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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240116] 에르리체 - 시월의 템페스트

 

플레이타임 : 16시간

 

 

 
.
 
Writer 사탕
 
별장에 도착한 지도 오늘로 벌써 한 달하고도 3주나 지났습니다.
 
본가에서는 아직도 이렇다 할 연락이 오질 않아요.
 
주치의 역시 조금 더, 조금 더 머물다 가길 권하는 판국이니 멋대로 채비해 돌아가 잘 수도 없습니다.
 
다들 수도의 매너 하우스가 그립지도 않은가 봅니다.
 
이 부근에는 별장이 아주 많지만, 휴가철이 아니기 때문에 관리인 몇 명,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 하나가 전부입니다.
 
어울릴 만한 사람도 없는 기나긴 요양 생활입니다.
 
어땠나요, 베아트리체? 이런 조용한 생활은 당신의 취향에 맞나요?
 
베아트리체 힐:(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터라 처음 도착한 별장은 퍽 마음에 들었으나 하염없이 기다리는 적막한 곳은 점점 지루해졌다.)
 
이미 서재에 있는 읽을 만한 책들은 전부 읽었고, 후원을 산책하는 것도 지겹습니다.
 
이런 지루한 생활에서는 작은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말이에요...
 
-똑똑.
 
메이드:베아트리체 아가씨. 약을 가져왔습니다.
 
은 쟁반을 든 메이드가 약차와 다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습니다.
 
주치의의 처방이라고 하는데 찻잔 속 찻물의 색은 매일 조금씩 달라져 있습니다.
 
어제는 몹시 붉었다가, 오늘은 아슬아슬 보랏빛을 띄고 있군요.
 
이곳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뿐이지만.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늘 고생이 많아. (눈을 맞췄다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내려본다.)
 
메이드:(그런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아가씨, 많이 지루하세요? 마침 오늘은 비가 그쳤으니 멀리 가지 않으신다면 산책을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폭풍우가 몰아쳐 바깥에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그쳤다니, 그것 하나는 정말 다행이네요.
 
차가운 바깥 공기를 쐬며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병증 완화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얼른 건강해진다면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겠죠.
 
베아트리체 힐:...그러고 보니 날이 개었네. 응, 오늘은 좀 걸어야겠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메이드:그러면 잠깐만 계세요. 준비를 도와드릴게요.
 
메이드가 외투와 장갑, 양산, 모자를 준비해 줍니다.
 
오늘은 해가 전혀 비치지 않는 날이지만 모자를 쓰고 양산을 드는 것은 귀족 자제의 기본 소양이지요.
 
메이드:절대로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베아트리체 힐:그래, 걱정마. 그리 멀리가지는 않을테니까.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아 가며 밖으로 나옵니다.
 
멀리 가지 말라고는 했지만 산책으로라도 숨통을 틔워줘야 하는 법입니다. 별장 부지 밖으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괜찮겠지요.
 
[꽃밭], [후원], 그리고 [숲]으로 가볼 수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양산을 고쳐 쓰며 꽃밭으로 향한다.)
 
커다란 나무들이 빙 둘러싼 넓은 부지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검은 흙과 작게 고개를 내민 파란 들꽃이 가득한 별장 소유의 꽃밭입니다.
 
연이어 지나간 폭풍의 영향으로 조금 기세가 수그러들었지만 푸릇하게 피어 있는 것은 여전합니다.
 
아직 정원사가 정리하지 못했는지 산책로가 이리저리 튄 진흙으로 조금 지저분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아직 엉망이구나. (잠시 고민하듯 멈춰섰다. 찬찬히 길게 늘어진 드레스를 내려보다 아쉬워하며 후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귀족 가문의 별장 치곤 조금 소박한 후원입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그네와 벤치, 장미울, 대리석 분수 따위가 아름다운 곳인데 폭풍 탓에 흠뻑 젖어 제대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아쉬운대로 닦여있는 산책로나 조금 거닐어야 할 것 같아요.
 
베아트리체 힐:...마찬가지네. (모처럼의 산책이라 조금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무래도 부지에서 산책은 그른 것같네. 남은 손으로 드레스를 그러쥐고 조심 산책로를 걸어 숲으로 향한다.)
 
꽃밭 뒤쪽에 난 작은 오솔길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입니다.
 
이 뒤로 무엇이 기다리는지, 숲의 경계는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단지 이 중 몇 마일 정도는 별장에서 소유한 영토라는 것 외에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평소에 이 길로 종종 산책을 하던 터라 외투를 바싹 여미고 조심히 걷는다면 옷에 흙이 튀지는 않겠지요.
 
비바람이 한 차례 훑어간 것치곤 비교적 온건한 모습입니다.
 
올려다보면 듬성듬성 푸른 차양 사이로 회백색의 하늘이 보입니다.
 
쌀쌀한 바람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쩐지, 여기까지 나왔더니 기분이 좋네요. 며칠간 전혀 외출하지 못했던 탓일까요?
 
오늘따라 조금 더 걷고 싶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여기서 돌아가기는 아쉬우니까.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길이지만 오늘따라 호기심이 들었다. 걸음을 옮기기전 숨을 크게 들이쉬면 젖은 흙과 나무에서 나는 눅눅한 내음에 오히려 눅눅한 기분이 사라지는 느낌. 외투와 드레스 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오솔길을 따라간다.)
 
<관찰> 판정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좁게 이어진 오솔길은 자칫 정신을 팔았다간 방향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평소에는 흙더미가 쌓인 방향대로, 나뭇가지가 꺾인 방향대로 길을 찾았지만 오늘은 폭풍 탓에 익숙한 표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길도 많이 상했고 말이에요.
 
그런데, 어...?
 
문득,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하얀 무언가가 눈에 띕니다.
 
금빛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듯한데요...?
 
맙소사, 저건... 사람? 사람이잖아요!
 
베아트리체 힐:...사람? 왜 이런 곳에...? (조심히 들여보던 눈동자가 크게 뜨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바삐 걸음을 옮긴다.)
 
반쯤 찢어진 하얀 코트 차림의 덩치 큰 남자입니다.
 
연갈색 피부 위로 곱슬기 있는 새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졌습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키가 크고 우락부락한 인상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곳에 쓰러져 있는 거죠? 살아있기는 한 건가요?
 
남자의 곁에는 긴 장검과 손바닥만한 총 한 정이 놓여있습니다.
 
???:으윽…….
 
순간 쓰러진 인영에게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옵니다.
 
베아트리체 힐:(흔들어보려던 손이 뚝 멎고 자그만 소리에 그대로 무릎을 굽혀 앉아 숨소리를 확인한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요?
 
<지능> 판정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2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러고 보니 남자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부 흠뻑 젖어있습니다.
 
비가 그친지는 좀 되었으니 분명 폭풍에 휩쓸렸던 것이겠죠.
 
남자의 뺨에는 작은 생채기가 나 있고 코트의 팔 부분에도 미미한 혈흔이 묻어납니다.
 
어제부터 계속 이곳에 있었다면 체온이 떨어져 아주 위험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대답이 없습니다만,
 
흰 바탕에 금사를 수놓은 코트, 견장, 금색 단추와 흑요석 커프스에 긴 장검...
 
차려입은 모양으로 보아 귀족, 혹은 어딘가의 기사입니다.
 
이 근처에도 성청과 영주관이 있으니 그 곳 소속일까요?
 
베아트리체 힐:(급히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뺨과 이마의 온도를 재본다. 손 끝에 식어가는 체온이 느껴지면 재빨리 외투를 벗어 그에게 두른다. ...보아하니 귀족이나 기사같은데, 왜 여기 혼자 쓰러져 있는걸까.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을 잠시 보다 팔 한 쪽을 끌어 일으켜본다.)
...혼자 옮길 수 있으려나.
 
우선 이 남자를... 어떻게든 해야겠어요.
 
집사에게 혼이 나겠지만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다친데다 쫄딱 젖은 사람을 홀로 두고 가는 건 귀족의 도리가 아닙니다.
 
비를 맞았을 때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야단치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다른 것은 무리일지라도 우선 저 커다란 코트부터 벗기는 편이 낫겠어요.
 
그리고 당신의 외투를 둘러주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베아트리체 힐:...참, 젖은 옷을 이렇게 두면 안되겠지. ...실례할게요. (대답없는 그에게 말을 건내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열심히 커다란 코트를 벗겨낸다. 물을 잔뜩 먹어 옷 뿐인데도 무겁다...)
 
원래는 망토가 부착되어 있었던지 견장에 달린 망가진 핀이 눈에 띄는군요.
 
베아트리체가 조심조심 쓰러진 남자의 코트에 손을 올리는 순간, 억센 손아귀가 팔목을 잡아챕니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눈을 번쩍 뜬 사내는 돌연 상체를 굽히며 콜록콜록 기침을 토해내더니, 이내 힘없이 손을 놓아버립니다.
 
찰나에 스친 금색 눈에 당신의 얼굴이 비칩니다.
 
???:…… 윽. (머리를 짚은 채 낮은 신음을 흘린다. 정신을 잡느라 애를 쓰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느릿하게 시야를 열었다. 혼탁한 눈빛이 숲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안착하는 곳은 당신이다.) 여긴……? 그리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베아트리체 힐:...괜찮아요? 정신이 좀 들어요?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아요. (흐린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면 걱정이 표정 가득 묻어난다.) 베아트리체 힐이에요. 여긴 저희 가문 별장 뒤쪽의 숲이에요.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된건가요?
 
???:베아트리체…… 힐? (희미하게 당신의 이름을 중얼인다.) 집안에 일이 생겨 돌아가던 중 폭풍에 휘말렸나 봅니다. 눈을 떠 보니 이곳이군요. 아가씨께서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따라 여기에 걸음하게 된 이유가 당신 때문이었나보네요. 일단 이것 먼저 둘러요. (제 외투를 어깨에 둘러얹는다.) ...영주관에서 나오셨나요? 성청?
 
에르드 하이너스:예. 저는 레노버의 기사, 에르드 하이너스입니다. (제게 둘러지는 외투를 물끄럼 내려다보았다.) 힐 가문에 당신 같은 자제분이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상처가 나을 때까지만 아가씨의 댁에 잠시 신세를 져도 괜찮겠습니까? 급한 일은 아닌데다, 영주님께 충성을 바친 기사로써 이런 쇠약한 모습을 보여드리기엔 죄송스러워 말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대외적인 행사에는 잘 참여하지 않아서요. (찬찬히 끄덕인다.) 그럼요, 그렇지않아도 별장으로 모실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다치신 분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 체구 차이 때문인지 자꾸만 흐르려는 외투를 꼭꼭 여민다.) ...일단 일어나실 순 있겠어요?
 
레노버라면 이곳에서 산 하나 더 넘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지방입니다.
 
그곳 영주관 소속의 기사님이셨군요.
 
게다가 하이너스 가문이라면 이곳에서 하루 거리의, 킬트에 영지를 둔 가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요. 당장 손님 하나 들인다고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베아트리체의 가문은 매우 부유하고, 손님 접대라면 본가에 있을 때 부모님의 어깨 너머로 익혔으니까요.
 
창백하게 질린 뺨이며 무거운 몸짓까지, 상태가 상당히 나빠 보입니다.
 
당분간 이곳에서 천천히 회복하도록 돕는 편이 좋겠어요.
 
에르드 하이너스:기꺼이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일단 다친 곳은 팔이니, 어떻게든 일어설 순 있을 것 같습니다. (주변의 굵은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불안정하게 일어선다.)
 
베아트리체 힐:...저한테 기대세요. 그래도 나뭇가지보다는 튼튼할거에요. (곁으로 다가가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른다.)
 
에르드 하이너스: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처음 보는 이에게 제 몸을 기대야 한다는 게 영 어색한 눈치였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결국 당신에게 체중을 얼마간 지탱하며 걷는다.)
 
베아트리체 힐:그럼요, 제걱정은 말고 당신 몸 먼저 걱정해요.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웃어보이고는 기대기 편하게 붙어서서 걸음을 맞춘다.)
 
에르드 하이너스:(한동안 말없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문득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당신을 내려다보더니) …… 베아트리체 힐, 씨라고 하셨죠.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베아트리체 힐:(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춘다.) ...올해로 열여덟이에요. 에르드, 당신은요?
 
에르드 하이너스:(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또 침묵을 베어물다가) 아직 성년이 아니시군요. 저는 스무 살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잠시간의 침묵에 고개가 기울었다가 끄덕인다.)
 
문을 열어준 메이드는 기함을 하고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근처에 산책을 나갔던 작은 주인이 양산과 모자는 어디론가 내버리고 대신 다 죽어가는 낯선 남자를 데려왔으니까요.
 
하지만 곧 손님맞이에 익숙한, 수도의 저택에서 따라온 사용인답게 재빨리 두툼한 담요를 에르드에게 둘러주고 벽난로가 켜진 방으로 데려갑니다.
 
한발 늦게 달려온 별장의 집사는 조금 미묘한 낯입니다.
 
집사:(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메이드에게 이른다.)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분명 완쾌되지 않은 베아트리체가 숲까지 들어간 것이 못마땅한 탓이겠죠.
 
그에게 <심리학> 판정이 가능합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냥 두고 올 수는 없어서. (집사의 표정을 슬쩍 살핀다.)
심리학
기준치: 70/35/14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걱정뿐 아니라, 조금 혼란스럽고 불안해 보입니다.
 
집사:그리고 아가씨, 이 분은……?
 
베아트리체 힐:...숲길에 쓰러져 계셨어. 레노버의 영주관 소속 기사님이시래. 다치셨으니 잘 부탁해.
 
집사:(한숨 푹 쉰다) 분명 멀리 가시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아가씨는 우선 목욕부터 하시죠. 기사님께는 2층의 손님방을 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퍼시, 베아트리체 아가씨의 점심 식사는 되도록 따뜻한 것으로 부탁한다고 주방에 일러주세요.
 
집사의 뒤에 서 있던 어린 시종이 주방으로 달려가자 베아트리체와 에르드는 각각 그들의 방으로 안내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집사가 베아트리체를 따라왔을 텐데 오늘은 에르드에게 방을 안내해주고 있군요.
 
그는 일류 사용인이니 주인의 손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면 갈아입을 실내복과 물을 데운 욕조, 환복용 파티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많이 걱정하는 것 같았지.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목욕 준비를 한다.)
(더러워진 옷가지를 올려두고는 손을 휘저어 데운 물을 찰방이다 식은 몸을 밀어넣는다)
 
뜨거운 욕조 안에 들어가 있으려니 당신이 아니었다면 온종일 춥고 서늘한 숲속에서 누워있었을 에르드가 떠오릅니다.
 
정말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베아트리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메이드가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내려놓습니다.
 
뜨거운 토마토 스튜와 치즈를 뿌려 구운 감자, 꿀을 탄 우유... 환자식이로군요.
 
그래도 식사는 평범하게 일반식을 먹었는데 찬 바람을 조금 쐬었다고 정말 환자 취급입니다.
 
메이드:맛있게 드세요, 아가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스푼으로 스튜를 휘 크게 젓는다.) 응, 아무렇지도 않아. ...그 분은 어떠셔?
 
메이드:손님은 잠드셔서 나중에 따로 식사준비를 해 드릴 예정입니다. 입고 오신 옷들은 세탁 중이고요. 이곳엔 성인 남성분의 의복은 사용인 정복뿐이라서 부득이하게 주인어른의 예전 의복들을 내어드렸어요.
식사 거르지 마시고 많이 드셔야 해요! 혹시 감기라도 걸리셨으면 큰일이라구요.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다. (혹시나 하고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 조금 가라앉았다.)
알겠어, 알겠어. 이정도는 괜찮은데 다들 너무 걱정이야. (스푼을 내려두고 우유를 한모금 홀짝인다.)
 
메이드:아가씬 식사도 잘 드시지 않고, 건강도 별로 챙기질 않으시잖아요. 정말 저희가 얼마나 고민인지 모르실 거예요.
 
