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성내촌에서 나고 자란 당신입니다. 이렇게 호화롭고, 끔찍하게 고요한 대저택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살면서 지은 죄를 주마등처럼 떠올려 볼 지하 감옥도 아니고, 간밤에 술을 너무 마신 건 아닌지 의심해 볼 여관방도 아닙니다.
빛이 잘 들지 않을 뿐, 갖출 것은 다 갖춘... 어쩌면 당신의 집보다도 넓은 방입니다.
또한 이곳의 모든 가구는 당신의 동선과 동작, 몸집을 고려한 듯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요.
큼직하고 노란 국화 무늬가 점점이 박혀 있는 벽지는 새것 같고,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은 한눈에 보아도 질 좋은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당신이 손을 뻗는다면 꼭대기 층에 꽂힌 책도 무리 없이 꺼낼 수 있을 만한 높이입니다.
지금 당신이 일어나 앉은 이 침대조차도, 알맞게 푹신하고... 숫제 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또한 당신의 몸에는 어떤 족쇄도 걸려 있지 않습니다.
납치를 당했다지만, 그런 것치고는 운신의 자유가 지나치게 보장되고 있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한쪽 벽에 걸린 커튼은 따뜻하고 진한 올리브색으로, 부드럽고 묵직해 보입니다.
반쯤 걷힌 커튼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들판이 내려다보입니다.
이곳은 4층, 어쩌면 그 이상의 높이에 있겠군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코레트:(음산히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방 내부 풍경으로 고개를 돌린다. 화려하면서도 안락한 가구들하며 제 평소 행동 양식을 아는 것처럼 동선에 맞추어진 배치…… 그저 평민으로 조용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던 그로서는 이 방의 모든 요소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자신은 이름 모를 귀족의 대저택에 납치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 뒤에 수많은 의문이 따라붙는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옵니다.
코레트:(문가를 휙 돌아본다. 마음은 여전히 고요한 호수처럼 침착하고 두렵지도 않지만, 급변해 버린 환경과 상황 탓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문가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아, 일어나계셨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당신이 알기로, 문은 잠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열쇠를 가진 사람일 확률이 높아요.
쓸데없는 예의를 차리는군요. 납치범 주제에 말입니다.
밀밭을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을 뒤로 길게 늘어뜨린 남자입니다.
가려진 얼굴 한 쪽에는 큰 흉터가 얼핏 보이지만, 꽤나 미형인 얼굴은 그런 것에 가려지지 않아요.
그는 당신을 곁눈질하더니,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겸연쩍게 웃습니다.
웃어?
그런 생각이 치밀지만... 어찌 되었건 멀쩡히 잘 살던 사람을 납치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힘은 가진 사람이란 겁니다.
어떤 의미로든 말이에요.
게다가 입은 옷을 좀 보세요, 원단부터 마감까지 착실하게도 부티를 내고 있습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이라는 걸까요?
누가봐도 귀족가의 도련님이라는 생각이 드는 외양이지만,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평범한 옷차림입니다.
검은색의 정장에 넥타이, 외투에 달린 장식도 약소해보여요.
코레트:(온갖 종류의 천과 비단을 다루는 직업이니만큼, 눈앞의 상대의 복식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값비싼 옷감으로 만들어졌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아마도 이 사람이 저를 이 저택에 데려온 사람인 것 같다. 직접적이든, 지시를 내렸든. 마주 웃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싸늘하지도 않은, 부드럽고 신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이 도련님은 순진한 웃음을 띠고 당신의 손을 대뜸 잡아 옵니다.
꼭 잘 아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그는 당신에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입니다.
뭐, 반갑게 인사라도 해 달란 건가요? 납치범에게?
앨릭스 제이 셔먼:(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중...)
코레트:……? (당황해선 맞잡힌 손과 반짝이는 푸른 눈을 번갈아본다. 이 친근한 제스처와 표정은 뭐지? 적어도 나쁜 목적을 갖고 데려온 건 아닌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음, 실례지만 저를 알고 계시나요?
코레트:앨릭스. (나지막이 이름을 중얼거리며, 내밀어진 손을 살짝 맞잡았다.) 저를 이미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맞아요, 코레트라고 해요.
앨릭스 제이 셔먼:(맞잡은 손에 눈에 띄게 기뻐하며 위아래로 흔든다.) 그럼요. 제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리가 없죠.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우린 이미 만난 적이 있거든요, 코레트.
그나저나...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때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작게 중얼거린다.)
코레트:만난 적이 있다구요?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을 처음 뵙는데도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이상할 정도로 친숙하게 구는 태도가 이해가 간다. 여전히 제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이지만.)
눈을 떠 보니 갑자기 귀족들이나 살 만한 커다란 방에 있어서 놀랍긴 했지만, 저는 사람을 때리지 않아요. (가까이에 있는 만큼, 저를 데려온 이로 추정되는 만큼 앨릭스를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었는데, 자꾸만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이 들린다.) ……이번에는?
앨릭스 제이 셔먼:사실...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였어요. 당신은 저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아, 납치범이요.당당해할만한 주제가 아닌데도 뻔뻔스럽게 웃는다.)
... 아, 들렸구나. 혼잣말이었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잡았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오히려 한 술 더 얹어 두 손으로 잡아본다. 그리고 당신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웃는다.)
... 갑자기 데려와서 미안해요, 코레트. 하지만, 부디... 한 달만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이상할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다. 여전히 당신의 손을 붙잡은 채로, 말을 잇는다.) 한 달만이요. 그 이후에는 당신을 보내드릴게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신 당신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코레트:아직 당신이나, 당신의 목적에 대해 모르니까요. (제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아무리 그라도 마냥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만, 그를 차치하고서라도 무척 침착한 반응이긴 했다.)
(저를 잘 아는 듯한 말투며 닿아오는 손길. 원인을 알 수 없는 간절한 음성과 미소…… 저를 당장 해칠 작정은 아닌 듯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그대로다.) 한 달을 이곳에서 지내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앨릭스 제이 셔먼:... (물음과 함께 미소가 움츠려든다. 동시에 머뭇거리며 잡았던 손을 놓아준다.)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이 지내는 한달 동안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드릴게요. ... 이 곳에서 나가는 것만 뺀다면.
(문득 벽의 시계를 보고는,) 배고프지 않아요? 그리 거창한 건 아니지만 끼니가 될만한 음식을 가져왔는데...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요? (눈치...)
코레트:말씀하시는 걸 보아 제가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해도 보내주지 않으실 것 같군요. (이번에는 제 쪽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의중을 짐작하려는 듯이.)
(어릴 적 고향을 떠나와 정착한 후로는 여행을 가거나 타지에 다녀온 적 없이 마을에서만 지냈다. 마을 사람들을 제외하곤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이만한 대저택에 사는 이와 친분이 있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기억을 잃기라도 했나?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던가. 의문이 산재하지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건 개중 무엇도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제겐 챙겨야 할 가족이 없다. 가게를 열지 못하면 생계에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이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것이다. 완전히 결정을 내린 건 아니지만, 일단은 그를 계속 세워두기만 할 수도 없으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바로 확답을 드리진 못하겠지만, 우선 챙겨오신 게 있으니 식사를 할까요.
앨릭스 제이 셔먼:(시선이 마주치면 기쁘게 미소짓는다. 이어진 긍정적인 답에 미소는 조금 더 짙어졌다.)
금방 가져올 테니까, 저쪽 테이블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코레트:그럴게요. (앨릭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순순히 테이블로 가 앉았다.)
앨릭스는 상당히 기쁜 듯한 얼굴로 문밖에 세워둔 서빙용 손수레를 끌고 들어옵니다.
손수레에 있는 메뉴는…
얇게 저민 햄과 계란, 신선한 채소로 만들어진 샌드위치와 양송이 크림 스튜.
노릇하게 구워진 바게트 빵과 써니 사이드 업, 버터와 딸기잼.
음료로는 홍차와 우유가 준비되어 있네요.
앨릭스 제이 셔먼:(하나씩 당신의 앞에 조심스럽게 놓는다.) 저 때문에 아침도 못 먹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른 점심으로 괜찮을 만한 메뉴로 준비해봤어요.
마음에... 드실까요? (눈치22...)
코레트:(접시가 하나 둘 늘어나자 눈이 살짝 커진다. 평민인 저로선 이 음식들 중 한두 개만 차리는 게 한 끼의 전부였으므로.) 그럼요. 당연히요. 이렇게나 챙겨주시지는 않아도 되는데…… 잘 먹겠습니다.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곤 스튜부터 조금씩 떠먹었다.)
앨릭스 제이 셔먼:(당신이 식사를 시작하면 눈치보던 얼굴이 다시금 밝아진다.)
다행이네요. 아, 그렇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솜씨가 뛰어난 주방장이라, 웬만한 요리는 다 할 줄 알거든요.
코레트:저는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하며 빵에 버터를 발랐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있자니, 자신이 챙겨 주던 가난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제가 여기에 머물기로 한다면…… 정말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실 건가요?
앨릭스 제이 셔먼:(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그럼요. 이 영지의 주인은 저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나가는 것만 제외한다면.
무엇을 원하나요? 코레트.
코레트:(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을에 제가 이따금씩 돌보아주던 아이들이 있어요. 대부분 고아거나, 부모님이 아파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이죠. 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 아이들을 대신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저 음식이나 옷가지를 챙겨주는 정도만…….
앨릭스 제이 셔먼:마을의 아이들이라... (고민은 짧았다.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는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좋아요. 역시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군요.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가족인 것처럼 대해주다니... 어쩐지 그 아이들이 조금 부러워지는 걸요.
(시선을 마주한다.) 코레트. 시간은 이 나라, 이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없어요. 그 말인 즉슨, 시간은 순금보다 비싸다는 말이죠. 전 당신의 시간을 갖는 대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정말로 원하는 게, 그것이 전부인가요?
조금 더 대단한 걸 바라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편하게 말해주세요.
코레트:아…! 감사해요. (반색했다.) 제가 그 아이들의 이름과 집의 특징을 적어 드릴게요. (햄을 우물거리면서 종이와 펜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음식을 삼키고는 겸연쩍게 미소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요. 해줄 수 있는 만큼은 해주고 싶어서 짬을 내어 돌봐 오고는 했었어요.
음, 또다른 것도 괜찮다면…… (고민하다) 제 집에 있는 반짇고리와 옷감들을 가져다 주실 수 있나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소일거리로 이것저것 만들어볼까 해서요.
앨릭스 제이 셔먼:(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테이블의 서랍에서 편지지와 펜을 꺼내 건네준다.) 천천히 적어줘도 괜찮으니 우선은 식사를 마치도록 해요.
ㅡ아, 그거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서빙용 손수레의 마지막 칸에서 바구니를 꺼내 건넨다.)
바구니에는 당신이 늘 사용하던 낯익은 반짇고리와 옷감들, 그리고 처음 보는 원단과 실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미완성 작품들도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집을 뒤졌다는 것은 상당히 찝찝하지만…
앨릭스 제이 셔먼:선물도 같이 넣어놨어요. 코레트의 집을 뒤지려는 속셈은 아니였지만... 자주 쓰는 색이 보여서요. 혹시 취향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다른 색깔들도 준비봤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요. (눈치봄..)
