다.
 
가늘게 열린 시야에 이 폭압적인 물살이 시작되는 방향이 걸립니다.
 
저 멀리, 바다를 유영하는 검은 점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갑니다.
 
 
 
…목소리가 들립니다.
 
입을 벌려도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을 먹인 옷감처럼 늘어진 몸에 의식이 끝없이 가라앉습니다.
 
간신히 파고든 음성마저 꿈결처럼 먹먹하게 멀어져갈 때, 억센 손길이 당신의 뺨을 내려칩니다.
 
번쩍, 다시 한 번 눈이 뜨입니다.
 
에르드:
건강
기준치: 80/40/16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에르드는 거친 기침과 함께 폐부에 찬 바닷물을 토해냅니다.
 
역한 고통과 함께 심해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옵니다.
 
체력 -2
 
머리 위로 내려앉는 찬란한 태양에 호흡이 서서히 진정됩니다.
 
에르드:쿨럭!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을 뜬다. 온몸이 해류에 빨려들어가고, 갑옷마저 힘없이 부서져나가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런데 햇살이라니, 그 심해에서 빠져나온 건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통 속에 정신을 다잡고 주위를 둘러보면, 옥빛으로 넘실거리는 에게 해의 해안선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시금 에르드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슬금슬금 모래사장 위로 기어오르는 파도가 누군가의 속삭임을 전합니다.
 
죽어가던 이팔로스의 왕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당신을 바라보며 남긴 유언이 그것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이곳은 틀림없이 이팔로스의 동쪽 해안가입니다.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어요.
 
이팔로스의 왕을 베고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너뜨린 것이 당신의 생애 가장 큰 전공이었는데.
 
에르드:(승전. 그래…… 분명 긴 혈투 끝에 승전을 거두고, 아끼던 포도주를 모두 풀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었다. 이제 곧 베아트리체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그조차도 평소엔 손도 대지 않던 술을 기쁘게 몇 잔이나 들이켰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병사는, 배는? 그보다 뺨을 때리면서 절 깨운 이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바닷속에서 눈을 뜬 것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순간 의문으로 가득찬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립니다.
 
폐에 고여있던 바닷물이 다시 한 번 역류합니다.
 
한차례 더 해수를 토해내고 나면, 당신의 곁에 쭈그려 앉은 노인이 혀를 차며 물이 든 주머니를 건넵니다.
 
어부 노인: 어디, 이제 정신이 좀 드시나? 송장이나 다름없던 몸으로 살아난 걸 보니 제법 튼튼한가 보구먼. 꼴이 말이 아닌데 이거라도 걸치시게.
 
노인이 그 말과 함께 나귀의 등을 덮었던 낡고 더러운 모포를 건네줍니다.
 
에르드의 몸을 내려다보면 갑옷은 커녕 옷가지마저 거의 다 헤지고 찢겨나간 상태입니다.
 
우아한 붉은 색으로 물들여 금실로 수놓았던 옷은 걸레보다 아주 조금 나은 형태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체나 다름 없는 몸을 가리기 위해서는 저 누더기라도 받아 걸치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드:……고맙소. (목소리는 바닷물을 마신 탓인지 잔뜩 쉬었다. 흠뻑 젖고 엉망이 된 몸뚱어리를 흘끗 살폈다가 누더기를 걸쳤다.) 실례지만, 여긴 어디지?
 
어부 노인: 그야 이팔로스의 해안이지! 영 정신이 없어 뵈는군.
모르는 얼굴인 걸 보니 외지인인 것 같은데,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라도 당했나? 어쩌다 이런 곳까지 떠밀려 온 거요?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려주면 내 도울 방법을 찾아보지.
 
에르드:(이자에게 왕이 죽었단 사실이 닿았을 것인가? 적어도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 정도는 알 텐데.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잠시 상황을 재어보며 고민하다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이팔로스 근처의 나라 사람인데, 예상치 못하게 난파를 당했소. 일행이 많았소만.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나?
 
어부 노인: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못 봤네. 이 해안에는 자네랑 나 뿐이지.
 
에르드:(대체 어찌된 일이지? 승전 연회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는데 별안간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해안가에서 눈을 뜨다니. 물 속에서 마구잡이로 휩쓸려댔던 충격 때문인지 아직도 머리가 멍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제 상황이 객관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난, 승리를 얻고 베아트리체에게 돌아갈 날을 코앞에 두고서 배와 병사들을 모두 잃은 건가.)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나? 적어도 칼이라도. 무기와 한몸처럼 살아왔으므로 없는 게 더 어색하다. 해변가를 둘러보았다.)
 
주변을 살펴보면, 성난 물결이 깎아지른 [절벽]을 무너뜨릴 듯 끊임없이 제 몸을 부딪혀옵니다.
 
파도에 떠밀려 내려온 무언가의 [잔해]가 광활한 해변 위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끌던 군대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드넓은 바다에,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에르드 자신]의 몸뚱이 하나 뿐입니다.
 
에르드:(물결 소리마저 거칠게 울리는 절벽을 응시한다.)
 
: 에게 해를 바라보며 선 절벽은 오랫동안 항해자들의 이정표로 이용되었을만큼 높고 가파릅니다. 포로들의 요청과 에르드의 자비에 따라 이팔로스의 왕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에르드는 바로 어젯밤 그의 매장을 허가했을 터인데, 이 무덤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듯 거친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습니다.
 
이성 판정(1/1D2).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5/27/11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1
(절벽은 분명, 제 손으로 벤 이팔로스의 왕이 묻힌 곳이다. 매장이 바로 어제였으니 아직 흙조차 다 마르지 않은 것이 정상일 터인데. 저 무성한 덤불과 풀은 다 무엇이지? 일순 눈이 커진다.)
……이봐. 저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아나? (노인에게 무덤을 가리켰다.)
 
어부 노인: 보자, 저기 저 무덤 말인가? 이팔로스 왕의 무덤이지. 그래, 벌써 저기에 묻힌 지 10년은 되었던가.
분명... 그래. 아모르베루스지. 아모르베루스에서 정예부대를 끌고와 박살을 내버렸지 않나.
 
에르드:10년……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바닷속에 십 년을 갇혀 있을 수는 없지 않나. 10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게 인간인데.)
그럼 지금 이팔로스는 누가 지배하고 있지?
 
어부 노인: 젊은 사람이 이렇게 눈이 어두워서야. 그야 와해되었지! 아모르베루스의 왕이 10년 전 그날에 실종되지 않았나! 그가 이끌고 온 정예부대도 같은 날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고. 왕이 없는데 대체 누가 다스린단 말이오?
 
에르드:난파당한 탓에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은가 보오. (건성으로 답한다. 머릿속은 폭풍처럼 복잡했다. 왕과 부대가 한날한시에 실종이라. 바다에 잠기며 사라진 것인가. 십 년이 흘렀다니. 그럼 베아트리체는……)
왕이 실종된 아모르베루스는 어찌 되었지? 그곳도 와해되었나. (저와 베아트리체 사이에는 아직 아이가 없다. 베아트리체는 저 대신 나라를 이끌어도 될 만큼 현명하지만…… 저를 잃은 충격에 혹여 잘못된 건 아닐까.)
 
어부 노인: 세상 물정에 이리 어두워서야, 참. 그 에르드왕이 남긴 나라와 보물, 모든 재산은 그의 왕비 베아트리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지. 덕분에 온 대륙에서 몰려든 베아트리체의 구혼자들로 나라가 북적인다던가, 뭐라던가. 그 왕비와 재혼하는 자는 왕이 되어 에르드의 유산을 모두 차지할 수 있으니까. 세상에 그만한 출세길이 어디 있겠나?
 
에르드:(베아트리체의 이름을 듣고 이렇게나 안심되었던 적이 또 있었던가. 타들어갈 것처럼 불안하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된다. 적어도 살아 있구나. 아직도 재혼하지도 않고서. 나를 잊지 않아준 걸까. 이 자의 말에 따르면 십 년이나 흘렀는데도.)
(구혼자가 몰려든다는 내용만이 유일하게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하긴, 왕의 자리와 막대한 재물이 비어 있으니 그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개떼처럼 몰려들겠지. 이를 아득 갈았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 내던져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해변 위에 나뒹구는 잔해를 향해 다가갔다.)
 
물살에 쓸려 내려온 석재 기둥은 곧고 굵으며 단단합니다.
 
서로 맞물려 쌓기 쉽도록 다듬은 바윗돌도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이팔로스 양식으로 조각된 타일은 세월이 무색하게도 선명한 색을 발하며 바닷가를 나뒹굽니다.
 
에르드: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거대한 잔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에르드:(검이 아니군. 제게 도움되는 물건이 아님을 깨닫곤 금세 시선을 뗀다.)
(자신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스스로의 몸을 살피던 에르드는 자신의 손가락 위에서 빛나는 장신구를 발견합니다.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형상이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 한가운데에 어두운 색의 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그 푸르다 못해 검은 빛에 가까운 보석이 시선을 빼앗습니다.
 
이팔로스의 왕을 베고 거두었던 국왕의 인장 반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인장 아래에 보석이 심어져있던 모양입니다.
 
보통은 화려한 보석 아래에 인장을 숨길 터인데, 꽤나 독특한 구조입니다.
 
문득 에르드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따라 내려옵니다.
 
…성난 파도에 휩쓸리며 입었던 상처가, 생채기 수준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 있습니다.
 
에르드:(이런 반지가 있었던가. 잠시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몇 초 뒤에 그것이 이팔로스의 왕에게서 빼앗은 인장 반지임을 깨달았다. 이런 보석을 숨겨 두었다니. 어쩐지 꺼림직한 빛깔이다.)
(그러다 무심결에 팔을 바라보았다. 욱신거리던 통증이 어느 순간 약해지더라니. 고통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상처가 사라져 있다. 이건 또 어찌 된 일이지?)
(잠시 고민하다 반지를 손에서 빼내어 본다.)
 
손에서 빼내어 보아도, 별 다른 반응은 없습니다.
 
빛을 받으니, 더욱 선명한 색을 띄는 것 같습니다.
 
에르드:(한낱 노인이 국왕의 반지에 대해 알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혹, 깊은 바다의 주인이란 게 무얼 칭하는지 아는가?
 
어부 노인: 깊은 바다의 주인? ...그건 또 무슨 말이요? (노인은 에르드를 영 안쓰러운 눈으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 근방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마침 베아트리체의 구혼자 소유의 배가 저기 절벽 건너편에 있으니, 한 자리 얻어 타고 가보던가 하게.
...그래 가지고 걸어가길 하겠나, 수영을 해 건너가길 하겠나. 잘 빌면 구겨 타고는 갈 수 있겠지.
 
에르드:모르면 됐소. (만지작거리던 반지를 다시 검지손가락에 끼웠다. 그러다 들려오는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구혼자 소유의 배라. 이팔로스에서부터 베아트리체를 만나러 가는 것인가……)
(부아가 치밀고 속이 용암처럼 끓어오르지만, 돈은 고사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상황에선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알겠소. 알려주어 고맙군.
 
어부 노인: 그래, 그래. 또 어디 휩쓸리지 말고, 정신 단단히 잡고 다니게! 껄껄…. 나 원, 아직 젊은 사람이 저리 정신이 없어서야.
 
어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물을 짊어지고 해안선을 따라 떠나갑니다.
 
의문은 여전하고, 부아가 치밀지만 에르드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분명, 절벽의 건너편이라고 했던가요.
 
에르드:(거적대기 하나 걸친 꼴이라니. 왕은커녕 영락없는 거지 취급 당하게 생겼군. 딱히 선민의식 같은 게 있진 않지만, 왕자로 태어나 평생을 좋은 것만 입고 좋은 음식만 먹으며 자란 입장으로선 이 상황이 상당히 어색하고 또 불쾌하기도 했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 베아트리체에게 돌아가는 게 우선이고 병사며 지난 10년의 상황을 파악하는 건 그 다음이다. 절벽 너머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절벽 위의 언덕을 넘어가면 보이는 항구에 거대한 선박이 정박해 있습니다.
 
선원에게 부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르드:(떨떠름하게 선원에게 다가간다.) 배에 남은 자리가 있습니까? 난파에 휩쓸리면서 가진 모든 걸 잃어서 말이오.
 
선원은 에르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원: 안 그래도 일손이 좀 모자랐는데, 잘 됐군. 처지도 딱하고. 짐을 좀 옮겨주고 노를 같이 젓는다면 태워주지.
 
에르드:그쯤이야 어렵지 않소. (노를 젓는 건 가장 하급 선원들이나 하는 일이지만,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항구에 늘어선 물품들이 선박 규모에 비하여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출항하는 선박이 아니라 음식과 식수를 조달하기 위하여 잠시 정박한 배 같습니다.
 
짐을 옮기며 일꾼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물품들을 번쩍번쩍 들어 옮기면서 귀를 기울인다. 아모르베루스로 가는 배라면 관련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너무 빠르게 움직인 탓인지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집니다.
 
모자 쓴 일꾼: 이번에는 분위기가…. 정말…?
 
키작은 일꾼: 그래. 베아트리체가 에르드의 수의를 완성…. 드디어 선왕의 장례를….
 
키작은 일꾼: 뭐 그리 오래…. …시체도 못 찾았으면서.
 
모자 쓴 일꾼: 수의야 핑계…. 아무튼, 어서 예물을 가져다드려야 우리 왕자님의 면이…. 바람길이 좋으니 잘 하면 새벽 중에 당도할 것 같네.
 
짐을 모두 옮기고 나면, 선원은 약속대로 에르드에게 노잡이를 위한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합니다.
 
잠시 후, 손에 무언가 들고 오더니 마른 빵 한 덩이와 물도 나눠줍니다.
 
쿵, 닻을 올리는 소리와 함께 에르드를 태운 배가 바다 위로 미끄러져갑니다.
 
고수가 북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머리를 울립니다.
 
피로에 지친 안색의 노예들과 호흡을 맞추어 노를 밀고 당기면, 거대한 선박이 코린토스 만을 따라 흘러내려갑니다.
 
선박 밑바닥에서는 파도가 칠 때마다 그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이팔로스를 무너뜨린 지 10년.
 
승전의 영광을 알리는 나팔수의 연주도, 꽃을 뿌리는 백성들의 환호성도 없이 에르드는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의 왕비를, 당신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준비된 예물을 싣고 나아가는 배의 노를 저으며.
 
당신의 간절함이 바람을 보내준 걸까요.
 
새벽 달이 기울어갈 즈음, 배는 항구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선박에서 내려오면 거대한 포구의 전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에르드의 나라 서쪽에 위치한 가장 큰 항구는 여행자들과 상인들로 북적입니다.
 
너무 늦은, 혹은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기 때문일까요.
 
에르드가 기억하는 것처럼 웃음과 활기로 가득한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닙니다.
 
한 음식점은 새벽부터 거대한 솥을 걸어놓은 채 소박한 키케온을 끓이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을 들여오곤 한다며 베아트리체가 호평했던 포목점은 사라졌네요.
 
짐을 짊어지고 걷던 한 청년이 에르드의 어깨에 가볍게 부딪힙니다.
 
실례했습니다, 무심히 인사하며 지나가는 그에게서 이팔로스로 출정하는 에르드에게 환호하던 어린 소년의 얼굴이 얼핏 엿보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몇 번이고 새로이 실감하게 됩니다.
 
당신이 이 나라를 떠나온 뒤로 10년이 흘러버렸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크고 작은 건물이 서로에게 기대어 선 골목의 풍경만큼은 그대로입니다.
 
큰 길의 어귀에는 술에 취한 도박꾼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내기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도박꾼1: 새로운 왕이 될 분은 역시 헥터 님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 외에는 이 난리를 수습할 사람이 없다고. 에르드 왕의 뒤를 이을 명분도 가장 확실한 사람 아닌가?
 
도박꾼2: 뭘 모르는군. 어디 정치가 우리 나라 안에서만 굴러가나? 우리와 동맹을 맺은 나라들이 대부분 필립소 님을 다음 왕으로 밀고 있는걸.
 
…베아트리체의 구혼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헥터와 필립소, 두 사람인 듯 합니다.
 
에르드:(그는 출정하는 일이 잦았기에, 베아트리체와 이 서쪽 항구에 자주 오곤 했었다. 그만큼 이곳의 지리나 상점들은 꽤나 익숙했었는데, 엇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명확하게 보이는 풍경들은 자신이 떠나 있던 세월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만 같다.)
(거지꼴로 고국을 밟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감흥과 추억에 젖은 채 거리를 가로지르던 것도 잠시,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들이 또다시 신경을 긁는다. 물론 나라의 왕을 공석으로만 둘 수도 없으니 새로운 이가 다음 대를 잇는 건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이다. 헥터라면 저 역시 오래 알아온 이고, 왕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다. 합리성을 알면서도 그가 베아트리체의 옆 옥좌에 앉는단 생각만 해도 영 기분이 좋지 않은데, 하물며 같은 나라 출신도 아닌 이가 이 나라를 차지하려 들다니.)
(뻔뻔하기 그지없군. 도박꾼들을 형형한 눈으로 한 번 노려봤다가 다시 걸었다. 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곳으로 가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기던 중, 등 뒤에서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대오를 맞추어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갑자기 잠에서 깬 시민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창문 밖을 내다봅니다.
 
이 시간에 무슨 소란이냐는 웅성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선두에 선 병사는 다시 한 번 나팔을 길게 붑니다.
 
이어 병사들이 밧줄에 묶인 누군가를 바닥에 내동댕이칩니다.
 
선두에 선 병사가 좌중을 둘러보며 고함을 칩니다.
 
“다들 똑똑히 보아라! 선왕을 참칭하며 왕비의 내궁에 침입한 자에게 어떤 형벌이 기다리는 지!”
 
한바탕 소리를 내지르던 병사가 죄수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고개를 들게 합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피와 먼지를 뒤집어 쓴 죄수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비록 꼴은 엉망이지만 튼튼해보이는 연갈색 피부,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 아래로 비치는 황금빛 눈동자까지.
 
죄수는, 다름 아닌 에르드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성 판정(0/1D3).
 
에르드:(내…… 얼굴을 하고 있잖아.)
SAN Roll
기준치: 54/27/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3
(제게 쌍둥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똑같이 생긴 얼굴로, 저를 참칭해 내궁에 침입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평정심이 무너진다.)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함에 평정심마저 무너집니다.
 
그 흔들리는 시선으로...
 
에르드: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4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니, 자세히 보니 당신과는 다릅니다.
 
머리칼의 색이, 얼굴선이, 에르드와 잘 알고 지냈던 이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빛이 비치면 묘하게 갈색 빛을 띄는 검은 머리칼이나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손등도 그렇군요.
 
당신으로 변장을 한 걸까요?
 
아니, 저 정도라면 외모를 흉내내는 주문을 사용한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아트리체를 속이기는 어려웠겠지만요.
 
에르드:(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오래지 않아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주문이었나. 저를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라면 더더욱 모를 리 없었을 터다. 배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다.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텐데. 그 마음을 이용하려 들다니.)
 
돌이라도 얻어맞았는지 피투성이가 된 채 죄수를 바라보며 구경꾼들이 혀를 찹니다.
 
그 사이 포고를 마친 병사들이 죄수를 성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이 자는 성문 밖에서 눈이 뽑히고, 영영히 도시에서 추방될 것이다!”
 
짐짝처럼 끌려가던 죄수가 크게 휘청거린 순간, 그의 찢어진 옷 아래에서 무언가 작은 물체가 떨어집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파피루스 조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죄수에게 침을 뱉고 야유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무언가 떨어졌다는 사실은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에르드:(왕을 사칭했으니 마땅한 형벌이다. 작게나마 통쾌함마저 느끼다가, 사람들 틈새에서 손을 뻗어 파피루스 조각을 집어들었다.)
 
슬쩍 파피루스 조각을 주워들고 펼쳐보면 작은 사각형 몇 개와 곡선으로 표현된 약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약도에서 시선을 들면 바로 정면에 펼쳐진 항구 북쪽 민가와 그림의 구조가 유사합니다.
 
어디로 향하는 약도일까요?
 
그때, 에르드의 어깨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일꾼 1: …그런데 저 놈, 아까 우리 배에 올랐던 나그네랑 닮지 않았나?
 
일꾼 2: 응? 어…, 정말 그렇잖아?
 
일꾼 1: 당장 경비에 알려! 놈도 왕비를 현혹하러 온 마술사다!
 
잠시 잦아들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금 커집니다.
 
붙잡히기 전에 인파에 섞여 들어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약도에 그려진 건물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에르드:(혀를 찬다. 사칭해대는 놈 때문에 진짜까지 가짜로 몰려야 한다니.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인간들 때문에 꼭 죄 없는 이들이 해를 입는다니까. 진짜로 에르드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단 건 알겠지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인파를 뚫고 나와 약도에 그려진 북쪽 민가로 향했다.)
 
상점과 민가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난립한 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간략하게 도형화된 약도로는 대략적인 위치 이상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에르드:(이 골목. 이렇게까지 복잡했던가……)
기준치: 50/25/10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이 골목은 분명 방금 지나온 곳 같습니다.
 
그 순간, 에르드를 찾는 경비병들이 한 골목 너머로 스쳐갑니다.
 
에르드:쯧.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다시 지도를 들여다봤다. 큰 건물들은 뚜렷이 표현해두었을 테니, 그 건물들의 위치를 토대로 약도와 대조해보며 다시 길을 나섰다.)
 
추적을 물리치고 약도를 따라간 에르드는 거의 허물어지다시피 한 건물들이 모여 앉은 장소를 발견합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길이 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곳입니다.
 
늘어진 담쟁이 덩굴을 걷어내고 골목의 끝까지 들어서면 [버려진 은신처]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겨우 찾았군.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경계하면서 버려진 은신처의 안으로 들어섰다.)
 
썩어가는 판자로 가린 출입구 외에는 손바닥만큼 작은 창문 하나 뿐인 단촐한 구조입니다.
 
창 밖으로는 태양보다 먼저 떠오른 금성이 보입니다.
 
이울어가는 달보다도 더욱 선명한 금색으로 빛나는 별은 불길할 정도로 아름답고 또렷합니다.
 
내부는 장정 두어 명이 겨우 몸을 누일만한 공간 뿐입니다.
 
사람이 떠난 지 며칠은 지난 듯, 바닥에 깔린 짚더미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다.
 
: 완전히 연소하여 재가 된 화톳불 위에는 [작은 솥]이 걸려있고, 타다 남은 [스크롤]이 그 옆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벽에 걸린 청동검은 날이 무뎌졌음에도 희미한 달빛을 받아 매끄럽게 반짝입니다. 아마도 침상으로 사용했을 짚더미 위에는 누더기에 가까운 [암갈색 외투]가 떨어져 있습니다.
 
에르드:(저로 위장한 놈이 숨어 있던 은신처인가. 아직도 제대로 된 옷을 구하지 못한 판이니 암갈색 외투부터 집어든다.)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촉감의 히마티온입니다.
 
피부에 닿으면 마치 몸에 달라붙듯이 탄력있게 휘어 감기는 것이, 천인지 가죽인지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외투를 걸치는 순간 벽에 걸린 이 빠진 청동검에 당신의 얼굴이 비칩니다.
 
얽고 주름진 피부와 힘을 잃고 축 늘어진 가느다란 회갈색 머리카락, 피로에 움푹 패인 뺨과 왜소하게 말라붙은 체격.
 
본래의 당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누군가가 그곳에 서 있습니다.
 
이성 판정(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1/25/10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청동검에 비치는 얼굴을 보고 또다시 당황했다가, 다시 히마티온을 벗어본다. 주문이 걸린 옷인가?)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만큼은 본래의 에르드의 것 그대로입니다.
 
외투를 벗으면 곧바로 외양이 돌아옵니다.
 
에르드:그놈. 조잡한 기술을 쓰는군. (그래도 잘됐다. 베아트리체를 만나려면 왕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본래 에르드의 외관이라면 성문에서부터 막힐 확률이 높으니까.)
(작은 솥을 들여다본다)
 
취사를 위한 도구일까요?
 
솥 내부에 시커멓게 말라붙은 내용물에서 고약한 썩은내가 풍깁니다.
 
이 기이함은…
 
: [오컬트] 혹은 [크툴루 신화] 판정 가능합니다.
 
에르드:(입맛 떨어진다.)
오컬트
기준치: 5/2/1
굴림: 49
판정결과: 실패
 
역시 입맛이 떨어지는 냄새입니다.
 
에르드:(멀리 치워놓고 스크롤을 살폈다.)
 
타다 남은 파피루스 스크롤입니다.
 
이런 곳에서 숨어지내야 하는 자에게는 꽤나 고가의 물건이었을텐데, 어째서 불에 던져버린 걸까요?
 
펼쳐보면 흐릿한 그믐 달빛만으로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군요.
 
에르드:(무슨 소리야? 빼곡히 들어찬 글씨에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꼈지만, 억누르며 좀 더 자세히 보니 이건 제 외모에 관한 글이다. 저로 변장하려던 준비 과정의 일환인가 보군. 뭐랄까, 더 역겨워진다.)
 
기분마저 더러워질 지경입니다.
 
여하튼,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일단 궁궐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도 같았지만, 당신으로 위장한 사기꾼들이 자주 나타났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예민해진 베아트리체와 마주한다면 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미 구혼자들이 권력과 민심을 양분하고 있는 상황에 10년만에 돌아온 에르드를 모두가 무조건적으로 환영할 리도 없습니다.
 
우선은 정체를 숨기고 나라의 상황을 살피며 흐릿한 기억도 되짚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곳은 이미 거주자가 떠난 지 오래된 빈 집 같으니, 에르드가 며칠쯤 신세를 진다고 나무랄 이는 없을 겁니다.
 
이미 새벽이 깊었습니다.
 
짚더미 위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곧장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고 싶었지만, 제가 없는 동안 나라의 정세가 몹시 어지러워진 상태다. 왕의 부재 탓이겠지. 동맹국 놈들이 기웃대고 급기야 저를 위장하는 놈들까지 나오는 판국이니. 홀로 버티고 있을 제 왕비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 온다. 하지만 뒤탈 없이 확실한 재회와 왕권의 재건을 위해선 때를 노려야만 할 테다. 마침 이 외투 덕분에 외관을 걱정하진 않아도 되니, 상황을 자세히 살피며 기회를 노리자.)
(베아트리체도 잠을 설치며 저와 같은 새벽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까. 혹은 정치의 고단함에 지쳐 잠들었을까. 적어도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음에 만족하며,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짚더미에 누웠다.)
 
10년, 그 긴 세월. 당신만을 기다렸을 당신의 왕비를 생각하며 잠에 듭니다.
 
...
 
어젯밤 늦은 시각에 도착했기 때문인지, 눈을 붙인지 오래지 않아 새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문 밖으로 나서면 그리운 고국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저 멀리 언덕 위의 성벽 너머로 10년간 당신을 기다려온 베아트리체가 머무르고 있을 [왕궁]이 보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지대에는 나라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창을 들고 시내를 거니는 군사들의 뒤를 따라가 [병영]을 둘러보거나, 어젯밤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항구]로 돌아가 민생을 살필 수도 있겠습니다.
 
에르드:(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어제부터 먹은 거라곤 빵 한 덩이뿐이라 배가 허하지만, 한창 전쟁하던 시기에는 사흘 가까이 굶은 적도 있으니 아직은 버틸 만하다.)
(최대한 시간을 지체하지 말자. 곧장 왕궁으로 향했다.)
 
당신이 거처하던 궁전입니다.
 
언덕 위에 거대한 바위를 쌓아올려 축조한 성벽이 위압감을 자아냅니다.
 
울부짖는 사자가 새겨진 관문을 지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서자 화사하게 피어난 부겐베리아의 분홍빛이 대리석 건물과 뒤섞여 흐드러집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거리의 풍경을 따라 그리운 왕궁에 들어서면, 꿈에서 깨어나듯 초라한 현실을 목도합니다.
 
가장 먼저 홀에 앉아서 떠들어대는 [구혼자 무리]의 웃음소리가 당신을 반깁니다.
 
건물의 중심이 되는 거대한 기둥 너머에 자리한 중앙 향로는 잉걸불만이 남아 있습니다.
 
황금을 씌우고 보석을 박아넣었던 옥좌의 장식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다소 허전할 정도로 검소해진 왕궁의 모습에서 한때 태양의 도시라고 불렸던 영광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여러 색과 무늬의 석회암과 대리석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짜맞춘 건물의 기틀만이 이곳이 당신의 왕궁이 분명함을 알려줍니다.
 
당신이 주변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시녀들]은 부지런히 홀의 탁자 사이를 오가며 음식과 포도주를 내어줍니다.
 
벌써 취기가 오른 듯 경박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는 무리와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 구혼자들도 보입니다.
 
그들의 중심에서 은은하게 미소를 띈 채 [상석에 앉은 청년]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에르드:(왕궁만큼은 시간도 거뜬히 이겨낼 줄 알았는데. 이 또한 저의 부재 탓인가. 왕궁의 모습이 곧 왕의 모습이나 다름없으니 보기에 부족함 없이 꾸미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검소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화려함을 추구해 왔다. 특히나 베아트리체가 왕비로 온 후에는 그의 취향에 따라 맞춘 부분도 상당했었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군데군데 놓인 화분 말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곳까지 세세히 살필 여유는 없었던 거겠지.)
(저 거머리 같은 구혼자들을 상대하노라면 더더욱 그랬을 테고! 면면에 침이나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꾹 참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간다.) 도련님들. 왕비님을 기다리십니까.
 
어느 지방의 귀족, 원로회 의원의 손자, 이웃 나라에서 온 왕자…
 
설명을 들으면 알 듯 말 듯한 위치의 젊은이들이 술잔을 서로 부딪히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습니다.
 
어림잡아도 수십은 너끈한 인파가 떠들어대는 소리에 건물이 울릴 지경입니다.
 
에르드가 그들에게 말을 걸면 ‘저 거지가 어디서 고개를 들고 눈을 빤히 바라보나’라며 식은 빵을 에르드의 안면에 던지고 조롱합니다.
 
악질적인 행동 이후 에르드에게 흥이 식은 그들은 다른 화젯거리를 꺼냅니다.
 
에르드:(안면에 내던져지는 빵을 반사적으로 잡아챈다. 목덜미에 핏줄이 절로 돋았지만, 어쨌거나 저들이 보기에나 실제로나 거지는 맞으니 할 말도 딱히 없다. 대신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둔다. 너희들은 내가 왕으로 되돌아가면 모두 숙청해주마.)
 
구혼자 무리는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웃고 떠듭니다.
 
이웃 왕자: 어제 내궁에서 끌려나가던 녀석, 보았나?
 
의원의 손자: 어엉, 봤지. 자기가 돌아온 에르드 왕이라고 주장했다던데.
 
지방의 귀족: 그런 놈들이 잊을 만 하면 나타나서 설쳐대니, 베아트리체 님도 심란해져서 지금까지 선택을 못하신 거 아냐.
 
의원의 손자: 그런데 선왕이 아닌 건 어떻게 알아차리셨대? 나도 어릴 때 선왕을 직접 본 적이 있거든. 그정도면 10년간 고생하느라 달라진 거라고 둘러대도 그럴듯한 차이 뿐이던걸.
 
지방의 귀족: 뭐, 부부 사이라면 정체를 증명할 만한 무언가는 있지 않겠어? 둘만 아는 비밀이라거나.
 
둘만 아는 비밀.
 
그 말이 뇌를 후벼파며 찔러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관자놀이가 강렬히 욱신거리며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번집니다.
 
피로 얼룩진 전장의 비명과 형용할 수 없는 것의 그림자가 눈앞을 스쳐갑니다.
 
과거와 현재, 진실과 환영, 사라지고 남아있는 기억이 뒤얽힌 소용돌이를 한가운데에서 꿈결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두통이 잦아듭니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그리운 음성도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버립니다.
 
이팔로스로 떠나기 전날 밤, 베아트리체가 전했던 말이 무엇이었던가요.
 
부탁에 가까웠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기억이 당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에르드:(그래…… 저인 척 위장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에르드라는 걸 증명하려면 두 사람만이 아는 확실한 이야기를 증거로 대야 한다. 기억을 더듬고자 하면 창졸간에 날카로운 두통이 뇌리를 직격한다. 제게는 아직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닌데. 십 년이 제 기억마저 훑어갔는지.)
(베아트리체와 함께 했던 세월은 모두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했건만. 허나 괜찮다. 처음 결혼을 약속할 때 나누었던 약조만은 아직 또렷하니까. 베아트리체가 저를 잊지 않았다면 그 약조도 기억해주겠지.)
(식은 빵을 궁상맞게 베어물면서 시녀들을 응시했다.)
 
시녀들은 음식과 음료가 든 광주리를 이고 지며 뛰어다니며 손님을 접대하고 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던 체구가 작은 어린 시녀 하나가 에르드와 부딪힙니다.
 
광주리를 떨어트린 어린 시녀가 볼멘소리를 냅니다.
 
어린 시녀: 저기요, 아저씨! 이쪽으로 오시면 안 돼요. 다들 바쁜데 동선에 방해가 되잖아요.
 
갈색머리 시녀: 얘, 뭘 상대하고 있어? 매번 궁 앞에 찾아오는 거지잖아. 대충 빵이나 한 덩이 들려서 보내.
 
어린 시녀: 하지만 이미 하나 들고 있는...! ...네, 언니.
 
아무래도 에르드가 빌린 얼굴은 왕궁에 자주 드나들던 걸인의 것인 모양입니다.
 
어린 시녀는 에르드에게 끝이 탄 빵을 건네주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향하는 문으로 사라집니다.
 
시녀들이 오가는 작은 문 너머로 속닥거리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에르드:(주문을 쓴 자가 원래 걸인이었던 건지, 그자가 걸인의 얼굴마저 빌려온 건지…… 완전히 거지 취급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하지만 빵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챙겼다. 굶어죽을 순 없으니깐)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여인 1: 틈만 나면 몰려와서 궁궐 살림을 먹어 치우니, 돼지도 저보다는 염치가 있겠어.
 
여인 2: 저기 저 헥터 님을 봐. 위엄도 있고 자질도 뛰어나신데다, 저런 무도한 구혼자들과는 분명히 격이 다르잖아.
 
여인 3: 베아트리체 님께서 진작에 헥터 님을 선택하셨다면 우리도 고생이 덜했을 텐데.
 
여인 1: 그러게. 사랑이 뭐라고 죽은 사람에게 매달려서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드는지. 100명이나 되는 구혼자들을 한결같이 마다하시니, 우리만 고생이잖아.
 
여인 2: 야, 말 조심해! 방금은 심했어!
 
여인 1: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어차피 이제 곧 헥터 님이 왕이 되실 게 뻔한걸.
 
에르드는 물론 베아트리체의 권위도 거의 무너져내린 상태 같습니다.
 
시녀들마저도 실질적으로 왕위에 가장 가까운 존재를 권세가, 헥터로 보고 있네요.
 
에르드:(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왕궁을 점령하고 있으니 살림이 어려워질 수밖에. 사실상 왕궁이 이토록 초라해진 건 저자들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영문도 없이 사라져 버린 10년. 그 세월의 행방이라도 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기실, 정말로 제가 죽었다면 베아트리체가 평생 독수공방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물론 헥터가 능력 말고 인격적으로도 좋은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홀로 지내는 세월이 너무 외롭고 힘들진 않았을까. 그의 얼굴을 그리워하면서, 상석에 앉은 이를 돌아본다.)
 
에르드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이가 든 모습이지만, 틀림없이 권세가인 헥터입니다.
 
에르드가 눈에 띄면 헥터는 흥미 없는 얼굴로 탁자 위의 음식 하나를 내밉니다.
 
동시에 그는 턱을 느슨하게 괸 채 측근들과 하던 대화를 이어갑니다.
 
에르드를 눈도 귀도 없는 사물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처럼.
 
측근: 그나저나, 저쪽의 어중이 떠중이들은 언제 모여도 시끄럽군요. 왕궁에 객으로 초대된 입장에서 무례하게 굴어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헥터:...애초에 구혼이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그래도 남아있는 이유는 나 정도면 혹시 모른다, 실패하더라도 자신보다 몇 급은 높은 사람들과 나란히 이름이 거론될 것이다…. 그거면 됐다, 이런 심리려나.
 
측근: 참으로 한심한 인생들이군요.
 
헥터:됐어. 나도 쓸만한 사람들은 대충 걸러냈으니. 오늘은 저런 녀석들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야.
 
헥터는 고개를 들어 계단 위를 바라봅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베아트리체가 거처하는 내궁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습니다.
 
굳게 닫힌 문은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고요합니다.
 
헥터:직접 짠 베로 에르드 왕의 수의를 짓겠다. 그것이 내가 그의 왕비로서 지킬 마지막 책무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3년 전 그날, 분명히 그리 말했었지.
그날의 증인이 100명이야. 어디 오늘 무슨 말을 할 지 두고 보자고.
 
...그때.
 
쿠구궁, 경첩이 돌아가며 발하는 무거운 소리에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합니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면 내궁으로 이어지는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환관들과 시녀들 사이에서 나이 든 시녀장이 나타납니다.
 
시녀장: 베아트리체 님께서 걸음하실 테니, 다들 예를 갖추시오!
 
한 차례 시선을 교환한 구혼자들이 왕궁과 내궁 사이의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바라봅니다.
 
잠시 후, 열린 문 너머로 누군가가 나타납니다.
 
장신구 하나 없이 검은 옷을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어두운 색의 베일을 쓴 그가 높은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베일 아래로 흘러넘치는 옅은 보라색의 머리칼은 발 끝에 닿을 듯 늘어졌으며...
 
한때 온갗 보랏빛을 머금었던 눈동자는 짙고 어두운 색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검고 어두운 천은 원래도 흰 피부의 색을 앗아 창백하기 그지 없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졌고, 지친 듯한 기색의 베아트리체입니다.
 
가라앉은 눈빛에서 선명한 부담감과 피로가 묻어납니다.
 
에르드:(홀린 듯이 시선을 앗긴다. 온 신경이 오로지 계단 위에 선 이에게로 집중되었다. 아, 너무도 지치고 슬프고 예민해 보이는…… 그럼에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나의 왕비.)
 
베아트리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구혼자들이 차지한 홀을 내려다봅니다.
 
그때, 누군가 구혼자들의 무리 앞으로 나섭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구혼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두어 발짝씩 물러서며 길을 터줍니다.
 
이곳에 모인 모두를 마치 제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그는, 당연하게도 헥터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베아트리체를 올려다봅니다.
 
헥터:...베아트리체 님. 마침내 선왕의 수의를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 ...소식이 빠르군요. 그래, 나는 에르드 왕의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소. 닷새 동안 모든 절차와 예우를 갖추어 나의 왕을 떠나보내고, 그 후 새로운 왕을 선택할 것이오.
...... 부디 장례 기간 동안만이라도 진정으로 에르드 왕을 추모해주기를 바라오.
 
참담한 표정의 베아트리체와는 달리 구혼자들은 기대감 섞인 탄식을 삼키지 못합니다.
 
바로 조금 전의 부탁조차 무시해버리는 희망에 찬 웅성거림에, 베아트리체는 지친 기색으로 구혼자들에게 물러가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헥터는 천천히 흩어지는 구혼자들의 흐름을 거슬러 베아트리체에게 다가갑니다.
 