베아트리체가 식사를 끝낼 때 즈음에는 집사가 찾아와 이런 저런 사실들을 알려줍니다.
 
집사:식사는 맛있게 하셨는지요? …… 분명 그 기사분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실 테죠. (안 들어도 알겠단 듯)
 
베아트리체 힐:... ...다들 잘챙겨주는 덕분에. (정곡이다) 역시 집사는 눈치가 빨라.
..지금은 깨어나셨어?
 
집사:예, 아가씨의 주치의가 직접 상처를 살피고 약을 처방했습니다. 왼쪽 뺨과 목덜미 부근에 얕은 찰과상, 그리고 오른팔에 바위에 찍힌 자상이 남아있습니다만 걱정하실 수준은 아닙니다. 기사 분들은 회복력이 좋으시니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따로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베아트리체 힐:(찬찬히 끄덕인다.) ...레노버의 기사님이 여기까지 오실 일이 있으실까? 그것도 혼자.
 
집사:기사는 영주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법이니, 어떤 비밀 임무 같은 걸 맡으신 걸지도 모르지요.
 
집사는 식기를 챙겨 물러나다가, 마지막으로 당신을 돌아보며 한 마디 덧붙입니다.
 
집사:아가씨께선 아직 미혼이시고 혼약을 주고받은 자제분도 없으시죠.
다른 미혼의 귀족과 너무 가까이 하시면 좋지 못한 소문이 도니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주치의 말로는 길어도 이 주면 상처가 나을 거라더군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가씨.
 
아무래도 에르드는 집사에게 단단히 밉보인 것 같습니다.
 
정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저리 부랴부랴 내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니...
 
물론 이 곳에는 환자인 베아트리체 홀로 있으니 손님맞이에 소홀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에르드가 머무는 동안은 베아트리체에게도 말벗이 생기는 셈이니 조금 덜 무료할 텐데요.
 
하지만 집사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이 난다면 에르드에게도 폐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간다면 베아트리체는 다시 이 지루한 별장에 혼자 남게 되겠지만요.
 
베아트리체 힐:...다들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창밖에 시선을 둔다.)
 
예상치 못하게 깊은 숲까지 가고, 건장한 이를 부축해 오다 보니 베아트리체에게도 피로가 몰려옵니다.
 
다시 만나보고 싶다면 잠시 눈을 붙였다가 가보아도 괜찮겠어요.
 
베아트리체 힐:(잠시 고민하다 침대에 푹 엎어진다.) ...조금만 쉴까.
 
침대에 누우면 금세 잠이 쏟아집니다.
 
...
 
...어라? 세상에, 지금 시간이 몇 시죠?
 
문득 눈을 떠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저택은 어둠 속에 고요하고요. 지금쯤이면 에르드도 다시 잠들었겠죠.
 
베아트리체 힐:(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역시 다시 잠드셨을까.
(실례임을 알면서도 걱정과 호기심에 고민에 잠긴다.)
...잠깐 바람이나 쐴까.
(조심스레 외투를 챙겨들고 방문을 나선다.)
 
복도를 빼꼼 내다보면 역시나 기름 등 몇 개를 제외하곤 암흑 속입니다.
 
사용인들이 쓰는 별채와 집사장실, 주방엔 불이 켜져 있겠지만 굳이 그곳까지 가야 하려나요.
 
에르드가 사용하고 있을 방 역시 굳게 닫혀있습니다.
 
<관찰> 판정
 
베아트리체 힐: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33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런데... 어디선가 미미하게 밝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의 방은 3층으로, 복층식 복도가 나 있기 때문에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면 로비와 아래 정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입니다.
 
이 방향은 현관이 있는 쪽인데, 이런 시간에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이라도 있나 봅니다.
 
베아트리체 힐:...이 시간에 깨어있는 사람은 없을텐데. (옷깃을 꼭 여미여 현관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과연 현관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고, 등불을 든 어린 소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집사를 따라왔었던 그 소년 시종입니다. 퍼시라고 하던가요?
 
저 아이도 이곳에서 일한 지 약 두 달이 지났다고 했죠. 베아트리체가 갓 도착했을 무렵이었으니.
 
일이 서투른 탓에 하녀장에게 곧잘 혼이 나곤 하는 아이입니다.
 
퍼시:아, 아가씨?! 이 시간에 추운 현관까진 어쩐 일이세요?
 
베아트리체 힐:...잠시 눈이 떠져서. 이 시간에 왜 여기 혼자 있니?
 
퍼시:그게에…… 별채에 놔두고 온 게 있어서요. 시간이 늦었어요 아가씨. 얼른 올라가 주무셔야죠.
 
베아트리체 힐:그래, 금방 돌아갈게. ...별채. 어두우니 같이 갈까?
뭘 두고 왔니?
 
퍼시:아, 아니에요. 이미 갖고 왔어요. 가족한테 편지가 왔거든요. (편지지를 슥 들어보인다.) 받아보자마자 읽는다는 게 거기다 그대로 두고 왔지 뭐예요.
 
베아트리체 힐:...혼자 떨어져서 고생이 많겠구나. (은은하게 웃어보인다.) 가족분들은 잘 지내신다고 하시니?
 
퍼시:아니에요. 버텨내야죠, 제 일인걸요. (어른스럽게 웃는다.) 네…… 다들 건강히 계시대요. 그보다 아가씨, 얇은 옷차림으로 현관가에 계속 계시면 추워요! (호들갑을 떨며 당신을 안쪽으로 안내한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너도 얼른 들어가렴. (호들갑에 다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퍼시:주무세요, 아가씨. 저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당신이 올라가는 것까지 지켜본다)
 
베아트리체 힐:(잠시 뒤돌았다가 못이겨 계단을 올라간다.)
 
여하튼 건강을 생각한다면 도로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이런 어중간한 시각에 깨어서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베아트리체 힐:(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얼른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조용한 일상에서 간만에 일어난 소란이 싫지않아 꾸역꾸역 눈을 감았다.)
 
...
 
다시 아침입니다.
 
거짓말처럼 해가 밝아 습하고 축축했던 별장 일대를 환하게 달구어놓았습니다.
 
시월치곤 많이 따뜻하네요. 꼭 봄 같은 날씨예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에르드가 복도에 서 있다가 당신을 보고 목례합니다.
 
에르드 하이너스:(묵묵한 투로 말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간밤엔 탈없이 주무셨습니까.
 
제대로 말려 찰랑거리는 머리칼은 단정하게 정돈해두고 뺨의 상처에도 반창고가 붙어있습니다.
 
빛을 적게 머금었음에도 번쩍이는 금빛 눈, 며칠간의 고생으로 거칠어졌지만 옅은 호선을 그린 입술.
 
눈밑이 어둡고 다소 기운이 없어보이지만,
 
팔에 부목을 댄 것을 제외하면 든든하고 강인해 보이는, 전형적인 기사다운 모습입니다.
 
베아트리체 힐:(검은 머리칼에서 반짝이는 눈까지 느긋하게 올려보다 마주 목례한다.) 좋은 아침이에요. 불편한데는 없으셨나요.
상처는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느리게 고개 끄덕인다.) 도와주신 덕분에 치료를 받았습니다. 회복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헬렌이란 메이드가 말하길,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식당으로 내려와 달라더군요.
(에스코트를 하려는 듯 자연스레 부목을 대지 않은 반대쪽 팔을 내민다)
 
베아트리체 힐:다행이에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끄덕이고 자연스레 팔에 손을 얹는다.)
이런 몸으로도 기사도 정신은 어쩔 수 없나보네요. (사뿐 걸음을 옮긴다.)
 
에르드 하이너스:아주 어릴 적부터 기사로 길러졌다 보니, 버릇처럼 배어 버렸습니다. (무뚝뚝하지만, 기사로 오랜 시간 살아왔단 말답게 말씨에 예의가 배어 있다.)
오늘은 날이 좋지만 어제는 꽤 쌀쌀했는데, 아가씨께선 저를 부축하느라 감기는 걸리지 않으셨는지요.
 
베아트리체 힐:...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러니 이만큼 훌륭하게 성장하신거겠죠. (기복없이 차분한 목소리와 예의바른 투. 훌륭히 교육받은 여느 귀족 아가씨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데운 물에 오래 있었으니 괜찮아요. 저는 폭풍우에 맞고 쓰러져있던 당신이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네요.
 
에르드 하이너스:아직은 많이 모자랍니다. 성년이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요. (겸허하게 답한다. 저보다야 제 눈앞의 아가씨야말로 훨씬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았는가. 흠 없고 완전무결한 귀족 영애다.)
훈련을 받으며 험한 상황에도 많이 던져져 봤기에, 이 정도로는 감기에 걸리진 않습니다. (당신을 식당으로 이끈다.)
 
이어 두 사람은 짧고 훌륭한 -크림 스튜와 오믈렛으로 이루어진 환자식- 식사를 마칩니다.
 
이제 베아트리체의 앞에 약차가, 에르드의 앞에는 커피 한 잔이 놓여있군요.
 
식탁의 꽃병에는 실내 온실에서 가꾸는 아가판서스 몇 송이가 싱싱하게 피어있습니다.
 
마침 오늘은 화창하게 날씨가 개어 산책을 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에르드에게 함께 나가자고 권유해도 괜찮겠죠.
 
몸을 회복하는 데엔 적절히 햇빛을 쬐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에르드가 함께 가준다면 이참에 마을 구경을 조금 해 봐도 좋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찰랑이는 약차를 내려보다 한모금 마시고 조용히 내려둔다.) ...괜찮으시다면, 조금 걸으시겠나요?
빛이 좋으니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에르드 하이너스:좋습니다. (고개 끄덕인다.) 마침 저도 몸이 근질거리던 차였습니다. 레노버에서는 한시도 가만히 있는 새가 없어서요.
준비를 하고 오시겠습니까?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금방 준비를 마치고 돌아올게요. (승낙이 제법 기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몸놀림이 가볍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현관에서 봐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준비를 위해 방으로 간다.)
 
베아트리체는 어떤 옷을 입었나요? (상세한 묘사 부탁드립니다)
 
베아트리체 힐:(간만에 보는 햇빛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 인지 괜히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밝은색의 조금 화려한 옷을 꺼내들었다. 옅은 살구색의 고급스러운 원단 위로 은은한 레이스가 풍성하게 주름 잡혀 아래로 흐르고 소매와 드레스 곳곳마다 조그만 리본과 진주 장식이 붙어는. 구두와 양산 역시 같은 색으로 맞춰 썩 잘어울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출다운 외출을 하려니 조금 설레는군요.
 
현관으로 내려가면 에르드가 평상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르드 하이너스:(당신의 옷차림을 보고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작게 헛기침을 한다. 처음 정신을 차리고 봤을 때도 느꼈지만 꼭 인형 같은 아가씨다.) 양산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이정도는 제가 들 수 있는데. 고마워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양산을 건낸다.)
 
에르드 하이너스:은인의 팔을 무겁게 할 순 없으니까요. (이런 표현은 역시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해 작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현관을 열고 별장 근처를 천천히 걷습니다.
 
비를 머금은 가을 꽃들이 더욱 생생히 피어나 달콤하고 생그러운 향기를 풍겨옵니다.
 
햇볕이 딱 좋은 온도로 따스하게 두 사람을 덮어오는군요.
 
에르드 하이너스:아름다운 별장입니다. (가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가씨는 언제나 이곳에서 지내시는 겁니까?
 
베아트리체 힐:다들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주변의 꽃들에서 찬찬히 시선들 올리며 끄덕인다.) 맞아요.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가네요. 이제는 눈을 감고도 훤하답니다. (담담하게 얘기하지만 이곳의 적막에 질렸다는 듯 작게 숨을 뱉는다.)
먼 곳까지는 못 가게 하니까요.
 
에르드 하이너스:힐 가문이라면 수도에서도 유명한 가문인데, 그런 가문의 자제께서 이런 시골 별장에 계시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습니다.
어디 아프신 겁니까. (물끄럼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베아트리체 힐:...요양 차 내려와있었어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아주 멀쩡하답니다.
 
에르드 하이너스:다 나아지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굳이 별장 안에만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기도 한데……
이 주변에 마을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보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고개를 느긋하게 저었다.) 그렇잖아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잘되었네요. 이 곳에만 있으려니 조금 질린 참이었거든요.
...에르드 당신이 있다면 다들 걱정하지 않을테니까요. 같이 가주실래요?
 
에르드 하이너스:물론입니다. 두 달이나 별장에만 계셨다니, 저였다면 지루해서 못 견뎠을 겁니다. (고개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 다시 별장에 들려 비상금을 손가방에 넣어 가져오는 건 어떨까요?
 
베아트리체 힐:고마워요. ...그럼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가져갈게 있어서요. (비상금을 가지러 별장으로 총총 돌아간다..)
(왜인지 두둑해진 손가방(비상금이 가득한)을 손목에 걸치고 돌아왔다.)
이제 됐어요.
 
에르드 하이너스:(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허공 올려다본다) 예. 가시죠.
 
두 사람은 저택의 정문을 지나, 숲과 반대쪽 길로 십여분을 걸어 대기 중인 마차를 타고 바로 이어지는 마을, 비슐트에 도착합니다.
 
이 일대는 귀족들의 별장이 여럿 모여있고 기숙 아카데미도 하나 설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근에 조합 소속의 마차가 항상 대기 중이거든요.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진 빽빽한 숲길과 듬성듬성 자리한 민가가 눈에 띕니다.
 
오 분여를 달려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 앞에 펼쳐진 [장터]와 이야기꾼의 [무대]입니다.
 
베아트리체로서는 모두 오늘 처음 보는 것들이죠.
 
에르드 역시 이곳저곳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봅니다.
 
베아트리체 힐:...이런 곳이 있었네요. (우아한 귀족 아가씨답게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도 차분한 듯 하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저 곳 먼저 구경해볼까요? (반짝이는 눈과 손 끝에는 이야기꾼의 무대가 보입니다.)
 
에르드 하이너스:저도 이 마을에는 처음 와봅니다. (시선을 바삐 움직이다 베아트리체가 가리켜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자면 반짝이는 그의 보랏빛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두 달이나 나가지 못했다면 많이 지루했을 법도 하지. 어쩐지 제 가슴도 풋풋한 소년의 마음처럼 들뜨는 기분이다.) 예, 좋습니다. 함께 가보시죠.
 
작은 무대 앞에 땅을 파고 긴 나무 의자를 놓은 작은 원형 극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듣자하니 이곳은 거의 매일같이 음유시인과 이야기꾼, 유랑 배우들이 극을 올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마을 주민들의 문화공간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한 번 구경해 볼까요?
 
다닥다닥 붙어 앉으려니 조금 민망하지만...
 
에르드 하이너스:(안쪽으로 들어가 제 옆자리에 손수건을 깔고서 손짓한다.) 이쪽으로.
 
베아트리체 힐:(깔린 손수건 위로 사뿐히 앉으며 조그맣게 속삭인다.) 고마워요.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는 집사의 말이 문득 스쳤지만 지금은 왠지 신경쓰고싶지 않았다.)
 
오늘은 나무 인형을 든 남녀가 그림자 인형극을 공연하기 위해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있네요.
 
왕자: 애원컨데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이 섬에 사시는 분입니까? 신기한 그대여! 당신은 하계의 여인이십니까?
 
공주: 신기한 건 제가 아니에요. 그저 보통의 여인이랍니다.
 
난파당한 왕자를 발견한 공주가 서로 속살거리듯 대화를 나눕니다.
 
이 극은 저택의 서재에도 한 권 있는 유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공연되는 연극인 듯합니다.
 
늙은 왕, 요정, 신하들이 여럿 등장하고, 비로소 두 젊은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여 함께 돌아가는 대목으로 막이 내립니다.
 