코레트:아, 벌써 챙겨 주셨군요. (작게 탄성했다. 아무래도 저를 납치해 왔다면 집을 돌아보는 것도 당연했겠거니……)
(편지지를 테이블 한켠에 가지런히 놓고 반짇고리를 확인하려다 처음 보는 원단과 실들을 발견한다. 금세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선 원단을 하나씩 넘겨보았다. 제 취향을 알아본 듯한 세심한 준비다. 그를 알아채자 절로 미소가 어린다.) 고마워요. 새로운 원단까지 주실 줄은 몰랐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당신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며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실까봐 노심초사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요.
전 바느질이나 원단에 대해서라면 문외한이라... 재봉사의 조언을 통해 지금 저택에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괜찮은 품질의 물건을 가져왔어요. 다른 것들은 구해보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네요. (미안한 듯이 작게 미소짓는다.) 모자라다면 말씀해주세요. 얼마든지 구해다드릴게요.
음,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서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미리 조치를 취해뒀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코레트:저택의 물건을 제게 주셔도 되는 건가요……? (조심스러우면서도 기쁜 티를 미처 다 감추지 못한다.) 제가 자주 쓰는 게 아니었더라도, 챙겨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새로운 원단은 이걸 다 쓴 뒤에 부탁드려도 충분하니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이들에 대해서도요? 이미 듣긴 했지만, 정말로 저에 대해서 원래부터 알고 계셨던 모양이네요. 죄송스럽지만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희는 원래 어떤 사이였나요? 제가…… 기억을 잃을 만한 사고라도 겪은 건가요?
앨릭스 제이 셔먼:그럼요. 지금은 제가 저택의 주인인걸요. ... 비록 제멋대로 데리고 왔지만, 좋은 기억만 남겨드리고 싶어요. (조심스레 웃는다.) 당신이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지 궁금하네요.
(이어진 물음에 미소가 천천히 깨어진다.) ... 아뇨, 아니에요.
(웃음이 깨어진 얼굴에는 씁쓸함이 담긴다.) 제가 당신을 알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그 궁금증은 접어 놓는 게 좋아요, 코레트.
코레트:(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가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꿈은 금세 잊히는 법인지라 흐릿한 심상만이 남았다. 재촉하는 노크 소리에 꿈자리를 되새겨볼 틈도 없이 침대에서 내려가 손잡이를 돌려본다. 이번엔 문이 열리나?)
문고리는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열어보나요?
코레트:앨릭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당신이 문을 열면 보이는 사람은, 앨릭스가 아닙니다.
문 앞에는 당신보다 반 뼘 정도 작은, 마른 체구의 남자가 서 있습니다.
해리엇 퓨쳐:아, 일어나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생글거리며 웃는다.)
코레트:안녕하세요. (일단 마주 인사한다.) 당신은……?
해리엇 퓨쳐:해리엇이라고 합니다. 이 저택에서 일하고 있어요, 정원 청소부거든요.
... 여기, 끌려오신 거죠? 도련님께.
제가 나갈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코레트:네? (이 저택에 온 이후론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다.) 제 의지로 온 건 아니지만……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건가요? 마음대로 앨릭스의 뜻을 거슬러도 되는 건가요? 당신이 모시는 분일 텐데.
해리엇 퓨쳐:(넉살좋게 웃는다.) 에이, 다 저만의 방법이 있죠. 이 저택에서 오래 일했거든요. 원래 제가 이렇게 누굴 도와주진 않는데... 사정이 딱해보이셔서요.
(빤히...) 흠, 들킬까봐 걱정되시나 본데... 그런 걱정은 필요없으니 안심하세요. 원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코레트:(오래 일했다면 이전 저와 앨릭스 사이에 있었던 일도 알까? 만난 적이 있었다는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돌아가기 싫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앨릭스의 첫인상은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 같았지만,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약속이 전부 말뿐일 가능성을 내려놓을 순 없다. 게다가 이미 저의 집이나 행동 양식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신분까지 높은 이인데,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보복을 받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악덕 귀족들을 많이 봐 왔고, 때로 그들의 횡포를 겪어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걱정이 되네요. 그분은 제게 한 달만 여기 머무르면 된다고 하셨는데…….
해리엇 퓨쳐:솔직히... 한 달도 긴 시간이죠. (...)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드리긴 했지만, 사실 저도 지금 당장은 꺼내드리기 어려워요. 도련님을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거든요.
사흘만 기다려주세요. 그동안만 참아주시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코레트:(절대 나가지 말고 머물러 달라던 도련님의 씁쓸한 낯이 눈앞을 맴돌아,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 달이 지난다 해도 그를 인생에서 완벽히 잘라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직감이 들어서인지도.) 혹시…… 앨릭스가 저를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고 계신가요? 아니면 이전에 저와 그분이 만난 적이 있었는지라도요.
해리엇 퓨쳐:(곤란한 낯으로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높으신 분들의 취미죠. 아랫것인 제가 어떻게 속마음을 이해하겠어요.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게 한 두번이 아니였던지라. 대부분 사흘이 되면 관심을 거두시더라구요.
코레트:아…… 이전에도 다른 이들을 이곳에 데려오신 적이 있었나요? (자신을 특별한 사람처럼 대하기에 의아했었는데, 그저 취미였던 걸까. 귀족들의 생각이란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해리엇 퓨쳐:(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 쉰다.) 도련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철이 없으신 편이거든요. 소설을 많이 읽으셔서 그런가... 그래서 당신같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죠.
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맡겨주신다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정말이에요.
코레트:그랬군요. (시선을 떨군다. 부탁하는 모습이 유독 간절해, 저와 어떤 특징적인 과거가 있는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상반되는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놀아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알겠어요. 저를 이렇게 도와주시려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요. 부탁드릴게요. (사흘 후에 앨릭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다시 결정을 내려도 되겠지. 우선은 답한다.)
해리엇 퓨쳐:(긍정의 답을 들으면, 활짝 미소짓는다.) 이대로 당신을 이렇게 두는 게 이래저래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도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해리엇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격려합니다.
해리엇 퓨쳐:그럼, 제가 탈출 계획을 세워볼게요. 아마, 내일쯤이면 말씀드릴 수 있을 테니까 불안해하지 마세요. 전 당신 편이니까.
자, 이건 선물.
해리엇은 당신에게 종이에 싼 빵과 반쯤 찬 물병을 건넵니다.
코레트:감사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저를 이렇게 도와주셔서요. (내밀어진 빵과 물병을 받아들었다.)
해리엇 퓨쳐:(쑥스럽게 웃으며 손사래친다.)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어려운 사람은 돕고 살아야한다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말씀해주셨거든요. 당신을 보니 그 분이 생각나서...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해야하나. 뭐랄까... 분위기가 좀 닮았거든요.
아무튼, 전 이만 가볼게요! (손을 흔들며 가볍게 윙크하고는,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고, 날도 어스름히 밝아 옵니다.
한동안 굶었더니 허기가 지네요.
일단 식사부터 해야겠습니다.
코레트:(창가에 앉아 해리엇에게 받은 빵과 물로 간단한 식사를 한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넉넉하진 않아도 평온한 삶이었는데,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코레트:(들어가 봤더니 누군가의 침실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혼자 쓰는 방이 이렇게나 크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는 귀족의 집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이쪽의 상식은 전혀 모른다. 한참이나 고민하며, 문가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하다가 조심스럽게 밀어 안쪽을 살짝 엿보았다.)
당신이 문을 열면, 과연 서재입니다.
푸르스름한 회색 빛줄기가 비쳐드는, 천장이 높고 책 냄새가 나는 서재요.
사다리를 기대 놓고 올라가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높이의 책장들이 색색의 책으로 빼곡합니다.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그 앞에는 길고 안락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자수로 뒤덮인 쿠션이 늘어서 있습니다.
여명이 깔린 서재 안은 고요합니다.
코레트:(서재라서 다행이지만, 이렇게나 넓고 높다니.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서 내부의 모습을 보자 절로 입이 벌어진다.)
당신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만이 고막을 나직하게 울릴 뿐입니다.
웅대한 광경입니다.
책장 사이로 난 길에서는 먼지와 나뭇등걸 냄새가 부유합니다.
한창 구경을 하고 있던 그때,
사락-
옷자락이 양탄자를 스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몸을 숨기나요? 아니면 숨기지 않나요?
코레트:(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돌아봤다가, 근처에 있는 책장 뒤로 황급히 숨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들킨다면 좋은 소릴 듣지는 못할 것 같다.)
급히 책장 뒤로 모습을 숨기면...
앨릭스가 의아한 얼굴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낮에 봤던 옷차림보다 한결 편해보이는 셔츠와 바지를 입은 잠옷 차림이지만, 여전히 검은 장갑을 낀 채로 손에 책을 들고 있네요.
인기척을 알아차린 모양이에요.
앨릭스 제이 셔먼:거기 누구 있어?
코레트:(그새 조금은 귀에 익은 목소리다.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고 잠시 갈등하다가, 이미 인기척을 알아차린 것 같아 쭈뼛거리며 책장 옆으로 걸어나왔다.) 음…… 저예요, 앨릭스.
앨릭스 제이 셔먼:(잘못 들었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다... 들리는 목소리에 얼굴이 밝아진다.) 코레트.
여긴 어쩐 일이야?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 아. (입가를 매만진다.) 미안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코레트:괜찮아요. (자연스러운 어투에 내심 놀랐으나 티를 내지는 않는다. 이전에 만난 적 있었다는 말은 진실이었던 걸까.) 낮잠을 잤더니 일찌감치 깨고 말아서요. 앨릭스야말로 왜 주무시지 않으시고……
앨릭스 제이 셔먼:(장갑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 본다.) 저도 잠이 오지 않아서요. (손에 든 책을 들어보이며) 책이라도 읽으려고 왔어요. 저택 안내는 해드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잘 찾아오셨군요.
네, 꽤나 좋아해요. 평소에는 바빠서 읽을 시간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요. 앨릭스는 주로 무슨 책을 읽으세요?
앨릭스 제이 셔먼:그럴리가 있나요. 오히려 기쁜걸요. 안 그래도 코레트의 생각이 났는데... 마침 눈에 보이니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어요. (슬그머니 웃는다.)
동화. 전 결말이 뻔한 동화를 좋아하거든요.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현실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우니까, 이런 동화가 더 낭만적으로 다가오잖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코레트:(내 생각. 이런 말을 하고서도 사흘이 지나면 없었던 일처럼 관심이 사그라드는 걸까? 원하는 걸 모두 가지는 높은 사람들이란 원래 이런 법인지, 역시 잘 모르겠다. 제가 순진해서인진 몰라도 지금 앨릭스의 말은 전부 진심처럼만 느껴지는데.)
저도 시간이 날 때면 아이들에게 동화를 자주 읽어주곤 했지요. 아이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사실 어른들에게도 교훈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흐려질 수 있는 가치들을 되새기게 해주고요.
그래도 가장 흥미 있는 책은 역시 다양한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인 것 같아요. 과학이든 수학이든, 하다 못해 요리라도요. 머릿속을 새로운 지식들로 채워 가는 게 즐겁거든요.