왕궁의 중심부와 홀을 나누는 굵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기면,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긴 시간이었지. 마침내 나를 놓아주기로 결심했구나. 옳은 선택이다. 옳은 선택이다…… 내가 기적처럼 살아 있지만 않았어도.)
(닷새의 시간 안에 어떻게든 제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헥터에게 내어줄 순 없다. 서둘러 굵은 기둥 뒤로 숨어들었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21
판정결과: 실패
(행운 깎겠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에르드는 무사히 기척을 죽이고 베아트리체와 헥터의 대화를 엿듣는 데에 성공합니다.
 
사람들의 눈과 귀가 멀어지자마자 헥터는 베아트리체에게 무례한 말투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헥터:아무렴, 이제라도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됐어. 나를 선택하면 에르드 왕의 모든 영광을 이어가리라고 약조하지.
 
베아트리체 힐:...그대는... 이제 내가 전혀 두렵지 않은가 보군요. 어린 그대를 귀히 보셨던 에르드 왕께 최소한의 죄책감도 들지 않는 것이오?
 
헥터:하하. 별 순진한 소리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 당신의 패도 동이 나긴 했나봐. 3년 전에는 어떻게 상황을 무마한 건지 모르겠지만, 더 버텨봐야 이제는 한계야.
 
아무래도 3년 전 이들 사이에 무언가 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헛웃음을 흘리던 헥터는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헥터:이제 그만하자, 베아트리체…. 나는 당신과 잘 지내고 싶어. 며칠만 있으면 부부가 될 사이잖아?
…내일 [후원]에 시인과 악사들을 부를게. 선왕의 넋을 기리는 추모곡을 부를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당신도 내키면 들으러 와. 그리고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고. ...선왕도, 지난 10년간의 알력도.
 
베아트리체 힐:... ...
 
베아트리체는 대답 없이 베일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내궁으로 들어갑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헥터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자리를 뜹니다.
 
에르드:(헥터. 그를 괜찮은 인간이라 보았던 제 눈이 삐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베아트리체를 겁박하고, 험한 말을 뱉어대고, 왕궁이 제 것인양 굴다니. 제 손에 검이 없어 그의 목을 베지 못하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내궁으로 들어가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을 시선으로나마 좇았다. 저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참아야만 한다.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무거워진 발을 돌려 왕궁을 나섰다.)
 
하릴없이 왕궁을 나서던 중, 뒤편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를 따라가보면... 홀로 눈물짓는 베아트리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아직은 다가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작게 흘러나오는 흐느낌과 가녀린 뒷모습이 눈에 띈 순간 의식도 못한 사이에 발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만 할까. 걸인의 모습과 차림새를 한 채로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어렵게 입을 뗐다.) 왕비님.
 
그 목소리에 베아트리체는 황급히 눈물을 감추고 의연한 표정으로 돌변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메마른 음성이 이어진다.) ... ...누구신가.
 
에르드:……소인은 그저 지나가는 걸인이온데. 구슬픈 울음 소리가 들려 저도 모르게 걸음하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눈가를 닦아 주고 싶다. 서로의 체온을 나눠주고 체향을 맡고 싶다. 팔을 내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베아트리체 힐:(...제대로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눈가를 더듬던 손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진다. 봄날의 꽃같던 이는 때이른 서리를 맞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색을 잃었다.)
(자신의 태양을 잃고, 그의 마지막을 제 손으로 지어냈으니 그의 장례도, 제 재혼도 미룰 핑계가 없어졌다. ...그것을 드러내어서는 안된다. 누구도 지금의 일을 알아서는 안돼.) ...... 구혼자들에게는 방금 본 것을 발설하지 말아주게.
 
에르드:(너무도 마르고 피폐해져 버린 모습에 애간장이 다 녹아 뜯기는 듯하다. 봄꽃처럼 생그럽고 화사하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나 소녀처럼 순수하고 맑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앗아갔다. 저 때문이다. 마음이 아려서 차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겨우 감정을 갈무리하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제가 그분들께 어디 말이나 함부로 붙일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왕비 전하.
……돌아가신 선왕 전하를 아직 그리워하고 계십니까?
 
베아트리체 힐:...... (짧은 침묵. 시선은 느리게 허공으로 올라가며, 어떠한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싹 마른 입술에서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떨어진다.) ... ......그래, 여전히. 무척이나.
 
에르드:(일어서는 모습이 꼭 까딱이면 부러질 나뭇가지처럼 보여서. 아주 무너져 사그라들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시게 될 겁니다. 그리 간절히 그리워하고 계시다면.
 
베아트리체 힐:... ... (반쯤 고개만 돌려 묵묵히 눈 앞의 사내를 시야에 담았다. 이어지는 말은 마치 실바람에도 금세 흩어질 것처럼.) ...... ...고맙네.
 
베아트리체는 마지막 말만을 남긴 채 내궁으로 사라집니다.
 
에르드:(착잡한 심정으로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천천히 돌려 군사들을 눈으로 좇았다. 병영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착잡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청년들의 체육 훈련장인 김나시온과 나란히 붙어있는 병영입니다.
 
긴 회랑과 올리브나무가 곳곳에 그늘을 드리우는 이곳은, 과거 숙련된 군인과 체육 활동을 즐기러 온 시민들이 각각 여러 무리를 이루어 어울리던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이팔로스 원정의 후유증일까요, 이제는 곳곳이 비어버린 병영은 어쩐지 허전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나마 주변을 스치는 병사들의 얼굴을 훑어보아도 열의나 긍지는 느껴지지 않는 피곤함 뿐입니다.
 
궁술을 훈련하는 병사들 옆에서 [장교]가 크게 소리를 치며 다그치고 있습니다.
 
절도를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의 행진을 이어가는 어리숙한 병사들의 머리 너머로 병장기를 보관하는 [무기고]가 보입니다.
 
병영 북쪽에 설치된 김나시온의 공터가 이 넓은 부지에서 가장 요란스럽습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 창던지기 훈련을 하는 듯, 여러 청년들이 번갈아 나서며 창을 던지는 모습이 얼핏 보입니다.
 
에르드:(병영은 자신이 가장 공들여 왔던 곳이다. 그가 왕으로서 제일 중요시했던 가치는 국력을 키우고 원정을 나가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기에, 병사들의 훈련을 직접 감독하기도 하고 대장간을 돌아다니며 질 좋은 무기와 갑옷을 고르기도 했었다. 직전 이팔로스 원정을 준비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건만. 그때에 비해 허전하고 초라해진 모습이 절로 씁쓸함을 불러일으킨다.)
(척 봐도 병사들의 상태가 엉망임을 알겠군. 지도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지? 장교를 바라본다.)
 
시선 끝에, 손을 높이 들었던 장교가 세차게 팔을 내립니다.
 
파파팍, 신호에 맞추어 날아간 병사들의 화살이 표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곳에 떨어집니다.
 
장교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지릅니다.
 
장교: 이것들아, 동네 꼬맹이들이 돌팔매질을 해도 너희보단 잘 맞히겠다! 너희에게 배급할 화살이 국고 낭비야!
 
병사들: 시, 시정하겠습니다…!
 
장교: 알아들었으면 당장 가서 화살 전부 주워와!
 
장교의 윽박에 허둥지둥 달려가는 뒷모습이 어설픕니다.
 
당신이 이끌던 병사들보다 평균적인 수준이 훨씬 떨어진 것 같습니다.
 
에르드를 발견한 장교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장교: ...당신은 뭐요? 여긴 와봤자 구걸할 것도 없소.
 
가까이에서 장교를 바라본 에르드는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이팔로스 원정 당시 전령을 맡았던 병사입니다.
 
에르드:(엉망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보니 절로 이마를 짚고 싶어진다. 이게 정녕 나라를 지킨다는 병사의 수준이란 말인가? 혀를 차려다가 장교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더니…… 그래도 이자는 살아남은 건가? 그렇다면 원정에 대해 캐물을 좋은 기회다. 제 휘하의 병사는 싸그리 없어진 상태니 말이다.) 구걸하러 온 건 아닙니다, 장교님.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 이팔로스 원정 때가 어렴풋 떠올라 말입니다.
 
장교: (허둥대는 병사들을 보고 끌끌거리며 혀를 차다가 그 말에 반색한다.) ...자네, 이팔로스 원정 때를 아나? 설마 자네도 원정군 출신인 건 아니겠지.
 
에르드:소인은 아니고, 제 아들이 원정군이었습니다. (적당히 둘러댄다.) 다만…… 떠난 이후로 도통 소식이 없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지요. 혹 장교님께서 자세히 알고 계신 바가 있다면 소인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교: 이렇게 옛 전우의 친족을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군. ...다만, 그에 대해서는 조의를 표하네. 이팔로스 원정군은 일반병조차도 하나도 빠짐없이 우수했는데… 그때의 전우들이 그립군. (잠시 허공을 올려본다.)
나는 전령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한 발 앞서 귀국했소. 우리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모두 크게 기뻐했다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에르드 왕과 전우들이 오지 않아, 심상치 않음을 느낀 베아트리체 님께서 수색대를 파견하셨소. 이팔로스의 폐허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병사들을 거두어 온 바로 그들 말이지. ...자네의 아들도 거기에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에르드:저도 대승을 거두었다며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헌데…… 폐허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있었습니까?
 
장교: 아예 없지는 않았지. 그때 구조된 병사들의 증언에 나라에선 아주 난리가 났었네. 에르드 왕과 그의 최정예였던 장군들 모두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전쟁 중 전사한 것도 아닌데 지휘부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처벌이 두려워 도주한 병사도 많았다고 들었소.
 
에르드:어찌 지휘부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장본인도 전혀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의문 어린 말투는 진심 그대로다.) 이전에 징조 같은 건 없었답니까? 이팔로스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든가.
 
장교: 그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도록 두었겠는가. 막아도 진작에 막았을걸세.
그 덕에 그 전쟁에서 우리 군은 너무 큰 피해를 입었지. 전쟁 도중의 전사자만 헤아려도 타격이 컸을텐데, 에르드 왕과 지휘관 대부분이 증발해버렸으니 군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쯧쯔... 이런 오합지졸들만 남은 상황에서 무슨 사태라도 일어난다면…. (진저리친다.) 상상도 하기 싫소.
 
에르드:모자란 병사들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럼 장교님처럼 훌륭한 병사가 또 나오겠지요. (한마디로 군영이 와해되기 직전이란 소리군. 그렇잖아도 근처 나라의 왕자들이 구혼을 위해 아모르베루스를 오간다는데, 혹여 상황을 알아챈 놈이 기습이라도 가한다면 큰일이다.)
 
장교: ..말 만으로 고맙소. 내 저것들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 베아트리체 님께서도 어서 믿을만한 새로운 왕을 골라주셔서 뒤숭숭한 분위기를 안정시켜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오.
그래, 자네도 아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저기 김나시온에서 무예를 자랑 중인 접경국의 왕자가 인기가 좋소. (손을 뻗어 한 쪽을 가르키더니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나는 이왕이면 다소스의 왕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주셨으면 싶다네. 이팔로스의 전장에서부터 의지할 수 있는 지휘관이셨지 않나. 이런 혼란기에도 그분이라면 믿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어깨를 두드려준다.) ...자네 아들 소식도 머지않아 들려오길 바라네.
 
에르드:(공터를 흘끗 바라본다. 접경국 왕자와 다소스의 왕이라……) 예.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 아모르베루스도 하루빨리 안정이 되어야겠지요.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장교에게 인사하곤 적당히 먼발치에서 무기고를 바라본다.)
 
우물 옆에 세워진 무기고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병장기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자산이 충분한 장군들은 사비를 들여 보다 우수한 무기와 갑옷을 갖추기도 하지만,
 
일반병들은 대체로 이 무기고에서 보급을 받아 활동합니다.
 
무기고를 지키는 앳된 얼굴의 경비들은 지루한 얼굴로 군견에게 막대기를 던져주거나 꾸벅꾸벅 졸며 시간을 떼우고 있습니다.
 
액면가를 보니 이제 갓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한 소년들 같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장교가 ‘물을 떠와라!’ 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의 호통에 혼비백산한 병사들은 허둥거리며 다같이 우물가로 달려가버립니다.
 
한 명은 남아야 한다는 경비의 상식도 지키지 않는다니, 아무리 신병이라 해도 상태가 심각하군요.
 
에르드:(역시나 절로 한숨이 나오는 작태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 됐다. 경비가 없는 틈에 슬쩍 무기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 틈을 타 무기고 내부로 들어가 보면 무기가 가지런히 쌓인 내부가 드러납니다.
 
그래도 꾸준한 훈련과 관리는 이루어지고 있는 듯, 낡은 무기 위에도 먼지는 보이지 않네요.
 
에르드:(최소한은 하고 있어 다행이군. 무기들을 재빠르게 훑어보고는, 아래쪽에 놓인 낡은 무기들 중 검 한 자루를 집어든다. 내내 몸을 지킬 무기 하나 없는 게 거슬렸던 차였다.)
 
검을 품에 잘 챙겨든 후 주변을 둘러보면, 무기고의 한 구석에는 [장부]가 쌓여 있습니다.
 
에르드:(검을 망토 안에 감추고는, 장부를 열어본다. 철저히 기록되고 있나? 만일 그렇다면 내가 오늘 검을 훔쳐간 것도 바로 알아차려야 할 텐데.)
 
: 병장기의 관리 내역이 기록된 장부입니다. 웬만한 수준의 검 하나가 수 개월치의 평민 가족 생활비에 육박하니, 국가 소유의 무기를 도난해 팔아치우는 간 큰 자들도 종종 나타나곤 합니다. 덕분에 관리병은 무기 하나하나의 상태와 분실 및 폐기 여부를 꼼꼼히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에르드:.
회계
기준치: 50/25/10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왕자 시절에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숫자는 역시 쉽지 않군)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않은 탓에 속셈에 조금 둔해졌나 봅니다.
 
대략적으로 보자면, 장부에 적힌 것과 보관 중인 무기의 갯수가 맞지 않습니다.
 
슬쩍 보기에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무기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어느모로 보아도 좋은 징조는 아니네요.
 
장부를 이리저리 들추던 에르드의 발 앞에 무언가 툭 떨어집니다.
 
들어서 살펴보면 끈을 이리저리 땋아 만든 매듭입니다.
 
우연히 나타나기 어려운 기묘하고 독특한 모양으로 얽혀있는 것이, 단순한 장신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에르드:(무기 관리는 잘 해두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애초에 거지 행색인 제가 무기고에 침입할 수 있는 것부터가 병영 상태를 드러내는 셈이나 다름없지만.)
(대체 어디부터 족쳐야 할지 고민하다가 발치에 떨어진 매듭을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이건 뭐지?)
 
특이한 모양입니다.
 
아모르베루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인 듯 한데, 어딘가에 쓸 수 있을지 모르니 챙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르드:(우선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바깥에 경비가 되돌아오진 않았는지 살핀 뒤 잽싸게 무기고를 빠져나간다.)
 
어리버리한 병사들은 아직인가 봅니다.
 
무사히 무기고를 빠져나옵니다.
 
에르드:(기강이 안 잡혀 있어, 기강이.)
(한숨을 내쉬면서 젊은이들이 모인 김나시온 공터로 가 본다. 왕 자리를 넘겨줄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인정할 만한 이인지 확인이나 해야겠다.)
 
이 넓은 부지에서 가장 요란스러운 곳으로 향합니다.
 
우중충한 분위기의 병사들과는 달리, 이곳에 모인 청년들은 웃고 떠들며 운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의 억양이 뒤섞여 있는 것을 보면 다양한 나라와 지방에서 모인 무리 같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유난히 체격이 좋은 청년이 일어서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합니다.
 
상체를 이리저리 풀던 청년은 끝이 무딘 창을 잡고, 몇 번의 도움닫기 후 공터의 끝까지 창을 날려 보냅니다.
 
그의 엄청난 힘에 모두가 탄성을 내뱉습니다.
 
“멋진데, 필립소!”
 
과연, 그렇군요.
 
저 청년이 바로 권세가와 지지도를 양분하고 있는 접경국의 왕자입니다.
 
함성으로 호응한 그는 은근슬쩍 이리저리 고개를 돌립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양새에 곱슬머리 청년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곱슬머리 청년: 또 베아트리체 님 찾냐? 시찰 중에 우연히 본 멋진 광경, 그가 던진 창 끝이 내 마음으로 날아와 박혔네…. 이런 전개라도 기대하는 거야?
 
필립소:너, 너, 너 이 자식, 조용히 안 해!?
 
얼굴이 시뻘개진 접경국의 왕자가 윽박을 지르자 왁자한 웃음이 쏟아집니다.
 
사방에서 장난스런 야유가 쏟아지는 와중, 얼핏 이제 갓 청년기에 접어든 그의 눈빛이 비칩니다.
 
그 순간 에르드는 직감합니다.
 
사랑에 빠진 얼간이.
 
그것이 저 젊은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일 거라는 사실을요.
 
곱슬머리 청년: 이번에는 분위기가 다르다지만, 나는 솔직히 별로 기대 안 돼. 10년이나 변함없던 마음이 떠밀리듯 새로운 왕을 고른다고 바뀌나?
 
필립소:흥. 다들 베아트리체 님을 무시하고 몰아세우면서 구혼을 하니 그러지. 베아트리체 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예물을 들고 정중하게 구혼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흉흉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걸.
 
곱슬머리 청년: 좋아하실 예물? 에르드 왕의 비로 계실 때, 이 세상의 가장 좋은 것들은 원하는 만큼 누리셨을 분이야. 그런 분의 눈에 황금과 보석이, 고운 옷과 먼 곳에서 온 향유가 귀해 보이겠나?
 
필립소:그렇게 물질적으로만 접근하니 안 되는 거지! 10년이나 선왕과의 의리를 지킬 정도로 마음을 중히 여기시는 분께, 진심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나? 님께서는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계실 거야.
에르드 왕과의 기억마저 기꺼이 과거로 떠나보낼 만할, 새로운 사랑을.
 
곱슬머리 청년: 얼씨구….
 
똑똑한 청년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베아트리체를 향한 마음만큼은 분명한 것 같네요.
 
이런 성품의 젊은이가 권세가와 어깨를 견주는 구혼자라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거기에는 여러 정치적인 사정이 얽혀있겠지요.
 
필립소:그러니 내일 꼭 [광장]으로 나와주게나! 내가 상심에 빠져계실 베아트리체 님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서 아주 멋진 선물을 준비했거든.
 
곱슬머리 청년: 그래, 얼마나 애절한 진심인지 구경이나 해 보지.
 
이후 젊은이들은 손을 털며 각자 그늘 아래로 흩어져 휴식을 취합니다.
 
에르드:(조용히 젊은이들을 지켜본다. 혈기 넘치는 모습에 순수한 표정. 제 머리칼과 홍채의 빛깔을 닮은 젊은이에게서 얼핏 자신이 겹쳐 보인다.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 어릴 적의 자신이. 어쨌거나 이자는 헥터처럼 베아트리체를 무시하지는 않겠군. 내 자리를 내줄 생각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지만.)
(헥터는 후원. 필립소는 광장인가…… 기억해두자.)
(병영은 이만하면 다 살핀 듯하니, 이번에는 신전으로 향했다.)
 
왕궁과 함께 왕성의 중심적인 시설을 담당하는 신전입니다.
 
새하얀 기둥 위에 새겨진 열두 신의 부조 조각이 섬세한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에르드는 이팔로스로 출정하기 전 축복을 받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이곳에 방문했었지요.
 
상아와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신상이 백향목으로 조각한 왕좌에 앉아 도시 전체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현실감이 사라질 정도로 장엄한 규모의 신상 앞에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놓여 있고,
 
뒤로는 사제가 신탁을 내리는 [아디톤]으로 향하는 길이 보입니다.
 
옛 기억을 더듬는 사이, 혼례복도 벗지 않은 신혼 부부가 신전 밖으로 나섭니다.
 
이제 막 혼례를 올리고 신전에 방문하여 축복을 받은 것 같네요.
 
말쑥하게 차려 입은 [하객들]은 젊은 부부의 머리 위로 쌀과 씨앗을 뿌리며 환호합니다.
 
행복한 풍경 너머, 저 멀리 신전 뒤편에서는 어쩐지 [익숙한 얼굴의 남성]이 하급 신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에르드:(이곳도 아주 간만처럼 느껴진다. 베아트리체와 함께 제물을 바치고 축복과 안정을 바랐던 나날이 뇌리를 스친다. 추억을 회상하며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하객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익숙한 풍경이 그려집니다.
 
황금빛으로 찬란한 노을 사이.
 
봄날의 태양빛을 받아 만발한 꽃향기, 걸음마다 쏟아지는 환호와 축복.
 
고운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행복한 앞날을 꿈꾸는 새신랑과 새신부.
 
왕자였던 에르드와 비인 베아트리체의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지만, 그럼에도 다를 바 없는 풍경입니다.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고 사람들 앞으로 나아갈 때 무슨 말을 건넸었는지,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젊은 부부에게 덕담을 던진 하객 두 명이 뒤로 물러서서 대화를 나눕니다.
 
하객1: 베아트리체 님께서도 이제 그만 새 짝을 찾으시면 좋을 텐데.
 
하객2: 내로라 하는 왕자들은 물론 왕들까지 몰려왔다던데, 뭐가 그리 어려워서 지금까지 선택을 미루고 계시는 걸까?
 
하객1: 언급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왕이나 그 후계자들은 선택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지.
 
하객2: 어째서? 지위도 높고, 나름대로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검증된 이들 아닌가?
 
하객1: 바로 그게 문제야. 이미 그들 각자 책임져야 할 나라가 있을 텐데, 그 상태로 이 나라가 지참금으로 딸린 베아트리체 님과 재혼하면 어떻게 되겠나. 베아트리체 님을 그쪽이 모셔가면 우리는 누가 다스리지? 반대로 남의 나라 지도자를 우리 나라에 데려올 수도 없고. 이도저도 어려우니 국경을 허물고 한 나라가 되어야 할까? 어느 모로 봐도 부담이 너무 커지잖나.
 
하객2: 그것도 그렇군. (신전 건물 뒤편을 흘긋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그럼 저분은 헛된 공을 들이고 계시는 건가?
 
하객1: 글쎄. 심복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지도 모르니 이만 말을 아끼자고.
 
에르드:(아직 제가 돌아왔음을 아무도 모르니,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이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막 신성한 결합을 마친 부부를 응시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서로 믿고 의지하며 함께할 것만 같았다. 그 믿음을 어기지 않고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베아트리체에겐 미안할 뿐이다.)
(금세 부부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급 신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를 확인했다. 헥터인가?)
 
중년에 가깝지만 기품 있는 남성이 하급 신관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름 아닌 북쪽의 동맹국 다소스를 다스리는 왕입니다.
 
당신과 함께 이팔로스 원정에 직접 참여하여 최전선에서 싸웠던 전사입니다.
 
에르드의 입장에서는 고작해야 며칠 전까지 함께했던 전우이건만, 그때의 모습보다 확실히 나이가 들어 있습니다.
 
별달리 하는 일 없이 근처를 어슬렁대는 장정들이 다소스의 왕의 수행원들로 보입니다.
 
그들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에서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71
판정결과: 실패
 
지나치게 거리를 둔 탓일까요, 주변의 소음에 뒤덮여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급 신관: 이전까지는 원로 귀족들이 주요한…. 요즈음은 민심도 대부분…. 에게로 기울고 있습니다.
 
바실리스: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바뀐…. … 영향인가?
 
하급 신관: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바실리스:하하…. 참 영리한 젊은이들이야. …...오시나?
 
하급 신관: …후로 빈도가 크게 줄었습니다만, 가끔 마음을 달래러 찾아오시기는 합니다.
 
바실리스:쯧쯧…. 어린 구혼자들이 베아트리체 님을 어지간히도 괴롭히나 보군.
 
하급 신관은 고개를 숙이고는 신전 뒤편의 [기록물 보관소]로 향합니다.
 
다소스의 왕도 옷자락을 정돈하며 돌아서자, 멀찍이 서있던 수행원들이 다가와 그의 뒤를 따릅니다.
 
에르드:(다소스의 왕은 용장이나 왕비가 있었을 텐데…… 저자도 짝을 잃은 모양이군. 헌데, 아모르베루스의 병사들과 제가 사라져버린 것과 달리 다소스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가? 이팔로스의 왕이 남긴 유언이 다시금 떠올라 심기를 어지럽힌다.)
(함께 싸울 때는 괜찮은 동료였지만, 구혼자로 마주하니 영 껄끄럽기만 하다. 괜히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먼저 아디톤으로 향한다.)
 
: 아디톤은 신전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제가 신탁을 받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큰 사건이 생겼을 때 이곳으로 찾아와 신들의 뜻을 묻고는 합니다. 신성한 장소이기에 신관들만이 출입할 수 있으며, 작은 출입문에는 커튼을 겹겹이 늘어뜨려 내부를 엿볼 수 없도록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제에게 신탁을 받을 때조차도 의뢰자가 아디톤 내부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 신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는 구조입니다.
 
‘승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였던가요.
 
이팔로스 원정에 나서기 전, 당시에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던 예언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에르드를 발견한 하급 신관들은 이곳은 부랑자가 얼정거리는 곳이 아니라며 내쫓으려 합니다.
 
그때,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만 같은 호통에 놀란 신관들이 에르드에게서 손을 뗍니다.
 
사르르, 천이 걷히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아디톤 내부에서 걸어나옵니다.
 
얼굴이 거의 드러나지도 않도록 베일을 늘어뜨린 모습에 신관들이 술렁입니다.
 
신관1: 사, 사제님…! 다시 자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신관2: 사제님이 큰 소리를 내며 아디톤 밖으로 나오시다니…. 불길한 징조다.
 
신관3: 전쟁이 나기 전에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유황 냄새를 풍기는 사제가 에르드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니, 초점이 맺히지 않는 눈은 당신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하늘을, 땅을, 태양이 지나는 모든 길을 돌아보던 사제가 베일을 벗어내고 두 손 높이 들어 올립니다.
 
천이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지하에서부터 끌어올린 것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옵니다.
 
무겁게 울리는 목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로 떨어집니다.
 
예언을 마친 사제는 눈을 굳게 닫고 스르륵 뒤로 쓰러집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신관들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합니다.
 
신관들은 사제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럿이서 부축하여 쉴 곳으로 데려갑니다.
 
신관 중 한 명은 에르드에게 오늘 목격한 일에 대해서 함구하라고 경고합니다.
 
에르드:(해일과 무덤. 이팔로스의 세력을 의미하는 건가? 제 본모습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의미심장한 예언에 사제에게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예. 그러지요.
(예언의 내용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아디톤을 나와 기록물 보관소로 향했다. 이쯤 되면 바실리스도 떠났으려나.)
 
바실리스는 자리를 뜬 것 같으나, 방금의 신탁으로 사제들이 그 주변을 분주히 다니고 있습니다.
 
내일, 보는 눈이 줄었을 때를 노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르드:(조용히 신전을 나서 항구로 향했다.)
 
어젯밤에 비교하면 확연히 활기가 도는 항구입니다.
 
지난 10년간 국가의 위세가 제법 기울어버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항구에 정박한 선박의 수는 오히려 늘어난 것 같습니다.
 
다만 눈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에르드가 익히 알고있던 유명한 상단들의 가게 대다수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일까요.
 
좋지 않은 지표에 비하여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가의 활력이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집니다.
 
나란히 늘어선 고기잡이 배의 갑판 위에서는 [어부들]이 노동요를 흥얼거리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의 공터에는 원반을 던지며 노는 [아이들]도 보이네요.
 
잔치라도 열리고 있는 듯 소란스러운 방향을 돌아보면,
 
바닷가에 자리를 깔고 앉은 [화려하게 치장한 청년]이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에르드:(본래의 상단들이 빠졌음에도 활력이 유지되는 건…… 대부분이 다른 나라의 상단으로 대체된 건가? 어쩌면 나라가 이미 야금야금 먹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부들의 근처로 다가가본다.)
 
그물을 털어내던 어부 하나가 한숨을 쉬며 투덜거립니다.
 
어부 1: 에휴, 오늘도 허탕이구만. 집에 가면 바가지 좀 긁히겠어.
 
어부 2:그러게 상단주 님께 가서 해도를 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분이 어장 위치를 기가막히게 잡으신다니까.
 
어부 1: 끄응, 아무리 그래도 해도 값이 너무 비싸. 게다가 계절이 바뀌어 해류가 달라질 때마다 새로 사야 하잖나. 그 돈이면 우리 식구가 석 달은 먹고 산다고.
 
어부 2: 정보를 사는 대가가 비싸긴 하지만, 막상 그 위치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면 입이 떡 벌어질 걸? 치른 값의 세 배는 이득을 본다구.
 
어부 1: 정말 급전이라도 구해서 사봐야 할까봐.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리 바닷길을 잘 알지? 나도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자존심이 말이 아니야.
 
어부 2:내 말이 그 말일세. 그 재주 덕분에 이쪽 상권도 완전히 틀어 잡혀서는, 예전에 난다긴다 하던 상단들도 이름을 못 내밀잖아. 평민 출신인데도 그 유명한 상단들을 전부 밀어내다니 굉장해.
 
에르드:(기묘할 정도로 해도를 잘 아는 젊은이라. 어디 출신이지? 아까 화려하게 치장하고 술을 마시던 자가 그자인가? 소란스러운 방향으로 다가가 본다.)
 
소란을 따라가보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을 붉은 자줏빛 비단과 금 장신구로 두른 젊은이가 바닷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화려한 외모의 미인들이 둘러앉아 소리를 높여 웃고 떠들며 노래를 불러 잔치의 흥을 돋웁니다.
 
친구로 보이는 자가 그의 손에 걸쳐진 술잔을 채워주며 묻습니다.
 
상단주의 벗: 자네, 왕비에게 구혼한 사람 맞나? 볼 때마다 애인이 늘어나는 것 같아.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어?
 
시메온:아, 그래? 왜지? 배 한 번 안 아프고 귀여운 자식 턱턱 안겨주는 남편, 괜찮지 않나?
 
상단주의 벗: 와하학! 이 친구, 완전히 취했군!
 
시메온:말도 마~ 오랜만에 왕궁에 다녀왔더니, 서글퍼서 눈물이 다 나지 뭐야. 그런 게 그 유명한 황금 왕 에르드의 집이라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오늘은 적셔야겠네.
 
조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한 상단주가 잔을 비우며 시시덕거립니다.
 
상단주의 벗이 순간 상체를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춥니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야 이어지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가까운 곳에 몸을 잘 숨긴 덕에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립니다.
 
상단주의 벗: 그래, 그 구혼자와는 끝까지 함께 갈 생각인가?
 
시메온:응. 제법 쓸만하거든.
 
짧은 대답을 마친 상단주가 슬며시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입가에 검지손가락이 살짝 올라옵니다.
 
…그의 눈동자가,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성 판정(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0/25/10
굴림: 53
판정결과: 실패
(난봉꾼이나 다름없는 천박한 말들에 조용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도 찰나, 눈이 정확히 마주치자 살짝 당황한다. 해도를 읽는다더니 확실히 뛰어난 눈을 가진 건가? 아니, 그저 우연일 뿐이겠지.)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치던 그는 잔칫상 위의 닭다리 하나를 뜯어 에르드에게 건넵니다.
 
마치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낮은 위치에서 살살 까딱거리는 손짓이 모멸적입니다.
 
에르드:(발끈해서 닭다리를 든 손을 강하게 쳐냈다.) 필요없소.
 
시메온:맛있는 부위로 골랐는데. 아쉽게 됐군. (슬 웃더니 고기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자리로 돌아간다.)
 
에르드:(알아본 건가, 아닌 건가. 어느 쪽이든 불쾌하기 그지없다. 당장 자리를 떴다. 성큼성큼 걷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이 있는 공터다.)
 
에르드가 자리를 떠나려 하면, 상단주는 제 친구와 다시금 대화를 이어갑니다.
 
대화가 서서히 멀어집니다.
 
시메온:내일 [무역선]이 도착할 거야. 미리 연락을 받았는데, 녀석들이 이번에 꽤나 큰 걸 발견한 것 같아.
 
상단주의 벗: 큰 거? 나한테도 못 알려주나?
 
시메온:비밀은 상인의 가장 큰 자산이거든~
 
걸음을 재촉해 공터로 나오면 금세 아이들이 보입니다.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모여 서로에게 질 세라 원반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일 에르드가 원정을 떠나기 전 베아트리체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두었다면 꼭 저들의 또래가 되어 있었겠지요.
 
후계자라도 명확했다면 10년간 베아트리체를 괴롭혀온 문제들이 해결되었을까요?
 
아니, 오히려 베아트리체와 재혼하여 나라를 차지할 생각 뿐인 구혼자들이 그 아이를 내버려두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답을 알 수 없는 가능성일 뿐이지요.
 
한 아이가 원반을 던지는 순간, 돌풍이 불어와 그것을 멀리 날려보냅니다.
 
아이들의 탄식을 뒤로한 채 무정하게 날아가버린 원반이 바닷물에 빠집니다.
 
하필이면 배가 정박해있는 수심이 깊은 위치네요.
 
아이들이 울상을 짓자, 열 살이 조금 못 되어보이는 소년 하나가 일어섭니다.
 
어린 소년: 내가 가서 찾아올게.
 
소년은 망설임 없이 바닷물로 뛰어듭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도 소년이 올라오지 않자, 아이들은 어른을 불러오자며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소년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밉니다.
 
원반을 건네받은 아이들이 환호하며 소년을 추앙합니다.
 
아이: 어떻게 물 속에서 그렇게 오래 숨을 참아?
 
어린 소년: 물을 무서워하지 말고 몸을 맡겨봐.
 
아이: 잘 모르겠는데…. 수영도 타고나는 건가봐.
 
에르드: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소년의 말투가 아모르베루스의 억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에르드:(베아트리체의 건강이 상할까 염려하여 부러 후사를 두지 않았고 부담도 주지 않았었다. 애초 왕인 제가 젊고 강건하니 당장 후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도 했었고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 못했었지. 후계가 있었다면 베아트리체가 조금은 덜 외로웠을까 싶으면서도, 그 아이마저 구혼자들의 암투에 희생되었다면 더 괴로웠겠거니 싶어진다.)
(아이들을 가만 돌아보다가 몸을 돌린다.)
(이만 돌아가자. 그 남루한 은신처로.)
 
어느덧 밤이 늦었습니다.
 
[버려진 은신처]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복잡다난한 길을 올라 은신처를 찾아서 몸을 뉘였다. 나라의 상태를 돌아보니 심경이 한층 복잡했지만, 목표 의식은 오히려 분명해진다.)
 
지친 눈을 감습니다.
 
...
 
아침이 밝았습니다.
 
구혼자 중 몇몇이 수상한 낌새를 보였지만,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합니다.
 
앞으로도 부지런히 왕도를 돌아다니며 살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늘은 왕궁의 [후원]에서 악사와 시인들이 모여 당신을 추모하는 노래를 올린다고 했지요.
 
접경국의 왕자는 [광장]에서 베아트리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선보이겠다고 공언했고,
 
다소스의 왕과 대화하던 신관이 사라진 [기록물 보관소] 역시 둘러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항구로 돌아온 상단주의 [무역선]이 무엇을 싣고 돌아왔는지 살펴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도 도시를 둘러보다가 베아트리체와 만날 기회가 있을까요.
 
외투를 걸치고 문밖으로 나서봅시다.
 
에르드:(무엇부터 살피러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항구부터 가 보기로 한다. 무역선이 싣고 들어오는 물건들도 정세에 하나하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니, 알아두어야 한다.)
 
상단주의 소유인 [무역선]은 무수한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도 한눈에 띌 정도로 거대합니다.
 
선원들은 대부분 하선을 마친 상태인 듯, 시끌벅적한 항구 분위기에 비해 무역선 주변은 고요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을 맴도는 일꾼들이 있어 주의해야 합니다.
 
무역선 내부로 숨어들기 위해서는 [은밀행동] 혹은 [행운] 판정.
 
에르드:(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며 무역선에 들어갈 틈을 노린다.)
기준치: 49/24/9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에르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무역선에 승선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참나무로 만든 선박은 튼튼하고 무게 중심이 안정적이기에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10년 전에는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평민 상인이 이런 무역선을 거느리게 되었다니,
 
상단주의 성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네요.
 
마땅한 광원 하나 없는 내부에서 슥 훑어보기에는 단순히 거대하고 훌륭한 무역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누군가 실수로 흘리고 간 것 듯 복도를 뒹굴고 있는 [파피루스] 한 장,
 
그리고 문짝도 달리지 않은 일반 선실과 달리 큰 문으로 공간이 분리된 [고급스러운 선실] 정도입니다.
 
에르드:('녀석들'이 '큰 걸' 발견했다고 했지. 분명 평범한 물건은 아닐 텐데. 주의깊게 살피며 걷다가 파피루스를 집어들었다.)
 
주워들어서 확인해보면 짧은 서신입니다. 적힌 내용은 이러합니다.
 
암구호 같은 것인지, 에르드가 보아서는 어떤 내용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에르드:(양이 아주 귀한 건 아니니, 분명 암호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 뭘 함의하는 건지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알 수 없다. 우선 품안에 잘 숨겨두고, 고급스러운 선실의 문에 귀를 대어본다. 안에서 소리나 인기척이 들리나?)
 
귀를 대어보면 조용합니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에르드:(그럼 조심히 문을 열어본다.)
 
들어서면, 무척이나 화려한 방입니다.
 
꾸밈새를 보아 관리자급 인물이 사용하는 공간인 모양입니다.
 
히타이트에서 들여온 듯한 세련된 철검,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집트 신의 조각상,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수가 수놓인 에티오피아의 의복….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서 들여온 물건들에 눈이 돌아갈 지경입니다.
 
책상 위에는 갖가지 서류들이 늘어져 있는데, 그 위에 [무역 장부]가 무심히 던져져 있습니다.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고급스러운 천이 깔린 [침대]도 보입니다.
 
에르드:(무역 장부. 중요한 물건이다. 사람이 오기 전 서둘러 확인해야 한다.)
 
옷감, 식품, 석재, 광석, 보석, 양털…. 수입과 수출을 막론하고 다루지 않는 물품이 거의 없군요.
 
에르드의 기억이 맞다면 대부분 육로를 통해 교역하던 물건들조차 이미 상단주의 무역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 듯 보입니다.
 
가장 상식에서 벗어난 점은, 이정도 규모의 사업을 벌이면서도
 
해적에게 붙들리거나 파도에 휩쓸리며 소실된 물품이 단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장부를 팔락거리다보면 마지막 장에 이렇게 쓰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에르드:깊은 바다의 주인. (낮게 쉰 목소리로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팔로스의 왕이 남긴 유언에서도 언급되는 이. 추정컨대 그 저주로 인해 자신이 10년을 잃고 떠돌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장부에 이렇게 떡하니 적혀 있다니. 약탈이나 폭풍 등에 당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의심스럽다. 시메온, 이자에 대해선 반드시 자세한 내막을 파악해둬야겠군.)
(장부를 덮어두고 침대를 흘끗 바라봤다.)
 
올리브 나무를 깎아 만든 고급스러운 평상형 침상입니다.
 