공연이 끝나자 장막 속에 숨어있던 두 배우가 나무 인형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와 절도있게 인사를 합니다.
 
꽤 전문적이고 볼만한 연극이었어요.
 
베아트리체 힐:재미있었어요. 참 동화적이고 낭만적인. ...당신은 어땠나요? (늘 차분하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있다. 의견을 묻는 눈동자 역시 여전히 반짝인다.)
 
에르드 하이너스:(사람들 틈에 섞여 가볍게 두어 번 박수를 친다.) 저도 재밌었습니다. 기사는 워낙 바쁜지라 평소에는 이런 극을 볼 틈도 없거든요. 그림자로 그렇게 많은 종류의 등장인물을 구현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내용도…… 멋진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연인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요. 아가씨께선 감명을 받으셨나 봅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렇죠, 이런 야외 무대에서의 공연은 처음이라 저도 무척 신기했어요. 그림자로도 이런 무대를 꾸밀 수 있군요. (찬찬히 끄덕이던 고개가 멈춘다.)
....어렸을 때는, 사랑만큼 바보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여태까지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니까요. (자신이 여태껏 봐왔던 책이며 주변의 이야기들이 그러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런것 만도 아니었네요. 잃는 것만이 아니었어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내리 감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많은 것을 얻고 성장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에르드 하이너스:(베아트리체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금빛 눈이 몇 차례 느리게 깜박인다.)
저는 어린 날 부모를 잃고 친척의 집에 맡겨졌지만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기적처럼 어떤 귀족 부인을 만났고 그분의 양자로 입양되었지요. 그리고 지금의 기사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도록 저를 물심양면 도와주셨고요.
저는 그분을 사실상 어머니처럼 여기고 따르고 있습니다.
연인의 사랑과 모자간의 사랑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잘 알지 못해도…… 예. 사랑은 성장을 도와준다는 말씀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혼담을 나누는 가문은 없으십니까? 아름다우시고 가문도 위세가 드높으니 앞다투어 구혼자들이 몰려들 만도 한데요.
 
베아트리체 힐:(말이 끝을 맺을 때까지 묵묵히 들었다.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조금 서글픈 표정이 되기도 했다가 다시 부드럽게 풀리기도 했다.)
...아주 훌륭하신 분이네요. 당신을 지금 이곳에 있게 해주신 분이군요. 가족보다도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 또한 정말 멋진 사랑이에요.
(희미한 미소를 띈 얼굴이 가로저어진다.) 좋게 봐주어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없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얼굴도 모르는 이와 혼약을 맺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에르드 하이너스:(평소엔 누구에게도 제 가정사를 말하지 않는데. 진솔하고 차분한 당신의 이야기에 감화된 것일까. 저도 모르게 속내가 흘러나온다. 아담하고 단아한 아가씨를 바라보는 금빛 눈이 색채만큼 따스하게 휘어졌다.) 예. 진정한 가족보다도 더 가족같은 분이지요.
귀족은 대개 정략혼을 한다지요. 아가씨께서는 역시, 원치 않으시는 걸까요.
 
베아트리체 힐:(비 갠 뒤의 화창한 빛을 닮은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무지개처럼 휘었다. 전해지는 따스함이 싫지 않아서.)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신의 앞에서는 왠지 무엇을 굳이 감춰야할까 싶어졌다.) ...대게 귀족들의 결혼은 권력의 결합이니까요.
...평생을 이름뿐인 채로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에르드 하이너스:(아, 문득 당신의 연보랏빛 홍채가 무지갯빛을 반사하지 않았던가. 분수대의 물결을 당신의 눈빛이 비추었을까.) 예, 사랑 아닌 가문간의 이득을 위한 결합인 편이지요. (저도 주변인의 정략결혼을 수많이 봐 왔으니.)
힐이 아닌, 베아트리체 아가씨로서 남고 싶으시다는 의미일까요.
무엇이든, 아가씨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함께 희망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끄덕임에 조금 힘이 실린다.) 당신이 그렇게 얘기해주니 정말로 꼭 이루어질 것만 같네요. 고마워요.
(인형의 유리 눈알처럼 아름답지만 어딘가 힘없던 눈동자는 어느새 생기를 움틔웠다.)
그럼, 저쪽도 가볼까요? (장터를 가르켰다.)
 
에르드 하이너스:예. (원래도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베아트리체는 보다 더 활기를 얻고 반짝이는 것 같다. 꼭 연극에서 왕자가 경탄하며 말했던 하계의 여인처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닷새에 한 번 열린다는 장이 서는 날입니다.
 
특이한 빛깔의 염색 천과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장식품들, 신선한 식자재, 과일 따위가 그득하게 쌓여있어요.
 
흙으로 빚고 유약을 발라 구운 목걸이를 파는 상인도 있고요,
 
아라베스크 무늬의 양탄자, 묘하게 비뚤어진 꽃병... 저택에서는 도통 구경할 수 없었던 신기한 것들입니다.
 
오전에 군사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비슐트 영주관의 문양이 찍힌 제복을 걸친 장정들이 여럿 보이고요.
 
비슐트는 남쪽 국경지대에 인접해 있어 병력이 튼튼하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과연 절도 있는 품세를 보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네요.
 
베아트리체 힐:(흥미로운 눈동자가 곳곳을 살핀다.) ...정말 신기한 것들이 많네요. 재밌어요.
뭔가 드시겠어요? 오늘 아침식사로는 부족하셨을 것 같아서.
 
에르드 하이너스:시장은 언제 와도, 어느 지역에 있는 곳을 가더라도 눈이 바쁜 것 같습니다.
(머쓱하게 미소한다) 아가씨께서도 함께 드신다면요.
 
베아트리체 힐:...그렇군요. 다른 지역의 시장도 가보고 싶어요. 갈 수만 있다면.
(마주 웃으며 끄덕인다.) 그럴게요. 뭘 좋아해요?
아무래도 커다란 기사님이시니 고기가 부족하셨을까요?
 
에르드 하이너스:(시선을 스윽 옆으로 피한다) 무엇이든 상관없지만, 확실히 고기류를 좋아하기는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의아한듯 고개가 슬 기울어진다.) 그럼 저기 레스토랑에 들어갈까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좋습니다. 조금 이르게 점심을 해결하게 되겠군요. (모른 척 레스토랑으로 베아트리체를 에스코트한다.)
 
두 사람은 슬슬 붐비기 시작하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섭니다.
 
이탈리안 파스타와 칠면조 구이, 오리훈제 구이, 온갖 고기의 모듬꼬치, 치킨 샐러드, 리조또 등등 많은 메뉴가 있네요.
 
베아트리체 힐:(메뉴판을 느긋하게 훑는다.) 원하는 게 있으면마음껏 시켜도 괜찮아요. 이런 일이 있을까봐 많이 챙겨왔거든요. (두둑한 손가방을 슬쩍 들어보인다.)
 
에르드 하이너스:자꾸 신세만 져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레노버로 돌아가게 되면 꼭 그간 진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그새에 언제 그렇게 많이 챙겨온 거지)
아가씨께서 골라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감히 마음대로 시켜도 될지.
무엇이든 잘 먹습니다. (어필이라면 어필, 솔직함이라면 솔직함)
 
베아트리체 힐:갚을 필요 없어요. 이렇게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으음, 그럼.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칠면조 구이와 클램 차우더, 간단한 샌드위치를 하나씩 시켰다.)
 
에르드 하이너스:저는 별로 한 일도 없는걸요. 그저 에스코트를 해드린 것밖에는.
 
조금 기다리다 보면 주문한 음식들이 뜨거운 김을 풀풀 풍기며 올라옵니다.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고 싱싱한 게 맛있어 보이네요!
 
베아트리체 힐: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고기요리를 앞으로 슥 밀어주고는 제 몫의 샌드위치를 가져갔다.)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도 함께 드십시오. (샌드위치만 먹는 건 아니겠지 설마? 라는 눈으로 고기요리를 베아트리체 옆의 다른 접시에 덜어준다.)
 
베아트리체 힐:...당신 몫이었는걸요. 그래도 고마워요. (포크와 나이프로 작게 잘라 입에 가져간다.)
...최근 늘 환자식만 먹느라.
 
에르드 하이너스:아, 몸이 좋지 않아서 이곳에 오셨다고 했었죠. (멈칫한다) …… 그렇지만 아픈 곳은 없으시다고 하였으니 가끔씩은 고기를 드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환자식만 먹어도 몸에 좋지 않습니다.
(베아트리체가 조금이나마 먹는 걸 보고서야 저도 고기구이를 먹기 시작한다. 과연 활동량이 많아 잘 먹는 타입인지 고기가 금세 줄어든다)
 
베아트리체 힐:...그럴게요. 집사에게 미리 전해둬야겠어요.
(어느정도 먹다가 식기를 가지런히 내려둔다. 금세 비워지는 접시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리고 당신의 식사량도 꼭 늘려달라고 전해둘게요.
 
에르드 하이너스:…… 아닙니다. 지금도 의도치 않게 머무르고 있는데 괜히 더 신경쓰이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클램 차우더도 제 몫을 덜어서 야무지게 먹었다)
 
베아트리체 힐:오랜만의 손님이시니 다들 더 잘 모시지 못해 안달일거에요. (많이 시키길 잘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닦는다.)
참, 아까 그 특이한 목걸이도 구경하고 싶어요. 도자기 조각같은.
 
에르드 하이너스:제겐 영광일 뿐입니다. (어색하게 미소하며 다 비운 그릇 한켠에 식기를 깔끔히 모아 올려놓는다.)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으시다면 전부 보십시오. 오랜만에 나오셨으니 원하시는 만큼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옅게 미소한다)
 
베아트리체 힐:다친 분을 끌고 너무 오래 걷는 게 아닌가 해서요. (감사를 담아 희미하게 웃었다.)
맛있게 먹어주니 기쁘네요. 그럼 일어나볼까요? (손을 가볍게 든다.)
 
에르드 하이너스:다리가 다친 것도 아니니 끄떡없습니다, 이 정도쯤은. (일어서서 당신 곁으로 다가선다. 팔을 내미는 모습이 그새 퍽 익숙해졌을지도.)
 
베아트리체 힐:(가볍게 손을 얹고는 금세 계산까지 마쳤다.) ...분명 저쪽에 있었죠?
(목걸이를 파는 상인 쪽을 떠올리며 천천히 걸어간다. 저도 모르게 조그맣게 흥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짧은 길임에도 신기한 물건들에 한번씩 시선이 멎느라 느릿한 걸음이 이제서야 상인의 앞에 멈춰섰다.)
 
예쁜 유리나 보석들로 장식된 목걸이가 한가득 진열되어 있습니다.
 
"자자! 구경들 하고 가세요! 이야, 여기 아가씬 눈이 예쁜 보라색이니 자수정 목걸이가 딱이네 딱이야!"
 
주인이 당신에게 자수정 목걸이를 가리켜 보입니다.
 
은색 체인 중간중간 자그마한 진주가 박혀 있고, 가운데에는 물방울 모양으로 세공된 자수정 장식이 자리하고 있는 예쁜 목걸이네요.
 
그외에도 다이아몬드, 황수정, 오팔 등 온갖 귀한 보석들로 꾸며진 목걸이가 많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예쁘네요. 세공도 아주 깔끔해보여요.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다 아차,하고 고개를 든다.)
이 기사님의 검집에 달만한 장식도 있을까요?
 
에르드 하이너스:(보석은 제 눈엔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인다. 베아트리체 뒤에서 무심하게 내려보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 번쩍 든다) 제 검집 말입니까? 아가씨 목걸이를 보러 오셨던 게……
 
베아트리체 힐:...그렇게 말하면 안 가려고 하셨을 것 같아서요. (조금 머쓱하게 미소하며 진열대를 찬찬히 살핀다.)
 
"아, 물론 장식도 많지요! 자자, 여길 보시면 귀~하게 세공된 오팔과 아쿠아마린 장식이 있는데…… 주변이 황금으로 꾸며져서 아주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맛을 주지요!"
 
"깔끔한 게 좋으시다면 은으로 장식된 이 장식도 좋습니다. 이건 가운데에 로즈쿼츠가 박힌 것, 자수정이 박힌 것, 사파이어가 박힌 것이 있답니다."
 
베아트리체 힐:...음, 둘 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걸요.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다 진지하게 끄덕인다. )
... .....역시 둘다 사는게 좋겠어요. (황금으로 꾸며진 오팔 장식과 자수정이 박힌 은장식을 콕 집는다.)
 
에르드 하이너스:(뒤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곤란해하는 중) …… 둘 다 말입니까……
 
베아트리체 힐:네, 그럼요. 둘 다 당신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거든요. (이미 상인에게 값을 치르고 있다)
 
에르드 하이너스:……. (말릴 틈도 없었다)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 아가씨도 목걸이를 꼭 함께 사시죠.
 
베아트리체 힐:...으으음. 알겠어요. 그럼 저 목걸이도 같이 부탁해요.
(마저 계산을 끝냈다.)
 
에르드 하이너스:(자수정 목걸이로 골랐나?)
 
베아트리체 힐:(끄덕. 자수정 목걸이가 손에 들려있다.)
 
에르드 하이너스:(만족.) 지금 목에 걸어드릴까요?
 
베아트리체 힐:아, 부탁할게요. (목걸이를 넘겨주고는 연보랏빛의 긴 머리칼을 한 쪽으로 걷어내면 희고 긴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에르드 하이너스:(햇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나는 목덜미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해 괜히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한다. 조금은 떨리기까지 하는 것 같은 손길로 아주 조심스럽게 베아트리체의 목에 목걸이를 두르고 걸쇠를 걸었다.) 다 됐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기분 좋은 금속의 서늘함에 제 목가를 손 끝으로 쓸어내린다.)
...고마워요.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천천히 돌아서며 눈을 마주한다. 거기에 미소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않았다.)
 
에르드 하이너스:(절로 말문이 막혔다. 홀린 듯 한참이나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대답한다.) 아, …… 예. 무척. (정신 차리자, 에르드. 베아트리체만 없었어도 제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겨줬을 것이다.)
 
베아트리체 힐:(한참의 침묵동안 눈만 동그랗게 깜빡이다 그제야 안심한 듯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당신 마음에 들면 저도 마음에 들어요.
당신 검에도 장식을 달아 드리고 싶은데. (금장식과 은장식을 뚫어져라 내려본다.)
....어느쪽이 더 좋을까요.......?
 
에르드 하이너스:(웃는 모습이 예쁘긴 한데, 너무 예뻐서 곤란할 지경이다. 얼굴이 스르륵 타오를 것 같은 걸 기합으로 애써 참아본다. 웃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째서 제가 기준이 됐는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다.)
(제 검집을 꺼내어 장식과 번갈아본다.) 아가씨께 골라달라고 하면 한참 서계실 것 같으니, 금장식으로 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끄덕인다.) ...이미 저를 제법 파악하셨네요.
(한걸음 사뿐 다가가 검집에 장식을 단단히 매어둔다.)
 
에르드 하이너스:(검집에 매달린 장식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햇살을 반사하는 황금과 오팔 보석이 눈부시다) 감사합니다. 검을 뽑을 때마다 아가씨께서 주신 장식이 눈에 들어오겠군요.
 
베아트리체 힐:(자신을 빤히 보고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쑥스러워지는 기분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음, 흠. 그렇겠네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장식을 교환해주며 풋풋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듣기> 판정
 
베아트리체 힐: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90
판정결과: 실패
 
…… 다시해볼까??
 
베아트리체 힐:(다시 귀기울이기..)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71
판정결과: 실패
(행운의 힘을 빌려봅니다..)
 
행운 1 감소, 성공으로 판정합니다.
 
"그러고보니 2황자님은 아직도 수배 중이라며?"
 
"아무리 이복동생이라지만 너무하신 거 아니야? 그분이 무슨 죄가 있다고!"
 