앨릭스 제이 셔먼:(당신의 속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여상히 웃어보일 뿐이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책이니 유치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어른들에게도 큰 의미를 전해주는 이야기더라구요. ... 그립네요. 사실 비슷한 이유로 추천받은 거라. 그 뒤로 손에서 놓을 수가 없더군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당신의 손을 잡고 뒤쪽의 책장으로 이끈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책은 다 이쪽에 정리해두었거든요. 마음껏 읽어도 괜찮아요. 당신은 제 손님이니까, 아무도 막지 않을 겁니다.
코레트:(추천해준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궁금했지만, 주제넘는 질문인 것 같아 묻지 않았다. 대신 앨릭스의 동작 하나하나로 확 좁혀져 버린 거리감을 실감한다.) 정말 마음대로 읽어도 되나요? 제겐 더없이 감사하고 기쁜 기회이지만요.
앨릭스 제이 셔먼:(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제가 허락했으니까요. 부디 괜찮으시다면 마음대로 가져가 읽어주세요. 아, 아니면 아예 선물로 해드릴까요? 한달이 지난 후에도 읽을 수 있게...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네요.
코레트:그럼 감사히 읽을게요. 아…… (잠시 곤란해하다 고개를 내젓는다. 혹하는 제안이긴 했지만 저택을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산재하는 이상 더한 빚을 질 수는 없다.) 그것까지는 괜찮아요. 여기에서 읽는 걸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니깐요. 책은 귀한 물건이기도 하잖아요.
앨릭스 제이 셔먼:...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제가 가진 전부도. 이 저택에 있는 게 무엇이든 당신보다 귀한 건 없어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코레트인데... 제가 그 정도도 못하겠나요. (아쉬운 얼굴로 어깨를 살짝 늘어뜨린다.)
코레트:……왜 그렇게까지 말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책장에 한 손을 올리다 말고 천천히 떨어뜨렸다.) 과거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제겐 이상할 정도로 당신에 관한 기억이 없는데, 그런 저를 위해서 전부까지 주실 수 있다니. 저는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도 아닌걸요.
앨릭스 제이 셔먼:... ...아, 그렇죠. 그랬었죠. (잡았던 손을 놓는다. 고개는 기울여지고, 시선은 천천히 바닥을 향했다.) 부담을 드리고 싶었던 건 아니였어요. 그저... 지금의 제가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라서. ... 사실, 이곳에서 나가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뇌물이기도 했구요.
코레트:이 저택에서 머무는 게 아니더라도 저희가 만날 방법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꼭 여기 머물기를 바라시는 거죠? 저택 밖으로 나가게 되면 제게 해로운 일이라도 생기는 건가요? (아니면 순전히 당신의 만족을 위해서? 잘 모르겠다. 해리엇을 믿고 탈출해야 하는지, 앨릭스를 믿고 이곳에 남아야만 하는지.) 부담이 된다기보다는, 그저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제게 앨릭스는 어제 처음 만난 분이니까요. 저를 중하게 대해주시는 건 감사할 따름이에요.
앨릭스 제이 셔먼:(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는다.) ... 미안하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하지만, 저로서는 당신을 내보낼 수도 없어요. (다시금 당신의 손을 잡는다. 마주잡은 손은 작게 떨려온다.) 절 믿어주세요. 당신을 해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주변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에요.
코레트:(맞잡은 손 너머로 떨림이 전해져 왔다. 대체 그는 어떤 진실과 과거를 품고 있는 걸까.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곤란한 낯으로 맞잡은 손과 앨릭스의 눈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쪽만 드러난 푸른 홍채에 담긴 감정은 진심 같기만 한데, 본디 믿음과 현실은 다른 법이라서. 방향타를 잃은 배에 타 해류를 헤매는 기분이다.) ……알겠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잔뜩 어두웠던 얼굴에 당신의 말 한 마디로 기쁨의 미소가 퍼진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이미 말씀드렸던 거지만, 지내는 한 달 동안 불편함 없이 편안히 보낼 수 있게 해줄게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 그건 조금 어렵지만. 최대한 노력해볼 수 있어요.
(천천히 밝아오는 바깥을 쳐다보고는) 그나저나, 곧 아침인데... 배고프지 않아요? 같이 아침이라도 들면 어떨까, 하는데.
코레트: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손사래쳤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곤 햇살이 조금씩 새어들어오는 창가를 함께 바라본다. 서재에 오기 전에 뭘 먹긴 했지만 고작 빵 한 덩이뿐이니,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럴까요. 이른 아침식사가 되겠네요.
앨릭스 제이 셔먼:(그 말에 다시 한 번 더 얼굴이 밝아진다.) 기뻐요.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질 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잡았던 손에 힘을 준다.) 사실... 혼자 먹게 될까봐 걱정했는데, 역시 당신은 저 같은 사람한테도 상냥하군요. 안내해드릴테니 따라와주세요.
사흘 후에 나가게 됐으니, 그전까지만이라도 이 저택이 주는 풍요를 맛보고 가는 게 좋을지 모릅니다.
코레트:(제 방이 두 개는 들어갈 것 같은 너비의 복도를 걷는다. 채광이 잘 들면 더 멋진 저택일 것 같은데 커튼을 쳐둔 이유가 있는 걸까? 그러나 짧게 부상했던 의문은 길쭉한 식탁이며 그 위에 올라간 엄청난 음식들을 보자 금세 사라져 버린다. 이게 귀족들의 식사인가……? 엄청나구나. 절로 입이 벌어진다. 잠시 어리버리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조심히 앉았다.) 제가 감히 마음에 들고 말고를 판단하면 안 될 것 같은 진수성찬인걸요. 앨릭스는 매일 이런 식사를 하시는 건가요……?
앨릭스 제이 셔먼:평소보다는 더 신경을 썼어요. 지금은 저 뿐만 아니라 당신이 함께 머물고 있으니까, 당신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 잡아두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어야 하잖아요. (뻔뻔한 얼굴로 답하고선 크림스프를 당신 쪽으로 밀어준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주세요, 꼭. 전에도 말했듯이, 주방장은 이 제국에서 제일가는 요리사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코레트:그, 그렇군요. (한 달간 머무르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앨릭스를 보니 양심이 콕콕 찔려 온다. 감사 인사를 작게 중얼이면서 스프를 받아 떠먹었다. 한 번의 식사에 이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음식이 나오는 건 처음이었으므로 뭘 먹어야 할지 감도 잘 오지 않아서 그냥 근처에 있는 음식들만 조금씩 손을 댔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아, 아니. 이 식사의 반의 반만큼만 나와도 만족스럽게 잘 먹을 수 있어요. (어제 점심식사는 앨릭스 기준에선 엄청 소박했겠구나, 새삼 깨닫는다)
앨릭스 제이 셔먼:하지만 반의 반은 너무 작은데... (코레트의 자리로부터 멀리있는 접시도 끌어온다. 이것도 먹어봐요.) 부담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요.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게 오랜만이라 들떴나봐요.
(물끄러미, 당신이 수저를 들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미소짓는다.) 그거 알아요? 사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앉은 적이 없어요. 이곳에 온 뒤로 늘 저 혼자였거든요. 이 저택은... 제게 너무 넓어요. (여러가지 다채로운 음식들로 채워진 테이블에 비해, 여전히 주인없이 비워져 있는 의자들을 바라본다.) 그래서 저조차도 헤매지 않게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죠. 숨겨진 공간 같은 건 전혀 없는 곳인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 뭐, 지금은 익숙해졌지만요.
코레트:(접시에 뭐가 담겨 있는지 보는 데만 해도 한나절은 걸릴 것 같다. 앨릭스가 끌어다주는 대로 얌전히 제 그릇에 덜어 먹었다. 생김새뿐 아니라 맛도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것처럼 훌륭하기 그지없다. 정말 맛있어요, 말하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이곳에 온지 고작 이틀차고 돌아다닌 장소도 서재뿐이니 그냥 우연히 사람을 마주치지 않은 줄로만 알았는데, 혼자였다니.) 당연히 가족이 계실 줄 알았어요. 혹은 배우자 분이라도요. ……앨릭스도 많은 일을 겪으셨나 보네요. 이 저택은 넓으니, 처음에는 정말 헤맬 만도 했을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도 될지 모르겠네요. 힘드시다면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앨릭스 제이 셔먼:(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다가, 웃는 낯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 당신의 상냥함을 받기엔, 당신을 멋대로 납치해버린 제게 너무 과분해요. 그러니 코레트가 신경쓸 일은 아니에요.
(여유로웠던 낯은 점점 초조함으로 변질되어간다. 숨기지 못한 채 눈을 깜빡이면서 아랫입술을 깨문다.) 생각해본 적 없나요? 그 상냥함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손을 붙잡는다. 그 손길은 무척이나 다급해보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정말로 주변 사람들을 위한다면, 위하고 싶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조금 더 돌봐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꼭 새겨들어줬으면 해요.
... .... (머뭇거리며 손을 거두고는, 입술을 짓이긴다.) 그, 미안해요. 간밤에 좋지 못한 꿈을 꿨는데, 그게 생각이 나서.
코레트:네? (조금 당황한다. 이제 앨릭스가 손을 잡아오는 게 익숙해질 지경이었으나 이 표정은 다르다. 왜 이렇게나 위태로워 보이는 걸까. 제겐 없는 기억 속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우선은 그를 진정시켜야겠단 생각에 스푼을 내려두고 반대쪽 손으로 앨릭스의 손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종종 비슷한 말을 듣거든요. 미련할 만큼 착하다고, 그러다간 이용만 당할 거라고요. 실제로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도 있는 것 같아요. 별로 깊게 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요. 비록 가족이랄 관계는 없어져 버렸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새롭게 만났죠. 그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좋아요. 그걸 위해서라면 저를 조금 깎아내는 정도는 괜찮아요. 마모되기 전에는 멈출 테니까요.
아무래도 식사가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앨릭스일 수도 있겠네요. (찻주전자를 들어 앨릭스의 잔에 뜨거운 김이 나는 홍차를 따라준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악몽을 덜 꾼대요.
앨릭스 제이 셔먼:(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더 이상 여유는 없다. 방금까지 잘만 지었던 웃음조차 어딘가로 사라진 듯 하다.) ... 그러지 말아달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죠? 제가 아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 지금 절 안심시켜주는 거겠죠. 전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미련해요, 코레트. 전 당신만큼 미련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습관은 결국엔 당신에게 좋지 못한 결말을 주고 말 거예요. 조금 이기적이어도 괜찮으니까, 다치는 일 없이, 당신이 깎아지는 일 없이... 행복했으면 하는데. 어려운 일일까요.
(제 앞에 놓인 홍차를 멍하니 바라보다, 찻잔을 들어 천천히 들이킨다.) ... 오랫동안 꿔오던 악몽이 있어요.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한 달 동안은 당신과 함께니까. (이번에는.작은 목소리로 짧게 덧붙인다.)
코레트:저는 행복하게 지내 왔어요. 비록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런저런 아픔이 있었지만… (말간 낯에 잠시 씁쓸함이 스쳐지나간다.) 이 마을에 정착하고 난 후로는 친구도 여럿 사귀었고, 아이들도 돌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걸요. 미련하단 말은 부정하지 않겠지만요. (짧은 정적. 홍차의 달콤씁쓰레한 향기만이 감돈다.) ……꼭, 미래를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제가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으실 것 같나요? 영광인걸요. (겉으로는 부드럽게 말하지만 속은 점점 더 심란해져 온다. 어떻게 해야만 하지, 나는…… 저를 위하고 걱정하는 듯한 말들도,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들이 불쑥불쑥 들고는 한다.)