마지막 정리를 마친 후 사용하지 않은 듯, 침대 위에 깔아둔 천과 베개는 깨끗하고 구겨짐이 없습니다.
 
침대 밑을 들여다보면, [작은 궤짝] 하나가 먼지와 함께 저 구석지에 처박혀 있습니다.
 
에르드:(평범한 물건을 숨겨두진 않았겠지. 철검으로 궤짝을 꺼내와 열어본다.)
 
: 궤짝을 열어보면 보석 장신구가 가득합니다. 황금 프레임에 갖가지 보석이 달린 화려한 브로치부터, 담수진주를 꿰어 만든 비교적 수수한 팔찌도 있습니다. 상단주가 숨겨둔 보물상자일까요? 그런 것 치고는 아주 소중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모든 장신구의 중심이 되는 보석이 하나같이 푸른색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르드:(문득, 자신이 거두었던 인장 반지를 떠올린다. 퍼뜩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같은 보석인가?)
 
손에 있는 반지와 비교해보자면, 궤짝에 있는 것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짙푸르며 아름답습니다.
 
형상은 비슷할지라 해도 말입니다.
 
에르드:(엇비슷하면서도 색은 완연히 깊고 뛰어나다. 왕이 쓰던 물건이라 더 귀한 보석을 쓴 것인가? 아니면 더 강한 힘이 담겨 있어서?)
(먼지가 쌓인 걸 보니 잘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 푸른 보석이 확실하게 보이는 팔찌 하나를 챙겨넣었다.)
(주인이 되돌아오기 전에 어서 방을 나서자.)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사람들이 방에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서둘러 몸을 숨기지 않으면 발각당할 겁니다!
 
에르드:(젠장, 늦었군. 서둘러 궤짝을 침대 밑에 밀어넣고, 그 옆으로 몸을 굴려 들어가 숨는다.)
 
침대 밑으로 몸을 숨기고 나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섭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시메온의 목소리와 그의 부하로 추정되는 낯선 음성입니다.
 
시메온:이번에도 못 찾았구나?
 
상인: 죄송합니다. 겉보기에 큰 특징이 있는 물건은 아니다보니….
 
시메온:됐어~ 이번엔 그거랑은 다른 소득이 있었으니.
 
시메온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습니다.
 
시메온:읏차, 내일은 멋진 옷을 입어야겠는걸~ 베아트리체를 위한 ‘선물'이 도착했으니 찾아가서 바쳐야지.
 
상인: 헥터 님을 거치지 않고요?
 
시메온:응, 이걸 본 베아트리체의 얼굴은 꼭 직접 보고 싶거든. 슬퍼할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할 것 같기도 하고…. 고마워 할 지도 모르지만 화를 내면서 내 뺨을 때릴 지도 모르지. 예측 불가능이라는 점이 설레잖아~
 
‘선물’이 무엇이기에 이런 대화가 나오는 걸까요.
 
예상은 가지 않지만, 그 물건을 함께 확인해야만 할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이 듭니다.
 
이후로는 한동안 상단의 운영과 관련된 대화가 이어집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슬슬 돌아가자며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습니다.
 
탱, 팔찌 하나가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집니다.
 
원을 그리며 바닥을 구르던 팔찌는 침대 바로 옆에서 기우뚱 하더니 잔떨림을 이어갑니다.
 
또르르르, 차르르…. 에르드의 눈앞으로 손이 내려옵니다.
 
긴장감에 귀가 먹먹해지며 모든 소음이 차단됩니다.
 
호흡마저 멈춘 상황에, 심장이 뛰는 소리마저도 땅을 뒤흔드는 굉음처럼 느껴집니다.
 
쿵, 쿵, 쿵….
 
…그리고, 팔찌를 주워든 시메온은 방을 떠났습니다.
 
한참만에야 몸을 숨겼던 곳에서 빠져나오면 팔다리가 온통 저릿합니다.
 
앞으로는 퇴로가 마땅찮은 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충분히 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드:(칼자루를 꾹 쥐고 있다가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짐을 확인하고서야 조용히 빠져나왔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그 좋은 눈으로 제가 숨어있단 사실은 파악하지 못한 건가? 혹은 넘어가준 것인가. 가장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 성가시다.)
(무엇보다 베아트리체에게 존칭도 붙이지 않고 멋대로 이름을 불러대는 꼴이 가장 마음에 안 든다. 저런 놈이 준비한 선물이 제대로 된 물건일 것 같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주변을 살피며 방을 나서고, 무역선도 빠져나온다.)
 
침입한 창문을 통해서 에르드 역시 하선하면, 시메온은 부둣가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시메온:…그러니까 내일, 언제라도 좋으니 베아트리체 님의 [내궁]에 방문할 수 있도록 요청 부탁해. 허가 없이 들어가면 나도 눈을 뽑아서 성벽 밖에 던져버리실 거 아냐~
 
시메온의 너스레에 주변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립니다.
 
에르드:(저런 놈이 내궁에까지 발을 들인다니, 끔찍하기 그지없군. 덮어쓴 외투 아래로 미간을 한껏 찡그리며 그들을 지나쳤다.)
(후원으로 가자.)
 
걸음을 옮겨 바다로부터 멀어집니다.
 
왕궁의 뒤편, 내궁으로 이어지는 길 사이에는 인공적으로 조경한 후원이 있습니다.
 
사면을 회랑으로 둘러친 후원은 왕궁 시설을 분리하는 주요한 기준점이자 비격식적인 교류를 위한 모임의 장소입니다.
 
본래 이렇게 아무나 다닐 수 있도록 개방해두는 곳은 아니지만, 귀빈들이 다수 오가는 상황을 고려하여 열어둔 것 같습니다.
 
시야가 막히지 않도록 널찍하게 자리잡은 [정원] 중앙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분수대가 더위를 식혀줍니다.
 
꽃나무 아래에 앉은 [음유시인]이 리라를 연주하며 서정적인 음색의 노래를 부릅니다.
 
후원에 방문한 귀빈들은 원로 귀족들과 함께 [스토아] 그늘 아래에 서서 토론을 나누고 있습니다.
 
에르드:(이번에도 거지라며 몰매 좀 맞겠군. 뻔뻔하게 정원으로 다가간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던 장소입니다.
 
중앙의 분수대 근처에는 베아트리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모리베늄. 꼭 운명처럼 두 사람의 색을 따온 것 같다며 무척이나 아낀 꽃입니다.
 
슬쩍 몇 송이를 챙겨두었다가 베아트리체와 마주쳤을 때 선물하면 기뻐할 지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정성껏 돌보고 있는지, 시든 이파리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에르드:(황금빛의 꽃잎과 연보랏빛의 잎새. 따로 쓰면 독이지만 함께 쓰면 약이 되는 꽃. 두 사람을 상징하듯 피어난 꽃 같아 식물에는 큰 관심이 없는 그도 아모리베늄은 퍽 좋아하는 편이었다. 깔끔하고 단아하게 관리된 꽃의 모습이 저를 향한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리다.)
(잎새를 손끝으로 가만 쓸어보다가 조심히 서너 송이를 꺾어들면서 음유시인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꽃잎새에 손이 닿으면.
 
평화로웠던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습니다.
 
멀리서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
 
평온한 마음으로 맑은 샘과 연결된 분수가 솟아 흐르는 소리를 듣다 보면, 갑작스레 어떤 기억이 겹쳐 떠오릅니다.
 
틀림없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탄내와 비린내가 뒤섞인 악취가 온몸으로 스며들며 기억을 깨웁니다.
 
어두운 공간으로 거침없이 내딛는 발, 어떤 그림자,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과 절규…
 
그리고 영혼마저 할퀴어낼 것 같은 비웃음.
 
그때, 당신의 횃불에 비친 것은….
 
에르드:
정신
기준치: 55/27/11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아, 또다시 엄습했던 두통이 겨우 잦아듭니다.
 
이건 정확히 언제쯤 겪었던 일인 걸까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좀처럼 정돈하기 어렵습니다.
 
에르드:(……이건, 어느 때의 기억이지?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작게 신음하며 허리를 굽혔다. 보물. 보물을 보고서,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비틀거리며 분수대에서 몇 발짝 떨어졌다. 노랫소리에 물 소리가 묻히도록.)
 
분수대에서 조금 멀어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눈을 감은 음유시인이 관악기인 아울로스로 화음을 넣는 악사 옆에서 노래를 합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잔잔하고 서글픈 선율이 후원을 가득 채웁니다.
 
음유시인: …마침내, 그 발이 이팔로스의 성벽을 넘어섰다.
 
에르드의 장례 기간이기 때문일까요, 그는 이팔로스 정벌 당시의 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음유시인: 소용돌이치는 해일조차 넘지 못했던 벽을, 피에 젖은 머리칼의 전사가 무너뜨렸네.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오르던 암초의 주인도, 태양 빛의 전차 앞에서는 하릴없구나!
 
계속해서 노래의 주연을 차지하는 이는 에르드 자신이고, 암초의 주인은 이팔로스의 왕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팔로스의 왕은 전투 도중 몇 번이고 치명상을 입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직접 그의 몸에 무기를 찔러 넣은 것만 해도 수 번입니다.
 
그러나 그는 빈사 상태로 물러서고도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전장에 나타나 당신의 병사들을 도륙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남다르게 훌륭한 의원이나 치유사를 둔 것이 아닐까 했습니다만….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고 표현될 만큼 빠르게 상처가 아물어가는 힘을, 이제는 에르드 역시 경험해 보았습니다.
 
에르드:(인장 반지에 박혀 있던 보석 때문이었구나. 말도 안 될 정도로 질기던 이팔로스 왕의 생명력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 에르드의 손에 있는 반지는 ‘죽음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고 표현될 만큼 빠르게 상처가 아물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라운드마다 체력 회복 1D6+1의 힘을 갖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음유시인은 마지막 소절을 노래합니다.
 
음유시인: 성벽을 허무는 자, 도시를 사르는 불꽃, 불멸하는 이름의 그대여.
깊은 바다의 주인께서 그대를 받아 안으시리라!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음유시가에서조차 에르드를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처리해버리네요.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팔로스의 왕이 남긴 저주가 겹치며 미묘한 불쾌감을 선사합니다.
 
시인의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가볍게 박수를 칩니다.
 
누군가가 살짝 손을 들고는 시인에게 질문을 건넵니다.
 
귀족: 이팔로스 원정과 에르드 왕의 이야기에 관련된 여러 시인들의 노래를 들어보았지만, 이런 마무리는 처음 듣는군. 어떻게 그런 시구를 떠올렸나?
 
음유시인: 아, 그게…. 선왕의 마지막이 워낙 허무하다보니 어떻게 시를 마무리할 지 고민이 깊었는데, 저를 고용하고 있는 시메온 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귀족: 오호…. 그 친구, 의외로 그런 쪽으로도 재능이 있었나보군.
 
그렇다면… 시메온에게 고용된 시인이 헥터가 불러모은 사람들 사이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라는 거군요.
 
에르드:(복잡하게도 얽혀 있군.)
(굳이 '깊은 바다의 주인'이란 문구를 넣은 것도 신경쓰인다. 외투 안에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스토아를 바라보았다.)
 
기둥이 일렬로 늘어선 회랑이 뙤약볕을 피할 그늘을 드리웁니다.
 
기둥 너머로 이어진 건물 벽면에는 그동안 에르드의 나라가 겪었던 거대한 사건들이 프레스코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건국의 순간, 내전, 괴수의 출몰, 타국의 침공….
 
가장 최근에 새겨 넣어진 이팔로스 원정대의 그림 앞을 누군가가 가리고 서 있습니다.
 
여러 사람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그 인영은 역시나 헥터입니다.
 
그는 원로 귀족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헥터:동맹국들이 필립소로 힘을 모으는 건 앞으로 우리 나라에 영향을 끼칠 명분을 얻기 위해서야. 녀석의 집안은 주변국들과 혼인이나 혈연으로 얽힌 관계가 많거든. 국혼이 끝나자마자 그 왕자와 조금이라도 얽힌 모든 나라와 가문이 파리떼처럼 달려들겠지.
‘왕이 아직 젊어 경험이 부족할 테니까, 우리가 왕을 조금 도와주겠다. 우리는 왕의 부모니까, 형제니까, 외가니까, 사돈이니까…. 적당한 자리 하나만 내어달라.’
그에게 힘을 보태는 세력의 면면을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오지. 다소스의 왕, 바실리스만 해도, 필립소의 누이와 혼인했던 적이 있지 않나?
 
원로 귀족1: 참 옳은 말씀이오. 그런 꼴이 났다간, 이 나라는 지난 10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침체기에 빠지게 될 겁니다.
 
원로 귀족2: 헥터 님께서는 아직 젊으신데도 이리 통찰력이 뛰어나시구려.
 
원로 귀족3: 상단주 시메온을 거두시며 민심까지 품어가고 계시니, 헥터 님께서 왕위를 받으시고 나면 나라는 빠르게 안정될 것입니다.
 
가만히 듣다보면 헥터의 연설에 자연스럽게 말려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법 뛰어난 언변과 분위기를 장악하는 힘을 지니고 있군요.
 
잠시 후, 그들의 대화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빠집니다.
 
헥터:[극장]에서 이팔로스 원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혼을 기리는 추모극을 올린다고 해. 아주 뛰어난 작가와 배우들이 참여했던데…. 선왕을 추모하는 기간이니만큼 원하는 이들은 한 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지.
 
에르드:(왕위를 굳이 넘겨야 한다면 당연히 타국의 젊은이보다는 국내의 유망한 이가 낫다. 하지만 그자가 시류는 잘 읽되, 베아트리체를 아끼긴커녕 교활한 야욕으로만 가득 차 있는 인간이라면? 저 귀족들은 에르드 역시 잘 아는 면면이다. 저자들이 헥터의 진실된 모습을 파악했을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씁쓸함이 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가리 벌린 짐승들에게 찢겨지기 직전인 제 나라의 신세란.)
(그들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다가 조용히 발을 뒤로해 광장으로 향했다.)
 
에르드는 눈 앞에 그들의 왕이 살아있음을 모르는 자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깁니다.
 
씁쓸함을 달래듯 활기찬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옵니다.
 
광장은 시민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장소입니다.
 
[시민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토론을 벌이는 장소이기도 하고, 정식 재판에 올리기 어려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작은 재판소가 되기도 합니다.
 
외지인들을 맞이하기 위한 숙박업과 식당 위주로 발달한 항구의 거리와 달리, 도시 내 시민들이 생필품을 거래하는 [시장]도 겸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소규모의 체육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는데….
 
마침 저쪽 [공터]에 몸을 풀며 올리브유를 바르고 있는 청년들이 보이네요.
 
에르드:(베아트리체가 과연 모습을 비출까? 전체적인 민심을 돌아보는 것도 필수겠지만 역시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다. 광장을 돌아보는 척 하면서 시민들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있는 시민을 중심으로 여럿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시민1: 자네, 이번에 다소스에 다녀왔다면서? 그쪽 분위기는 어떤가?
 
나귀 주인: 우리보다야 훨씬 나아. 요절한 전 왕비가 왕과의 금슬도 좋고 현명한 사람이었으니, 여전히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베아트리체 님과의 혼인이 성사되는 것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야.
 
시민3: 쳇. 만약 우리와 세력이 합쳐진다면 다소스에 유리한 형태이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나귀 주인: 그렇지, 뭐. 그쪽이 왕이고 이쪽은 일단 왕비의 위치니까….
 
시민3: 제멋대로 착각하게 둬. 어차피 유력한 후보는 거의 정해진 상황 아닌가?
 
시민1: 그렇긴 하지. 나는 필립소님께서 새 왕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귀 주인: 동의하네. 요즈음 상단주 시메온이 바닥을 거의 장악한 상태라, 그쪽에 줄을 대지 못한 상인들은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시민3: 미노이아과 동맹을 맺고 육로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만이 모두가 살 길이야. 시메온 녀석이 이 나라 자금줄을 다 빨아먹기 전에!
 
미노이아.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입니다.
 
접경국의 왕자 필립소의 고향국의 이름이었던가요.
 
한참 두런거리던 시민들은 인사를 나누고 흩어집니다.
 
에르드:(시메온의 독점이 만만찮은 피해를 주는 모양이군. 역시 그자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를 해야 한다.)
(시장으로 향한다. 여기가 그자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곳인가?)
 
도자기, 옷감, 곡물 가루, 장신구 등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자. 여기서 찾고 싶은 물건이 있나요, 에르드?
 
에르드:(무역선에서 보았던, 그리고 제 손에 낀 반지와 비슷한 푸른 보석이 쓰인 장신구가 세간에 퍼져 있나? 물건을 훔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펴본다)
 
에르드가 지나가면 상인들은 웬 걸인인가 하며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립니다.
 
저 끝에는 장신구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특정한 색이랄것 없이 알록달록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소지하고 있는 돈이 없으니, 뭐가 되었든 무용지물입니다.
 
시장의 한 편에서는 왁자한 [도박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에르드:(안 훔친다고. 오해하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그냥 살펴보러 온 것뿐이라고)
(시메온의 영향이 없는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경계해서야. 혀를 작게 차면서 도박판으로 다가간다. 여기에도 그 자식이 기웃대는 건 아니겠지.)
 
도박꾼들이 모여 주사위 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고조된 것을 보면 상당한 접전인 모양입니다.
 
수염을 요란하게 기른 도박꾼이 한껏 흔든 주사위들을 판 위에 흩뿌린 순간,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무엇인가가 당신에게 날아옵니다.
 
갑자기 날아온 그것은 가만히 있던 당신의 손 안으로 정확하게 안착합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육면체 주사위입니다.
 
황당하고 우스운 상황에 구경꾼들이 웃음을 쏟아내고, 도박꾼이 멋쩍게 일어서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상인: 잠깐! 주사위가 판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 역시 신의 뜻이네. 저 주사위를 무효로 돌리면 이 판은 자네의 패배야.
 
수염난 도박꾼: 아니, 아니지!! 방금 튕겨나가자마자 저 자의 손에 들어간 거 못 봤나? 그저 신께서 잠시 저 자에게 주사위를 맡기신 게야!
 
상인: 참 끈질기군…. 그럼 이렇게 하지. 저 걸인이 던진 결과가 자네의 마지막 주사위가 되는 거야. 무려 신께 자네의 주사위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니 말일세.
 
수염난 도박꾼: 윽…. 하, 알았네. 그리 하자고. 이봐, 자네! 잘 좀 부탁해. 내가 거의 다 이겨놨다고! 딱 3만 넘기면 돼.
 
자, 주사위를 굴려볼까요?
 
에르드: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나. (어깨를 으쓱하곤 판 위로 주사위를 가볍게 던졌다.)
5
 
수염난 도박꾼: 와, 와하학! 이거 보라고! 신께서 나를 응원하신다니까.
 
수염을 기른 도박꾼이 주사위 눈을 보자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어깨동무를 하며 날뛰고는 보상으로 동전 한 주먹을 챙겨줍니다.
 
재력+1.
 
에르드:(그래도 이거면 구걸은 안 해도 되겠군)
 
이제 구걸은 면했습니다.
 
이 동전으로 원하는 물건을 구매한다면, 기분도 좋아질겁니다.
 
에르드:(일단 지금으로선 딱히 필요한 게 없으니 아껴두자. 예전엔 이 정도는 쳐다도 안 볼 푼돈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돈의 가치를 되새기면서 공터로 향했다.)
 
잘그랑. 빈 주머니에서 걸음마다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공터로 향하면, 지나온 가게들을 되돌아갑니다.
 
그중 한 포목점 앞에서 중년 여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중년 여인: 요즘은 미노이아에서 들어오는 물건이 거의 없네.
 
중년 여성: 글쎄 말야, 옷감만큼은 그쪽 기술을 따라오는 곳이 없는데….
 
중년 여인: 시메온이 바다 건너의 직물들을 대량으로 들여와서 그래. 미노이아의 물건은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물량 공세에는 못 버티지.
 
중년 여성: 필립소님은 시메온을 싫어할 수밖에 없겠네. 만약 그분이 새 왕이 되시면 바로 제거당하는 거 아냐?
 
중년 여인: 글쎄. 이 거리의 반절은 시메온이 뒤를 봐주는 가게인데, 마음대로 될까….
 
어느 곳이든 사정은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에르드:(시메온이 줄을 대려는 이는 헥터인가? 밥맛들끼리 잘들 노는군.)
 
속으로 혀를 차던 에르드가 공터로 시선을 돌린 순간,
 
건장한 청년이 상대를 넘어뜨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합니다.
 
싸움이라도 난 걸까요?
 
그러나 주변에서는 말리긴 커녕 오히려 와, 하고 환호성을 쏟아냅니다.
 
코뼈가 부러진 상대가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자, 심판이 흥분한 청년을 지팡이로 쳐 물러서게 합니다.
 
이어 심판은 건장한 청년의 손을 잡고 높이 들며 그가 승자임을 공표합니다.
 
저 멀리 임시적으로 설치된 단상 위에서 박수를 치는 접경국의 왕자가 보입니다.
 
필립소:정말 멋진 경기였다! 그래도 시범 경기는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 곧 베아트리체 님께서 행차하실 테니까, 불쾌하시지 않게 흙먼지를 좀 가라앉혀둬!
 
아무래도 접경국의 왕자가 베아트리체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종합격투 경기인 ‘판크라티온’을 준비한 모양입니다.
 
다들 겉옷을 걸친 상태에, 코피가 나자마자 심판이 제지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나마 과격함을 덜어낸 약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진지하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기분전환과는 거리가 멀겠지요.
 
코피를 흘리던 사람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자신의 옷에 달린 브로치를 승리자에게 선물합니다.
 
브로치를 받은 청년은 자신의 옷에 자랑스레 그것을 달고는, 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서로 의기투합하네요.
 
만약 경기에 참여하고 싶다면 시장에 가서 교환 가능한 물건 하나쯤은 준비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르드:(판크라티온이라. 어릴 적 체력 단련을 하면서 스승이나 군인들과 엎치락뒤치락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에게는 그리 먼 시절도 아니었지만……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보니 제 과거가 떠올라 심장이 쿵쿵 거센 뜀박질을 해온다. 주머니에 넣어 둔 동전 한 닢을 쥐어보았다. 베아트리체의 앞에서 정식 경기가 열린다면, 만일 제가 참여해 괜찮은 실력을 낸다면…… 조금이나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까? 혹은 가까이에서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다시 장신구 가게로 가서 청년이 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를 찾아보았다. 연보라색의 자그마한 브로치 하나를 발견하곤 그것을 가리켜며 물었다.) 저건 얼마나 하나?
 
상인: 어라, 자네는 아까 운 억세게 좋은 그 자가 아닌가? (가르킨 브로치를 보고는 끄덕인다.) 보자, 자네 얼마나 가지고 있나. 내 싸게 줌세.
 
에르드:딱 이만큼 있네만. (도박꾼에게 받은 동전 한 주먹을 꺼내보인다)
 
상인: 어디 보자, 그럼... ... (그 중에 동전 몇 닢을 골라 쥐어가며 브로치와 바꿔 올려둔다.) 자, 이만큼만 받겠네. 자네에게는 더 받기도 미안해서 말일세.
 
에르드:고맙군. (다 가져갈 줄 알았는데 의외다. 이거면 빵을 살 정도는 되려나……)
(브로치를 챙겨서 다시 공터로 향한다. 출전한다는 의사를 표할 만한 사람이 있나)
 
에르드가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저기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말 우는 소리와 동시에 필립소의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말 위에 앉은 채 시녀와 호위를 대동한 베아트리체가 나타내자, 광장의 모두가 몸을 숙이며 인사를 올립니다.
 
필립소가 허둥지둥 달려나가 베아트리체에게 손을 뻗습니다.
 
필립소:저, 저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베아트리체 힐:...나야말로 환대에 감사드리오.
 
베아트리체는 그의 손을 잡고 사뿐히 말 위에서 내려옵니다.
 
베아트리체를 자리로 인도하는 얼굴이 귀끝까지 붉어져 있습니다.
 
어제는 그토록 당당하던 목소리가 자신감 없이 떨리며, 어디에도 두지 못한 시선이 이리저리 흐릅니다.
 
필립소:즐거운 구경거리를 마련했으니, 이쪽에 앉아서 편히 쉬면서 구경하십시오. 이건, 그, 저기, 베아트리체 님께서 좋아하시는 과일이라고 들어서….
 
베아트리체 힐:(고개만 가볍게 끄덕인다.) ...고맙소.
 
베아트리체가 자리를 잡고 앉자, 필립소가 나서 선수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필립소:자, 나와 상대할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라! 나를 이기는 자에게는 이 크시포스를 선물하겠다!
 
그렇게 외친 후 검집에서 무기를 뽑아 높이 쳐듭니다.
 
과연, 좋은 철을 두드려 만든 듯 요철 하나 없는 검날이 매끄럽게 빛납니다.
 
도박장에서 획득한 돈으로 적당한 물건을 구매했으니 에르드 역시 판크라티온 경기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베아트리체. 먼발치에서도 그 모습을 보니 판크라티온을 하는 청년들을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와 생기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가뭄에 죽어가던 식물이 비를 만난 것처럼. 정작 저를 살아가게 하는 이는 말라가고 있는데, 야속하게도.)
(비록 내 모습을 밝힐 때는 아직 오지 않았고, 베아트리체에겐 이 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의미없는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베아트리체라면, 제 움직임을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십 년이나 지나 기억이 흐릿해졌을지 몰라도 조금이나마 베아트리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무기고에서 훔쳤던 검을 꺼내쥐고는 공터의 한가운데로 발을 내디뎠다.) 내가 나서겠소.
 
에르드가 경기에 참여하려 하면 주변에서 모두 야유하며 비웃습니다.
 
베아트리체가 나서 에르드를 조롱하지 말라고 만류하면서도 연약한 걸인의 모습으로 의태한 그를 걱정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접경국의 왕자는 뛰어난 용맹을 지닌 전사인데, 그대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에르드:미노이아의 왕자께선 한낱 걸인과는 자존심이 상해 겨루실 수 없습니까? (반면 갈채처럼 쏟아지는 비웃음 속에서 홀로 진지했다.)
(그리곤 베아트리체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왕비 전하. 전하의 눈을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대는 나의 걱정을 할 것이 아니라... (걱정스레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건너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의지를 읽은 탓일지도 몰랐다. 또는 너무나 따스한 색의... ...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끄덕인다.) ...위험해진다면 얼른 손을 드시게. 바로 멈추게 할 것이니.
 
에르드에게 비친 의지를 본 필립소 역시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필립소:좋다! 걸려온 싸움은 절대 나서서 피하지 않지. 즐거운 경기가 될거야.
 
에르드:(칼을 빼든다. 검집을 내던지자 철그렁,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주변의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눈앞의 상대만이 시야를 차지한다. 걸인의 것이라기엔 예리하고 날카로운, 깊은 눈빛이 왕자를 흔들림없이 응시했다.)
 
판크라티온 경기를 시작합니다.
 
: 전투는 민첩성 순서대로 진행합니다. 또한 모든 판정은 근접전(격투)로 진행되며, 필립소는 공격을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반격합니다. 한 쪽의 체력이 1이 되는 순간 경기는 종료됩니다.
둘의 민첩이 같은 수치임으로 민첩 대항으로 순서를 정하겠습니다.
 
필립소: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에르드: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극단적으로 민첩했던 에르드, 선공입니다.
 
에르드:(제 각오를 알리기 위해 치켜든 검을 시작의 신호탄처럼 그대로 땅에 꽂아넣었다. 민첩하면서도 간결하고 묵직한 동작이었다. 땅에 박힌 칼날의 흔들림이 채 잦아들기도 전 번개처럼 필립소에게 달려들어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2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4
 
필립소:하하, 각오가 대단하군! (선명한 색의 눈에 환한 이채가 돈다. 땅에 꽂힌 칼날에 시선이 돌아가는 것도 찰나, 어느새 한치 앞으로 날아온 묵직한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내며 빈 옆구리로 주먹을 내리 꽂는다.)
비무장
기준치: 70/35/14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3
 
: 에르드가 착용한 반지의 효과가 발동되고 있습니다. 매 라운드 1d6+1의 체력이 회복됩니다.
 
체력 +7.
 
에르드 턴.
 
에르드:(옆구리에 주먹이 꽂혔지만 별로 아프지는 않다. 본래 단단한 몸을 지녀서일 수도 있겠지만, 번지던 통증이 금세 완화되어감을 느낀다. 아마 반지의 힘이겠지. 이기는 건 좋지만 반지의 힘을 빌리고 싶진 않았는데. 하필 이팔로스의 왕과 관련된 물건인 탓에 묘하게 불쾌감이 들었으나 이제 와 빼기엔 늦었다.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리며 뒷발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피해: 3
(한순간 반지에 신경이 쏠려서인가? 생각보다 힘을 싣지 못했다. 젠장!)
 
필립소:그새 힘이 빠졌나? (허리를 뒤로 젖히며 간발의 차로 피함과 동시에 중심축을 회전하듯 틀어 들어올린 뒤꿈치를 무릎께로 내려 찍는다.)
비무장
기준치: 70/35/14
굴림: 3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5
 
에르드 체력 -5
 
: 그러나 반지의 힘은 여전합니다.
 
체력 +4.
 
에르드의 턴.
 
에르드:벌써 지쳤을 리가요. (몸의 중심이 흔들렸지만, 실질적으로 들어오는 충격은 많지 않다. 정확히는 충격을 받자마자 바로 회복되는 기분. 이팔로스의 왕은 내내 이런 상태로 전투에 임했겠지.)
(바로 자세를 회복하며 이번엔 무릎으로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6
 
필립소:흔들림이라고는 없고, 꼭 바위같군. (옆구리로 들어오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목을 휘감으려 팔을 뻗는다.)
비무장
기준치: 70/35/14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2
(팔을 접어 그대로 목을 조른다.) 자, 어떻게 빠져나갈건가.
 
: 반지의 힘이 발동됩니다.
 
체력 +5.
 
에르드:(몸을 움츠렸다가 폭발적인 힘으로 목을 감은 팔을 풀어내면서 그대로 상대를 메쳤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99
판정결과: 실패
피해: 6
 
필립소:(분명 제대로 붙잡았을텐데. 이렇게 쉽게 풀어내다니. 이 사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대로 등을 맞댄 채로 굴러 자세를 바짝 낮춘 뒤, 발목을 노린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5
(그대로 발목을 걸어 넘어트린다.)
 
반지의 힘이 발동됩니다.
 
체력 +6.
 
에르드:(몸이 묵직한 소릴 내며 지면과 충돌한다. 왜소한 걸인의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라기엔 다소 이질적이다. 곧장 몸을 일으켜 거리를 벌렸다가 상체로 필립소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넘어뜨리려 했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7
(필립소의 솜씨도 나쁘지는 않다. 힘도 강하고 몸놀림도 능란해. 하지만 아직 관록이 붙으려면 멀었군.)
 
필립소:(붙잡힌 팔이 꼭 무쇠처럼 느껴진다. 분명 앙상하기만한 팔인데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거지? 힘에 눌려 흙먼지를 일으키며 넘어지면서도 주먹은 옆구리를 노린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1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6
 
: 흙먼지 속에서도 반지의 힘은 여전합니다.
 
체력 +7.
 
에르드:(이자도 만만치 않군. 반지가 없었더라면 꽤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무장
기준치: 75/37/15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6
(주먹이 그저 간지럽게만 느껴진다. 끝장을 낼 작정으로 필립소의 명치를 가격했다.)
 
필립소:(명치로 날아오는 힘을 분산시키려 두 손으로 받아낸다.)
비무장
기준치: 70/35/14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피해: 4
(생각보다 더 강하게 들어온 타격에 온몸이 울린다.) ......으윽.
 
필립소가 거친 기침을 토해내는 지금이 마무리를 할 때입니다.
 
에르드가 상대의 목과 허리를 붙들고 들어올리는 순간,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침묵합니다.
 
이어 모래밭 위로 건장한 젊은이가 나동그라집니다.
 
경기장 가장자리까지 내던져진 필립소는 이를 갈며 상체를 일으키다가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심판이 막대기를 높이 들어올리고, 가라앉았던 좌중이 환호하며 열광합니다.
 
“저 늙은 거지가 접경국의 왕자를 쓰러트렸어!”
 
“와하하! 방금 내가 뭘 본 거야?”
 
“굉장하다. 굉장해!”
 
주변 사람들은 왜소하고 비쩍 마른 걸인의 외형을 지닌 에르드가 보이는 놀라운 힘에 열광합니다.
 
필립소는 통증에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서, 다소 거친 손길로 당신에게 크시포스를 넘겨줍니다.
 
: 운철로 만든 크시포스로 대형 단도로 분류되며, 1D8+2+피해보너스의 피해치를 가집니다.
 
베아트리체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망신만 당한 것이 수치스러운 모양입니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베아트리체도 조금,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입니다.
 
에르드:(검을 받아들고는 베아트리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이 승리를 베아트리체 님께 바칩니다.
 
경기가 마무리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베아트리체가 멈춰섭니다.
 
베아트리체 힐:(베일 아래로 눈 앞의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희미한 웃음기가 여즉 남아있었다.) ... ...참으로 멋진 경기였네. ...훌륭한 선물 역시 진심으로 감사하오. ...다만, (말을 잠시 끊으며, 내밀어진 검 위로 손을 내렸다.) 이 승리는 온전히 그대의 것이지. ...검 역시 그대에게 더욱 필요해 보여서.
(조금 허리를 숙여 눈동자를 더욱 가까이서 마주 본다. 저 아득한 너머에서 그리운 것을 찾는 듯, 일렁이는 눈동자가 잠시 맞아 들었다.) … …에르드 왕께서도 판크라티온 경기를 할 때면 왼발을 축으로 움직임을 가다듬는 습관이 있으셨지. …오랜만에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어 고맙네.
 
에르드:(고개를 살짝 들어올리자 베일 너머의 연보라빛 눈동자가 시야에 훅 들어온다. 한 떨기 꽃보다도, 새벽녘 하늘보다도 아름다운 그 색채에 홀린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어지는 말에는 동요가 표정에 드러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잊지 않았구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직도…….)
(잠시 목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박자 늦게서야 겨우 가다듬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해 같은 아량에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곧 돌아갈게. 네게로 돌아갈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희미한 웃음을 갈무리하며 베아트리체가 자세를 바로합니다.
 
검은 베일이 눈 앞에서 돌아서며 멀어져 갑니다.
 
필립소는 베아트리체와 말머리를 같이 하고 왕궁으로 향합니다.
 
베아트리체가 구혼자들에게 내어준 [별궁]으로 가는 동안 마저 수작을 계속해보려는 것 같습니다.
 
“...꼭 다시 꽃이 핀 것 같지 않아?”
 
행렬의 말미에 선 시녀들의 목소리가 스쳐갑니다.
 
두 사람의 나란한 뒷모습이 꼭 에르드와 베아트리체가 시장에 내려왔던 날 같다는 수근거림이 에르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르드:(익숙한 문장이 들려온다. 아직 애수에 젖어 있던 터라 저와 베아트리체를 일컫는 줄 착각했으나, 뒤늦게 베아트리체의 곁에서 함께 걷는 청년을 가리킴을 깨달았다. 머리칼과 눈동자의 색이 닮았으니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베아트리체의 곁에 설 이는 저런 풋내기 왕자가 아니다. 야심가인 헥터도 아니다. 오로지 나여야만 한다.)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귀한 무기까지 얻었으니 귀환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셈이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리며 몸을 일으켜 자세를 추스렸다.)
 
마음을 추스르며 인파를 거슬러 나가다보면, 긴 행렬은 어느새 사라지고 주변도 조금 사그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검은 천을 온몸에 둘렀어도 당신의 눈에 띄는 여인.
 
같이 왕궁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왜 이곳에 아직 남아있는 걸까요?
 
에르드:(흥분과 애상으로 들어찼던 심신을 겨우 가라앉히던 차, 꿈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이를 발견하곤 눈이 커진다. 필립소와 돌아간 게 아니었나?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얼른 근처로 다가가본다.)
 
베아트리체 힐:(여러 색의 천을 늘어놓고서 천천히 쓸어본다.) ... ...천은 이걸로 주시게.
 
필요한 물품이 있어서 남아있는 듯 한데, 표정이 썩 좋지 않습니다.
 
에르드:(곁에 수행원들은 있나? 얼른 주변을 살폈다. 걱정이 된다.)
 
곁에는 이미 산 물품들을 가득 안고 있는 시녀 몇몇과 시녀장이 함께 있습니다.
 
에르드:(그래도 혼자는 아니라서 다행이군.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곁으로 다가갔다.) 왕비님? 왕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베아트리체 힐:... ...아, 그대는. (고개를 돌려 사람을 확인하고는 앞서려는 시녀장을 가벼운 손짓으로 물린다.)
...일이 남아 먼저 가도 좋다 일렀소. 나의 왕의 장례에 쓰일 것들은 다른 이의 손에 맡겨두고 싶지는 않아서 말일세. (순식간에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 ...이어질 국혼에도 필요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라.
(느릿하게 천 끝을 매만지던 손이 천천히 떨어트리며 몸을 돌려 완전히 마주 본다. ...어째서일까.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몹시 그리운 목소리를 닮은 것만 같아.)
 
도박판에서 딴 돈이 남아있으니 베아트리체가 좋아하는 물건을 선물해보면, 표정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르드:……그러셨군요. (그의 모든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에서 저를 향한 깊은 마음이 묻어 나온다. 지금 당신의 곁에 이렇게 살아 있는데. 지금이라도 로브를 벗어던진 채 장례식 따윈 필요 없다고,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선언하고 싶다. 밀어닥치는 충동이 마치 파도 같다. 저를 삼켜버린 것보다 더 지독한 파도.)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어도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고민하다가, 정원에서 꺾었던 아모리베늄 중 가장 생기를 머금고 있는 꽃 한 송이와 아까 산 연보라색 브로치를 건넸다. 판크라티온 경기에 참여하기 전 검집에 꽂아두어 용케 꽃잎이 멀쩡했다.) 일전 숲 속에서 발견하여 꺾어둔 꽃인데, 베아트리체 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크시포스는 저를 보아 거절하셨어도 이건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 ... (가라앉아있던 눈동자가 순간 크게 뜨였다.) ......이건. (뻗은 손의 움직임이 너무도 느려 그 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당신이 내민 것에 닿기도 전에, 손이 천천히 돌아간다. 그대로 가슴께에 두 손을 꼭 모아둔 채, 고요히 눈을 감았다.)
... ...다시 한번만. 다시 한번만, 조금 전의 행동을 반복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어서.
 
에르드:(슬픈 기억을 상기시켰을까. 거절의 의미인 줄 알고 꽃을 든 손을 물리려다가 멈칫했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다.)
이 꽃을 베아트리체 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부디 받아주시겠습니까. (원정을 나가기 전의 기억을 되살려 일부러 흡사한 말투로 되풀이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어조, 낮지만 부드러움이 섞인 음성. 달라진 건 호칭과 존대하는 어미뿐. 분명 시장 한복판인데, 마치 왕관을 쓰고 궁의 정원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베아트리체 힐:(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한참만에 뜨였다. 무수한 감정이 스쳐지나간 눈동자는 희미한 호선에 다시 조금 가려졌다. 꼭 10년 전, 그보다 더 이전으로 불안과 불행이라고는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 꽃잎이 조금이라도 상할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뒤늦게 흐른다.)
... 그대가 에르드 왕과 음성이 매우 닮아서, … … 꼭 그가 돌아와 선물을 준 것만 같았다네. … 이상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정말 고마워.
 