"쉿, 말조심해. 이곳까지 황태자 전하의 기사들이 내려와 있다는 소문이 있어. 우리 영주님이야 2 황자님을 지지하시겠지만. "
 
"그렇겠지. 마님이 2황자님의 유모셨다잖아."
 
"황후님은 참 좋은 분이셨는데... 황자님은 무사하실까?"
 
...이게 무슨 소리죠? 수배라니...
 
2황자라면 베아트리체의 육촌 친척뻘인데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 '황태자'가 드디어 실권을 잡기라도 한 걸까요?
 
온화하고 영민한 2황자와는 다르게 첫 황후 소생의 황태자는 성정이 거칠고 손속에 자비가 없어 제국민들에게 인기가 없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별일이 있었다면 가문에서 언질을 주었겠죠.
 
베아트리체 힐:(들려오는 말소리를 차분하게 곱씹는다. ...본가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
...에르드, 혹시 당신도 저 소문을 들으셨나요?
 
에르드 하이너스:(고개를 젓는다.) 레노버는 황궁과는 떨어져 있는 탓에 저런 소문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다른 걸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꽃집이 있다면 가보고 싶은데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베아트리체 힐:....그런가요. (끄덕이곤 있지만 영 마음에 걸리는 듯 사람들 쪽을 지켜보다 시선을 돌린다.)
...아, 꽃집 말인가요? 그러고보니 저 부근에 있었어요. (의문들을 털어내고 금세 떠올랐는지 꽃집이 있던 방향을 가르킨다.)
 
에르드 하이너스:그럼 저쪽으로 한 번 가봐도 괜찮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럼요. 얼마든지. (꽃집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매대에 온갖 색색의 싱그러운 꽃들이 올려져 있는 꽃집에 도착합니다.
 
"오늘 새벽 공수해온 싱싱한 꽃들이니 보고 가세요! 피튜니아, 백합, 장미…… 무엇이든 있답니다."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께선 꽃을 좋아하는 편이십니까? (느리게 꽃들을 훑어본다)
 
베아트리체 힐:(한걸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눈을 감는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향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해요.
당신은요?
 
에르드 하이너스:(향기를 맡는 이의 모습이 오히려 꽃보다 더 꽃다워 보인다. 눈을 감은 틈에 몰래 그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떨어뜨린다.) 관상용으로 두기에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무엇이신지요? 장식의 답례를 해 드리고 싶은데.
 
베아트리체 힐:(아, 그제서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래서 꽃집을 찾으셨군요.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해서. (잠시 꽃들을 느긋하게 둘러보며 고민에 빠진다.)
그럼 저 노란색 프리지아는 어떨까요. 우연한 저와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는 뜻에서.
 
에르드 하이너스:(꽃은 그저 꽃, 약초가 아니고서야 구체적인 종류는 잘 모르는지라 당신이 가리켜는 방향을 보고서야 프리지아의 생김새를 배운다.) 저 꽃이 프리지아군요. 그럼 프리지아 한 다발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것도 고르셔도 됩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렇다면. (슥 다른 쪽을 가르킨다.) 저쪽의 연한 빛의 리시안셔스도 같이 꽂아두면 예쁘겠어요.
 
에르드 하이너스:이건 아까의 프리지아보다 꽃잎이 풍성하군요. (꼭 베아트리체처럼 화려한 미를 지닌 꽃이다.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며 주인에게 이른다) 프리지아와 이 리시안셔스로 한 다발 주시겠습니까.
아, 리시안셔스는 이것으로. (연보라색을 콕 집어 가리켠다)
 
"예에, 알겠습니다. 이 두 꽃에는 안개꽃도 같이 섞으면 더욱 보기 좋지요!"
 
"기사님이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달큰한 꽃향기를 맡으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면 주인이 리시안셔스와 프리지아, 안개꽃을 조합하여 만든 멋들어진 꽃다발 하나를 에르드에게 건네줍니다.
 
샛노란 프리지아와 옅은 보랏빛을 띈 리시안셔스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네요.
 
"아가씨께 선물하시려는 거지요? 좋을 때입니다그려."
 
에르드 하이너스:선물하려는 건 맞지만…… 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게. (당황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며 어정쩡하게 꽃다발을 받아든다) 귀한 아가씨께 저처럼 험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 어울린다고.
 
"부끄러워하시긴~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요 뭘!"
 
베아트리체 힐:험하긴요. (타이르는 투로 당신쪽은 보았다가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이렇다 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괜히 목을 가다듬는다.)
 
에르드 하이너스:저는 아가씨보다 덩치도 거의 두 배는 큰데다…… 정식 귀족도 아니고…… 아무튼, 함부로 이런 말을 듣기엔 아가씨의 격에 누가 됩니다. (와중에도 당신이 별다른 부정이나 화를 내지 않았음을 깨닫고, 귀가 스르륵 빨개져서 주인에게 대강 값을 치르곤 두 발짝 물러선다)
 
베아트리체 힐:...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은 제가 본 기사님들 중에서도 아주 기사다운 사람인걸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자신을 폄하는 듯한 말에 어르듯 이른 말이었지만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어 달아오른 볼을 감싼다.)
...음, 그러니까 누가 될 일은 없을거에요.
 
에르드 하이너스:정말이십니까.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인다. 어쩐지 이 아가씨의 앞에선 자꾸만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당신이 너무 빛이 나서, 그 곁에 다가가기엔 한참 모자란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기사란 본디 주군의 한 발짝 뒤에 서있는 존재이니 어색할 일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감히 당신의 곁에 서고 싶기라도 한 건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그리고 여기. (받았던 꽃다발을 당신에게 내민다.)
 
베아트리체 힐:(자꾸만 그늘로 숨어드는 이 커다란 기사님을 밝고, 따스한 빛이 드는 곳으로 자꾸만 끌어내고 싶어진다. 그 빛 아래에서 당당히 빛나기를 바라게 된다. 꽃다발을 받아들며 스친 온기가 이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이상하게도.)
....고마워요. 정말. 정말 너무 예뻐요. (느긋하게 향을 맡다가 피어나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과분하고 멋진 답례를 받았네요.
 
에르드 하이너스:(꽃다발을 건네며 스치는 손길도, 향을 맡는 모습도, 꽃잎에 어린 이슬처럼 환하고 맑게 웃는 모습도 어쩌면 그리 반짝일 수 있는 건지. 한봄의 햇살을 가득 간직하여 피어나는 꽃만 같았다. 단순히 외모적 면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미(美)가 너울거린다. 베아트리체와 함께하는 시간은 잠깐뿐이겠지만, 아주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과분하기는요. 한참 모자랍니다.
…… 그래도 좋아해주시니 기쁩니다.
 
베아트리체 힐:(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어 마주하는 황금색의 눈동자는 너무나 환해서, 구름에 가리워진 제 삶에 이제서야 고개내민 태양 같았다. 어쩌면 바라고 기다린 존재.) ...정말요. 고마워요. 오늘 당신과 함께 이 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함께 와주어 고마워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감사를 표했다.)
 
에르드 하이너스:저야말로 아가씨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예 갖춰 마주 고개를 숙인다)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네요.
 
이제는 슬슬 돌아갈 시간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슬슬 돌아가야겠죠. (남은 아쉬움을 다 털어내지 못한 웃음으로 걸음을 돌린다.)
 
에르드 하이너스:너무 시간이 늦으면 걱정하실 테니까요.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멀쩡한 쪽의 팔을 내민다)
 
베아트리체 힐:그래요. (끄덕이고는 팔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마차를 타고 힐 가문의 별장으로 되돌아옵니다.
 
집사는 거의 반나절 가까이 외출했다 돌아온 베아트리체를 보고도 별 말이 없습니다.
 
건강을 생각하시라며 작게 한숨을 쉬기는 했지만요.
 
간단한 저녁 식사 후,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메이드 한 명이 베아트리체를 따라 방으로 돌아와 환복을 돕습니다.
 
메이드:아가씨, 솔직하게 말씀하셔요. 혹시 비슐트까지 내려가셨어요?
 
베아트리체 힐:.....(잠잠..) ...어떻게 알았니?
 
메이드:그야, 그렇게 오래 나갔다 오셨으니까요!
그래도 열이 오르지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아가씬 몸이 약하시니 오래 돌아다니시면 발이 붓고 호흡이 어려워질 거예요. 조심하셔야 한다구요.
혹시 바깥에 나가신 동안 아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으셨죠……?
 
베아트리체 힐:...비밀로 해주렴.
이제는 거의 다 나았으니 이 정도 산책은 건강에도 좋을거야. ...그래도 다음에는 조심할게.
(갸우뚱..) ...글쎄. 아무도 없었지. 요란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메이드:네에 네에, 꼭 조심해주셔야 해요.
그나저나 소문이요? 어떤 소문이요? (눈빛에 호기심이 어린다. 잘 나가지 못하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인지)
 
베아트리체 힐:(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다 혹여나 하고 살그머니 목소리를 낮춘다.) ...... ...2황자님이 수배중이시라는 소문이었어.
...사실일까? 그렇다면 본가에서 분명 언질이 있었을텐데.
 
메이드:네에? 세상에나. (지레 놀라 제 입을 틀어막는다) 설마요. 그렇게 위험한 일인데……
일단은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도 입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가씨가 그 기사님이랑 나들이를 다녀오셨단 것도요. 미혼인 아가씨가 다른 미혼의 남성분과 바깥에 함께 다녀오셨단 소식이 수도에 있는 주인어른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혼이 나실 거예요.
 
베아트리체 힐:...그래. 그것도 비밀로 해야겠지. 이미 집사에게도 한 소리 들은 참이거든.
(답답함에 한숨이 흐를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낸다.)
 
메이드:네에, 그럼 쉬세요 아가씨. 이만 나가볼게요.
 
메이드가 방을 나가면 오늘도 베아트리체는 어둠 속에 홀로 남습니다.
 
산책도 제대로 못 나가는 통에, 나들이 한 번 다녀왔다고 이 난리라니……
 
정말이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잠시 발코니에서 바람이라도 쐬는 건 어떨까요?
 
베아트리체 힐:(낮에 있었던 일이 벌써 먼 일 같이 느껴졌다. 막히는 숨을 깊은 호흡으로 토해내며 발코니로 걸어간다.)
 
평소에는 항상 잠가두기만 했던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가면 칠흑 같은 어둠 위로 반짝거리는 별빛이 쏟아집니다.
 
마치 커다란 우주 속에, 나와, 저 별들 그리고...
 
저 사람만 존재한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한 층 아래의 손님방 발코니에 가만히 앉아있는 에르드가 보입니다.
 
그도 밤바람을 쐬러 나온 것일까요.
 
손을 흔들면 보일까요?
 
베아트리체 힐:(바람에 날리는 머리칼도 내버려두고 손을 크게 흔든다.)
 
에르드 하이너스:(제복과 망토를 벗은 편안한 차림으로 앉아있다가,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움직임에 고개를 살짝 든다. 베아트리체를 발견하곤 눈이 커져서 일어났다.) 아가씨?
 
베아트리체 힐:(눈이 마주치면 안심한 듯 조그맣게 웃는다.) ...봐줬네요. 못 볼까봐 걱정했어요.
 
에르드 하이너스:부르시지 않고요. (얼른 발코니의 끝자락까지 나와 당신을 올려다본다. 달빛과 별빛을 뒤에 둔 당신은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로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다.) 잠이 오지 않으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난간 너머로 당신을 내려다본다. 푸르스름한 어둠과 은은한 흰 빛을 머금은 당신은 낮과는 달리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맞아요. 즐거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나봐요.
 
에르드 하이너스:저도 오늘, 무척 즐거웠습니다. (마을은 무척 시끌시끌하니 활기찼었는데, 단둘만이 있는 밤하늘 아래는 무척이나 조용하기 그지없다. 때때로 불어오는 산들바람만이 옷자락을 살짝 들추고 지나갈 뿐. 절로 당신에게 더욱 집중하게 되고, 태도와 목소리는 더욱 진솔함을 담는다.) 오늘 바깥에 나간 걸로 집사나 하녀들이 무어라 하지는 않았는지요? 신경을 많이 쓴다는 말이 기억나서.
 
베아트리체 힐:(고요함 속에 바람이 스쳐지나가면서 머리칼을 흩트린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멀리 응시하다 긴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내린다. 어둠을 핑계삼아 솔직하게 풀어지는 마음을 가볍게 누른다.)
...걱정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으니 괜찮을거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달이 참 아름답죠.
 
에르드 하이너스:다행입니다. 기껏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공연히 트집이라도 잡혔다면 아쉬웠을 듯해서 말입니다. (느리게 미소한다. 잠깐의 나들이였어도 저에게는 무척이나 인상깊은 한때였다. 결국은 그때를 되짚고 또 되짚다, 그런 자신이 너무 이상하단 생각에 바람이라도 쐬려 테라스까지 나온 게 아니었던가. 베아트리체의 생각에서 도피하려 나온 장소에서 또다시 베아트리체를 만나다니. 가슴은 다시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감정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우물 속에서 기쁨을 끌어올린다.)
예. 하늘이 맑아 달도 별도 무척 잘 보이는군요. 본디 훈련에 매진하기에 바빠 밤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만, 새삼스럽게 그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당신도 즐거웠다니 기쁘기 그지없네요. (누군가의 트집도 그 기쁨을 상쇄할 수는 없었을테니. 낮 동안 가슴 안 쪽을 간지르던 것이 점점 선명하게 형태를 갖추는 것을 느낀다. 불어오는 바람에 달아오른 뺨을 식힌다. 이 마음이 자신을 이 곳에 닿게 했음을 깨닫는다. 처음 느껴보는 벅참과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테지. 지금은 그 무엇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와 당신 오로지 둘만이 중요하니까.)
그 영광스러운 경험을 함께 할 수 있어 기쁘네요. 저도 그래요. ...밤하늘이 이렇게나 아름다웠군요. (이 밤이, 당신과 함께하는 날들이 끝나지 않기를 달에 대고 빌고 싶었다.)
 
에르드 하이너스:(가슴 안에서 피어오르는 이 이질적이고 낯선 감각은 무엇일까. 불에 델 듯 뜨거워 차마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고, 가시가 돋아난 듯 까끌하면서도 홀린 듯 중독적으로 이끌린다. 그는 아직 이 감정의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니 구한다. 베아트리체의 보랏빛 눈에게. 그 길게 흩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칼에, 미소를 빚어내고 영광을 말하는 입술에 간구한다.) 아가씨도 밤하늘을 구경할 시간이 별로 없으셨던 것일까요.
 
베아트리체 힐:...밤바람이 차다며 다들 걱정이 많았거든요. (깃털처럼 가볍다가도 용암을 삼킨 듯이 뜨겁게 치밀어오른다. 쉽게 꺼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무겁게 내려앉는다. 침묵의 길이는 마음의 크기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역시 사랑은 참 바보같지. 별거 아닌 걸로 수십번 고민하게 하고, 자신이 아닌 것처럼 되어버린다.)
...어쩌면 지금 당신과 함께 보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내려보던 시선을 어찌 할 줄 모르고 고개를 들었다.)
 
에르드 하이너스:그러면 지금은 나와 계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옷도 외출복보다 얇으실 것 같은데…… (차라리 제 곁에 오면 제 높은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 텐데. 무심코 스친 상념이 순식간에 불을 붙인다. 귀끝이 열로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밤이라 다행이지, 보일 일 없을 테니.)
(하지만 이어지는 당신의 말은 제 불씨에 장작을 던져넣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예……? (방금 제 귀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순간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며 시선을 둘 곳 찾지 못하고 헤맨다. 착각하게 되어버릴 것 같지 않은가. 베아트리체와 자신이 같은 감정에 허덕이고 있다고.) 그런 말씀을…… (이성은 기사와 귀족 영애 사이에 놓인 높고 두꺼운 벽을 상기시키려 든다. 하지만 고즈넉하고 서정적인 달빛 아래 놓인 감성이 달콤히 등을 떠민다. 원하는 바를 말해. 너도 다를 바 없잖아.)
아가씨는…… 밤하늘 아래에서 보니 더욱 우아하십니다. (반쯤은 억눌려지고, 반쯤은 다 잡지 못한 진심이 한 조각 빠져나간다.)
 