앨릭스 제이 셔먼:... 언젠가 마을에 갔을 때,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웃고있는 당신의 모습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척이나 행복해보였으니까. (...) 당신이 처음부터 이곳에 지내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이곳에 오기 전의 코레트가 궁금해지는 걸요. 물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숙인 채로 찻잔을 매만진다.) 글쎄요. 그렇게 들렸나요? 전 그저 당신이 걱정될 뿐이에요.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제 눈이 닿지 않게 될 테니...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잖아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곁에 있어줄 건가요?
코레트:여기 오기 전에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어요. 근처의 성과도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죠. 동생도 넷이나 있었구요. 솔직히 말해 형편이 좋았다곤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름 화목한 집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됐지만요. 부모님께 쫓겨났거든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 생각도 없어져 포크와 스푼도 접시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둔 지 오래다.)
꼭 저를 보호해주시는 것 같네요. 한 달이 지나 이곳을 나가게 되더라도 앨릭스가 저를 보러 찾아와 주시면 되지 않나요? 아니면 제가 이곳에 종종 방문할 수도 있고요. 저택에서만 지내셔야 하는 건…… 아니죠?
(그러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만 봐선 사람을 갖고 놀기 좋아하는 도련님으론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약속을 해 놓고 떠난다면 앨릭스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건 간에 제 마음이 무척이나 불편할 것 같다. 어쩌지.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천성이라 답하기가 심히 어렵다. 결국 고민 끝에 애매한 어조로 속삭였다.) ……네.
앨릭스 제이 셔먼:(나지막한 음성을 귀담아 듣는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 미안해요. 슬픈 일을 떠오르게 해버렸네요. 동생들이 그립진 않나요? 만약 궁금하다면 가족의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요.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 사실, 모르겠어요. 그 뒤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본 적도, 떠올려본 적도 없거든요. (입을 열기를 망설인다.) 하지만... 당신한테는 이곳을 잊는 게, 조금 더 행복한 편이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린,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작게 미소 짓는다. 기뻐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 외로움이 점철되어 있는 웃음이다.) 고마워요, 코레트. 그렇게 말해줘서. 덕분에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코레트:아…… (망설인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버려진 자신이 알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알아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지만 조금 더 고민해본 뒤에 답을 드려도 될까요? 나쁜 소식이라도 있으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이 들어서요.
네? (이건 다소 예상치 못한 답이다. 이렇게나 간절하게 저를 붙잡고 있으면서 한 달이 지나면 없던 것처럼 마무리를 짓고 싶다고?) 이곳에서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걸요. ……조금 이해가 어렵네요. (해리엇의 제안을 듣고 일찌감치 떠나게 된다면 이후로 마주치지 않는 게 제게도 좋은 일이긴 할 테다. 그럼에도 이 묘한 아쉬움과 의문은 뭘까.)
앨릭스 제이 셔먼:(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그게 언제가 되었든,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드릴 수 있으니까... 아니, 해드리고 싶으니까 부디 편하게 고민해주세요.
나쁜 일이 아니였다니. (놀란 듯이 바라본다.) 전 당신을 납치한 납치범이에요. 이 사실만으로 충분히 나쁜 일이 될 텐데. 정말 미련하군요.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해를 바라고 이곳에 데려온 건 아니였으니...... 당신이 유일하게 해줘야 하는 건, 한 달만 이곳에서 있어주는 것. 이 한 가지니까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코레트:아, 물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음. (이래서 미련하단 말을 듣는 건가?) 앨릭스는 나쁜 분이 아닌 것 같아서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비록 저는 당신 같은 귀족은 아니지만요.
앨릭스 제이 셔먼:...... 다음부터는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경계해주세요. 제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아, 물론 당신이 절 친구로 생각해준다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친구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요? ... 아까, 싫다는 말은 아니였어요. 그저 그 편이 당신에게 이로울 것 같았거든요.
그저 울적함이 짙게 배어난 눈으로 당신을 빤히 바라볼 뿐입니다.
이상하죠, 분명 낯선 얼굴이며, 태어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김새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
저 눈은 마주칠 때마다 서글픔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기이하리만치...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 당신에게는 그저 허풍이고 거짓일 뿐인 모든 환상이 진실처럼 느껴집니다.
해리엇의 말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요.
'당신이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우린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거짓말...
당신은 누구죠? 당신이 누구인지를, 당신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눈앞의 도련님은 마치 그것을 당신보다 몇 배는 잘 알고 있는 양 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식사 시간이 끝이 납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이런, 당신을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었네요. 이렇게까지 긴 아침시간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웠어요.
방에 올라가서 푹 쉬세요.
코레트:(좀 더 상대를 경계해야 하는 걸까. 만나자마자 제가 관심이 있던 원단을 챙겨주거나, 아이들까지 대신 돌봐준다는 말을 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아 버린 걸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는 저를 멋대로 납치해 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약해지고 마는 건 깊은 서글픔을 담은 벽안 때문일까.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의 호소나 부탁이 모두 진실처럼만 느껴져서.)
저도 즐거웠어요. 앨릭스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잠시 앨릭스를 바라보다가 녹색 문을 밀고 나가 방으로 돌아간다.)
앨릭스 제이 셔먼:(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손을 흔들어준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밤이 찾아옵니다.
방에만 있으려니 어쩐지 답답합니다. 바깥에는 나갈 수 없지만, 복도에라도 나가볼까요. 아니면 서재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코레트:(앨릭스가 구해 준 원단으로 이것저것 모양을 잡아보다가, 잠시 휴식도 취하고 몸도 움직일 겸 문을 열고 나선다. 마침 책을 맘대로 읽어도 된다는 허락도 떨어졌으니 서재에나 들려볼까.)
복도를 메운 눅눅한 공기가 폐부로 흘러듭니다.
창밖의 구름도 꾸물거리는 것이, 오늘 밤에는 천둥이 치려나 봅니다.
곧 휘몰아칠 폭풍우를 고대하듯, 드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우수수 흔들리는 것이 보입니다.
온통 낯설고 음울한 풍광뿐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서재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직전,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려옵니다.
코레트:(날씨가 좋지 않네. 폭풍이 치면 마을에도 이런저런 피해가 있을 텐데. 다시 발을 내딛으려다 인기척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반가운 얼굴이 양동이와 걸레자루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갈색 눈의 청소부, 해리엇.
해리엇 퓨쳐:아, 나오셨군요. 이제 막 노크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좋네요.
다름이 아니라... '그것' 말입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거든요.
그것이라면, 아마 계획을 이야기하는 거겠죠.
이곳을 탈출하기 위한.
그는 주변을 의식하듯 곁눈질합니다.
해리엇 퓨쳐:... 저,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해도 될까요? 코레트 씨도 아시다시피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잖아요.
코레트:해리엇 씨. (그를 마주치자 대번 심란함이 올라왔지만, 티를 내지 않고 눈만 반쯤 내리깔았다.) ……네. 들어오세요.
해리엇 퓨쳐:(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쾌하게 답한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당신의 수락에 해리엇은 문 옆에 걸레자루를 기대 놓고, 양동이를 내려놓은 뒤 안으로 들어섭니다.
해리엇 퓨쳐:계획은 이렇습니다. 사흘 후라고 말씀드렸죠? 그날 정원 청소 겸 경비를 제가 맡기로 했거든요. 다만, 저 말고도 경비를 서는 인원이 꽤 많긴 할 거예요.
하지만 다들 술을 좋아해서... 적당히 취하게 하면 별 일 없을 겁니다.
코레트:(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다른 경비 분들이 술에 취하신 틈을 타서 정원으로 빠져나가는 걸까요?
해리엇 퓨쳐:네, 맞아요. 아, 그리고 이 저택의 사용인으로 위장하면 일이 더 쉬워질지도요. 혹시나 다른 사람을 마주쳤을 때, 사용인끼리의 친목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요.
마을로 향하는 마차 삯 정도야, 얼마 하지 않으니 대신 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만하면 꽤 잘 짠 계획이죠? (웃음.)
코레트:좋아요. 열심히 고민해 주셔서 고마워요, 해리엇 씨. 다만… 앨릭스, 도련님께 들키면 어떡하죠? 저는 그렇다 쳐도 해리엇 씨가 의심받기라도 하면.
해리엇 퓨쳐:에이, 뭘요. 제 입으로 돕는다고 했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손사래 친다.) 너무 걱정마세요.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워낙 정신이 없으신 분이라, 그 의심이 제게 닿을 일은 없을 겁니다.
가여운 분이긴 하지만, 가끔은 인질로 있는 사람이 모질게라도 대했으면 싶을 때가 있어요. 자기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구시는데... 지켜보는 입장으로도 여간 고역이 아니라니까요?
코레트:아, 아니에요. 힘들지 않았어요. 정말로요. (적나라한 평가에 당황했다. 그래도 나름 납치범(...) 이라는 인식은 있는 것 같던데. 이건 내 문제일지도.)
식사 중에, 이 집에 온 뒤로는 늘 혼자라고 하시던데. 혹시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해리엇 퓨쳐:이렇게 착하신 분을 못살게 구시다니... (짠한 눈으로 당신을 본다...)
혼자라고 하셨나요? 이제껏 당신처럼 납치해온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런 거짓말까지 하시다니. 어지간히도 심심하신 모양이네요. 이해해주세요. 저희 도련님께서 동화를 많이 읽으신 탓에, 때론 상상력이 지나치실 때가 있거든요.
코레트:음, 그래도 함께 사는 가족이 없으면 혼자라고 여기실 만도 하니까요. (앨릭스가 나쁜 주인은 아닐 것 같은데, 너무 직설적이라서 듣는 제가 다 식은땀이 난다.) 그간 납치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들 무사히 돌아갔나요? 제게는 한 달만 머물러 달라고 하셨는데, 한 달이 지나면 약속대로 돌려보내 주셨는지도 궁금해요.
해리엇 퓨쳐:(여전히 짠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코레트 씨. 세상에 이런 말이 있어요.모르는 게 약이다.알면 다친다는 뜻이에요. 아는 게 힘이라고들 하지만, 때론 모르는 게 더 나을 때가 있어요.
참, (짝, 손바닥을 맞댄다.) 이걸 제일 먼저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사흘 뒤, 새벽 두 시 반 즈음에 문을 두드릴 테니 나오세요. 자지 않고 절 기다려주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동안 도련님이 의심하지 않게... 아시겠죠?
코레트:그, 그런가요. (제대로 돌려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해리엇이 저를 도와주는 걸까. 오히려 확실하게 아는 게 없으니 막연한 상상만 끝없이 하게 된다.)
사흘 뒤 두시 반…… (제가 있으면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다던 이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친다. 여기에서 대답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될 텐데.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수긍했다.) 알겠어요.
코레트:(착잡함에 서재로 갈 생각도 싹 사라졌다. 창문을 살짝 열어 바람을 쐬면서 앨릭스가 선물해 준 원단만 하염없이 매만졌다. 새벽녘이 되도록.)
그렇게 방 안에서 뜬 눈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쯤...
똑 똑 똑 -
별안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졸음을 깨웁니다.