에르드:아닙니다. 베아트리체 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 것입니다. (진중하게 속삭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슬픔을 달래줄 수 없는 나를 부디 용서하길.)
……포기하지 마십시오, 왕비님.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말뿐. 베아트리체가 숨겨진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채준다면 좋을 텐데.)
 
베아트리체 힐:... ...그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끄덕인다. 무너지려는 순간마다 실낱같은 희망을 다시금 이어 붙이는 목소리가 이리 기꺼울 수가 없어서.) ......정말 고맙네.
 
두 사람을 한 발치 멀리서 지켜보던 시녀장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옵니다.
 
시녀장: 왕비님, 시간이 너무 지체 되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이만 돌아가세.
 
가벼운 고갯짓과 함께 말에 오른 베아트리체는 시녀들을 거스리고 혼자 남은 왕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에르드:(베아트리체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후드 자락을 고쳐 썼다. 길을 올라 신전에 딸린 기록물 보관소로 향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건물은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기록은 물론 신탁, 달과 별의 움직임,
 
군대의 행정 등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관리하는 보관소입니다.
 
주기적으로 쓸모가 있는 기록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아서 신전의 제단에 태워버리곤 합니다.
 
그만큼 일단 발을 들인다면 선별된 중요한 정보들을 훑어볼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에르드에게 중요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점일까요.
 
창을 들고 문의 양옆을 지키는 [문지기]의 경비가 삼엄합니다.
 
에르드의 기억대로라면, 저 내부는 사관, 신관, 행정병 등의 1차 관리자 혹은 그들의 대리인만이 출입 가능한 곳입니다.
 
그들 중 에르드의 핑계가 되어줄 만한 존재는 없을까요?
 
적당한 증표와 함께 심부름을 왔다고 이야기하면 문지기들이 비켜줄 지도 모릅니다.
 
에르드:(원래도 삼엄하게 지키는 곳이니 일개 거지에게 뚫리면 그게 더 문제겠지. 어떻게 뚫고 지나가야 할지 고민하다, 일전 무기고에서 주웠던 매듭을 떠올렸다. 무기고 안에 있었으니 아마 병사가 떨어뜨린 물건이겠지. 경비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며 매듭을 꺼내 보여주었다.) 고생 많으십니다. 심부름을 왔는데, 들여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르드:
매혹
기준치: 45/22/9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문지기들은 조금 미심쩍어하는 듯 하더니...
 
에르드와 눈을 마주치자 마자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기 좋도록 비켜섭니다.
 
사람 한 둘정도는 가볍게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눈동자였나봅니다.
 
무사히 들어온 보관소 내부는 약간 어둑어둑합니다.
 
기록물이 햇빛에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을 크게 내지 않은 탓입니다.
 
높은 벽 위의 손바닥만한 창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내부를 둘러보면,
 
파피루스와 점토판이 종류에 따라 가지런히 분류되어 있습니다.
 
서쪽에는 남겨둘 가치가 있는 [신탁]을 정리해 두었고,
 
남쪽에는 [행정병의 일지]가 쌓여 있습니다.
 
태워서 폐기하기 위하여 따로 모아둔 듯한 [서류더미]도 보입니다.
 
에르드:(신탁부터 살피자. 전번 신관이 기이한 예언을 했었지. 그 연장선의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디톤의 사제가 내린 신탁은 사제의 기록을 통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유황 가스에 취한 사제의 예언은 알아듣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아, 때로는 신관들의 해석이 신탁에 섞여들어가기도 합니다.
 
이 구조를 잘 아는 권력자들은 신관을 매수하여 신탁을 고의로 비틀기도 하지요.
 
특히 지나치게 명확하고 조리있는 예언이라면 신관의 입김이 들어간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며 자료를 훑어봅시다.
 
에르드:
자료조사
기준치: 50/25/10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고래 그림자가 해변을 기어오르고 있다.
 
소금물에 젖은 밭은 식물을 낼 수 없다.
 
물비린내가 나는 자는 집에 들이지 마라.
 
모호하고 알 듯 말듯한 문장들로 가득한 점토판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문장들입니다.
 
에르드:(고래 그림자, 소금물, 물비린내…… 전부 바다와 관한 예언이 아닌가? 베아트리체를 향한 구혼자들을 은유했을지도 모르겠군.)
(신탁을 몇 차례 반복해 읽고는 행정병의 일지를 펼쳐 읽었다.)
 
간단히 훑어 내려보면 이팔로스 원정 이후로는 거대한 군사적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에르드가 사라진 혼란을 틈타 침공이라도 당했다면 위험했을 텐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네요.
 
다소스, 접경국의 왕자의 고국인 미노이아, 국내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에르드:(일단 다소스부터 살펴본다.)
 
에르드:(다소스와는 여전히 우호적이었군. 이어서 미노이아도 살폈다.)
 
에르드:(미노이아의 정세는 좀 마음에 걸리는데. 남쪽 인접국들끼리 동맹이라도 형성한 건가? 기억해두고는 아모르베루스에 관한 기록으로 넘어갔다.)
 
에르드:(헥터와 베아트리체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일도 3년 전이 아니었던가? 이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이것저것 뒤적이며 둘러보는 와중, 왕궁 경비대의 3년 전의 기록이 눈에 띕니다.
 
에르드:(일지의 글자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고 내려두었다. 쓸모있는 내용을 찾아 서류 더미를 뒤졌다.)
 
자세한 정황은 알기 어렵지만, 궁 내 반란에 가까운 상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에르드:(마침 타이밍 좋게 3년 전에 관한 서류를 찾아들었다. 빠르게 읽어내려갈수록 표정이 딱딱해진다. 궁의 물자를 축내는 것만으로도 숙청할 이유는 충분하건만 반란에 가까운 소동까지 일으키다니. 분위기가 갑자기 변한 것도 신경쓰인다. 헥터가 여기에 힘을 썼던 건가?)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는 곳답게 중요해보이는 정보들이 곳곳에 섞여있습니다.
 
폐기하기로 한 저 서류더미의 자료들에서도 의외로 중요한 정보가 섞여 있을 지도 모르지요.
 
이것저것 뒤적이는 와중, 파피루스 한 장이 팔랑이며 떨어집니다.
 
베아트리체의 필체로 적힌 서신입니다.
 
에르드:(다소스의 왕비가 죽었을 때 보낸 서신인가 보군. 그런데 서신이 여기 남아있단 건, 미처 보내지 못한 건가? 왜지?)
 
의문을 가지고 편지의 말미를 보자면,
 
다소스의 왕비가 사망한 날 보낸 베아트리체가 보낸 위로 서신으로 추정됩니다.
 
에르드왕 집권 8년…. 이라면, 지금으로부터 6년쯤 전이겠군요.
 
에르드:(왜 이 편지가 남아있는 건지 모르겠군. 다소스의 왕이 다시 여기에 태우라고 두고 간 것도 아닐 텐데…… 기록용으로 한 장을 더 써둔 거라면 태울 이유가 없지 않나?)
(혹시 모르니 파피루스를 접어 제 품에 챙긴다. 또 눈에 띄는 서류는 없나?)
 
눈에 띄는 서류는 더 없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면, 보관소의 벽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귀를 기울여볼까요?
 
에르드:(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벽에 귀를 댄다.)
 
가만히 벽에 귀를 기울이면, 그 대화에 다소스의 왕의 목소리가 섞여 있습니다.
 
바실리스:…그럼, 확실히 해주는 거네.
 
신관: 예. ‘새로운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오리라’…. 적당히 끼워맞출만한 신탁이 내려졌을 때 전달하겠습니다. 상인 몇 명에게 퍼지면 여론이 되는 건 금방일 겁니다.
 
바실리스:언제나 고맙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걸세.
 
이거 설마…. 그동안 다소스의 왕이 신탁을 조작해온 건가요?
 
아무리 정치가의 신탁 조작이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그걸 남의 나라에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탁의 내용이 조금 의아합니다.
 
다소스는 북쪽에 있을 텐데, 어째서 저런 예언을 퍼트리려 하는 걸까요?
 
잠시 후, 벽 건너편의 대화는 이어집니다.
 
신관: 저, 이제 다시 뵙기 어려울 거라면…. 혹시 뭐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바실리스:말해보게.
 
신관: 어째서 본인이 아니라 미노이아의 왕자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십니까? 당신께서도 베아트리체 님께 구혼하셨지 않습니까.
 
바실리스:그건 베아트리체 님 가까이에서 구혼자들의 행패를 저지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지. 내가 어떻게 베아트리체 님과 진정으로 혼인을 하려 했겠나? 선왕에게 이팔로스 원정을 처음 제안한 자가 바로 나인데, 그 정도의 염치는 있네.
 
과연 그랬었죠.
 
전쟁의 발단은 이미 몇 해 전이었기에 반쯤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만….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던 이팔로스가 남하를 시작했을 때,
 
당신에게 연합군을 모아 이팔로스를 정벌할 것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바로 다소스의 왕이었습니다.
 
바실리스:베아트리체 님의 입장에서는 나를 볼 때마다 겨우 묻어둔 가시가 다시 눌리는 기분일 거야. 그런 나보다야 젊고 인물 좋고, 온 열정을 다해 사랑해주는 왕자가 좋지 않겠나. 필립소는 나의 옛 처남이기도 하니, 그의 마음을 응원해주고 싶은 생각도 있고….
 
다소스의 왕이 낮은 웃음을 흘리고는 떠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으니, 문지기가 수상하게 여기기 전 서둘러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드:(신탁을 조작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다소스도 아닌 아모르베루스의 신탁을! 괘씸함에 절로 핏대가 돋는다. 바다와 관련 있던 신탁들도 전부 다소스의 왕이 의도한 내용인가?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자 분노와 함께 의문이 자리를 채운다. 바실리스조차 필립소를 지지하고 있었다니. 표면이야 순수한 응원처럼 굴지만 실상은 미노이아와 다소스가 함께 아모르베루스를 삼키려는 속셈인 게 아닌가?)
(물론 헥터나 돼지처럼 욕심을 흘려대는 별볼일 없는 구혼자들과 결혼하는 것보단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게 베아트리체를 위한 일이기는 하지. 허나 타국의 신탁까지 멋대로 주무르는 행태를 결코 용서할 순 없다. 숙청할 이가 점점 더 늘어나는군. 짧은 한숨을 쉬곤 의심받기 전에 보관소를 빠져나왔다.)
 
보관소 밖으로 나서면 저 멀리 천천히 걸어가는 다소스의 왕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지난한 밤이 늦었습니다.
 
[버려진 은신처]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왕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다른 길로 돌아서 은신처로 귀환한다.)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은신처로 귀환합니다.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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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아침이 밝았습니다.
 
도시 바깥에 위치한 [아스클레피온]에 찾아가면 성 내부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단서와 마주할 지도 모릅니다.
 
구혼자들이 모여 있을 [별궁]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도 있을테고,
 
[극장]에서는 에르드의 장례 기간에 맞추어 준비된 추모극이 무대에 오른다고 했지요.
 
무엇보다 상단주가 베아트리체에게 ‘선물'을 바치기 위하여 [내궁]에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장소를 돌아보려면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습니다.
 
에르드:(구혼자들과 마주치면 살해 욕구가 끓어오를 것 같으니, 첫 장소는 우선 아스클레피온으로 하자. 간단히 채비를 마치고 로브의 후드를 덮어쓴 뒤 아스클레피온으로 향했다.)
 
부글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깁니다.
 
왕도의 남쪽,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과는 다소 떨어진 산에 위치한 의료 시설입니다.
 
의술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자 병원이기도 한 아스클레피온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된 환경에서 치료하기 위해 시외에 건축되었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완만한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샌가 건물이 가까이에 보입니다.
 
환자가 많은 시기는 아닌지, 아스클레피온의 [관리인]이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건물로 다가오는 에르드를 발견한 관리인이 먼저 말을 겁니다.
 
관리인: 치료 받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병문안인가요?
 
에르드:(뭐라고 하지. 잠깐 멈칫했다가 대충 둘러댄다.) 병문안을 왔습니다.
 
관리인: 아, 병문안이십니까. 죄송합니다만,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저쪽 목욕 시설에서 몸을 씻어내고 이 옷으로 갈아 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취약한 상태의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니 양해해주십시오.
 
건네는 옷은 질이 좋지 않고 무늬도 없는 값싼 베로 지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 낡고 더러운 암갈색 외투보다야 훨씬 깔끔한 의복이긴 하네요.
 
시외이기도 하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으니 잠시 본모습을 내보여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얼마 만에 새 옷을 입어보는지 모르겠군. 더러운 외투와 한몸처럼 살다 보니 벗는 게 꺼려지긴 했지만, 한적한 장소니 눈에 띄는 짓만 하지 않으면 일개 병문안을 온 사람의 얼굴 따윈 금방 잊어버릴지도.)
(목욕 시설에서 간만에 시원하게 몸을 닦아내고는 관리인에게 받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고작 나흘 만인데 얼굴을 드러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관리인을 너무 정면으로 마주하진 않고, 얼굴을 비스듬하게 숙인 채 물었다.) 이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욕 시설에서 허브 향기가 은은하게 밴 맑은 물로 몸을 씻어내면,
 
은은한 향과 따스한 온기가 지친 몸을 부드럽게 녹입니다.
 
이성+1.
 
관리인: 예,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손을 들어 안쪽을 가르킨다.) 병동은... 저 쪽입니다.
 
에르드:(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안쪽 건물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통하는 복도로 들어서면, 정면에서 누군가가 걸어옵니다.
 
천과 약초가 담긴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것을 보아 [간호사] 같습니다.
 
간호사: 새로 온 방문객이신가요? 이쪽으로 안내….
 
친절한 음성으로 안내하던 간호사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섭니다.
 
굳었던 얼굴은 오래지 않아 핏기 하나 없는 사색으로 질립니다.
 
간호사: …에르드 왕?
 
벌어진 턱이 경련하듯 떨립니다.
 
죽은 사람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익숙합니다.
 
틀림없이, 당신의 정예였던 장군 중 하나입니다.
 
그는 뒤를 돌아 미친듯이 도망칩니다.
 
바구니가 내팽개쳐지고 천이 사방으로 날립니다.
 
얼마나 경황이 없는지, 스스로의 다리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면서도 에르드에게서 도망치려 합니다.
 
에르드:사람 잘못 보셨…… (처음엔 부정하려다가, 그 역시 간호사의 얼굴을 알아본다. 우수했던 장군이 아닌가? 헌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도망치는 거지. 타인에게 알리기라도 하면 사달이 날 테니 재빠르게 뛰어 간호사를 쫓았다.)
(육중함에도 날래고 민첩한 몸놀림은 여전했기에 몇 걸음 만에 간호사를 따라잡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멈춰서라. 유령이라도 본 꼴이군.
 
에르드는 겁이 질린 이를 수월하게 붙잡습니다.
 
간호사 역시 누구보다 재빠른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짐작하고 있었나 봅니다.
 
에르드에게 붙잡힌 간호사는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애걸합니다.
 
간호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부디 목숨만은…!
 
당신을 따르던 장군들은 당신과 함께 실종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자가 여기에….
 
에르드:분명 장교에게 나와 더불어 정예였던 장군들이 모두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들었다.
헌데 그대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군.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고하라.
 
간호사: 그, 그것이... ... (잔뜩 겁에 질려 숙인 허리가 거의 바닥에 닿을 듯 굽었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그 간의 기억을 되짚어간다.) ...이, 이팔로스를 떠나기 전날 밤, 승전의 축배를 들던 당신께서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때 포로로 잡혔던 이팔로스의 왕족이 대담하게 나서서 왕의 장례를 요구하였는데, ... 흔쾌히 허락하실 정도로 말입니다.
....그 왕족은 보답으로 이팔로스의 보물이 숨겨진 곳으로 안내하겠다 했습니다. 그 포로는 당신들을 이끌고 궁전 안쪽 방향으로 향했고, 폐하와 다른 장군들은 모두 그를 따라나섰지요.
저는, 부상 탓에 움직이기 어려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닥에 몸을 굽히고 떨고 있던 간호사가 번뜩 고개를 들며 땅을 내리친다.) ...그들 중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왕께서 사라지시다니!
그날... 내가 다녀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수상하다고 한 마디만 했다면…! 미련하게도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목격자였던 나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올 것만 같아, 두려움에 휩싸여 진지를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수색대가 온 것을 보았지만 차마 따라가지도 못했지요. ...돌아가면 탈영죄까지 더해질 테니까.
(거칠어졌던 숨이 천천히 사그라든다.) ...당장은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두 해쯤 전, 이곳으로 들어와 일자리를 얻었지요.
 
간호사: ... 막상 그들은 각자 슬픔을 이겨내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이제 와서 그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이 곳에서 간호사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실토한 그는 제발 용서해달라고 애걸합니다.
 
그를 용서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에르드:……되었다. (저를 배신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저 겁이 나 도망쳤을 뿐이었군. 형형하게 번뜩이던 눈빛이 적요히 가라앉는다.) 그대가 이팔로스 원정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데, 고작 그 정도로 그대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오히려 그대라도 살아남아 다행이다. (붙들고 있던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고개를 들어라.
 
간호사: (그 말에 바닥에 박혀있던 고개가 들린다.) ... ... 나의 왕이시여.
 
그는 마치 신의 은총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당신을 올려봅니다.
 
간호사: ...이 자리에서 다시금 맹세합니다. 당신을 끝까지 도울 것이라. (한 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뒤 일어선다.)
 
곧이어 바구니에서 흰 천을 꺼내어 에르드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피부가 드러나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둘둘 감은 그가 당당한 얼굴로 이야기합니다.
 
간호사: 이 천으로 온몸을 가린 상태에서 저와 함께 다니시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피부병 환자 정도 되겠거니 생각할 테니까요.
 
에르드:그래, 고맙군. 그렇잖아도 아스클레피온에서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던 것 같아 정황을 확인하러 온 참이다. 3년 전 왕비의 구혼자들이 소란을 피웠다던데, 그대는 두 해 전에 왔으니 아는 바가 없겠지?
 
간호사: 그러십니까. ...그도 그렇지만, 이곳은 왕도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다 보니, 소식이 여기까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괜히 허리를 꾸벅 숙인다.)
…에르드 왕이시여. 혹시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10년 만에 귀국하셨으면서 왜 베아트리체 님께서 기다리시는 왕궁으로 가시지 않고 이런 곳을 떠돌고 계십니까.
 
에르드:이미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있다. 무리도 아니지. 허나 개돼지 같은 구혼자들이 몰려들어 궁을 제 것처럼 차지한 채 베아트리체를 괴롭히고 행패를 부리는 꼴은 용서할 수 없다. 철저한 계획을 세워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그 누구도 나의 귀환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니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그대도 가능한 도와주면 좋겠는데, 상당히 외곽이다 보니 쉽지는 않겠군.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꺼내 놓으니,
 
그동안 혼자 감당해왔던 답답함과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가시며 안정감이 몰려옵니다.
 
이성+1.
 
간호사: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꾹 쥐었다.) ...예, 부족하나마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에르드:(상상도 못한 조우였으나, 결과적으론 조력자를 얻었다. 거지 신세로 전락한 거나 다름없는 지금에선 한 명의 원군이라도 크게 위안이 되었다.) 혹시, 헥터나 시메온의 세력이 아스클레피온에 온 적은 없나?
 
간호사: 이 곳에는 보시다시피 환자들이 대부분이라 말입니다. 그 자들에게 이곳은 득 될 것이 없는 곳입니다.
 
말을 마친 간호사가 부축하듯 붙어섭니다.
 
아스클레피온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에르드:역시 그런가. (환자인 척 붙어서선 아스클레피온을 쭉 걸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회복실에는 병세가 가벼운 [환자들] 몇몇이 앉거나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전염 가능성이 있거나 증세가 심각한 환자들은 더 은밀한 장소에서 따로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지나가던 나이 든 의원 한 명이 중앙 복도로는 들어서지 못하도록 만류하네요.
 
[창고] 건물은 거처의 옆에 따로 작게 세워두었습니다.
 
에르드:(환자들을 흘끗 살펴본다.)
 
바로 근처의 산에서 채집해 온 것인지, 신선하고 탐스러운 과일과 꿀, 양젖 치즈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흰 천을 둘둘 두른 에르드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듭니다.
 
환자: 거기!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자네도 와서 들게나.
 
간호사: (속닥속닥) ...제가 받아올까요?
 
에르드:얼굴을 보여선 안 되니…… 부탁하지.
 
환자들은 흔쾌히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깊은 달콤함과 싱그러운 향기에 포만감과 함께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성 +1.
 
에르드:(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기분도 몸 상태도 한결 나아졌다.)
 
음식을 눈 깜짝할 새 해치우고 든든해진 에르드를 누군가 힐끔거립니다.
 
방금 손을 흔들던 그 환자입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부목을 대고 있는데, 천을 둘러맨 에르드를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봅니다.
 
환자: 자네도 그 병에 걸렸나? ‘따개비 병?’
 
에르드:따개비 병이 뭐지? (간호사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간호사: (마주 목소리를 낮춘다.) 요 근래 해안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피부병입니다. 엄밀히 표현하면 따개비라기보다는 비늘에 가까운 형태인데…. 주로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유행이라곤 하지만 별다른 전염성은 없는 것 같아요. 참 신기하죠. 전염병도 아닌데 인근 지역의 여러 사람들이 유사한 증세를 보이다니.
정작 발병한 환자 대부분이 비협조적인지라 연구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차입니다. 병을 고칠 생각이 없는 건지, 이 정도는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환자: 뭘 그렇게 둘이서 속닥대나? 거, 거. 도시에 피부병이 유행하지 않나. 피부에 단단한 굳은살이 생기면서 색도 이상해지고…. 피부에 뭐가 달라붙는 것처럼 거칠거칠해지니 다들 ‘따개비 병’이라고 불러.
 
에르드:비슷한 증세인 것 같아 물어보고 있었소. (건성으로 답했다.) 원인은 아무도 모르는 건가?
 
간호사: ...예, 연구가 늦춰져 아직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속닥이는 두 사람을 보며 환자는 쾌유를 응원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에르드:(깊은 바다의 주인 운운하던 이팔로스의 왕도 그렇고 신탁도 그렇고, 바다에 관한 미심쩍은 일들이 여럿 일어나는군.)
(건물을 나서서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의료 활동과 일상 생활을 위한 물건들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의원들은 중환자, 희귀병, 전염병, 다수가 연루된 사고 등에 대해서는 꼼꼼히 기록을 남겨두었습니다.
 
이곳에서 구혼자들이 난동을 부린 밤과 관련된 [3년 전의 진료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에르드:(다행히 기록을 남겨두었군. 서둘러 일지들을 넘기며 3년 전 기록을 꼼꼼히 찾아보았다.)
자료조사
기준치: 50/25/10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간호사: 관련 기록을 찾으셨습니까. (곁에서 슬쩍 서류를 곁눈질한다.) 저는 2년 전에 처음 근무를 시작해서, 그 당시의 환자들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도 종종 비슷한 상태의 구혼자들이 아스클레피온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검사를 해도 음독 증세도 보이지 않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사람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고….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지라 두통에 좋은 약초만 처방해드립니다.
 
에르드:상당히 수상하군. (이 기록에서 그나마 읽어낼 만한 수상한 점이라곤 술뿐인데. 베아트리체가 술에 이상한 약을 탔을 리는 없는데. 어쩌면 시종들 중 누군가와 결탁한 세력이 존재할 수도.)
대략 살펴본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다. 도움이 필요할 땐 연락을 취하지.
(그리곤 다시 원래의 더러운 외투를 입었다.) 이 옷에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나를 왕 아닌 평범한 걸인으로 보이게끔 만들더군. 내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그대도 각별히 주의하라.
 
간호사: (가슴 앞에 손을 얹으며 짧게 고개를 숙인다.) ...예, 명심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 건물 밖에서 관리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관리인: 아이쿠, 귀하신 분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밖으로 나와보면 필립소가 말 위에 앉은 채 관리인의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필립소:어제 판크라티온 경기를 하다가 약간 다쳤거든. 의원을 부를까 했는데, 마침 저쪽에 볼 일도 있고 해서 나왔지.
 
필립소는 손짓으로 성벽 밖의 [산간 마을]을 가리킵니다.
 
저곳은 험악한 지형과 토질 문제로 버려진 땅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자체적으로 형성된 거리입니다.
 
일단은 국경선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폐쇄적인 지리와 분위기 덕분에 관리가 닿기 어려운 지역이기도 합니다.
 
관리인: 저 마을에요? 구휼이라도 가십니까?
 
필립소:그거 말고 거기 갈 일이 뭐 있겠어. 이제 곧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텐데, 소외되는 시민이 있으면 베아트리체 님께서 슬퍼하실 거 아냐. …그냥 말이 나와서 그런데, 베아트리체 님이 오늘 아스클레피온에 물품을 직접 전달하러 오신다고 들었거든. 벌써 가셨나?
 
역시 저게 본 목적이었을까요.
 
간호사는 필립소의 입에서 베아트리체의 이름이 나오자 에르드의 눈치를 보며 어색해합니다.
 
어색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립니다.
 
다각, 다각.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약초를 실은 말 두 필을 더 이끌고 누군가 도착합니다.
 
에르드:티를 내지 마라. (간호사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될 줄이야. 하필 현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구혼자들 중 한 명과 함께라는 사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베아트리체를 만날 생각에 그 불쾌감도 차차 사라진다.)
 
간호사: ......예. (고개를 숙인다.)
 
필립소가 베아트리체와 관련된 소식이라면 가장 발빠른 말이 맞았나 봅니다.
 
발굽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검은 베일 아래로 흘러넘치는 연보랏빛 머리칼.
 
필립소는 금세 환하게 핀 얼굴로 베아트리체에게 손을 뻗습니다.
 
필립소:베, 베아트리체 님.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는 시녀들에게 눈짓하고는 그 손을 잡고 사뿐히 말에서 내린다.) ... 원인 모를 전염병이 돌고 있다 하여, 의료품을 전달하러 왔네.
그대는... ... (필립소의 등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조금 지쳐있던 얼굴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진다. 곧장 걸인의 모습을 한 사내에게 향하는 소리 없는 발걸음, 목소리에서는 반가움마저 묻어나는 듯하다.) 그대도 이곳에 있었는가. ...마침 좋은 약초를 가져왔으니 어제 경기를 하며 다친 곳에 사용하게.
(직접 품에 안고 온 약초를 가득 쥐어준다.)
 
에르드:왕비님. (사랑하는 이가 저를 곧장 알아봐주자 기쁘면서도 목이 메어 왔다. 양손으로 정중하게 약초를 받았다. 스치듯 닿는 손길이 애틋하고 갈급하기만 하다.) 직접 약초까지 전해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처는 깊지 않으나 요긴히 사용하겠습니다. (사실 반지 덕분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지만, 말은 그럴듯하게 했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다친 곳이 어떤지 묻지 못해 신경이 쓰이던 차였는데. ...이리 만나게 되어 다행이야.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떠올리면 어느새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떠오르고 천천히 흐려진다.)
 
에르드:(본래 더 행복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봄 햇살처럼 밝게 웃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저 안개 같기만 하구나.) 간밤엔 무탈하셨는지요. 무도하게 궁을 차지하는 구혼자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베아트리체 힐:(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시선이 어딘가의 허공으로 향한다. 표정이 차츰 흐려져 어느새 얼굴에는 어느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무탈하여 불행이라 해야할까. 다행이라 해야할까...) ...궁에 자주 드나들어서인가. 그대에게도 이런 소식이 들릴 정도라면.
...걱정은 고마우나, 그대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 괜찮네.
 
에르드:예. 주제넘었습니다. (짧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다만 왕비님의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침묵 끝에 문득 시선이 돌아온다. 당신은 누구기에 나의 행복만을 빌어주는가. 고작 몇 번 마주친 이가 빌어주는 제 행복이 어찌나 색바랜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하는지. ...지난 세월이 너무 길어서인가.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를 닮아서인가. 고요한 정적 속에서 눈동자만을 마주했다. 겨우 새어나온 자그마한 속삭임이 침묵을 녹였다.) ... ...그리 바라주어 고맙네. ...그 말이 무척이나 기뻐.
 
에르드:(제 모든 겉모습은 거짓이고, 망토 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황금색 눈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그 눈으로 오래도록 베아트리체를 담았다. 눈빛만으로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할 수 있다면 이런 같잖은 연극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영광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얇은 베일 너머로 동 트기 전의 태양을 닮은 환한 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찰나이나, 시간이 멈춘 듯이 오래도록.)
 
두 사람을 먼 발치에서 안절부절하며 지켜보던 필립소가 기어코 베아트리체의 곁으로 다가옵니다.
 
필립소:베아트리체 님, 환자들을 직접 보고 상황을 시찰하실거죠? 제가 돕겠습니다. 이쪽으로. (곁에 있던 간호사에게 눈짓, 손짓을 한다.)
 
곁에 있던 간호사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 베아트리체를 안내해 건물 안으로 들어섭니다.
 
필립소는 에르드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곁에 있던 관리인을 향해 투덜거립니다.
 
필립소:내가 저 거지와 같은 곳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다니. 베아트리체 님께서는 마음이 곱고 백성을 깊이 사랑하시기에 저런 거지에게도 관심을 주셨을 뿐이지. 그렇지?
 
관리인이 허리를 숙이며 따라갑니다.
 
에르드:(어리기만 한 놈. 베아트리체와 나눈 교감의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 부러 귀담아듣지 않는다. 베아트리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느리게 몸을 돌려 별궁으로 향했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했다.)
 
오래도록 남을 뒷모습을 눈에 새기며 걸음을 옮깁니다.
 
이곳은 아모르베루스에 방문한 귀빈들이 투숙하는 별궁입니다.
 
타국에 내비치는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 없는 별궁 건물은 호화롭고도 섬세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탁 트인 긴 회랑의 끝에서 [구혼자] 하나가 술에 취한 듯 바닥에 널브러져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별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햇빛이 잘 드는 [객실]은 레바논에서 들여온 백향목을 깎아 만든 문이 지키고 있습니다.
 
곧게 뻗어 풍성한 잎을 드리운 정원수가 [건물 뒤편]까지 이어지며 봄날의 싱그러운 빛을 더합니다.
 
에르드:(이자는 또 얼마나 답 없는 인간인지 보자. 구혼자 근처로 다가간다.)
 
이 답없는 구혼자는 화려한 포도넝쿨을 조각한 기둥머리를 베개 삼아 누운 채 헛소리를 중얼대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 퍼져있다니, 혼자서 얼마나 들이부은 걸까요.
 
왕궁에 방문한 손님으로서의 예의는 찾아보기 어렵네요.
 
입가로는 다 삼키지 못한 짙은 색의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에르드: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인사불성이 된 사람처럼 축 늘어진 것이 어딜 보아도 참 답이 없어보입니다.
 
그때, 지나가던 시녀가 구혼자의 어깨를 두드려 깨우며 소리를 칩니다.
 
시녀: 저기요! 방에 가서 침대에서 주무세요!
 
시녀의 호통에 조금 전까지 바닥에 누워있던 구혼자가 스르륵 일어섭니다.
 
그리고 다 풀린 눈으로 얌전히 제 방을 찾아 비틀비틀 걸어가네요.
 
에르드:(아스클레피온에서 보았던 진료 기록이 떠오른다. 만취한 이가 난동을 부렸다지. 저자도 비슷하게 취한 것 같지만 태도는 얌전한데.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구혼자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툭 말을 걸어봤다.) 이보시오.
 
구혼자: ...으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려 보면서도 착실하게 제 방을 찾아 걸어간다.)
 
에르드:그 술이 그리도 맛있소? 아주 즐기는 것 같아서.
 
구혼자: ...어어, 이 술 말이지. 끝내주지...어, 그래.
 
에르드:
심리학
기준치: 60/30/12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대화를 해보니 조금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인사불성이 된 사람 치고는 그렇게 진한 술냄새가 풍기지는 않는 다는 것이.
 
에르드:(냄새가 별로 나지 않아. 이미 만취했는데도.) 다른 술과 특별히 다른 점이라도 있소?
 
구혼자: ...다른? ...그거야... 기분이 아주 좋아지지. (휘청대면서도 목적지로 향하는 걸음만은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아주 좋은 냄새가 나. ...무척이나 기름지고... ... ...딸꾹.
 
만취해서 휘청이면서도 걸인의 모습을 한 에르드에게 꼬박꼬박 답을 해주는 태도라던가,
 
마치 '명령'처럼 떨어진 시녀의 호통에 착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자면... 확실히 이상해보이기는 합니다,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제 방에 거의 다다른 듯합니다.
 
이토록 착실하게 지시를 따르는 상태라면, 3년 전의 일을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까요?
 
답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자 역시 구혼자들 중 하나이니 말입니다.
 
에르드:(술에서 기름진 냄새가 난다고?) 그러고 보니 3년 전에 구혼자들이 크게 소란을 피웠던 때가 떠오르는군. 술이 그렇게도 맛있던가? (지나가는 이야기인 척 언급했다.)
 
구혼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맛있지, 그럼. 맛도 없는 걸 먹겠나.
 
에르드:그럼 그때는 대체 왜 그렇게들 난동을 피웠던 건가?
 
구혼자: ...난동? ...뭐야, 그 3년 전 얘기인가? (여전히 에르드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제는 게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베아트리체, 왕비가 7년이나 재혼을 거부했으니 구혼자들의 분노가 치솟을대로 치솟았지.
....어? 어차피 무결하고 정당한 계승자도 없는 판국이니, 차라리 베아트리체 님? 그래, 베아트리체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새 왕을 세우는 편이 낫다고 의견이 모였었지, ...아마.
...그런데 말이야. 그 고고한 왕비님께서 선왕의 장례 준비를 마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 기다려달라고 요구했어. ...그때에... ...헥터가 가장 먼저 알았다고 대답했고, ...결국 모두가 동의했지.
 
구혼자: (제 방문을 찾았는지 걸음이 뚝 멈춘다.) ... ... ... ...딸꾹.
 
구혼자는 에르드를 빤히 응시한 채로 방에 들어가더니 침대에 드러누워 버립니다.
 
정신은 또렷하지 않아 보임에도 그를 향해 내려진 지시는 놀라우리만치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런 모습을, 분명 어디에선가….
 
에르드:역시 반란 모의가 맞았군. (어차피 잘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숨기지도 않고 낮고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 쓰레기 같은 구혼자의 행동은 역시 어딘가 이상하다.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기시감은 뭐지?)
(지능 판정 가능할까요)
 
땡땡 (GM):(괜찬습니다 진행가보자고)
 
기억을 되짚으려는 순간, 끔찍한 통증이 에르드의 머리를 옥죕니다.
 
조각난 기억의 파편이 뇌를 긁어 상흔을 남기는 것만 같습니다.
 
에르드:으, 으윽.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뇌가 긁혀나가는 듯한 통각과 함께 지난날의 조각난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와 돌아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 아무리 승리에 취했다고 한들 이미 분배를 마친 전리품을 더 베푸는 비합리적인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명령이라도 받은 듯 알아서 움직이는 몸까지…… 대체, 대체 이건 뭐지?)
 
머리가 터질것만 같던 고통도 차츰 옅어집니다.
 
깊은 잠에 빠진 구혼자의 코골이만 고요한 복도를 울립니다.
 
에르드:(비틀거리다가 객실을 두리번거린다. 직전 떠오른 기억으로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어디 쉴 곳이라도 있나. 아니면 또 수상한 이가 보이진 않는가?)
 
길게 이어진 객실들이 보입니다.
 
방의 수준은 배정받은 자의 서열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장 눈에 띈 방.
 
왕의 방보다 못하다고 하기 어려운 이 화려한 방은 헥터에게 주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문은 단단히 잠겨 있습니다.
 
객실에 침입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고안해봐야겠습니다.
 
에르드:(헥터의 방. 반드시 살펴봐야만 한다. 우선, 문에 귀를 대고 안쪽에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주의깊게 살폈다.)
 
다행히도 문 너머는 고요합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에르드:(근처에서 버려진 쇠꼬챙이 하나를 주워와서 열쇠 대신 잠금쇠에 넣고 교묘하게 조작해본다.)
손놀림
기준치: 40/20/8
굴림: 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찰칵. 무언가 맞아 떨어지며 돌아가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큰 덩치에 맞지 않는 섬세하고 유려한 손놀림으로 잠금쇠를 쉽게 풀어냅니다.
 
객실 안으로 들어서면 중후한 가구들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꽤나 오래 사용했을 공간임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방 안은 헥터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극도로 정제된 이 공간에서 유일하다시피 균형에 맞지 않는 것은 갖가지 [서류]와 나무 조각들이 이리저리 서 있는 넓은 [탁상] 정도입니다.
 
에르드:(헥터가 돌아오기 전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서둘러 서류를 펼쳐 읽었다.)
 
서류는 주로 거래와 관련된 계약서들입니다.
 
헥터는 그동안 많은 양의 석재를 주기적으로 납품 받아온 것 같습니다.
 
솜씨 좋기로 유명한 석공을 고용하기 위한 문서도 보이고, 이팔로스 포로 출신 노예들을 사들인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어디에 새 건물이라도 지었던 걸까요?
 
에르드:(시메온이 뒤를 봐주고 있었으니, 그와 손을 잡고 뭔가를 계획하는 모양이군. 결코 나라에 도움 되는 방향은 아닐 것이다.)
(이어 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 탁상 │ 에르드가 두 팔을 넓게 벌린 것보다 더 긴 변의 탁상 위에 지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에르드의 폴리스와 그 인근의 바다와 숲까지 모두 담아낸 지도 위에는 나무 말이 여기저기 올라가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당신이 전시에 작전을 논의할 때마다 보았던 탁상 위의 풍경 그대로입니다.
 
지도 위에는 서로 다른 색의 실선이 여러 개 그어진 상태입니다.
 
휘어짐이나 각도는 서로 다르지만, 성도 북쪽에 펼쳐진 [평원] 즈음에서 하나로 모여 왕궁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네요.
 
전략 회의 시 지도에 실선을 긋는 의미는 대체적으로…. ‘군사 진격로’.
 
에르드:(전쟁을 계획하고 있는 건가. 이미 나라가 제 손아귀에 들어온 양 굴고 있군.)
(내부의 모습을 확인했으니 복도에 지나가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방을 나섰다.)
(아무 일도 없는 척 건물 뒤편으로 향한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정원수를 따라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보면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저 멀리 외진 곳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두 인영의 정체는 다소스의 왕과 언제나 베아트리체의 한 발짝 뒤를 따르던 나이 든 시녀장입니다.
 
저 두 사람이 단둘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요?
 
대화를 엿듣기 위해서는 나무 그늘 뒤에 몸을 숨기며 다가가야 합니다.
 
에르드: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25
판정결과: 실패
(이 대화를 꼭 들어야겠다. 행운 5 깎겠습니다)
 
운이 따랐습니다.
 
거센 바람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흩어진 사이 더 가까운 그늘로 숨어들 수 있었습니다.
 