베아트리체 힐:...모두가 잠든 밤일테니 이 정도의 작은 비밀은 달님도 눈감아 주시겠죠. (얇은 로브를 꼭 여며든다. 당신의 품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려고 단단히 옷깃을 쥐었다. 손 끝까지 울리며 시끄럽게 뛰는 심장소리가 당신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면서도 전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당신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길 원해서. 혼자 깊이 빠져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해서.)
(입가에 걸린 미소에는 애절하고 간절한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마음 가는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고마워요. 당신도, 달빛이 굉장히 잘어울려요. 애틋할 만큼.
 
에르드 하이너스:분명 달님도 용인해 주실 텝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나와 계시면 안 되겠습니다. 혹여라도 저와 이야기를 나누다 감기에 걸리신다면 기사도를 망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희미하게 미소한다. 어깨에 내려앉는 별빛 같은 아스라함을 가지면서도, 밤하늘에 콕 박힌 진주마냥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웃음이었다. 확실한 호의와 긍정이 담긴. 그는 본래 많은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고, 느낀다 한들 뭉개온 무정하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당신 앞에서는 섬세한 은사를 다루는 직공마냥 조심스러워지게 된다. 제 행동과 말씨 하나하나를 되짚게 되었다.)
달빛은 저보단 영애께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달빛에 흠뻑 젖은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걸.)
 
베아트리체 힐:...그래요. 그건 곤란하니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갈게요. (묵묵한 당신의 말에 웃음으로 반쯤 접힌 눈이 일순 동그랗게 깜빡인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하고 가슴에 박힌다. ...누군가의 웃음이 이렇게나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심장이 터질듯이 뛰어오르고 벅차오름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매료되어 시선을 옮기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이렇게나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니.)
(한차례 숨을 고르고 나서야 입술이 달싹인다.) 저를 좋게만 봐주시니까요. ... ...그건 은인에 대한 보답인가요?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께는 단점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은요. (오래 머물지 못하는 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저는 어디까지나 객으로 잠깐 신세를 지는 몸. 지금도 미혼의 영애와 함께 있기만 하여도 눈총을 받으니 상처가 나으면 지체없이 떠나야만 하겠지. 아직은 오지 않은 나날이지만, 그 순간이 벌써부터 아쉽게만 느껴진다.) 섣부른 판단이라 지적하실 겁니까?
 
베아트리체 힐:(...적어도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은. 수면에 내던져진 납덩어리가 표면을 일그러트리며 무겁게 가라앉는다. 남은 날이 분명 길지 않을터다. 애초에 끝이 정해진 시작이었으니까.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섣부르다 지적하려고 해도 조그맣게 웃음이 터진다.) ...정말 못 말리겠네요, 당신은. 하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같은 생각이거든요. 제게도 당신은 그저 좋게만 보여서.
...아주 조그만 단점이라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으시다면 좋을텐데요.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께서도 마찬가지십니까. (작게 웃음소릴 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당신이 보는 것만큼 전 좋은 사람은 아닐 터인데. 실제로도 한심한 모습을 여럿 보이지 않았나. 그래도 당신과 제 시각이 같다는 건 좋았다. 아주 조그만 공통점을 찾고서도 큰 것을 얻은 이마냥 흡족하다. 당신의 웃음이 저를 충만하게 채운다.)
(서로의 단점을 찾아내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터놓았다. 그리고 이어 베아트리체는 단점을 찾을 수 있기까지 머무르길 바란다 말한다. 그가 아무리 관계에 눈치가 없는 편이래도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된다면 분명 좋을 겁니다. (제 벅차오르고 들뜨는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자제력에 자제력을 더하여 겨우 한 문장을 답으로 내놓는다. 서로의 신분에 발목을 잡혀 진심을 입술 밖으로 전부 말하지 못하고 정제해야만 하지만, 오히려 그런 신분이기에 한 마디에 감추어진 수많은 속뜻을 알아보는 일도 쉬울 테지.)
 
베아트리체 힐:....그럼요. (작은 웃음소리가 전신을 타고 울리고, 뒤흔든다. ...어쩌자고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것인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당신이면 되었다.)
(짧게 줄여진 한 문장에는 그저 기쁘게 끄덕일 수 밖에. 자신의 마음을 제 입으로 온전히 전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전해졌다. 대답 뒤로 숨겨진 진심에 어쩌면 맞을 지도 모르는 미래를 그린다.) ... 분명 그럴테죠. 나도 당신도.
 
에르드 하이너스:(기사가 된 이래로 제 심장은 쭉 고요했다. 저를 거두어준 이를 만났고 혹독하지만 안정적인 자리에 올랐으니, 검을 휘두르고 적을 무찌르는 호승심과 충성심만이 제게 적합한 감정이라 여겼다. 그러나 작고 단아한 이 연보랏빛 아가씨를 만난 이래로 제 심장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다채로운 빛에 두근거리며 뛰어댄다. 지극히 짧은 시간 만에 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할까. 당신은 어떻게 날 이토록 바꾸어두는 걸까.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기 어렵다. 단 하나 분명한 건 당신을 향한 긍정적인 감정이 점점 제 안에서 크기를 불려간다는 사실. 폭풍 속에서 길을 잃고 떠도는 것 같은데, 이 폭풍은 저를 할퀴지도 내던지지도 않고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등불을 들어올리면 앞길이 보일까. 당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수없는 가능성이 그를 뒤흔들어 놓는다. 이내 그는 뭇 풋사랑에 빠진 청년의 낯 대신 쓸쓸한 기사의 낯을 덮어쓴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십시오.
 
베아트리체 힐:(옅은 빛만이 남은 밤 아래, 반짝이고 술렁이며, 휘몰아치고 얽혀있던 시선을 서서히 떼어낸다. 고요한 혼란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어렵게도 시선을 들었다. 길지 않은 제 인생 중 가장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밤. 상기된 마음이 걷히고 남은 것은 그 위를 덮은 쓸쓸함이었다.)
....그래요. 당신도 얼른 들어가요. 상처가 덧나면 안되니까요. (예를 표하고 뿌리 박힌 듯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떼어낸다.)
(이 밤이 지나가고 내일이 오듯. 우리의 앞에도 언젠가 희망이 떠오르기를 바라며 방 안으로 사라진다.)
 
에르드 하이너스:좋은 밤 되시기를. (더 이상 서있는 이가 없는 테라스를 한참이고 올려다보았다가, 스치는 바람이 시려워질 때가 되고서야 제 방으로 향한다. 테라스에서 벗어나더라도 쉬이 잠들 수는 없으리라.)
 
발코니 문을 닫기 전,
 
'똑똑.'
 
야트막한 노크소리가 당신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이제 저택의 모든 일과가 전부 종료되었을 시간인데... 집사나 메이드일까요?
 
베아트리체 힐:......이 시간에 누구지?
 
퍼시:저예요, 아가씨. (문 너머에서 말한다)
 
베아트리체 힐:(천천히 문 가까이로 다가가 한 뼘정도 문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온거니?
 
조심스레 문을 열면 예의 소년 시종, 퍼시가 서 있습니다.
 
퍼시: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가씨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베아트리체 힐:...이렇게 서서 얘기하기도 그러니 안으로 잠시 들어오겠니?
 
퍼시: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거절도 않고 안으로 조심히 들어온다.)
최근에 집에 들어온 손님에 대한 이야기예요.
 
베아트리체 힐:(심장이 쿵 떨어진다.) ...손님이라면 내가 모셔온 기사님 말이니?
 
퍼시:(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 황태자의 기사단이 비슐트까지 당도했단 사실을 아세요?
기사단이 이곳까지 왔다면 목적은 2황자 하나뿐만이 아닐 거예요. 그런데…… 집에 계시는 손님께서도 기사라고 들었어요.
…… 제가 알기로, 레노버의 기사는 푸른 제복을 입어요. 추측일 뿐이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베아트리체 힐:(말소리가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웅웅 이명이 울린다.)
...아무래도 근거없는 헛소문을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후들거리는 다리에 부러 힘을 주어 꼿꼿이 섰다.) ...일러주어 고마워. ...그런데 퍼시, 너는 어디서 이 소식을 들은거니?
 
퍼시:저도 집사님에게 들은 소식이에요. 하지만 아가씨께 소식을 전해드렸단 걸 알면 절 혼내실지도 모르니, 괜히 집사님께 먼저 말씀하시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가씨?
 
베아트리체 힐:...그래, 고마워.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서 자렴. (표면적인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퍼시:(꾸벅 인사하고 뒤돌아 나간다.)
 
갑작스러운 퍼시의 말이 큰 울림을 남깁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요.
 
베아트리체 힐:...설마. 그럴리가. (술렁이는 심장에 손은 얹어 꾹 누른다. 하루만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 발 밑이 꺼져가는 늪에 걸린 것 같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침대에 누워 오지 않을 잠을 청할 수밖에요.
 
베아트리체 힐:(휘청이는 걸음 탓에 침대에 눕기까지 까마득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휘감기는 천에 몸을 맡기고 까무룩 눈을 감았다.)
 
에르드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대체 왜, 무엇을?
 
그러나 당신이 잠들기 직전까지 곱씹었을 그의 표정과 그의 목소리, 몸짓에선 거짓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에르드가 이 저택에 머문 지도 어언 이틀. 오늘은 사흘째 되는 아침입니다.
 
단점을 찾을 때까지 오래 머무르기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짧은 밀회 끝 시종이 들려준 이야기는 당신에게 충격을 떠밀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어쩐지 저택 로비가 조금 소란스럽습니다.
 
<듣기>, 혹은 <대인기능> 판정
 
베아트리체 힐:(...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귀만 쫑긋세워본다..)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남부 우편국이 전부 업무 중단을 선언했대."
 
"지난주에 본가에 있는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는데..."
 
"그런데 그게, 폭풍 때문이 아니라 황실에서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있나 봐."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남부라면 이 부근을 포함해 제국의 수도와 남쪽 항구를 모두 지칭하는 단어죠.
 
요즘 자꾸 황실과 관련된 소문들이 들리는데 괜찮은 걸까요?
 
본가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는 별 탈이 없는 걸까요.
 
어쨌거나 오늘도 가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베아트리체 힐:(..편지라도 써서 본가에 안부를 물을까 했더니 그것도 일이 어렵게 되었구나. 혹시 여태 말이 없는게 이미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은 아닐까. 조그만 불안이 고개를 든다.)
 
에르드 하이너스:(그런 불안을 눈치챈 듯 조용히 곁에 다가온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베아트리체 힐:....아, 간밤에는 평안하셨나요. (예를 표하며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소문이 어째 점점 몸집을 키워가는 듯 해서.
 
에르드 하이너스:예, 신경써주신 덕분에. (느리게 고개 끄덕이고는) 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람을 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릅니다.
 
베아트리체 힐:다행이네요. (찬찬히 그린듯한 미소를 떠올린다. ) ...네,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조용히 손을 뻗는다.)
 
에르드 하이너스:(자연스럽게 손을 받칠 수 있도록 팔을 내밀고, 천천히 바깥으로 향했다.)
 
작은 [분수대]와, 티 파티를 열 수 있는 테이블, 원형의 [미로], 드넓은 [꽃밭]과 장식 체스말들이 놓여있는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저택의 뒤쪽 발코니를 통해 계단을 밟고 내려갈 수 있지요.
 
베아트리체 힐:(조용한 발걸음은 서로에 맞춰 분수대로 향한다.)
 
비너스 신상이 선 아름다운 분수대입니다.
 
이곳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죠.
 
베아트리체 힐:...신상이 참 아름답죠. (올려다보던 시선이 서서히 내려오며 맞아들어간다.) ...이 분수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어요.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죠.
...한번도 해본 적은 없었지만. ...해보실래요?
 
에르드 하이너스:참 아름답고 섬세한 신상입니다. (비너스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던가. 사랑도 아름다움도 모두 당신에게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가치다. 또 사소한 요소를 베아트리체와 연결짓고 있음을 깨닫고는 시선을 먼 곳으로 떨군다) 그런 전설도 있군요.
좋습니다. 빌고 싶은 소원은 있으십니까?
 
베아트리체 힐:(멀어지는 시선에 고개가 조금 기운다.) 종종 이곳의 사용인들도 시도해보는 듯 했어요.
(소원. 무겁지만은 않은 침묵이 감돈다.) ...그럼요. 분명하게요. 당신은요? 빌고싶은 소원이 있나요?
 
에르드 하이너스:(긴 침묵. 그 끝에 무겁게 미소했다.) …… 저도, 있습니다. 명확한 소원이.
 
동전을 던진다면 <행운> 판정.
 
베아트리체 힐:...그럼 해볼까요. (드레스의 주머니에 숨겨둔 동전을 한 닢을 건내주고는 먼저 던져본다.)
기준치: 49/24/9
굴림: 3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베아트리체가 던진 동전은 분수대 가운데에 정확히 들어갑니다.
 
베아트리체 힐:(동전을 따라가던 시선이 딱 멎는다. 작은 탄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조그맣게 난다. 돌아보는 얼굴에는 기쁨이 어린다.) 보셨어요?
...참, 소원을 빌어야죠. (두 손을 입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 가만 눈을 감는다.)
(... ...부디 저의 혼란에 제가 사랑하게 된 이가 휘말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이별은 먼 일이기를 바랍니다. 같은 말을 한참이나 되새긴다. 간절한 마음에 꼭 잡은 두 손과 내리감은 눈이 서서히 풀어진다.)
...음, 이제 됐어요. 자, 이제 당신 차례에요.
 
에르드 하이너스:네, 봤습니다. (기뻐하는 모습이 꼭 순수한 아이 같아서 절로 웃음이 난다. 정말이지 봄꽃같은 사람.)
(소원을 비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때만큼은 어떤 눈, 어떤 표정으로 보더라도 당신이 알 수 없을 테지. 무슨 소원을 비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 저와 관련된 소원이었으면 하면서도 차라리 아주 상관없는 다른 종류이기를 바라게 된다. 그 이유는 필시……)
좋습니다. (베아트리체에게 건네받은 동전을 분수대에 던져본다.)
기준치: 50/25/10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동전은 분수대 가운데의 파인 부분을 보기 좋게 빗나가 한참 곁다리에 떨어집니다.
 
베아트리체 힐:(뎅구르르 굴러가는 동전 바라본다..)
... ......기회는 원래 세번까지랬어요. (하나 더 손에 꼭 쥐어준다.)
 
에르드 하이너스:힘 조절이 잘 안 됐나 봅니다. (머쓱)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거리를 가늠하고 동전을 휙 던진다)
기준치: 50/25/10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번에는 깔끔하게 홈 안으로 들어가네요.
 
에르드 하이너스:(작게 안도) 잘 들어가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음 베아트리체의 귀한 동전을 하나 더 낭비할 뻔했다)
(베아트리체가 했던 것처럼 두 눈을 내리감는다. 찾아오는 암흑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다.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사람이 저에게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 그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다. 바랄 것이 있다면 오직 그뿐이다.)
다 됐습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정말요. (자신이 동전을 넣었을 때보다 더 기쁜 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그리고 숨죽여 소원을 비는 옆모습을 눈에 새기려는 듯 지켜본다. 지금만큼은 온전히 나만이 당신을 가질 수 있으니.)
(...문득 고개를 드는 욕심. 그의 소원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관련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볍게 저어 털어낸다.)
분명 이루어질거에요. 당신이 바라는 것이니까. (조용한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보인다.)
 