막 대꾸하기도 전, 커튼 아래로 섬광이 번쩍인 순간 문이 다급하게 열립니다.
창백한 얼굴의 앨릭스가 문고리를 힘주어 붙잡은 채 서 있습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 코레트.
미안하지만... 여기서 자도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낯은 썩 간절해 보입니다.
코레트:앨릭스? (깜짝 놀라 문가를 돌아봤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문고리를 쥔 손을 살짝 감싸쥐며 떼냈다.) 안색이 좋지 않아요. 악몽을 꾸셨나요?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앨릭스 제이 셔먼:(비틀거리며 당신의 손을 잡는다.) ... ... 고마워요, 코레트.
(안정되지 못한 낯으로 불규칙하게 숨을 내뱉는다.) ... 그나저나, 왜 여태까지 안 자고 있던 건가요. 역시, 무서우신 거죠. 같이 있어드릴테니 안심해주세요...
코레트:뭘 만들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원단을 선물해 주셨잖아요? (램프를 원단에 살짝 비춰보이곤) 무섭지 않아요. 이 저택도, 당신도. (그를 부드럽게 침대로 이끈다.) 이리 누우세요, 앨릭스. 서로의 곁에 있어 주면 되겠네요.
앨릭스 제이 셔먼:(원단과 당신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이끄는대로 침대로 향해 옆자리에 앉는다.) 갑작스럽게 미안해요. 당신을 방해한 게 아니였으면 좋겠는데... 역시 방해한 거겠죠, 제가.
코레트:방해는요. 아직 뭘 만들지 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어요. (탈출을 확정한 탓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잠들지 못했다곤 차마 할 수 없다.) 데운 우유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무래도 제 방에는 물과 홍차뿐이네요. 이거라도 좀 드시겠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 (불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또 다시 한 번 천둥이 치면 다급하게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붙잡는다.) 괜, 찮아요. 그보다... ... 제 옆에 있어주세요. 제가 지켜줄 수 있게. 멀리 있으면, 그러지 못하잖아요.
코레트:(천둥이 치던 날에 안 좋은 일이라도 겪었던 걸까? 그에게 맞춰주기로 하고, 주전자를 내려놓고 도로 곁으로 돌아온다. 앨릭스를 다시 침대로 이끌었다. 그의 바로 곁에 붙어 앉았다. 램프의 주황빛이 일렁거렸다.) 알겠어요. 여기 있을게요. 안심하세요, 앨릭스.
안 좋은 꿈을 꾸셨나요? 아니면 나쁜 기억이 떠오르신 걸까요.
앨릭스 제이 셔먼:(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뱉는다.) ... 네, 그럴게요. ... 두려워서요. 이제야 당신을 내 눈앞에 놓게 되었는데,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코레트:(납치해온 이가 한둘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오로지 저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당신이란 사람에 대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저를 잃은 적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앨릭스 제이 셔먼:... .... (당신을 응시하던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입술을 달싹인다.) 코레트. 아까, 뭘 만들지 못 정했다고 했죠. ... 인형은, 어떤가요? 코레트라면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마주하지 못한 시선. 누가봐도 말을 돌린 듯한 모양새다.)
코레트:(화제를 돌렸음을 곧장 알아차렸지만 지적하는 대신 순순히 말을 잇는다.) 그럴까요. 옷이나 식탁보, 손수건 등 많은 걸 만들 줄 알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고 또 자신있는 건 인형이거든요. 어떤 인형을 만들면 좋을지도 추천해 주실래요?
앨릭스 제이 셔먼:(인형에 관한 주제가 나오면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그려진다.) 친구들을 닮은 인형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그래, 가까이 지내는 마을 아이들을 닮은 인형이라던가. 아니면 동물 인형도 괜찮을 것 같아요. 크기가 커도 좋을 것 같지 않나요? 껴안고 잔다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은데. (다소 신이 난 태도로 재잘거린다...)
코레트:아이들은 동물 인형도, 자기를 닮게 만들어주는 인형도 곧잘 좋아하죠. 앨릭스가 좋아하는 동물이 있음 참고해볼게요. (금세 웃음을 되찾고 재잘거리는 앨릭스도 일견 아이처럼 보인다고 하면 언짢아하려나. 동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인형을 안고 자면 편안해질 것 같다는 말도 그렇고……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얼 만들지 마음을 정했다.) 다 만들면 당신께도 보여드릴게요.
앨릭스 제이 셔먼:제 의견도 참고해주신다니, 영광인걸요. (고민...)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은 강아지예요. 사실 예전에는 길을 잃고 저택으로 들어왔던 강아지를 돌봤었던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밝았던 낯이 점점 어두워진다.) ...누군가, 죽였어요.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지만...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이겠죠. ...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을 있는 힘껏 말아쥔다. 잠시간 가라앉았던 얼굴은 서서히 다시 밝아진다.) ... ... 코레트가 어떤 인형을 만드실지 기대되네요. 그런데... 이 곳에 계실 동안 만들 수 있나요? 저도 만들어본 적 있었는데... 한 달보다 오래 걸리더군요.
코레트:강아지군요, 참고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당황한다. 그렇잖아도 해리엇의 어투를 통해서 앨릭스가 그리 위엄있는 주인은 아니리라 추측하고 있었는데, 주인이 거둔 동물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다니. 사용인이 죽인 걸까? 아니면 이마저도 앨릭스의상상일까. 진실이 무엇이건 우선은 앨릭스의 어깨를 살짝 도닥이며 위로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많이 슬프셨겠어요. 자책하지는 마세요. 함부로 생명을 죽인 이에게 죄가 있는 게 아니겠나요.
작은 인형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어요. 특히 지금은 따로 하는 일 없이 저택에서만 머무르니 더더욱이요. 그나저나 인형을 만들 줄 아시나요? (호기심이 어린다.)
앨릭스 제이 셔먼:(머뭇거리는 손이 당신의 옷자락을 잡는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쉽게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담긴 손길로.) 하지만, 제가 끝까지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어요. ... 닮아서, 무척이나 닮아서... 지켜주고 싶었는데. 저는 늘 똑같았어요. 아무리 붙들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금방 떠나버리던걸...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입가에는 무언가의 깊은 감정이 담긴 미소가 걸려있다.) 정말 옛날의 일이긴 하지만, 가르침을 받았거든요. 제 친애하는 친구에게. 그래서 약간의 바느질을 할 줄 알아요. 코레트가 보기에는 많이 서툴겠지만.
코레트:무엇과 닮았었기에? (뿌리치는 대신 옷자락을 잡은 손길을 제 손으로 살짝 감싸쥐었다. 여리고, 섬세하고, 정 많은 도련님. 저 이전에 스쳐지나갔던 많은 이들도 당신의 마음을 채우지는 못했나 보다. 오히려 그마저도 하나하나 기억 속에 간직하고 돌아보겠지. 계속 이 저택에 남았더라면 당신을 외롭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저택에서 나간 이후에도 계속 만남을 갖자는 제안을 거절한 건 바로 앨릭스기도 하다. 이해와 불이해가 넘나든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늘 슬프고 아프죠.
멋진걸요. 제가 자주 쓰는 원단을 알아본 것도 그래서였군요? (감탄한다.) 서툴어도 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거죠. 계속하다 보면 금세 늘 거예요.
앨릭스 제이 셔먼:(당신의 손이 맞닿으면 흠칫, 놀라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 (곧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들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삼켜진다.) 모르겠어요. 제법 오래 전의 일이거든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면, 긴 머리카락이 장막처럼 드리워 얼굴의 일부분을 가린다.)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아니, 분명 그럴 거예요... 직접 내뱉은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어쩔 수 없는 수순이겠죠.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낯이다. 시선은 피하고 있지만 잡은 손은 놓지 않는다.)
코레트한테 칭찬을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하지만, 몇 년동안 계속 늘지 않았는데. 그래서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어요. 만들고 있는 인형이 하나 있었거든요.
코레트:오래전의 일인데도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계시군요. 당신이 그만큼 상냥하고 사려깊은 분이라서겠죠. (숙인 고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반대쪽 손으로 빛 바랜 금빛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내었다.)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당신과 짧게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앨릭스도 죄책감에 얽매이기보단 즐거웠던 추억을 되새기셨으면 해요. ……떠나간 이는 돌아오지 않아도 함께 했었던 기억은 남아 있잖아요.
그럼요. 정말로. (부드럽지만 확연하게 긍정했다.) 어떤 인형을 만들고 계신가요? 그 말씀을 들으니 무척 궁금해지는걸요. 막힌 지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겼던 이를 잃어버린다면. (그 손길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본다.) ... 하지만, 보통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원망하잖아요. 그것조차 지키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과분한 것을 누릴 자격이 있겠어요.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은 자는 끝내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해요. 못된 왕비나 사냥꾼들이 그랬듯이. (씁쓸하게 웃는다.) 그 기억이 있으니까 슬퍼하는 거예요. 미련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어요. 전... ... 소중한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어쩐지 마지막 말에는 어떠한 힘이 실렸다.)
... 그게, 사실은... 잃어버렸어요. 깨달았을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서. 그러니 괜찮아요. 어차피 완성할 수 없었을 거예요. 전 코레트가 만든 인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거든요. 꼭, 보여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코레트:그 죽음은 당신의 탓이 아니었잖아요, 앨릭스. (예상보다도 깊은 죄책감과 자괴감이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일까? 저는 알 수 없는 수많은 과거가 늪처럼 그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장막 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깊은 푸른색의 눈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감히 당신의 가치관이나 생각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지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소중한 사람 역시도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랄 거예요. (고요한 서정을 품은 목소리가 부드럽다.) 물론 저도 앨릭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앨릭스도 제게 말하셨죠? 정말로 주변 사람들을 위하고 싶다면 스스로를 돌봐 달라고. 그 말씀을 되돌려 드리고 싶네요.
알겠어요. ……시일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완성해서 보여드릴게요.
앨릭스 제이 셔먼:저는, 그러니까...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푸른 눈동자가 형편없이 흔들린다. ) ... 하지만, 저도 같은 마음이라면. 어떻게 하죠? 전, 제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전부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그 어떤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삶의 풍족함을 영위했으면 하는데. ... (...)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당신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놓는다. 그리고 곧장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밤이 깊었네요. 곧 새벽이에요, 코레트. 내일을 위해서 잠에 드는 게 좋겠어요. 천둥이 무서우시면 자장가를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어깨를 토닥여드릴게요. 잠이 드실 때까지.
코레트: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죠.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바라잖아요? 함께 방법을 찾아보면 되겠네요. (저와 앨릭스의 초점이 미묘하게 다르단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분명 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앨릭스는 더 멀리, 혹은 더 과거에 있는 것만 같아서. 힘이 빠진 손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불을 어깨까지 잘 덮어주었다.) 후후. 자장가가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앨릭스 쪽일 것 같은데요? 제가 아이들을 재우는 데는 조금 일가견이 있죠. 들어보시겠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게 그럴 자격은 없어요. 하지만 정말로, 만약에...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눈꼬리를 접어 웃어보인다.좋을 것 같아요.라고 작게 속삭이듯이 대답한다.)
... 네.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드리는 거예요. 다신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망설임을 담은 고갯짓은 느렸다. 그리고 은근슬쩍, 당신과 거리를 좁히고는 베개에 머리를 뉘인 채로 바라본다.)