바실리스:너무 늦기 전에 완전히 처분해주게.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기 전에는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해야 안전할 거야. 베아트리체 님도, 자네들도….
 
시녀장: 예. 그렇잖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염려 마십시오.
 
바실리스:밀고자는 아직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나?
 
시녀장: 송구합니다.
 
바실리스:그래…. 그럴 수도 있지. 때를 기다리세. 갯짐승은 소금을 뿌려야 땅 위로 올라오는….
 
뚝.
 
에르드의 발 아래 얇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습니다.
 
순간 다소스의 왕이 하던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허리춤의 호신용 검까지 뽑아들고 다가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위기 모면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판정으로 극복해봅시다.
 
에르드: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재빠르게 등을 돌려 뛴다. 여기서 들킬 순 없다!)
 
그가 기척이 있는 곳을 찾기도 전에 재빠르게 도망갑니다.
 
그대로 훌쩍 별궁의 담을 넘어 빠져나옵니다.
 
까딱하면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었습니다.
 
가쁜 숨을 가다듬은 후, 다음 목적지로 넘어갑시다.
 
에르드:(아슬아슬했군. 별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도망친 뒤에야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처분이며 밀고자라. 무슨 소리지? 다소스의 왕이 시녀장과 결탁하고 있다니. 대체 베아트리체가 믿을 이가 누가 있는 것인가. 주먹을 거세게 말아쥐었다.)
(한시도 낭비할 수 없다. 추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걸음을 바삐 옮깁니다.
 
산비탈을 따라 자리잡은 극장은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공간입니다.
 
소리가 모이는 각도를 계산한 치밀한 설계 덕에 무대 위의 배우들의 대사와 노래는 메아리처럼 증폭되어 관객에게 도달합니다.
 
마지막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무대의 바로 앞, 여유롭게 자리잡은 헥터가 보입니다.
 
자연적인 경사를 활용하여 설치된 관객석에는 벌써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습니다.
 
이팔로스 원정으로 가족을 잃은 자, 직접 참전했던 자,
 
그 전쟁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세대, 연합국에 속한 나라에서 찾아온 듯한 사람….
 
모두의 얼굴을 지나쳐 적당한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에르드:(직전까지 헥터의 방에서 불손한 증거들을 보고 온 참이라, 덮어쓴 후드 너머로 그를 노려보면서 구석 자리에 구겨져 앉았다.)
 
에르드가 관객석에 앉으면, 가장 먼저 무대에 나타난 배우는 남녀 한 쌍입니다.
 
다소스 고유의 패턴을 수놓은 옷을 걸친 것을 보아,
 
연합군 창설을 처음 제안한 다소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모양입니다.
 
다소스의 왕이 좌중을 돌아보며 한탄합니다.
 
“이팔로스의 군마가 끝내 우리의 국경까지 넘어서고 말았구나. 우리 다소스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창 끝을 피하기 어려우니, 어찌해야 할까?”
 
“나의 왕이여, 동맹국에 원조를 요청하십시오. 훌륭한 기병을 가진 제노이, 장인들의 솜씨가 좋은 미노이아…. 무엇보다도 아모르베루스 역시 우리와 친교를 맺고 있지 않습니까?”
 
“오, 현명한 나의 비. 그대의 말이 옳소. 홀로 맞서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을 모아 헤쳐나가야지.”
 
왕이 왕비의 손을 잡으며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어 다소스의 왕이 관객들을 향하여 호소하듯이 외칩니다.
 
“들어주게, 나의 벗 에르드여! 이팔로스가 우리를 침공해오고 있다네. 우리 다소스가 무너지면, 필히 바로 다음 제물은 자네의 고국이 될 터!”
 
마지막으로 다소스의 왕은 무대 뒤편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동맹국의 영웅들을 모아 연합군을 창설하고, 힘을 모아 이팔로스에 맞서는 걸 제안하네. 어떤가, 에르드?”
 
무대 뒤편을 가린 어두운 색의 천막에서 큰 소리로 대답이 들려옵니다.
 
“자네의 말이 옳아. 이팔로스가 삼킨 나라가 벌써 다섯이다. 지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이팔로스의 위세를 꺾어놓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가장 위험해지는 것은 다소스와 국경을 맞댄 우리다.”
 
이어서 우레와 같은 호령 소리가 야외 극장을 울립니다.
 
“연합군을 모아라! 이팔로스 원정에 뜻을 보탤 자들은 모두 나의 이름 아래에 들어와라!”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더해진 코러스가 울려 퍼집니다.
 
“모여라, 모여라. 영웅이 될 자여. 겁쟁이에게는 소리없는 죽음이 기어올 뿐.”
 
천막이 무대를 가리고, 잠시 후 다시 드러난 무대 위에는 완전무장을 한 배우가 서 있습니다.
 
주변의 다른 배우들은 비교적 가벼운 무장을 두르고 나타납니다.
 
“에르드 왕이여! 이팔로스의 무도한 군대를 불사를 용사들이 모두 모였소.”
 
“그대가 이 연합군을 불러모았으니, 부디 현명한 지휘를 내려주시오!”
 
“좋아. 첫 번째 명을 내리겠다! 가장 가벼운 배, 가장 훌륭한 말, 가장 발이 빠른 용사들을 선별하여 선두에 세워라! 적군이 성벽 뒤로 숨어들기 전, 이팔로스 왕도에 도착해야 한다.”
 
“우리는 맹주의 명을 받들겠소!”
 
역시나 가장 화려한 착장의 배우가 당신의 역할이군요.
 
연합군의 시점과 이팔로스 왕도 내부의 시점을 오가며 연극은 진행됩니다.
 
일단은 추모극이기 때문일까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배역들의 이름 사이에서 전사한 자들의 이름이 자주 밟힙니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며 양측 진영의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 둘 쓰러져 퇴장합니다.
 
마침내 최후의 결전의 날이 밝고,
 
장수 셋을 단신으로 베어넘기며 저항하던 이팔로스의 왕이 에르드의 발 앞에 쓰러집니다.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이팔로스의 왕은 다시 한 번 무기를 들어올리는 에르드를 향하여 손을 뻗습니다.
 
“에르드여! 전사들은 그대의 검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저 밖에서 울부짖는 시민들은 무기를 쥐어본 적도 없소. 자비로 그들을 품어 당신의 백성으로 거두어주시오. 그리하면 그대의 고결한 마음을 칭송하는 소리가 우리가 내려갈 지하로부터 이 땅 위까지 닿을 것이오!”
 
“좋다. 같은 자리에 앉아 서로를 이해하는 자로서, 마땅히 그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아니, 저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분명히 당신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아무리 최후의 결전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실종되었다 한들, 그날을 이런 장면으로 재현하다니요.
 
그럼에도 연극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짧은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전우의 죽음에 절규하는 청년, 이팔로스의 유민들이 오열하는 모습.
 
극 내내 애절한 엇갈림을 반복하던 이팔로스 여인과 연합군 병사의 사랑이 맺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에르드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좌중을 향하여 선언합니다.
 
“승전보를 울려라!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자. 이제 전쟁은 끝났다.”
 
에르드는 검을 내리고 돌아섭니다.
 
관객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자세 그대로,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어가 사라집니다.
 
막을 내리고, 관중들은 박수를 칩니다.
 
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하고 무대 양 옆의 횃불이 완전히 꺼지는 순간까지 박수는 그치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환호 속.
 
주변의 반응을 둘러보다 보면, 에르드는 문득 무대 뒤편에서 빠져나가는 그림자들을 발견합니다.
 
공연을 마친 배우들일까요?
 
한 무리의 그림자가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왕가의 묘지] 방향입니다.
 
에르드:(고위급 장군들이 대부분 실종되었다지만, 아스클레피온의 장수처럼 마지막을 목격한 생존자가 분명 있을 텐데 이토록 진실과 다른 유언을 대사로 쓰다니. 극본을 쓴 이가 누구지? 유명한 작가와 배우가 참여했다고 한 것 같은데, 여기에도 구혼자의 입김이 들어간 건가. 본래도 여유롭게 극이나 구경할 마음은 없었지만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박수를 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의 눈에 괜히 띄지 않기 위해 건성으로 손을 몇 번 맞부딪힐 뿐이었다. 그때 뒤편에서 빠져나가는 이들이 눈에 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묘지 방향으로 가는 거지? 석연치 않다.)
 
극장의 인파에 치여 나아가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무리의 인영은 한참 멀어져 있습니다.
 
극장에서 나오다 보면 여러 사람들의 평가가 들립니다.
 
전사한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짓는 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용맹했던 전우를 광대 같은 인물로 그려냈다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팔로스보다 다른 연합국의 이야기를 더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외국인도 보이고,
 
사랑하는 연인이 살아남아 다행이라고 눈물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성이 잔뜩 난 얼굴로….
 
“이런 엉터리 연극 같으니!”
 
다소스 특유의 무늬가 들어간 외투를 걸친 여행객 하나가 분노를 토로합니다.
 
일행인 듯한 사람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진정시킵니다.
 
일행: 이봐, 친구. 무엇에 그리 화가 난 건가?
 
다소스 여행객: 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이지 뭐겠어! 우리 왕께서 처음 연합을 제안하신 것은 사실이나, 당시에는 이 나라도 이미 이팔로스와 수 차례 충돌하지 않았나!
 
다소스에서 온 여행객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립니다.
 
다소스 여행객: 이팔로스는 육로와 해로로 나란히 진군하여 두 나라를 동시에 건드려대고 있었어. 이 나라도 분명 선박이 나포되고 해안가가 습격당했다고 들었네. 다소스만을 노리던 침공에 원군을 요청한 것이 아니란 말이네!
 
…생각해보면, 저 사람의 말이 각본보다 더 사실에 부합합니다.
 
당시 연합국은 각자의 나라에 닥치게 될 위기와,
 
연합이라는 미명 아래에 나누게 될 이익을 감안하여 모인 집단이었습니다.
 
에르드가 이팔로스 원정이라는 승부수를 던진 것도 이미 국경에서의 충돌이 시작되었던 상황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 연극은 대사의 생략과 연출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진실을 가려놓았네요.
 
이것이 고의라면 각본 전체에 모종의 설계가 들어간 것이 분명합니다.
 
극장의 출입구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무리를 토해냅니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무대 바로 앞의 관객석에 앉아있었던 헥터입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헥터가 갑작스레 입을 엽니다.
 
헥터:자네는 어땠지?
 
돌아보면, 헥터의 두 눈이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헥터:요즈음 밖에서 자주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본래 온종일 궁 주변을 돌며 구걸만 했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와서 관람할 정도면 연극을 많이 기대한 것 같아서.
 
에르드:(내가 그렇게 눈에 띄었나? 한때나마 좋게 보았던 것이 아까워지는 인간과 이런 식으로 독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늙수그레한 척 허리를 굽혔다.) 사람들이 많이 향하고 있기에 궁금하여 발을 들였을 뿐입니다.
훌륭한 연극이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진 않사오나, 사실과 조금 다른 부분도 있던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는 대답도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말을 끊어지면, 그제야 그는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 그대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깁니다.
 
그가 당신의 옆으로 지나쳐갑니다.
 
헥터:..그런데 말이야. 자네 눈이 원래 그런 색이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경계심이, 피부를 따갑게 찔러오는 것 같습니다.
 
헥터의 흐트러짐 없는 뒷모습은 천천히 멀어져 갑니다.
 
에르드:(쓸데없이 예리한 놈. 다음엔 눈에 띄지 않도록 기척을 최대한 죽여야겠군.)
(인파 틈에 적당히 끼어 있다가 내궁으로 향했다.)
 
내궁으로 향합니다.
 
왕궁과 정원을 넘어서면 왕비와 궁 내의 여인들이 거처하는 내궁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에르드에게는 본래 베아트리체를 찾을 때마다 방문했던 곳이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지만….
 
허가받지 않고 내궁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높은 수위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 도시에 돌아오자마자 목격했던 그 죄수처럼 말입니다.
 
건물 내외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하는 환관과 시녀들의 시선을 피하여 이동해야 합니다.
 
: 내궁에서는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은밀행동 판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에르드에게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만일을 위해 궁궐 곳곳에 숨겨 놓은 비밀 공간을 찾아 몸을 숨겨가며 조사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에르드:(저에겐 무척 익숙한 곳이지만, 거지로 위장한 지금은 이전처럼 대놓고 활보했다간 사단이 나겠지. 비밀 공간을 통해서 오가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아직 남아 있을까. 기억을 되새겨 본다.)
(지능 판정 될까요)
 
땡땡 (GM):(가능합니다~!)
 
에르드: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기억을 되짚어 보니 금세 적절한 장소들이 떠오릅니다.
 
빈 기둥, 대들보 위의 공간, 벽 뒤에 숨겨진 복도... 에르드의 큰 덩치도 숨길 수 있을만한 곳들이 꽤 있었습니다.
 
: 적절한 위치를 지정하여 몸을 숨기면 은밀행동 판정에 추가 다이스 2개가 부여됩니다.
 
에르드:(차분하게 비밀 공간의 위치를 되짚어보고는, 시녀와 환관이 가장 적게 오가는 틈을 타서 재빠르게 커다란 기둥 뒤로 뛰어들어간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54, 10, 75
+2: 어려운 성공
+1: 어려운 성공
0: 실패
-1: 실패
-2: 실패
 
기둥 뒤로 숨자, 바삐 걸음을 옮기는 시녀들이 바로 곁으로 스쳐지나갑니다.
 
겨우 내궁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팔로스 원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돌아온 내궁은 이전의 단아한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곳 역시 화려한 장식들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살피는 주인이 머무르는 공간인 덕분인지 왕궁보다는 허전한 느낌이 덜하네요.
 
성스러운 산, 올림포스의 여주인을 조각한 신상이 내궁에 들어서는 길목을 지키며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복도에는 [시녀들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궁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장소는 역시 이 궁궐의 주인인 [베아트리체의 방]이겠지요.
 
에르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베아트리체가 실질적인 왕으로서 일해온 만큼, [베아트리체의 집무실]도 둘러보고 올 수 있다면 좋겠네요.
 
에르드:(복도 뒤쪽의 빈 공간으로 조용히 몸을 낮추고 숨어들어, 시녀들이 쓰는 공간으로 향했다. 시녀장이 다소스의 왕과 결탁을 한 듯했으니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81, 84, 9
+2: 어려운 성공
+1: 실패
0: 실패
-1: 실패
-2: 실패
 
소리를 죽여, 궁인들에게 띄지 않고 적절히 잘 숨어들었습니다.
 
내궁에서 가장 외부와 가까운 이 공간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오가며 일을 해야하는 시녀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주어집니다.
 
그동안 궁에서 부리는 인력의 수도 많이 줄였는지, 예전이라면 가벼운 웃음소리와 수다가 들려왔을만한 거리에서도 조용하네요.
 
그때, 갑작스레 큰 소리가 들립니다.
 
“너, 지금 대체 어딜 다녀오는 거니?!”
 
구석진 벽에 몸을 숨기고 살짝 엿보면, 붉은 머리를 틀어올린 시녀가 어린 시녀를 혼내고 있습니다.
 
첫날 에르드와 부딪혔던 어린 시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쩔쩔매며 더듬더듬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어린 시녀: 수, 숙성 시켜둔, 포도주 항아리를 찾으러….
 
붉은머리 시녀: 거기를 어떻게 너 혼자 다녀왔다는 거야? 그 숲에 맹수가 얼마나 많은데! 솔직히 말해보렴. 거짓말하다가 들키면 더 혼나는 거, 알지?
 
어린 시녀: 언니…. 저, 정말 죄송해요. 사실은 평원의 양치기를 만나러 갔어요….
 
붉은머리 시녀: 뭐라고? 아이고, 머리야…. 너는 규율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겠구나.
 
이후로는 어린 시녀의 행동에 대한 매서운 꾸지람이 이어집니다.
 
에르드:(양치기라…… 연애 같은 건가? 그보단 좀 더 유용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만. 약간 김이 샜다.)
(좀 더 머물러본다. 더 들려오는 얘기는 없나?)
 
붉은 머리 시녀의 목소리가 한참 이어지더니 기어이 어린 시녀의 훌쩍임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울면서 뛰쳐나오면 큰일이겠죠.
 
들키기 전에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르드:(쯧…… 이런 어리바리한 시녀들이 있어서 베아트리체만 힘들겠군. 그렇잖아도 수도 줄어들었던데.)
(내적 한숨을 쉬고 뒤쪽 복도로 빠져나와 조심히 베아트리체의 방으로 향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당당히 걸어갔던 길을 이렇게 도적처럼 다시 밟게 될 줄이야.)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61, 2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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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무사히 인적이 드문 복도에 몸을 잘 숨겨 들었습니다.
 
마치 침입자라도 된 듯 숨소리마저 죽여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 걸리지만.
 
어느덧 시야에 베아트리체의 방이 들어옵니다.
 
내궁에서 가장 크게 변한 곳은 다름 아닌 베아트리체의 방인 것 같습니다.
 
화려한 무늬를 짜넣은 천을 벽에 드리우고, 언제나 은은한 꽃과 향유의 향기가 배어나던 방은 황량할 정도로 수수해졌습니다.
 
이전에 에르드가 선물했던 사치품들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보면 사용하지 않고 버려두는 건 아닌데….
 
방 안의 풍경은 그간 베아트리체가 왕이 없는 왕비로서 보냈던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둘러볼 것도 찾기 어려운 방의 한쪽 탁자 위에는 [나무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에르드:(가만히 방을 둘러보았다. 꼭 그 사람처럼 단정하면서도 화사하고 은은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봄꽃 같던 향기는 사그라들었고, 놓인 물건도 별로 없어 이것이 정녕 왕비의 방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저를 잃은 베아트리체의 심경이 그대로 녹아든 것만 같다. 시녀들에게 들키기 전 민첩하게 살피고 나와야 함을 아는데도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벽지를 손끝으로 느리게 쓸어보다가 마침내 발을 내딛어 탁자 위의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았다.)
 
먼저 열어본 상자에는 시신에게 입히는 수의가 들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짜내었다가 다시 풀어내기를 반복했는지, 가닥마다 실이 꼬였다가 풀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바로 옆의 상자에는 신부를 위한 화려한 옷과 면사포가 보입니다.
 
베아트리체가 당신과의 혼례를 치렀던 날, 단 한 번 걸쳤던 그 아름다운 옷은 여전히 빛이 바라지 않은 채입니다.
 
에르드:(극렬히 대비되는 두 가지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 수의를 몇 번이고 지었다 풀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끌었다지. 지혜에 탄복하기 앞서서, 수의를 직접 지어야만 했던 베아트리체의 참담했을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이내 상자를 닫고 몸을 돌렸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지만, 자신이 수의를 입을 때가 지금은 아닐 것이다. 이 사실을 어서 전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집무실은 특히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공간이니, 대들보 위로 올라가서 주의깊게 주변을 살피다가 사람이 없을 때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5, 95,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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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들보를 타고 베아트리체의 집무실로 이동하면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틈새로 방 안을 엿보면, 베아트리체가 시녀장과 환관장을 불러놓고 명을 내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오랫동안 왕의 업무를 처리해온 공간이기 때문인지 집무실의 풍경은 베아트리체의 방보다도 훨씬 더 장중한 품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 ...그동안 구혼자들의 시중을 감당하느라 모두 수고가 많았네. 궁에서 일하는 자 모두에게 새 옷을 한 벌씩 마련할 급료를 나누어 주게.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베아트리체의 명을 받듭니다.
 
베아트리체는 이어 무거운 목소리로 강조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또, 사흘 후에 있을 국혼의 준비는… 새벽 중으로 마쳐주게. 해가 뜨기 전에는 모두 각자의 집이나 마을로 내려가서 며칠 쉬라고 명하고. … ...궁 안에는 단 한 사람도 남아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시녀장: 예?
 
환관장: 하지만, 가장 일손이 필요할 날이 바로….
 
베아트리체 힐:…그만. 이제는 그대들도 나를 괄시하려드는가. 다시 한 번 말하겠네. … …아침이 밝기 전까지, 왕궁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떠나라고 명하게.
 
단호한 명령을 마치고 나면 베아트리체는 두 사람을 자리에서 물러가게 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을 하던 베아트리체는 서류 위에 무언가를 길게 적어내리고,
 
그 끝에 에르드가 맡기고 간 인장을 찍습니다.
 
에르드:(국혼 날에 왕궁을 텅 비우다니. 무슨 생각이지?)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흘 후 왕궁의 경비를 최대한 강화하고, 병사들을 중무장시킬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서류입니다.
 
친서를 갈무리하며 밀랍으로 봉인하는 내내 흔들림 없이 굳은 눈빛은 마치 혼인이 아니라 전쟁을 준비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네요.
 
에르드: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베아트리체의 구혼자 대부분은 상당한 세력을 업고 있습니다.
 
새 왕을 고르고 나면 거절 당한 자들의 반발로 궁궐 내에서 소요가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베아트리체가 친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문 밖에서 시녀장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시녀장: 왕비님, 아래에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방문을 허가하셨던 상단주 시메온입니다.
 
베아트리체 힐:... 지금 가겠네.
 
베아트리체는 베일을 머리에 쓰고 집무실 밖으로 나섭니다.
 
에르드:(국혼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고, 이후의 소요를 대비한 건가. 현명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본래 베아트리체가 강한 사람이라는 건 잘 알지만, 재회하지 못한 10년 사이에 유독 마르고 어두워 보여서 몇 배로 걱정이 된다.)
(우선은 시메온의 선물이 무엇인지도 봐야겠지. 소리없이 대들보를 내려와 다시 복도 뒤의 비밀 공간으로 몸을 숨겨가며 베아트리체를 따랐다.)
 
시메온이 베아트리체에게 ‘선물'을 건넬 장소는 응접실이겠지요.
 
응접실로 이어지는 벽 뒤 공간을 타고 이동하면, 짜맞추어진 벽돌 가장자리의 틈새로 베아트리체가 상단주를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메온:이야, 정말로 내궁 방문을 허락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편히 앉아 쉬도록 하시오.
 
시메온:왕비님께서는 참 상냥하시기도 하지~. 이러니 백 명이나 되는 구혼자들이 몰려들어서는, 당신의 시선이라도 한 번 받아보려 안달인 거군요.
 
시메온은 베아트리체의 손을 잡아 끌어 손끝에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상 위에 놓인 복숭아 하나를 높이 던졌다가 받으며 깨물어 먹습니다.
 
앉으라는 제안에도 응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어슬렁거리는 태도가 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의 무례함에 베아트리체의 낯이 한결 더 지쳐보입니다.
 
시메온:(한입 베어 문 복숭아를 가볍게 손안에서 굴린다.) 그동안 제가 바쳐온 패물은 열어보시지도 않으신 게지요? 베아트리체 님께는 이리 칙칙한 검은 베일보다는 황금 면류관과 진주를 꿴 목걸이가 더욱 잘 어울릴 텐데. 옷은 금색 수를 놓은 붉은 천으로 꾸며야 새 왕의 앞에서도 어여쁘게 보일….
 
베아트리체 힐:… ...그대, 왕의 상을 치르고 있는 비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목적이 있어 방문했다면, 그 이야기부터 제대로 하게.
 
시메온:아하하, 실례했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시오. (가볍게 까닥인다.) 저는 높으신 분들의 예의범절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장사치니까요. 하지만 오늘 바칠 선물은 당신께도 틀림없이 의미가 있을 겁니다.
 
상단주가 턱짓을 하자, 한 발짝 물러서서 궤짝을 들고 있던 종들이 앞으로 나섭니다.
 
저것이 상단주가 언급한 ‘선물’인가봅니다.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궤짝이 방 한가운데에 내려앉습니다.
 
천천히 궤짝이 열리고, 불빛 아래에 드러난 내부를 내려다보던 베아트리체의 눈이 한순간에 커집니다.
 
그 명백한 동요가 즐거운 듯 시메온이 빙글거립니다.
 
베아트리체 힐:..이건... …. 이걸, 어떻게….
 
시메온:옛 이팔로스 앞바다를 지나가던 제 부하들이 발견하여 가져왔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요.
 
…소금물에 닿아 심각하게 부식되었음에도 또렷하게 드러난 화려한 문양.
 
전쟁 도중 적의 무기에 스치며 생겼던 상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비단의 잔해.
 
당신의 물건이기에 곧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바닷속 폭풍에 휘말렸을 때, 당신의 몸을 보호하다가 부서져 나갔던 바로 그 갑옷이 분명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동요하듯 속절없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빛 바랜듯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게 물들었다. 마른 입술에서는 더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으며, 소리없는 걸음만 궤짝에 가까워진다.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는 애틋한 증거에.)
(지난 10년은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그가 탄 선박이 풍랑에 휩쓸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럼에도 그는 강한 사람이니, 어떻게든 제가 기다리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우습게도 언젠가 그런 생각도 했었지.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시신도 수습된 전사자들이 더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 ... (오직 그의 갑옷과 자신만 있다는 듯, 눈 앞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잘게 떨리는 손이 형체를 잃어가는 갑옷을 조심스레 쓰담는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처럼. 그리움, 원망, 사랑...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들이 한차례 스쳐가고 흰 낯에는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미소만 짧게 흩어졌다.)
 
베아트리체는 무릎을 꿇고 바닷물에 부식된 갑옷을 꺼내어 안은 채 고개를 숙입니다.
 
베아트리체의 떨림을 따라 붉게 변색된 갑옷이 흔들립니다.
 
에르드: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에르드는 가슴받이 안쪽에서 희미한 문양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눈치챌 수 있을 뿐,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멉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필 기회를 얻기도 전, 베아트리체가 떨리는 손으로 갑옷을 다시 상자에 넣습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스라질 것만 같은 조각을 다루는 손길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하던 베아트리체는 시녀장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킵니다.
 
에르드:(이 며칠간 베아트리체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꾸준히 말해 왔다. 미천한 거지의 말이 진지하게 닿지는 않았겠지만, 시메온이 가져온 갑옷으로 인해 이 순간 제 미약한 부탁마저 무참히 깨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제가 베아트리체였어도 저걸 보았더라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겠지. 새삼스럽게도 시메온이 더 악질처럼 느껴진다. 겉으론 선물이라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잔존하던 미약한 생존 가능성마저 꺾어 버리려는 목적이 아닌가? 지금 당장 나서서 그를 후려갈길 수 없는 게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베아트리체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내일, [화장터]에서 에르드 왕의 인형을 태울 때…. 이 갑옷도 수의 위에 입혀야겠어. ..자네의 선물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네.
 
베아트리체는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태도의 시메온을 직접 배웅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출입구로 몰리는 틈을 타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다.
 
에르드:(저런 작자를 직접 배웅까지 해줘야 한다니. 베아트리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옮겨 뒷문을 통해 내궁을 나섰다.)
 
이 참담한 기분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뒷문으로 나서 비밀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도중, 옷을 짓는 침방을 지나치게 됩니다.
 
그때, 너머로 끼익. 미약한 문소리가 들립니다.
 
통로의 이음매에 난 틈새를 들여다보면, 베틀에 앉아있는 베아트리체가 작게 보입니다.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베틀 앞에서 북을 몇 번 움직여보던 베아트리체는 한숨을 쉬며 허공을 올려봅니다.
 
위태로워보일 정도로 피로에 지친 얼굴입니다.
 
베아트리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남몰래 중얼거립니다.
 
베아트리체 힐:... ... ...당신이 내가 입혀준 갑옷을 입고 돌아오길 바랐는데.
 
그 목소리는 끊어질 듯 미약하나, 애끓는 속만은 고스란히 드러내어······.
 
한 차례 마른 세수를 한 후 다시 왕의 대리인다운 위엄을 되찾고 방 밖으로 나섭니다.
 
침방에는 다시금 고요만 남습니다.
 
에르드:(여기 살아 있다고, 갑옷은 잃었어도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왔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역시 이번에도 속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한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를 보며 웃을 수도, 껴안을 수도 없으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쓸쓸하게 내궁을 나섰다.)
 
적적한 걸음으로, 오늘만큼은 혼자서 내궁을 돌아 나옵니다.
 
어느덧 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마저 외로워 보이는 밤입니다.
 
[버려진 은신처]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 있습니다.
 
에르드:(내일은 화장인가. 마찬가지로 힘겨운 날이 되겠군. 조용히 은신처로 돌아가 무거운 몸을 뉘였다.)
 
곁에는 한 줌 온기조차 없이, 홀로 잠에 듭니다.
 
.
 
.
 
.
 
아침이 밝았습니다.
 
당신의 장례가 마무리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베아트리체는 [화장터]에서 당신을 대신할 인형을 태워보낼 것입니다.
 
필립소가 언급한 덕분에 그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도성 밖의 [산간 마을]에 대해서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걸음한 [왕가의 묘지]에서도 무언가의 실마리가 보일 만 합니다.
 
어째서 헥터가 북쪽 성벽 밖의 [평원]위에 불길한 표식을 남겨두었던 것인지 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아야겠지요.
 
서서히 시간이 목을 붙들고 짓누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불안감과 무력감을 잠재우는 방법은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것 뿐입니다.
 
에르드:(어디부터 가야 마음이 덜 심란할까. 잠시 고민하다 화장터로 향한다. 그 뒤에 산간 마을에 가면서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좀 나아지겠지.)
 
바삐 걸음을 옮기면 어느새 화장터에 다다릅니다.
 
화장 의식을 치르기 위한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쌓아올려져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얼핏 건물이라 착각할 정도로 높은 장작더미는, 오늘 밤이 새도록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를 것입니다.
 
당신을 닮은 형상으로 조각된 [나무인형]은 장작더미에 올라가기 전 마지막 단장을 받고 있습니다.
 
귀족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 [조문객]들이 나무인형 위에 꽃을 던지거나 짧은 기도를 올린 후 물러섭니다.
 
에르드:(장작더미를 바라본다. 살아있는 나를 화장하는 곳이라니, 정말 기분이 묘하군.)
 
병사들 몇 명이 쩔쩔매며 장작더미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이미 화장 준비는 모두 마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연신 장작더미 주위를 빙빙 돌며 하늘을 바라보네요.
 
병사: 높은 곳은 위험합니다! 이제 내려오십시오, 왕비님.
 
병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면 높게 쌓은 나무 위에 선 베아트리체가 보입니다.
 
저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에르드:(왜 저기 올라가 있는 거지?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뚫고 나아갈 뻔했다.)
 
에르드를 대신하듯 병사는 다시 한 번 간절한 목소리를 내어봅니다.
 
병사: 발이라도 헛디디시면 큰일이 납니다..!
 
베아트리체 힐:...나의 왕께서 잠드실 자리를 봐드리는 것 뿐이니. 더는 방해하지 말거라.
 
단호한 대답과 함께 베아트리체는 품에 안고 있던 천을 펼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정성스레 짜낸 것인지, 장작더미의 윗면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거대한 천이 정교한 무늬로 가득합니다.
 
천의 끄트머리를 타고 오르는 듯한 풀줄기, 그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꽃, 꽃잎, 잎사귀.
 
에르드의 눈동자를 닮았다며 베아트리체가 좋아하던 황매화도,
 
베아트리체의 머리칼을 닮았다며 에르드가 아끼던 아가판서스도,
 
거대한 천 위에서 아름답고도 정교하게 어우러집니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었던 둘의 사랑을 증명하듯이.
 
베아트리체는 손수 장작 위에 그 천을 깔고,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꼼꼼히 펴낸 후에야 사다리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가 사다리의 중간 즈음까지 내려왔을 때, 갑자기 불길한 소리가 들립니다.
 
끼익, 드드득…
 
덜컥.
 
병사: 와, 왕비님!!
 
사다리를 고정했던 받침돌이 밀려나며, 베아트리체의 몸이 크게 흔들립니다.
 
에르드:안 돼. (받침돌이 밀려나는 걸 발견한 순간 남의 시선이나 위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뛰쳐나가 베아트리체를 받쳐안으려 두 팔을 벌렸다.)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에르드의 두 팔이 베아트리체를 아주 가볍게 받아냅니다.
 
무척 오랜만에 베아트리체를 품에 안습니다.
 
떨리는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놀란 심장은 마치 오래도록 그려온 이를 마주한 사람처럼 빠르게 뛰어옵니다.
 
쿵, 쿵….
 
부리나케 달려온 시녀장이 베아트리체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킵니다.
 
시녀장은 경황이 없는 베아트리체를 뫼시며 한 발 늦게 달려온 병사들에게 크게 화를 냅니다.
 
시녀장: 네 이놈들, 사다리를 받쳐 놓으려면 더 무겁고 든든한 돌로 해뒀어야 할 것 아니냐! 귀하신 분께서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어쩌려 그랬나! 하다못해 한 놈이라도 아래에서 붙잡고 있어야-....
 
베아트리체 힐:…진정하게. 이번에는 내가 고집을 부린 것이니, 저들을 혼낼 문제가 아니야. 그런 것보다…. (천천히 에르드 쪽을 보며 돌아선다.) …자네, 괜찮은가?
 
에르드:(그를 받쳐안던 찰나가 슬로우모션처럼 길게 지나간다. 흩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 팔을 스치는 베일, 맞닿는 옷감과 살결의 감촉…… 출정을 나가기 이전보다 확연히 가벼워진 무게. 품에 더 강하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왕비님이 다치실까 무례하게 나섰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내가 감사를 표해야 할 일이지.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다친 곳은 없는지 낯이며 곳곳에 시선이 닿는다.) ...매번 그대의 도움을 받는 것 같군. ...고맙네.
 
에르드:아모르베루스의 국민으로서 왕비님을 지키고 보필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쪼록 몸조심하십시오, 왕비님.
 
베아트리체 힐:(당신의 목소리가 끝을 맺을 때까지, 응시하던 시선이 조금 휘어졌다. 희미한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곧 시녀장이 베아트리체를 모시고 물러납니다.
 
에르드:(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다시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자연스럽게 나무인형에 시선을 던졌다.)
 
당신과 닮은 형상으로 조각된 나무 인형이 한 쪽에 뉘여져 있습니다.
 
어젯밤 시메온이 베아트리체에게 건넨 당신의 [갑옷]을 걸치고, 당신이 사용하던 무기들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꽃을 바치는 조문객들의 줄에 합류하면 이 인파 속에서도 잠시나마 가까이에 가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장작을 봤을 때도 그렇지만 기분이 정말 묘하다. 하지만 시메온이 바다 속에서 건져 왔다는 갑옷도 살펴볼 겸, 조문객 틈에 껴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다.)
 
인형에 꽃을 바치는 척을 하며, 어젯밤 신경이 쓰였던 흠집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입니다.
 
위치는 틀림없이 심장을 보호하는 가슴받이 안쪽이었죠.
 
에르드:
기준치: 44/22/8
굴림: 75
판정결과: 실패
 
조문객 사이에 끼어 갑옷을 들춰보려는 순간, 다음 조문객에게 떠밀립니다.
 
...슬쩍 빠져나가 다시 한번 조문객 줄에 섞여 서볼까요?
 
에르드:(이팔로스에서 석연찮은 일을 겪었던 만큼, 증거가 될 만한 걸 자세히 살펴두는 게 중요하다. 다시 조문객 사이로 섞여서 나무인형 앞까지 다가간다.)
 
2:" 두번째로 둘러보는 것이니 이번에는 타이밍을 잘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너스 주사위 2개를 드립니다.
 
에르드:
기준치: 44/22/8
굴림: 18, 4, 19
+2: 극단적 성공
+1: 극단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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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려운 성공
-2: 어려운 성공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뒤에선 조문객이 아주 느긋한 편이라 다행입니다.
 
꽃을 놓는 척 잠깐의 틈을 타 갑옷을 살짝 뒤집어 엿보면...
 
바닷물 속에서 부식되고 따개비가 붙은 탓에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표면을 끌로 파낸 듯 음각으로 새겨진 문양이 보입니다.
 
기울어진 오망성 형태의 문양 가운데에는 그림인지 먼 나라의 문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문양은 본래의 갑옷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언제,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것을 새겨넣은 걸까요?
 
에르드:(이 문양 탓에 내가 남의 말에 조종되듯이 움직였던 건가? 취한 채 말을 잘 듣던 구혼자의 옷에도 이런 표식이 새겨져 있었을까. 좋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으리란 것 말고는 추측이 어렵다.)
(갑옷을 이대로 태워선 안 될 것 같지만, 훔칠 수도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꽃을 내려놓고 물러나며 조문객들의 면면을 슬쩍 살폈다.)
 
조문객들을 따라 시선을 옮깁니다.
 
헥터가 이미 왕이라도 된 듯 베아트리체와 가까운 곳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귀족들 역시 베아트리체의 바로 다음으로 헥터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표합니다.
 
필립소는 그의 기세에 밀려났는지, 불편한 얼굴로 다른 구혼자들의 앞에 서 있네요.
 
시메온은 그런 필립소에게 장난을 걸며 신경을 긁고 있지만 완전히 무시당하는 중입니다.
 
바실리스는 어린 구혼자들과는 약간 거리를 둔 채 상황을 지켜봅니다.
 
에르드:(뻔뻔한 헥터와 능글맞은 시메온은 쳐다보기도 싫다. 그나마 만만한 필립소 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린다.) 미노이아의 왕자님 아니십니까.
 
필립소:(다른 구혼자들에게 가벼운 불평을 늘어놓는가 싶더니 금세 고개를 돌린다.) 자네는, 그때 그 자인가? (아스클레피온에서의 일을 떠올렸는지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돌아온다.) 뭐, 거지라 해도 제 나라의 왕에게 조문을 올 수 있는거니. (숙인 어깨 너머로 베아트리체와 근처에 선 헥터를 바라본다.)
...여간 마음에 안 든다니까.
 
에르드:예. (그리고 귀한 검도 얻게 해 줬지.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풋내기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채곤 슬쩍 떠보듯 말했다.) 헥터 님이 왕비님과 유독 가까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필립소:그야, 나만큼이나 조건이 좋은 구혼자니 말이지. 게다가 저 상단주와 손을 잡았으니. (그 둘에게서 여전히 시선을 때지 못한다.) 경쟁자로 둘 거라면 차라리 바실리스 왕이 나아. 저런 녀석과는 달리 점잖고 멋진 남자시니 말이야.
돌아가신 누님의 남편이셨기도 하고. 그를 제외한 다른 구혼자들은 베아트리체 님에게 무례하게 구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결투 신청을 한 후 때려눕히고 다니곤 했는데... (그제야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턱짓 한다.) 특히 저 상단주, 시메온. 저 무뢰한이 제일 악질인데 이 녀석은 결투 신청도 매번 빠져나가곤 하니, 열 받는단 말이지.
(봇물 터진 듯이 묻지도 않은 것까지 줄줄이 풀어놓는다. 여간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베아트리체 님의 배우자가 되는 건 나여야 하는데!
 
에르드:상단주에 대해 좀 아십니까? 상인들이 말하길, 그가 일대를 주름잡고 있다더군요. (무례한 구혼자들을 때려눕히고 다녔다? 이건 좀 마음에 드는군. 베아트리체를 대하는 태도만 보면 이자가 가장 진심이다. 만약 자신이 정말 죽었더라면 헥터보다야 필립소가 베아트리체에겐 훨씬 더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살아있으니 아무 소용 없는 가정이지만.) 필립소 님은 진심으로 왕비님을 흠모하시나 봅니다.
 