에르드 하이너스:(문득 내밀어진 손을 좀 더 세게 잡아 제 품으로 끌어오고 싶다는 생각이 예고없이 불쑥 떠오른다. 잔잔하다 믿었던 파도가 예기치 않게 키만큼 솟아오르듯이. 점점 스스로가 이상해져가는 듯하다.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는데, 그런데도 당신의 곁에서 멀어지고 싶지는 않으니 어찌 된 일일까.)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표를 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하리만치 무감한 낯으로 손을 받쳐들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어디가 좋을까요. (받쳐진 손을 내려다본다. 당신의 커다란 손에 제 손을 겹쳐 얽어서 영원히 붙잡고 있고싶어진다. 커다란 품에 파고들어 심장소리를 나누고 싶다.)
....아.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예의바른 미소를 덮어쓴다.) 미로는 어떠세요?
 
에르드 하이너스:(나누지 못하는 목소리들에 얼마나 많은 진심들이 갇혀 있을까.) 좋습니다. 분명 저쪽이겠지요? 아직 이곳의 구조를 다 익히지는 못한지라.
 
베아트리체 힐:(새어나가려는 마음들을 미묘한 웃음의 저편에 묻어둔다.) ...그새 길을 제법 익히셨네요. 맞아요. (발걸음은 미로를 향한다.)
 
미로라고는 하지만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짧은 유희거리로, 본격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구조의 미로입니다.
 
베아트리체는 어릴 적 이곳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을까요?
 
베아트리체 힐:(유희거리인 작은 미로라고는 하지만, 어릴 적 길을 잃고 해맨 후 로는 처음인지라 걸음이 앞에서 멎는다.)
 
에르드 하이너스:다행히 크지는 않군요. (키도 덩치도 큰 탓에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별로 높지 않은 수풀들로 꾸며진 미로를 물끄럼 본다.) 어릴 적에도 이곳이 있었습니까?
 
베아트리체 힐:...당신은 앞이 다 보이시겠어요. (수풀의 끝자락에 닿을 듯한 그가 새삼스레 더 커다랗게 느껴진다.) .... ...그럼요. 어릴 적부터 있었어요.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에르드 하이너스: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많이 자그마하셨겠지요? (제 무릎에도 오지 않을 법한 아이 베아트리체를 상상해본다.) 그때에는 저 미로가 높게 느껴졌을 듯한데.
 
베아트리체 힐:(조그맣게 끄덕인다. 이 사람도 저보다 작은 시절이 있었을까.)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 ....그랬었죠. 아무리 빙글빙글 돌아도 제자리로 돌아오고, 밖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벽에 갇혀 완전히 길을 잃었었죠.
 
에르드 하이너스:이런. (빙글빙글 돌다 끝내 길을 잃어버린 어린 아가씨를 생각하니 괜히 제 마음이 다 조급하고 안타까워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 .........음. (몇 번이고 망설이다 작은 한숨과 함께 겨우 입을 뗀다.) .... ...해질녘쯔음 제가 훌쩍이는 소리에 사용인들이 저를 찾아냈어요. 그제서야 이 미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구요. .....조금 부끄럽네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결국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다.)
...정말. 비밀이에요. (들릴듯 말듯 속삭인다.)
 
에르드 하이너스:제가 달리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무사히 발견되셨으니 다행입니다. (얼굴 파묻는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작은 웃음소릴 흘린다. 예쁘고 우아한 줄만 알았는데 이런 귀여운 면도 있다니. 너무 다방면으로 완벽한 것 아닌가?) 제가 괜히 부끄러운 걸 여쭌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 그렇게 웃지말아요. (저런 웃음이 흐르는 당신의 얼굴은 어떨까. 그러나 차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반쯤 얼굴을 가린 채로 한 손만 휘적이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툭하고 걸린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얽혀 쓰러진다.)
 
에르드 하이너스:앗. 아가씨?! (넘어지는 베아트리체를 받쳐주려다 제 중심까지 흔들려 어찌할 새도 없이 몸이 기울어진다. 와중에도 베아트리체가 다치지 않게끔 제 쪽으로 휙 끌어당긴 탓에 그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누운 꼴이 되었다.)
(커다란 한 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받치고선,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태부터 확인한다.) 괜, 괜찮으십니까? (두 사람이 얽혔음을 깨닫는 건 그로부터 5초쯤 뒤였다)
 
베아트리체 힐:...괘, 괜찮아요. ...미안해요, 놀라셨죠. (제 손에 가려진 시야가 트이면 보이는 것은 넓은 품이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심장이 뛰는. 그제서야 쓰러진 곳은 풀 숲도 찬 바닥도 아닌 그의 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 미안해요. 괜찮나요? 어디 다친 곳은요? 내버려뒀어도 되었을텐데. (걱정으로 미간이 구겨진다. 곧장 몸을 일으켜 자신을 받치고 쓰러진 당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정말 미안해요, 고마워요. (그럼에도 다시금 그 품에 기대 심장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세상에, 베아트리체. 정신차리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데도.)
 
에르드 하이너스:아닙니다. 저야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다친 곳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괜찮다는 걸 깨닫고는 어색하게 몸을 일으킨다. 옷자락에 흙이 묻어 더러워졌을 뿐 다친 곳은 없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간 혹독하게 단련해온 시간이 있으니.)
하지만 기껏 내어주신 옷이 더러워져서 어찌해야 할지. (상황이 조금 정리되고 나니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얼굴과 훅 닥쳐온 당신의 향기에 금세라도 열이 오를 것만 같다. 괜히 옷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 애쓴다.)
 
베아트리체 힐:아직 몸도 다 낫지 않으신걸요. ...기사님은 늘 약한 소리를 하시는 법이 없으시니까요. (잠시 실례할게요, 조그만 목소리와 함께 훌쩍 다가와서는 남은 흙자국을 가볍게 털어낸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얼굴도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다 검은 앞머리에 걸린 작은 잎을 떼어내고서야 미소짓는다.)
...옷은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마세요. (그제서야 발걸음을 급히 물린다.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얼마나 가까워졌던건지, 괜스레 볼이 달아올라 시선을 멀찍이 둔다.)
...그때처럼 길을 잃기 전에 얼른 이 미로를 나가야겠네요.
 
에르드 하이너스:레이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야 있겠습니까. 게다가 실제로도 전혀 아무렇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걱정은 달콤하게만 느껴진다. 저를 신경써주는 마음은 구름처럼 포근하고, 한순간 팔에 감겼던 머리칼은 꼭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서. 앞머리에 손길이 닿으면 살짝 흠칫했지만 가만히 떼어내도록 둔다. 코앞까지 다가온 이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베아트리체의 기척이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떠올린다.) 조금 다치더라도 저는 워낙 잔부상을 자주 입어온데다 회복도 빠르지만, 아가씨께선 몸이 약하셔서 여기 머무르시고 계시니까요.
예, 사용인들이 또 찾으러 오기 전에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제 팔뚝에도 흙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는 손을 올릴 수 있도록 팔을 내민다)
 
베아트리체 힐:...그래도 저와 계신 동안은 부디 당신의 건강을 우선해주세요. (모범적이고도 귀족적인 손짓으로 손을 얹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던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참, 꽃밭에는 가보셨나요? 아주 넓고 아름다워요. (꽃밭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렸을 적 미로에 갇힌 작은 아이는 어느새 출구를 찾았다.)
 
에르드 하이너스:유념하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이상 당신을 최우선할 수밖에 없는데도. 기사에겐 너무 어려운 명이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는 조심스러워, 아직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른에게는 맥빠질 만치 쉬운 미로를 벗어나 꽃밭으로 향했다.)
 
꽃밭은 후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 숲길로 가는 입구 즈음에 있습니다.
 
저택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예요. 보는 눈이 없으니 조금 더 편하군요.
 
에르드 하이너스:집사님께서 이걸 챙겨 주셨습니다. (피크닉 매트를 꺼내서 꽃밭 한쪽에 펼친다.)
 
베아트리체 힐:...집사님도 참, 손님께 이런걸 맡기셨군요. 그렇지만 정말 좋은 선택이네요. 고마워요. (매트의 한 쪽에 가지런히 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향에 가만 눈을 감았다.)
 
에르드 하이너스:메이드를 딸려보겠다 하시는 걸 제가 들겠다고 했습니다. (미소한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마 저나 당신이나 동일하겠지.)
단정하게 정리된 예쁜 꽃밭입니다. (가만 있어도 꽃향기가 절로 콧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절로 평안해지는 분위기. 눈 감은 당신을 바라보다가, 문득 꽃 하나가 눈에 띈다.)
아가씨를 닮은 꽃이 피어있군요. (가리키는 것은 아가판서스.)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러셨군요. (마주 미소를 지었다. 둘만이 있을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으니까.)
다들 정성껏 돌보고 있거든요. 지극정성이에요.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이 꽃밭에 당신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닮았다니, 손 끝을 따라가면 연한 보랏빛의 꽃이 긴 줄기 끝에 소담히 피어있다.) 저 꽃은 아가판서스예요. 원래 이 시기에는 피는 꽃이 아닌데, 당신을 보고 싶었나보군요.
(그리고는 찬찬히 꽃밭을 둘러본다. 당신의 눈동자를 닮은 노란 황매화.) ...이 곳엔 당신을 닮은 꽃도 피어나는데, 지금은 가지만 남았네요. ...그 꽃이 피는 시기에 같이 볼 수 있다면 분명 좋을거예요. 길을 따라 피어나서 굉장히 아름답거든요.
 
에르드 하이너스:다들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이만한 별장을 관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 꽃밭까지 돌보려면 상당히 손이 많이 가겠지.)
아가판서스, 라 하는군요. (고운 이름이다. 당신을 닮았다 생각했는데 이름마저도 그렇지 않나. 그러다 멈칫한다. 저를 보고 싶어 피었다니, 꼭 심장에 꽃잎이 내려앉은 것처럼 간질거린다.)
저를 닮은 꽃……?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마찬가지로 꽃밭을 둘러보았다.) 어떤 꽃인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늘 얘기하는데도 어쩐지 다들 듣지 않아서요. (쉽게 걱정하는 듯한 말투도 사용인들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색이 참 아름답죠. 저런 아름다운 꽃을 닮았다 해주시니 기쁘네요. (환한 웃음이 어린다.)
죽단화라고 불려요. 겹겹이 피어나는 짙은 노란빛의 꽃이 참 아름답죠. 기사이신 당신에게 걸맞는 꽃말을 지니기도 했군요. (숭고함. 작게 꽃말을 덧붙인다.)
 
에르드 하이너스:사용인들을 아끼시나 봅니다. (베아트리체 정도의 높은 귀족쯤 되면 자신의 신분에 기고만장해져 아랫사람을 하대하는 경우가 많다. 에르드는 기사로서 일하며 그런 경우를 숱하게 봐 왔다. 그렇기에 베아트리체의 따스하고 포용적인 성품이 더욱 돋보인다. 자신의 눈에 무언가 씌여서 베아트리체의 좋은 면만이 보이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인품은 칭송받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성년을 코앞에 두었으니 그의 곁을 차지하려는 귀족들도 차고 넘치겠지.)
(현실은 냉정하고 아프지만, 이곳의 꽃향기는 지금만큼은 다 내려두어도 된다는 듯 편안하다. 당신의 웃음은 만개한 꽃을 꼭 닮았어.)
죽단화……. (베아트리체가 알려준 이름을 곱씹었다.) 제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꽃말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래도, 아가씨께서 손수 저와 닮았다 말씀해주셨으니 꼭 한번쯤 보고 싶어집니다.
 
베아트리체 힐:...다들 저희 가문을 위해 힘써주고 있으니까요. 고맙지 않을수가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그들이 있기에 비로소 저희 가문이 있는 것이겠죠. (늘 스치는 가족같은 이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제게는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웃었다.)
당신도 분명히 좋아할거에요. ......꼭 그 날이 오면 좋겠네요.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때.
...참, 죽단화는 말려서 차로도 마실 수 있댔어요. 꽃이 피면 가장 예쁜 걸로 따다 말려둘게요. 당신이 언제든 보실 수 있게.
 
에르드 하이너스:(봄. 지금은 멀게만 느껴지는 그 계절. 그래도 시간은 흐를 테고 언젠가는 오겠지. 비록 가능보다 불가능에 추가 더 가깝다고 하여도 소망하는 것만큼은 죄가 아니니 에르드는 조용히 바란다.)
좋습니다. 차를 별로 마셔본 적은 없지만 아가씨께서 직접 말려둔 꽃잎으로 탄다면 분명 무척이나 향기로울 테지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이지만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꽃잎은 노란색일까. 향기는 어떠할까? 꽃말이 숭고함이라 하였으니 고상한 느낌이 들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 상상하고 싶은 건 당신과 함께 맞는 봄의 광경이다. 과연 그때, 나는 당신의 곁에 설 수 있을까.)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아름다운 푸른 꽃이 드넓게 펼쳐진 이 곳.
 
에르드는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다가 문득 입을 열었습니다.
 
에르드 하이너스:……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무엇인가요?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 유람선에 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배가 전복되어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직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던 와중 지나가던 구조선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면, 아가씨께서는 그걸 잡으실 겁니까?
 
베아트리체 힐:....... ...그건, 어려운 문제네요. 다른 이들의 생사는 내버려둔 채 홀로 살아남아야 할 지도 모르니까요.
(질문의 의도를 헤아려보고자 애썼다. ...혹시나 하는 귀띔일까 하고.)
 
에르드 하이너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이걸로 아가씨의 성품을 가리거나 시험할 마음은 없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렇죠, 가정이니까요. (그 후로도 한참 침묵이 이어진다.)
...다른 이들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혼자서만 그 손을 잡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찌보면 미련할지도 모르겠지만.
 
에르드 하이너스:(가만히 고개 끄덕인다. 그 낯에는 어떤 뚜렷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당신을 바라보는 금빛 눈은 깊고 깊었다. 수많은 상념과 진실과 진심을 품은 채로.)
 
베아트리체 힐:...모두를 잃고 살아남는다해도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닐거에요. (금빛 눈동자 저 너머 일렁이는 것들을 애써 보지 못한 듯 미소지어 넘긴다.)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는 너무 착하셔서 탈입니다. 보통은 스스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기사로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에르드 역시도 저 스스로를 가장 중시하였겠지.)
그래도 그게 아가씨답다고 생각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착하지 않아요. (일순간 침묵이 감돈다.)
...으음, 예를 들어 가라앉는 저를 구하러 구명정을 타고 온 당신의 손이라면 저도 모르게 잡을지도 모르겠어요. (왜인지 가벼운 어투와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다.) ...당신은 기사님이시니까요, 그렇죠?
 
에르드 하이너스: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많은 이들을 보았지만, 지나치게 착할수록 빼앗기는 것만 많아지더군요. 험한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이기심은 필요합니다.
(겨우 가슴의 풍랑을 가라앉히면, 당신은 곧장 거기에 바람을 일으킨다. 시선을 떨어뜨리면 시야에 베아트리체의 작고 섬세한 손이 보였다.) 아가씨가 빠졌다는 걸 알면 저는 망설일 새도 없이 뛰어들 테니,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가벼운 어투에 진중한 답을 돌려준다.) 바닷물은 차가우니, 얼른 나오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실 겁니다.
 
베아트리체 힐:...제게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내어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만큼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이기심도 필요하겠죠. (서서히 시선이 돌아온다.)
...당신은 참 쉽게도 저의 파란에 뛰어드시는군요. (그러지 않으셨으면 했는데. 자신이 귀족이라 참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표정을 언제든 원하는 대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요, 늦었다가는 당신이 걱정할테니까요.
 
에르드 하이너스:(한동안 말이 없었다.) …… 제가 뛰어들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그게 당신이 진정 바라는 거라면 따를 수밖에. 자신의 의사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베아트리체 힐:(...네, 라는 한마디면 된다. 그 말 한마디면 그는 풍파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찬 바다에 가라앉을 일 없을 것이다. ...그거면 되는데. 짧은 한마디가 왜 이렇게나 무겁게 심장을 짓누르는지.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모래를 삼킨 듯 껄끄럽고 가시가 돋힌 듯 따끔하다. 바람에 날리듯 연한 빛의 눈동자가 저항없이 흔들린다.)
... ....그랬으면 했어요. ....그랬는데, ...모르겠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가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줬으면 해요. .... ..........미안해요. 참 못났네요.
 