코레트:(저는 앨릭스가 자꾸만 자격이 없다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쭉 그럴지도 모른다. 고작 사흘 뒤 이곳을 떠날 예정이니까. 그러니 제 말 몇 마디로 그를 감화시킬 수도,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일만을 하자.)
또 바라도 괜찮아요. (이불 위로 앨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면서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는 음률을 읊는다. 천둥과 폭우가 내리는 바깥과 달리 평온하기만 했다.)
나지막한 음성이 방 안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단조롭고 느린 박자의 자장가.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 두려움이 담겼던 앨릭스의 눈이 감기며, 서서히 평안이 찾아옵니다.
코레트:(약속? 무엇을…… 시야도, 귓가도, 정신도 모든 것이 안개처럼 흐리다. 눈물의 온도와 촉감을 겨우 감각할 뿐이었다. 수많은 자책과 자괴를 겪으며 살아 왔으나 자신이 '코레트'라는 절대명제만큼은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이 기시감은 대체 뭘까. 그리고, 이 익숙한 목소리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소리가 나가지 않는다.)
간절한 속삭임은 목이 멘 듯 잠시 멈추었다가,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하게 이어집니다.
???:내가 지켜줄게.
안개처럼 눅눅한 맹세, 고백, 둘 중 무엇도 될 수 있는 것.
...
...
불현듯 잠에서 깹니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하늘은 흐리게나마 개어 있습니다.
아주, 아주 그리운 무엇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멍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듣다 보니 드디어 당신도 미쳐 가는 걸까요?
앨릭스가 있어야 할 옆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 일어났군요. 더 주무시지.
등 뒤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돌아보면, 어느샌가 침대 곁에 끌어다 놓은 의자 위로 한쪽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는 앨릭스가 보입니다.
무릎에 턱을 괴어 놓고 웃는 얼굴이 조금... 낯이 익은 것도 같습니다.
그의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코레트:(숨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심결에 제 눈가를 매만지면서 옆자리를 더듬어 찾다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짧게 안도한다. 안도? ……뭘까, 이 감정은. 저택에 와서야 처음 만났는데도 낯이 익은 듯 느껴지는 이유는.)
(목구멍이 말라붙은 탓에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작게 입을 열었다.) 앨릭스…… 앨릭스야말로 먼저 깨셨군요. 책을 읽고 계셨나요?
앨릭스 제이 셔먼:너무 일찍 깨버려서요. 다시 눈을 감았는데도... 통 잠이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서재에서 가져왔어요. (펼쳤던 책을 덮고는 침대에 걸터앉는다. 가까이 다가가 이마에 제 손을 얹는다.) ... 악몽이라도 꾼 건가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혹시 어디 아픈 건...
코레트:깨우셨으면 자장가를 또 불러 드렸을 텐데요. (피로가 얹힌 낯으로도 옅게 웃고는) 악몽은 아닌 듯하지만, 이상한 꿈을 꿨어요. (말도 안 되지만, 어쩌면, 혹시……당신일까?저를 지극히 걱정하고 신경써 주는 모습에 그만 착각하게 된다. 당신이 들으면 우습지도 않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는데도 말을 꺼내게 된다.)
누군가 저를 위해 슬퍼해주고, 또지켜주겠다고 하는 꿈을요.
앨릭스 제이 셔먼:(고개를 젓는다.) 또 어리광을 피울 순 없죠.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는 미안하잖아요.
(손을 거두고는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미소짓는다.) 꿈이 이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상하지 않나요? 원래 그런 법이에요. 그래도 악몽은 아니라니 다행인걸요. 당신만큼은 끔찍한 악몽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없어도.
마침 이 책의 주인공인 기사가 공주에게 지켜주겠다고 하는 단락을 읽고 있었는데... 괜찮으시다면, 읽어드릴까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거든요.
코레트:(하긴. 고작 꿈일 뿐이다. 앨릭스와 대화를 하다 잠들었으니 그가 꿈에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말이다. 현실과 관련이 있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테지. 그가 제 말에 어떤 반응을 하진 않을까 예상했던 게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말까지 조금 더듬었다.) 다, 당신의 말이 맞네요.
좋아요. 읽어주세요. (얼른 대답한다. 이 창피함에서 벗어날 만한 거라면 무엇이든 좋다…!!)
앨릭스 제이 셔먼: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1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고개를 기울인다. 왜 부끄러워 하는 거지?)
(그래도 아무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네, 그럴게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읽어드리는 게 좋겠군요. (중간쯤 읽었던 책을 처음으로 넘겨, 첫장을 펼친다.)
앨릭스는 고요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가기 시작합니다.
...
기사도에 심취한 시골 귀족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기사 소설을 읽다 못해 스스로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모험을 떠납니다.
다들 그 기사를 가리켜 미쳤다고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모험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웬 마을 처녀에게 둘시네아 공주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그녀의 마법을 풀어 농부의 딸에서 공주로 되돌리겠다는 호언장담을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기사는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되고... 결국에는 자기가 굳게 믿던 공주의 마법을 풀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노환 때문이었는지, 마음의 병 때문이었는지... 그는 제정신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야기는 기사가 죽고, 그 종자가 유산을 상속받으면서 끝이 납니다.
...
앨릭스 제이 셔먼:... (마지막 구절을 끝으로 책을 덮는다.)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돈키호테>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 중 하나거든요.
코레트:(이내 부끄러움도 잊어버린 채 책의 내용에 몰입한다.) 흥미롭지만, 끝마무리는 좀 씁쓸한 책이네요. 그래도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모험을 떠나는 순간만큼은 즐거웠겠지요?
앨릭스 제이 셔먼:그럴거예요. 아마, 그렇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공주가 있는 기사인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가 더 괴롭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게 그 기사에게는 더 좋은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공주가 안타까워요. 둘네시아 공주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결국 그녀에게 했던 맹세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잖아요.
코레트:그러게요. 기사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환상이나 모험기가 전부 깨져 버렸을 뿐 아니라, 기사의 굳은 약속을 믿었을 공주에게도 슬픈 일이 되었어요. 환상은 환상일 뿐이라지만,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좌절되는 이야기는 슬프네요. 이래서 동화가 있는 걸지도요.
앨릭스 제이 셔먼:(책을 펼친다. 펼친 책장에는 기사가 공주에게맹세를 하는 장면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 만약 제가 기사였다면, 공주와의 약속을 지켰을 거예요. 설령 그 대가가 영혼이라고 해도, 기꺼이. 그렇다면... 적어도, 둘 중 한 명은 해피엔딩을 맞을지도 모르니까요. 안 그런가요?
코레트:(삽화를 보자, 잠시 잊혀졌던 꿈의 장면이 다시 부상한다.내가 지켜줄게.안개처럼 젖어 있던 그 목소리는 고백 혹은 맹세처럼 들렸다…… 불길한 직감이 든다. 꿈은 꿈일 뿐인데.)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앨릭스. …영혼까지 바쳐 약속을 지킨들 공주가 행복할 것 같지는 않은걸요. 마법은 풀렸어도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기사가 곁에 없잖아요.
앨릭스 제이 셔먼:(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겼을 것이다.) 기사의 숙명은 공주를 지키는 것이니, 그녀에게 괴로움과 슬픔을 겪게 할 수는 없어요. 자신을 지켜준 기사가 사라져 혼자가 된다고 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결말이 될 거예요.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앨릭스는 혼곤한 피곤이 묻어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코레트, 오늘은 선약이 있어요. … 부탁이니까, 웬만하면 방 밖으로 나오지 말아주세요. 당신에게는 위험해요.
아침과 점심, 저녁은 하인들을 통해서 올려보낼 테니까… 거르지 말고 드셔주세요. 원하는 거나 필요한 게 있다면 방 안의 종을 울려주시면 집사가 찾아올 거예요. 아셨죠?
코레트:……알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를 붙잡지 않았다. 무슨 선약이기에 위험한지 묻지도 않았다. 대신 깊게 가라앉아 슬프게도 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앨릭스. 이건 기우겠지만, 당신이 지금 말한 것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앨릭스 제이 셔먼:.......
(당신의 말엔 그저 침묵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다. 잠시간 가라앉은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떼었다.)
책장 사이사이로 스며든 우울이, 가만히 묻어둔 불안 앞에서 쥘부채를 들고 부치는 것만 같습니다.
그대로 맨 안쪽 책장을 찾아 들어가면 창문을 투과한 암녹색 빛이 어깨를 훑고 지나갑니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한 줄이 적혀 있습니다. 간결한 필체예요.
- <돈 키호테> 전편과 후편의 위치를 바꾸어 동시에 꽂기.
코레트:(앨릭스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 오늘 아침에도 책의 일부 구절을 두고 대화를 나누었었지. 우연일까, 필연일까. 들어올린 손이 잠시 허공을 배회한다. 불길한 직감이 든다. 그러나 이 미지의 저택, 미지의 상대에 대해 더 알고 싶었기에 결국은 <돈 키호테>를 찾아 전편과 후편의 위치를 바꾸어 꽂았다.)
당신은 어렵지 않게 책을 찾아 바꿔 꽂습니다.
... 달칵.
무언가 맞물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책장이 무서운 속도를 내며 앞으로 밀려나갑니다.
당신의 눈앞에는 어둑하고 가파른,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놓여 있습니다.
코레트:(망설이다가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앨릭스는 분명 '숨겨진 공간 같은 건 전혀 없다'고 했었는데요.
집주인도 모르는 비밀 공간인 걸까요, 아니면 그게 이 공간을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걸까요.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희미하게 빛을 받고 있는 곳이 시야 끄트머리에 걸립니다.
해리엇이 불순한 생각을 품었든 아니든, 그건 당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코레트:(사용인들은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걸까? 심지어 산 채로 갇혔다는 흔적까지 눈에 띄자 조금씩 식은땀이 난다. 정말로 앨릭스가 저지른 짓이건 아니건, 이 공간에 더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봐버린 듯한 배덕감과 불길함에, 서둘러 다시 계단을 올랐다.)
다시 서재로 올라서면, 책장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이곳에서 알게 된 건 하나뿐입니다.
해리엇의 경고가 진실이라는 것.
코레트:(서재에 붙어서서 숨을 고른다. 직전 본 끔찍한 광경이 여전히 시야에 엉겨붙어 사라지질 않는다. 대체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이곳에 데려온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더니 저택 전체가 의문스러운 것들 투성이다.)
(해리엇은 앨릭스를 그리 존중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다른 사용인들도 동조해온 걸까? 혹은 아는 이가 드물기 때문일까? 가닥은 여러 개인데, 정작 그 끝에 가 보면 블랙홀처럼 까맣기만 하다.)
(돈키호테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서재를 나서 제 방으로 돌아온다. 그 누구도 제게 진실에 관해 속시원히 말해줄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빨리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
방으로 돌아오고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습니다.
기이한 꿈, 해리엇의 수상한 대화, 숨겨진 방, 도련님의 순진한 얼굴,
한 자 한 자 책을 읽어 내리던 나지막한 목소리, 가끔 지어보이던 상냥한 눈웃음…
제가 지켜 드릴게요, 하고 장담하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머리를 혼곤케 합니다.