필립소:최근 10년 사이라고 했던가. 갑작스럽게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 말고는. (어깨를 으쓱이다 말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야 당연한 소리 아닌가?
(옛 기억을 떠올리 듯 잠시 시선이 허공으로 향한다. 순식간에 첫사랑에 빠진 청년의 얼굴로 피어난다.) 과거 친선 도모를 위해 베아트리체 님과 회담을 가졌을 때 첫눈에 반했거든. 당시의 나는 어린 소년이었고 베아트리체 님은 에르드 왕의 비였지만, 지금은 에르드 왕도 죽었고 나는 청년으로 자랐으니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건 바보 아닌가?
나는 왕의 자리보다 베아트리체 님을 원해서 구혼 했어. 그래도 왕이 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베아트리체 님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다.
베아트리체 님이 원한다면 첫 아이는 선왕의 아이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배려할거야. 나와 친인척으로 이어진 여러 왕국의 도움을 받아 이 나라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올 것이며, 10년 간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도 다시 세울테지.
그래, 자네도 저들 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하지?
 
에르드:(자존심 탓에 과장해서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만, 일개 거지에게까지 이렇게 자세한 계획을 늘어놓을 정도라면 그가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는 것만은 진심인 모양이다. 하필이면 헥터한테 밀리다니, 이자도 안타깝게 되었군.)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필립소 님. 반려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소:역시 자네도 그리 생각하지?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이제 보니 나쁜 녀석은 아니었군.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에르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자네들도 들었는가? 이 자도 나를 응원한다는데? (어느새 웃는 낯이 되어 다른 구혼자들의 틈에 섞여 든다.)
 
에르드:(하하, 작게 웃고는 자연스럽게 멀어져 바실리스에게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예를 갖춰 목례했다.) 다소스의 왕이시여. 저희 에르드 왕의 조문을 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바실리스:(다른 이들과 떨어져 조금 조용한 곳에서 시선을 맞춘다.) 친우의 장례이니 응당한 일일세.
에르드 왕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였는데, 무척 아쉽게 되었지. (높게 쌓은 장작더미를 바라본다.)
 
에르드:(비탄을 연기하듯 잠시 침묵했다가) 혼자 남은 왕비님이 걱정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구혼자들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실리스:(제 앞에 선 이를 위 아래로 조용히 훑다가 베아트리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내가 베아트리체 님에게 구혼하지 않았나. 친구의 비가 구혼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안타까워, 가까이에서 도와주고자.
 
에르드:마음이 깊으시군요. 저는 정치나 높으신 구혼자들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만, 헥터 님이 유독 베아트리체와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다.
 
바실리스:헥터 말인가. 내가 내로라 하는 젊은 영웅들에게 덧붙일 말이 뭐가 있겠나. (짧게 턱을 쓸어낸다.) 다만, 헥터와 친한 그 상단주가 이팔로스 유민 다수를 종으로 거둔 것 같던데…. 무슨 거래를 한 건지는 몰라도, 외세를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세력을 모은 헥터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아모르베루스에 악감정이 심할 이팔로스 유민은 받아들인 건, 모순같아 보이기는 하는군.
 
에르드:이팔로스 유민을 말입니까? (군사 진격로를 표시해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지? 이 자들은 반드시 척결해야만 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나라가 더 시끄러워지진 않을지 걱정입니다.
 
바실리스:그럴 수도 있겠지. (천천히 시선을 눈 앞의 상대에게로 옮겨온다.) ...만일 베아트리체 님이 나를 선택한다면 다소스와 이 나라는 하나로 통합될 것이고, 그만큼 부강하고 거대한 나라로 거듭나게 될테니,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고, 왕위가 욕심나서 구혼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면, 서로 의지하여 말년을 보내도 좋겠군.
(당신의 눈동자를 가만 응시하는 듯 하더니 다시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에르드 왕은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군. ...이렇게 남녀소노, 귀천을 따질 것 없이 조문객이 물밀듯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야. ..참 안타까운 일이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 물러서 다음 조문객을 맞이한다.)
 
에르드:(바실리스가 제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타국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교우관계를 쌓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모르베루스의 문제. 타국의 왕을 함부로 끌어들일 순 없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헥터 근처로 다가간다. 귀족들 사이에 있으니 제 모습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며.)
 
헥터는 몰려오는 귀족들과 조문객들에게 신경을 쏟느라 에르드가 가까이에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귀족들 역시 명복을 핑계삼아 헥터의 곁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눕니다.
 
귀족 하나가 헥터의 곁에서 귓속말을 하자 고개를 저으며 은근히 웃습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꼭 자신이 이미 왕이라도 된 듯 해보입니다.
 
어느새 귀족들과 무리를 이룬 헥터는 베아트리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헥터:그대들은 걱정할 필요 없어. 나머지 구혼자들은 다 신경쓸 것도 없는 위인들이지. 다만, 다소스의 왕만큼은 거슬려. 에르드 왕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 게 바로 본인이면서, 염치도 없이 베아트리체에게 청혼하러 오다니.
 
헥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 서린 얼굴로 낮게 속삭이자 귀족들은 고개를 기울여 목소리에 집중합니다.
 
헥터:...다소스의 왕비가 요절한 이유도 병이 아닌 사고였다던데, 글쎄. 과연 사고일까?
 
귀족: 헥터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
 
무리 지은 이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커집니다.
 
헥터가 손을 내저으면 이내 침묵을 되찾습니다.
 
헥터:진정들 해. 만약의 일이지, 아주 만약의. (손을 거두어 천천히 팔짱을 끼면서 시선 끝에 있는 베아트리체를 응시한다.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이를 보며 작게 고개 젓는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신의 옹호자들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에르드 왕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감정을 이유로 위대한 왕이 남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어. 하지만 왕이 없는 나라를 10년이나 유지해온 인망과 수완만큼은 인정할 만 하지. 그런 인재를 거둔다는 마음으로라도 혼인 후에는 잘 지내보려 해.
 
귀족: 역시 헥터님은 능력만 뛰어나신 것이 아니라 마음도 넓으십니다.
 
귀족들은 그의 말에 어떠한 부정도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입니다.
 
헥터는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청중을 돌아봅니다.
 
헥터:그래, 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지.
나는 왕이 된 후 상단주 시메온과 손을 잡고 바다로 뻗어나갈 생각이다. 해상 장악을 방해하던 이팔로스 왕국도 무너졌고, 상단주는 지금까지 한 척의 배도 침몰시키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으니 나라에 큰 도움이 될 거야. 10년. 10년만 지나면 선왕 대보다 훨씬 더 발전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귀족들은 헥터의 연설에 감화된 듯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게 박수까지 치려다 우뚝 멈춰섭니다.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입니다.
 
에르드:(비웃음이 절로 나는군. 이미 자기가 왕이 된 것마냥 행세하는 꼴이며 시메온 같은 작자와 손을 잡은 행태까지 모두, 심히 거슬린다. 가장 화가 나는 건 베아트리체의 언급이다. 감히 제가 뭐라고 베아트리체의 행동을 멋대로 평가해댄단 말인가?)
(귀족들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걸 참으면서 근처에 있을 시메온을 시선으로 좇는다.)
 
필립소에게 장난을 걸며 신경을 긁고 있던 시메온은 철벽같은 무시에 흥미를 잃었는지, 어느새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장소에 맞지 않는 웃음소리가 참으로 경망스럽습니다.
 
에르드:(패고싶다. 온힘을다해서 딱 한대만)
 
어깨동무까지 하고 있는 걸 보아하니 옆에 있는 이는 벗인가 봅니다.
 
상단주의 벗: 이런 상황에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자네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궁금해져서 말이지... 자네는 왜 베아트리체 님께 구혼한건가?
 
시메온:(턱을 쓸어내며 씩 웃는다.) 그야, 다들 해보는 것 같기에 유행인가 싶어서.
 
상단주의 벗: 자네가 친구라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 미친건지 취한건지!
 
허리까지 굽혀가며 낮게 웃던 시메온은 일순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얼굴로 대꾸합니다.
 
시메온:이보게, 친구. 사실 나는 에르드 왕의 행방을 알고 있어. 선왕은 죽지 않았거든….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그는 지금도 해마를 타고 바닷속 요정들의 마을을 정벌하는 중이지. 보자, 지금 쯤이라면... 그 아래에서 이미 새 살림을 차렸을 지도?
 
그의 말은 온통 조롱과 농담으로 뒤섞여 있습니다.
 
상단주의 벗: 이러다 나까지 목이 달아날까 두렵네. 이거라도 일단 풀고 얘기하게나. (어깨동무에서 겨우 벗어난다.)
 
시메온:하지만 말이야, 잘 들어봐. (클클 웃으며 팔짱을 끼웠다.) 아무리 내가 구혼자로서 조금 모자라다고 해도 말이지~ (눈까지 접어 능글맞게 웃는다.) 만약 다른 구혼자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역시 내가 왕이 되나?
 
짧은 정적을 깨는 것은 이번에도 시메온의 웃음입니다.
 
시메온:(벗의 등을 턱턱 두드린다.) 와하하, 농담. 농담이야.
내가 왕이 된다면 베아트리체 비가 미친 게 틀림 없을테니, 나라가 망하기 전에 망명 준비나 해야겠다.
 
시메온은 여전한 얼굴로 그의 벗을 이끌어 필립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작은 소란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르드:(말 한마디 한마디가 천박하기 짝이 없군. 헥터와 함께 반드시 처단해주마.)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사이, 주변이 서서히 조용해집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중앙으로 모여듭니다.
 
마침내, 에르드의 인형을 장작 위에 올릴 순간이 다가온 모양입니다.
 
베아트리체는 수의와 갑옷을 입힌 나무 조각의 입 안에 동전을 넣고, 그것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춥니다.
 
이어 병사의 검을 빌려 자신의 머리칼을 한 줌 쥐고 잘라냅니다.
 
베아트리체가 인형의 가슴 위에 자신의 머리칼을 얹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면,
 
병사들이 인형을 뉘인 천의 네 귀퉁이를 잡고 옮기기 시작합니다.
 
베아트리체는 가장 앞에 서서 그 모든 순간을 바라봅니다.
 
그때, 조문객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옵니다.
 
베아트리체의 몇 발짝 뒤에 멈추어 선 바실리스가 예의 바르게 몸을 숙입니다.
 
바실리스:선왕께서 검은 슬픔의 강물을 평안히 건너시기를 바랍니다.
 
베아트리체는 장작더미에 가다가는 횃불에 시선을 고정한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베아트리체 힐:... ...당신께서도 같은 슬픔을 겪으셨을 때, 저는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에 바빠 직접 찾아보지도 못했지요. 그런데 당신께서는 몇 번이나 저를 찾아 이리 도움을 주시니, 면목이 없습니다.
 
바실리스:제가 아무리 큰 슬픔을 겪었다 한들 지난 10년 간의 괴로움에 비하겠습니까. 아무리 다음 왕이 될 꿈에 부풀어 있다지만, 어린 구혼자들이 참으로 방자하게 굴더군요.
 
베아트리체 힐:(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조금 더 현명하고 강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을 터. ...억울하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실리스:구혼자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에르드 왕은 저의 전우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그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영웅을 대체 어느 바다의 파도가 휩쓸어 가 버렸는지…. 살아서 해야 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진심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향유를 부은 장작더미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나무를 살라먹으며 올라가는 불길을 바라보던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손수 깔아 놓은 천이 타기 시작하는 순간 고개를 숙입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늘어뜨린 베일 아래에 얼굴을 감춘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마침내 조각상 위에 가지런히 놓은 당신의 갑옷과 무기마저 불꽃에 뒤덮입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베아트리체가 다시 고개를 들며 다소스의 왕을 바라봅니다.
 
베아트리체 힐:(목이 메어 잠시 입술만 달싹인다.) ... …언제나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니 고맙소.
 
베아트리체는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다른 구혼자의 앞에서는 보인 적 없는 편안한 웃음에, 오랜 친구를 향한 신뢰와 우정이 담겨 있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있나요?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베아트리체의 마음이 달라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말이에요.
 
그가 10년 간 당신을 기다린 이유가 오직 사랑 뿐이었을까요?
 
정말로 10년이나 소식이 끊긴 당신이 언젠가 살아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버틴 걸까요.
 
베아트리체가 그동안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당신을 기다렸는지,
 
그의 가슴 속에서 어떤 동요와 변화가 일어났을지, 타인이 짐작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베아트리체는 다시금 불꽃을 향하여 고개를 돌립니다.
 
나무 조각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잿가루는 당신의 이름으로 무덤에 안치되겠지요.
 
베아트리체의 기도와 함께, 산 자의 장례식은 오래도록 이어집니다.
 
베아트리체와 구혼자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며 밤새도록 타오를 장작더미를 바라봅니다.
 
에르드:(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요 며칠간 왕궁 주변을 직접 돌아다니며 조사하면서 베아트리체의 그리움과 슬픔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설사 저를 더는 사랑하지 않고 남은 감정이 애도뿐이라 한들 제가 어찌 감히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제겐 하룻밤이나 다름없었으나 베아트리체에겐 10년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그 간극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가 저 아닌 다른 이를 택한다면 순순히 물러날 것이다. 아모르베루스에서 먼 곳으로 떠나 여생을 마치자.)
(산 자를 향한 애도라니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베아트리체의 선택에 따라 정말로 여기에서 죽은 자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늘 높이 타오르는 연기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음도 비울 겸 도성 바깥의 산간 마을이나 가보자.)
 
씁쓸함을 삼키며 하늘까지 오르는 흰 연기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깁니다.
 
성도의 서남쪽으로 향합니다.
 
바위산에 기대어 선 낡은 건물들이 모여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자들은 나름의 자체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국가의 관리도 원조도 거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에르드와 베아트리체도 몇 번이나 이곳 주민들을 성내의 민가로 이주시키려 시도했습니다만, 큰 수확은 없었습니다.
 
이런 지역이니만큼 얼굴을 드러내기 곤란한 사람들이 몸을 숨기는 곳으로도 애용됩니다.
 
그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범죄자나 해적, 암매상 등도 포함되기에 치안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렇잖아도 저쪽에서 [시비가 붙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네요.
 
몸뚱이 하나 간신히 누일 천막과 움집이 밀집되어 뒤엉킨 [골목]은 이전보다 더욱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에르드:(여긴 예나 지금이나 시끄럽군.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가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옥신각신하고 있습니다.
 
남성이 억울하다는 듯 큰 소리로 외칩니다.
 
억울한 남자: 나는 이팔로스인이 아냐!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그저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립니다.
 
청년: 웃기고 있네. 몇 년이나 이팔로스의 군대에 속해 싸우고, 이팔로스인들이 먹을 곡식을 키웠으면서….
 
억울한 남자: 나는 징집당했을 뿐이야! 너의 나라도 전쟁에서 패했다면 나와 같은 신세였을 거다!
 
청년: 닥쳐! 그렇다고 네가 이팔로스군으로서 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이 달라져?
 
에르드:(전쟁의 폐해군. 수많은 정복전쟁을 직접 이끌어온 자로서 마음이 좋지는 않지만, 괜히 나서서 끼어들 필요도 없다. 조용히 지나친다.)
 
점점 험악해지던 싸움은 순식간에 드잡이질로 번집니다.
 
서로 멱살을 잡고 큰 소리를 내던 와중, 한 쪽이 먼저 주먹을 들어올립니다.
 
전쟁 중 동생을 잃었다는 청년은 그대로 이팔로스인이 아니라 주장하던 남성의 얼굴을 가격합니다.
 
퍽, 요란한 타격음이 터진 순간 남성의 몸이 크게 휘청거립니다.
 
몇 발짝 뒷걸음질치던 그의 몸은 중심을 잃고 뒤로 기웁니다.
 
억울한 남자: …어?
 
콰직.
 
남성이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잘못된 소리가 납니다.
 
바닥에 박혀있던 돌이 남성의 뒤통수에서 흘러나온 피로 젖어들어갑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시비가 붙었던 청년은 크게 놀라 허둥거리다가 재빨리 도망쳐버립니다.
 
쓰러진 남성으로부터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에르드:이런. (곧장 도망쳐 버리다니. 전후사정을 얼추나마 들은 이상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다.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쓰러진 남성의 몸을 뒤집어 상처를 살펴본다. 치료할 수 있는 정도인가?)
 
에르드:
응급처치
기준치: 30/15/6
굴림: 39
판정결과: 실패
(급한 대로 남자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동여매보려고 하지만, 전문적인 도구가 아니라 좀 어설프다.)
 
천을 찢어 감고, 환부를 누르며 지혈을 시도해도 좀처럼 피가 멎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곳에 충격을 받아 두개골이 부서진 모양입니다.
 
억울한 남자: ...저는, 이팔로스에 정복당한, 리피아 출신…. 이팔로스인이, 아니….
 
남성은 끝내 호흡이 잦아듭니다.
 
에르드:쯧……. (혀를 차고는 남자의 고개를 조심히 내려놓는다. 치안이 좋지 않다지만 심각하기 그지없군.)
(시체의 수습이라도 해야 할 텐데. 지나가는 이들에게 외쳐 묻는다.) 이봐. 이 자의 집이나 가족에 관해 아나?
 
도움을 청하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들은 모르는 척 지나가기 바쁩니다.
 
물동이를 이고 오던 한 아가씨만이 에르드에게 속삭입니다.
 
아가씨: 저기요, 이 거리 처음 와요? 그냥 가세요. 여기선 흔한 일이니까, 버려두면 ‘목자’들이 와서 치울 거에요. 귀찮게 휘말려봐야 당신 손해예요.
 
에르드:목자?
 
아가씨: 이 거리의 관리자들을 그렇게 불러요. 거리의 규율을 세우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모두 그들이고요.
 
에르드:관리자라. (보통 이런 곳의 규율이라 해봤자 힘 센 이들의 이익을 채우는 부류일 것 같은데. 얽히지 않는 게 중요하니 우선은 몸을 일으켰다.) 알려줘서 고맙소. (남자를 흘끗 바라봤다가 골목을 향해 발을 딛었다. 안타깝게 됐지만 그 이상의 애도를 표할 여유는 없다.)
 
광경을 뒤로 하고, 당신은 이리저리 얽힌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 걸음이 가장 깊숙한 골목까지 들어서자, 벽에 기대어 선 채 시간을 죽이던 불량배들이 흘긋흘긋 에르드를 바라봅니다.
 
그들 중 가장 체격이 좋은 남자가 다가와 에르드의 어깨를 붙듭니다.
 
불량배: 어이. 아저씨, 이 동네 처음 와? 여기로는 가는 거 아니야.
 
에르드: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어깨가 붙잡혔으나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되묻는다.)
 
불량배: 엉? 그걸 왜 나한테 묻지?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저리, 멀리 돌아가시라고. (제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 더욱 앞을 가로막고 선다.)
 
에르드:
기준치: 44/22/8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던 그때, 에르드의 소매 아래에서 행정병의 매듭이 떨어집니다.
 
툭, 땅에 떨어진 매듭을 본 불량배들이 크게 당황합니다.
 
어쩔 줄 몰라하던 이들은 곧 스스로 물러서며 길을 열어줍니다.
 
불량배: 죄, 죄송합니다. 무식한 것들이 미처 목자를 몰라뵙고…. 어서 지나가십시오.
 
아무래도 이 매듭이 ‘목자’ 라고 불리는 자들의 증표였던 모양입니다.
 
에르드:(이건 예상치 못한 운이다. 매듭을 다시 주워들곤 짧게 고갯짓했다.) 행실을 바르게들 하도록 해.
(그리곤 불량배들이 가로막고 있던 뒤편을 향해 나아간다. 뭘 감추던 거지?)
 
불량배: 예! 시정하겠습니다.
 
불량배들은 에르드가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뒤편으로 이어진 좁고 더러운 오물 냄새가 나는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 담쟁이 덩쿨이 타고 오른 낡은 [담벼락]이 이어집니다.
 
덩쿨 아래로는 무언가 그림 같은 것이 비치는 듯 합니다.
 
에르드:(흠? 담벼락 뒤에 뭐라도 있는 건가? 덩쿨 아래 비치는 것부터 확인해본다.)
 
덩쿨을 걷어내고 살펴보면, 담벼락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거대한 문양이 드러납니다.
 
기울어진 오망성 형태의 문양 가운데에는 그림인지 먼 나라의 문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건 분명...
 
당신의 갑옷에 남아있던 문양과 똑같습니다.
 
에르드:(잠시 멈칫한다. 이 문양이 대체 왜 여기에? 이팔로스의 원정을 나섰을 때 새겨졌으리라 추측했는데, 아모르베루스의 산간 마을 구석에 있다니?)
(담벼락을 따라 쭉 걸어들어간다. 아무래도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 시메온과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골목 끝에는 늘어진 천과 널빤지로 가려진 [길목의 입구] 같은 것이 보입니다.
 
에르드:(천을 들어올리고 입구로 진입한다.)
 
길을 막은 물건들을 치우고 나면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공간의 입구가 드러납니다.
 
허리를 반쯤 숙여야 겨우 이동할 수 있는 열악한 복도를 따라 걸어들어갑니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토굴에 가까운 내부에는 굵고 튼튼한 나무로 창살을 세운 [감옥]이 있습니다.
 
에르드:(이런 곳에 감옥이라. 목자들이 가둬놓은 건가? 내부를 확인했다.)
 
감옥 안에는 몸을 한껏 웅크린 사람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다가가서 살펴보면 극도로 기분 나쁜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
 
…인간?
 
정말 저것이 당신의 동족이 맞나요?
 
저렇게 툭 튀어나온 사백안과 기이할 정도로 작은 머리, 쪼그라든 귀.
 
따개비처럼 거칠게 일어난 상처투성이의 피부를 지닌 존재가?
 
새까만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 시체를 닮은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을 담습니다.
 
이성 판정(0/1D4).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52/26/10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4
(따개비 병에 걸린…… 사람? 사람이 맞나? 인간이라 보기엔 어려운 모습에 간담 큰 그라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숨기고 있었나 보군.) 너는 누구지?
 
험난한 전장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외모에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그 말에 남자가 비식비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입니다.
 
???:...뭐야. 이번엔 애송이 왕자가 아니네? 드디어 죽여주려고 망나니를 보냈나?
응? 으흐흐... 말을 잃었나? 죽일거라면 아프지 않게 단번에 부탁하지.
 
에르드:필립소…… 그놈을 만난 적이 있나?
네 몸은 왜 그리 된 거지?
 
???:...필립소? ...아, 그... (순간 눈이 가늘어지며 주머니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것을 응시하더니, 웅얼거리던 입술이 다물린다.)
목자의 증표를 들고 있는 놈에게 할 말은 없어.
 
에르드:바라는 것이 네 죽음이라면 입을 열어라. (칼을 꺼내 보인다.) 나는 충분히 망나니가 될 수 있는 자라서 말이지.
 
???:(새까만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흐흐...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내가 죽음 따위를 두려워 할까봐.
(창살을 쥐고 가까이 붙는다.) 목자, 목자... ... 그 빌어먹을 것들.
 
에르드:죽이겠다는 협박이 아니라 회유다. 방금 죽여 달라고 말하지 않았나? 말하는 걸 보아 목자란 놈들은 너를 일부러 살려두는 것 같군. 그자들이 네게 무슨 짓을 했지?
 
???:(창살에서 손을 떼고 한발 물러나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망나니. 너도 똑같은 자이면서, 그걸, 내가 묻나? (한참 욕설을 웅얼거리며) ..그 빌어먹을 것들, 그때 염소 새끼들도 모조리 끌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손발에 추를 달고 바다 밑에 처박아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줬다면….
(그러다 우뚝 멈춰서 창살 앞에 이마를 붙이고 선다.)
 
에르드:(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듣기가 어렵군.) 너, 시메온이란 자와 관련이 있나?
 
???:...내가 말하지 않았어? ...목자의 증표를 들고 있는 놈에게 할 말은 없어.
(갑자기 눈을 감고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분은 돌아오실 것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어둠의 밑바닥에서 일어나, 돌아오시겠다고, 돌아오시겠다고, 우리에게 돌아오시겠다고… ....
 
기도같은 방언을 오래도록 중얼거리다 번뜩 눈을 뜹니다.
 
눈을 데룩 굴리며 에르드를 훑어내리던 그의 표정이 순간 굳습니다.
 
???:…어?
 
순간, 창살 사이로 불쑥 손이 튀어나옵니다.
 
상처투성이인 손이 에르드의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고 당깁니다.
 
그의 시선은 온통 짙푸른 빛의 반지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꿈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얼빠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중얼거립니다.
 
???:폴리페모스의… 눈동자?
 
에르드의 손목을 쥐고 이리저리 꺾으며 반지를 돌려보던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채근합니다.
 
???:이게 어디서 났지? 이팔로스 왕의 유물을 왜 네가 지니고 있느냔 말이야? 대답해!
 
에르드:(손을 팍 쳐냈다.) 목자에겐 할 말이 없다지 않았나? 나도 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 놈에게 답해줄 말은 없다.
 
에르드의 말이 들리지 않는건지, 허공에 뜬 손은 미동도 없습니다.
 
갇혀있는 상인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창살을 틀어쥔 채 몸을 앞뒤로 흔들며 괴성을 지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추악한 욕설을 모두 늘어놓으며 발광하던 그는,
 
창살에 이마를 미친듯이 들이박으며 당신을 향하여 울부짖습니다.
 
???:에르드! 에르드, 이 찢어죽일 새끼가 살아있었어! 에르드!!!
 
소란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르드:(귀가 아플 지경이다. 내 정체를 알아봤는데도 경의는커녕 욕설이라. 깊은 바다의 주인과 관련된 듯한 말들도 그렇고, 시메온의 수하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신경질적으로 칼집에서 칼을 뽑아내어 창살 너머의 복부에 박아넣었다.) 네 소원대로 죽여주지.
(복부 깊이 찔러넣은 칼을 그대로 확 빼냈다. 머잖아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그분에게로 꺼지도록 해라.
 
기이한 괴성과 함께 창살 밖으로 뻗어 나온 손이 허공을 가릅니다.
 
피가 끓어올라 드문 드문 끊어지는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저주의 말을 뱉습니다.
 
당신의 사지를 이팔로스 바다에 뿌리겠다 말을 마지막으로 새까만 눈동자가 희미하게 옅어집니다.
 
피가 튄 곳은 없는지 잘 확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앞을 지키고 선 불량배에게 띄면 큰일을 면치 못할겁니다.
 
에르드:(어두운 색의 로브라 티가 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앞뒤로 꼼꼼하게 잘 살펴본다. 그래도 기술(?)이 있어 거의 묻어나진 않았다. 안감으로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아내곤 빠르게 몸을 돌린다. 어서 벗어나야겠군.)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소란을 들은 이들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지나쳐야겠습니다.
 
에르드:(로브를 푹 눌러쓰고 칼을 감추며 조용히 그림자에 숨어 지나친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34
판정결과: 실패
 
워낙에 골목이 좁은 탓입니다.
 
칼 끝이 담벼락에 걸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냅니다.
 
불량배들의 고개가 이쪽을 향합니다.
 
불량배: ...아까의 목자십니까?
 
에르드:그래. (매듭을 보여준다.)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불량배: ...잠깐 기다리십시오. 안쪽에서 큰 소란이 들려서 말입니다. (어깨를 붙잡는다.) 아무 일도 없으셨습니까.
 
에르드:발이 미끄러져 나무 뿌리를 밟고 넘어졌다. 그러면서 주변의 물건을 넘어뜨렸지. 거기까지 소리가 들렸나 보군. (태연히 말한다.)
 
불량배: ...그러십니까.
 
불량배는 뒤편과 에르드를 번갈아보더니 손을 놓고 끄덕입니다.
 
상황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 듯 합니다.
 
에르드:그렇다. 그럼, 이만. (의심을 사지 않도록 느긋하게 걷는다. 골목을 돌아 시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재빠르게 뛰어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고, 곧장 산간 마을을 벗어났다.)
 
에르드: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1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감옥을 확인하러 간 불량배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사히 달아났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나가는 걸음은 무척이나 빨라, 어느새 평지에 다다랐습니다.
 
숨을 돌리고, 다음 목적지로 향해봅시다.
 
에르드:(나무 뒤에서 호흡을 정리한다. 이 정도 달리기는 끄떡도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을 회복했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죽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차피 살인은 그에겐 익숙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며칠 안으로 더 많은 피가 손에 묻겠지.)
(도성 안으로 들어가 왕가의 묘지로 향한다.)
 
손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깁니다.
 
에르드의 선조들이 잠들어있는 왕가의 묘지입니다.
 
야트막한 동산처럼 보이는 톨로스 양식의 무덤이 모여있는 이 들판은 마치 땅이 물결치는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 베아트리체도 화장을 마친 잿가루를 항아리에 담아 [에르드의 무덤]에 안치하러 오겠지요.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화장터로 몰려간 탓인지,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에르드:(어제 무대 뒤편에서 목격했던 인영을 되새긴다. 무슨 목적이었을까. 주변을 주의깊게 확인하고는 저를 위해 만들어진 무덤으로 향했다.)
 
건축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왕의 무덤은 생전에 준비해두는 게 관례입니다.
 
젊은 나이에 건강하기도 했으나 위험한 전장에 직접 나서곤 하던 에르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요.
 
에르드의 무덤은 이팔로스 원정에 나서기 직전 착공을 명령해두었습니다.
 
전장에 가기 전에 무덤을 파두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불안해하는 베아트리체에게,
 
훗날 당신과 합장될 무덤을 미리 준비하는 것 뿐이라며 달래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하나, 둘, 셋…?
 
무언가 이상합니다.
 
에르드가 본 적도, 건설을 명한 적도 없는 [봉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에르드:(뭐지? 미래에 있을 아이의 무덤을 미리 마련해두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세 번째 봉분으로 향했다.)
 
다른 무덤에 비하여 미묘하게 크기가 작습니다.
 
묘실의 입구가 열려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언제든 칼을 빼들 수 있게 준비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묘실을 돔형 구조로 쌓아올려 세우는 톨로스 양식의 무덤은 빈 공간이 제법 넉넉합니다.
 
묘실 내부의 바닥은 이제 막 가져다 놓은 듯 생생한 꽃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황금을 연상시키는 샛노란 꽃들 사이로 드문드문 소담하게 피어난 연보랏빛 꽃잎들.
 
벽과 바닥에 놓인 부장품들은 하나같이 왕에게 바치는 물건처럼 화려하고 섬세합니다.
 
예식에 사용하는 의장용 무기, 천 척의 배를 앞장서 이끄는 용장이 그려진 도자기, 왕실의 상징인 사자가 조각된 황금 가면까지.
 
이건 마치….
 
???: 이봐!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당장 나와!
 
누군가 불쑥 무덤 입구에서 큰 소리를 칩니다.
 
돌아보면 어수룩해보이는 중년 남성 하나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나오라고 소리를 지른 주제에 정작 본인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오네요.
 
에르드:(내부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뒤돈다.) 실례했소. (그런 자기는 왜 들어오는 거지?)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아시오?
 
???: 이 무덤의 주인이 하나밖에 더 있나!
 
에르드의 몸을 이리저리 뒤지고 살피며 부장품을 빼돌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 그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곤 꽃을 정돈합니다.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묘지기라도 되는 모양입니다.
 
묘지기: 아이고, 애써 정돈해서 깔아 놓은 꽃이 흐트러졌잖아! 내일 새벽같이 베아트리체 님이 여기로 오실텐데, 이게 무슨 짓이야?! 도굴꾼이라도 든 줄 알았네!
 
그 말인 즉슨…. 이곳이 바로 에르드의 무덤이라는 건가요?
 
당신이 건축을 명했던 무덤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에르드:에르드 왕의 무덤은 따로 있지 않소? 봉분이 세 개나 되기에 신기하여 살펴보러 왔을 뿐이오. (어정쩡하게 밀려났다.)
 
묘지기: 어엉? 그야 첫 무덤은 왕과 왕비를 함께 뫼실만큼 넉넉한 크기로 만들었었는데, 에르드 왕이 요절하며 홀로 무덤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별 수 없이 적절한 규모로 다시 세웠지. 베아트리체 님은 후일 마지막 남편과 같은 무덤에 들어가시는 쪽이 법도에 맞을 테니까.
 
그렇게 대답한 묘지기는 다시 꽃을 정돈하는 데에 집중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흩어졌다면 모여라.
 
무너졌다면 일어서라.
 
바다는 다시 하나가 된다, 바다는 다시 파도가 된다.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에르드:아아…… 그런가. (듣고 보니 합당한 이유다.)
(좋은 가사지만, 최근 바다와 부정적으로 얽힌 것들을 보고 들어서일지 마음에 와닿진 않는다.) 참, 어제 어떤 무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소?
 
묘지기: 어제? 이팔로스 출신 노예들이 아니려나. 에르드 왕의 무덤을 세우는 동안 이팔로스 출신 노예들이 자주 오갔었어.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귀에 익어서 정신을 차려보면 이렇게 따라 부르고 있더라니까. (괜히 멋쩍어하다가 다시 주변을 정리하는데 몰두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럼, 주인 없는 무덤으로 남겨졌으나 허물지 않은 [에르드의 무덤]은 어떻게 된 걸까요?
 
묘지기의 시선이 주변 정리에 팔려있는 틈을 타 에르드의 무덤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에르드:이팔로스의 노예들이라고? (그들이 부른 노래라고 하니 갑자기 가사가 다르게 들린다. 헥터가 사들인 이들인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도 그렇고, 꼭 저들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것 같군.)
(그러나 이 이상의 말을 흘릴 필요는 없겠지. 조용히 빠져나와 본래 저의 몫으로 마련된 무덤으로 향한다.)
 
에르드가 계획했던 그대로 자리를 잡은 무덤은 소담하게 다듬어진 고운 풀로 덮여 있습니다.
 
무덤가에 핀 제비꽃과 크로커스가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고, 거대한 돌로 쌓아올린 통로 끝의 [입구]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에르드:(여기에 와서 무언가를 하고 갔나? 다시 몸을 긴장시키고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소름끼치는 한기가 치고 오릅니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다리를 휘감으며 올라와 온몸을 감싸는 것 같습니다.
 
머릿속이 비명으로 가득찹니다.
 
해일에 휩쓸린 도시의 시민들이, 암초에 부딪힌 배의 선원들이, 땅에서 나고도 뭍으로 돌아오지 못한,
 
창세 이래 저 깊은 어둠이 삼켜버린 모든 시대의 모든 생명이 일시에 내지르는 것 같은 그 단말마가….
 
이성 판정(0/1D3).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48/24/9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뇌내에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와 광경에 이마를 짚는다. 몸을 긴장시켰던 덕분인지 데미지가 크진 않았으나, 영문을 알 수 없다. 무덤에 발을 들이기만 했을 뿐인데. 분명 그들이 무슨 짓을 해놓은 것이다. 울려대는 비명을 무시하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렸을 공포에도 불구하고, 에르드의 심박은 뜻밖에도 조금 빨라졌을 뿐입니다.
 
마치 무겁고 잔잔한 힘이 당신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무덤 내부는 비릿한 냄새로 가득합니다.
 
왕가의 묘지는 해안가와는 거리가 상당한 위치임에도, 이 무덤의 묘실 바닥은 바닷물로 흥건히 젖어 있습니다.
 
수십, 어쩌면 수백의 것일지도 모르는 발자국이 [석관] 주변에 가득합니다.
 
에르드:(바닷물. 아주 작정을 했군. 싸늘히 굳은 낯으로 석관으로 걸어갔다.)
 
본래 에르드와 베아트리체가 함께 누워야 했을 석관은 그만큼 넉넉한 크기를 자랑합니다.
 
에르드의 힘이라면 열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
근력
기준치: 80/40/16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이명 탓에 순간 팔에서 힘이 빠졌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석관의 뚜껑을 밀어낸다)
근력
기준치: 80/40/16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서늘한 추위와 이명 탓일 겁니다.
 
석관의 뚜껑을 힘껏 열어내지는 못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비스듬히 반쯤 밀어냈습니다.
 
좁은 틈이 드러나면, 곧바로 거센 바람이 그 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석관 아래에 마치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에르드: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틈을 들여다봅니다.
 
고개를 숙이면, 서늘한 기운이 주변으로 퍼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공기가 길고도 긴 계단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누군가의 절규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어디로 이어지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깊이, 규모, 용도, 어느 것 하나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함정까지 설치하여 지키고 있다면 심상치 않은 시설일 확률이 높겠지요.
 
이후 충분한 채비를 갖추고 찾아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바닥엔 바닷물을 채워두고, 석관 아래에는 계단이라. 눈으로 보지 않아도 심상찮은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아주 장난질을 쳐 뒀군. 제 나라인 것마냥. 이를 뿌득 갈고는 다시 석관의 뚜껑을 덮어 두었다. 흉계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혀야 참수할 근거로 내세울 수 있을 테니.)
(이팔로스의 노예까지 동원했다면 헥터와 시메온의 짓이겠지. 몰아닥친 분노를 가라앉히며 무덤을 나선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고른 뒤, 평원으로 향했다.)
 
평원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성벽 바깥에 위치한 광활한 평원은 자연이 선물한 거대한 목초지입니다.
 
왕의 목장을 지키는 [양치기]가 풀피리를 불며 지루한 시간을 때우고 있습니다.
 
[언덕] 너머로 풀어놓은 동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내달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네요.
 
수십년 전부터 들판을 헤매는 나그네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무화과 나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먼 곳에는 다소스와의 경계를 가르는 북쪽 숲이 보입니다.
 
에르드:(그러고 보니, 별궁의 시녀가 양치기를 만나러 갔다고 했었지. 이자인가? 느릿하게 다가간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그려.
 
양치기는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로 보입니다.
 
풀잎 하나를 입에 물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냥 상냥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양치기: ..아저씨는 뭐예요?
 
양치기라, 문득 궁의 시녀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자주 마주쳤던 어린 시녀와 붉은 머리의 시녀가 나누었던 이야기.
 
시녀들이 술을 찾으러 종종 숲에 오가곤 했다던가요.
 
언제나 평원에서 양을 치는 이 소년이라면 목격한 것들을 증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에르드:왕궁에서 일하는 시종인데, 휴가를 얻어서 잠시 쉬러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별궁의 시녀들이 자주 오다니지 않습니까? 어디, 뭐 흥미로운 이야기라도 들은 건 없으신지요. (만만해 보이기 위해서 어린 소년에게도 존댓말을 유지한다.)
 
양치기: 별궁이요?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한다.) 뭐 가끔 왔다갔다 하죠. 왜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소소한 대화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에르드:(만만함으로는 안 되나?)
위협
기준치: 65/32/13
굴림: 86
판정결과: 실패
(허리를 펴고, 위압적인 말투로 돌변한다.) 네가 우리 궁의 시녀와 몰래 놀아나는 걸 봤다는 소문이 있어서 직접 확인하러 온 거다. 바른 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양치기: (아예 팔짱까지 끼고 얕보듯이 반쯤 뜨고 있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투와 훌쩍 높아진 눈높이며, 입에서 나온 말에 잠시 입만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그, 그러니까. 뭘 말해드리면 되는데요?
 