에르드 하이너스:(그는 답이 나올 때까지 연보라색 홍채를 묵묵히 마주하고만 있었다. 당신의 것과 달리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감정의 갈등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기사이므로 명령을 따르는 데는 익숙했다.)
(그래도 모든 감정을 감추는 법까지 익히지는 못했다. 마침내 흘러나온 가녀린 목소리에 나지막히 웃음짓는다. 진정 기쁘고 안심이 되는 듯, 한결 녹아내린 표정이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못났단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당신이 원치 않는다면 빼낼 수 있을 만큼 느리고 조심스럽게 한 손을 감싸쥔다.) 저는 그 대답을 기다렸으니.
 
베아트리체 힐:(그제서야 제 손이 긴장으로 차게 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뜻하고 커다란 온기로 서서히 녹아간다. 손을 따라 당신의 얼굴까지 시선이 올라가면 밝은 눈과 표정을 마주한다. 자신을 이끌어 줄 빛처럼 밝은.)
...그리 바라주어 기뻐요. 정말로.
 
에르드 하이너스:손이 차갑습니다.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의 냉기가 전해져온다. 아예 양손을 다 잡아 감싸주었다. 평균보다 뜨거운 편인 제 체온이 녹여주기를 기대하며.)
(당신의 기쁘단 말이 제게 더 기껍다는 걸 당신은 알까.)
 
투두둑.
 
뺨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찰나의 행복한 순간을 방해합니다.
 
에르드는 재빨리 양산을 베아트리체에게 들려주고 피크닉 매트를 정리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정자가 있으니 일단 거기에서 비를 피하는 것이 좋겠죠.
 
아무래도 금방 지나갈 소나기 같으니까요.
 
베아트리체 힐:..저기 저 정자 밑으로 가요. (양산을 에르드 쪽으로 최대한 높이 들어올린다.)
 
에르드 하이너스:저는 비를 맞아도 상관없으니 아가씨께서 쓰십시오. (그래도 허리 최대한 숙여서 베아트리체랑 높이 맞춰준다.)
 
베아트리체 힐:(정자를 향해 총총 걸어간다)
 
이 정자는 오랜 옛날, 가족들이 다 같이 티파티를 즐기던 곳입니다.
 
이 저택은 어린 시절 이후 거진 10년 만에 방문한 별장이니까요.
 
에르드 하이너스:(매트가 든 바구니를 옆에 내려두고 제 외투를 벗어 베아트리체에게 걸쳐준다.)
내일은 시내로 외출을 잠시 다녀올까 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빗방울을 툭툭 털어내다가)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에르드 하이너스:알아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반나절 내로 돌아올 예정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아트리체 힐:혼자 다녀오셔도 괜찮으신가요? 사람을 붙여드릴까요?
 
에르드 하이너스:(고개 젓는다) 아닙니다. 금방 다녀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기사가 누군가의 호위를 받는다니…… 조금 우습지 않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참, 그렇죠. (소중한 사람일수록 애지중지하는 버릇이 툭 튀어나온 참이라 슬 웃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에요.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본다.)
 
이렇게 되니 꼭 어제 함께 마을로 가던 그 마차 안 같아요.
 
자박한 빗소리, 낯선 감각들과 눈앞의 에르드.
 
과거를 상기하게 하고, 현재를 감각하게 하는 풍경.
 
에르드 하이너스:이곳에서는 어떤 추억이 있었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가족들과 함께 티파티를 하고는 했어요. 좋아하는 꽃으로 꾸며놓고,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즐거웠어요.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에르드 하이너스:정말 즐거운 순간이었겠군요. (미소한다. 따뜻한 표정과 말투지만, 어째선지 그 낯에는 그늘과도 같은 착잡함이 드리운다.)
가족분들과는 사이가 좋으십니까?
 
베아트리체 힐:...그럼요, 그리워지네요. (과거에 잠겨 그의 그늘을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을 언젠가 후회할 것이다.)
부끄럽지만 음, 그래요. ...아 참, 저와 꼭 닮은 쌍둥이 오빠도 있답니다. 분명 당신을 좋아할거에요.
 
에르드 하이너스:쌍둥이 오빠가 있으셨습니까. 언젠가 만나뵐 날이 온다면 좋겠군요. 하지만 제가 딱히 호감상으로 생기지는 않은지라, 절 마음에 들어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분명 좋은 친구가 될거라 확신해요. 제가 좋다고 하면 다 좋아하거든요.
...음,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줘요. 뭐라도 좋으니.
 
에르드 하이너스:사이가 가까우신 모양입니다. 저는 형제가 없었던지라…… 어떤 느낌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잠깐 고민한다) 제 이야기라 할 법한 건 별로 없습니다만…… 기사 교육을 받았을 때, 나름대로 가까워진 이가 몇 있긴 합니다. 저는 인간관계를 맺는 게 서툴러 누구에게든 까칠하고 정없게 대했는데, 그런 제게도 끈질기게 다가와주는 이들이 있더군요.
 
베아트리체 힐:...쌍둥이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요. ...그런데 여태 안부 편지 한 통 없다니 참 이상하네요. (곰곰 생각에 빠졌다가 흥미로 금새 눈이 반짝인다.)
정말인가요? 다들 사실 당신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아보셨나보네요. 그 분들은 지금 뭘 하고 계신가요?
 
에르드 하이너스:(잠깐 입을 다물었다. 반짝이는 눈에는 힘없이 미소지어보이긴 했지만, 어느새부턴가 차차 표정이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랑은 거리가 멀지만 말입니다. 모두가 서임을 받고 기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기사가 되어 각자의 소속 기사단에 들어갔습니다. 이전만큼 매일같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가끔씩은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래도 다행이에요.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어두워져 가는 낯빛에 말을 더 붙이려다 조용히 미소지으며 정자 밖으로 손을 뻗는다. 소나기가 멎기를 기다리면서.)
 
에르드 하이너스:(제가 당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만큼 당신에게도 저에 대해 더 알려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베아트리체가 손을 뻗어 빗줄기를 가늠하는 동안, 에르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낯빛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마침내 비가 그쳐 저택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생각에 잠겨서, 베아트리체의 말을 흘려보내기 일쑤였지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간 베아트리체에게 뜨거운 탕파와 데운 우유 한 잔을 들고 퍼시가 찾아옵니다.
 
퍼시:아가씨, 계신가요?
 
베아트리체 힐:그래, 들어오렴.
 
퍼시:주방에서, 아가씨가 비를 맞으셨으니 오늘은 탕파를 안고 주무시라고 이것들을 보냈어요.
에르드 님이 어디론가 가시기에 아가씨와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주방에도 전해주렴.
...이 시간에 가셨단 말이니?
 
퍼시:네. 정확히 어딜 가셨는지는 잘 모르지만요. (탕파와 우유잔을 건네준다.)
 
베아트리체 힐:...혹시 어느 쪽으로 가시는지는 봤니?
 
퍼시:음…… 방향은 사용인 숙소 쪽이었던 것 같아요.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나가봐도 좋아. (살짝 웃는다)
 
퍼시:네. 좋은 밤 보내세요 아가씨. (꾸벅 인사하고 나선다.)
 
대답을 마친 퍼시는 빈 트레이만 가지고 문밖으로 나섭니다.
 
베아트리체 힐:(...사용인 숙소 쪽이라면.... 살금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간다.)
 
복도는 그야말로 고요합니다.
 
아직 일과가 모두 끝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요.
 
아까부터 에르드가 너무 신경 쓰입니다.
 
어딜 나섰던 걸까요?
 
사용인 숙소 쪽은 조용합니다.
 
베아트리체 힐:...이 쪽이 아닌가
(혹시나 싶어 창 밖을 둘러본다.)
 
사용인 숙소가 아니라면 후원에라도 나갔을까요?
 
베아트리체 힐:(...후원에 가셨을까. 후원 쪽으로 옮겨간다.)
 
다행히 비가 그쳤습니다.
 
어둡고 쌀쌀하지만 에르드는 체력이 좋으니 밤산책을 나섰을 수도 있겠죠.
 
어떻게 할까요, 나가볼까요?
 
베아트리체 힐:(옷을 꼭 여미고 나가본다)
 
등불을 든 이가 있나 싶어 뒷문을 열고 빼곡한 덤불 사이를 돌아보던 찰나, 누군가 베아트리체의 손목을 잡습니다.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 이 시간에, 이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어딜 가십니까.
 
베아트리체 힐:아.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걱정이 되어서요.
사용인 숙소 쪽으로 가셨다고 들었는데 조용해서 혹시나 했어요.
 
에르드 하이너스:저처럼 건장한 사람을 왜 걱정하십니까. 일단, 날이 추우니 어서 들어오십시오. (손목을 얼른 놓아주고 뒷문을 열어준다.)
마을의 지리를 잘 모르기에 집사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이 오지 않기에 잠시 산책을 하려 했는데…… 아가씨가 보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열린 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집사님께요..? (이 늦은 시간에 물어봐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었을까. 잠시 떠오른 의문을 금새 지웠다.)
이제 바람이 차니 당신도 들어와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베아트리체가 들어오면 자신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새 제가 신경쓰이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그게, 그러니까. (별안간 던져진 질문에 말문이 막혀 얼굴만 올려본다.) ...그래요. 신경이 쓰였어요. 그러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도 아주 느린 걸음으로 돌아본다.)
 
에르드 하이너스:(빙그레 미소한다) 곤란한 걸 여쭤봤나 봅니다.
그래도 저를 신경써주셨다 하니 좋습니다. (원래라면 삼켰을 말을 솔직하게 뱉어본다. 이건 바깥이 어둑한 밤이라서일까.)
 
베아트리체 힐:...곤란하긴요. 저를 위해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분인데요.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크게 뜨였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 ...어쩐지 밤의 당신은 조금 더 솔직하네요.
 
에르드 하이너스:(그제야 제동이 걸린 듯 두어 걸음 살짝 삐걱거린다. 밤이란 낭만을 모르는 그의 심장에도 불을 지핀다. 달콤한 말이라곤 할 줄 모르는 그의 혀에 기름을 바르고.) …… 괜한 말을 했을까요?
 
베아트리체 힐:(고장난 듯한 움직임도 퍽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평소같은 그린듯한 가식적인 웃음은 없다. 그거 기쁨만 떠오를뿐. 기사도 어느 명문가의 자제도 아닌 서로로서 존재하는 지금.) ...전혀요. 당신께 들은 어떤 말보다 가장 기꺼운걸요.
 
에르드 하이너스:그렇습니까……. (괜시리 또 얼굴이 타오르는 듯하여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다. 이성은 진심을 숨겨야만 한다고 외치는데, 당신은 제 솔직함에 가장 기껍게 반응하니 추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줄타기라도 하는 기분이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저도 정말로 자러 갈 테니. (결국은 빠르게 자리를 피하고자 밤인사를 건넨다.)
 
베아트리체 힐:(가만히 당신의 움직임과 표정을 지켜보았다.)
그래요, 시간이 늦었으니. (차분한 표정이지만 목소리는 묘하게 들떠있다.) ...덕분에 아주 좋은 밤이 될 것 같아요. 당신도 그러길 바라요.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선다. 즐거운 비밀을 숨긴 아이같은 표정으로)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에게 좋은 밤이 될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진심 한 점을 솔직히 내보인 것만으로도 용광로에 던져진 듯 열기가 달뜬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어색한 감정에 허덕이는 쑥맥이나 다름없다.)
(베아트리체에게 마주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지만, 머릿속은 꼭 마구 잉크를 들이부은 오선지마냥 엉망인 채였다.) 좋은 밤 보내시길……. (흐려지는 말끝으로 간신히 밤 인사를 건네고 제 방으로 향했다.)
 
설레이는 밤이 지나갑니다.
 
……
 
또 다시 찾아온 아침. 에르드와 함께 하는 나흘째의 시작입니다.
 
일찌감치 외출하겠노라 알렸던 에르드는 셔츠에 바지, 그리고 일꾼 러셀의 외투를 빌려 걸친 지극히 평범한 차림입니다.
 
그 곁에 선 집사는 복잡한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고요.
 
에르드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사용인에게서 모자를 건네어 받습니다.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또 처음 보네요.
 
집사는 에르드를 퍽 탐탁잖게 여겼지요. 게다가 에르드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 물어보았다던 마을 지리의 이야기를 또 나누고 있는 걸까요?
 
베아트리체 힐:..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집사:좋은 아침입니다, 베아트리체 아가씨.
 
베아트리체가 다가오면 이야기는 곧 종료되고 집사는 자리를 뜹니다.
 
에르드 하이너스:(단둘만 공유했던 어제의 짧은 밀회를 상기하듯 옅은 미소를 띈다.) 간밤엔 잘 주무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자연스러운 미소가 스친다.) ...덕분에요. 좋은 밤이 되셨을까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상처도 거의 다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아가씨. 혹시 이 저택에 정문과 후문을 제외한 다른 문이 있는지요?
 
<지능> 판정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글쎄요. 주인인 베아트리체가 그런 곳으로 드나들 일은 일절 없으니까요.
 
하지만 집사에게 물어본다면 알지도 몰라요.
 
베아트리체 힐:(곰곰.. 한참 생각에 잠긴다) ...글쎄요. 나중에 따로 집사에게 물어볼게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위치를 들으신다면, 기억하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 힐:조심히 다녀와요.
 
기억하고 있는 편이 좋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무튼 오늘의 일과는 그가 없었던 그 많은 날들처럼 아주 무료하고 따분할 거예요.
 
[산책]을 나가거나... 아니면 저택의 서재에서 시간이라도 죽여 볼까요?
 
베아트리체 힐:(...산책이나 다녀올까.)
(평소대로 걸음을 옮긴다.)
 
산책을 나가려 하는 베아트리체에게 집사가 다가옵니다.
 
집사:아가씨. 오늘은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수도에서 내려온 기사들 때문에 비슐트가 떠들썩합니다. 가문의 입장이 있으니 부디 오늘은 1층에 내려오지 말아주시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수도에서 기사들이? (알 수 없는 일이 늘어가는데 아무도 언질이 없으니 답답해진다.)
...일단 알겠어요. (돌아서려다 뚝 멈춘다.) ...참, 혹시 이 저택에 정문과 후문을 제외한 다른 문이 있었나요? 간만에 저택을 둘러보다보니 궁금해서.
 
집사:다른 문이라면…… 사용인들이 쓰는 뒷문이 있습니다. 수로도 있긴 합니다만, 그곳은 더이상 쓰지 않게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그래, 고마워요.
(방으로 돌아선다.)
 
...참 어렵네요. 다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태자가 정권을 쥐고, 이복동생인 2황자에게는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고요.
 
그리고 그 2황자는 베아트리체의 친척... 단순히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한 걸까요?
 
아니, 애초에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 거죠?
 
메이드가 복잡한 낯의 베아트리체를 방으로 인도하고, 노란빛의 차를 내어옵니다.
 
또 이 차입니다.
 
이 차를 마시지 않으면 베아트리체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지능> 판정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그러고 보니 두 달간 기침 한번 하지 않았잖아요.
 
고작 차 한잔의 효능이 이 정도라니... 뭔가 이상합니다.
 
베아트리체 힐:(메이드를 불러세운다.) ...잠깐만. 혹시 이 차에 뭐가 들어가는지 아니?
 
메이드:네? 당연히 좋은 약초와 허브가 많이 들어가지요, 아가씨.
 
베아트리체 힐:...차 말고는 별다른 처방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호전되었으니 궁금해서. 신경쓰지마렴.
 