그럼에도 잠은 옵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만 같았던 잠이 눈꺼풀과 몸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코레트:(잠에서 깬 이후로 내내 멍했다. 원단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이나 손끝을 바늘에 찔릴 정도였다. 그러나 아픔도 잠깐일 뿐,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보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의 선혈이 떠오르고, 사고의 흐름은 이내 앨릭스를 향해 뻗는다. 서재의 비밀 공간을 발견하자 기다렸다는 듯 떠오른 꿈. 아마도 진실. 백골들은 여러 번이고 죽어온저 자신이리라.)
(모두 진실이라면, 앨릭스가 저를 위해 그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어 온 거라면…… 나는 떠나서는 안 된다.)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앨릭스 제이 셔먼:(대답이 한 박자 늦는다.) ... 저예요, 앨릭스.
... 문, 열어주실 수 있나요?
코레트:그럼요. 들어오세요.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하지만 앨릭스의 방을 모르니 찾아갈 수도 없었는데, 먼저 와 주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그곳에는 신열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앨릭스가 서 있습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죄송해요, 쉬시는데… 제가 방해했을까요?
코레트: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직 많이 아프신 것 같은데, 몸은 어떠신가요?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매정하기도 하지. 이렇게나 열로 들떠 있는데 어째서 꾀병이라니 뭐니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어서 들어와서 앉으세요. (그를 침대가로 이끌었다.)
앨릭스 제이 셔먼:많이 안 좋은 건 아니라...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당신의 손길을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기다가, 장갑을 낀 손으로 입가를 막고 작게 기침한다.) ... 부탁이 있어요, 코레트. 오늘 밤도 여기에 있을 수 있게 허락해줄 수 있나요?
코레트: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를 바라보던 친밀한 눈빛, 기대감, 웃음…… 그럼에도 터놓지 못하고 삼키던 말들. 이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이에요. 당연히 허락할게요.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앨릭스.
……끝까지 혼자만 모든 걸 떠안고 계시려 했나요? (추궁도 아니고 원망조는 더더욱 아니다. 참담한 광경을 몇 번이고 보아 왔을 당신을 향한 염려와 안타까움, 깊은 경애가 물기처럼 가득 어려 있었다.)
앨릭스 제이 셔먼:(긍정의 말에 작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가, 흠칫하며 놀란다.)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시선은 당신을 빗나간 채로, 목소리는 힘없이 떨리고 있다. 마치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낌새로.)
코레트:있죠, 저 보고 말았어요. 서재 안쪽에 있는 지하 공간을요. 그리고 꿈을 꿨죠. 당신과 제가 얽혔던 과거, 당신이 저를 살리기 위해 해 온 모든 일들이 아주 생생하게 비추어지는 꿈을요.
이제 알겠어요. 이곳에 머물러야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으셨던 이유. 당신이 내내 장갑을 착용하고 계셨던 이유. (검은 장갑으로 감싸인 손을 느리게 쓸었다.)
시간이 지나 내일이 되면 비로소 당신의 염원이 이루어질까요?
앨릭스 제이 셔먼:... ... (한 걸음, 두 걸음.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친다.)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 네가 꾼 건 이상한 꿈일 뿐일 수도 있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매달려도 결국 난 너를 강제로 납치한 악인이야. 그런데, 왜... 믿어주는 거야? (가려지지 않은 한 쪽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아, 이렇게 형편없을 수가.) ... 날 두고, 도망치려고 한 주제에. 모른 척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코레트:이상한 꿈일 리가 없어요. 지금 당신의 그 말로 확신하게 됐으니까요. (눈을 반쯤 내리감는다. 그때 그러했던 것처럼.) 따스한 햇살이 기분 좋았었죠. 당신의 무릎에 누워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몸이 나른해졌어요. ……아무리 저희의 위치와 환경이 달라져도 당신은 절 잊지 않아주셨군요.
못된 짓을 해서 미안해요, 앨릭스. 당신을 몇 번이고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올리브색의 홍채가 앨릭스를 응시한다. 그의 맑은 눈가도 조금은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겠어요?
앨릭스 제이 셔먼:...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로, 기억하는구나. (혼란스러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참 많이 흘렀지. 몇 번이나 반복됐을까... 수십 번? 수만 번? 하하, 정확한 숫자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어... (눈물은 고개를 기울이는 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이제는, 조금 지치네.
코레트. 네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그러니까 들어줘. (간절함이 담긴 손길로 당신의 두 손을 잡는다.)
가지마.
하루만이라도 더... 나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줘. 너만의 것을 만들고, 너만의 시간을 가져줘. 이제 내게 남은 건 그것뿐이야. 그러니, 제발...
코레트:(상상도 하지 못한 숫자다. 꿈 속의 푸른 눈에 광기가 깃드는 것도 당연스럽다고 여기게 될 만큼. 그렇게나 길고 많은 시간을 오로지 저를 살리기 위해 쓰다니. 그런데도 저는 또다시 남의 꼬임에 넘어가 벗어나려 했다. 그를 향한 고마움과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거목처럼 높고 두껍게 쌓였다. 끝내 눈가를 타고 흐른다. 제 피부에 떨어지던 미지근한 물방울처럼.)
(하필이면 이번에서야 기억을 찾게 된 이유는 뭘까? 역시나 알 수 없다. 천문학적인 세월을 고통 속에 버텨 왔을 앨릭스를 가여이 여긴 누군가의 안배일까.)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공주의 이야기를 제게 해 주셨었죠.
제가…… 제가 당신보다 하루를 더 살아남는다면. 그럼 당신은 비로소 내기에서 승리하고 자유로워지나요? (그때 나눈 대화를 잊을 수 없었다. 앨릭스가 단순히 책에 대한 토론이 아닌 실제로 제 영혼을 내걸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꿈을 통해 대부분의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그리고 당신은……)
앨릭스 제이 셔먼:(손을 들어 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울지마, 라고 작게 속삭이기도 하면서.)
이제껏 너는, 7월의 장마가 끝나는 시간에 목숨을 잃었어. 빌어먹을 누군가가... 자꾸만 8월이 오기 전에 네 목숨을 앗아가.
그러니 내 눈앞에서 안전히 한달을 보내면... 너는 더 이상 죽지 않게 될 거고, 조금 더 넓은 세상을 가지게 될 거야. 지금처럼 한적한 곳에서 가게를 열고 그 어떤 위협과 방해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혹은 배를 타고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새로운 대륙을 밟을 수도 있을 거야. 널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아마, 나조차도...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 얼굴에는 기쁨만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지금 네가 신경써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코레트, 네 자신이야. 난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너도, 행복해지고 싶잖아. ...그렇지?
애달픈 굴레입니다.
그가 늘어놓는, 두서 없는 애원은 꼭 유언을 닮아 있습니다.
그의 바람을 외면할지, 마주할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코레트:대신 당신이 죽게 되겠군요. 그렇죠? (눈가에 닿는 손길이 다정해서, 장갑 너머로도 따스하게 느껴져서 더욱 괴롭다. 결국 언뜻언뜻 느껴졌던 저의 직감은 모두 들어맞았던 셈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저 스스로를 깎아내는 건 괜찮다고 했었죠. 당신은 그러지 말라며 저를 말리셨지만, 사실은 당신이야말로. 당신이야말로 저를 위해 망가지는 것도 감수하며 시간을 돌리셨잖아요.
모순적이에요, 앨릭스. 당신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건 저도 똑같은데. 평온과 즐거움, 광활한 세상으로의 나아감, 당신도 누렸으면 한다구요. 어떻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살아가고 싶어요. 행복할 수 있다면, 더욱 만족스러운 삶이겠지요. 하지만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소중한 가치들 중 당신이 빠지게 되면 저는…… 당신의 가정 속 둘시네아 공주가 되겠죠. 죽음의 마법은 풀렸어도 도와준 기사가 곁에 없으니까요.
이 끝없는 굴레를 함께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서글픈 목소리에는 소금기가 가득 담겼다.)
앨릭스 제이 셔먼:... 글쎄. 거기까지 닿아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어. 하지만... 내 영혼 하나만으로 네가 살아서 행복할 수 있다면, 난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지금까지 내가 어떤 각오로 시간을 돌렸을 것 같아? 내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서, 이런 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지금까지 널 지키지 못하고 몇 번이고 죽게 내버려둔 건 나야. 그런데 어떻게 내 앞으로의 삶과 행복까지 바랄 수 있겠어. 분에 넘치는 욕심은 비극을 불러일으킬 거야...
공주에게 걸린 마법을 푸는 것만이 기사의 삶이자 행복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그는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공주를 속박하는 마법을 풀기 위해, 그녀에게 축복을 건네주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줄 수는 없는 걸까... 코레트. 아직도 모르겠어?
... (달뜬 숨을 몰아쉬며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머리를 네게 기댄다.) 너와 함께 행복해지겠다는 욕심을 버린지는 꽤나 오래전이야. 그러니 나 대신 살아서 행복해줘. 네가 안전해질 때까지, 이 저택을 떠나지 말고... 내 곁에 머물러줘. 그래주면, 안될까?
코레트:(어째서를 묻는 건 우리에겐 의미가 없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그 이유만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둘 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저 당신이 겪었을 지난한 세월의 고난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따름이다.)
저의 죽음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이것만은 꼭 알아주세요. (앨릭스의 손을 감싸쥔 채 속삭인다.) 당신의 삶과 행복을 바라는 것 역시도 분에 넘치는 게 아니고요. 인간인 이상 당연한 점이지요.
당신의 해석이 그렇다면, 기사가 그토록 자신보다 공주를 위한다면, 그 마음을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겠지요. (이 선택이 높은 확률로 제게서 당신을 앗아가게 되더라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목숨을 감수한 기사에게 저 역시 그 정도는 감내하는 게 마땅하리라. 슬픔에 깊이 잠긴 목소리가 애상하다.) 앨릭스가 바라는 대로 할게요.
정원 청소부인 해리엇 퓨쳐가 제게 이 집에서 도망치는 걸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제 방 앞에서 어떤 검은 머리의 남자와내기에 관해 논의하는 걸 들었고요. 이번에 당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이는 아마도 그가 아닐까요.
앨릭스 제이 셔먼:(감싸쥔 손을 바라보다 맞잡는다.) ... 나는 이제껏 너의 평안한 미래만을 위해 살아왔어. 그러니 나의 행복따위는, 글쎄... 정말로 모르겠어. 잊은지 오래거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참이나 오래됐지. 정말로 나를 생각해준다면... 네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줘. 그게 나의 전부야.
(여전히 네게 제 무게를 실어 기대어 있다. 기대고 있는 몸의 심장 소리를 엿들으려는 듯, 요지부동에 가깝다.) ... 해리엇 퓨쳐, 라... 낯선 이름인걸. 우리 저택에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던가. (무상한 웃음을 지으며 한숨섞인 목소리로 답한다.) 모든 게 흐릿하네. 기억도 나지 않아...
(간절함이 실린 목소리로, 손길로 당신의 옷자락을 잡아본다.) 코레트, 너는 알고 있을까. 언젠가의 너도,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바라는대로 해주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끝내... 날 떠나버렸어. 이해해지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내가 지긋지긋하더라도... 네가 7월의 장마를 무사히 보낸다면, 그때 놓아줄게. 그러니까... ...