양치기: (눈치만 보다가 다시 입을 연다.) 딱히 흥미로운 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왕궁의 시녀 몇 명이 저기 숲 속으로 가서 술항아리를 숨겨두었다가, 열흘쯤 후에 찾아가서 다시 들고 와요.
(눈을 마주쳤다가 슬금슬금 바닥으로 내려간다.) 포도주를 숙성하기에 딱 좋은 환경인 동굴이 있다던데요. 그러기 시작한 지는 3년쯤 됐어요. 사실 고작 열흘 숙성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녀들이 숲에 갈 때는 다소스의 병사들이 호위해줬어요. 곰을 마주치면 큰일이니까요. ..제가 본 건 그게 다에요.
 
에르드:(3년이라. 고작 열흘 따위로 숙성되지 않는단 건 조금만 머리가 있으면 알 테다. 다소스의 병사가 호위해주었다는 건, 그들과 어떤 결탁을 했다는 의미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시녀장과 바실리스가 수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그 일환인가 보군.) 알았다.
네 일을 똑바로 해라. 베아트리체 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뒤집어쓴 망토 탓에 얼굴은 드러나지 않으나 가히 차갑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명했다.) 또한, 조사를 계속할 필요가 있으니 시녀들에게 내가 찾아왔다 알리지 마라. 알겠나?
 
양치기: ..네, 알겠어요. (고개만 끄덕이다가 힐끔 눈을 든다.) 그리고... 저기. 그 애랑은 여기 앉아서 대화나 조금한 게 다에요. 크게 잘못한 것도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 애는 혼내지 마세요, 예? 제 일은 똑바로 할테니까요. (당돌한 태도는 문장의 끝으로 가며 조금씩 흐려진다. 감싸려고 나서기는 해도 겁은 나는 모양이다.)
 
에르드:(서로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심인가…… 애초 양치기가 불량하게 나오지만 않았어도 불필요한 위협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고압적이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
(후드를 고쳐쓰며 언덕을 향해 걷는다.)
 
양치기는 에르드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양을 몰며 멀어져 갑니다.
 
그와 반대로 언덕을 오릅니다.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평선 끝에서부터 작은 그림자가 당신에게 달려옵니다.
 
태양을 등지고 달려오는 그것의 형태가 점점 더 커지고 또렷해집니다.
 
틀림없습니다.
 
에르드의 애마입니다.
 
함께 이팔로스 원정까지 나섰던, 당신의 소중한 친구 말입니다.
 
한달음에 달려온 말은 에르드의 얼굴을 들이받고 핥아댑니다.
 
흥분한 말이 투레질을 하며 뒷발을 크게 굴러댑니다.
 
베아트리체의 수색대가 남아있던 병사들과 함께 거두어 온 모양입니다.
 
온몸으로 당신을 환영하는 그리운 온기에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이성 회복 +1.
 
에르드:(저에게 무언가 달려오자 반사적으로 경계했지만, 빛 받아 드러나는 형체를 알아보곤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병사들과 다를 바 없이 험한 전장을 누비며 함께 맞서 싸운 전우. 얼굴을 핥아대는 말의 목덜미를 차근차근 쓸어주었다.) 살아 있었구나.
(베아트리체는 물론이고 사병 하나 없이 거지꼴로 나라를 누비며 꽤 지쳤던 모양이다. 이렇게나 반갑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잠시 말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대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탔다. 안장과 고삐가 없이도 편안하기만 하다.) 자. 가자. (가볍게 옆구리를 걷어차 무화과 나무로 향했다.)
 
긴 목을 휘감으며 해후를 나누던 애마는 에르드를 등에 태우자마자 시원스레 앞으로 나아갑니다.
 
무척이나 익숙하고 편안한 감각에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느려집니다.
 
무화과 나무에 다가가면 누군가가 그늘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보입니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사람이 몸을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멀리서는 탈진한 사람인지 시체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몰골입니다.
 
에르드:(말에게 멈추란 신호를 보내고, 그 위에서 뛰어내려 나무에 기댄 사람에게 다가가 살핀다. 아는 얼굴인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 자는 움찔하더니 서서히 고개를 듭니다.
 
드러난 것은 당신과 같은 얼굴입니다.
 
두 눈이 있던 자리에서 피와 진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내리고, 그의 이마에는 죄인임을 나타내는 낙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참칭했다가 베아트리체에게 정체를 발각당했던 그 죄수입니다.
 
갈라져 터진 입술 사이에서 쇠를 긁는 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죄수: 어째서 나를 부르는 거지? 나는 이제 그만 죽기로 했어. 조금만 더 있으면 평온하게 의식이 끊어질 차였는데, 왜, 왜….
 
당신을 원망하듯이 휘적거리던 죄수의 손이 에르드의 몸을 칩니다.
 
암갈색 외투에 손이 스치는 순간, 죄수가 멈칫합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돌변한 그는 더듬더듬 외투를 만져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그것을 확 잡아당깁니다.
 
외투가 벗겨져나가고, 에르드의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나뭇가지처럼 마른 두 손이 에르드의 뺨을 완전히 감싸쥡니다.
 
미친 사람처럼 에르드의 얼굴을 휘어잡고 더듬어대던 죄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갑니다.
 
만면에 가득해진 미소에 얼굴 근육이 바르르 경련합니다.
 
죄수: … ...에르드! 에르드! 하하. 으하하하하! 죽지 않았구나. 네놈이 정말 살아있었어! 이런 촌극이 다 있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름끼치는 폭소가 이어집니다.
 
이성 판정(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49/24/9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이놈이고 저놈이고, 왕의 이름을 저잣거리 시정잡배마냥 불러대는군. (처음 정체를 확인했을 때 다시 돌아갔어야 했는데.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다. 죄수의 손에서 망토를 빼앗아들곤 그의 안면에 주먹을 내갈겼다.) 내 손으로 네놈에게 형벌을 내리지 못한 게 통탄스러울 뿐이다.
 
정통으로 맞은 주먹에 풀밭으로 나동그라지면서도 죄수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죄수: 하하하, 아하하하... 하하.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풀밭을 구르다 그대로 몸을 축 늘어트린다.) 왜 살아있는 거냐? ...아니지, 왜 이제 돌아온 거지?
 
에르드:곧 목숨이 끊어질 네놈이 알 필요는 없다. (죄수의 손이 닿았던 얼굴을 문질렀다. 뭐가 묻기라도 한 것마냥 피부를 벅벅 닦아냈다.)
 
죄수: 하하....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웃음을 서서히 거두며 허공에 손을 휘적인다.) 네가 뒤집어 쓰고 있는 게 뭔지는 아는가?
 
에르드:……모습을 다른 사람처럼 바꾸어주더군.
 
죄수: ...큭큭. 그래, 평범한 망토는 아니지. 네가 뒤집어쓴 건 사람의 가죽이다. 본래 왕궁 안팎에서 구걸하던 거지였는데.. 주제에 왕비, 베아트리체에게 마음을 품었다지 않나? 덕분에 사랑의 묘약이니 뭐니를 미끼로 은신처로 유인하기는 쉬웠지. 그놈의 가죽도 나보다 네가 더 잘 써준 것 같군!
우습지, 아주 우스워... (기침을 토해내더니 피가 흐르는 입가를 벅벅 문질러 닦는다.) 네 겉모습을 뒤집어쓰고 베아트리체를 홀려 인생을 바꿔보려 했지만…. 보다시피 이 꼴이 되었어. 거대한 힘들이 이 나라를 삼키기 위하여 호시탐탐 눈을 굴리고 있다는 걸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이겠지.
 
에르드:그런가. 네놈도 참 비위가 좋군. (망토를 흘끗 내려다볼 뿐, 별다른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수년간 전장을 누비며 온갖 못 볼 꼴들을 목격하고 때로는 겪어 왔으므로. 양치기의 눈에 띌지도 모르니 다시 망토를 덮어썼다.)
네 패인이 뭔지 아는가? 아모르베루스를 노리는 권력 있는 구혼자들 때문이 아니야. 이런 망토를 만든 지식으로 관직이나 욕심낼 것을, 지나치게 눈을 높여 베아트리체를 유혹한다는 멍청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감히 왕비의 눈을, 마음을 속이려 들다니. 네놈을 두 번 죽이지 못하는 게 아쉽구나.
 
죄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과장된 말투로) 인간이기에 더 욕심이 나는 거지! 더 높은 것을.. 더 많은 것을..!
(풀썩 팔이 땅으로 떨어진다.) 어디 어리석은 게 나 하나 뿐일까. 에르드, 네 나라를 노리는 자들은 하나가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아가리가 벌어질 지 모르지. …아니, 안다고 해도 한낱 인간인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지? 당장 저 [북쪽 숲]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아하하!
 
이어 죄수는 낮은 소리로 낄낄거리기 시작합니다.
 
죄수: 만약 네가 돌아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나와 같은 꼴로 만들어 내쫓는다면…. 으하하! 우습다, 우스워. 지금껏 베아트리체, 그를 보호해 온 의심이 스스로를 찌른 셈이 되지 않나? 카하하하!
 
숨이 넘어갈 듯 웃어재끼던 죄수는 이윽고 탈진한 듯 무너집니다.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던 그는 대화로 모든 힘을 다한 듯, 천천히 숨이 끊어집니다.
 
평원의 끝에 걸린 [북쪽 숲]의 녹음이 유난히 검어 보입니다.
 
그토록 맹수가 많고 위험하다는 숲에, 기묘하게도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숲의 거대한 그림자가 이리저리 뒤틀리며 불길한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숲에는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방문해야겠습니다.
 
에르드:(귀를 긁는 소음만 남기고 죽어가는 죄수를 무시하고 먼 북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녀들이 주기적으로 호위까지 받으며 오가는 곳. 새 한 마리 없는 불온한 기운이 풍긴다. 10년 사이 온갖 것들이 아모르베루스, 나의 나라에 거머리처럼 붙어 기승을 부리는군. 싸그리 쓸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베아트리체에게 돌아가리라. 그가 저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가자. (다시 말 위에 올라타 은신처로 돌아간다.)
 
어느새 해가 능선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버려진 은신처로 돌아가 잠을 청합니다.
 
오늘 밤은 혼자가 아니니, 춥지도 외롭지도 않을겁니다.
 
.
 
.
 
.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제 이 은신처에서 잠을 청할 밤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이 듭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권세가 헥터와 상단주 시메온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북쪽 숲]에 찾아가면 다소스의 왕 바실리스와 접경국의 왕자 필립소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루 해는 짧고, 양측 모두를 방문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두 세력에 얽힌 수상한 정황들을 계속해서 목격하였습니다.
 
어느 세력이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나요, 에르드?
 
당신은 어디로 나아가서, 어느 세력의 전모를 파헤치겠습니까?
 
에르드:(바실리스와 필립소가 아주 의심스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적어도 그들은 저에게 전우애와 순수한 연심을 보여 주었다. 제 갑옷을 태우는 장례식 때 다시 한 번 확인한 바 있다. 그러니, 단 하나만 적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가 칼을 겨눌 곳은 말할 것도 없이 헥터와 시메온이다.)
 
당신은 왕가의 묘지로 향하기로 결정합니다.
 
계단이 끝없는 어둠으로 이어지던 것을 생각해보면,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기름을 채운 도자기 램프와 부싯돌을 준비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르드:(그 끔찍한 환영을 다시 볼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분이 나빠지지만, 감수해야만 한다. 도박꾼에게서 받았던 동전을 탈탈 털어 램프와 부싯돌을 사들고 묘지로 향한다.)
 
남겨둔 돈을 탈탈 털어 준비를 마쳤습니다.
 
왕가의 묘지에 도착하면, 저 멀리 새로 축조한 무덤 앞에 잿가루가 담긴 항아리를 안아든 베아트리체가 보입니다.
 
구혼자와 병사들, 시중드는 사람들도 그 뒤를 따릅니다.
 
인파가 한 쪽에 몰린 틈을 타서 어제 발견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에르드:(먼발치에 서 있어도 온 신경이 그를 발견하고 반응한다. 그러나 때가 아니다. 결혼식이 거행되기 전 모든 걸 끝마쳐야 한다. 오히려 인파가 그쪽에 쏠렸음을 고마워해야겠지. 조용히 본래 제 무덤으로 들어서 무거운 석관의 뚜껑을 밀어젖혔다.)
 
계단을 타고 걸어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위가 서늘해집니다.
 
습기를 머금은 찬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등불 외에는 아무런 광원이 없는 지하공간은 거리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다다르면, 판판한 돌로 잘 포장된 긴 [복도]가 나타납니다.
 
에르드:(램프를 앞으로 들어 비추며 조심히 복도를 걷는다.)
 
사람 두 명은 넉넉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길목입니다.
 
하나로 이어진 복도는 도시의 지하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도록 설계된 것 같습니다.
 
길은 한 갈래 뿐이라지만, 깊이와 길이를 감안하면 상당히 오랜 시간 많은 인력을 투입한 구조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돔 형태의 천장과 적당한 간격으로 선 두꺼운 [기둥]이 흙의 무게를 나누어 받치고 있습니다.
 
한 번씩 휘어지고 꺾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곳곳에 또 다른 계단들과 곁가지로 뻗은 복도들도 보입니다.
 
이 구조물은 도시 곳곳과 연결되어 있는 비밀 통로인 것 같네요.
 
짧게 끊기는 복도들의 끝에는 신상의 형태로 조각한 [부조]가 보이고,
 
중심이 되는 큰 길은 계속해서 [더 깊은 어둠]으로 이어집니다.
 
에르드:(사실상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10년 전부터 이곳을 만든 건가. 이 길로 이팔로스의 반란군이 처들어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겠군. 주변을 주의깊게 살피며 걷다가 기둥을 바라본다.)
 
이런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데만 해도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모되었을텐데, 꾸밈새마저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에르드의 키보다 더 높은 곳의 기둥 머리에는 휘몰아치는 파도의 형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있습니다.
 
당신이 처음 정신을 차린 해변에서도 보았던, 이팔로스 양식의 건축 자재입니다.
 
에르드:(아모르베루스에 이팔로스의 상징을 음침하게 조각해두다니. 주먹을 강하게 말아쥐었다가, 기둥을 지나쳐 부조를 응시한다.)
 
그것은 에르드가 알고 있는 신들과는 다릅니다.
 
절반은 사람, 절반은 물고기의 형상이 뒤섞인 두 존재가 서로의 몸을 휘감으며 기대어 서 있습니다.
 
뾰족하고 작은 머리, 비늘 투성이의 팔, 물갈퀴가 남은 손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은 뱃사람들의 악몽에나 나올 법한 괴수의 형태입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바닷물에 완전히 젖은 신상이 번들거립니다.
 
이성 판정(0/1).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48/24/9
굴림: 49
판정결과: 실패
(이게 그자들이 말하던 '깊은 바다의 주인'인가. 본능적인 불쾌감에 머리가 찡하니 울린다.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신의 형상을 떨쳐내듯 고개를 내저으며 더 깊은 곳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럼에도 나아갑니다.
 
계속해서 복도를 나아가다보면, 저 멀리서 작은 불빛이 어른거립니다.
 
폐쇄된 복도를 따라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쪽에서도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몸을 숨겨야 합니다!
 
에르드:이런. (재빨리 램프의 불을 끄고, 근처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긴다.)
 
그대로 숨을 죽이고 있으면, 멀리서부터 시작된 찰박이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잠시 후, 횃불을 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골목 너머로 나타납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횃불의 일렁거림을 받아 빛이 납니다.
 
눈꺼풀이 없는 눈은 반투명한 피막으로 덮여있고, 청록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비늘이 피부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목덜미가 아가미처럼 벌어지며 식, 식 하고 거친 숨결을 내뱉는 소리가 들립니다.
 
심해인을 목격한 에르드, 이성 판정(0/1D6).
 
에르드:
SAN Roll
기준치: 47/23/9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5
 
에르드: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2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저건 뭐지?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는다. 따개비병을 치유하지 못하면 저런 꼴이 되는 건가? 이미 인간이라 볼 수도 없는 꼴이잖은가.)
 
얼마 전, 감옥에 갇혀있던 그 자와 비슷한 몰골입니다.
 
혹은 그보다 훨씬 심한... ...
 
기이한 생김새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서늘함을 겨우 달래고 있자면,
 
그들 중 한 명이 입술 없는 입을 열고 소금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한 명, 두 명,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목소리는 지하를 울리는 합창이 됩니다.
 
폴리페모스의 반지가 아니었더라면, 저들의 노래에 이성마저 홀려버렸을지 모릅니다.
 
가장 먼저 노래를 시작한 자가 희열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댑니다.
 
에르드:(미쳤다는 말로밖엔 표현할 수 없군. 한때 현명하다고 여겼던 헥터가 적의 세력을 끌어들였다. 그것도 고국의 바로 아래에. 통로와 계단이 여럿 있는 걸 보아 이미 곳곳에 이 지하 통로가 뻗어 있겠지. 땅 아래에서 찰랑일 바닷물을 상상하니 치가 떨릴 지경이다.)
(사람이라 볼 수 없는 흉칙한 몰골은 아마도 저들이 섬기는 신 탓이겠지. 그 불온하고 험흉한 신앙을 이곳에까지 퍼뜨릴 셈인가. 그리 둘 수는 없다.)
(새로운 물결? 썩어가는 더러운 물결이겠지. 물살이 바뀌기 전 반드시 이 수로를 모두 끊어내야만 한다.)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당신의 나라를 노리는 어리석은 이들을 모두 솎아내리라.
 
...숨을 죽이고 심해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다시 복도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갈수록 점점 더 습기가 선명해집니다.
 
복도 바깥으로 들리는 파도 소리에 귀가 멍멍해집니다.
 
돌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작은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져 바닥을 적십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나긴 길목의 끝에는, 에르드의 왕궁 정문에도 비견될 만한 [거대한 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에르드:(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품안에 감춘 칼손잡이를 한 차례 꽉 쥐었다가 천천히 문을 밀어 열었다.)
 
장정 세 명의 키만큼 거대한 문을 밀면, 경첩이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그 거대한 문 너머에서 에르드를 기다리는 것은 장엄한 해저 궁전의 홀입니다.
 
들어가는 순간 압도 당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지하 통로의 부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인간과 물고기가 뒤섞인 형태의 두 신의 조각이 오벨리스크를 닮은 기둥을 중심으로 서로를 휘어감고 있습니다.
 
비늘 하나 놓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낸 조각상의 손 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섬세한 조각을 새겨 넣은 새하얀 [제단]이 그 신상의 발 아래 놓여 궁전의 중심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돔 형태의 지붕에는 색색의 대리석 조각들이 모여 이팔로스의 상징인 회오리치는 파도 가운데의 암초를 그리고,
 
푸르스름한 빛이 맴도는 궁전 바닥에는 세상에서 사라진 언어를 닮은 [붉은 봉인]이 가득합니다.
 
에르드:(이만한 궁전을 만들어 두다니. 분노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하릴없이 입이 벌어지는 위용이다.)
(경비 인원은 없는지 주변을 재빠르게 확인하고는, 손 위에 누운 이에게로 조용히 다가간다. 제물인가?)
 
제단 위에 올라서서 손을 높이 뻗어야 간신히 닿는 높이에 누워있는 사람은 마치 신상의 품에 안겨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놀랍게도 매우 익숙한 얼굴입니다.
 
당신과 함께 사라졌던 장군 중 한 명 말입니다.
 
눈을 감은 채 아주 천천히 숨을 쉬고 있는 그의 얼굴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입니다.
 
맥을 짚어보아도 심박이 매우 느려졌을 뿐, 여전히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르드:
의료
기준치: 1/0/0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에르드:(익숙한 얼굴에 일순 숨이 멈춘다. 이자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 대성공하였음으로 원하시는 판정 하나를 성공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익숙한 이의 얼굴이기 때문일까요?
 
그를 보는 순간 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것을요.
 
어떤 육체적 충격을 주어도, 의학적 처치를 해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의 감옥에 갇힌 것 같은 그의 상태에,
 
눈을 뜨기 전까지의 당신이 어떤 식으로 10년을 잃어버린 것인지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에르드:(그러면 나도,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건가? 돌아오지 못한 장군들을 모두 이런 식으로 관리해왔던 거라면 홀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한 기억과 몸이 이해가 된다. 시메온이 제 갑옷을 가져온 것도.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떻게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
(장군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문을 뒤로한 채 시선을 돌립니다.
 
거대한 황소도 한 번에 올릴 수 있을 듯 넓은 제단이 눈에 들어옵니다.
 
제단 앞면의 조각 속에서는 바로 앞의 신상과 같은 형태의 신이 손을 뻗고 있습니다.
 
월계관을 쓴 왕에게 신이 어떠한 보석을 하사하는 순간입니다.
 
인간들, 그리고 인간과 물고기의 형상이 섞인 자들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신과 왕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바다의 주인이 이팔로스의 왕에게 직접 선사한 보석.
 
시선이 저절로 당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로 향합니다.
 
에르드:(폴리페모스의 눈동자라고 했던가. 이 반지를 신, 혹은 그 신자들을 물리치는 데 쓸 방법은 없나. 무심결에 보석을 손끝으로 더듬었다가 바닥의 봉인을 바라본다.)
 
붉은 봉인은 제단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며 벽과 바닥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그 그림에 가까운 글씨가 발하는 기이하고 잔잔한 빛을, 분명히 어디선가….
 
짧은 순간, 둔기로 강렬하게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이 에르드의 머리를 울립니다.
 
생존 본능이 망각 아래 묻어둔 기억이 틈새를 비집어 벌리고 머리를 드러냅니다.
 
기억의 마지막 순간 허공을 향해 뻗은 당신의 손에는….
 
‘폴리페모스의 눈동자’가 있었지요.
 
를리에의 영원한 악몽으로 인도하는 주문조차 막아서서,
 
이팔로스 앞바다의 궁전이 무너져내린 날, 에르드를 다시금 깨어나게 한 바로 그 보물이.
 
크툴루의 별의 자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에르드, 이성 판정(1D6/1D20).
 
에르드:―윽! (뇌를 열어젖히는 듯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그리고 마침내 수면 아래 깊이 묻혀있던 과거가 떠오른다.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여겨지는 그 순간이. 아, 이 반지가 있어 나만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거구나.)
SAN Roll
기준치: 42/21/8
굴림: 96
판정결과: 대실패
(대성공 찬스를 쓰겠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 순간 손가락에 자리잡은 푸른 보석이 번쩍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깨질듯한 두통을 조금이나마 잠재워 준 것만은 확실합니다.
 
땡 (GM):(이성판정 성공 처리 합니다!)
 
에르드:6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광기의 발작 - 실시간
기절:
기절해서 1D10라운드 후에 깨어납니다.
Rounds: 5
Underlying Insanity Duration (Hours): 6
 
그러나 쉽게 가라앉을 고통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눈 앞에 퍼렇게, 더욱 짙게, 검게 물들더니...
 
그대로 찬 바닥으로 쓰러집니다.
 
서늘함에 온몸이 떨릴 쯤이 되어서야 겨우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손 끝이 차게 굳었으며, 몸이 뻐끈합니다.
 
몸을 데우기 위해서는 얼른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르드:(지친 정신으론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식, 뇌리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장군을 깨워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방법도 모르고 이곳의 구조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위험한 요소를 추가할 순 없다. 잠시 근처의 구조물을 붙잡고 정신을 가다듬었다가 궁전을 나섰다.)
 
해저 궁전과 가장 가까운 계단을 타고 올라가 외부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램프의 기름이 모두 떨어져갈 즈음 통로 위에서 달빛이 새어들기 시작합니다.
 
완전히 계단을 올라가면, [서쪽 해안]의 해식동굴로 이어져 있습니다.
 
틀림없이 내일 아침, 그들의 궁전에서 새 물결이 시작된다고 했었지요.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직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당신 혼자서 막아서기는 어려울 게 분명합니다.
 
성도로 돌아가 군사적 지원을 요청할 상대를 찾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르드:(해안. 저곳도 반드시 가봐야겠군. 허나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 해도 혼자의 몸으로 거대한 세력에 대응할 순 없다. 정체를 드러내서라도 힘을 빌려줄 이를 찾아야겠군. 몇 얼굴을 떠올리며 성도로 향했다.)
 
에르드가 성 내부로 돌아오면 누군가가 에르드에게 말을 겁니다.
 
시녀장: 아, 자네 여기에 있었군.
 
돌아보면 작은 횃불을 든 시녀장의 근엄한 얼굴이 보입니다.
 
시녀장: 베아트리체 님께서 걸인과 나그네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푸셨었네. 그런데 익숙한 얼굴 중 자네만 보이지 않기에, 혹시 찾게 된다면 따로 대접하기를 원하셨어. 나를 따라오게.
 
이 상황에 베아트리체와 접촉할 명분을 저쪽에서 만들어준다니, 운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목격한 것들을 베아트리체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에르드:(의외다. 시녀장 쪽에서 저를 찾을 줄이야. 이런 거지가 하는 말을 믿어줄진 모르겠다만, 일단 저를 기억해서 초대했다는 것부터가 베아트리체의 기억에 남았다는 뜻이니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후드 자락을 깊이 눌러쓰곤 그의 뒤를 따랐다.)
 
시녀장을 따라가면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에 바쁜 사람들을 지나쳐 내궁으로 인도합니다.
 
익숙한 길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면 창가 자리에 기대어 앉은 베아트리체가 보입니다.
 
베아트리체는 당신을 보고 부드러운 얼굴로 시녀장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시각이 늦어 찾지 못했나 했더니, 정말로 데려왔군. 정말 고생이 많았네. 자네는 이제 편히 쉬러 가도 좋아.
 
시녀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갑니다.
 
창가의 자리에 기대어 앉은 베아트리체가 에르드를 바라봅니다.
 
내일 아침이면 베아트리체는 저 상복을 벗고 신부의 옷과 베일을 걸치게 되겠지요.
 
베아트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에르드에게 자리를 권합니다.
 
자리에는 꿀과 포도주, 신선한 올리브유와 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베아트리체는 홀로 잔을 비운 듯 뺨이며 귀 끝에 붉은 기가 돕니다.
 
베아트리체 힐:... ...보게 되어 다행이야. 지금까지는 구혼자들이 드나드는 탓에 왕궁이 거의 개방되다시피 했지만, 새로운 왕이 선출되면 왕궁 문은 닫힐 것이니. ...마지막으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자 불렀소. (발갛게 익은 얼굴이 한결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화장터에서 그대에게 입은 은혜 역시 따로 보답해야겠지.
 
이어 베아트리체는 희고 깨끗한, 소매를 길게 늘어뜨릴 수 있는 고급스러운 새 예복 한 벌을 에르드에게 선물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그대의 마음에 들었으면 해.
 
에르드:왕비님. 이런 미천한 거지를 친히 챙겨주시는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달빛을 등지고 앉은 이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이 멀 것 같다. 감성이라곤 찾아든 적 없던 그의 메마른 가슴도 봄의 현신 같은 베아트리체 앞에서는 물기를 머금고 세차게 뛰었다.)
(술을 마셨구나. 약한 걸 다 아는데. 잔을 들 수밖에 없었겠지. 오늘은 저와 당신 모두에게 착잡하기 그지없는 밤일 테니.)
아모르베루스의 국민으로서 왕비님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니 보답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친히 내려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예복을 공손히 받아들고 의자에 앉았다.)
 
베아트리체 힐:(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넘기며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그렸다. 창백한 피부 위로 술기운에 붉은 기가 도니 그제야 조금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느른하게 기울어진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 목숨을 구한 이를 누가 미천하다 할 수 있겠어.
(더욱 느려진 손길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가까이 밀어준다. 지쳐 색바랜 눈동자가 아니라, 예전의 따스함이 얼핏 비친다.) ... ...그대가 왕궁에서 구걸을 시작한 지 몇 해나 되었을 텐데, 근래의 며칠 동안만큼 그대에게 관심을 둔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리 사람의 마음을 달래는 재주가 뛰어난 걸 알았다면 보다 일찍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을.
… ...일자리를 내어주면 왕궁의 하인이 될 생각이 있는가?
 
에르드:(음식 대신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겨우 빵을 올리브유에 담가 입에 밀어넣었다. 후드를 쓰고 있는 탓에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완벽히 시야에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닙니다. 이리 눈길을 주시니 그저 기쁘기만 합니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일 왕궁을 오갈 권리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그 또한, 정말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왕비님만 괜찮으시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왕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헛된 망상이라 치부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 이리 기꺼이 받아 들여주니, 기쁘기 그지없어. (꼭 제가 잘 아는 이의 목소리와 버릇을 빼닮은 자를 보고 있자면, 자연히 옛 생각에 잠기게 되는지라 질문에 대한 답이 늦어졌다. 나른하게 깔린 긴 속눈썹이 곡선을 그리며 그 아래 눈동자를 드러낸다.)
... ...그래, 말해보게.
 
에르드:(저를 위해 축조되었던 무덤 아래에서 본 광경을 전달한다. 장군을 보았다는 장면은 고민하다가 제외했지만.)
당장 내일 아침 그자들이 궁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이나마 무예에 자신이 있으니 기꺼이 맞서 싸우고자 하지만, 혼자로는 무리입니다. 부디 궁의 방어를 강화하시고, 군사를 준비시키십시오.
 
베아트리체 힐:(당신의 말이 끝맺어질 때까지 묵묵히 앉아있었다. 간혹 끄덕이는 고개만 그가 경청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래, 그들이.
(한참만에 입술이 떨어지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 ...궁의 방어를 강화하고, 군사를 준비시키기만 하면 되겠는가.
 
에르드:예. (굳건히 긍정하곤) 또한…… 제 휘하에도 병력을 붙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무얼 믿고 병사를 내어줄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음을 압니다. 허나 모두 왕비님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헛되게 쓰지 않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묵묵히 내려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베아트리체는 놀랍게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서류 한 장을 가져옵니다.
 
에르드가 말한대로 궁의 방어를 강화하고, 군사를 준비시키라는 칙서.
 
병력을 부릴 수 있도록 허가하는 증서를 작성한 후 곧바로 왕의 인장을 찍어 건넵니다.
 
내일 아침 국경의 병사들에게 이것을 내밀면 지원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현명하고 신중한 베아트리체의 행동답지는 않습니다.
 
그때, 베아트리체가 내려놓은 술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넘어져 탁상 위를 구릅니다.
 
순간 에르드는 익숙한 향을 맡습니다.
 
기름지고 부드러우면서도 시큼한, 짐승의 젖과 닮은 그 냄새를.
 
어째서 이 술이 베아트리체의 탁자에 오른 걸까요.
 
베아트리체는 자신이 무엇을 마셨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듯,
 
창 밖으로 초승달이 뜬 밤하늘을 바라보는 얼굴이 몽롱하고 고요합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짧은 생각이 스쳐갑니다.
 
지금이라면 잠깐 정체를 드러내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술에 취한 사람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잠시 본모습을 보이며 베아트리체를 달래주더라도, 두 사람의 해후를 방해할 이는 없습니다.
 
에르드:(이 술은. 향기를 맡자마자 눈이 커진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병사를 내어줬구나. 기억에 혼선이 생기는 술임을 안다. 가장 먼저 든 걱정은 오늘 한 이야기를 베아트리체가 잊어버리면 어쩌지, 였다. 하지만 칙서가 남아 있으니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안심하자 이제껏 꾹 억눌러 왔던 재회의 욕구가 스물스물 고개를 든다. 어차피 잊어버리게 될 거라면, 차라리 꿈결이라 착각해도 좋으니…… 한 번만 가녀리게 말라버린 몸을 안아주고 싶다고.)
(천천히 후드를 걷었다. 망토 자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다. 왜소한 거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떡 벌어진 건장한 체구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몸을 일으켜 창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딛을 적마다 흠뻑 사랑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길을 밟는 것만 같았다.) ……리체. 술은 몸을 상하게 한다고 했잖아.
 
베아트리체 힐:(천이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느릿하게 고개가 돌아온다. 창을 등지고 선 여인은 겨울 가지처럼 색을 잃고 외로이 홀로 서있었다. 언제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 기다림의 세월만큼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연보라색의 머리칼이 등진 달빛을 받아 장인이 공들여 뽑아낸 은사처럼 흩날린다. 깜빡. 찰나에 가냘픈 턱이, 흰 뺨이,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빛에 물들어간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러나 걸음은 흔들림 없이 올곧게, 향해야 마땅한 곳을 향해 걸음을 뻗듯이. 느리게 뻗던 손이 지근거리에서 멈춘다. ...꿈인걸까. 너무 오래 그리워해, 취기에 보는 환영인가. 그런 것이라면 영영 깨지 않기를, 쉬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서, 간절히 원하면서도 차마 닿지 못하고 그립고 그리워 미워할 수도 없을 이름만 불렀다.) ...에르드.
... ...왜 더 자주 꿈에 나와주지 않았어요.
 
에르드:(10년 동안 검은색 베일을 뒤집어쓴 채 저를 기다리고 또 그리워해왔을 이. 취기가 왕비라는 직책의 무게를 벗겨내자 그가 견뎌 왔을 지난한 나날의 무게가 드러난다. 눈부신 달빛 아래서도 앙상함과 쓸쓸함이 가려지지 않는다. 이런 고난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는데. 그를 사랑한다 자각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도, 평생 함께할 반려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고 듣게 해주고 싶었다.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다. 마음을 깨닫게 된 후로는 말할 것도 없다. 옅은 금빛 햇살과 꽃망울 같은 웃음을 언제까지고 보고 싶었다. 헌데 제가, 제 손으로 모두 앗아가고 말았다.)
(나뭇가지마냥 말라붙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 제 뺨에 가져다댔다. 그래, 차라리 꿈이라 믿는 게 나을 터다. 저 역시 이 애틋함과 죄책감을 흐린 구름 속에 묻을 수 있도록.) 미안해. 미안하다. 너를 고통 속에 너무 오래 내버려 두었지.
이런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한다. 밤 기운을 머금은 곱슬기 있는 머리칼, 무던한 온기가 느껴지는 황금색의 눈동자, 닿는 것만으로도 애달픈 연갈색의 피부. 먼 기억이 한달음에 달려나와 그 간극을 가벼이 메운다. 마치, 그날 밤처럼. 너무나 선명한 꿈이라 달고도 아리다. 온몸을 울리는 제게만 다정한 낮은 목소리, 손을 감싸고 바닥까지 전해지는 이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고자 잠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이상하네, 꿈 속의 당신은 언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떠오르면 그 아래에는 언젠가 봄날의 꽃처럼 피어나던 꽃잎을 닮은 눈동자가 빛난다. 엄지 끝만 움직여, 닿은 눈가를 살살 쓸어낸다.) ...어째서 당신이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어. 그저 나를 안아주고, 고맙다 해주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나 굳건하고, 강인해보이던 이는 제 앞에서는 꼭 무르게 굴곤 해서 꼭 여린 마음을 다 내어 보살피고 싶게 했다.)
... ... 그러니 이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어. 단 한순간도, 그리 생각한 적 없으니.
 
에르드:(꽃잎처럼 부드러운 손길과 목소리를 사랑했다. 아롱대는 빛을 닮은 홍채를 은정했다. 희미하게 끌어올린 입꼬리에서 애상이 꽃가루처럼 묻어난다.) 고마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이나 미안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혼자 보내며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면…… 어찌 마냥 좋다는 이야기만 하겠어.
(두 팔을 뻗어 베아트리체의 허리와 어깨를 느릿하게 끌어안았다. 처음 바닷가에서 눈을 뜨고 사태를 파악했을 때부터 얼마나 이 순간을 바라 왔던가. 살갗의 온기를 느끼고, 체향을 깊이 들이마신다. 본래도 한참이나 공간이 남던 몸이 더 빼빼 말라있어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이 가슴이 아리다.) 멀고 먼 곳에서도 언제나 너를 떠올렸어. 오로지 너만을 사랑해.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같을 거야.
 
베아트리체 힐:(입꼬리에 희미하게 묻어나는 슬픔이 안쓰러워 고개만 저었다. 그 사이 품 가득히 들어차는, 자신을 온통 메우고도 넘칠 그를 안으며 눈을 감았다. 차게 식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심장 한구석이 시리고 허전해 아침을 미워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서. 마른 가지같은 팔이 너른 등에 감긴다. 여전한가? 먼 길을 헤매고 헤매다 여까지 꿈에 찾아오느라 그 사이에 조금은 야위었나.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며 마음을 달래었다. 어느 하나 성치 않았을 두 사람의 마음을. 10년간 기다렸을 고백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당신을 다시 만나면, 왜 이제 왔느냐고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는데, 한 날에는 화라도 내봐야지 싶었는데. 긴 시간은 사무치는 그리움만 앙금처럼 남겼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누구와 있던지?
 
에르드:언제 어디서나, 그 누가 곁에 있을지라도. (답은 망설임없고 굳건하며 단단하다. 베아트리체는 제 세상을 채웠고, 그 누구보다 큰 족적과 존재를 저의 안에 남겼다. 연정을 자각한 뒤로 그의 마음은 베아트리체가 칠해주는 색으로 함빡 물들었다. 나라를 지탱하고 이끄는 업을 타고난 이로서, 베아트리체가 떠난다 하여 무너지지는 않았겠지만 더는 이전과 같은 평온도 다채로움도 행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어땠을까. 저를 꿈에서만 그려야 했을 그는 얼마나 아득하고 막막했을까. 아모르베루스로 돌아온 며칠 동안 곳곳에서 짧게 목격한 것만으로 그 비애를 엿볼 수 있었으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았을 그의 마음에 다시 싹을 틔워주고 싶었다. 길을 열어 끝내는 빛으로 함께 나아가고 싶었다.) 나를 믿어. 네게 돌아갈 테니.
 
베아트리체 힐:...사랑해, 사랑해요. 사랑해. 나의 심장.
(대답은 아주 달콤하게 녹아내린다.)
에르드, 나의 왕이여. ...나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어. (우리가 걸어온 시간, 그 안에서 피워온 다정한 마음, 우리의 백성, 우리의 나라,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 . 혼자서는 완벽하지 못했지만, 돌아올 이가 있으니 그 자리만은 지키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느리게 가슴이 부풀고 내려앉는다. 숨을 깊게 들이 쉬어 온통 체향으로 안을 가득 채운다. 품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흐른다. 아주 작고 미약해 금세 바람결에 흩어져 버렸지만. )
...당신을 믿었으니까.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확신했으니까.
 
에르드:(과거 두 사람은 오히려 대놓고 사랑한다 표현하는 일이 적었다. 굳이 소리내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손짓으로, 표정만으로 제 의사를 전달하고 상대의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시간이 이별로 홍해처럼 우리를 갈랐다. 서로의 눈동자 안에서 빛나던 광채를 잊어버릴 만큼. 맞잡은 손의 온도와 입술의 감촉이 희미해질 만큼. 그러니 목소리로 사랑을 빚어낸다. 당신을 향한 애정이 한 치도 변치 않았다 고한다.)
고생이 많았어. 그 곁을 채워주지 못해 미안해. ……모두 네 노력 덕분이야. 사랑하는 베아트리체, 나의 운명이여.
 