메이드:다들 아가씨의 건강이 호전되길 바라면서 열심히 차를 끓이고 있으니까요, 아가씨. (밝게 말한다.)
 
...어쩌면 퍼시, 그 애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애는 눈치가 빠른데다 수도의 일을 퍽 잘 아는 눈치인 것 같았으니까요.
 
퍼시는 어디에 있죠?
 
베아트리체 힐:고마워. 모두의 덕분이야. (묵묵히 웃는다.) 참, 혹시 퍼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니?
 
메이드:퍼시요? 잠시만요, 아가씨. 제가 금방 올려보낼게요!
 
오래지 않아 퍼시가 방문을 두드립니다.
 
퍼시:아가씨, 저를 찾으셨다고요.
 
베아트리체 힐:...그래,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너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거든.
지금 수도에서 내려온 기사들 때문에 떠들썩하다고 들었어. 혹시 수도에 무슨 일이 있는거니?
 
퍼시:아가씨께서 아시는 대로일 거예요. 황태자가 왕위를 찬탈했고 사라진 2황자는 수배 중이라죠. 2황자가 황실에서 자취를 감춘 지는 한참 되었고, 황태자의 기사단이 전국에 파견되어 그를 수색 중이라고요.
하지만 위험한 건 2황자뿐만이 아니예요.
 
베아트리체 힐:...역시 떠도는 소문이 아니었구나. 2황자님 뿐만이 아니라는건 무슨 얘기니?
 
퍼시:베아트리체 아가씨께서는 명문 힐 가문의 후계자이시죠. (당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게다가 2황자와는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이니 황태자로서는 아가씨를 취하거나 아예 내치려고 할 거예요.
아마 그게 아가씨가 여기 계신 이유와도 관련이 있겠죠.
 
베아트리체 힐:(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생각보다도 일이 심각했구나.) ...퍼시. 정말 궁금해서. 이런 이야기를 어째서 이렇게나 상세히 알고 있는거니?
 
퍼시:소식통이 빠른 편이거든요. 현 사태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요.
많이 답답하실 것 같아서요. 저는 아가씨께 숨길 이유가 없으니 말해드리는 거지만, 다른 사용인들은 걱정이 많거나 아예 모르기 때문에 숨기는 것 같아요.
 
베아트리체 힐:...이해해줘서 고마워. 혹시 2황자님이 어떻게 생긴지 알고 있니? 혹시나 해서.
 
퍼시:죄송해요. 그것까진 저도 자세히 모르겠네요.
 
베아트리체를 닮은 소년은 조금 복잡해 보이는 낯입니다.
 
그는 조금 망설이더니, 베아트리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전합니다.
 
퍼시:저는 오늘부로 일을 그만둡니다.
…… 2황자가 비슐트의 영주와 결탁하고, 세력을 모아 조만간 수도를 칠 거라는 정보가 있었어요. 베아트리체 아가씨도 그때까지 무사하시면 좋겠군요.
 
퍼시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베아트리체의 메이드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방문을 두드립니다.
 
메이드:아가씨. 에르드 님이 귀가하셨답니다.
 
방 밖으로 나서던 퍼시는 명백한 경고를 담은 눈길로 베아트리체를 한 번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갑니다.
 
에르드... 에르드.
 
알고 지낸 지는 나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베아트리체의 세상을 이만큼이나 넓혀놓은 야속한 사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더 이상 이 저택은 안전하지 못하다는데...
 
베아트리체 힐:(퍼시가 나간 문 너머와 메이드를 번갈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마워. 나가봐야겠다.
 
아래로 내려가면 에르드가 문가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힐:돌아오셨네요. 알아보신다던건 잘 되었나요?
 
에르드 하이너스:(고개를 가볍게 주억인다.)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베아트리체 힐:...별일 없었어요. 온종일 저택 안에만 있었으니까요.
 
에르드 하이너스:간밤에 비가 온 탓에 날이 찼습니다. 집안에만 계시길 잘하셨습니다.
사용인들이 식사를 준비해두었다고 하더군요. 함께 가실까요.
 
베아트리체 힐:...네, 그래요. (웃음 뒤로 불안한 기색을 숨기고 가볍게 손을 얹는다.)
 
돌아온 에르드는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저녁을 먹을 때에도, 함께 티타임을 가질 때에도 특별한 기색은 없어요.
 
베아트리체 힐:...참, 무엇을 알아보러 가셨던건가요?
 
에르드 하이너스:(찻잔을 쥐고만 있고 마시지는 않는다. 평이한 낯으로 답한다) 별일은 아니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용무였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출의 목적을 물어도 둘러대는 그 모습이 꼭 저택의 사용인들과 같네요.
 
어째서, 무엇을 숨기려 드는 걸까요?
 
당신은 에르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에르드는 당신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군요.
 
그의 마음도 베아트리체의 것과 비슷할 텐데, 분명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베아트리체 힐:...그렇군요. (쓴 입맛을 차로 넘겨버린다. 하루 이틀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에르드 하이너스:(입을 꾹 다문 채로 베아트리체의 표정을 살핀다. 약간은 난처한 듯한 기색이 묻어나왔을지도.)
 
베아트리체 힐:...표정이 왜 그래요? (그린 듯 정석적인 표정으로 마주한다.) 별거 아니에요, 신경쓰지 말아요.
 
에르드 하이너스:……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순수함이 묻어났던 당신의 앳된 낯이 좋았는데, 지금은 다시 완벽히 귀족다운 모습이다. 역시 최근의 일로 많이 심란한 거겠지.)
차를 다 드셨다면 방까지 바래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바닥이 드러난 잔을 소리없이 내려둔다.) ...고마워요. 조금 쉬고 싶어서.
 
에르드는 당신의 방문 앞까지 함께 동행합니다.
 
에르드 하이너스:(당신이 들어가기 전에야 다물었던 입을 연다.) 아가씨.
오늘 밤 열 시에 서재에서 뵐 수 있을까요.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들어나 볼까요.
 
베아트리체 힐:(잠깐의 침묵이 끝나면) ...알겠어요, 그럴게요.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에르드 하이너스:예……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목례하고는 물러선다.)
 
지금은 약 일곱 시.
 
시간을 떼우다 서재로 향하면 되겠군요. 물론, 갈지 말지는 당신의 자유입니다.
 
베아트리체 힐:(방 안으로 들어서면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한참이고 창 밖을 보며 멈춘 듯 생각에 잠긴다. 고작 나흘. 고작 그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자신이 송두리 채 흔들릴 수 있었을까.)
(혼란스러워. 복잡하고 답답한 생각과 마음이 시끄럽게 떠드는 데도 그 중간에는 결국 그가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있다 천천히 일어난다. 이렇게 앉아서 생각만 해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게 우선이니까. (시계를 확인하고 서재로 향한다.)
 
이 저택의 서재에는 그다지 많은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편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시골의 별장일 뿐,
 
그동안 저택을 경유했던 수많은 귀족들이 한 두권씩 모아둔 것에 사용인들이 참고하는 실용서적이 몇 권.
 
총 200권도 되지 않는 책들이 낮은 책꽂이 두 개에 나란히 꽂혀있습니다.
 
마치 구색이나 갖추어 두었다는 모양새예요.
 
바닥에는 두터운 벨벳 카펫이 깔려있고 석재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어 미관을 살린 벽면에는 테피스트리가 여러 장 걸려있습니다.
 
<지능> 판정
 
베아트리체 힐:
지능
기준치: 55/27/11
굴림: 3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집사에게 들었던 수로로 가는 문이 저 뒤쪽 어딘가에 있었죠.
 
이 저택은 원래 작은 크기의 성을 개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옛 통로의 방향이 꼬여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남아버린 흔적이 몇 되니까요.
 
수로는 지하로 길게 이어져 숲길로 빠집니다.
 
에르드는 녹색 테피스트리 앞에 서서, 드물게도 초조한 얼굴로 베아트리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불러낸 걸까요?
 
에르드 하이너스:…… 아가씨, 와주셨군요. (긴장감과 초조함이 뒤섞인 낯으로 서 있다가도, 베아트리체를 보자 나지막히 미소한다.)
 
베아트리체 힐:(...수없이 고민을 해도 결국 에르드, 당신이었으니까.)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요.
 
에르드 하이너스: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겠군요.
그 전에 하나만 여쭙고 싶습니다.
베아트리체…… (처음으로 온전히 부르는 당신의 이름) 당신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베아트리체 힐:(자신의 이름에 시선을 맞춰 올린다. 세상 그 어떤 질문보다 잔인하고 다정한.) ...에르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나를 위해 위험도 불사하겠다고 만큼.
그만큼 다정하고 잔인해요. 자꾸만 당신만 생각하게 하니까. 에르드, 당신이 말하는 단점까지도 내게는 장점으로 보일만큼, 내게 가장 소중해질 사람. ...그렇게 생각해요. (귀족들의 빙빙 돌려말하는 투는 접어두었다. 지금은 그저 솔직하고 싶었으니까.)
 
에르드 하이너스:(복잡한 감정들이 한켠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그런 와중에도 베아트리체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와닿는다. 꼬이고 꼬인 타래를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을 만큼. 그의 낯에 안도와 기쁨이 찾아든다.)
제가 어떻게 기사가 되었는지는 이전에도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을 겁니다. 험한 취급을 당하던 저를 한 귀족 부인이 입양해주셨고, 실력을 인정받아 기사로서 일하게 되었다고.
어느 날, 저의 주인은 아비를 죽이고 동생을 쫓아냈습니다. 그는 정당한 통치자가 되고자 기사들에게 명령했죠. 이복동생에게는 뒷배가 되어줄 명문 외가가 버티고 있는데, 그 가문에서 후계자를 피신시켰으니 제 앞으로 데려오라고 말입니다.
시골로 남행하던 기사단은 미처 날씨를 예상할 수 없었고, 기사는 폭풍에 휘말려 숲속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났지요.
기사는 정신을 차리고서야 생명의 은인이 자신이 체포해야 할 대상임을 알았습니다.
베아트리체, 저는 당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곳에 내려온 황태자의 가신입니다.
 
에르드 하이너스:하지만, 그날 당신의 손에 목숨을 건졌고, 이제는 주군을 버리고 생명의 은인인 당신을 살리고자 합니다.
고작 나흘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장갑을 착용한 손길을 뻗어 당신의 한 손을 조심스럽게 든다. 그 손등에 느리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당신을 바라보는 황금빛 눈에서는 비로소 모든 제약을 해방한 열락이 일렁거린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체 힐:(낯빛은 어느 순간까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생각지 못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발 밑이 꺼져가는데도 제 앞에서 담담히 이어가는 당신을 보면 이상하게도 그저 안심이 되었다. 가슴을 옭죄는 것들이 하나둘 풀려간다. 이 순간 가장 밝은 빛을 머금은 저 환한 눈동자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손등에 가볍게 닿은 온기에 금새 가면은 무너지고 놀랄 세도 없이 이어지는 말에 손끝부터 온몸을 타고 울린다. ...달콤한 속삭임. 당신의 입에서 이렇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상상치도 못했다. 사랑. 사랑. 사랑.)
....제가 너무 간절해서 잘못들은 것이 아니길 바라요, 부디. (잡힌 손에 힘을 준다.)
 
에르드 하이너스:(베아트리체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얼마나 갈등하였던가. 가히 자신이 살아온 20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괴로운 나흘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행복하고 들뜨기도 한 나흘이었다. 저에게 찾아들리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이질적인 감각이 베아트리체로부터 빚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안에 푹 잠겨 있었다. 베아트리체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사랑스럽다는 표현의 정의를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껏 명령에 살고 명령에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삶을 살아왔으나,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걸어온 삶에 반기를 들려 한다. 그것이 반역이라 불린다 할지라도.)
수도 없이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맞을지. 저는 그저 한미한 귀족가에 입양된 기사일 뿐. 힐 가문 같은 명문가에는 발끝만치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려주셨습니다. 가문으로 차등을 나누고 가르지 않을 사람이라고. 또한, 소중해질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셨기에……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당신과 제가 같은 감정이라 여겨도 되겠습니까.
 
베아트리체 힐:(자신과 당신의 가장 짧지만 가장 긴 나흘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영원히 되새기고 되새길. 서로에게 감히 상상하지 못한 충만한 감정을 일깨워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오로지 명령에 움직이는 기사인 당신이 스스로 정한 유일한 것이니까요. ...이 마음을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신분과 가문이 무슨 소용일까. 지금 서로의 앞에서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용기내줘서. ...또 나를 사랑해주어서. 당신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에르드 하이너스:(그제야 온전하게 마음을 놓는다. 나흘간 당신의 눈빛으로 표정으로, 또 목소리로 이미 여러 번 짐작하였지만, 같은 생각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는 확언만큼 달콤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이내 눈빛이 한층 진지해진다.) 시내에 나갔을 때 동료들이 지척까지 탐문 중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빠르면 내일 아침, 저택 역시도 검문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자취를 감춰야만 합니다.
(사내는 사랑에 들떴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결연함을 품는다.)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저는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함께 겨울을 넘어 봄에 핀다는 죽단화를 볼 수 있도록…… 또, 그 일이 매해 반복될 수 있도록.
제가 당신의 파란에 뛰어들게 해주시겠습니까.
 
에르드의 눈 속에 든 감정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에요.
 
베아트리체 힐:(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얽혀들면, 이런 순간임에도 조그맣게 웃음이 난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어쩌면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도 절망도 아닌, 도리어 안도에 가까운 인정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다시 여름에서 가을로. 우리의 계절을 잊은 만남이 시작된 그 날까지. ...그 날을 지나 계속해서. 당신의 결연함에 힘을 보태줄 수 있도록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고 놓지 않을 것 처럼.)
...부디. 기꺼이, 제의 파란에 뛰어들어 주세요. 당신이 원하는대로.
 
에르드 하이너스:(주군도 명예도 모두 버린다. 그는 더 이상 에르드 하이너스라 불릴 자격이 없으리라. 그러나 어떤 것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사랑은 파도이며 불길처럼 거대했고 설원처럼 세상을 가득 채운다. 저의 세상은 당신으로 하여금 새롭게 쓰여가며, 우리의 발자국이 닿는 곳이 곧 우리가 몸 눕힐 땅이 되리라.)
오롯이 베아트리체 힐, 당신에게 충성하는 기사가 되겠습니다.
제 목숨도 명예도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베아트리체 힐:(...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이 사랑해마지 않을 이와 그 빈 자리를 메우고 넘칠만큼의 행복을, 사랑을, 미래를 써내려가자. 우리 두 사람은 반드시 그리 될 수 있을테니까. 평소처럼 들어올린 손은 더이상 당신의 팔이 아닌 당신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에르드 하이너스. 에르드 힐이 되어주세요. 당신의 모든 것을 제게 주었으니 저의 모든 것을 에르드 당신께 드려야 맞겠죠.
 
에르드 하이너스:(목끝까지 찰랑이듯 벅차오르는 감각에, 차마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기뻐할 만한 사랑의 언사를 쏟아냈겠지만, 그는 애초부터 화술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기쁨과 희열, 애정이 뒤섞여 약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진실한 답을 엮는다.)
…… 기꺼이.
 
어두컴컴한 수로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는 길목.
 
고목에 미리 매어두었던 흑마 한 마리가 주인을 알아보고 투레질을 합니다.
 
에르드는 다만 아무 말도 없이 당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바닥에 놓아 둔 아가판서스를 하나씩 주워가며 베아트리체와 에르드는 별빛이 빼곡한 숲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오가는 말이 없어도 불안함은 없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과, 마주 잡은 상처투성이 손은 충분히 따뜻했으니까요.
 
사랑. 우리는 이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걸요.
 
그러니 우리, 이 숲에 모든 걸 묻어두고 오직 사랑만을 가져가요.
 
이 길의 끝까지.
 
End 1. After Tempest
 
베아트리체 생환. 에르드 생환