그의 텅 빈 눈이 당신을 들여다보고, 이내 힘없이 감깁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손은 툭, 하고 허공에 매달립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열에 못 이겨 잠이 든 모양이네요.
…
시곗바늘은 착실하게 돌아가, 어느덧 두 시를 넘겨 약속한 시간을 앞둡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나요?
애당초 결정한 대로 해리엇의 도움을 받아 탈출할지, 당신을 지키겠다며 헛소리를 하는 미친 남자의 곁에 남을지.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의 뜻대로요.
코레트:(모든 진실을 똑똑히 보고 들은 이상 더는 그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가 저를 위해 얼마나 끝없이 긴 굴레를 반복해 왔는지, 얼마나 성기고 마모되어 왔는지를 안다면…… 비록 앨릭스를 더는 만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의 염원대로 이곳에 머무르는 게 마땅하다.)
(열오른 앨릭스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며 내내 그의 곁에 있었다.)
그 곁에 남기로 합니다.
철부지라 여겼던, 끝내는 미쳤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곁에.
해리엇이 찾아오면, 돌려보내면 될 일입니다.
...
약속한 시간은 성큼 다가옵니다.
뻐꾸기시계가 두 시 삼십 분을 가리키자마자, 누군가 방문을 낮게 두드립니다.
코레트 씨? 하고 살며시 부르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옵니다. 해리엇이겠군요.
코레트:(잡고 있던 앨릭스의 손을 놓아주고, 천천히 다가간다. 문을 막아서듯 기댄 채 고요히 입을 열었다.) 해리엇 씨.
죄송해요. 전,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어요.
해리엇 퓨쳐:(당신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미소가 얼굴에 퍼진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서서히 굳기 시작한다.)
... 하하, 그게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네요.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으셨던 게 아니였나요?
코레트:당신의 말대로 서재에 숨겨져 있던 진실을 봤어요. 그리고 또 다른 진실도 알게 되었고요.
(온화하던 낯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상대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해리엇 씨, 당신은 누구시죠? 흑발의 남성과 이야기한내기는 또 무엇이고요?
해리엇 퓨쳐:아하, 내기... 내기라. 이것 참, 부끄럽네요. 제 개인적인 손님과 한 대환데, 다 들으신 모양이군요?
뭐, 어쨌든. 그건 당신이 신경쓰실 바가 아닙니다.
숨겨진 방을 보고도, 여기에 남으시겠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하아, 정말.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해요. 어제도 말씀드렸지 않나요? 이미 담당 경비를 바꿔서 변경이나 미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테라스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눠보시죠. 제대로 된 까닭을 듣고 싶으니.
코레트: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제 방문 앞에서 이야기를 하시기에 전부 들렸어요. 저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추측했고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앨릭스는 사용인들에게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경비를 좀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될 점이 있나요? (그의 의중을 읽어보려 든다. 이미 세상의 이치가 공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방법으로 죽어 왔음을 알기에, 쉬이 넘어가줄 수는 없었다.)
심리학
기준치:
65/32/13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해리엇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둥글고 선한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갈색 눈에 담긴 저열한 질투 따위를 당신은 알아채고야 맙니다.
기이한 위화감이 어깨를 감싸 안습니다. 평정을 가장한 얼굴에서는 엷은 초조가 묻어납니다.
해리엇 퓨쳐:... ... (한숨을 쉬는 모습에는 신경질적인 태도가 묻어난다.)
이렇게나 빠르게 그 분의 꾀임에 넘어가실 줄은 몰랐네요. 전부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은 못해보신건지?
그래도 다행히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가서 이야기하시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티타임이라도 가지면서요. 원래 대화는 제대로 된 장소에서 해야 잘 이루어지는 법이니까요. (싱긋, 미소짓는다.)
코레트:(무엇 때문에 질투하는 걸까? 그의 헌신에? 눈빛에 비치는 질투와 신경질적 태도는 코레트의 결심만 더 확고히 굳힌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사양할게요. 저택을 꼭 나가야만 한다면 앨릭스에게 부탁하죠. 그라면 분명 들어주실 테니까. (차를 마시면 안 된다는 직감이 강하게 든다.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닐지라도 위험 요소는 차단하는 게 좋겠지.)
저를 위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미안해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방문의 손잡이를 쥔다.)
해리엇 퓨쳐:(닫지 못하게끔, 손으로 방문을 잡는다.)
코레트 씨. 이게 무슨 무례죠? 선약을 아무런 말씀도 없이 깨셨잖습니까. 그렇다면 이유가 궁금할 만도 하죠.
잠시면 됩니다. 오래 붙잡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제 친절은 아무에게나 허용되지 않아요.
코레트:이유를 말씀드리면 믿어주실 텐가요? (마침내 진실을 깨닫고 살아남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모든 걸 알고서 다시돌아갈수는 없다. 해리엇을 자극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차분하고 침착하게 답했다.)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어요. 그는 저를 해치려던 게 아니라 저를 구하려 하고 있었죠. 아주 오랜 시간, 스스로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코레트:제가 앨릭스라면,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당신의 마음을 받아주려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 (팔뚝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얕은 자상이 난 복부가 따끔거리지만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아직은 죽어선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애쓰면서 삽을 휘둘렀다.) 판단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셨군요, 해리엇.
삽
기준치:
25/12/5
굴림:
6,1,89
+2:
대성공
+1:
대성공
0:
어려운 성공
-1:
어려운 성공
-2:
실패
피해:
3
퍽 - !
당신의 공격은 정확히 명중합니다.
그러니까, 해리엇의 머리에 말이죠.
해리엇 퓨쳐:... ....
충격을 이기지 못한 해리엇은 바닥에 쓰러집니다.
상처 사이로 새어나온 피가 복도를 적시기 시작합니다.
쓰러진 상대를 보고 안심했다면, 아직은 이릅니다.
해리엇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질질 끌어 당신의 발목을 움켜쥡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은 튕겨져 나간지 오래이며, 당신의 손에는 여전히 피가 묻은 삽이 들려 있습니다.
당신은, 또 다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코레트:(해리엇이 쓰러지고, 바닥에 피가 퍼져나가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하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저를 죽이려 드는 상대에겐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다. 칼을 주워들며 생각했다. 해리엇 퓨쳐는 저를 몇 번이나 죽이며 앨릭스를 끝없는 쳇바퀴에 가두는 데 크게 일조한 사람이다. 설득도 전혀 통하지 않았으니 이곳에서 놓아준들 또다시 저를 해치러 올지도 모른다. 저를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코레트에게 살인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먼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갈등하게 된다.)
(희미하게 헐떡이는 해리엇의 숨소리와 번진 핏물 위에서 통탄스럽게 눈을 내리감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 처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현실은 자신이 바라던 평온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소중한 이의 원념과 영혼을 대신 받은 채, 배신자의 목숨을 밟은 채, 정녕 앞으로도 이런 삶을 헤쳐나가야만 한단 말인가……)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었다. 엎드러진 해리엇의 왼쪽 등줄기에 날을 올렸다. 살인의 죄악보다 앨릭스가 저를 위해 바친 시간과 혼의 무게로 저울을 기울이려 한다. 기껏 기사 덕분에 살아난 공주가 얼마 가지 않아 악당에게 살해당한다면 기사가 슬퍼할 테니까. 물론, 모두 변명일 뿐임을 안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날을 잊지 못하겠지.)
미안해요. (속삭이며, 그의 심장을 향해 칼날을 찔러넣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칼에 힘을 주어, 심장을 향해 밀어넣습니다.
당신의 발목을 쥐었던 해리엇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끝내 해리엇의 몸은 힘을 잃고 늘어집니다.
...
깨달음은 느리게 찾아옵니다.
자유. 여실히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
자유입니다.
저택에 갇혀 있을 필요도, 앨릭스의 석연찮은 태도를 무지하게 지켜볼 필요도, 죽음의 두려움에 떨며 숨어들 필요도 없어요.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만끽하세요, 코레트.
유언처럼 남은 공포는 분명 씻겨나갈 겁니다.
당신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옵니다.
당신이 익히 아는, 이제는 주인을 알 수 밖에 없는 기척입니다.
코레트:(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만 한다니. 이 무슨 원초적인 행위란 말인가. 완전히 숨이 멎어 식어버린 몸에게서 비척거리며 떨어져나왔다. 손에서 칼이 툭 떨어진다. 자유를 얻었다는 실감 같은 건 없다. 처음부터 나는 부자유한 적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인기척에 돌아보면 앨릭스가, 뜀박질, 혹은 박동으로 벅차오른 숨을 가라앉히는 앨릭스가 서 있습니다.
앨릭스 제이 셔먼:... 코레트.
코레트:앨릭스……. (제 바짓단이며 팔뚝을 흠뻑 적셨을 피를 자각한다. 얼굴에도 아마 튀어 있을 테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앨릭스 제이 셔먼:... 죽였구나.
내가 기억하는 너는 작은 벌레조차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핏자국을 닦아준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길은 떨리고 있다.) ... 미안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들어서.
코레트:그가…… '이전'의 저를 몇 번이나 죽였다고 했어요. 그 시체를 모아둔 공간을 제게 보여주었고요. (횡설수설하며 말을 쏟아냈다.) 만일 당신의 말을 들어 제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가 또다시 저를 해치려고 들 것 같아서. 그러면, 당신의 노력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 것 같아서…… (앨릭스의 손수건이 뺨에 닿아오고서야 자신이 온몸을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이 차가웠다.)
앨릭스 제이 셔먼:... ....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네 어깨에 걸쳐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깨를 감싸안는다.)
떨고 있으니까, 따뜻하면... 멈추지 않을까, 싶어서.
... 잊어버려. 너는 그래도 괜찮아. 나머지는 내가 짊어지고 갈게.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코레트:(고맙다는 인사를 할 정신도 없다. 앨릭스에게 안겨 그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자 그제야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애써 눈가가 흐려지려는 걸 막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네…… 따뜻해서 좋아요, 앨릭스.
행복하길 바란다고 하셨죠. ……잊지 못할 거예요. 당신도, 해리엇도, 이곳에서의 모든 일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는 게 마땅해요. 그러고서도 감히 웃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구요.
앨릭스 제이 셔먼:(조용히 당신의 등을 토닥인다.) 잘 기억하고 있네. 다행이야.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 있잖아, 코레트. 궁금한 게 생겼는데.
앞으로 우리는... 다시는우리라고 부를 수 없게 될까?
코레트:(먹먹히 젖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렇지 않아요.
제가 저답지 않은 짓을 저질러도, 당신이 이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되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혹은 추억을 잊어버렸어도 한 쪽이 기억하고 있다가 건네주었을 때 언제든 받아들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우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앨릭스 제이 셔먼:... 몇 번이나 널 지켜내지 못한 내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어. 공주와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기사가 끝내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말이야.
(까마득한 옛날을 회상한다. 아무런 고민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고, 함께 시간을 보냈던 시절을.)
... ...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정말로... 그럴 수 있으려나.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갑니다. 기계적인 동작이지만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웃고 싶지 않나요, 코레트.
웃음이란 이런 때에 터져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당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고, 그는 자신의 바람을 이루었는걸요.
그러니 만끽하세요. 웃어도, 울어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 이 삶을요.
우여곡절은 좀 있었지만 뭐 어떤가요. 두렵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걸 알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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