베아트리체 힐:(...모든 손가락을 꼽아야 할만큼 긴 시간, 당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만이라도 알게 해달라며 밤낮을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처음 몇 해 간은 모두 온정적이었다. 당신은 추앙과 존경,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왕이었으며, 나는 당신의 왕비 였으니. 몇 해간 신전은 민심을 다스리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그것도 5년. ...그나마 신전은 오래 버틴 편이었다. 함께 에르드 왕을 기다리자며 기반이 되어주던 세력들은 모두 차례로 돌아섰고, 홀로 5년을 버텨왔다. 여태 쌓아온 부는 민생을 관리하는 데에 소모했다. 민심마저 내 편을 떠나버리면, 나를 자신을 쫒아내고 가장 명분있는 자를 새 왕가의 시조로 세웠을테니까. 끝나지 않는 겨울처럼 길고도 시린 세월이었다.)
(...다소스의 왕만이, 그날로부터 줄곧 도움을 주었다. ... 그 힘. 겨우 의지할 동앗줄 하나만 잡고, 버텨왔다. 당신을 위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러나, 지금 이순간. 금방이라도 봄이라는 듯이, 지난 세월이 눈녹듯 녹아내린다. 따스하게 흘러내린다. 우리는 운명으로 엮여 서로의 심장이 되었으니 비로소 깨닫는다. 어떤 거창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당신의 말 하나로 충분했구나, 나는. 취기 어린 눈동자가 하늘에 걸린 초승달보다 환하게 휘어진다.) ... 사랑하는 에르드, 다시는 나를 떠나가지 말아.
 
에르드:이젠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달빛이 베아트리체가 홀로 보내왔을 세월을 전해주는 듯하다. 희고 붉게 물든 그의 뺨을 애틋하게 쓰다듬고 고운 이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당신에겐 한낱 꿈으로 가라앉을지 모르나, 진정으로 재회했을 때 마침내 깊은 입맞춤을 나눌 것이다. 두 사람을 갈라두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뿌리는 다시 맞닿아 서로를 끌어안고 휘감기 시작한다.) 널 외롭게 하지 않아.
 
베아트리체 힐:(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흐른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번쩍이는 황금과 오색찬란한 꽃으로 장식된 길의 끝에서 당신의 진정한 반려가 되었던 그날이 떠오른 탓이다. 그날의 영광을 다시 그리며 끄덕인다.) ... ...기다릴게요, 언제까지나.
 
베아트리체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깁니다.
 
포도주향이 밴 호흡이 천천히 느릿해집니다.
 
베아트리체를 침대에 눕혀두고 다시 외투를 걸치고 나면, 때마침 시녀장이 방으로 들어옵니다.
 
취해서 잠든 베아트리체를 발견한 시녀장은 에르드에게 ‘왕궁은 내일 정오에 있을 왕위 계승식으로 분주해질 예정이니,
 
괜히 이 근처 골목에서 노숙하다가 말발굽에 치이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습니다.
 
내일은 새로운 왕이 선택되는 날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 해가 걸리는 순간, 베아트리체는 구혼자 중 하나에게 면류관을 씌워줄 것입니다.
 
베아트리체가 선택한 구혼자가 높은 단상에 오르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만인에게 선언하겠지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정오가 되기 전에 왕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압니다.
 
서쪽 해안/북쪽 숲에서 목격한, 구혼자들이 이 나라를 삼키고자 오랜 세월 준비해온 흉계를 저지하는 것 말입니다.
 
내일을 기약하며, 은신처로 돌아와서 잠을 청합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얼룩지고 구멍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갑니다.
 
에르드가 이팔로스로 떠나가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베아트리체와 보낸 둘만의 시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베아트리체가 문득 농담조로 운을 뗍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 거리의 젊은 아가씨들은 사지에 나서는 연인에게 무사히 돌아와 구혼해달라고 당부한다는데, 나에게는 이미 혼인한 남편이 있으니 어찌 해야 하려나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베아트리체는 이윽고 시선을 맞춘 그대로 속삭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세요, 에르드. 무사히 돌아오시면, 그때는…. 나에게, 다시 한 번 구혼해줘요. 당신이 내 마음을 얻었던 그 밤, 나에게 건넸던 그 말 그대로.
 
에르드의 이마 위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습니다.
 
오래 전 흘러간 과거임을 앎에도 벗어나기 어려운 꿈이 점점 흐릿하게 멀어져 갑니다.
 
...
 
다시 눈을 뜨면, 에르드가 누운 자리는 왕비의 침상이 아닌 버려진 은신처의 건초더미 위입니다.
 
아침이 되었으나 날은 밝지 않았습니다.
 
하늘에는 안개처럼 엷은 구름이 깔려있고, 어두운 장막에 갇힌 태양은 힘을 잃고 제대로 빛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듯 불길한 광경에 압도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은신처 바깥의 세상은 새로운 왕을 맞이할 준비에 분주합니다.
 
군중은 베아트리체가 누구의 손을 잡아 왕좌로 이끌어갈지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본능적인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려는 그들 나름의 발버둥인 듯, 기대에 찬 어투와 달리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당신의 얼굴을 덧씌웠던 외투는 이제 완전히 벗어내어도 좋습니다.
 
흰 옷의 소매를 늘어뜨리고, 이 나라에 주인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러 갑시다.
 
에르드:(일주일 가까이 뒤집어쓰던 망토를 마침내 불길에 태워버린다. 실패한다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실패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왕좌를 되찾고 고혈을 짜내며 들러붙은 구혼자들을 처단하리라.)
(베아트리체가 내려준 깨끗하고 단정한 흰 옷을 차려입고 이른 아침의 어스름한 회색 하늘 아래 발을 디딘다.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서 망설임없는 걸음으로 군중들 틈새를 지나쳐 국경으로 향했다.)
 
흰 천이 걸음마다 바람에 펄럭입니다.
 
국경을 수비하는 병사들에게 찾아가 베아트리체의 친서를 내밀면 모두 크게 술렁입니다.
 
어떻게 이 낯선 사람이 베아트리체의 친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지 논의가 일어납니다.
 
그때, 누군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소리가 들립니다.
 
돌아보면 병영에서 만났던 전령 출신의 장교입니다.
 
그는 저승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도 목격한 듯 얼이 빠져 더듬거립니다.
 
장교: 마, 말도, 말도 안…. 어떻게…. 에르드, 에르드 전하…?
 
장교의 한마디에 삽시간에 소란이 번져나갑니다.
 
에르드:(수런거리는 군인들 사이에서 홀로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다. 태산처럼 우직한 덩치와 굳건한 위용. 냉정하게 불타오르는 금빛 눈에 위엄이 넘친다.) 그래. 아모르베루스의 왕, 에르드다. 베아트리체의 인장이 찍힌 친서가 있고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니, 더한 의문이 필요하겠나?
 
에르드의 위용에 소란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집니다.
 
그 중 장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에르드의 명을 받듭니다.
 
장교: 곧바로 병사들을 무장시키겠습니다. 한 시가 급하신 듯 하니, 발이 빠르고 용맹이 뛰어난 자 몇 명을 우선 준비시키겠습니다. 준비가 마무리되는 즉시 모든 병사가 전하의 뒤를 따르겠나이다!
 
이후 장교는 에르드의 애마를 끌고 옵니다.
 
하루 사이에 사라졌나 했더니, 이곳으로 돌아와 있었나봅니다.
 
: 말을 타고 소수의 수행원을 거느린 채 평원을 가로질러 북쪽 숲의 제단으로 가거나, 해안가로 이동하여 해저 궁전에 찾아갈 수 있습니다.
 
에르드:(말에 훌쩍 뛰어올라 군사들을 내려다본다.) 서쪽 해안의 해식동굴로 간다. 나라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다! 모두 칼을 차고 무장을 하라. 그대들의 용맹을, 그대들의 핏줄인 이 아모르베루스에서 증명하라.
(고삐를 돌려 곧장 서쪽 해안가를 향해 박차를 가한다. 수행원들이 뒤를 따른다.)
 
때가 왔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곧장 해안으로 나아갑니다.
 
해저 궁전에 도착한 에르드의 앞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결박당한 접경국의 왕자, 필립소 입니다.
 
필립소:(결박을 풀고자 뒤틀던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 ...세상에. 정말 에르드 왕이십니까? 바실리스님이 당신이 돌아온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은 있지만... 사실일 줄이야.
 
에르드:(의외의 얼굴이다. 그를 무덤덤하게 내려다본다.) 그래. 그대는 어찌 이곳에 묶여 있는가?
 
필립소:(말을 고르다 그냥 눈 딱 감고 얘기한다.) 염치가 없다고 받아들여질 행동임을 압니다만, 결박을 풀어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지금 이 곳에서는 매우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합니다.
 
에르드:그대를 이대로 두고 갈 작정은 아니었다. (곁의 수행원에게 턱짓으로 결박을 풀라 지시한다.) 나 또한 그것을 알아채고, 불온한 자들을 직접 처단하러 왔다.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되었지?
 
필립소:(묶여있는 채라 고개만 가볍게 숙였다.) ... ...그건.
 
그 순간, 등 뒤에서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시메온:하하! 웬 쥐새끼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 했더니, 이리도 반가운 얼굴일 줄이야!
 
헥터:역시나, 그럴 사람은 당신 뿐이라고 생각했지. 에르드. (시메온을 바라본다.) 거래는 잊지 않았겠지?
 
시메온:네, 네~. 땅과 권력은 당신의 것으로, 바다와 사람은 우리의 것으로.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요.
 
에르드:쥐새끼라. 나라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외세를 들여온 너희에게 붙어야 하는 표현이 아닌가? (싸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웃음기는커녕 선뜩한 살의만이 가득한 미소다.)
반역자, 시메온. 이팔로스와 어떤 관계지?
 
시메온:하하하! 뭐어,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일텐데 그 정도 궁금증은 풀어드릴까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턱을 문지른다.) 이팔로스, 이팔로스. 아하.
저희 집안은 원래부터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자들과 친분이 있었죠? 그래서 이팔로스가 멸망한 후, 잔존 세력이 이쪽 바다로 건너와 제게 의탁하게 된 거다, 이 말입니다!
해저 궁전 건설을 마친 후 에게 해에 남겨진 ‘보물’들을 이주시켰는데…. (어깨를 으쓱인다.) 그 과정에서 보물들과 함께 궁전에 봉인되었던 당신도 깨어나 버린 모양입니다.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에르드:(바다를 이상하리만큼 잘 안다는 평가하며 장부에 적힌 내용하며.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 깨워주었으니 은인이라고 해야 할까. 베아트리체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어 고맙군. (빈정댔다.)
네놈들은 반드시 내 칼로 목을 베어주마. (검집에서 검을 빼들었다.)
 
번뜩이는 날을 본 순간 시메온이 한 손을 들어올립니다.
 
시메온:자, 자. 그리운 얼굴들도 천천히 보여드릴게요~. 당신에게는 10년이나 부대끼고 지낸 사이잖아요?
모두 주목 부탁드릴게요. 우리의 보물, 바다 밑에 잠든 별의 자식들을!
 
허리를 숙인 시메온이 바닥의 봉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습니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한 순간, 해저 궁전의 바닥이 흔들리며 열린 틈새로 바닷물이 솟구칩니다.
 
그때, 계단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완전무장을 한 병사들이 쏟아지듯 홀에 들어서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반란군은 모두 무기를 버려라!”
 
“소란을 그만두고, 에르드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자비를 빌어라!”
 
장교가 약속한 원군입니다.
 
헥터는 팔카타를 높이 들어올리며 술렁이는 병사들에게 신호합니다.
 
반란군은 곧 전의를 다잡으며 적을 향하여 돌격합니다.
 
곳곳에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해저 궁전에서 난전이 벌어집니다.
 
해수의 비릿함과 피냄새가 뒤엉키는 전장에서 전투가 시작됩니다.
 
: 헥터의 손짓을 신호로 심해인과 심해인 혼혈 병사가 한 명씩 등장했습니다.
결박에서 풀려난 필립소가 에르드에게 합류합니다.
전투 순서는 에르드 - 필립소 - 시메온 - 심해인 - 심해인 혼혈 - 헥터 순입니다.
상단주는 봉인을 푸는 주문을 영창하는 데에 여념이 없기 때문에 공격도, 반격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5라운드 안에 상단주를 처리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굉음과 동시에 모든 봉인이 터져나가고, 그 틈새로부터 심해수와 함께 솟아올라온 크툴루의 별의 자식이 전투에 참전합니다.
 
에르드:(칼을 쥔 채 그대로 박차를 가하며 시메온에게 달려든다. 지금까지 범해 온 온갖 무례는 물론이고, 바다와 연결되어 있을 게 뻔한 주문을 막기 위해서라도 최우선으로 노려야 한다. 높이의 우위를 점하고 위쪽에서부터 시메온의 어깻죽지를 향해 사정없이 칼을 내리쳤다.)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1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10
 
번뜩이는 날이 삿된 주문을 외우는 시메온의 어깻죽지를 노립니다.
 
에르드가 여태 쌓아온 분노는 가죽과 뼈에 박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깊게 박힌 날에 주문을 외우던 팔 한짝이 그대로 날아갑니다.
 
시메온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 대신 죽음에 임박한 공포와 두려움이 떠오릅니다.
 
입에서 피거품을 토하며 숨을 껄떡입니다.
 
에르드:(반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이다. 바깥 세상에서는 십 년이 흘렀으나 실상 에르드의 신체와 기억은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음이라. 힘을 실어 칼을 휘두르니 간단하게도 팔이 날아간다. 카타르시스와 분노가 들끓는 금빛 눈으로 죽어가는 상단주를 내려다본다.) 나의 왕비를 우롱하고 능멸한 죄. 나라를 함부로 휘두르려 한 죄. 이외에도 네놈이 부린 횡포를 따지자면 셀 수가 없겠지. 네놈의 목을 열 번, 스무 번을 쳐도 모자라다.
네놈도 죽음의 공포는 아는구나. (비스듬히 웃고는, 부러 시메온의 복부나 다리를 칼로 찔러대며 극한의 고통을 준다. 그런 끝에서야 비로소 목을 내리쳤다.) 죽어라.
 
: 시메온의 목이 바닥을 구릅니다. 봉인을 푸는 주문이 멈췄습니다.
 
필립소:잔챙이들은 제가 처리할테니 왕께서는 저 자를 노리십시오! (검을 고쳐 쥐고는 심해인에게 바로 달려든다.)
크시포스
기준치: 70/35/14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14
 
: 필립소의 칼날에 심해인이 비명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심해인 혼혈:... (피가 낭자한 주변을 돌아보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곧장 에르드에게로 손톱을 세우며 달려든다.) 키야아아아악-! 죽어라, 우리의 바다의 원수여!
비무장
기준치: 45/22/9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2
 
에르드: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피해: 11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러 곧장 괴상한 이의 심장을 찌른다.)
 
에르드의 날은 따개비를 닮은 피부를 뚫고 심장까지 단박에 꿰뚫습니다.
 
심장에서부터 붉은 것이 터져 나오며 축 늘어집니다.
 
: 심해인 혼혈이 바닥을 구릅니다. 어느새 숨이 멎었습니다.
 
헥터:(그 상황을 가장 뒤에서 관망하던 이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다. 바닥에 쓰러진 것들을 발끝으로 툭 치며 앞으로 나온다.) 10년 만에 깨어나도 이 정도라니. 정녕 당신이 인간이 맞나? 이것들보다 더한 괴물이 아니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에르드에게 달려들며 크게 휘두른다.)
도검 - 코피스
기준치: 25/12/5
굴림: 36
판정결과: 실패
피해: 2
(힘이 과하게 실린 탓에 검은 어디에도 스치지 못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젠장!
 
에르드:검은 여전히 부족하군. 무예 수련은 안 하고 베아트리체를 나날로 괴롭히며 왕좌를 탐내기만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빗나가는 검의 궤적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장 헥터의 반경으로 파고들며 복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68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8
 
헥터:(손목을 꺾어 검을 부딪혀 반격한다.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웃기는 군. 베아트리체는 당신을 기다리느라 나라를 망쳤어. 그가 의지해온 다소스의 왕은 우리와 다른 신을 섬기는 자다.
도검 - 코피스
기준치: 60/30/12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피해: 4
 
: 헥터 체력 -4, 남은 체력 10.
 
에르드:그 모독적인 신을 믿는 이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깊은 바다의 주인'인지 뭔지가 이팔로스가 섬기던 신임을 잊지는 않았을 테고.
나라를 망치는 건 바로 네놈이다. 마지막까지 그 더러운 혀를 놀리는군. 자비를 베풀 마음 따위 원래도 없었으나, 네놈은 결코 살려둘 수 없다.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9
(목덜미에 칼을 박아넣는다.)
 
비릿한 웃음이 걸려있던 헥터 얼굴이 순간 희게 질립니다.
 
흰 목에서 가늘게 흘러내리던 선혈이 서서히 폭포처럼 타고 흐르며 바닥을 적십니다.
 
피거품 끓는 입으로 무어라 입을 뻐끔거립니다.
 
헥터:....크헉, 쿨럭. ...어리석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줘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 ..역시, 그 자리는 나의 것이었어야 했어.
 
에르드:그래, 역시 쉽게 보내줄 수야 없지. (선혈이 줄줄 흐르는 목에서 칼을 빼내고, 이미 빈사가 된 헥터를 벽에 밀어붙인다. 완전히 죽이려는 듯 다시금 칼을 고쳐쥐었다.)
 
시메온에 이어 헥터까지 쓰러지자 온몸을 울리던 해저 궁전의 진동이 멈춥니다.
 
무릎까지 차오른 물 위에 쓰러진 사체들로부터 붉고 푸른 피가 번져나갑니다.
 
헥터는 입가에 고이는 피를 뱉으며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상태에서도 낮은 웃음을 흘립니다.
 
헥터:아…. 해 볼만, 할 줄, 알았는데. 어렵네….
 
피투성이의 남자는 그대로 떨리는 팔을 겨우 들어 제단 가까이로 뻗습니다.
 
헥터:..정당한, 승리자에게는, 마땅한 전리품이…. 있어야겠지. …잘 해봐.
 
헥터가 목가의 선혈에 젖은 손을 뻗어 제단을 짚습니다.
 
힘줄이 돋아나도록 주먹을 틀어쥐고, 죽어가는 몸에 남은 모든 힘을 그러모아 제단 앞면의 정중앙을 내려칩니다.
 
헥터:...하하하.
 
에르드:(머리부터 발끝까지 계략으로 들어찬 것 같은 간교한 놈이다. 다 죽어가는 중에도 끝끝내 불길한 짓을 하려 드는가. 헥터의 뒷머리를 잡아들어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던진다. 그리고 가슴팍에 칼을 느리게 찔러넣었다. 살갗을 넘어 심장까지 가닿는 감각을 하나도 빠짐없이 느끼도록.) 씹어먹어도 모자랄 놈. 네놈의 숨을 거두겠다.
 
묵직한 검이 피부를 발기고 뼈를 으스러트리며 심장을 터트립니다.
 
적의 심장을 쥐었습니다.
 
그의 피는 푸른 바닷물에 잠식되어 갑니다.
 
그때,
 
쿵, 주변이 내려앉는 충격에 모두가 비틀거립니다.
 
멈추었던 진동이 다시 시작됩니다.
 
바닥이 열리는 것이 아닌, 기둥과 천장의 구조가 뒤틀리는 충격입니다.
 
깨어진 천장 곳곳에서 물이 쏟아집니다.
 
당신의 머리 위로 부러진 대들보 조각이 떨어집니다.
 
피하기 어렵다, 그렇게 직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쾅-....
 
거대한 방패가 당신을 막아섭니다.
 
자칫 머리에 부딪힐 뻔한 대리석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박살이 납니다.
 
엄청난 충격에 온몸을 요동하며 당신을 돌아보는 이는, 다름 아닌 아스클레피온의 간호사입니다.
 
처벌이 두려워 도망쳤다던 그는 덜덜 떨리는 두 팔로 에르드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 있습니다.
 
간호사: 죄, 죄송합니다. 병사들이 이리로 몰려가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장교: 전하, 건물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서둘러 지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에르드:(역시 내부에서의 전투는 위험했나. 격통을 예감하며 팔을 반사적으로 치켜들었으나, 한 인영이 모든 것을 막아선다. 간호사를 알아보고는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옅게 미소한다. 그의 떨리는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지켜주어 고맙다.
(그리고 간호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칼을 고쳐쥐고 번쩍 치켜든다.) 수장은 죽였다. 궁전이 무너지고 있으니 전원, 속히 퇴각하라!
 
장교: 퇴각! 퇴각이다! 전원, 속히 퇴각하라!
 
에르드가 퇴각을 명령하면 병사들이 큰 소리로 명을 받습니다.
 
쓰러진 동료를 부축하고, 발목을 붙드는 적을 뿌리치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바닷물을 피해 계단을 달립니다.
 
등 뒤로 바닷속의 궁전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들립니다.
 
물과 돌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는 어딘지 익숙합니다.
 
10년 만에 깨어난 당신이 처음으로 들었던, 온몸을 울리는 듯 격렬한 그 소음입니다.
 
쏴아아….
 
에르드의 발이 지상을 밟은 순간, 계단까지 완전히 파도에 휩쓸립니다.
 
화려했던 해저 궁전은 흔적도 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곳에 잠들어있던 ‘보물’은 산산히 분해된 궁전의 잔해와 함께 해류를 따라 대양으로 쓸려나가 흩어지게 되겠지요.
 
어떠한 그림자도 남지 않은 청록빛 바다의 소용돌이가 점차 잦아듭니다.
 
에르드:험흉한 신이었다. (제 손에 여전히 끼워진 반지를 흘끗 내려다본다. 반란을 진압했으니 더는 이 반지를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감히 왕좌를 앗으려 한 이들은 모두 목이 떨어졌다. 궁으로 돌아가자! (해저 궁전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곧장 말머리를 돌려 왕궁으로 박차를 가한다. 왕비를 재회할 곳으로.)
 
적의 피를 뒤집어쓴 몸이 무겁습니다.
 
머리 위의 하늘에선 태양이 어둠에 갉아먹히고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전장에 찬미해 마땅한 영광은 없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오직 비명, 피, 아우성, 쇠붙이, 절규, 심장의 고동, 영혼,
 
죽음, 죽음, 죽음….
 
그래도, 그러므로 돌아가야 합니다.
 
베아트리체가 지금까지 홀로 버텨온 그 전장으로.
 
성벽을 허무는 자, 도시를 사르는 불꽃, 바다의 저주를 받은 영웅.
 
에르드는 10년의 세월을 지나 마침내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이팔로스를 무너뜨렸던 날, 무수한 죽음을 짊어졌던 그 모습 그대로.
 
그때, 말머리를 돌리는 에르드의 등 뒤로 누군가 이름을 외치며 달려옵니다.
 
잠시나마 함께 등을 맞대었던 필립소입니다.
 
필립소:이건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근래에 헥터와 시메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바실리스 님과 함께 사병을 모으고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사라졌는데도 그쪽에서 구하러오지 않았다면….
(목소리를 낮춘다.) 다소스의 왕은 나를 배반하고 왕궁으로 향한 걸지도 몰라. 베아트리체 님께서 위험해….
 
그리 말하며 에르드의 등을 떠밀어줍니다.
 
에르드:(북쪽 숲의 불온한 징후는 역시 바실리스와 필립소의 세력이었군. 베아트리체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눈이 돌아간다. 마침내 재회를 코앞에 두고 있다. 결코 사랑하는 이에게 더한 위협을 안겨줄 순 없어.) 전속력으로 달려라! (가장 앞에서 말을 몰고 내달린다.)
 
우레와 같은 함성을 이끌며 말을 달립니다.
 
왕궁 앞, 높게 쌓아 올린 의례용 단상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단상 아래 모인 인파는 모두 고개를 들고 그 위에 홀로 선 베아트리체를 우러러봅니다.
 
성스러운 의식을 상징하는 흰 천 위에 에르드의 왕관을 든 베아트리체가 서있습니다.
 
황금으로 조각한 월계관의 안에 태양이 담기도록 들어올린 채, 느릿한 목소리로 읊조립니다.
 
베아트리체는 천천히 구혼자들이 모인 방향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바윗돌처럼 굳어버린 몸이 경련합니다.
 
좌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목소리는 완전히 가라앉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입술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베아트리체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눈길이 일시에 당신에게로 쏟아집니다.
 
어느 누구도,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에르드:(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칼과 피로 젖은 로브 자락이 휘날린다. 왕궁에 모인 인파와 단상 위의 베아트리체마저 돌처럼 굳어버린 이 순간, 그들의 이 말 위에서 훌쩍 내려온다. 얼굴에 튄 핏자국을 닦아내며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진다. 금색 시선은 오로지 한 명에게만 붙박혀 있다.)
 
그 행동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구혼자의 무리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옵니다.
 
다소스의 왕, 바실리스가 검을 꺼내어 들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병기의 날카로운 소음이 사방에서 터져나옵니다.
 
창과 방패를 든 경비대가 베아트리체가 선 단상을 둘러싸며 보호 태세를 갖춥니다.
 
인파에 섞여 숨어들었던 반란군이 함성을 지르며 경비대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혼인을 축하하는 화려한 천 장식 위로 피가 튑니다.
 
음식과 술로 가득했던 탁자 위로 사람의 몸이 나동그라집니다.
 
하늘을 향하여 무기를 치켜든 반란군이 한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특한 언어는 오래 전 세상에서 사라진 노래를 닮았습니다.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바실리스의 두 눈이 당신을 흔들림 하나 없이 똑바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전해집니다.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에르드는 직감합니다.
 
목표에게서 시선을 떼는 순간 그의 주문에 압도당하리라는 사실을.
 
나아가야 합니다.
 
쇠붙이가 살을 찢고 뼈를 부러뜨려도, 핏물에 미끄러진 다리가 꺾이더라도,
 
고개를 든 그대로 나아가 적을 베어넘겨야 합니다.
 
몇 번이고 사선을 넘나들어온 당신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 다소스의 왕이 이끌고 온 자들은 왕위 계승 의례를 위하여 세운 제단으로 슈브 니구라스 강림을 시도합니다.
에르드가 달의 그림자가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순간까지 다소스의 왕을 죽이지 못하면 슈브 니구라스가 강림하며 왕궁 내 모두가 몰살당할 겁니다.
다소스의 왕은 '아자토스의 끔찍한 저주'의 강화 주문을 사용합니다. 3 라운드에 거쳐 3번의 정신력 대항 판정이 연달아 발생합니다.
다소스의 왕의 주문 영창 이후 첫번째 [정신력] 대항 판정이 발생한 이후부터 라운드가 시작되며, 다소스의 왕이 대항 판정에서 패배해도 1라운드의 재영창 시간이 소모되지 않고 다음 라운드에 곧바로 대항이 발생합니다.
에르드는 대항에 실패할 때마다 [폴리페모스의 눈동자] 효과로 경감된 3D3의 정신력 피해를 받습니다. 3번의 대항 모두 성공하거나, 술자를 살해해야 주문의 효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소스의 왕이 '아자토스의 끔찍한 저주'를 영창합니다.
 
땡 (GM):2
 
: 바실리스 이성 2 감소.
 
에르드:헥터가 마지막 순간엔 옳은 말을 하긴 했군. (뱉듯이 중얼거린다. 이번에야말로 제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반강제로 시선이 고정된다. 하지만 전투는 어렵지 않다. 그의 칼에 스러져간 목숨을 셀 수도 없으며, 몸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도 또한 셈할 수 없다. 다만 끝의 끝까지 저를 가로막는 자들에게 불길 같은 분노가 인다. 적을 죄 살라먹을 거대한 불길이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온갖 잡스럽고 사악한 신들을 불러댔어. 안 그런가? 내 나라에서 말이지.
정신
기준치: 55/27/11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바실리스:마지막 음절의 발성을 들으라.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2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정신력이 -3D3 감소됩니다.
 
에르드:5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71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7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소리가 뇌를 들쑤십니다.
 
인간의 혀와 입술로는 발음할 수 없는 음절이 당신의 정신을 파괴합니다.
 
핑, 허공을 찢는 소리와 동시에 어깻죽지에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퍼집니다.
 
화살이 박혔다는 것을 인지한 후에야 통증이 몰려옵니다. (체력 -1D3)
 
비명과 함성이 뒤엉켜 메아리치는 가운데, 누군가의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태양이 사라지고 있다!”
 
…북쪽에서 불어온 돌풍에, 썩어가는 무덤의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 체력 3 감소.
 
: 폴리페모스의 반지가 작동합니다. 체력 7 회복.
 
에르드:이 나라가 그리도 탐났나? 아니면 베아트리체를 탐했나? 네놈은 나뿐 아니라 그를 배신한 것이기도 해. 계략에 빠진 어린 놈은 그렇다 쳐도, 연륜 있는 친우마저 등을 돌리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바실리스의 왼다리를 내려쳤다.)
 
바실리스:
근접전(격투)
기준치: 60/30/12
굴림: 93
판정결과: 실패
(검의 등으로 날을 쳐낸다.) 내가 두려운 것은 오직 나의 신밖에 없으시지. 오랜 친우여.
나의 신께서는 진정한 이름으로 힘을 빨아낼지니.
 
다소스의 왕이 다시 존재함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공포의 주문을 사용합니다.
 
정신력 대항 판정.
 
바실리스: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3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에르드: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정신력 -6.
 
존재함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공포가 당신의 심장을 옥죕니다.
 
생명체로서의 원초적인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다리에 엉겨붙어 움직임을 저해합니다.
 
칼을 든 병사가 에르드에게 달려듭니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내려치는 일격에 에르드의 가슴팍이 크게 베어져 나갑니다.
 
체력 -3.
 
푹, 이어지는 또 다른 소리와 동시에 에르드를 벤 병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집니다.
 
곧 창에 꿰뚫린 그의 육체가 흥건한 피웅덩이 위로 넘어집니다.
 
하늘을 할퀴는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도시를 집어삼킬 그림자가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벌린 채 다가오고 있습니다.
 
발 아래 널브러진 시체를 넘어서, 한 걸음 더 전진합시다.
 
어둠이 당신의 나라를 삼키기 전에.
 
: 폴리페모스의 반지가 작동합니다. 체력 6 회복.
 
에르드: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62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14
(옷자락이 찢겨나가고 피가 튄다. 그러나 베인 살점은 바닷물이 스며들듯 곧장 아문다. 보지 않아도 병사의 표정이 어떨진 알 수 있다. 이팔로스의 왕과 전투하던 저와 그리 다를 바 없을 테니. 시끄러운 소음과 벌떼처럼 달려드는 인파를 무시한 채 오로지 한 점에만 집중한다.) 보아하니 그 마음엔 삿된 신앙심만이 가득하고, 우애는 없었던 듯하군.
더는 나를 친구라 부르지 마라. 너 또한 쓸어내야 할 버러지에 불과하니. (칼로 그의 심장을 꿰뚫으려 한다.)
 
바실리스:
비무장
기준치: 60/30/12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피해: 2
(칼날을 비껴내며 곧장 발을 빼 지근거리에서 물러난다. 순식간에 생겨나고 아무는 상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본다.) 그대도 그대의 영광을 원하듯 나 역시 그러했을 뿐이지. 그대의 죽음을 몹시도 슬퍼했다네. ...조금 더 써먹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바실리스가 마지막으로 주문을 욉니다.
 
바실리스:...이들의 침울한 착취로 강림하실 위대한 이여.
 
정신력 대항 판정.
 
에르드:
정신
기준치: 44/22/8
굴림: 55
판정결과: 실패
 
바실리스:
정신
기준치: 50/25/10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순식간에 주변에 어스름이 깔립니다.
 
그림자에 잡아먹힌 태양은 제 빛을 잃고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갑니다.
 
정오에 찾아온 암흑을 목도하며 공포에 질린 병사들의 난투극이 거칠어집니다.
 
“멸망이다! 멸망의 날이 왔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조차 없는 난전 속에서 에르드의 옆구리로 창이 날아듭니다.
 
상체를 꿰뚫는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집니다.
 
체력 -2.
 
제 몸에서 쏟아진 피가 피부를 타고 발목까지 흘러내립니다.
 
뜨겁고, 끈적하고, 비린내가 납니다.
 
: 폴리페모스의 눈동자가 작동합니다. 체력 4 회복.
 
에르드:
크시포스
기준치: 80/40/16
굴림: 1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피해: 9
하! 믿을 인간 하나 없군. (암흑이 내려앉는 와중에도 그의 눈만큼은 여전히 형형한 빛을 발한다.) 그 아가리를 이만 닥쳐라! (다시 한 번 그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르드는 적의 한 걸음 앞에 당도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찔러드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핏발 선 눈과 에르드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칩니다.
 
심장이 멎은 상태로도 깊은 한이 맺힌 목소리는 가늘게 이어집니다.
 
그림자가 태양을 완전히 집어삼킵니다.
 
세상이 암흑에 휩싸입니다.
 
빛을 잃은 사람들은 엄습한 멸망의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지릅니다.
 
다소스의 왕이 절명과 동시에, 피 묻은 입술로 마지막 음절을 토해내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계속해서 주문을 흘려내던 목의 떨림이 멈춥니다.
 
뚝, 뚝.
 
육체를 꿰뚫은 서늘한 칼날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에르드의 피부에 떨어집니다.
 
사라졌던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느다란 빛 아래 생명이 떠나간 적의 텅 빈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린 자리에는, 베아트리체가 서있습니다.
 
시선이 마주칩니다.
 
난전 중 주인 잃은 검을 주워들고, 피가 튄 손을 떨며, 베아트리체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었던 황금으로 조각한 월계관은 피웅덩이 위를 나뒹굴고 있습니다.
 
검은 그림자 너머로 새어나온 빛이 두 사람을 비춥니다.
 
“반역자가 쓰러졌다!”
 
절규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나옵니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동시에 내지르는 소리가 서로에게 부딪혀 메아리가 됩니다.
 
주인을 잃은 사병들은 순식간에 기세를 잃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한 번 고개를 든 승기는 빠르고 거대한 흐름이 되어 전장을 휩쓸어갑니다.
 
판세가 굳어진 그 순간, 베아트리체는 바닥을 뒹굴던 월계관을 낚아채며 재빠르게 뒷걸음질 칩니다.
 
베아트리체 힐:...당신인가요?
 
붉게 물든 손끝이 경련합니다.
 
요동치는 시선에서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묻어납니다.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 것인지, 그것이 저를 지켜주리라 믿는 것인지….
 
베아트리체는, 선혈로 얼룩진 에르드의 왕관을 끌어안은 채 당신을 바라봅니다.
 
광란에 가까웠던 주변의 소음은 어느새 잦아들었습니다.
 
먹먹할 정도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베아트리체의 목소리만이 당신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베아트리체 힐:...에르드, 정말로 당신이 돌아온 건가요?
 
그 질문에는 너무도 오랜 세월 고여버려서, 이제는 그리움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응어리가 걸려있습니다.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증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르드:(허물어지는 적의 몸, 옷깃 위를 새로이 적시는 핏방울, 붉게 물들어선 떨리는 손…… 정신없는 난전과 위기였으나, 베아트리체가 사이를 가르고 나타나자 시간이 멈춘 듯이 모든 신경이 그에게 쏠린다.)
그래. 내가 돌아왔어. (적의 핏방울이 튀어 엉망인 낯으로, 십 년 전과 달라질 바 없는 낯으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로지 너만을 사랑하는 내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여신을 올려다보듯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멀지만 또렷한 기억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대로, 세월을 건너뛰어, 처음 혼인을 약조하던 순간처럼……) 나는 일생의 대부분을 검을 잡고 살았습니다. 부부의 도리에는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허나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도록.
그러니 나와 혼인해주시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피로 물든 단상 위.
 
당신의 구혼을 들은 베아트리체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걸어옵니다.
 
무기를 밟고, 시체를 지나, 전장을 가로질러온 베아트리체가 당신의 앞에 마주섭니다.
 
베아트리체는 살며시 손을 뻗어 당신의 머리 위에 월계관을 씌워줍니다.
 
입술이 열리고,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선언합니다.
 
베아트리체 힐:... 그리하여 나, 베아트리체는 하늘 위의 신과 땅의 만민 앞에서 선언하노니….
구혼자, 에르드를 이 나라의 왕으로 선택하겠노라.
 
베아트리체의 말이 끝나는 순간, 태양이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던집니다.
 
비로소 당신의 머리 위로 온전한 광명이 쏟아부어집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금빛 광채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옵니다.
 
베아트리체 힐:(흰 천과 번쩍이는 황금, 오색찬란한 꽃들로 장식되어있던 지난날 우리의 결혼식은 지금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지난한 세월을 지나온 우리는 피로 붉디 붉게 물든 천을 두르고, 날붙이와 시체, 우습다 하기도 어려울 무대 위에,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 운명처럼 다시 서로를 마주 보고 서있다. 그 날처럼,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 손을 내민다.) ... ...언제고, 내 심장은 오직 그대의 것입니다, 에르드.
(환한 웃음. 물기 어려 반짝이는 눈동자. 겨울은 어느새 종적을 감추고 녹아내렸다. 봄, 봄이 온다. 새 바람에 그리운 이를 싣고 봄이 온다.)
 
에르드:(반지를 끼워주었던 곱고 깨끗한 손은 피에 물들었고, 풋풋하던 왕자는 수많은 목숨을 밟으며 닳고 닳았다. 그러나 사랑만은, 서로를 향한 이 깊은 사랑만큼은 처음 구혼하던 순간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그대로다.)
(피로 물든 손을 보석을 다루듯 중히 붙잡아 약지에 짧게 입맞춘다.) 내 운명은 오로지 그대로 완성됩니다.
(꽃이 피고, 태양이 우리를 비춘다. 어떤 암흑도 더는 우리를 구덩이로 이끌지 못하리. 찬란한 광채 아래에서 마침내 입술을 겹쳤다.)
 
베아트리체 힐:(누군가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고작 사랑만으로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며. ...하나, 나와 당신. 우리 두 사람만은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처음 그 날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우리는 안다.)
...사랑해, 언제까지나. (그제야 숨을 쉰다. 나는 그제야 안다. 당신을 잃은 세상에서도 숨쉬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겹친 입술 사이로 달콤한 사랑이, 진실한 고백이 세어 나온다.)
 
철과 피 냄새가 가득한 결혼식입니다.
 
고운 옷은 망가졌고, 왕궁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서로를 잃은 채 지나가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돌아왔습니다.
 
당신의 나라로, 당신을 기다리는 이의 곁으로.
 
사랑, 그 하나로 10년을 거슬러.
 
그리하여 당신의 이야기가 노래가 되는 날, 시인들은 에르드라는 이름을 부르기에 앞서 이렇게 선언하겠지요.
 
이팔로스의 정복자, 바다의 저주를 받아 시간에 갇혀버렸던 그 이름난 왕은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얻은 첫 번째 구혼자였다고.
 
그리고 긴 시간을 넘어 태양이 사라진 날, 베아트리체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온….
 
땡 (GM):아무말
 
ED1. 101번째 구혼자
 
에르드 생환, 베아트리체 생환
 
보상 : 이성 +2D10, 크툴루 신화 기능치 +3, 아이템 [폴리페모스의 눈동자]
 
에르드의 나라를 노리던 이팔로스 세력과 다소스 세력이 모두 힘을 잃습니다.
 
에르드는 베아트리체가 지켜오던 자신의 자리를 되찾습니다.
 
많은 피가 흘렀고 지워지지 않는 상흔도 남았지만, 주인을 되찾은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결말 이후의 이야기는 두 사람에게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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